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2022. 8. 14. 22:06

존 페스코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믿음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신자의 구원의 근거로서의 그리스도의 믿음은 많은 저명한 설교자들이 종종 인용하고 주장하는 개념이다.

이는 신학적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많은 이들에게 종종 혼란을 가져다 주기도한다.

신자의 구원의 근거가 (그리스도가 주격인) 그리스도의 믿음이냐 아니면 (그리스도가 목적격인)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냐라는 두 가지는 분명 구분되어지고 정리되어져야한다.

어떤 이들은 신자의 믿음 조차도 그리스도의 믿음에 근거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믿음이 신자의 믿음의 근거라고 말하기도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믿음과 신자의 믿음은 분명히 성격이 다른 구분되어져야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믿음은 타락 전 아담이 가졌던 믿음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되어져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믿음은 타락 전 아담의 믿음과 마찬가지로 구원하는 믿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순종에 따른 하나님의 상급에 관한 믿음이다.

물론 창세기에는 아담의 순종에 따른 상급에 대한 언급이 나와있지 않다.

하지만 구약이 신약을 통하여 해석되어질 때 분명 아담의 순종은 영원한 축복과 안식에 대한 상급이 있었다.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서 타락 전 처음 아담과 마찬가지로 죄가 없으시다.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의 믿음은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언약에 대한 믿음이다.

신자에게는 타락 후의 처음 아담과 마찬가지로 구원하는 믿음이 요구된다.

이는 그리스도의 믿음과는 구분되는 다른 성격의 믿음이다.

이에 대하여 존 페스코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다음 번역 부분은 존 페스코의 "아담과 행위언약ADAM AND THE COVENANT OF WORK"에서 "칭의가 행위와 믿음 모두에 의한 것인가? Justification is Either by Works or Faith"에 관한 서술 가운데 일부(p472-475)를 취하여 번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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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적 삶이 순종, 혹은 행위를 요구한다는 주장에 대한 두 가지 그럴듯한  반대가 있다:

There are two likely objections against the claim that eschatological life required obedience, or works:

아담의 상태가 믿음을 요구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성공적인 언약적 검증이 믿음과 행위의 복합적 구성에 의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Did not Adam’s state require faith and thus in some sense his successful covenantal probation would have consisted in a combination of faith and works? 

이런 맥락에서 신약은 그리스도의 믿음을 말하고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의 행위가 믿음과 행위가 섞여있는 것이 아니지 않겠는가?

Correlatively, does not the New Testament speak of the faith of Christ, and thus in some sense was not Christ’s work a mixture of faith and works? 

아담의 믿음에 관한 첫번째 의문은 애매하게 사용되고있는 믿음의 의미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The first question regarding Adam’s faith employs an equivocal use of the term faith. 

예를 들자면, 은혜언약에 있어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구원하는 믿음을 ‘은혜언약으로 인하여, 칭의, 성화,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그리스도만을 받아들이고, 영접하고, 의지하는 것’을 구원하는 믿음으로 정의하고있다(웨민신앙고백 14.2)

In the covenant of grace, for example, Reformed theologians have defined saving faith as ‘accepting, receiving, and resting upon Christ alone for justification, sanctification, and eternal life, by virtue of the covenant of grace’ (WCF XIV.ii). 

믿음이라는 것은 다른 이의 공로, 즉 예수의 공로를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Faith is resting and trusting in the work of another, namely, Jesus. 

보스가 말했던 것과 같이, ‘아담에게 있어서는 선택받은 죄인이 하여야할 것을 인지하였던 것과 같은 구원하는 믿음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As Vos notes, ‘For Adam, there was no thought of saving faith as the elect sinner learns to exercise it.’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25절들 가운데 16번이나 faith (πίστις), 혹은 believe(πιστεύω)를 사용하여 이러한 점을 강조하였다.(롬 4:3, 5, 9, 11, 12, 13, 14, 16, 18, 19, 20, 22, 24). 

The apostle Paul, for example, highlights this point in Romans 4 by using the words faith (πίστις) or believe (πιστεύω) sixteen times in twenty-five verses (Rom. 4:3, 5, 9, 11, 12, 13, 14, 16, 18, 19, 20, 22, 24). 

이러한 점에서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라고 말하는 로마서 4장 5절은 놀랄만하다.

Stunning in this respect is Romans 4:5, ‘And to the one who does not work but believes in him who justifies the ungodly, his faith is counted as righteousness.’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다른 사람의 공로를 의지하는 것, 즉 자신을 대신하여 공로를 행하는 누군가를 신뢰하는 믿음을 실행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God did not tell Adam to rest in the work of another – to exercise his faith and trust someone else to accomplish the work on his behalf. 

1부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아담의 믿음을 말했을 때, 이들은 행위언약 아래서의 믿음의 기능과 은혜언약 아래서의 믿음의 기능을 조심스럽게 구분하고 있었다.

As noted in Part I, when Reformed theologians have spoken of Adam’s faith, they carefully distinguish between the function of faith under the covenants of works versus grace. 

신학자들은 법적인 믿음과 복음적인 믿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Theologians speak of legal versus evangelical faith. 

법적인 믿음은 율법에 대한 순종을 통한 칭의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는 반면에 복음적인 믿음은 복음을 통한 칭의를 추구한다.

Legal faith is interchangeable with justification through obedience to the law whereas evangelical faith seeks justification through the gospel.

법적인 믿음은 단순히 율법의 약속들, 즉 이를 행하는 이들은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약속들을 믿는 것이다.

Legal faith (fides legalis) simply believes the promises of the law, namely, the one who does them will live in them.

이러한 구분은 바울이 행함의 법과 믿음의 법을구대비시킬 때 사용했던 바울 자신의 단어와 유사하다(롬 3:27)

These distinctions parallel Paul’s own vocabulary when he contrasts the law of works versus the law of faith (Rom. 3:27).

두번째로, 그리스도의 믿음이라는 개념은 피스투스 크리스투(pistis Christou)의 의미에 대한 뜨거운 논쟁에 불을 지폈는지, 이는 피스투스 크리스투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이 어휘를 목적격으로 해석하느냐, 아니면 주격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혹은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예를 들면 롬 3:22, 26; 빌 3:9;G갈 2:16, 20; 3:22; 야 2:1를 참조). 

Second, the idea of Christ’s faith treads upon the hotly contested question of the meaning of pistis Christou, which can be translated as faith in Christ or the faith of Christ depending on whether one interprets the lexeme as an objective or subjective genitive (see, e.g., Rom. 3:22, 26; Phil. 3:9; Gal. 2:16, 20; 3:22; James 2:1). 

이 주제에 관해서는, 그렇게 크게 중요하지 않은 부분의 영역을 과도하게 넘어서는 문헌의 점진적 확대가 있다.

There is a growing body of literature on this subject that far exceeds the scope of this modest section.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스티스 크리스투(그리스도의 믿음)에 대한 주격적 해석을 무시해야만 하는 적합한 이유들이 있다.

Nevertheless, there are good reasons to dismiss the subjective genitive translation of pistis Christou (‘faith of Christ’). 

모세 실바는 목적격을 선택하여야만 하는 5가지 핵심적 이유들을 제공해주고있다.

Moisés Silva provides five key reasons for opting for the objective genitive: 

(1) 그리스 동방정교회는 교부들이 목적격을 수용하고있다고 말한다.

(1) the Eastern Greek-speaking church fathers opted for the objective genitive; 

(2) 인간의 믿음은 신약에서의 중요한 주제이다.

(2) human faith is a significant theme in the New Testament; 

(3) 바울은 규칙적으로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대하여 피스티스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리스도에 관련된 다른 경우에 있어서는 가장 최상의 것들 조차도 애매하기만 하다.

(3) Paul regularly uses the term pistis vis-à-vis the Christian’s faith but the other occurrences as they might relate to Christ are ambiguous at best; 

(4) 갈라디아서 2-3장에서는 일관되게 피스튜오(πιστεύω, 믿음)을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관련되어 사용하며, 이는 그리스도의 믿음에 관련된 것이 아니다.

(4) Galatians 2–3 consistently uses the verb πιστεύω to refer to the Christian’s faith, not Christ’s; and 

(5)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 어느 정도 행위를 떠난 구원을 무시하고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5) there is no reason to suggest that highlighting faith in Christ somehow negates salvation apart from works. 

칭의의 모든 관점에 있어서, 솔라피데(오직 믿음)은 자신들의 행위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The whole point of justification sola fide is for people to abandon their own works and rest in the works of Christ.

우리가 혹시 그리스도의 하늘의 아버지에 대한 일반적인 신뢰에 관하여 그리스도의 믿음을 말하는 경우에는, 우리는 율법의 약속에 대한 아담의 믿음과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행하는 이는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자신의 아버지의 말을 믿는다는 것을 언급하여야만 할 것이다(레 18:5).

While we may speak of Christ’s faith as a general trust in His heavenly Father, we must note that like Adam’s faith in the promises of the law, Christ believed His Father’s Word that the one who does the law will live in it (Lev. 18:5).

그리스도는 자신을 대신하여 율법을 충족시킬 다른 이를 찾지 않으셨다.

Christ was not looking to another to fulfill the law on His behalf. 

설령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아버지를 믿었으셨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하여 신약은 침묵하고있다.

But even then, while Christ had faith in His Father, the New Testament is silent regarding this matter. 

신약에서는 한번도 이에 대하여 언급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이는 신자들의 믿음에 대한 풍부한 진술이나 설명과는 분명히 대조를 이루고있는 것이다.

It never once speaks of or explains it; this stands in stark contrast to the copious statements and explanations of the faith of believers. 

피스티스 크리스투 논쟁에 있어서 비슷한 맥락에서, 노먼 쉐퍼드(1933-)는 그리스도의 믿음이 중재자로서의 자신의 행위에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Along similar lines as the pistis Christou argument, Norman Shepherd (b. 1933) has maintained that Christ’s faith was integral to His work as mediator.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어진 언약을 충족시키는 것에 관하여, 쉐퍼드는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적 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이는 그를 온전하게 십자가로 이끄는 살아있는, 능동적인, 그리고 순종하는 믿음이었다. 이러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는 의롭다고 인정받게되어진 것이다.

Concerning the fulfillment of the covenant promise to Abraham, Shepherd writes that, ‘All of this is made possible through the covenantal righteousness of Jesus Christ. His was a living, active, and obedient faith that took him all the way to the cross. This faith was credited to him as righteousness.’

이러한 주장이 성경적 언어로 치장되었고 이러한 이유로 진실인 것처럼 보이지만, 쉐퍼드는 이를 그리스도께 잘못 적용하고있는 것이다.

While this statement is laced with biblical language and for that reason seems to ring true, Shepherd erroneously applies it to Christ. 

신약 어디에도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가 의롭게 여겨졌다고 말하는 곳은 없다.

Nowhere does the New Testament state that Christ’s faith was credited to Him as righteousness. 

바울이 믿음의 예를 제시할 때에는, 그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호소한다(롬 4:3)

When Paul puts forth an example of faith, he appeals to Abraham, not Christ (Rom. 4:3). 

대신에 신약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종을 언급하는 것들로 가득하다(마 3:15; 5:18-19; 요 4:34; 6:38-40; 17:3-6; 롬 5:12-21; 갈 4:4-5). 

Instead, the New Testament is replete with references to Christ obeying the will of His Father, not His faith (Matt 3:15; 5:18-19; John 4:34; 6:38-40; 17:3-6; Rom. 5:12-21; Gal 4:4-5).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자신의 행위와 순종으로 구원하셨다는 것은 바울이 믿음과 행위를 분명한 대조로 제시하는 이유가 된다(롬 2:13;G갈 3:10; cf. 신 6:24; 27.26).

That Christ saves His people by His works or obedience, is why Paul places faith and works in stark antithesis (Rom. 2:13; Gal 3:10; cf. Deut. 6:24; 27.26).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는 의심의 여지 없이 믿음을 가지셨지만, 그의 믿음은 구원하는 믿음과 다른 성격의 것이다.

Again, while Christ undoubtedly has faith, His is of a different order than saving faith. 

바빙크가 언급하였듯이: 우리에게 있어서,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형태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알고있는 죄의 상태의 결과에서만 얻어지는 믿음인 것이기 때문이다.

As Bavinck notes: Naturally faith for Christ was not, as it is for us, trust in the grace and mercy of God, for this feature is something faith only obtained as a result of the state of sin in which we find ourselves. 

본래 아담과 그리스도에 있어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의지하는 행위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며, 보이지 않는 것을 붙잡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께서도 하신 것이다(마 27:46; 히 2:17-18; 3:2)

By nature faith for Adam and Christ was nothing other than the act of clinging to the word and promises of God, a holding on to the Invisible One. And that is what Jesus did as well (Matt. 27:46; Heb. 2:17-18; 3:2).

보스도 비슷한 언급을 하였다: '죄인 안에서 실행되어지는 구원하는 믿음으로서의 믿음이라는 특별한 형태는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Vos similarly states: ‘Of the specific form that faith, as saving faith, takes within the sinner, nothing can be seen in the sinless Christ.’ 

그러므로 행위언약에서의 칭의는 순종에 의한 것이며, 은혜언약에서는 오직 믿음에 의한 것이다.

Justification in the covenant of works is therefore by obedience and in the covenant of grace it is sola fide

 

posted by Wonho Kim
:
스캇 맥나이트 2020. 11. 1. 23:06

스콧 맥나이트의 "예수 왕의 복음"과 메튜 베이츠의 "복음적 충성"에 대한 그레그 길버트의 비평

번역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이번 그레그 길버트의 강연은 스콧 맥나이트의 "예수 왕의 복음"과 메튜 베이츠의 "복음적 충성"을 염두에 두고서 이들이 주장하는 "왕의 복음"이 무엇이 문제인지를 잘 드러내주고있다.

