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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머징미셔널처치 2014. 9. 27. 18:55

판넨베르크 신학 비평


김원호(dent4834@hanmail.net)


판넨베르크는 누구인가

판넨베르크는 지금은 폴란드에 속하여 있지만 과거에는 독일에 속하여 있던 슈테틴이란 곳에서 1928년에 태어났다.


청년시절 예기치 않은 신비적 경험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후 칼 바르트에게서 신학을 배웠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1958년 독일의 부버탈 대학교수로 취임한 이후 1961년 마인쯔 대학교수로, 그리고 1967년 이후 1993년 은퇴 시까지 뮌헨대학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재임하였다.


판넨베르크는 40여년 간 수많은 소논문과 책들을 저술하였으며 세 권짜리의 조직신학을 통하여 자신의 신학을 전개하였다.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 일생의 가장 중요한 경험이 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인 1945년 1월 초에 군대징집을 몇 개월 앞둔 학생으로서 학교를 마치고 기차 대신에 걸어서 두 시간 걸리는 집으로 걸어가던 중  자신이 석양의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순식간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빛 속으로 녹아버리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판넨베르크 자신에게 있어서 중대한 경험이었고 평생에 판넨베르크 신학에 영향을 미쳤던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다행히 종전 직전에 군 입대를 하면서 피부병이 도져서 군 후송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포로로 잡혀 있다가 종전 후인 1947년부터 동베를린의 훔볼트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매력에 빠지게 되었고 이때 평생을 신학자로 살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 후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의 후원 장학금으로 스위스 바젤에서 공부하면서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을 모두 읽을 수 있었으며, 이 때 칼 바르트의 사상에 철학적 깊이가 결여되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칼 바르트의 신학에 대하여 깊이 실망하게 되었다.


칼 바르트에 대한 이러한 실망은 나중에 판넨베르크의 신학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윤곽을 잡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후 판넨베르크는 박사논문과 교수자격 논문의 주제로  중세 스콜라주의를 선택하면서 신앙과 이성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신학을 정립하게 된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성서주석과 조직신학, 철학, 교회사 등을 연구하면서도 도저히 신학의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지만 다행히 유대인의 역사와 구약에 대하여 정통한 게르하르트 폰 라드(Gerhard von Rad)를 만나면서 자신의 신학의 어두운 장막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판넨베르크의 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역사로서의 계시”를 근거로 한 보편사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폰 라드의 역사 신학의 도움으로 개념이 정립될 수 있었던 것이고 폰 라드를 만난 후 10년 만에 결실로 나타날 수 있었다.


폰 라드의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와 전승에 관한 연구의 도움을 받으면서 판넨베르크는 “역사는 곧 성서 주석의 핵심 단어”라는 인식을 하게 된 것이다.

1961년 출간된 “역사로서의 계시”의 출간은 불트만 학파의 실존주의 신학과 바르트주의자들의 “종교 비판적 계시 사상”과는 확실하게 선을 그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의 중세 신학사를 강의를 통하여 헤겔 사상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자신의 신학이 최소한 헤겔 철학과 동일한 수준으로 발전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서  헤겔 철학은 판넨베르크 신학의 철학적 기초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1967년도에 하나님을 “미래의 힘”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이후 1980년대 초에 이르러 판넨베르크의 신학이 윤곽을 드러내게 되었다.


판넨베르그는 미래의 힘이라는 개념에서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의 개념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현재를 과거의 결과가 아닌 미래의 결과라고 생각함으로서 모든 역사의 과정을 미래의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계시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루터파에 속한 사람으로서 독일 개신교와는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신학자로서 지구적 차원에서의 기독교 공동체를 생각하였다.


그는 현대 기독교인이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문화적 영광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하며, 단순히 독일이 아니라 지구적 차원의 신학을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 로마의 문화유산 속에서 학문적 정립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 가운데 신학을 정립하였다.


판넨베르크 신학에서 볼 수 있는 특징들

판넨베르크는, 불트만이나 바르트를 중심으로 한 20세기 실존주의 신학이 이성과 신앙을 분리시킨 것에 반발하여,  “역사로부터의 계시”라는 개념의 신학을 통하여 이성과 신앙의 접목을 시도하였다.

판넨베르크에게 신앙은, 이성을 기초로 하는 과학적인 사고와 분리되어있는 분야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과학적인 방법을 통하여 알 수 있도록 열려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산물이었다.


판넨베르크는 전통의 전승이라는 역사 개념을 통하여 현재와 과거가 모든 역사 속에서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내적 연결의 중심에 있는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의 선취적 현재라는 개념을 적용함으로서, 현재의 모든 현상들이 종말론적 미래의 현재적 결과로 해석되어질 수 있다.

판넨베르크는 교의학이 역사의 산물이므로 교의학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 교의학은 절대 불변의 기준이 될 수 없었다.


