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도서 2017. 12. 18. 15:06

존 페스코의 “태초의 첫째 아담에서 종말의 둘째 아담 그리스도까지" 요약 정리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이 책의 원제는 Last things First이다.


하지만 번역본의 제목 선정이 쉽지 않았던 것은 원제인 Last things First도 많은 고민 끝에 나온 제목이었으며, 이는 미국의 정서에는 적합하지만 한국의 정서에는 맞지 않기에 결국 “태초의 첫째 아담에서 종말의 둘째 아담 그리스도까지”라는 긴 제목으로 결론이 내려진 것 같다.


이 책은 저자가 서문에서 말하였듯이 “왜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이라 부르는가?”에 대한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이 책의 논증은 역사적 개혁주의 교리의 기본 요소인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이라는 조직 신학 개념이 타당함을 입증하는 것이다.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행위 언약 개념을 비판하면서 이의 수용을 거부하고있는 것이 현실이다.


저자가 논하는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행위 언약의 개념이 없이는 정립되기 어려운 개념이다.


실제로 행위 언약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칼 바르트, 존 머레이, 톰 라이트등의 기독론이 처음 아담과의 관계성에서 정립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루이스 벌코프는 헤르만 바빙크가 정리한 행위 언약 개념을 조직 신학적으로 잘 정리하였다.


저자는 루이스 벌코프의 책과 같은 신학 작품과 같이 읽을 것을 추천한다.


최근 창세기의 창조기사와 관련되어 창조과학, 젊은 지구론, 오래된 지구론, 유신진화론등의 논쟁이 식을 줄을 모른다.


최근 창세기 1~3장에 대하여 논쟁이 뜨겁게 진행되고있지만, 이는 창세기 저자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먼 논쟁이다.


이 책은 창세기 1~3장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제공한다.


젊은 지구론, 오래된 지구론, 유신론적 진화론등은 창세기 저자가 말하고자하는 주제에서 벗어난 논점들이다.


창세기에서의 6일간의 창조가 의미하는 바는 창조 시간의 길이와는 관계가 없으며, 중요한 점은 창조 사역이 안식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서론


창세기에 대한 대중적인 접근 방법들


창세기를 둘러싼 논쟁은 지난 200년간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중심으로 발생했다.


구 프린스턴: 워필드와 핫지


프린스턴 신학교의 구학파장로교Old School Prebyterianism Of Princeton Seminary에 속해 있던 벤자민 워필드B. B. Warfield는 진화론과 창세기 1~3장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했다.


워필드는 인간의 영혼을 제외한 모든 것이 진화론적이라고 말하며, 최초의 천지 창조 이후부터는 인간의 몸과 더불어 모든 것이 진화적인 방식으로 생겨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핫지Charles Hodge는 “날"이라는 단어를 “불명확한 기간의 시간"이라고 해석하면서, 창조가 6일 만에 완성되었다는 창세기의 설명은 지구의 나이가 그것보다도 훨씬 많음을 가리키는 지질학적 증거와 상충된다고 주장했다.


핫지는 창세기 1~3장을 진화론과 조화시킨다.



창조 과학: 헨리 모리스


구 프린스턴의 입장의 특징이 창세기를 과학에 맞춘 해석이라면, 창조 과학 추종자들은 과학을 성경에 맞추어 해석한다.


헨리 모리스Henry Morris는 “창세기 1장을 해석하는 유일하게 적합한 방법은 바로 ‘해석’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라고 결론 내리면서, 창세기는 하나님이 우주를 하루에 24시간씩 엿새 동안 창조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고 말한다.


더글라스 켈리Douglas Kelly는 빛의 속도가 일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근거로, 우주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오래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두 가지 대중적인 접근 방식이 취하는 전제들



창조 과학


창조 과학의 2세대 과학자들 가운데에는 헨리 모리스가 있으며 그는 존 위트콤과 함께 “창세기의 홍수"를 저술하였다.


헨리 모리스의 저술에는 세대주의의 해석학적 특징인 문자적 해석 방식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대부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종말론에 있어서 세대주의의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문자적 해석을 전제로한 종말론적 결론을 거부한다.


하지만 개혁주의 공동체 안에서 그들의 세대주의적 창조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모리스가 쓴 창세기 해석에서 보여주는 세대주의적 증거들을 보여주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삼분법적 인간론을 고수한다.

2. 원죄가 간접적으로 전가되었다고 믿는다.

3.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천년왕국 통치동안에 물지붕이 다시 복원될 것이라고 믿는다.

4. 생명나무 열매 속에 실제로 생명을 연장하는 물질이 들어있다.

5.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에는 유전자를 변형시키는 유독물질이 들어있었다.

6. ‘신비mystery'라는 단어를 성경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


이외에도 모리스는 모형론typology에 대하여 별 관심이 없으며,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는 아담과 교회의 모형이 되는 하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모리스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과학의 나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모리스는 성경이 과학적이지 않고 신학적이라고 말하는 모든 사람을 신정통주의자라고 분류했다.



구프린스턴


핫지의 방식의 문제는 지질학적인 의미로서의 하루가 핫지의 주해적 결론을 이끌어 내는데, 과학 이론은 변하기 마련이기에 이러한 방식에는 문제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 성경 해석의 절대적인 규칙은 성경 그 자체다. 따라서 성경의 어떤 부분에 대한 진정하고 완전한 의미에 대한 의문이 있다면, 이 부분에 대해 더 명확히 설명하고 있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그 답을 찾아내고 알아내야한다(1.9)”


Fesko는 창세기에 대한 창조 과학적 접근뿐 아니라 구프린스턴의 접근방식에도 반대한다.



창세기 1~3장에 대한 최근의 문자적 해석


개혁주의에 속한 많은 이들이 창세기 1~3장을 해석할 때 창조가 일어난 기간에 주목하는 문자적 해석 방법을 채택한다.


하지만 창세기 1~3장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작품들은, 창조가 일어난 날들의 실제 길이가 얼마인가라는 하나의 문제에만 지나친 주해적 초점을 두기 때문에, 결함을 지닐 수 밖에 없다.



창세기 1~3장의 목적


과학적 자료와 세계사


모리스나 로스등 창조 과학을 주장하는 이들은 창세기에 대한 과학적인 묘사들을 하는데 있어서 다음과 같은 전제들을 기초로하고있다.


1. 창세기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방법을 말해준다.

2. 창세기 1~11장은 지구의 일반 역사에 대한 것이다.

3. 창세기 1~11장이 종교에 대한 것이라고 말하거나 신학적 진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정통주의 혹은 자유주의적인 답변이다.


페스코는  이러한 세 가지에 대하여 비판한다.


1. 하나님은 욥에게 창조에 대한 60개 이상의 질문을 하지만 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욥에게 하신 질문은,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셨는지에 대하여 욥이 모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랍비의 해석에 의하면, 창세기 1장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어떻게 창조하셨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러므로 창세기가 창조의 방법에 대해 말해준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며, 해석은 오로지 성경 본문과 그 본문의 맥락에만 충실해야한다.


2. 모리스의 주장과 같이 창세기 1~11장은 세계 역사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창세기 1장에는 천사의 창조나 사탄의 타락에 대한 내용이 전혀 나와 있지 않다.


창세기 1~11장은 선택적 역사이며, 성경은 전반적인 세상의 역사를 다루지 않으며 구속사, 즉 구원의 역사를 다룬다.


3. 모리스의 주장과는 다르게 창세기 1~11장이 일차적으로 종교적 혹은 신학적 글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정통주의와 비슷한 것이 아니다.


신정통주의 밖에 있는 신학자들도 이와같은 주장을 한다.


창세기 1~11장, 그중 특히 1~3장은 과학에 대한 것이 아니며 독자에게 과학적 자료를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창세기 1~3장은 신학적이다.



기독론적 강조와 그 목적


창세기의 첫 장들을 기독론적으로 연결짓는 것은 중요한 해석학적 가정이다.


