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은'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6.05.10 :: "칭의, 균형있게 이해하기"(박재은, 부흥과 개혁사)
추천도서 2016. 5. 10. 17:54

“칭의, 균형있게 이해하기(박재은, 부흥과 개혁사)”


  by 김원호(dent4834@hanmail.net)



개혁주의에서 보는 성경의 전체적 구도는 “언약적 구속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Salvation)” “구속(Redemption)”을 위한 성경 이야기의 핵심은 “어떻게 죄인이 의인이 될 수 있는가”이다.


“칭의”라는 단어는 구원이라는 그릇에 담겨있는 죄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일 것이다.


하지만 “칭의"라는 단어는 많은 신앙인들을 잘못 인도하고 있다는 오해를 받게 되면서 기독교계에서 끊임없이 퇴출의 위협을 받고 있다.


더군다나 칭의를 담고 있는 구원이라는 주제까지도 기독교를 협소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피하고 싶은 주제로 취급 받는 상황까지 되었다.


칭의와 구원에 관한 주제는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신론 중심의 기독교를 인간 중심의 기독교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원망까지 받고 있다.


톰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새관점주의자인 스캇 맥나이트는 복음 자체를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완성 시키는 예수의 이야기Story of Jesus as the fulfillment of Israel’s Story”로 규정함으로서 그동안 개혁주의가 견지해왔던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원 협약에 근거한 언약적 구속사”로부터의 일탈을 시도한다.


복음에 대한 정의가 바뀌게 되면 예수의 역할도 달라질 수밖에 없으며 우리에게 전가 될 예수의 완전한 순종의 의도 의미가 없어져 버리며 칭의의 근거가 되는 전가교리도 상실될 수밖에 없다.


최근 한동안 출판계를 달구었던 톰 라이트와 존 퍼이퍼의 “칭의 논쟁”은 개혁주의와 새관점이 서로 공존 할 수 없는 서로를 부정하는 논쟁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존 파이퍼는 인간이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선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다고 말하며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의 의를 전가 받아야만 한다고 말하는데 반하여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행위로 인하여 완성되어야 한다며

인간의 공로를 주장한다.


이는 단지 톰 라이트와 존 파이퍼만의 논쟁이 아니라 개혁주의 영역들과 새관점주의 영역들 전반에 걸쳐서 보편화되고있다.


비록 우리나라에는 영향력이 미미하지만 서구 기독교는 “페더럴 비전(Federal Vision)”의 일탈로 인하여 홍역을 치르고 있는 상황이다.


새관점과 유사한 언약적 율법주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페더럴 비전은 카톨릭과 마찬가지로 성례를 칭의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칭의의 조건이 개인적인 믿음의 고백에서 공동체로의 참여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개혁주의의 칭의가 구원론에 속하여 있다면 새관점에서의 칭의는 교회론에 속하여있는 것이다.


새관점에서는 칭의의 근거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을 말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 받는 것을 근거로하는 개혁주의의 주장과 다른 것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the Faithfulness of God)”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약속을 신실하게 이행하심이 근거가 되어 하나님의 언약 백성만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수 있기에 칭의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외적인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인 역사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신약의 하나님 나라 백성은 산상수훈을 지킴으로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종적 칭의는 행함에 의하여 결정되기에 언약 백성에 참여한 것으로 최종적 구원이 보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페더럴 비전과 동일하게 카톨릭의 반펠라기우스 주의로 돌아간 것이다.


이와 같이 칭의에 관한 주제는 종교개혁 이후 지금까지 줄곧 식지 않는 뜨거운 감자였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 가운데 하나는 그의 수도원 생활 가운데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죄에 대한 문제 해결이 결코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극도의 좌절감이 그를 피폐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칭의 교리에 대한 뜨거움도 시간이 지나면 식을 것이라는 생각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알리스터 맥그레스는 자신의 저서 “하나님의 칭의론"에서 칭의 교리는 지난 16세기 이후 서구교회의 균열을 만들고 이 균열을 지속 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말하였듯이 교회 분열의 주범으로 지적되었다.


1997년 "The Gift of Salvation"이란 이름으로 카톨릭과 복음주의가 함께하는 신학자들의 모임(Catholic Evangelical Together; ECT)에서도 칭의 교리는 "불필요하게 분열시키는 논쟁"(Needlessly divisive dispute)으로 폐기되어야 것으로 결론이 났었다.


