리처드 미들턴

리처드 미들턴의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Sherif Gendy의 서평

Wonho Kim 2015. 7. 14. 23:25


리처드 미들톤의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Sherif Gendy의 서평


     by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리처드 미들턴이 10여년의 준비를 거쳐 최근(2014.12) 발간한  “새 하늘과 새 땅(A New Heaven and a New Earth: Reclaiming Biblical Eschatology)”은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Creation Regained)”에 이어 신칼빈주의와 새관점을 접목시킨 새로운 기독교 세계관을 보여주려는 시도를 하고있다.

이번에 새롭게 발간된 미들턴의 "새 하늘과 새 땅"은 아브라함 카이퍼로 부터 시작된 신칼빈주의가 그의 후예들을 통하여 최근에는 어떠한 방향으로 발전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최근의 신칼빈주의는 광범위한 영역에서 각기 다양한 색채를 띄우고 있지만, 이들의 공통된 주제는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들턴이 "새 하늘과 새 땅"을 통하여 말하고자하는 그리스도인의 문화 활동은 단순한 사회 참여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명령(Creation Order)”, 즉 소위 말하는 "문화 명령 (Cultural Mandate)"을 근거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자는 것이다.

미들턴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사회 문화에 대한 변혁적 참여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그 결과물들이 예수님의 재림시에 임하게 될 이 땅에서의 새로운 문화에 보존되리라는 것이며 이러한 사회변혁적 문화 활동이 그리스도인이 일상에서 드리는 진정한 예배라는 것이다.

미들턴의 이러한 주장들이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그가 근거 말씀으로 많이 인용하고있는  창1:28이 소위 말하는 "문화 명령"으로 해석되어지는 것이 올바르냐는 것이다.

미들턴에게 창 1:28은 성경을 해석하는 열쇠이며 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중심 키인 것이다.

이와같은 미들턴의 성경 해석 방법은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하는 개혁주의의 기본 원칙과는 다른  것이며, 전체를 통하여 부분을 해석하는 개혁주의의 성경  해석 방법과 반대되는 것이다.

최근에는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카이퍼의 문화 명령(물론 카이퍼는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스킬더 이후에 사용되었지만) 개념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Dr J. Glenn Friesen은 "신칼빈주의와 기독교 신지학: 프란츠 폰 바더,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도예베르트(Neo-Calvinism and Christian Theosophy: Franz von Baader, Abraham Kuyper, Herman Dooyeweerd)”을 통하여 아브라함 카이퍼의 사상의 뿌리가 카톨릭 철학자인 “프란츠 폰 바더(Franz von Baader)”의 “기독교 신지학(Christian Theosophy)”에 있음을 밝힘으로서 아브라함의 일반은총과 영역 주권 사상, 심지어는 화란 자유 대학의 설립정신의 뿌리가 카톨릭 철학사상과 접목되어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의 J. V. Fesko는 “Last Things First”를 통하여, 유형학적인 관점에서 두 번째 아담 되신 예수님의 "제사장, 선지자, 왕"로서의 역할은 첫번째 아담의 "제사장, 선지자, 왕"로서의 역할을 성취하신 것이며, 두번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첫번째 아담이 실패한 창1:28의 말씀을 다 완성하셨기에 이제 그리스도인이 하여야 할 일은 소위 말하는 문화명령이 아니라 “대위임령(마28:19-20)”이라고 말한다.

창1:28의 명령은 단순한 문화 사역을 뜻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의 왕권을 이 땅에 선포하는 왕으로서의 다스리는 권한을 가진 아담의 왕권을 표현하는 것이다.

아담이 다스려야할 대상 중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인 간교한 뱀도 포함되어있다.

통치명령의 의미를 포함한 창1:28에서 아담에게 주어진 명령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에 대한 영적인 통치를 의미하며 다스린다는 것은 이미 지배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1:28은 일종의 영적인 싸움을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는데 아담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사단을 다스리지 못하였고 그의 유혹에 넘어가서 그의 종이 되어버린 것이다.


창1:28에서 다스림의 대상 중에는 "모든 생물"이 포함되어있다.  창3:1의 들짐승도 모든 생물 가운데 한 가지이기에 다스려야 할 대상이다.

창1:28의 "생물"과 창3:1의 "짐승"은 같은 히브리어 “chay: 살아있는, 생존하는”로서 아담은 분명 왕의 자격으로 간교한 뱀을 다스리라고 창1:28에서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것이다.