스콧 맥나이트는 자신의 저서 "예수 왕의 복음"에서 많은 부분에서 그레그 길버트의 “Who is Jesus”에서 제시하는 복음의 의미에 이의를 제기하기도했다.

또한 메튜 베이츠는 자신의 저서 "충성으로 받는 구원"과 "복음적 충성Gospel Allegiance”에서 스콧 맥나이트가 강조하였던 왕의 복음을 근거로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충성을 제시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예수가 왕이 되셨다는 사실 자체가 복음이라고 주장한다.

그레그 길버트는 2020년 4월 "T4G”에서의 강연에서 스콧 맥나이트와 메튜 베이츠가 주장하는 왕의 복음에 대한 비평을 하게된다.

그레그 길버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심과 참된 왕의 복음이 무엇인지 왕의 역할을 중심으로 풀어나간다. 

맥나이트와 베이츠의 왕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왕되심과 왕으로서의 역할을 분리시키고있다.

길버트는 왕의 복음이 왕되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분리될 수 없음을 서술하고있다.

다음 글은 2020년 4월 "T4G”에서의 강연 내용이 실린 https://www.9marks.org/article/a-t4g-2020-sermon-what-is-and-isnt-the-gospel/에서의 글을 번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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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복음이고 무엇이 복음이 아닌가
A T4G 2020 Sermon: What Is and Isn’t the Gospel  
 
그레그 길버트
By Greg Gilbert

Article
04.15.2020

이번 강연에서의 제목은 "무엇이 복음이고 무엇이 복음이 아닌가?"입니다. 저는 T4G의 인도자들이 저에게, 이번 달로 쓴지 10년이 되는 "복음이란 무엇이가?"라는 책 때문에, 이번 강좌를 부탁했으리라 생각해봅니다. 그동안 주님이 "이 작은 검정 책"을 사용하셔서 신자들을 격려하고 심지어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하는데 어떻게 사용하셨는가를 듣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The title of this talk is “What Is and Isn’t the Gospel?” I have to assume the grand poohbahs of T4G asked me to do this talk because of a book I wrote ten years ago this month, called What is the Gospel? It’s been wonderful through the years to hear the stories of how the Lord has used “that little black book” to encourage believers and even bring people to faith in Jesus.

그러나 믿든지 안 믿는지 간에, 이 책을— 그리고 우리가 책임져야할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복음에 대한 정의; 인간의 죄의 문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왕이신 예수의 대속적인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해결책; 그리고 회개와 믿음으로 예수께 반응하도록 하는 우리에 대한 부르심을—폄하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But believe it or not, that book—and it’s definition of the gospel as a proclamation of whom we are accountable to; the problem of human sin; God’s solution to that problem in the substitionary life, death, and resurrection of King Jesus; and the call for us to respond to Jesus in repentance and faith—has not been without its detractors.

복음의 핵심
THE BEATING HEART OF THE GOSPEL

저는 지금 제가 10년 전에 쓴 책을 변론하려고 이 시간을 사용할 의도는 없습니다. 대신에 저는 이 시간을 한 가지 특별한 도전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합니다. 이 도전은 성경이 가르치고있는 복음의 핵심이, 우리를 위한 예수의 형벌에 대한 대속적 속죄와, 그를 믿는 것으로 인한 우리의 칭의에 관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우리 모두에 대한 것입니다.
Now, I don’t intend to use this time to defend a book I wrote ten years ago. Instead, I want to use this time to engage in a conversation with one particular charge that’s often leveled against all of us who understand the Bible to teach that the beating heart of the gospel is Jesus’s penal substitutionary atonement for us and our justification by faith alone in him.

나는 최근에 이러한 도전을 하는 두 권의 책, 스콧 맥나이트의 "예수 왕의 복음"과 메튜 베이츠의 "복음적 충성: 구원을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놓치고 있는 것"을 다시 읽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다른 책들 가운데서도 나의 작은 검은 책에 대하여 반응하는데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할애 하였습니다. 나는 특히 감사하게도 베이츠의 책에서 거의 끝나갈 무렵에 그가 요점을 정리하는 가운데에서 다음 문장을 마주치게되었습니다:
I was recently re-reading two books that make this charge, Scot McKnight’s The King Jesus Gospel and Matthew Bates’s Gospel Allegiance: What Faith in Jesus Misses for Salvation. These authors spend a considerable amount of time interacting with my little black book, among others. I was especially gratified to run across this sentence in Bates’s book, near the end, when he’s summing things up:

만약에 챈들러, 길버트, 맥아더, 파이퍼, 그리고 스프로울과 같은 개신교 지도자들이 복음의 참된 내용과 경계들을 규정하는데 실수한다면, 개신교인들은 이들과 교제를 끊거나 아니면 파면시켜야하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이는 매우 부적절한 일일 것이다.
Should Protestants break fellowship with or excommunicate Protestant leaders such as Chandler, Gilbert, MacArthur, Piper, and Sproul if it is true that they have made mistakes about the true content and boundaries of the gospel? Absolutely not. This would be wildly inappropriate.

이것을 읽는 나의 처음 생각은 물론 "와, 나쁘지 않은 사람이군; 나는 이를 받아들이겠어."였습니다. 나는 이러한 문장을 지워버리고 달리 생각하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깨닫게 된 것은 "잠깐, 그는 개신교인들에게 나와 교제를 끊고 나를 추방해야 할 것을 요청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제 마음을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는 우리가 추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베이츠는 나중에 자신들이 이것을 아주 강조할 수는  없겠지만, 매트 챈들러, 존 파이퍼, R. C. 스프로울과 제가 실제로 깊게 낙담해서 구원의 길로 예수를 신뢰하게 될 것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My first thought on reading this, of course, was “Wow. Not bad company; I’ll take it.” I wanted to take that sentence out and frame it. But then I realized, “Wait, did he just ask if Protestant evangelicals should break fellowship with me and excommunicate me?” That wonderfully concentrates the mind! Thankfully, he we shouldn’t be excommunicating. Bates later writes that maybe Matt, John, R. C. and I are actually, deep-down, trusting in Jesus in a saving way even if we can’t articulate it very well.

어떻든 간에, 제가 이 두 가지 책을 제시하게 된 것은, 그들이 자신들 만의 방식으로, 이 분들에게서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 복음적 개혁주의 진영도 비난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유로 잠시 동안 이에 대한 전체 윤곽을 그리고자 합니다. 이러한 비난은, 우리가 죄를 위한 예수의 대속적 형벌 속죄와 그리스도만을 믿는 믿음만으로의 칭의에 대한 복음 선포에 집중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복음의 핵심에 있는 것은 무시하면서 또한 승화시킨다는 것입니다.
Anyway, the reason I bring these two books up is because, in their own way, they each make the same charge against those of us in this Reformed evangelical camp, if I can paint in broad strokes for a minute. That charge is that in centering the proclamation of the gospel around Jesus’s penal substitutionary atonement for our sins, and on justification through faith alone in Christ alone, we are ignoring and sublimating what is actually the heart of the gospel.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인지요? 맥나이트나 베이츠, 그리고 다른 이들은 어떤 때는 미요한 차이로, 어떤 때는 상당한 차이와 불일치를 보여주면서 자신들만의 방식을 만들어 가지만, 그 중심에 있는 명제는, 복음은 예수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메시아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선언이라는 것입니다. 맥나이트는 이러한 선언을 "복음은 이스라엘의 이야기의 절정으로서의 예수의 이야기"로서 이러한 이야기에는 왕권 뿐만이 아니라 다른 맥락들도 포함하고 있지만, 확실하게는 왕권이 이 이야기의 핵심에 있습니다. 베이츠는 이를 궁극적이고 단도직입적으로 "복음의 절정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왕이시라는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And what’s that? Well, McKnight, Bates, and others make their own cases, with sometimes subtle and sometimes enormous differences and disagreements, but the central proposition seems to be that the gospel is the declaration that Jesus is the long-awaited Messiah or King of Israel. McKnight puts that declaration as “The gospel is the Story of Jesus as the culmination of the Story of Israel,” which involves not just kingship but other threads in the story as well; but kingship is certainly key to that Story. Bates puts it utterly straightforwardly: “The gospel climax is that Jesus is the Christ, the King.”

물론 이러한 도전의 취지는 우리 복음주의자들이— 특히 복음주의 설교자들이— 성경의 거대하고 포괄적인 이야기 맥락에서 예수를 제거하지 말것을 확실히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도 이는 좋은 경고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말하고자합니다. 이는 심지어 많은 복음주의적 가르침, 특히 최소한 우리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연자가 복음주의자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구약으로부터 떼어낼 것을 요구하는 경우에는 합법적인 비평으로 자리매김 될 것입니다.
The burden of that charge, of course, is to make sure that we as evangelicals—especially as evangelical preachers—don’t excise Jesus from his place in the grand, sweeping storyline of Scripture. And I have to say, I think that’s a good warning. It may even qualify as a legitimate critique of much evangelical preaching, especially when at least one of our most well-known spokesmen is explicitly calling on evangelicals to “unhitch the Christian faith” from the Old Testament.

사실 우리들 상당 수는, 대속적 속죄와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라는 단순한 (실은 사실인) 전제에 의한 복음을 가르치는 것에서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서사시를 다시 수용하여서 이러한 것들을 전체적인 이야기의 맥락에 적당한 위치에 가져다 놓은 것을 가르치는 것에서 도움을 받고있습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기독교가 냅킨에 쓸 수 있는 서너 문장들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관심을 끌기 위해서 경쟁하고있는 다른 다양한 세계관과 종교들과 비교해서 협소하고 얄팍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는, 여러분이 이를 이해를 하게되었을 때에는, 예수를 놀랄만하게 끔찍하게 만들어 버리는, 왕들과 정복들과 실패와 구속의 이야기인 세계의 역사와 미래에 관한 마법에 묶여있는 이야기에 의존하게 될 것입니다.
It’s true: Many of us would be helped in our preaching of the gospel by not just preaching the simple (though true) propositions of substitutionary atonement and justification by faith alone, but by re-embracing the epic of the Bible, placing those things in their proper place in the grand storyline. If people think Christianity is about three or four sentences that you can fit on a napkin, it’s going to seem shallow and flimsy compared to the myriad other worldviews and religions that are competing for their attention. Christianity rests on a spell-binding story about the history and future of the world—a story of kings, conquests, failures and redemptions that, when once you understand it, makes Jesus breathtakingly awesome.

"왕의 복음"이라는 것이 있는가?
IS THERE A “KINGSHIP GOSPEL”?

그러나 이번 경우에 제가 "왕의 복음"이나 "충성의 복음"을 만드는 책들에 관해서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은, 여기에는 예수의 왕권의 이야기를 개인적인 구원, 용서, 속죄 그리고 칭의의 실상과 분리시키고자하는 시도가 자주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혹스러운 것은; 그 메세지가 바로 “구원이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십자가의 말씀과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을 가르치세요”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보다는  종종 “복음은 예수가 왕이라는 것이지 자신의 백성을 위해서 구원을 성취하신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But what I don’t understand about books that make this case for a “kingship gospel” or a “royal gospel” is why there’s so often an impulse to take the story of Jesus’s kingship and divorce it from the realities of personal salvation, forgiveness, atonement, and justification. It’s puzzling; because the message isn’t just “Don’t forget that salvation has a history; preach the word of the cross and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It’s often something more like, “The gospel is that Jesus is king and not that he wins salvation for his people.”

예를 들자면, 스콧 맥나이트는 복음을 “예수의 이야기가 이스라엘 이야기의 절정이라는 선언”과 그가 소위 말하는 “구원의 계획"이라고 묘사하지만, 그는 이 둘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고 있습니다.
Scot McKnight, for instance, describes the gospel as “the declaration of the Story of Jesus as the culmination of the Story of Israel,” and what he calls “the Plan of Salvation.” But then he draws a hard distinction between the two:

이제 세번째로 다루고자하는 커다란 주제는 (개인적) 구원 계획에 관한 것입니다. 구원 계획은 이스라엘/성경 이야기와 예수의 이야기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이스라엘로부터 예수로 이어지는 성경의 이야기는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복음을 붙잡기를 원한다면, 이러한 이야기의 중요성을 감히 축소시키지 않는 것과 같이, 이야기의 구원의 효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Now to our third big idea: the (personal) Plan of Salvation. The Plan of Salvation flows out of the Story of Israel/Bible and the Story of Jesus. The Bible’s Story from Israel to Jesus is the saving Story. Just as we dare not diminish the importance of this Story if we wish to grasp the gospel, so also with the saving effects of the story.

그러나 구원의 계획을 이스라엘의 이야기나 예수의 이야기와 동일시하는 것은 복음을 왜곡시키게 되는 것이며 어떤 때는 이야기 자체까지도 파괴시키게 될 것입니다.
But equating the Plan of Salvation with either the Story of Israel or the Story of Jesus distorts the gospel and at times even ruins the Story.

그는 구원은 복음으로부터 나타나거나 흘러나오지만 “구원의 계획과 복음은 같은 커다란 개념이 아니다”라고 자주 말하곤합니다.
He goes on to say it a few more times. Salvation “emerges from” and “flows from” the gospel, but “the plan of salvation and the gospel are not the same big idea.”