폴 틸리히등 현대신학자들은 이신칭의의 교리를 공룡의 화석 정도로 여기고 지금은 뜨거운 신학적 쟁점의 대열에서 빠져 버려야 할 것으로 여겼다.


칭의는 예수와 바울이라는 주제를 대립 관계로 몰아가는 주범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불트만은, 칭의는 바울 복음의 제한된 표현 양식이며 바울의 칭의론에서는 윤리가 나올 수 없다며 전통적 칭의론에 심각한 비판을 가했었다. (김세윤, 칭의와 성화 17)


이에 대해 김세윤 교수는, 바울이 예수의 가르침을 전혀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바울의 칭의의 복음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과 일치한다는 불트만의 주장은 대단히 역설적이라고 말한다.(김세윤, 칭의와 성화93)

샌더스 (E. P. Sanders)는 예수와 바울을 대립 관계로 보는 오해는, 개혁주의가 바울이 실제로 반응한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에 믿음에 의한 칭의를 통하여 바울이 말하려는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하는데 실패했다고 보면서 “바울에 대한 새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을 제시한다.


슈바이처에 상당히 공감을 하며 슈바이처의 접근과 비슷한 접근을 하고 있는 톰 라이트(N. T. Wright)는, 슈바이처의 법정적 칭의론에 의한 윤리의 결핍에 대한 비판은 케제만의 관계적  칭의론에 대한 개념이 보충될 때  비로소 해결 될 수 있다며, 케제만의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을 칭의의 근거로 내세운다.(톰 라이트, 예수의 도전 119)

톰 라이트는 바울이 주장한 칭의는 율법주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새관점에서 주장하는 언약적 신율주의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개혁주의는 칭의에 대한 이해의 차이로 인하여 로마 카톨릭과 결별하였지만 최근에 와서는 개신교 안에서도 페더럴 비전을 비롯하여 새관점학파들을 중심으로 로마카톨릭과 같은 반펠라기우스적 칭의론을 주장하려는 움직임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새관점의 대표적 인물인 톰 라이트는


"복음은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선포하는 것이며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가족이 되게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어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이다.

칭의라는 것은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의 커다란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Johnson & Waters, by faith alone 43)고 하면서 칭의를 공동체의 일원의 개념과 일치시킨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 정당성이 입증될 사람, 즉 미래적 칭의를 약속 받은 사람은 그들의 마음과 삶에 하나님의 율법 즉 토라를 새겨 넣은 사람들이다” (Johnson & Waters, by faith alone 49)라고 말하면서 삶과 미래적 칭의를 연관시킨다.


전통적 개혁주의의 바울 이해가 주로 개인의 죄와 관계된 칭의를 주제로 하고 있다면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Krister Stendahl의 바울 이해를 수용하여) 주로 공동체적인 죄를 다루고 있기에 개인 구원보다는 당연히 사회 구원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톰 라이트는 바울의 칭의 교리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서 칭의는 부차적인 것이며, 칭의란 (죄인이 구원 받는다는) 구원론에 속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냐는) 교회론에 속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교회에서의 알곡과 가라지의 구별은 믿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행위에 속하여 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유대주의의 언약에 대한 역사적 이해라는 관점에서 바울이 말하는 칭의를 생각해보면 “칭의란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의 공동체에 들어가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누가 그 공동체에 속하였다고 말할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N. T. Wright, What Saint Paul Really Said? 120)


톰 라이트에게 종말론이란 “메시아 예수”를 통하여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였고, 아브라함 언약이 그 절정에 도달하였기에, 예수를 추종하는 자들은 믿음 안에서 “현재 칭의”를 받고, 성령과 더불어 행함으로써 “미래 칭의”를 확증 하게 된다는 것이다(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133)


칭의에 대한 주제와 관계된 또 하나의 변화된 환경은 아브라함 카이퍼의 화란개혁주의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전의 전통적 개혁주의의 중심된 주제가 그리스도의 구원론이었다면 화란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라는 신론이 중심이 된다.


개혁파 구원론에서의 중심 주제였던 칭의는  신론 중심으로 옮겨가면서 최근에 와서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에서 비롯된 “의"의 개념도,  톰 라이트가 새관점에서 의의 근거로 제시하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케제만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가, 자연스럽게 신론 중심의 화란개혁주의와 접목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것이다.


