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호튼이 말하는 바울과 언약적 율법주의

  by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의역 주관적 편집) 바울에 관한 새관점을 논하면서 E.P.Sanders는 바울 시대의 유대주의는 그동안 전통적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바와같이 "꼭 지켜야 의롭게 된다는 율법주의"가 아니라 "언약적 율법주의"라고 말한다.
전통적 개혁주의가 말하는 율법주의는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단순히 지키기만 하면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언약적 율법주의"에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의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상태로 있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즉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으면 이미 의로운 상태이므로 따로 의롭게 되기 위하여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의롭게 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고 이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다.
그 다음은 순종의 문제로서 토라나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지킴으로서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새관점이 말하는 언약적 율법주의에서 유대인이 율법을 지키는 목적이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샌더스는 만약 바울이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는다는 개념에 대하여 말하였다면 이는 (바울이)유대주의를 잘못 선택한 것이라고 말한다.
제임스 던이나 톰 라이트같은 새관점 신학자들은 샌더스가 1세기 유대주의를 (의를 얻기 위한)율법주의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에 옳다고 동의하면서 더 나아가 전통적 개혁주의에서보는 바울에 대한 해석에 반하여 바울(이 말하는 유대주의)을 "언약적 율법주의"와 일치 시키는 작업을 시도하고있다.
언약적 율법주의에서는 보통 유대인이 죄를 범한다 하더라도 회개를 하거나 율법에 새롭게 복종함으로서 언약 안에 남아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언약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요구를 모두 지켜야만 되는 것이 아니고 자유롭게 순종하면 된다는 것이다.
언약적 율법주의가 은혜의 종교라고 샌더스나 그 밖의 새관점 신학자들이 말하는 이유는 율법이 범죄를 허용하고 완벽한 복종을 요구하지 않아서라는 것이다.(개혁주의에서는 율법을 완전히 지킬것을 말하기에 이와 대조로 은혜를 적용한다.)
우리는 샌더스가 주장하는1세기의 유대주의가 개혁주의들이 부정하고있는 중세 신학과 얼마나 다른지 명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확신한 것은 바울시대의 유대주의는 단순히 스스로의 힘에 의지하는 펠라기우스주의는 아니다.또한 후기 중세의 로마카톨릭의 가르침도 그렇게 액면 그대로의 펠라기우스주의는 아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 아무리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초기 유대주의와 후기 중세와는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에 대하여 비슷한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즉 하나님의 자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우리의 순종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샌더스의 요약 즉 초기 유대주의는 "은혜 안에 들어가서 순종으로 머문다"는 것이고 이는 " 우선 세례를 통하여 의롭게 되지만 은혜가 증가하여 최종적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인간의 협력에 달려있다"는 중세 카톨릭의 관점과 평행을 이룬 닮은 꼴 이라는 것이다.
"아무도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명확하고 단순한 명제가 중세의 틀 안에서 보았을 때는 개혁주의자들이 잘못 알고 있는 논증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는 그 자체가 장점이 될 수가 없기에 인간은 항상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에 부족한 것이다.
후기 중세 신학자들은 말하기를 "아직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셔서 믿는 자들이 덕스러운 자세로 행하였을 때 이를 받아주신다고 약속하셨다"는 것이다. 이들은 엄격한 시나이 율법을 유하게 만들고서 이를 "복음"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중세 신학자들은 행함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있는데 하나는 인간이 타락함으로 인하여 아무도 얻을 수 없는 엄격한 공로( strict merit)와 다른 하나는 구원을 얻기에 유용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선한 일에 해당되는 인정해주는 공로(proposionate merit)로 둘로 나누었다.
이를 쉬운 말로 표현하면 "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자에게는 은혜를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선을 다한다면 하나님께서 이를 구원의 근거로 인정을 하여주신다는 것이다.
이는 "은혜로 들어가서 순종으로 머문다"는 개념이고 이것이 바로 종교 개혁자들이 성경을 근거로 하여 공격한 구원 개념이다.
갈라디아서는 이러한 반발의 풍부한 근거가 되고있다.
바울의 서신들, 특히 갈라디아서에서는 샌더스와 "바울에 관한 새관점"이 근본적으로 "언약적 율법주의" 개념으로 1세기 유대주의를 보고 있다면 이러한 말이 옳을 수있다고 말한다.
설령 1세기 유대주의가 완전한 율법주의가 아니라 " 언약적 율법주의"가 보편적인 개념이라고 하더라도 다음 구절은 바울이 갈라디아 이단들에게 반대하고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갈라디아서 3:1-4 )
이러한 혼동은 실제로 개혁주의자들도 직면하고있는 문제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유산을 받는데 있어서 교회 역사를 통하여 성경이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는 율법과 복음, 충성과 믿음을 혼동할 때 나타나게 된다.