매튜 베이츠는 이를 좀 더  명확하게 말하지만 그 개념은 같은 것입니다:
Again, Matthew Bates says it even more starkly, but the idea is the same:

내 주장은 다르다: 우리들의 믿음에 의한 칭의는 복음의 일부가 아니다. 우리는 칭의와 믿음이 어떻게 각각 분리되어 서로에 관계하며, 복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관계하는 것을 정확하게 탐색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작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이 복음이다”라고 말하기 시작한다거나 혹은 심지어는 복음의 일부라고 말하기 시작할 때에는, 우리는 성경의 표현을 심각하게 왜곡시키게 되는 것이다.
My claim is different: our justification by faith is not part of the gospel. We need to work cautiously to ferret out exactly how justification and faith separately relate to each other and to the gospel. But when we begin saying that it is the gospel, or even part of the gospel, we seriously distort the Bible’s presentation.

여러분은 여기에서 핵심을 보게됩니다. 만약에 맥나이트나 베이츠와 같은 저자들이 우리에게, 혹은 저에게, 하는 주의사항이나 경고들이 "형제들이여,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은 믿음으로만 얻는 칭의의 진리를 가르치세요, 그러나 그것을 그것의 모든 영광스러운 서술적 내용에 적용하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라는 것이라면 저는 이에 동의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장들은 좀 다른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는 왕이시다"라는 것이 복음이며, 개인적인 구원, 속죄, 그리고 칭의는 복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You see the point here. If the caution and warning to us, even to me, from writers like McKnight and Bates is “Brother, preach the truth of justification by faith alone in Christ alone, but don’t forget to put it in all its glorious narrative context,” I’m there! But these passages seem to be saying something different. They seem to be saying that “Jesus is king” is the gospel, and that personal salvation, atonement, and justification are not.

예수는 왕이시다—그러나 왕의 역할은 무엇인가?
JESUS IS KING—BUT WHAT DOES THE KING DO?

이러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우리는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해야하며,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성경본문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이들의 글에는) 수 많은 증거본문들 보다도 더 높은 차원의 잘못이 있는데, 저는 이러한 이유에서 이번 강연의 나머지를 이를 좀 더 구체화하는데 사용하고자합니다. "예수는 왕이시다"는 복음이고, 개인적인 구원, 속죄, 그리고 칭의는 복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며, 이는 이스라엘에서의 왕권이 실질적으로 의미하는 것을 면밀하게 분석하려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왕의 존재와 그 역할에 대하여 면밀하게 조사하지 않은 것입니다.
What do we say to that? Well, we say it is wrong, and there are plenty of Scripture passages we could unpack to prove it. But I think it’s wrong even on a level higher than a bunch of prooftexts, and that’s what I want to flesh out in the rest of this talk. To say that “Jesus is king” is the gospel, and that personal salvation, atonement, and justification are not the gospel is wrong precisely because it doesn’t grapple with what kingship in Israel actually meant. It doesn’t grapple with who the king is and what he is expected to do.

그러므로 제가 여기서 원하는 것은 여러분이 예수가 왕이시라는 복음을 선언하여야하지만, 왕이 국민을 대신해서 세워졌으며, 국민들이 자신들의 죄로부터 구원을 받도록하기 위해서 대신 죽어야한다는 왕의 역할에 대해서 선언하지 않는다면 복음을 올바르게 선언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합니다. 
So what I want to do here is show that you should proclaim the gospel that Jesus is king—but you cannot rightly do that without proclaiming what that king does: The king stands in his people’s place, and he suffers and dies in their stead in order to save them from their sins.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단순히 부차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는 단순히 한 왕, 예수가 우연하게 하여야만 했던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백성을 대표하고 자신의 백성을 위해서 고통을 받는 것은 이스라엘에서 왕권이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왕에게 기대되었던 것입니다.
Now hear me out: that’s not just incidental; that’s not just what one king, Jesus, happened to have to done. To represent and to suffer for your people was what the kingship in Israel meant. It’s what the king was expected to do.

십자가 위의 왕?
A KING ON THE CROSS?

질문을 가지고 시작해봅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에서 우리는 어떠한 직무를 연관시키려는 경향이 있는지요? 제사장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맞습니다.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예수께서 죽으셨을 때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단번에 완전한 마침이 되는 희생의 제사장으로 드려지셨다고 기록하고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수난의 이야기들에서 어떠한 종류의 이미지가 가득하다는 것을 인지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는 제사장의 이미지가 아닙니다; 바로 왕의 이미지입니다. 예수는 로마군인에 의해서 채찍에 맞으시면서 자색옷이 입혀지시고 왕의 홀로서의 갈대가 주어졌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시면서는 가시관이 씌워졌습니다. 예수는 매달려 돌아가시면서 그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Let’s start with a question: what office do we tend to associate with Jesus’ death on the cross? Priesthood. And that’s right. Hebrews tells us that when he died, Jesus was acting as a priest to make a once-for-all final sacrifice to save his people. But have you ever noticed what kind of imagery suffuses the passion narratives? It’s not priestly imagery; it’s kingly imagery. As he’s scourged by the Romans, Jesus is dressed in a purple robe and given a reed as a scepter. As he’s nailed to the cross, Jesus is coronated with a crown of thorns. As he hung dying, the sign over Jesus’s head read, “King of the Jews.”

그러므로 예수의 죽으심의 이야기는, 좀 아름다우면서도 여전히 뒤틀려진 조롱의 방식으로, 예수는 제사장으로서가 아니라 왕으로 죽으셨다고 우리에게 절규하고 있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어느 정도는 특별하게, 그리고 일관되게 왕의 사역입니다. 이는 우리가 종종 왕권에 대하여 생각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왕이라는 것은 능력과 통치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통치권과 위엄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예수를 왕들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그의 고난과 겸손에 대하여 말할 때, 제사장적인 언어로 도달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So the story of Jesus’ death is screaming to us that, in some beautifully and yet wrenchingly ironic way, Jesus is dying not just as priest, but as king. His death is somehow particularly and uniquely king-like work. That’s not how we usually think of kingship. Kings are about power and ruling. When we talk about Jesus’ sovereignty and majesty, we call him King of kings. When we talk about his suffering and humiliation, we tend to reach for priestly language.

그러나 여기에 바로 오늘 여러분들이 보고서 기뻐해야 할, 제가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백성을 대신하는 예수의 죽으심과 그들을 자신들의 죄로부터의 구원하심은, 그의 왕으로서의 직무와 자연스럽게, 올바르게, 그리고 본질적으로 결합되어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왕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가 고난받는 구원자이심을 동시에 선언하지 않고서는 예수의 왕되심을 올바르게 선포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은, 하나님의 백성이 단지 왕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도살당하신 왕의 피에 의해서 구원받을 것이라는 복음을 향하여있다는 것이 바로 제가 여러분에게 보여주고자하는 것입니다.
But here’s what I want you to see and rejoice in today: Jesus’s death in his people’s place, his salvation of them from their sins, is naturally, rightly, and inherently tied to his office as king. In fact, you can’t understand kingship without understanding that. You cannot rightly proclaim Jesus as king without proclaiming him also as Suffering Savior. That’s what I want to try to show you—that the whole Bible strains toward the good news that God’s people will be saved not just by a king, but by the blood of a Slaughtered King.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예
A BIBLICAL-THEOLOGICAL CASE

이러한 목적에서 약간의 성경 신학을 하면서, 특별히 왕권, 대표성, 그리고 고난이라는 성경 이야기의 문맥을 따라 몇 가지 주제를 추적해 봅시다. 우리는 이를 네가지 장면에서 볼 것입니다.
To that end, let’s do a bit of biblical theology, tracing a few themes through the storyline of the Bible—particularly Kingship, Representation, and Suffering. We’ll look at this in four acts:

동산에서의 왕
이스라엘에서의 왕
예언서에서의 왕
자신의 아름다움에서의 왕
동산에서의 왕
The King in the Garden
The King in Israel
The King in the Prophets
The King in His Beauty
The King in the Garden

창세기 1장 28절은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으로하여금 땅을 지배하고 다스리도록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으로하여금 동물들의 이름을 짓도록 하셨읍니다. 하나님께서는 권위의 구조를 설립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이 뱀의 모습으로 이브에게 온 이유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창조 조직에 세우신 모든 권위의 구조들을 거꾸로 뒤집어서 전복시키길 원합니다.
Genesis 1:28 defines what it means to be the image of God. God commissions Adam to have dominion and subdue the earth. He has him name the animals. God is setting up structures of authority. This is why Satan comes to Eve and as a snake. He wants to upend and overthrow all the structures of authority that God had placed into the fabric of creation.

우리는 이미 왕권이 취하는 모습의 의미와 목적을 볼 수 있는데, 왕의 역할은 하나님을 그의 창조 세계에 올바르게 투영시킴으로서 의 가운데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는 동산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아담이 하기로 되어있었던 것이었지만, 그는 이러한 역할에 실패하였던 것이었습니다.
Already we can see the meaning and purpose of kingship taking shape—the role of the king is to act in righteousness by rightly imaging God to His creation. He must protect the Garden. That’s what Adam was supposed to do, and he failed to do it.

우리는 아담이 하나님 아래서 두 가지 직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는 왕이었습니다—여러분은 이를 통치 언어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직책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2장 15절에서는 아담이 동산을 경작하고 지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경작하다는 아바드라는 단어는 정확히 그것이 들리는 그대로를 의미합니다. 아담은 동산의 관리인으로서 동산을 경작하고 동산의 성장과 아름다움이 자라도록 격려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동산을 지켜야만 했는데, 이는 단순히 동산을 현재적으로 지키는 것 이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그보다는 "보호"한다거나 "방어"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어떠한 악한 것이나 불결한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하여야 했으며, 만약에 이러한 일이 발생할 경우 악이 심판을 받고 쫓겨나도록 확실하게 했어야만 했습니다.
We should note that Adam held two offices under God. He was king—you can see that in the dominion language. But he held another office as well. Genesis 2:15 says that Adam needed to “work” and “keep” the garden. The word “work,” abad, means exactly what it sounds like. Adam was to be the caretaker of the garden, to cultivate it and encourage its growth in maturity and beauty. And he was to “keep” (shamar) the garden, which means more than just keeping it presentable. It means, rather, “guarding” it, “protecting” it, and making sure that nothing evil or unclean ever entered it, and if it did, to make sure that evil was judged and cast out.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두 가지 단어, "일"이라는 아바드와 "지키다"라는 샤마르가 아담 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성전/성막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에덴 동산은 그 근본적인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하시는 완전한 성전이었습니다. 성막과 성전을 아바드하고 샤마르하였던 제사장과 같이 아담도 성전을 아바드하고 샤마르했던 것입니다. 아담은 에덴에서의 단순한 왕이 아니었습니다; 아담은 제사장이면서 왕이었습니다. 아담에게 제사장직과 왕직은 서로 연합되어 있었습니다.
What’s fascinating is that these two words, abad, “work” and, shamar, “keep,” are the precise job description not only of Adam, but of the priests in Israel’s temple/tabernacle. That’s not just a coincidence. The Garden of Eden was, in its very essence, a perfect temple—the dwelling place of God with man. And like the priests who would abad and shamar the tabernacle and the temple, so Adam was to abad and shamar the temple of the Garden of Eden. He was not only king in Eden; he was priest-king. The offices of priest and king were united in him.

물론 결론은 아담은 에덴에서 제사장-왕으로서 동산을 보호하는 행동을 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는 뱀을 처형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탄의 반역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여자와 뱀과 함께 동산에서 쫓아내시고 천사로 하여금 입구를 지키게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화염검으로 생명 나무에 이르는 길을 완벽하게 지키(샤마르)셨습니다(창 3:24). 아시겠습니까? 만약에 대리 통치자가 동산을 샤마르하지 못한다면, 높으신 왕이 직접 그렇게 하십니다. 
The upshot, of course, is that, as the priest-king in Eden, Adam should have acted to protect the Garden. He should have executed the snake. But he didn’t. He joined Satan’s rebellion. Thus God cast him out of the garden, along with the woman and the serpent, and placed an angel at the entrance. He would, with a flaming sword, fascinatingly, “guard [shamar] the way to the tree of life” (Genesis 3:24). See? If the vice-regent would not shamar the garden, the High King would do so himself.

창세기 3장의 끝부분에 와서는 상황이 절망적으로 보입니다. 죄가 권세를 잡고, 죽음이 지배하기 시작하였으며, 여러분이 이야기를 미리 알고있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어떠한 희망도 없었을 것을 우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대변혁에서의 희망의 빗장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실패한 것을 대신 하게될 누군가 다른 이가 오게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창세기 3장 15절을 기억할 것입니다.
By end of Genesis 3 the situation looks hopeless. Sin takes hold, death begins to reign, and if you didn’t know the story already, you’d wonder if there is any hope at all. But then you remember Genesis 3:15—a bolt of lightning in the cataclysm—in which God promises that someone else will come who will do what Adam failed to do.

여기서 "왕"이라는 단어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이 "여자의후손"이 아담이 실패한 왕적인 통치를 실행할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아담이 떨어뜨린 검을 집어들고서, 아담이 동맹한 원수를 죽일 것이며, 아담이 패배한 전쟁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아담은 왕이 되기를 실패하였지만, 그는 최종적으로 왕이 되실 것입니다.
The word “king” isn’t used there, but it’s clear that this “seed of the woman” will exercise the kingly dominion that Adam failed to. He’ll pick up the sword that Adam dropped, slay the Enemy that Adam allied with, and win the battle that Adam lost. In other words, he’ll finally be the king that Adam failed to be.