다스림은 통치권을 가진 왕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으로서 왕이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아담의 왕권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순종으로 종 되었던 인류는 오직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이를 믿는 자들만이 왕권이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왕권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회복되어진 것이고 이렇게 성도의 회복된 왕권이 요한계시록에 잘 표현되어 있다.


계20:6에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왕 노릇할 성도의 모습이 나타난다.


계21:24에는 성도들이 땅의 왕으로 표현됨으로서 뱀을 다스리지 못하였던 아담의 실패로부터 회복된 성도들의 천국 입성이 나타난다.


계21:24은 성도를 왕으로 표현한 말인데도 불구하고 창1:28을 문화 명령으로 해석하는 이들은 계21:24이 문화물의 천국 입성의 근거가 되는 구절이라고 무리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창1:28을 문화 명령이라고 해석하고있는 이들은 이 왕들이 이 땅의 각 나라의 문화 정치 영역에서의 왕으로서 이 왕들이 자신들의 믿음과는 관계없이 각자 자기들의 문화를 가지고 천국에 입성한다는 무리한 해석을 함으로서, 천국 입성 후의 심판이라는 논리를 전개하는 무리수를 두기도한다.(송인규: 일반은총과 문화적 산물, 문화물의 천국 보존의 근거중에)


미들턴도 마찬가지로 창1:28을 문화 명령, 혹은 창조 명령으로 해석함으로서 천국에서 보존 될 문화를 만드는 일이 성도들이 일상적 사회 참여와 윤리의 근거가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창1:28은 이미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서 회복된 왕권을 가진 성도들에게 다시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창1:28에 대하여 또 다시 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완성된 그리스도의 사역을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의 할 일은 다만 우리가 아담 안에서 이미 실패한 사역을 그리스도께서 다 하셨다는 것을 온 만방에 선포하는 일(대위임령)인 것이다.


John Fesko등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에덴을 성전 개념으로 봄으로서 창1:28은 단순한 문화 명령이 아니라 선지자로서 말씀을 통하여 성전을 다스리고, 왕으로서 성전을 위협하는 세력을 정복하며, 제사장으로서 온 땅이 하나님 나라인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을 예배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도 왕으로서, 선지자로서, 제사장으로서 이 땅에서 아담의 역할을 재연하면서 제대로된 역할을 하였어야했는데 아담과 마찬가지로 실패한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이러한 아담과 이스라엘의 실패를 재연하시면서 완성하신 것이기에, 우리가 소위말하는 창조 사역으로서의 문화 명령을 실행한다고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을 대신하려는 것이면서 동시에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십자가 상에서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아담은 범죄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역할을 못하였다기보다는 오히려 사단, 즉 생물을 명령대로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것이 오히려 역으로 다스려야 할 대상이었던 사단에게 다스림을 당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창1:28은 단순한 문화 명령이 아니라 정복과 다스림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확장이었고, 아담이 실패한 사역을 예수님께서 완성 시키셨기에 우리는 이제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대 위임령”을 수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시기는 일부 신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문화변혁의 완성 시기가 아니라  대 위임령의 수행을 통하여 땅 끝까지 복음이 다 전파되는 때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들턴은 예수님의 다시오심을 문화 변혁을 통하여 준비하여야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창1:28의 명령이 언약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되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 언약은 언약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님에 의하여 성취되어졌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소위 말하는 "문화 명령"을  “창조 명령”의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은 개혁주의의 근간이 되는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에 대한 도전이며, 인간의 공로를 인정하는 신칼빈주의의 펠라기우스적 개념은 개혁주의의 기본 틀을 흔들 위험의 소지가 있는 것이다.


미들턴의 "새 하늘과 새 땅"의 기본 틀은 자신의 스승이었던 알버트 월터스(Albert Wolters)의 "창조 타락 구속(Creation Regained)"의 기본 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를 발전시킨 것이다.


미들턴은 월터스와 마찬가지로 지옥에 대하여는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영혼 소멸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이 땅에서의 “새 하늘과 새 땅" 개념에 상응하는 지옥의 개념을 생각할 수가 없었기 때문 인 듯하다.


