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 말하는 율법의 요구


  by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성경 전체에 대한 해석을 좌우하기에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 대한 논란의 핵심은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서 기인하는 것인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전통적 개혁주의가 해석하는 바와 같이 율법을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닌 구원 받은 상태 안에 머무르기 위한 수단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해석의 근거로 ”제 2 성경 유대교"에 대한 ”역사적 예수 탐구"를 근거로 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하여 유대인들이 지키고자하였던 율법이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 안에 머무르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결론 내면서 성경 전체에 대한 해석을 새롭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 보는 율법의 요구가 전통적 개혁주의에서보는 율법과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완전한 순종의 요구


전통적 개혁주의에서 해석하는 율법의 요구는 완전한 순종이며 인간에게는 이러한 요구를 충족 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율법의 진정한 역할은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음으로 인한 죄인임을 깨닫게 함으로서 죄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다.


만약에 율법에서 요구하는 순종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 적당한 수준의 요구였다면 구태여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행하심이 율법에 대한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키신 완전한 순종의 삶이었다고 말할 근거와 필요가 사라지게 된다.


또한 그리스도의 순종을 구태여 적극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는 특징적 구분을 할 필요도 없으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가 성립되지도 않으며, 믿음을 통한 의의전가 개념 또한 성립될 수 없다.


새관점에서보는 의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율법의 요구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을 근거로한다.


새관점에서 보는 율법은 의를 제공해주는 근거도 아닐 뿐더러 죄에 대한 정죄의 기능도 하지 못한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로 인하여 새관점에서 말하는 율법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지 않는다.


새관점에서는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범하였다고 하더라도 성전에서의 제사행위를 통하여 언제나 회복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설령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여 언약에서 벗어났더라도 다시 회개하고 들어와서 율법을 지키면 언약 백성으로서의 의로운 상태가 유지된다고 말한다.


이는 마치 아버지가 자녀에게 훈계한 것을 자녀가 지키지 않는다고 자녀로서의 자격을 박탈하지 않는 것과 같이 율법을 명령이 아닌 훈계나 교훈의 차원으로 보고 있기에 완전한 순종과 의의 개념을 적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가능한 것은 새관점에서 보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공동체로서 마치 자녀와 같은 자격을 이미 취득한 상태로 보고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새관점에서 보는 유대인들은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서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의인이고 율법의 역할은 언약 백성들을 언약 안에 계속 머물게함으로서 의인의 상태를 계속적으로 유지하게하기 위한 수단이다.


2. 의의 근거 


신자에게 부여되는 칭의는 하나님의 자녀됨의 근거를 제공한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부여되는 의는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은 것이다.


신자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의는 율법의 요구에 대한 완전한 순종, 즉 율법을 완전히 지키신 적극적 순종과 율법이 죄인에게 요구하는 십자가의 형벌인 수동적 순종을 통하여 얻으신 의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수동적 의를 전가받아서 죄를 용서받고,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온전히 지키심으로 이루신 적극적 순종의 의를 전가 받아서 의인이 되는 것이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 모두를 전가 받아야지만 죄를 용서 받고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킨 진정한 의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새관점에서 말하는 의의 근거는 그리스도에게 있지 않고 성부 하나님께만 있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의의 근거는 불트만 학파인 케제만이 주장하였던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에 있다.


이를 해석하자면 하나님께서 (아담의 죄와는 관계없이) 아브라함에게 구원을 약속하셨고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신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the faithfulness of God이라는 의를 말한다.


새관점에서 보는 의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께 있지 않고 성부 하나님께만 있기에 율법의 요구가 의를 이루는 근거가 된다고 보지는 않는다. 


3. 선악과 명령과 아담의 죄


율법이 있기 전에는 죄를 죄로 정죄할 수 없었으며 오직 양심만이 마음의 법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율법이 드러내고자하는 죄는 아담의 불순종에서 기인된 죄를 말한다.


아담의 범죄는 선악과에 대한 금지 명령을 어긴 불순종에서 기인된다.


실패의 과정을 회복하려면 실패에 대한 회복의 과정이 재연Republication되어야만 한다.


