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도서 2016. 5. 10. 17:54

“칭의, 균형있게 이해하기(박재은, 부흥과 개혁사)”


  by 김원호(dent4834@hanmail.net)



개혁주의에서 보는 성경의 전체적 구도는 “언약적 구속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Salvation)” “구속(Redemption)”을 위한 성경 이야기의 핵심은 “어떻게 죄인이 의인이 될 수 있는가”이다.


“칭의”라는 단어는 구원이라는 그릇에 담겨있는 죄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일 것이다.


하지만 “칭의"라는 단어는 많은 신앙인들을 잘못 인도하고 있다는 오해를 받게 되면서 기독교계에서 끊임없이 퇴출의 위협을 받고 있다.


더군다나 칭의를 담고 있는 구원이라는 주제까지도 기독교를 협소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피하고 싶은 주제로 취급 받는 상황까지 되었다.


칭의와 구원에 관한 주제는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신론 중심의 기독교를 인간 중심의 기독교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원망까지 받고 있다.


톰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새관점주의자인 스캇 맥나이트는 복음 자체를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완성 시키는 예수의 이야기Story of Jesus as the fulfillment of Israel’s Story”로 규정함으로서 그동안 개혁주의가 견지해왔던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원 협약에 근거한 언약적 구속사”로부터의 일탈을 시도한다.


복음에 대한 정의가 바뀌게 되면 예수의 역할도 달라질 수밖에 없으며 우리에게 전가 될 예수의 완전한 순종의 의도 의미가 없어져 버리며 칭의의 근거가 되는 전가교리도 상실될 수밖에 없다.


최근 한동안 출판계를 달구었던 톰 라이트와 존 퍼이퍼의 “칭의 논쟁”은 개혁주의와 새관점이 서로 공존 할 수 없는 서로를 부정하는 논쟁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존 파이퍼는 인간이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선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다고 말하며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의 의를 전가 받아야만 한다고 말하는데 반하여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행위로 인하여 완성되어야 한다며

인간의 공로를 주장한다.


이는 단지 톰 라이트와 존 파이퍼만의 논쟁이 아니라 개혁주의 영역들과 새관점주의 영역들 전반에 걸쳐서 보편화되고있다.


비록 우리나라에는 영향력이 미미하지만 서구 기독교는 “페더럴 비전(Federal Vision)”의 일탈로 인하여 홍역을 치르고 있는 상황이다.


새관점과 유사한 언약적 율법주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페더럴 비전은 카톨릭과 마찬가지로 성례를 칭의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칭의의 조건이 개인적인 믿음의 고백에서 공동체로의 참여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개혁주의의 칭의가 구원론에 속하여 있다면 새관점에서의 칭의는 교회론에 속하여있는 것이다.


새관점에서는 칭의의 근거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을 말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 받는 것을 근거로하는 개혁주의의 주장과 다른 것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the Faithfulness of God)”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약속을 신실하게 이행하심이 근거가 되어 하나님의 언약 백성만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수 있기에 칭의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외적인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인 역사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신약의 하나님 나라 백성은 산상수훈을 지킴으로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종적 칭의는 행함에 의하여 결정되기에 언약 백성에 참여한 것으로 최종적 구원이 보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페더럴 비전과 동일하게 카톨릭의 반펠라기우스 주의로 돌아간 것이다.


이와 같이 칭의에 관한 주제는 종교개혁 이후 지금까지 줄곧 식지 않는 뜨거운 감자였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 가운데 하나는 그의 수도원 생활 가운데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죄에 대한 문제 해결이 결코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극도의 좌절감이 그를 피폐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칭의 교리에 대한 뜨거움도 시간이 지나면 식을 것이라는 생각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알리스터 맥그레스는 자신의 저서 “하나님의 칭의론"에서 칭의 교리는 지난 16세기 이후 서구교회의 균열을 만들고 이 균열을 지속 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말하였듯이 교회 분열의 주범으로 지적되었다.


1997년 "The Gift of Salvation"이란 이름으로 카톨릭과 복음주의가 함께하는 신학자들의 모임(Catholic Evangelical Together; ECT)에서도 칭의 교리는 "불필요하게 분열시키는 논쟁"(Needlessly divisive dispute)으로 폐기되어야 것으로 결론이 났었다.


폴 틸리히등 현대신학자들은 이신칭의의 교리를 공룡의 화석 정도로 여기고 지금은 뜨거운 신학적 쟁점의 대열에서 빠져 버려야 할 것으로 여겼다.


칭의는 예수와 바울이라는 주제를 대립 관계로 몰아가는 주범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불트만은, 칭의는 바울 복음의 제한된 표현 양식이며 바울의 칭의론에서는 윤리가 나올 수 없다며 전통적 칭의론에 심각한 비판을 가했었다. (김세윤, 칭의와 성화 17)


이에 대해 김세윤 교수는, 바울이 예수의 가르침을 전혀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바울의 칭의의 복음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과 일치한다는 불트만의 주장은 대단히 역설적이라고 말한다.(김세윤, 칭의와 성화93)

샌더스 (E. P. Sanders)는 예수와 바울을 대립 관계로 보는 오해는, 개혁주의가 바울이 실제로 반응한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에 믿음에 의한 칭의를 통하여 바울이 말하려는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하는데 실패했다고 보면서 “바울에 대한 새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을 제시한다.


슈바이처에 상당히 공감을 하며 슈바이처의 접근과 비슷한 접근을 하고 있는 톰 라이트(N. T. Wright)는, 슈바이처의 법정적 칭의론에 의한 윤리의 결핍에 대한 비판은 케제만의 관계적  칭의론에 대한 개념이 보충될 때  비로소 해결 될 수 있다며, 케제만의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을 칭의의 근거로 내세운다.(톰 라이트, 예수의 도전 119)

톰 라이트는 바울이 주장한 칭의는 율법주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새관점에서 주장하는 언약적 신율주의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개혁주의는 칭의에 대한 이해의 차이로 인하여 로마 카톨릭과 결별하였지만 최근에 와서는 개신교 안에서도 페더럴 비전을 비롯하여 새관점학파들을 중심으로 로마카톨릭과 같은 반펠라기우스적 칭의론을 주장하려는 움직임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새관점의 대표적 인물인 톰 라이트는


"복음은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선포하는 것이며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가족이 되게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어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이다.

칭의라는 것은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의 커다란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Johnson & Waters, by faith alone 43)고 하면서 칭의를 공동체의 일원의 개념과 일치시킨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 정당성이 입증될 사람, 즉 미래적 칭의를 약속 받은 사람은 그들의 마음과 삶에 하나님의 율법 즉 토라를 새겨 넣은 사람들이다” (Johnson & Waters, by faith alone 49)라고 말하면서 삶과 미래적 칭의를 연관시킨다.


전통적 개혁주의의 바울 이해가 주로 개인의 죄와 관계된 칭의를 주제로 하고 있다면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Krister Stendahl의 바울 이해를 수용하여) 주로 공동체적인 죄를 다루고 있기에 개인 구원보다는 당연히 사회 구원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톰 라이트는 바울의 칭의 교리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서 칭의는 부차적인 것이며, 칭의란 (죄인이 구원 받는다는) 구원론에 속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냐는) 교회론에 속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교회에서의 알곡과 가라지의 구별은 믿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행위에 속하여 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유대주의의 언약에 대한 역사적 이해라는 관점에서 바울이 말하는 칭의를 생각해보면 “칭의란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의 공동체에 들어가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누가 그 공동체에 속하였다고 말할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N. T. Wright, What Saint Paul Really Said? 120)


톰 라이트에게 종말론이란 “메시아 예수”를 통하여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였고, 아브라함 언약이 그 절정에 도달하였기에, 예수를 추종하는 자들은 믿음 안에서 “현재 칭의”를 받고, 성령과 더불어 행함으로써 “미래 칭의”를 확증 하게 된다는 것이다(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133)


칭의에 대한 주제와 관계된 또 하나의 변화된 환경은 아브라함 카이퍼의 화란개혁주의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전의 전통적 개혁주의의 중심된 주제가 그리스도의 구원론이었다면 화란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라는 신론이 중심이 된다.


개혁파 구원론에서의 중심 주제였던 칭의는  신론 중심으로 옮겨가면서 최근에 와서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에서 비롯된 “의"의 개념도,  톰 라이트가 새관점에서 의의 근거로 제시하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케제만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가, 자연스럽게 신론 중심의 화란개혁주의와 접목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것이다.


바빙크는 루터파와 개혁파의 구별에 관하여 당대에 유행하던 입장을 소개한다. 개혁파는 신학적으로 사고하고, 루터파는 인간론적으로 사고 한다고 첫 마디를 시작한다. “개혁파는 역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이념 곧 하나님의 작정에까지 추적한다. 루터파는 구원역사에 만족하고서 하나님의 작정에 침투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개혁파에게는 선택론이 교회의 심장이지만, 루터파에게는 이신칭의가 교회의 생사가 달려있는 조항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영광이 처음과 마지막 관심사이지만, 후자에게는 인간의 구원이다. 전자는 이교사상과 우상 숭배를 대항한 투쟁이지만, 후자는 유대교나 행위에 의한 거룩을 투쟁한다.”고 강변한다.(신칼빈주의 운동,유해무)

칭의의 개념은 성화와의 관계로 인해서도 개념의 변화가 생기기도 한다.


김세윤 교수는 전통적인 구원론에서는 칭의 다음에 성화가 단계적으로 이어지므로 윤리 없는 구원이라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치우친다는 것이다(『칭의와 성화』, p. 81).


이에 대하여 박영돈 교수는 “그것은 통상적인 오해일 뿐, 개혁교회의 구원론에서는 칭의와 성화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칼빈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은혜의 두 면이다. 곧 단일하면서도 이중적인 은혜이다(One grace yet two-fold grace)”라고 비평한다.


박영돈 교수는 “구원의 전 과정에서 칭의와 성화는 긴밀하게 영합하여 병행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칭의와 성화는 영원히 분리될 수 없는 연합으로 엮어져 있기 때문에, 이 둘을 서로 분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찢어버리려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점에서 칭의와 성화가 긴밀히 연결되어있음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우리는 구원 받은 후 칭의에서 바로 성화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칭의의 바탕 위에서 신앙 생활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칭의는 구원의 서정에서의 중심이며 이는 전적으로 행위와 상관없으며, 즉 믿음 이전과 이후의 모든 행위와 상관없다.( 바빙크 개혁교의학 4; 219)


칭의는 창세 전에 삼위 하나님의 구원 협약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택자의 행동과 무관하게 선택 받은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칭의는 개혁주의의 중심교리들인 “오직 은혜”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  “의의전가”등은 물론 성화와 관계성의 혼동으로 인한 “현재적 칭의” “미래적 칭의” “유보적 칭의”등의 많은 용어들이 생겨나고 있다.


“죽산 박형룡은 ‘성화를 칭의와 나눌 수 없이 연결되고 둘이 결코 분리되지 않지만 반드시 구별돼야 하며, 성화를 칭의와 혼동하는 것은 성경을 생각 없이 읽는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과오’라는 칼빈의 입장을 취했다”

김균진의 뿌리가 되는 바르트 신학에 대해 그는 “외형적으로 칼빈의 성화론과 유사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며 “바르트는 칭의와 성화를 하나로 본 것이며, 칭의 속에서 성화를 보고 성화 속에서 칭의를 보고 있어 사실상 둘을 구별할 수 없다”고 밝혔다.(복음주의조직신학회, 제30차 정기논문발표회-조봉근 박사)


이상과 같이 “칭의(Justification)”라는 주제는 개혁주의 신학의 가장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지난 500년 동안 가장 많은 도전을 받아왔고 지금도 여전히 식지 않는 뜨거운 감자인 것이다.


그렇다고 기독교에서 “칭의"라는 주제를 배제한다거나 아니면 새관점과 같이 칭의의 개념 자체를 바꾼다고해서 서로 화합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분열의 양상만 짙어질 뿐이다.


가장 올바른 해결책이라면 “칭의"의 성경적 개념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식하는 가운데 그동안 논의되어왔던 “칭의"에 대한 여러가지 개념들이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아보는 가운데 “칭의"에 대한 제대로 된 개념을 신앙의 기반으로 삼을 때 개혁주의 신앙에 더욱 견고히 설 수 있게 될 것이다.


부흥과 개혁사에서 출간된 박재은 박사의 “칭의, 균형있게 이해하기"는 이러한 혼란을 잠재우기라도 하듯 결코 길지 않은 글로서 깔끔하고 간결하게 정리를 해 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책 전체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박재은 박사의 “칭의, 균형있게 이해하기"는 총 3장으로 구성되어있다.



1장에서는 주로 과거의 대표적 논쟁들을 정리하였으며 상황적 접근보다는 원론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첫 번째로는 칭의에 행위적인 요소가 가미됨으로 인해서 인간의 역할이 강조되고 하나님의 주권이 약화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로는 이러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것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대신에 인간의 역할을 약화시킨 반율법주의 칭의론을 다루고있다.