(참조출처)
Paul and Covenantal Nomism
Michael S. Horton

In advancing what has come to be called "the new perspective on Paul," E. P. Sanders argues strenuously that the Judaism in Paul's day was not "legalistic," as traditional Protestant readings maintain, but that it was characterized by "covenantal nomism." Legalism claims that we can become righteous simply by choosing to obey God's commandments. Covenantal nomism holds, in contrast, that righteousness is a matter of being part of God's covenant people, which is initially a matter of grace-"getting in" to God's covenant is a matter of God's "electing" or choosing-but then becomes a matter of obedience-"staying in" God's covenant requires obeying the stipulations that come with it, which make Torah, God's law. Sanders concludes that if Paul was in fact reacting against legalistic works-righteousness, then he was wrong to take Judaism as his target. Other "new perspective" theologians, such as James D. G. Dunn and N. T. Wright, think Sanders is right about first-century Judaism not being legalistic, but they then attempt in varying degrees to reconcile Paul with "covenantal nomism" against the classic "Reformation" reading of Paul.
Covenantal nomism also holds that the average Jewish person may sin and yet remain in the covenant through repentance, renewed obedience to the law, and (according to some major rabbinical sources) the "merit of the fathers"-the faithful deeds of the patriarchs. The condition for remaining in the covenant is not, then, successfully fulfilling all of God's commandments-it is not legalistic perfectionism-but freely intending to obey them. The fact that covenantal nomism provides for transgressions and does not require perfect obedience means, for Sanders and others, that it was after all a religion of grace.
It is unclear how such "covenantal nomism" is significantly different from the medieval system that the reformers rejected, even if we grant many of Sanders's points about first-century Judaism. To be sure, the Judaism of Paul's day was not simply pull-yourself-up-by-your-own-bootstraps Pelagianism; and it has been a travesty of Protestant interpretation to suggest as much. Yet late medieval Roman Catholic teaching was not such a raw Pelagianism, either.
However great the differences between them, early Judaism and late medievalism shared a similar hunch about how salvation works: God's mercy is not absent, but it is conditioned upon our obedience. Sanders's summary of early Judaism as "getting in by grace, staying in by obedience" parallels the medieval view that "first justification" through baptism is by grace alone while increase in grace and final justification depends on human cooperation. No one can be "saved by works," plain and simple, according to the medieval scheme of things, contrary to the popular but ill-informed polemics of many Protestants. For human works are never truly meritorious in and of themselves, and thus they are always insufficient to gain God's favor. Yet God has provided a covenant, say the later medieval theologians, in which he promises to accept as meritorious the believer's virtuous attitudes and actions. This softening of the strictness of the law at Sinai ("Do this and you shall live") is called "good news."
These medieval theologians developed a distinction between merit de condigno (strict merit), which no human being can attain after the fall, and merit de congruo (proportionate merit), which involves good works that God accepts as if they merit salvation. The common saying was this: "God will not deny his grace to those who do what lies within them." So while my works cannot earn salvation in the strictest sense, God will accept them as meritorious if, after all, I do my best. This is "getting in by grace, staying in by obedience;" and as such, it was precisely the view of salvation that the reformers attacked on biblical grounds. Galatians was a gold mine for such resistance.
Paul's letters-and specifically Galatians-show that Sanders and the "new perspective on Paul" are basically right in their identification of first-century Judaism as "covenantal nomism." But even if we grant that covenantal nomism rather than perfectionistic legalism was the broad consensus formula for first-century Judaism, it is precisely this that Paul opposes as the Galatian heresy: "O foolish Galatians! . . . Let me ask you only this: Did you receive the Spirit by works of the law or by the hearing with faith? Are you so foolish? Having begun by the Spirit, are you now being perfected by the flesh?" (Gal. 3:1-4). This confusion is substantially the same as the one the Protestant reformers faced. It crops up throughout church history whenever Scripture's clear distinctions between law and gospel, faithfulness and faith, get confused concerning the way we receive the inheritance promised to Abraham.


1 [ Back ] Michael Horton's citation of E. P. Sanders comes from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7). For more recent exploration along these lines, but with some variations, see also James D. G. Dunn, Jesus, Paul and the Law: Studies in Mark and Galatians (Louisville, KY: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0); N. T. Wright, The Climax of the Covenant: Christ and the Law in Pauline Theology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2); and What St. Paul Really Said (Grand Rapids: Eerdmans, 1997). The literature of the new perspective is vast and still growing.


posted by Wonho Kim
:
새관점에서 보는 율법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는가?

  by 김원호(dent4834@hanmail.net)

톰 라이트가 말하는 (바울에 관한)새관점에서는 율법 안에 은혜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새관점에서는 율법을 은혜가 있는 약속의 언약으로 보고 있다.
만약에 율법이 완전한 순종을 요구한다면 율법에 은혜나 약속의 개념을 적용할 수 없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언약적 율법주의는 (The idea is that Second Temple Judaism was gracious and forgiving, not legalistic and harsh.) 율법 안에 은혜가 있고 그 안에 용서가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 개혁주의와 달리 율법을 은혜의 성격으로 보는 것은 새관점이 말하는 언약적 율법주의의 틀을 유지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전통적 개혁주의가 보는 바와같이 율법에 절대적이고 완벽한 행위적 요구가 있다면 이를 행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의를 전가받아야만 하는데 의의전가 개념을 부정하는 새관점에서는 어쩔 수없이 율법을 은혜적으로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새관점에서 보는 율법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관점에서는 율법이 은혜 언약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완전한 순종의 개념을 완화 시켜서 율법을 자의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융통성 있는 법으로 격하시킨다.

(Failing to observe the law would place one outside of the covenant. If that person repented and went back to observing the law, God would be gracious and merciful and receive that person back into the covenant. The idea is that Second Temple Judaism was gracious and forgiving, not legalistic and harsh.POSTED BY
D.A. BOATMAN
POSTED on
JANUARY 18, 2012


posted by Wonho Kim
:
율법의 역할에 대한 해석에 따라서 성경 전체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있다.

  by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바울에 관한 새관점(New Perspective on Paul:NPP)”은 바울이 서신서들을 통하여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으려고 한다는)율법주의 개념으로 유대인들을 책망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는 전통적 해석을 거부하고 유대인들은 이미 아브라함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케제만이 말하는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시다는 하나님의 의)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단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의로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주장한다.


톰 라이트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New Perspective on Paul:NPP)을 주장하는 제임스 던의 바울 해석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다음은 톰 라이트가 자신의 저서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에서 다음과 같이 율법과 유대주의에 대하여 전통 개혁주의와 다른 관점 즉 "바울에 관한 새관점(New Perspective on Paul:NPP)을 말하고있다.



1) 바울 시대의 유대주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율법적 행위로 의롭게되려고 하는 종교가 아니다.
만약 우리가 (전통적 개혁주의의 해석과 같이) 율법주의로서 율법을 해석한다면-그리고 바울이 율법주의 개념으로서 유대인을 책망하고있다고 생각하게되면 - 우리는 율법과 바울에 대하여 (잘못된 개념으로) 반항적으로 도전하는 것이 된다.


2) 대부분의 (정통 개혁주의) 개신교 신자들은 바울이 말하는 유대주의를 마치 유대주의가 오랜 이단적 펠라기우스주의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도적적 행위로 인하여 의롭게되고 구원을 얻으려 한다고 해석하고 있다고 톰 라이트는 주장한다.