또한 죽은 자의 상태를 천상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 존재하는 상태가 아닌 단순한 수면의 상태로만 해석하고있는 것은 천상의 하나님 나라에서의 존재의 연장 선에서 이어져야 할 이 땅에서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존재의 연속성을 설명하지 못한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히려 알버트 월터스가 자신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하여 기술한  "창조 타락 구속(Creation Regained)"의 2005년 개정판이 톰 라이트에게서 도움을 받은 개정이었음을 고백하면서 톰 라이트의 "하나님 나라"개념을 수용하고있듯이, 이러한 수용은 미들턴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나타나고있다.


Sherif Gendy는 최근 발간된 리처드 미들턴의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 도움이 될만한 서평을 기록하였기에 좋은 글이라고 생각되어 아래와 같이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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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rif Gendy의 "새 하늘과 새 땅"(리처드 미들턴) 서평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A Review Article
Sherif Gendy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Reclaiming Biblical Eschatology, by J. Richard Middleton.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14, 336 pages, $26.99, paper.


이 책에서 리처드 미들턴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에 대한 새로운 표현을 하고있다.
In this book J. Richard Middleton brings in a fresh presentation to the biblical teaching about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그의 첫 번째 목적은 창조물의 구속에 관한 종말론적 예측에 대하여 논리적인 성경 신학을 그리기 위한 것이다.

His primary purpose is to sketch the coherent biblical theology of the eschatological vision of the redemption of creation.


그가 이것을 하는 방법은, 우리의 현 시대의 성경을 근거로 하고있는 전체론적인 종말론의 일부 윤리적 함의를 탐구하고, 기독교의 종말론 역사에 있어서 이 땅의 회복에 관한 성경적 전망 가운데 일어날 것을 탐구하는 것이다.

He does so by exploring some of the ethical implications of a biblically grounded holistic eschatology for our present day and investigating what happened to the biblical vision of the redemption of the earth in the history of Christian eschatology.

이 책은 12장과 부록을 포함하고 있다.
The book contains twelve chapters and an appendix.


1장에서는 이 책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으며, 최종적 운명으로서의 하늘에 대한 기독교인의 전통적인 관점의 잘못을 강조하고 있다.

Chapter 1, which serves as the introduction to the book, highlights what is wrong with the traditional Christian view of heaven as final destiny.


미들턴은, 구약은 사후에 대한 어떠한 확실한 희망을 제공해주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Middleton argues that the Old Testament does not place any substantial hope in the afterlife.


(구약은) 어느 정도는 창조를 새롭게 하거나 회복 시킬 하나님의 의도를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Rather, it presents a holistic vision of God’s intent to renew or redeem the creation.


구약의 종말론적인 본문(예, 단.12:2-3)들은 명백히 현세적이라는 것이다.

The expectation in Old Testament eschatological texts (e.g., Dan. 12:2–3) is manifestly this-worldly.


그리고 나서 미들턴은, 천상에서의 사후의 삶으로서의 내세 개념이 역사적으로 플라톤의 가르침에 기원을 두고있다고 말하면서, 기독교인 선조들이 그리스-로마 문화의 맥락에서 자신들의 신학을 강조하기 위하여 (플라톤의) 이러한 개념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Middleton then sketches the historical origins of the otherworldly idea of heavenly afterlife in the teachings of Plato to show how Christian forebears have used his ideas to articulate their theology in the context of Greco-Roman culture.

2장과 3장은 이 책의 1부에 포함되어있으며 여기에는 "창조로부터 종말까지"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Chapters 2 and 3 are grouped together under part 1 of the book, which is titled “From Creation to Eschaton.”


2장에서 미들턴은 문화를 발전시키고 이 땅의 환경을 돌봄으로서- 이 의도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단절되었지만-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담으시려는 원래의 의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Middleton focuses in chapter 2 on God’s original intent for humans to image him by developing the culture and caring for the earthly environment—an intent that was blocked by human sin.


그는 사람이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지어졌다는 믿음에 대하여 의문을 제시한다.

He questions the belief that man was created to primarily worship God.


미들턴에게 있어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하여 특별한 방법으로 예배 하는데, 이는 이 땅을 환경이 복잡한 사회 문화의 세계에 맞추어 변화되도록 서로 영향을 미치게 만드는 것이다.

For Middleton, man worships God in a distinctive way by interacting with the earth to transform the environment into a complex sociocultural world.

