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넬리스 프롱크목사가 말하는 신칼빈주의

NEO-CALVINISM By Cornelis Pronk

 

번역: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출처https://verloreseun.wordpress.com/tag/abraham-kuyper/)

 

용어에 대한 정의

Definition of the Term

 

신칼빈주의란 무엇인가?
What is Neo-Calvinism?

 

“Neo”는 새로운 것을 의미하며, 칼빈주의는 존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는 개신교의 분파에게 주어진 이름이다.

“Neo” means new and Calvinism is the name given to that branch of Protestantism that followed the teachings of John Calvin.

 

이와같이 칼빈주의는 개혁주의에 붙여진 또 다른 이름이다.

As such, Calvinism is another word for Reformed.

 

사람들이 칼빈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로마 카톨릭주의나 루터주의, 혹은 알미니안주의와 구별되는 개혁주의 신앙을 의미한다.

When people say Calvinism, they mean the Reformed faith as distinguished from Roman Catholicism, Lutheranism or Arminianism.

 

그러므로 신칼빈주의라고하는 것은 원래의 형태와는 달리 새로운 칼빈주의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The term Neo-Calvinism, therefore, would suggest that it represents a form of Calvinism that is new or different from its original form.

 

이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다.

This is indeed the case.

칼빈주의나 이의 파생어인 칼빈주의자와 칼빈주의적이라는 용어는, 사실상 개혁주의 신앙이나 개혁주의 교회에 적절한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을 우선 말하고 싶다.
Let me say first of all that the word Calvinism and its derivatives, Calvinist and Calvinistic, are not really proper as synonyms for the Reformed faith and Reformed churches.

 

칼빈 자신은 개혁주의 교회가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을 반대했었다.

Calvin himself was opposed to calling the Reformed churches after his name.

 

이러한 교회들은 칼빈주의적이라고 불리우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단지 개혁적이라고 불리우길 원했다.

Neither did those churches want to be referred to as Calvinistic, but simply as Reformed.

 

이러한 이유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절대로 단순히 한 인간과 연계되어서는 안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The reason for this was that they felt that the church of Christ should never be associated with a mere human being.

 

개혁주의 교회가 칼빈에게 빚진 것과 같이, 이들은 그(칼빈)가 가르친 교리들이 (킬빈) 자신의 재능의 산물이 아니라 단지 복음의 기초를 놓으신 그리스도의 교리의 산물이라고 이해하였다.

As indebted as the Reformed churches were to Calvin, they understood that the doctrines he taught were not products of his own genius but simply the doctrines of Christ, which he had found in the Gospel.

칼빈주의라는 이름을 거절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운동에 이름이 붙여진 경우는, 아리안주의, 펠라기우스주의, 몬타누스파의 경우와 같이 역사적으로 항상 이단적이었다.
Another reason for rejecting the name Calvinism was that historically it had always been heretics whose names were given to the movements they started, e.g., Arianism, Pelagianism and Montanism.

 

세번째 이유로는, 칼빈주의는 그들의 대적자들이나 로마 카톨릭, 루터주의자, 재세례파들에 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A third reason was that Calvinism was a label put on them by their opponents, the Roman Catholics, Lutherans and Anabaptists.

 

칼빈주의라는 이름은, 많은 이들이 칼빈의 발명품이라고 생각하는, 예정 교리를 비난하기 위해서 붙여놓은 모욕적인 별칭이 되었다.

The name Calvinist became an abusive nickname for anyone holding to the hated doctrine of predestination, which many thought to be the invention of Calvin.

 

이러한 이유로 개혁주의는 칼빈주의라는 칭호를 거절하였으며, 이들은 오랜시간동안 이러한 입장을 유지하고있다.

For these reasons the Reformed rejected the label Calvinism; they maintained that position for many years.



칼빈주의와 아브라함 카이퍼

Calvinism and Abraham Kuyper


그런데도 왜 칼빈주의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는가?

Why then was the name Calvinism eventually adopted?

 

아마도 다른 개신교 교회들과 로마 카톨릭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개혁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위대한 지도자와 그의 조직 신학에 점차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이 불가피했었을 것이다.

Perhaps it was inevitable that in their controversies with Rome, as well as with other Protestant churches, the Reformed were increasingly identified with their great leader and his system of theology.

 

개혁주의자들에게는, 칼빈과 관련된 교리(특히 예정론)로 인해서 결국 칼빈주의가 또 다른 이름이 되었는데, 최근에와서는 칼빈주의라는 의미가 이 이상의 무엇인가를 대변하게되었다.

While Calvinism eventually became just another name for Reformed because of the doctrines associated with Calvin (especially predestination), in more recent times the term Calvinism has come to represent something more than that.

 

신칼빈주의가 바로 이 경우이다.

It is here where Neo-Calvinism comes in.

 

신칼빈주의라고하면 아브라함 카이퍼를 생각 할 수 밖에 없는데, 그는 위대한 화란 신학자이며 정치가로서, 그의 이름은 화란에서 칼빈주의의 위대한 부흥이라고 불리우는 것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가 없다.

And Neo-Calvinism brings us to Abraham Kuyper, the great Dutch theologian and statesman whose name is inseparably connected to what has been called the great revival of Calvinism in the Netherlands.

카이퍼는, 1897년 뉴 저지주에 있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강연한 주제들을 모아놓은 강연집인, 자신의 칼빈주의 강연에서,  칼빈주의에 관한 단어 4가지를 언급하였다.
In his book, Lectures on Calvinism, which is a collection of lectures on that subject delivered at Princeton University, N.J. in 1897, Kuyper mentions four uses of the word Calvinism.

 

그가 본 칼빈주의는 다음과 같다.

According to him, Calvinism may be viewed as:

반대자들에 의하여 개혁주의자들에게 붙여진 분파적 명칭이다;
a sectarian name given to the Reformed by their opponents;

예정 교리나 이와 관계된 다른 진리들을 수용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사용되어지는 고백적 명칭이다;

a confessional name used by those who subscribe to the dogma of predestination and other related truths;

 

칼빈주의 침례교나 칼빈주의 감리교와 같이, 칼빈주의자들과 동일시되기 원하는 교회들에 의해서  사용되어지는 교파적 명칭이다.
a denominational name used by churches that want to be identified as Calvinist, such as Calvinistic Baptists and Calvinistic Methodists.

역사적이고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포함하는 과학적 명칭이다.

a scientific name, either in a historical, philosophical or political sense.[1]

 

카이퍼는 말하기를:
Says Kuyper:


역사적으로 칼빈주의라는 명칭은, 루터파나 재세례파나 소치니파가 아닌 이상, 개혁주의가 움직이는 통로를 가리킨다. 철학적 의미에서, 우리는 이것이, 칼빈이 체계화한 것의 영향 아래에서, 삶의 여러 영역들에서, 개념의 체계 자체가 지배할 수 있도록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인 명칭에서는, 칼빈주의는, 첫번째는 화란에서, 그 다음은 영국에서, 그리고 미합중국에서의 18세기 말 이후로,

입헌적 정치력에 있어서, 국가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치적 운동을 가리킨다.

Historically, the name of Calvinism indicates the channel in which the reformation moved, so far as it was neither Lutheran, nor Anabaptist nor Socinian. In the philosophical sense, we understand by it that system of conceptions, which under the influence of the mastermind of Calvin, raised itself to dominance in the several spheres of life. And as a political name, Calvinism indicates that political movement which has guaranteed the liberty of nations in constitutional statesmanship; first in Holland, then in England, and since the close of the 18th century in U.S.A.[2]

 

세상과 삶을 보는 관점으로서의 신칼빈주의

Neo-Calvinism as World and Life View


카이퍼가 이해하고 있는 칼빈주의의 개념은 “소위 말하는 독립적인 일반적 성향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는 그 자체의 모체의 원칙으로부터, 서구 유럽과 북미의 국가들 가운데서의 우리의 삶과 우리의 사고 모두에서 독립적인 형태로 발전한 것으로서” 과학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다.

It is in this scientific sense that Kuyper understands the concept of Calvinism, namely as “an independent general tendency which, from a mother-principle of its own, has developed an independent form both for our life and for our thought among the nations of Western Europe and North America.”[3]

 

카이퍼에게 있어서 칼빈주의의 범위는 그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보다도 훨씬 넓은 것이었다.

For Kuyper, the domain of Calvinism was much broader than what most people in his time understood it to be.

 

개혁주의 범주 안에 있었던 그와 동시대의 사람들은 칼빈주의를 근본적으로 교회론적이고 고백적인 운동으로 보았던 것이다.

His contemporaries in Reformed circles saw Calvinism as basically an ecclesiastical and confessional movement.

 

이들에게 개혁적 혹은 칼빈주의적이라는 것은 인간이 부패 하였다는 것과 구원을 위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을 의미하였다.

Reformed or Calvinistic for them meant believing in the depravity of man and his absolute dependence on God for salvation.

 

이를 달리 표현한다면, 이들은 은혜의 교리, 혹은 칼빈주의 5대 강령을 부정하는 알미니안이나 현대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은혜의 교리와 칼빈주의 5대 강령을 강조하였다.

In other words, they stressed the doctrines of grace or the so-called “Five Points of Calvinism” in opposition to Arminians and Modernists who denied these doctrines.

 

카이퍼는 자신의 동료 개혁주의 신자들에게, 칼빈주의가 이것보다 훨씬 더 이상의 것이라고 확신 시키는 것을 자신의 삶에 있어서의 사명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Kuyper saw it as his mission in life to convince his fellow Reformed believers that Calvinism was much more than that.

 

그는 이것이 우리를 이해시키고 현실감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세상과 삶에 대하여 모든 것을 망라하는 관점이라고 주장했다.

It was an all-encompassing world-and-life view, he insisted, which enables us to understand and make sense of reality.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과업은 칼빈주의의 원리들로 세상을 품어서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시켜서, 모든 창조 질서가 속하여있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구속되고 주장되어지도록 하여야한다고 믿고있다.

Our task as Christians, he believed, is to bring the principles of Calvinism to bear upon the world so as to influence and change it, redeeming and claiming it for Christ to whom the whole created order belongs.

 

핵심 개념: 하나님의 주권

The Key Concept: God’s Sovereignty

 

카이퍼에 의하면, 칼빈주의의 핵심적 개념은 모든 영역에 있어서 전체 피조계를 관할하는 하나님의 주권이다.

The key-concept of Calvinism, according to Kuyper, is the sovereignty of God over the whole cosmos in all its spheres.

 

이러한 신적인 주권은 국가와 사회와 교회에서의 인간의 3중 주권에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This Divine sovereignty is reflected in a three-fold human sovereignty, namely in the State, in Society and in the Church.

 

카이퍼의 칼빈주의의 개념은 신칼빈주의라고 불리는데 이는 반대자들에 의해서 뿐만이 아니라 카이퍼와 그의 동료들 자신들로부터도 불리는 것이다.

Now it is this concept of Calvinism that has come to be referred to as Neo-calvinism, not only by its opponents, but by Kuyper and his followers themselves.

 

비록 카이퍼는 자신의 생각들의 대부분이 칼빈에게 함축적으로 표현되어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것들은 원래의 고전적 칼빈주의나 개혁주의 신앙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새로운 사상들이나 가르침 들인 것이다.

It is neo or new in that it represents ideas and teachings which are not found in the original, classic Calvinism or the Reformed Faith, although Kuyper claimed that many of his ideas were seminally present in Calvin.

 

그는, 이 근원들이 칼빈의 사상에 있는 것이며, 이것들은 단지 실행되고 적용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The seeds are there in Calvin's thought, he says, they only need to be worked out and applied.

 

실은 칼빈이 모든 것들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가르쳤던 것은 사실이다.

Now it is true that Calvin taught the sovereignty of God in all things.

 

그(칼빈)도 역시 하나님의 주권이 구원에만 제한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교리가 삶의 모든 것, 즉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포함하여, 가족의 역할, 사회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소명, 과학의 영역, 기타 등등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He also knew that God's sovereignty is not limited to salvation but that there are implications of this doctrine for all of life, including Church-State relations, the role of the family, the Christian's calling in society, the place of science, etc.,etc.

 

하지만 칼빈 사상의 함축적인 뜻들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카이퍼는 일부 중요한 부분에서는 원래의 것과는 동떨어진 것들로 구성된 칼빈주의 체계로 귀결 시켜버린다.

Yet in the process of working out the implications of Calvin's thought, Kuyper ended up with a system of Calvinism that in some important areas constituted a departure from its original version.

 

카이퍼는 화란에서 칼빈주의의 원리들을 사회의 모든 영역에 적용을 시킨 영향력으로 인하여 자주 칭찬을 받곤 한다. 이 칭찬은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이다.

Kuyper has often been praised for the impact he has made on the Netherlands by applying Calvinistic principles to society in all its spheres. This praise is well-deserved.

 

이 사람은 모든 방면에 재능이 있었다.

The man was a genius in many respects.

 

화란 교회 역사에 친숙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 이 위대한 사람에 대한 다음의 계략적인 생애에 대한 스케치는 그의 중요성에 대한 몇가지 생각을 하게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For those who are not too familiar with Dutch church history, the following thumbnail biographical sketch of this great man may help to give some idea of his importance.

 

카이퍼의 생애에 대한 개요

Biographical Sketch of Kuyper

 

아브라함 카이퍼는 남부 화란의 마슬루이스에서 1837에 태어났다.
Abraham Kuyper was born in 1837 at Maassluis, South Holland.

 

그의 아버지 젠 프레드릭 카이퍼는 화란 개혁 교회의 목사였으며, 중도파에 속하여있었다.

His father, J.F. Kuyper, was a minister in the Dutch Reformed Church and belonged to the moderate party.

 

어린 아브라함은 특별하게 지적이었다.

Young Abraham was exceptionally intelligent.

 

열열한 독서광인 그는 어려서부터 글짜를 다 익혔으며, 그의 부모로부터 공부하라는 독촉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A voracious reader from the time he mastered the alphabet, he needed no prodding from his parents to apply himself to his studies.

 

12세에 레이든에 있는 김나지움에 입학하였으며, 6년 후에 뛰어난 성적으로 학업을 마칠 수가 있었다.

At the age of twelve he was enrolled at the gymnasium of Leiden, which he completed with distinction six years later.

 

그 다음 7년간은 명성있는 레이든 대학에서 보냈으며, 여기서 그는 1862년에 최우등으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을 수가 있었다.

The next seven years were spent at the famous Leiden University from which he graduated in 1862 with a doctor of theology degree, summa cum laude.

카이퍼는 대학교를 입학할 때 가졌던 관점과는 다른 신앙적 관점을 가지고 대학을 떠났었다.
Kuyper left the university with different religious views from those he held when he entered it.

 

그는 분명하게 보수적이었으며, 목회를 하여야한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있었다.

He had been brought up fairly conservative and even felt inclined towards the ministry.

 

그러나 카이퍼는 대학생활동안에 완전히 자유주의에 영향을 받게되었다.

During his university years, however, Kuyper became thoroughly influenced by liberalism.

 

그의 모델은 그 당시 현대주의에 앞장선 주창자 가운데 한 사람인 숄텐박사였다.

His model was Dr. Scholten, one of the leading exponents of modernism at the time.

 

그러므로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멈추게하지 않았다면, 카이퍼는 배교의 길로, 심지어는 그의 멘토들보다도 더 멀리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Therefore, if God had not called him to a halt, Kuyper would have gone far down the road of apostasy, probably even further than his mentors.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찬란하지만 맹렬하게 질주하는 것을 간섭하시고 그 방향을 바꾸셨다.

But God did intervene and changed the direction in which this brilliant but blind student was going at break-neck speed.

1862년에 카이퍼는 화란 개혁주의(국가 교회)의 목회자 후보생이 되었지만, 후보생들의 과잉배출로 인하여 거의 1년 가까이 발령을 받지 못했다.
In 1862 Dr. Kuyper became a candidate for the ministry in the Dutch Reformed (state church), but due to an oversupply of candidates he did not receive a call until almost a year later.

 

그는 겔더란트의 동부 지역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인 비스트의 회중 목사로 임명을 받았다.

He was ordained as pastor of the congregation of Beesd, a small village in the eastern province of Gelderland.

그러나 모든 회중이 자신들의 새로운 목회자에 대하여 기뻐했던 것은 아니었다.
Not all the members of the congregation were happy with their new minister, however.

 

그 가운데는 그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 최소한 한 숙녀가 있었다.

There was at least one lady who did not agree with his preaching.

 

그녀의 이름은 피쳐 발투스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인으로서, 그녀의 목회자가 하나님과 은혜에 대하여 낯설다는 것을 즉각 알아차렸다.

Her name was Pietje Baltus, a God-fearing woman who sensed immediately that her minister was a stranger to God and to grace.

 

카이퍼가 그녀를 방문하였을 때,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회심시켰는가를 말하면서, 카이퍼의 영혼에 필요한 것들에 관하여 말하였다.

When he came to visit her she told him how the Lord had converted her and spoke to him about the needs of his soul.

 

그녀는 카이퍼가 거듭나지 않으면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을 경고하였다.

She warned him that unless he was born again he would perish forever.

 

카이퍼는 이를 듣고서 마음에 새겨넣었다.

Kuyper listened and was impressed.

 

더 많은 방문이 이어졌다.

More visits followed.

 

밝혀진 바와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이 단순하고 교육받지 못한 여인의 증언을 사용하여 카이퍼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한 것을 기뻐하셨다.

As it turned out, the Lord was pleased to use the testimony of this simple, uneducated woman to bring about a radical change in Kuyper’s life.

 

비스트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뿐 아니라 신실한 여인과의 만남을 통해서 카이퍼의 삶은 완전히 변화되었다.

Through contact with this godly woman as well as others who feared the Lord in Beesd, Kuyper’s life was completely changed.

 

그는 엄청난 영적인 몸부림을 거쳤으며, 하나님께 사로잡히었을 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통하여, 모든 이해를 넘어서는 평안을 경험하게된 것이다.

He went through a profound spiritual struggle and there came a moment when he surrendered to the Lord and experienced the peace that passes all understanding, through faith in Christ and His finished work on the cross.

이 새롭게 거듭난 설교자는 정통에 뛰어난 사람으로 급속히 알려졌으며, 좀 더 크고 영향력있는 회중들로부터 부름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The re-born preacher rapidly became known as a champion for orthodoxy and started to receive calls from larger, more influential congregations.

 

그는 1867년 우트레흐트에서의 부름에 응했으며, 3년 뒤에는 암스텔담으로 갔으며, 여기서 그는 1886년에, 일찍이 1834년의 분리와도 비슷하면서도 다른, 국가 교회로부터의 분리를 일으킨 운동인, 돌레앙티(애통)의 리더가 되었다.

In 1867 he accepted a call to Utrecht and three years later he moved to Amsterdam, where he became the leader of the Doleantie (Grievance), a movement which in 1886 led to a separation from the State Church similar to, yet also different from, the earlier Secession of 1834.

여러해동안 카이퍼는 화란 국가 교회를 내부에서부터 개혁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작업을 해왔었다.
For many years, Kuyper worked tirelessly in an effort to reform the Dutch State Church from within.

 

그는 단순히 교회 개혁에만 관여하였던 것은 아니다.

He was not just concerned with church reform.

 

그는 국가적 관심사들에 대하여 흥미를 가졌으며,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되었다.

National concerns also had his interest and he became actively involved in politics.

 

곧바로 그는 드 헤라우트(헤럴드)라 불리우는 주간지와 기독일보인 드 스텐다드(스텐다드)의 편집인이 되었다.

Soon he became editor of a weekly paper called De Heraut (The Herald) and a Christian daily, De Standaard (The Standard).

 

그는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반혁명당(반, 프랑스 혁명에서 하나님을 배제하는 원칙에 대한 거부)의 지도자가 되었다.

He was elected to parliament and became leader of the Anti-Revolutionary Party (anti, against the godless principles of the French revolution).