3) 샌더스는 “유대주의 안에서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려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이라는) 언약적 그림 안에서 행하여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4) 하나님께서는 이미 유대주의와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시작하셨기에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들 특히 유대인들이 (율법적 행위로) 반응하는 모든 것을 앞선다.


5) 따라서 유대인들은 (정통 개혁주의가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감사하는 뜻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여 구원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은혜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언약 백성이 되고자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언약 안에 머무르고자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처음부터 언약 안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Judaism in Paul’s day was not, as has regularly been supposed, a religion of legalistic works-righteousness. If we imagine that it was, and that Paul was attacking it as if it was, we will do great violence to it and to him. Most Protestant exegetes had read Paul and Judaism as if Judaism was a form of the old heresy Pelagianism, according to which humans must pull themselves up by their moral bootstraps and thereby earn justification, righteousness, and salvation. No, said Sanders. Keeping the law within Judaism always functioned within a covenantal scheme. God took the initiative, when he made a covenant with Judaism; God’s grace thus precedes everything that people (specifically, Jews) do in response. The Jew keeps the law out of gratitude, as the proper response to grace—not, in other words, in order to get into the covenant people, but to stay in. Being ‘in’ in the first place was God’s gift.


- N. T. Wright, What Saint Paul Really Said: Was Paul of Tarsus the Real Founder of Christianity? (Grand Rapids: Eerdmans, 1997), p. 19;


바울이 서신서들, 특히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유대인들에게 대하여 책망하였던 내용이 톰 라이트의 주장처럼 행위를 통하여 의를 얻고자 하는 펠라기우스적 유대인에 대한 책망이 아니었다면 전통적 개혁주의는 물론 종교 개혁을 통하여 형성된 개신교는 이제껏 모두 루터의 잘못된(?) 성경 해석을 근거로 한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된다.
톰 라이트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말처럼 “우리가 이제껏 복음을 잘못 이해하였다"라고 주장하는 톰 라이트가 맞다면 (절대로 맞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맞다고 가정해보면) 개혁주의는 다음가 같은 몇 가지 교리의 변화를 수반하여야만 할 것이다.


1)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속죄의 의미가 아닌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십자가의 보혈에 의한 속죄의 개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세상 권세를 대표하는 로마에 대하여 어떻게 행하시는지 본을 보여주심으로서 즉 정치적 희생을 당하심으로서 앞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 대하여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할 지를 예수님께서 손수 본을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 정부에 대항하여 희생되셨던 예수님을 성부 하나님이 받아주시고 부활시켜주셔서 성부 하나님이 이 세상에 대하여 승리를 선포하셨다는 것이다.


복음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승리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었으므로 이제 (십자가의 보혈로 속죄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본받으면 살아가야할지를 전하는 것으로 내용이 바뀌게되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위치는 더 이상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따름의 대상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보혈 즉 피흘림의 속죄개념이 아니라 단지 희생의 개념으로 바뀐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인류에 들어온 아담의 죄는 하나님의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통하여 이미 정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담의 죄가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통하여 정리가 되었으므로 이 땅에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셨을 때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의로운 상태에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이미 임하셨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상태가 맞다면 이러한 상황은 더 이상의 속죄를 요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된다.
3)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의 중심은 십자가보다는 유월절 만찬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
톰 라이트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것은 이스라엘이 순종치 못함으로 인해서 실제적으로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데 (톰 라이트는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이 실질적으로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포로생활을 청산시키고자 오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포로생활의 청산은 바로 유월절 식사를 통하여 유월절을 기념하며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살이를 청산하였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이와 같이 실질적으로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고있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선포하셨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공생애 사역이 바로 유월절 만찬을 통한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의 청산이라고 말하고있다.


4) 구원의 대상이 달라진다.


새관점의 근거는 아브라함 언약이다.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된다는 전재 아래서 구원이 대상이 모든 사람들, 더 나아가 모든 피조계의 회복을 의미하게된다.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창세전에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서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께 보낸 자들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작정의 대상에 한하여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에서는 그리스도의 정치적 희생으로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로 선포되었기에 이 세상에는 하나님 나라 바깥에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되는 것이다.(Universalism-만인구원론)
이는 이머징 처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내용과 일치되며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이머징 처치의 하나님 나라 개념의 기초가 되고있다.


5) 교회론이 달라진다.


전통적 개혁주의에서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죄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이 모인 회중적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와 연계시키고있다.
하지만 톰 라이트가 말하는 교회는 개인을 대상으로하는 회중적 교회가 아니라 모든 만물을 대상으로하는 우주적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이 땅에는 하나님 나라 바깥에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주장하는 이머징 처치의 이론과 같이 결국 모든 이들이 하나님 나라 안에 있기에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개념에서는 회중적 교회가 아닌 이머징 미셔널 처치에서 주장하는 우주적 교회론을 기초로하게되는 것이다.


6) 지옥의 개념이 없다.


모든 이들이 신앙고백과는 관계없이 하나님 나라 안에 있다는 새관점의 개념에서는 지옥은 실제하는 곳이 아니라 상징적 의미로 전락된다.
이머징 처치 운동을 하는 랍벨이 자신의 저서 “Love Wins”를 통하여 지옥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톰 라이트와 같은 개념을 가지고 있다.
톰 라이트는 오히려 카톨릭의 연옥의 개념을 부활시키고있다.


7) 믿음의 성격이 달라진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복음은 예수님께서 정치적 희생(?)으로 죽으셨는데 이를 부활시키심으로
이 땅의 권세를 하나님께서 자신의 발 아래 굴복 시킴으로 하나님께서 이 땅의 왕이 되셨다는 것이다.
새관점의 믿음은 예수님의 정치적 희생을 통하여 왕이 되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선포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의 고백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과는 상관없는 것이 된다.


8) 세대주의적 발상이다.