창세기 1~3장은 과학이나 세계 역사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이해하는 시작점이다.


기독론이 창세기 1~3장을 설명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신약 성경에 비추어 이 부분을 해석해야만 한다.


신약 성경에서 빛과 어두움, 창조주로서의 그리스도,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와 같은 표현들은 창세기 1~3장이 기록된 목적이다.


창세기 1~3장은 첫째 아담의 실패가 지니는 신학적 의미를 설명해주며, 첫째 아담의 실패가 지니는 신학적 의미는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공적 사역의 시작점 역할을 한다.



해석 방법론: 기독론과 종말론


창세기 1~3장은 단지 구속 무대의 건축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인격person과 사역work에 대한 예시shadows와 모형types을 보여준다.


바울도 아담을 “오실 자의 모형"(롬 5:14)이라고 말한다.


창세기는 구속사와 분리할 수 없다.


둘째 아담의 사역은 첫째 아담의 중요성을 가르쳐주며, 첫째 아담의 사역은 둘째 아담의 중요성을 가르쳐준다.


아담이 첫 번째 예언자, 선지자, 왕인 것과 같이, 창세기 1~3장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예언자, 선지자, 왕이라는 세 가지 직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직접적인 역사적 상황


창세기 1~3장은 기원전 15세기라는 직접적인 역사적 상황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두 가지 지평에서 해석되어져야한다.


창세기가 기록된 시점은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이나 광야 기간 중 한 때로 잡을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 숭배로 가득했던 애굽 땅에서 나온 이후에, 다시 우상 숭배자들과 이교도들이 차지하고 있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창세기의 설명은 우주의 나이를 계산하는 일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성품과 특징을 기억나게 해 주었을 것이다.(42)


창조 이야기는 21세기 과학이 던지는 질문들을 통해 분석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약속의 땅의 정복을 둘러싼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맥락에서 이해하여야하며, 궁극적으로는 기독론적인 의미를 염두에 두어야한다.(43)



1장.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


서론


창세기 1~3장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 관한 탐구는, 대부분 구원의 순서(ordo salutis)의 관점에서, 창조, 타락, 구속의 맥락으로 접근한다.


하지만 구속사의 문제들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


둘째 아담의 사역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첫째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손상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9)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종말론적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시작해야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성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창세기 1장 26절의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사람을 만들자'라는 구절에서 하나님이 복수형을 말씀하시는 것에 대한 세 가지 설명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이 자신의 천상회의를 향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가장 초기의 랍비 해석자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왕실에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했었다.


최근에는 이 입장에 대하여 메러디스 클라인Meredith Kline이 지지하고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천상회의가 인간 창조에 참여하였지만, 이 회의에 천사나 다른 천상의 회원이 참여하였다는 말은 없다.


2) 위엄Majesty을 나타내는 하나님 주권의 복수형이다.


3) 삼위일체의 초기 단계적 표현이다.


구약 성경에서 신약 성경에 이르기까지의 점진적인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이 드러남을 볼 때, 본질적으로 하나이지만 복수 성격을 갖고 계신 하나님에 대한 예시일 수 있다.


1)과 2)의 주장보다는 3)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


통전적holistic 정의


하나님의 형상을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의 인간의 역할에서 일차적으로 찾을 수 있으며, 이차적으로는 인간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영역,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 하나님처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역시 지구를 지배하는 주권을 가진다.



고대 근동의 배경에 비춰 본 하나님의 형상


고대 근동의 배경에 비춰볼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갖는 의미는,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다스리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인간은 창조물로서 신이 아니며,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지배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형상, 곧 전달 가능한 하나님의 속성들을 부여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또 삼위일체 안에 있는 신적인 거룩한 공동체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 인간을 공동체로 만드셨고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인간: 창조의 정점


창세기 1장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은 두 가지 특징이 두드러진다.


첫 번째는 ‘바라’(בָּרָ֣א)라는 동사의 사용이다.


한 구절에서 ‘바라’(בָּרָ֣א)라는 동사를 세 번이나 사용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의 정점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형상이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두 개의 얼굴을 지닌 양성체가 아니며, 홀로 하나님의 형상을 갖지 못한다.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서 창조의 정점인 하나님의 형상을 갖는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창조 세계를 다스리도록 인간을 세상에 두셨다는 것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다스리셨다는 선포였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타락 할 수 없는 상태로 창조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고귀한 위치로부터 타락했고, 이 때문에 구속이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중요한 교리적 요지가 담겨있다.


1) 그리스도의 형상은 인간이 참으로 어떠해야하는지를 결정한다.


신약 여러 곳에서 증언하였듯이, 그리스도가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완벽한 인간이었다는 말이다.


이를 학문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기독론이 인류학을 정의한다는 말이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지만, 절대적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와 달리, 상대적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리스도는 신적인 존재로서의 영원한 독생자인 반면에 인간은 신적 존재 밖에 있는 피조된 아들이다.


그리스도는 창조 세계에 주권을 행사하심으로서 하나님을 형상화했는데, 이는 첫째 아담이 실패한 임무인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일을 삼위일체 하나님이 참으로 해내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2) 그리스도의 형상은 인간 구속의 목표를 결정한다.


후크마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완벽한 형상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완전하게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닮는 것이 성화의 최종 목적이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전면에 두어야한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남자와 여자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단일성과 공동체성을 모두 나타낸다.


하나님은 자신의 대리 통치자로서 다스리도록 인간을 창조 세계 가운데 두셨는데, 이는 곧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통치하시고 우주를 다스리심을 뜻한다.


인간은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인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2장 동산이자 성전인 에덴


서론


아담에게 주어진 임무에 대한 창세기 본문의 의도는 과연 채소밭을 경작하는 일등이 주어진 단순한 농장으로서의 에덴을 이야기하는 것인가에 대하여 추론해 볼 때 대답은 “아니다”이다.


아담은 에덴에서 제사장적 임무를 가지고있었으며, 에덴이 지구상의 원형적 성전이라는 결론에 이르게된다.



에덴동산의 특징


동방에 위치함


창세기 2장 8절에서 하나님이 동산을 동쪽 지역에 만드셨다고 나와있다.



산꼭대기에서


에덴 동산은 주변의 지형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하고있었다.


창세기 2장 10~14절에는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왔다고 말한다.


에스겔은 에덴동산의 위치를 하나님의 성산 위라고 말한다.


호렙산, 시내산, 시온산 위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도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거할 종말론적인 장소는 산꼭대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히12:22)


성경은 성전 안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와 산꼭대기에 있는 성전의 위치 사이에 중요한 연관성을 부여한다.


에덴에서 강물이 흘렀다는 사실과 에스겔의 진술을 종합해 볼 때 에덴동산이 산꼭대기에 있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74)



에덴의 강


에덴의 강은 성전 이미지와 중요한 연관성을 지닌다.


시편 46편 4절에서는 강과 성전을 연결시켜 말한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생수의 근원이라고 부른다.(렘 2:13)


강과 성전을 연결하는 이미지는 물의 이미지와 하나님의 임재 사이의 관계를 인식하게끔 해주며, 성령에 대한 내용을 인식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하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8~9)


이에 대하여 메러디스 클라인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에덴에 있는 산의 보좌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가 낙원 안에 있는 강을 샘솟게 하는 근원이었음이 분명하다”(76)



동산 안의 나무들


십계명은 지성소의 궤 안에 보관되었고 그 옆에 율법 책이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궤를 만지거나 궤가 열린 모습을 보게 되면, 즉각 죽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의 가시적인 표현인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와 하나님의 계명 사이에는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명령의 가시적인 표현인 선악을 알게하는 아무든지 언약궤 안의 율법이든지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의 성전 안에 언제나 존재한다.


생명나무와 성전의 일곱 촛대 사이에도 연관성이 있다.