카이퍼는 1901년부터 1905년까지 수상으로 봉직하면서 다수의 가난한 계급들을 향상시키고 모든 시민에게 사회 정의를 증진시키는 많은 법률을 통과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From 1901 to 1905 Kuyper served as Prime Minister and helped to pass many laws improving the lot of the poorer classes and promoting social justice for all citizens.

 

카이퍼는, 성경과 개혁주의 원칙들에 근거를 둔 고등 학문 교육을 위한, 자유대학의 주요 설립자였다.

Kuyper was also the main founder of the Free University, a school of higher academic education based on Scripture and Reformed principles.

 

그는 위대한 언변에 재능을 가진 뛰어난 달변가로서, 청중들을 수 시간동안 끝날 때까지 넋이 나가게 붙들어 놓을 수가 있었다.

An accomplished speaker with great oratorical gifts, he could hold audiences spell-bound for hours on end.

거의 반세기 가까이 카이퍼는 화란에서 복음적이고 정치적인 상황을 지배하였다.
For almost half a century Kuyper dominated the ecclesiastical and political scene in the Netherlands.

 

그러는 동안 칼빈주의는 국가의 일들에 있어서 무시할 수 없는 힘이 된 것이다.

During that time, Calvinism became a force to be reckoned with in the affairs of the nation.

 

거의 단독적으로, 그는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로하여금, 의회의 다수 의석을 확보하거나 정부를 구성할 정도로 충분히 강력한 영향력있는 선거구가 되도록 움직일 수 있었다.

Almost single-handedly he was able to mobilize Reformed Christians into a powerful constituency strong enough to secure many seats in Parliament and even form governments.

 

이것은 위대한 성취였음이 확실하였다.

This was certainly a great accomplishment.

비록 그는 피쳐 발투스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존경하였지만, 이들의 신앙이 너무 내면을 향하여 있었으며,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적이고 문화적인 고립에서 밖으로 나와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Although he respected God-fearing people like Pietje Baltus, he realized that their faith was too inward directed and that they had to be brought out of their religious and cultural isolation.

 

그들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빛을 비추어야만하며 자신들의 업무를 진실되게 할 필요가 있지만, 자신들이 세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They needed to let their light shine and take seriously their task as Christians in the world, while still showing that they were not of the world.

 

반정립과 일반은혜

Antithesis and Common Grace

 

카이퍼는 어떻게 자신의 신앙적 지지자들을 확신시키고 설득시켰는가?
How did Kuyper convince and persuade his religious constituency?

 

그는 두 가지의 상반되어 보이는 교리, 즉 반정립과 일반은혜라는 교리를 가르침으로해서 그렇게 했다.

He did so by teaching two seemingly contradictory doctrines, namely those of the antithesis and common grace.

반정립이라는 단어는 대립을 뜻하는 anti와 명제, 혹은 이론과 진술을 뜻하는 thesis로 이루어졌다.

The word antithesis is made up of anti, meaning against, and thesis which means proposition, theory or statement.

 

그렇다면 반정립은, 예를 들자면, 신앙이나 철학의 영역에서 어떤 사람의 대적자들이 믿음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Antithesis, then, means taking position against beliefs held by one's opponents e.g., in the area of religion and philosophy.

 

카이퍼에 의하면 교회와 세상 사이에는 근본적인 “반정립”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According to Kuyper there exists a basic "antithesis" between the church and the world.

 

이를 표현하자면, 구속 받은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원칙으로 살아가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반대의 원칙으로 살아간다.

The redeemed live out of one principle-love for God-and all others live out of the opposite principle, enmity of God, however this might be expressed.

 

교회와 세상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간격으로 인하여, 이 두 진영 사이에는 협력이 전혀 있을 수 없다고 결론을 지을 수도 있다.

One might conclude from this that with such a gap existing between church and world there could be no cooperation at all between the two camps.

 

그러나 카이퍼는 일반은총이라는 새로운 교리를 구성함으로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발견하게된다.

But Kuyper found the solution to this problem by constructing a new doctrine, namely that of common grace.

 

우리는 이것은 이미 칼빈과 개혁주의 신앙고백들에 이미 존재하였던 요소들이라는 것을 알고있기에, 나는 이것이 새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데, 카이퍼는 사실상 이 교리에 대하여 자신의 도장을 찍은 것이다.

I shouldn't say it was new, really, because we find elements of it already in Calvin and the Reformed confessions, but it is a fact that Kuyper put his own stamp on this doctrine.

 

그렇다면 카이퍼가 규정하고 있는 일반 은총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What, then, is common grace as defined by Kuyper?

 

이는 하나님께 선택하신 자에게만 베푸시는 특별한 구원의 은총에 더 하여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도 주시는 은혜가 있다는 개념이다.

It is the idea that in addition to special or saving grace which is given only to God's elect, there is also a grace which God bestows on all men.

 

특별 은총이 사람들의 마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인 반면에 일반 은총은 (1) 일반적으로 인류 안에 있는 죄로 인한 파괴적인 과정들을 억제하는 것이고 (2) 비록 거듭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우주에 있는 잠재적인 능력들을 개발하도록 하여서 타락 전에 사람에게 주어진 문화 명령을 완성시키는 일에 긍정적으로 공헌하도록 하는 것이다.

Whereas special grace regenerates men's hearts, common grace (1) restrains the destructive process of sin within mankind in general and (2) enables men, though not born again, to develop the latent forces of the universe and thus make a positive contribution to the fulfillment of the cultural mandate given to man before the Fall.

 

모든 사람이 자신들 안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하여 이러한 일반 은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삶의 환경을 향상 시키며, 빈곤과 싸우며 모두를 위한 사회 정의를 추구하기 위하여 믿지 않는 이들과 함께 일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Because all men share in this common grace by virtue of the image of God left in them, Christians can and should work together with unbelievers towards improving living conditions, fighting poverty and promoting social justice for all.

 

이 외에도 카이퍼는 일반 은총이 우리들로 하여금 세상의 선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을 인식하고 감사하도록 하여서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함으로 즐거워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Besides, Kuyper argued, common grace enables us to recognize and appreciate all that is good and beautiful in the world and allows us to enjoy God's gifts with thanksgiving.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술과 과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서 문화의 발전에 관여하여야한다.

Therefore Christians should be actively involved in the arts and sciences and thus in the development of culture.

 

카이퍼는 이러한 방식, 즉 주일을 평일과 분리 시키며,신학적 의미들에 있어서의 육적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을 분리시키며, 은혜로부터 자연을 분리시키는 "경건주의적 이원론"을 제거하도록, 개혁주의 공동체에 도전을 가하고있다.

In this way Kuyper challenged the Reformed community to "purge themselves of their 'pietistic dualisms,' their separation of Sunday from the workweek, of the spiritual from the physical-in theological terms, of nature from grace" (James Bratt).

 

카이퍼의 일반 은총 이론은 그의 전체 작품과 사상의 핵심 축이라고 불린다.

Kuyper's doctrine of common grace has been called the linchpin of his entire work and thought.

 

카이퍼는 이를 반정립 이론과 기술적으로 결합시켜서, 교회와 세상의 차이를 보존하려는 이들을 설득시켰을 뿐만이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최소한 문화의 어떤 면에 대하여 좋게 생각하는 개혁주의 영역 안에 있는 지식인들도 만족시키고있다.

By skillfully combining it with the doctrine of the antithesis, he reassured those who were concerned to preserve the difference between church and world, while on the other hand he also satisfied intellectuals within the Reformed camp who appreciated at least some aspects of culture.

 

일반은혜의 이중적 목적

The Dual Purpose of Common Grace

 

그러므로 일반은혜는 이중적 목적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Common grace thus served a dual purpose.

 

이는 전적 부패의 교리가 회심 하지 않은 이들 가운데 있는 선의 존재와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해주며, 동시에 이 세상 가운데 아직까지 존재하는 어떠한 선이든지, 이는 인간의 노력의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임을 주장함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것이다.

It reconciled the doctrine of total depravity with the presence of good among the unconverted, while at the same time emphasizing God's sovereignty by insisting that whatever good there still is in the world is not the result of human effort but the fruit of divine grace.

 

뿐만아니라, 일반은혜가 통치 체제나 법으로서의 기관에서 보여주었던 것과 같이, 예술과 과학도 단순한 은혜의 산물이 아니라, 은혜의 수단으로서 하나님께서 죄를 억제하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원래부터 의도하셨던 데로 창조물을 발전시키는 수단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But not only that, common grace also showed that such institutions as the government and the law, the arts and sciences were not just products of grace but means of grace- instruments whereby God restrained sin and enabled man to develop creation as He had originally intended.

 

그러나 만약에 은혜가 카이퍼 사상의 중심축이라고 한다면, 이는 바로 그의 체계의 취약점을 증명하는 것이된다.

But if common grace was the linchpin of Kuyper's thought, it also proved to be the Achilles heel of his system.

 

많은 개혁주의 사람들이 카이퍼와 그의 사상을 열광적으로 따르고 있지만, 그의 관점에 동의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이있다.

For while many Reformed people followed Kuyper and his ideas enthusiastically, there were also many who disagreed with his views.

 

특히 분리 교회들에서 신칼빈주의에 많은 반대가 있었다.

Especially in the Secession churches there was much opposition to Neo-Calvinism.

 

린드붐이나 텐 후어 같은 이들은 매우 중요한 일부 분야에 있어서 카이퍼의 가르침들이 성경과 개혁주의 신앙고백에 상반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Men like Lindeboom and Ten Hoor were convinced that in some very important areas Kuyper's teachings were contrary to Scripture and the Reformed confessions.

 

나는 여기에서 이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 할 수는 없지만, 관심 있는 세 부분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자 한다.

I cannot go into detail here, but I will mention three areas of concern.

 

첫째로는 교회에 대한 카이퍼의 교리가 있었다.

First there was Kuyper's doctrine of the church.

 

두번째로는 교회의 우선적 과제에 대한 그의 관점이었다.

Second, there was his view of the primary task of the church.

 

세번째로는 문화에 대한 낙관적인 관점이며 그것의 잠재적 구속에 대한 것이다.

And, third, his optimistic view of culture and the potential for redeeming it.

 

기관과 유기체로서의 교회

The Church as Institute and Organism

 

카이퍼는 기관으로서의 교회와 유기적 조직체로서의 교회는 구분되어야만 한다고 믿고 있다.

Kuyper believed that a distinction should be made between the church as institute and the church as organism.

 

기관으로서의 교회는 세가지 직무에 대한 위임을 받았는데 이는 가르치는 일과 성례를 집행하는 것과 제자 훈련을 시키는 것에 대한 소명을 받은 것이다.

As institute the church has been entrusted with the three offices and is called to preach and administer the sacraments and exercise discipline.

 

유기체 혹은 성도들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사회적 활동에 관여함으로서 문화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다.

As organism or body of believers she is to be involved in social activities and thus carry out the cultural mandate.

 

이러한 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지만 카이퍼가 사용하였던 방법은 분리 교회 신자들에게 불안감을 주었다.

As such there was nothing wrong with this distinction, but the way Kuyper used it alarmed the Seceders.

 

카이퍼가 말하는 참된 교회는 기관으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유기체로서의 교회를 말하는 것 같다.

Kuyper seemed to say that the real church is not the church as institute but the church as organism.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기관으로서의 교회는 교회의 전부가 아니며, 참되고 필연적인 교회도 아니며, 교회 자체도 아니며, 다만 교회를 통하여 설립된 기관이며, 말씀이 그 가운데 영향을 미치도록 하기 위한 교회이다."

This is how he put it: "The church as institute is not all of the church, nor the real or essential church, not the church itself, but an institute established through the church and for the church in order that the Word can be effective in its midst."

 

달리 표현한다면, 기관으로서의 교회는 유기적 조직체로서의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존재하며, 성도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과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In other words, the church as institute exists to serve the church as organism, equipping the saints for their task in the world.

 

그렇다면 이러한 일이 무엇인가? 카이퍼에게는 이것이 무엇보다도 사회에 관여를 하여서, 세상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회복 시키며, 문화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다.

And what is that task? For Kuyper it is primarily one of social involvement, redeeming the world for Christ, obeying the cultural mandate.

 

그러므로 신칼빈주의는 이전의 칼빈주의나 개혁주의 신학에서 근본적으로 이탈되었음을 보여주고있다.

Thus neo-Calvinism marks a radical departure from the older Calvinism or Reformed theology.

 

카이퍼 시대 이전까지 개혁주의에서는 교회를 구원에 관련된 기관으로, 성령이 역사하시는 장소로, 죄인이 구원받고 성도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살수 있도록 무장하는 것은 물론 믿음으로 양육되도록하는 터전으로 보았다.

Until Kuyper's time the Reformed viewed the church as a salvation-institute, the work-shop of the Holy Spirit, where sinners are saved and believers nurtured in the faith as well as equipped for living in this world as Christians.

 

그러나 카이퍼의 계획 안에 의하면, 선택 받은 이들이 이미 거듭난 상태로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탄생할 때부터 이미 은혜의 상태 안에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But in Kuyper's scheme the elect enter this world already regenerated and thus may be presumed to be in a state of grace from birth.

 

사실 유아는 이러한 가정에 의하여 세례를 받는 것이다.

In fact, infants are to be baptized on the ground of this presumption.

 

결과적으로 교회의 우선 되는 과제는 거듭난 이들을 양육하며 이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준비를 해주는 것이다.

Consequently, the church's primary task is to nurture the regenerate and prepare them for life in the world.

 

카이퍼 이전에 개혁주의에서는, 교회가 이 사회에서 할 일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죄인의 구원을 강조하였었다.

Prior to Kuyper the Reformed, while not denying that the church has a task in society, put the emphasis on the salvation of sinners.

 

그러므로 전통적인 칼빈주의자들의 가르침에서는, 회개에 관한 성경의 주요 주제들을 다루는데 있어서, 신자의 매일의 회개 뿐만이 아니라 교회생활에서의 회심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한 회개에 대한 초기 행동과 거듭남, 칭의, 성화 그리고 기타 등등에 대한 것들이 있다.

Preaching for the Old School Calvinists, therefore dealt with the great Biblical themes of repentance-and then not just daily repentance of believers, but also the initial act of repentance on the part of the unconverted in the churchfaith, the new birth, justification, sanctification and so on.

 

그러나 카이퍼에 와서는 강조점에 있어서 이동이 일어났다.

But with Kuyper a shift in emphasis took place.

 

말씀을 통하여 죄인의 마음에서 성령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의 회복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하여야만 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 된 것이다.

Not what the Holy Spirit works in sinners' hearts through the Word, but what Christians should do to redeem society and culture-that became the important thing.

 

문화 명령

The Cultural Mandate

 

이는 우리를 문화 명령으로 이끈다.
This brings us to the cultural mandate.

 

카이퍼는 아담이 타락 전에 하나님께 부여받은 과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의 과업이라고 믿고있다.

Kuyper believed that the task God gave Adam before the Fall is still the task of Christians today.

 

사실 그는 말하기를,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이를 적절하게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인데,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났으며, 아담의 타락으로 상실되었던 처음의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In fact, he says it is really only Christians who are able to carry out this task properly because they have been regenerated by the Spirit of God and restored into the original relationship that was lost through Adam’s fall.


과업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What was that task?

 

카이퍼에 의하면, 이는 창세기 1장 28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라고 기록되어있다는 것이다.

According to Kuyper, it is spelled out in Genesis 1:28,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th upon the earth.”

 

카이퍼는 이 구절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실질적 목적을 요약한 것이라고 말한다.

This verse, Kuyper says, sums up God’s real purpose for man.

 

이러한 목적은 궁극적으로 죄인의 구원이 아니며, 우주의 구속이다.

That purpose, ultimately, is not the salvation of sinners, but the redemption of the cosmos.

 

구원은 이러한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Salvation is but the means to that end.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참된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처음 아담과 이브에게 주어졌던 원래의 명령, 혹은 문화 명령을 실행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God’s real purpose in saving us is that we will carry out that original command or cultural mandate first given to Adam and Eve.[7]

이러한 명령은 카이퍼와 그의 제자들에게 매우 중요하기에, 마치 이는 대위임령보다 상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This mandate is so important for Kuyper and his disciples that it seems to take precedence over the Great Commission.

 

카이퍼는 그리스도가 구속의 중재자일 뿐만이 아니라 창조의 중재자라고 믿었다.

Kuyper believed that Christ is not only the Mediator of redemption, but also the Mediator of creation.

 

이는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죄인을 위해서 죽으셨을 분만이 아니라 상실된 세상이나 우주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That means Christ died not only for lost sinners, but also for a lost world or cosmos.

 

카이퍼의 관점에서 달리 표현한다면, 예정은 택한 자의 구원뿐만이 아니라, 전체 창조의 회복에 관계가 있다.

To put it still differently, in Kuyper’s view, predestination does not just concern the salvation of the elect, but also the restoration of the entire creation.

 

하나님께서는, 예정에 있어서 자신의 관점을 전체 창조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섭리가 모든 역사를 아우르면서,  자신이 자신의 손으로 만드신 모든 것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려는 목적을 향하여있다.

God, in predestination focuses His attention on the whole creation so that the decree encompasses all of history and is directed to the end that He will receive the glory from all the works of His hands.

 

카이퍼는 느끼기를, 이와같은 방식으로 사람의 관심이 특정한 혹은 특별한 은혜에 제한되어서는 안되며, 일반은혜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완전히 다른 사역으로도 확장되어야한다는 것이다.

In this way, Kuyper felt, one’s attention is not restricted to the work of particular or special grace, but it also extends to that completely different work of God in the realm of common grace.[8]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엄청난 과업을 가진것이다.
The Christian, then, has a formidable task in this world.

 

그는 문화 명령을 실행하여야하며, 창조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전시켜야만 한다.

He is to carry out his cultural mandate and fully develop the creation’s potential.

 

이렇게 되면, 이러한 영역에서의 신자의 활동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준비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된다.

In fact, the believer’s activity in this area is absolutely necessary as a preparation for the coming of God’s kingdom.

 

그리스도는 이러한 명령이 완성되기까지는 다시 오시지 않을 것이다.

Christ will not return until this mandate is completed.

 

우리에게 있어서 “재림은 우리로 하여금 전투하는 교회에서 승리하는교회로 바꾸어주어야만 하며… 하나님께서 자연과 세상에 감추어두셨던 모든 것을 종말이 이르기 전에 빛 가운데 드러내야만하는 것은 확실하다”고 카이퍼는 말한다.

For us, Kuyper says, “it is certain that the Parousia must bring us not only a change from the militant to the triumphant church … but also that everything that God has hidden in nature and the world must be brought to light before the end can be ushered in [emphasis mine, C.P.].[9]

분명히 카이퍼는 여기서 너무 멀리 나아갔으며, 그의 많은 추종자들이 이제껏 그래왔고 또 지금도 그렇게 하고있다.
Surely Kuyper went too far here, and so did and do many of his followers.

 

몇해 전에 질스트라는, 토론토에 있는 기독교학문연구소의 대변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교회는 반드시 “태초에 인류에게 주어졌던 처음 과업으로 복귀한 구속받은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관점에서는 마태복음 28장의 선교 명령이 근본적으로 창세기의 문화 명령의 재연이거나 재진술이라고 말하고있다.

Not many years ago, B. Zylstra, one of the spokesmen for the Toronto based Institute for Christian Studies (ICS), wrote that the church is essentially “redeemed humanity restored to its original task assigned to mankind at the beginning,” and that in his view the missionary mandate of Matthew 28 is basically a republication or restatement of the cultural mandate of Genesis.[10]



문화명령 비평

Critical Evaluation of the Cultural Mandate

이것이 성경적인 기독교인가?

Is this Biblical Christianity?

 

절대로 아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우리의 문화적 노력으로 이루어진 과정에 의존한다는 생각은, 좋게 표현해서, 말도 안되는 생각이다.

Hardly. The very notion that Christ's second coming is contingent on the progress we make with our cultural endeavours is preposterous, to put it mildly.

