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2019. 4. 10. 08:13

존 오웬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들어가는 말


다음 글은 마이클 브라운 목사가 존 오웬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에 대하여 정리한 글을 번역한 것이다.


국내에 소개된 마이클 브라운 목사의 저서로는 부흥과 개혁사에서 출간된 “언약 신학으로서의 초대”가 있다.


마이클 브라운 목사는 마이클 호튼이 공동 목사로 참여하고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근처에 위치한 크라이스트 연합 교회의 목사이다.


출처: www.reformedfellowship.net/john-owen-the-imputation-of-christs-active-obedience



존 오웬: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JOHN OWEN: THE IMPUTATION OF CHRIST'S ACTIVE OBEDIENCE


마이클 브라운

by Rev. Michael Brown



존 오웬(1616-1683)이 자신의 책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통한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 설명되어졌고, 확고부동하며, 그리고 입증된 개신교 칭의 교리”를 발간하였을 때인 1677년에도 개신교 칭의 교리는 아직 논란의 소용돌이 안에 있었다.

In 1677, when John Owen (1616–1683) published his book,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Faith through the Imputation of the Righteousness of Christ; Explained, Confirmed, and Vindicated, the Protestant doctrine of justification was still engulfed in controversy.


영국 칼빈주의자는 “나의 판단에는, 루터가 ‘칭의에 관한 글들을 잃어버린다면, 동시에 기독교 교리 전체를 잃어버린 것이 된다’고 말하였을 때, 그 때는 그가 진리를 말한 것이었으며, 그가 앞으로의 세대에서는 이러한 교리가 다시 불분명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면, 그는 참된 예언자가 아니었기를 바란다” 고 말했다.

"In my judgment," said the English Calvinist, "Luther spake the truth when he said, 'When the article of justification is lost, at the same time the whole Christian doctrine is lost.' And I wish he had not been a true prophet, when he foretold that in the following ages the doctrine hereof would be again obscured."



개혁주의 신학자이며, 옥스포드대학 부총장이며, 회중 교회 목사였던 오웬은 알미니안주의, 소시안주의, 로마 카톨릭주의에 대항하여 칭의에 관한 개신교 고백 교리를 변론하였다.

As a Reformed theologian, Oxford University Vice-Chancellor, and Congregationalist pastor, Owen defended the Protestant and confessional doctrine of justification against Arminianism, Socinianism, and Roman Catholicism.


실제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는 주로 이러한 세 가지 입장들, 특히 소시니안주의에 대한 거부였다.

Indeed,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Faith was primarily a repudiation of these three positions, particularly Socinianism.

17세기 개신교도들은 일반적으로 신자의 칭의의 공식적 근거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가 되어야한다고 이해하였지만, 전가된 의의 정확한 정의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While Protestants in the seventeenth-century generally understood the formal cause of a believer's justification to be the imputed righteousness of Christ, not all agreed on the precise definition of that imputed righteousness.


예를 들어, 웨스트민스터 총회(1643-1649)에서 대다수는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 포함되어있다고 믿었다.

At the Westminster Assembly (1643–1649), for example, the majority believed that the imputed righteousness of Christ included both Christ's active and passive obedience.


그러나 소수는 후자(수동적 순종)에 대해서는 확신하였지만, 전자(능동적 순종)에 대해서는 거부하였다.

A small minority, however, affirmed the latter but denied the former.


이들 가운데에는 총회의 초대 의장인 윌리엄 트위스(1578–1646)와 신학자인 토마스 가타커(1574–1654)가 포함되어있었다.

Among these were the Assembly's first prolocutor, William Twisse (1578–1646), and the theologian Thomas Gataker (1574–1654).

비록 오웬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는 능동적 순종의 전가라는 대다수의 관점에 상당히 관여하고있었다.
While Owen was not present at the Westminster Assembly, he was nevertheless fully committed to the majority view of imputed active obedience.


오웬은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에 관계하고 있었기에, 그가 주된 역할을 하여 구성한 사보이 선언에서는, 이러한 효과를 나타내게하는 용어들이 포함되도록 웨스트민스터 선언을 개선하였다.

So committed was Owen to the imputation of Christ's active obedience, that the Savoy Declaration, which he played a major role constructing, modified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to include words to that effect.


사보이 선언에서는, 칭의에 관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용어를 필수적으로 채용하고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순종과 충족을 그들에게 전가시킴으로서(웨민신앙고백41)”를 “그러나 율법 전체에 대한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과 그들의 완전하고 유일한 의를 위한 그의 죽으심 안에서의 수동적 순종의 전가에 의해서”라는 말로 바꾸었다.

While it essentially adopted the Westminster Confession's language on justification, the Savoy Declaration replaced the words, "but by imputing the obedience and satisfaction of Christ unto them" (WCF XLI) with the words, "but by imputing Christ's active obedience to the whole law, and passive obedience in his death for their whole and sole righteousness."

오웬에게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는 칭의 교리에 있어서 필수적 요소였으며, 앞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제공되었던 것보다도 좀 더 특별한 용어를 사용할 가치가 있었다.
For Owen, the imputation of Christ's active obedience was a necessary component of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and deserved more specific wording than previously afforded by the Westminster Confession.


자신의 시대에 개혁 교회 안에 있었던 논쟁들을 의식하면서, 그는 이 교리로부터 분리되어있던 자신의 청교도 동료들이, 성경으로부터 떠났을 뿐만 아니라, “영국 교회의 예전의 교리”로부터도 떠났다고 믿었다.

Aware of the debates within the Reformed churches of his day, he believed that his Puritan contemporaries who had deviated from this doctrine not only departed from Scripture, but from "the ancient doctrine of the church of England."

이 글은 오웬이 어떤 이유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가 칭의 교리의 필수적 요소였다고 믿었는지, 그리고 오웬은 이것을 어떻게 “구속 언약”, 혹은 구속 언약과 연계시켰는지에 대한 질문들을 추적해나가게 될 것이다.
This article shall pursue the question of why Owen believed the imputation of Christ's active obedience was an essential element of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and how Owen linked it to the "covenant of redemption" or pactum salutis.


이는 오늘날 개혁주의와 장로교 안에서, 전가된 능동적 순종의 주제에 관한 상당한 분량의 논쟁이 제기된 것을 고려해 볼 때, 중요한 질문인 것이다.

This is a significant question to consider in the present day for, within Reformed and Presbyterian circles, a substantial amount of debate has erupted over the issue of imputed active obedience.


한편으로는, 소위 말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 혹은 페더럴 비전을 고수하는 이들로서, 이들은 노골적으로 복음의 메세지를 신뢰한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라는 어떠한 특정한 교리적 표현을 요구한다는 것을 거부한다.

On the one hand are those holding to the so-called New Perspectives on Paul and/or Federal Vision, who outright "deny that faithfulness to the gospel message requires any particular doctrinal formulation of the 'imputation of the active obedience of Christ. '"


다른 한편으로는, 칭의에 있어서 신자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필요성을 확고히함으로서, 이러한 움직임에 대항하는 이들이 있다.

On the other hand are those who have responded to these movements by affirming the necessity of Christ's active obedience imputed to the believer in justification.

이와같은 논쟁의 한 가운데에서, 개혁정통주의의 탁월한 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오웬이, 왜 칭의에 있어서 전가에 관한 말들을 왜 언급하였는지 고찰해보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In the midst of such a debate, it may be helpful to consider why Owen, one of the preeminent theologians of Reformed Orthodoxy, said what he said about imputation in justification.


이 글은 오웬이,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전가시키신 것이, 구속 언약에서의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할 때문이었다고하는 것에 대하여 논할 것이다.

This essay argues that for Owen, God imputes, Christ's active obedience to the believer in justification because of the roles of Christ and the Holy Spirit in the pactum salutis.

이러한 주제를 탐구하기 위해서, 구속 언약에 관한 오웬의 교리와, 은혜 언약에 있어서의 보증이되고 중재자가 되신 그리스도의 역할과, 그리스도와 교회를 하나의 신비한 인격으로 연합되게하신 성령의 사역과, 칭의에 있어서 유일한 도구로서의 믿음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In order to examine this thesis, a concise observation will be made of Owen's doctrine of the pactum salutis, Christ's role as surety and mediator in the covenant of grace, the work of the Holy Spirit coalescing Christ and the church into one mystical person, and faith as the sole instrument in justification.

삼위일체적 구원: 오웬의 구속 언약 교리
Trinitarian Salvation: Owen's Doctrine of the Pactum Salutis

17세기 중반까지는 구속 언약 교리가 영국이나 대륙의 개혁 정통주의에서 상당히 일반적이었다.
By the mid-seventeenth-century, the doctrine of the pactum salutis had become quite prevalent in Reformed Orthodoxy, both in Britain and on the continent.


오웬도 이러한 경향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Owen was no exception to this trend.


오웬은 소시니안들을 대항하며 복음을 변론하는 1655년 작품에서, 구속 언약을 “성부와 성자사이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중재에 의한 우리들의 구속을 위한 사역의 수행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양하는 협약, 언약, 조약, 혹은 협정”으로 묘사하고있다.

In his 1655 work against the Socinians, Vindiciae Evangelicae, Owen described the pactum salutis as "that compact, covenant, convention, or agreement, that was between the Father and the Son, for the accomplishment of the work of our redemption by the mediation of Christ, to the praise of the glorious grace of God."


그는 이 언약에 5가지의 주된 요소들이 있음을 보았다.

He saw five major elements within this covenant:


1.성부는 약속자로서, 성바는 보증자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택한 자의 구원”이라 불리우는 보편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함께 총회에서 자의적으로 동의하셨다.

(i) The Father, as "promiser," and the Son, as "undertaker," voluntarily agreed together in counsel to achieve a common purpose, namely, "the glory of God and the salvation of the elect."


2.성부께서는 이러한 언약의 조건들을 규정하셨는데, 이는 성자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택함받은 자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그들을 위해서 자신의 순종으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시며,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으로 고난을 받으시는 것으로 구성되어있다.

(ii) The Father prescribed conditions for this covenant, which consisted of the Son assuming human nature, fulfilling the demands of the law through his obedience, and suffering the just judgment of God for the elect in order to satisfy God's justice on their behalf.  


3.언약의 약속들은 두 가지로 구성되어있는데: 첫번째는, 성부는 성자가 자신의 구속 사역을 완수하는데 있어서 지속적으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자신의 지상의 삶에서의 고통과 시험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시는 것이며, 두번째로는, 만약에 성자께서 자신에게 요구되었던 것을 성취하셨다면, 그 사역 자체는 그가 위하여 순종하고 고통을 받았던 이들의 구원과 영화를 가져옴으로서 번성할 것이다. 이러한 약속들은 성부께서 맹세로 확고히하신 것이다.

(iii) The promises of the covenant, which were two: First, the Father assisting the Son in the accomplishment of his redeeming work by continually being present with him as he underwent the afflictions and trials of his earthly life. Secondly, if the Son did what was required of him, the work itself would prosper by bringing about the deliverance and glorification of those for whom he obeyed and suffered. These promises the Father confirmed with an oath.


4.성자는 자의적으로 조건들을 수용하셨으며, 언약의 보증자로서 사역을 담당하셨다.

(iv) The Son voluntarily accepted the conditions, and assumed the work as surety of the covenant.


5.성부는 성자의 행하심을 인정하셨고 받아들이셨으며, 성자 마찬가지로 언약에서 주어진 약속들을 요구하셨다.

(v) The Father approved and accepted the performance of the Son, who likewise laid claim to the promises made in the covenant.


오웬은 구속 언약이 구속사의 근간이며 추구하는 목적이 되어야한다고 믿었다.
Owen believed the pactum salutis to be the basis and driving purpose of redemptive history.


오웬에게있어서 이는 교회의 고백으로 불분명하게 진술되기에는 너무나도 중요한 교리였다.

For Owen, it was a doctrine too important to state vaguely in the church's confession.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1647)이 회중교회 성도들의 조직에 적합하도록 변형된, 회중 교회를 위해 1658년에 그가 도움을 주어 다듬어진, 사보리 선언이라고 불리우는 신앙고백에는 구속 언약에 관한 분명한 용어를 포함하고있다.

The confession he helped craft in 1658 for the Congregationalist churches, namely, the Savoy Declaration, a modification of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7) to suit Congregationalist polity, included explicit language on the pactum salutis.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8.1에서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그의 독생자이신 주 예수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되도록 선택하시고 임명하시기를 기뻐하셨다” 고 말한다.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VIII.l reads, "It pleased God, in His eternal purpose, to choose and ordain the Lord Jesus, His only begotten Son, to be Mediator between God and man."


그러나 사보이 선언 8.1에서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그의 독생자이신 주 예수가, 두 분 사이에 맺어진 언약을 따라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되도록 선택하시고 임명하시기를 기뻐하셨다” 고 말한다.

VIII.1 of the Savoy Declaration, however, reads: "It pleased God, in his eternal purpose, to choose [sic] and ordain the Lord Jesus his only [sic] begotten Son, according to a Covenant made between them both, to be the Mediator between God and Man."

칼 투르먼은, 오웬이 구속 언약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고려함으로서, 17세기에 이러한 교리를 발전시키는데 중대한 공헌을 하였음을 지적하고있다.
Carl Trueman points out that Owen made a significant contribution to the seventeenth-century development of this doctrine by considering the Holy Spirit's function in the pactum salutis.


투루먼에 따르면, 이것은 “피셔와 벌켈레브의 업적들이, 배타적으로 성부-성자의 관계에 자신들의 주의를 기울임으로서, 구원의 경륜에 있어서 삼위일체에 미치지 못하는 근거를 발전시키고있다고 제기되는 이의에 대하여, 논쟁적 취약점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데 대한 분명한 삼위일체적 진보를 보여주는 핵심점”이었다.