학자들은 이 일곱 촛대가 동산에 있던 생명나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유대 문헌서는 생명나무가 에덴동산 안의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에 있었다고 기록한다.


성전과 나무의 연관성은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현저하게 두드러진다.


에스겔은 ‘성소를 통하여 나오는’ 강을 보는데 이 강이 좌우 강변의 각종 ‘먹을 과실나무’를 자라게 해준다.(78)



보석과 금속


창세기 2장 10~14절에는 금과 호마노등 값진 보석과 금속이 있었다.


동산 안에있던 보석들 가운데는 대제사장의 예복, 특별히 그의 흉패에 다시 등장한다.


대제사장의 흉패는 “하늘나라 성막을 본뜬 땅의 성막의 작은 복사판”으로 만들어져야했다.


이와 동일한 보석들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종말론적 성전의 토대에 다시 등장한다. (79)



그룹 (케루빔)


인간이 타락하게되고 그 후에 동산에서 쫒겨나게되면서 하나님은 동산의 동쪽 문 밖에 두 그룹을 세워두신다.


그룹은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는 수호자이다.


솔로몬의 성전에는 두 그룹이 내소 안을 지켰다.


그룹의 위치와 움직임은 성전으로서의 동산의 정체성을 제공해준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 그룹은 동산 안을 앞뒤로 돌아다닌다(겔 28:14).


이 그룹들은 처음에는 동산에 있었지만, 인간의 타락 후에 동쪽 문으로 옮겨졌으며, 성전 내부와 지성소 사이에 달린 휘장에 상징적으로 재현된다.


이 휘장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찢어졌으며,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한 번 지성소 안에 계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동산 안의 거주자의 활동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은 “동산 안에 거니시고” 있었다.


이는 하나님이 성전 안에 나타나셨을 때 하셨던 하나님의 활동을 묘사하는 표현과 같다.(81)



하나님의 동산 창조


동산과 성전의 유사성은 동산의 창조와 광야의 성막 건축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학자들은 창조가 일어난 기간 칠 일과 하나님이 모세에게 성막 건축을 지시하기 위해 일곱 번 말씀하신 것이 평행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웬함Wenham은 “창세기 1장 1절~2장 3절에 나오는 창조 사건의 결말과 출애굽기 25장 31~40절에 나오는 성막 건축을 설명하는 표현에 있어 평행을 이룬다.”라고 지적한다.


하나님은 창조 사역을 모두 마치신 후에 일곱 째 날에 안식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은 모세에게 일곱 번째 말씀을 마치신 후 안식일을 규정하셨다. (출 31:17)


하나님은 창조가 완료되자 동산-성전에서 안식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광야의 성막 안에 새로 만들어진 지성소에서도 안식하셨다.


성막은 성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우주적 성전인 창조 세계의 작은 복사판이다.


이는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우주적 성전이라면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최초의 지성소라는 것이다.


1. 첫째 날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창 1:1)하셨으며, “하늘을 휘장같이 치셨다”(시 104:2)

-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휘장을 염소 털로 만들되”(출 26:7)


2. 둘째 날

-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창 1:6)

- 그 휘장이 너희를 위하여…… 구분하리라.”(출 26:33)


3. 셋째 날

-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창 1:9)

- “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출 30:18)


4. 넷째 날

-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창 1:14)

- “너는 순금으로 등잔대를 쳐 만들되”(출 25:3)


5 다섯째 날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창 1:20)

-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출 25:20)


6. 여섯째 날

- 인간이 창조되었다.

- “네 형 아론을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출 38:1)


7. 일곱째 날

-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창 2:1)

 “하나님이 복되게하사”(창 2:1)

  하나님은 하시던 일을 마치셨다. (창 2:2)

  하나님은 “거룩하게 하셨고”(창 2:3)

- “이와같이 성막 곧 회막의 모든 역사를 마치되”(출 39:32)

 “모세가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출 39:43)

 “그날에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치니”

 “신성하게(거룩하게)하셨다.(83~85)



아담이 맡은 책임들


하나님이 아담을 동산에 두신 이유는 아담이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게”(창 2:15)하기 위함이었다.


많은 주석가들이 이 노동을 농사짓는 일, 농업적 경작으로만 이해하는데,

‘경작하다’라는 단어인 ‘아바드’와 ‘지키다’라는 단어인 ‘샤마르’는 성막 안의 제사장의 임무를 묘사하는데 쓰인다.


웬함은 아담이 레위인의 원형으로 묘사되어야한다고 말한다.


성경 전체의 더 큰 맥락에서 해석하면, 아담이 동산에서 수행하여야 할 책임은 농업에 관련된 일이기보다는 일차적으로 제사장으로서의 임무인 것이다.



아담이 타락 후에 입은 옷


아담과 하와의 옷은 장차 하나님의 백성을 그리스도의 의로 덮으실 것을 예시하는 것이지만, 에덴동산 안에서 인간이 입은 옷과 이후 성전 제사장들이 입은 예복 사이에는 평행 관계가 있다.(87)



결론


에덴동산의 여러가지 특징들은 에덴동산이 성전의 지위를 가졌음을 확증해주는 상당한 증거들이다.


클라인은 하나님이 우주적 성소의 소우주적인 모형을 에덴동산 안에 만드셨다고 말한다.


루터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성전을 지어주셔서 “아담으로 하여금 자신을 예배하게하셨다”라고 말했다.


아담은 제사장의 원형이지 농부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성전을 지으신 것이지 농장을 만드신 것이 아니었다.(90)



3장 행위언약


서론


아담은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 역사적으로는 행위 언약이라고 불렸던 관계에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사람과 맺은 첫 언약은 행위의 언약으로, 그것 안에서 완전하고 개별적인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에게 그리고 그의 모든 후손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7.2)고 말한다.


정의


언약을 표현하는 히브리 용어는 ,베리트(בְּרִית)다.


‘베리트(בְּרִית)’의 일반적 정의는 인간들 사이 또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조약, 동맹 또는 협정을 말하며, 이는 구약 성경에서 보통 언약covenant라는 단어로 번역된다.


구약 성경 안의 언약들


구약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언약은 크게 사람들 사이의 언약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의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사람 사이의 언약으로는 우정(다윗과 요나단 언약), 동등 조약(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언약), 종주와 봉신(여호수아와 기브온 사이의 조약), 결혼(남자와 여자 사이)을 예로 들 수 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언약은 종주와 봉신의 언약이라는 일반적 범주에 속한다.


여기에는 일방적 언약과 쌍방적 언약이 존재한다.


노아 언약


하나님과 노아 사이의 언약으로서 하나님과 피조물 간의 언약으로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루어지는 일방적 언약의 범주에 속한다. 하나님은 언약에 동반하는 표지로 무지개를 보여주신다.


아브라함 언약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언약으로서, 일방적인 집행이 강조되지만 쌍방적 요소가 존재하며, 표지로는 할례가 있다.


모세 언약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으로서, 일방적인 요소들이 언약 안에 있지만, 쌍방적 요소에 더 큰 강조점이 있다.


십계명과 언약의 책을 동반하며, 언약에 참여하는 남자들에게 할례가 요구된다는 점에서 아브라함 언약을 전제로하며, 언약의 표지로 안식일을 주신다.


다윗 언약


하나님과 다윗 왕 사이의 언약으로서 일방적 언약이다. ‘소금 언약'이라고도 묘사되며, 모세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에 그 뿌리를 두고있다.



창세기 1~3장에 나오는 언약



창세기 1~3장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창 1:5)


하나님이 낮과 밤에 이름을 붙여주시는 것은 언약적 행동이다.


예레미아는 “너희가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깨뜨려 주야로….나의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깨뜨려….레위인 제사장에게 세운 언약도 파할 수 있으리라(렘 33:20-21)”고 말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창조는 언약적인 것이다.


창세기 1장의 창조의 이미지, 특히 하나님의 성령이 혼돈 가운데있는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모습은, 언약적인 배경을 가진 성경의 다른 곳에서 다시 등장한다.


