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2018. 10. 27. 11:52

매튜 베이츠의 “오직 충성으로 받는 구원”에 대한 토마스 슈라이너의 비평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서론


매튜 베이츠의 “오직 충성으로 받는 구원”에 대한 토마스 슈라이너의 비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매튜 베이츠의 신학 사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매튜 베이츠의 “오직 충성으로 받는 구원”은 개혁주의의 전통적 관점인

“오직 믿음에 의한 구원”의 개념에 도전장을 내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오직 충성”의 개념에는 “오직 믿음”의 개념에 포함되어있지 않은 행함의 내용이 포함되어있다.


매튜 베이츠의  “오직 충성으로 받는 구원”은, 행함과 열매가 없는 성도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새로운 도전이 될 수 있는 책이며, 오랫동안 교회 개혁을 외치며, 교인들의 변화를 촉구하였던 이들에게 단비와 같은 획기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성경적이지 않은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오히려 또 다른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다.


매튜 베이츠의 책의 주요내용들은, 톰 라이트의 새관점의 구도에서 쓰여졌으며, 개혁주의의 주요 교리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이지만, 개혁주의의 교리를 새관점의 구도에서 새롭게 수정하려한다는 점에서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매튜 베이츠의 “오직 충성으로 받는 구원”에서 보여주는 주요 특징들을 요약하면서 토마스 슈라이너의 비평을 번역하여 게시하고자한다.



새관점 구도의 왕이신 예수께 충성


베이츠는 톰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왕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나간다.


왕에게 요구되는 것은 신하의 충성이다.


성도는 마치 신하가 왕에게 충성을 하듯, 그리스도께 충성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왕이라는 개념으로만 접근할 때는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충분히 수용하지 못할 수가 있다.


그리스도의 속성을 왕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나갈 때 개인적인 신앙고백이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지체로서의 관계,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이 약화되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거나,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라는 개념이 연계되기가 쉽지않다.


그리스도의 계보는 아담을 거처 하나님 아버지로 이어진다.


아담의 대표성은 그리스도의 대표성을 예표한다.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범죄하였듯이,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것이다.


베이츠가 말하는 왕이라는 개념은 유대주의적 사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있으며, 톰 라이트의 유대주의적 신학의 특성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이다.


왕이라는 개념은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 즉 하나님의 왕국에서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개념만있을 뿐, 자녀나 지체의 개념이 없다.


또한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와는 다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역사적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중심에 있으며, 교회는 단지 역사적 이스라엘의 확장일 뿐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가나안의 이스라엘의 연속선상에 있는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다.


매튜 베이츠가 말하는 왕으로서의 예수도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있다.


매튜 베이츠가 말하는 “오직 충성으로 받는 구원”은 톰 라이트가 말하는 왕이신 그리스도께 충성한다는 개념을 공유하고있다.



인간의 전적인 부패


베이츠는, 바울이 왕이신 예수께 대한 “구현된 충성embodied allegiance”을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이는 인간에게 행함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하는 펠라기우스적 주장이다.


하지만 바울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더불어 전적인 은혜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도 하나님께 순종할줄 모르는 전적인 부패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행함을 강조하였던 로마 카톨릭의 부패도 마찬가지로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보여주고있다.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 즉 노예 의지를 강조하였다.


종교개혁에 반기를 든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 개념에도  정면으로 도전한다.


베이츠가 말하는 충성의 개념에는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종교개혁자들의 사상 대신에, 톰 라이트가 말하는 인간의 행위가 자리잡고있다.


“충성”은 자녀보다는 일꾼에게 요구되는 개념으로서, 이는 인간에게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며, 동시에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변화를 시도한다.


베이츠는 왕이신 예수께 요구되는 충성은 최종적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이는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기 위하여 인간의 행위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는 새관점의 “언약적 율법주의”, 즉 신율주의에서 요구되는 최종적 구원을 위한 행함과 같은 구조를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말하는 종교개혁자들은 은혜로 받은 구원이 행함으로 취소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베이츠는 톰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이미 받은 의가 행함에 의하여 취소될 수 있다고 말한다.



부활에 관한 관점


베이츠가 보는 부활에 대한 관점은 새관점주의자들의 관점과 일치한다.


베이츠는 톰 라이트가 부활을 해석하는 관점과 마찬가지로, 부활의 의미가  하나님께서 예수를 비난하는 자들의 판단을 뒤집으시고, 그를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 예수의 행함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에서 부활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부활이 예수의 행위가 옳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증명하신 것이라는 주장은 톰 라이트가 자주 사용하는 말이며, 베이츠는 이를 그대로 인용하여 사용한다.


톰 라이트가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는 것은, 개혁주의에서 예수를 믿으라는 것과 용어만 같을 뿐 내용은 전혀 다르다.