바빙크는 루터파와 개혁파의 구별에 관하여 당대에 유행하던 입장을 소개한다. 개혁파는 신학적으로 사고하고, 루터파는 인간론적으로 사고 한다고 첫 마디를 시작한다. “개혁파는 역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이념 곧 하나님의 작정에까지 추적한다. 루터파는 구원역사에 만족하고서 하나님의 작정에 침투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개혁파에게는 선택론이 교회의 심장이지만, 루터파에게는 이신칭의가 교회의 생사가 달려있는 조항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영광이 처음과 마지막 관심사이지만, 후자에게는 인간의 구원이다. 전자는 이교사상과 우상 숭배를 대항한 투쟁이지만, 후자는 유대교나 행위에 의한 거룩을 투쟁한다.”고 강변한다.(신칼빈주의 운동,유해무)

칭의의 개념은 성화와의 관계로 인해서도 개념의 변화가 생기기도 한다.


김세윤 교수는 전통적인 구원론에서는 칭의 다음에 성화가 단계적으로 이어지므로 윤리 없는 구원이라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치우친다는 것이다(『칭의와 성화』, p. 81).


이에 대하여 박영돈 교수는 “그것은 통상적인 오해일 뿐, 개혁교회의 구원론에서는 칭의와 성화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칼빈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은혜의 두 면이다. 곧 단일하면서도 이중적인 은혜이다(One grace yet two-fold grace)”라고 비평한다.


박영돈 교수는 “구원의 전 과정에서 칭의와 성화는 긴밀하게 영합하여 병행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칭의와 성화는 영원히 분리될 수 없는 연합으로 엮어져 있기 때문에, 이 둘을 서로 분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찢어버리려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점에서 칭의와 성화가 긴밀히 연결되어있음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우리는 구원 받은 후 칭의에서 바로 성화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칭의의 바탕 위에서 신앙 생활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칭의는 구원의 서정에서의 중심이며 이는 전적으로 행위와 상관없으며, 즉 믿음 이전과 이후의 모든 행위와 상관없다.( 바빙크 개혁교의학 4; 219)


칭의는 창세 전에 삼위 하나님의 구원 협약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택자의 행동과 무관하게 선택 받은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칭의는 개혁주의의 중심교리들인 “오직 은혜”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  “의의전가”등은 물론 성화와 관계성의 혼동으로 인한 “현재적 칭의” “미래적 칭의” “유보적 칭의”등의 많은 용어들이 생겨나고 있다.


“죽산 박형룡은 ‘성화를 칭의와 나눌 수 없이 연결되고 둘이 결코 분리되지 않지만 반드시 구별돼야 하며, 성화를 칭의와 혼동하는 것은 성경을 생각 없이 읽는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과오’라는 칼빈의 입장을 취했다”

김균진의 뿌리가 되는 바르트 신학에 대해 그는 “외형적으로 칼빈의 성화론과 유사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며 “바르트는 칭의와 성화를 하나로 본 것이며, 칭의 속에서 성화를 보고 성화 속에서 칭의를 보고 있어 사실상 둘을 구별할 수 없다”고 밝혔다.(복음주의조직신학회, 제30차 정기논문발표회-조봉근 박사)


이상과 같이 “칭의(Justification)”라는 주제는 개혁주의 신학의 가장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지난 500년 동안 가장 많은 도전을 받아왔고 지금도 여전히 식지 않는 뜨거운 감자인 것이다.


그렇다고 기독교에서 “칭의"라는 주제를 배제한다거나 아니면 새관점과 같이 칭의의 개념 자체를 바꾼다고해서 서로 화합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분열의 양상만 짙어질 뿐이다.


가장 올바른 해결책이라면 “칭의"의 성경적 개념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식하는 가운데 그동안 논의되어왔던 “칭의"에 대한 여러가지 개념들이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아보는 가운데 “칭의"에 대한 제대로 된 개념을 신앙의 기반으로 삼을 때 개혁주의 신앙에 더욱 견고히 설 수 있게 될 것이다.


부흥과 개혁사에서 출간된 박재은 박사의 “칭의, 균형있게 이해하기"는 이러한 혼란을 잠재우기라도 하듯 결코 길지 않은 글로서 깔끔하고 간결하게 정리를 해 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책 전체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박재은 박사의 “칭의, 균형있게 이해하기"는 총 3장으로 구성되어있다.



1장에서는 주로 과거의 대표적 논쟁들을 정리하였으며 상황적 접근보다는 원론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첫 번째로는 칭의에 행위적인 요소가 가미됨으로 인해서 인간의 역할이 강조되고 하나님의 주권이 약화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로는 이러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것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대신에 인간의 역할을 약화시킨 반율법주의 칭의론을 다루고있다.