 

만약에 우리 주님이 재림 하실 때가 우리의 활동과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신약 성경에서 강조하고있는 선교적 사역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다.

If the timing of our Lord's second coming has anything to do with our activity it is our involvement in missionary work that is emphasized in the NT.

 

이는 예수님 자신이 마태복음 24장 14절에서 말씀하신 바와같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As Jesus Himself states in Matthew 24:14, "This gospel of the kingdom shall be preached in all the world for a witness unto all nations; and then shall the end come."

 

그러나 창세기 1장 28절은 어떠한가?

But what about Gen.1:28?

 

오늘날 우리에게 이것을 말씀하시지 않는가?

Does it have nothing to say to us today?

 

그렇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어진 명확한 과업이나 선교를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Yes it does. It cannot be denied that here God speaks of a definite task or mission given to man.

 

그러나 소위 말하는 문화명령이 아담에게 주어졌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동일하게 강력하다는 말인가?

But is this so called cultural mandate still in force in the same way as it was for Adam?

 

분명히 아니다.

Clearly it is not.

 

문화 명령의 개념에는 법적인 함축적 의미가 담겨있다.

The very notion of a cultural mandate has a legalistic connotation.

 

이것(문화 명령)은 은혜나 은혜 언약의 맥락에 속하여있지 않은 개념이다.

It is a term that does not belong in the context of grace and the covenant of grace.

 

하나님께서 이러한 명령-당신이 이렇게 부르기를 원한다면-을 주셨을 때는 아직 타락이 일어나지 않은 상황이다.

When God gave this mandate, if you want to call it that, the fall had not yet taken place.

 

그러나 아담이 범죄 하였을 때 그는 더 이상 이 명령을 수행할 입장에 있지 않았다.

When Adam sinned, however, he was no longer in a position to carry out this command.

 

태초에 사람에게 부여되었던 과업을 아담에게로부터 책임을 넘겨 받아서 충족시키신 분은 두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이셨다.

It was Christ, the second Adam, who took over this responsibility from the first Adam and fulfilled the task assigned to man at the beginning.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처음의 명령을 폐지하신 것은 아니다.

No, God did not abrogate His original demand.

 

그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직접 이러한 요구를 감당하신 것이다.

Rather, in Christ He Himself met that demand.

 

우리를 위하여 자신이 순종하심으로서 율법을 지키신 것이다.

By His obedience He has kept the law for us.

 

그의 구원 사역의 결과로 우리의 행위와 활동의 특성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The result of His saving work is that the character of our work and activity has fundamentally changed.

 

문화적인 것이든 아니면 그 밖의 것이든 간에, 선한 행위들은 이제는 신자들에 의하여 감사함으로 행해져야 하고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Good works, cultural or otherwise, are now performed by the believer out of gratitude and never out of fear.

 

그러므로 우리의 활동이나, 혹은 이것들의 결핍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재촉하거나 늦출 수 있다는 어떠한 생각도 단호히 거부되어야 할 것이다.

Any notion, therefore, that our activities, or the lack of them, could either hasten or delay the return of Christ is to be firmly rejected.

 

이 때문이든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든 간에 문화 명령이라는 개념은 피해야 할 것이다.

For this and other reasons the term cultural mandate should be avoided.

 

W.H. Velema는 "의미에 있어서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역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우리를 모두 다 처음의 출발선으로 돌려놓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일은 그리스도가 이 세상 역사의 결정적인 전환을 가져온 것을 뒤따라서 행해져야 할 것이다."

As dr. W.H. Velema says, "as a term it does not show a relation to the work of Christ and puts us all the way back to the starting line... Our work takes place after Christ has brought about a decisive turn in world history."

 

사도들이 믿는 이들에게 선한 행위를 하라고 권면 할 경우에 이들은 항상 명령법을 직설법에 연결 시키곤 하였다.

When the apostles urge believers to perform good works they always join the imperative to the indicative.

 

달리 표현하자면, 행위에 대한 명령은 항상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근거로 하여 논해져야한다는 것이다.

In other words, the command to work is always issued on the basis of Christ's finished work.

 

우리의 영적인 활동들 모두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All our spiritual activities are grounded in His saving activity.

 

신칼빈주의자들은, 문화에 대한 강조로 인하여, 선교적 헌신에 있어서, 신자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범주와 맥락에서 자신들의 일을 하고있다는 사실에 대한 관점을 상실하는 경향이 있다.

Neo-Calvinists, with their emphasis on cultural, rather than missionary endeavour tend to lose sight of the fact that believers do their work in the sphere and context of Christ's soteriological work.

 

복음의 참된 사역의 과정을 방해하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다.

This is a tragic error which has hindered the progress of the real work of the Gospel.

 

최근에와서는 J. Douma 나 W.H. Velema 같은 신학자들이 카이퍼와 그의 추종자들이 문화 명령을 위하여 제시한 해석학적 근거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했다.

Recently, theologians like J. Douma and W.H. Velema have questioned the exegetical basis which Kuyper and his followers have adduced for the cultural mandate.

 

예를 들어서 Douma는 창세기1:28; 2:15, 3:23과 시편8편이 진실로 신칼빈주의자들이 믿는 것과같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명령을 구성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의구심을 갖는다.

Douma, e.g., wonders if such passages as Gen.1:28; 2:15, 3:23 and Psalm 8 really constitute such an all-encompassing mandate as Neo--Calvinists believe.

 

창세기 1:28과 2:15이 동산을 가꾸고 보존 할 뿐만이 아니라 땅을 정복하도록 위임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은 창조물의 생명이 충만한 잠재력에 이르도록 하라는 명령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True, Gen. 1:28 and 2:15 assign man the task of subduing the earth as well as dressing and keeping the garden, but does this have to be seen as a mandate to bring the life of creation to its full potential?

 

Douma는 히브리어인 abad가 단순히 땅을 경작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Douma points out that the Hebrew verb abad means simply to cultivate a field.

 

이러한 노동은 사람이 식생활을 위해서 요구되는 것이다.

This labour is required of man if he is to eat (Gen.1:29; 2:5; 3:17ff.).

 

이러한 구절들이 우리에게 말해주고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일하는 것과 식생활은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범죄는 일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What these verses seem to tell us is that there is a connection between working and eating and that sin has made work difficult.

 

Douma는, 넓은 의미에서, 여기에 경작한다는 뜻에 담겨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는 이 구절이 허락하는 것 이상으로 읽는 것에 대하여 주의를 주고있다.

Douma does not deny that there may be implications here for culture in a broader sense, but he cautions against reading more into these verses than is warranted.

 

그는 Culture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에 씨의 형태로 주신 것을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특별한 명령 이상의 결과물이라고 보고있다.

Culture in the sense of the unfolding of what God has put in His creation in seed form, in his view, is more a matter of consequence than a specific mandate.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고 번성하라고 독촉을 하셨기 때문에, 인류는 땅에 충만할 것이고, 그 과정 중에 문화가 발전할 것이기에, 이것은 먹고 마시는 것 이상이어서, 사람이 아직까지도 많은 좋은 것들을 즐긴다고 볼 수 있다.

Because God has created man in His image and with the urge to reproduce himself the human race will populate the earth and in the process a culture will develop that will go beyond eating and drinking so that man may still enjoy many good things.

 

Venema는 Douma에게 동의하면서,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한 문화 프로그램을 끝내야 할 의무가 주어졌다는 생각은 거부를 하는데, 그 이유는 이 경우에 있어서 이와 같은 프로그램이 우선 윤곽이 그려져야 하는데, 이에 대하여 신약성서에서 전혀 증거를 찾을 수가 없는데도 홀로 "명령"으로 규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Velema agrees with Douma and rejects the idea that Christians are under obligation to finish off a specific cultural program, for in that case such a program would first have to be drawn up, but for this we find no evidence at all in the NT, let alone that it prescribes a "mandate."

 

그는 이와같이 문화와 사회에 개입하여야한다는 선입관에 반대하면서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순례자" 라는 특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경고를 한다.

He warns against such a preoccupation with culture and social involvement that the Christian life loses its "pilgrim" character.

 

우리는 원래 이 땅에서 영원한 이방인이고 순례자인 것이다.

We are first and foremost strangers and pilgrims on earth.

 

순례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필수적인 것이다.

Being a pilgrim is essential for the church of Christ.

 

신약의 신자들은 자신들이 과정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The congregation of the NT knows that she is 'on the way.'

 

성도는 여기가 고향이 아니다.

She is not at home here.

 

성도는 자신의 옛날의 환경에서 이탈 되었으며, 지금은 사람이 아닌, 그리스도가 세우실 나라가 장래에 나타날 것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She has been loosed from her old environment and now looks for the future revelation of the Kingdom which Christ will establish, not man.

 

Velema는, 명령보다는,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나 부르심을 말하는 것을 선호한다.

Velema prefers to speak of the Christian's vocation or calling in the world instead of a mandate.

 

그렇다면 이 소명은 무엇인가? 이것은 이 죄악된 붕괴되는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And what is this vocation? it is to live in this sinful and corrupt world as salt and light.

 

소금이 맛을 낼 뿐만이 아니라 고기나 다른 음식들의 부패를 방지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증인으로서 그리고 거룩한 행보로서 주변의 세상에 영향을 줄 것을 모색하여야 한다.

Just as salt checks decay in meat and other foods, as well as giving it flavour, so Christians should by their Gospel witness and holy walk seek to influence the world around them.

 

달리 말하자면, 그들(그리스도인들)의 세상에서의 존재와 활동은 죄의 파괴적인 영향들이 경감되거나 소멸되도록 도와야 하며, 사회에서의 삶이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관용적이거나 전도적이 되도록 만들어야하는 것이다.

In other words, their presence and activity in the world should help to alleviate and offset the baneful effects of sin and make life in society tolerable and conducive to the work of proclaiming the Gospel.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는 모든 것은 선교적이며 종말론적 초점을 가지고 있어야한다.

Everything we do as Christians should have a missionary and eschatological focus.

 

심지어 우리가 이와 같은 문화에 참여하는데 있어서 조차도, 그리스도의 도래할 나라의 관점으로부터 행하여져야하는 것이다.

Even our cultural involvement such as it is, should take place from the perspective of Christ coming kingdom.

 

이것은 신약에서의 분명한 가르침이다.

This is the clear teaching of the NT.

 

바울이 빌립보서에 기록한 바와같이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2:14-16)"

As Paul writes to the Philippians," Do all things without murmuring and disputings: That ye may be blameless and harmless, the sons of God, without rebuke, in the midst of a crooked and perverse nation, among whom ye shine as lights in the world, holding forth the word of life; that I may rejoice in the day of Christ, that I have not run in vain, neither laboured in vain." (2:14-16). Cf.,I Thess. 3:13; 5:23; 2 Pet. 3:14.

 

세상에 대하여 이러한 종류의 영향을 주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소명이지만, 우리는 성공이라는 비현실적인 희망을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While it is our calling as Christians to try to have this kind of impact on the world, we should not entertain unrealistic hopes of success.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가, 문화적이든 혹은 선교적이든 간에, 우리의 노력들을 통해서 올 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We should certainly not expect the Kingdom of God to come through our efforts, be they cultural or missionary.

 

눈에 보이는 결과라는 방식으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주님께서 영광 가운데 우리로 하여금 다가올 나라의 몇 가지 징조들을 세우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The most we can look for in the way of visible results is that the Lord will graciously enable us to erect a few signs of the coming Kingdom.

 

이 나라는 근본적이고 종말론적인 실체이지만, 충만함과 눈에 보이는 징후가 관계되는 한에있어서는, 아직 미래의 실체인 것이다.

That Kingdom is basically and eschatological reality, i.e., as far as its fullness and visible manifestation is concerned, it is still a future reality.

 

이 세대 동안에는 이는 근본적으로 내면적이며, 영적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During this dispensation it is basically inward, spiritual and invisible.

 

천상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The kingdom of heaven, Jesus said, is within you.

 

이제 그리스도는 자신의 백성의 마음에서 통치를 하시며, 그는 자신의 교회의 왕이시며 이와 같이 인식 되어지신다.

Christ now rules in the hearts of His people and He is King in His Church and acknowledged as such.

 

그렇다, 그리스도는 당연히 이 세상의 왕이시지만,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는 사단이 불법적으로 세상의 왕자로서 계속해서 다스릴 것이며, 이 세대가 지속될 때까지는 요한1서 5장19절에 요약되어있는 바와 같이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혹은 악한 자인 사단에게)이기에,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과업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과업이 무엇으로 구성되어있으며 그것의 성경적 기초와 이를 위한 근거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True, Christ is also King of the world, but until His return Satan continues to rule, be it illegally, as prince of the world, and as long as this dispensation will last "the whole world lieth in wickedness" (or in the wicked one, Satan.) I John 5:19 Summing up, the question is not whether Christians have a task in this world or not, but what this task consists of and what is the Scriptural basis and warrant for it.



일반은혜: 걱정스럽고 위험한 교리

Common Grace: a Doctrine Fraught with Danger

 

우리가 살펴본 것과 같이, 카이퍼는 그 근거를 일반은혜 교리에서 찾고있다.

Kuyper, as we saw, found the basis in the doctrine of common grace.

 

이 교리는, 혹은 최소한 그가 공식화하고 있는 방식에 있어서는, 심각한 문제에 노출되어있다.

This doctrine, or at least the way he formulated it, is open to serious question.

 

만약에 그가 말하는 일반은혜가 교회가 항상 이해하고 있었던, 즉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속성으로 인해서, 의인이나 불의한 자나 모두에게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리시는 것을 의미한다면, 나는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If he had only meant by common grace what the church has always understood by it, namely God's gracious disposition toward all men, so that He lets his sun shine and his rain fall on the just and the unjust, I would have no problem with it.

 

다시 말해서, 만약 자신에게 일반은혜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복음이 전체 세계에 전파되어서 자신의 은혜를 모두에게 제공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진심으로 동의 할 것이다,

Again, if common grace for him meant that God wants His Gospel to be preached to the whole world and offers his grace to all, we would heartily agree.

 

그러나 이 교리에 대한 카이퍼의 해석에는 이것 이상의 더욱 많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But Kuyper's version of this doctrine includes much more than that.

 

그에게 있어서 일반은혜는 우선적으로 우주와 문화의 구속을 향하여있는 은혜인 것이다.

For him common grace is primarily a grace directed to the redemption of the cosmos and culture.

 

그는 이 교리를 예정이라는 신적인 강령에 근거을 두고서, 하나님의 피조계를 향한 자신의 계획이 두 가지 방식을 따라 실현될 수 있도록 체계화 시킬 수 있었다; 선택받은 이는 구속의 중재자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을 받으며 (특별은혜), 문화에 대한 모든 잠재력을 가지고있는 우주는 창조의 중재자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속이 되는 것이다(일반은혜).

By rooting this doctrine in the divine decree of predestination he was able to construct a system whereby God's plan for His creation is realized along a double track: the elect are brought to salvation by Christ as Mediator of redemption (particular grace) and the cosmos with all its potential for culture is redeemed by Christ as Mediator of creation (common grace).

 

이와같은 개념은 필연적으로 문화와 세상에 대하여 낙관적인 관점으로 귀결 될 수밖에 없다.

Such a conception had to lead to an essentially optimistic view of culture and the world.

 

카이퍼 자신이 죄와 그것으로 인한 인류와 우주의 끔찍한 결과들에 대한 시야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아니다.

Not that Kuyper himself lost sight of sin and its awful consequences for the human race and the cosmos.

 

그는 반정립과 이에 따른 일반은혜과 특별은혜의 근본적 차이를 굳게 믿고 있었다.

He deeply believed in the antithesis and thus in the fundamental difference between common and particular grace.

 

그러나 그의 제자들에 대해서는 똑같이 말 할 수 없다.

The same cannot be said of his disciples, however.

 

그의 일반은혜 이론이 특별은혜나 구원의 은혜에 위협을 주는 것으로 인하여 일부의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였을 지라도, 다른 많은 이들이 단지 이를 기뻐하였던 것은, 일반은혜 이론이 세상으로부터의 그리스도인의 분리라는 매우 경직된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 주었기 때문이다.

If some had problems with his theory of common grace because they saw in it a threat to particular or saving grace, many others were only to happy with it because it offered an escape from what they considered a too rigid view of the Christian's separation from the world.

 

이렇게 함으로서 일반은혜는 세속적인 것에 대하여 문을 열게 된 것이다.

Thus common grace opened the door to worldliness.

 

신칼빈주의는 이전의, 전통적 칼빈주의와 다른 것인가?

Is Neo-Calvinism different from the old, classic Calvinism?

 

다방면에서 그렇다.

Yes, in many ways.

 

이러한 주제에 대하여 철저하게 연구를 한 화란의 위대한 학자인 W. Aalders는 카이퍼와 신칼빈주의 운동 전체에 대하여 "거대한 탈선"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W. Aalders, a great scholar in the Netherlands who has studied this issue thoroughly does not hesitate to refer to Kuyper and the whole Neo-Calvinist movement as De Grote Ontsporing, The Great Derailment.

 

그는, 카이퍼의 문화와 사회 참여에 대한 편협된 강조가, 소위 그가 말하는 은혜 교리의 외형화- 특히 칭의와 거듭남에 있어서-에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보고있다.

In his view, Kuyper with his lopsided emphasis on culture and social involvement has contributed greatly to what he calls the externalization of the doctrines of grace, especially justification and regeneration.

 

그는 말하기를, 신칼빈주의 계통에서 칭의는 부정되지는 않았지만, 루터나 칼빈 그리고 사람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았던 모든 이들에 경험하였던 것을 더 이상 경험 할 수 없었으며, 이(칭의)를 단지 기독교적 관념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In Neo-Calvinistic circles, he says, justification is not denied, but no longer experienced as it was by Luther, Calvin and all who live by God's Word rather than by human, be it Christian philosophy.

 

신칼빈주의자들은, 살아있는 말씀이 성령과 연합되면서 죄인을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의 영적인 실체로 인도하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칭의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있단 말인가?

What do NeoCalvinists still know of justification as an inner occurrence wherein the living Word in union with the Spirit introduces a sinner into the spiritual reality of Christ and His Realm?

 

사색적이고 추상적이며 철학적인 사고는 말씀의 주권적이고 영적이며, 내면적인 역사를 제거하며, 이것을 머리만의 지적인 개념으로 바꾸어 버린다.

Speculative, abstract, philosophical thinking has eliminated the sovereign, spiritual, inward working of the Word, turning it into a cerebral, intellectual concept.

 

천천히 성장하는 씨앗으로서의 거듭남이라는 추상적이고 유기체적인 개념은, 말씀과 성령에 의한 거듭남과 칭의를 대신하게 되었다.

An abstract, organic idea of regeneration as a slowly maturing seed has taken the place of regeneration and justification by Word and Spirit.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왕 되심에 대한 카이퍼의 열심은 영적인 가치에 대한 세속화의 과정을 가속시킬 수 밖에 없었다.

Kuyper's zeal for the kingship of Christ in the world had to lead to an acceleration of the process of the secularization of spiritual values.

 

점차 증가되는 세상과의 접촉과 세상의 영에 대한 노출로 인해서, 개혁주의 신앙은 점점 더 외형화되거나 손상되어가게된 것이다.

Through ever-increasing contact with the world and exposure to spirit of the world, the Reformed faith became more and more externalized or hollowed out.

 

카이퍼와 가장 가까웠던 친구들 가운데 일부는 개혁주의 계통에서 점증하는 이와같은 경향에 대하여 불안해하였다.

Some of Kuyper's closest friends were alarmed by this growing trend in Reformed circles.

 

신칼빈주의자인 J. C. Aalders는 1916년 성직자 회의에서 자신의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우리 개혁주의자들은 세상의 문화와 점진적으로 접촉을 하게되면서 인본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커다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J.C. Aalders, himself a Neo-Calvinist warned his colleagues at a ministers' conference in 1916 in these words: Our Reformed people, having gradually come into contact with the world of culture are in great danger of being influenced by humanism.