전통적 개혁주의에서는 (역사적)이스라엘은 영적 이스라엘 즉 교회로 귀결되어야한다.
역사적 이스라엘은 실체가 되는 교회의 그림자인 것이다.
하지만 새관점의 해석대로라면 교회는 이스라엘 유대 공동체의 새로운 버전에 불과하다.
결국 유대 공동체가 교회의 원형이 되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칭의의 속성에 관한 칼빈과 톰 라이트의 해석의 차이점1)

  by 김원호(dent4834@hanmail.net)
 
1. 톰 라이트
 
1) 톰 라이트가 말하고 있는 칭의는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일원이 되는 것으로 시작되며 칭의의 완성은 궁극적으로 완성될 완전한 극치의 날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김을 받는다는 종말론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2)
 
2) 톰 라이트는 1세기 유대 사회에서 생각하고 있던 칭의의 개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정의에 의하여 미래와 현재에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3)
 
3) 톰 라이트의 칭의에 대한 정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 안에 속하여 있느냐의 자격에 관한 것으로서 이는 종말론적인 관점에서4)규정하고 있는 것이다.5)
 
4) 톰 라이트가 말하는 칭의는 성경 교리의 다른 중심축과 연계되어있지 않다.
 
5) 톰 라이트는 칭의를 개인 차원의 주제가 아닌 공동체적인 성격에서 규정하고 있다.
 
2. 칼빈
 
1) 칼빈이 말하는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실제로 믿는 자에게 전가됨으로 인하여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6)
 
2) (톰 라이트 못지않게 1세기 유대자료를 많이 연구하였던) 칼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이라고 좋게 받으시는 수단으로서의 칭의를 말한다. 이러한 칭의는 죄를 사해주시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는 것으로 구성되어있다고 말한다.7)
 
 
 
 
3) 칼빈은 의가 필요한 죄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이는 구원론에 관한 것이다.8)
 
4) 칼빈이 말하는 칭의는 성경의 다른 주제의 중심 축과 서로 연계되어있다.
칼빈은 구원론과 거듭남, 믿음, 죄, 회개, 그리고 성화등을 칭의와 연계시키고있다.9)
 
5) 칼빈은 톰 라이트와 달리 개인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에 대한 강조가 공동체를 희생하면서까지 지나치게 강조되지는 않는다.10)
 
3. 종합적인 소견
 
1) 톰 라이트는 언약을 근거로 한 칭의의 개념을 말하고 있다.
 
 칭의의 개념은 하나님의 의의 개념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어있기에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면 그가 말하는 칭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분”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한다.톰 라이트가 하나님의 의를 언약을 중심으로 정의하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의도 언약을 중심으로 정의될 수밖에 없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과 인간의 공통분모가 되는 “의(Righteousness)"를 언약의 개념을 기초로 정립하고 있기에 의롭다고 인정되는 개념인 "칭의(Justification)"는 언약을 떠나서는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11)
 톰 라이트가 의로운 상태라고 말하는 언약 백성으로 있기 위한 조건은 믿음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지 않아도 되고 다만 백성의 일원으로서 율법을 지킴으로서 백성의 상태를 유지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또한 혹시라도 율법을 어기게 되면 율법 안에 은혜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회개를 하고다시 율법을 지키면 언약 백성 안에 있게 되고 이러한 상태가 최종적으로 유지 될 때 종말론적 칭의가 주어지는 것이다.12)
 
 칼빈이 말하는 칭의는 의의 전가와 더불어 더 이상의 요구 조건이 필요 없는13)완성된 상태14)인데 반하여 톰 라이트가 말하는 칭의는 완성의 개념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미래의 현재적 상태를 말한다. 이는 믿음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달됨으로서 칭의가 완성된 상태와 비교되는 미래적인 개념으로서 톰 라이트가 말하는 칭의는 현재 상태만으로는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2) 톰 라이트의 칭의 개념은 언약 안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와 같은 맥락이다.
 
 톰 라이트는 여러 가지 출판물이나 인터뷰를 통하여 많이 사용하는 말 중의 하나가 종말론적 개념의 현재적 칭의이다. 이는 언약 안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구원을 약속받았다는 것을 전재로 언약 안에 있는 상태를 의롭다고 규정하는 것과 같은 그림이다.
 톰 라이트는 신약 시대인 현재에도 이방인인 우리에게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다는 개념의 칭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약속한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언약 백성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톰 라이트는 율법이 언약 백성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이방인과 구별을 두기 위한 법으로 규정하듯이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아감으로서 언약백성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구도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율법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시며 예수님은 더 이상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따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의가 빠진 칭의 개념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에서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의를 공유하기 위한 조건으로 의의 전가(Imputation) 대신에 언약 백성으로 있기만 하면 된다.15)
전통적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칭의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통한 의의 전가가 필수요소이지만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미 아브라함 언약을 통하여 이 땅에서 실현되고 있기에 예수님의 역할은 이러한 아브라함 언약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조해 주는 수단으로 전락 되는 것이다.16)
 
4) 하나님의 의의 개념이 다르다.
 
 톰 라이트의 칭의 개념이 칼빈과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God)의 의에 대한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분이라는 하나님의 본질 자체보다는 하나님의 행하심에서 나온 개념이다. 행함이 전제가 되는 개념의 의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행함을 통하여 언약 안에 머물러야할 것이 요구된다.17)
 
 
5) 톰 라이트의 칭의는 자격(Identity)에 관한 것이다.
 
 톰 라이트의 칭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에 속해 있느냐에 대한 것이다. 마치 회원이냐 아니냐와 같이 그 사람의 본질의 변화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구비 조건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회개의 과정이 있어야하며 세례와 더불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수반되어야한다. 톰 라이트는 세례의 행위를 로마카톨릭과 같이 일종의 자격(Identity)을 얻는 행위로 보고 있다.
 초대 교부인 터툴리안부터 시작된 세례 행위를 통한 자격 획득의 개념은 로마 카톨릭에서 정착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데 톰 라이트의 새관점도 같은 개념에서 자격 획득의 수단으로 세례를 말하고 있다.18)
 전통적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세례는 자격 획득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고 의인이 된 하나님의 자녀가 그리스도가 머리되신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행위로서 새관점이나 로마 카톨릭이 말하는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성례와는 개념이 다르다.
 