비록 사람이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지만, 사람은 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지어졌다는 것이다.(시편.86:9, 이사야 60:21, 롬. 11:36, 고전. 6:20; 계. 4:11)
Although man was not created primarily to worship God, he was created chiefly to glorify him (cf. Ps. 86:9; Isa. 60:21; Rom. 11:36; 1 Cor. 6:20; Rev. 4:11).


분명히 예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형태의 한 가지이다.

Certainly, worship is one form of glorifying God.


하나님의 나타난 뜻에 대한 적극적인 순종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품은 자로서  마땅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또 다른 방법인 것이다.

Active obedience to God’s revealed will is another way through which man ought to glorify God as his image bearer.

3장에서는 창세로부터 종말까지의 성경적 거대 담론의 구조를 설명하면서, (우리를 이 땅에서 벗어나게 하여 하늘로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창조물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다.
Chapter 3 presents the structure of the biblical metanarrative from creation to eschaton, which clarifies God’s purpose to redeem earthly creation (rather than take us out of earth to heaven).


여기서 미들턴은, 하늘은 결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일부가 될 수 없으며, 본래적으로 인간 구원의 최종 운명으로서의 역할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Here Middleton emphatically argues that heaven was never part of God’s purposes for humanity and has no intrinsic role as the final destiny of human salvation.


미들턴이 말하는 종말론적 회복은, 이 땅에서 인간의 문화 생활이 새롭게 되는 것이다.

For Middleton, eschatological redemption consists in the renewal of human cultural life on earth.

성경이 하늘을 믿는 자의 영원한 목적지로서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하여는 미들턴이 옳을 수도 있겠지만, 그가 이 땅에서의 문화적 삶을 변화시키는 인간의 수고가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이고, 의에 대한 종말론적 희망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이다.
While Middleton might be right that the Bible does not describe heaven as the eternal destiny of the believer, I find his emphasis on the human’s labor of transforming the cultural life on earth as the ultimate purpose of God, and the eschatological hope for the righteous, biblically ungrounded.


미들턴은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희망이 "하늘"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우리의 이땅에서의 삶을 변화시키는 기대감으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돌려버린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Middleton goes as far as to say that to name the Christian hope “heaven” diverts our attention from the expectation for the transformation of our earthly life.


그러나 성경은 새로운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올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계. 21:2, 10)

Yet, the Bible clearly speaks of new Jerusalem that will come down out of heaven (Rev. 21:2, 10).

이 하늘의 예루살렘은 "새 하늘과 새 땅", 즉 전적으로 새로운 상황의 질서의 도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베전. 3:13; 계. 21:1)

This heavenly Jerusalem ushers in the “new heavens and new earth;” a totally new order of things (2 Pet. 3:13; Rev. 21:1).


이것은 인간의 노력의 결과도 아니며, 미들턴이 말하려는 것과 같이 단순히 이 땅의 문화나 환경의 발전이 아닌 것이다.

This is not the result of human effort, nor is it simply a development of earthly culture and environment, as Middleton would like to propose.


이것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일인 것이다.( 계21:5; 고후.5:1, 17; 히.12:27)

This is the supernatural work of God in Christ who is making all things new (cf. Rev. 21:5; cf. 2 Cor. 5:1, 17; Heb. 12:27).

2부 "구약에서의 전체론적인 구원"은 4장에서 6장까지 구성되어있으며, 이 땅의 삶을 꽃피울 것에 대하여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관여하고 계심을 묘사하고있다는 것을 밝히고있다.
Part 2 “Holistic Salvation in the Old Testament” consists of chapters 4 through 6 and uncovers the Old Testament’s portrayal of God’s ongoing commitment to the flourishing of earthly life.


4장에서는 출애굽 이야기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분석하고서, 이러한 전형적인 사건이 구약과 신약에서 구원을 이해하는 하나의 형태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Chapter 4 analyzes God’s deliverance of Israel in the exodus narrative and suggests that this paradigmatic event functions as a pattern for understanding salvation in both the Old and New Testaments.


비록 출애굽 사건이 하나님의 전체적인 구원 사역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그림자라는 것에 대하여 많은 부분을 공유하더라도, 출애굽 구출의 핵심적인 성격은 구원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Though the exodus event shares many components with the overall work of God’s salvation and is a shadow of Christ’s redemption, one has to keep in mind that the core nature of the exodus deliverance is not salvific.