 

신비주의나 재세례주의를 극복하였던 것과 같은 정도로,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들의 이 땅에서의 소명을 인식하여야한다.

To the degree that mysticism and anabaptism have been overcome, God's people have recognized their earthly calling.

 

그러나 우리는 이 세대의 영에 의하여 혼탁해질 위험에 직면해있다.

But now we face the danger of contamination by the spirit of the age.

 

우리들이 고백하고 실천하는 일반은혜의 교리는, 세상에 열려있음과 동시에 세상과 동일시될 위험에 노출되어있다.

The doctrine of common grace, confessed and put into practice by our people, opens with the world at the same time the danger of conformity to the world.

 

우리는 영적인 양식에 있어서 어떠한 불균형에서도 도피하지는 않았다.

We have not escaped a certain imbalance in our spiritual food.

 

개인의 마음과 영혼의 필요들에 대하여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Not enough attention is given to the needs of the individual heart and soul.

 

외부지향적 순종은 구원에 충분한 것이 아니다.

Outward obedience is not sufficient to salvation.

 

약 10년정도 전에, 헤르만 바빙크는 Ralph와 Ebenezer Erskine의 설교들을 화란어로 번역을 하면서 서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About a decade earlier, H. Bavinck had written in an introduction to a Dutch translation of sermons by Ralph and Ebenezer Erskine:

 

여기에는 우리들 가운데 많이 부족한 중요한 요소들이 있다.

Here we have an important element which is largely lacking among us.

 

우리는 이러한 영적인 영혼의 지식을 놓치고 있다.

We miss this spiritual soul-knowledge.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은혜, 범죄와 용서, 거듭남과 회심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It seems we no longer know what sin and grace, guilt and forgiveness, regeneration and conversion are.

 

우리는 이것을 이론으로는 알고 있지만, 이것을 더 이상 삶의 두려운 실체로는 모르는 것 같다.

We know these things in theory, but we no longer know them in the awful reality of life.

 

바빙크는 자신의 생애 끝 무렵에 신칼빈주의 운동의 특정한 면들에 대하여 매우 환멸을 느끼게 되었는데 이는 (신칼빈주의의) 상당한 부분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세속적이고, 피상적이며, 교만한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있다.

It is well-known that Bavinck became very disillusioned with certain aspects of the NeoCalvinist movement towards the end of his life, because so much of it seemed to result, be it ever so unintentionally, in worldliness, superficiality and pride.

 

신칼빈주의가 궁극적으로 인도하는 것 혹은 최소한 공헌하는 것은, 카이퍼가 그렇게 많이 세운 (화란)개혁주의 교회들과, 적게는 북미기독개혁교회의 자매 교회 가운데서 발생하고 있는 배교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What Neo-Calvinism has ultimately led to or at least contributed to, can be seen in the apostasy taking place at present in the very churches Kuyper did so much to establish, the Gereformeerde Kerken and to a lesser extent in their sister churches in North America, the Christian Reformed Church.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같은 실수를 피할 수 있도록 해주시고, 우리를 사도들에 의하여 성도들에게 한번 전하여지고, 개혁주의자들과 청교도 계승자들에 의하여 다시 발견되고 제시된, 신앙 안에 보존되도록 지켜주시길 빕니다.

May God help us avoid making the same mistakes and may He preserve us in the faith once delivered to the saints by the apostles and rediscovered and set forth by the Reformers and their successors the Puritans.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칼빈주의가 아니고 옛 칼빈주의나 참된 개혁주의 신앙인데 이는 이것이 성경적이며, 고백적이며, 경험한바 되었기 때문이다.

What we need is not Neo but Old Calvinism or the true Reformed Faith because it is Scriptural, confessional and experiential.

 

Endnotes
[1]Abraham Kuyper, Lectures on Calvinism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31), pp. 12-15.


[2]Ibid., p. 14.

[3]Ibid., p. 15.

[4]Calvin, Joh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2 Vols. Edited by John T. McNeill. Translated by Ford Lewis Battles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0), II,2,12-17; cf. “Canons of Dort, “III,IV,4, The Psalter With Doctrinal Standards, Liturgy, Church Order, and Added Chorale Section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1), p. 107.

[5]James D. Bratt, Dutch Calvinism in Modern America (Grand Rapids: William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84), p. 16.

[6]H. Zwaanstra. “Abraham Kuyper’s Conception of the Church,” Calvin Theological Journal (1974), p. 178.

[7] Abraham Kuyper, Dictaten Dogmatiek, (Kampen: J.H. Kok, n.d.) Vol. 2, pp. 192, 194, 205; Vol. 3, p. 108.

[8] J. Douma, Algemene Genade, (Goes: Oosterbaan & Le Cointre N.V., 1966), p. 306.

[9] Abraham Kuyper, Van de Voleinding, Vol. 2 (Kampen: J. H. Kok, 1929), p. 507.

[10] Bernard Zylstra, “Thy Word Our Life,” Will all the King’s Men (Toronto: Wedge Publishing Foundation, 1972), p. 171.

[11] W.H. Velema, Ethiek en Pelgrimage, Ethisch Kommentaar (Amsterdam: Uitgeverij Ton Bolland, 1974), p. 55.

[12] Ibid.

[13] Ibid., p. 55.

[14] Douma, Algemene Genade, p. 345.

[15] Ibid., p. 57.

[16] Ibid., p. 18.

[17]W. Aalders, De Grote Ontsporing (Den Haag: J.N. Voorhoeve, n.d.), p. 100.

[18] J. C. Aalders, Veruitwendigen onze Kerken? (Kampen: J. H. Kok, 1916), pp. 19-20.

[19] H. Bavinck, “Introduction,” Levensgeschiedenis en Werken van Ralph en Ebenezer Erskine (Doesburg: J.C. Van Schenk-Brill, 1904) p. 5.

SOURCES CONSULTED


Aalders, J. C. Veruitwendigen onze Kerken? Kampen: J. H. Kok, 1916.

Aalders. W. De Grote Ontsporing. Den Haag: J.N. Voorhoeve, n.d.

Bavinck, H. Introduction to Levensgeschiedenis en Werken van Ralph en Ebenezer Erskine.

Doesburg: J.C. Van Schenk-Brill, 1904.

Bratt, James D. Dutch Calvinism in Modern America. Grand Rapids: William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84.

Calvin, Joh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2 Vols. Edited by John T. McNeill. Translated

by Ford Lewis Battles.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0.

Douma, J. Algemene Genade. Goes: Oosterbaan & Le Cointre N.V., 1966.

Kuyper, Abraham. Dictaten Dogmatiek, Vols. 2 and 3. Kampen: J.H. Kok, n.d.

_________. Lectures on Calvinism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31.

_________. Van de Voleinding, Vol. 2. Kampen: J. H. Kok, 1929.


The Psalter, With Doctrinal Standards, Liturgy, Church Order, and Added Chorale Section,

“Canons of Dort.” Grand Rapids, Michiga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1.

Velema, W.H. Ethiek en Pelgrimage, Ethisch Kommentaar. Amsterdam: Uitgeverij Ton Bolland,

1974.

Zwaanstra, H. “Abraham Kuyper’s Conception of the Church,” Calvin Theological Journal

(1974), p.178.

Zylstra, Bernard. “Thy Word Our Life,” Will all the King’s Men. Toronto: Wedge Publishing

Foundation, 1972.

*Published also in

The Free Reformed Student Journal, Spring 1994.

Reformed Theological Journal (November 1995), 98 Lisburn Road, Belfast BT9 6AG IRELAND.

For a summary, see Banner of Truth Trust website: http://www.banneroftruth.org/pages/articles 1/5.2005.



posted by Wonho Kim
:
추천도서 2017. 12. 18. 15:06

존 페스코의 “태초의 첫째 아담에서 종말의 둘째 아담 그리스도까지" 요약 정리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이 책의 원제는 Last things First이다.


하지만 번역본의 제목 선정이 쉽지 않았던 것은 원제인 Last things First도 많은 고민 끝에 나온 제목이었으며, 이는 미국의 정서에는 적합하지만 한국의 정서에는 맞지 않기에 결국 “태초의 첫째 아담에서 종말의 둘째 아담 그리스도까지”라는 긴 제목으로 결론이 내려진 것 같다.


이 책은 저자가 서문에서 말하였듯이 “왜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이라 부르는가?”에 대한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이 책의 논증은 역사적 개혁주의 교리의 기본 요소인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이라는 조직 신학 개념이 타당함을 입증하는 것이다.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행위 언약 개념을 비판하면서 이의 수용을 거부하고있는 것이 현실이다.


저자가 논하는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행위 언약의 개념이 없이는 정립되기 어려운 개념이다.


실제로 행위 언약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칼 바르트, 존 머레이, 톰 라이트등의 기독론이 처음 아담과의 관계성에서 정립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루이스 벌코프는 헤르만 바빙크가 정리한 행위 언약 개념을 조직 신학적으로 잘 정리하였다.


저자는 루이스 벌코프의 책과 같은 신학 작품과 같이 읽을 것을 추천한다.


최근 창세기의 창조기사와 관련되어 창조과학, 젊은 지구론, 오래된 지구론, 유신진화론등의 논쟁이 식을 줄을 모른다.


최근 창세기 1~3장에 대하여 논쟁이 뜨겁게 진행되고있지만, 이는 창세기 저자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먼 논쟁이다.


이 책은 창세기 1~3장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제공한다.


젊은 지구론, 오래된 지구론, 유신론적 진화론등은 창세기 저자가 말하고자하는 주제에서 벗어난 논점들이다.


창세기에서의 6일간의 창조가 의미하는 바는 창조 시간의 길이와는 관계가 없으며, 중요한 점은 창조 사역이 안식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서론


창세기에 대한 대중적인 접근 방법들


창세기를 둘러싼 논쟁은 지난 200년간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중심으로 발생했다.


구 프린스턴: 워필드와 핫지


프린스턴 신학교의 구학파장로교Old School Prebyterianism Of Princeton Seminary에 속해 있던 벤자민 워필드B. B. Warfield는 진화론과 창세기 1~3장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했다.


워필드는 인간의 영혼을 제외한 모든 것이 진화론적이라고 말하며, 최초의 천지 창조 이후부터는 인간의 몸과 더불어 모든 것이 진화적인 방식으로 생겨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핫지Charles Hodge는 “날"이라는 단어를 “불명확한 기간의 시간"이라고 해석하면서, 창조가 6일 만에 완성되었다는 창세기의 설명은 지구의 나이가 그것보다도 훨씬 많음을 가리키는 지질학적 증거와 상충된다고 주장했다.


핫지는 창세기 1~3장을 진화론과 조화시킨다.



창조 과학: 헨리 모리스


구 프린스턴의 입장의 특징이 창세기를 과학에 맞춘 해석이라면, 창조 과학 추종자들은 과학을 성경에 맞추어 해석한다.


헨리 모리스Henry Morris는 “창세기 1장을 해석하는 유일하게 적합한 방법은 바로 ‘해석’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라고 결론 내리면서, 창세기는 하나님이 우주를 하루에 24시간씩 엿새 동안 창조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고 말한다.


더글라스 켈리Douglas Kelly는 빛의 속도가 일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근거로, 우주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오래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두 가지 대중적인 접근 방식이 취하는 전제들



창조 과학


창조 과학의 2세대 과학자들 가운데에는 헨리 모리스가 있으며 그는 존 위트콤과 함께 “창세기의 홍수"를 저술하였다.


헨리 모리스의 저술에는 세대주의의 해석학적 특징인 문자적 해석 방식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대부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종말론에 있어서 세대주의의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문자적 해석을 전제로한 종말론적 결론을 거부한다.


하지만 개혁주의 공동체 안에서 그들의 세대주의적 창조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모리스가 쓴 창세기 해석에서 보여주는 세대주의적 증거들을 보여주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삼분법적 인간론을 고수한다.

2. 원죄가 간접적으로 전가되었다고 믿는다.

3.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천년왕국 통치동안에 물지붕이 다시 복원될 것이라고 믿는다.

4. 생명나무 열매 속에 실제로 생명을 연장하는 물질이 들어있다.

5.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에는 유전자를 변형시키는 유독물질이 들어있었다.

6. ‘신비mystery'라는 단어를 성경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


이외에도 모리스는 모형론typology에 대하여 별 관심이 없으며,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는 아담과 교회의 모형이 되는 하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모리스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과학의 나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모리스는 성경이 과학적이지 않고 신학적이라고 말하는 모든 사람을 신정통주의자라고 분류했다.



구프린스턴


핫지의 방식의 문제는 지질학적인 의미로서의 하루가 핫지의 주해적 결론을 이끌어 내는데, 과학 이론은 변하기 마련이기에 이러한 방식에는 문제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 성경 해석의 절대적인 규칙은 성경 그 자체다. 따라서 성경의 어떤 부분에 대한 진정하고 완전한 의미에 대한 의문이 있다면, 이 부분에 대해 더 명확히 설명하고 있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그 답을 찾아내고 알아내야한다(1.9)”


Fesko는 창세기에 대한 창조 과학적 접근뿐 아니라 구프린스턴의 접근방식에도 반대한다.



창세기 1~3장에 대한 최근의 문자적 해석


개혁주의에 속한 많은 이들이 창세기 1~3장을 해석할 때 창조가 일어난 기간에 주목하는 문자적 해석 방법을 채택한다.


하지만 창세기 1~3장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작품들은, 창조가 일어난 날들의 실제 길이가 얼마인가라는 하나의 문제에만 지나친 주해적 초점을 두기 때문에, 결함을 지닐 수 밖에 없다.



창세기 1~3장의 목적


과학적 자료와 세계사


모리스나 로스등 창조 과학을 주장하는 이들은 창세기에 대한 과학적인 묘사들을 하는데 있어서 다음과 같은 전제들을 기초로하고있다.


1. 창세기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방법을 말해준다.

2. 창세기 1~11장은 지구의 일반 역사에 대한 것이다.

3. 창세기 1~11장이 종교에 대한 것이라고 말하거나 신학적 진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정통주의 혹은 자유주의적인 답변이다.


페스코는  이러한 세 가지에 대하여 비판한다.


1. 하나님은 욥에게 창조에 대한 60개 이상의 질문을 하지만 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욥에게 하신 질문은,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셨는지에 대하여 욥이 모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랍비의 해석에 의하면, 창세기 1장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어떻게 창조하셨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러므로 창세기가 창조의 방법에 대해 말해준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며, 해석은 오로지 성경 본문과 그 본문의 맥락에만 충실해야한다.


2. 모리스의 주장과 같이 창세기 1~11장은 세계 역사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창세기 1장에는 천사의 창조나 사탄의 타락에 대한 내용이 전혀 나와 있지 않다.


창세기 1~11장은 선택적 역사이며, 성경은 전반적인 세상의 역사를 다루지 않으며 구속사, 즉 구원의 역사를 다룬다.


3. 모리스의 주장과는 다르게 창세기 1~11장이 일차적으로 종교적 혹은 신학적 글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정통주의와 비슷한 것이 아니다.


신정통주의 밖에 있는 신학자들도 이와같은 주장을 한다.


창세기 1~11장, 그중 특히 1~3장은 과학에 대한 것이 아니며 독자에게 과학적 자료를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창세기 1~3장은 신학적이다.



기독론적 강조와 그 목적


창세기의 첫 장들을 기독론적으로 연결짓는 것은 중요한 해석학적 가정이다.


창세기 1~3장은 과학이나 세계 역사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이해하는 시작점이다.


기독론이 창세기 1~3장을 설명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신약 성경에 비추어 이 부분을 해석해야만 한다.


신약 성경에서 빛과 어두움, 창조주로서의 그리스도,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와 같은 표현들은 창세기 1~3장이 기록된 목적이다.


창세기 1~3장은 첫째 아담의 실패가 지니는 신학적 의미를 설명해주며, 첫째 아담의 실패가 지니는 신학적 의미는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공적 사역의 시작점 역할을 한다.



해석 방법론: 기독론과 종말론


창세기 1~3장은 단지 구속 무대의 건축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인격person과 사역work에 대한 예시shadows와 모형types을 보여준다.


바울도 아담을 “오실 자의 모형"(롬 5:14)이라고 말한다.


창세기는 구속사와 분리할 수 없다.


둘째 아담의 사역은 첫째 아담의 중요성을 가르쳐주며, 첫째 아담의 사역은 둘째 아담의 중요성을 가르쳐준다.


아담이 첫 번째 예언자, 선지자, 왕인 것과 같이, 창세기 1~3장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예언자, 선지자, 왕이라는 세 가지 직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직접적인 역사적 상황


창세기 1~3장은 기원전 15세기라는 직접적인 역사적 상황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두 가지 지평에서 해석되어져야한다.


창세기가 기록된 시점은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이나 광야 기간 중 한 때로 잡을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 숭배로 가득했던 애굽 땅에서 나온 이후에, 다시 우상 숭배자들과 이교도들이 차지하고 있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창세기의 설명은 우주의 나이를 계산하는 일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성품과 특징을 기억나게 해 주었을 것이다.(42)


창조 이야기는 21세기 과학이 던지는 질문들을 통해 분석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약속의 땅의 정복을 둘러싼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맥락에서 이해하여야하며, 궁극적으로는 기독론적인 의미를 염두에 두어야한다.(43)



1장.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


서론


창세기 1~3장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 관한 탐구는, 대부분 구원의 순서(ordo salutis)의 관점에서, 창조, 타락, 구속의 맥락으로 접근한다.


하지만 구속사의 문제들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


둘째 아담의 사역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첫째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손상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9)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종말론적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시작해야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성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창세기 1장 26절의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사람을 만들자'라는 구절에서 하나님이 복수형을 말씀하시는 것에 대한 세 가지 설명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이 자신의 천상회의를 향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가장 초기의 랍비 해석자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왕실에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했었다.


최근에는 이 입장에 대하여 메러디스 클라인Meredith Kline이 지지하고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천상회의가 인간 창조에 참여하였지만, 이 회의에 천사나 다른 천상의 회원이 참여하였다는 말은 없다.


2) 위엄Majesty을 나타내는 하나님 주권의 복수형이다.


3) 삼위일체의 초기 단계적 표현이다.


구약 성경에서 신약 성경에 이르기까지의 점진적인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이 드러남을 볼 때, 본질적으로 하나이지만 복수 성격을 갖고 계신 하나님에 대한 예시일 수 있다.


1)과 2)의 주장보다는 3)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


통전적holistic 정의


하나님의 형상을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의 인간의 역할에서 일차적으로 찾을 수 있으며, 이차적으로는 인간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영역,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 하나님처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역시 지구를 지배하는 주권을 가진다.



고대 근동의 배경에 비춰 본 하나님의 형상


고대 근동의 배경에 비춰볼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갖는 의미는,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다스리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인간은 창조물로서 신이 아니며,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지배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형상, 곧 전달 가능한 하나님의 속성들을 부여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또 삼위일체 안에 있는 신적인 거룩한 공동체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 인간을 공동체로 만드셨고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인간: 창조의 정점


창세기 1장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은 두 가지 특징이 두드러진다.


첫 번째는 ‘바라’(בָּרָ֣א)라는 동사의 사용이다.


한 구절에서 ‘바라’(בָּרָ֣א)라는 동사를 세 번이나 사용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의 정점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형상이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두 개의 얼굴을 지닌 양성체가 아니며, 홀로 하나님의 형상을 갖지 못한다.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서 창조의 정점인 하나님의 형상을 갖는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창조 세계를 다스리도록 인간을 세상에 두셨다는 것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다스리셨다는 선포였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타락 할 수 없는 상태로 창조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고귀한 위치로부터 타락했고, 이 때문에 구속이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중요한 교리적 요지가 담겨있다.


1) 그리스도의 형상은 인간이 참으로 어떠해야하는지를 결정한다.