톰 라이트는 예수를 혁명적 메시아로 규정하면서, 십자가에서의 희생은 예수의 로마에 대한 정치적 혁명이며, 예수를 믿으라는 것은, 예수가 혁명을 위한 희생적 삶의 모습을 보여준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옳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에는, 속죄의 보혈 개념이 없으며, 우리의 죄를 대신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국가적 죄을 향한 하나님의 저주를 감당한 것이며, 이스라엘이 로마에 대하여 어떻게 혁명적 삶을 살아야하는지 본을 보여줌으로서, 예수를 믿는 자들은 예수의 행동 방식에 동참하라는 것이다.


새관점에서의 예수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따름의 대상이며, 예수의 혁명적 삶에 동참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옳다고 인정받는 칭의된 자가 된다는 것이다.


베이츠는 이러한 톰 라이트의 주장에 공감하며, 신자에게 예수의 행동 방식에 동참하는 충성을 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인정받는 칭의된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베이츠가 보는 예수의 부활은 칭의의 사건이며, 예수의 혁명적 희생이 옳음을 하나님께서 증명해주신 사건이라고 말한다.



칭의와 의의 전가


베이츠의 칭의에 대한 관점은 새관점과 유사하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근거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현대 신학이 기독론 중심의 칭의보다는 신론 중심의 칭의의 경향을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베이츠의 신학도 현대신학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있다.


베이츠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칭의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가 포함되어있지 않다.


그리스도께서 신자에게 전가시켜주신 순종의 의에는, 율법의 마침이 되신 적극적 순종과 십자가에서의 속죄로 인한 수동적 순종의 의가 있다.


베이츠는 신자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하나님 앞에서 의로와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베이츠가 말하는 신자에 대한 칭의는, 부활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행한 방식이 옳다고 인정받은 것과 같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와 협력할 때, 행동방식이 옳다고 인정받는 다는 것이다.


이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마찬가지로 신인협력적인 방식synergism이다.


베이츠가 말하는 칭의에는 순종의 의가 없다.


베이츠의 관점에서는,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은 것과는 무관하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칭의의 기준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행동 방식이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받느냐 아니야인 것이다.


새관점에서는 율법은 의의 수단이나 기준이 될 수가 없다.


베이츠는 톰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인정을 받은 것을, 하나님 앞에서 칭의된 것으로 보고있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인정을 받음으로 칭의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와 협력할 때 역시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속하여있는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의가 주입infusion되며, 주입된 의는 충성을 통하여 즉각적으로 효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베이츠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부정하지 않지만, 전가된 의 자체가 최종적 구원의 근거가 되지 않으며, 전가된 의는 취소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베이츠가 말하는 전가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행동방식이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받은 것에 대한 전가를 말한다.


베이츠가 말하는 전가는 그리스도의 죽으심뿐만이 아니라, 죽으심으로 이루신 순종의 의에 대한 전가와는 관계없다.


베이츠는 예수가 왕이라는 사실이 복음의 중심이기에, 복음은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공식으로 축소될 수 없다고 말함으로서, 간접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외면한다.


베이츠는 전가를 인정하지만 전가는 상실될 수 있으며, 실질적 칭의의 상태도 상실될 수 있다고 말한다.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는, 그리스도로부터 전가받은 의가 아니라, 왕위에 오르셔서 통치하시는 왕이신 예수께 충성을 하는 행위가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이는 구원의 근거, 즉 칭의의 근거가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가 아니라 예수의 행동 방식에 협력하는 행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베이츠가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구원의 서정에 동의하지 않고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개인보다는 공동체적 선택


예수 그리스도를 왕의 개념으로 접근할 때 성도는, 교회의 일원이라는 개념보다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된다.


하나님 나라는 공동체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의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의 구원은 공동체적 구원이었다.


신약에 들어와서 하나님 나라 백성은 신자들로 새롭게 구성되면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교회 공동체로 대체되었다.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지체인 성도들로 개별적으로 구성되어있는 것이다.


베이츠는 톰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신약의 교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유대 이스라엘 공동체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다.


예수가 왕이라는 사실에 집중된 것은, 톰 라이트가 말하듯이, 예수는 구속주가 아니라 유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이기 때문이다.


유대주의적 사상에서의 왕에 대한 충성은 집단적이고 국가적이었다.


베이츠는 유대 이스라엘에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택함받음을 거부하며, 집단적 선택이 좀 더 정확하게 성경적 증거들을 표현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신앙 고백은 개인적인 것이며, 신앙 고백을 근거로하는 선택은 개인적일 수 밖에 없다.


유대주의적 왕에 대한 개념에서는 개인의 신앙고백이 아니라 집단적 충성이 요구된다.


하지만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에 참여되는 성도에게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신명기에서는 모세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칭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삼위 하나님의 창세전 구속 언약은 택함이 개인에 대한 것임을 보여주고있다.



나가는 말


베이츠가 구원의 조건으로 행위를 더하는 것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행위가 얼마나 더해져야 하나님께서 구원의 조건에 합격을 하실 정도가 될 수 있을지 기준도 모호하다.