칭의에 있어서 인간이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으며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완전한 형태의 “무상" 선물을 강조하는 무상칭의론자들의 반율법주의 칭의론으로서, 특히 존 이튼(John Eaton)의 반율법주의를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바울에 대한 새관점"과 유사한 성격의 신율법주의(neonomism) 칭의론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율법의 성격에 준하는 “새로운 법"으로 보는 것이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를 예로 들고 있다.


네 번째로는 존 브라인(John Brine)을 예로 들면서 18세기에 영국에서 유행한 반율법주의와 신학적 맥을 같이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대신에 인간의 역할을 약화시킨 하이퍼 칼빈주의의 칭의론의 핵심 사상들에 대하여 설명한다.



마지막으로는 영원으로부터의 칭의를 다루면서 게할더스 보스나 아브라함 카이퍼의 경우와 반율법주의자들이나 타락 전 예정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받는 오해들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의 불균형을 초래한 “죄인을 의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영원 작정"과 “칭의 자체"에 대한 혼동에 대하여 설명한다.


2장의 제목은 “현대의 균형 잃은 칭의론"이다.


첫 번째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두 기둥에 대한 이해다.

존 스토트과 에버렛 헤리슨 사이의 논쟁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칭의와 성화라는 관점에서 풀어나간다.


이와 함께 개혁주의권에서 지지를 받는 “순종과 헌신이라는 믿음의 열매를 맺는 주재권 구원”과 세대주의권에서 지지를 받는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되고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을 믿는 무상 은혜”의 차이에 대하여 설명하며 주제권 구원이 행위 구원론으로 오해 받아서는 안되는 점들을 설명한다.


이는 최근 논쟁이 되고 있는 김세윤 교수의 “칭의와 성화”와 “유보적 칭의론”이 어떠한 점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부분이다.


두 번째로는 신율법주의와 유사하며 또한 새관점과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페더럴 비전의 칭의론에 대하여 설명한다.


믿음과 행위를 칭의의 조건이나 근거로 삼는 페더럴 비전에 대하여는 1) 언약에 대한 이해  2)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한 거부  3) 믿음과 순종에 대한 관계를 중심으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세 번째로는 현재 바울 신학에 관하여 뜨거운 감자라고 할 수 있는 “바울에 대한 새관점”에 관하여 논하고 있다.


“바울에 대한 새관점”을 다루고 있는 이 부분은 이 책의 가장 뜨거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곳에서는 언약적 신율주의, 율법의 행위, 이신칭의, 그리스도의 의의전가, 미래 칭의와 삶의 방식등으로 지면의 열기를 가득하게 채워 넣고 있다.


3장에서는 첫 번째로 1장과 2장에서의 논란을 잠재우기 위하여 원론적으로 고려해보아야 할 능동적/수동적 칭의를 관점의 차이, 믿음의 위치, 논리적 우선순위라는 3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 있다,



두 번째로는 헤르만 바빙크가 능동적/수동적 칭의를 어떠한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세 번째로는 네덜란드 개혁신학자 헤르만 비치우스의 칭의론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그가 능동적/수동적 칭의에 대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절충을 하면서 지혜롭게 풀어 나아가고 있는지 보여줌으로서 모든 논쟁을 잠재우는 비치우스의 지혜를 이 책의  결론적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 책의 칭의의 다양한 상황에 대한 설명들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칭의에 대한 생각의 위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주며 개혁주의 칭의 교리가 어떤 의미에서 중요한 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이제 우리에게는 “칭의에 대한 개념이 다른 교회를 같은 교회 공동체로 인정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주어진다.


제임스 패커는 전 생애에 걸쳐 개신교와 카톨릭과의 연합을 주도하고 대화를 시도해보았지만 결과적으로 열매 맺은 것은 거의 없었다.


카톨릭과 개신교가 타협할 수 없었던 교리의 한 가운데에는 “칭의” 교리가 있었다.


새관점과 유사하게 아르미니우스적인 구원론을 가지고 있는 페더럴 비전의 이단성을 염려하는 한 가운데에도 마찬가지로 “칭의" 교리가 있다.


현재 톰 라이트의 “바울에 대한 새관점"과 페더럴 비전은 성례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있지만 언약적 율법주의 구도에서는 거의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번 책에서 보여준 칭의에 대한 커다란 시작 차이에도 불구하고 페더럴 비전과는 달리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별로 이단성의 논쟁이 없이 자연스럽게 개혁주의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상황에서 칭의에 대한 좀 더 올바른 이해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해줄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존 페스코가 말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 칼빈과 톰 라이트- 6부


요약과 결론들

Summary and Conclusions


칭의에 대한 라이트와 칼빈의 분석을 비교해서 대조해본 결과 우리는 이 두 신학자 간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In our comparison and contrast of the analyses of N. T. Wright and Calvin on justification we see great divergence between the two theologians.  


새관점에서는, 바울이 전체적으로 어떻게 유대인과 이방인이 1세기 교회에서 공존할 수 있느냐하는, 구원론과 사회론의 문제를 다루고있다고 말한다.

The new perspective argues that Paul largely deals with matters of ecclesiology and sociology, how Jews and Gentiles can co-exist in the first-century church.  


(새관점에서) 칭의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시는, 언약에 대하여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세대의 마지막에 자신의 백성을 옳다고 하시는 것이라고 한다.

Justification is a declaration that God, who is faithful to His covenant promises, which is a display of His righteousness, makes at the consummation of the age to vindicate His people.


다른 한편 개혁주의에서는, 바울이 전체적으로 구원론을 다루고있는데, 이(구원론)는 교회론과 종말론과 서로 연결되어있는 것이다.

The Reformation, on the other hand, argues that Paul largely deals with matters of soteriology, which are intermeshed with ecclesiology and eschatology.  


결과적으로 칭의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근거로하여 의롭다고 분명히하시는 때를 말한다.

Consequently, justification is when God declares a person as righteous based upon the imputed righteousness of Jesus Christ.  


어쩌하던 간에, 이 글은 칭의가 라이트와 칼빈에 있어서 전혀 다른 축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If anything, this essay has demonstrated that justification rotates on entirely different axes for Wright and Calvin.  


트루만은 말하기를,"솔직히 말해서"

“To put it bluntly,” writes Trueman,

내가 보기에는 소위 바울에 관한 새관점의 옹호자들에 의해서 공식화되는 칭의 교리에 대한 최근의 재조명은 종교개혁의 강령과 교리의 궤도 안에서 서려고하는 개신교를 근본적으로 거절하는 것 밖에는 안되며, 또한 최소한도로 돌아가서 궁극적으로 어거스틴으로부터 시작해서 칭의에 대한 전체 서구 전통을 거절하는 것이다.

it seems to me that the current revision of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as formulated by the advocates of the so-called New Perspective on Paul is nothing less than a fundamental repudiation not just of that Protestantism which seeks to stand within the creedal and doctrinal trajectories of the Reformation but also of virtually the entire Western tradition on justification from at least as far back as Augustine.[57]


과학의 역사로부터 언어를 빌려온다면, 새관점주의자들은 우리들에게, 우주가 구원론이 아니라 교회론 주위를 회전하는 것을 보는데 있어서, 자신들의 망원경을 통해서 보라고 설득하고있다.

To borrow language from the history of science, the proponents of the new perspective are beckoning us to look through their telescopes to see that the universe does not revolve around soteriology but rather ecclesiology.  


우리는 코페르니쿠스 혁명이 진행 중인 교회 역사의 기반 위에 있기에, 바울에 관한 옛 관점을 지지하는 이들이 망원경을 통해서 진리를 보는 것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곧 얼굴이 붉어질 것이란 말인가?

Are we at a nexus in church history where a Copernican revolution is underway and the advocates of the old perspective on Paul will soon wear the red faces of chagrin because they have refused to peer into the telescope and see the truth?  


분명히 말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이다

Quiet frankly, the answer to this question is, No.


우리가 실제로 새관점의 망원경을 들여다보았을 때 우리는 그것이 우주를 향하여있는 것이 아니라 대신에 그들 자신이 만든 별자리 투영기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When we actually peer into the telescope of the new perspective we have found that it is not aimed at cosmos but instead a planetarium of their own making.


새관점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그것이 자신들의 반복적인 왜곡된 주문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의 일차적 자료가 결핍되었다는 것을 알게되기까지, 매우 불안해보였으며, 그리고 그것은 불완전한 정경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The case for the new perspective sounds quite ominous until we see that it lacks any reference to Reformation primary sources despite their repeated mantra of distortion, and that it is built upon an incomplete canon.


그러므로, 혁명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서, 새관점은 루터나 칼빈을 뜨겁게 흉내내는 평화로운 반항자들의   단순한 조그마한 연대인 것이다.
So, far from a revolution, the new perspective is simply a small band of peaceful protestors burning effigies of Luther and Calvin.  


그러나 이것은 바울에 관한 새관점이 신학적으로 해롭지 않은 움직임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This does not mean, however, that the new perspective on Paul is a harmless theological movement.  


반대로 새관점은 교회에 매우 치명적이다.

On the contrary, the new perspective is quite lethal to the church.  


무엇이 이러한 사상의 학파들을 치명적으로 만들고 있는가?

What makes this school of thought lethal?


이것이 너무 과장되게 꾸며지지 않았는가?

Is this not overstated rhetoric?  


아주 간단히 말한다면,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Quite simply stated, no, it is not an exaggeration.


새관점을 치명적으로 만드는 것은 이것이 복음주의 신학의 한 변형으로 표현되고있다는 것이다.
What makes the new perspective lethal is that it is presented as a variant of evangelical theology.  


아직 새관점주의자들은 어거스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복음주의 칭의 이해를 거절하고있다.

Yet, the proponents of the new perspective reject the very evangelical understanding of justification that goes as far back as Augustine.  


새관점주의자들은 칭의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거절 할 뿐만이 아니라 이들은 정경에 대한 역사적 복음주의 이해를 거절하고있다.

Not only do new perspective advocates reject the historic understanding of justification but they also reject the historic evangelical understanding of canon.[58]  


예를 들면, 로마서에 대한 던의 주석은 Word Biblical Commentary 시리즈에 속하여 있는데, 이 시리즈는 아마 "성경의 권위를 신적인 계시로 굳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Yet, Dunn’s commentary on Romans, for example, is included in the Word Biblical Commentary series that is supposedly “firmly committed to the authority of Scripture as divine revelation.”


신적 계시에 굳게 연계시키기보다는, 새관점의 해석은 많은 점에서 평범한 해석을 보여주고있다.
Rather than a firm commitment to divine revelation, the exegesis of the new perspective reflects the interpretation of mediocrity on many points.  


쉐렌 키에르케고르는 "범인의 성경 해석은 해석을 계속하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 자체로 죽은 의미에서  빠져나올 때까지 해석하며, 그리고 나서 모든 난제들을 제거한 후에, 이것은 안정이되며,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호소하게된다"고 관찰하였었다.

Søren Kierkegaard once observed that the “biblical interpretation of mediocrity goes on interpreting and interpreting Christ’s words until it gets out of them its own spiritless meaning—and then, after having removed all difficulties, it is tranquilized, and appeals confidently to Christ’s word!”[59]  


바울에 호소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The same may be said of appeals to Paul.  


라이트는 확신을 가지고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호소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만들어가지만, 그는 에베소서를 간단하게 무시해버린다.

Wright confidently appeals to Romans and Galatians to make his case, but he conveniently ignores Ephesians.  


그러나 이것이 가장 위협적인 위협은 아니다.

This, however, is not the most menacing threat.


새관점이 교회에 가장 해를 입히는 것은 용어의 사용이다.
What makes the new perspective most harmful to the church is its use of terminology.  


새관점주의자들은 성경, 죄, 칭의, 행위, 믿음, 그리고 복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이들에게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있다.

Advocates of the new perspective use terms such as Scripture, sin, justification, works, faith, and gospel, but have given them entirely different meanings.  


비록 약80년 전에 쓰여졌지만 그레샴 메이첸의 말은 아직 바로 이러한 주제에 적용된다.

J. Gresham Machen’s words, though written some eighty years ago, still apply to this very issue.


메이첸이 기록하기를, 의심의 여지없이 "끔찍한 위기"가 교회에서 나타났다.

“A terrible crisis,” writes Machen, unquestionably has arisen in the Church.


복음주의 교회의 사역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는 이들의 숙주가 발견되었다.

In the ministry of evangelical churches are to be found hosts of those who reject the gospel of Christ.


전통적인 용어를 애매하게 사용하면서, 의견의 차이를 마치 자신들이 오직 성경의 해석에 관해서만 차이가 있는 것처럼 나타내면서, 이들은 바로 믿음의 기초에 대하여 적대적인데도 교회로의 진입이 보장되고 있는 것이다.

By the equivocal use of traditional phrases, by the representation of differences of opinion as though they were only differences about the interpretation of the Bible, entrance into the Church was secured for those who are hostile to the very foundations of the faith.[60]


이것은 바로 정통주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인데, 이는 새관점을 해가 없는 것 같이 만들며, 어느 정도 개혁주의 범주의 생각 안에 있는 것 같이 하여 라이트가 종교개혁에 적이 아닌 것같이 만든다.
It is this use of orthodox nomenclature that makes the new perspective seemingly harmless and has some within Reformed circles thinking that Wright is no foe of the Reformation.  


