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도서 2017. 2. 12. 19:52

“하나님이 조선을 이처럼 사랑하사”를 읽고서


김원호(dent4834@hanmail.net)


“하나님이 조선을 이처럼 사랑하사”를 통하여 전해주는 방위량 선교사와 한부선 선교사의 기록은 평양 대부흥과 신사참배로 인한 수난들과 공산치하에서의 기독교인들의 수난사를 다루고있다.


이 책은 몇 가지 부차적인 사건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의 형성과정에서의 주된 부분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현재의 한국의 장로교회를 더욱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피값으로 쓰여진 책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생명과 죽음이 교차하는 가운데 현재의 교회의 상황에 대한 말할 수 없는 미안함과 두려움이 엄습하면서 복음이 단순히 개인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수단이 아니라 현실을 압도하는 능력임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되었다.


“하나님이 조선을 이처럼 사랑하사”는 2부로 나뉘어져있다.


1부에서는 1901년에 조선에 도착한 방위량 선교사가 평양 대부흥이 있기까지 보고 경험한 것들을 토대로 당시의 상황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있다.


2부에서는 방위량 선교사의 사위인 한부선 선교사가 일제 말기에 있었던 신사참배와 관련된 일제에 의한 성도들의 희생과 이후 공산주의자들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성도들의 희생을 구체적인 상황을 예로 들면서 소개하고있다.


방위량 선교사가 처음 부산에 도착하였을 때 묘사한 조선의 모습은 조선의 낙후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보여주고있다.


이미 일찌감치 문호를 개방하여 세력을 키운 일본에게 조선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고 더군다나 일본에 의하여 무장 해제를 당한 조선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마찬가지로 아무 힘을 쓸 수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도착한 선교사들은 선택의 여지도 없이 조선이 위안을 얻을 수 있었던 유일한 도피처였다.


일본은 조선을 발전시킨다는 명목으로 대륙으로 이어지는 철로를 건설하였지만 이는 명백히 중국 침략을 위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기 적절하게 선교사들이 복음을 신속하게 전하기 위한 주요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20세기 초의 전 세계적인 열강의 식민지 열풍으로 러시아도 조선을 침략하게된다.


일본군이 아니었다면 당시 미약한 조선으로서는 러시아의 군대를 막아내기에 역부족이었을 것이고 조선은 동구의 러시아 연방 중의 하나와 같이 러시아의 간섭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을 방어하기 위하여 러시아와 전쟁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목적이 조선을 장악하고자 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인들은 일본이 러시아를 물리치고나선 일본으로 돌아갈 줄로만 알고있었다.


러시아군을 물리친 일본군은 철수를 하지 않고 실질적으로 조선을 통치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1907년 조선인들은 철수를 하지 않고 조선을 장악한 일본 군인들로 인하여 국권을 상실한 절망감에 압도되어있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은 성령의 역사하심이었지만 국권을 상실한 극도의 좌절감에 빠진 조선인들의 마음에 불을 붙이셨던 것이다


2007년에 시도되었던 again1907이 실패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2007년의 상황이 100년 전과 같이 상실한 마음의 마른 장작과도 같지 않았으며 교회 확장이라는 욕심에 흠뻑 젖어있는 마음에 불을 붙일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인간의 욕심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일으키려던 부흥은 결코 성령께서도 간섭하시지도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부흥주의의 부작용만 그대로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방위량 선교사가 전하는 평양 대부흥은 국권의 상실과 좌절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복된 시간이었다.


극도의 상실감 만큼이나 하나님을 경험하는 놀라움은 극에 달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이들은 자신들의 내면의 죄를 보기 시작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이들은 죄를 토해내지 않고는 하나님의 영광을 담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부흥의 기간동안 경험한 하나님의 영광은 국가를 잃은 서러움과 비통함을 넘어서는 것이었으며 이는 수천년의 한반도 역사에서 처음으로 경험된 놀랍고 두려운  사건이었던 것이다.


평양 대부흥은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라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과 같이 이제  한반도에서도 성령께서 항상 함께 계시겠다는 표징이었다.


평양 대부흥은 이제껏 중국을 의존하면서 조선의 자존감을 지켜왔던 성리학과 유교 의존적인 굴레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함께 하심 가운데 새로운 역사를 쓰게될 한반도에서의 기독교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불길이었다.


평양 대부흥과 함께 시작된 한반도의 기독교 역사는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903년 선교사의 자녀로 조선에서 태어나 젊어서 일제를 경험했던 한부선 선교사가 전하는 신사참배의 실상은 이제 갓 태동하기 시작한 조선의 기독교가 얼마나 혹독한 시련을 견디어 왔는지를 있는 그대로 전해주고있다.


신사참배라는 시련은 조선인들이 받은 복음이 지식을 넘어서 능력을 점검하는 혹독한 시험의 과정이었으며 동시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신사참배의 시련을 견뎌내어야만 했던 성도들의 어려움은 이 시대 신학교에서는 가르칠 수 없는 혹독한 시험의 과정이었으며 이 시련의 과정을 통하여 초기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보여준 복음의 능력은 단순한 이론 이상의 삶의 능력이었다.


신사참배와 공산주의자들의 혹독한 시련과 그로 인한 순교의 피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견고히 설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었다.


평양 대부흥과 일제의 핍박,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의 박해를 전하는 “하나님이 조선을 이처럼 사랑하사”를 읽으면서 환란, 고통, 죄, 용서, 부흥에 대하여 읽고 느낀 것들을 다음과 같이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환란에 대하여)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 통치는 한민족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사건이었다.


방위량 선교사가 조선에 도착하였던 1901년의 조선의 상황에서는 조선의 자랑스러움이라고는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방위량 선교사가 처음 도착하여 보았던 부산에서의 충격적인 모습은  오랜 시간 배멀미를 하고 도착한 방위량 선교사로하여금 다시 돌아가고픈 마음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100여년 전의 조선의 모습은 외적인 초라함은 둘째치고 나라에 대한 통치권을 서서히 잃어가고있던 꺼져가는 촛불과도 같이 국민들의 마음도 한없이 무너져만 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마치 아프리카 들판에서 먹이 전쟁을 벌이는 야수들 사이에서 벌벌 떠는 사슴과도 같은 연약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미 무장 해제를 당하여 아무 힘이 없었기에 조선 반도에서 벌어진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철수하지 않고 남아 있으려던 사실은 마치 야수가 먹이를 먹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을 알리는 것과 같았다.


2007년 평양대부흥의 밑바탕에는 철수하지 않는 일본군의 통치가 시작 된 것으로 인한 한민족의 상실한 절망감이 마음의 한 가운데 자리를 잡고있었다.


구한 말에 선교사들이 전하였던 복음은 환란과 상실로 인하여 갈아 엎어진 마음의 밭에 뿌려진 씨앗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믿고 의지하였던 중국이 청일전쟁에서 패배함으로 인하여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던 조선은 일제의 압박으로 인하여 구시대의 전통을 벗어버리고 저항과 체면이 상실된 채 선교사들을 통하여 전해지는 복음을 붙들 수밖에 없었다.


국권의 상실이라는 환란은 한편으로 이조 500년의 근간을 이루고있던 인본주의적 성리학을 중심으로한 유교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싸인이었다.


더 나아가 평양을 중심으로 견고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복음은 한국전쟁이라는 소용돌이 가운데서도 전국 각지의 지역 텃세를 넘어서 복음의 씨앗을 뿌림으로서 환란 가운데서 또 다른 형태의 복음의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악은 절대로 정당화되거나 합리화 될 수 없지만 구한 말부터 시작된 환란이라는 악으로 인하여 짧은 시간에 복음이 견고히 자리잡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결코 가볍지 않은 환란은 오랜 시간동안 민족과 국가 내면 깊숙이 자리잡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뿌리 깊은 악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라는 축복의 통로를 여는 수단이 되었다.


현재 우리가 소유한 복음은 수많은 선배들의 피와 고통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이기에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다.


불행하게도 현재의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라는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귀한 보배를 자신들의 이 생에서의 욕심과 맞바꿈으로서 선배들의 피와 고통으로 이룬 결실들을 값없이 내다버리고있지만 하나님이 환란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 이 땅에 복음을 심으셨기에 성도의 몸부림은 지속 되어야만 할 것이다.



(고통에 대하여)


방위량 선교사와 한부선 선교사가 전하는 기독교인들의 순교와 수난은 고통스러웠던 상황들에 대한 기록들이었지만 이러한 고통의 시간들은 영원한 생명을 위한 과정이었기에 이렇게 책으로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이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기에 육체의 고통은 결코 가볍지가 않았으며 육체의 죽음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고통이었지만 순교자들이 보여준 믿음의 모습은 하나같이 영원한 생명이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었음을 증거하고있다.


신사참배에 대한 거부와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로 인한 순교의 고통은 선교사들이 뿌린 씨앗의 결실이었으며 이후에 한국 교회가 맺을 결실들의 원동력이 되었다.


순교자들은 배교로 인한 고통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함으로서 천상의 기쁨이 육체의 고통을 넘어서는 것이었음을 보여주었다.


평양 대부흥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복음은 인간적인 면에서는 결코 기쁘기만한 것은 아니었다.


복음을 받아들였던 이들은 죄의 문제를 직시하여야만 했고 자신의 죄를 직시한 이들은 더욱 비통함에 빠질 수밖에 없다.


평양 대부흥을 겪으면서 부흥에 참여하였던 이들에게는 일제의 압제등  외부의 문제들보다는 자신들의 내면의 죄에 대한 문제가 더욱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


고통은 죄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며 평양 대부흥은 이것을 보여주었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부흥에 참여한 이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의 내면의 죄에 대하여 별로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은 내면의 죄를 외면 할 수 없었고 죄를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의 죄를 알면서도 스스로 죄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위안을 삼는다.


그냥 죄인으로 머무르고자한다면 내면의 죄에 대한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식을 할 필요도 없겠지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의인으로 살기로 작정하였다면 내면의 본질적 죄와 죄의 결과물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평양 대부흥에서 보여준 죄를 회개하는 행위는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었다.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에서 회개를 구원의 선행 조건으로 말하고있는 것과는 달리 평양 대부흥에서 보여주었던 회개의 모습들은 구원받은 자의 열매로서 나오는 행위들이었다,


평양대부흥에서의 죄에 대한 고백과 회개와 비통함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받은 자들에게서 결과적으로 나타난 행위였으며 이는 그들 안에 성령의 내주하심을 증거하는 성령의 열매였던 것이다.