또 인간의 행위가 구원의 조건에 충족될 수 있을 정도로 위대할 수도 없다.


타락 이후의 모든 상황은 인간의 죄성과 더불어 변질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사람이 생각하는 기준이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기준과 동일시 될 수도 없다.


베이츠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생각이다.

에덴에서의 사역은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종결되었으며, 에덴에서의 요구 조건은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하여 안식에 이르게 된 것이다.


안식은 더 이상의 조건을 요구하지 않는다.


베이츠가 말하는 충성이라는 개념 가운데에는,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안식과 무관하게, 인간에게 주어지는 또 다른 책무를 포함한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순종에는, 율법의 요구는 물론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명령(창 1:28)을 완성시킨 적극적 순종과, 선악과 금령을 어김으로서 당해야만 했던 죽음을 직접 담당하신 수동적 순종이 포함되어있다.


베이츠의 신학에는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순종과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안식과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한 의에 대한 개념이 없다.


베이츠가 말하는 충성은, 그리스도의 마침표를 쉼표로 바꾸는 작업이다.


안식은 더하여질 수 없는 완성적 의미를 가진다.


에덴에서의 요구되어졌던 순종의 성취는 종말론적 안식과 영원한 생명으로 결론지어졌을 것이며, 아담이 실패한 에덴에서의 요구는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되었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자에게 주신 안식은 더 이상의 순종이 요구되지 않는다.


충성이라는 행위가 구원의 조건으로 요구되어진다면,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을 인정하지 않는 꼴이 된다.


행위가 더하여지거나 그 외의 요구조건이 추가되는 이들은, 진정한 안식에 들어온 자라고 할 수 없다.


신자에게 전가된 의가 취소될 수 있거나, 또 다른 행위가 요구된다면,  신자의 삶의 여정은 불안 할 수 밖에 없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몸에 장애도 있게되며, 치매등으로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염려에도 불구하고 신자가 평안 할 수 있는 것은, 구원이 신자의 행동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기 때문이다.


구원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이기 때문에,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충성의 개념 가운데 내포되어있는 행위의 요구를 충족시킴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면,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성도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어느 시대나 어느 상황에서나 타락하고 부패할 수밖에 없기에, 둘째 아담의 구속 사역의 은혜 안에 거해야만 참 평안을 얻을 수 있다.


끊임없이 행함의 열매를 강조하는 이들은,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아담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외면하며, 이에 대한 언급을 회피한다.  


종교개혁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로 인한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을 강조하였지만, 기독교를 윤리적 종교로 만들려는 이들은 이를 애써서 외면한다.


기독교를 윤리에 접목시키려는 시도는, 복음의 본질에 무지하거나, 아니면 알고도 외면하는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이다.


인간의 윤리적인 노력은 유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의 전형이며, 유대주의적 사고를 추구하는 새관점주의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매튜 베이츠는 비록 자신이 복음주의 안에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 구도에서 신학을 하고있으며, 오직 충성의 개념은 새관점의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는 것이다.


다음은 토마스 슈라이너가 매튜 베이츠의 “오직 충성으로 받는 구원”에 대하여 비평한 것을 번역한 것이다.



매튜 베이츠의 “오직 충성으로 받는 구원”에 대한 토마스 슈라이너의 비평


오직 ‘충성’으로 구원받는다고? 종교개혁을 수정하려는 새로운 시도에 관하여
Saved by ‘Allegiance’ Alone? On a New Attempt to Revise the Reformation


MARCH 3, 2017    | Thomas Schreiner     SHARE
BIBLE & THEOLOGY


올해는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시에서 95개 조항을 게시한지  500주년이 됨을 기념하는 해이다.
This year marks the 500th anniversary of Martin Luther’s posting the Ninety-five Theses in the city of Wittenberg.


한 가지 제기되는 질문은, 500년 간에 걸쳐서 심사숙고하여 연구한 후에도, 오직이라는 5개 조항- 이는 종교 개혁에서의 주된 신학적 강조점들을 올바르게 담아내고 있다-이 꼭 강조되어야만 하느냐에 대한 것이다.

One question that arises is whether the five solas—which rightly capture some of the major theological emphases of the Reformation—should be nuanced after 500 years of reflection and study.

퀸시대학에서 가르치는 재능있는 젊은 신학자인 매튜 베이츠는, 우리가 “오직 믿음”을 수정하고서 “오직 충성”이라는 구호로 재공식화할 것을 제안하면서, 이러한 수정이 유익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있다.
Matthew Bates, a gifted young scholar who teaches at Quincy University, thinks that an adjustment would be salutary, suggesting we revise “faith alone” and reformulate with the slogan “allegiance alone.”


