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라이트가 말하는 1세기 유대주의

  by 김원호(dent4834@hanmail.net)

톰 라이트는 자신의 저서 "바울"을 통하여 1세기 유대주의는 개혁주의가 생각하였던 구원을 얻기 위한 구원론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의 공동체 안에 머물기 위한 교회론의 문제에 관한 것이었으며 바울의 서신서는 구원 받은 백성이 어떻게 이방인을 자신들의 언약 백성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것이냐 에 관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의 이러한 주장에 대한 다음 글을 통하여 개혁주의 입장에서 몇 가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톰 라이트는 칭의라는 개념이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1)의 관점에서 읽혀지면 안되고 대신에 1세기 유대주의2)의 상황에서 읽혀져야 한다고 말한다.

Wright contends that the idea of justification must not be read in the light of the Augustine-Pelagius debate but instead in the context of first-century Judaism( Paul, pp. 19, 32, 35, 116, 120, 124, 129.)

1세기 유대주의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3)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 시대의 칭의는 하나님의 종말론4)적인 정의로서 미래와 현재의 것이며 누가 하나님의 백성의 맴버5)가 될 것이냐 에 관한 것이다. 샌더스의 의미로 말한다면 "진입"의 문제가 아니라 "머무름"6)의 문제인 것이고 누가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일반적인 신학 용어를 사용한다면 교회론7) 이상의 구원론에 대한 것이 아니며 교회 이상의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다.


(in the first century was not about how someone might establish a relationship with God. It was about God’s eschatological definition, both future and present, of who was, in fact, a member of his people. In Sanders’ terms, it was not so much about ‘getting in,’ or indeed about ‘staying in,’ as about ‘how you could tell who was in.’ In standard Christian theological language, it wasn’t so much about soteriology as about ecclesiology; not so much about salvation as about the church.(Wright, Paul, p. 119.)

1) 어거스틴-펠라기우스의 논쟁?

어거스틴-펠라기우스의 논쟁이 개혁주의에 잘못된 영향을 주어 현재의 개혁주의 성경해석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가?
여기에는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전제와 이를 근거로 개혁주의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개혁주의는 어거스틴 펠라기우스 논쟁 이전에 성경 자체를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며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도 성경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어거스틴 이후의 성경 해석 전체를 부정하면서 어거스틴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2) 1세기 유대주의?

1세기 유대주의가 전통적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율법주의 개념이 아니라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언약적 율법주의 개념이라면 전통적 개혁주의의 성경 해석은 전부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1세기 유대주의에 관하여는 이미 칼빈도 외경등을 참조로 하여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며 여기에 추가된 쿰란 문서의 경우는 에센파의 자료이면서 아직도 해석이 진행되고 있다는 관점에서 미리 결론을 내리고 이를 근거로 성경 자체를 해석하는 것은 여러가지 면에서 무리수를 두고 있다고 말을 할 수 밖에 없다.

3) 관계 형성?

톰 라이트는 하나님과 언약 백성과의 관계가 이미 제대로 형성 되어있는 의로운 상태라고 말한다.
그럼 아담의 죄의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고 그리스도는 아담의 죄와 관계없이 오신 분이라면 성경에서 예수님을 두번째 아담이라고 칭하는 것은 성경이 틀렸다는 말인가?
톰 라이트는 아담의 죄는 이미 아브라함과의 언약 가운데 암묵적으로 해결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4) 종말론적 칭의?

칭의라는 용어보다는 vindication(옳음을 드러냄)이라는 용어를
톰 라이트가 칭의의 문제를 말할 때는 의로움의 현재적 완료가 아니라 종말론에 옳음이 드러난다(vindicate)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Wright, JVG, p307)
이는 은혜로 구원 받고 공로로 완성한다는 로마카톨릭이 말하는 구원론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새관점은 은혜로 하나님의 언약 약에 모든 사람이 있는 상태이고 이 의로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이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구원의 완성을 위한 펠라기우스적인 인간의 공로가 추가되고 평가에 의하여 종말에 확정된다는 개념이기에 항상 구원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 긴장하며 살 수밖에 없고 오직 은혜가 아닌 부분적인 은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5) 멤버? Identity?

자녀의 개념이 아니다. 멤버라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성경에서 말하는 자녀의 개념들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은 칭의에서 중요한 개념이지만 연합 개념이 없는 맴버로서 만족하는 개념이다.

6) 머무름의 문제?

만약 아담의 죄의 문제가 아직 해결 되지 않은 상태라면 머무름(staying in)의 문제 이전에 진입(getting in)의 문제가 우선이 될 것이다. 하지만 톰 라이트는 유대인의 문제가 진입에 대한 것이 아니라 머무름에 대한 것이라고 말하며 이 머무름의 상태가 은혜 안에서 의로운 상태라는 것이다.
만약에 유대인이 은혜 안에 제대로 머물렀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며 예수님의 오심은 속죄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것이 된다.
새관점에서는 아담의 범죄의 문제는 이미 아브라함 언약에서 정리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예수님의 속죄를 유월절 만찬을 통한 이스라엘의 민족적 해방이라는 개념으로 변질시켰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속죄의 보혈 개념이 아닌 삶의 모범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희생으로 개혁주의와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7) 교회론에 관한 문제?

1세기 유대주의가 구원론을 넘어선 교회론에 관한 것이라면 톰 라이트는 유대 교회를 신약 교회의 원조라고 말하는 것이랑 다름없다.
톰 라이트의 주장대로라면 유대교회와 현재의 신약교회는 대립의 개념이 아니라 새로운 버전으로의 업 그래이드 개념이다. 즉 유대됴회가 신약교회의 원조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세대주의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비슷하며 또 다른 세대주의적 발상이다.
이러한 개념의 교회론은 이 지구 상의 모든 민족을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에 전통적 개념의 회중교회가 아니라 피조계 전체를 구원의 대상으로 삼는 우주적 교회론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보편구원론으로 귀착되는 미셔널 처치의 교회론이다.

결론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맞다면 믿음이라는 개념이 설 자리가 없다.
맴버 즉 회원(Identity)의 개념에서의 교회론으로는 맴버가 되기 위한(회원가입?) 요구조건이 불분명하다.(요구조건이 없다면 맴버의 의미가 있는가?)
멤버가 된 후에 자격 박탈의 규정이 애매하다.
인간이 선하다는, 혹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아담의 죄는 이미 나하고는 상관없는 문제가 되었고 어떠한 종교를 가지던 간에 간디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삶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1세기 유대주의에 대한 해석이 너무 자의적이며 의로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기준이 막연하며 종말에 심판의 기준이 모호하기에 새관점이 맞다면 심판에 대한 불공평의 항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
혼란스럽고 복잡하고 어지럽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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