평양 대부흥은 진정으로 고통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물질의 부족함이나 외부의 압력이나 자존감의 상실은 부흥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더 이상 고통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진정으로 고통스러워했던 것은 자신들의 내면의 죄였다.


현재 우리가 흔히 고통스러워 하는 것이 주로 외부의 환경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우리의 영적인 감각이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부흥을 경험한 이들이 고통스러워했던 죄에 대한 인식이 하나님의 복된 선물이었다면 역으로 현재의 우리들의 영적린 무감각은 하나님이 축복을 거두어가신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바울이 사망의 몸이라고 고백한 육체를 가지고있기에 고통에서 자유 할 수 없다.


평양 대부흥은 죄에 대한 고통의 시작이었으며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되는 동안에는 결코 죄에 대한 고통에서 자유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있다.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혹독한 고문과 순교,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희생은 영적인 고통의 확장이었다.


하지만 영적인 고통은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며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내적인 평안으로 완성되어진다.


평양 대부흥에서 죄에 대한 고통에는 신사참배와 공산주의자들의 핍박을 넘어서기 위한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있었다.


죄를 고백하였던 이들은 죄가 드러남으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평안을 경험 할 수 있었다.


개인을 넘어서 구한 말 조선의 국가적 고통도 마찬가지로 조선의 치부를 드러내는 고통의  시간들이었지만 동시에 국가적 부흥의 문이 열리는 시간이었다.


일제의 압제로 인하여 비록 외적으로는 무너짐의 고통이 있었지만 내적으로는 부흥으로 조선을 하나님 앞에 견고하게 서게 하는 시간들이었다.


해방 후에 지속된 공산주의자들의 핍박과 한국전쟁이라는 고통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이 악을 허락하실 수 밖에 없으셨던 이유를 찾아야만 할 것이다.


예루살렘에 대한 핍박으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던 고통이 복음을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듯이 공산주의자들의 핍박과 한국전쟁은 각 지역의 텃세를 무너뜨리고 그리스도인을 전국 각지에 흩어놓음으로서 한반도 전역으로 복음이 고르게 퍼지게된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서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현재의  대한민국의 현실은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의 손길이 거두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할 것이다.


대한민국이 한없이 풍요하다면 중세 로마 카톨릭과 마찬가지로 죄에 대한 무감각과 교회의 부패로 인하여 교회가 쇠락의 길을 걸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부흥의 불길이 꺼지지 않으려면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영원한 생명을 순간의 행복과 바꾸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통에 직면할 때에만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을 것이다,


교회와 성도의 부흥은 죄를 제대로 인식하면서  고통에 직면할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죄에 대하여)


평양대부흥은 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비록 대부흥은 나라를 잃은 서러움이 가득하여 절망에 빠진 심령들을 위로하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었지만 성령의 간섭하심으로 인한 첫 번째 경험은 죄를 직면하는 것이었다.


진정 이들이 고통스러워했던 것은 자신들 안에 자리 잡고있던 죄의 모습들이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 집중되어있었음을 방위량 선교사는 기록하고있다.


국권의 상실과 일제의 압제는 이들의 내면의 죄보다 더 관심사가 되지 못했다.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는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죄에 대한 고백과 회개는 복음이 내면의 세계에 들어왔을 때 일어날 수밖에 없는 내면 세계의 변화에 의한 현상이었다.


이들에게 외부의 불행한 환경은 자신들을 일깨우기 위한 수단으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았다.


평양대부흥의 기간에 어떤 이들은 일본인들을 미워하였던 죄까지도 고백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일본의 압제보다 그들을 미워하였던 죄가 더 크게 다가왔었다.


극도의 절망으로 무너진 마음은 죄에 대한 제대로된 인식의 출발이었지 절망 자체는 아니었다.


이와는 달리 일본인들의 강퍅한 마음은 발전과 팽창으로 인하여 더욱 견고하여져서 죄를 제대로 인식할 수가 없었다.


일본인들은 외부의 침입으로 인해 비통함에 빠져보질 않았기에 그들의 마음은 좀처럼 복음에 대하여 열릴 수도 없었고 더 나아가 죄에 대한 제대로된 인식을 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상한 마음이 없었기에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쉽지가 않았다.


조선의 절망감과 비통함은 복음에 대하여 마음을 열리게 하였으며 이는 죄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졌다.


죄를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복음이 옳바로 전해졌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각자가 진리의 기준인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도 자신들의 기준에 맞추어 해석된다.


이들에게는 결혼보다 동거가 더욱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이들에게는 동성간의 결혼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들에게 전파되는 복음은 죄에 대하여 침묵하거나 죄를 다르게 정의하기도 한다.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더이상 구속주가 아니며 단지 삶의 본을 보여주는 윤리선생에 불과하다.


이들에게 기독교는 문화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평양 대부흥을 경험한 이들은 결코  문화변혁의 주체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포스트모던 신학자들이 말하는 회개는 자신들의 기준에서 바라본 죄에 대한 것이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죄와는 차이가 있다.


이들은 회개를 구원의 조건으로 말하지만 평양 대부흥에서 보여주었던 바와 같이 회개는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하여 나올 수밖에 없는 결과물 중의 한가지였다.


일제나 공산주의하에서 핍박받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는 문화일 수도 없었고 따름의 대상으로서의 예수만으론 부족했다.


순교자들에게 그리스도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구세주였으며 자신들의 죽음과도 바꿀 수 있는 분이셨다.


일제와 공산주의자들은 진정한 죄에 대한 인식이 없었으며 그들은 단지 선을 파괴하는 악마의 하수인이었을 뿐이다.


이들은 마치 예수님의 탄생을 시기하여 어린 아이를 다 죽이고자했던 헤롯왕과도 같이 한반도에 일어난 하나님의 영광의 불길을 끄기 위한 발악을 했을 뿐이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극단적인 어려움이 없이는 죄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해 볼 수가 없다.


구한 말의 극단적인 국가적 어려움은 구원받은 죄인에게 죄를 드러내게한 성결의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을 평양 대부흥의 경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평양 대부흥에 참여하였던 이들이 죄에 대한 제대로 인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복음과 성령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은 헬조선이다.


구한 말의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현재의 어려움은 아직 대한민국을 향한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이 기다리고있음을 나타낸다.


영적인 축복과 부흥은 오직 죄를 깨닫고 죄에 대한 고백과 회개가 따라야만 한다.


죄를 제대로 깨닫기 위해서는 평양대부흥 때의 사경회 못지 않은 성경과 교리에 대한 제대로된 인식이 선행되어야한다.


각 출판사마다 발행하는 교리에 관한 많은 서적들은 한국교회에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고있다.


평양 대부흥에서의 사경회와 같이 교리 공부를 통한 깨달음은 우리가 얼마나 근본적으로 죄악 가운데 놓여있는지를 인식시킬 것이다.


죄에 대한 인식과 회개의 열매가 맺어질 때 진정 한국 교회의 부흥을 경험 할 수 있을 것이다.



(용서하여야만 하는 이유들)


평양대부흥 기간 중의 성도들은 일제의 압박과 국권이 상실된 극단적인 절망감에서도 오직 자신들의 죄의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다.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면서 특히 다른 이들, 혹은 자신에게 해를 끼쳤던 이웃이나 일본인들을 미워하였던 죄를 고백하고서 용서를 구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자신이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해자임을 밝히면서 용서를 구하기도하였다.


부흥을 경험한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죄를 다스리기 위하여 다른 이들을 사용하셨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있었기에 환란과 어려움의 일차적인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인식하였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셨기에 일제의 압박에 때를 맞추어 선교사들을 통하여 복음이 전해졌음을 인식하였다.


이들에게 일제는 악으로 여겨지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조선을 사랑하셔서 일제라는 악을 사용하셔서 조선인들의 완악함을 무너뜨리는 수단일 뿐이었다.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조선이었고 일본은 이차적인 문제였다.


부흥으로 인하여 외부의 상황이 변화된 것은 없었지만 조선의 성도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제대로 직시하고 관심의 초점을 자신들의 문제에만 제한시킬 수 있었다.


평양 대부흥은 정치적 해방이나 문화 변혁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지도 않았다.


변화시켜야 할 대상이 정치적 환경이나 문화적 상황이 아니라 자신들의 복음을 거부한 죄에 대한 것이라는 인식을 제대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관점에서는 예수의 십자가를 로마라는 세상 권세에 대한 정치적 희생으로 보고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의 희생을 본받아 이 땅에 정치적인 하나님 나라의 구축을 바라고있지만 평양 대부흥에서는 이러한 방식의 정치적 문제와 관련된 것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평양 대부흥은 문화변혁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아니라 환란의 일차적 원인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인식하였기에 가해자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복음은 환란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죄와 고난과 사랑에 대한 인식의 변환을 가져왔다.


평양 부흥 기간 중에 일본인들을 용서한다는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이나 자신의 아들을 죽인 청년을 입양할 수 있었던 손양원 목사의 경우들은 용서해야하는 이유를 제대로 알고있었던 경우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제대로 이해하였기에 고난에 참여할 수 있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용서를 제대로 이해하였었기에 용서할 수 있었다.


사랑이 없이는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사랑의 능력으로 용서할 수가 있었다.


인간은 나쁜 짓을 하여서 죄인이기 이전에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본질적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미움은 사랑의 능력을 상실시키고 더 나아가 상대방을 해하는 정죄를 하게된다.


용서는 복음을 전해받은 이들이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게되는 은혜의 열매다.


평양 대부흥과 일제,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용서는 선교사들이 전하여준 복음의 결실들이었다.


한국의 현재의 상황은 사랑이 식어가고 있다.


용서하지 못하고 정죄가 난무하다.


일제의 압제와 한국전쟁이라는 혹독한 환경 가운데서도 성도들의 일차적 목표는 용서와 사랑을 통한 거룩함에의 참여였다.


현재의 대한민국 상황에 대한 일차적인 원인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와 성도가 욕심이 가득했고 선배들이 피값으로 세운 교회를 자신들의 배를 불리우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죄를 범하고있다.


한국교회의 희망은 목회자와 성도가 선배들이 피값으로 세운 교회를 더럽혔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함으로서 용서를 구하면서 동시에 사랑이 없이 서로 정죄하기에 급했던 자신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해야할 것이다.



(부흥에 대하여)


방위량 선교사는 부흥에 관한 사건을 기록하는데 있어서 많은 지면을 부흥 이전의 상황을 기록하는데 할애하고있다.