성경만을 믿는 이들로서, 우리는 과거에 가졌던 것을 개혁하고 다듬는 일에 열려있어야만 하며, 이에 베이츠는 우리에게 성경을 새롭게 보도록 도전한다.

As those who believe in Scripture alone, we should be open to reforming and sharpening what we have held in the past, and Bates challenges us to look at the Bible anew.



충성과 복음
Allegiance and the Gospel


그의 새로운 책 “오직 충성으로 받는 구원: 믿음과 행위와 왕이신 예수의 복음을 다시 생각한다”에서, 베이츠는 구원과 복음의 성격을 새롭게 할 것을 숙고해본다.
In this new book, Salvation by Allegiance Alone: Rethinking Faith, Works, and the Gospel of Jesus the King, Bates considers afresh the nature of salvation and the gospel.


그는 신약성경에서 pistis와 pisteuō를 번역하는데 있어서, “믿음faith”과 “신뢰belief”가 항상 최상의 의미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He argues “faith” and “belief” aren’t always the best terms to translate pistis and pisteuō in the New Testament.


대신에, 구원과 관련하여서는 왕이신 예수께 충성을 말하는 것이 더욱 좋을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서 믿음은 충실함의 개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Instead, with regard to salvation it would be better to speak of allegiance to Jesus as King, so that faith has the idea of fidelity.


충성의 유익한 점은,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선행이 필요하다는 개념을 포함하고있다는 것이다.

The advantage of allegiance is that it includes the idea that good works are necessary for final salvation.


믿음이 단순한 지적인 동의나, 어둠에서의 도약이나, 바램의 생각으로 규정될 수 없다고 베이츠는 옳바르게 주장하고있다.

Bates rightly maintains that faith can’t be defined as mere intellectual assent, a leap in the dark, or wishful thinking.


베이츠에 의하면, 믿음이 “충성”이라는 것으로 가장 잘 표현된다는 생각은, 제2성전 유대교 문헌의 증거를 통해서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The notion that faith is best rendered by “allegiance” is supported, according to Bates, by a look at evidence in Second Temple Jewish literature.


그리고나서 그는, 바울 본문의 핵심에서의 이러한 의미는, “고백적 충성서약”, 그리고 “구현된 충성”이라는 정신적 동의의 개념들이,  pistis를 통한 구원이나 칭의가 의미하는 것을 좀 더 잘 설명할 수 있다고 논한다.
He then argues for this meaning in key Pauline texts, saying that the notions of mental assent, “professed fealty,” and “embodied loyalty” better account for what is meant by salvation or justification through pistis.


그래서 바울이 왕이신 예수께 “구현된 충성”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Hence Paul teaches “embodied allegiance” to Jesus as King.


베이츠가 “신뢰”보다는 “충성”을 선호하는 것은, “신뢰”가 보좌에 앉으신 왕이신 예수께 충분한 충성을 담아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Bates prefers “allegiance” to “trust” since he thinks the latter doesn’t sufficiently capture loyalty to Jesus as the enthroned King.


베이츠에 따르면, 우리는 마지막 날에 항목별로 분류된 계명들을 지켰느냐가 아닌, 예수께 진정으로 충성했느냐에 따라서 심판 받는다는 것이다.

According to Bates, we’ll be judged on the last day on whether we were genuinely loyal to Jesus, not whether we kept an itemized list of commands.


복음은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공식으로 축소될 수 없는데, 이는 예수가 왕이라는 사실이 복음의 중심이기 때문이라고 베이츠는 주장한다.
As Bates argues, the gospel can’t be reduced to the formula “Jesus died for our sins,” since the gospel centers on the truth that Jesus is King.


예수는 부활하셨으며, 모든 이들의 왕이되신 주이시며, 우리는 우리의 주이신 그에게 충성을 표현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

He’s the resurrected and enthroned Lord over all, and we’re called to express our allegiance to him as our Lord.


베이츠에 따르면, 복음에는 여덟가지 요소들이 있다.

According to Bates, there are eight elements to the gospel:

1. 예수는 성부와 함께 이미 존재하셨으며;
1. Jesus pre-existed with the Father;


2. 그는 성육신하셨고, 다윗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셨으며,
2. He became incarnate and fulfilled the promise to David;


3. 성경에 따라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으며,
3. He died for our sins according to the Scriptures;


4. 무덤에 묻히셨으며,
4. He was buried;


5. 그는 성경에 따라 3일만에 부활하셨으며,
5. He was raised on the third day according to the Scriptures;


6. 많은 이들에게 나타나셔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을 보여주셨으며,
6. He appeared to many, showing he was raised from the dead;


7. 주로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으며,
7. He is seated at God’s right hand as Lord; and


8.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것이다.
8. He will come again as judge.

베이츠는 특별히 예수가 왕으로, 그리고 메시아로서 왕좌에 오르셔서, 모든 세계를 다스릴 것을 강조한다.

Bates particularly stresses that Jesus is enthroned as King and Messiah over all the world.