모더니즘적 사고에서 형성된 교의학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적합한 변화가 요구되었기에 적합화된 판넨베르크 신학은 이머징 처치와 새관점을 비롯한 포스트모더니즘 신학과 조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교의학의 변화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역사적이고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성찰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였기에, 철학적 신학화의 작업을 통해서 역사를 하나님의 계시라는 관점에서 신학과 역사를 조화시키며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결론을 도출해내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 자신을 통해서 확보되지 않은 진술들은 자의적 상상력의 생산품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았기에, 역사를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하나님의 자신의 진술의 차원으로 보고서, 역사를 하나님 자신의 진술 차원으로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판넨베르크가 보는 교의학은 모든 시대의 불변하는 명제적 기준이 될 수 없기에, 신학은 종교 현상과 전승들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작업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다른 경쟁적인 종교들과 함께 문을 열고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된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포스트모던 신학자들인 톰라이트나 스탠리 그렌츠, 브라이언 맥클라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현실은 반드시 이성적으로 설명되어져야 한다는 개념에서 출발하여 자신만의 신학을 정립하게 된 것이다.

이성적 설명이 요구되어지는 판넨베르크의 신학은, 철학과 자연과학과의 학술적 교류가 가능한 것이 되어야 했기에, 전통적 신앙고백에 의한 신학보다는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출발하여 자연과학적 신학을 하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맥락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보편사


판넨베르크에게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특징 중의 하나는 보편사Universalgeschichte라는 개념의 신학이다.


역사라는 개념의 독일어에는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역사 개념으로서의 Historie가 있으며, 또 하나는 주관적 개념의 추상적인 Geschichte라는 역사가 있다.


바르트는 물론이고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역사는 주관적인 Geschichte의 개념으로 진술되고 있으며,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보편사는 Universalgeschichte이다.

판넨베르그가 말하는 세속화는 보편사에서 하나님을 배제하는 개념이며, 판넨베르크의  보편사 신학은
하나님이 세계 역사 가운데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개념의 역사의 주체가 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현대와 달리 중세에서는 기독교가 삶과 분리되지 않았었기에  현실과 기독교 세계를 하나님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연계시킬 수 있었지만, 종교개혁 이후로는 인간 중심의 인문학이 발달되면서 신 중심의 문화보다는 인간 중심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게 되면서 삶이 기독교와 분리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하나님보다는 인간이 문화의 중심이 되면서 현실과 기독교 세계의 자연스러운 분리는 오히려 삶 가운데  기독교의 고립을 초래하였으며 더 나아가 판넨베르크가 자연법이라고 규정 짓는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 중심의 문화로 인하여 기독교는 존립의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판넨베르크가 기독교의 공동체성을 강조한 배경에는 기독교가 개인구원에 대한 문제해결을 위한 개인의 종교로 축소되면서 사회 공동체로부터 외면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서 신학을 정립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기독교의 고립을 극복하기 위해서 기독교가 사회 속에서 보편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자연과학과의 소통이 가능하고 일상의 삶의 영역에서 적용이 가능한 신학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판넨베르크의  보편사Universalgeschichte는 이러한 분리를 극복하기 위하여 주관적 역사geschichte 개념을 계시와 접목 시킴으로서 역사를 하나님의 말씀의 차원으로 격상 시킨 것이다.


이와같이  보편사Universalgeschichte 는 판넨베르크 신학의 주요 특징을 이루고 있다.


판넨베르크가 도입한 보편사 개념은  칼 바르트를 비롯한 신정통주의 신학 마져도 해결하지 못하였던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기독교의 고립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인간이 비록 하나님을 떠나 인간 중심의 삶의 양식을 통해서 세계를 구성해 나간다고 하더라도 기독교의 가르침 자체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또한 종말론적인 완성을 이루실 존재로 인식하기 때문에, 보편성을 가질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이를 위하여 “역사로서의 계시”라는 개념의 보편사적 신학을 전개해 나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보편사적 신학을 하는 방법론에 있어서 믿음을 근거로 하는 명제적 접근법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는 판단에서 역사비평적인 방법론을 채택하게 된다.

역사비평적인 방법론을 취한 대표적인 신학자로서는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등이 있으며, 톰 라이트는 비록 이들을 비판하지만 이들과 마찬가지로 역사비평의 방식에 참여하고 있다.



역사로서의 계시

판넨베르그의 “역사로서의 계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세속화의 개념이 무엇인지 이해하여야 한다.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세속화라는 개념은 현실의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개념이 배제된 시대적 상황을 일컫는다.


세속화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배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찾으려는 노력 자체도 하지 않는다.

판넨베르크는 세속화가 근대의 계몽주의에서 출발하였으며 16,17세기의 종교전쟁과 더불어 급격히 증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종교전쟁은 종교개혁의 원치 않은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으며, 교리를 중심으로 한 서로 간의 싸움으로 말미암아 종교가 더 이상 사회에서의 인간학적 기초가 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종교는 자신의 자리를 자연법에 내어주게 되었으며, 스스로 사회로부터 고립된 게토화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사회는 자연법과 더불어 더욱 세속화 되면서 하나님에 대한 관념은 사회 안에서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고 또 어떠한 의미도 가질 수 없었다.


기독교의 가르침이 아무런 의심도 없이 진리로 받아 들여졌던 시대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다.


종교가 사라진 서구사회에서 기독교를 구하고자 슐라이어마허는  나름대로 인간의 이성을 기초로 한 신학을 정립함으로서 기독교를 몰락의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는 것 같았지만, 이성을 기초로 정립하였던 슐라이허마허의 신학은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성경의 많은 부분을 제하여 버림으로서 자유주의 신학을 출범시키는 결과를 낳게된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 칼 바르트(Karl Barth)는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라는 개념으로 초월적 개시의 신학을 정립하였으나 이 또한 현실에서 신앙을 제하여 버리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판넨베르크가 보기에 칼 바르트의  “하나님 말씀의 신학” 역시 사회 현실에서의 하나님 개념에 대한 답을 주지를 못하였던 것이다.