방위량 선교사가 기록한 부흥의 모습에는 방언이나 치유등 서양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오순절 신비주의의 모습이나 혹은 사회변혁 운동 같은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대부분의 서구의 부흥은 기독교의 오랜 역사 한 가운데서 일어난 사건들이었던 반면 평양 대부흥은 수천년 동안 기독교를 접해보지 못한 민족이 죄의 암흑 속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시점에 있었던 조선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하심이었다.


평양대부흥은 이제 하나님께서 조선에도 함께하신다는 한반도 역사의 커다란 전환점에서의 사건이었다.


평양대부흥은 다가올 혹독한 시련 가운데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견고한 신앙을 심어주기 위한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위로였다.


성령께서는 평양 대부흥을 통하여 거룩함이 죄와 공존 할 수 없음을 보여주셨다.


평양 대부흥에서는  개인의 뿌리 깊은 죄를 드러냄으로서 어떤 이는 살인죄를 고백하고 너무 고통스러워 정신을 잃는 이도 있었지만 죄를 고백하는 고통을 피하고자 불륜을 고백하지 않았던 방위량 선교사의 조사 상씨의 경우는 최악의 상황으로 나빠졌던 것을 보게된다.


부흥을 통하여 성령의 거룩한 옷을 입게된 자들은 이전의 죄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죄와도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됨으로서 일제의 신사참배와 공산주의자들의 핍박 가운데서도 타협하지 않을 수 있었다.


평양 대부흥은 천상의 신비보다는 현실의 상황을 직면함으로서 다가올 험난한 세월들을 현실적 상황으로 직면하게하였던 진정한 의미의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평양 대부흥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2007년에 떠들썩 했던 Again1907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평양 대부흥이 고난을 견디어내기 위한 성령의 간섭하심이라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사람들의 인위적인 욕심에 의한 시도였기 때문이다.


평양대부흥의 주체는 사람이 아닌 성령이셨다.


성령의 역사하심에 사람들은 감당할 수가 없었다.


평양 대부흥에서의 부흥은 부흥사가 부흥을 일으키려는 부흥주의와는 구별된 것이었다.


평양 대부흥은 교회의 확장을 위한 것도 아니었고 대부흥의 결과로 인하여 외부 환경이 나아진 것도 아니고 오직 험난한 시련만이 그들을 기다리고있었다.


평양 대부흥은 일제와 공산주의라는 시련의 과정 가운데서도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외적인 증거였다.


부흥을 경험한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거룩함에 합당한 모습이다.


성령의 간섭하심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비록 외적인 부흥은 1907년이라는 시간에 한정되었지만 일제와 공산주의라는 박해의 과정 가운데 이전의 죄악된 모습을 벗어버리고 미래의 거룩함을 향하여 견고히 서는 시간들이 진정한 의미의 부흥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와 공산주의자들로 인하여 비록 외적으로는 규모가 축소되었을 지라도 이러한 시련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체질을 깨끗하게 할 수 있었던 부흥의 시간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제 36년은 복음이 자리를 잡게 되기까지 이씨 조선의 오랜 아집들을 내려놓게 할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으며 이북의 공산화와 한국전쟁은 각 지역의 텃세를 무너뜨리면서 그리스도를 전국 각지에 전하게 할 수 있었던 시련의 사건들이었다.


구한 말의 환란과 일제의 압제와 한국 전쟁에서의 고통은 수천년 동안 민족 깊숙이 자리 잡고있던 하나님을 거부였던는 죄를 드러내는 시간이었기에 진정한 의미에서 평양대부흥과 마찬가지로 죄를 드러내고 새롭게되는 부흥의 시간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조선을 이처럼 사랑하사”를 읽고난 소감)


천주교는 개신교보다도 약 100년이 앞서서 조선에 전파되었지만 조선의 내적인 견고함으로 인하여 수많은 순교자가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반하여 개신교는 토마스 선교사를 제외하고는 조선으로부터의 박해가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견고한 시기에서의 조선에게 천주교는 거부할 대상이었지만 무너져갔던 조선에서의 개신교는 희망의 대상이었다.


시간적인 적절함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설명할 수가 없다.


수천년 동안 정신적 지주였던 중국의 무너짐과 일제의 압제로 인한 조선의 정신적 공백은 조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간섭하심이었다.


천주교는 비공식적으로 임진왜란을 통하여 조선에 전래된 흔적이 있었고 정약용의 목민심서에서도 기독교 사상이 전래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었지만 성리학과 유교 사상으로 무장한 조선의 배타성 앞에서 기독교 사상을 표현한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하였었다.


일제의 압제는 결코 선하다고 할 수 없었지만 일제에 발목이 잡힌 조선은 더 이상 기독교에 대하여 배타적 태도를 취할 수가 없었다.


조선의 배타성이 제거된 시기에 전파된 선교사들의 복음은 부흥과 핍박을 통하여 한반도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림으로서 세계 역사상 전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성공적인 선교 사례를 보여주고있다.


그렇다고 일본의 역할을 선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은 마치 가룟인 유다의 역할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었다고 가룟 유다의 행동을 선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하나님은 일제라는 악을 조성하신 분이 결코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조선의 악을 깨뜨리시고자 일제라는 악을 허락 하신 것이다.


이제까지의 한국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현재의 국가적 어려움을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를 향한 뜻이 무엇인지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헬조선이라는 용어를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성도들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대부분 다른 이들을 정죄하기에 바쁘다.


페북에서는 정치인이나 재벌들에 대한 성토가 넘쳐난다.


평양대부흥은 국가적 어려움 가운데서도 자신들의 죄를 돌아보는데 집중하였다.


대한민국의 정치인들과 재벌들의 악이 교회를 깨끗하게 하고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악이라면 목회자이건 성도들이건 과연 자신들의 근원적인 죄는 생각하지도 않고 정치인들과  재벌들을 성토하는데 온 힘을 기울일 수가 있을까 생각해 보아야한다.


사회가 변화되기 이전에 교회가 변화되어야하고 그 안의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에서 회개가 일어나야 할 것이다.


나 자신도 수십년 동안 교회문제로 인하여 고통을 겪고 있지만 교회 문제 이전에 나 자신이 사랑이 없는 정죄를 하였음을 고백 할 수밖에 없다.


평양대부흥에서 성도들은 문제의 1차적 원인이 자신들에 있음을 인식하고서 일본 사람들을 미워했던 죄를 고백하고있다.


우리는 현재의 헬조선의 1차적 원인이 자신과 교회에 있음을 망각하고 정치인들과 재벌들, 그리고 일본과 중국을 미워하는 가운데 정죄하고있다.


페북에서 넘쳐나는 정죄들은 자신들이 사랑의 능력이 없는 사람들임을 끊임없이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간음한 여자를 잡아온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에게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셨던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과연 정치인들과 재벌들을 누가 먼저 자신있게 돌로 칠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죄가 드러난 간음한 여자보다도 스스로 죄가 없다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의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보셨고 결국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드러난 정치인들과 재벌들보다도 이들을 끊임없이 정죄하는 목회자와 성도들의 죄를 더욱 심각하게 보고 있으실 것이다.


인간의 죄의 심각성은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 처럼 죄를 짓기 이전에 인간이 본질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을 망각하는 것에 있다.


목회자와 성도는 죄의 현상들을 통하여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한다.


인간에게는 사랑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판단은 사랑이 없는 정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랑이 없는 정죄는 결코 성령의 열매가 될 수 없으며 그 안에서 성령이 역사하시는 부흥도 일어날 수가 없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진정한 부흥을 원한다면 우선 사랑하지 못하고 정죄만하는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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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nho Kim
:
추천도서 2016. 5. 24. 16:54

전가교리에 대한 단상과 신호섭 교수의 “개혁주의 전가교리”



  by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들어가는 말

신호섭 교수의 “개혁주의 전가교리”가 출판되었다는 소식에 눈이 번쩍 뜨였다.

영문으로 출간된 서적 가운데에는 전가(imputation)교리와 관련된 제목을 가진 서적들이 어느 정도 판매되고 있었지만 국내에서 전가교리와 관련된 제목을 가지고 출간된 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은 현재 개혁주의 교리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새관점주의자들이 “전가교리”를 확실하게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가교리는 종교개혁의 심장이었으며 개혁주의를 움직이는 핵심 동력이기에 전가교리가 부정되게 될 경우 개혁주의는 물론 종교개혁 자체가 잘못된 개혁이되며 개신교는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된다.


전가교리에 대한 새관점의 도전이 성공한다면 개혁주의 뿐만이 아니라 개신교를 넘어서 기독교 자체를 유대교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새관점은 제2성전 유대교, 즉 1세기 유대주의에 대한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작업을 통하여 예수와 기독교에 대한 전통적 관점을 해체하고 바울 신학을 언약적 율법주의 구도로 재건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으로 전가교리를 제거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 신호섭 교수의 “개혁주의 전가교리”는 신자에게 새관점을 비롯한 현대신학의  도전에 흔들리지 않고 견고히 설 수 있는 신학적  논리 근거를 제공해 줄 것이다.

신호섭 교수의 “개혁주의 전가교리”를 소개하기에 앞서 종교개혁 이후 전가교리가 어떠한 위치에서 어떠한 논쟁을 거치면서 지금까지 왔는지를 다소 길지만, 특히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특수한 환경들을 중심으로, 개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전가교리의 중요성


전가교리는 성도와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의 근거가된다.


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도의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불의와 함께 하실 수 없으시시에 성도에게 완전한 의를 요구하신다.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을 위해서 성도는 완전한 의의 옷을 입어야한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성도의 의는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불트만 학파의 케제만의 주장을 근거로하고있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인간에게 더 이상 아담의 죄를 묻지 않고 그냥 일방적으로 용서를 선포하신다는 내용이 내포되어있다.


하지만 개혁주의에서 보는 의는 선악과 명령의 요구이며 더 나아가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야지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율법은 선악과 금지명령이 요구하였던 완전한 순종과 더불어 선악과를 범한 죄와 같은 맥락에서의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형벌을 요구하는 것이다.


율법의 두 가지 요구, 즉 완전한 순종과 형벌을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은 없기에 하나님 앞에 의인은 있을 수 없다.