이러한 점에서, 성경 전체의 줄거리는 커다란 질문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누가 창세기 3장 15절에서의 새로운 왕에 대한 약속된 성취가 될 것인가?" 누가 왕이며, 그가 어떻게 아담이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입힌 손상을 회복시킬 것인가?
From that point, the whole storyline of the Bible begins to revolve around the great question: “Who is going to be the fulfillment of the promise of a new king in Genesis 3:15?” Who is the king, and how does he repair the damage that Adam has done by his rebellion against God?

우리는 이러한 질문이 창세기의 나머지 부분에서 실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4장에서는 가인이 아닌가 의심해 보게 되고, 창세기 5장 29절에서 라멕은 진짜 노아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됩니다.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창세기 3장 15절의 성취에 대한 희망이 단순히 왕의 오심이 아니라, 죽음과 저주를 바꾸어 놓을 왕이라는 것은 놀랄만한 일입니다. 정확하게는 이러한 관점에서 그가 하실 일은 아직 막연한 것이지만, 이와같은 이야기의 초기 부분에서 제가 여러분이 알기를 원하는 것은, 창세기에서 선언된 복된 소식이 단순한 왕의 오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된 소식이란, 왕의 오심이 구원, 즉 저주의 종결과 죄로부터 기인된 죽음과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회복시키는 구원을 의미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왕이 하는 것입니다.
We can see that question working itself out in the rest of Genesis. In chapter 4, we wonder if it’s Cain, then in Genesis 5:29, Lamech really thinks its Noah. “Out of the ground that the Lord has cursed, this one shall bring us relief from our work and from the painful toil of our hands.” It’s also striking that the hope of a fulfillment of Genesis 3:15 isn’t just the coming of a king, but a king who will reverse death and the curse. Exactly how he’s going to do that is still cloudy at this point, but here’s what I want you to see, even this early in the story: The good news proclaimed in Genesis is not just the coming of the king. The good news is that the arrival of the king will mean salvation—it will mean an end to the curse, and a reversal of the death and separation from God that resulted from sin. That’s what the king does.

창세기의 이어지는 몇몇 장들에서는, 창세기 3장 15절에서의 오실 왕에 대한 약속이 한 사람, 아브라함과 그로부터 기인된 민족에 초점이 맞추어지게 됩니다.
Through the next few chapters of Genesis, that Genesis 3:15 promise of a coming king focuses on one man, Abraham, and the nation that would come from him.

이는 우리를 두 번째 장으로 인도합니다.
That brings us to the second act.

이스라엘에서의 왕
The King in Israel

창세기 12장에서는,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집중되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로부터 후손이 나올 것이며, 이 (창세기 3장 15절에서와 같은 용어인) 자녀가 세상의 족속들에게 저주 대신에 축복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 15절의 성취로서의 약속된 자녀는 아브라함도 아니며, 이삭도 아니며, 야곱도 아닙니다. 사실 창세기의 나머지 부분은 Kill the Carrier라는 거대한 게임과도 같습니다. 루우벤?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의 첩과 동침했습니다. 시몬? 아닙니다. 레위? 아닙니다. 그들은 세겜에서 완전히 고약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혹시 유다는? 아닙니다, 다말과의 불행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 그가 약속된 왕일 것이다!
In Genesis 12, it’s clear that God’s promise of salvation has localized on Abraham. From him will come the Seed, the Offspring (same word as Gen 3:15) who will bring blessing instead of curse to the families of the world. But the promised seed, the fulfillment of Genesis 3:15, is not Abraham, nor Isaac, nor Jacob. In fact, the rest of Genesis reads like a giant game of Kill the Carrier. Reuben? Nope, sleeps with his father’s concubine. Simeon? Nope. Levi? Nope. They do the whole nasty thing in Shechem. Maybe Judah? Nope, unfortunate incident with Tamar. Oh, it’s Joseph; he’s the promised King!

하지만 그 다음에 우리는 창세기 49장 10절을 보게됩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놀랄 일입니다. 결국은 유다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은 아직 거기에 머물러있으며 감질나게 애를 태우지만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
But we find then Genesis 49:10. “The scepter shall not depart from Judah, nor the ruler’s staff from between his feet, until he comes to whom it belongs!” Shocking; it’s Judah after all. And the promise of Genesis 3:15 still hangs there, tantalizing but unrealized.

모세 오경의 나머지 부분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왕이 올 것이라는 약속을 유지하시고 계십니다. 심지어는 민수기 24장에서 이방인 마술사인 발람은 미래를 가리키며 예언합니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 . . 주권자가 야곱에게서 나서 남은 자들을 그 성읍에서 멸절하리로다." 여러분은 창세기의 메아리들을 쉽게 들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Through the rest of the Pentateuch, God keeps promising his people that the king is coming. In Numbers 24, even this pagan sorcerer Balaam points to the future and says, “I see him, but not now; I behold him, but not near. A star shall come out of Jacob, and a scepter shall rise out of Israel. . . . And one from Jacob shall exercise dominion.” You can easily hear the echoes of Genesis.

그러나 아직은 약속이 다가오기에는 멀었습니다. 사사기의 끝 무렵에서 우리는 계파들의 혼란과 연약함의 한 가운데에서 불길한 반복구를 듣게됩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왕이 없었더라."
But still, the promise is long in coming. By the end of Judges we hear the ominous refrain in the midst of rank chaos and wickedness: “There was no king in Israel.”

마침내 사무엘서에서 왕이 나타납니다. 사무엘 상하의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어떻게 왕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의 밑바탕과 그 안에는 다른 것이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에서의 왕위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치심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에 와서 왕의 역할과 책임이 선명해지기 시작합니다.
In the books of Samuel a king finally arrives. The story of 1 and 2 Samuel, on its face, is the story of how the nation of Israel got a king. But underneath and within that story is another one—the story of God teaching what Kingship in Israel was all about. In David, the role and responsibility of the King begin to become clear.

이러한 책임이라는 것들이 무엇이겠습니까? 대표성과 고난으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이것이 왕이 하여야할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는 자신 안에서 백성을 대표하고있으며 고난을 감당합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하여 생각해봅시다.
What are those responsibilities? They are particularly representation and suffering. As the story plays out, it becomes clear that this is what the king does. He represents the people in himself and he suffers. Let’s think about both.

먼저 대표성입니다. 이는 감을 잡기에 대단히 어려운 개념은 아닙니다. 통치자는 그들 국가의 실제적인 정체성을 대표하고 있다고 흔히들 말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왕위에서의 강력한 주제였으며,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문구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이것이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언급하고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또한 잘 알려진바대로 이스라엘 왕을 칭하는 보좌의 명칭이었습니다.
First, representation. This isn’t a terribly hard concept to grasp. Sovereigns are often said to represent the very identity of their nation. This was a strong theme in Israelite kingship, and we can see it in several ways. For instance, think about the phrase “Son of God.” We know it refers to Jesus being the second person of the Trinity, the Son of God. But it was also a well-known throne title for King of Israel.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삼하 7: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시 2:7)
하나님께서는  왕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내게 부르짖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내가 또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시 89:26-27)
그렇다면 대표자로서 이스라엘 왕의 역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어떤 이유에서 이와같이 "아들됨"이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겠습니까?
“I will be to him a father, and he will be to me a son” (2 Sam. 7:14).
“The LORD said to me, ‘You are my Son’” (Ps. 2:7).
God says of the king, “He shall cry to me, ‘You are my Father, my God, the Rock of my Salvation, and I will make him the firstborn, the highest of the Kings of the earth’” (Ps. 89:26).
Now, why would this use of “sonship” language be important in understanding the role of Israel’s king as representative? 

자 그럼 출애굽기 4장 22-23절을 살펴봅시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 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왕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장자”인 이유는 이스라엘이 먼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장자”였기 때문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왕 안에서 취하여지고 요약 되어졌습니다. 그들은 왕과 연합되어 있었습니다. 왕은 이스라엘을 대표합니다.
Well, consider Exodus 4:22–23: “Then you shall say to Pharaoh, ‘Thus says the Lord, Israel is my firstborn son, and I say to you, ‘Let my son go that he may serve me.’” The reason the king was the “son” and “firstborn” of God was that Israel first was the “son” and “firstborn” of God. Do you see? The identity of Israel was taken up and summed up in the King. They were united to him. He represented them.

대표한다는 것은 왕이 국민을 위해서 행동하는 중요한 방식으로  이해되어져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왕이 한 것은 국민이 한 것입니다. 왕이 한 것은 국민에게 결과로 나타납니다. 역대상 21장 3, 7절을 봅시다. 요압은 다윗에게 인구조사를 하지 말기를 간청합니다. 요압은 다윗에게 요청하기를: “내 주께서 어찌하여 이 일을 명령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하시나이까?” 그러나 왕의 말은 요압을 제압하였습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에 화가 나셨으며, 이스라엘을 치셨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시지않습니까? 왕은 행동하였고, 왕은 범죄하였으며, 그 결과로 국민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시편 89편도 봅시다:
That representation meant that the king was understood in important ways to act for the nation. What he did, they did. What he did had ramifications for them. Consider 1 Chronicles 21:3, 7. Joab is pleading with David not to take a census of the people. He asks him: “‘Why then should my lord require this? Why should it be a cause of guilt for Israel?’” But the king’s word prevailed against Joab. . . . But God was displeased with this thing, and he struck Israel.” Did you notice what happened? The king acted, the king sinned, and the nation suffered the consequences. Consider also Psalm 89:

주께서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노하사 물리치셔서 버리셨으며 
주의 종의 언약을 미워하사 그의 관을 땅에 던져 욕되게 하셨으며
But now you have cast off and rejected;
you are full of wrath against your anointed.
You have renounced the covenant with your servant;
you have defiled his crown in the dust.

그의 모든 울타리를 파괴하시며 그 요새를 무너뜨리셨으므로 
길로 지나가는 자들에게 다 탈취를 당하며 그의 이웃에게 욕을 당하나이다 
You have breached all his walls;
you have laid his strongholds in ruins.
All who pass by plunder him;
he has become the scorn of his neighbors.

주께서 그의 대적들의 오른손을 높이시고 그들의 모든 원수들은 기쁘게 하셨으나 
그의 칼날은 둔하게 하사 그가 전장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하셨으며
You have exalted the right hand of his foes;
you have made all his enemies rejoice.
You have also turned back the edge of his sword,
and you have not made him stand in battle.

왕에게 일어난 일이 국민에게 일어났으며, 국민에게 일어난 일이 왕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서로가 분리될 수 없게 연합되어 있습니다. 왕은 국민을 대표하며, 그들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What happens to the king happens to the people, and what happens to the people happens to the king. They are inseparably united to one another. He represents them; he stands in their place.

대표성 이외에도 다윗의 삶은 고난 받는 것이 왕의 신분의 또 다른 주된 주제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왕이 된다는 것은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이야기 속에 담겨있습니다ㅡ다윗의 삶은 궁전에서의 안락한 삶이 아니라 고난의 삶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살았으며, 그는 적의 포로가 되었으며, 심지어는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그의 통치는 가족의 반란과 시민 전쟁, 그리고 죄의 결과 등으로 파괴되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다윗 언약에서 왕에게 고난을 약속하셨습니다: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삼하 7:14). 시편을 보십시오. 시편의 많은 부분이 다윗이 괴로움과 고통ㅡ어떤 때는 개인으로서, 그러나 어떤 때는(특히 2권에서) 국민의 소리로ㅡ 부르짖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권이 끝나갈 무렵인 시편 89편에서는 왕의,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국민 자체의, 부끄러움과 절망을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Besides representation, David’s life teaches that suffering is another major theme of kingship. To be king is to suffer. It’s right there in the story—David’s life is not one of royal ease; it’s one of suffering. He lives in the wilderness, he’s captured by enemies; even when he takes the throne, he doesn’t have an easy time. His reign is wracked by family strife, civil war, and consequences for sin. In fact, God promises suffering for the king in the Davidic Covenant: “When he commits iniquity, I will discipline him with the rod of men, with the stripes of the sons of men” (2 Sam 7:14). Read the Psalms. Many of them show David crying out in distress and pain—sometimes as an individual, but sometimes (especially in Book 2) as the voice of the nation. By end of Book 3, Psalm 89 reveals nothing but shame and despair for the king and therefore for the nation itself.

이제 정리를 해봅시다. 왕위가 발전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동산에서 아담은 왕으로서 하나님을  피조물에 올바르게 형상화하면서 의롭게 지배하는 행동을 하여야만 했습니다. 왕인 아담은 실패하였지만 또 다른 왕이 약속되었습니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과의 언약에서 구체화되면서, 다윗 왕은 이스라엘에서의 왕권의 진정한 속성은 자신 안에  국민을 대표하고 고난을 받는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So let’s take stock. Can see picture of kingship developing? In the Garden, Adam the king must act in righteous dominion by imaging God correctly to creation. King Adam fails, but another is promised. That promise crystallizes in a covenant with David, King of Israel, who learns that the very nature of kingship in Israel is to represent the people in himself and to suffer.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구원의 결과를 가져오는지 아직은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이것들은 의미에 있어서 전혀 다른 것이며, 서로 연결되어있지 않은 파편들입니다. 왕은 대표를 해야하며, 왕은 고난을 받아야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이러한 것들을 서로 연관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It’s still not clear, though, how this is going to result in salvation. These are disparate, unconnected shards of meaning. The king would represent and the king would suffer. But what do those things have to do with each other?