예를 들면, 라이트의 책 "What Saint Paul Really Said"에 대한 최근의 서평에서, George Grant는 라이트가 "증거에 비중을 두고서, 그리고 오직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정통주의만이 믿음에 대한 사도의 공헌에 관한 날카로운 질문에 충분히 대답을 하였다고 말하면서.... 라이트가 보수적인 신학적 해석에 새로운 영향력을 더하면서 법정적 정확함과 함께 신약의 자료를 심사숙고하고있다"고 말하고있다.

For example, in a recent review of Wright’s book What Saint Paul Really Said, George Grant states that Wright “weighs the evidence and finds that only historic biblical orthodoxy has sufficiently answered the thorny questions of the apostle’s contribution to the faith…. Mr. Wright pores over the New Testament data with forensic precision to add new weight to a conservative theological interpretation.”[61]


더글라스 윌슨(그는 새관점에 동조하는 페더럴비전주의자이다-역자 주)도 마찬가지로, "라이트의 공동체적 칭의에 대한 강조는 중요하고 필요한 반면에, 그가 강조하는 방법이 문제의 원인이 되고있다. 그러나 그의 테이프 강좌에서, 나는 그가 자신이 개별적 칭의에 관한 개신교 교리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분명히 들었다. 그의 전체적 접근은 놓아 두더라도 이것은 일관성이 있는 것이다."고 말한다. (윌슨의 관점이 맞다는 것이 아니라 새관점주의자인 윌슨이 자연스럽게 정통주의의 칭의 개념을 자신들의 새관점에서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하면서 생기는 혼란의 문제점을 제기하고있는 것이다.-역자)
Similarly, Douglas Wilson writes that “while Wright’s emphasis on corporate justification is important and necessary, the way he stresses it is a cause for concern.  But in a taped lecture of his, I heard him explicitly say that he was not denying the Protestant doctrine of individual justification.  Given his overall approach, this is consistent.”[62]


그렇다면, 물어보아야 할 것은, 라이트가 의미하는 칭의가 전가된 의를 뜻하는가, 아니면 종말론적 정의를 의미하는 것인가?(실제의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정의의 칭의를 구분하지 않고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있다는 것이다.-역자)

Yet, one must ask, Does Wright mean justification in the sense of imputed righteousness or as eschatological definition?  


만약에 전자라면, 그는 일관성이 없는 것이고; 만약에 후자라면, 이것은 명백하게 메이첸이 말한 바와 같이- 자유주의를 숨기는 정통주의의 명칭- 위험한 것이다,

If it is the former, then he is inconsistent; if it is the latter, then this is precisely the danger of which Machen speaks—orthodox nomenclature that veils liberalism.


이것이 후자로 나타난 것은 윌슨이 라이트를 "뛰어난 해석가"로 부르면서, 그는 "본문이 '표준' 해석들과 충돌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It appears that it is the latter because Wilson calls Wright “an outstanding exegete,” who “does not shy away from showing how the text conflicts with ‘standard’ interpretations.”[63]  


훈련 받은 신학자나 신약학자들은 명칭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하여 쉽게 분별을 할 것이지만, 그렌트의 서평이나 윌슨의 일반적인 칭송을 읽는 평신도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The trained theologian or New Testament scholar will readily identify this shift in nomenclature, but the person in the pew who reads Grant’s review or Wilson ’s general approbation may not.


마찬가지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필라델피아)의 구약학 교수인 피터 엔즈는 최근 라이트가 설교한 두권에 대하여 긍정적인 서평을 하였다.
Likewise, Peter Enns, professor of Old Testament at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 Philadelphia ) recently positively reviewed two volumes of sermons by Wright.


엔즈는, "나는 이러한 책들을, 성경적 그리스도를 좀 더 알기를 원하고 이러한 예수의 도전을 주위의 사람들에게 전해주길 원하는 사람 모두에게, 아무 주저함이 없이 권한다"고 말한다.

Enns writes, “I recommend these volumes without reservation to all who wish to know better the biblical Christ and bring the challenge of this Christ to those around them.”[64]  


하지만 만약에 복음, 죄, 칭의, 그리고 믿음에 대한 라이트의 관점이 자신의 가르침을 증거하고 있다면, 우리는 라이트의 예수가 진정으로 "성경적 예수"인지 의심해보아야한다.

Yet, if Wright’s views on gospel, sin, justification, and faith stand behind his preaching, then we must wonder if Wright’s Jesus truly is “the biblical Christ.”


새관점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옛관점을 버려야 할 아무런 근거도 제시해주지 못하고있다.
The advocates of the new perspective on Paul give us no reason to abandon the old perspective.  


그들의 사례에는 일차적인 자료들이 결핍 되어 있으며, 성경 자체와 충돌이 되는 근원적인 가정들을 가지고 있다.

Their case lacks evidence from primary sources and has fundamental presuppositions that conflict with Scripture itself.  


새관점의 원천으로부터 마시는 이들은 매우 분별력을 가지고 마셔야 하는데 이는 정통주의 명칭 뒤에 자유주의가 숨어있기 때문이며, 자유주의의 심장은 불신앙이다.

Those who drink at the fountain of the new perspective must drink with great discernment because hiding behind orthodox nomenclature lies liberalism, and the heart of liberalism is unbelief.  


끝으로, 결국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전도자의 말이 옳은 것 같다.

In the end, it looks like Qohelet was right after all—there is nothing new under the sun.


___________

[57] Trueman, “Martin Luther,” p. 1.

[58] These are not the only questionable areas in the theology of new perspective advocates.  Wright, for example, does not come out and say he believes in the virgin birth of Christ but that it is a possibility and that the New Testament authors believed it: “What if we find that, very early within the movement that grew up around [Christ], there arose two independent sources claiming that he had been conceived without a human father?  Faced with all of this, a belief in this God, and this Jesus, may compel us to hold open the possibility that this account of his conception might just be true” (Wright, Who Was Jesus?, p. 83).  He also states, “One of the best possible answers is that [Matthew and Luke] very firmly believed it to be true” (Wright, Who Was Jesus?, p. 84).

[59] Søren Kierkegaard, Attack Upon ‘Christendom,’ trans. Walter Lowrie (1944; Princeton :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8), p. 57.

[60] J. Gresham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alism (1923; Grand Rapids : Eerdmans, 1999), p. 177.

[61] George Grant, “Books: Revisiting the Apostle,” World Magazine, 1 Nov 1997 .

[62] Douglas Wilson, “N. T. Wright and All That,” Credenda Agenda 13/3 (2002), p. 10.

[63] Wilson , loc. cit.

[64] Peter Enns, “Book Review of N. T. Wright’s Crown of Fire and Following Jesus,”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58/2 (1996), p. 328.




posted by Wonho Kim
:

존 페스코가 말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 칼빈과 톰 라이트- 5부


특별한 해석학적 고찰들

Specific Exegetical Observations


앞서 라이트와 칼빈의 관점을 해설하면서 우리는 두 신학자 사이에 몇 가지 다른 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In our previous exposition of the views of Wright and Calvin, we were able to detect some differences between the two theologians.  


우리는 비교되는 3가지 주요 분야를  끄집어냄으로서 작업해야 할 주요 골격에 도달하게 된다: (1) '하나님의 의'라는 문구의 해석; (2) 칭의의 속성; 그리고 (3) '율법의 행위'라는 문구의 의미.

We brought out three major areas of comparison to give us a framework in which to work: (1) the interpretation of the phrase ‘the righteousness of God;’ (2) the nature of justification; and (3) and the meaning of the phrase ‘the works of the law.’  


이제 우리는, 각각의 주제를 완전히 분해하여 논평하기를 원하지 않고, 다른 이들이 이것을 이미 하였기에, 우리는 칼빈의 해석학적 방법을 라이트의 것과 비교하면서 몇가지 관찰을 할 수 있을 것이다.

Now, while we do not want to enter a full-fledged dissection and refutation of each issue, as others have done this elsewhere, we can make some observations about Calvin’s exegetical method in contrast to that of Wright.[34]


"하나님의 의"라는 문구의 주제에 관해서, 우리는 바울이 하나님이 소유하신 도덕적 속성을 옮겨 받는 것, 즉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공유하는 무엇, 즉 칼빈이 말하는 법정적 칭의를 의미하는지 물어보아야한다.
Regarding the issue of the phrase ‘the righteousness of God,’ we must ask whether Paul means to convey a moral quality that God possesses, i.e., Wright’s covenant faithfulness of God, or whether it is something that God imparts to His people, i.e. Calvin’s forensic righteousness.  


물론 이러한 문구는 로마서1장 17절에서 볼 수 있고, 신약의 해석에 있어서 가장 논쟁이 되는 문구인 것이다.

This phrase, of course, is found in Romans 1.17 and is one of the most debated phrases in New Testament exegesis.[35]  


이 문구에 대하여 상세히 해석하는데 들어갈 수 없기에, 우리는 라이트가 침묵하는 곳에서 칼빈이 바울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While we can not enter into a detailed exegesis of this phrase we should note that Calvin echoes Paul where Wright is silent.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께 속한 배타적인 영역이라고 전한다.

Wright conveys that the ‘righteousness of God’ is exclusively a category that belongs to God.  


반면에 칼빈은, 이것이 하나님께 속하여있는 영역일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신자와 교통하는 것이라고 언급한다.

Calvin, on the other hand, notes that it is not only a category that belongs to God but that it is also something that God communicates to the believer.  


칼빈이 로마서3.26을 해석한 것을 보자.

Note Calvin’s comments on Romans 3.26: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나타난 의로 정의한 것으로서, 이것은 그가 1장에서 가르친 것과 같이 복음에 나타난 것이다.
This is a definition of that righteousness which he said had been revealed when Christ was given, and which, as he has taught us in the first chapter, is made known in the Gospel.


그는 이것이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고 확신한다.

He affirms that it consists of two parts.  


첫번째는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것은, 실제로 많은 것 중에 한 가지로서가 아니라, 본인 자신 안에 스스로 모든 의의 충만함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The first is that God is just, not indeed as one among many, but as one who contains in Himself alone all the fullness of righteousness.  


그는 충만하고 완전한 찬양을 받으시는데 이는 그에게 마땅한 것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홀로 의롭다는 이름과 영예를 얻으셨으나 인류 모두는 불의로 저주를 받는 것이다.

He receives the full and complete praise which is His due only as He alone obtains the name and honor of being just, while the whole human race is condemned of unrighteousness.  


다른 부분은 의의 소통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결코 자신의 풍성하심을 자신 안에만 가두어 놓으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들을 인류에게 부어 넣으신다는 것이다.

The other part refers to the communication of righteousness, for God does not by any means shut His riches within Himself, but pours them forth upon mankind.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그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시는 한에서 우리 가운데 빛나시는데, 이는 만약에 믿음에 의한 즐거움이 없다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를 위하여 헛되이 내어주신 것이다,

The righteousness of God, therefore, shines in us in so far as He justifies us by faith in Christ, for Christ was given in vain for our righteousness, if there were no enjoyment of Him by faith.  


이것으로부터 이어지는 것은, 하늘로부터 치료책이 그들에게 제공될 때까지는, 그들 안에서 모든 사람이 불의하고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It follows from this that in themselves all men are unrighteous and lost, until a remedy from heaven was offered to them.[36]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라는 문구가 배타적인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 즉 그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진술하는데 있어서 고려되지 않고있다는 것이다. 그는 의로우시며 의롭게 하시는 분일 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의는 믿음을 통하여 전달되는 것이다.
So, then, to argue that the phrase ‘the righteousness of God’ is exclusively a moral quality of God, i.e. His covenant faithfulness, does not take into account Paul’s statement that with the righteousness of God (dikaiosu,nh qeou/, dikaiosune theou) He is not only the just and the justifier (di,kaion kai. dikaiou/nta, dikaion kai dikaiounta) but that this righteouness is communicated through faith.


그러나 이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칼빈과 라이트 사이의 두번째 주제, 즉 칭의의 속성으로 인도한다.

This brings us, however, to the second issue between Calvin and Wright, namely the nature of justification.


중요한 것은 라이트가 로마서3장 26절이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며 의롭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언급하고있다는데 동의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한다.
It is important that we note that Wright would agree that Romans 3.26 does state that God is both the just and the justifier.  


그러나 칼빈과 라이트가 동의하지 않는 부분은 신자와 관계된 칭의의 속성에 관해서다.

Where Calvin and Wright, however, would disagree is on the nature of the justification in relation to the believer.  


우리는 라이트가, 칭의는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속하여있음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하는 것과, 이것이 시대의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궁극적인 종말론적 인정과 우선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다.

We have already seen that Wright believes that justification is God’s declaration that a person is part of His covenant people and that this is primarily tied in with the ultimate eschatological vindication of the people of God at the consummation of the age.  


