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w Perspective on Paul: Calvin and N.T. Wright
by J.V. Fesko 에서 인용)


  by 김원호(dent4834@hanmail.net)

톰 라이트를 비롯하여 다른 복음을 전하는 새관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은 성경에 대하여 개혁주의와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하고 있지만 이들이 사용하는 신학적 용어에 있어서는 정통 개혁주의와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있으면서도 정통 개혁주의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라이트는 성경보다는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방법을 통하여 성경을 해석하고있으며 이러한 방법을 통한 성경해석은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결론을 이끌어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기독교를 유대교에 귀착시키며 기독교의 근본을 흔들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대속사역과 그의 의의 전가 교리를 부정하면서도 개혁주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서 같은 용어지만 전혀 다른 내용을 전함으로 독자들의 이해에 심각한 혼란을 초래하고있다.

이에 대하여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WSC)의 조직신학 교수인 John Fesko는 자신의 글 “The New Perspective on Paul: Calvin and N.T. Wright”에서 칭의의 예를 들면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있다.

칭의에 대한 새관점의 주장

1) 새관점론자들은 바울이 자신의 서신서를 통하여 말하고자 했던 것은 율법주의에 대립된 믿음을 통한 칭의 즉 유대인의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미 언약 안에서 의로운 상태에 있는 유대인의 교회론이나 공동체 즉 1세기의 교회에 있어서 유대인이 이방인과 어떻게 같이 지낼 수 있는 지에 관하여 논의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The new perspective argues that Paul largely deals with matters of ecclesiology and sociology, how Jews and Gentiles can co-exist in the first-century church. p13/22)


2) 새관점에서는 칭의를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극치의 날에 자신의 의를 나타내시어 자기 백성들을 인정하시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Justification is a declaration that God, who is faithful to His covenant promises, which is a display of His righteousness, makes at the consummation of the age to vindicate His people. p13/22)




칭의 용어에 대한 칼빈( 개혁주의)의 해석

1) 개혁주의에서는 톰 라이트의 앞의 주장과는 달리 바울이 구원론에 관하여 다루고 있고 이는 교회론과 종말론에 긴밀하게 엮어져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The Reformation, on the other hand, argues that Paul largely deals with matters of soteriology, which are intermeshed with ecclesiology and eschatology. p14/22)

2)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칭의는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 의롭게 된 사람을 하나님께서 명확히 인정하시는 것이다.

(justification is when God declares a person as righteous based upon the imputed righteousness of Jesus Christ. p14/22)

톰 라이트의 몇가지 문제점들

톰 라이트는 개혁주의와 다른 주장을 하면서도 실질적으로 거의 모든 영역에서 개혁주의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용어인 칭의를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살펴 볼 수 있다.

1)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복음주의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erminster Theological Seminary: WTS philadelphia)의 역사신학 교수인 칼 투루만(Carl. R. Trueman)은 새관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소위 새관점 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칭의의 교리에 대한 재조명은 개혁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신조와 교리들로 굳건히 서있는 개신교를 거부하는 것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칭의에 대한 서구 전통 전체를 부정하며 어거스틴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it seems to me that the current revision of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as formulated by the advocates of the so-called New Perspective on Paul is nothing less than a fundamental repudiation not just of that Protestantism which seeks to stand within the creedal and doctrinal trajectories of the Reformation but also of virtually the entire Western tradition on justification from at least as far back as Augustine. Trueman, “Martin Luther,” p. 1.)

존 페스코(J. V. Fesko)는 새관점이 복음주의 교회에 대하여는 치명적이라고 말한다. 새관점이 치명적인 이유는 새관점이 복음주의 신학의 여러가지 유형 중의 한가지 형태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the new perspective is quite lethal to the church. What makes the new perspective lethal is that it is presented as a variant of evangelical theology.)
국내 출판사에서도 한 가지로 톰 라이트를 소개할 때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복음주의 신학자라는 서술을 붙인다. 사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더 이상 복음주의 안에 있다고 할 수 없고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대부분 수용하고 있는 서구의 패더럴 비전(Federal Vision)이라는 교단은 이미 이단(Federal Vision Heresy, Auburn Avenue Heresy)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있는 상태이다.

2) 톰 라이트는 어거스틴 이후의 서구 기독교의 역사적 전통 가운데 있는 개혁주의 해석을 전부 부정하고 있다.(Yet, the proponents of the new perspective reject the very evangelical understanding of justification that goes as far back as Augustine.p14/22)

새관점 주의자들은 칭의에 대한 역사적 해석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정경에 대한 역사적 복음주의적 이해를 거부하고있다.
(Not only do new perspective advocates reject the historic understanding of justification but they also reject the historic evangelical understanding of canon-Wright, Who Was Jesus?, p. 83~4).

3) 새관점이 교회에 가장 해를 끼치는 것은 (복음주의) 용어 사용에 있다.