메러디스 클라인에 의하면 “창세기 1장2절의 창조 묘사는 재창조 광경에 대한 환상에서 반복된다…. 영광의 영…. 영광의 임재가 신적인 증인으로서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 출애굽-재창조에서 모세가 창세기 1장 2절의 이미지를 통해 묘사하는 영광의 그름은…. 언약에 대한 핵심적인 증인이 된다.  예수님이 세례받으실 때, 새의 형상으로 물 위로 내려오신 성령은 창세기 1장 2절에서와 같이...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신적인 증언이었다. 영광의 형상은 요한계시록 10장 1절 이후에… 맹세하시는 모습이다….”와 같이 출애굽, 그리스도의 세례, 완성의 때에도 성령이 하나님의 언약 행위에 대한 증인으로 나타나면서, 성령이 창세기 1장 2절의 창조의 시작때와 같은 기능을 하신다.


성령은 하나님의 언약적 주권에 대한 증인이셨다.


고든 스파이크만은 “언약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에, 태초부터 창조물은 하나님께 대한 의존과 하나님 앞에서의 반응이라는 언약적 관계 안에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시고 아담을 원시 성전Primeval temple인 에덴동산 안에 두셨을 때 하나님은 복과 저주를 모두 담고 있는 명령을 내리셨으며, 복과 저주가 첨부되었다는 덤에서 모세 언약과 평행을 이룬다.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하나님의 구속적 언약의 성례적 표지들과 비슷한 성례적 역할을 한다.


칼빈에 의하면 “성례라는 말은….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이 참이라는 사실에 대해 사람들이 더욱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명하신 모든 표지들을 일반적으로 포함한다….자연의 물체 가운데 표지…. 한 예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불멸에 대한 보증으로 생명나무를 주셔서 아담과 하와가 영원히 살 수 있다는 확신을 생명나무 열매를 먹음으로써 갖도록 하신 것이다…. 아담과 노아는 생명나무와 무지개를 성례로 여겼다….생명나무와 무지개 안에 하나님 말씀에 의해 새겨진 표시가 있어서 언약에 대한 증거와 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6장 18절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창 6:18)


하나님께서 노아와 관계를 맺으실 때 처음 사용하신 언약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게서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시작하실 때 사용하신 언약과 다른 명칭을 사용하신다.


아브라함 언약에서는 ‘세우다'라는 뜻의 ‘하킴’ 대신에 ‘카라트’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노아 언약에 사용된 ‘하킴'이라는 단어는, ‘자르다'라는 뜻을 가진 ‘카라트’라는 단어와는 달리, 이미 존재하고있는 것을 다시 세우는 행위로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언약의 지속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9장에서 노아와 언약을 맺으실 때, 9장 1~2절과 창세기 1장 28절의 통치 명령dominion mandate사이에 명확한 연관성이 드러난다.


노아 언약은 창조에 그 뿌리가 있으며, 창세기 1장 1절을 시작으로하고있기에, 하나님이 노아와 세우신 언약은 하나님이 아담과 세우신 언약에 그 뿌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호세아 6장 7절


“그들은 사람들(혹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호 6:7)


‘커아담( כאדם)’이라는 구절을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대하여 의견이 일치하지 않지만, 칼빈이나 워필드의 경우에는 ‘사람들처럼’보다는 ‘아담처럼’에 무게를 실어주고있다.


만약 올바른 해석이 ‘아담처럼’이라면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언약이 존재했음에 대한 명확하고 확실한 증거가 된다.


이 구절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하나님의 아들인 아담과 하나님의 아들인 이스라엘의 비교로 해석하는 것이다.



로마서 5장 12-19절


이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명확한 평행관계를 세운다.


바울이 아딤을 ‘튀포스’ (τύπος), 즉 ‘오실자의 모형’이라고 여길 때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에 핵심적 연관성이 드러난다.


아담으로부터 언약적 배경을 제거해버리는 것은 성경의 근본 흐름을 거스르는 일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렸다”고

아담을 언약적 문맥에서 이야기한다.


그리스도와 아담 사이의 평행 관계, ‘튀포스’라는 단어의 전문적 사용, 그리스도가 둘째 아담으로서 구속을 가져다주는 언약적 배경, 이 모든 것에 기초해 볼 때 아담 또한 언약적 상황 속에 있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아담이 언약 안에서 해야 할 일



통치명령


인간의 언약적 책임에 대하여 가장 많이 진술하는 구절은 통치 명령이라고 불리우는 창세기 1장 28절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이다.


이를 통하여 아담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임무는 “1) 출산을 통해 이 세상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채워라 2) 땅을 정복하라 3) 창조 세계를 다스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명령은 일정한 시험 기간이 지나면 끝나는 것이었다.


시험 기간에 아담에게 주어진 임무는 자신의 일을 끝마칠 때까지 확장 사역을 감당하며 인생을 보내는 것이었다.



잘못 이해된 통치 명령


학술것인 글이나 대중의 글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담의 사역을 노동과 연계시키는 것이다.


존 머리는 창세기 2장 15절에 대하여 “....아담의 노동이 저주가 아니라 복임을 확실히 인식해야한다…..아담의 노동이 에덴동산을 가꾸고 지키는 일이었다는 사실이...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인간의 위엄에 상당히 걸맞는 것이었다는 사실이다”고 말한다.


R. C. Sproul은 “우리는 지구를 가꾸고, 경작하고, 지키도록 만들어졌다...하나님이 생산적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생상적이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타락 전에 이런 일들을 우리에게 맡기셨다….”고 말한다.


머리와 스프로울과 같은 주석자들은 노동을 창조의 법령으로보고, 이로부터 노동 일반이 인간이 맡은 의무의 한 부분임을 도출한다.


하지만 아담이 일만을 했다거나, 동산을 지키기만 했다거나, 아담의 일차적 직업이 농부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116)



성전의 문맥 안에 있는 통치 명령


아담의 언약적인 일의 요소들


첫째, 아담의 주요 직업은 농부가 아니라 제사장이다.


고든 웬함은 “아담을 원형적인 레위인archetypal Levite으로 여겨야한다"고 말한다.


둘째, 에덴동산은 농장이 아니라 최초의 성전이었고, 여기서 아담은 자신의 제사장적 임무를 수행해야했다.


셋째,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담은, 창조 세계 전체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다스리는 임무를 받았으며, 하나님의 권위 아래서 (왕적인 임무를 가지고) 창조 세계를 다스려야했다.


넷째, 동산과 바깥 세상 사이에는 눈에 띄는 경계가 있었으며, 동산 안의 지역에는 질서가 있었다.


홍수 전에도 땅에는 비가 내렸으며, 동산 안은 인간이 땅을 경작하였기 때문에 질서가 유지되고 있던 반면 동산 밖은 경작이 없었기에 무질서했다.


아담은 동산 안의 질서를 세상 전체에 확장해야만 했다.


하나님은 아담과의 언약을 통해 아담에게 다음의 임무(아담의 언약적 의무)를 주셨다.


1) 출산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이 많아지게하며,

2) 지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가득 차게 하고, 동산- 성전을 확장시켜서 땅 끝까지 가득 차게 하여 땅을 정복하고,

3)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들이 창조 세계 전체를 다스리게 함으로써 아담의 통치 대행권을 세상 전체에 확장시키는 의무이다.



아담의 언약적 노동의 목적: 안식일의 쉼


아담에게 주어진 시험의 기간은 영원한 것이 아니었으며, 아담이 언약적 의무를 이;행한 후에는 아마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을 것이다.


종말론은 죄가 있기 전에도 있었으며, 생명나무가 상징적인 모습으로 영광스러운 운명을 나타내고있었다.


행위 언약이란 것은 안식일의 원칙이 구체화된 것이다.