결국 종교는 개인의 영역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정치 제도 뿐만이 아니라 교육 제도마저도 종교에 대하여 대립 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 것이다.


사회 현실에서 종교가 배제되는 이러한 상황적 배경에서 볼 때 판넨베르그에게 있어서 신학함이란 이러한 세속화에 대하여 반대 급부로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만 했었다.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신학적 과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이성과의 관계 속에서 만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판넨베르크가 보기에 바르트와 불트만의 실존주의 신학은 신앙과 이성을 분리시킴으로서 종교를 사회 제도 가운데 정착 시키는데 실패하였던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모든 것을 규정하는 현실”로서의 하나님 이해를 추구한다.


하나님은 세계에 대한 관계에서 결코 제한되지 않으시며 오히려 이 세계를 완성시키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계시의 개념으로 현실을 규정하고 계시기에 하나님 인식에 있어서 역사의 개념과 계시의 개념을 진리와의 일정한 관계 속에서 이해하여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와 계시의 통합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진리를 찾으려는 히브리사상과 형이상학적 계시 속에서 진리를 찾으려는 그리스 사상의 통합으로서, 독일의 관념주의 철학자 헤겔의 방법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원론적 사상에 영원성이 결여되어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헤겔의 사상 속에도 미래라는 영원의 지평이 상실되어있음을 비판하며 판넨베르크는 미래로부터 다가오는 종말론적 하나님나라라는 개념을 통해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미래에 대한 지평을 드러냄으로서 헤겔이 보여주었던 한계를 극복하였다.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론과 같이 경험 가능한 하나님 인식과 역사로서의 계시라는 두 가지 관계의 조화 가운데 진리를 찾아냄으로서, 신학이 계시에 근거하면서도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행위라는 결론 하에, 완전한 계시는 역사의 종말에 가서야 가능하다고 보았다.

판넨베르크는, 역사로서의 계시라는 개념 하에서 종말론적 지평을 설정하는 방법을 통하여 미래적 관점에서 현재를 재구성하는 신학을 함으로서 현실에서 하나님을 배제하는 세속화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기독론

판넨베르크 기독론의 특징은 위로부터의 기독론이 아닌 역사적 실증주의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다.


전통적인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권위주의적인 접근방법이며 초대교회의 전승과는 다르다고 생각되었기에 판넨베르크에게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신학함의 출발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위로부터의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에 판넨베르크와 같이 역사적 실증주의를 기초로하는 신학함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판넨베르크는  믿음을 기초로 한 명제적이고 권위적인 방법인 위로부터의 기독론이 기독교를 사회적 고립으로부터 탈출 시키기에 적합하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이에 대한 대안으로 역사적 실증주의라는 학문적 기초를 통한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라는 방법론을 취하게 된 것이다.

판넨베르크가 취한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은 헤겔적인 방법론을 취함으로서 철학과 자연과학과의 대화가 가능한  보편사적 신학의 길을 열게 된 것이다.


판넨베르크에게 보편사가 외면된 신학은 역사가 없는 신학이며 역사가 없는 신학은 신화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리스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래로부터의 신학은 일반 학문에 대하여 좀 더 설득력 있게 그리스도가 하나님 되심을 설명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길을 열어주었다.

판넨베르크의 그리스도 이해는 존재론적이 아닌 인식론적 접근방식이다.


예수님에 대한 인식론적 접근방법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의 신분에 상관없이 눈에 보여지고 경험 되어지는 인간 예수에서 출발하여 어떠한 과정을 거치면서 신성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 가시는가를 인식해가는 과정이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되어지시는 과정을  사람의 눈으로 인식되어지는 과정과 연계시킴으로서 과정신학적 방법론과 유사성을 띄고있다.


그리스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판넨베르크의 인식론적 접근방식은 그리스도가 탄생과 더불어 하나님으로서의 신성을 가지고 계셨다는 존재론적 개념과 대비된다.


판넨베르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부터 하나님이셨으며 또한 이 세상의 창조주이심을 인정하고 신학하는 것은 위로부터의 명제적 진리를 인정하고 신학을 하는 것이기에 이는 이 땅에서의 철학과 자연과학과의 소통이 가능한 보편사적 신학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판넨베르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창조주이심을 고백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보편사적 신학 방법론에 있어서는 믿음에 의한 전제가 적합하지 않기에 믿음의 고백을 신학에 적용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예수가 탄생과 더불어 신성을 가지셨다는 인식은 존재론에서 출발한 믿음을 전재로 하는 것이기에 불신자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예수에 대한 존재론적인 방법보다는 과학과의 소통이 가능한 인식론적 방법을 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식론적 접근방식은 예수는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해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셨기에 우리는 이러한 증명을 통해서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식론적 접근방식은 화이트 헤드의 과정 신학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신성이 완성되어지는 과정으로서의 인식론과 유사한 성격을 나타낸다.


판넨베르크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설명하기 위하여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누스의 유출 개념을 사용함으로서  헬라 철학에서의 “신의 현현theophany”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이는 히브리적인 사고에서 출발한 위로부터의 신학과 대조를 이루는 헬레니즘의 성격을 가진 아래로부터의 신학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판넨베르크 말하는 신의 현현(顯現)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시는 과정이다.