결국 출애굽 세대는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광야에서 죽었다.(민. 26:64-65; 32:11-13)

After all, the exodus generation died in the wilderness for disobedience (Num. 26:64–65; 32:11–13).


그러므로 출애굽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는 몇 가지 주된 차이가 있는 것이다.

Therefore, there are some major dissimilarities between the exodus and Christ’s work of redemption.


전체적인 유사성을 갖추려는데 있어서, 미들턴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완전한 구원에 필요하다는 것의 예를 만들어서 찾으려고한다.

Building upon the full analogy, Middleton seeks to make the case that a life of obedience to God is necessary to complete salvation.


그는 "구원을 완성하려는 순종은 출애굽에서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다. (87)

He states that “obedience completes the salvation begun in the exodus” (87).


이러한 가정에서 미들턴은, 신약 성경에서 순종은 구원의 결정적인 면이라고 말하면서, 그는 이것(순종)이 정의를 다시 세우며 공동체의 복지를 회복하는 것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From that premise Middleton goes on to say that in the New Testament obedience is a crucial aspect of salvation, which for him entails the reestablishment of justice and restoration of communal well-being.


이것은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 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Here Middleton is influenced by N. T. Wright’s new perspective theology which many evangelicals would find problematic.


분명히 믿는 자의 순종은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과 은혜를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Surely a believer’s obedience naturally follows his God-given faith and grace (Eph. 2:10; Titus 2:14).


그러나 이러한 순종은 자신의 구원에 공헌하는 것도 아니며 더군다나 (구원을) 완성 시킬 수도 없는 것이다.

But this obedience does not contribute to his salvation nor does not complete it (Eph. 2:8–9).



구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공로이며, 그리스도만이 다시 오실 때 완성 시키실 수 있는 것이다.

Salvation is entirely the work of Christ, and he alone will bring it to completion at his return.

5장에서는 어떻게 이스라엘의 율법과 지혜의 전통이, 심판의 예언적 말씀과 출애굽을 넘어서는 회복의 예측과 함께, 이 땅에서의 일상적인 인간의 삶에 평안과 축복을 가져오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지를 증명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살펴보고있다.
Chapter 5 examines how Israel’s laws and wisdom traditions, together with prophetic oracles of judgment and anticipations of restoration beyond exile, testify to God’s desire to bring shalom and blessing to ordinary human life on earth.


6장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는 이들에게 피할 수 없는 실제로서의 심판을 나타내는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현현의 본문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In chapter 6 Middleton addresses the Old Testament’s theophany texts that present judgment as an inescapable reality for those who resist God’s will.


이 본문에서는 심판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인간애가 꽃 피우고 인간적이지 않은 세상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원래의 의도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These texts show that God’s ultimate purpose beyond judgment is to accomplish his original intent for the flourishing of humanity and the nonhuman world.

3부, "우주의 회복에 대한 신약 성서의 전망"은 7장과 8장으로 구성되어있다.
Part 3, “The New Testament’s Vision of Cosmic Renewal,” is comprised of chapters 7 and 8.



7장에서는 회복의 희망에 대한 내적 논리와 이것이 이 땅에서 인간의 규율의 회복과 연결되는 것을 탐구하고 있으며, 이는 구약 본문의 후반부에서 시작되어 신약으로 이어진다.

Chapter 7 explores the inner logic of the hope of resurrection and its connection to the restoration of human rule of the earth, beginning with late Old Testament texts and on into the New Testament.


8장에서는 신약에서의 구원에 관한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탐색에 관하여 논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이 다  합하여 모든 것이 새롭게 됨으로서 죄와 악이 역전된다는 기대의 다양한 맥락에 이르게 된다.

The comprehensive and holistic scope of salvation in the New Testament is discussed in chapter 8 as it brings together various strands of expectation that sin and evil will be reversed through the renewal of all things.

4부 " 전체론적인 종말론에 문제되는 본문들"은 9장과 10장으로 구성되어있다.
Part 4, “Problem Texts for Holistic Eschatology,” contains chapters 9 and 10.


9장에서 미들턴은, 예수의 재림 시에 우주의 파괴나 사라짐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잘못 읽혀지고 있는 일부의 신약의 본문에 대한 오해를 고치려고 한다.(예, 마 24; 계 6:20-21; 히 12)

In chapter 9 Middleton seeks to correct the misunderstanding of some New Testament texts that are typically misread as if they teach the destruction or annihilation of the cosmos at Christ’s return (e.g., Matt. 24; Rev 6; 20–21; Heb. 12).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베드로후서 3장의 하늘과 물질의 파괴에 대하여 미들턴이 논의하는 것이다.