다른 한편으로, 칼빈은 칭의가 그리스도의 의가 믿음을 통하여 신자에게 실질적으로 전가된다고 믿고있다.

Calvin, on the other hand believes that justification is the actual imputation of the righteousness of Christ to the believer through faith.


양쪽 신학자를 피상적으로 보게 된다면 우리에게 주의를 요구하는 여러가지 요소들이 나타나게 된다, 말하자면 칭의와 연관된 더 큰 교리적 주제들이다.
In the cursory exposition of the views of both theologians several factors emerge that demand our attention—namely the greater doctrinal issues that are connected with justification.  


성경의 교리들이 유기체적 전체의 일부라는 것을 관찰한 사람은 워필드였다; 맞다, 이들은 각자 논의 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이들은 서로에게서 분리 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It was B. B. Warfield who observed that the doctrines of the Bible are part of an organic whole; yes, they can be discussed individually but ultimately they can not be divorced from one another.[37]  


이것은 라이트와 칼빈의 입장 사이에서 두드러진 대비를 보여주는 것이다.

This is something that is a marked contrast between the positions of Wright and Calvin.


예를 들어, 그들 각자의 칭의에 대한 정의를 비교해보면; 우선, 라이트는 칭의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정의하고있다:
For example, let us compare their respective definitions of justification; first, Wright defines justification in the following manner:


"1세기에서의 '칭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립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는, 미래와 현재에 있어서, 실제로 누가 자기 백성의 일원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정의인 것이다."

“‘Justification’ in the first century was not about how someone might establish a relationship with God. It was about God’s eschatological definition, both future and present, of who was, in fact, a member of his people.”[38]


다른 한편, 칼빈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쁘시게 의로운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정의한다.

Calvin, on the other hand, defines it as the acceptance with which God receives us into his favor as righteous men.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죄사함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구성되어있다고 말한다.

And we say that it consists in the remission of sins and the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39]  


두 사람 사이의 차이는 명백하다.
The divergence between the two men is evident.  


라이트의 정의는 신분에 관한 말로서, 누가 언약에 속하여있느냐, 혹은 달리 말하면, 라이트는 종말론으로부터 말하고있는 것이다.

Wright’s definition speaks of identity—who belongs to the covenant—or in other words, Wright speaks from ecclesiology.  


다른 한편, 칼빈은 죄, 의의 필요를 말하고있으며, 달리 말하면, 칼빈은 구원론으로부터 말하고있는 것이다.

Calvin, on the other hand, speaks about sin, the need for righteousness—or in other words, Calvin speaks from soteriology.


둘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를 만드는 것은 라이트가 궁극적으로 구원론에 속하는 모든 논의를, 다른 교리적 고려로부터 실질적으로 분리 시키면서, 무시한다는 것이다,

What makes the critical difference between the two is that Wright virtually by-passes all discussions that pertain to soteriology effectively divorcing it from other doctrinal considerations.  


이와는 달리, 칼빈은, 둘이 서로 연결되어있는 것으로 알려진, 구원론과 교회론을 연결시키고있다.

Calvin, on the other hand, makes the connection between soteriology and ecclesiology knowing that the two are interconnected.  


우리는 각각의 저자들의 여러가지 예들을 통하여 이러한 점들을 볼 수 있다.

We can see this point by several examples from each writer.


예를 들어서, 그리스도의 사역에 있어서, 톰 라이트는, 예수가 구원론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다루기 위하여 오시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For example, when it comes to the ministry of Christ, argues Wright, Jesus did not come to deal primarily with issues of soteriology.


차라리, 그리스도는 교회론적이고 종말론적인 문제들, 즉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최종적 인정을 받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있다는 것이다.

Rather, Christ presents ecclesiological and eschatological issues—namely, how to bring about the final vindication of God’s covenant people.  


라이트는,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우선적 목적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회개를 촉구하는 것인데, 이는 가벼운 각자의 죄들보다는 언약의 하나님이신 창조주에 대한 커다란 국가적 반역에 대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Wright contends that Christ’s “first aim, therefore, was to summon Israel to ‘repent’—not so much of petty individual sins, but of the great national rebellion, against the creator, the covenant God.”[40]  


라이트에 따르면, 1세기 유대교에서는 궁극적인 칭의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거나 승리를 가져오는 것에 관한 3가지 주요 선택을 제공하는데: (1) 쿰란 공통체로의 분리, (2) 헤롯과 같이 로마에 정치적으로 합의를 하거나, 그리고 (3) 열심당의 군사적인 접근을 하는 것이다.

According to Wright, first century Judaism offered three main options for bringing about the ultimate justification, or vindication and victory, of the people of God: (1) the separatism of the Qumran community, (2) political compromise like Herod’s with Roman, and (3) the militaristic approach of the zealots.[41]  


이러한 선택들은 모두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된 나라를 가져오는 것에 관한 그럴듯한 해석들이다.

These options were all specious interpretations of bringing about the promised kingdom of God ’s covenant.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Wright argues that


그렇다면, 문제는 신앙이 아니라 종말론이며, 도덕성이 아니라 나라의 도래이다. 그리고 나라의 도래는 예수님께서 알리신 것과 같이, 그의 시대의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비망록으로 도전하게된다: 너의 전통에 근거한 너의 해석을 포기하라, 그것은 너를 파멸로 몰아갈 것이다. 대신에 전통과 매우 다른 해석을 수용하라, 그것은 비록 상실되는 방법인 것 같아 보일지라도, 사실 참된 승리의 길이다. 내가 제안하건대, 이것이 상징적 행동들로 채워질 때는 예수와 바리세인들 간의 열띤 논쟁을 유발할 것이며, 예수의 삶에 대항하는 음모를 낳게 될 것이다.
what mattered, then, was not religion but eschatology, not morality but the coming of the kingdom.  And the coming of the kingdom, as Jesus announced it, put before his contemporaries a challenge, an agenda: give up your interpretation of your tradition, which is driving you toward ruin.  Embrace instead a very different interpretation of the tradition, one which, though it looks like the way of loss, is in fact the way to true victory.  It was a challenge, I suggest, which when backed up by symbolic actions generated the heated exchanges between Jesus and the Pharisees and resulted in plots against Jesus’ life.[42]


라이트는, 예수와 바리세인 간의 충돌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하기를 계속하면서, (예수와 바리세인 간의) 의견의 불일치는 그(예수)가 반율주의자이거나 혹은  그들(바리세인)이 행위에 의한 칭의를 믿은 것과는 달리 그 (예수)가 믿음에 의한 칭의를 믿은 것 때문이 아니고,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나라의 비망록이 요구하였던 것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황당한 피해망상의 자기 방어로부터 떠나서 조상의 법전들에 의해서 다시 강해져서, 세상의 빛과 땅에서의 소금이 되라는 소명을 대신 수용하라는 것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Wright continues to elaborate the conflict between Jesus and the Pharisees and argues that the disagreement came about not because he was an antinomian or because he believed in justification by faith while they believed in justification by works but because his kingdom-agenda for Israel demanded that Israel leave off her frantic paranoid self-defense, reinforced as it now was by the ancestral codes, and embrace instead the vocation to be the light of the world, the salt of the earth.[43]


자 이제 어떻게 라이트가 죄와 구원론을 무시하는지, 그리고 오직 교회론과 종말론만을 언급하는지 알아보도록하자.
Now, notice how Wright by-passes discussion of sin and soteriology and makes reference only to ecclesiology and eschatology.  


(톰 라이트가 말하는) 회개는 단순히 언약과 종말론에 관계된 전통의 잘못된 해석을 버리는 것으로 구성되어있다.

Repentance simply constitutes abandonment of misinterpretation of the tradition as it relates to covenant and eschatology.  


(여기에는) 개인적인 도덕성, 죄, 그리고 구원론의 개념들이 결여되어있는데, 이는 칭의, 교회론, 그리고 종말론과 분리가 불가능하게 연결되어있다.

Absent are the concepts of personal morality, sin, and soteriology, which are inextricably linked with justification, ecclesiology, and eschatology.


다른 한편, 칼빈으로 돌아와서 보면, 라이트의 분석과는 대조적으로 칭의를 전체적으로, 그리고 유기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When we turn to Calvin, on the other hand, we see a full-orbed and organic treatment of justification in contrast to Wright’s analysis.  


예를 들면, 칼빈은 칭의가 다른 많은 교리들과 서로 얽혀있다고 말한다.

For example, Calvin argues that justification is intermeshed with a host of other doctrines.  


그는 "그리스도는 동시에 성화 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의롭다고 하시지 않으신다. 이러한 유익들은 영속적이고 분리시킬 수 없는 연합으로 연결되므로, 그가 자신의 지혜를 비추시는 이들을, 그가 구속하시며; 그가 구속하시는 이들을, 그가 의롭다고 하시며; 그가 의롭다고 하시는 이들을, 그가 깨끗하게 하신다."고 기록한다.

He writes that “Christ justifies no one whom he does not at the same time sanctify. These benefits are joined together by an everlasting and indissoluble bond, so that those whom he illumines by his wisdom, he redeems; those whom he redeems, he justifies; those whom he justifies, he sanctifies.”[44]  


비슷한 맥락에서 칼빈은 칭의의 여정을 펼치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께서는 우선 자신의 순수하고 값 없이 주시는 선으로 죄인을 감히 포용하신다고 말할 때, 그 (죄인)에게서는 비참한 상태 외에는 찾을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즉시 자비를 베푸실 수 밖에 없으시며, 이는 사람이 궁극적으로 헛되며 선한 행실이 없기 때문에; 그는 자신 안에서 사람을 유익하게할 근거를 찾으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Along similar lines Calvin lays out the order of justification when he says that God first deigns to embrace the sinner with his pure and freely given goodness, finding nothing in him except his miserable condition to prompt Him to mercy, since he sees man utterly void and bare of good works; and so he seeks in himself the reason to benefit man.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자신의 선하신 인식으로 어루만지시며, 그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절망으로 인하여, 그의 구원을 전부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하게 하신다.

Then God touches the sinner with a sense of his goodness in order that he, despairing of his own works, may ground the whole of his salvation in God’s mercy.  


이것은 믿음의 경험으로서, 이것을 통하여 죄인이 자신의 구원을 소유하게 되는데, 이때는 복음의 가르침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다는 것을 알게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의로서 중재를 하시고 죄를 용서하심으로서 그가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This is the experience of faith through which the sinner comes into possession of his salvation when from the teaching of the gospel he acknowledges that he has been reconciled to God: that with Christ’s righteousness interceding and forgiveness of sins accomplished he is justified.[45]


칼빈이 칭의를 라이트와 전혀 다른 축으로서 순환시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It is important that we notice that Calvin’s treatment of justification rotates on an entirely different axis than that of Wright.  


칼빈이 구원론, 거듭남, 믿음, 범죄, 회개, 그리고 성화의 문제를 어떻게 칭의와 연계시키는지 관찰해보라.

Notice how Calvin connects matters of soteriology, regeneration, faith, guilt, repentance, and sanctification, to justification.


더군다나 칼빈은 개별적인 신앙인을 강조하는데 반하여 라이트는 그렇지 않다.

Moreover, Calvin emphasizes the individual believer whereas Wright does not.  


그렇다면 칼빈은 공동체를 희생하면서까지 개인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단 말인가?

Does Calvin, however, over-emphasize the individual at the expense of the corporate body?


첫 번째로, 칼빈은 자신의 칭의 교리에서 공동체를 희생하면서까지 개인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First, Calvin does not emphasize the individual at the expense of the corporate body in his doctrine of justification.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칼빈은 전체로서의 교리가 유기적임을 인식하고있다.

As previously stated, Calvin recognizes that doctrine as a whole is organic.  


모든 이들이 하여야 할 것은, 칼빈이 보이지 않는 교회를, 예를 들면,  칭의를 받은 사람들인 "하나님의 선택된 모두"로 정의 하면서 만든 연결들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All one must do is see the connections Calvin makes, for example, with his definition of the invisible church as “all God’s elect,” which are those  who receive justification.[46]


이러한 개념은 우리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세대로부터 떠나서, 회상을 해 볼 때, 좀 더 실례를 들어볼 수 있는데, 칼빈은 공동체적 단결에 의하여 특징되어지는 시대에 살았던 것이다.
This idea can be further illustrated when we recall that far from the radically individualistic age in which we now live, Calvin lived in a time that was marked by corporate solidarity.  


공동체적 단결은 강령과 고백과 교리문답에 의하여 유지되었었다.

Corporate solidarity was maintained by creeds, confessions, and catechisms.  


예를 들어, 칼빈은 제네바의 모든 거주민에게 일반적 고백에 대한 서명을 요구하는 실천을 확립하였었다.

Calvin, for example, established the practice of requiring all the inhabitants of Geneva to subscribe to a common confession.  


이것은 도시의 공동체적 연합을 유지하기 위하여 행하여진 것이다.