6) 톰 라이트는 언약 안에 있는 백성은 죄인이 아닌 약속된 의인으로 보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한 아담의 죄의 문제가 언제 해결 되었느냐는 주제에 대하여 새관점은 개혁주의와 전혀 다르게 보고있다.
 개혁주의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 사건 이전에는 모든 인류가 죄 안에 있었던 상태이고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조차도 속죄의 필요성을 가지고 있는 백성으로 보고 있다. 반면에 톰 라이트는 이미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아담의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전재로 하고 있다. 즉 언약 백성으로 있는 상태 자체가 의로운 상태이고 칭의의 의미는  이러한 의로운 상태가 종말까지 이어졌을 때의 결과를 말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전의 사람들은 아직 의인이 되지 않은 상태에 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의가 전가 되어 의인이 되는 과정 즉 구원의 과정 이후에 칭의를 말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칼빈의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는 시점에 있는 반면 톰 라이트의 칭의는 의로운 상태가 완성되는 종말에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톰라이트는 어떻게 언약 안에 계속적으로 머물 것인가가 관심의 주제라면 칼빈은 어떻게 예수님의 의를 전가 받아 구원 받은 백성이 될 것이고 의로운 자로서 마땅한 도리로서의 성화의 차원에서의 삶을 살아갈 것인가의 차이를 보여준다.
 이러한 개념의 차이로 인하여 톰 라이트는 행위를 칼빈은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즉 행위냐 믿음이냐 이것이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칼빈의 이론을 따르는 전통적 개혁주의와  커다란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커다란 시각 차이로 인하여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의 교리는 자연스럽게 구원론에 관한 논의를 모두 건너뛰고 있다는 것이다.19)
 
 
 
6) 칼빈의 교리는 전체적으로 유기적이다.20)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에서의 칭의는 오직 성경의 한 부분만을 이루고 있을 뿐인데 반하여 칼빈의 칭의론은 창세 전에 시작된 구속 언약에서부터 창조 언약, 은혜 언약으로 이어지는 성경의 전체 구도 가운데 중요한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다. 톰 라이트에게 개인 구원에 관한 칭의에 대한 주제는 공동체적 구원에 관한 언약백성의 주제보다 덜 중요하기에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 칭의는 톰 라이트에게 불편한 주제일 따름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칭의는 언약 백성이라는 의로운 공동체 안에 거하는 것이며 의로움의 상태는 개인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백성이라는 공동체적인 속성에 있기에 톰 라이트의 의로움에 대한 개념은 공동체가 1차적이고 개인은 1차적 공동체의 2차적 결과물인 것이다.
 반면에 칼빈이 말하는 칭의는 공동체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의 믿음에 의한 신앙고백과 그리스도의 의가 전달된 개인에 국한된 것이며 교회는 다만 일차적으로 칭의 된 자들이 모이는 이차적인 공동체라는 것이다.
 
결론
 
 톰 라이트의 “바울에 관한 새관점”이 개혁주의와 많은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은 성경 해석의 전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톰 라이트는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게 하라”는 개혁주의와 달리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방법론을 도입하여 이미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내려진 결론21)을 도입하여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방법으로 해석되어진 새관점은 모든 내용을 아브라함 언약에서 시작하고 있는데 반하여 개혁주의는 새관점과 달리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에 중심을 두고 있다.
 이러한 해석의 차이로 인한 결과는 아담의 죄의 문제의 해결 시점과 방법, 율법의 의미,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유월절 만찬의 의미, 십자가에서의 죽으심, 부활, 승천, 다시 오심의 모든 의미가 달라지게 되며 이는 종교개혁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데 까지 나아가게된다.
 만약 톰 라이트의 해석이 옳다면 이제까지의 모든 신학자 즉 어거스틴을 비롯하여 루터, 칼빈, 조나단 에드워드, 마틴 로이드 존스, 메이첸등 개혁주의 신학자와 신앙인 모두 다 커다란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톰 라이트가 틀렸다면 톰 라이트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톰 라이트와 개혁주의의 상반된 해석의 차이로 인하여 이 둘 다 옳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학자들의 성경 해석의 도움을 받으며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누구를 옳다고 인정하고 수용 할 것이냐는 우리의 구원이 달린 문제이기에 결코 가볍게 다룰 주제가 아닌 것이다.
1) The New Perspective on Paul: Calvin and N.T. Wright by J.V. Fesko를 참조하여 정리한 것임.
 
2) Wright believes that justification is God’s declaration that a person is part of His covenant people and that this is primarily tied in with the ultimate eschatological vindication of the people of God at the consummation of the age.(p10/22)
3) Wright defines justification in the following manner: “‘Justification’ in the first century was not about how someone might establish a relationship with God.  It was about God’s eschatological definition, both future and present, of who was, in fact, a member of his people.”[Wright, Paul, p. 119.]
4) 톰 라이트의 칭의는 종말론적인 완성을 전재로 하고있다. 이러한 완성의 개념은 로마 카톨릭이 말하는 세미 펠라기우스 즉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공로로 구원이 완성되어진다는 개념이다.
5) Wright’s definition speaks of identity—who belongs to the covenant—or in other words, Wright speaks from ecclesiology. (P10/22) 
 
6) Calvin, on the other hand believes that justification is the actual imputation of the righteousness of Christ to the believer through faith.
7) Calvin, on the other hand, defines it as the acceptance with which God receives us into his favor as righteous men.  And we say that it consists in the remission of sins and the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 Calvin, Institutes, 3.9.2, p. 727.]
8) Calvin, on the other hand, speaks about sin, the need for righteousness—or in other words, Calvin speaks from soteriology.(p11/22)
 
9)It is important that we notice that Calvin’s treatment of justification rotates on an entirely different axis than that of Wright.  Notice how Calvin connects matters of soteriology, regeneration, faith, guilt, repentance, and sanctification, to justification.  Moreover, Calvin emphasizes the individual believer whereas Wright does not. (p12/22)
10) Calvin does not emphasize the individual at the expense of the corporate body in his doctrine of justification
 