This was, according to Trueman, "a point which represents a distinctly Trinitarian advance on the works of Fisher and Bulkelev who, with their exclusive attention to the Father-Son relationship were arguably vulnerable to the accusation of developing a subTrinitarian foundation for the economy of salvation."!!


오웬은 신격에서 각 위격의 구별된 역할을 조심스럽게 묘사함으로서, 구원의 삼위일체적 속성을 보여주고있다.

Owen was careful to describe the distinct roles of each Person in the Godhead, showing the Trinitarian nature of salvation.


성령에 관하여는, 처녀 마리아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잉태하신 것과, 성자가 성부께 자신을 내어드린 것과, 성자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도 성령을 통한 것이었다.

With regard to the Holy Spirit, it was through him that the Virgin Mary conceived the Incarnate Christ, that the Son offered himself to the Father, and that the Son was raised from the dead.


또한 성령은 택함받은 자를 그들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 효과적으로 연합케 인도하시며, 그들을 보존하신다.

The Spirit also brings the elect into union with Christ their Savior efficaciously and keeps them secure.

이와같이 오웬에게 있어서 구속 언약은 삼위 하나님 안에서의 언약이었으며, 이는 성부께서 자기에게 주신 이들을 위해서, 처음 아담의 행위 언약에 대한 범죄의 재앙적 결과들을 극복하고,  은혜 언약에 근거한 구속의 유익의 공로가 되신 둘째 아담이시며 언약적 대표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을 분명히 한 것이다.
Thus, the pactum salutis was for Owen an intra-Trinitarian covenant that made explicit Christ's role as the second Adam and federal head, who, on behalf of those given to him by the Father, overcame the catastrophic consequences of the first Adam's breaking of the covenant of works (foedus operum), and merited the benefits of redemption mediated in the covenant of grace (foedus gratiae).


오웬은, 자신의 시대의 많은 언약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구속 언약과 타락 이전의 행위 언약과 타락 이후의 은혜 언약 간의 필연적이고 핵심적인 연관성을 보았다.

As with many federalist theologians of his day, Owen saw a necessary and vital connection between the covenant of redemption and the pre-fall covenant of works and post-fall covenant of grace.


그의 구속 언약에 대한 관점은, 그가 전가된 능동적 순종을 이해하는 근거를 제공해주며, 영원한 과거로부터의 이와같은 언약이 없었다면, 그리스도는 은혜 언약 안에서 보증자와 중재자로 오시지 않으셨을 것이며, 성령은 택한 자를 그리스도께 연합시키지 않으셨을 것이다.  

His view of the pactum saluti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understanding of imputed active obedience, for apart from this covenant from eternity past, Christ would not have come as the surety and mediator in the covenant of grace, and the Holy Spirit would not have united the elect to Christ.

그리스도의 은혜 언약에서의 보증과 중재자로서의 역할에 있어서, 오웬은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에서 구속 언약에 대한 설명과 함께 자신의 주장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Christ's Role as Surety and Mediator in the Covenant of Grace Owen did not begin his case i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Faith with an explanation of the pactum salutis.


그보다 그는, 소위 말하는 “신자들의 화평과 순종의 진보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이러한 작업을 해야만하는 자신의 이유들과 목회적 관심사들에 관한 장문의 서문으로 시작한다.

He began, rather, with a lengthy introduction stating his reasons and pastoral concerns for taking up this work, namely, "the glory of God in Christ, with the peace and furtherance of the obedience of believers."


그는 칭의 자체의 의미는 물론이고, 의롭게하는 믿음의 속성과 목적에 관하여 여섯 장 가득히 이것으로 채우고있다.

He followed this with a full six chapters on the nature and object of justifying faith, as well as the meaning of justification itself.

그러나 오웬은 자신의 탐구가 일곱번째 장에 이르렀을 때, 종종 그래왔던 것과같이, 자신들을 위해서 이들 둘(교황주의자들과 소시니안들)로부터 과감하게 빌려오는 많은 침입자들은 물론이고, 교황주의자들과 소시니안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의한 칭의 교리를 반대하는 거대한 양대 무리라고 불리우는 이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전가의 속성에 관하여 좀 더 자세하게 다루기 시작한다.
When Owen came to the seventh chapter of his study, however, he began to deal with the nature of imputation more precisely.

Responding to what he called "the two grand parties by whom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the imputation of the righteousness of Christ is opposed; namely the Papists and the Socinians," as well as the "many interlopers, who, coming in on their hand, do make bold to borrow from both as they see occasion."

오웬은 낯선 의에 대하여 논한다.
Owen argued for an alien righteousness.


의는 우리 안으로부터 오기도하고, 혹은 우리 바깥으로부터 오기도한다.

Righteousness either comes from within us or from outside of us.


“한편으로는 전가의 근거가 우리 안에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이 안에 있는데: 이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In the one way, the foundation of imputation is in ourselves; in the other, it is in another: which are irreconcilable."


개인의 믿음조차도 이러한 근거가 될 수 없는데, 이는 만약에 하나님께서 단지 우리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면, 이는 은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의에 의한 것이며, 믿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행위에 의한 구원이다.

Not even one's faith can be this ground, for if God merely regards our faith as righteousness then it is ours by justice and not by grace, a salvation by works and not by faith.


그러므로 오웬은 결론 내리기를:

Thus, Owen concludes:

이러한 전가는 하나님의 'ex mera gratia,'- 단순한 사랑과 은혜의 행위로서; 이는 그리스도의 중재를 고려함으로서, 그리스도 자신의 것인, 진실되고, 실제적이며, 완전한 의를  믿는 모든 자에게, 효과적으로 인정하고 수여하시며, 이것들을, 그 자신의 은혜로운 행동으로 인하여, 그들을 죄로부터 죄가 없게하시며, 그들을 옳다고 인정하시며, 영생을 부여하심으로서, 그들의 것으로 여기시는 것이다.

This imputation is an act of God 'ex mera gratia,' —of his mere love and grace; whereby, on the consideration of the mediation of Christ, he makes an effectual grant and donation of a true, real, perfect righteousness, even that of Christ himself, unto all that do believe; and accounting it as theirs, on his own gracious act, both absolves them from sin and granteth them right and title unto eternal life.


그러므로 이러한 전가에 있어서, 그 자체가 우선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며, 그것의 어떠한 효과들은 아니며, 이것들이 이러한 전가로 인해서 우리들의 것이 된 것이다.

Hence, -in this imputation, the thing itself is first imputed unto us, and not any of the effects of it; but they are made ours by virtue of that imputation.

은혜 언약 안에서의 보증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중재는 신자에게 전가된 의를 제공해준다.
The mediation of Christ, as the surety in the covenant of grace, provides imputed righteousness for the believer.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의 여덟번째 장에서 오웬은, 보증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다른 것의 원인과 조건으로 삼는 것이며, 책임을 져야할 것이나 실행되어지는 것에 대한 답이되거나 담당하거나 갚는 것으로서, 이로인해서 자신이 정당하게 법률적으로 실행한 것에 대하여 책임지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In chapter eight of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Faith, Owen explained that a surety is "one that voluntarily takes on himself the cause and condition of another, to answer, or undergo, or pay what he is liable unto, or to see it done; whereon he becomes justly and legally obnoxious [i.e. liable] unto performance."16


보증자로서의 그리스도는, 보증자가 없었던 곳에서, 깨어진 행위 언약으로 인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필연이되었다:

Christ as surety was a necessity for our redemption due to the broken covenant of works, III which there was no surety:

아담과 맺어진 첫번째 언약에서는 보증자가 없었지만, 하나님과 사람은 언약의 직접적인 당사자였으며; 우리는 그 당시 모든 언약의 요구 조건들을 실행하고 응답할 수 있는 상태와 조건에 있었지만, 언약은 이미 깨어지고 무효화되었다… 실패하고 언약을 깨뜨린 이는 사람뿐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새언약을 만들 필요가 생겼으며...우리는 우리를 위한 보증자와 실행자가 있어야만 했다.
In the first covenant made with Adam there was no surety, but God and men were the immediate covenanters; and although we were then in a state and condition able to perform and answer all the terms of the covenant, yet it was broken and disannulled...It was man alone who failed and broke that covenant: wherefore it was necessary, that upon the making of the new covenant...we should have a surety and undertaker for us.

아담은 행위 언약 안에서 하나님께 완벽하고, 완전하고, 개인적인 순종을 드리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인류는 하나님께서 주시고자했던 종말론적 삶과 목표를 얻지를 못하였다.
Because Adam failed to render perfect, complete, and personal obedience to God in the covenant of works, humankind did not attain the eschatological life and goal for which God created them.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서 보증자과 실행자”로 보내주셨다.

Thus... God sent Christ as "a surety and undertaker for us."


오웬은 알미나안주의자인 Grotius(1583–1645), 소시나안주의자인 Schlichtingius(1592–1661), 그리고 17세기 영국 성공회 신학자이며 주교인 Hammond (1605–1660)등,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기보다는 하나님을 후원하거나 하나님을 위한 보증이었다고 주장하는, 대적자라고 분명하게 불리워지는 모든 이들을 대항하여,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면서 논쟁하였다.

In
using this language, Owen made an argument against the Arminian Grotius (1583–1645), the Socinian Schlichtingius (1592–1661), and the seventeenth-century Anglican theologian, Bishop Hammond (1605–1660), all of whom he explicitly named as asserting just the opposite, viz., that Christ was a sponsor or surety for God, rather than for us.


(대적자들의) 이러한 주장들과는 반대로, 오웬은 그리스도의 후원과 보증은, 구속 언약에 명시되고 은혜 언약에 적용되었던 것과 같이, 죄인을 위해 하나님께 향하여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위해서 죄인을 향하여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Contrary to these claims, Owen maintained that the sponsorship and surety of Christ, as prescribed in the pactum salutis and applied in the covenant of grace, was directed to God on behalf of sinners, and not to sinners on behalf of God.


오웬에게 있어서, 보증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은 그의 제사장직과 분리될 수 없었다: “그는 제사장으로서 보증자가 되셨으며, 이러한 직책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과 함께 하신 것이다.”

For Owen, Christ's role as surety was inseparable from his priesthood: "he is a surety as he is a priest, and in the discharge of that office; and therefore is so with God on our behalf."

이러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의 자신의 죽음을 포함하여) 자신의 사역을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성취하셨기 때문에, 칭의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전가는 불가능한 것이라는 소시니안의 주장에 대항하는 오웬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이었다.

This was important for Owen's case against the Socinian claim that the imputation of Christ's active and passive obedience in justification was impossible because Christ accomplished his work (including his death on the cross) for himself and on his own behalf.


오웬은 성육신의 모든 의미들이 구속 언약의 요구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것과 죄인들을 위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었다는 설명을 함으로서, (대적자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항하였다.

Owen opposed this claim by explaining that the whole point of the Incarnation was to fulfill the conditions of the pactum salutis and obtain salvation on behalf of sinners.


“인성의 신성과의 형언할 수 없는 연합”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죄성을 가진 인간을 위한 제사장과 중재자로서 행하시는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The "ineffable union between the human nature with the divine" is what qualified Christ to act as priest and mediator for sinful humans:

그러므로 그가 사람이 되시거나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신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정도로 언약의 보증이 되신 것과, 보편적으로 사람으로서는 율법에  대해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는 모세의 율법에 대하여 자신이 순종한 모든 것을 대표하신 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며, 이렇게 계획되고 실행된 것이며; 교회에 대한 관계가 없다면 자신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에게로 나셔서 우리에게 자신을 주셨으며; 우리를 위해서 사신 것이다; 즉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이들이 의롭게 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였으며; 이것이 보편적 교회의 믿음이다. 그리고 그가 우리를 위해서 하신 것은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다.

Whereas, therefore, he was neither made man nor of the posterity of Abraham for himself, but for the church—namely, to become thereby the surety of the covenant, and representative of the whole his obedience as a man unto the law in general, and as a son of Abraham unto the law of Moses, was for us, and not for himself, so designed, so performed; and, without a respect unto the church, was of no use unto himself. He was born to us, and given to us; lived for us; that "by the obedience of one many might be made righteous." This was the "grace of our Lord Jesus Christ;" and this is the faith of the catholic church. And what he did for us is imputed unto us.

다른 이들을 위해서 공인으로 보내심을 받으셨기에, 그리스도는 자신을 위해서 율법에 능동적으로 순종하신 것이 아니다. 그는 다른 이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법에 능동적으로 순종하신 것이다.
Sent as a public person on behalf of others, Christ was not actively obedient to the law for his own sake. He was actively obedient to the law of God for the sake of others.

하나의 신비한 인격: 전가의 주요 근거
One Mystical Person: The Principal Foundation of Imputation

오웬은 자신의 저서 여덟번째와 아홉번째 장에서, 전가의 주요 근거를 성령의 사역에 의한 전가라고 규정했다:

In chapters eight and nine of his study, Owen identified the principal foundation of imputation as the work of the Holy Spirit:



“이러한 구상에서의 주요 근거는,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의 신비적 인격이라는 것이며, 이러한 상태는 이들이 성령의 연합케하는 효능을 통해서 실질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The principal foundation hereof is, that Christ and the church, in this design, were one mystical person; which state they do actually coalesce into, through the uniting efficacy of the Holy Spirit."


성령이 창출해내시는, 이러한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 간의 연합은 필연적으로 이중 전가를 수반한다:

This union between Christ and his people, which the Holy Spirit creates, necessarily involves double imputation:


“그러므로 그가 하신 것이 마치 그들이 한 것처럼, 그들에게 전가된 것과 같이; 마찬가지로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할 죄가 그에게 책임지워진 것이다.”

"Hence, as what he did is imputed unto them, as if done by them; so what they deserved on the account of sin was charged upon him."