This was done to maintain the corporate unity of the city.[47]


예를 들어, (제네바)시에서의 교리문답인, 칼빈의 신앙 교훈은 세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세례는 . .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일원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밝히는 표시로서, 우리가, 모든 믿는 이들과 함께, 하나의 신앙으로서,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섬기고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Calvin’s Instruction in Faith, the city’s catechism, for example, states the following regarding baptism: “Baptism . . is a mark by which we publicly declare that we wish to be numbered among the people of God, to the end that we, together with all believers, may serve and honor, with one same religion, one God.”[48]  


칼빈은 개인이 세례를 통하여 공동체의 지체가 된다는 개념을 강조하고 있다.

Calvin stresses the idea that the individual is baptized into a corporate body.  


그러므로 우리는 칼빈이 교회의 공동체적 성격의 중요성과 그것의 칭의와의 연계를 간과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So, we see that Calvin does not miss the importance of the corporate nature of the church and its connection with justification.


두 번째는, 칼빈이 개인적 구원의 개념을 강조하는 실수를 범하였는가?
Second, is Calvin in error for emphasizing the concept of individual salvation?  


예를 들면, 라이트는 "로마에 보내는 바울 서신이 어떻게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거나, 어떻게 그들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수립하는가에 대하여 아무 생각 없이  진술한 것이 아니라 창조자 하나님의 언약 목적들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Wright argues, for example, that Paul’s epistle to the Romans is not “a detached statement of how people get saved, how they enter a relationship with God as individuals, but as an exposition of the covenant purposes of the creator God.”[49]  


그래도 칼빈은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룰 것이가?" 라는 성경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한 가지를 단순히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Yet, Calvin simply echoes one of the major themes in Scripture—how a person has peace with God.


예를 들어서, 칼빈은 바울과 실라에게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행16:30)라고 소리를 지른 빌립보 간수에 대하여 "그는 그의 사역자들의 문하생으로서 자신을 표현하며 진실로 겸손하였다"고 설명하고있다.
For example, Calvin comments on the cry of the Philippian jailer who cried out to Paul and Silas, “What must I do to be saved” (Acts 16.30) that “he was truly humbled to present himself as a pupil to His ministers.”[50]  


여기서 칼빈의 설명은 분명히 선을 벗어나진 않았다.

Here Calvin’s comment is certainly not out of line.  


빌립보 간수는 개인으로서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The Philippian jailer asked the question of how he, an individual, could be saved.


우리는 이러한 점에서 라이트와 새관점 옹호자들이, 종교 개혁의 바울에 관한 (포스트)모더니스트의 해석에 공헌했는지-이것은 상당히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를 의심해 보아야한다.
We have to wonder at this point if Wright, and the advocates of the new perspective, are attributing a (post)modernist reading of Paul to the Reformation, which is highly anachronistic.[51]  


예를 들면, 칼빈이 "사람의 죽음은 사람이 자아를 상실하는 자신의 근원에서 벗어나서 살려고 발버둥 친다는 사실에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생명은 자아를 둘러싼 것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로 나아갈 때 생기며, 이것에 의하여 자신의 자아를 얻게되는 것이다"와 같은 루돌프 불트만의 말을 하겠는가?

Would Calvin, for example, say with Rudolf Bultmann that “man’s death has its cause in the fact that man in his striving to live out of his own resources loses his self,” but on the other hand, “life arises out of surrendering one’s self to God, thereby gaining one’s self”?[52]  


칼빈이 하이데거 실존주의자들의 칭의에 대한 바울 해석을 인정한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힘들다.

It is hard to imagine Calvin affirming a Heideggerian exisistentialist reading of Paul on justification.


이러한 주제들을 열심히 하다보면, 우리는 세번째이면서 마지막 주제, 즉 "율법의 행위"에 관한 문구의 의미를 살펴보게된다.
With these issues addressed, this leads us to examine the third and final issue, namely the meaning of the phrase ‘the works of the Law.’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라이트와 새관점주의자들은, '율법의 행위'의 문구가 율법주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주장을 한다.
As previously noted, Wright and advocates of the new perspective argue that the phrase ‘the works of the Law’ has nothing to do with legalism.  


차라리, 이러한 문구는 할례와 같은 유대인의 문화적 상징, 혹은 경계 표지라고 언급한다.

Rather, this phrase refers to the Jewish cultural badges or boundary markers, such as circumcision.  


우리는 칼빈이 이러한 핵심 문구를 오해하였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We must ask whether Calvin has misunderstood this key phrase.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아니다'이다

The answer to this question is, No.  


우리는 어떻게 칼빈이 이러한 문구를 잘못해석하지 않았다는 결정을 할 수 있는가?

How can we determine that Calvin has not misinterpreted this phrase?  


그 답은 두 가지 면에서 그러하다.

The answer comes on two fronts.


첫 째로, '율법의 행위'는 은혜에 의한 구원 개념과 나란히 놓여있는 유일한 구절은 아니다.
First, ‘works of the law’ (e;rgwn no,mou, ergon nomou) is not the only phrase juxtaposed with the idea of salvation by grace.


예를 들어서, 로마서9:11에 대한 칼빈의 분석에서 그는 하나님께서는 행위의 공로를 고려하지 않으셨다고 분석하는데, 이는 야곱이나 에서나 하나님의 측량에 비중이 있는 어떠한 공로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For example, in Calvin’s analysis of Romans 9.11 he argues that God does not consider the merit of works because neither Jacob nor Esau had performed any works that God could weigh in the scales.  


그는 바울이 하나님의 목적을 행하는 것을 반대하는데 이는 하나님 홀로 자신의 선하신 기쁨에 속하여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He argues that Paul “sets in opposition to works the purpose of God, which is contained in His own good pleasure alone.”  


그는 에서보다 야곱이 선택되었던 것은 "형제가 태어나기 전이었고 선과 악을 행하기 전이었다"고 덧붙인다.

He adds that Jacob was chosen over Esau “before the brothers were born and had done either good or evil.”[53]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는 칼빈이 여기서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을 가져다 사용한 것이 아니고; 차리리, 그는 단순하게 행위를 '선과 악' 모두로 정의하는 바울을 반복하고있음을 알아야한다.

Now it is important that we note that Calvin does not import the Augustine-Pelagius debate here; rather, he simply echoes Paul who defines works as either ‘good or evil.’  


이러한 이해는 라이트가 제시한 것과 같이 심히 미묘한 차이가 있는 정의가 아니다.

This understanding is not the highly nuanced definition that is set forth by Wright.


로마서 9.11은 바울이 일반적인 행위와 하나님의 은혜 사이에 대립 관계를 설정한 유일한 곳은 아니다.

Romans 9.11 is not the only place that Paul sets up the antithesis between works in general and the grace of God.


칼빈은 에베소서 2장 8-9절을 해석하면서, 바울이 "의는 하나님 한 분의 자비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것이며,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에 의하여 우리에게 제공되는 것이며, 행위의 공로 없이 오직 믿음으로 수용되는 것이라는, 로마와 갈라디아에 보내는 서신에서의 긴 논쟁의 본질을 수용하는 것"이라고 기록한다.
Commenting on Ephesians 2.8-9 Calvin writes that Paul “embraces the substance of his long argument in the Epistle to the Romans and to the Galatians, that righteousness comes to us from the mercy of God alone, is offered to us in Christ and by the Gospel, and is received by faith alone, without the merit of works.”  


그는 계속해서 기록하기를, 효과적인 분석으로는 궁극적으로 새관점에서 행위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는 것과 평행을 이루는 것으로서, 이 의미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이해에는 결함이 있다는 것이다.

He goes on to write, in a telling analysis that virtually parallels the new perspective understanding of the term works,  that the Roman Catholic understanding of the term is defective.  


칼빈은 로마카톨릭이, 그리고 우리는 라이트와 새관점의 사람들을 추가할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바울이 우리가 행위 없이 의로워진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의식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기록하고있다.

Calvin writes that the Roman Catholics, and we might add Wright and those of the new perspective, tell us that Paul is speaking about ceremonies when he tells us we are justified without works.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행위의 한 가지 종류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의 전체를 거부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행위를 부정하는 것과, 사람 전체와 그가 가진 모든 것으로 구성되어있는 것이다.

But it is quite certain that he is not dealing with one sort of works, but rejects the whole righteousness of man, which consists in works—nay, the whole man, and everything that he has of his own.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은혜와 행위 간의 대조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We must observe the contrast between God and man, between grace and works.  


논쟁이 오직 의식에만 관계된다면, 왜 하나님은 사람과 대비되셔야만 하는가?

Why should God be contrasted with man, if the controversy only concerned ceremonies?[54]


바울에 관한 새관점은 그렇게 새로운 것이 아니며, 라이트와 같은 옹호자들은  '율법의 행위'라는 문구의 의미를 축소시키려는 사람으로서, 이 경우에 있어서는 행위'가 공로로서의 일반적 행위밖에 않되지만, 처음으로 해석된 것은 아니다.
The new perspective on Paul is not quite so new; advocates such as Wright are not the first exegetes who have tried to narrow the meaning of the phrase ‘the works of the law,’ or in this case the term ‘works,’ to something less than general actions of merit.[55]  


칼빈은 행위라는 의미가 할례를 포함하는 의식만을 언급하고있다는 것을 배제한다.

Calvin rules out that the term works refers only to ceremonies, which would include circumcision.  


더군다나, 중요한 것은 우리는, 칼빈이 자신의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성경의 유비를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Moreover, it is important that we see that Calvin is using the analogia Scripturae to arrive at his conclusions.  


그는 에베소서 2장 8-9절이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논하고자하는 것의 정수라고 말한다.

He argues that Ephesians 2.8-9 is a distillation of what Paul argues throughout Romans and Galatians.  


칼빈은, 일반적으로 라이트가 이의를 제기하는 것과 같이,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을 바울에 왜곡시켜  대입시키지는 않았다.

Calvin has not, as is commonly charged by Wright, eisegeted the Augustine-Pelagius debate into Paul.  


그러나 알아야 할 흥미로운 것은, 라이트를 포함하여 새관점 지지자들은, 이러한 핵심 본문에 대한 칼빈의 해석에 동의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What is of interesting note, however, is that advocates of the new perspective, including Wright, would not agree with Calvin’s exegesis of this key passage.


새관점 지지자들은 대부분 칼빈의 결론들에 대하여 동의를 하려고 하지 않는데, 이는 그(칼빈)가 본문을 잘못 해석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에베소서에 대한 바울의 저작권을 거절하고있기 때문이다.
Advocates of the new perspective would most likely disagree with Calvin’s conclusions, not because he has misinterpreted the passage, but because they reject the Pauline authorship of Ephesians.  


비록 라이트는 에베소서에 대한 바울의 저작권을 명확하게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는 에베소서 2장 8-9절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는다.

Though Wright does not explicitly deny Pauline authorship of Ephesians, he makes no reference to Ephesians 2.8-9.  


예를 들면, 던은 에베소서에 대한 바울의 저작권을 믿지 않는다.

Dunn, for example, does not believe in the Pauline authorship of Ephesians.[56]


논의를 위해서, 바울이 에베소서를 기록하지 않았다고 가정을 해보자.
For the sake of argument, let us assume that Paul did not write Ephesians.  


그렇다고 할지라도, 칭의 교리를 전부 살펴보고 노출 시켜보면, 본문을 이와같이 해석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ven so, a thorough examination and exposition of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should exegete this passage.  


이러한 본문과 그것에 대한 칼빈의 해석을 무시하고 개혁주의 전통이 곡해하였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최소 한도로 말하더라도, 결함이 있는 학문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To ignore this passage and Calvin’s exegesis of it, and then accuse the Reformed tradition of eisegesis is once again defective scholarship, to say the least.


우리가 이제 칼빈과 라이트 사이의 이와 같은 비평적 주제를 살펴보았으므로, 이제 우리의 결과를 요약해서 몇 가지 중요한 결론들을 산출해보고자 한다.
Now that we have surveyed these critical issues between Calvin and Wright, we may now summarize our results and draw some important conclusions.


________

[34] See Richard B. Gaffin, “Paul the Theologian,”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62/1 (2000), pp. 121-41; Thomas R. Schreiner, The Law and Its Fulfillment: A Pauline Theology of Law (Grand Rapids: Baker Books, 1993); Peter Stuhlmacher, Revisiting Paul’s Doctrine of Justification: A Challenge to the New Perspective (Downers Grove: Inter Varsity Press, 2001); Stephen Westerholm, Israel’s Law and the Church’s Faith (Eugene: Wipf & Stock, 1998).

[35] Thomas R. Schreiner, Romans, Baker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Baker Books, 1998), p. 63.

[36] Calvin, Romans, pp. 77-78.

[37] B. B. Warfield, “The Task and Method of Systematic Theology,” in The Works of B. B. Warfield, vol. 9, eds. Ethelbert D. Warfield, et al. (1932; Grand Rapids : Baker Books, 1981), pp. 94-95.

[38] Wright, Paul, p. 119.

[39] Calvin, Institutes, 3.9.2, p. 727.

[40] Wright, Who Was Jesus?, p. 101.

[41] Wright, Challenge of Jesus, p. 37.

[42] Wright, Challenge of Jesus, p. 58.