11)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은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이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칭의를 비롯한 성경의 모든 해석을 아브라함 언약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12) 이러한 주장이 맞다면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생활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율법을 잘 지켰다면 예수님의 성육신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13)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인간의 행위적 공로가 추가되어야하는 반펠라기우스(semi-pelagius) 개념과 대립되는 차원에서의 완성이다.
14) 톰 라이트는 의의 완성 즉 칭의를 종말론적으로 보고 있는 반면에 칼빈은 칭의를 현재적 완성으로 보고 있다.
15) 톰 라이트는 율법이 언약 백성으로 있기 위한 수단으로 주어졌다고 보고 있다.
16) 새관점의 예수님은 아브라함 언약의 주체가 아니라 다만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방법을 제시해주기 위한 미봉책에 불과하신 것이다.
17) 톰 라이트는 의를 규정하는 데 있어서 존재론적인 접근이 아닌 행위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펠라기우스적이 될 수밖에 없는 근거가 된다.
18) Justification: Understanding the Classic Reformed Doctrine. J. V. Fesko p10
 
19) What makes the critical difference between the two is that Wright virtually by-passes all discussions that pertain to soteriology effectively divorcing it from other doctrinal considerations.(p12/22)
20) Calvin recognizes that doctrine as a whole is organic.(p12/22)
21) 톰 라이트는 1세기의 고대 문서를 분석하여 내린 결론 즉 율법이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결론을 성경해석의 전제로 도입하였다. 


posted by Wonho Kim
:
(The New Perspective on Paul: Calvin and N.T. Wright
by J.V. Fesko 에서 인용)


  by 김원호(dent4834@hanmail.net)

톰 라이트를 비롯하여 다른 복음을 전하는 새관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은 성경에 대하여 개혁주의와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하고 있지만 이들이 사용하는 신학적 용어에 있어서는 정통 개혁주의와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있으면서도 정통 개혁주의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라이트는 성경보다는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방법을 통하여 성경을 해석하고있으며 이러한 방법을 통한 성경해석은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결론을 이끌어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기독교를 유대교에 귀착시키며 기독교의 근본을 흔들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대속사역과 그의 의의 전가 교리를 부정하면서도 개혁주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서 같은 용어지만 전혀 다른 내용을 전함으로 독자들의 이해에 심각한 혼란을 초래하고있다.

이에 대하여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WSC)의 조직신학 교수인 John Fesko는 자신의 글 “The New Perspective on Paul: Calvin and N.T. Wright”에서 칭의의 예를 들면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있다.

칭의에 대한 새관점의 주장

1) 새관점론자들은 바울이 자신의 서신서를 통하여 말하고자 했던 것은 율법주의에 대립된 믿음을 통한 칭의 즉 유대인의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미 언약 안에서 의로운 상태에 있는 유대인의 교회론이나 공동체 즉 1세기의 교회에 있어서 유대인이 이방인과 어떻게 같이 지낼 수 있는 지에 관하여 논의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The new perspective argues that Paul largely deals with matters of ecclesiology and sociology, how Jews and Gentiles can co-exist in the first-century church. p13/22)


2) 새관점에서는 칭의를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극치의 날에 자신의 의를 나타내시어 자기 백성들을 인정하시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Justification is a declaration that God, who is faithful to His covenant promises, which is a display of His righteousness, makes at the consummation of the age to vindicate His people. p13/22)




칭의 용어에 대한 칼빈( 개혁주의)의 해석

1) 개혁주의에서는 톰 라이트의 앞의 주장과는 달리 바울이 구원론에 관하여 다루고 있고 이는 교회론과 종말론에 긴밀하게 엮어져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The Reformation, on the other hand, argues that Paul largely deals with matters of soteriology, which are intermeshed with ecclesiology and eschatology. p14/22)

2)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칭의는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 의롭게 된 사람을 하나님께서 명확히 인정하시는 것이다.

(justification is when God declares a person as righteous based upon the imputed righteousness of Jesus Christ. p14/22)

톰 라이트의 몇가지 문제점들

톰 라이트는 개혁주의와 다른 주장을 하면서도 실질적으로 거의 모든 영역에서 개혁주의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용어인 칭의를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살펴 볼 수 있다.

1)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복음주의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erminster Theological Seminary: WTS philadelphia)의 역사신학 교수인 칼 투루만(Carl. R. Trueman)은 새관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소위 새관점 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칭의의 교리에 대한 재조명은 개혁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신조와 교리들로 굳건히 서있는 개신교를 거부하는 것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칭의에 대한 서구 전통 전체를 부정하며 어거스틴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it seems to me that the current revision of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as formulated by the advocates of the so-called New Perspective on Paul is nothing less than a fundamental repudiation not just of that Protestantism which seeks to stand within the creedal and doctrinal trajectories of the Reformation but also of virtually the entire Western tradition on justification from at least as far back as Augustine. Trueman, “Martin Luther,” p. 1.)

존 페스코(J. V. Fesko)는 새관점이 복음주의 교회에 대하여는 치명적이라고 말한다. 새관점이 치명적인 이유는 새관점이 복음주의 신학의 여러가지 유형 중의 한가지 형태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the new perspective is quite lethal to the church. What makes the new perspective lethal is that it is presented as a variant of evangelical theology.)
국내 출판사에서도 한 가지로 톰 라이트를 소개할 때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복음주의 신학자라는 서술을 붙인다. 사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더 이상 복음주의 안에 있다고 할 수 없고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대부분 수용하고 있는 서구의 패더럴 비전(Federal Vision)이라는 교단은 이미 이단(Federal Vision Heresy, Auburn Avenue Heresy)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있는 상태이다.

2) 톰 라이트는 어거스틴 이후의 서구 기독교의 역사적 전통 가운데 있는 개혁주의 해석을 전부 부정하고 있다.(Yet, the proponents of the new perspective reject the very evangelical understanding of justification that goes as far back as Augustine.p14/22)

새관점 주의자들은 칭의에 대한 역사적 해석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정경에 대한 역사적 복음주의적 이해를 거부하고있다.
(Not only do new perspective advocates reject the historic understanding of justification but they also reject the historic evangelical understanding of canon-Wright, Who Was Jesus?, p. 83~4).