오웬은 자신의 주장을 견고히 하기 위해서, 어거스틴, 이레니우스, 시프리안, 아타나시우스, 유세비우스, 그리고 크리소스톰을 포함하는 여럿의 초대 교부들을 인용한다.

Owen quoted several of the early church fathers in support of his claim, including Augustine, Irenaeus, Cyprian, Athanasius, Eusebius, and Chrysostom.


그가 이것을 한 것은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이와같은 연합이 보편적 교회의 믿음이기에, 모든 세대에서도 이와 같아야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He did this in order to show that "such a union between Christ and believers is the faith of the catholic church, and hath been so in all ages."


또한 오웬은, 자신이 “다양한 유형들”에서 이와같은 신비적 연합을 가르친다고 믿고있는 성경의 여러 본문들을 인용한다.

Owen also referred to several passages in Scripture that he believed taught this mystical union in "divers kinds."

오웬에게 있어서, 성령께서 창출하시는 이와같은 신비한 연합은 구속 언약에 뿌리를 두고있는 것이다.
For Owen, this mystical union, which the Holy Spirit creates, is rooted in the pactum salutis:

이러한 연합의 처음 원천과 근거는, 그리고 그것의 모든 다른 근거들은, 타락한 인류의 회복과 구원에 관계한 성부와 성자 간에 있었던 영원한 협약에 자리잡고 있었다.
The first spring or cause of this union, and of all the other causes of it, lieth in that eternal compact that was between the Father and the Son concerning the recovery and salvation of fallen mankind.


여기에는, 다른 것들 가운데서, 그것의 효율성을 위해서, (이러한 연합의 근거가되는) 우리 본성을 떠맡는 것이 계획되었다.

Herein, among other things, as the effects thereof, the assumption of our nature (the foundation of this union) was designed.


나는 이러한 협약과 협의와 협정의 속성과 의미들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밝혔기에, 여기서는 이것에 대해서 다시 주장하지 않으려고한다.

The nature and terms of this compact, counsel, and agreement, I have declared elsewhere; and therefore must not here again insist upon it.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성부와 성자의 협의 안에서, 성령에 의해 효과적으로 이루어진, 무한한 지혜의 결과들이기에, 다른 모든 연합이나 어떠한 관계들로부터도 구분되어야한다.

But the relation between Christ and the church, proceeding from hence, and so being an effect of infinite wisdom, in the counsel of the Father and Son, to be made effectual by the Holy Spirit, must be distinguished from all other unions or relations whatever.

구속 언약을 완성하는데 있어서의 성령의 역할은, 그리스도와 신자들이 하나의 신비한 인격으로 연합되도록 하게 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었다.
The role of the Holy Spirit in the outworking of the pactum salutis was to cause Christ and believers to "coalesce into one mystical person.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신비적 몸의 일원이 되는 것은, 교회의 머리로서 모든 충만함으로 각 사람에 맞게끔 모든 신자들 안에 거하는 성령에 의한 것이다,

This is by the Holy Spirit inhabiting in him as the head of the church in all fullness, and in all believers according to their measure, whereby they become members of his mystical body."


“그리스도와 신자들이 하나의 신비적 인격이며, 하나의 영적으로 생기가 불려넣어진 몸과, 머리와 일원들인 것”은 성령에 의한 것이다.

Because of the Holy Spirit, "Christ and believers are one mystical person, one spiritually-animated body, head and members."

오웬은 그리스도와 신자들 간의 이러한 신비한 연합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전가라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믿었다:
Owen believed that this mystical union between Christ and believers resulted in the imputation of Christ's active and passive obedience: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속죄와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직접적인 근거가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기에; 이를 근거로 우리는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행하신 것과 고통받으신 것을 우리에게 승인하고 기증하시고 전가시키심으로, 우리가 그 안에서 행하고 고통받은 것으로 여겨질 것이며...이는 우리의 것이 될 것이며: 이 모두는  우리가 주장하는 것이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으로 그와 함께 하나의 신비한 인격으로 이끄는 우리의 실제적인 하나됨이다. 여기에 처음부터 믿음의 필요성이 기대되었던 것이다.
God hath appointed that there shall be an immediate foundation of the imputation of the satisfaction and righteousness of Christ unto us; whereon we may be said to have done and suffered in him what he did and suffered in our stead, by that grant, donation, and imputation of it unto us... that it may be made ours: which is all we contend for. And this is our actual coalescency into one mystical person with him by faith. Hereon doth the necessity of faith originally depend.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 의롭게 되는데, 이는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다.
Thus, believers are "made righteous by the righteousness of Christ, which is not inherent in us, but only imputed unto US."

결론
Conclusion

오웬에게 있어서, 신자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으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서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For Owen, Christ's passive obedience imputed to the believer was not enough for a right standing before God.


그는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한 순종과 이것이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 같은 목적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칭의를 위해서 자신이 받으신 율법의 형벌의 고통과 이것이 우리에게 전가된 것보다도 결코 덜 필요한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He said, "The obedience of Christ unto the law, and the imputation thereof unto us, are no less necessary unto our justification before God, than his suffering of the penalty of the law, and the imputation thereof unto us, unto the same end."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하나님의 계명의 율법으로 인해서, 오웬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단순한 고통 이상의 것이 필요하며, 이것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믿었다.

Because the law of God commands, "Do this and live," Owen believed that "we have need of more than the mere sufferings of Christ, whereby we may be justified before God."3l


단순한 용서와 무죄 선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Mere pardon and acquittal is not enough.


오직 완전한 의만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만하다.

Only perfect righteousness merits God's approval.

오웬은 구속 언약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하나의 신비적 인격체가 된 신자에게, 그리스도의 이와같은 능동적 의를 전가시키셨다고 믿었다.
Owen believed that, because of the pactum salutis, God imputed this active righteousness of Christ to believers who are coalesced with him into one mystical person.


그리스도와 그의 택한자의 이러한 신비적 연합을 이해함으로서, 오웬은 결코 칭의와 성화의 연대적 순서와 구분을 혼합시키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직 믿음이라는 고백과 개혁주의 공식으로부터도 일탈하지도 않았다.

By understanding this mystical union of Christ and his elect as the principal foundation of imputation, Owen in no way conflated the chronological order and distinction of justification and sanctification, nor deviated from a confessional, Reformed formulation of sola fide.



posted by Wonho Kim
:
교리 2019. 3. 26. 22:02

메이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메이첸은 임종시에 머레이에게 “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것이 없었다면 내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전가 교리는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이며, 전가의 내용에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현 시대에 대표적으로 전가 교리를 거부하는 이들은 새관점주의자들이며, 그 한 가운데에는 톰 라이트가 있다.


하지만 능동적 순종이라는 그리스도의 삶의 여정에 대한 특징적 개념이 정립되지 않는다면, 개혁주의 진영에 있다고하는 이들 조차도 새관점에 쉽게 동화될 수 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출발하였지만 행위 언약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개념을 거부하는 패더럴 비전Federal Vision의 경우만 보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새관점과 유사한 형태로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패더럴비전이 새관점과 차이가 있다면, 새관점은 전가 교리 자체를 부인하는 것과 달리, 페더럴비전은 오직 수동적 순종의 의만의 전가를 인정한다.


결핍된 능동적 순종의 의는 결과적으로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신자에게 순종의 행위가 요구된다.


처음 아담의 경우, 에덴에서 요구되었던 선악과 금령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종말론적 축복에 이를 수 없었다.


처음 아담에게는 선악과 금령만이 아니라 창세기 1장 28절의 통치 명령이 요구되었었다.


율법의 저주가 아담의 범죄와 관련된 것이었다면, 율법의 요구는 선악과 금령에서의 행위 언약 뿐만이 아니라 통치 명령을 통한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위한 것이었다.


능동적 순종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한다.


처음 아담은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을 실행하지 못하였지만,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능동적 순종을 통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하셨다.


처음 아담과의 대비가 없는 하나님 나라는 둘째 아담이 없는 새관점의 하나님 나라와 같은 결론에 도달된다.


모든 인류의 죄는 처음 아담의 범죄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지만, 둘째 아담의 개념이 제거된 새관점은 인간의 죄를 단지 가나안에서의 유대 이스라엘의 범죄로 국한시킨다.


둘째 아담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이며,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과 능동적 순종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한 절대 개념이다.


하지만 새관점에서는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다.


새관점은 아담의 불의와는 관계없이 논리를 전개하지만, 능동적 순종의 개념은 전적으로 아담의 의와 불의라는 관점으로부터 논리가 전개된다.


메이첸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아담의 불순종과 대비시키면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하여 설명하고있다.


메이첸이 예를 들어 설명하는 도덕 감화론은 오늘날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 그대로 적용해 볼 수 있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메이첸이 말하는 능동적 순종을 번역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The Active Obedience of Christ


그레샴 메이첸

J Gresham Machen


지난 주일 오후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의 윤곽을 그리는데 있어서, 나는 이 사역의 한 가지 매우 중요한 부분에 대하여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LAST Sunday afternoon, in outlining the Biblical teaching about the work of Christ in satisfying for us the claims of God’s law, I said nothing about one very important part of that work.


저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할  죄값으로 죽으셨음을 지적하였지만, 그가 우리를 위해서 하신 또 다른 것은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I pointed out that Christ by His death in our stead on the cross paid the just penalty of our sin, but I said nothing of another thing that He did for us.


저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이 행하신 하나님의 법에 대한 능동적 순종에 관하여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I said nothing about what Christ did for us by His active obedience to God’s law.


우리가 한 단계 더 나아가기 전에 이 부분에 관한 윤곽을 그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It is very important that we should fill out that part of the outline before we go one step further.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지난 주 오후에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에 대하여 우리들이 언급했던 것만을 행하셨다고 가정해보세요.
Suppose Christ had done for us merely what we said last Sunday afternoon that He did.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어졌던 율법의 마땅한 형벌만을 치루시고 그 이상의 어떠한 것도 행하지 않으셨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어느 곳에 있어야하겠습니까?

Suppose He had merely paid the just penalty of the law that was resting upon us for our sin, and had done nothing more than that; where would we then be?


그렇다면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 생각 속에서나마,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의 한 부분을 나머지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 합당하다고 가정한다면-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죄값만을 치르시고 그 이상의 것을 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잘해봐야 아담 자신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행위 언약 아래 두신 것을 알았던 상황에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Well, I think we can say — if indeed it is legitimate to separate one part of the work of Christ even in thought from the rest — that if Christ had merely paid the penalty of sin for us and had done nothing more we should be at best back in the situation in which Adam found himself when God placed him under the covenant of works.

이 행위 언약은 일정 기간의 검증이었습니다.
That covenant of works was a probation.


만약에 아담이 특정 기간동안 하나님의 법을 지켰다면, 그는 영생을 얻었을 것입니다.

If Adam kept the law of God for a certain period, he was to have eternal life.


만약에 그가 불순종하였다면, 그는 죽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If he disobeyed he was to have death.


결국 그는 불순종했고, 죽음의 형벌은 그와 그의 후손에게 내려졌습니다.

Well, he disobeyed, and the penalty of death was inflicted upon him and his posterity.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러한 형벌의 값을 치르셨습니다.

Then Christ by His death on the cross paid that penalty for those whom God had chosen.

정말 다행입니다.
Well and good.


만약에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전부라면, 우리는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But if that were all that Christ did for us, do you not see that we should be back in just the situation in which Adam was before he sinned?


아담의 범죄에 대한 형벌은, 그리스도께서 전부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로부터 제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The penalty of his sinning would have been removed from us because it had all been paid by Christ.


그러나 영생을 얻는 미래의 일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우리의 완전한 순종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But for the future the attainment of eternal life would have been dependent upon our perfect obedience to the law of God.


우리는 단지 다시 검증의 시간으로 돌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We should simply have been back in the probation again.

더군다나 우리는, 검증에 있어서, 처음 아담이 놓여있던 환경보다도 훨씬 희망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돌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Moreover, we should have been back in that probation in a very much less hopeful way than that in which Adam was originally placed in it.


아담은 검증을 받는데 있어서 모든 것이 아담에게 좋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Everything was in Adam’s favour when he was placed in the probation.


그는 지적이고 의롭고 거룩하게 창조되었습니다.

He had been created in knowledge, righteousness and holiness.


그는 분명히 선하게 창조되었습니다.

He had been created positively good.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타락했습니다.

Yet despite all that, he fell.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 것이 단지 우리의 과거의 범죄를 제거하는 것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완전한 순종을 근거로 선언하신 상급을 우리의 노력으로 얻도록 남겨두신다면, 우리는 타락할 수밖에 없을 뿐만이 아니라 확실하게 타락할 것입니다.

How much more likely would we be to fall — nay, how certain to fall — if all that Christ had done for us were merely to remove from us the guilt of past sin, leaving it then to our own efforts to win the reward which God has pronounced upon perfect obedience!

그러나 저는,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가 실제로하셨던 것보다도 덜하셨을 경우에 일어날 수 있었을 것에 대하여 탐구하는 것을 그만둘 수밖에 없습니다.

But I really must decline to speculate any further about what might have been if Christ had done something less for us than that which He has actually done.


실제에 있어서는, 그는 아담의 처음 범죄의 형벌과 우리 각자가 행한 죄들의 형벌을 감당하셨을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생을 위해서 분명한 공로가 되셨습니다.

As a matter of fact, He has not merely paid the penalty of Adam’s first sin, and the penalty of the sins which we individually have committed, but also He has positively merited for us eternal life.


달리 표현하자면, 그는 형벌을 갚으신 것과 검증을 받으신 것 모두에 있어서 우리의 대표가 되셨습니다.

He was, in other words, our representative both in penalty paying and in probation keeping.