Worthy of note here is Middleton’s discussion on the destruction of heavens and the elements in 2 Peter 3.


그가 말하는 바는 이 본문이 마지막 날에 우주의 사라짐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He makes the case that this text does not describe the obliteration of the cosmos on the last day.


차라리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악을 깨끗하게 제거하심으로서 악마의 세력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으며, 이렇게 하심으로서 이 세상은 다시 새롭게 되고 변혁 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Rather, it depicts God’s judgment of demonic powers as he purges the world of evil so that it might be renewed and transformed.


미들턴은 이 땅과 그 위의 작품들은 세워질 것이라고 말한다. (베전 3;10)

Middleton argues that the earth and its works will be “found” (2 Pet. 3:10).


여기서의 파괴는 창조물에 대한 것이 아니고 죄에 대한 것이기에, 창조물을 깨끗하게 하고 정화 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The destruction is not of creation but of sin, thus cleansing or purifying creation.

미들턴은 모든 이들이 최종적으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멀한다.
Middleton is clear that not everyone will be finally saved.


그는 심판의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He does not deny the fact of judgment.


그러나 그는 최종 심판은 이 땅이 우주적으로 상속되지 않는 것, 즉 하나님의 창조물로부터 영원히 추방되는 것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He does, however, suggest that the final judgment is akin to cosmic disinheritance of the earth; a permanent exile from God’s creation.


그러므로 심판은 영원한 고통보다는 사람이 소멸되는 것이라고 한다.

Judgment, therefore, is an annihilation of the person rather than eternal torment.


분명한 것은, 이러한 결론이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Certainly, this conclusion does not seem to be supported from the Scriptures.


다른 곳에서는, 성경은 타락하고, 죄악되고, 범죄하고서도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 사역을 거절하는 이들에 대하여 영원한 형벌을 확실히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34:10; 마 18:8, 25:41, 46; 유7; 계 14:10-11, 19:3; 20:10)

At different places, the Bible does in fact confirm eternal punishment to those fallen, sinful, and guilty persons who rejected the perfect atoning work of Christ (cf. Isa. 34:10; Matt. 18:8; 25:41, 46; Jude 7; Rev. 14:10–11; 19:3; 20:10).

10장에서 미들턴은 "휴거" 본문을 포함하는 하늘에서의 초자연적인 운명을 약속하는 듯한 신약에서의 본문들과 죽음과 부활 사이의 잠시 동안과 중간 단계를 말하는 신약의 본문들을 다루고있다. (예, 마. 24:40–41; 25:34; 고후. 5:1–5; 데전. 4:13–18; 베전. 1:3–5; 계. 6:9–10; 21:1–2).
In chapter 10 Middleton covers the New Testament texts that seem to promise an otherworldly destiny in heaven including the “rapture” texts and those that speak of the interim or intermediate state between death and resurrection (e.g., Matt. 24:40–41; 25:34; 2 Cor. 5:1–5; 1 Thess. 4:13–18; 1 Pet. 1:3–5; Rev. 6:9–10; 21:1–2).


그가 말하는 핵심은 이러한 본문들이, 이 땅의 베일이 벗겨진 후에 따르게 될 천상에서의 준비를 묵시적인 형태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His main point is that these texts present an apocalyptic pattern of preparation in heaven followed by unveiling on earth.


미들턴은 고집스럽게 하늘이 의인들이 죽은 후에 갈 곳이라는 관점을 배제하려고한다.

Middleton insistently dismisses any view of heaven being a place to which the righteous go when they die.

미들턴은 잠시 동안(Interim)의 상태가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려고 하지만, 그는 의인들이 죽은 후에 갈 곳에 대한 어떠한 통찰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다.
While Middleton tries to make the case that an interim state is not taught in the Scripture, he offers no insight on where the righteous go when they die.


그는 사람이 자각하는 상태로 죽음에서 부활로 움직이는 곳으로서의 "영혼의 수면"의 개념이 더욱 그럴듯하다고 말한다.

He suggests that the notion of “soul sleep” where one moves subjectively from death to resurrection, with no consciousness of the intermediate state, is more plausible.