행위 언약에 대한 비판에 답함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세기 2장 16~17절에 대한 설명에서 시작된 행위 언약 교리는 종교개혁 이후에 와서 개혁주의 신학의 표준이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행위 언약 교리가 표기되었지만, 행위 언약에 대한 비판은 계속되었으며 대표적인 사람으로 존 머리를 들 수 있다.


존 머리는 행위 언약에 대한 반대에는 다음의 세 가지 주장이 담겨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논해보고자한다.


1)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의 시험 기간중에 은혜의 요소가 존재했으므로 행위라는 용어는 적합한 표현이 아니다.


2) 성경은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의 상태를 언약이라는 용어 아래에서 정의하지 않는다.


3) 성경은 언약이라는 단어를 하나님이 인간을 구속적으로 다루실 때만 사용한다.



행위라는 용어는 적합하지 못한 표현이라는 주장


머리는 언약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아를 어떻게 다루셨는지를 이해하여야한다면서 노아 언약을 설명한다.


존 머리는 노아 언약을 하나님 단독적monergistic인 일방적인 방식으로 이해함으로서, 언약에 대한 전형적인 분석과 정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머리는 언약을 맹약compact이나 계약contract, 또는 조약agreemant이라는 개념을 시작으로 접근하면 안된다고 말한다.


머리는 언약이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의 주권적인 적용이며, 본질적으로 일방적인 집행이라고 정의했다.


머리는 하나님이 아담을 다루시는 방식이 공의가 아닌 은혜에 기초한 것이라고 믿었다.


아담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했다는 믿음이 에덴동산 안의 인간의 상태에 대한 머리의 생각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머리의 이러한 주장은 몇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다.


1) 머리는 에덴동산 안의 아담의 위치가 공의가 아닌 은혜 위에 세워졌다고 주장한다.


이는 머리가 은혜와 행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고려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머리는 아담이 동산 안에 계속 머물 수 있는지의 여부가 아담의 순종에 좌우된다고 주장함으로서, 아담이 에덴동산에 머물 수 있었던 기반이 은혜와 공로의 혼합이었다는 말이 된다.


(필자 주: 존 머리의 이러한 주장은 새관점이 말하는 이스라엘의 가나안에서의 상태와 유사성을 가지고있다. 이는 존 머리의 영향을 받은 노먼 쉐퍼드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페더럴 비전이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유사성을 갖는 이유가 되기도하다)


즉 아담은 순종에 대한 보상은 공의justice가 아닌 은혜를 기초로 받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필자 주: 만약에 아담이 완전한 순종을 하였을 때 주어졌을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은 순종에 대한 공로를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전적인 은혜를 근거로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 11:6)고 말하면서, 바울은 은혜와 행위를 대조시킨다.


머리의 주장의 또 하나의 결점은, 하나님이 아담의 순종을 은혜가 아닌 공의에 의해 판단하셨을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머리가 행위 언약을 비판하면서 다루지 않는 점 하나는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평행 관계다.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첫째 아담이 공의justice가 아닌 은혜에 기초하여 심판을 받는 것이라면, 둘째 아담의 공로 역시 공의justice가 아닌 은혜에 기초한 것이 된다.


이에 대하여 클라인은 “만약 공로의 행위가 둘째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으로 인정될 수 없다면, 그의 백성이 의롭게 여겨지고 인정받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전가해 줄 공로 또한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리 아이언즈Lee Irons는 “두 아담 사이의 평행 구조는 우리로하여금 이 두 경우 모두의 근거를 하나님의 공의로 보게한다. 왜냐하면 만약 첫째 아담이 공로적 순종을 통해 영생을 얻을 수 없었다며, 마지막 아담도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언약이라는 표현은 아담과 관련하여 등장하지 않는다는 주장


머리는 언약이라는 단어가 동산 안의 아담의 상태와 관련되어 등장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어떤 구절 안에서 단어의 형식적인 부재가 그 구절 안에서 그 단어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 예로서, ‘은혜 언약’ ‘결혼’등을 들을 수 있다.


또한 머리는 호세아 6장 7절의; 행위 언약적 해석을 반대하는 근거가 될만한 대체 해석을 제시하지 않는다.


언약은 언제나 구속적이라는 주장


머리는 “성경이 언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언제나 하나님이 인간에게 구속적, 혹은 구속의 계획에 밀접하게 연관된 준비를 해 나가시며 인간을 다루실 때다"라고 주장한다.


머리는 구속적인 언약에 주목하여 이것만이 유일한 언약이라고 가정한다.


행위 언약을 부정하려는 머리의 시도는 비성경적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4장 둘째 아담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


서론


아담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창조 세계를 다스리라고 하나님이 주신 임무를 팽개쳐 버렸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향해 가졌던 목적이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장 15절(필자 주:원시복음)에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자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이를 위해 구속 역사를 통하여 첫째 아담이 팽개쳐 버린 일을 다시 맡아 하신 것이다.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가 출현하기가지 구속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이 자신과 둘째 아담의 인격과 사역을 모형화하도록 세우신 대표자들 사이에 일련의 언약을 세우셨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필자 주: 저자는 아담 이후의 언약들을 아담 언약과의 관계성, 혹은 연관성을 통하여 유형학적으로 해석하고있다. 이어지는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가운데 담겨있는 아담 언약의 속성들을 밝혀내고있다. 특히 모세 언약을 아담의 행위 언약과의 관계성에서 플어나가는 방식은 모세 언약을 은혜 언약으로 해석하는 이들의 반발을 불러오고있다.)



노아 언약


아담의 타락 이후에 주어지는 일련의 언약들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세우셨던 첫 언약의 통치 명령이 다시 반복해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신 언약의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형상을 땅 위에 퍼뜨리는 것

2) 성전을 땅끝까지 확장하는 것

3) 1)과 2)의 요소를 통해 땅 위를 통치하는 것

4) 돕는 배필의 보조로 이 임무를 완성하는 것


노아 언약은 세대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이 선례가 없는 처음 언약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아담 언약과 평행관계를 이루면서 통치 명령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주셨던 것과 똑같은 임무를 노아에게 주셨다.


노아 언약에 나타나는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요소는 첫 번째 창조와 대홍수 이후의 새로운 창조 사이의 평행관계를 보여준다.


1) 하나님의 형상을 땅 위에 퍼뜨린다.(창 9:7)

2)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땅 위에 퍼뜨린다.

3) 1)과 2)의 요소를 통해 땅을 정복한다.

4) 노아는 이 임무를 자신의 돕는 배필과 연합하여 생긴 열매인, 후손을 통해 성취한다.


이에 대한 워렌 게이지의 설명이다.


“.... 창세기 8장의 기록은 본래의 창조에 대한 창세기 1장의 설명과 평행을 이룬다…. 창세기 8장 1절에서 하나님은 창조 전에 세상을 덮고 있던 물과 같이(창 1:2) 땅을 덮고 있었던(창 7:18-19) 홍수 위에 바람이 불게 하신다….채소밭이 생기는 장면(1:12)은 비둘기가… 감람나무 잎을 물어다 주는 장면(8:11)과 유사하다…. 하나님이 처음 세상의 창조를 마치신 후 안식하신 일은 새로운 창조가 긑난 후에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으시며 쉬신 일과 일치한다.”


첫 창조와 대홍수 이후의 창조 사이의 평행 구조는 노아를 일종의 새 아담처럼 여기시며 노아와 새로 시작 하셨고, 첫 아담에게 주셨던 언약적 임무를 노아에게도 주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홍수 이후의 노아의 타락은 아담을 연상시킨다.


1) 노아도 에덴동산과 비슷한 환경인 포도밭에서 타락했다(9:20).

2) 아담이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것과 같이 노아도 포도나무의 열매에서 나온 포도주를 마셨다(9:20).

3) 아담이 올곧은 자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이었던 것과 같이, 노아 역시 의로운 자였고 그의 세대 가운데 흠없는 자였다(6:9).