율법은 표면적인 행위언약과 근원적인 은혜언약 모두를 포함하고있다.


율법은 행위언약인 실패한 선악과 금지명령의 재연이면서 또한 회복을 위한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도하는 은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율법에서의 행위언약이 선악과 금지명령의 행위언약과 속성을 같이 하기에 율법에서 드러내고자하는 죄는 아담의 범죄에서 기인된 죄를 말한다.


그러나 새관점에서 보는 율법은 선악과 금지명령의  재연Republication도 아니며 이스라엘의 범죄는 아담의 죄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취급한다.



4. 율법의 역할


새관점에서 보는 율법은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율법을 마치 자녀가 부모의 훈계를 생각하는 수준과 비슷하게 보고있다.


이미 자녀로서의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 훈계는 결코 자녀의 자격을 박탈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전통적 개혁주의에서 보는 율법은 훈계의 의미를 넘어서 명령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명령은 하나라도 어기면 불순종으로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율법이 요구하는 명령은 선악과를 금하는 명령과 동일한 수준의 명령이다.


하나라도 범하면 모두를 범한 것과 마찬가지로 죄인의 상태가 된다.


율법의 요구가 완전한 순종이라면 율법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유지하는 훈계와는 비교될 수가 없다.


율법의 역할은 아담의 범죄로부터 비롯된 인간이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죄를 드러냄으로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도하는 것이다.


율법이 인간 내면의 죄를 드러내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는 불완전한 은혜가 될 것이며 나머지는 인간의 능력에 근거한 공로로 채워지고 말 것이다.


율법이 인간의 죄를 드러내는 일은 참된 은혜의 복음이 증거되기 위한 필수적 과정이다.


인간이 죄인임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율법의 요구가 완전한 순종이어야만 한다.




5. 출애굽과 예수 그리스도


개혁주의에서 보는 신자의 위치는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녀로서의 위치다.


칭의와 성화의 최종적 목적은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이지 명령이 아니다.


산상수훈은 명령이 아니기에 완전하게 지키지 못하였다고 자녀의 자격이 박탈 되는 것은 아니다.


새관점에서는 율법을 산상수훈과 동등한 차원에서 해석한다.


이와같은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이미 출애굽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이라고 보고있기에 이들에게 율법은 은혜 안에 거하기 위한 훈계의 차원으로 해석 될 수 밖에 없다.


새관점에서 보는 율법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는 새관점이 율법을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 즉 명령이 아닌 교훈과 훈계의 차원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새관점에서는 이스라엘을 이미 하나님의 은혜 안에 세워진 하나님 나라로 보고 있다.


이들에게 율법은 단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새관점이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보는 근거는 출애굽에 있다.


개혁주의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보고있는데 반하여 새관점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출애굽과 더불어 이 땅에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고 본다.


개혁주의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한 수단을 믿음으로 본다.


새관점에서 보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출애굽을 통하여 선택되어진 백성이다.


현재의 많은 하나님 나라 운동가들이 자신들이 진보적인 사역자들로 매도되고있다고 억울해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이 세상에서의 현재적 하나님 나라는 새관점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와 상당 부분 일치하고있기 때문에 오해가 아닌 어느 정도 제대로 판단되어지고있는 것이다.



6. 율법과 산상수훈


개혁주의에서보는 율법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한다.


산상수훈을 율법과 같이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는 명령이라고 본다면 복음은 절망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개혁주의에서보는 산상수훈은 믿음을 가진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삶의 열매로서 맺어야할 기준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고하더라도 항상 산상수훈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기에 그리스도인은 평생 성화의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부족함으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서 탈락되는 것은 아니다.


새관점에서는 산상수훈을 확장된 이스라엘로서의 교회가 지켜야할 교훈으로서 유대인의 율법과 연계시키고있다.


이러한 관점이 가능한 이유는 새관점에서 보는 이스라엘 백성과 신약 교회의 성도를 같은 맥락의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보고있기 때문이다.


새관점에서는 유대인들이 율법의 요구를 완전한 순종으로 보고 있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산상수훈의 요구가 완전한 순종이 아니라고 본다.