새관점 옹호자들은 성경, 죄, 칭의, 공로, 믿음과 같은 복음주의 용어를 사용하고는 있지만 의미에 있어서는 (복음주의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What makes the new perspective most harmful to the church is its use of terminology. Advocates of the new perspective use terms such as Scripture, sin, justification, works, faith, and gospel, but have given them entirely different meanings. p14/22)

새관점이 아무런 해가 없고 마치 개혁주의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여겨지며 톰 라이트가 더 이상 개혁주의의 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새관점이 정통주의에서 사용하는 학술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It is this use of orthodox nomenclature that makes the new perspective seemingly harmless and has some within Reformed circles thinking that Wright is no foe of the Reformation.p15/22)

4) 톰 라이트가 말하는 개인적 칭의는 정통적인 의미를 가진 용어가 아니다.

톰 라이트는 공동체적 칭의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지만 가끔 강의에서는 개혁주의의 개인적 칭의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의 이 말은 항상 일관성이 있는데 이에 대하여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이 있다. 과연 그가 말하는 칭의가 의의 전가(Imputation)에 근거한 칭의냐 아니면 새관점에서 주장하는 종말에 확정될 칭의냐인 것이다.
만약 전자라면 톰 라이트는 일관성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만약에 후자라면 (메이첸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자유주의자들이 자신의 이단성을 가리기 위하여 정통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Similarly, Douglas Wilson writes that “while Wright’s emphasis on corporate justification is important and necessary, the way he stresses it is a cause for concern. But in a taped lecture of his, I heard him explicitly say that he was not denying the Protestant doctrine of individual justification. Given his overall approach, this is consistent.”[62] Yet, one must ask, Does Wright mean justification in the sense of imputed righteousness or as eschatological definition? If it is the former, then he is inconsistent; if it is the latter, then this is precisely the danger of which Machen speaks—orthodox nomenclature that veils liberalism.-p15/22)

실은 톰 라이트가 사용하는 칭의는 믿음과 더불어 확정되는 현재적 칭의가 아니라 극치의 날에 확정되는 종말론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훈련된 신학자나 신약학자들은 쉽게 이 용어의 변질을 파악하겠지만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It appears that it is the latter because Wilson calls Wright “an outstanding exegete,” who “does not shy away from showing how the text conflicts with ‘standard’ interpretations.”[63] The trained theologian or New Testament scholar will readily identify this shift in nomenclature, but the person in the pew who reads Grant’s review or Wilson ’s general approbation may not. (p15/22)

이러한 용어 사용에 있어서 톰 라이트가 사용하는 복음이나 죄, 칭의 믿음 등이 정통 개혁주의와 다른 뜻이 있다면 우리는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가 진짜 성경이 말하는 예수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Wright’s views on gospel, sin, justification, and faith stand behind his preaching, then we must wonder if Wright’s Jesus truly is “the biblical Christ.”(p15/22)

결론

John Fesko가 말하는 톰 라이트의 위험성은 복음주의자가 아닌 사람이 복음주의를 표방하며 복음주의 안에서 복음주의의 용어를 사용하며 복음주의 자처럼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사용하는 용어들의 문제는 하나님 나라 개념에서도 심각한 혼란을 초래하고있다.

기독교는 유대교와 분명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신약의 교회를 하나님 나라로서의 구약 이스라엘의 확장으로 보고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케제만의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한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기초로 하고있다.

신약의 교회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의, 즉 예수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통하여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신 의를 기초로하고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신다는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하고있기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의의 전가를 통한 칭의를 필요로하지 않는다.

개혁주의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의롭게된 신자들을 말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와 신약의 교회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있지만 내용에서는 전혀 다른 근거를 기반으로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는 많은 이들이 이러한 차이를 모름으로 인해서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보다는 따름의 대상으로 보는 과오를 범하고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지와 혼란은 새관점의 하나님 나라 개념을 기초로하고있는 미셔널 처치, 혹은 성육신적 교회의 선교적 교회론에 대한 분별력의 상실로 인한 혼란을 가져오기도한다.

이러한 혼란은 전혀 다른 복음인 새관점이 자연스럽게 개혁주의와 혼합되는 양상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기도한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 세계관 운동과 신칼빈주의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들은 역사적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통한 문화 변혁을 추진하고있다.

대표적 기독교 세계관 저서인 알버트 월터스 (Albert Wolters)의 "창조 타락 구속 (Creation Regained)"의 경우에는 미셔널 처치 운동을 하는 칼빈 신학교의 마이클 고힌과 함께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수용한 개정판이 출간되기도했다.

신칼빈주의자인 마이클 고힌은 개혁주의를 표방하면서도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수용함으로서 전형적 새관점주의자인 스캇 맥나이트와 함께 미셔널 처치 운동에 동력을 부여하고있다.

최근의 미셔널 처치와 마참가지인 성육신적 교회는 선교적 교회론을 그대로 수용하며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서의 교회 변혁을 추구하고 있다.

최근의 이러한 많은 움직임이 동력을 얻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운동들이 같은 개혁주의 용어를 사용하지만 대다수의 개혁주의 진영에 속하여 있는 이들이 이것이 전혀 다른 복음인지에 대한 분별력이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개혁주의 진영에 속하여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다른 복음에 대한 분별이 어느 때 보다도 중요하다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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