예수 안에서 드러나신 하나님의 “실체 현재(現在)” 즉 “하나님 자신이 예수 안에서 완전히 전적으로 현재(現在)한다”는 헬레니즘적 사고는 인간과 신의 합일(合一)사상의 근거를 제공해준다.


인간과 신이 같이 하나가 된다거나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의 본성과 합한다는(deification) 알렉산드리아적 해석 방법은 인간으로부터 출발하여 신적인 존재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방법론으로서의 관상기도의 기초를 마련해준다.



교회론

판넨베르크의 교회론의 모형은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에 있다.


판넨베르크가 보는 현재는 과거가 아닌 미래의 선취적 결과다.


현재의 교회는 과거의 전통에서 모델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라는 미래적 공동체의 모형(provisional)으로서 현재의 교회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의 개념에서는 미래에 우위성을 둔 현재와 미래의 결합으로서 미래로부터 오고 있는 현재적 하나님나라라는 개념에서 교회론이 정립됨으로서 전통과와 단절을 위한 포스트모더니즘에 적합한 대안적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현대 사회에서의 교회의 몰락에 대한 대안으로서 위로부터의 신학이 바탕이 된 전통적 교회와는 달리 아래로부터의 신학을 통한 포스트모더니즘적 교회를 제시하고있다.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포스트모던적 교회는 모든 학문과 소통이 가능한 보편사와 종말론적 미래의 현재적 선취로서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판넨베르크의 교회론은 전통적 교회가 이 세상에 대하여 취하였던 이전의 형태들과는 달리 최종적 미래로서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하여 기존 제도권 속의 교회 형태를 탈피하는 시도를 함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교회 형태인 이머징 처치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해주었다.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교회의 영역은 기존 제도권에만 국한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보편사적 교회론을 바탕으로하여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모든 곳으로 범위가 확장되어 결과적으로 최종적으로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 세워져가야 한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이해

판넨베르크가 이해하는 삼위일체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이루어가는 과정으로서의 삼위일체 다. 즉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의 완성이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완성이라는 만유내재신론적 삼위일체다.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위해서 이해되어지는 삼위일체는 기독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개념보다는 이 세계에서 경험 되어지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개념에서 나온 것이지만 하나님의 활동이 완성되는 종말에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일치가 일어난다.


성부의 신성은 계시로 드러나는 성자의 역사적 활동과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현실화하는 성령에 의하여  경륜적 삼위일체가 경험 되어지는 것이다.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이루어 가시는 성령은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역동적인 마당으로서의 힘의 장(dynamic field)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성령은 인격(person)이나 정신(mind)이 아닌 창조, 생명을 주는 동력(creative and life-giving dynamic)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힘의 장이라는 개념은 스토아 철학에서 유래한 것이며, 스토아 철학에서의 하나님은 하나의 인격자도 아니며 정신도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니시기에 세 위격의 통일을 힘의 장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면서도 이 힘의 장의 내적 구조로서의 내재적 삼위일체를 설명한다.

물론 판넨베르크는 양태론자도 아니며 삼위의 위격들을 힘의 장의 본질적 내적구조 자체로 이해하고있다.


이러한 이해는 존재론적 삼위일체보다는 경륜적 삼위일체로 이해하는 것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경륜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판넨베르크의 경륜적 삼위일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의 활동 가운데 완성되어가는 이 세계의 창조를 이해하여야만 한다.


판넨베르크에게 삼위일체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필연적 존재로 이해되며 세 위격들 모두 역사 가운데서의 활동을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구체화 시킨다.


성부의 삼위일체적 본질은 역사가 종말로 치달으면서 성자의 계시와 성령의 종말론적 활동에 의하여 점차적으로 현실화 되어간다.


내재적 하나님의 자기 현실화의 과정에서 절대적 하나님의 자기 실현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존재는 되어감이라는 동적인 특성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진리도 나무테와 같이 완성되어진다는 역동성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되어 가심에 적용하고있다.


경륜적 삼위일체에 의존하는 내재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하나님의 자기 현실화라는 점에서는 과정신학자들이 말하는 완성되어지시는 하나님과 차이가 있지만 존재의 완성이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판넨베프크의 논리는 자의적 만유내재신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유내재신론의 개념에서의 이 세계의 완성은 곧 하나님 자신의 완성이기에 모든 창조세계는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영원 가운데 내재한다는 것이다.

만유내재신론은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신플라톤주의에서 유래된 관상기도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준다.


표면적인 거짓의 내면 깊숙이 자리잡은 참된 존재를 향한 관상기도는 거짓된 이 세상의 내면 깊숙히 자리잡으신 내면의 빛으로서의 하나님을 규정한다.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삼위 하나님이 이 세상의 내면의 빛이 되어 이 세상의 거짓된 표면을 벗겨내시면서 자신을 드러내심으로 완성되어지시기에 고대 미래 영성으로 규정되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교회는 관상기도를 통하여 내면의 빛을 추구하게된다.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동일화는 이 세계가 하나님의 존재에 필연이 되며 하나님 존재의 완성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에 의존된다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도래는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존재의 완성을 의미한다.

존재론적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를 위하여 이 세계의 실존성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으시지만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이 세계를 창조하시겠다고 선택을 하셨기에 이 세계의 완성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필연이 되었다.