신약 여러 곳에서 증언하였듯이, 그리스도가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완벽한 인간이었다는 말이다.


이를 학문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기독론이 인류학을 정의한다는 말이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지만, 절대적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와 달리, 상대적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리스도는 신적인 존재로서의 영원한 독생자인 반면에 인간은 신적 존재 밖에 있는 피조된 아들이다.


그리스도는 창조 세계에 주권을 행사하심으로서 하나님을 형상화했는데, 이는 첫째 아담이 실패한 임무인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일을 삼위일체 하나님이 참으로 해내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2) 그리스도의 형상은 인간 구속의 목표를 결정한다.


후크마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완벽한 형상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완전하게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닮는 것이 성화의 최종 목적이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전면에 두어야한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남자와 여자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단일성과 공동체성을 모두 나타낸다.


하나님은 자신의 대리 통치자로서 다스리도록 인간을 창조 세계 가운데 두셨는데, 이는 곧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통치하시고 우주를 다스리심을 뜻한다.


인간은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인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2장 동산이자 성전인 에덴


서론


아담에게 주어진 임무에 대한 창세기 본문의 의도는 과연 채소밭을 경작하는 일등이 주어진 단순한 농장으로서의 에덴을 이야기하는 것인가에 대하여 추론해 볼 때 대답은 “아니다”이다.


아담은 에덴에서 제사장적 임무를 가지고있었으며, 에덴이 지구상의 원형적 성전이라는 결론에 이르게된다.



에덴동산의 특징


동방에 위치함


창세기 2장 8절에서 하나님이 동산을 동쪽 지역에 만드셨다고 나와있다.



산꼭대기에서


에덴 동산은 주변의 지형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하고있었다.


창세기 2장 10~14절에는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왔다고 말한다.


에스겔은 에덴동산의 위치를 하나님의 성산 위라고 말한다.


호렙산, 시내산, 시온산 위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도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거할 종말론적인 장소는 산꼭대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히12:22)


성경은 성전 안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와 산꼭대기에 있는 성전의 위치 사이에 중요한 연관성을 부여한다.


에덴에서 강물이 흘렀다는 사실과 에스겔의 진술을 종합해 볼 때 에덴동산이 산꼭대기에 있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74)



에덴의 강


에덴의 강은 성전 이미지와 중요한 연관성을 지닌다.


시편 46편 4절에서는 강과 성전을 연결시켜 말한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생수의 근원이라고 부른다.(렘 2:13)


강과 성전을 연결하는 이미지는 물의 이미지와 하나님의 임재 사이의 관계를 인식하게끔 해주며, 성령에 대한 내용을 인식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하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8~9)


이에 대하여 메러디스 클라인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에덴에 있는 산의 보좌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가 낙원 안에 있는 강을 샘솟게 하는 근원이었음이 분명하다”(76)



동산 안의 나무들


십계명은 지성소의 궤 안에 보관되었고 그 옆에 율법 책이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궤를 만지거나 궤가 열린 모습을 보게 되면, 즉각 죽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의 가시적인 표현인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와 하나님의 계명 사이에는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명령의 가시적인 표현인 선악을 알게하는 아무든지 언약궤 안의 율법이든지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의 성전 안에 언제나 존재한다.


생명나무와 성전의 일곱 촛대 사이에도 연관성이 있다.


학자들은 이 일곱 촛대가 동산에 있던 생명나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유대 문헌서는 생명나무가 에덴동산 안의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에 있었다고 기록한다.


성전과 나무의 연관성은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현저하게 두드러진다.


에스겔은 ‘성소를 통하여 나오는’ 강을 보는데 이 강이 좌우 강변의 각종 ‘먹을 과실나무’를 자라게 해준다.(78)



보석과 금속


창세기 2장 10~14절에는 금과 호마노등 값진 보석과 금속이 있었다.


동산 안에있던 보석들 가운데는 대제사장의 예복, 특별히 그의 흉패에 다시 등장한다.


대제사장의 흉패는 “하늘나라 성막을 본뜬 땅의 성막의 작은 복사판”으로 만들어져야했다.


이와 동일한 보석들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종말론적 성전의 토대에 다시 등장한다. (79)



그룹 (케루빔)


인간이 타락하게되고 그 후에 동산에서 쫒겨나게되면서 하나님은 동산의 동쪽 문 밖에 두 그룹을 세워두신다.


그룹은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는 수호자이다.


솔로몬의 성전에는 두 그룹이 내소 안을 지켰다.


그룹의 위치와 움직임은 성전으로서의 동산의 정체성을 제공해준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 그룹은 동산 안을 앞뒤로 돌아다닌다(겔 28:14).


이 그룹들은 처음에는 동산에 있었지만, 인간의 타락 후에 동쪽 문으로 옮겨졌으며, 성전 내부와 지성소 사이에 달린 휘장에 상징적으로 재현된다.


이 휘장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찢어졌으며,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한 번 지성소 안에 계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동산 안의 거주자의 활동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은 “동산 안에 거니시고” 있었다.


이는 하나님이 성전 안에 나타나셨을 때 하셨던 하나님의 활동을 묘사하는 표현과 같다.(81)



하나님의 동산 창조


동산과 성전의 유사성은 동산의 창조와 광야의 성막 건축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학자들은 창조가 일어난 기간 칠 일과 하나님이 모세에게 성막 건축을 지시하기 위해 일곱 번 말씀하신 것이 평행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웬함Wenham은 “창세기 1장 1절~2장 3절에 나오는 창조 사건의 결말과 출애굽기 25장 31~40절에 나오는 성막 건축을 설명하는 표현에 있어 평행을 이룬다.”라고 지적한다.


하나님은 창조 사역을 모두 마치신 후에 일곱 째 날에 안식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은 모세에게 일곱 번째 말씀을 마치신 후 안식일을 규정하셨다. (출 31:17)


하나님은 창조가 완료되자 동산-성전에서 안식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광야의 성막 안에 새로 만들어진 지성소에서도 안식하셨다.


성막은 성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우주적 성전인 창조 세계의 작은 복사판이다.


이는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우주적 성전이라면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최초의 지성소라는 것이다.


1. 첫째 날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창 1:1)하셨으며, “하늘을 휘장같이 치셨다”(시 104:2)

-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휘장을 염소 털로 만들되”(출 26:7)


2. 둘째 날

-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창 1:6)

- 그 휘장이 너희를 위하여…… 구분하리라.”(출 26:33)


3. 셋째 날

-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창 1:9)

- “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출 30:18)


4. 넷째 날

-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창 1:14)

- “너는 순금으로 등잔대를 쳐 만들되”(출 25:3)


5 다섯째 날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창 1:20)

-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출 25:20)


6. 여섯째 날

- 인간이 창조되었다.

- “네 형 아론을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출 38:1)


7. 일곱째 날

-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창 2:1)

 “하나님이 복되게하사”(창 2:1)

  하나님은 하시던 일을 마치셨다. (창 2:2)

  하나님은 “거룩하게 하셨고”(창 2:3)

- “이와같이 성막 곧 회막의 모든 역사를 마치되”(출 39:32)

 “모세가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출 39:43)

 “그날에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치니”

 “신성하게(거룩하게)하셨다.(83~85)



아담이 맡은 책임들


하나님이 아담을 동산에 두신 이유는 아담이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게”(창 2:15)하기 위함이었다.


많은 주석가들이 이 노동을 농사짓는 일, 농업적 경작으로만 이해하는데,

‘경작하다’라는 단어인 ‘아바드’와 ‘지키다’라는 단어인 ‘샤마르’는 성막 안의 제사장의 임무를 묘사하는데 쓰인다.


웬함은 아담이 레위인의 원형으로 묘사되어야한다고 말한다.


성경 전체의 더 큰 맥락에서 해석하면, 아담이 동산에서 수행하여야 할 책임은 농업에 관련된 일이기보다는 일차적으로 제사장으로서의 임무인 것이다.



아담이 타락 후에 입은 옷


아담과 하와의 옷은 장차 하나님의 백성을 그리스도의 의로 덮으실 것을 예시하는 것이지만, 에덴동산 안에서 인간이 입은 옷과 이후 성전 제사장들이 입은 예복 사이에는 평행 관계가 있다.(87)



결론


에덴동산의 여러가지 특징들은 에덴동산이 성전의 지위를 가졌음을 확증해주는 상당한 증거들이다.


클라인은 하나님이 우주적 성소의 소우주적인 모형을 에덴동산 안에 만드셨다고 말한다.


루터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성전을 지어주셔서 “아담으로 하여금 자신을 예배하게하셨다”라고 말했다.


아담은 제사장의 원형이지 농부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성전을 지으신 것이지 농장을 만드신 것이 아니었다.(90)



3장 행위언약


서론


아담은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 역사적으로는 행위 언약이라고 불렸던 관계에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사람과 맺은 첫 언약은 행위의 언약으로, 그것 안에서 완전하고 개별적인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에게 그리고 그의 모든 후손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7.2)고 말한다.


정의


언약을 표현하는 히브리 용어는 ,베리트(בְּרִית)다.


‘베리트(בְּרִית)’의 일반적 정의는 인간들 사이 또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조약, 동맹 또는 협정을 말하며, 이는 구약 성경에서 보통 언약covenant라는 단어로 번역된다.


구약 성경 안의 언약들


구약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언약은 크게 사람들 사이의 언약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의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사람 사이의 언약으로는 우정(다윗과 요나단 언약), 동등 조약(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언약), 종주와 봉신(여호수아와 기브온 사이의 조약), 결혼(남자와 여자 사이)을 예로 들 수 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언약은 종주와 봉신의 언약이라는 일반적 범주에 속한다.


여기에는 일방적 언약과 쌍방적 언약이 존재한다.


노아 언약


하나님과 노아 사이의 언약으로서 하나님과 피조물 간의 언약으로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루어지는 일방적 언약의 범주에 속한다. 하나님은 언약에 동반하는 표지로 무지개를 보여주신다.


아브라함 언약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언약으로서, 일방적인 집행이 강조되지만 쌍방적 요소가 존재하며, 표지로는 할례가 있다.


모세 언약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으로서, 일방적인 요소들이 언약 안에 있지만, 쌍방적 요소에 더 큰 강조점이 있다.


십계명과 언약의 책을 동반하며, 언약에 참여하는 남자들에게 할례가 요구된다는 점에서 아브라함 언약을 전제로하며, 언약의 표지로 안식일을 주신다.


다윗 언약


하나님과 다윗 왕 사이의 언약으로서 일방적 언약이다. ‘소금 언약'이라고도 묘사되며, 모세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에 그 뿌리를 두고있다.



창세기 1~3장에 나오는 언약



창세기 1~3장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창 1:5)


하나님이 낮과 밤에 이름을 붙여주시는 것은 언약적 행동이다.


예레미아는 “너희가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깨뜨려 주야로….나의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깨뜨려….레위인 제사장에게 세운 언약도 파할 수 있으리라(렘 33:20-21)”고 말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창조는 언약적인 것이다.


창세기 1장의 창조의 이미지, 특히 하나님의 성령이 혼돈 가운데있는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모습은, 언약적인 배경을 가진 성경의 다른 곳에서 다시 등장한다.


메러디스 클라인에 의하면 “창세기 1장2절의 창조 묘사는 재창조 광경에 대한 환상에서 반복된다…. 영광의 영…. 영광의 임재가 신적인 증인으로서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 출애굽-재창조에서 모세가 창세기 1장 2절의 이미지를 통해 묘사하는 영광의 그름은…. 언약에 대한 핵심적인 증인이 된다.  예수님이 세례받으실 때, 새의 형상으로 물 위로 내려오신 성령은 창세기 1장 2절에서와 같이...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신적인 증언이었다. 영광의 형상은 요한계시록 10장 1절 이후에… 맹세하시는 모습이다….”와 같이 출애굽, 그리스도의 세례, 완성의 때에도 성령이 하나님의 언약 행위에 대한 증인으로 나타나면서, 성령이 창세기 1장 2절의 창조의 시작때와 같은 기능을 하신다.


성령은 하나님의 언약적 주권에 대한 증인이셨다.


고든 스파이크만은 “언약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에, 태초부터 창조물은 하나님께 대한 의존과 하나님 앞에서의 반응이라는 언약적 관계 안에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시고 아담을 원시 성전Primeval temple인 에덴동산 안에 두셨을 때 하나님은 복과 저주를 모두 담고 있는 명령을 내리셨으며, 복과 저주가 첨부되었다는 덤에서 모세 언약과 평행을 이룬다.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하나님의 구속적 언약의 성례적 표지들과 비슷한 성례적 역할을 한다.


칼빈에 의하면 “성례라는 말은….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이 참이라는 사실에 대해 사람들이 더욱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명하신 모든 표지들을 일반적으로 포함한다….자연의 물체 가운데 표지…. 한 예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불멸에 대한 보증으로 생명나무를 주셔서 아담과 하와가 영원히 살 수 있다는 확신을 생명나무 열매를 먹음으로써 갖도록 하신 것이다…. 아담과 노아는 생명나무와 무지개를 성례로 여겼다….생명나무와 무지개 안에 하나님 말씀에 의해 새겨진 표시가 있어서 언약에 대한 증거와 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6장 18절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창 6:18)


하나님께서 노아와 관계를 맺으실 때 처음 사용하신 언약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게서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시작하실 때 사용하신 언약과 다른 명칭을 사용하신다.


아브라함 언약에서는 ‘세우다'라는 뜻의 ‘하킴’ 대신에 ‘카라트’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노아 언약에 사용된 ‘하킴'이라는 단어는, ‘자르다'라는 뜻을 가진 ‘카라트’라는 단어와는 달리, 이미 존재하고있는 것을 다시 세우는 행위로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언약의 지속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9장에서 노아와 언약을 맺으실 때, 9장 1~2절과 창세기 1장 28절의 통치 명령dominion mandate사이에 명확한 연관성이 드러난다.


노아 언약은 창조에 그 뿌리가 있으며, 창세기 1장 1절을 시작으로하고있기에, 하나님이 노아와 세우신 언약은 하나님이 아담과 세우신 언약에 그 뿌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호세아 6장 7절


“그들은 사람들(혹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호 6:7)


‘커아담( כאדם)’이라는 구절을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대하여 의견이 일치하지 않지만, 칼빈이나 워필드의 경우에는 ‘사람들처럼’보다는 ‘아담처럼’에 무게를 실어주고있다.


만약 올바른 해석이 ‘아담처럼’이라면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언약이 존재했음에 대한 명확하고 확실한 증거가 된다.


이 구절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하나님의 아들인 아담과 하나님의 아들인 이스라엘의 비교로 해석하는 것이다.



로마서 5장 12-19절


이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명확한 평행관계를 세운다.


바울이 아딤을 ‘튀포스’ (τύπος), 즉 ‘오실자의 모형’이라고 여길 때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에 핵심적 연관성이 드러난다.


아담으로부터 언약적 배경을 제거해버리는 것은 성경의 근본 흐름을 거스르는 일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렸다”고

아담을 언약적 문맥에서 이야기한다.


그리스도와 아담 사이의 평행 관계, ‘튀포스’라는 단어의 전문적 사용, 그리스도가 둘째 아담으로서 구속을 가져다주는 언약적 배경, 이 모든 것에 기초해 볼 때 아담 또한 언약적 상황 속에 있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아담이 언약 안에서 해야 할 일



통치명령


인간의 언약적 책임에 대하여 가장 많이 진술하는 구절은 통치 명령이라고 불리우는 창세기 1장 28절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이다.


이를 통하여 아담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임무는 “1) 출산을 통해 이 세상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채워라 2) 땅을 정복하라 3) 창조 세계를 다스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명령은 일정한 시험 기간이 지나면 끝나는 것이었다.


시험 기간에 아담에게 주어진 임무는 자신의 일을 끝마칠 때까지 확장 사역을 감당하며 인생을 보내는 것이었다.



잘못 이해된 통치 명령


학술것인 글이나 대중의 글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담의 사역을 노동과 연계시키는 것이다.


존 머리는 창세기 2장 15절에 대하여 “....아담의 노동이 저주가 아니라 복임을 확실히 인식해야한다…..아담의 노동이 에덴동산을 가꾸고 지키는 일이었다는 사실이...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인간의 위엄에 상당히 걸맞는 것이었다는 사실이다”고 말한다.


R. C. Sproul은 “우리는 지구를 가꾸고, 경작하고, 지키도록 만들어졌다...하나님이 생산적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생상적이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타락 전에 이런 일들을 우리에게 맡기셨다….”고 말한다.


머리와 스프로울과 같은 주석자들은 노동을 창조의 법령으로보고, 이로부터 노동 일반이 인간이 맡은 의무의 한 부분임을 도출한다.


하지만 아담이 일만을 했다거나, 동산을 지키기만 했다거나, 아담의 일차적 직업이 농부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116)



성전의 문맥 안에 있는 통치 명령


아담의 언약적인 일의 요소들


첫째, 아담의 주요 직업은 농부가 아니라 제사장이다.


고든 웬함은 “아담을 원형적인 레위인archetypal Levite으로 여겨야한다"고 말한다.


둘째, 에덴동산은 농장이 아니라 최초의 성전이었고, 여기서 아담은 자신의 제사장적 임무를 수행해야했다.


셋째,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담은, 창조 세계 전체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다스리는 임무를 받았으며, 하나님의 권위 아래서 (왕적인 임무를 가지고) 창조 세계를 다스려야했다.


넷째, 동산과 바깥 세상 사이에는 눈에 띄는 경계가 있었으며, 동산 안의 지역에는 질서가 있었다.


홍수 전에도 땅에는 비가 내렸으며, 동산 안은 인간이 땅을 경작하였기 때문에 질서가 유지되고 있던 반면 동산 밖은 경작이 없었기에 무질서했다.


아담은 동산 안의 질서를 세상 전체에 확장해야만 했다.


하나님은 아담과의 언약을 통해 아담에게 다음의 임무(아담의 언약적 의무)를 주셨다.


1) 출산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이 많아지게하며,

2) 지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가득 차게 하고, 동산- 성전을 확장시켜서 땅 끝까지 가득 차게 하여 땅을 정복하고,

3)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들이 창조 세계 전체를 다스리게 함으로써 아담의 통치 대행권을 세상 전체에 확장시키는 의무이다.



아담의 언약적 노동의 목적: 안식일의 쉼


아담에게 주어진 시험의 기간은 영원한 것이 아니었으며, 아담이 언약적 의무를 이;행한 후에는 아마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을 것이다.


종말론은 죄가 있기 전에도 있었으며, 생명나무가 상징적인 모습으로 영광스러운 운명을 나타내고있었다.


행위 언약이란 것은 안식일의 원칙이 구체화된 것이다.



행위 언약에 대한 비판에 답함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세기 2장 16~17절에 대한 설명에서 시작된 행위 언약 교리는 종교개혁 이후에 와서 개혁주의 신학의 표준이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행위 언약 교리가 표기되었지만, 행위 언약에 대한 비판은 계속되었으며 대표적인 사람으로 존 머리를 들 수 있다.


존 머리는 행위 언약에 대한 반대에는 다음의 세 가지 주장이 담겨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논해보고자한다.


1)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의 시험 기간중에 은혜의 요소가 존재했으므로 행위라는 용어는 적합한 표현이 아니다.


2) 성경은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의 상태를 언약이라는 용어 아래에서 정의하지 않는다.


3) 성경은 언약이라는 단어를 하나님이 인간을 구속적으로 다루실 때만 사용한다.



행위라는 용어는 적합하지 못한 표현이라는 주장


머리는 언약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아를 어떻게 다루셨는지를 이해하여야한다면서 노아 언약을 설명한다.


존 머리는 노아 언약을 하나님 단독적monergistic인 일방적인 방식으로 이해함으로서, 언약에 대한 전형적인 분석과 정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머리는 언약을 맹약compact이나 계약contract, 또는 조약agreemant이라는 개념을 시작으로 접근하면 안된다고 말한다.