미들턴에 따르면, 이것은 십자가에서 믿는 강도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에 적용이 된다고 한다.(눅 23:39–43).

This applies, according to Middleton, to Jesus’s promise to the believing criminal on the cross (Luke 23:39–43).


이것의 예로서, 미들턴은 고린도후서 5:6-9와 빌립보서 1:23절은 바울이, 그가 죽었을 때 즉시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의미보다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종말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Middleton takes 2 Corinthians 5:6–9 and Philippians 1:23, for example, to mean that Paul is looking at the second coming of Christ and thinking of the eschaton rather than being with Christ immediately when he dies.


이 구절들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바울을 이해하는 말도 안되는 방법인 것 같다.

This seems to be a farfetched way of understanding Paul in these passages.


영혼이 잠잔다는 이론은 참으로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 없으며 성경의 어디에서도 가르치고 있지 않다.

The theory of souls sleep does not really find biblical warrant and is nowhere taught in the Scriptures.


이 책의 마지막 부인 5부 "왕국에서의 윤리"는 11장과 12장으로 구성되어있다.
The last part of this book, Part 5 titled “The Ethics of the Kingdom,” consists of chapters 11 and 12.


11장에서는 나사렛 회당(눅 4:16–30)에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복된 소식의 전체론적이고 현세적인 특성

에 초점을 맞추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방인에게 개방하시면서 전체적인 사람과 사회 질서의 새로워짐에 대한 예수님의 메세지의 함의를 풀어나가고있다.

Chapter 11 focuses on the holistic, this-worldly character of Jesus’s announcement of good news in the Nazareth synagogue (Luke 4:16–30), unpacking the implications of Christ’s message for the renewal of the entire person and social order itself with the opening of the kingdom to outsiders.


미들턴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의 복된 소식은 다름 아닌 우리 모두가 참여하도록 초대 받은 세상을 회복(문자적으로는, 확립)하는 것일 뿐이다.

According to Middleton,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is nothing less than the healing (literally, the establishing) of the world in which we are all invited to participate.


이 책의 마지막 장인 12장에서는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그의 시대와 우리 시대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윤리적 도전에 대하여 말하고있다.

The last chapter of the book, chapter 12, addresses the ethical challenge of the kingdom that Jesus brings, both in his day and ours.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은 오직 삶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요구하는 근원적 도전을 통해서 만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can be grasped only through a radical challenge that requires a fundamental reorientation of life.


창세로부터 종말까지의 성경적 이야기에서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이는 이 땅에서의 삶의 모든 차원에 적용할 수 있으면서 또한 모든 인간 가족에게 열려있다는 것이다.

The overall thrust of the biblical story from creation to eschaton unveils a vision of God’s kingdom that is both applicable to every dimension of earthly life and open to the entire human family.


미들턴은 1장에서 논의된 바와같이 플라톤적인 내세의 비젼의 역사적 분석을 지속하면서 이책을 부록과함께 결론을 짖고있다.
Middleton concludes this book with an appendix that continues the historical analysis of a Platonic otherworldly vision discussed in chapter 1.


여기서는 교회 역사의 과정을 통하여 우주의 회복에 대한 성경적 전망을 가리게하였는지 추적함으로서, 어떻게 천상에서의 운명에 대한 개념이 일반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을 지배하게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있다,

It looks at how the idea of a heavenly destiny came to dominate popular Christian eschatology by tracing the eclipse of the biblical vision of the redemption of the cosmos over the course of church history.


미들턴은 좀 더 전체론적인 종말론의 희망적인 회복의 징조들에 주목하고있다.

Middleton notices hopeful recent signs of the recovery of a more holistic eschatology.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면서, 이 책은 물리적인 우주와 인류의 문화와 사회 모두를 포함하는 창조물의 회복을 가르치는데 관여하는 전체론적인 성경적 세계관의 발전을 시도하고있다.
Comprehensive in its scope, this book is an attempt to develop a holistic biblical worldview regarding the teaching of the redemption of creation, including both physical cosmos and human culture and society.


미들턴이 이러한 전망에 윤리를 결부 시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Middleton’s ethical implications of such a vision are noteworthy.


궁극적으로, 우리가 구원의 성취로서 바라고 예상하는 것이 우리가 현재를 어떻게 살아갈 지에 진실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는 것이다.