[43] Wright, Challenge of Jesus, p. 58.

[44] Calvin, Institutes, 3.16.1, p. 798.

[45] Calvin, Institutes, 3.11.16, p. 746.

[46] Calvin, Institutes, 4.1.2, p. 1013.

[47] François Wendel, Calvin: Origins and Development of His Religious Thought, trans. Philip Mairet (1950; Grand Rapids : Baker Books, 1997), p. 51.

[48] John Calvin, Instruction in Faith (1537), trans. and ed., Paul T. Fuhrmann (1977; Louisville : Westminster / John Knox, 1992), §28, p. 67.

[49] Wright, Paul, p. 131.

[50] John Calvin, The Acts of the Apostles: Acts 14-28, trans. John W. Fraser, Calvin’s New Testament Commentaries, eds. David W. Torrance and T. F. Torrance (Grand Rapids: Eerdmans, 1966), p. 86.

[51] Mark A. Seifrid, “The Pauline Gospel in a Postmodern Age,” in The Challenge of Postmodernity: An Evangelical Engagement, ed. David S. Dockery (Wheaton: Victor Books, 1995), p. 191.

[52] Rudolf Bult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Complete in One Volume, trans. Kendrick Grobel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51-55), vol. 1, p. 270.

[53] Calvin, Romans, p. 201.

[54] John Calvin, Galatians, Ephesians, Philippians, & Colossians, trans. T. H. L. Parker, Calvin’s New Testament Commentaries, vol. 11, eds. David W. Torrance and T. F. Torrance (Grand Rapids: Eerdmans, 1965), pp. 144-45.

[55] Seifrid remarks that “Sanders’ ‘covenantal nomism’ is at root quite similar to the medieval understanding of facienti quod in se est Deus non denegat gratiam, particularly in the via moderna” (Seifrid, “Pauline Gospel,” p. 202).  Cf. McGrath, Iustitia Dei, pp. 70-91.

[56] James D. G. Dunn, “Works of the Law and the Curse of the Law (Galatians 3.10-14),” in New Testament Studies, 31 (1985), pp. 523-42; idem, Paul and the Law, p. 230; idem, Theology of Paul the Apostle (Grand Rapids: Eerdmans, 1998), p. 13, n. 13: “There is roughly even split among critical commentators on Colossians and 2 Thessalonians (I regard the latter as written by Paul and the former probably written by Timothy before Paul’s death…), while the majority regard Ephesians and the Pastorals as definitely post-Pauline (I side with the majority).”  Cf. Silva, “The Law and Christianity,” pp. 351-52.  For general coverage of the debate over Pauline authorship of Ephesians cf. Andrew T. Lincoln, Ephesian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42 (Dallas: Word Books, 1990), pp. lix-lxiii; and Peter T. O’Brien, The Letter to the Ephesians, Pillar New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Eerdmans, 1999), pp. 37-45.  In addition to issues of canon, Dunn also rejects the doctrine of inerrancy (see Roger Nicole, “The Inspiration and Authority of Scripture: J. D. G. Dunn versus B. B. Warfield,” Churchman 97/3, 98/1, 98/3 [1983], also in Standing Forth: Collected Writings of Roger Nicole [Fearn: Christian Focus, 2002], pp. 159-222).


posted by Wonho Kim
:

존 페스코가 말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 칼빈과 톰 라이트


4부  라이트의 주장에 대한 분석

Analysis of Wright’s Claims


훈련 받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라이트와 칼빈 사이에는 칭의 교리에 대한 상당한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ven to the untrained eye, one can notice that there is a great degree of divergence between Wright and Calvin o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더군다나 칼빈이 카톨릭에서의 ‘당연함과 일치의 공로’에 대한 논쟁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최소한 칼빈을 포함하여 개혁주의자들이 바울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이방인의 개념을 들여왔다는 라이트의 주장에 어느 정도 신뢰를 부여해주는 것으로 보이기도한다.

Moreover, the fact that Calvin does mention the debate with Catholicism over condign and congruent merit appears to lend some credence to Wright’s claim that the reformers, at least Calvin, imported foreign ideas into their exegesis of Paul.  


1세기를 염두에 두고 바울을 해석하기보다는 그들(종교개혁자들)은 자신들의 16세기 주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어거스틴-펠라기우스를 자신들의 해석의 지식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Rather than exegete Paul with the first-century context in mind they had their own sixteenth-century issues by way of the Augustine-Pelagius debate informing their exegesis.  


하지만 바울에 대한 칼빈의 해석을 좀 더 깊이 파고들거나 라이트의 주장을 조심스럽게 분석해보면, 라이트의 비평이 틀렸다는 것이 나타날 것이다.

A careful analysis of Wright’s claims as well as delving more deeply into Calvin’s treatment of Paul, however, will reveal that Wright’s critique is incorrect.  


더군다나 이것은 칭의에 대한 라이트 자신의 해석의 결함들을 보여줄 것이다.

Moreover, it will reveal the shortcomings of Wright’s own interpretation of Paul on justification.  


우리는 몇몇 일반적 관찰을 통해서 라이트의 주장을 분석할 것이며, 그 다음에 칼빈의 바울 해석의 특징들을 깊이 파고들 것이다.

We will begin the analysis of Wright’s claims with some general observations and then delve into the specifics of Calvin’s exegesis of Paul.


라이트의 방법론에서의 결함들
Deficiencies in Wright’s methodology


우리가 라이트의 바울에 관한 종교개혁 해석에 대한 비판적 논평을 살펴보게 될때, 일차적 자료로서의 일부 참고 문헌에 심각한 결함이 있음을 보게 된다.
When we survey Wright’s critical statements of the Reformation interpretation of Paul there is a striking absence of any reference to primary sources.  


예를 들면 그의 "바울이 실제로 무엇을 말했는가"에서, 우리는 라이트가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칭의 교리에 대한 탐구를 그대로 인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맥그래스가 말하기를:

For example, in his What Saint Paul Really Said, we find Wright approvingly cite Alister McGrath in his survey of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McGrath writes:


칭의 교리는 그 성경적 기원과는 상당히 무관하게 의미가 발전되었으며,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확립되는 수단으로서 관여하게 된 것이다. 교회는 칭의를 곡해시키면서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케하는 논의에 포함시키기를 선택하면서, 이로 인하여 신약 성서에 심각하게 결함이 있는 개념을 강조하게된 것이다. '칭의 교리'는 바울의 기원과는 매우 무관한 교리 신학 안에서의 의미를 낳게 된 것이다.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has come to develop a meaning quite independent of its biblical origins, and concerns the means by which man’s relationship to God is established.  The church has chosen to subsume its discussion of the reconciliation of man to God under the aegis of justification, thereby giving the concept an emphasis quite absent from the New Testament.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has come to bear a meaning within dogmatic theology which is quite independent of its Pauline origins.[24]



맥그래스가 옳은지는 핵심이 아니다; 그(맥그래스)는 자신의 진술을 명백하게 일차적 자료에 근거를 두고있지만, 라이트는 그렇지 않다.
Whether McGrath is correct is beside the point; he has based his statement upon primary source evidence, whereas Wright has not.  


라이트는 어디에서 바울에 관한 전통적 해석이 잘못되었는지, 혹은 어디에서 개혁주의자가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을 본문에 곡해하였는지를 증명하는 어떠한 일차적 근원 자료도 언급하고있지 않다.

Wright does not cite any primary source material to demonstrate where the traditional exegesis of Paul is wrong or where the reformers have eisegeted the Augustine-Pelagius debate into the text.[25]  


이것은 새관점 지지자들 가운데 드문 경우가 아니다.

This is not uncommon among advocates of the new perspective.


예를 들어서, 마틴 루터에 대한 던의 비평의 경우를 보면, 그는 루터가 자신의 회심에서의 근심으로 자신이 로마서 7장의 해석을 곡해 하였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일차적 근원에 대하여 언급을 하지 않는다.
In Dunn’s critique of Martin Luther, for example, he does not cite primary sources to substantiate the claim that Luther eisegeted his own conversion anxieties into his interpretation of Romans 7.


이러한 책망을 입증하기 위하여, 던은 루터의 저작들을 직접 인용하지 않고, 대신에 Roland Bainton의 루터의 생애를 인용하고 있다.

To substantiate this charge, Dunn cites Roland Bainton’s biography of Luther, not Luther’s writings directly.[26]  


이것은, 최소 한도로 말하자면, 결함이 있는 방법론이다.

This, to say the least, is defective methodology.  


입장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 것은 분명히 책임 있는 학문의 영역 안에 있어야 하지만, 증거를 떠난 비판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To disagree with a position is certainly within the realm of responsible scholarship, but to critique apart from evidence is unacceptable.  


라이트는 일차적 자료와 그것의 역사적 환경을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왜곡에 대한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것들은 어떠한 실제적 토대로부터 떠나서 공중에 매달려있는 것이다.

Because Wright does not examine primary sources and their historical setting, his claims of distortion lack cogency; they are suspended in mid-air apart from any factual foundation.


예를 들어, 칼빈이 로마서를 해석한 것의 역사적 문맥을 보게되면, 우리는 그가 단순히 성경을 곡해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Let us turn to the historical context of Calvin’s exegetical work on Romans, for example, so that we may see that he was not simply eisegeting Scripture.


칼빈이 로마서의 주석을 기록했을 때의 16세기 환경을 조사해보면, 라이트의 주장을 누그러뜨리는 고려해야 할 많은 요소들이 있다.
When we survey the sixteenth-century milieu in which Calvin wrote his commentary on Romans, there are many factors to consider that mitigate Wright’s claims.  


David Steinmetz에 따르면 16세기에는 로마서 주석을 발간한 루터교, 개혁주의, 카톨릭, 근본주의 신학자들이 70인이 넘었다고한다.

David Steinmetz notes that in the sixteenth century there were over seventy Lutheran, Reformed, Catholic, and Radical theologians who published commentaries on Romans.  


여기에 더하여 한줌의 중세 작품은 물론 오리겐으로부터 암브로시에스터에 이르기까지  부분적이거나 완전한 교부 저자들의 주석이 있었다.

In addition to this, there were partial or complete commentaries by Patristic authors from Origen to Ambrosiaster as well as a handful of medieval works.  


칼빈이 모든 유용한 로마서 주석을 참조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작업은 이러한 작품의 내용들과 상호 관련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While Calvin did not consult all of the available commentaries on Romans, his work certainly reflects interaction with this body of literature.[27]


예를 들면, 칼빈은 로마서4장에서 아브라함을 분석하면서 비느하스와 동정녀 마리아를 언급을 하는데, 이는 그가 "자신이 저자가 아니라는 해석학적 전통과 자신이 모든 다른 면에 있어서 격렬하게 경쟁적으로 고백적인 충실들을 표현하는 해석자들과 공유하는 해석학적 전통"을 반복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 자신은 비느하스뿐만 아니라 동정녀 마리아도 언급하고있지않다.
For example, Calvin mentions Phinehas (Rom. 4.6) and the Virgin Mary (Rom. 4.20) in his analysis of Abraham in Romans 4 because he is repeating “exegetical traditions of which he is not the author and which he shares with interpreters who represent in all other respects fiercely competing confessional loyalties.  Paul himself mentions neither Phinehas nor the Virgin Mary.”[28]  


달리 말하면, 칼빈은 해석을 위하여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간의 유명한 신학적 논쟁보다도 오래된 1500년 정도 뒤로 돌아가야만하는 해석학적 논쟁에 참여하고있었다.

In other words, Calvin was participating in an exegetical discussion that went back some fifteen-hundred years to exegetes that ante-dated the famous theological debate between Augustine and Pelgaius.  


칼빈은 바울에 있어서 단순하게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을 곡해한 것이 아니다.

Calvin was not simply eisegeting the Augustine-Pelagius debate into Paul.  


이것만이 라이트가 자신의 분석에 있어서 분해하는데 실패한 유일한 역사적-상황적 주제는 아니다.

This is not the only historical-contextual issue that Wright fails to factor in his analysis.


새관점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의 상당 부분을 1세기 유대교 문헌 위에 구축하고 있다.
The advocates of the new perspective make a large part of their case on the literature of first-century Judaism.  


신학적 환경의 특성을 보여주는 1세기 유대교의 문헌들과 함께, 새관점 옹호자들은 이러한 문헌이 전통적으로 유지되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그림을 보여주고있다고 주장한다.

With the documents of first-century Judaism illuminating the nature of the theological milieu, new perspective advocates argue that this literature reveals a totally different picture than is traditionally held.  


바울 시대의 유대인들은 어리석은 율법주의자들이 아니라 은혜를 옹호하는 이들이었으며;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보호하기 위하였다는 것이다.

The Jews of Paul’s day were not crass legalists but were advocates of grace; they were simply out to protect their cultural identity.  


예를 들면, 샌더스는 타나이트 문헌, 사해사본, 외경, 그리고 위경을 조사하여서 자신의 결론에 도달하는데 이는 톰 라이트가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결론들이다.