선물과 새 창조로서의 구원
Salvation as a Gift and the New Creation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이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베이츠는 강조한다.

Bates emphasizes we can’t earn salvation; it’s a gift of God.


그러나 동시에 그는, 개인적인 택함받음을 거부하며, 집단적 선택이 좀 더 정확하게 성경적 증거들을 표현한다고 주장한다.

At the same time, however, he rejects individual election and contends corporate election more accurately captures the biblical witness.


어떤 경우에든지, 은혜는 효과적이며,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

In any case, grace is effective and transforms our lives.


비록 개신교인들은 종종, 우리의 행함은 필요한 증거이며, 우리의 신앙의 열매라고 말하지만, 베이츠는, 왕위에 오르셔서 통치하시는 왕이신 예수께 충성을 말하는 것이 더 좋으며, 이러한 행위는 “최종적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Though Protestants often say our works are the necessary evidence and fruit of our faith, it’s better, Bates says, to speak of allegiance to Jesus as the enthroned and reigning King, and thus works are “integral to final salvation” (110).

베이츠는 그리스도인이 죽은 후에 단순히 천국에 간다는 생각에 이의를 제기한다.
Bates takes issue with the notion that Christians simply go to heaven after death.


천국에 관하여 신약이 묘사하는 것은, 이러한 대중적인 개념보다는 좀 더 생동감있고 강력한 것이라는 것이다.

The New Testament picture has more vigor and strength than this popular conception of heaven.


신자들은 죽음에서 부활하여 새 창조의 시민으로 산다는 것이다.

Believers are raised from the dead and live as citizens in the new creation.


우리는 변형된 우주를 기다리면서, 왕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면서,  하나님께서 원래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실행하기를 고대한다는 것이다.

We’re awaiting a transformed universe and look forward to ruling with King Jesus to fulfill the purpose for which God originally created human beings.


우리는 구름 위를 떠다니는 천상의 피조물이 되지 않을 것이며, 새 창조 안에 거주하는 변형되고 불멸의 몸을 가진 인간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We will not be ethereal creatures floating on clouds, but persons with transformed and immortal bodies residing in a new universe.

베이츠는, 왕으로서 보좌에 앉으신 예수가, 어떻게 우리가 예수와 함께 그 아래에서 통치하는 새로운 우주를 고대하시는지, 옳게 보고있다.
Bates rightly sees how the enthronement of Jesus as King anticipates a new universe where we’ll reign with and under him.


베이츠는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진실되고 선한 모든 것은 오는 새 창조에서 보존될 것이라는 것을 제시한다.

Bates also suggests everything true and good we’ve done in this world will be preserved in the coming new creation.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로서, 우리는 현재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목적을 가질 수 있다.

As those created in God’s image, we have purpose in our lives even now.


만약에 우리가 우상의 길을 따른다면- 만약에 우리가 자신이 지음받은 방식대로 사는데 실패한다면- 우리는 세상을 망가뜨리고 다른 인간들을 손상시킬 것이다.

If we follow the path of idolatry—if we fail to live in the way we’re designed as those made in his image—we deface the world and damage other human beings.


예수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며,예수는 찬양받으실 보좌에 계신 왕이시기에, 우리는 인간 존재로서의 우리와는 불연속적인 면이 좀 있더라도, 그의 형상을 입게될 것이다.

Jesus is the full image of God, and we’ll be conformed to his image even if there is some discontinuity between us as human beings, since Jesus is the exalted and enthroned King.

칭의
Justification


칭의에 이르러서는, 베이츠는 이를 그리스도의 변호에 근거를 두고있다.
When it comes to justification, Bates roots it in the vindication of Jesus.


예수는 메시아라는 주장으로 처형되었으며,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는,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하나님께 저주받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Jesus was condemned as a messianic pretender, and his death on the cross signified to the Jewish religious leaders that he was cursed by God.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비난하였던 자들의 판단을 뒤집으시고, 그를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 그가 옳다는 것(칭의)을 증명하셨다는 것이다.

Yet God reversed the judgment of those who condemned Jesus and demonstrated his vindication (justification) by raising him from the dead.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와 협력할 때 역시 의롭다(하나님께 옳다)는 것이다.

Christians are also justified (right with God) when they’re incorporated into Christ.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속하여있는 이들은, 예수의 옳다고 인정받음이 역시 그들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옳다고 선언된다는 것이다.

Those belonging to Christ through union with him are declared to be in the right with God, because Jesus’s vindication is also theirs.

또한 베이츠는, 개혁주의 분야에서는 일반적인 구원의 서정에 대하여 의문을 제시하면서, 구원의 서정이 성경 신학보다는 조직 신학에 좀 더 치우쳐있는 것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다.
Bates also questions the order of salvation (ordo salutis), which is common in Reformed circles, arguing it’s more indebted to systematic than biblical theology.