머리는 언약이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의 주권적인 적용이며, 본질적으로 일방적인 집행이라고 정의했다.


머리는 하나님이 아담을 다루시는 방식이 공의가 아닌 은혜에 기초한 것이라고 믿었다.


아담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했다는 믿음이 에덴동산 안의 인간의 상태에 대한 머리의 생각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머리의 이러한 주장은 몇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다.


1) 머리는 에덴동산 안의 아담의 위치가 공의가 아닌 은혜 위에 세워졌다고 주장한다.


이는 머리가 은혜와 행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고려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머리는 아담이 동산 안에 계속 머물 수 있는지의 여부가 아담의 순종에 좌우된다고 주장함으로서, 아담이 에덴동산에 머물 수 있었던 기반이 은혜와 공로의 혼합이었다는 말이 된다.


(필자 주: 존 머리의 이러한 주장은 새관점이 말하는 이스라엘의 가나안에서의 상태와 유사성을 가지고있다. 이는 존 머리의 영향을 받은 노먼 쉐퍼드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페더럴 비전이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유사성을 갖는 이유가 되기도하다)


즉 아담은 순종에 대한 보상은 공의justice가 아닌 은혜를 기초로 받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필자 주: 만약에 아담이 완전한 순종을 하였을 때 주어졌을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은 순종에 대한 공로를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전적인 은혜를 근거로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 11:6)고 말하면서, 바울은 은혜와 행위를 대조시킨다.


머리의 주장의 또 하나의 결점은, 하나님이 아담의 순종을 은혜가 아닌 공의에 의해 판단하셨을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머리가 행위 언약을 비판하면서 다루지 않는 점 하나는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평행 관계다.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첫째 아담이 공의justice가 아닌 은혜에 기초하여 심판을 받는 것이라면, 둘째 아담의 공로 역시 공의justice가 아닌 은혜에 기초한 것이 된다.


이에 대하여 클라인은 “만약 공로의 행위가 둘째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으로 인정될 수 없다면, 그의 백성이 의롭게 여겨지고 인정받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전가해 줄 공로 또한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리 아이언즈Lee Irons는 “두 아담 사이의 평행 구조는 우리로하여금 이 두 경우 모두의 근거를 하나님의 공의로 보게한다. 왜냐하면 만약 첫째 아담이 공로적 순종을 통해 영생을 얻을 수 없었다며, 마지막 아담도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언약이라는 표현은 아담과 관련하여 등장하지 않는다는 주장


머리는 언약이라는 단어가 동산 안의 아담의 상태와 관련되어 등장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어떤 구절 안에서 단어의 형식적인 부재가 그 구절 안에서 그 단어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 예로서, ‘은혜 언약’ ‘결혼’등을 들을 수 있다.


또한 머리는 호세아 6장 7절의; 행위 언약적 해석을 반대하는 근거가 될만한 대체 해석을 제시하지 않는다.


언약은 언제나 구속적이라는 주장


머리는 “성경이 언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언제나 하나님이 인간에게 구속적, 혹은 구속의 계획에 밀접하게 연관된 준비를 해 나가시며 인간을 다루실 때다"라고 주장한다.


머리는 구속적인 언약에 주목하여 이것만이 유일한 언약이라고 가정한다.


행위 언약을 부정하려는 머리의 시도는 비성경적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4장 둘째 아담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


서론


아담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창조 세계를 다스리라고 하나님이 주신 임무를 팽개쳐 버렸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향해 가졌던 목적이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장 15절(필자 주:원시복음)에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자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이를 위해 구속 역사를 통하여 첫째 아담이 팽개쳐 버린 일을 다시 맡아 하신 것이다.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가 출현하기가지 구속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이 자신과 둘째 아담의 인격과 사역을 모형화하도록 세우신 대표자들 사이에 일련의 언약을 세우셨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필자 주: 저자는 아담 이후의 언약들을 아담 언약과의 관계성, 혹은 연관성을 통하여 유형학적으로 해석하고있다. 이어지는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가운데 담겨있는 아담 언약의 속성들을 밝혀내고있다. 특히 모세 언약을 아담의 행위 언약과의 관계성에서 플어나가는 방식은 모세 언약을 은혜 언약으로 해석하는 이들의 반발을 불러오고있다.)



노아 언약


아담의 타락 이후에 주어지는 일련의 언약들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세우셨던 첫 언약의 통치 명령이 다시 반복해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신 언약의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형상을 땅 위에 퍼뜨리는 것

2) 성전을 땅끝까지 확장하는 것

3) 1)과 2)의 요소를 통해 땅 위를 통치하는 것

4) 돕는 배필의 보조로 이 임무를 완성하는 것


노아 언약은 세대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이 선례가 없는 처음 언약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아담 언약과 평행관계를 이루면서 통치 명령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주셨던 것과 똑같은 임무를 노아에게 주셨다.


노아 언약에 나타나는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요소는 첫 번째 창조와 대홍수 이후의 새로운 창조 사이의 평행관계를 보여준다.


1) 하나님의 형상을 땅 위에 퍼뜨린다.(창 9:7)

2)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땅 위에 퍼뜨린다.

3) 1)과 2)의 요소를 통해 땅을 정복한다.

4) 노아는 이 임무를 자신의 돕는 배필과 연합하여 생긴 열매인, 후손을 통해 성취한다.


이에 대한 워렌 게이지의 설명이다.


“.... 창세기 8장의 기록은 본래의 창조에 대한 창세기 1장의 설명과 평행을 이룬다…. 창세기 8장 1절에서 하나님은 창조 전에 세상을 덮고 있던 물과 같이(창 1:2) 땅을 덮고 있었던(창 7:18-19) 홍수 위에 바람이 불게 하신다….채소밭이 생기는 장면(1:12)은 비둘기가… 감람나무 잎을 물어다 주는 장면(8:11)과 유사하다…. 하나님이 처음 세상의 창조를 마치신 후 안식하신 일은 새로운 창조가 긑난 후에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으시며 쉬신 일과 일치한다.”


첫 창조와 대홍수 이후의 창조 사이의 평행 구조는 노아를 일종의 새 아담처럼 여기시며 노아와 새로 시작 하셨고, 첫 아담에게 주셨던 언약적 임무를 노아에게도 주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홍수 이후의 노아의 타락은 아담을 연상시킨다.


1) 노아도 에덴동산과 비슷한 환경인 포도밭에서 타락했다(9:20).

2) 아담이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것과 같이 노아도 포도나무의 열매에서 나온 포도주를 마셨다(9:20).

3) 아담이 올곧은 자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이었던 것과 같이, 노아 역시 의로운 자였고 그의 세대 가운데 흠없는 자였다(6:9).

4)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동산에서 바람이 불 때 아담과 함께 동산을 거니셨던 장면을 연상시킨다(3:8, 6:9).

5) 노아는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자신의 하체를 드러냈다. 이 때 아담의 죄를 하나님이 덮으셨던 것처럼(3:21) 노아의 아들들이 와서 그의 벌거벗은 몸을 가렸다(9:23).


노아는 행위 언약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기에 또 다른 아담을 바라보아야했다.



아브라함 언약


아브라함 언약에서도 아담 언약과의 연속성을 살펴 볼 수 있다.


1)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크게 번성시키겠다고 약속하셨다(창17.2).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꾸신다.


이런 하나님의 복은 기본적으로 왕에게 내리는 복으로서 창조 세계의 대리인이었던 아담의 역할과 비슷하다.


2) 아브라함 언약의 목적은 이 언약의 복을 땅끝까지 퍼뜨리는 것이다(창 12:3)


아브라함은 이러한 언약을 실행하기 위해서 돕는 배필인 사라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는 아담의 통치 명령과 평행을 이룬다.


3) 아브라함에게도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주셨다.


4) 아담이 원형적인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했던 것과 같이 아브라함도 성전같은 것을 건축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도착하였을 때 아브라함은 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창 12:7)


게할더스 보스는 “... 가나안은 이스라엘의 종말론적인 상태를 예시해준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즉 전형적인 낙원이었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의 제단은 하나님이 동산- 성전에 있던 아담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던 사건을 상기시켜준다.


제단은 ‘희생하다'라는 동사로서 작은 성전 부지라고 할 수 있다.


쌓은 제단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1. 아브라함이 이 제단들을 산 위에 세웠다.


야곱이 제단을 쌓은 벧엘은 산 위에 있는 “하늘의 문"이다.


2. 아브라함은 보통 나무숲 한 가운데 제단을 쌓았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산 위의 나무숲 속에다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동산- 성전인 에덴을 생각나게해준다.



모세 언약


모세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미 언급한 동산- 성전과 광야의 성막 사이에 평행 요소들이 다음과 같이 존재한다.


1) 칠 일 동안의 창조와 성막 건축에 대한 하나님의 일곱 번의 말씀

2) 장식용 나무들과 귀금속과 금속의 존재

3) 생명나무의 복제본인 일곱 촛대

4) 그룹의 수가 놓인 지성소의 휘장

5) 하나님이 동산 안을 거니심과 성막 안에서 거니심

6) 레위인의 원형인 아담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레위인이 하나님을 섬기며 산 위, 곧 시내산 위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등…

7) 아담의 행위 언약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모세 언약 사이에 연속성의 존재.

8) 아담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것(눅 3:38)과 같이 이스라엘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다(출 4:22).

9) 하나님이 아담을 생명의 원천인 성전의 위치인 동산에 두셨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도 젓과 꿀이 흐르는 땅에 두셨다. 빌Beale이 말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 땅의 풍요는 에덴동산과의 일치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10) 이스라엘이 제사장의 나라가 되어야했던 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임재를 세상 전역에 확장하는 일에 헌신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온 땅에 퍼뜨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로 가득하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11) 하나님아 아담에게 내려진 통치 명령을 노아에게 다시 내려졌듯이 이스라엘도 일종의 통치 명령을 받았다.


이스라엘이 가진 지위는 창세기가 그리는 그림에서 보았을 때 바로 아담이 가졌던 지위이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행위 언약을 주셨듯이 이스라엘에서도 행위 언약이 재현republication되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창조 사이에도 다음과 같이 평행관계가 존재했다.


1) 첫 창조에서 성령은 새처럼 원시적인 혼돈의 수면 위를 운행하셨다.


새를 연상시키는 똑같은 이미지가 하나님이 광야에서 떠도는 이스라엘을 지휘하는 모습과 연결되어 등장한다.


2) 성령이 창조를 지휘하셨던것과 같이 성막의 건축도 지휘하셨다.


성막 건축은 단지 하나님의 우주적 성전인 창조 세계의 재건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우주적 원형 성전인 동산의 재건이기도했다.


3) 성령의 창조론적 관련성은 원시의 물과 이스라엘 사이에도 관련성이 있다.


태초에 혼돈의 깊은 물 속에서 처음으로 마른 땅이 나왔다.


이스라엘은 한 나라로서 물, 곧 홍해에서부터 태어나거나 창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게이지Gage는 “....창세기부터 여호수아에 나온 출애굽과 가나안 입성의 역사는 창조의 구속적인 재현이라는 형태를...홍해에서 이스라엘을 구속적으로 일으키는 사건은 하나님의 첫 창조 사건과 같은 서술 방식으로 이야기된다….출애굽 사건의 정점인 에덴동산 같은 가나안 땅으로의 진입은 창조의 정점인 안식일과 상관관계가 있다(히 4:3-10)”고 말한다.


4) 창조론과 모세 언약 사이에는 안식일에 관련성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사역을 마치신 후에 안식하셨다.


아담은 시험 기간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에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다.


보스는 “소위 ‘행위 언약'이라는 것은 안식일 원칙의 구현에 지나지 않는다" “안식일은 인류의 삶이 세워진 기초가 되는 종말론적 원칙이 표현된 것이다"고 말한다.


이러한 안식일의 원칙으로서의 창조론적 유형이 모세 언약에까지 이어진다.


안식일이 제정된 것은 원형 성전인 에덴동산의 창조와 건설 후의 하나님의 안식과 동산을 계승한 형태인 성막의 건설 이후에 하신 하나님의 안식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윗 언약


다윗 언약에서는 성전을 건축하는 방식에서 창조론과 연결되는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다윗 언약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계승자 중 하나를 이스라엘의 보좌에 앉히셔서, 그 보좌로부터 그가 통치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집을 건축"하고 하나님은 그에게 아버지가되고 그는 하나남의 아들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삼하 7:13-14)


다윗 언약에서 첫 창조로부터 되풀이 되는 주제는 왕의 다스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인 성전의 건축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창조 세계를 다스렸으며, 동산- 성전을 땅끝까지 확장해야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었다.


빌Beale에 의하면,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성전 건축 준비를 했을 때 다윗이 족장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이 제단을 쌓았음에 주목한다.


다윗의 성전 건축에서 볼 수 있는 창조론적 요소로는, 산 위에서의 제사장의 직무, 하나님의 나타나심, 하나님의 처소, 성전등이다.


시편 110편에서는 다윗이 왕과 제사장의 역할을 했을 뿐만이 아니라 예언자로서의 활동도 했음을 말해준다.


이와같이 구속사 내내 창조론의 유형들이 반복된다.


시작에 대한 교리는 다른 교리들의 내용을 결정하기에 중요하다.



신학적인 기반: 은혜 언약


1) 아담이 임무를 실패하자마자 하나님은 승리를 약속하셨다.


아담이 자기 아내에게 지어준 이름이 ‘여자’에서 ‘생명을 주는 자'라는 뜻의 ‘하와’로 바꾸었다.


아담이 자기 아내에게 ‘하와'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사실은 곧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신들을 죄와 사망과 뱀으로부터 구원해 줄 약속된 여자의 후손을 믿었다는 것이다.


2) 노아 언약에서 하나님은 지구를 다시는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언약의 표지로 무지개를 사용하셨다.


무지개는 일종의 창조 세계에 대한 심판 집행의 보류를 나타낸다.


노아에게 주신 통치 명령의 집행은 은혜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


행위 언약의 목적은 더 이상 아담이나 사람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 의도하신 결과를 이뤄 내실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역사하시는 분이 궁극적으로는 바로 자심이심을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숙지 시켜 주셨다.


3) 아브라함과 족장들은 피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지만, 동산- 성전에서 아담은 아마도 곡식제나 감사제를 드렸을 것이고, 이는 죄를 위한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풍성한 복을 감사하며 드리는 제사였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언약에서의 핵심은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인 복음이다.


이들 언약은 구원의 순서에 있어, 타락 이후의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또한 구원 역사의 단계에서 보면 노아, 아브라함, 이스라엘은 앞으로 올 둘째 아담의 그림자요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 성경은 그림자와 모형을 통해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를 예시한다.


노아, 아브라함, 이스라엘은 궁극적으로 미래를 가리키는 그림자이다.



5장 둘째 아담 그리스도의 사역


서론


첫째 아담의 사역은 근본적으로 선지자, 제사장, 왕이었다.


아담의 임무는 배필의 도움을 받아 성전을 땅 끝까지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언약들은 둘째 아담의 인격과 사역을 가리킨다.


이번 장에서는 1) 두 아담 사이의 공통점 2)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창조론과 기독론 3) 어떻게 교회가 둘 째 아담의 돕는 배필이 되었는지 살펴 볼 것이다.



두 아담 사이의 공통점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 사이의 중요한 공통점으로는 바로 형상, 아들됨, 삼중 직분이다.



하나님의 형상


창세기는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고 말한다.


둘째 아담으로 오신 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으신 것이 아니라 그 분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었다.


이것은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첫 번째로 중요한 평행 구조다.



하나님의 아들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린다(눅 3:38).


“아담은 백삼십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창 5:3)


히브리서에서는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 1:2~3)


여기서 형상을 닮는다는 개념과 아들 됨의 개념이 서로 밀접하게 얽혀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중 직분


아담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땅을 통치하였던 자로서 첫 번째 왕이었다.


“경작하고 지키게 하시고"9창 2:15)라는 구절에서 사용된 두 동사는 동산-성전에서 맡았던 임무로서 아담이 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동산-성전을 땅 끝까지 퍼뜨리기 위해서 표면적으로는 설교를 보충적으로 동원했을 거이기에 아담의 임무와 사역 가운데에는 선지자적인 면도 있었다.


아담은 결국 그리스도가 가지신 세 가지 직분, 즉 선지자, 제사장, 왕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다.


벌코프는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가 삼중 직분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이 세 가지 임무와 사역이 본래 인간에게 의도되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벌코프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는 선지자로서 인간과 함께 하고 있는 하나님을 대표하고, 제사장으로서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있는 인간을 대표하며, 왕으로서는 통치권을 행사하며 또한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통치권을 회복해주신다.”



그리스도의 삶  



누가복음 4장 1~14절: 그리스도가 받으신 시험


창조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첫째 아담이 자신에게 주어졌던 시험에 실패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에 있어서 복음서에 기록된 사건들 중 가장 첫 번째 사건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당하신 사건이다.


누가복음에서는 그리스도의 계보가 그리스도에게서부터 하나님의 아들인 아담으로 거슬러 올라가도록 기록되었다.


예수님은 둘째, 혹은 ‘종말론적’ 아담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공생애가 시작되는 처음에 첫째 아담이 시험받았던 것과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다.


그리스도는 아담과 달리 뱀의 유혹을 물리치셨다.


아담에게는 풍부한 식량이 있었지만 그리스도는 사십일 동안 금식하셨다.


아담은 낙원인 동산-성전에 머물러있었지만그리스도는 광활한 광야에서 자신의 시험기간을 보내셨다.


그리스도는 아담과 갈리 하나님의 뜻에 완벽히 순종하셨다.


그리스도의 시험 기간과 관련하여 더 많은 창조론과의 관련성을 찾아볼 수 있다.


창조의 셋째 날 태초의 수면으로부터 창조 세계가 나타났다.


홍수 이후의 창조 세계도 물에서부터 나타난다.


하나님의 아들인 이스라엘도 홍해로부터 태어났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와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가 물에서부터 나왔을 뿐 아니라 성령, 또는 성령을 상징하는 것이 함께 존재한다.


성령은 새처럼 수면 위를 운행하셨고, 빠지고 있는 홍수의 물 위에는 비둘기가 날아 다녔으며, 구름 기둥은 새처럼 날며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통과하도록 인도해 주셨다.


아담은 성령의 감독으로 물에서부터 나오게 되었으며, 이 주제는 노아와 이스라엘에게도 되풀이 되었으며, 둘째 아담과 새하늘과 새 땅을 가리키는 모형이 되었다.


둘째 아담의 사역 아래에서 새로운 창조물은 세례의 물로부터 나오게 된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벧전 3:20)


대홍수의 물은 궁창 위의 물과 관련이 있다.


이는 홍수를 통해 창조 세계를 창조 전의 원상태, 즉 혼돈의 상태로 되돌리셨다는 말이 된다.


홍수는 자연적이면서도 초자연적 사건이었다.


홍수의 물은 원형인 세례의 물을 가리키는 모형이었다.


베드로는 세례를 홍수, 즉 새 창조의 물과 연결시킨다.



빌립보서 2장 5~11절: 둘째 아담에게 부르는 찬송


바울은 빌립보서 6절 앞부분에서 그리스도가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의 근본 본체란 ‘그 밑에 있는 근본이 되는 존재를 진정하고 완전하게 표현하는 형태’다.


바울이 쓴 본체라는 단어는 창세기 1장 26~27절의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과 평행을 이룬다.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 이는 첫째 아담이 받았던 “너희가 하나님 같이 되리라”(창 3:5)는 유혹을 상기시킨다.


둘째 아담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과 동등 됨을 추구하는 시도를 하지 않는 반면 첫째 아담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려고 했다는 사실에서 아담과 그리스도 간에 평행 관계가 드러난다.


첫째 아담이 실패한 일을 둘째 아담은 성공했다.



그리스도의 죽음



로마서 5장 12~19절: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의 사역의 전가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의 사역은 그들 각자가 대표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데, 죄와 의의 전가를 통해 적용이 이루어진다.