이러한 자의적 만유내재신론으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경륜적으로 이해 될 수밖에 없다.



만유내재신론

판넨베르크의 만유내재신론(Panentheism)은 범신론(pantheism)과는 달리 이해되어야한다.


판넨베르크의 만유내재신론(Panentheism)은, 미래의 힘이라는 개념으로 이해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역사에 활발하게 개입하셔서, 하나님 나라 안에 만물을 포함시키심으로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켜 나아가시는 분으로 이해된데서 비롯된 것이다.


판넨베르크 자신은 만유내재신론을 부정하지만, 세계의 존재 자체를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삶 자체에 포함시킴으로서, 삼위일체적 삶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신적인 힘의 장(divine force field)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신적인 힘의 장(divine force field)은 판넨베르크 신학의 핵심 개념으로서 판넨베르크가 만유내재신론자라는 논란의 근거가 되기도한다.

신적인 힘의 장(divine force field)은 역사로서의 계시와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의 현재적 선취의 동력으로 묘사된다.


판넨베르크와 몰트만은 만유내재신론을 근거로 이머징 처치에 많은 부분 공통적으로 참여되고있지만 판넨베르크는 자신의 신학에 자연과학과의 대화를 위한 보편사 개념과 역사로서의 계시 사상을 도입함으로서 몰트만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 진리는 과정신학적 신론과 마찬가지로 영원하고 절대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역사적이라는 것이다.


진리는 나이테와 같아서 점진적으로 완성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종말에 가서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모든 지적인 개별현상까지도 하나님의 유효한 임재가 있음을 말하는 장(field)개념을 도입함으로서 자신의 신학을 진리를 이루어가는 힘의 장(force field) 개념으로 풀어 나가고 있다.


이러한 개념에서 신앙은 검증 가능한 하나님 경험을 도출해낼 수 있는 것이며 세상에 대하여 기독교의 선포가 가능한 것이다.

힘의 장 개념의 핵심 사항은 예수의 부활사건이며, 예수의 부활은 역사의 사건 가운데 하나님이 자신을 가장 경험적이면서도 보편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으로 묘사된다.

하나님이 시간의 역사 안에 계심으로서 세계는 하나님 안에 있게되며, 이러한 상호 내재 가운데 인간은 종교철학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격적 실재에 참여하게 된다.


이러한 상호 내재는 하나님과 세계의 상호 내함성(in-ness)을 보여준다.


하나님과 세계의 상호 내함성으로 인하여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의 한 가운데는 (플로티누스가 언급한)일자(一者 the One)를 만날 수 있는 참 자아가 있게되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나는

참 자아, 즉 내면의 빛 혹은 내면의 불꽃으로 묘사되는 일자(一者 the One)를 만나는 원리이다.


이머징 처치에서의 관상기도는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 비추는 빛으로서의 일자(一者 the One)를 만나는 방식이다.

판넨베르크는 하나님과 세계의 존재론적 관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개인의 내면은 물론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하나님과 세계의 상호 내함성(in-ness)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내포되어있다고 본다.


하나님의 본질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동일하지만 그 본질은 시간 가운데 일종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의 본질이 세계와 더불어 불변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변화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더불어 하나님 자신도 완성되어 가시기에 반드시 필수적이다.

세계가 하나님나라로 완성되는 일은 하나님 본질의 완성이라는 개념과 필연적으로 관련되어있기에 하나님의 존재 자체의 본질적인 문제이다.


무한하신 존재론적 삼위일체 하나님은 유한한 세계를 내포하심으로서 필연적으로 역사의 과정을 통해 완성되어지시기에 종말론적 역사를 완성시키시는 만유내재신론적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유한한 세계의 내포는 시간을 영원의 한 부분의 현시로 보는  플로티누스의 영원과 시간의 관계에 대한 개념에 적용함으로서 시간과 영원의 대립 관계를 해체시킨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세계를 내포하는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의 완성은 삼위일체가 하나님나라 안에 충만하게 성취되면서 참된 무한이 현실태로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헬라 철학적 사고에서 신학을하는 판넨베르크는 플로티누스의 일자( the One 한분이신 절대자)를 삼위일체라고 규정하는 헤겔의 초월적인 현실태가 세계 역사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미래도 자기의 외부에 두지 않기에 미래는 하나님께 속해있다고 본다.


신플라톤주의의 거대한 존재의 사슬(Great Chain of Being)은 미래의 삼위일체적 일자로부터 유출되어 다시 그에게 복귀된다.


역사로서의 계시 비평

역사로서의 계시 개념에서는 모든 현실을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선취적 결과로 해석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현실의 모든 것이 종말에 가서야 확실한 평가가 내려진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현실의 모든 것은 종말의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어떠한 판단도 임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성경을 명제적으로 보고 성경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는 개혁주의 입장과는 확실히 다른 것이다.

역사로서의 계시라는 개념에서는 역사가 지속되는 한에서의 계시의 점진성과 지속성의 가능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점진성과 지속성의 개념에서 보는 성경은 단지 기록될 당시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의 이야기로서 간접적인 하나님의 계시에 불과하기에 지금 이 시대에서는 이 시대에 맞게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를 통한 삶의 현실 가운데 지속적으로 오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이러한 계시를 바탕으로 진리를 완성 시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의 계시는 나무의 나이테와 같아서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완성되어 나아가기에 현재의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성경의 명제적 진리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타종교에 대하여도 기독교가 관용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종말에 하나님나라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타종교에도 선한 믿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역사로서의 계시” 개념에는 하나님이 만물 가운데 내재하여 계신다는 만유내재신론(Panentheism)의 개념이 적용되고 있다.