그는 우리를 위해서 죄의 형벌을 치르셨으며, 또한 우리를 위해서 검증도 받으셨습니다.

He paid the penalty of sin for us, and He stood the probation for us.

이것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받은 자들이 타락 이전의 아담보다도 훨씬 더 축복받은 상태에 있는 이유입니다.
That is the reason why those who have been saved by the Lord Jesus Christ are in a far more blessed condition than was Adam before he fell.


타락 이전의 아담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의로웠지만, 아직 불의하게될 가능성이 있는 상태였습니다.

Adam before he fell was righteous in the sight of God, but he was still under the possibility of becoming unrighteous.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을 받은 이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울 뿐만이 아니라 불의하게될 가능성은 넘어선 이들입니다.

Those who have been saved by the Lord Jesus Christ not only are righteous in the sight of God but they are beyond the possibility of becoming unrighteous.


이들의 경우에 있어서 검증은 끝난 것입니다.

In their case, the probation is over.


이는 그들이 성공적으로 설 수 있었기 때문에 끝난 것은 아닙니다.

It is not over because they have stood it successfully.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완전한 순종을 조건으로 약속하신 보장된 축복의 상급을 얻었기 때문에 끝난 것은 아닙니다.

It is not over because they have themselves earned the reward of assured blessedness which God promised on condition of perfect obedience.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대신해서 감당하셨기 때문에 끝난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법에 대한 자신의 완전한 순종의 상급을 공로로 얻으셨기 때문입니다.

But it is over because Christ has stood it for them; it is over because Christ has merited for them the reward by His perfect obedience to God’s law.

나는 이를 하나님의 법과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들 간의 대화를 상상함으로서  분명하게 설명해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I think I can make the matter plain if I imagine a dialogue between the law of God and a sinful man saved by grace.

하나님의 법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아, 너는 나의 계명에 순종하였는가?’.
‘Man,’ says the law of God, ‘have you obeyed my commands?’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을 대답하기를 “아니오”.
‘No,’ says the sinner saved by grace.


‘나는 나의 대표자로서의 처음 범죄한 아담 안에서 뿐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생각에서, 그리고 말과 행동에서 범죄하여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 하였습니다.’

‘I have disobeyed them, not only in the person of my representative Adam in his first sin, but also in that I myself have sinned in thought, word and deed.’

‘그렇다면, 죄인이여’ 하나님의 법이 말씀하시기를, ‘자네는 내가 불순종에 대하여 선언하였던 형벌을 치렀는가?’
‘Well, then, sinner,’ says the law of God, ‘have you paid the penalty which I pronounced upon disobedience?’

‘아닙니다’ 죄인이 대답하기를, ‘나는 나 자신이 형벌을 치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치르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나의 대표자였습니다. 그러므로, 형벌에 관해서 나는 결백합니다.’
‘No,’ says the sinner, ‘I have not paid the penalty myself; but Christ has paid it for me. He was my representative when He died there on the cross. Hence, so far as the penalty is concerned, I am clear.’

‘그렇다면, 죄인이여’ 하나님의 법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보장하신 축복을 얻기 위해서 선언하셨던 조건들에 대해서는 어떠하였는가?’
‘Well, then, sinner,’ says the law of God, ‘how about the conditions which God has pronounced for the attainment of assured blessedness?


시험은 통과하였는가?

Have you stood the test?


너는 검증의 기간 동안에 완전한 순종으로 영생을 얻을 공로를 쌓았는가?

Have you merited eternal life by perfect obedience during the period of probation?’

‘아니오’ 죄인은 말하기를, ‘나는 나 자신의 완전한 순종으로 영생을 얻을 공로를 쌓지 못했습니다.
‘No,’ says the sinner, ‘I have not merited eternal life by my own perfect obedience.


나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도 나는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범죄하였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시고, 나 자신의 양심도 알고 있습니다.

God knows and my own conscience knows that even after I became a Christian I have sinned in thought, word and deed.


그러나 나 자신의 어떠한 순종도 영생을 얻기 위한 공로가 될 수 없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서 자신의 완전한 순종으로 공로를 얻으셨습니다.

But although I have not merited eternal life by any obedience of my own, Christ has merited it for me by His perfect obedience.


그가 율법에 복종하신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He was not for Himself subject to the law.


그는 모든 것의 주가 되시기에, 그에게는 자신을 위한 어떠한 순종도 요구되지 않습니다.

No obedience was required of Him for Himself, since He was Lord of all.


그렇다면, 그가 이 땅에 계셨던 동안에 자신을 율법에 내어주신 순종은, 나를 대신하는 자로서 스스로 내어주신 것입니다.

That obedience, then, which He rendered to the law when He was on earth was rendered by Him as my representative.


비록 나에게는 나 자신의 의가 없지만, 오직 믿음으로 나에게 전가되어 받게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옷 입어서, 검증이 지켜졌던 것이 나에게 관계되어있다는 사실과, 그리스도께서 이와같이 나를 위해서 얻으신 영광스러운 상급이 나를 기다리고있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진실하시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습니다.’

I have no righteousness of my own, but clad in Christ’s perfect righteousness, imputed to me and received by faith alone, I can glory in the fact that so far as I am concerned the probation has been kept and as God is true there awaits me the glorious reward which Christ thus earned for me.’

이와같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그리스도인과 하나님의 법 간의 대화는 단순한 형태입니다.

Such, put in bald, simple form, is the dialogue between every Christian and the law of God.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완전한지요!

How gloriously complete is the salvation wrought for us by Christ!


그리스도께서는 형벌을 감당하셨고, 상급을 받을 공로를 이루셨습니다.

Christ paid the penalty, and He merited the reward.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두 가지 위대한 것들입니다.

Those are the two great things that He has done for us.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이 두 부분을 구분하는데 익숙해져있는데, 하나는 그의 수동적 순종으로 불리우고, 다른 하나는 그의 능동적 순종으로 불리운다.
Theologians are accustomed to distinguish those two parts of the saving work of Christ by calling one of them His passive obedience and the other of them His active obedience.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을 받으신 그의 수동적 순종으로, 그는 우리를 위해서 형벌을 치루셨고,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는 것에 대한 그의 능동적 순종으로, 그는 우리를 위해서 상급에 대한 공로를 이루셨습니다.

By His passive obedience — that is, by suffering in our stead — He paid the penalty for us; by His active obedience — that is, by doing what the law of God required — He has merited for us the reward.

나는 이와같은 용어를 매우 좋아합니다.
I like that terminology well enough.


나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역의 두 가지 면이 인간의 언어로 잘 제시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I think it does set forth as well as can be done in human language the two aspects of Christ’s work.


여기에는 이러한 구분이 우리로하여금 그리스도의 사역의 두 부분 가운데 한 부분을 다른 부분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하는 위험이 도사리고있습니다.

And yet a danger lurks in it if it leads us to think that one of the two parts of Christ’s work can be separated from the other.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그의 수동적 순종으로부터 구분 할 수 있겠읍니까?
How shall we distinguish Christ’s active obedience from His passive obedience?


우리는 그가 자신의 능동적 순종을 자신의 삶으로 이루셨으며, 자신의 수동적 순종을 자신의 죽음으로서 이루셨다고 말해야만 합니까?

Shall we say that He accomplished His active obedience by His life and accomplished His passive obedience by His death?


아니요,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No, that will not do at all.


그리스도께서는 땅에서 사시는 모든 순간 동안에 자신의 수동적 순종에 관여하셨습니다.

During every moment of His life upon earth Christ was engaged in His passive obedience.


이것은 모두 그분에게는 굴욕이었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It was all for Him humiliation, was it not?


이것은 모두 고통이었습니다.

It was all suffering.


이것은 그분이 죄에 대한 형벌을 치르신 모든 것이었습니다.

It was all part of His payment of the penalty of sin.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그의 죽으심이 능동적 순종이 아닌 수동적 순종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On the other hand, we cannot say that His death was passive obedience and not active obedience.


이와는 반대로, 그의 죽으심은 그분의 능동적 순종의 왕관이었습니다.

On the contrary, His death was the crown of His active obedience.


이(죽으심)는 하나님의 법에 대한 순종의 왕관이었으며, 이로 인해서 그는 자신이 구원하게된 이들의 영생에 대한 공로가 되셨습니다.

It was the crown of that obedience to the law of God by which He merited eternal life for those whom He came to save.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실상이 무엇인지 보이지 않습니까?
Do you not see, then, what the true state of the case is?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그의 수동적 순종은 그의 사역을 두 가지로 나누는 분기점이 아니며, 그의 지상에서의 삶 가운데 일부 일들은 그의 능동적 순종이 될 수 있으며, 그의 삶의 다른 일들은 그의 수동적 순종이 될 수 있지만; 그의 삶의 모든 일들이 능동적 순종이면서 동시에 수동적 순종이었습니다.

Christ’s active obedience and His passive obedience are not two divisions of His work, some of the events of His earthly life being His active obedience and other events of His life being His passive obedience; but every event of His life was both active obedience and passive obedience.


그의 삶의 모든 일들은 죄의 형벌에 대하여 치루시는 값의 일부분이며, 그의 삶에서의 모든 일들은, 자신의 백성을 위해서 영생의 상급을 얻으려고 하나님의 법을 영광스럽게 지키시는 일부분입니다.

Every event of His life was a part of His payment of the penalty of sin, and every event of His life was a part of that glorious keeping of the law of God by which He earned for His people the reward of eternal life.


달리 표현하자면, 그의 행위의 두 가지 면은 서로 불가피하게 뒤얽혀있다는 것입니다.

The two aspects of His work, in other words, are inextricably intertwined.


어떠한 것도 서로 분리되어서 실행되지는 않았습니다.

Neither was performed apart from the other.


이것들은 모두 우리의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를 위해서 기록되어진 놀랍고 완전한 구원을 구성하고있습니다.

Together they constitute the wonderful, full salvation which was wrought for us by Christ our Redeemer.


우리가 간단 명료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법에 관해서 우리를 대신하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We can put it briefly by saying that Christ took our place with respect to the law of God.


그는 우리를 위해서 율법의 형벌을 받으셨고, 그는 우리를 위해서 율법의 계명들에 순종하셨습니다.

He paid for us the law’s penalty, and He obeyed for us the law’s commands.


그는 우리를 지옥에서 구하셨으며, 그는 우리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대신 얻어주셨습니다.

He saved us from hell, and He earned for us our entrance into heaven.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그에게 빚진 것입니다.

All that we have, then, we owe unto Him.


우리가 이 세상에서나 다음 세상에서 그리스도께 감사하지 않아도 되는 축복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There is no blessing that we have in this world or the next for which we should not give Christ thanks.

제가 말한 바와 같이, 저는 제 언어가 불충분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있습니다.
As I say that, I am fully conscious of the inadequacy of my words.


나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관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하려고 하였지만; 성경 자체의 놀라운 풍성함과 따뜻함과 비교해 볼 때, 어떠한 단순한 인간의 요약도 - 제가 한 것보다도 더욱 좋다고 하더라도- 차갑고 메마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I have tried to summarise the teaching of the Bible about the saving work of Christ; yet how cold and dry seems any mere human summary — even if it were far better than mine — in comparison with the marvellous richness and warmth of the Bible itself.


제가 다음 주일 오후에 저와 함께 들어가기를 부탁하려고하는 것은 성경 자체에 관한 것입니다.

It is to the Bible itself that I am going to ask you to turn with me next Sunday afternoon.


우리가 성경의 각 부분을 다른 부분들과 적절한 관계 속에서 취하도록하기 위해서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하려고하는데 있어서, 하나님 자신이 그분의 언어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으로, 모든 사람들의 요약과 우리의 요약을 점검하기 위해서, 저는 여러분이 다음 주일에 저와 함께 그 위대한 본문들 자체로 들어가기를 요청하려고합니다.

Having tried to summarise the Bible’s teaching in order that we may take each part of the Bible in proper relation to other parts, I am going to ask you next Sunday to turn with me to the great texts themselves, in order that we may test our summary, and every human summary, by what God Himself has told us in His Word.


우리가 이러한 일을 할 때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새롭게 회복되지는지 모르겠습니다!

Ah, when we do that, what refreshment it is to our souls!


이러한 가르침을 요약하려는 모든 인간의 시도들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월등하게 우수한지 모르겠습니다!

How infinitely superior is God’s Word to all human attempts to summarise its teaching!


이와같은 시도들은 필요하며; 우리는 이것이 없이 할 수가 없으며; 성경에 대하여 참으로 진실된 모든 사람은 이 일에 참여할 것입니다.

Those attempts are necessary; we could not do without them; everyone who is really true to the Bible will engage in them.


그러나 심령을 건드리는 것은 바로 성경의 말씀이기에, 우리가 성경을 요약하면서 말하는 모든 것들은 - 혹은 심지어 위대한 신학자들의 성경에 대한 자료에 있어서도- 성경 자체와 비교하면서 새롭게 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But it is the very words of the Bible that touch the heart, and everything that we — or for the matter of that even the great theologians — say in summary of the Bible must be compared ever anew with the Bible itself.

그러나 오늘 오후에는, 다음 주일에 우리가 최대한 지적으로 가능한 방법으로 성경 탐구를 시작하기 위해서, 저와 함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하여 사람들이 가지고있는 한 두 가지 다른 관점들을 얼핏 살펴보도록 하고자합니다.

This afternoon, however, just in order that next Sunday we may begin our searching of the Scriptures in the most intelligent possible way, I am going to ask you to glance with me at one or two of the different views that men have held regarding the cross of Christ.

저는 이미 여러분에게 정통주의 관점을 요약해주었습니다.
I have already summarised for you the orthodox view.


이 관점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가 마땅히 치러야 할 형벌을 우리를 대신해서 치르셨습니다.