Sanders, for example, surveys the Tannaitic literature, the Dead Sea Scrolls, Apocrypha, and Pseudepigrapha to reach his conclusions—conclusions with which Wright generally agrees.[29]


그렇다, 사실은 칼빈을 포함하여 개혁주의자들은 이러한 방대한 문헌의 실체를 조사하지 않았다; 실은 이들은 사해 사본이 수백년간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어떠한 문헌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Yes, it is true that the reformers, Calvin included, did not survey this vast body of literature; indeed, they could not have explored some of the literature seeing that the Dead Sea Scrolls would not be discovered for hundreds of years.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개혁주의자들이 1세기 유대주의의 흐름을 무시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Nevertheless, this does not mean that the reformers were nescient of the rhythms of first-century Judaism.  


새관점 옹호자들은 개혁주의자들이 신구약 중간기의 유대교 문헌인 외경에 친숙해있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The advocates of the new perspective do not take into consideration that the reformers were familiar with the writings of the apocrypha—the writings of inter-testamental Judaism.  


예를 들면, 칼빈은 외경이 다양한 로마 카톨릭 교리를 뒷받침하는데 사용되는 것에 대하여 관여하고 있었다.

For example, Calvin interacted with the apocrypha in response to its use in support of various Roman Catholic doctrines.  


예를 들면, 칼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For example, Calvin writes:


그는 죽은 이를 위하여 예루살렘에 제물을 보냈을 때 유다의 경건이 칭송을 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마지막 부활에 대한 견고한 희망을 가지고있었다는 것이다.
The piety of Judas is praised for no other distinction than that he had a firm hope of the final resurrection. When he sent an offering for the dead to Jerusalem.


그 당시의 역사 기록자가 유대의 행동을 구속의 가치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그들이 나라와 지역을 위하여 죽은 남아있던 신자들의 영원한 삶을 공유하기 위하여 한 것으로 여긴 것이다.

Nor did the writer of that history set down Judas’ act to the price of redemption, but regarded it as done in order that they might share in eternal life with the remaining believers who had died for country and religion.  


이러한 행동은 미신이나 잘못 판단한 열심이 없이 나온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율법의 희생을 우리에게까지 확장하려는 이들이 어리석다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인하여 이를 우리가 알았을 때는 무엇이 사용되기를 멈추어야하겠는가?

This deed was not without superstition and wrongheaded zeal, but utterly foolish are those who extend the sacrifice of the law even down to us, when we know that by the advent of Christ what was then in use ceased.[30]


칼빈은 1세기 유대교가, 최소한 이것이 외경을 통해서 온 것과 같이, 미신적 의식을 포함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Calvin recognizes that first century Judaism, at least as it comes through the apocrypha, contained superstitious practices.  


그래서, 외경으로부터의, "하나님 우리의 주시여, 우리가 당신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조상이나 혹은 우리의 왕의 어떤 의로운 행동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닙니다"와 같은 말에 관하여 칼빈은 "그것들은 매우 진실되고 거룩한 말들"이라고 기록하고있다.

Yet, regarding the following words from the apocrypha, “For it is not because of any righteous deeds of our ancestors or our kings that we bring before you our prayer for mercy, O Lord our God” (Bar. 2.18; NRSV), Calvin can write that they are “very true and holy words.”[31]  


그러므로 칼빈은, 최소한 잠재적으로 1세기 유대교에서 새관점주의자들이 아마 '은혜의 지지자들'이라고 부를만한 정통주의 신학의 맥락이 있었음을 인식하고있었다.

Calvin, therefore, recognized, at least implicitly, that there were strands of orthodox theology in first century Judaism, what the new perspective advocates would perhaps call ‘proponents of grace.’  


그렇다고 이러한 맥락만이 칼빈이 친숙했던 것들은 아니었다.

Yet, these strands were not the only ones with which Calvin was familiar.  


그는 감히 말하자면 속성이 '펠라기우스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맥락에 대하여도 잘 알고있었다.

He was also familiar with those strands that were, dare one say, ‘Pelagian,’ in nature.


우리는 외경에서 다음과 같은 것도 읽는다: "만약에 당신이 선택한다면, 당신은 명령들을 지킬 수 있고, 충성스럽게 행동하는 것은 당신 자신이 선택할 일이다. 그는 당신 앞에 불과 물을 갖다 놓았으며, 당신이 선택하려는 것 아무 것에나 당신의 손을 뻗어라.  각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놓여있으며 선택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나 주어질 것이다.
We read the following in from the apocrypha: “If you choose, you can keep the commandments, and to act faithfully is a matter of your own choice.He has placed before you fire and water; stretch out your hand for whichever you choose. Before each person are life and death, and whichever one chooses will be given” (Sir. 15.14-17, NRSV; Vg. 14-18).  


이러한 문구에 대하여 칼빈은 다음과 같이 반응한다:

To this passage Calvin responds:


사람이 창조시에 생명과 죽음을 취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고하자. 우리가, 그가 이러한 능력을 상실했다는 반대편에 답변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제대로 만드셨지만, 그는 자신을 위하여 많은 대책들을 고안하였다"고 분명히 밝힌 솔로몬에 부딪히려는 의도는 분명히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타락으로, 자신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 모두를 파선 시킨 원인을 제공했기에, 원래의 창조에 공헌 되었던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그의 붕괴되고 타락한 성품에 바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대적 뿐만이 아니라 Ecclesiasticus 자신에게도, 그가 누구이든 간에, 대답하겠는데: 만약 당신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 스스로가 구원을 얻으려는 능력을 찾도록 한다면, 우리는 당신의 권위가 최소 한도에서 의심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는 어떠한 편견도 증가시킬  정도로 높게 평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Granted that man received at his creation the capacity to obtain life or death.  What if we reply on the other side that he has lost this capacity?  

Surely it is not my intention to contradict Solomon who declares ‘that God made man upright, but he has sought out many devices for himself.’  But because man, in his degeneration, caused the shipwreck both of himself and of all his possessions, whatever is attributed to the original creation does not necessarily apply forthwith to his corrupt and degenerate nature.  Therefore I am answering not only my opponents but also Ecclesiasticus himself, whoever he may be: If you wish to teach man to seek in himself the capacity to acquire salvation, we do not esteem your authority so highly that it may in the slightest degree raise any prejudice against the undoubted Word of God.[32]


칼빈이 외경에서의 이러한 문구를 거절하는 이유는, Ecclesiasticus나 Sirach가 경정이 아닐 뿐만아니라 로마서 3장과 같은 성경의 증거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Calvin rejects this passage from the apocrypha not only because Ecclesiasticus, or Sirach, is not canonical but also because it contradicts the witness of Scripture, such as Romans 3.  


흥미로운 것은 외경으로부터의 이러한 문구는 새관점에서 다루어지지 않고있지만, 펠라기우스나 에라스무스 모두의 주의를 끌지 못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What is interesting is that this passage from the apocrypha goes untreated by the advocates of the new perspective, yet it does not pass by the attention of either Pelgaius or Erasmus.[33]  


그러므로, 16세기의 해석학은 1세기의 유대 문헌에 대한 지식이 없었지만, 이것의 맥락을 전적으로 몰랐던 것은 아니다.

So, while sixteenth-century exegetes were not as knowledgeable of first century Jewish literature, they were not totally unaware of its rhythms.  


이와는 반대로, 로마카톨릭교회와 종교개혁자간의 정경에 관한 다른 이론으로 인하여, 16세기 신학 논쟁은 외경이라고 불리우는 1세기 유대교의 문헌에 바로 연계되었다.

On the contrary, because of the different theories of canon between the Roman Catholic Church and the Reformation, sixteenth-century theological debate had a taproot straight into the literature of first century Judaism, namely the apocrypha.  


이제 우리가 이러한 일반적이고 상황적인 주제를 다루었으므로, 우리는 특별한 해석학적이고 신학적인 문제들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되었다.

Now that we have covered these general historical-contextual issues, we can turn our attention to specific exegetical and theological matters.

_______

[24] Wright, Paul, p. 115.  Cf. Alister McGrath, Iustitia Dei: A History of the Christian doctrine of Justification, vol. 1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p. 2.

[25] See, e.g., one of Wright’s most academic works, which we might think would be the most annotated (N. T. Wright, Jesus and the Victory of God [ Minneapolis : Fortress Press, 1996], pp. 14, 123-24, 280, and 380).  In these places he invokes the names of Luther, Calvin, Melanchthon, and “the reformers” but has only one primary source reference to Melancthon’s Loci Communes.  In one reference to Luther he only cites a secondary source, Oliver O’Donovan, Resurrection and Moral Order: An Outline for Evangelical Ethics (Leicester: Inter Varsity Press, 1986).

[26] Carl R. Trueman, “The Portrait of Martin Luther in Contemporary New Testament Scholarship: Some Casual Observations,” Lecture delivered at Tyndale Fellowship in Christian Doctrine, 2001; cf. James D. G. Dunn and Alan M. Suggate, The Justice of God: A Fresh Look at the Old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Faith (Grand Rapids: Eerdmans, 1994), p. 6; Roland Bainton, Here I Stand: A Life of Martin Luther (Nashville: Abingdon, 1950).  The same criticism can be said about Sanders’ own knowledge of historical theology (see Moisés Silva, “The Law and Christianity: Dunn’s New Synthesis,”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53/2 (1991), p. 348.

[27] David Steinmetz, “Calvin and Abraham: The Interpretation of Romans 4 in the Sixteenth Century,” Church History 57 (1988), pp. 443-55; also in idem, Calvin in Contex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5), p. 65.

[28] Steinmetz, “Calvin and Abraham,” p. 66; cf. Calvin, Romans, pp. 86, 98.

[29]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passim; Wright, Paul, pp. 18-20.

[30] Calvin, Institutes, 3.5.8, p. 679.

[31] Calvin, Institutes, 3.20.8, p. 860.

[32] Calvin, Institutes, 2.5.18, p. 338.  In addition to contradicting Scripture, Sirach contradicts itself; cf. Sir. 33.12 (Donald E. Gowan, “Wisdom,” in Justification and Variegated Nomism: A Fresh Appraisal of Paul and Second Temple Judaism , eds. D. A. Carson, Peter T. O’Brien, and Mark and Seifrid, vol. 1, The Complexities of Second Temple Judaism (Grand Rapids: Baker Books, 2002), p. 216.  


posted by Wonho Kim
:

칼빈이 말하는 칭의

Calvin on Justification


하나님의 의
The righteousness of God


톰 라이트와 칼빈을 제대로 비교하기 위해서, 우리가 라이트의 이해를 탐구하였던 것과 같은 주제를 따라서 칼빈의 칭의 교리를 계속 탐구해보도록 하자.
To see a good comparison between N. T. Wright and Calvin let us proceed to examine Calvin’s doctrine of justification along the same issues that we examined Wright’s understanding.[19]  


이러한 탐구는 두 신학자들 간에 비교하고 대조하는 일을 편리하게 할 것이다.

This examination will facilitate the task of comparison and contrast between the two theologians.  


그러므로 우선 '하나님의 의'라는 문구에 대한 칼빈의 이해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보기로 하자.

Let us therefore turn our attention, first, to Calvin’s understanding of the phrase, the righteousness of God.  


우리가 이 잘 알려진 문구를 볼 수 있는 로마서 1장17절에 대하여 칼빈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In Calvin’s treatment of Romans 1.17 where we find this well-known phrase he writes: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이것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인정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사람의 의견에 있어서 의로 계산되고 여겨지는 것으로서, 이것이 비록 단순히 사소한 것일지라도,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의'라고 언급되는 것이다.
By the righteousness of God I understand that which is approved at His tribunal, as on the other hand that which is reckoned and counted as righteousness in the opinion of men, even though it is a mere triviality, is generally referred to as the ‘righteousness of men’.


그러나 바울은, 성령이 도처에서 앞으로 올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의가 말하여지리라는 많은 예언들을, 의심하지 않고 언급하고있다.

Paul, however, is without doubt alluding to the many prophecies in which the Spirit is throughout setting forth the righteousness of God in the future kingdom of Christ .  


일부 주석가들은 이 의미를 '하나님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Some commentators explain the meaning to be ‘what is given to us by God.’  


나는 분명히 그 단어가 이러한 뜻을 가지고 있다는데 동의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복음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며, 이로서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이다.

I certainly grant that the words will bear this meaning, because God justifies us by His Gospel, and thus saves us.  


그리고, 비록 나는 질문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을 지라도, 아직은 전자의 뜻이 나에게는 좀 더 적합한 것 같다.

And yet the former sense seems to me more suitable, although I would not spend much time on the question.  


일부 학자들이 이러한 의가 값없는 죄사함 뿐 아니라, 또한 부분적으로는 거듭남의 은혜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것이다.

It is of more importance that some scholars think that this righteousness consists not only in the free remission of sins, but in part also the grace of regeneration.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값 없이 우리를 자신에게 화목케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생명으로 회복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는 후에 우리가 적절한 곳에서 더욱 길게 살펴보게 될 것이다.