4)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동산에서 바람이 불 때 아담과 함께 동산을 거니셨던 장면을 연상시킨다(3:8, 6:9).

5) 노아는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자신의 하체를 드러냈다. 이 때 아담의 죄를 하나님이 덮으셨던 것처럼(3:21) 노아의 아들들이 와서 그의 벌거벗은 몸을 가렸다(9:23).


노아는 행위 언약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기에 또 다른 아담을 바라보아야했다.



아브라함 언약


아브라함 언약에서도 아담 언약과의 연속성을 살펴 볼 수 있다.


1)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크게 번성시키겠다고 약속하셨다(창17.2).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꾸신다.


이런 하나님의 복은 기본적으로 왕에게 내리는 복으로서 창조 세계의 대리인이었던 아담의 역할과 비슷하다.


2) 아브라함 언약의 목적은 이 언약의 복을 땅끝까지 퍼뜨리는 것이다(창 12:3)


아브라함은 이러한 언약을 실행하기 위해서 돕는 배필인 사라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는 아담의 통치 명령과 평행을 이룬다.


3) 아브라함에게도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주셨다.


4) 아담이 원형적인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했던 것과 같이 아브라함도 성전같은 것을 건축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도착하였을 때 아브라함은 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창 12:7)


게할더스 보스는 “... 가나안은 이스라엘의 종말론적인 상태를 예시해준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즉 전형적인 낙원이었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의 제단은 하나님이 동산- 성전에 있던 아담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던 사건을 상기시켜준다.


제단은 ‘희생하다'라는 동사로서 작은 성전 부지라고 할 수 있다.


쌓은 제단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1. 아브라함이 이 제단들을 산 위에 세웠다.


야곱이 제단을 쌓은 벧엘은 산 위에 있는 “하늘의 문"이다.


2. 아브라함은 보통 나무숲 한 가운데 제단을 쌓았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산 위의 나무숲 속에다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동산- 성전인 에덴을 생각나게해준다.



모세 언약


모세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미 언급한 동산- 성전과 광야의 성막 사이에 평행 요소들이 다음과 같이 존재한다.


1) 칠 일 동안의 창조와 성막 건축에 대한 하나님의 일곱 번의 말씀

2) 장식용 나무들과 귀금속과 금속의 존재

3) 생명나무의 복제본인 일곱 촛대

4) 그룹의 수가 놓인 지성소의 휘장

5) 하나님이 동산 안을 거니심과 성막 안에서 거니심

6) 레위인의 원형인 아담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레위인이 하나님을 섬기며 산 위, 곧 시내산 위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등…

7) 아담의 행위 언약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모세 언약 사이에 연속성의 존재.

8) 아담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것(눅 3:38)과 같이 이스라엘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다(출 4:22).

9) 하나님이 아담을 생명의 원천인 성전의 위치인 동산에 두셨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도 젓과 꿀이 흐르는 땅에 두셨다. 빌Beale이 말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 땅의 풍요는 에덴동산과의 일치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10) 이스라엘이 제사장의 나라가 되어야했던 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임재를 세상 전역에 확장하는 일에 헌신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온 땅에 퍼뜨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로 가득하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11) 하나님아 아담에게 내려진 통치 명령을 노아에게 다시 내려졌듯이 이스라엘도 일종의 통치 명령을 받았다.


이스라엘이 가진 지위는 창세기가 그리는 그림에서 보았을 때 바로 아담이 가졌던 지위이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행위 언약을 주셨듯이 이스라엘에서도 행위 언약이 재현republication되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창조 사이에도 다음과 같이 평행관계가 존재했다.


1) 첫 창조에서 성령은 새처럼 원시적인 혼돈의 수면 위를 운행하셨다.


새를 연상시키는 똑같은 이미지가 하나님이 광야에서 떠도는 이스라엘을 지휘하는 모습과 연결되어 등장한다.


2) 성령이 창조를 지휘하셨던것과 같이 성막의 건축도 지휘하셨다.


성막 건축은 단지 하나님의 우주적 성전인 창조 세계의 재건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우주적 원형 성전인 동산의 재건이기도했다.


3) 성령의 창조론적 관련성은 원시의 물과 이스라엘 사이에도 관련성이 있다.


태초에 혼돈의 깊은 물 속에서 처음으로 마른 땅이 나왔다.


이스라엘은 한 나라로서 물, 곧 홍해에서부터 태어나거나 창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게이지Gage는 “....창세기부터 여호수아에 나온 출애굽과 가나안 입성의 역사는 창조의 구속적인 재현이라는 형태를...홍해에서 이스라엘을 구속적으로 일으키는 사건은 하나님의 첫 창조 사건과 같은 서술 방식으로 이야기된다….출애굽 사건의 정점인 에덴동산 같은 가나안 땅으로의 진입은 창조의 정점인 안식일과 상관관계가 있다(히 4:3-10)”고 말한다.


4) 창조론과 모세 언약 사이에는 안식일에 관련성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사역을 마치신 후에 안식하셨다.


아담은 시험 기간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에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다.


보스는 “소위 ‘행위 언약'이라는 것은 안식일 원칙의 구현에 지나지 않는다" “안식일은 인류의 삶이 세워진 기초가 되는 종말론적 원칙이 표현된 것이다"고 말한다.


이러한 안식일의 원칙으로서의 창조론적 유형이 모세 언약에까지 이어진다.


안식일이 제정된 것은 원형 성전인 에덴동산의 창조와 건설 후의 하나님의 안식과 동산을 계승한 형태인 성막의 건설 이후에 하신 하나님의 안식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윗 언약


다윗 언약에서는 성전을 건축하는 방식에서 창조론과 연결되는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다윗 언약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계승자 중 하나를 이스라엘의 보좌에 앉히셔서, 그 보좌로부터 그가 통치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집을 건축"하고 하나님은 그에게 아버지가되고 그는 하나남의 아들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삼하 7:13-14)


다윗 언약에서 첫 창조로부터 되풀이 되는 주제는 왕의 다스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인 성전의 건축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창조 세계를 다스렸으며, 동산- 성전을 땅끝까지 확장해야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었다.


빌Beale에 의하면,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성전 건축 준비를 했을 때 다윗이 족장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이 제단을 쌓았음에 주목한다.


다윗의 성전 건축에서 볼 수 있는 창조론적 요소로는, 산 위에서의 제사장의 직무, 하나님의 나타나심, 하나님의 처소, 성전등이다.


시편 110편에서는 다윗이 왕과 제사장의 역할을 했을 뿐만이 아니라 예언자로서의 활동도 했음을 말해준다.


이와같이 구속사 내내 창조론의 유형들이 반복된다.


시작에 대한 교리는 다른 교리들의 내용을 결정하기에 중요하다.



신학적인 기반: 은혜 언약


1) 아담이 임무를 실패하자마자 하나님은 승리를 약속하셨다.


아담이 자기 아내에게 지어준 이름이 ‘여자’에서 ‘생명을 주는 자'라는 뜻의 ‘하와’로 바꾸었다.


아담이 자기 아내에게 ‘하와'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사실은 곧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신들을 죄와 사망과 뱀으로부터 구원해 줄 약속된 여자의 후손을 믿었다는 것이다.


2) 노아 언약에서 하나님은 지구를 다시는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언약의 표지로 무지개를 사용하셨다.


무지개는 일종의 창조 세계에 대한 심판 집행의 보류를 나타낸다.


노아에게 주신 통치 명령의 집행은 은혜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


행위 언약의 목적은 더 이상 아담이나 사람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 의도하신 결과를 이뤄 내실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역사하시는 분이 궁극적으로는 바로 자심이심을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숙지 시켜 주셨다.


3) 아브라함과 족장들은 피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지만, 동산- 성전에서 아담은 아마도 곡식제나 감사제를 드렸을 것이고, 이는 죄를 위한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풍성한 복을 감사하며 드리는 제사였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언약에서의 핵심은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인 복음이다.