According to that view, Christ took our place on the cross, paying the penalty of that we deserved to pay.


이러한 관점은 매우 단순한 언어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That view can be put in very simple language.


우리에게는 죄로 인해서 영원한 죽음이 마땅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자리에서 죽으셨습니다.

We deserved eternal death because of sin; Jesus, because He loved us, took our place and died in our stead on the cross.


여러분들이 원한다면 이와같은 관점이 혐오스럽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Call that view repulsive if you will.


이는 실제로 자연인에게는 혐오스럽습니다.

It is indeed repulsive to the natural man.


그러나 이것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하지는 마십시오.

But do not call it difficult to understand.


어린 아이도 이를 이해할 수 있으며,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이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A little child can understand it, and can receive it to the salvation of his soul.

이와같은 대속적 관점을 거부하면서, 많은 이들이 다른 관점들로 나아갑니다.
Rejecting that substitutionary view, many men have advanced other views.


대다수가 속죄이론입니다.

Many are the theories of the atonement.


저는, 우리가 만약에 그들이 매우 소수의 일반적 분파들로 나뉘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게된다면, 그들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다양함들이 마치 질서와 같은 것들로 축소되고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Yet I do think that their bewildering variety may be reduced to something like order if we observe that they fall into a very few general divisions.


그들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이 단지 사람들에게 주는 도덕적 효과만을 가지고있다는 이론입니다.
Most common among them is the theory that Christ’s death upon the cross had merely a moral effect upon man.


이러한 관점을 옹호하는 이들은 말하기를,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Man is by nature a child of God, say the advocates of that view.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자신의 고귀한 특권을 충분히 사용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But unfortunately he is not making full use of his high privilege.


그래서 사람은 끔찍한 나락으로 추락하였으며, 끔찍한 나락으로 추락한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He has fallen into terrible degradation, and having fallen into terrible degradation he has become estranged from God.


사람은 더 이상 마땅히 살아가야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친밀한 관계로 살아가고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He no longer lives in that intimate relationship of sonship with God in which he ought to live.

사람과 하나님간의 이와같은 낯선 관계가 어떻게 제거될수 있겠으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교제관계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How shall this estrangement between man and God be removed; how shall man be brought back into fellowship with God?


우리가 지금 얘기하고있는 이러한 관점을 옹호하는 이들은, 단순히 사람을 자신의 악의 길에서 돌이키게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이 가지고있는 고귀한 특권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도록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Why, say the advocates of the view of which we are now speaking, simply by inducing man to turn from his evil ways and make full use of his high privilege as a child of God.


하나님 쪽에서는 확실하게 장벽이 없으며, 오직 사람의 어리석고 사악한 마음에만 있을 뿐이다(고 이들은 말합니다).

There is certainly no barrier on God’s side; the only barrier lies in man’s foolish and wicked heart.


일단 이러한 장벽을 극복하기만하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고 이들은 말합니다).

Once overcome that barrier and all will be well.


(이들은) 일단 사람의 딱딱한 마음을 어루만져서 다시금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볼수 있도록하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이 용서받은 것보다도 더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인도하고나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진실된 관계는 단번에  회복될 수 있으며, 사람이 거룩한 삶 가운데 열심으로, 자신이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사랑 받는 자녀로서 갖고 있는 고귀한 특권을 사용하도록 하여야한다(고 주장합니다).

Once touch man’s stony heart so that he will come to see again that God is his Father, once lead him also to overcome any fear of God as though God were not always more ready to forgive than man is to be forgiven; and at once the true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man can be restored and man can go forward joyously to the use, in holy living, of his high privilege as a child of the loving heavenly Father.

그러나 어떻게 사람의 마음이 다스려질 수 있을 것이며, 자신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도록 인도받을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But how can man’s heart be touched, that he may be led to return to his Father’s house and live as befits a son of God?


지금 우리가 언급하고있는 관점을 옹호하고있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함으로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By the contemplation of the cross of Christ, say the advocates of the view that we are now presenting.


예수 그리스도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Jesus Christ was truly a son of God.


진실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와같은 독특한 방식에서는 어느 정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워질 수도 있습니다.

Indeed, He was a son of God in such a unique way that He may be called in some sort the Son of God.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내어주시고, 그리스도도 기꺼이 죽음에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짓고 잘못되어진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놀라운 증거가 될 수는 있습니다.

When therefore God gave Him to die upon the cross and when He willingly gave Himself to die, that was a wonderful manifestation of God’s love for sinning, erring humanity.


이와같은 사랑 앞에서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든 적대감이 무너져야만 합니다.

In the presence of that love all opposition in man’s heart should be broken down.


이러한 이는 결국 하나님이 진실로 자신의 아버지이시라는 사실을 인식하여야만 하며, 결국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하는 고귀한 특권을 사용하여야만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He should recognise at last the fact that God is indeed his Father, and recognising that, he should make use of his high privilege of living the life that befits a child of God.

이와같은 것을 소위 말하는 속죄에 대한 ‘도덕 감화론’이라고 부릅니다.
Such is the so-called ‘moral-influence theory’ of the atonement.


이는 일천가지의 다양한 형태들을 취하고있으며, 자신들이 붙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조그마한 지식도 가지고있지 않은 수천의 사람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It is held in a thousand different forms, and it is held by thousands of people who have not the slightest notion that they are holding it.

이를 받아들이고 있는 이들 가운데 일부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실제적 믿음과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려고 하고있습니다.
Some of those who have held it have tried to maintain with it something like a real belief in the deity of Christ.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참된 영원하신 아들이셨다면, 그분이 십자가에서 주신 선물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가장 위대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If Christ was really the eternal Son of God, then the gift of Him on the cross becomes all the greater evidence of the love of God.


그러나 속죄에 관한 도덕 감화적 관점을 고수하는 거의 대다수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고있다는 것입니다.

But the overwhelming majority of those who hold the moral-influence view of the atonement have given up all real belief in the deity of Christ.


이러한 사람들은 단순히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들에게 자기 희생이라는 최상의 본보기를 제시한 것이라는 생각을 고수하고있습니다.

These persons hold simply that Jesus on the cross gave us a supreme example of self-sacrifice.


이와같은 본보기에 의해서 우리는 그와같이 행동할 영감을 얻게됩니다.

By that example we are inspired to do likewise.


우리는 어떤 거룩한 동기로 인한 실제적 순교로서나 혹은 희생적 헌신으로, 우리의 삶을 희생하는 영감을 얻을 것이다.

We are inspired to sacrifice our lives, either in actual martyrdom in some holy cause or in sacrificial service.


이와같이 자신의 삶을 희생함으로서, 우리는 자신이 이로 인하여 이전보다도 더 고귀한 삶을 성취했다는 것을 발견하게된다.

Sacrificing thus our lives, we discover that we have thereby attained a higher life than ever before.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로하여금 도덕적 절정에 이르게하는 길이 되었습니다.

Thus the cross of Christ has been the pathway that leads us to moral heights.

오늘날 인기있는 대부분의 종교 서적을 읽어보세요,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들이 의미하는 것이 그 밑바탕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저에게 말씀해주십시오.
Read most of the popular books on religion of the present day, and then tell me whether you do not think that that is at bottom what they mean.


그들 가운데 일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Some of them speak about the cross of Christ.


그들 가운데 일부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구속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Some of them say that Christ’s sufferings were redemptive.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리스도 자신의 십자가일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십자가이며; 그리스도의 고난이 구속적일 때 우리의 고난도 구속적이라는 것을 고수하고있다는 것입니다.

But the trouble is they hold that the cross of Christ is not merely Christ’s cross but our cross; and that while Christ’s sufferings were redemptive our sufferings are redemptive too.


그들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 전부는 갈보리의 그리스도가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을 가리키고있다는 것입니다.

All they really mean is that Christ on Calvary pointed out a way that we follow.


그는 자기 희생의 길을 신성화하고 있습니다.

He hallowed the pathway of self-sacrifice.


우리는 이 길을 따라야하며, 그렇게함으로서 우리 영혼에 더 고귀한 삶을 얻어야한다는 것입니다.

We follow in that path and thus we obtain a higher life for our souls.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다루고있는 대부분의 현대 서적들의 가장 핵심적이고 널리 퍼져있는 악입니다.
That is the great central and all-pervading vice of most modern books that deal with the cross.


이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단순히 자아 희생이라는 일반적 원리의 한가지 예로 만들고 있습니다.

They make the cross of Christ merely an example of a general principle of self-sacrifice.


그리고 만약에 그들이 여전히 구원에 관하여 말하고있다면, 그들은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걸음으로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And if they talk still of salvation, they tell us that we are saved by walking in the way of the cross.


이러한 관점으로는,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라 우리의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It is thus, according to this view, not Christ’s cross but our cross that saves us.


십자가의 길이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이 됩니다.

The way of the cross leads us to God.


그리스도는 우리로하여금 자아 희생의 길인,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게끔 인도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줄 수 있지만, 여기서 실제로 우리를 구원해주는 것은 그 안에서의 우리의 걸음이지, 그리스도의 걸음이 아닙니다.

Christ may have a great influence in leading us to walk in that way of the cross, that way of self-sacrifice; but it is our walking in it and not Christ’s walking in it which really saves us.


그러므로 결과적으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피로서 구원을 받게되는 것이 아닙니다.

Thus we are saved by our own efforts, not by Christ’s blood after all.


이것은 죄인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옛 개념과 같은 것입니다.

It is the same old notion that sinful man can save himself.


이는 새 옷가게의 간판을 걸어놓고서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It is that notion just decked out in new garments and making use of Christian terminology.

이와같은 것이 속죄에 관한 도덕감화론입니다.
Such is the moral-influence theory of the atonement.


여기에 더해서 우리는 종종 통치론이라 불리우는 것을 보게됩니다.

In addition to it, we find what is sometimes called the governmental theory.


통치론은 확신하건데 얼마나 낯설고 낯 뜨겁고 왜곡된 것인지요!

What a strange, compromising, tortuous thing that governmental theory is, to be sure!

통치적 관점에서 본다면, 신성에 근거하고있는 어떠한 영원한 하나님의 정의가 충족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According to the governmental view, the death of Christ was not necessary in order that any eternal justice of God, rooted in the divine nature, might be satisfied.


이제까지 통치적 관점은 도덕 감화론을 지지하는 이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So far the governmental view goes with the advocates of the moral-influence theory.


그러나 이 이론은 세상에서 선한 제자도가 유지되기 위한 목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필요성을 고수하고있습니다.

But, it holds, the death of Christ was necessary in order that good discipline might be maintained in the world.


만약에 죄인들에게 죄가 모두 다 형벌을 받지 않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허용이 된다면, 죄에 대한 적절한 방지책은 없을 것이라는 겁니다.

If sinners were allowed to get the notion that sin could go altogether unpunished, there would be no adequate deterrent from sin.


이와같이 죄에 대해서 대책이 없어진다면, 사람들은 계속적으로 죄를 지을 것이며, 세상은 혼란 속에 빠져들 것이라는 겁니다.

Being thus undeterred from sin, men would go on sinning and the world would be thrown into confusion.


그러나 만약에 세상이 이와같이 도덕적 혼란에 빠져든다면, 이는 대다수의 가장 좋은 관심사가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But if the world were thus thrown into moral confusion that would not be for the best interests of the greatest number.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보여주심으로서, 사람들로하여금 죄를 짓는 것에서 멀어지게하고, 세상에서의 질서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Therefore God held up the death of Christ on the cross as an indication of how serious a thing sin is, so that men may be deterred from sinning and so order in the world may be preserved.

도덕 감화론에서 그러했던 것과 같이, 이렇게 하는 것은,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지를 보여주심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원래 제공해주시려던 것들보다도 좀 더 쉬운 조건으로 구원을 베푸시는 과정을 진행하신다는 것입니다.
Having thus indicated — so the governmental theory runs — how serious a thing sin is, God proceeded to offer salvation to men on easier terms than those on which He had originally offered it.


하나님께서는 원래 완전한 순종을 근거로 이를 제공해주셨다는 것입니다.

He had originally offered it on the basis of perfect obedience.


그러나 지금은 믿음을 근거로 제공해주신다는 것입니다.

Now He offered it on the basis of faith.


그는 이것을 이와같은 좀 더 쉬운 조건으로 안전하게 제공해줄 수 있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끔찍한 광경을 통해서, 그는 사람들에게 죄가 심각한 범행이라는 것과, 무엇인가를 범한다면 온 세상의 선한 질서가 보존되기 위해서 이 일에 대하여 다른 것이 치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충분히 보여주었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원래 선언되었던 형벌을 안전하게 제거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He could safely offer it on those easier terms, and He could safely remit the penalty originally pronounced upon sin, because in the awful spectacle of the cross of Christ He had sufficiently indicated to men that sin is a serious offence and that if it is committed something or other has to be done about the matter in order that the good order of the universe may be conserved.

이러한 것이 통치론입니다.
Such is the governmental theory.


그러나 여러분은 실제로 그 밑바닥에 있는 것이 바로 도덕 감화론의 형태라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But do you not see that really at bottom it is just a form of the moral-influence theory?


통치론은 도덕 감화론과 마찬가지로, 사람과 하나님의 교제 사이에 있는 유일한 장애물은 사람의 의지에 있다는 것을 고수하고있습니다.

Like the moral-influence theory, it holds that the only obstacle to fellowship between man and God is found in man’s will.


도덕 감화론과 마찬가지로 통치론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근거한 어떠한 하나님의 영원한 정의가 있다는 것을 거부하며, 하나님의 영원한 정의가 죄에 대한 형벌을 요구한다는 것을 거부합니다.

Like the moral-influence theory it denies that there is any eternal justice of God, rooted in His being, and it denies that the eternal justice of God demands the punishment of sin.