창조에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우주의 전체 역사를 피조물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완벽히 참여되는 신적행위로 보고 있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이 종말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행위에 참여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성령님은 “힘의 장(Dynamic Field)” 개념으로 모든 피조물 가운데 현존하며 영원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미래를 완성해 나가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판넨베르크가 언급하는 역사의 의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역사(Historie)가 아니라 주관적인 해석이 가능한 역사(geschichte)이며, 이러한 역사는 하나님의 힘의 장(Dynamic Field)에 포함되어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 또한 모든 것 안에 있다는 만유내재신론에서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교회론 비평

판넨베르크의 교회론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과 더불어 성령의 강림으로 회개하고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은 자들이 모인 공동체로서의 전통적인 개념과는 달리 마지막에 도래할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에서 출발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선취적으로 예기된(proleptic) 미래의 결과로서의 현재적 교회를 말한다.


교회의 뿌리를 과거가 아닌 미래, 즉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선취라는 형태를 취하고있다.

이와같은 교회론은 철학과 자연과학과 소통이 가능한 보편사적 구원론을 바탕으로 하기에 피조 세계의 모든 영역을 통치의 개념보다는 구속의 개념에서의 하나님 나라에 포함시키고있다.

보편사 개념에서 출발한 교회론은 그리스도가 통치가 모든 곳에 미치므로 모든 곳이 하나님의 통치 속에 들어가는 우주적 교회론을 지향한다.

전통적 교회가 신앙고백을 하는 이들로 구성되어있는데 반하여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적 교회론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선취라는 통치 영역에 포함되는 모든 영역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과 구속 영역을 구분하는 하나님의 두 나라의 구분을 없앤 것이다.


신앙고백을 한 신자들의 모임으로서의 전통적 교회는 이 세상과는 구별되는 제한적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는데 반하여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적 교회론에서는 교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하여 신앙고백이 요구되어지지는 않는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마찬가지로 판넨베르크의 교회론이 이머징 처치의 한 부분을 구성할 수 있었던 것도 전통적 신앙고백을 요구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 개념을 적용하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머징 처치의 맥클라렌은 진리가 나무의 나이테와 마찬가지로 점진적 성격을 가지고있다고 보고있으며, 판넨베르크도 이와 동일하게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진리가 변화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새관점도 마찬가지로 성경을 명제적 진리보다는 완성을 위한 거대담론으로 보고있음으로서 이들 모두 동일하게 포스트모더니즘에 부합된 형태를 취하고있다.

판넨베르크는 교회론에 있어서 기독교 전통의 정체성과 순수성이 보존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교회론을 정립하는데 있어서 지속적인 역사적 연구와 학문적 연구가 선행됨으로서 끊임없는 교회론의 재정식화(Reformulation)를 말한다.


이는 전통적 교회가 성경을 근거로 끊임없이 개혁(Reformed)되어야하는 것과는 달리 성경보다는 역사적 예수 연구나 철학적 사고와 학문적 연구를 통한 역사 비평에 더욱 비중을 둠으로서 개혁주의보다는 전통과의 단절을 요구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한층 더 길을 열어주게된 것이다.


톰 라이트도 자신이 개혁주의의 전통에 서있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개혁주의에서 떠나있는 것도 판넨베르크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개혁(reform)과 다른 재공식화(reformulation)가 이루어지는 것은 현대신학들이 성경보다는 자연과학의 맥락에서 변화의 근거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판넨베르크의 재공식화 의도는 전통적 기독교 진리를 붕괴시키기보다는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전통적 진리의 의미와 타당성을 현대적 상황 속에서 새롭게 재조명하고 현대적 의미를 발견하고자하는데 있지만 재공식화에 있어서의 위험성은 새관점과 같이 불확실한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성경을 재해석하는 것이다.

이머징 교회에서 나타나는 특징 중의 하나는 고대 미래 예배다.


판넨베르크의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의 뿌리가 되는 헬라 철학은 전통적 기독교의 명제적 진리를 대체하는 신플라톤주의의 관상적 특징들을 수용하면서  이머징신학의 고대 미래 영성에 길을 열어주게된다.

신플라톤주의에서 보는 유출 개념에서의 역사는 신적 본질의 현현(顯現)이다.


신앙과 역사를 하나로 연합시키려는 관상은 고대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머징 교회에서의 예배는 종말론적 미래와 신의 현현으로서의 고대 역사를 아우름으로서 신의 본질과의 연합을 추구한다.


판넨베르크의 “역사로서의 계시”는 역사를 통하여 만물 가운데 신의 내재를 통한 계시적 임재를 의미하기에 역사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고대- 미래 영성”이라는 관상 기도의 형태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계몽주의 이후의 불행이 신앙과 역사를 분리 시킨 것에서 기인된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고대의 신앙을 따라서 역사와 신앙을 하나로 하고자 한 것이다.

헬라 철학에 바탕은 둔 판넨베르크의 사상은 구조적으로 자연스럽게 헬라 사상의 근간이 되는 관상적 영성에 귀착될 수밖에 없었다.