복음은 이러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소식이며, 율법의 두 가지 요구를 그리스도가 대신 이루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을 통한 완전한 순종과 십자가에서의 형벌은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로 선언되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창세 전에 택하시기로 작정된 자들을 위한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는 성도들의 믿음을 통하여 전가됨으로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가교리를 부정하는 것은 의를 이루어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과 성도와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궁극적인 구원 성취를 가로막는 심각한 도전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전가교리가 없이 하나님의 일방적 무죄 선언에 의한 의로움을 근거로 의인이 된다면 성도와 그리스도는 연합의 근거를 찾을 수 없고 삼위 하나님과 성도의 연합은 불가능한 개념이 된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이 하나로 연합 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논리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지만 전가교리는 이 비밀을 밝혀주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거룩이라는 의의 옷을 입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전통적 율법주의 개념에서는 죄인이 율법의 요구를 모두 이행하여야 하는데 이미 아담 안에서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해진 상태에서는 오직 죄를 깨달을 뿐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율법의 요구는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하여 경계표지 (boundary marker)로서 율법을 지켜야 할 것을 요구하지만 이는 율법의 본래의 기능을 무리하게 변형시킨 것이다.


새관점은 보편성과 객관성이 결여된 1세기 유대 자료를 바탕으로 성경 전체를 재해석하려는 무리수를 두고있는 것이다.


2. 칼빈이 말하는 율법의 요구


전가교리는 율법의 요구로부터 시작된다.


율법은 순종을 요구하지만 문제는 인간의 죄성(man’s sinfulness)에 있다.


아담의 죄를 전가받은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그리스도의 도움이 없이는 의로울 수가 없다.


칼빈은 “의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댓가없이 전가시켜 주셔서 거듭나게 하지 않고서는 절망만을 가르쳐 줄 뿐이다”(기독교 강요 2.7.2)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도움이 없이는 율법은 오직 인간에게 절망 만을 안겨다 줄 뿐이다.


그리스도의 사역(ministries of Christ)은 모세의 율법에서부터 찾아 볼 수 있다.


칼빈은 율법에  대한  모세의 경영(administration)은,  순종을 조건으로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행위 원칙에 의하여 운영이 된다고 말한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듯이 영원한 구원이라는 상급은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요구한다는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율법 언약(foedus legale)과 복음 언약(foedus evangelicum)은 대립 관계이면서 동시에 전자는 순종으로, 후자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의 약속으로 까지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The Law is not of Faith: by John Fesko p30)


칼빈이 말하는 율법 언약(foedus legale)과 복음 언약(foedus evangelicum)의 대립 관계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우리에게 전가시켜줌으로서만 해소될 수 있다.


특히 능동적 순종의 전가교리는 새관점을 비롯하여 은혜언약만을 말하는 단일언약을 주장하는 이들이 가장 외면하는 내용 중의 하나다.


새관점주의자들이나 단일언약론자들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막연하게 나마 언급하고 있지만 이들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율법이 요구하는 형벌적인 수동적 순종과는 관계가 없다.


의인이 되기 위해서는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어야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도 전가 받아야만 가능하다.


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말하는 전가교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아담의 죄의 전가(6-3)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11-1)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면서 로마카톨릭의 주입된 의와 구별되는 전가된 의를 말한다.


“(6-3)그들(첫 조상)은 온 인류의 근원이었으므로 이 죄의 허물이 전가 되었으며, 죄 안에서 동일한 죽음과 부패한 성질이 보통 생육법으로 태어나는 그들의 모든 후손에게 전달되었다.”


“(11-1) 하나님은 효과 있게 부르신 사람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게 하셨는데, 이는 그들 안에 의를 주입하심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또 그들의 인격을 의롭다고 인정하며 받아들임으로써이고, 그들 안에 이루어진 어떤 것이나 그들로 말미암아 성취된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다. 또한, 신앙 자체나 믿는 행위나 그 밖에 어떤 복음적인 순종을 그들의 의로 그들에게 전가하심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만족을 그들에게 전가시킴으로써이며, 그들이 신앙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그에게 의지함으로써이다. 그 신앙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다.”

4. Edward Fisher가 말하는 전가교리


새관점주의자들이 전가교리를 부정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청교도 신학자 Edward Fisher는 “The Marrow of Modern Divinity”(p56)에서 타락으로 인한 인류의 죄악과 비극에 관계된 전가교리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Nom.

그렇다면 아담의 죄와 형벌이 그의 모든 후손에게 전가 되었다는 것입니까?

And was Adam's sin and punishment imputed unto his whole offspring?


Evan.

예 그렇습니다, (롬5:12),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들어왔고,이것으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혹은, "그 안에서, 즉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Yea, indeed; for says the apostle, (Rom 5:12), "Death passed upon all men, for that all have sinned"; or, "in whom all have sinned," that is, in Adam.


진실은, 아담이 자신의 타락으로 인하여 우리의 본질 전체를 같은 파멸로 치닫게 했으며, 그의 후손 전체를 같은 비극의 심연으로 몰고 갔으며, 이유인 즉,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하여, 그는 자신만이 홀로 서거나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공적인 사람으로서, 자신으로 말미암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주어진 모든 행복과 모든 재주와 재능들은 그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전체 본질 위에 주어졌으며, 그와 맺은 언약은 모든 인류와 맺은 것이며, 심지어는 언약을 깨뜨림으로서 모든 것을 잃어 버린 것도 자신에게 해당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The very truth is, Adam by his fall threw down our whole nature  headlong into the same destruction, and drowned his whole offspring in the same gulf of misery, and the reason is, because, by God's appointment, he was not to stand or fall as a single person only, but as a common public person, representing all mankind to come of him: therefore, as all that happiness, all those gifts, and endowments, which were bestowed upon him, were not bestowed upon him alone, but also upon the whole nature of man, and as that covenant which was made with him, was made with the whole of mankind; even so he by breaking covenant lost all, as well for us as for himself.


5. 조나단 에드워즈와 전가교리


전가교리에 대한 청교도들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 이후부터 전가교리에 대한 균열의 조짐이 보인다.


비록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D. G. Hart는 “The Law is Not of Faith. Essay on Works and Grace in the Mosaic Covenant”(p74)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Earl A. Pope는 에드워즈가 주장하는 특징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1) 에드워즈는 "아담이 인류를 법적으로 대표한다"라는 생각을 인정하지 않는다(set aside).

에드워즈는 이러한 아담의 대표 개념을 전혀 적절하지 못한 것으로 여기며 뉴잉글랜드 신학에서 이러한 대표성의 원리를 제거해버린다.


2) 에드워즈는 사람이 선천적으로 부패한 존재라는 전제가 없이는 죄의 전가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에드워즈의 이러한 개념은 언약 신학(Federal Theology) 자체를 붕괴시켜 버리는 것이다.


3) 에드워즈의 "인종 간의 신비한 연합 (mystical unity of the  race)" 개념은 언약 신학(Federal Theology)에 대한 중대한 반향(repercussions)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된 행동(sinful act)이 아닌 오직 자신의 행동으로 인하여 저주를 받는다.


4) 각 사람 안에 작용하는 죄의 원리는 아담을 괴롭혔던 죄의 원리와 동일하다.


Earl A. Pope는 에드워즈의 이러한 생각의 방식이 언약 신학(Federal Theology)에 대하여 재앙적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6. 전가교리를 부정하는 신신학(New Divinity)


에드워즈의 후예들에 의하여 형성된 신신학(New Divinity)에서는 전가교리를 부정하는 더 많은 신학적 변형이 일어난다.


드종(Peter Y. De Jong)은 1945년에 출간된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 "뉴잉글랜드 신학에서의 언약의 개념 (The Covenant Idea in New England Theology)"에서 뉴잉글랜드 신학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1) 신신학(New Divinity)로 소개되는 뉴잉글랜드의 신학적 변형(theological modifications)은 너무나 많은 언약적 개념을 내다 버렸다.


2) 에드워즈는 좀 순진하게 인간의 책임을 "자연적이고 도덕적인 능력과 무능력 사이의 구별(distinction between natural and moral ability and inability)"에 기초하여 정립하였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재앙이 되어버린 것이다.


3) 에드워즈는 이러한 구별을 "죄와 거룩은 오직 개인의 행동의 의미에서 생각되어야 한다"는 개념으로 발전시킨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이들, 특히 유아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있다거나 타락해 있다고 여기면 안된다"고 말한다.


4) 뉴잉글랜드 신학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 가운데 하나는 속죄 교리(doctrine of the atonement)다.

칼빈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남을 대신하는 속죄(vicarious atonement)는 의의전가(imputation), 대표성 (representation), 대속(substitution), 법적 충족(legal satisfaction)의 개념들과 서로 얽혀서 신학적 구조물(theological superstructure)의 기초가 되어있다.

그러나 에드워즈 이후에는 강조점이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도덕적 관계(man's moral relation to God)"로 추락해버렸고 "속죄 통치설(the governmental theory of atonement)"에 대한 길을 열어주게 된 것이다.

(“The Law is Not of Faith. Essay on Works and Grace in the Mosaic Covenant. P&R Publishing. 2009”)


7. 도덕 통치설에 대한 비평


D. G. Hart는 칼빈의 “의의 전가” 개념을 희석시키고 "속죄 통치설(the governmental theory of atonement)"에 대한 길을 열어주게 된 도덕 통치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에드워즈를 비판한다:


에드워즈는 순진하게도 인간의 책임을 "자연적이고 도덕적인 능력과 무능력( natural and moral ability and inability)"과 관계하고 있다는 관점을 유지하였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불행한 문제를 가져오게 되었다.


에드워즈는 이를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발전시켰다.  "죄와 거룩은 각자의 행동에 관계된 개념이기에 어린이, 특히 유아의 경우에는 하나님 앞에서 죄가 있다거나 타락했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죄에 대한 관점의 변화는 (에드워즈의 후예들로 구성된) 뉴잉글랜드 신학에서 속죄 교리에 관한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칼빈주의에서는 대속(vicarious atonement)개념은 항상 "의의 전가(imputation)나 상징적 대표 개념(representation), 대리개념(substitution), 법적인 충족개념(legal satisfaction)"과 연계되어있었다.


그러나 에드워즈 이후에는 "하나님과 관계된 인간의 도덕이 강조되고"  이는 "속죄에 관한 통치설(the governmental theory of the atonement)"의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전통적 언약 개념은 법정적 개념과 긴밀한 관계에 있기에 전통적인 관점과 상반된

"속죄에 대한 통치설(the governmental theory of the atonement)"의 개념은 언약에 대한 전통적 개념을 바꿀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에드워드 사람들의 경직된 논리는 언약 신학의 전체 구조를 배제 할 수밖에 없었다.