도덕 감화론과 마찬가지로 이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솔히 여기고있으며, 여기에 더한다면, 도덕 감화론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의 진정한 깊이를 보지 못하고있습니다.

Like the moral-influence theory it plays fast and loose with God’s holiness, and like the moral-influence theory, we may add, it loses sight of the real depths of God’s love.


사람이 만든 이러한 이론에 포함되어있는 죄에 대한 가벼운 관점을 가지고있는 이들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 저주받은 나무에서 우리를 대신하셨을 때 치르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조금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No man who holds the light view of sin that is involved in these man-made theories has the slightest notion of what it cost when the eternal Son of God took our place upon the accursed tree.

실제로 사람들은 종종 우리가 속죄에 관하여 어떠한 이론을 취하던지 간에 거의 차이가 없다고 말합니다.
People sometimes say, indeed, that it makes little difference what theory of the atonement we may hold.


친구들이여, 이는 세상에서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Ah, my friends, it makes all the difference in the world.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할 때, 여러분은 현대신학자들과 같이, ‘얼마나 고귀한 자기 희생의 본보기인가; 그분은 물론 나도 나 자신을 희생시켜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얻어야하겠다’라고 말하겠습니까?

When you contemplate the cross of Christ, do you say merely, with modern theorists, ‘What a noble example of self-sacrifice; I am going to attain favour with God by sacrificing myself as well as He.’


혹은 성경에서와 같이, ‘그는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서 자신을 주셨으며; 그는 나를 대신하셨으며; 그는 나의 저주를 담당하셨으며; 그는 자신의 가장 고귀한 보혈로 나를 사셨습니다’라고 말하겠습니까?

Or do you say with the Bible, ‘He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He took my place; He bore my curse; He bought me with His own most precious blood.’


이것이 바로 어느 누구의 마음에나 다가올 수 있는 가장 중대한 질문입니다.

That is the most momentous question that can come to any human soul.


나는 여러분이 이러한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을 할 수 있도록 모두가 다음 주일 오후에 저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 갈수있기를 원합니다.

I want you all to turn with me next Sunday afternoon to the Word of God in order that we may answer that question aright.


저자

Author

존 그레샴 메이첸은 그의 시대에 가장 흥미진진하고 논란이 많았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이삼십 개국의 복음주의 세계에서 어떠한 종교 지도자도 이보다 더 꾸준한 조명을 받을 수 있었던 사람은 없었다.
John Gresham Machen was one of the most colorful and controversial figures of his time, and it is doubtful that in the ecclesiastical world of the twenties and thirties any religious teacher was more constantly in the limelight.


메이첸은 학자였으며, 프린스턴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교수였으며, 교회 지도자, 성경적 기독교의 변증가, 그리고 20세기의 가장 유창한 신앙의 변론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Machen was a scholar, Professor at Princeton and Westminster Seminaries, church leader, apologist for biblical Christianity, and one of the most eloquent defenders of the faith in the twentieth century.


그는 1937년 1월에 주님의 품으로 떠나갔다.

He went home to be with the Lord on January 1, 1937.


출처

https://www.the-highway.com/atone2_Machen.html



posted by Wonho Kim
:
교리 2018. 10. 27. 11:52

매튜 베이츠의 “오직 충성으로 받는 구원”에 대한 토마스 슈라이너의 비평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서론


매튜 베이츠의 “오직 충성으로 받는 구원”에 대한 토마스 슈라이너의 비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매튜 베이츠의 신학 사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매튜 베이츠의 “오직 충성으로 받는 구원”은 개혁주의의 전통적 관점인

“오직 믿음에 의한 구원”의 개념에 도전장을 내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오직 충성”의 개념에는 “오직 믿음”의 개념에 포함되어있지 않은 행함의 내용이 포함되어있다.


매튜 베이츠의  “오직 충성으로 받는 구원”은, 행함과 열매가 없는 성도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새로운 도전이 될 수 있는 책이며, 오랫동안 교회 개혁을 외치며, 교인들의 변화를 촉구하였던 이들에게 단비와 같은 획기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성경적이지 않은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오히려 또 다른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다.


매튜 베이츠의 책의 주요내용들은, 톰 라이트의 새관점의 구도에서 쓰여졌으며, 개혁주의의 주요 교리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이지만, 개혁주의의 교리를 새관점의 구도에서 새롭게 수정하려한다는 점에서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매튜 베이츠의 “오직 충성으로 받는 구원”에서 보여주는 주요 특징들을 요약하면서 토마스 슈라이너의 비평을 번역하여 게시하고자한다.



새관점 구도의 왕이신 예수께 충성


베이츠는 톰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왕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나간다.


왕에게 요구되는 것은 신하의 충성이다.


성도는 마치 신하가 왕에게 충성을 하듯, 그리스도께 충성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왕이라는 개념으로만 접근할 때는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충분히 수용하지 못할 수가 있다.


그리스도의 속성을 왕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나갈 때 개인적인 신앙고백이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지체로서의 관계,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이 약화되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거나,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라는 개념이 연계되기가 쉽지않다.


그리스도의 계보는 아담을 거처 하나님 아버지로 이어진다.


아담의 대표성은 그리스도의 대표성을 예표한다.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범죄하였듯이,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것이다.


베이츠가 말하는 왕이라는 개념은 유대주의적 사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있으며, 톰 라이트의 유대주의적 신학의 특성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이다.


왕이라는 개념은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 즉 하나님의 왕국에서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개념만있을 뿐, 자녀나 지체의 개념이 없다.


또한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와는 다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역사적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중심에 있으며, 교회는 단지 역사적 이스라엘의 확장일 뿐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가나안의 이스라엘의 연속선상에 있는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다.


매튜 베이츠가 말하는 왕으로서의 예수도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있다.


매튜 베이츠가 말하는 “오직 충성으로 받는 구원”은 톰 라이트가 말하는 왕이신 그리스도께 충성한다는 개념을 공유하고있다.



인간의 전적인 부패


베이츠는, 바울이 왕이신 예수께 대한 “구현된 충성embodied allegiance”을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이는 인간에게 행함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하는 펠라기우스적 주장이다.


하지만 바울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더불어 전적인 은혜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도 하나님께 순종할줄 모르는 전적인 부패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행함을 강조하였던 로마 카톨릭의 부패도 마찬가지로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보여주고있다.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 즉 노예 의지를 강조하였다.


종교개혁에 반기를 든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 개념에도  정면으로 도전한다.


베이츠가 말하는 충성의 개념에는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종교개혁자들의 사상 대신에, 톰 라이트가 말하는 인간의 행위가 자리잡고있다.


“충성”은 자녀보다는 일꾼에게 요구되는 개념으로서, 이는 인간에게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며, 동시에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변화를 시도한다.


베이츠는 왕이신 예수께 요구되는 충성은 최종적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이는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기 위하여 인간의 행위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는 새관점의 “언약적 율법주의”, 즉 신율주의에서 요구되는 최종적 구원을 위한 행함과 같은 구조를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말하는 종교개혁자들은 은혜로 받은 구원이 행함으로 취소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베이츠는 톰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이미 받은 의가 행함에 의하여 취소될 수 있다고 말한다.



부활에 관한 관점


베이츠가 보는 부활에 대한 관점은 새관점주의자들의 관점과 일치한다.


베이츠는 톰 라이트가 부활을 해석하는 관점과 마찬가지로, 부활의 의미가  하나님께서 예수를 비난하는 자들의 판단을 뒤집으시고, 그를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 예수의 행함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에서 부활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부활이 예수의 행위가 옳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증명하신 것이라는 주장은 톰 라이트가 자주 사용하는 말이며, 베이츠는 이를 그대로 인용하여 사용한다.


톰 라이트가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는 것은, 개혁주의에서 예수를 믿으라는 것과 용어만 같을 뿐 내용은 전혀 다르다.


톰 라이트는 예수를 혁명적 메시아로 규정하면서, 십자가에서의 희생은 예수의 로마에 대한 정치적 혁명이며, 예수를 믿으라는 것은, 예수가 혁명을 위한 희생적 삶의 모습을 보여준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옳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에는, 속죄의 보혈 개념이 없으며, 우리의 죄를 대신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국가적 죄을 향한 하나님의 저주를 감당한 것이며, 이스라엘이 로마에 대하여 어떻게 혁명적 삶을 살아야하는지 본을 보여줌으로서, 예수를 믿는 자들은 예수의 행동 방식에 동참하라는 것이다.


새관점에서의 예수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따름의 대상이며, 예수의 혁명적 삶에 동참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옳다고 인정받는 칭의된 자가 된다는 것이다.


베이츠는 이러한 톰 라이트의 주장에 공감하며, 신자에게 예수의 행동 방식에 동참하는 충성을 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인정받는 칭의된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베이츠가 보는 예수의 부활은 칭의의 사건이며, 예수의 혁명적 희생이 옳음을 하나님께서 증명해주신 사건이라고 말한다.



칭의와 의의 전가


베이츠의 칭의에 대한 관점은 새관점과 유사하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근거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현대 신학이 기독론 중심의 칭의보다는 신론 중심의 칭의의 경향을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베이츠의 신학도 현대신학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있다.


베이츠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칭의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가 포함되어있지 않다.


그리스도께서 신자에게 전가시켜주신 순종의 의에는, 율법의 마침이 되신 적극적 순종과 십자가에서의 속죄로 인한 수동적 순종의 의가 있다.


베이츠는 신자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하나님 앞에서 의로와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베이츠가 말하는 신자에 대한 칭의는, 부활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행한 방식이 옳다고 인정받은 것과 같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와 협력할 때, 행동방식이 옳다고 인정받는 다는 것이다.


이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마찬가지로 신인협력적인 방식synergism이다.


베이츠가 말하는 칭의에는 순종의 의가 없다.


베이츠의 관점에서는,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은 것과는 무관하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칭의의 기준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행동 방식이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받느냐 아니야인 것이다.


새관점에서는 율법은 의의 수단이나 기준이 될 수가 없다.


베이츠는 톰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인정을 받은 것을, 하나님 앞에서 칭의된 것으로 보고있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인정을 받음으로 칭의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와 협력할 때 역시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속하여있는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의가 주입infusion되며, 주입된 의는 충성을 통하여 즉각적으로 효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베이츠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부정하지 않지만, 전가된 의 자체가 최종적 구원의 근거가 되지 않으며, 전가된 의는 취소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베이츠가 말하는 전가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행동방식이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받은 것에 대한 전가를 말한다.


베이츠가 말하는 전가는 그리스도의 죽으심뿐만이 아니라, 죽으심으로 이루신 순종의 의에 대한 전가와는 관계없다.


베이츠는 예수가 왕이라는 사실이 복음의 중심이기에, 복음은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공식으로 축소될 수 없다고 말함으로서, 간접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외면한다.


베이츠는 전가를 인정하지만 전가는 상실될 수 있으며, 실질적 칭의의 상태도 상실될 수 있다고 말한다.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는, 그리스도로부터 전가받은 의가 아니라, 왕위에 오르셔서 통치하시는 왕이신 예수께 충성을 하는 행위가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이는 구원의 근거, 즉 칭의의 근거가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가 아니라 예수의 행동 방식에 협력하는 행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베이츠가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구원의 서정에 동의하지 않고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개인보다는 공동체적 선택


예수 그리스도를 왕의 개념으로 접근할 때 성도는, 교회의 일원이라는 개념보다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된다.


하나님 나라는 공동체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의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의 구원은 공동체적 구원이었다.


신약에 들어와서 하나님 나라 백성은 신자들로 새롭게 구성되면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교회 공동체로 대체되었다.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지체인 성도들로 개별적으로 구성되어있는 것이다.


베이츠는 톰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신약의 교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유대 이스라엘 공동체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다.


예수가 왕이라는 사실에 집중된 것은, 톰 라이트가 말하듯이, 예수는 구속주가 아니라 유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이기 때문이다.


유대주의적 사상에서의 왕에 대한 충성은 집단적이고 국가적이었다.


베이츠는 유대 이스라엘에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택함받음을 거부하며, 집단적 선택이 좀 더 정확하게 성경적 증거들을 표현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신앙 고백은 개인적인 것이며, 신앙 고백을 근거로하는 선택은 개인적일 수 밖에 없다.


유대주의적 왕에 대한 개념에서는 개인의 신앙고백이 아니라 집단적 충성이 요구된다.


하지만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에 참여되는 성도에게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신명기에서는 모세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칭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삼위 하나님의 창세전 구속 언약은 택함이 개인에 대한 것임을 보여주고있다.



나가는 말


베이츠가 구원의 조건으로 행위를 더하는 것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행위가 얼마나 더해져야 하나님께서 구원의 조건에 합격을 하실 정도가 될 수 있을지 기준도 모호하다.


또 인간의 행위가 구원의 조건에 충족될 수 있을 정도로 위대할 수도 없다.


타락 이후의 모든 상황은 인간의 죄성과 더불어 변질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사람이 생각하는 기준이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기준과 동일시 될 수도 없다.


베이츠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생각이다.

에덴에서의 사역은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종결되었으며, 에덴에서의 요구 조건은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하여 안식에 이르게 된 것이다.


안식은 더 이상의 조건을 요구하지 않는다.


베이츠가 말하는 충성이라는 개념 가운데에는,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안식과 무관하게, 인간에게 주어지는 또 다른 책무를 포함한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순종에는, 율법의 요구는 물론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명령(창 1:28)을 완성시킨 적극적 순종과, 선악과 금령을 어김으로서 당해야만 했던 죽음을 직접 담당하신 수동적 순종이 포함되어있다.


베이츠의 신학에는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순종과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안식과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한 의에 대한 개념이 없다.


베이츠가 말하는 충성은, 그리스도의 마침표를 쉼표로 바꾸는 작업이다.