이들 언약은 구원의 순서에 있어, 타락 이후의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또한 구원 역사의 단계에서 보면 노아, 아브라함, 이스라엘은 앞으로 올 둘째 아담의 그림자요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 성경은 그림자와 모형을 통해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를 예시한다.


노아, 아브라함, 이스라엘은 궁극적으로 미래를 가리키는 그림자이다.



5장 둘째 아담 그리스도의 사역


서론


첫째 아담의 사역은 근본적으로 선지자, 제사장, 왕이었다.


아담의 임무는 배필의 도움을 받아 성전을 땅 끝까지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언약들은 둘째 아담의 인격과 사역을 가리킨다.


이번 장에서는 1) 두 아담 사이의 공통점 2)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창조론과 기독론 3) 어떻게 교회가 둘 째 아담의 돕는 배필이 되었는지 살펴 볼 것이다.



두 아담 사이의 공통점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 사이의 중요한 공통점으로는 바로 형상, 아들됨, 삼중 직분이다.



하나님의 형상


창세기는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고 말한다.


둘째 아담으로 오신 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으신 것이 아니라 그 분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었다.


이것은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첫 번째로 중요한 평행 구조다.



하나님의 아들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린다(눅 3:38).


“아담은 백삼십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창 5:3)


히브리서에서는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 1:2~3)


여기서 형상을 닮는다는 개념과 아들 됨의 개념이 서로 밀접하게 얽혀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중 직분


아담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땅을 통치하였던 자로서 첫 번째 왕이었다.


“경작하고 지키게 하시고"9창 2:15)라는 구절에서 사용된 두 동사는 동산-성전에서 맡았던 임무로서 아담이 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동산-성전을 땅 끝까지 퍼뜨리기 위해서 표면적으로는 설교를 보충적으로 동원했을 거이기에 아담의 임무와 사역 가운데에는 선지자적인 면도 있었다.


아담은 결국 그리스도가 가지신 세 가지 직분, 즉 선지자, 제사장, 왕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다.


벌코프는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가 삼중 직분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이 세 가지 임무와 사역이 본래 인간에게 의도되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벌코프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는 선지자로서 인간과 함께 하고 있는 하나님을 대표하고, 제사장으로서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있는 인간을 대표하며, 왕으로서는 통치권을 행사하며 또한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통치권을 회복해주신다.”



그리스도의 삶  



누가복음 4장 1~14절: 그리스도가 받으신 시험


창조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첫째 아담이 자신에게 주어졌던 시험에 실패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에 있어서 복음서에 기록된 사건들 중 가장 첫 번째 사건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당하신 사건이다.


누가복음에서는 그리스도의 계보가 그리스도에게서부터 하나님의 아들인 아담으로 거슬러 올라가도록 기록되었다.


예수님은 둘째, 혹은 ‘종말론적’ 아담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공생애가 시작되는 처음에 첫째 아담이 시험받았던 것과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다.


그리스도는 아담과 달리 뱀의 유혹을 물리치셨다.


아담에게는 풍부한 식량이 있었지만 그리스도는 사십일 동안 금식하셨다.


아담은 낙원인 동산-성전에 머물러있었지만그리스도는 광활한 광야에서 자신의 시험기간을 보내셨다.


그리스도는 아담과 갈리 하나님의 뜻에 완벽히 순종하셨다.


그리스도의 시험 기간과 관련하여 더 많은 창조론과의 관련성을 찾아볼 수 있다.


창조의 셋째 날 태초의 수면으로부터 창조 세계가 나타났다.


홍수 이후의 창조 세계도 물에서부터 나타난다.


하나님의 아들인 이스라엘도 홍해로부터 태어났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와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가 물에서부터 나왔을 뿐 아니라 성령, 또는 성령을 상징하는 것이 함께 존재한다.


성령은 새처럼 수면 위를 운행하셨고, 빠지고 있는 홍수의 물 위에는 비둘기가 날아 다녔으며, 구름 기둥은 새처럼 날며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통과하도록 인도해 주셨다.


아담은 성령의 감독으로 물에서부터 나오게 되었으며, 이 주제는 노아와 이스라엘에게도 되풀이 되었으며, 둘째 아담과 새하늘과 새 땅을 가리키는 모형이 되었다.


둘째 아담의 사역 아래에서 새로운 창조물은 세례의 물로부터 나오게 된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벧전 3:20)


대홍수의 물은 궁창 위의 물과 관련이 있다.


이는 홍수를 통해 창조 세계를 창조 전의 원상태, 즉 혼돈의 상태로 되돌리셨다는 말이 된다.


홍수는 자연적이면서도 초자연적 사건이었다.


홍수의 물은 원형인 세례의 물을 가리키는 모형이었다.


베드로는 세례를 홍수, 즉 새 창조의 물과 연결시킨다.



빌립보서 2장 5~11절: 둘째 아담에게 부르는 찬송


바울은 빌립보서 6절 앞부분에서 그리스도가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의 근본 본체란 ‘그 밑에 있는 근본이 되는 존재를 진정하고 완전하게 표현하는 형태’다.


바울이 쓴 본체라는 단어는 창세기 1장 26~27절의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과 평행을 이룬다.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 이는 첫째 아담이 받았던 “너희가 하나님 같이 되리라”(창 3:5)는 유혹을 상기시킨다.


둘째 아담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과 동등 됨을 추구하는 시도를 하지 않는 반면 첫째 아담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려고 했다는 사실에서 아담과 그리스도 간에 평행 관계가 드러난다.


첫째 아담이 실패한 일을 둘째 아담은 성공했다.



그리스도의 죽음



로마서 5장 12~19절: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의 사역의 전가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의 사역은 그들 각자가 대표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데, 죄와 의의 전가를 통해 적용이 이루어진다.


아담은 인류의 언약적 대표였다.


한 사람의 죄의 결과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


아담의 불순종 때문에 ‘죄인 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순종 덕분에 ‘의인이 되는 것’은 평행을 이룬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의를 자신의 백성에게 전가하시고, 선택받은 자들의 죄는 그리스도에게 전가되는 것이다(고후 5:21).



구약 성경의 배경: 아브라함 언약


전가 개념은 아브라함 언약에서, 그리고 신약 성경에 나온 아브라함 언약에 대한 해석에서도 나타난다.


창세기 15장 18절에서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에 대하여 로벗 팔머슨은 “....이러한 행동은 자기 스스로를 저주하는 맹세를 성립시켰다….”고 말한다.


모세 언약을 선포할 때 모세가 백성들에게 피를 뿌린 것도 이와 비슷한 읨

의 행동이었다(출 24:8)


로벗 팔머슨은 “이렇게 피를 뿌리는 일이 백성들을 깨끗케 하는 것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백성들을 목숨을 걸고 언약을 지키는 자로 봉헌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신약 성경과 창세기 15장 1절 이후의 관계


히브리서 9장 15~20절은 둘째 아담이 언약 대표임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약속을 하시몀서 자기 자신을 저주하신 것처럼 히브리서의 저자 역시 그리스도께서 모세의 언약 가운데 있는 자들을 위해 자기 자신이 언약의 저주를 담당하셨다고 기록한다.


언약의 계보, 즉 노아, 아브라함, 모세 언약은 원시 복음(창 3:15)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


고린도전서 15장은 그 뿌리가 창조론, 즉 창세기 1~3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20~28절


바울은 첫째 아담이 가져온 죽음과 둘째 아담이 가져온 부활을 평행적으로 연결한다.


아담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릉 향한 목적은 바뀌지 않았다.


첫째 아담과 달리 둘째 아담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세상을 다시리신다.


고린도전서 15장 35~49절


바울은 49절에서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 함으로서 창세기 1~2장의 창조론과 연계시킨다.