“The Law is Not of Faith. Essay on Works and Grace in the Mosaic Covenant. p73)


8. 아키발드 알렉산더와 시대적 배경


뉴잉글랜드는 19세기가 들어서면서 에드워즈의 후예들에 의하여 형성된 뉴잉글랜드신학(New England theology, 혹은 New Divinity라고 불리기도함)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스코틀랜드의 도덕 철학의 영향을 받은 칼빈주의자로서의 에드워즈의 후예들은 프린스턴을 중심으로 한 장로교에 심각한 영향을 주게되며 이들의 죄에  대한 관점의 변화는 칼빈주의에서 대속(vicarious atonement)개념을 기초로 하고있는 전가(imputation)교리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갈등은 결국 1837년 미국의 장로교를 새학파 장로교회(new school presbyterian church)와 구학파 장로교회(old school presbyterian church)로 분열 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러한 혼란의 한 가운데에서 1812년에 프린스턴 신학교가 설립되면서 초대 학장으로 임명된 아키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는 1851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40년간에 걸쳐서 장로교인으로서 칼빈주의를 프린스턴의 신학적 특성으로 견고히 자리잡게 한다.


스코틀랜드 도덕 철학 (Schotish moral philosophy)을 바탕으로 한 계몽주의는 대륙은 물론 북미에 까지 기독교 사상 체계에 영향을 미치면서 칼빈주의를 배경으로한 개혁주의에 심각한 도전을 주게된다.


뉴잉글랜드는 에드워즈의 후예들로부터 시작된 스코틀랜드 도덕 철학의 영향으로 프린스턴을 제외한 거의 모든 영역에 절대적 영향을 주었으며 프린스턴 신학도 계몽주의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면서 아키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를 중심으로한 프린스턴 신학이 탄생하게 된다.

알렉산더가 프린스턴의 학장으로 재임하던 기간에 뉴잉글랜드에서는 뉴잉글랜드 신학의 "속죄에 관한 도덕통치론 (moral governmental theory of atonement)"이나 "사심없는 선행 (disinterested benevolence)" 개념들의 절대적 영향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고난"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해석이 칼빈주의의 중심 교리인 "그리스도의 대속"개념을 대체하게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의의전가 (imputation)", 더 나아가서는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의 개념에까지 영향을 주면서 오늘날 논란이 되고 있는 톰 라이트의 “바울에 대한 새관점(New Perspective on Paul)”과 노먼 쉐퍼드의 후예들로부터 시작된 “페더럴 비전(Federal Vision)”의 전가교리에 대한 저항의 토대를 마련해주게 된 것이다.


율법의 요구로서의 그리스도의 순종과 도덕 철학에 기반을 둔 인간의 행위에 대한 갈등의 배경에는

칼빈주의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프린스턴의 초대학장이었던 아키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의 도덕 철학의 입장에 대한 많은 신학자들의 오해가 있었다.


프린스턴의 두번째 학장이었던 찰스핫지의 칼빈주의는 표면적으로는 도덕 철학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 아키발드 알렉산더와 갈등을 빚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는 프린스턴이 칼빈주의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였다고 결론 내림으로서 현대에 들어와서 재조명되기 시작한 "행위 언약의 재연 교리(Republication Doctrine)"에 대하여 제동을 걸기도 했다.


9. 프린스턴 신학의 딜레마와 지혜


이러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1812년에서 1929년까지의  프린스턴신학은 16,17세기의 개혁주의 신학을 이어 받아서 이들이 생각하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반복하여 보여주었다.


하지만 프린스턴 대학의 두 번째 학장이었던 찰스 핫지와 그의 동료들은 효과적으로 개혁 정통주의(Reformed Orthodoxy)를 방어하기 위하여 인간의 이성에 호소력을 갖는 계몽주의 철학과 자연법의 전통에 대한 제대로 된 체계를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수들은 계몽주의의 도덕 철학(Enlightenment moral philosophy)의 영향권  안에서 일을 하였지만 미덕(virtue)에 대한 인간의 능력을 인정한다는 것은 뿌리 깊은 인간의 죄성을 생각할 때  칼빈주의의 가르침에 위배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특히 구원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프린스턴은 당시의 새로운 국가의 문화에 대한 낙관적이고 순진한  생각과는 달리, 홀로 용기를 가지고 개혁주의 관점에서 죄악과 범죄, 의의 전가, 속죄에 대하여 스스로 서야만 했었다.


프린스턴 신학이 생각해낸 해결책은 계몽주의와 개혁주의의 혼합이었다.

즉 개혁주의 언약 신학(Reformed federal theology)에서는 십계명과 모세 언약을 원래의 행위 언약(아담 언약)을 강조하기 위한 행위 원칙의 재연(Republication of a works principle)으로 해석하면서 동시에 대속적 희생을 통한 율법의 요구와 저주를 제거할 수 있는 구속자의 필요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The Law is Not of Faith. Essay on Works and Grace in the Mosaic Covenant. P&R Publishing. 2009”-D. G. Hart의 글을 요약 정리)


이로서 전가교리의 내용이 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개념 모두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나름대로의 프린스턴 신학을 정립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10.  찰스 핫지(Charles Hodge)의 신학방법론


찰스 핫지는 당시의 미국에서 개신교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고있는 요소들 중에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핫지는 성경의 권위에 입각한 "아담의 죄의 전가(the imputation of Adam's sin)"나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와 같은 개혁주의 가르침을 방어하기 위하여 언제나 "무비판적 베이컨주의(uncritical Baconianism)"나 "의식의 표출(the deliverance of consciousness)"이라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핫지가 전가 교리를 보존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개혁주의의 언약 교리(doctrine of the covenant)를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말하는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는 행위 언약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전가 받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는 믿음에 근거한 은혜 언약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본다.


1.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다.

2. 언약에 부가된 약속은 생명이다.

3. 생명의 조건은 완전한 순종이다.

4. 언약에 대한 형벌은 죽음이다.


행위 언약으로서의 언약 교리에 대하여는


1. "공로(works)는 약속이 이행되는 조건"이기에 행위 언약이라고 부른다.

2. "완벽한 순종의 요구(the requirement of perfect obedience)"는 모세경륜(Mosaic economy)에서 뿐만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법에 적용될 수 있는 분명한 원칙이다.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논하는 전체에서도 이러한 가정이 나타난다.

3. 이러한 행위 언약의 내용들은 아직도 모든 인류에게 적용된다.


은혜 언약으로서의 언약 교리에 대하여는


1. 은혜 언약은 행위 언약과 대립 관계에 있다.

2.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은혜 언약의 중재자가 되셨다.

3. 그러므로 은혜 언약의 조건은 (중재자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4. 아담이 실패한 것을 (두번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완전한 순종으로서 실행을 하셨기에 이러한 상태는 공로에 의한 것(meritorious)이다.

5. 은혜 언약은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는 믿음이 공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근거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니고는 구원이 있을 수 없으며 또한 믿음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전가 받을 수 없기에) 구원이 없다."며 전가교리의 당위성을 말한다.

(“The Law is Not of Faith. Essay on Works and Grace in the Mosaic Covenant. p55)


11. 프린스턴 신학에 대한 결론적 평가


하트(D. G. Hart)는 프린스턴 신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면서 칼빈주의에서의 의의전가를 언급하고 있다.


반면 도덕 철학을 채택하고 칼빈주의를 버린 뉴잉글랜드의 신학은  “모세 언약을 보장된 은혜의 언약으로 보아야 한다Mosaic covenant had to be seen as a covenant of guaranteed grace”는 존 머레이의 단일언약론에 근거를 제공하기도 한다.


1) 프린스턴은 뉴잉글랜드의 신학과 달리 행위 언약이나 원죄, 의의전가, 속죄의 개념에 있어서 칼빈주의에 충실하였다.


2) 남장로교회를 제외하고는 뉴잉글랜드 대부분의 장로교회가 칼빈주의의 고독한 길(calvinist austerity)을 외면하고서 미국의 낙관주의(American optimism)로 옮아갔을 때 프린스턴만은 아무 변명이 없이   장로교회의 신앙고백 표준문서에 근거하는 개혁주의 신앙을 고수하였다.


3) 도덕 철학을 신학의 한 과정으로 여길 경우 생길 수 있는 위험한 결과는 프린스턴보다는 뉴잉글랜드 신학에서 나타났다.

이들은 프린스턴의 신학을 열등하다고 여기면서 에드워즈가 원죄(original sin)와 참된 덕(true virtue), 의지의 자유(the freedom of the will), 종교적 감화(religious affection)등을 변론 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던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전반의 도덕 철학을 보호하기 위하여 칼빈주의를 버렸던(abandom calvinism) 것이다.


4) 뉴잉글랜드 신학자들은 프린스턴보다는 철학적이었으나 신학적인 면에서는 프린스턴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1747년 장로교 목회자 배출을 위해 설립된 뉴저지대학에 1756년 조나단 에드워즈가 학장으로 임명되면서부터 식민지 장로교회는 뉴잉글랜드 신학과 조나단 에드워즈의 특색 있는 칼빈주의로 급격한 지적인 변화의 움직임을 보였다.

(“The Law is Not of Faith. Essay on Works and Grace in the Mosaic Covenant. p71)


12. 존 머레이와 페더럴 비전


존 머레이(John Murray)는 모세 언약을 “보장된 은혜의 언약으로 보아야 한다seen as a covenant of guaranteed grace”며 예수님의 능동적 순종의 근거가 되는 율법의 요구를 재해석한다.


그(존 머레이)는 언약의 약속들과 조건들을 규정한 율법이, 아브라함 언약이나 새 언약에서 보았던 바와 같이, 은혜의 맥락 안에서, 순종의 요구와 다를 바 없이 이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Kline on the Works Principle in the Mosaic Economy: An Exposition. Charles Lee Irons Ph.D.)


율법의 은혜의 속성에 대한 존 머레이의 해석은 그의 제자였으며 신학 동료였던 노먼 쉐퍼드(Norman Shepherd)에 의하여 좀 더 확대 발전되면서 율법을 오직 은혜 언약으로만 해석하는 페더럴 비전(Federal Vision)의 기초를 닦아 놓았다.


행위 언약 개념이 제거된 모세 율법에서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의 개념은 설 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개념이 “개혁주의 전가교리”에서의 핵심 주제인데 반하여 페더럴 비전에서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개념을 완전히 제거해 버린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바울에 대한 새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비롯하여, 최근 이단 논란에 휩싸인 페더럴 비젼(Federal Vision) 뿐만이 아니라, 이들의 개념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고있는 신칼빈주의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서도 모세 언약에서 행위 언약의 개념이 사라지는 현상이 나타나고있다.