확실한 것은, 이스라엘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위해서 고난을 받고, 죽음으로서 다른 존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대리적 고난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희생 제도의 전체적 교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사장의 영역이었으며, 왕의 영역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왕이 제사장의 의무를 실행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웃시아 왕이 이러한 일을 시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나병으로 치셨으며, 그는 도시 바깥의 나환자 촌에서 죽었습니다. 이것이 다윗 왕조가 가장 난점 가운데 한 가지였습니다.
Sure, Israel had an understanding of vicarious suffering—one thing suffering for another, dying so that another wouldn’t have to. That’s the whole lesson of the sacrificial system. But that was the realm of the priests, not the king. In fact, it was forbidden for the king to do the duties of the priest. When King Uzziah tried, God struck him with leprosy and he died outside the city in a village of lepers. That’s one of the lowest points of Davidic Dynasty.

그렇다면 왜 이러한 왕권의 의미의 분리된 조각들이 나실인의 파편과 같이 놓여 있겠습니까? 이것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들을 함께 모아 놓는다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한다면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대하여 좀 더 드러낸 것과 같이 좀 더 선명해질 것입니다.
So why these disparate pieces of the meaning of kingship, lying there like the shards of Narsil? What do they mean? What do they become when you put them together? That would become a bit clearer as prophets revealed more of God’s plan and purpose.

예언서에서의 왕
The King in the Prophets

다윗의 생애가 끝나갈 무렵, 그는 창세기 3장 15절의 성취가 아니었음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는 약속된 왕의 희미한 모습이었지만,  그는 왕의 홀이 주어지는 이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다윗의 가족은 그를 대항하여 반역을 하였으며, 그의 아들 아도니아는 그의 죽어가는 부친이 침대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따스함으로 보호 받고 있는 동안 왕좌를 찬탈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분명 능력의 그림은 아닙니다.
By end of David’s life, it was clear he wasn’t the fulfillment of Genesis 3:15. He was a blurry picture of the promised king, but he wasn’t him to whom the scepter belongs. In the end, David’s family was in rebellion against him, and Adonijah his son tried to usurp the throne while his dying father was kept warm in bed by a beautiful woman. This isn’t exactly a picture of strength.

상황은 더 나아지지가 않았습니다. 솔로몬의 통치는 잠시동안은 영광스러웠지만 그의 죄로 인하여 붕괴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르호보암은 재앙이었으며, 그의 통치의 결과는 다윗의 왕좌를 두 개의 다른 왕국으로 분열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북왕국은 앗시리아의 침략을 받아 유배를 당하고, 다시는 소식이 들리지 않았으며, 남왕국은 바벨론에 두 번이나 침략을 당하였습니다.
The situation didn’t get better. Solomon’s reign was glorious for a time but collapsed because of his sin. His son Rehoboam was a disaster, the result of his reign being the splitting of the throne of David into two different kingdoms. Ultimately, the northern kingdom was invaded by Assyria and carried away into exile, never to be heard from again, and the southern kingdom was invaded twice by Babylon.

그러나 양쪽 모두의 왕국에서 이러한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들 모두에게 일련의 선지자들을 보내시면서 국민들에게 회개를 요구하시면서 동시에 미래를 가리키면서,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의도를 재확인 시켜주었습니다. 수 세기에 걸쳐서 선지자들은 이러한 왕권과,연합, 대표성, 그리고 고난의 줄기들을 끄집어내서, 이러한 것들로부터, 그들을 위해서 고난을 받고 그들을 구원함으로서 자기 백성들을 대표할 놀랄만한 왕의 모습을 엮어내기 시작하였습니다.
Through all this, though, in both kingdoms, God sent a series of prophets both to call the nation to repentance and to point them to a future, reaffirming God’s intention to keep the promise of Genesis 3:15. Through the centuries, prophets picked up these threads of kingship, union, representation, and suffering and began to weave them together into a breathtaking picture of a king who would represent his people by suffering for them, and so save them.

이와같은 것을 몇 군데에서 살펴보겠습니다.
Let me show you this in a few places.

먼저 이사야서를 보겠습니다. 이사야 예언의 처음 부분을 우리는 왕의 책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웃시아의 끔찍스러운 죽음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3장, 민수기 24장, 사무엘하 7장, 시편 2편 등에 쌓여있는 약속들을 지키시겠다는 자신의 결정을 재확인시켜주십니다. 우리는 이사야서의 두 번째 부분을 고난받는 종의 책이라고 부릅니다. 그 안에는 백성들의 죄악의 희생물로서 자신의 백성을 대신하여서 고난을 받으시는 주의 고난받는 종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이사야서 53장에서 두드러지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이사야서를 읽으시면서 더욱 놀라게되는 것은, 이 약속된 왕과 고난받는 종이 한 사람이면서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이 파편 조각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제서야 어떻게 국민에 대한 왕의 대표성과 왕의 고난이 하나로 합쳐지는지를 보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3장 15절은, 단순히 고난받는 왕이 아니라, 국민의 대표자로서 그들을 위해서 그들을 대신해서 고난받는 왕에 의해서 성취될 것입니다.
First, look at Isaiah. The first part of Isaiah’s prophecy we might call The Book of the King. In it, God reaffirms his determination, even in the wake of Uzziah’s awful death, to keep the now-piled-up promises of Genesis 3, Numbers 24, 2 Samuel 7, and Psalm 2. The second part of Isaiah we might call the Book of the Suffering Servant. It in, this suffering Servant of the Lord suffers in the place of his people as a sacrifice for their sins. We see this preeminently in Isaiah 53. But the shocker is that as you read Isaiah, you realize that this Promised King and this Suffering Servant are one and the same person. Do you see the shards coming together? We can now begin to see how the king’s representation of the people and the king’s suffering fit together. Genesis 3:15 would be fulfilled by a king who would not just suffer, but would suffer as the representative of his people—for them, in their place.

두번째로는, 스가랴서를 봅시다. 스가랴는 분리되어있는 두 가지의 직책인 제사장과 왕에게 초점을 맞추고있습니다. 에덴에서의 타락 이후에, 이러한 직책들은 언제나 분리되어왔습니다. 왕은 통치를 하지만 제사장은 속죄를 위한 희생을 실행합니다. 그러므로 스가랴는 나와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제사장과 왕이라는 두 가지 직책을 통해서 구원하실 것이라는 놀랍지도 않은 말을 하게됩니다. 그러고나서 우리는 3장에서 그 때의 대제사장인 여호수아를 소개하는 환상을 보게되며; 그 다음에는 4장에서 통치지인 스룹바벨을 소개하는 또 다른 환상을 보게됩니다.
Second, look at Zechariah. Zechariah focuses on both priest and king—two separate offices. Since the Fall in Eden, these offices had always been separated. The king rules, while the priest performs the sacrifices of atonement. So Zechariah comes along and says—unsurprisingly—that God is going to save his people through those two offices of priest and king. Then in chapter 3 we find a vision that introduces Joshua the high priest of the time; then another vision in chapter 4 that introduces Zerubbabel the governor.

그러고나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사로잡힌 자 가운데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 . .  은과 금을 받아 면류관을 만들어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슥 6:9-11)
But then something astonishing happens. “And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me: ‘Take from the exiles who have arrived from Babylon. . . . Take from them silver and gold, and make crowns, and set it on the head of Joshua the high priest” (Zechariah 6:9–11).

잠깐, 무엇이라고요? 우리는 즉각 두 가지 문제에 마음이 사로잡히게 됩니다. 첫번째로는, 그들은 다수의 왕관을 만들어야 할 것을 생각하였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머리에 씌우질 단 하나의 왕관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머리라고요? 통치자인 스룹바벨이 아니라 대제사장인 여호수아의 머리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이는 놀라운 일이어서 사람들은 스가랴가 이름을 잘못 선택하였으며 스룹바벨에게 왕관이 씌워져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핵심이 이것입니다. 이와같이 활성화된 비유는 어느날엔가는 왕위와 제사장직이 함께 나타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왕관은 하나로 합쳐지게됩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속죄하고 희생을 실행할 제사장과 통치하고 대표하며 고난을 당할 왕을 갖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다시 하나로 합쳐진 제사장-왕이 백성을 대표할 것이며, 자신을 그들을 위한 희생 제물로 드릴 것입니다.
Wait, what? Our mind is immediately caught by two problems. First, they are supposed to make crowns—plural. But then it says to set it—singular, one crown—on somebody’s head. And who’s head? Not Zerubbabel the governor, but Joshua’s, the high priest’s head. This is shocking! It’s so shocking that people have asserted that Zechariah got the name wrong and Zerubbabel should have been the one crowned. But that’s whole point! This enacted parable shows that one day, kingship and priesthood would merged together. The two crowns are forged into one. No longer will Israel have a priest who would atone and perform sacrifices and a king who would rule and represent and suffer. Rather, once again, a single, united priest-king would represent the people, and offer himself as a sacrifice for them.

스가랴서의 후반부에서는 이를 적용시킵니다. 여기서는 국민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왕을 거부하며, 그를 찌르고 못박으며, 그의 죽으심으로 어떻게 구원이 흘러 나올 것인지 말해주고있습니다. 왜 왕은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서 고통을 받으셔야만 했는지요? 이는 이것이 왕이 해야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 가운데, 자신들의 백성들이 스스로 감당했어야만 했던 진노를 제거하기 위해서 자신의 백성의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The second half of the book of Zechariah drives this home. It tells how the people reject their king, pierce him and run him through, and salvation will flow from his death. Why does this happen? Why does the king have to be stricken for his people? Because that’s what the King does. In love he stands in the place of his people to absorb the wrath that should have been theirs.

아름다움에서의 왕
The King in His Beauty

물론 이 모든 것은 천사가 마리아에게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1-33) 라고 말할 때 궁극적인 최종 목적지에 이르게되며 성취됩니다.
Of course, all this comes to its ultimate end, goal, and fulfillment when the angel says to Mary, “Behold, you will conceive in your womb and bear a son, and you shall call his name Jesus. He will be great and will be called the Son of the Most High. And the Lord God will give to him the throne of his father David, and he will reign over the house of Jacob forever, and of his kingdom there will be no end” (Lk. 1:31–33).

모든 복음은 “이 분이 바로 그 왕이시다”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해야할 것은, 그리고 예수 자신이 이해하시는 것은, 왕관을 쓰고 왕이 된다는 것은, 또한 죽어야만하는 고난받는 종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All the gospels scream, “This is the King!” But now we understand—and Jesus himself understood—that to take the crown, to be the King, was also to be the suffering servant who would have to die.

제가 생각하기에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장 특별하고 가슴 아픈 순간 가운데 한 가지는 예수의 세례입니다. 하늘로부터 들려온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러한 말씀에는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으며, 이는 우리로 하여금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는지를 볼 수 있게끔 도와줍니다.
I think one of the most extraordinary and poignant moments in entire Bible is the baptism of Jesus. Remember what the voice from heaven says? “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That statement is packed with meaning, and it helps us see how all this came to its fulfillment in Jesus.

우리는 이러한 말씀에서 세 가지 것을 듣게됩니다.
We are told three things about Jesus in that statement:

첫 번째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이는 성부 하나님의 선포로서, 예수는 그의 매우 사랑하시는 아들이시며, 사도 요한이 설명한 바와같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아들이시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태초부터 진실로 하나님이셨던 분이십니다.
First, “my beloved Son.” This is God the Father’s announcement that Jesus is his dearly-loved Son, the one who, as the apostle John puts it, is God’s one-and-only begotten Son, the one who was with God and who in fact was God from the very beginning.

두 번째로는,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것과 같은 구절에서, 예수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메시아로서, 이스라엘의 왕이셨다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애굽에서 부르실 때 이스라엘을 “나의 아들”이라고 처음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러한 호칭이 하나님 앞에서 전체 백성의 대표자로서의 왕에게 주어졌습니다. 여기서 예수께 이러한 호칭이 주어진 것이며; 예수는 왕과 대표자의 직무를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
Second, with this same phrase God declared, again, that Jesus was the long-awaited Messiah, the King of Israel. God first called Israel “my Son” when he brought the nation out of Egypt. But later the title was given to the king, the representative of the entire nation before God. Jesus is here given that title; he steps into the office of King and Representative.

마지막으로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입니다. 이는 평범한 말씀인 것 같지만, 이는 예수가 담당하여야 할 또 다른 직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이사야서 42장 1절을 반영하고 있는데,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종은, 사람들에 의해서 경멸 당하고 거절될 종과 같은 종으로서, 자기 사람들을 대신해서 고난을 받을 사람입니다. 여기에 그는 고난받는 종이 있었습니다.
Finally, “my beloved Son, with whom I am well-pleased.” This seems like a plain statement, but it points to another office that Jesus was stepping into. These words reflect Isaiah 42:1, where God says, “Behold my servant, whom I uphold, my chosen (or beloved) one, in whom my soul delights.” My servant—the same servant who would be despised and rejected by men, who would suffer in the place of his people. Here was the suffering servant.

예수는 자신의 세례와 하늘로부터의 이와같은 말씀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로하여금 성취하도록 의도하신 직무로서의 역할에 완전히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늘로부터의 이러한 말씀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세 가지 왕관을 쓰셨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하늘의 왕관과,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왕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왕관과, 자신의 백성을 위해서 그들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심으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가시관을 쓰신 것입니다. 이는 그가 많은 죄인들과 함께 세례를 받는 것이 옳았던 이유이며, 이는 그가 죄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들의 대표자로서, 그들의 왕으로서, 심지어는 그들의 대변인으로서의 직책을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With his baptism and with these words from heaven, Jesus steps fully into the roles—the offices—that God intended him to fill since the very beginning. You might say that with these words from heaven, Jesus takes on the triple crown—the crown of heaven as God’s Son, the crown of Israel as the long-awaited king, and the crown of thorns as the suffering servant who would save his people by suffering for them, in their place. That’s why it was right for him to be baptized with a bunch of sinners—not because he was a sinner, but because he was taking on the office of being their representative, their king, even their champion.