그는, 신자는 보좌에 앉으신 왕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의미에서, 전가를 옹호한다.

He defends imputation in the sense that believers are united with Christ as our enthroned King.


베이츠는 전가를 인정하지만, 베이츠에 의하면, 전가는 상실될 수 있으며, 지금 의롭게 된 자라도 실질적으로 칭의의 상태를 상실할 수 있으며, 최종적인 지옥살이를 경험하는 것으로 결말이 날 수 있다는 것이다.

While Bates endorses imputation, he also suggests that imputation may possibly be lost so that some who are now justified, according to Bates, may actually lose the status of justification and end up experiencing final damnation.


그는 칭의는 법정적이라고 말하지만, 의는 주입된 것이라고도 (비록 주입이 점진적이지는 않지만, 충성을 드러내는데 있어서는 즉각적이라고) 말한다.

He says justification is forensic, but also says righteousness is infused (though infusion isn’t gradual but instantaneous upon declaration of allegiance).


보수적 성향을 유지하다.
Keep to the Old Paths


“오직 충성에 의한 구원”에는 도움되는 통찰들로 가득하며, 베이츠의 글들을 모두 접하기에는 공간이 부족하다.
Salvation By Allegiance Alone is full of helpful insights, and space is lacking to interact with everything Bates writes.


그가 보좌에 앉으신 만물의 주이신, 왕이신 예수께 복종할 것을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신약이 강조하고있는 것을 잘 표현하고있는 것이다.

His emphasis on submission to Jesus as King, the enthroned Lord of the universe, nicely captures the New Testament emphasis on what it means to be a Christian.


그는 또한, 이 세상 일에 관한 우리의 삶에 대한 것과, 우상은 추상적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우리를 상기시킨다.

He also reminds us that our lives in this world matter, and that idolatry isn’t an abstraction but shows up in how we live.


우리는 육체로부터 분리된 독립체가 아니며, 우리는 새창조의 생명을 고대하는 육체적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We aren’t disembodied entities; we’re flesh-and-blood creatures anticipating new-creation life.


베이츠는, 복음이 단순히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광범위한  것이라고 옳게 말하고있으며,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다.

Bates rightly says the gospel is broader than simply receiving Jesus as Savior, and he emphasizes God’s grace in saving us.


나도 그의 충성에 대한 강조에 공감한다; 너무도 많은 개신교인들이 믿음을 단순한 언어적 동의로 축소시키고있다.

I also sympathize with his emphasis on allegiance; too many Protestants reduce faith to mere verbal agreement.


많은 이들이, 자신들이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임으로서,  순종과는 관계없이, 영생을 즐길 수 있다고 잘못된 확신을 하고있다.

Many are mistakenly assured they’ll enjoy eternal life apart from any obedience if they accept Jesus as Savior.


베이츠는, 이와같은 이해가 행위에 대한 신약의 강조와 일치하지 않다는 것을 확신을 가지고 증명하고있는데, 이는 행위가 영생을 얻기 위해 분명히  필수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Bates convincingly demonstrates that such a reading doesn’t accord with the New Testament’s emphasis on works, for works are clearly essential for the reception of eternal life.


우리는 구원에 이르기까지 믿음을 유지해야만 한다.

We must maintain our faith until the end to be saved.


“충성”이라는 단어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신뢰”나 “믿음”이 더욱 좋다고 믿고있는데, 이는 “충성”이 곧바로 우리가 하는 것과 우리의 헌신이라는 인간의 주체됨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Despite the advantages of the word “allegiance,” though, I still believe “trust” or “faith” is better since “allegiance” puts the emphasis squarely on the human subject—on what we do, on our commitment.


“충성”은 부차적인 선행들의 중요성을 담아내면서도, 무엇인가를 배제하기도하는데, 이는 믿음이 본질적으로 수용적이기 때문이다.

“Allegiance” captures the importance of subsequent good works, but it leaves something out as well, for faith is fundamentally receptive.


우리는 빈손으로 의의 선물을 받으며, “믿음”이 “충성”으로 대체된다면, 이러한 개념이 없어지게된다.

We receive the gift of righteousness with an empty hand, and this conception is absent when we put “allegiance” in place of “faith.”


비슷하게, 참된 믿음과 신뢰는 필연적으로 선행으로 인도한다는 개념은 신약의 증거를 더욱 적합하게 다루고있는 것이다.

Similarly, the notion that true faith or trust inevitably leads to good works handles the New Testament witness in a more fitting way.

나는 또한 베이츠가 공동체적 선택을 개인적 선택과 분리시키는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말하고자한다.
I’d also argue Bates wrongly separates corporate from individual election.


공동체적 선택의 영역을 개인적 선택으로부터 때어내려는 시도는, 내가 다른 곳에서 논한 것과 같이, 논리적으로 흠이있고, 성경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The attempt to carve out a place for corporate election apart from individual election, as I’ve argued elsewhere, is logically flawed and biblically unsupportable.