창조 사역에 관여하셨던 성령은 새 아담과 협력 관계 안에서 새로운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첫 번째 창조 세계는 아담에게 묶여있고 새 하늘과 새 땅과 이것들의 탄생은 둘째 아담의 부활에 묶여있다.



둘째 아담의 돕는 배필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여자가 창조된 사건의 목적은 그리스도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24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 말하노라”에서 결혼에 대해 설명하며, 비밀은 단지 결혼에 대한 것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하여 드러내는 것이며, 창조론을 기독론뿐만이 아니라 종말론에까지 연결시킨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의 권위를 남편의 권위에 비유하고 교회의 순종을 아내의 순종에 비유한다(엡 5:22~27)


바울이 아담을 오실자의 모형이라고 말했던 것과 같이 창세기 2장 24절은 하와가 교회의 모형이라는 논리가 전제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통치 명령


창세기 1장 28절에서 아담에서 아담에게 주어진 임무는 1) 하나님의 형상을 땅끝까지 퍼뜨리는 것, 2) 성전을 땅끝까지 확장하는 것, 3) 1과 2를 통해 주권을 행사하는 것, 4) 이 임무를 돕는 배필과 함께 수행해 내는 것이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죄 때문에 이 통치 명령을 수행해 낼 수 없었다.


둘째 아담은 첫째 아담이 실패한 이 통치 명령을 완수했다.



잘못 이해된 통치 명령


많은 대중적인 책들이 아담의 타락과 그리스도의 사역을 함께 다루지 않는다.


더글라스 윌슨은 타락이 본래의 통치 명령에 아무런 영향이 미치지 않았다고 본다.


존 머리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고 정복하며, 창조 세계를 다스리고, 일하며, 결혼하고, 안식일을 지키라는 창조의 법령들은 아직 폐지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머리는 통치 명령과 그리스도의 사역을 연결시키지 못하고있다.


머리는 통치 명령이 중지되었다기보다는 계속해서 강조되어야하며, 이 의무를 시행하여야 하는 필요성과 긴박감을 강화시켜야한다고 말한다.


통치 명령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타락과 무관하게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젠트리는 통치 명령을 문화 명령이라 칭하며 이를 ‘후천년주의의 낙관적 기대’와 연관시키지만, 그 가운데 그리스도는 제외시킨다.


헨리 모리스는 통치 명령이 아직도 유효한 명령이라고 말하지만, 이를 수행하는 주체는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민족들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에서의 공통점은 1) 통치 명령을 말할 때 죄가 세상에 들어오지 않은 것처럼 말하며, 2) 둘째 아담의 사역과 계시에 대한 충분한 깨달음과 활용 가운데서 통치 명령을 살펴보지 않는다.



통치 명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


통치 명령은 아직도 유효하지만 이는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사역과 계시에 비추어 해석되어야하며, 통치 명령은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가 완수하신다.


그리스도는 통치 명령의 사명을 담당하셨고, 자신의 돕는 배필, 신부, 둘째 하와인 교회의 도움으로 지금도 그 명령을 완수하고 계신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통치 명령에서 “천하 만민 (판타 타 에스네πάντα τὰ ἔθνη)(창 23:18)”와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모든 민족 (판타 타 에스네πάντα τὰ ἔθνη)(마 28:19)”에서 ‘판타 타 에스네’가 반복되고있다.


이로서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가 그의 돕는 배필이자 신부인 교회의 도움으로 통치 명령을 완수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통치 명령은 단순히 번식을 통해, 또는 대가족을 이룸으로써 완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타락 후 아담과 하와는 죄 때문에 더 이상 이 명령을 수행 할 수 없게 되었다.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돕는 배필인 교회와 함께 후손을 만들어 가심으로 통치 명령을 맡아 수행하시고 자신의 형상을 지닌 자들을 만들어 가신다.


통치 명령은 생육과 번식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전파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복음의 전파로 자녀들이 태어나는 것이다.


이들은 남편과 아내에게서 태어난 자들이 아니라 둘째 아담과 그의 돕는 배필이자 둘째 하와인 교회에게서 태어난 자들이다.



6장 안식일



서론


창조의 일곱째 날이 지닌 본질을 첫째 아담, 이스라엘, 모형론적인 하나님의 아들과 둘째 아담과 관련하여 이해하여야한다.


종말론의 교리는 창조론적인 안식일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


마지막 장에서는 안식일이 아담과 이스라엘과 그리스도와 맺는 관계를 살펴본다.


종말론은 구원론보다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선행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종말론이 다른 주요 교리들과 맺는 관계를 인식하는 우리의 방식이 바뀔 것이다.



아담과 안식일


창조가 끝난 주의 주말, 엿새 동안의 일이 끝난 후 하나님은 일곱째 날에 쉬셨고 일곱째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는데, 아담도 자신의 일, 곧 하나님의 형상을 증가시키고 땅끝까지


성전을 확대시키는 행위 언약의 노동을 완수하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담이 해야 할 의무였다.


이에 대하여 게할더스 보스는 행위 언약이란 “결국 안식일 원칙의 구현”이라고 말한다.


안식일의 원칙은 종말론적 목적을 가진 노동 행위의 종착점이다.


보스는 “행위 언약이 인류에게 절대적인 목적과 불변하는 미래를 가정하는 한, 우리는 종말론이 구원론을 선행한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종말론은 죄가 들어오고 구속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 따라서 구원이 아직 필요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다.


거룩한 시간인 안식일은 행위 언약에 대한 시간적인 종말론적 그림자의 역할을 하며, 창조의 목적을 기억하게 해주는 시간적 장치이다.


종말론이 창조론에 내재되어있는 까닭에 안식일의 원칙은 구속사 내내 지속된다.



이스라엘과 안식일


일곱째 날의 안식은 모세 언약에서 역사 속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안식일은 십계명의 제4계명으로 공표된다.


제4계명은 단지 창조를 기념하는 계명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이고 종말론적 성격을 가지고있다.


히브리서 4장 1절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해주는데, 여기서의 안식은 창조 주간의 일곱째 날의 하나님의 안식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바로 전에 그들은 창조 주간의 일곱째 날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약속의 땅 자체는 시편 95편이 말하는 안식이 아니었다.


안식은 약속의 땅에서의 시간적인 쉼을 의미하지 않았다.


안식이란 하나님이 창조 사역을 마치신 후 영원한 일곱째 날에 원형적 하늘나라를 성전 삼아 그 안에 거하시며 쉬는 것을 말한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일곱째 날 안식의 무대가 되는 하늘나라의 모형의 역할을 한다.


이스라엘은 믿음이 부족했기에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안식은 하나님이 종말론적 주님이심을 보여주기 위해 십계명 속에 포함되어있음을 말해준다.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종말론적 표지와 같은 역할을 한다.(출 31:17)


타락 이후의 안식일은 구원론적인 표지로서의 작용을 한다.


이스라엘이 최종적으로 일곱째날의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오직 둘째 아담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것은 매주 돌아오는 표지인 안식일에 의해 표현된다.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영원한 일곱째 날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었기에, 이스라엘은 행위 언약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언약 아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둘째 아담의 인성과 사역을 가리키는 모형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둘째 아담과 안식일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가 일곱째 날의 안식에 들어가셨다고 말한다(히 10:12~13)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쉬기 시작하였던 원형 성전 속에 들어가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역 가운데 종말론적으로 실현된 부분은 그리스도가 창조의 안식으로 들어간 것이다.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첫 번째 창조가 주일에 시작되었던 것과 같이 한 주의 첫째 날에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셨다.


새로운 창조는 시작되었지만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는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구약 성경의 유형은 먼저 일하고 그 다음에 쉬는 것이지만, 신약 성경의 유형은 먼저 쉬고 그 다음에 일하는 것이다.


세례는 새 창조 안에 들어가는 것, 또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시각적으로 상징하는 의식인 것이다.


안식일에 일을 한다면, 그것이 곧 이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안식에 참여할 수 있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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