여러분은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이는 놀라운 일입니다! 이러한 사역에 들어서면서, 예수는 즉시 일어나셔서, 자신의 검을 취하시고, 자신의 왕적인 뒤꿈치를 상하게하겠지만, 예수가 그 머리를 부숴뜨리실, 자신의 백성의 철천지 원수를 상대하시기 위해서 광야로 들어가셨습니다.
Do you know what happens next? It’s amazing! Having stepped into these offices, Jesus immediately rises, takes up his sword, and heads into the wilderness to take on his people’s mortal enemy—the one who would bruise his royal heel, but whose head he would crush.

십자가 주변에는 왕의 이미지 뿐입니다. 자색 가운, 가시관, 머리 위의 표식은 예수가 제사장이 아닌 왕으로 죽으신 것을 보여줍니다. 예 그렇습니다, 오시는 왕은 왕국이 시작되었음을 알리시지만, 그는 또한 자신의 백성의 죄를 담당하시고, 그들이 왕국에서 자신과 함께 살도록 그들을 변화 시키십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예수는 단순한 왕이 아니십니다; 그는 고난받는 왕이십니다. 그는 단순히 위대하신 왕 예수가 아니십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왕 예수이십니다.
All that kingly imagery around the cross. The purple robe, the crown of thorns, the sign above his head—Jesus died as King, not just as Priest. Yes, the coming king would inaugurate a kingdom, but he would also bear his people’s sins and qualify them to live with him in that kingdom. Do you see? Jesus is not just the king; he is the suffering King. He is not just King Jesus the Great, but King Jesus the Crucified and Resurrected.

세 가지 결론적 고찰들
THREE CONCLUDING OBSERVATIONS

첫 번째로, 여러분들은 제가 왜 지금 단순한 왕권만의 복음이 불충분하다고 말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불충분한 이유는 이는 이스라엘 왕의 본연의 역할과 책임을 공정하게 다루질 않습니다. 왕이 된다는 것은 대표자로서 자신의 백성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가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예수가 왕이심을 가르쳐야합니다. 그의 통치와 능력과 권위를 선언해야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과, 예수 자신이 세우신 공의와 정의의 나라에 관하여 말해야합니다.
First, I hope you can see now why I say that a gospel of mere kingship is insufficient. It is insufficient because it doesn’t do justice to the very role and responsibility of the King of Israel. To be King was to represent and suffer in the place of your people. That’s what Jesus does. So by all means preach Jesus as King. Declare his dominion and power and authority. Talk about the new heavens and new earth, the kingdom of justice and righteousness that he himself is establishing.

그러나 기억하셔야 할 것은 복음은 왕의 오심으로 모든 것이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구원하시는 왕의 오심입니다.
But remember that the good news is not the coming of the King, full stop; it is the coming of the King to suffer, to die, to rise, and to save.

두번째로는, 제가 원하는 것은, 왜 십자가가 복음의 한 가운데 서 있는지; 왜 바울이 자신의 메세지를 “십자의 도”라고 언급하는지; 왜 복음에서 예수의 왕권에 대한 가장 명백한 증거가 십자가에서의 죽으실 때 그가 머리를 숙이셨음인지, 지금 여러분이 알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왕권이 의미하는 것으로서, 왕이 된다는 것은 고난받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주의자들이 이렇게 종종 왕국과 십자가로 몸부림치는 것을 보는 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 둘을 서로 다른 이야기로 다루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며, 우리가 십자가가 어떻게 왕국의 이야기에 적합할수 있는지 감을 잡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십자가와 왕국 사이에 틈을 만들어 놓고서, 십자가는 이쪽으로, 왕국은 저쪽으로, 그리고 누구나 할 것 없이 벌어진 틈의 한 쪽이나 다른 쪽에 모여 앉게 하고서는 서로를 의심하면서 조롱하게 합니다.
Second, I hope you can see now why the cross stands at the center of the gospel; why Paul refers to his message as “the word of the Cross”; why the most unambiguous testimony to Jesus’s kingship in the gospels is a sign hanging over his head as he dies on the cross. This is what kingship means—to be king is to suffer, to die, to rise, and to save. It’s strange to see evangelicals struggle so often with kingdom and cross. It’s almost like we treat the two of them as different stories, and we can’t figure out how the cross fits into this story of the kingdom. So we manage to create a rift between the cross and the kingdom, with cross over here and kingdom over there and everyone crouching on one side or the other of the chasm, sneering suspiciously at each other.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이와같은 분열의 상태로 놔두질 않습니다. 십자가와 왕국은 신학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데 이는 왕국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십자가를 통해서이기 때문입니다.
But the Bible doesn’t leave us with that kind of division. The cross and the kingdom are theologically inseparable because the only way into the kingdom is through the cross.

이것이 우리가 이 모두를 함께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왕국에 속하는 것과 왕국의 축복을 받는 유일한 길은 왕의 보혈을 통하는것입니다.
That’s how we must put all this together. The only way to be included in the kingdom, to receive the blessings of the kingdom, is through the blood of the king.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여러분에게 잠시 간곡히 부탁 드리고자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에 대한 설교를 하거나 글을 쓰면서 십자가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소홀히 하다면, 여러분은 좋은 소식에 대하여 전혀 가르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은 단지 사람들에게 그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들어갈 권리가 없는 놀라운 것을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예수 자신과 사도들이 가르쳤던 것은 단순히 왕국의 도래만이 아니라, 왕국의 도래이면서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는 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So brothers, let me exhort you a moment. If you preach a sermon or write a chapter on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but neglect to talk about the cross, you’ve not preached good news at all. You’ve just shown people a wonderful thing that they have no right to be a part of because they are sinners. What Jesus himself and the apostles preached was not just the coming of the kingdom; it was the coming of the kingdom and the way people could enter it.

그러므로 당연히 왕국에 대해서 가르치십시오. 예수의 악에 대한 정복에 대해서 전하십시오. 그의 도래할 통치에 대하여 글을 쓰십시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이 그 자체로 모두 영광스러운 좋은 소식인 척은 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가 완전한 의로서 세상을 통치할 것이라는 사실은 저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저는 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이는 끔찍한 소식입니다! 저는 그 분이 오셔서 부수려고 하는 원수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다가오는 왕국은 오직 오시는 왕이 죄를 용서하시고 백성을 의롭게 하실 구원자이시며, 자신의 죽으심으로 십자가에서 죽음을 물리치셨고 다가올 세대의 생명으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만 좋은 소식이 됩니다. 
So by all means, preach about the kingdom. Talk about Jesus’ conquest of evil. Write about his coming reign. But don’t pretend that all those things are glorious good news all by themselves. They’re not. The bare fact that Jesus is going to rule the world with perfect righteousness is not good news to me; it’s terrifying news, because I am not righteous! I’m one of the enemies he’s coming to crush! The coming kingdom becomes good news only when I’m told that the coming king is also a savior who forgives sin and makes people righteous—and he does that through his death-destroying death on the cross and resurrection to the Life of the Ages.

세번째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는 여러분이 이러한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왕을 마음으로 즐거워하고 경배하고자하는 충동을 새롭게 느낄 수 있게되기를 희망합니다.
Third, and finally, I hope you can feel anew an impulse in your heart to rejoice, to worship this Suffering, Dying, Rising King.

면류관 벗어서 주 앞에 드리세 
저 천사 기쁜 노래가 온 땅에 퍼지네 
내 혼아 깨어서 주 찬송하여라 
온 백성 죄를 속하신 만왕의 왕일세
Crown Him with many crowns,
The lamb upon the throne:
Hark! How the heav’nly anthem drowns
All Music but its own!
Awake, my soul, and sing
Of Him who died for thee,
And hail him as thy matchless King
Through all eternity.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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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


톰 라이트가 말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의” 즉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the faithfulness of God”이라는 사상이 자리잡고있다.


새관점의 언약 사상은 개혁주의 언약 사상과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있다.


그리스도의 새언약이 개혁주의 언약 사상의 중심에 자리잡고있다면,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의 언약 사상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중심에있다.


개혁주의에서는 아브라함 언약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하여 구현된 것으로 보는 반면에, 새관점에서는 아브라함 언약이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통하여 구현된 것으로 본다.


톰 라이트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 있었으며,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언약이 신실하게 이행되는 과정이었기에, 출애굽 자체가 구원의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차이로 인하여 새관점에서는, 언약 백성의 근거가 되는 의, 즉 하나님의 의가 유대 이스라엘을 통하여 구현된 반면에, 개혁주의에서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원인 성도들 안에서 구현된 것이다.


새관점에서는 유대 이스라엘을 실질적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보는 반면에 개혁주의에서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보고있다.


새관점이 보여주는 이러한 차이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을 이루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냐에 대한 차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을 살펴보자.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covenantal faithfulness)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의 핵심적인 특징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는 로마서 2장 17절- 3장 8절을 비추어보면, 하나님의 단일한 계획, 즉 인간의 죄의 문제를 처리하고 온 세상을 바로 잡으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반드시 의미하여야하며, 그것만 의미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Wright, Justification, 175)


라이트에 의하면,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의란, 이스라엘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통해 온 세상을 축복하시려는 언약을 그리스도 안에서 끝내 성취하시고야마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이다.


라이트에게는 하나님의 의를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구약적 증거에 가장 충실한 정의이다.

(박영돈,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읽기, 38, 39)


톰 라이트는 “로마서에서 바울이 전한 복음은 개인의 구원과 칭의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 전 세계를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놀라운 방식으로 성취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 즉 하나님의 의의 나타남이다”라고 말한다.

(박영돈,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읽기, 42)


라이트의 관점에서 보면 의롭게 되는 것은 죄의 용서를 받는 것, 도덕적으로 옳다고 간주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 보다는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되는 것, 그래서 식탁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박영돈,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읽기, 057)


톰 라이트는 로마서 3장 21-22절에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의를 3:9-20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의미로 21절의 하나님의 의를 읽지 않고 오히려 2:17-3:8과 연결해서 새관점에서 선호하는 의미로 하나님의 의를 해석한다.


라이트는 로마서 3장 25-26절이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에서 3번씩이나 하나님이 자신의 의를 계시하신다고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 외에 다른 의미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박영돈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읽기 102)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 자신의 약속,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고 해석한다.(What Saint Paul Really Said: N. T. Wright, 96)

이는 창조 세계를 회복하고 새롭게하려는 언약 계획에 대한 하나님의 헌신을 묘사하는 용어다.

톰 라이트는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의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으로 바꾸어 해석한다.(Resurrection of the Son of God, N. T. Wright, 305)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God)에 대한 70인 역(septuagint)의 해석은 "하나님의 자신의 언약의 약속에 대한 신실하심 God's own faithfulness to his promisses to the covenant”이라고 말한다.(What Saint Paul Really Said, 96)

이사야서 40-55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속성의 한 가지 면을 나타내주며, 이는 이스라엘의 완고함과 상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속성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구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하셨고 이스라엘은 이를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한편으로는 그의 신실하심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심으로서 이는 어원이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사야에 나타난 그의 그림의 중심에는 고통받는 종의 이상한 모습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의로우신 목적이 이를 통하여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사야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불의에 대하여 벌을 주시고 의에 대하여는 상주시는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는 언약에 대한 신실한 행하심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44)


여기서 톰 라이트는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과 죄에 대한 용서를 연관시킨다.


라이트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 안에서 아담의 죄와 이스라엘의 죄는 모두 해결되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의가 우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으로 이해가 된다고 하더라도, 톰 라이트는 구약과 유대주의에서 이 하나님의 의라는 용어를 법정적인 비유로 적용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인정하고있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라는 개념을 재판관의 판결을 거칠 필요가 없는 법정적 심판의 영역에까지 확대 적용함으로서, 죄의 문제가 법정적 판결이 없이 해결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반드시 법정적 판결의 과정을 요구하는데 반하여,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항목이 법정적 평결을 대신 한 것으로 간주함으로서  법정적인 평결없이 법정적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다.(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44)


사람의 의는 하나님의 의로 연결되어,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언약 안에서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반드시 재판관의 평결이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God나 칭의justification라는 용어는 완전히 별률적이거나 법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라이트는 로마서1:17의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를 언약에 신실하신 분, 즉 약속을 지키시는 분으로 묘사할뿐, 심판자로서 의를 세우시며 공정하게 판단하시는 분, 즉 정의를 세우시는 분으로 묘사하지 않는다.(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62)


의의 전가Imputation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믿는 자들에 전가된다는 전통적 개혁주의 교리의 중요한 용어 가운데 하나다.


여기서 의는 적극적 순종과 소극적 순종을 근거로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말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의는 신자에게 전가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아닌 언약을 충실히 이행하여 나가시는 하나님의 의The Faithfulness of God를 말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는 관계가 없는 의이다.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은 언약이라는 약속을 만드시고 이를 지키시는, 자신 스스로가 의로우신 분이시다. 

God is himself righteous, as the covenant God who has made promises and kept them.


법정적 비유의 의미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말에 대하여 진실되셨으며, 공정하셨으며 (바울이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똑같이 공정하게 다루시고 있음을 지속적으로 말하고있는 방식에 주목해보면) 그렇게 죄를 다루셨다.

In terms of the law-court metaphor, he has been true to his word, he has been impartial (note the way in which Paul goes on at once to speak of God’s even-handed dealing with Jew and Gentile alike), and he has dealt with sin.  