베이츠는 개인적 선택을 지지하는 구절이 한 구절도 없다고 말한다.

Bates says that not a single verse supports individual election.


이것은 놀랄만한 주장이며, 우리가 단어가 아니라 개념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This is an astonishing claim, especially when we consider concepts and not words.


나는 분명한 예로서, 요한복음 6장 35-44절을 말했다.

I’d point to John 6:35–44 as a clear example.


그리고 베이츠가 무슨 말을 하던간에, 로마서 9장 6-23절도, 많은 단독적 형태들과 구원론적 문맥과 함께, 개인적 선택을 뒷바침하고있다.

And despite what Bates says, Romans 9:6–23—with its many singular forms and soteriological context—also supports individual election.


공동체적 선택은 복음주의 영역에서 오랜 유산을 가지고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모든 권위있는 개혁주의자들은, 개인적 선택을 믿고있다.

Certainly corporate election has a long legacy in evangelical circles, but all of the magisterial Reformers believed in individual election.

더군다나, 내가 판단하기로는, 구원의 서정의 개념은 베이츠의 주장보다도 더 많은 장점을 가지고있다.(로마서 8장 29-30절을 보라)
Additionally, the notion of an ordo salutis has more merit in my judgment than Bates claims (see Rom. 8:29–30).


내가 비록 여기서 전형적인 개혁주의 이해를 바로 적용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우리가 우리의 관점을 성경에 근거하게 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옳바르게 상기시키고있다.

He rightly reminds us we need to ground our view in Scripture, though I’d suggest the typical Reformed understanding gets it right here.


칭의의 의미에 관해서는, 나는 베이츠가 우리가 필요로하는 분명함을 제공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In terms of justification, I don’t think Bates offers the clarity we need.


그에 따르면 칭의는, 법정적이면서 변화될 수 있으며, 전가와 주입 모두를 포함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는 상실로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According to him, justification is both forensic and transformative, includes both imputation and infusion, and the righteousness we have may end up being lost.


나는, 우리가 왕이신 예수의 제자로서 삶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베이츠의 주장에 깊이 공감하지만, 칭의가 행위가 함께 다루어질 때에, 칭의와 행위에 대한 그의 관점은 성경의 증거에서 벗어나있다.

I deeply appreciate Bates’s claim that we need to live changed lives as disciples of King Jesus, but his view of justification and works when merged together veers away from Scripture’s witness.


이 책에서의 많은 세부적인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내가 믿기로는, 전통적 방식이 좀 더 명확하고 성경적으로 근거가 있다.

Despite the many fine insights in this book, the old paths are clearer and, I believe, biblically warranted.


오직 믿음과 다섯 가지 솔라
Faith Alone and the Five Solas


비록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게된다는 진리를 여기서 상세하게 변론할 수는 없지만, 아마 한 두가지 문장이나 몇가지 신학적 함의들을 깊이 생각해보는 것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Though the truth that we’re justified by faith alone can’t be defended in detail here, perhaps it’ll help to reflect on a text or two and some theological implications.


예를 들어, 바울의 구원론을 잘 표현해주고있는 에베소서 2장 8-10절을 살펴보면, 우리가 믿음에 의해서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Consider, for instance, Ephesians 2:8–10, which famously captures Paul’s soteriology and where it’s clear we’re saved by grace through faith.


나는 “믿음”이 “충성”보다도 (바울이 사용한) pistis의 의미를 좀 더 적절하게 표현해준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데, 이는 문맥상으로 볼 때 “믿음”이 “행위”에 대립되기 때문이다.

I’d suggest “faith” more aptly captures the meaning of pistis (which Paul uses) than “allegiance,” because “faith” is opposed to “works” in the text.


만약에 구원이 행위에서 왔다면, 행위가 배제되는 것은, 우리로하여금 자랑하게 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Works are excluded because, if salvation came from them, we’d be prone to boast.


우리는 여기서, 행하는 것과 믿는 것, 성취하는 것과 받는 것, 활동하는 것과 쉬는 것 간의 대비를 보게된다.

We see a contrast here between doing and believing, between achieving and receiving, between acting and resting.


그러므로 “충성”이라는 의미는 인간의 헌신이 강조되기에, 좋은 역할을 하지 못하는 반면에,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것에 대한 신뢰를 잘 전달해준다.

So the term “allegiance” doesn’t work as well because, again, it puts the emphasis on human commitment, whereas “faith” conveys trust in what God has done for us in Jesus Christ.

이 책의 많은 세부적인 통찰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통적 방식이 좀 더 분명하고 성경적으로 근거가 있다고 믿는다.
Despite the many fine insights in this book, the old paths are clearer and, I believe, biblically warranted.

그러나 신뢰하는 것과 받는다는 것의 개념이, 베이츠가 그렇게 간절히 강조하는 바와같이, 선행의 중요성을 배제하는가?
But does the notion of trusting and receiving cancel out the importance of good works, which Bates so helpfully emphasizes?