13. 전가교리를 부정하는 새관점


언약적 구속사의 핵심 교리이며 종교개혁 신앙의 가장 한 가운데 있는 전가 교리에 대한 부정은 개혁 신학의 기둥 자체를 무너뜨리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능동적 순종을 통하여 이루신 의를 믿는 자들에게 전가하신다는 개념을 거부하며, 이런 생각이 “의로운”(righteous)이라는 말이나 “의”(righteousness)라는 말을 잘못 사용한 데서 기인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가된 의를 수용하지 않는 칭의 개념은 근본적 내용에 있어서 개혁주의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라이트는 분명하게 전가 된 의imputed righteousness의 개념을 거부한다.


톰 라이트는 자기의 주장이 개혁주의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지만 라이트의 주장은 개혁주의 관점에서 볼 때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닐 수밖에 없다.


톰 라이트는 개혁주의 역사에서 정립되어온 “죄의 용서”  “의의 전가”  “이신칭의”와 같은  개혁주의의 핵심 교리 대부분을 부정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칭의는 “하나님의가족의 일원이 되었다”라는 판결이며 자신의 행위로  칭의를 완성 시켜야 한다는 과제가 주어진다.


14. 아담의 죄의 전가


인간의 죄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개념을 결정한다.


인간의 죄가 아담에게서 전가된 인간 본질의 죄인지 아니면 인간의 행위에서 비롯된 환경적 결과물의 문제인지에 따라서 죄에 대한 규정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톰 라이트나 스캇 맥나이트와 같은 새관점주의자들은  인간의 죄를 아담 안에서 찾지만 아담으로부터의 전가를 인정하지 않기에 아담으로부터 말미암은 외적인 결과물들에만 연결 시킬 뿐 인간 본질의 문제에 까지는 접근을 하지 않는다.


아담의 죄가 인간 본질에 전가가 된 것이 아니고 다만 외적인 환경의 문제라면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의 역할은 예수님 자신의 의를 인간에게 전가시키는 구속 사역이 아니라 인간의 외부에 있는 환경적 요인을 바꾸는 변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해방신학이나 사회변혁적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담으로부터의 죄의 전가 개념을 외면하거나 부정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아담으로부터 인류에게 전가된 죄의 속성은 인간의 본질 자체를 변화 시킨 것이기에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인간은  누군가의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없이는 탈출이 불가능하다


15. 언약적 율법주의


전가 교리를 수용할 수 없는 새관점의 구조적 형태 밑바탕에는 모세 율법을 은혜 언약으로만 보는 언약적 율법주의(신율주의)가 자리잡고있다.


율법에 대한 정통 개혁주의의 관점에서의 율법이 궁극적으로는 은혜 언약으로 귀결된다 하더라도 율법 자체는 행위 언약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가교리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율법의 요구가 “행위 언약"이어야 하기에 행위 언약의 개념이 배제된 은혜 언약만으로는 전가 시킬 순종이라는 내용을 담아낼 공간이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에 나시고 율법의 요구를 행하신 것은 율법이 순종의 행위를 요구 하는 행위 언약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은 율법의 요구에 대한 것이었고 율법의 요구를 그리스도께서 직접 충족 시키심으로 인하여 이루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주셨다.


율법의 궁극적 목적이 은혜로 인도하는 은혜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율법 자체는 행위를 요구하기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개념을 생각할 수 있다.


언약적 율법주의와 같이 율법 자체를 행위 언약이 배제된 은혜 언약으로만 해석 할 때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생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전가시킬 “그리스도의 의”도 생각할 수가 없다.


우리에게 자신의 의를 전가시키기 위하여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에 나시고 율법의 요구를 다 행하셨다는 개념은 율법에서 행위 언약의 개념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님의 속죄행위는 십자가를 통하여 개인의 죄를 사하신 것이 아니라 유월절 만찬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의 종식을 선언함으로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를 다시 세우심으로 공동체적 의를 이루셨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의 이와 같은 주장은 같은 새관점주의자인 스캇 맥나이트마져도 동의하지 않는 톰 라이트만의 유일한 주장이다.


율법을 언약적 율법주의의 관점으로 해석을 할 경우 예수님은 두 번째 아담으로서 자신의 의를 전가시킬 신자들의 내면의 죄를 해결하신 분이 아니라 단지 이스라엘의 행위적인 죄만을 용서하신 분으로만 해석된다.


이러한 해석은 그리스도의 삼위 하나님으로서의 창세전 구원협약의 관점에서 본다 하더라도 삼위일체 하나님되신 예수님의 위격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는 해석이다.


16.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몸의 지체


삼위 하나님의 창세전 구원 협약에 의한 언약적 구속사의 최종 목표는 신자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지체가 되는 것으로서 하나님 나라 개념만 가지고는 설명 될 수 없는 부분이다.


스캇 맥나이트는 자신의 저서 “하나님 나라 비밀(Kingdom Conspiracy)”에서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동일성을 주장하지만, 그의 언약적 율법주의 구도에서는 율법의 요구로서의 순종의 개념과 전가 개념을 생각할 수 없기에, 전가에 의해서만 한 몸의 지체를 이루는 교회의 개념을 하나님 나라와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맥나이트가 말하는 교회는 신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일원이 된 사람들의 구성으로서 전통적 개념의 교회와는 차이가 있다.


언약적 율법주의 개념에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요구하지 않기에 그리스도가 없이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개념 자체로 존립할 수 있기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 하는 것은 무리가 될 수밖에 없다.


17. 전가의 내용


전가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전가되는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선물을 주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선물의 내용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새관점주의자들도 전가 개념의 선물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내용이 다르다.


톰 라이트는  자신의 저서 “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the Faithfulness of God)”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신다"는 개념의 케제만이 주장했던 하나님의 의를 (신자가 아닌)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게 선물로 주었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 하여 구원에 참여 되었다고 말한다.


개혁주의는 칭의의 근거를 전가교리에서 찾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일원이 되는 것"으로 칭의의 개념을 대신한다.


개혁주의의 칭의 개념은 시작과 동시에 더 이상의 행위가 요구되지 않는 최종적인 것이지만 톰 라이트가 말하는 칭의는 최종적 칭의를 위한 행위가 요구되는 “불완전한 칭의”다.


개혁주의에서의 행위에 대한 요구는 열매의 차원이지 결코 구원의 조건은 아니다.


신호섭 교수의 “개혁주의 전가교리"에서는 전가의 내용, 즉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시내산 언약을 오직 은혜 언약으로만 해석하는 페더럴 비전에서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만 인정하고 능동적 순종을 인정하지 않지만, “개혁주의 전가교리"에서는 특히 능동적 순종의 중요성에 대하여 상당한 부분을 할애하여 설명하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에 나신 것은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심으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의를 전가 시켜주시기 위함이었다.


토마스 브룩스는 율법이 요구하는 이러한 이중적 의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 하나님의 계명이 우리에게 이중적 의무를 요구한다, 그중 하나는 그것이 요구하는 것을 성취해야 하는 능동적 순종이요, 다른 하나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범죄로 말미암아 임한 형벌에 따라 고난을 받아야 하는 수동적 순종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보증이 되셨으며,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를 위해 전체 율법을 완전히 이행하셨다.”(102)



“개혁주의 전가 교리” 요약 정리


신호섭 교수의 “개혁주의 전가 교리는 총 4부로 구성되어있다.


1부 “전가 교리와 그리스도의 순종"에서는 죄인이 의인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서 “죄의 사면”과 “의의 전가” 모두가 전가 되어야만 하며 이를 위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에 대하여 설명 한다.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분명하게 표현되지 않았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 회중교회의 대표적 신앙고백서인 “사보이 선언(savoy Declaration)”을 통하여 분명하게 표현되었던 것을 설명하며,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한 표현은 “침례교 신앙고백서"에서도 분명히 밝히고 있음을 말한다.


전가교리의 위치에 대하여는 이 교리가 “죄인의 생명과 사망"을 좌우하기 때문에 종교개혁시대 이후에 격렬한 논쟁의 대상을 될 수 밖에 없었음을 말한다.


2부 “전가 교리의 역사적 발전"의 1장과 2장은 주로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있다.


루터는 “우리를 의롭다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전가에 대한 하나님의 신적 행위”임을 말하면서 의롭게하는 주체가 우리에게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시는 하나님께 있음을 말한다.


존 칼빈에서는 칭의가 “죄의 사면(remission of sins)”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로 옮겨주시는 전가(the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로 구성되어있음을 말한다.


비록 존 칼빈의 모든 저작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는 언급이나 인용을 찾을 수 없을지 모르지만 칼빈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행하신 죽음의 구속적 사역뿐만이 아니라 생애 가운데 행하신 완전한 순종 역시 우리의 구원에서 본질적으로 중대한 것으로 여겼음을 말하면서 칼빈도 비록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내용면에서는 같은 개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밝힌다.


이외에도 테오도르 베자와 휴 라티머, 토마스 크랜머등에서 볼 수 있는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에 관한 자료들을 정리하였다.


청교도들에 대하여는 주요 청교도들 열한 명의 교리를 상세하게 묘사하고있다.


그 중에 대표적으로 존 오웬을 예로 들면서 그가 이중적 전가(double imputation)의 필요성에 대하여 관심을 집중시키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한다.


2부 3장 “후기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에드워즈와 찰스 스펄전, 존 머레이, 로이드 존스, 쉐퍼등에 대하여 언급을 한다.


특히 로이드 존스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확실히 구분했으며 “칭의와 죄 용서"가 동일하지 않음에 대하여 설명한다.


3부 “역사적 반론과 비평"에서는 칭의와 전가교리를 반대하였던 “로마 카톨릭주의” “알미니안주의” “소시니안주의” “율법폐기론주의” “신율주의"에 대하여 다룬다.


“로마 카톨릭주의"에서는 성화를 칭의의 연속성에 놓는 잘못에 대하여 오웬의 예를 들어 반박하면서 주입되는 의가 아닌 전가되는 의에 대하여 설명한다.


16세기 후반에 출현한 “소시니안주의"는 우리가 받는 칭의의 근거와 이유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그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에 있지 않고 우리의 믿음과 회개와 삶의 개선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그저 선한 일을 행한 모범(example)과 본보기(model) 정도로 왜곡한다.


벌코프는 이러한 소시니안주의의 교리를 “유전적 선함과 인간의 영적 능력이라는 믿음을 동반한 고대 펠라기우스주의의 재출현"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설명한다.


고칼빈주의의 율법폐기론에 반발한 신율주의자인 리처드 백스터에 대하여는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설명한다.