하나님께서는 무력한 이들을 이와같은 이유로 신원하신다: 그는 '믿음을 가진 자를 의롭게하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하나님 자신의 의라는 주제는, 그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으로 이해되어야하며, 법정적 비유가 의미하는데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결정적 본문의 핵심이다.(Wright, Paul, p. 105)

He has also thereby vindicated the helpless: he is the ‘justifier of the one who has faith.’  This theme of God’s own righteousness, understood as his covenant faithfulness, and seen in terms of the law-court metaphor, is the key to this vital passage.(Wright, Paul, p. 105)



톰 라이트의 칭의를 이해하려면 그가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을 주격이면서 소유격으로 읽어야만한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의 의는 신자에게 전가해주는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속해있다는 것이다(Wright, Paul, p. 101)


역사적 예수 탐구와 하나님의 의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에서의 칭의의 근거가된다.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의 핵심 사상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the faithfulness of God"이라는 해석으로부터 정당화된다.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에 참여된 유대 백성은,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 하는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해서 율법을 지킨다는 "언약적 신율주의"의 틀 안에서 이해되어져야한다.


라이트는 새관점의 근간을 이루는 언약적 신율주의를 재구성하기 위해서 '역사적 예수 탐구'에서의 슈바이처와 불트만 학파의 케제만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톰 라이트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에 있으며,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이 신실하게 이행되는 과정이었기에, 출애굽 자체가 구원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개혁주의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의의 주체이시지만, 새관점에서는 출애굽이 의의 분기점이 되며 예수 그리스도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완성시키기 위한, 부차적인 역할을 한 존재일 뿐이다.


새관점주의자들은,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출애굽이라는 구원의 과정을 통하여 은혜 안에 머물고 있는 상태였기에,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은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삶의 지침으로 주어졌다고 말한다.


라이트는 이를, 창조 세계를 회복하고 새롭게하려는 언약 계획에 대한 하나님의 헌신을 묘사하는 용어로 사용함으로서,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의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으로 바꾸어 해석한다.

또한 이사야서 40-55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속성의 한 가지 면을 나타내주는 것이며, 이는 이스라엘의 완고함과 상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속성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구하신다는 것이다.(Resurrection of the Son of God, N. T. Wright, 305)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하셨고 이스라엘은 이를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한편으로는 그의 신실하심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심과 어원이 같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위해 “역사적 예수 탐구”에 모든 것을 걸어놓고있다.


“역사적 예수 탐구”를 하지 않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예수가 실제로 누구였는지를 모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라이마루스로부터 시작된 역사적 예수 탐구로 인하여 성경의 예수가 누구였는지 연구되기 시작했으며, 지금 제3의 탐구에 의하여 밝혀진 예수가 진짜라면, 이제까지의 성경에 대한 해석은 전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를 포함하여, 루터나 칼빈을 비롯하여, 개혁주의 신학자 전부가 이제껏 잘못 만들어진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다. 


라이트의 성경 해석은, 20세기 말 상황에서의 슈바이처 라인의 제3의 탐구에 의한 것이다.


슈바이처의 유대 묵시문학적 종말론은 예수를 1세기 유대교의 맥락에서 철저하게 재구성함으로서, 예수 연구에 대한 새로운 추진력을 제공한다.

톰 라이트에게 슈바이처의 유대 묵시문학적 종말론은, 라이마루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됨으로서, 옛 탐구와 구분되는 새 탐구로서의 제 3의 탐구를 시작하게 한다.

슈바이처의 철저한 종말론은 예수를 1세기 유대교의 묵시적 기대를 품은 자로 보고있다.

브레데 노선과 구별된 슈바이처의 노선은 “역사적 재구성”을 향한 최고의 전망으로 제시되면서, 바울에 관한 새관점의 시발점이 되었다.


윌리엄 브레데(William Wrede)와는 달리  예수를 종말론적이고 묵시적인 유대교의 맥락에 두었던 슈바이처는 톰 라이트에게 언약적 율법주의의 틀을 제공하였던 것이다.(예수의 도전, 119)



슈바이처의 묵시적 유대교 사상


톰 라이트는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영역에서 슈바이처의 바울 해석에 많은 도움을 받고있다.

예수와 바울을 대립 시키지 않는 불트만과는 달리,  슈바이처는 브레데와 같이 예수와 바울을 대립시킴으로서, 바울이 예수와 다른 어떤 종교를 가르쳤다고 생각한다. 

슈바이처는 예수를 구속받은 구속자라는 실존주의적 개념으로 이해함으로서, 예수의 실존을 유대교와 연결시켜 해석하고있다.

슈바이처는 예수를 유대교에서의 실존적 완성으로 보고있는 것이다.

예수의 유대교에서의 실존적 완성이라는 후기 유대교적 메시아 개념은, 유대교가 은혜의 종교였다는 톰 라이트의 언약적 율법주의와 맥락을 같이한다.

슈바이처는 윌리엄 브레데(William Wrede)와 같이 예수와 바울을 대립시키지만, 예수를 종말론적이고 묵시적인 유대교의 맥락에 둠으로서 브레데와 차이를 보이고있다.


톰 라이트는 브레데의 생각에 동의를 못하다가, 예수를 종말론적이고 묵시적인 유대교의 맥락에 두는 슈바이처의 견해에는 상당히 공감하게 되었다.(톰 라이트, 예수의 도전, 119)


라이트는 자신이 슈바이처의 접근과 비슷한 접근을 한다고 말한다

슈바이처의 후기 유대교적 메시아 사상은, 톰 라이트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의라는 범주 안에 귀속시키는 틀을 제공한다.

슈바이처가, 바울이 예수와는 다른 종말론의 체계를 가지고있다는 바울과 예수의 대립관계를, 유대주의적 묵시 문학의 맥락에서 해결한 것은, 톰 라이트가 예수를 유대주의적 메시아, 즉 유대를 해방시키기 위한 혁명적 메시아라는 사상의 밑거름이 된다.

이는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구속주로서의 그리스도의 의를 유대교에 편입시킴으로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의, 즉 아브라함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신다는 하나님의 의를 완성시키신 분으로 제한 시킨다.

라이트는 슈바이처의 묵시적 유대교 사상를 통해, 바울의 기독론을 유대주의적 메시아 사상에 귀속시킴으로서, 바울에 관한 새관점의 틀을 완성시켜 나간다.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은, 바울의 서신서에 나타난 기독론이 유대주의적 메시아 개념을 바울 자신이 특별하게 발전시킨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슈바이처의 묵시적 유대교 사상을 빌려온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 라이트의 의의 개념에는, “칭의를 순전히 법정적으로만 이해하는 칭의론은 윤리를 낳지 못한다"는 슈바이처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행위 구원론적 의의 개념이 추가된다. 

이는 슐라이어마허의 영향을 받은 슈바이처가, 법정적 칭의론이 갖는 윤리의 부재에 대하여 우려했던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라이트는 슈바이처의 법정적 칭의론에 케제만의 관계적 칭의론을 대입시킴으로서, 결핍된 윤리의 문제를 해결하려한다.

슈바이처에게 칭의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김세윤 교수의 글을 인용해보면

종교사학파인 슈바이처(1808-1888)는 "바울 복음의 주된 분화구는 '그리스도-신비주의'이고,칭의론은 그 분화구 안에 부차적으로 형성된 2차적분화구이다."라고함으로서 그리스도-신비주의의 입장을 취한다. 

그는 "칭의론은 바울이 자기의 이방 선교를 방해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싸우기 위하여, 즉 그들이 이방 그리스도인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을 배격하기 위해 고안한 논쟁 교리이다. 그래서 그것은 이방 선교문제를 다루는 갈라디아서, 로마서, 빌립보서3장에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론은 바울 신학의 중심이 아니고 바울 신학의 곁가지에 불과하다. 바울 신학의 중심은 '그리스도-신비주의'이다"(칭의와 성화, 김세윤, 20)

이와같이 슈바이처에게는 칭의가 중요하지 않았기에 법정적 칭의에서의 윤리부제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톰 라이트에게는 칭의가 중요한 문제였다.

톰 라이트는 슈바이처에 상당히 공감을 하면서 슈바이처의 접근과 비슷한 접근을 하고 있지만, 슈바이처의 법정적 칭의론에 의한 윤리의 결핍에 대한 문제를 케제만의 관계적  칭의론에 대한 개념을 보충함으로서 비로소 해결 할 수있었다.

그는 케제만의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을 칭의의 근거로 내세운다.(톰 라이트, 예수의 도전 119)

톰 라이트는 윤리의 부재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과 같이 신자도 신실할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으로 이해하는 것과 같이 신자에게 주어지는 의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같이 신실한 삶을 살아감으로서 얻어진다는 윤리적 의를 제시한다.

톰 라이트가 추론한 하나님의 의는 윤리를 위한 의라고 할 수 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로의 이전"이라는 관계적 칭의는, 슈바이처의 윤리의 부재에 대한 문제 해결하기 위한 필요에 의해서, 케제만으로부터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관계적 칭의를 도입하게된 것이다.

톰 라이트에게 슈바이처의 법정적 칭의론에 의한 윤리의 결핍은 케제만의 관계적  칭의론에 대한 개념이 보충될 때  비로소 해결 될 수있었다.

이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윤리적 행위가 따르는 행위구원론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하지만 칭의의 근거가 윤리의 부재를 해결하기 위하여 도출되어서는 않된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새관점에서의 하나님의 의 개념은 법정적 칭의를 배제한체 칭의의 영역을 포함시킨다.

법정적 칭의는 인격적 관계의 회복이기에 법적인 윤리를 넘어서는 인격적 윤리가 있다.


법정적 칭의에는 죄용서라는 최소한의 소극적 칭의를 넘어서, 자녀로 삼는 완전하고 적극적인 칭의가 내포되어있다.


단순한 죄용서와 자녀로 삼는 입양은 차원이 다른 칭의다.


슈바이처-칭의를 순전히 법정적으로만 이해하면 "칭의론은 윤리를 낳지 못한다"(칭의와 성화, 김세윤, 88)고 말하지만, 법정적 칭의로 말미암은 입양됨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로 인하여 마땅한 윤리적 변화를 가져온다.

새관점은 자녀로서의 관계보다는 "하나님 나라로의 이전"이라는 관계적 의미로 윤리의 문제를 해결하려고한다.


케제만의 하나님의 의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불트만학파의 케제만(Ka:semann)으로부터 가져온 것이다.

케제만은 슈바이처의 “옛 탐구”와 구별된 “새 탐구”를 시작하였다.

톰 라이트에게 신학적 근거를 제공하고있는 “역사적 예수 탐구”는 케제만의 “새 탐구”의 영역에 속하여있다.


라이트는 케제만의 역사적 예수 탐구에 대하여 긍정적 입장을 취한다.


톰 라이트는 제1,2차 대전 동안에 교회가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를 하지 않았을 때 비역사적 예수가 제시되어, 나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했다는 에른스트 케제만의 1953년 10월 23일 행한 연설에 동의한다.(Challenge of Jesus, 21)


불트만학파인 에른스트 케제만이 로마서 1장 17절의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한 이래, 라이트는  이를 보편화 영구화 시키고있다.(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64)     


새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전통적인 개념과 달리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으로 해석한다.

케제만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케제만은 불트만의 제자로서, 불트만의 인간론 중심적 개인론 중심적 해석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의'를 '뒤틀린 온 세상을 바로잡는 하나님의 힘'으로 해석한다.

2. 케제만은 칭의론을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라는 관점에서 해석한다.(칭의와 성화, 김세윤, 21)

3. 하나님의 의에 대한 케제만의 해석도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다.(칭의와 성화, 김세윤, 63)

4. 케제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죄를 씻어 버리고 덮어버리는 제사expiation”라고 해석한다.

이는 죄를 벌주고 의를 상주는 법정적 의미로서의 전통적인 그리스도의 속죄 개념인 “형벌적 대속론(Penal substitutionary theory of atonement)”과는 다른 것이다.

5. 케제만은 칭의의 관계론적 의미를 중시함을 넘어서, 하나님의 의를 자신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힘이라고 말한다.(칭의와 성화,김세윤, 84)

여기서 하나님의 의는 창조주가 타락한 자신의 피조물들을 자신의 주권 아래로 회복시키는 힘이다.

라이트는 케제만의 관계론적 칭의론, 즉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하심”과, “하나님 나라로의 이전”이라는 관계적 칭의를, 윤리로서의 성화와 연계시켜 칭의와 윤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한다.

6. 케제만은 칭의를 “주권의 전이(lordship- transfer/ lordship-change)”로 해석한다.

아담적 죄인들을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를 통해 사단의 통치 아래서 해방하여(여기에 죄용서가 내포됨) 자신의 통치(하나님 나라) 아래로 이전하는 것을 말한다.(칭의와 성화, 김세윤, 85)

하지만 하나님의 의를 케제만의 주장처럼 주권의 전이라고한다면, 주권의 전이가 구원을 뜻한다고 할 수밖에 없다. 

주권의 전이는 신자의 믿음을 전제로하고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구원을 위해서 자신들이 본질적 죄인이라는 고백을 할 필요가 없으며, 그리스도의 법정적 속죄사역에 대한 인식이 없어도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담적 죄를 용서하여 주셨기에,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윤리가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주권의 전이 개념에서,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어지는 윤리로 주어진 것이며,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님이 모델이 되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예수의 삶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요구의 성취이며, 이는 신자에게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같이 신실하게 살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만약 요구되어지는 윤리적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면 최종적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새관점의 주장은 행위 구원론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고 구원을 위한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 알미니우스적 주장이면서 동시에 구원을 신인협력에 의한 결과물로 보는 것이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


1) 믿는자가 의롭다고 칭함을 받기 위하여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댓가 없이 선물받아서 의롭게된다.