3) 새관점이 교회에 가장 해를 끼치는 것은 (복음주의) 용어 사용에 있다.

새관점 옹호자들은 성경, 죄, 칭의, 공로, 믿음과 같은 복음주의 용어를 사용하고는 있지만 의미에 있어서는 (복음주의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What makes the new perspective most harmful to the church is its use of terminology. Advocates of the new perspective use terms such as Scripture, sin, justification, works, faith, and gospel, but have given them entirely different meanings. p14/22)

새관점이 아무런 해가 없고 마치 개혁주의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여겨지며 톰 라이트가 더 이상 개혁주의의 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새관점이 정통주의에서 사용하는 학술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It is this use of orthodox nomenclature that makes the new perspective seemingly harmless and has some within Reformed circles thinking that Wright is no foe of the Reformation.p15/22)

4) 톰 라이트가 말하는 개인적 칭의는 정통적인 의미를 가진 용어가 아니다.

톰 라이트는 공동체적 칭의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지만 가끔 강의에서는 개혁주의의 개인적 칭의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의 이 말은 항상 일관성이 있는데 이에 대하여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이 있다. 과연 그가 말하는 칭의가 의의 전가(Imputation)에 근거한 칭의냐 아니면 새관점에서 주장하는 종말에 확정될 칭의냐인 것이다.
만약 전자라면 톰 라이트는 일관성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만약에 후자라면 (메이첸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자유주의자들이 자신의 이단성을 가리기 위하여 정통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Similarly, Douglas Wilson writes that “while Wright’s emphasis on corporate justification is important and necessary, the way he stresses it is a cause for concern. But in a taped lecture of his, I heard him explicitly say that he was not denying the Protestant doctrine of individual justification. Given his overall approach, this is consistent.”[62] Yet, one must ask, Does Wright mean justification in the sense of imputed righteousness or as eschatological definition? If it is the former, then he is inconsistent; if it is the latter, then this is precisely the danger of which Machen speaks—orthodox nomenclature that veils liberalism.-p15/22)

실은 톰 라이트가 사용하는 칭의는 믿음과 더불어 확정되는 현재적 칭의가 아니라 극치의 날에 확정되는 종말론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훈련된 신학자나 신약학자들은 쉽게 이 용어의 변질을 파악하겠지만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It appears that it is the latter because Wilson calls Wright “an outstanding exegete,” who “does not shy away from showing how the text conflicts with ‘standard’ interpretations.”[63] The trained theologian or New Testament scholar will readily identify this shift in nomenclature, but the person in the pew who reads Grant’s review or Wilson ’s general approbation may not. (p15/22)

이러한 용어 사용에 있어서 톰 라이트가 사용하는 복음이나 죄, 칭의 믿음 등이 정통 개혁주의와 다른 뜻이 있다면 우리는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가 진짜 성경이 말하는 예수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Wright’s views on gospel, sin, justification, and faith stand behind his preaching, then we must wonder if Wright’s Jesus truly is “the biblical Christ.”(p15/22)

결론

John Fesko가 말하는 톰 라이트의 위험성은 복음주의자가 아닌 사람이 복음주의를 표방하며 복음주의 안에서 복음주의의 용어를 사용하며 복음주의 자처럼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사용하는 용어들의 문제는 하나님 나라 개념에서도 심각한 혼란을 초래하고있다.

기독교는 유대교와 분명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신약의 교회를 하나님 나라로서의 구약 이스라엘의 확장으로 보고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케제만의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한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기초로 하고있다.

신약의 교회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의, 즉 예수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통하여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신 의를 기초로하고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신다는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하고있기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의의 전가를 통한 칭의를 필요로하지 않는다.

개혁주의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의롭게된 신자들을 말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와 신약의 교회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있지만 내용에서는 전혀 다른 근거를 기반으로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는 많은 이들이 이러한 차이를 모름으로 인해서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보다는 따름의 대상으로 보는 과오를 범하고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지와 혼란은 새관점의 하나님 나라 개념을 기초로하고있는 미셔널 처치, 혹은 성육신적 교회의 선교적 교회론에 대한 분별력의 상실로 인한 혼란을 가져오기도한다.

이러한 혼란은 전혀 다른 복음인 새관점이 자연스럽게 개혁주의와 혼합되는 양상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기도한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 세계관 운동과 신칼빈주의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들은 역사적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통한 문화 변혁을 추진하고있다.

대표적 기독교 세계관 저서인 알버트 월터스 (Albert Wolters)의 "창조 타락 구속 (Creation Regained)"의 경우에는 미셔널 처치 운동을 하는 칼빈 신학교의 마이클 고힌과 함께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수용한 개정판이 출간되기도했다.

신칼빈주의자인 마이클 고힌은 개혁주의를 표방하면서도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수용함으로서 전형적 새관점주의자인 스캇 맥나이트와 함께 미셔널 처치 운동에 동력을 부여하고있다.

최근의 미셔널 처치와 마참가지인 성육신적 교회는 선교적 교회론을 그대로 수용하며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서의 교회 변혁을 추구하고 있다.

최근의 이러한 많은 움직임이 동력을 얻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운동들이 같은 개혁주의 용어를 사용하지만 대다수의 개혁주의 진영에 속하여 있는 이들이 이것이 전혀 다른 복음인지에 대한 분별력이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개혁주의 진영에 속하여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다른 복음에 대한 분별이 어느 때 보다도 중요하다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posted by Wonho Kim
:
톰 라이트가 말하는 1세기 유대주의

  by 김원호(dent4834@hanmail.net)

톰 라이트는 자신의 저서 "바울"을 통하여 1세기 유대주의는 개혁주의가 생각하였던 구원을 얻기 위한 구원론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의 공동체 안에 머물기 위한 교회론의 문제에 관한 것이었으며 바울의 서신서는 구원 받은 백성이 어떻게 이방인을 자신들의 언약 백성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것이냐 에 관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의 이러한 주장에 대한 다음 글을 통하여 개혁주의 입장에서 몇 가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톰 라이트는 칭의라는 개념이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1)의 관점에서 읽혀지면 안되고 대신에 1세기 유대주의2)의 상황에서 읽혀져야 한다고 말한다.