리처드 백스터는 ‘칭의'라는 주제를 포함하여 여러 사안에 대하여 개혁주의 노선을 지향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대속적 죽음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택자들의 죄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죄에 대한 형벌의 값을 지불하셨다고 믿었다. 또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근거와 보증이 된다는 점을 부인했다.


백스터에 따르면,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복음적 의로 말미암는다. 그의 정치적 칭의 사상은 하나님을 통치자로, 복음을 자신의 법전으로 가주해 버렸기에 우리의 구원은 이중적 의를 요구하게 되었다.


백스터가 칭의 교리에 대하여, 그리고 전가된 의를 반대하는 것에 대하여 쓴 글은 부분적으로 웨슬리에 의하여 재판되었으며, 대서양을 사이에 둔 두 대륙에 감리교라는 이름으로 큰 영향을 끼쳤음을 말한다.


4부 “신학적 발전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1,2,3부에서 다룬  다양한 역사적 상황 가운데에서 청교도들의 칭의 교리와 의의 전가교리에 동의하면서 전가교리의 당위성과 삶에의 적용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다.


4부는 총 7개의 장으로 구성되어있다.


1장 “전가의 원인과 필요성”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고 우리 죄가 공의롭게 용서받는 다른 길을 전혀 상상할 수 없다”는 브룩스의 말에서와 같이 우리의 칭의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의 전가가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되었으며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칭의도 없고, 중생도 없고, 죄인은 영원한 멸망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설명하고있다.


2장 “전가의 본질적 내용”에서는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는 청교도들이 보았던 바와 같이 속죄적 고난을 통한 수동적 순종과 율법의 요구에 대한 능동적 순종이며, 전자를 통해서는 율법에 대한 형벌의 값을 지불하시고 죄의 사면을 확보하셨고, 후자를 통해서는 율법의 교훈에 순종하시고서 영원한 생명을 성취하셨는데, 이는 죄인을 의롭다하기 위해서는 완전한 칭의를 가능케하는 능동적 순종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3장 “전가의 결과”에서는 전가가 우리를 아담의 상태로 회복하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를 의미하며, 이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뿐만이 아니라 능동적 순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가 시킨 것은 수동적 순종을 통한 형벌의 면제와 죄의 사면뿐만이 아니라 능동적 순종을 통한 행위 언약의 적극적인 조건들의 성취를 통한 영원한 생명의 소유임을 설명한다.


4장 “전가의 방법”에서는 구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선한 행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이 아닌 도구로서의 “오직 믿음으로”을 통하여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구원 받을 수 있음에 대하여 설명한다.


5장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구속 언약”에서는 전가를 위한 필요 조건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한다.


우리의 보증자와 중보자로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모든 유익들은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실제적으로 우리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6장 “전가의 성취와 적용”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셨어야만 했던 이유들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 모두를 소유하셔야지만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보자직을 감당하실 수 있으셨던 것이다.


두 본성의 연합은 구속 언약 안에 뿌리 내리고있는 그리스도의 사명을 지시하는 것이다.


7장 “전가 교리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중생과 성화, 그리고 확신과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하여 정리를 하였다.


특히 중생에 대하여는 “칭의의 은혜는 중생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하면서 중생은 지성적으로, 정서적으로, 의지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즉시 영향을 미치는 인간 본성을 변화임을 설명하면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중생을 새로운 생명을 생성하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으로 정의하고 있음을 설명한다.



성화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일인 동시에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 가야 할 거룩한 사역임을 설명한다.


신호섭 교수의 나가는 말에서 인용한 메이첸의 임종시에 머레이에게 하였던 “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것이 없었다면 내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을 것입니다"라는 말에 깊이 동감하며 “개혁주의 전가교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신 신호섭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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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도서 2016. 5. 10. 17:54

“칭의, 균형있게 이해하기(박재은, 부흥과 개혁사)”


  by 김원호(dent4834@hanmail.net)



개혁주의에서 보는 성경의 전체적 구도는 “언약적 구속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Salvation)” “구속(Redemption)”을 위한 성경 이야기의 핵심은 “어떻게 죄인이 의인이 될 수 있는가”이다.


“칭의”라는 단어는 구원이라는 그릇에 담겨있는 죄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일 것이다.


하지만 “칭의"라는 단어는 많은 신앙인들을 잘못 인도하고 있다는 오해를 받게 되면서 기독교계에서 끊임없이 퇴출의 위협을 받고 있다.


더군다나 칭의를 담고 있는 구원이라는 주제까지도 기독교를 협소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피하고 싶은 주제로 취급 받는 상황까지 되었다.


칭의와 구원에 관한 주제는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신론 중심의 기독교를 인간 중심의 기독교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원망까지 받고 있다.


톰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새관점주의자인 스캇 맥나이트는 복음 자체를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완성 시키는 예수의 이야기Story of Jesus as the fulfillment of Israel’s Story”로 규정함으로서 그동안 개혁주의가 견지해왔던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원 협약에 근거한 언약적 구속사”로부터의 일탈을 시도한다.


복음에 대한 정의가 바뀌게 되면 예수의 역할도 달라질 수밖에 없으며 우리에게 전가 될 예수의 완전한 순종의 의도 의미가 없어져 버리며 칭의의 근거가 되는 전가교리도 상실될 수밖에 없다.


최근 한동안 출판계를 달구었던 톰 라이트와 존 퍼이퍼의 “칭의 논쟁”은 개혁주의와 새관점이 서로 공존 할 수 없는 서로를 부정하는 논쟁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존 파이퍼는 인간이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선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다고 말하며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의 의를 전가 받아야만 한다고 말하는데 반하여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행위로 인하여 완성되어야 한다며

인간의 공로를 주장한다.


이는 단지 톰 라이트와 존 파이퍼만의 논쟁이 아니라 개혁주의 영역들과 새관점주의 영역들 전반에 걸쳐서 보편화되고있다.


비록 우리나라에는 영향력이 미미하지만 서구 기독교는 “페더럴 비전(Federal Vision)”의 일탈로 인하여 홍역을 치르고 있는 상황이다.


새관점과 유사한 언약적 율법주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페더럴 비전은 카톨릭과 마찬가지로 성례를 칭의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칭의의 조건이 개인적인 믿음의 고백에서 공동체로의 참여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개혁주의의 칭의가 구원론에 속하여 있다면 새관점에서의 칭의는 교회론에 속하여있는 것이다.


새관점에서는 칭의의 근거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을 말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 받는 것을 근거로하는 개혁주의의 주장과 다른 것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the Faithfulness of God)”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약속을 신실하게 이행하심이 근거가 되어 하나님의 언약 백성만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수 있기에 칭의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외적인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인 역사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신약의 하나님 나라 백성은 산상수훈을 지킴으로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종적 칭의는 행함에 의하여 결정되기에 언약 백성에 참여한 것으로 최종적 구원이 보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페더럴 비전과 동일하게 카톨릭의 반펠라기우스 주의로 돌아간 것이다.


이와 같이 칭의에 관한 주제는 종교개혁 이후 지금까지 줄곧 식지 않는 뜨거운 감자였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 가운데 하나는 그의 수도원 생활 가운데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죄에 대한 문제 해결이 결코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극도의 좌절감이 그를 피폐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칭의 교리에 대한 뜨거움도 시간이 지나면 식을 것이라는 생각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알리스터 맥그레스는 자신의 저서 “하나님의 칭의론"에서 칭의 교리는 지난 16세기 이후 서구교회의 균열을 만들고 이 균열을 지속 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말하였듯이 교회 분열의 주범으로 지적되었다.


1997년 "The Gift of Salvation"이란 이름으로 카톨릭과 복음주의가 함께하는 신학자들의 모임(Catholic Evangelical Together; ECT)에서도 칭의 교리는 "불필요하게 분열시키는 논쟁"(Needlessly divisive dispute)으로 폐기되어야 것으로 결론이 났었다.


폴 틸리히등 현대신학자들은 이신칭의의 교리를 공룡의 화석 정도로 여기고 지금은 뜨거운 신학적 쟁점의 대열에서 빠져 버려야 할 것으로 여겼다.


칭의는 예수와 바울이라는 주제를 대립 관계로 몰아가는 주범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불트만은, 칭의는 바울 복음의 제한된 표현 양식이며 바울의 칭의론에서는 윤리가 나올 수 없다며 전통적 칭의론에 심각한 비판을 가했었다. (김세윤, 칭의와 성화 17)


이에 대해 김세윤 교수는, 바울이 예수의 가르침을 전혀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바울의 칭의의 복음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과 일치한다는 불트만의 주장은 대단히 역설적이라고 말한다.(김세윤, 칭의와 성화93)

샌더스 (E. P. Sanders)는 예수와 바울을 대립 관계로 보는 오해는, 개혁주의가 바울이 실제로 반응한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에 믿음에 의한 칭의를 통하여 바울이 말하려는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하는데 실패했다고 보면서 “바울에 대한 새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을 제시한다.


슈바이처에 상당히 공감을 하며 슈바이처의 접근과 비슷한 접근을 하고 있는 톰 라이트(N. T. Wright)는, 슈바이처의 법정적 칭의론에 의한 윤리의 결핍에 대한 비판은 케제만의 관계적  칭의론에 대한 개념이 보충될 때  비로소 해결 될 수 있다며, 케제만의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을 칭의의 근거로 내세운다.(톰 라이트, 예수의 도전 119)

톰 라이트는 바울이 주장한 칭의는 율법주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새관점에서 주장하는 언약적 신율주의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개혁주의는 칭의에 대한 이해의 차이로 인하여 로마 카톨릭과 결별하였지만 최근에 와서는 개신교 안에서도 페더럴 비전을 비롯하여 새관점학파들을 중심으로 로마카톨릭과 같은 반펠라기우스적 칭의론을 주장하려는 움직임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새관점의 대표적 인물인 톰 라이트는


"복음은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선포하는 것이며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가족이 되게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어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이다.

칭의라는 것은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의 커다란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Johnson & Waters, by faith alone 43)고 하면서 칭의를 공동체의 일원의 개념과 일치시킨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 정당성이 입증될 사람, 즉 미래적 칭의를 약속 받은 사람은 그들의 마음과 삶에 하나님의 율법 즉 토라를 새겨 넣은 사람들이다” (Johnson & Waters, by faith alone 49)라고 말하면서 삶과 미래적 칭의를 연관시킨다.