이 하나님의 의는 믿는 자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하는 것이다.(롬1:16-17, 3:21-26)(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28)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하여 하나님의 의는(율법에 순종하시고 율법으로 받을 징벌을 감당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는자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다.(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45)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을 의롭게 하면서 동시에 신자와 의를 공유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의는 복음을 통하여 나타난다.

This is a definition of that righteousness which he said had been revealed when Christ was given, and which, as he has taught us in the first chapter, is made known in the Gospel. 


이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있다.

He affirms that it consists of two parts.  


첫 번째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는 많은 것 가운데 한 가지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 내포된 모든 의를 말하는 것이다.

The first is that God is just, not indeed as one among many, but as one who contains in Himself alone all the fullness of righteousness.  


하나님은 모든 충만한 찬양을 받으실 분이신데, 이는 하나님 한 분만이 의롭다는 이름과 명예를 마땅히 받으셔야만 하는 반면에, 모든 인간은 불의로 저주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He receives the full and complete praise which is His due only as He alone obtains the name and honor of being just, while the whole human race is condemned of unrighteousness.  


다른 부분으로는, 의의 소통에 관한 것인데, 이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풍요를 결코 자신 안에만 가둬놓지 않으시고, 이를 사람들에게 부어주신다는 것이다.

The other part refers to the communication of righteousness, for God does not by any means shut His riches within Himself, but pours them forth upon mankind.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게하시는 한에는,  하나님의 의는 우리를 비추게되는 것이다.

The righteousness of God, therefore, shines in us in so far as He justifies us by faith in Christ, for Christ was given in vain for our righteousness, if there were no enjoyment of Him by faith.  


이에 비추어볼때 모든 인간은 하늘로부터 치료책이 나올때까지는 불의하고 상실되어있는 자들인 것이다.[Calvin, Romans, pp. 77-78.]

It follows from this that in themselves all men are unrighteous and lost, until a remedy from heaven was offered to them.[Calvin, Romans, pp. 77-78.]


루터는 밤낮으로 로마서 1장 17절을 묵상하는 중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라는 말씀은 다름이 아니라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만나는 루터, 우병훈, 68)



2) 믿는 자에게 보혈의 속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는 공의의 심판을 하시는 의뿐만이 아니라 믿는자에게 보혈에 의한 속죄를 베푸시는 의로도 나타난다.(롬3:25-26)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그의 피를 흘리심을 통해서, 믿음으로 받아들이라고, 속죄의 희생으로 내어주셨다.

God presented Christ as a sacrifice of atonement, through the shedding of his blood—to be received by faith.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지은 죄를 벌하지 않으시고 참으심으로서, 자신의 의를 증거하시기 위해서 이를 행하셨으며, 예수를 믿는 자들을 의롭게하신 것과 같이 자신도 의로우시도록, 현재도 자신의 의를 증거하신다.(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71)

He did this to demonstrate his righteousness, because in his forbearance he had left the sins committed beforehand unpunished— he did it to demonstrate his righteousness at the present time, so as to be just and the one who justifies those who have faith in Jesus.


3) 의로운 자에게 상주시는 하나님


모세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에게 상을 주실 수 밖에 없으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여기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넘어서) 의로운 자에게 상주시는 일을 신실하게 행하셔야만 하는 하나님의 의무의 속성도 드러난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께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서 우리는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상 주시는 일을 신실하게 이행하셔야만 하는 의무가 있으신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약속을 지킨다는 개념을 넘어서 우리에게 상을 주셔야만 하시는 의를 가지고 계신 것이다.



법정적 개념이 제거된 새관점의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에 관하여 바울이 사용한 용어들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법정적 행하심을 볼 수가 있는데, 이는 언약백성에 대한 무죄선언과 옳음을 인정하심이 있고 그들의 적들에 대하여는 심판과 저주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의에 대하여는 옳다고 하시고 악에 대하여는 저주를 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의가 로마서에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가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구약적 배경에 비추어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법정적 행위에서 자기의 백성을 의로운 상태로 보증하는 그리스도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다.( 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54)


톰 라이트가 말하는 의는 누군가가 대신 죄값을 치러준 것을 근거로 해서 재판장이 무죄를 선고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죄값과 관계없이 그냥 재판장의  일방적인 선포에 의하여 무죄가 선언되는 것이기에 피고의 무죄의 근거는 재판장의 의가 되는 것이지 누군가의 죄값을 치룬 분의 의가 아닌 것이다.(Wright, Paul, 105)


피고가 되신 예수님의 의가 전가된 의가 아니라 믿음과 관계없이 선포되는 재판장의 의를 말한다.


이부분이 전통적 개혁주의와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다.



로마서에 나타난 4가지 법정적인 하나님의 의


1)  로마서1-3장에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시다( the concept of God’s faithfulness to his covenant)는 개념이 나온다.


그러나 로마서3:1에서  바울이 사용하는 헬라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faithfulness of God)과 대비되는 불순종하는 이스라엘(the unfaithfulness of Isreal)이다.(dik-langue  대신에 pist-langue사용)

(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67)


2) 롬1:17-3:26절에 나타나는 강력하고 인내심있는 관심사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법정적 심판의 개념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는  로마서의 이 부분에서 강하게 나타나고있으며 여기서는 최소한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심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관심사는 시편(시98:9) 기자의 관심사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 땅을 의와 공평으로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롬1:16- 3:26은 문맥상으로 볼 때 분명히 하나님의 법정적의를 드러내신다.

.(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67)


3) 로마서 1장 18절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은 로마서 1장 16-17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에 대한 설명의 시작으로서 로마서11장까지 이어지고있다.

(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66-72)


4) 로마서 1장 17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는 18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wrath of God)의 나타나심으로 설명된다. (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69)



법정적 개념이 제거된 하나님의 의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 개념에서 법정적인 심판의 개념을 제거하고있다. 


톰 라이트는 개혁주의와 마찬가지로 칭의의 개념을 법정적으로 본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의를 전가받는다는 개혁주의의 생각을 거부하고있다.(What Saint Paul Really Said: N. T. Wright 96)


라이트가 말하는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하나님의 의"는 법정적 심판의 개념이 포함되어있지 않지만, 죄의 문제가 판결없이 해결된 것으로 간주함으로서, 사실상 칭의에 대한 법정적 의미를 부여한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은 법정적 판결을 대신하는 것으로서 죄인에게 법정적 판결이 없이 법정적 의인이 됨을 선포하는 역할을 하고있는 것이다.(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44)


톰 라이트는 로마서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법정적이고 심판적인 개념들을 제거함으로서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를 잘못 이해하고있다.


톰 라이트는 바울이 설명하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자신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으로 해석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것을 성실히 이행하신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더 나아가 아담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며 궁극적으로 모든 피조계의 자유를 선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What Saint Paul Really Said, 48)


여기서 “의"(righteousness)를 “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God’s faithfulness to his covenant)이라는 기술적 용어(technical language)로 단정짓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63)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선과 악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의가 아니라 언약에 대하여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고있다.


쉽게 말해서 심판의 개념을 제외시키고 언약 안에서 선인이든 악인이든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하나님을 그려내고자 하는 것이다.(Ibid, 54)


톰 라이트가 바울에서 볼 수있는 하나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God)를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에 대한 신실하심 (the faithfulness of God in fulfilling of his covenant promises)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바울의 이 용어 사용에 대한 적절한 적용이라고 할수 없다.


톰 라이트의 이러한 이해는 보편적이지도 않고 바울의 글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 말이 뜻하는 특별한 의미를 찾기도 힘들다.


만약에 톰 라이트의 말대로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언약의 약속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면 어떻게 그 신실하심이 표현이 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의”(righteousness)의 뜻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고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기게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 비평



(주권의 전이와 행위구원론)


톰 라이트는 케제만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하나님의 의 개념에 도입한다.


하나님의 의를 케제만의 주장처럼 “주권의 전이”라고한다면, 주권의 전이가 구원을 뜻한다고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케제만이 말하는 주권의 전이는 사람의 믿음을 전제로하지 않는다. 

구원을 위해 자신들이 본질적 죄인이라는 고백을 할 필요도 없으며, 그리스도의 법정적 속죄사역에 대한 인식도 필요없다.

케제만의 주권의 전이는 언약적 신율주의의 토대가 된다.

언약적 신율주의에서의 율법은 윤리를 위한 도구로 전락 되었으며,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는 삶의 모델로 전락되었다.

새관점에서는 요구되어지는 예수를 따르는 윤리적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면 최종적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새관점의 주장은 행위 구원론으로 귀착될 수 밖에 없으며, 구원을 위한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 알미니우스의 주장과 같이, 구원을 신인협력에 의한 결과물로 보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선물이라고 말하지만, 그 선물에 내포된 윤리적 삶의 요구로 보아서는, 결코 은혜의 선물일 수가 없는 것이다.

윤리에 대한 요구가 의무적 요구 조건이 된다면, 요구조건을 이행하지 못하면 최종적 구원이 취소되는 것이다.

케제만의 주장과 같이, 하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고 자신의 나라로 이전 시켜 자신의 백성으로 만듬으로써, 이제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의지하고 순종하며 살아야한다는 요구, 즉 윤리적 의무를 담고있다면 윤리는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 탐구의 객관성)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개혁주의의 해석 방법과는 달리,  성경을 "역사적 예수 탐구(Quest for Historical Jesus)"라는 접근법을 사용하여 해석함으로서 얻어진 결과물이다.


문제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얼마나 객관성을 가지고 "역사적 예수 탐구"를 응용하였는가이다.


톰 라이트에게 "역사적 예수 탐구"는 이미 자신이 내린 결론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다.


톰 라이트에게서는 홀로코스트라는 유대인의 비극이 재연되지 않도록 기독교를 유대교화하려는 여러가지 시도들이 포착된다.


이미 톰 라이트에게서 배운 많은 유학생들의 장학금이 유대인의 장학금에서 자유하지 못하고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나오고있다.


톰 라이트가 역사적 예수 탐구에 사용되었던 1세기 유대교의 문서들은 객관성과 보편성에 문제가 있다.


일부 지역의 문서들일 뿐만이 아니라 이를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많은 선입관들이 전제가 되어있다.


톰 라이트가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만큼이나 이러한  자료들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문서들은 정경에 준하는 신뢰성을 가지고있는 문서들이 아니다.


정경에서 제외된 외경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 즉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의는 "언약적 신율주의"를 합리화시키기 위한 부차적인 유추물일 뿐이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의는, 바울의 서신서의 주제와는 거리가 멀다. 


바울 서신서의 주제와는 어울리지 않는 전혀 낯선 해석일 뿐이다. 



(공의의 하나님)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심판은 주로 약속과 행함에 관하여 이루어진다.


약속이 없다면 행함의 의무도 따르지 않는다.


처음 아담과의 약속,  아담 언약은 아담에게 주권적으로 선포되어진 하나님의 약속이다.


아담이 불순종하였을 때는 이에 상응하는 형벌이 주어졌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과의 약속에서 그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약속하시면서 쪼갠 짐승 사이로 지나가셨다.


즉 약속에 대한 불이행은 죽음뿐이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맺으신 구속 언약과 처음 아담과 맺으신 아담 언약도 아브라함과 맺으신 약속은 마찬가지로 반드시 이행하셔야했다.


불순종한 아담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불순종한 날 죽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날에 반드시 죽으리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실행하셨다.


바빙크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날에 바로 죽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날 바로 죽었다.


죽지 않은 것은 육신일 뿐이며, 아담 안에 있었던 하나님의 생명은 상실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으로서의 에덴에서 쫒겨남으로서 버림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정하고 절대적이다.


인간이 육신이 살아있다고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재판장은 공의의 재판장이 아니다.


죄에 대하여 죄를 묻지 않으며, 죄인에 대하여 심판을 선고하지 않는 재판장이다.


죄인을 그냥 죄가 없다고 선포하는 재판장으로서  공의의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의 속성과는 거리가 멀다.


모세는 신명기를 통하여 끊임없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기록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공의 의 심판의 희생물로 돌아가신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재판장의 의는 죄인을 대신하여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적그리스도적 발상이다. 



(구원의 기준)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를 말하면서 신자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같이 신실하게 살아갈 것을 요구하고있다.


톰 라이트가 제시하는 윤리적 요구로서의 율법과 예수의 행하심은 명확한 구원의 기준을 제시하고있지 못하고있다.


어느 정도를 충족시켜야지만 최종적 구원에 이를 수 있는지 명확한 기준이 없다.


또한 톰 라이트는 인간이 실상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있지 않다.


모든 인간은 실상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이기에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존재다.


아담 안에서 죽은 죄인에게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요구한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게 만드는 발상이다.


구원을 위해서 요구되어지는 행함의 기준은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기준으로서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다.


죽은 자에게 행함이 요구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행할 능력이 없는 절망적인 이들에게 다가오는 희망의 소식으로서 오직 전적인 은혜를 근거로하여야만 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와 예수 그리스도)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신자에게 주어지는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를 대체한다.


결과적으로 톰 라이트에게 그리스도는 구속주도 아니다.


톰 라이트가 부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위격이다.


그리스도가 구속주가 되실 수 있으셨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위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혁명적 행동 방식은 신격을 가지지 않은 선지자라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며, 실제 톰 라이트가 묘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에서는 그리스도의 신격을 찾아볼 수가 없다.


톰 라이트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행동 방식이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 받았다는 표식에 불과하다. 


톰 라이트는 신자가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때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부활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부활의 의미를 손상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과연 어느 누가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 될 수가 있단 말인가?


이러한 모순 투성이의 새관점의 논리는 복음도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왜곡시켜서 참된 복음을 손상시키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유대주의적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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