이들이 보는 산상수훈은 율법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이다.


이들에게 산상수훈은 언약 백성에서 탈락되는 기준으로 작용되기도하기에 최종적 심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어느 정도로 산상수훈을 행하여야 심판에서 합격될지에 대해서는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고있다.


개혁주의에서보는 산상수훈은 탈락의 기준이 될 수도 없으며 어떠한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단지 열매로서 요구되는 것이다.



7. 하나님 나라에 대한 혼동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슈는 오늘날의 신학계에서 매우 관심있는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우리나라에 하나님 나라에 관한 저술들이 본격적으로 소개된 배경에는 톰 라이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최근에 소개된 하나님 나라의 특징적 개념은 하나님 나라가 저 세상이 아닌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고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특히 톰 라이트를 비롯하여 리처드 미들턴, 스캇 맥나이트, 김세윤등이 본격적으로 참여하고있다.


한때 새관점을 가장 앞장 서서 비판하였던 김세윤교수도 이제는 어느 정도 새관점의 물결에 합류하며 새관점과 마찬가지 속성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주제는 결코 새관점주의자들만의 주제인 것은 아니다.


개혁주의에서도 오랫동안 많은 신학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주제로 훌륭한 책들을  출간하였다.


특히 최근에 저술된 메러디스 클라인의 “하나님 나라의 서막”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개혁주의에서 보는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잘 정리를 해주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최근에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는 이들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 개념은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와 많은 차이가 있다.


이들은 대부분 새관점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의 시작으로 보며 확장된 이스라엘 개념의 현재적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한다.


톰 라이트는 자신의 저서 “그리스도인의 미덕”에서 하나님 나라 확장의 방법론으로 끊임없는 연습과 훈련으로 산상수훈을 실행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는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며 자신의 방법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로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하나님 나라 운동가들은 역사적 이스라엘이 율법을 통하여 이 땅에서 유지 확장 되었어야 했듯이 현재적 하나님 나라가 삶에서 산상수훈의 실천을 통하여 이 땅에 세워지고 확장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믿음보다는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 삶 가운데 행하는 도덕적 행위가 이 땅에 도래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연속성을 갖는다고 본다.


이들은 저 세상이 아닌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방법론으로 산상수훈의 교훈을 따를 것을 강조한다.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구원자라기 보다는 따름의 대상으로서의 모델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을 통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시작 하시고 믿은 이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라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는 실패하지 않기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지 본을 보여주신 분일 따름이다.


이들이 율법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던 것과 같이 이들은 산상수훈도 확장된 이스라엘로서의 하나님 나라 백성이 살아가야 할 규범으로 보고있을 뿐이다.


8. 인간의 상태


새관점에서는 인간이 충분히 율법을 지킬 능력이 있다고 본다.


새관점에서 줄곧 외면하는 주제 중의 하나는 아담의 범죄와 인간의 부패성과 두 번째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이다.


새관점주의자들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에 대하여 반대한다.


새관점주의자들은 종교개혁자들이 인간의 의지를 노예 의지라고 말하는데 대하여 상당히 예민하게 반응한다.


종교개혁의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는 인간이 선을 행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기에 오직 믿음을 통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새관점에서 보는 선에 대한 기준은 성경에서 보는 기준과 차이가 있다.


성경에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선하신 분으로보고있다.


인간이 생각하는 선과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선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인간은 존재적으로 악하기에 아무리 선을 행한다고할지라도 선해질 수가 없다.


선은 행위 이전에 존재에 초점이 맞추어져야한다.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이 아무리 선한 행위를 한다고하여도 선한 존재가 될 수 없다.


율법은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있지만 새관점에서는 율법을 통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기에 합당한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 기준의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없는 타락한 존재이다.


율법은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존재 자체가 죄인임을 보여줌으로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도하는 교사로서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새관점주의자들은 율법을 이미 은혜 받은 자가 은혜 안에 거하는 선한 존재임을 증명해주는 수단으로 사용하고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도 같은 맥락에서 사용하고있다.