아담은 인류의 언약적 대표였다.


한 사람의 죄의 결과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


아담의 불순종 때문에 ‘죄인 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순종 덕분에 ‘의인이 되는 것’은 평행을 이룬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의를 자신의 백성에게 전가하시고, 선택받은 자들의 죄는 그리스도에게 전가되는 것이다(고후 5:21).



구약 성경의 배경: 아브라함 언약


전가 개념은 아브라함 언약에서, 그리고 신약 성경에 나온 아브라함 언약에 대한 해석에서도 나타난다.


창세기 15장 18절에서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에 대하여 로벗 팔머슨은 “....이러한 행동은 자기 스스로를 저주하는 맹세를 성립시켰다….”고 말한다.


모세 언약을 선포할 때 모세가 백성들에게 피를 뿌린 것도 이와 비슷한 읨

의 행동이었다(출 24:8)


로벗 팔머슨은 “이렇게 피를 뿌리는 일이 백성들을 깨끗케 하는 것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백성들을 목숨을 걸고 언약을 지키는 자로 봉헌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신약 성경과 창세기 15장 1절 이후의 관계


히브리서 9장 15~20절은 둘째 아담이 언약 대표임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약속을 하시몀서 자기 자신을 저주하신 것처럼 히브리서의 저자 역시 그리스도께서 모세의 언약 가운데 있는 자들을 위해 자기 자신이 언약의 저주를 담당하셨다고 기록한다.


언약의 계보, 즉 노아, 아브라함, 모세 언약은 원시 복음(창 3:15)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


고린도전서 15장은 그 뿌리가 창조론, 즉 창세기 1~3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20~28절


바울은 첫째 아담이 가져온 죽음과 둘째 아담이 가져온 부활을 평행적으로 연결한다.


아담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릉 향한 목적은 바뀌지 않았다.


첫째 아담과 달리 둘째 아담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세상을 다시리신다.


고린도전서 15장 35~49절


바울은 49절에서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 함으로서 창세기 1~2장의 창조론과 연계시킨다.


창조 사역에 관여하셨던 성령은 새 아담과 협력 관계 안에서 새로운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첫 번째 창조 세계는 아담에게 묶여있고 새 하늘과 새 땅과 이것들의 탄생은 둘째 아담의 부활에 묶여있다.



둘째 아담의 돕는 배필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여자가 창조된 사건의 목적은 그리스도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24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 말하노라”에서 결혼에 대해 설명하며, 비밀은 단지 결혼에 대한 것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하여 드러내는 것이며, 창조론을 기독론뿐만이 아니라 종말론에까지 연결시킨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의 권위를 남편의 권위에 비유하고 교회의 순종을 아내의 순종에 비유한다(엡 5:22~27)


바울이 아담을 오실자의 모형이라고 말했던 것과 같이 창세기 2장 24절은 하와가 교회의 모형이라는 논리가 전제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통치 명령


창세기 1장 28절에서 아담에서 아담에게 주어진 임무는 1) 하나님의 형상을 땅끝까지 퍼뜨리는 것, 2) 성전을 땅끝까지 확장하는 것, 3) 1과 2를 통해 주권을 행사하는 것, 4) 이 임무를 돕는 배필과 함께 수행해 내는 것이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죄 때문에 이 통치 명령을 수행해 낼 수 없었다.


둘째 아담은 첫째 아담이 실패한 이 통치 명령을 완수했다.



잘못 이해된 통치 명령


많은 대중적인 책들이 아담의 타락과 그리스도의 사역을 함께 다루지 않는다.


더글라스 윌슨은 타락이 본래의 통치 명령에 아무런 영향이 미치지 않았다고 본다.


존 머리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고 정복하며, 창조 세계를 다스리고, 일하며, 결혼하고, 안식일을 지키라는 창조의 법령들은 아직 폐지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머리는 통치 명령과 그리스도의 사역을 연결시키지 못하고있다.


머리는 통치 명령이 중지되었다기보다는 계속해서 강조되어야하며, 이 의무를 시행하여야 하는 필요성과 긴박감을 강화시켜야한다고 말한다.


통치 명령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타락과 무관하게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젠트리는 통치 명령을 문화 명령이라 칭하며 이를 ‘후천년주의의 낙관적 기대’와 연관시키지만, 그 가운데 그리스도는 제외시킨다.


헨리 모리스는 통치 명령이 아직도 유효한 명령이라고 말하지만, 이를 수행하는 주체는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민족들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에서의 공통점은 1) 통치 명령을 말할 때 죄가 세상에 들어오지 않은 것처럼 말하며, 2) 둘째 아담의 사역과 계시에 대한 충분한 깨달음과 활용 가운데서 통치 명령을 살펴보지 않는다.



통치 명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


통치 명령은 아직도 유효하지만 이는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사역과 계시에 비추어 해석되어야하며, 통치 명령은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가 완수하신다.


그리스도는 통치 명령의 사명을 담당하셨고, 자신의 돕는 배필, 신부, 둘째 하와인 교회의 도움으로 지금도 그 명령을 완수하고 계신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통치 명령에서 “천하 만민 (판타 타 에스네πάντα τὰ ἔθνη)(창 23:18)”와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모든 민족 (판타 타 에스네πάντα τὰ ἔθνη)(마 28:19)”에서 ‘판타 타 에스네’가 반복되고있다.


이로서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가 그의 돕는 배필이자 신부인 교회의 도움으로 통치 명령을 완수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통치 명령은 단순히 번식을 통해, 또는 대가족을 이룸으로써 완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타락 후 아담과 하와는 죄 때문에 더 이상 이 명령을 수행 할 수 없게 되었다.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돕는 배필인 교회와 함께 후손을 만들어 가심으로 통치 명령을 맡아 수행하시고 자신의 형상을 지닌 자들을 만들어 가신다.


통치 명령은 생육과 번식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전파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복음의 전파로 자녀들이 태어나는 것이다.


이들은 남편과 아내에게서 태어난 자들이 아니라 둘째 아담과 그의 돕는 배필이자 둘째 하와인 교회에게서 태어난 자들이다.



6장 안식일



서론


창조의 일곱째 날이 지닌 본질을 첫째 아담, 이스라엘, 모형론적인 하나님의 아들과 둘째 아담과 관련하여 이해하여야한다.


종말론의 교리는 창조론적인 안식일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


마지막 장에서는 안식일이 아담과 이스라엘과 그리스도와 맺는 관계를 살펴본다.


종말론은 구원론보다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선행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종말론이 다른 주요 교리들과 맺는 관계를 인식하는 우리의 방식이 바뀔 것이다.



아담과 안식일


창조가 끝난 주의 주말, 엿새 동안의 일이 끝난 후 하나님은 일곱째 날에 쉬셨고 일곱째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는데, 아담도 자신의 일, 곧 하나님의 형상을 증가시키고 땅끝까지


성전을 확대시키는 행위 언약의 노동을 완수하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담이 해야 할 의무였다.


이에 대하여 게할더스 보스는 행위 언약이란 “결국 안식일 원칙의 구현”이라고 말한다.


안식일의 원칙은 종말론적 목적을 가진 노동 행위의 종착점이다.


보스는 “행위 언약이 인류에게 절대적인 목적과 불변하는 미래를 가정하는 한, 우리는 종말론이 구원론을 선행한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종말론은 죄가 들어오고 구속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 따라서 구원이 아직 필요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다.


거룩한 시간인 안식일은 행위 언약에 대한 시간적인 종말론적 그림자의 역할을 하며, 창조의 목적을 기억하게 해주는 시간적 장치이다.


종말론이 창조론에 내재되어있는 까닭에 안식일의 원칙은 구속사 내내 지속된다.



이스라엘과 안식일


일곱째 날의 안식은 모세 언약에서 역사 속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안식일은 십계명의 제4계명으로 공표된다.


제4계명은 단지 창조를 기념하는 계명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이고 종말론적 성격을 가지고있다.


히브리서 4장 1절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해주는데, 여기서의 안식은 창조 주간의 일곱째 날의 하나님의 안식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바로 전에 그들은 창조 주간의 일곱째 날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약속의 땅 자체는 시편 95편이 말하는 안식이 아니었다.


안식은 약속의 땅에서의 시간적인 쉼을 의미하지 않았다.


안식이란 하나님이 창조 사역을 마치신 후 영원한 일곱째 날에 원형적 하늘나라를 성전 삼아 그 안에 거하시며 쉬는 것을 말한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일곱째 날 안식의 무대가 되는 하늘나라의 모형의 역할을 한다.


이스라엘은 믿음이 부족했기에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안식은 하나님이 종말론적 주님이심을 보여주기 위해 십계명 속에 포함되어있음을 말해준다.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종말론적 표지와 같은 역할을 한다.(출 31:17)


타락 이후의 안식일은 구원론적인 표지로서의 작용을 한다.


이스라엘이 최종적으로 일곱째날의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오직 둘째 아담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것은 매주 돌아오는 표지인 안식일에 의해 표현된다.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영원한 일곱째 날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었기에, 이스라엘은 행위 언약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언약 아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둘째 아담의 인성과 사역을 가리키는 모형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둘째 아담과 안식일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가 일곱째 날의 안식에 들어가셨다고 말한다(히 10:12~13)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쉬기 시작하였던 원형 성전 속에 들어가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역 가운데 종말론적으로 실현된 부분은 그리스도가 창조의 안식으로 들어간 것이다.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첫 번째 창조가 주일에 시작되었던 것과 같이 한 주의 첫째 날에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셨다.


새로운 창조는 시작되었지만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는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구약 성경의 유형은 먼저 일하고 그 다음에 쉬는 것이지만, 신약 성경의 유형은 먼저 쉬고 그 다음에 일하는 것이다.


세례는 새 창조 안에 들어가는 것, 또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시각적으로 상징하는 의식인 것이다.


안식일에 일을 한다면, 그것이 곧 이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안식에 참여할 수 있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posted by Wonho Kim
:
두 왕국 2017. 8. 15. 22:08
두 나라의 성격과 속성
The Nature and Attributes of the Two Kingdoms

김원호(dent4834@hanmail.net)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나라는 다스림의 성격과 속성에 따라서 두 가지 형태의 나라로 구분 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시며 이 세상을 유지 보존하시는 분이시며, 동시에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에 대하여 구속 주이시다.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이 그리스도께 속하여 있지만 그렇다고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이 구속의 대상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두 나라의 특성은 성과 속의 이원론적 개념과는 다르다.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두 나라는 성과 속의 이원론적 구분 보다는 육적인 나라와 영적인 나라로 구분 할 수 있다.

나라에 대한 정확히 번역은 왕국Kingdom이며 두 나라 교리는 정확히는 두 왕국 교리라고 할 수 있다.

왕국에 대한 그릇된 오해로 인하여 다만 “나라”라는 용어를 사용할 뿐이다.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는 구속주로서의 신자들을 중심으로한 하나님 나라와 창조주로서의 모든 피조물을 대상으로한 하나님 나라로 구분되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하나님 나라는 구속주로서의 그리스도의 나라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구속주로 계시는 하나님 나라는 신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영적인 하나님 나라이다.

가장 흔한 오해 가운데 하나는 역사적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인가에 대한 오해일 것이다.

역사적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오실 메시아로서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모두가 하나님 나라 백성은 아니다.

역사적 이스라엘은 참 하나님 나라인 참 이스라엘에 대한 유형학적typological 모형일 뿐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역사적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로 규정하고 있으며 신약의 교회를 확장된 이스라엘로서의 하나님 나라로 보고있다.

개혁주의에서 보는 하나님 나라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하여 거룩에 참여한 이들 가운데 임한 나라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부정하고있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의를 의의 근거로 보지 않기에, 새관점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참된 하나님 나라라고 할 수 없다.

최근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정의를 모호하게 말하는 이들이 많을 뿐만이 아니라, 새관점과 같이 그리스도의 의와는 관계없는 하나님의 의(언약에 대한 신실하심)를 근거로한 운동을 하는 이들이 많다.

그리스도를 배제한 새관점과 달리, 반드루넨이 말하는 하나님의 두 나라는 창조주로서의 그리스도의 나라와 구속주로서의 그리스도의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두 나라의 성격과 특성에 대한 제대로된 이해는 앞으로 논의하게 될 자연법의 속성과 적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정이다.

역사적 이스라엘에게 적용되었던 율법과 마찬가지로, 율법의 도덕법과 시민법의 성격을 가진 자연법은 모든 인류에게 적용될 법으로서 상당 부분 율법의 역할을 반복하게된다.

자연법은 율법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의 죄를 고발하며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필요성을 제시해주며, 모든 사람으로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핑계하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두 나라 가운데 창조주로서의 그리스도의 나라에 적용된 자연법을 니해허기 위해서는 반드루넨이 설명하는 두 나라 개념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반 두르넨은 이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 투레틴과 러더포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두 나라 개념을 풀어나간다.

다음 글은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WSC의 조직신학 교수인 David M. VanDrunen의 “자연법과 두 나라Natural Law and the Two Kingdom”의 176쪽 이하를 번역한 것이다.

두 나라의 성격과 특성
The Nature and Attributes of the Two Kingdoms

개혁파 정통주의 사상에서 두 나라 교리에 관하여 좀 더 세밀한 부분들에 대한 고려를 시작하면서, 우선 이 시대에 개혁주의 저자들이, 특히 한 나라를 다른 나라와 구분하는 의미들에 있어서, 어떻게 두 나라의 성격과 속성에 강조점을 둘 수 있었는지를 논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As we now begin a more detailed consideration of the two kingdoms doctrine in Reformed orthodox thought, it seems helpful first to discuss how Reformed writers of this era articulated the nature and attributes of the two kingdoms, particularly in terms of one kingdom’s distinction from the other.

특성적인 면에서 볼 때, 투레틴은 다른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과 비슷하게 그리스도의 왕권을 세밀하고 적절하게 논하고있기에 그의 논술은 이 세분화된 부분에서 유용한 역할을 하고있다.
Turretin, in characteristic fashion, offers a nuanced and relevant discussion of Christ’s kingship similar to that of other Reformed orthodox theologians, and thus his treatment serves as a useful focus for this subsection.

투레틴은, 그리스도의 왕권에 관하여, 두 나라 교리에 적절히 적용될 수 있는 부수적 강조점의 모양을 확실히 구분지을 수 있게끔, 다음과 같은 논술로 시작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한 두 가지 속성의 나라를 구분하여야 하는데, 하나는 자연적이거나 필연적이며, 다른 하나는 중재적이고 경륜적이다."
Turretin begins his exposition of Christ’s kingship with a crucial distinction that shapes his subsequent articulation of matters pertaining to the two kingdoms doctrine: “Before all things we must distinguish the twofold kingdom, belonging to Christ: one natural or essential; the other mediatorial and economical."

이러한 진술 뒤에 따라올 논의에서 분명히 지적하였던 것과 같이, 투레틴은 칼빈이 시민의 나라와 영적인 나라에 대하여 언급한 것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구분해 주고있다.
As clearly indicated in the discussion that follows this statement, Turretin is in effect identifying what Calvin referred to as the civil kingdom and the spiritual kingdom.

투레틴은 한 나라를 다른 나라과 구분하기 위하여 일련의 구분점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Turretin proceeds to make a series of distinctions in order to differentiate one kingdom from the other.

"자연적이거나 필연적인" 나라는 모든 창조물을 포함하는데 반하여 "중재적이고 경륜적인" 나라는 특별히 교회에서 종결이 된다.
The “natural or essential”kingdom is “over all creatures” while the “mediatorial and economical” kingdom is “terminated specially on the church.”

그리스도는 전자에 대해서는 영원한 아들(아버지와 성령에 따르는)로서 소유하시며, 후자에 대해서는 "하나님-사람이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다스리신다. 전자는 "섭리라는 강령 위에 근거를 두며" 후자는 "선택이라는 강령 위에" 근거를 둔다. 그리스도는 전자에 대하여는 "하나님이시고 말씀이시기에" 왕권을 행사하시고 후자에 대하여는 "하나님- 사람이시므로" 왕권을 행사하신다.
Christ possesses the former as the eternal Son (along with the Father and Holy Spirit) and administers the latter “in a peculiar manner as God-man.” The former “is founded on the decree of providence” and the latter “on the decree of election.” Christ exercises kingship over the former “inasmuch as he is God ... and the Logos”and over the latter “inasmuch as he is God-man”

요약하여 말하자면, 투레틴은 설명하기를: “ 이를 ‘그의 중재적이고 경륜적인 나라’라고 부르는 이유는 특별히 중재자에게 귀속되어있기 때문이며, 은혜의 섭리에 따른 그 분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나라는 자연적으로 그에게 귀속되어 있으며,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자연적'이라고 부른다.
In a summary statement, Turretin explains: “Hence it is called his ‘mediatorial and economical kingdom’ because it is a dominion peculiar to the Mediator and as it were his own according to the dispensation of grace. The other belongs to him by nature and is on that account called ‘natural.’”

이러한 자료 자체는, 개혁파 정통주의에서의 종교개혁 두 나라 교리의 자취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두 나라 신학이 기독론이라는 좀 더 커다란 질문들에 부합되도록 제대로 정돈된 사상의 전개와 발전을 위해서도, 근원적인 증거들을 제공해주고 있다.
This material alone provides substantial evidence not simply for remnants of a Reformation two kingdoms doctrine in Reformed orthodoxy, but for a well thought out and developed theology of the two kingdoms incorporated into larger questions of Christology.

여기서 잠시 머무르면서 투레틴의 주장을 조명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It is worth lingering for a moment and highlighting Turretin’s claims here.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주체로서, 모든 피조물 위에 있는 하나의 나라를 다스리신다.
Christ rules the one kingdom as eternal God, as the agent of creation and providence, and over all creatures.

그리스도는, 성육신 하신 하나님-사람으로서, 구속의 주체로서, 모든 교회 위에있는 또 하나의 나라를 다스리신다.
Christ rules the other kingdom as the incarnate God-man, as the agent of redemption, and over the church.

후자의 나라는 구속적인데 반하여 전자는 구속적이지는 않다.
The latter kingdom is redemptive, the former is non-redemptive.

후자는 배타적인데 반하여 전자는 포괄적이다.
The latter is exclusive, the former is inclusive.

내가 아는 바로는, 칼빈은 이를 결코 이와같이 조직화하거나, 상세하고 세심하게 분류하지는 않았다.
To my knowledge, Calvin never put things in quite this organized, detailed, and nuanced a way.

그러나 투레틴의 논술은, 이미 3장에서 논의하였던 바와 같이, 칼빈이 강조하였던 개념들을 보다 광범위하게 표현한 것으로서, 이를 발전적이면서도 좀 더 신학적으로 통합된 형태를 취한 것이었다.
But Turretin’s exposition seems very much to express the ideas that Calvin articulated, as discussed in Chapter 3, but in a more developed and theologically integrated fashion.

뒤따르는 논의에서 투레틴이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 가운데 한 가지는, 그리스도가 중재자이시고 구속자가 되시면서, 영적이고 천상의 성격을 나타내는 나라는, 이 땅의 세속적인 성격을 가진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나라와는 구별되어야 하는데, 이는 칼빈에게 중요했던 주제를 반복 서술하려는 의도다.
One of the matters that Turretin is intent on emphasizing in his subsequent discussion is the spiritual and heavenly nature of Christ’s mediatorial, redemptive kingdom in distinction from the earthly and mundane nature of the natural, essential kingdom, thereby echoing an important theme for Calvin.

이러한 중재적인 나라의 방식에 관계하여 그가 제기하는 특별한 질문은 이것이 일상적이고 지상적이냐, 아니면 영적이고 천상적이냐이다.
The specific question that he poses “concerns the manner of that [mediatorial] kingdom —whether it should be mundane and earthly, or spiritual and heavenly.”

그는 "정통주의에서는 그의 나라가 현세적이거나 지상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고 천상적인 것으로 추정하고있다"고 대답한다.
His answer is that “the orthodox infer that his kingdom is not mundane and earthly, but spiritual and celestial.”