안식은 더하여질 수 없는 완성적 의미를 가진다.


에덴에서의 요구되어졌던 순종의 성취는 종말론적 안식과 영원한 생명으로 결론지어졌을 것이며, 아담이 실패한 에덴에서의 요구는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되었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자에게 주신 안식은 더 이상의 순종이 요구되지 않는다.


충성이라는 행위가 구원의 조건으로 요구되어진다면,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을 인정하지 않는 꼴이 된다.


행위가 더하여지거나 그 외의 요구조건이 추가되는 이들은, 진정한 안식에 들어온 자라고 할 수 없다.


신자에게 전가된 의가 취소될 수 있거나, 또 다른 행위가 요구된다면,  신자의 삶의 여정은 불안 할 수 밖에 없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몸에 장애도 있게되며, 치매등으로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염려에도 불구하고 신자가 평안 할 수 있는 것은, 구원이 신자의 행동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기 때문이다.


구원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이기 때문에,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충성의 개념 가운데 내포되어있는 행위의 요구를 충족시킴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면,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성도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어느 시대나 어느 상황에서나 타락하고 부패할 수밖에 없기에, 둘째 아담의 구속 사역의 은혜 안에 거해야만 참 평안을 얻을 수 있다.


끊임없이 행함의 열매를 강조하는 이들은,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아담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외면하며, 이에 대한 언급을 회피한다.  


종교개혁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로 인한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을 강조하였지만, 기독교를 윤리적 종교로 만들려는 이들은 이를 애써서 외면한다.


기독교를 윤리에 접목시키려는 시도는, 복음의 본질에 무지하거나, 아니면 알고도 외면하는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이다.


인간의 윤리적인 노력은 유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의 전형이며, 유대주의적 사고를 추구하는 새관점주의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매튜 베이츠는 비록 자신이 복음주의 안에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 구도에서 신학을 하고있으며, 오직 충성의 개념은 새관점의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는 것이다.


다음은 토마스 슈라이너가 매튜 베이츠의 “오직 충성으로 받는 구원”에 대하여 비평한 것을 번역한 것이다.



매튜 베이츠의 “오직 충성으로 받는 구원”에 대한 토마스 슈라이너의 비평


오직 ‘충성’으로 구원받는다고? 종교개혁을 수정하려는 새로운 시도에 관하여
Saved by ‘Allegiance’ Alone? On a New Attempt to Revise the Reformation


MARCH 3, 2017    | Thomas Schreiner     SHARE
BIBLE & THEOLOGY


올해는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시에서 95개 조항을 게시한지  500주년이 됨을 기념하는 해이다.
This year marks the 500th anniversary of Martin Luther’s posting the Ninety-five Theses in the city of Wittenberg.


한 가지 제기되는 질문은, 500년 간에 걸쳐서 심사숙고하여 연구한 후에도, 오직이라는 5개 조항- 이는 종교 개혁에서의 주된 신학적 강조점들을 올바르게 담아내고 있다-이 꼭 강조되어야만 하느냐에 대한 것이다.

One question that arises is whether the five solas—which rightly capture some of the major theological emphases of the Reformation—should be nuanced after 500 years of reflection and study.

퀸시대학에서 가르치는 재능있는 젊은 신학자인 매튜 베이츠는, 우리가 “오직 믿음”을 수정하고서 “오직 충성”이라는 구호로 재공식화할 것을 제안하면서, 이러한 수정이 유익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있다.
Matthew Bates, a gifted young scholar who teaches at Quincy University, thinks that an adjustment would be salutary, suggesting we revise “faith alone” and reformulate with the slogan “allegiance alone.”


성경만을 믿는 이들로서, 우리는 과거에 가졌던 것을 개혁하고 다듬는 일에 열려있어야만 하며, 이에 베이츠는 우리에게 성경을 새롭게 보도록 도전한다.

As those who believe in Scripture alone, we should be open to reforming and sharpening what we have held in the past, and Bates challenges us to look at the Bible anew.



충성과 복음
Allegiance and the Gospel


그의 새로운 책 “오직 충성으로 받는 구원: 믿음과 행위와 왕이신 예수의 복음을 다시 생각한다”에서, 베이츠는 구원과 복음의 성격을 새롭게 할 것을 숙고해본다.
In this new book, Salvation by Allegiance Alone: Rethinking Faith, Works, and the Gospel of Jesus the King, Bates considers afresh the nature of salvation and the gospel.


그는 신약성경에서 pistis와 pisteuō를 번역하는데 있어서, “믿음faith”과 “신뢰belief”가 항상 최상의 의미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He argues “faith” and “belief” aren’t always the best terms to translate pistis and pisteuō in the New Testament.


대신에, 구원과 관련하여서는 왕이신 예수께 충성을 말하는 것이 더욱 좋을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서 믿음은 충실함의 개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Instead, with regard to salvation it would be better to speak of allegiance to Jesus as King, so that faith has the idea of fidelity.


충성의 유익한 점은,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선행이 필요하다는 개념을 포함하고있다는 것이다.

The advantage of allegiance is that it includes the idea that good works are necessary for final salvation.


믿음이 단순한 지적인 동의나, 어둠에서의 도약이나, 바램의 생각으로 규정될 수 없다고 베이츠는 옳바르게 주장하고있다.

Bates rightly maintains that faith can’t be defined as mere intellectual assent, a leap in the dark, or wishful thinking.


베이츠에 의하면, 믿음이 “충성”이라는 것으로 가장 잘 표현된다는 생각은, 제2성전 유대교 문헌의 증거를 통해서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The notion that faith is best rendered by “allegiance” is supported, according to Bates, by a look at evidence in Second Temple Jewish literature.


그리고나서 그는, 바울 본문의 핵심에서의 이러한 의미는, “고백적 충성서약”, 그리고 “구현된 충성”이라는 정신적 동의의 개념들이,  pistis를 통한 구원이나 칭의가 의미하는 것을 좀 더 잘 설명할 수 있다고 논한다.
He then argues for this meaning in key Pauline texts, saying that the notions of mental assent, “professed fealty,” and “embodied loyalty” better account for what is meant by salvation or justification through pistis.


그래서 바울이 왕이신 예수께 “구현된 충성”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Hence Paul teaches “embodied allegiance” to Jesus as King.


베이츠가 “신뢰”보다는 “충성”을 선호하는 것은, “신뢰”가 보좌에 앉으신 왕이신 예수께 충분한 충성을 담아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Bates prefers “allegiance” to “trust” since he thinks the latter doesn’t sufficiently capture loyalty to Jesus as the enthroned King.


베이츠에 따르면, 우리는 마지막 날에 항목별로 분류된 계명들을 지켰느냐가 아닌, 예수께 진정으로 충성했느냐에 따라서 심판 받는다는 것이다.

According to Bates, we’ll be judged on the last day on whether we were genuinely loyal to Jesus, not whether we kept an itemized list of commands.


복음은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공식으로 축소될 수 없는데, 이는 예수가 왕이라는 사실이 복음의 중심이기 때문이라고 베이츠는 주장한다.
As Bates argues, the gospel can’t be reduced to the formula “Jesus died for our sins,” since the gospel centers on the truth that Jesus is King.


예수는 부활하셨으며, 모든 이들의 왕이되신 주이시며, 우리는 우리의 주이신 그에게 충성을 표현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

He’s the resurrected and enthroned Lord over all, and we’re called to express our allegiance to him as our Lord.


베이츠에 따르면, 복음에는 여덟가지 요소들이 있다.

According to Bates, there are eight elements to the gospel:

1. 예수는 성부와 함께 이미 존재하셨으며;
1. Jesus pre-existed with the Father;


2. 그는 성육신하셨고, 다윗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셨으며,
2. He became incarnate and fulfilled the promise to David;


3. 성경에 따라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으며,
3. He died for our sins according to the Scriptures;


4. 무덤에 묻히셨으며,
4. He was buried;


5. 그는 성경에 따라 3일만에 부활하셨으며,
5. He was raised on the third day according to the Scriptures;


6. 많은 이들에게 나타나셔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을 보여주셨으며,
6. He appeared to many, showing he was raised from the dead;


7. 주로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으며,
7. He is seated at God’s right hand as Lord; and


8.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것이다.
8. He will come again as judge.

베이츠는 특별히 예수가 왕으로, 그리고 메시아로서 왕좌에 오르셔서, 모든 세계를 다스릴 것을 강조한다.

Bates particularly stresses that Jesus is enthroned as King and Messiah over all the world.



선물과 새 창조로서의 구원
Salvation as a Gift and the New Creation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이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베이츠는 강조한다.

Bates emphasizes we can’t earn salvation; it’s a gift of God.


그러나 동시에 그는, 개인적인 택함받음을 거부하며, 집단적 선택이 좀 더 정확하게 성경적 증거들을 표현한다고 주장한다.

At the same time, however, he rejects individual election and contends corporate election more accurately captures the biblical witness.


어떤 경우에든지, 은혜는 효과적이며,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

In any case, grace is effective and transforms our lives.


비록 개신교인들은 종종, 우리의 행함은 필요한 증거이며, 우리의 신앙의 열매라고 말하지만, 베이츠는, 왕위에 오르셔서 통치하시는 왕이신 예수께 충성을 말하는 것이 더 좋으며, 이러한 행위는 “최종적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Though Protestants often say our works are the necessary evidence and fruit of our faith, it’s better, Bates says, to speak of allegiance to Jesus as the enthroned and reigning King, and thus works are “integral to final salvation” (110).

베이츠는 그리스도인이 죽은 후에 단순히 천국에 간다는 생각에 이의를 제기한다.
Bates takes issue with the notion that Christians simply go to heaven after death.


천국에 관하여 신약이 묘사하는 것은, 이러한 대중적인 개념보다는 좀 더 생동감있고 강력한 것이라는 것이다.

The New Testament picture has more vigor and strength than this popular conception of heaven.


신자들은 죽음에서 부활하여 새 창조의 시민으로 산다는 것이다.

Believers are raised from the dead and live as citizens in the new creation.


우리는 변형된 우주를 기다리면서, 왕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면서,  하나님께서 원래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실행하기를 고대한다는 것이다.

We’re awaiting a transformed universe and look forward to ruling with King Jesus to fulfill the purpose for which God originally created human beings.


우리는 구름 위를 떠다니는 천상의 피조물이 되지 않을 것이며, 새 창조 안에 거주하는 변형되고 불멸의 몸을 가진 인간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We will not be ethereal creatures floating on clouds, but persons with transformed and immortal bodies residing in a new universe.

베이츠는, 왕으로서 보좌에 앉으신 예수가, 어떻게 우리가 예수와 함께 그 아래에서 통치하는 새로운 우주를 고대하시는지, 옳게 보고있다.
Bates rightly sees how the enthronement of Jesus as King anticipates a new universe where we’ll reign with and under him.


베이츠는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진실되고 선한 모든 것은 오는 새 창조에서 보존될 것이라는 것을 제시한다.

Bates also suggests everything true and good we’ve done in this world will be preserved in the coming new creation.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로서, 우리는 현재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목적을 가질 수 있다.

As those created in God’s image, we have purpose in our lives even now.


만약에 우리가 우상의 길을 따른다면- 만약에 우리가 자신이 지음받은 방식대로 사는데 실패한다면- 우리는 세상을 망가뜨리고 다른 인간들을 손상시킬 것이다.

If we follow the path of idolatry—if we fail to live in the way we’re designed as those made in his image—we deface the world and damage other human beings.


예수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며,예수는 찬양받으실 보좌에 계신 왕이시기에, 우리는 인간 존재로서의 우리와는 불연속적인 면이 좀 있더라도, 그의 형상을 입게될 것이다.

Jesus is the full image of God, and we’ll be conformed to his image even if there is some discontinuity between us as human beings, since Jesus is the exalted and enthroned King.

칭의
Justification


칭의에 이르러서는, 베이츠는 이를 그리스도의 변호에 근거를 두고있다.
When it comes to justification, Bates roots it in the vindication of Jesus.


예수는 메시아라는 주장으로 처형되었으며,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는,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하나님께 저주받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Jesus was condemned as a messianic pretender, and his death on the cross signified to the Jewish religious leaders that he was cursed by God.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비난하였던 자들의 판단을 뒤집으시고, 그를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 그가 옳다는 것(칭의)을 증명하셨다는 것이다.

Yet God reversed the judgment of those who condemned Jesus and demonstrated his vindication (justification) by raising him from the dead.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와 협력할 때 역시 의롭다(하나님께 옳다)는 것이다.

Christians are also justified (right with God) when they’re incorporated into Christ.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속하여있는 이들은, 예수의 옳다고 인정받음이 역시 그들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옳다고 선언된다는 것이다.

Those belonging to Christ through union with him are declared to be in the right with God, because Jesus’s vindication is also theirs.

또한 베이츠는, 개혁주의 분야에서는 일반적인 구원의 서정에 대하여 의문을 제시하면서, 구원의 서정이 성경 신학보다는 조직 신학에 좀 더 치우쳐있는 것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다.
Bates also questions the order of salvation (ordo salutis), which is common in Reformed circles, arguing it’s more indebted to systematic than biblical theology.


그는, 신자는 보좌에 앉으신 왕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의미에서, 전가를 옹호한다.

He defends imputation in the sense that believers are united with Christ as our enthroned King.


베이츠는 전가를 인정하지만, 베이츠에 의하면, 전가는 상실될 수 있으며, 지금 의롭게 된 자라도 실질적으로 칭의의 상태를 상실할 수 있으며, 최종적인 지옥살이를 경험하는 것으로 결말이 날 수 있다는 것이다.

While Bates endorses imputation, he also suggests that imputation may possibly be lost so that some who are now justified, according to Bates, may actually lose the status of justification and end up experiencing final damnation.