전통적 개혁주의의 바울 이해가 주로 개인의 죄와 관계된 칭의를 주제로 하고 있다면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Krister Stendahl의 바울 이해를 수용하여) 주로 공동체적인 죄를 다루고 있기에 개인 구원보다는 당연히 사회 구원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톰 라이트는 바울의 칭의 교리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서 칭의는 부차적인 것이며, 칭의란 (죄인이 구원 받는다는) 구원론에 속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냐는) 교회론에 속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교회에서의 알곡과 가라지의 구별은 믿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행위에 속하여 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유대주의의 언약에 대한 역사적 이해라는 관점에서 바울이 말하는 칭의를 생각해보면 “칭의란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의 공동체에 들어가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누가 그 공동체에 속하였다고 말할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N. T. Wright, What Saint Paul Really Said? 120)


톰 라이트에게 종말론이란 “메시아 예수”를 통하여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였고, 아브라함 언약이 그 절정에 도달하였기에, 예수를 추종하는 자들은 믿음 안에서 “현재 칭의”를 받고, 성령과 더불어 행함으로써 “미래 칭의”를 확증 하게 된다는 것이다(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133)


칭의에 대한 주제와 관계된 또 하나의 변화된 환경은 아브라함 카이퍼의 화란개혁주의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전의 전통적 개혁주의의 중심된 주제가 그리스도의 구원론이었다면 화란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라는 신론이 중심이 된다.


개혁파 구원론에서의 중심 주제였던 칭의는  신론 중심으로 옮겨가면서 최근에 와서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에서 비롯된 “의"의 개념도,  톰 라이트가 새관점에서 의의 근거로 제시하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케제만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가, 자연스럽게 신론 중심의 화란개혁주의와 접목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것이다.


바빙크는 루터파와 개혁파의 구별에 관하여 당대에 유행하던 입장을 소개한다. 개혁파는 신학적으로 사고하고, 루터파는 인간론적으로 사고 한다고 첫 마디를 시작한다. “개혁파는 역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이념 곧 하나님의 작정에까지 추적한다. 루터파는 구원역사에 만족하고서 하나님의 작정에 침투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개혁파에게는 선택론이 교회의 심장이지만, 루터파에게는 이신칭의가 교회의 생사가 달려있는 조항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영광이 처음과 마지막 관심사이지만, 후자에게는 인간의 구원이다. 전자는 이교사상과 우상 숭배를 대항한 투쟁이지만, 후자는 유대교나 행위에 의한 거룩을 투쟁한다.”고 강변한다.(신칼빈주의 운동,유해무)

칭의의 개념은 성화와의 관계로 인해서도 개념의 변화가 생기기도 한다.


김세윤 교수는 전통적인 구원론에서는 칭의 다음에 성화가 단계적으로 이어지므로 윤리 없는 구원이라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치우친다는 것이다(『칭의와 성화』, p. 81).


이에 대하여 박영돈 교수는 “그것은 통상적인 오해일 뿐, 개혁교회의 구원론에서는 칭의와 성화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칼빈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은혜의 두 면이다. 곧 단일하면서도 이중적인 은혜이다(One grace yet two-fold grace)”라고 비평한다.


박영돈 교수는 “구원의 전 과정에서 칭의와 성화는 긴밀하게 영합하여 병행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칭의와 성화는 영원히 분리될 수 없는 연합으로 엮어져 있기 때문에, 이 둘을 서로 분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찢어버리려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점에서 칭의와 성화가 긴밀히 연결되어있음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우리는 구원 받은 후 칭의에서 바로 성화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칭의의 바탕 위에서 신앙 생활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칭의는 구원의 서정에서의 중심이며 이는 전적으로 행위와 상관없으며, 즉 믿음 이전과 이후의 모든 행위와 상관없다.( 바빙크 개혁교의학 4; 219)


칭의는 창세 전에 삼위 하나님의 구원 협약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택자의 행동과 무관하게 선택 받은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칭의는 개혁주의의 중심교리들인 “오직 은혜”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  “의의전가”등은 물론 성화와 관계성의 혼동으로 인한 “현재적 칭의” “미래적 칭의” “유보적 칭의”등의 많은 용어들이 생겨나고 있다.


“죽산 박형룡은 ‘성화를 칭의와 나눌 수 없이 연결되고 둘이 결코 분리되지 않지만 반드시 구별돼야 하며, 성화를 칭의와 혼동하는 것은 성경을 생각 없이 읽는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과오’라는 칼빈의 입장을 취했다”

김균진의 뿌리가 되는 바르트 신학에 대해 그는 “외형적으로 칼빈의 성화론과 유사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며 “바르트는 칭의와 성화를 하나로 본 것이며, 칭의 속에서 성화를 보고 성화 속에서 칭의를 보고 있어 사실상 둘을 구별할 수 없다”고 밝혔다.(복음주의조직신학회, 제30차 정기논문발표회-조봉근 박사)


이상과 같이 “칭의(Justification)”라는 주제는 개혁주의 신학의 가장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지난 500년 동안 가장 많은 도전을 받아왔고 지금도 여전히 식지 않는 뜨거운 감자인 것이다.


그렇다고 기독교에서 “칭의"라는 주제를 배제한다거나 아니면 새관점과 같이 칭의의 개념 자체를 바꾼다고해서 서로 화합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분열의 양상만 짙어질 뿐이다.


가장 올바른 해결책이라면 “칭의"의 성경적 개념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식하는 가운데 그동안 논의되어왔던 “칭의"에 대한 여러가지 개념들이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아보는 가운데 “칭의"에 대한 제대로 된 개념을 신앙의 기반으로 삼을 때 개혁주의 신앙에 더욱 견고히 설 수 있게 될 것이다.


부흥과 개혁사에서 출간된 박재은 박사의 “칭의, 균형있게 이해하기"는 이러한 혼란을 잠재우기라도 하듯 결코 길지 않은 글로서 깔끔하고 간결하게 정리를 해 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책 전체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박재은 박사의 “칭의, 균형있게 이해하기"는 총 3장으로 구성되어있다.



1장에서는 주로 과거의 대표적 논쟁들을 정리하였으며 상황적 접근보다는 원론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첫 번째로는 칭의에 행위적인 요소가 가미됨으로 인해서 인간의 역할이 강조되고 하나님의 주권이 약화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로는 이러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것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대신에 인간의 역할을 약화시킨 반율법주의 칭의론을 다루고있다.


칭의에 있어서 인간이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으며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완전한 형태의 “무상" 선물을 강조하는 무상칭의론자들의 반율법주의 칭의론으로서, 특히 존 이튼(John Eaton)의 반율법주의를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바울에 대한 새관점"과 유사한 성격의 신율법주의(neonomism) 칭의론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율법의 성격에 준하는 “새로운 법"으로 보는 것이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를 예로 들고 있다.


네 번째로는 존 브라인(John Brine)을 예로 들면서 18세기에 영국에서 유행한 반율법주의와 신학적 맥을 같이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대신에 인간의 역할을 약화시킨 하이퍼 칼빈주의의 칭의론의 핵심 사상들에 대하여 설명한다.



마지막으로는 영원으로부터의 칭의를 다루면서 게할더스 보스나 아브라함 카이퍼의 경우와 반율법주의자들이나 타락 전 예정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받는 오해들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의 불균형을 초래한 “죄인을 의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영원 작정"과 “칭의 자체"에 대한 혼동에 대하여 설명한다.


2장의 제목은 “현대의 균형 잃은 칭의론"이다.


첫 번째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두 기둥에 대한 이해다.

존 스토트과 에버렛 헤리슨 사이의 논쟁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칭의와 성화라는 관점에서 풀어나간다.


이와 함께 개혁주의권에서 지지를 받는 “순종과 헌신이라는 믿음의 열매를 맺는 주재권 구원”과 세대주의권에서 지지를 받는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되고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을 믿는 무상 은혜”의 차이에 대하여 설명하며 주제권 구원이 행위 구원론으로 오해 받아서는 안되는 점들을 설명한다.


이는 최근 논쟁이 되고 있는 김세윤 교수의 “칭의와 성화”와 “유보적 칭의론”이 어떠한 점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부분이다.


두 번째로는 신율법주의와 유사하며 또한 새관점과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페더럴 비전의 칭의론에 대하여 설명한다.


믿음과 행위를 칭의의 조건이나 근거로 삼는 페더럴 비전에 대하여는 1) 언약에 대한 이해  2)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한 거부  3) 믿음과 순종에 대한 관계를 중심으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세 번째로는 현재 바울 신학에 관하여 뜨거운 감자라고 할 수 있는 “바울에 대한 새관점”에 관하여 논하고 있다.


“바울에 대한 새관점”을 다루고 있는 이 부분은 이 책의 가장 뜨거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곳에서는 언약적 신율주의, 율법의 행위, 이신칭의, 그리스도의 의의전가, 미래 칭의와 삶의 방식등으로 지면의 열기를 가득하게 채워 넣고 있다.


3장에서는 첫 번째로 1장과 2장에서의 논란을 잠재우기 위하여 원론적으로 고려해보아야 할 능동적/수동적 칭의를 관점의 차이, 믿음의 위치, 논리적 우선순위라는 3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 있다,



두 번째로는 헤르만 바빙크가 능동적/수동적 칭의를 어떠한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세 번째로는 네덜란드 개혁신학자 헤르만 비치우스의 칭의론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그가 능동적/수동적 칭의에 대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절충을 하면서 지혜롭게 풀어 나아가고 있는지 보여줌으로서 모든 논쟁을 잠재우는 비치우스의 지혜를 이 책의  결론적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 책의 칭의의 다양한 상황에 대한 설명들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칭의에 대한 생각의 위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주며 개혁주의 칭의 교리가 어떤 의미에서 중요한 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이제 우리에게는 “칭의에 대한 개념이 다른 교회를 같은 교회 공동체로 인정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주어진다.


제임스 패커는 전 생애에 걸쳐 개신교와 카톨릭과의 연합을 주도하고 대화를 시도해보았지만 결과적으로 열매 맺은 것은 거의 없었다.


카톨릭과 개신교가 타협할 수 없었던 교리의 한 가운데에는 “칭의” 교리가 있었다.


새관점과 유사하게 아르미니우스적인 구원론을 가지고 있는 페더럴 비전의 이단성을 염려하는 한 가운데에도 마찬가지로 “칭의" 교리가 있다.


현재 톰 라이트의 “바울에 대한 새관점"과 페더럴 비전은 성례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있지만 언약적 율법주의 구도에서는 거의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번 책에서 보여준 칭의에 대한 커다란 시작 차이에도 불구하고 페더럴 비전과는 달리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별로 이단성의 논쟁이 없이 자연스럽게 개혁주의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상황에서 칭의에 대한 좀 더 올바른 이해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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