죄인임을 드러내기 위한 율법을 의인임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율법의 요구는 선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선함을 증명하는 수단일 뿐이다.


성경에서는 의인이 하나도 없음을 말한다.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인간들이 있다면 이들에게 예수님은 따름의 대상일 뿐이지 믿음의 대상이 될 수가 없지만 새관점주의자들은 예수님을 결코 믿음의 대상으로 보지는 않는다.


새관점에서 비롯된 하나님 나라 운동은 인간이 선을 행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자는 반펠라기우스적 사고를 가지고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예정하심 가운데 이 세상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참된 신자는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따름이다.


새관점에서 보는 출애굽의 사건을 이스라엘이 은혜 안에 거하는 구원의 사건이며 동시에 이들은 아담의 범죄도 아브라함을 부르심과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암묵적으로 하나님께서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고 사하신 걸로 여긴다.


이는 마치 새관점에서 유월덜 만찬을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범되를 암묵적으로 사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들은 마치 재판장이 일방적으로 무죄를 선언하는 것과 같이 아담과 이스라엘의 죄를 사했다고 생각하기에 이들은 아담의 타락과 연관된 인간의 전적인 부패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에게 율법은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은 백성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는 수단일 뿐이고 이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품위 유지의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개혁주의에서 보는 율법의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는 인간이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도하는 교사로서의 역할하는 것인데 이들은 이들 반대로 사용하고있는 것이다.


개혁주의에서는 출애굽 사건을 구원 사역으로 보지 않고 다만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사건일 뿐이며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만이 진정한 출애굽, 즉 구원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으로 보고있다.


9. 은혜와 하나님 나라


출애굽을 구원의 사건으로 본다면 출애굽은 아담의 죄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는  전적인 은혜의 사건이며 이스라엘 백성은 은혜를 입은 백성으로서 더 이상 두 번째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하지 않는다.


출애굽한 백성을 구원받은 백성으로 본다면 율법의 요구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상실시키는 것이다.


새관점에서는 구원받은 백성으로서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을 충실하게 실행하시는 것이 근거를 두고있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은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the Faithfulness of God”이라는 “성부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하고 있는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하여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고있는 상태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은혜 안에 머무르는 것만이 요구되는 것이다.


새관점이 말하는 율법의 요구는 이러한 은혜 안에 머무르는 것이며 성부 하나님만의 의를 완성시키며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부차적인 존재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새관점에서는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그리스도 이전에 이미 이 땅에 형성된  하나님 나라로 보고있다.


새관점에서 보는 신약의 교회는 확장된 이스라엘이면서 동시에 확장된 하나님 나라로서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아닌 성부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한다.


새관점에서 보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확장된 이스라엘로서의 신약의 교회에게주는 새로운 율법일 뿐이다.


이미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 은혜 안에 거한다고 생각하는 새관점주의자들이 보는 확장된 이스라엘로서의 신약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아야 할 필요성도 없으며 이를 위한 믿음도 요구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이미 은혜 안에 거하기에 전가받아야할 의를 필요로하지 않는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는 완전한 순종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새관점에서보는 성육신한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최후의 만찬에서 역사적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한 행위에 대한 용서를 선언하고서 이들이 다시 시작하도록 본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희생을 당하신 모델에 불과한 것이다.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산상수훈은 율법의 바통을 이어받아 율법의 요구를 완성시키기 위한 또 다른 버전에 불과하다.


만약에 신약의 교회 구성원들이 구약의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버전의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이들이 구원받기 위하여 용서를 선언하는 또 다른 이가 필요할 것이다.


율법의 요구와 산상수훈의 요구는 최종적 구원을 불확실하게 만들기에 확장된 이스라엘로서의 교회는 유대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의미의 은혜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새관점에서보는 최후의 심판은 얼마나 산상수훈을 지키는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평가로 결정이 된다.


은혜로 시작되어 행위로 끝나는 새관점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진정한 의미에서 완전한 은혜의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가들이 말하는 삶의 변화가 새관점에서 말하는 율법의 요구와 같은 맥락에 있다면 이들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는 오히려 참된 복음을 가로막는 거짓된 사역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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