그는 칭의는 법정적이라고 말하지만, 의는 주입된 것이라고도 (비록 주입이 점진적이지는 않지만, 충성을 드러내는데 있어서는 즉각적이라고) 말한다.

He says justification is forensic, but also says righteousness is infused (though infusion isn’t gradual but instantaneous upon declaration of allegiance).


보수적 성향을 유지하다.
Keep to the Old Paths


“오직 충성에 의한 구원”에는 도움되는 통찰들로 가득하며, 베이츠의 글들을 모두 접하기에는 공간이 부족하다.
Salvation By Allegiance Alone is full of helpful insights, and space is lacking to interact with everything Bates writes.


그가 보좌에 앉으신 만물의 주이신, 왕이신 예수께 복종할 것을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신약이 강조하고있는 것을 잘 표현하고있는 것이다.

His emphasis on submission to Jesus as King, the enthroned Lord of the universe, nicely captures the New Testament emphasis on what it means to be a Christian.


그는 또한, 이 세상 일에 관한 우리의 삶에 대한 것과, 우상은 추상적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우리를 상기시킨다.

He also reminds us that our lives in this world matter, and that idolatry isn’t an abstraction but shows up in how we live.


우리는 육체로부터 분리된 독립체가 아니며, 우리는 새창조의 생명을 고대하는 육체적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We aren’t disembodied entities; we’re flesh-and-blood creatures anticipating new-creation life.


베이츠는, 복음이 단순히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광범위한  것이라고 옳게 말하고있으며,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다.

Bates rightly says the gospel is broader than simply receiving Jesus as Savior, and he emphasizes God’s grace in saving us.


나도 그의 충성에 대한 강조에 공감한다; 너무도 많은 개신교인들이 믿음을 단순한 언어적 동의로 축소시키고있다.

I also sympathize with his emphasis on allegiance; too many Protestants reduce faith to mere verbal agreement.


많은 이들이, 자신들이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임으로서,  순종과는 관계없이, 영생을 즐길 수 있다고 잘못된 확신을 하고있다.

Many are mistakenly assured they’ll enjoy eternal life apart from any obedience if they accept Jesus as Savior.


베이츠는, 이와같은 이해가 행위에 대한 신약의 강조와 일치하지 않다는 것을 확신을 가지고 증명하고있는데, 이는 행위가 영생을 얻기 위해 분명히  필수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Bates convincingly demonstrates that such a reading doesn’t accord with the New Testament’s emphasis on works, for works are clearly essential for the reception of eternal life.


우리는 구원에 이르기까지 믿음을 유지해야만 한다.

We must maintain our faith until the end to be saved.


“충성”이라는 단어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신뢰”나 “믿음”이 더욱 좋다고 믿고있는데, 이는 “충성”이 곧바로 우리가 하는 것과 우리의 헌신이라는 인간의 주체됨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Despite the advantages of the word “allegiance,” though, I still believe “trust” or “faith” is better since “allegiance” puts the emphasis squarely on the human subject—on what we do, on our commitment.


“충성”은 부차적인 선행들의 중요성을 담아내면서도, 무엇인가를 배제하기도하는데, 이는 믿음이 본질적으로 수용적이기 때문이다.

“Allegiance” captures the importance of subsequent good works, but it leaves something out as well, for faith is fundamentally receptive.


우리는 빈손으로 의의 선물을 받으며, “믿음”이 “충성”으로 대체된다면, 이러한 개념이 없어지게된다.

We receive the gift of righteousness with an empty hand, and this conception is absent when we put “allegiance” in place of “faith.”


비슷하게, 참된 믿음과 신뢰는 필연적으로 선행으로 인도한다는 개념은 신약의 증거를 더욱 적합하게 다루고있는 것이다.

Similarly, the notion that true faith or trust inevitably leads to good works handles the New Testament witness in a more fitting way.

나는 또한 베이츠가 공동체적 선택을 개인적 선택과 분리시키는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말하고자한다.
I’d also argue Bates wrongly separates corporate from individual election.


공동체적 선택의 영역을 개인적 선택으로부터 때어내려는 시도는, 내가 다른 곳에서 논한 것과 같이, 논리적으로 흠이있고, 성경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The attempt to carve out a place for corporate election apart from individual election, as I’ve argued elsewhere, is logically flawed and biblically unsupportable.


베이츠는 개인적 선택을 지지하는 구절이 한 구절도 없다고 말한다.

Bates says that not a single verse supports individual election.


이것은 놀랄만한 주장이며, 우리가 단어가 아니라 개념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This is an astonishing claim, especially when we consider concepts and not words.


나는 분명한 예로서, 요한복음 6장 35-44절을 말했다.

I’d point to John 6:35–44 as a clear example.


그리고 베이츠가 무슨 말을 하던간에, 로마서 9장 6-23절도, 많은 단독적 형태들과 구원론적 문맥과 함께, 개인적 선택을 뒷바침하고있다.

And despite what Bates says, Romans 9:6–23—with its many singular forms and soteriological context—also supports individual election.


공동체적 선택은 복음주의 영역에서 오랜 유산을 가지고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모든 권위있는 개혁주의자들은, 개인적 선택을 믿고있다.

Certainly corporate election has a long legacy in evangelical circles, but all of the magisterial Reformers believed in individual election.

더군다나, 내가 판단하기로는, 구원의 서정의 개념은 베이츠의 주장보다도 더 많은 장점을 가지고있다.(로마서 8장 29-30절을 보라)
Additionally, the notion of an ordo salutis has more merit in my judgment than Bates claims (see Rom. 8:29–30).


내가 비록 여기서 전형적인 개혁주의 이해를 바로 적용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우리가 우리의 관점을 성경에 근거하게 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옳바르게 상기시키고있다.

He rightly reminds us we need to ground our view in Scripture, though I’d suggest the typical Reformed understanding gets it right here.


칭의의 의미에 관해서는, 나는 베이츠가 우리가 필요로하는 분명함을 제공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In terms of justification, I don’t think Bates offers the clarity we need.


그에 따르면 칭의는, 법정적이면서 변화될 수 있으며, 전가와 주입 모두를 포함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는 상실로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According to him, justification is both forensic and transformative, includes both imputation and infusion, and the righteousness we have may end up being lost.


나는, 우리가 왕이신 예수의 제자로서 삶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베이츠의 주장에 깊이 공감하지만, 칭의가 행위가 함께 다루어질 때에, 칭의와 행위에 대한 그의 관점은 성경의 증거에서 벗어나있다.

I deeply appreciate Bates’s claim that we need to live changed lives as disciples of King Jesus, but his view of justification and works when merged together veers away from Scripture’s witness.


이 책에서의 많은 세부적인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내가 믿기로는, 전통적 방식이 좀 더 명확하고 성경적으로 근거가 있다.

Despite the many fine insights in this book, the old paths are clearer and, I believe, biblically warranted.


오직 믿음과 다섯 가지 솔라
Faith Alone and the Five Solas


비록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게된다는 진리를 여기서 상세하게 변론할 수는 없지만, 아마 한 두가지 문장이나 몇가지 신학적 함의들을 깊이 생각해보는 것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Though the truth that we’re justified by faith alone can’t be defended in detail here, perhaps it’ll help to reflect on a text or two and some theological implications.


예를 들어, 바울의 구원론을 잘 표현해주고있는 에베소서 2장 8-10절을 살펴보면, 우리가 믿음에 의해서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Consider, for instance, Ephesians 2:8–10, which famously captures Paul’s soteriology and where it’s clear we’re saved by grace through faith.


나는 “믿음”이 “충성”보다도 (바울이 사용한) pistis의 의미를 좀 더 적절하게 표현해준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데, 이는 문맥상으로 볼 때 “믿음”이 “행위”에 대립되기 때문이다.

I’d suggest “faith” more aptly captures the meaning of pistis (which Paul uses) than “allegiance,” because “faith” is opposed to “works” in the text.


만약에 구원이 행위에서 왔다면, 행위가 배제되는 것은, 우리로하여금 자랑하게 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Works are excluded because, if salvation came from them, we’d be prone to boast.


우리는 여기서, 행하는 것과 믿는 것, 성취하는 것과 받는 것, 활동하는 것과 쉬는 것 간의 대비를 보게된다.

We see a contrast here between doing and believing, between achieving and receiving, between acting and resting.


그러므로 “충성”이라는 의미는 인간의 헌신이 강조되기에, 좋은 역할을 하지 못하는 반면에,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것에 대한 신뢰를 잘 전달해준다.

So the term “allegiance” doesn’t work as well because, again, it puts the emphasis on human commitment, whereas “faith” conveys trust in what God has done for us in Jesus Christ.

이 책의 많은 세부적인 통찰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통적 방식이 좀 더 분명하고 성경적으로 근거가 있다고 믿는다.
Despite the many fine insights in this book, the old paths are clearer and, I believe, biblically warranted.

그러나 신뢰하는 것과 받는다는 것의 개념이, 베이츠가 그렇게 간절히 강조하는 바와같이, 선행의 중요성을 배제하는가?
But does the notion of trusting and receiving cancel out the importance of good works, which Bates so helpfully emphasizes?


바울이 말하는 것과 같이, 결코 그렇지 않다!

As Paul would say, certainly not!


에베소서 2장 10절은 신자가 하여야 할 선행을 묘사하고있으며; 이와같은 행위는 구원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열매인 것이다.

Ephesians 2:10 features the good works that believers will do; such works don’t qualify us for salvation but are the fruit of being a new creation in Christ Jesus.


우리가 예수를 주이시면서 구원자로서 받아들이는 비어있는 손은, 빈상태로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The empty hands with which we receive Jesus as Lord and Savior don’t remain empty.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하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능력을 입게되는 것이다.

By virtue of being in Christ, we’re empowered to live a new life that pleases God.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는 믿음인,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뢰는, 반드시  성령의 열매를 보여주는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한다.

Genuine trust in God—saving faith in Christ—inevitably leads to a new life manifesting the Spirit’s fruit.

누가복음 7장 36-50절의 죄 많은 여인에 관한 이야기는 같은 진리를 보여주고있다.
The story of the sinful woman in Luke 7:36–50 illustrates the same truth.


우리는 그녀의 정확한 죄는 알지 못하지만, 이는 소문이 무성하였기에, 아마도 성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We don’t know her exact sin, but it was notorious, and thus was probably sexual.


그녀는 예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그의 발을 닦이고 그녀의 머리로 말린 다음에, 향수를 부음으로서, 증명하였던 것이다.

She demonstrated her love for Jesus by weeping on his feet, drying them with her hair, and pouring perfume.


예수는 그녀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선언하셨으며(눅 7:47), 이 이야기는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라”(눅 7:50)는 호소력있는 말로 끝을 맺는다.

Jesus proclaims her sins are forgiven (Luke 7:47), and the story ends with the ringing words: “Your faith has saved you; go in peace” (Luke 7:50).


다시 한번, 나는 “충성”보다는 “믿음”이라는 단어가 더 좋다고 생각한다.

Again, I think the word “faith” is better than “allegiance.”


그녀는 자신의 왕이신 예수께 헌신된 것이 맞다.

Yes, she was devoted to Jesus as her King.


그래도 이 이야기의 초점은 그녀가 자신의 죄를 용서하신 것에 대하여  예수를 신뢰하고있다는 것이다.

Still, the point of the story is that she trusted Jesus to forgive her sins.


그녀는 예수께 빈손으로 왔으며, 그녀로부터 흘러나온 사랑과 헌신은 그녀가 받은 용서의 결과였던 것이다.

She came to him with empty hands, and the love and devotion that flowed out of her were a result of the forgiveness she’d received.


우리가 에베소서 2장에서 본 것과 같이, 오직 믿음만이 오직 은혜를 빛나게 해준다.
Faith alone, as we saw in Ephesians 2, highlights grace alone.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우리의 주이신 예수의 속죄 사역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다.

God’s grace and kindness save us through the atoning work of Jesus as our crucified and risen Lord.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는가?

But how does our faith save us?


우리는 우리의 믿음 자체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We aren’t saved by our faith per se.


믿음은 그것의 목적 때문에- 믿음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그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되기때문에-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다.

Faith saves us because of its object—because through faith we’re united to Jesus Christ, and his righteousness becomes ours.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의지해서, 오직 믿음을 통하여, 오직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다.
We’re saved by grace alone through faith alone on account of the work of Christ alone to the glory of God alone.


그리고 물론, 우리는 이러한 진리들을 성경에서만 가지고 온 것이다.

And, of course, we derive these truths from Scripture alone.

달리 표현하자면, 오직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미한다!
In other words, faith alone implies Christ alone!


그리고 은혜로 말미암아, 의를 위해서 믿음의 손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면, 구원을 위한 모든 영광이 하나님에 돌아가는 것이다.

And if, by grace, the hands of faith receive Christ for righteousness, then all the glory goes to God for salvation.


그렇다면, “충성”이란 의미는, 비록 어떤 점에서는 도움이 되겠지만, 잘못된 부분에 강조를 두게되기에, 나는 “오직 믿음” 만이 성경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표현하는데 있어서 검증된 자리에 서 있다고 믿는다.
The term “allegiance,” then, though helpful in some respects, puts the accent at the wrong place, and thus I believe “faith alone” stands the test of time in representing faithfully Scripture’s teaching.


토마스 슈라이너는 켄터키 루이스빌에 있는 남침례신학대학의 신약해석학의 제임스 뷰케넌 헤리슨 교수이며, 성서 해석학 부장이다.
Thomas Schreiner is the James Buchanan Harrison professor of New Testament interpretation and associate dean for Scripture and interpretation at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in Louisville, Kentucky.

출처

https://www.thegospelcoalition.org/reviews/salvation-by-allegiance-alone/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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