Wright contends that the idea of justification must not be read in the light of the Augustine-Pelagius debate but instead in the context of first-century Judaism( Paul, pp. 19, 32, 35, 116, 120, 124, 129.)

1세기 유대주의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3)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 시대의 칭의는 하나님의 종말론4)적인 정의로서 미래와 현재의 것이며 누가 하나님의 백성의 맴버5)가 될 것이냐 에 관한 것이다. 샌더스의 의미로 말한다면 "진입"의 문제가 아니라 "머무름"6)의 문제인 것이고 누가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일반적인 신학 용어를 사용한다면 교회론7) 이상의 구원론에 대한 것이 아니며 교회 이상의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다.


(in the first century was not about how someone might establish a relationship with God. It was about God’s eschatological definition, both future and present, of who was, in fact, a member of his people. In Sanders’ terms, it was not so much about ‘getting in,’ or indeed about ‘staying in,’ as about ‘how you could tell who was in.’ In standard Christian theological language, it wasn’t so much about soteriology as about ecclesiology; not so much about salvation as about the church.(Wright, Paul, p. 119.)

1) 어거스틴-펠라기우스의 논쟁?

어거스틴-펠라기우스의 논쟁이 개혁주의에 잘못된 영향을 주어 현재의 개혁주의 성경해석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가?
여기에는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전제와 이를 근거로 개혁주의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개혁주의는 어거스틴 펠라기우스 논쟁 이전에 성경 자체를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며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도 성경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어거스틴 이후의 성경 해석 전체를 부정하면서 어거스틴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2) 1세기 유대주의?

1세기 유대주의가 전통적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율법주의 개념이 아니라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언약적 율법주의 개념이라면 전통적 개혁주의의 성경 해석은 전부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1세기 유대주의에 관하여는 이미 칼빈도 외경등을 참조로 하여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며 여기에 추가된 쿰란 문서의 경우는 에센파의 자료이면서 아직도 해석이 진행되고 있다는 관점에서 미리 결론을 내리고 이를 근거로 성경 자체를 해석하는 것은 여러가지 면에서 무리수를 두고 있다고 말을 할 수 밖에 없다.

3) 관계 형성?

톰 라이트는 하나님과 언약 백성과의 관계가 이미 제대로 형성 되어있는 의로운 상태라고 말한다.
그럼 아담의 죄의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고 그리스도는 아담의 죄와 관계없이 오신 분이라면 성경에서 예수님을 두번째 아담이라고 칭하는 것은 성경이 틀렸다는 말인가?
톰 라이트는 아담의 죄는 이미 아브라함과의 언약 가운데 암묵적으로 해결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4) 종말론적 칭의?

칭의라는 용어보다는 vindication(옳음을 드러냄)이라는 용어를
톰 라이트가 칭의의 문제를 말할 때는 의로움의 현재적 완료가 아니라 종말론에 옳음이 드러난다(vindicate)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Wright, JVG, p307)
이는 은혜로 구원 받고 공로로 완성한다는 로마카톨릭이 말하는 구원론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새관점은 은혜로 하나님의 언약 약에 모든 사람이 있는 상태이고 이 의로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이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구원의 완성을 위한 펠라기우스적인 인간의 공로가 추가되고 평가에 의하여 종말에 확정된다는 개념이기에 항상 구원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 긴장하며 살 수밖에 없고 오직 은혜가 아닌 부분적인 은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5) 멤버? Identity?

자녀의 개념이 아니다. 멤버라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성경에서 말하는 자녀의 개념들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은 칭의에서 중요한 개념이지만 연합 개념이 없는 맴버로서 만족하는 개념이다.

6) 머무름의 문제?

만약 아담의 죄의 문제가 아직 해결 되지 않은 상태라면 머무름(staying in)의 문제 이전에 진입(getting in)의 문제가 우선이 될 것이다. 하지만 톰 라이트는 유대인의 문제가 진입에 대한 것이 아니라 머무름에 대한 것이라고 말하며 이 머무름의 상태가 은혜 안에서 의로운 상태라는 것이다.
만약에 유대인이 은혜 안에 제대로 머물렀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며 예수님의 오심은 속죄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것이 된다.
새관점에서는 아담의 범죄의 문제는 이미 아브라함 언약에서 정리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예수님의 속죄를 유월절 만찬을 통한 이스라엘의 민족적 해방이라는 개념으로 변질시켰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속죄의 보혈 개념이 아닌 삶의 모범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희생으로 개혁주의와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7) 교회론에 관한 문제?

1세기 유대주의가 구원론을 넘어선 교회론에 관한 것이라면 톰 라이트는 유대 교회를 신약 교회의 원조라고 말하는 것이랑 다름없다.
톰 라이트의 주장대로라면 유대교회와 현재의 신약교회는 대립의 개념이 아니라 새로운 버전으로의 업 그래이드 개념이다. 즉 유대됴회가 신약교회의 원조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세대주의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비슷하며 또 다른 세대주의적 발상이다.
이러한 개념의 교회론은 이 지구 상의 모든 민족을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에 전통적 개념의 회중교회가 아니라 피조계 전체를 구원의 대상으로 삼는 우주적 교회론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보편구원론으로 귀착되는 미셔널 처치의 교회론이다.

결론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맞다면 믿음이라는 개념이 설 자리가 없다.
맴버 즉 회원(Identity)의 개념에서의 교회론으로는 맴버가 되기 위한(회원가입?) 요구조건이 불분명하다.(요구조건이 없다면 맴버의 의미가 있는가?)
멤버가 된 후에 자격 박탈의 규정이 애매하다.
인간이 선하다는, 혹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아담의 죄는 이미 나하고는 상관없는 문제가 되었고 어떠한 종교를 가지던 간에 간디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삶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1세기 유대주의에 대한 해석이 너무 자의적이며 의로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기준이 막연하며 종말에 심판의 기준이 모호하기에 새관점이 맞다면 심판에 대한 불공평의 항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
혼란스럽고 복잡하고 어지럽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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