바울이 말하는 것과 같이, 결코 그렇지 않다!

As Paul would say, certainly not!


에베소서 2장 10절은 신자가 하여야 할 선행을 묘사하고있으며; 이와같은 행위는 구원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열매인 것이다.

Ephesians 2:10 features the good works that believers will do; such works don’t qualify us for salvation but are the fruit of being a new creation in Christ Jesus.


우리가 예수를 주이시면서 구원자로서 받아들이는 비어있는 손은, 빈상태로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The empty hands with which we receive Jesus as Lord and Savior don’t remain empty.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하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능력을 입게되는 것이다.

By virtue of being in Christ, we’re empowered to live a new life that pleases God.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는 믿음인,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뢰는, 반드시  성령의 열매를 보여주는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한다.

Genuine trust in God—saving faith in Christ—inevitably leads to a new life manifesting the Spirit’s fruit.

누가복음 7장 36-50절의 죄 많은 여인에 관한 이야기는 같은 진리를 보여주고있다.
The story of the sinful woman in Luke 7:36–50 illustrates the same truth.


우리는 그녀의 정확한 죄는 알지 못하지만, 이는 소문이 무성하였기에, 아마도 성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We don’t know her exact sin, but it was notorious, and thus was probably sexual.


그녀는 예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그의 발을 닦이고 그녀의 머리로 말린 다음에, 향수를 부음으로서, 증명하였던 것이다.

She demonstrated her love for Jesus by weeping on his feet, drying them with her hair, and pouring perfume.


예수는 그녀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선언하셨으며(눅 7:47), 이 이야기는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라”(눅 7:50)는 호소력있는 말로 끝을 맺는다.

Jesus proclaims her sins are forgiven (Luke 7:47), and the story ends with the ringing words: “Your faith has saved you; go in peace” (Luke 7:50).


다시 한번, 나는 “충성”보다는 “믿음”이라는 단어가 더 좋다고 생각한다.

Again, I think the word “faith” is better than “allegiance.”


그녀는 자신의 왕이신 예수께 헌신된 것이 맞다.

Yes, she was devoted to Jesus as her King.


그래도 이 이야기의 초점은 그녀가 자신의 죄를 용서하신 것에 대하여  예수를 신뢰하고있다는 것이다.

Still, the point of the story is that she trusted Jesus to forgive her sins.


그녀는 예수께 빈손으로 왔으며, 그녀로부터 흘러나온 사랑과 헌신은 그녀가 받은 용서의 결과였던 것이다.

She came to him with empty hands, and the love and devotion that flowed out of her were a result of the forgiveness she’d received.


우리가 에베소서 2장에서 본 것과 같이, 오직 믿음만이 오직 은혜를 빛나게 해준다.
Faith alone, as we saw in Ephesians 2, highlights grace alone.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우리의 주이신 예수의 속죄 사역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다.

God’s grace and kindness save us through the atoning work of Jesus as our crucified and risen Lord.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는가?

But how does our faith save us?


우리는 우리의 믿음 자체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We aren’t saved by our faith per se.


믿음은 그것의 목적 때문에- 믿음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그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되기때문에-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다.

Faith saves us because of its object—because through faith we’re united to Jesus Christ, and his righteousness becomes ours.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의지해서, 오직 믿음을 통하여, 오직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다.
We’re saved by grace alone through faith alone on account of the work of Christ alone to the glory of God alone.


그리고 물론, 우리는 이러한 진리들을 성경에서만 가지고 온 것이다.

And, of course, we derive these truths from Scripture alone.

달리 표현하자면, 오직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미한다!
In other words, faith alone implies Christ alone!


그리고 은혜로 말미암아, 의를 위해서 믿음의 손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면, 구원을 위한 모든 영광이 하나님에 돌아가는 것이다.

And if, by grace, the hands of faith receive Christ for righteousness, then all the glory goes to God for salvation.


그렇다면, “충성”이란 의미는, 비록 어떤 점에서는 도움이 되겠지만, 잘못된 부분에 강조를 두게되기에, 나는 “오직 믿음” 만이 성경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표현하는데 있어서 검증된 자리에 서 있다고 믿는다.
The term “allegiance,” then, though helpful in some respects, puts the accent at the wrong place, and thus I believe “faith alone” stands the test of time in representing faithfully Scripture’s teaching.


토마스 슈라이너는 켄터키 루이스빌에 있는 남침례신학대학의 신약해석학의 제임스 뷰케넌 헤리슨 교수이며, 성서 해석학 부장이다.
Thomas Schreiner is the James Buchanan Harrison professor of New Testament interpretation and associate dean for Scripture and interpretation at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in Louisville, Kentucky.

출처

https://www.thegospelcoalition.org/reviews/salvation-by-allegiance-alone/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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