만유내재신론 비평

판넨베르크는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누스의 유출설을 자신의 삼위일체의 개념에 도입시킨다.


또한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삼위일체적 하나님에 내포시킴으로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하나님의 존재의 완성을 연계시킨다.

신비주의 관상기도에서 행해지는 내면 세계에서의 하나님의 빛이나 하나님의 불꽃은 이 세계에 내포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을 추구하는 방법으로 도입되었다.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누스로부터 유래된 관상기도에서 합일의 대상으로 추구하는 하나님은 절대자로서의 일자이며 전통적인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의 여정과는 성격을 달리하고있다.

관상기도는 사도바울의 제자인 디오누시오(행17:34)로 알려진 디오니시우스의 관상기도 저작들을 통하여 카톨릭에서 수도원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지만 종교개혁과 더불어 관상기도의 저자인 디오니시우스가 사도행전에서의 디오누시오가 아닌 6세기의 인물임이 밝혀지면서 위(Pseudo-)디오니시우스로 달리 부르게되었지만 관상기도는 이미 중세 1000년의 기간동안 기독교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은 상태가 되었다.


관상기도는 브라이언 맥클라렌을 통해 리처드 포스터의 레노바레 운동에서의 뜨레스디아스 방법론으로 이머징 처치에 도입되었지만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또한  스탠리 그렌츠를 통해 판넨베르크의 만유내재신론에서 이론적 근거를 마련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에서는 위-디오니시우스의 저서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관상기도가 제거되었지만 유일하게 관상기도를 도입한 퀘이커교도의 전통이 리처드 포스터등을 통하여 포스트모더니즘과 더불어 개신교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으며 판넨베르크도 플로티누스의 일자 개념을 자신의 삼위일체 개념에 접목시킴으로서 판넨베르크의 신학을 배운 스탠리 그렌츠를 통해서도 이머징교회에 관상기도의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록 판넨베르크가 하나님의 현실이라는 개념으로 역사와 철학 속에 이성적으로 이해되는 신학을 정립하고자 만유내재신론의 신학을 정립하였지만 이는 이머징 처치의 대표격인 브라이언 맥클라렌에 의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의 교회 형태에 자리매김을 하게된 것이다.

비록 현재는 이머징 처치의 급격한 쇠퇴를 보고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교회 형태를 구성하는 새관점의 신학 구도를 가진 이머징 미셔널 처치의 지속적인 변화를 관찰할 수 있다.


이성에 대한 관점의 차이


개혁주의에서보는 인간은 살아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다.


죽었다함은 인간이 생각하는 영육혼이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인하여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하나님께 다가 갈 수 있는 능력이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최소한도로 제한되어있지만 하나님을 알만한 자연법 안에 제한되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자연법 안에 있는 인간에게는 구원에 이를 만한 능력이 상실되어있다.


자연법의 원리로는 아무리 도를 닦아도 하나님께 이를 수 없고 인류 역사상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이른 자가 없었다.


하나님의 특별법, 즉 복음은 인간이 원하지만 할 수 없는 하나님과 연합되는 길을 열어주는 복된 소식이다.


자연법은 하나님의 특별법을 수용하기 위한 기초가 되어야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특별법을 자연법의 차원으로 보편화시킬 때 복음은 더 이상 복음이 아니라 인간의 철학일 뿐이다.


판넨베르크가 하는 작업이 이러한 보편화 작업이다.


판넨베르크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비롯한 칼빈의 5대 강령의 요소가 전혀 들어가 있지 않다.


철저히 인본주의 신학의 전형을 보여줌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 인본주의 신학인 이머징 신학에 귀결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힘의 장(dynamic field)으로서의 성령


판넨베르크가 보는 성령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켜나가는 역동적인 마당으로서의 힘의 장(dynamic field)이다.


삼위 하나님으로서의 인격(persona)을 가지신 분이라기보다는 창조, 생명을 주는 동력(creative and life-giving dynamic), 즉 힘으로 묘사되고있다.


성령은 세계의 존재 자체를 삼위일체적 삶에 포함시키는 힘의 장(divine force field)으로서 만유를 신적 존재와 상호 내재케한다.


반면에 개혁주의에서 보는 성령은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원협약에 참여하신 하나님으로서 믿음을 통하여 죄사함을 받은 성도들 가운데 내주하셔서 이 땅에서 믿는 성도들로 구성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켜나가시는 분이시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도와주시는 보혜사로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아시기에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충만하게하시며 죄인인 우리가 성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한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인도해주시는 분이시다.


전적으로 부패하여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도없는 죄인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위임령을 실행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역사로서의 계시 비평


판넨베르크는 역사(geschichte)를 말씀 차원으로 끌어 올린다.


내재적 하나님의 자기 현실화의 과정에서 절대적 하나님의 자기 실현이 역사 가운데서 이루어지며 존재론적 하나님의 되어감이라는 역동성이 역사 가운데서 실현되기에 역사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의미하게 된다.


사람들은 역사 가운데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된다.


이는 마치 톰 라이트가 성경을 거대담론으로 묘사하며 역사를 통하여 성경의 이야기가 완성되어진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판넨베르크도 역사를 성경 이야기의 완성 차원에서 점진적으로 완성되어가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보고있다.


이들에게 역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기 실현이기에 관상기도의 방법으로 인간 내면 깊숙히 자리잡은 빛으로서의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하게 된다.