칭의에 있어서 인간이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으며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완전한 형태의 “무상" 선물을 강조하는 무상칭의론자들의 반율법주의 칭의론으로서, 특히 존 이튼(John Eaton)의 반율법주의를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바울에 대한 새관점"과 유사한 성격의 신율법주의(neonomism) 칭의론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율법의 성격에 준하는 “새로운 법"으로 보는 것이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를 예로 들고 있다.


네 번째로는 존 브라인(John Brine)을 예로 들면서 18세기에 영국에서 유행한 반율법주의와 신학적 맥을 같이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대신에 인간의 역할을 약화시킨 하이퍼 칼빈주의의 칭의론의 핵심 사상들에 대하여 설명한다.



마지막으로는 영원으로부터의 칭의를 다루면서 게할더스 보스나 아브라함 카이퍼의 경우와 반율법주의자들이나 타락 전 예정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받는 오해들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의 불균형을 초래한 “죄인을 의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영원 작정"과 “칭의 자체"에 대한 혼동에 대하여 설명한다.


2장의 제목은 “현대의 균형 잃은 칭의론"이다.


첫 번째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두 기둥에 대한 이해다.

존 스토트과 에버렛 헤리슨 사이의 논쟁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칭의와 성화라는 관점에서 풀어나간다.


이와 함께 개혁주의권에서 지지를 받는 “순종과 헌신이라는 믿음의 열매를 맺는 주재권 구원”과 세대주의권에서 지지를 받는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되고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을 믿는 무상 은혜”의 차이에 대하여 설명하며 주제권 구원이 행위 구원론으로 오해 받아서는 안되는 점들을 설명한다.


이는 최근 논쟁이 되고 있는 김세윤 교수의 “칭의와 성화”와 “유보적 칭의론”이 어떠한 점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부분이다.


두 번째로는 신율법주의와 유사하며 또한 새관점과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페더럴 비전의 칭의론에 대하여 설명한다.


믿음과 행위를 칭의의 조건이나 근거로 삼는 페더럴 비전에 대하여는 1) 언약에 대한 이해  2)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한 거부  3) 믿음과 순종에 대한 관계를 중심으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세 번째로는 현재 바울 신학에 관하여 뜨거운 감자라고 할 수 있는 “바울에 대한 새관점”에 관하여 논하고 있다.


“바울에 대한 새관점”을 다루고 있는 이 부분은 이 책의 가장 뜨거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곳에서는 언약적 신율주의, 율법의 행위, 이신칭의, 그리스도의 의의전가, 미래 칭의와 삶의 방식등으로 지면의 열기를 가득하게 채워 넣고 있다.


3장에서는 첫 번째로 1장과 2장에서의 논란을 잠재우기 위하여 원론적으로 고려해보아야 할 능동적/수동적 칭의를 관점의 차이, 믿음의 위치, 논리적 우선순위라는 3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 있다,



두 번째로는 헤르만 바빙크가 능동적/수동적 칭의를 어떠한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세 번째로는 네덜란드 개혁신학자 헤르만 비치우스의 칭의론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그가 능동적/수동적 칭의에 대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절충을 하면서 지혜롭게 풀어 나아가고 있는지 보여줌으로서 모든 논쟁을 잠재우는 비치우스의 지혜를 이 책의  결론적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 책의 칭의의 다양한 상황에 대한 설명들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칭의에 대한 생각의 위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주며 개혁주의 칭의 교리가 어떤 의미에서 중요한 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이제 우리에게는 “칭의에 대한 개념이 다른 교회를 같은 교회 공동체로 인정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주어진다.


제임스 패커는 전 생애에 걸쳐 개신교와 카톨릭과의 연합을 주도하고 대화를 시도해보았지만 결과적으로 열매 맺은 것은 거의 없었다.


카톨릭과 개신교가 타협할 수 없었던 교리의 한 가운데에는 “칭의” 교리가 있었다.


새관점과 유사하게 아르미니우스적인 구원론을 가지고 있는 페더럴 비전의 이단성을 염려하는 한 가운데에도 마찬가지로 “칭의" 교리가 있다.


현재 톰 라이트의 “바울에 대한 새관점"과 페더럴 비전은 성례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있지만 언약적 율법주의 구도에서는 거의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번 책에서 보여준 칭의에 대한 커다란 시작 차이에도 불구하고 페더럴 비전과는 달리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별로 이단성의 논쟁이 없이 자연스럽게 개혁주의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상황에서 칭의에 대한 좀 더 올바른 이해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해줄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