Ultimately, what we desire and anticipate as the culmination of salvation is what truly affects how we attempt to live in the present.


"윤리가 살아있는 종말론"이라는 것이다. (24)

“Ethics is lived eschatology” (24).


그러므로, 미래를 전체론적으로 보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동정적이면서도 담대하게 구속적인 삶을  활성화하고 견고히하는 것이라고한다.

Thus, a holistic vision of the future can motivate and ground compassionate yet bold redemptive living in God’s world.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이 땅에서의 삶을 회복시키려는 그의 구속적인 목적 안에서, 이 땅이 번성하고 최고점에 달하게하려는 하나님의 원래의 의도로 시작하는, 전체 성경의 이야기 안에서 종말론을 구축하려는 미들턴의 노력은 이 책의 또 하나의 훌륭한 한 면이다.

Middleton’s endeavor to ground eschatology in the entire biblical story, beginning with God’s original intent for earthly flourishing and culminating in his redemptive purpose of restoring earthly life through the work of Christ, is another commendable aspect of this book.



일부 논쟁을 일으키킬 수 있는 요인은, 특히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하늘이 그리스도인의 희망도 아니며 이 생의 삶 이후에 있을 그들의 거처도 아니라는 미들턴의 관점이다.
What might cause some controversy, especially among evangelicals, is Middleton’s view that heaven is not the hope for Christians or their home after this life.


영혼의 수면에 대한 그의 한쪽에 치우친 제시는 역사적 개혁주의 전통에서 많은 이들의 환영을 받지는 못할 것이다.

His alternative suggestion of soul sleep may not be welcomed by many in the historic Reformed tradition.


하지만 많은 이들이 틀림없이 이 세상의 새로워짐이 종말론에 대한 성경적 전망이라는 미들턴의 강조에 동의할 것이지만, 이러한 새로워짐은 이 땅의 문화와 환경이 꽃을 피운 것이 포함되는 인간이 만든 노력의 결과물이 아니다.

While many would rightly agree with Middleton on his emphasis on the renewal of the world as the biblical vision for eschatology, this renewal is not a man-made effort that involves the flourishing of earthly culture and environment.


거의 톰 라이트의 영향을 받음으로서, 미들턴이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의 상태를 요구하는 종말론적인 생각을 끊임없이 고집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Hugely influenced by N. T. Wright, Middleton’s consistent pursuit of an eschatological notion that requires a this-worldly final state is highly questionable.


미들턴은 자신의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아키발드 알렉산더 핫지,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 그 외의 사람들과 같은 개혁주의 성경 학자와 신학자들을 언급하고있다.

Middleton mentions Reformed biblical scholars and theologians like A. A. Hodge, Abraham Kuyper, Herman Bavinck, and others to support his position.


이러한 학자들은 실제로 이 땅이- 창조 질서의 회복으로서- 새롭게 되고 이 세상이 재건 되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작업인 것이다.

These scholars do indeed speak of the renewal of this earth and the reconstitution of the world—the redemption of the created order—as the eschatological work of God in Christ.


그러나 이것은, 이 세상을 새롭게 하는 회복 사역이 인간이 이 땅의 문화를 번성시킴으로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미들턴의 관점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However, they sharply differ from Middleton’s view that the redemptive work of world renewal is done gradually by man through the prospering of earthly culture.


오히려 이것은, 모든 것들이 완성된 상태에서,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세워진 상태에서, 그의 재림과 함께 동반되는 그리스도 자신에 의하여 성취될 신성한 사역인 것이다.

Rather, it is a divine work accomplished by Christ himself that will accompany his return in the consummation of all things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new heaven and new earth.

요컨데 이 책의 구성 요소들은, 특히 천상에서의 사후 생활에 대한 미들턴의 거부는, 논쟁이 있을 것이지만, 이 책은 전체론적인 구원에 대한 성경의 이야기와 창조물의 필연적이고 광범위한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하심에 대하여 잘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In sum, while elements of this book, particularly Middleton’s disavowal of heavenly afterlife, will be controversial, this book is a welcome reminder of the biblical story of holistic salvation and God’s commitment to an integral and comprehensive restoration of the cre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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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rif Gendy is a member of the Mission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in Saint Paul, Minnesota, a licentiate in the Presbytery of the Midwest (OPC), and a PhD student at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in Glenside, Pennsylva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