이머징 처치 운동가인 브라이언 맥클라렌이 종종 진리를 나무의 나이테에 비유하는 것은 진리가 역사 가운데서의 점진성을 가지고 계시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역사를 추상적인 역사(geschichte)와 객관적인 역사(Historie)로 나눈 것은 판넨베르크의 스승이었던 칼 바르트에게서 가져온 것이며 칼바르트는 창세기1장에서 11장까지를 원역사(geschichte)로 보는 반면에 판넨베르크는 원역사(geschichte)를 지금도 진행되는 현재 진행형으로 보고있다.


관상기도는 Historie의 삶 가운데서 geschichte의 삶으로 들어가서 Geschichte가운데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계시의 지속성을 경험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와 섞일 수 없으시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철저하게 죄와 분리되신 가운데 강림하셨으며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죄악된 더러움과 분리된 지성소에 임하신 분이시다.


죄로 인한 분리의 장벽을 거두시고자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는 오직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과 십자가의 보혈로 모든 이들의 죄를 사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거룩함에 참여한 자들에게 제한된 것이다.


판넨베르크가 추구하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상호내재는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함을 입은 믿는 성도들에 제한되어있지 않다.


역사로의 계시는 믿음의 조건이 선행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연합을 추구하는 관상기도는 모든 종교에도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신과의 합일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판넨베르크에 의하여 기독교로 특화된 관상기도는 십자가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은 이들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역사를 통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실현은 점진적 계시의 완성을 통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신 구원 사역을 위임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대위임령을 실천함으로서 구체화되는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기독론 비평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방법론은 자연과학이나 철학과 소통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신앙고백을 출발점으로 삼아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선포되어지는 히브리적인  케리그마 신학과는 대립 관계로서의 헬라적 방법이다.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은 증명을 통하여 존재가 인정되시는 분이 아니라 선포되어지시는 분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러가지 증거를 통하여 참 하나님을 인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불신으로 인하여 광야에서 멸망 당 할 수밖에 없었다.


이방인의 사도로 예수를 증거하였던 바울이 전도도 표면적으로는 헬라적 논리로보이나 근본에 있어서는  믿음을 요구하는 히브리적 방식으로 선포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은 믿음의 고백 위에서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아시는 성령의 도움을 통하여야만 가능하다.


판넨베르크가 기독교를 증거하기 위하여 불신자들에게 접근하는 방법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얻을 만한 자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그들의 원함에 맞추어 재단하는 것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오직 믿음을 통하여 성령의 내주하심으로만 가능하며, 이 경우에만 멸망당하지 않고 참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나가는 말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의 고통일 것이다.


상실의 고통의 시작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하나님의 고통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아담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죄 가운데 죽은 것이다.


하나님께는 사랑하는 아담과 그의 후손의 죽음은 인류의 고통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고통이었다.


죽음과 고통은 불순종과 밀접하게 관계되어있기에 오직 순종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예수님께서는 순종의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직접 성육신하시어 스스로 고통 가운데 완전한 순종을 이루시고 이를 믿는 자에게 전가시켜주심으로 죽음과 분리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셨다.


그러나 역사로서의 계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을 불완전하게 만들었고 순종과 불순종, 그리고 죄의 문제를 소외시켜 버렸다.

판넨베르크의 보편사 신학은 추락하는 기독교를 일으켜 세우려는 노력에서 행하여진 방법론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가시키시고자한 완전한 순종을 외면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방법론은 마치 웃사가 궤를 잡는 모습을 연상 시킨다.


판넨베르크가 보았던 기독교는 마치 마치에 실려가는 여호와의 궤와 같았을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오히려 종교와 삶이 하나가 되었던 중세 시대를 그리워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세우려는 기독교는 아마 중세 로마카톨릭과 같이 종교와 삶이 하나가되는 기독교였을 것이다.


이는 마차에 실린 여호와의 궤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다.


진정한 기독교는 자연법의 지배를 받는 하나님의 통치영역과 하나님의 특별법인 복음에 의하여 특정화된 하나님의 구속 영역으로서의 교회로 구분 되어야 할 것이다.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적 신학 방법론은 교회를 세상에 접목시키는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방법이며 이는 이머징미셔널 처치로 구현되고있다.


세상과 교회를 하나로 만드는 미셔널 처치의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의 두 나라(two Kingdom)를 인정하지 않는다.

판넨베르크는 기존 정통주의 신학과는 달리 믿음을 전제로 하지 않고 이성에 호소하는 아래로부터의 신학을 하고 있기에 많은 부분에서 기존 정통주의 신학과는 다른 양상과 결과들을 보일 수밖에 없다.


판넨베르크의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비롯한 보편사적 신학은 이미 슐라이허마허와 칼 바르트를 거치면서 인본주의 신학 방법으로으로 자리매김을 하였으며 최근에 붐을 일으키고있는 톰 라이트의 바울에 대한 새관점도 신학의 성격에서는 판넨베르크의 아래로부터의 보편사적 신학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참고도서

김영한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대한기독교서회, 2003, 349-462.

마커스 보그. 톰 라이트, “예수의 의미” 한국기독교연구소, 2010

존 쿠퍼, 김재영역, 철학자들의 신과 성서의 하나님, 2006, 425-460

박찬호, 판넨베르크 신학 비판, 웨스트민스터출판부, 2003


최성수,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신학연구, 한국학술정보,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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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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