그는 이에 반대하는 의견을 유대주의와 동일시하면서, 지상의 것들에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찾으려는 것은 "유대주의적 허망함"이라고 말한 칼빈의 의견을 반복하여 말한다.
He identifies the contrary opinion with the Jews, echoing Calvin’s sentiment that finding Christ’s kingdom in earthly things is a “Jewish vanity.”

투레틴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6가지의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특별히 구약의 예언들과 유형들, 그리고 메시아와 그의 나라에 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가리키고 있다.
Turretin proceeds to offer six biblical and theological reasons in support of this claim, pointing especially to Old Testament prophecies and types and to New Testament teaching about the Messiah and his kingdom.

이 논의에서 그는 왕, 보좌, 왕위, 국민, 통치 형태, 율법, 축복을 언급하면서 "나라에 속하여있는 이와같은 모든 것들은 영적인 것으로서, 현세적이거나 지상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있다.
In this discussion he asserts that “all that pertains to this kingdom is spiritual, not mundane and earthly,” mentioning its king, throne, scepter, subjects, mode of administration, laws, and blessings.

이보다 몇 년 더 일찍, 러더포드와 길레스피 역시 이와같은 핵심 요지들의 많은 부분들을 받아들였다.
A few years earlier, Rutherford and Gillespie also embraced many of these key points.

투레틴과 마찬가지로 러더포드도, 창조주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는 (그래서 임시적이고 현세적인) 나라와, 구속주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는 (그래서 영적이고 천상적인) 나라를 구분하였다.
Like Turretin, Rutherford distinguished between one kingdom ruled by God as creator (and hence temporal and mundane) and the other kingdom ruled by God as redeemer (and hence spiritual and heavenly).

예를 들어, 이러한 국가와 교회로 이 두 나라가 제도적으로 표현된 것에 관하여 말하자면, 러더포드는 "이 두 가지 권력은, 영적인 것과 임시적인 것, 이 세상의 세속적인 것과 이 세상이 아닌 곳에서의 영적인 것이 같이 다른 것으로서, 한 국민은 궁극적으로 창조주로서의 하나님께 속하여있고 다른 하나는 궁극적으로 구속주로서의 하나님께 속하여있는 것이다."고 말한다.
For example, in speaking about the institutional expression of these two kingdoms in state and church, Rutherford says: “these two powers are so different, as spiritual and temporal, carnal of this world, spiritual not of this world, the one subject as supreme immediately to God creator, the other supreme immediately subject to God the redeemer.”

그러고나서 그는 바로 "그리스도의 나라"와 "군주의 나라"를 대비시키고나서, 전자의 영성으로 인하여, 군주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나라의 일부분이 될 수 없다고 결론 내린다.
Shortly thereafter he contrasts “Christ’s kingdom”and “the magistrate’s kingdom” and, precisely because of the spirituality of the former, concludes that the magistrate’s kingdom “is not a part of his [Christ’s] kingdom.”

여기서 러더포드와 투레틴의 용어 사이의 유일한 명백한 차이는, 투레틴이 이 세상 나라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다스린다고 말하는 것과는 달리, 러더포드는 이 나라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라고 단순하게 말한다.
The only evident difference between Rutherford’s and Turretin’s language here is that while Turretin speaks of the temporal kingdom as ruled by Christ as God, with the Father and Spirit, Rutherford simply speaks of this kingdom as ruled by God (the creator).

그러나 이와같은 신학자들에 의하여 표현되는 이러한 신학적 사고들은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이다.
But the theological idea expressed by these theologians is substantively identical.

길레스피는 투레틴과 좀 더 비슷한 용어로, 동일한 교리를 확언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중적인 나라에 있어서, 한 나라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또 다른 나라는 중재자이시면서 교회의 머리로서 다스리신다"고 기록하고 있다.
Gillespie affirms the same doctrine, writing, in language more similar to Turretin’s, of “a twofold kingdom of Jesus Christ: one, as he is the eternal Son of God, reigning together with the Father and the Holy Ghost over all things ...; another, as Mediator and Head of the church.”

영적이고 구속적인 그리스도의 나라를 논하는데 있어서, 투레틴은 집행과 운용이 주로, 교회의 소명과 집회, 교회의 보존과 통치, 교회의 보호와 방어, 그리고 교회의 가득한 영광의 네 가지로 구성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In discussing the spiritual, redemptive kingdom of Christ, Turretin argues that its administration and exercise consist principally in four things: the calling and gathering of the church, the conservation and government of the church, the protection and defense of the church, and the full glorification of the church.

이번 연구에서 특별히 놀랄만한 한 가지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영적인 나라가 긴밀히 연관되어있다는 것이다.
One matter that is particularly striking for the present study is the close association of the church and Christ’s spiritual kingdom.

투레틴은 오직 교회만이 유일하게 하나님 나라가 집행되고 실행되는 장소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교회를, 유일하게 본질적인 천상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현실에서 제도적으로 표현되는 곳이라고 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Turretin mentions only the church as the place where the kingdom is administered and exercised, which suggests that he viewed the church as the only present institutional expression of the essentially heavenly kingdom of Christ.

투레틴이 다른 곳에서 말하는 방식도 이러한 결론을 지지해 준다.
The way Turretin speaks elsewhere bolsters such a conclusion.

예를 들어 그는 "교회는 하늘에 속한 나라이며, 그리스도의 구속적, 중재적 왕권은 교회에서 종결되는 것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He writes, for example, that “the church is the kingdom of heaven” and that Christ’s redemptive, mediatorial kingship is “terminated specially on the church.”

사실 그는, 중재자로서의 왕권은 그리스도에 속하여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교회의 머리로 지명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인다(시 2:6).
In fact, he adds that the mediatorial kingship belongs to Christ “because he [God] constituted him King over the church (Ps. 2:6).”

길레스피의 언어는 간결하고 분명하다: “중재자로서의 그리스도는 오직 교회의 왕이시다."
Gillespie’s language is concise and unambiguous: “Christ, as Mediator, is King of the church only.”

이와같은 교회의 구속적이고 영적인 나라로서의 배타적인 정체성은 개혁주의 신학에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Such an exclusive identity of the redemptive, spiritual kingdom with the church was no novelty in Reformed theology.

3장에서 살펴보았던 바와 같이, 칼빈도 이와 같은 교리를 가르쳤으며, 이는 그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의견과는 대립 되는 것이다.
As observed in Chapter 3, Calvin taught this same doctrine, contrary to commonly received opinion about him.

하인리히 헤페가 정통파 개혁주의의 일반적인 의견을 정리하면서 “개혁주의 교리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왕권이 교회 밖의 (자연의) 영역에 까지 확대되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여기에 대하여 영향력을 가지고 계시지만 이는 오직 교회에 대한 중재자적 왕권을 행사하실 목적에 한한 경우이다” 고 기록한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It is no surprise, then, that Heinrich Heppe writes, in summarizing the opinion of Reformed orthodoxy generally, that “it is not right, when it is said that according to Reformed doctrine the kingship of Christ also extends over the extra-Church sphere (of nature).
Of course Christ has power over this also, but only for the purpose of exercising his mediating Kingship over the Church."

두 나라 교리의 이러한 면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고백적인 표현에서 볼 수 있다.
This aspect of the two kingdoms doctrine found confessional expression in the Westminster Standards.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45에서는 우선적으로 교회의 의미로서 그리스도의 왕권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일단의 사람들을 세상으로부터 자기자신에게 불러내고, 그들에게 그가 유형적으로 그들을 통치하는 직임자와 법률과 징벌을 주심으로, 그의 선택자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수여하며, 그들의 순종을 포상하고 그들이 범죄할 때 교정하며 모든 유혹과 고난에서 그들을 보존하고 지원하며 ....”
WLC 45 speaks primarily of Christ’s kingship in terms of the church: “Christ executeth the office of a king, in calling out of the world a people to himself, and giving them officers, laws, and censures, by which he visibly governs them; in bestowing saving grace upon his elect, rewarding their obedience, and correcting them for their sins, preserving and supporting them under all their temptations and sufferings....”

이러한 점에서 그리스도의 왕권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선포된다고 말하는데, 이는 헤페가 말하는 바와 같이 구속의 의미에서 행사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백성을 위하는 것과 원수 갚음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모든 적들을 억제하고 정복하며, 나아가 자기자신의 영광과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만물을 능력있게 정리하며,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복음에 불순종하는 나머지에게 원수를 갚아 주심으로서 왕의 직분을 수행하신다.”
At this point it goes on to speak of his kingship over those outside of the church, not in redemptive terms but only, as Heppe says, for the sake of his people or for wreaking vengeance: “restraining and overcoming all their enemies, and powerfully ordering all things for his own glory, and their good; and also in taking vengeance on the rest, who know not God, and obey not the gospel.”

같은 맥락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2에서는 "보이는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이다"라고 간단 명료하게 말한다.
Succinctly, but along the same lines, WCF 25.2 states that the visible church “is the kingdom of the Lord Jesus Christ.”

교회를 그리스도의 구속의 나라이면서 영적인 나라로 보는 개혁파 정통주의의 관점이, 교회 자체가 어떠한 외적인 통치체제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It is worth noting that these Reformed orthodox views of the church as the redemptive kingdom of Christ and of this kingdom as spiritual did not mean that the church itself should have no external government.

이러한 점에서 개혁주의 전통은 전형적인 루터주의의 두 나라 신학과는 구별되는데, 교회의 영적인 특성이 외부인 통치 체제에 우선한다고 보는 루터주의의 두 나라 신학에서는 교회의 외적인 체제의 일들을 국가에 우선하여 다루어야한다고 주장했었다.
In this matter the Reformed tradition differed from typical Lutheran two kingdoms theology, which, in seeing the church’s spiritual character as precluding an external government, was content to hand external administrative matters of the church over to the state.

개혁주의의 본거지에 좀 더 가까운, 스위스의 의사이면서 하이델베르그 대학 교수인 토마스 에라스투스는 자주 이와 비슷한 관점에 연관된다.
Closer to home for the Reformed, Swiss physician and University of Heidelberg professor Thomas Erastus (1524-83) is often associated with similar views.

에라스투스는 교회의 추방할 권리를 부인함으로서, 에라스티안이란 의미가  국가가 교회를 다스려야 한다는 뜻을 연상하게 되었다.
Erastus denied the right of the church to excommunicate and the term “Erastian” came to connote the idea that the state should control the church.

칼빈은, 3장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영적이더라도 외적으로 조직화된 복음적 기관과 법규의 필요성에 대해서 확고히 했을 뿐만이 아니라, 그 후에도 개혁주의 신학과 예배 의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이러한 것들이 요구되었다.
Not only did Calvin affirm the necessity of a spiritual yet externally organized ecclesiastical government and discipline, as discussed in Chapter 3, but later Reformed theology and practice also typically called for such.

이것은 사실 투레틴이나 러더포드, 길레스피에게도 주요한 관심사였다.
This was in fact a major concern of Turretin, Rutherford, and Gillespie.

만약에 개혁주의 두 나라 교리가 무엇인가를 의미한다면, 이것은 교회의 외적인 체제나 규율이 국가 행정관에 맡겨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If the Reformed two kingdoms doctrine meant anything it meant that the external government and discipline of the church was not left to the civil magistrate.


투레틴과 다른 개혁파 정통주의 지도자들이 강조하고있는 두 나라 사이를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시민의 나라( 좀 더 명확히 말하자면, 특히 지상의 나라들을 말한다)를 다스리는지 혹은, 어떻게 다스리는지에 관한 중요하지만 어려운 질문을 제기된다.
The clear distinction between the two kingdoms that Turretin and other Reformed orthodox luminaries articulated raises the important yet difficult question of just how, or even whether, Christ rules the civil kingdom (or, more concretely, particular earthly kingdoms).

투레틴은 자신이 하는 것을 분명하게하면서,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조건들을 부여하고있다.
Turretin makes clear that he does, yet makes several qualifications in explaining how.

이를 “부여된 조건들”이라고 부르기에는 망설여지지만, 의미를 보증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One hesitates to call them “qualifications,” but they seem important enough to warrant the term.

우선,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투레틴은 그리스도가, 세상 나라를,  성육신하신 중재자가 아닌 로고스로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고 구속자가 아닌 창조주이면서 유지자로서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하고있다.
First, as seen above, Turretin makes quite clear that Christ rules over the temporal kingdom not as the incarnate mediator but as the Logos, the eternal Son of God, and hence as creator and sustainer but not as redeemer.

그는 추가적인 논의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구분되는 능력들로 통치하시는 서로 다른 방식들을 특화시킴으로서, 우리에게 질문에 대하여 정성을 들여 답하고있다.
Later in his discussion he elaborates on the question before us by specifying the different ways in which Christ reigns in these distinct capacities.

비록 그리스도께서 항상 세상적이 아닌 영적인 방법으로 통치를 하시더라도 “그는 진실로 경건한 이와 악한 이에 대하여 다르게 통치 하신다: 전자에 대해서는 머리로서, 성령의 따스하고 건강한 영향력으로, 후자에 대해서는 주권자로서 그 자신의 능력 있는 덕으로 통치 하신다”고 투레틴은 설명한다.
Though Christ reigns always in a “spiritual”and not an “earthly” way, Turretin explains: “Indeed he reigns differently in the pious and the wicked: in the former by the sweet and healthful influence of the Spirit, as head; in the latter, by his own powerful virtue as Lord.”

여기서 투레틴이 하는 설명은, 그가 이전에 제시한 두 나라 사이의 구분이, 바로 경건한 이들과 악한 이들 사이의 엄격한 구분이 아니라는 점에서, 혼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있을 수 있다.
Turretin’s exposition here might be suspected of harboring some confusion, insofar as the distinction between the two kingdoms that he previously set forth is not a strict distinction between the “pious”and the “wicked.”

경건한 이들은 영적인 나라에서 뿐만이 아니라 시민으로서도 살아가고 있다(그리고 일부 악한 사람들도 교회에서 외적인 일원으로서의 신분을 유지하기도 한다).
The pious live in the civil as well as the spiritual kingdom (and some wicked people hold external membership in the church).

이와 같은 것이 영역에 있어서 약간의 혼동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투레틴의 의견들은 그가 이전에 언급들, 즉 창조자이시면서 유지자로서, 그리스도는 모든 것에 대한 주권적 주로서 현세적인 나라를 다스리시면서 또한 성육신 하신 구속자이시면서, 보호하시는 구원자로서, 영적인 나라를 통치하신다는 이전의 언급들을 논리적으로 확장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Despite what thus may be a brief confusion of categories, Turretin’s sentiments here seem a logical extension of his earlier comments: as creator and sustainer, Christ rules the temporal kingdom as the sovereign lord of all; as incarnate redeemer, Christ rules the spiritual kingdom as a tender savior.

그러므로 투레틴의 결론을 따르자면: "이와 같은 정치적인 통치자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증진 시키기 위하여 적절하게 공식적으로 헌신하지는 않는다."
Hence would seem to follow Turretin’s conclusion elsewhere: “The political magistrate as such does not serve properly and formally in promoting the kingdom of Christ.”

길레스피도 투레틴과 같은 방식으로 자주 말하곤 하였다.
Gillespie frequently speaks in the same way as Turretin.

러더포드의 용어는 투레틴과 동일하지는 않더라도 비슷하며, 이들의 본질적인 신학적 주장들은 같은 것이다.
Rutherford’s language is similar though not identical to Turretin’s, and their substantive theological claims are the same.

앞에서 언급한 바와같이, 러더포드는 현세적 나라를 “창조주 하나님” 께 귀속시키고 영적인 나라를 “구속자이시며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귀속 시킨다.
As noted above, Rutherford put the temporal kingdom under “God the creator” and spiritual kingdom under “Christ the Redeemer and Head of the Church.”

전자에 대하여 좀 더 언급하면서, 그는 이것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나라의 일부분이 아니며, 솔직하게 말해서 시민의 관료는 “교회의 중재자나 머리로서 귀속될 수 없다”고 말한다.
In speaking further about the former, he writes that it is “not a part” of Christ’s spiritual kingdom and thus states bluntly that the civil magistrate “is not subordinate to Christ as mediator and head of the church.”

비슷한 맥락에서, 그는 후에 “관료로서의 통치자”는 “그리스도의 대사”가 아니며 대신에 “질서의 하나님, 그리고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대리인”이라고 말한다.
Along similar lines, he says later that “magistrates as magistrates” are not “the ambassadors of Christ” but “the deputy of God as the God of order, and as the creator.”

그 후에 그는 “통치자로서의 관료는 중재자로서의 그리스도의 대리인이나 대리자도 아니며, 이와같이 통치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중재적 나라의 대리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추가하여 언급한다.
Still later he adds that “the magistrate as a magistrate is not the vicar nor deputy of Jesus Christ as mediator”and that “the magistrate as such is not a vicar of Christ’s mediatory kingdom.”

이러한 주장에는 섬세한 부분과 단서 조건들이 있는데, 이 중에 몇 가지는 다음에 논의하기로 하자.
There are nuances and qualifications to these claims, some of which will be discussed below.

이러한 증거에 비추어 볼때, 나는 투레틴과 러더포드가 이러한 본문들에 대해서, 비록 어느 정도는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있지만, 같은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주장을 해본다.
In light of this evidence, I suggest that Turretin and Rutherford teach the same doctrine in these passages, though from somewhat different angles.

그리스도가 이 현세적 나라를 다스리시는가에 대한 질문에 투레틴은 그렇다라고 대답하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성부 성령과 함께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 그리고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분이라는 조건에서 대답하는 것이고; 러더포드는 같은 질문에 대하여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는데 이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러한 나라를 다스린다는 조건에서 대답하는 것이다.
Turretin answers Yes to the question whether Christ rules the temporal kingdom, but with qualifications (i.e., that he does so only as eternal God, with the Father and Holy Spirit, as creator/sustainer); Rutherford answer No to the same question, but with qualifications (i.e., that God the creator does rule this kingdom).

이러한 각각의 조건을 서로 비교해 볼 때, 같은 결과가 나온다
When the qualifications of each are compared to the other’s, the effect is the same.

이것을 가능한 좀 더 세밀히 살펴볼 때,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 현세적 세상을 삼위 하나님의 영원하신 일원으로서 통치 하신다고 말하지만, 성육신 하신 중재자이면서 구속자로서의 역량에서 다스리시지는 않으신다고 가르친다.
To put it as precisely as possible, they both teach that the Son of God rules the temporal kingdom as an eternal member of the Divine Trinity but does not rule it in his capacity as the incarnate mediator /redeemer.

이러한 신학적 구분은 이 책에서 서술 될 이야기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This theological distinction is crucial for the story being narrated in this book.

3장에서는 칼빈의 소위 말하는 극단적 칼빈주의의 기독론에서는,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그리스도의 신적인 작업을, 성육신 하신 이후에도 하나님-사람의 중재자로서의 구속 사역과 구분하는 신학적 범주를 제공해준다고 기록하였다.
Chapter 3 noted that Calvin’s so-called extra Calvinisticum Christology gave him theological categories for distinguishing Christ’s divine work of creation and providence from his work of redemption as God-man and mediator, even after the incarnation.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도 역시 그리스도의 계속되는, 즉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분과 구속자로서의 구별된 정체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를 특별히 두 나라 교리에 묶어서, 이와같은 사상을 앞서 관찰한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Reformed orthodox theologians also recognized Christ’s continuing distinct identities as creator/sustainer and as redeemer and developed this idea in the ways observed above, tying it specifically to the two kingdoms doctrine.

이들은 자연법의 근거를 행위 언약에 두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자연법을) 구속보다는 창조의 영역에 두고 있으므로, 이들은 세속의 나라의 기반을 구속보다는 창조의 영역에 두려고 한다.
As they grounded natural law in the covenant of works, and hence in creation rather than in redemption, so they also grounded the civil kingdom in creation rather than in redemption.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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