I hold, however, that we are restored to life because God freely reconciles us to Himself, as we shall later show at greater length in the proper place.[20]


이제 우리에게는 이러한 중요한 문구에 대하여 칼빈이 말하는 것을 주목하는 일 뿐만이 아니라 이를 라이트 자신의 분석과 비교해보는 것도 중요하다.
Now, it is important that we note not only what Calvin says about this important phrase but also the contrast with Wright’s own analysis.  


라이트가 '하나님의 의'를 주관적이고 소유의 격, 즉 하나님께 속하여있는 속성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달리, 칼빈은 이것을 객관적이거나 혹은 기원의 속격으로 이해한다.

Unlike Wright, who reads the ‘righteousness of God’ as a subjective or possessive genitive, i.e., a quality that belongs to God, Calvin reads it as either an objective or genitive of origin.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의 의는 사람에게 주어진 어떠한 것이라는 말이다.

In other words, the righteousness of God is something that is given to man.  


칼빈은 하나님의 의가 죄 사함과 거듭남의 은혜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Calvin notes that the righteousness of God brings the remission of sins and the grace of regeneration.  


라이트에서와 마찬가지로, 칼빈의 칭의 이해에는 중요한 것들이 내포되어있다.

This, just as with Wright, has important implications for Calvin’s understanding of justification.


칼빈이 칭의를 정의할 때, 그는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로운 사람으로 기쁘시게 받으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죄사함과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라고 기록하고있다.
When Calvin defines justification he writes that it is “the acceptance with which God receives us into his favor as righteous men.  And we say that it consists in the remission of sins and the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21]  


우리는 칼빈이 칭의를 정의할 때 죄 사함의 주제를 반복하고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We see in Calvin’s definition of justification the repeated theme of the remission of sins.  


그리고 또한 칼빈이 거듭남의 은혜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의를 설명할 때, 그는 은혜를 얻는 수단으로서 전가를 조건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We also see that when Calvin explained that the righteousness of God brings the grace of regeneration that he specifies the means of obtaining that grace—namely, imputation.  


전가라는 개념은 라이트가 거부하고있는 개념이다.

The idea of imputation is a concept that Wright rejects.


라이트와는 대조적으로 칼빈은, 만약에 하나님께서 무죄 판결과 용서로  우리를 의롭게 하지 않으신다면, 바울이 언급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신에게 화목케하시고, 그것들에 대항하는 반역을 전가시키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In contradistinction to Wright, Calvin argues that if God does not justify us by acquittal and pardon, what does Paul’s statement mean: ‘God was in Christ, reconciling the world to himself, not imputing men’s trespasses against them’?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도록  죄를 짓지 않으신 그를 죄 가운데 놓으셨다.'

‘For our sake he made him to be sin who had done no sin so that we might be the righteousness of God in him.’


첫째로 내가 결론 내린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화목한 의로 여김을 받았다는 것이다.

First, I conclude that they are accounted righteous who are reconciled to God.  


칭의가 고발와 대립이 된다는 다른 문장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용서에는 의롭다고 하시는 것의 의미가 포함된다.

Included is the means: that God justifies by pardoning, just as in another passage justification is contrasted with accusation.  


이러한 대립이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표현이 법적인 용법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This antithesis clearly shows that the expression was taken from legal usage.  


건전한 사고를 가지고 있으면서 히브리어에 적절하게 능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문구가 이러한 근원에서 나왔고 그것으로부터 그것의 경향과 함의를 도출해 낸다는 사실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Anyone moderately versed in the Hebrew language, provided he has a sober brain, is not ignorant of the fact that the phrase arose from this source, and drew from it its tendency and implication.


'범죄 함이 사함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한 다윗의 말을 기술함으로서, 바울은 행함이 없는 의를 말하고 있다.

Where Paul says that righteousness without works is described by David in these words, ‘Blessed are they whose transgressions are forgiven.’[22]


우리는 라이트와 칼빈간의 차이를 다시 한번 주목해야 한다.
Once again we should notice the distinctions between Wright and Calvin.  


라이트는, 하나님께서는 칭의에 대한 법정적 판결을 하신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종말론적으로 누가 자신의 언약 백성에 속하였는지를 명확히 하신다는 것이다.

For Wright, God does make a forensic declaration in justification—namely, God eschatologically defines who belongs to His covenant people.  


라이트는 이것이 죄의 용서를 포함하고 있다고는 말하지만, 이것이 이루어지는 방법에 대해서는 명확히 규명하고 있지는 않다.  

Wright says that this includes the forgiveness of sins, but he does not specify the way in which this is accomplished.  


이와는 대조적으로, 칼빈은 칭의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깨끗하고 의롭다고 명확히 밝히는 법정에서의 선언이라고 말한다.

By contrast, Calvin argues that justification is a forensic declaration where God declares a sinner pure and righteous.  


그는 자신의 논의를, 고린도후서 5장 19-21절을 논하면서, 법정에서의 범죄함과 무죄함의 판결의 선언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병행되는 것을 근거로한다.

He bases his argument on 2 Corinthians 5.19-21 and the parallel that exists between the declaration of a guilty or innocent verdict in a court room.


칼빈과 라이트 사이의 대조는 분명하다.

The contrast between Calvin and Wright is evident.  


이는 다른 주제를 탐구하도록 만든다.

This leaves one other issue to be explored.  


말하지만, 칼빈이 "율법의 행함"이라는 문구를 어떻게 이해를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Namely, what understanding does Calvin give to the phrase ‘the works of the law?’



율법의 행위
The works of the law


칼빈은 로마서 3장27-28절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사람이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거나 공로에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In Calvin’s treatment of Romans 3.27-28 he excludes the possibility that man can in anyway earn or merit salvation.  


라이트와는 대조적으로, 칼빈은 필연적이고 일치적인 공로에 대한 논쟁이었던 그의 시대에 유행하였던 논쟁을 제안한다.

In contrast to Wright, yes, Calvin does invoke a debate that was current in his day—the debate over condign and congruent merit.  


물론 이것은 칼빈이 거절하는 구분점이다.

This is, of course, a distinction that Calvin rejects.  


그는 단지 이 주제를 간단히 언급하고서 직접 분석에 들어간다.

He only briefly mentions this issue and then moves forward in his analysis.  


만약에 율법이 우리 모두를 죽음에서 구한다면, 그것(율법)에서 나오는 것이 무슨 영광이 있겠느냐고 칼빈은 말한다.

Calvin writes that if the law delivers us all over to death, what glory shall we get out of it?  


그것(율법)은 오히려 우리에게서 모든 영광을 빼앗고서 우리를 수치스럽게 하지 않는가?

Does it not rather deprive us of all glorying, and cover us with shame?  


그(칼빈)는, 우리의 죄가 율법의 판단에 의하여 노출되었는데, 이는 우리 모두가 그것을 지키는 것을 멈추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He showed then that our sin is laid open by the judgment of the law, because we have all ceased to observe it.  


그는 여기서, 만약에 의가 행위의 율법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우리의 자랑은 배제되지 않을 것이지만; 오직 믿음에 의한 것이라면, 우리 자신에 대하여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믿음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기에, 오직 원함의 겸손한 고백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있다.

He means here that if righteousness consisted in the law of works, our boasting would not be excluded; but since it is by faith alone, there is nothing that we can claim for ourselves, for faith receive all from God, and brings nothing except a humble confession of want.  


믿음과 행함 사이의 이러한 대비가 조심스럽게 인식되어야 할 것은, 행함이 어떠한 더함도 없이 보편적으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This contrast between faith and works should be carefully noticed, for works are mentioned here universally without any addition.  


그러므로 그는 의식의 준수, 특히 외적인 행함 만이 아니라, 상상 할 수 있는 행함의 공로 모두를 포함하여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He is therefore speaking not of ceremonial observances alone, nor specifically of external works, but includes all the merits of works which can possibly be imagined.[23]


이제 이 점에 관하여는 라이트와 칼빈 간의 대조가 다시 명백히 드러난다.
Now, the contrast between Wright and Calvin on this point is again evident.  


라이트는 율법의 행함이 할례나 안식일의 준수와 같은 문화적 경계를 만드는 것들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데 반하여 칼빈은 이것이 인간의 노력에 대한 전반적인 언급이라고 믿고 있다.

Wright believes that the works of the law refer to those cultural boundary markers such as circumcision and Sabbath observance whereas Calvin believes that it is a general reference to human effort.  


이제 우리가 칼빈과 라이트에 대하여 시작하면서, 두 입장 사이의 대조를 기록하는 동안, 우리는 차이를 분석하고서 바울에 대한 종교 개혁의 해석에 대한 라이트의 주장이 과연 어떠한 가치가 있는지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Now that we have set forth both Calvin and Wright on these points, while noting the contrasts between the two positions, we can analyze the differences and determine whether there is any weight to Wright’s claims regarding the Reformation reading of Pa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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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For a general survey of Calvin’s doctrine of justification as it specifically relates to faith, see Barbara Pitkin, What Pure Eyes Could See: Calvin’s Doctrine of Faith in Its Exegetical Contex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pp. 41-69.

[20] John Calvin, Romans and Thessalonians, trans. Ross Mackenzie, Calvin’s New Testament Comentaries, vol. 8, eds., David W. Torrance and T. F. Torrance (1960; Grand Rapids: Eerdmans, 1995), p. 28.

[21]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rans. Ford Lewis Battles, ed. John T. McNeill, The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vols. 20-21, ed. John Baillie, et al.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0), 3.11.2, p. 727.

[22] Calvin, Institutes, 3.11.11, pp. 738-39.

[23] Calvin, Romans, pp. 78-79.




posted by Wonho Kim
:



톰 라이트가 말하는 칭의

N. T. Wright on Justification


하나님의 의
The righteousness of God


우리는 톰 라이트의 저술로부터 새관점을 접했을 때, 자신이 (새관점에) 친숙한 유형이라는 것을 발견 할 수 없을 것이다.
When we come to the new perspective from the pen of N. T. Wright, one does not find himself on familiar terrain.  


이것은 라이트가 칭의를 공식적으로 인정할 어떠한 것도 취하지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다.

This is due to the fact that Wright does not take anything for granted in his formulation of justification.  


그는 " '믿음에 의한 칭의'의 일반적인 관점은, 비록 전적으로 왜곡된 것은 아니지만, 바울의 교리의 풍부함과 명료함에 타당하지 않으며, 실제로는 여러가지 점들을 왜곡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He writes that the “popular view of ‘justification by faith,’ though not entirely misleading, does not do justice to the richness and precision of Paul’s doctrine, and indeed distorts  it at various points.”[8]  


우리는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개념을 탐구함으로서 그의 칭의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는 것을 시작 할 수 있을 것이다.

We can begin the survey of Wright’s understanding of justification by an examination of his concept of the righteousness of God.  


'하나님의 의'라는 문구를 읽을  때, 라이트는 이것이 주격이나 소유격으로 읽혀져야한다고 말한다.

When one reads the phrase the ‘righteousness of God’ (dikaiosu,nh qeou/, dikaiosune theou) Wright argues that it must be read as a subjective or possessive genitive.[9]  


이를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의는 그 분이 그리스도인 신자에게 전가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여있는 속성이라는 것이다.

In other words, the righteousness of God is not something that He imputes to the Christian believer but rather it is a quality that belongs to God.


라이트는 로마서 3장을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하고있다:

In Wright’s analysis of Romans 3, he argues: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약속을 하시고 그것을 지키시는 스스로가 의로우신 분이시다.
"God is himself righteous, as the covenant God who has made promises and kept them.  


법률-법정 비유의 의미로 본다면, 그는 자신의 말에 진실하시며, 공평하셨으며 (바울이 하나님께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동일하게 손길을 주신다고 즉시 계속하여 말하는 방법을 주시하면), 그는 죄를 다루셨다.

In terms of the law-court metaphor, he has been true to his word, he has been impartial (note the way in which Paul goes on at once to speak of God’s even-handed dealing with Jew and Gentile alike), and he has dealt with sin.  


그는 또한 그것으로 인하여 무능한 자를 의롭게 하셨으며: 그는 '믿음을 가진 이를 의롭게 하시는 분'이시다.

He has also thereby vindicated the helpless: he is the ‘justifier of the one who has faith.’  


그가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고 이해하는, 법률-법정 비유의 의미로 볼 수 있는, 하나님 자신의 의라는 이러한 주제는 이러한 필연적인 문구의 핵심이다.

This theme of God’s own righteousness, understood as his covenant faithfulness, and seen in terms of the law-court metaphor, is the key to this vital passage.”[10]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라이트의 칭의 개념에서 중요한 것이다.
Now, this understanding of the righteousness of God is significant to Wright’s concept of justification.


칭의
Justification


우리가 칭의 교리를 다루고자 하면, 라이트는 그것이 로마에 보내는 바울 서신의 중심 주제가 아니라고 반박한다.
When we come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Wright contends that it is not the central theme of Paul’s epistle to the Romans.  


그는 "로마서를 이러한 방법으로 읽는 것은 수 백년 동안 원문에 대하여 조직적으로 폭력을 가한 것이었으며, 이제 원문에 다시 귀를 기울여야 할 때이다"라고 확신한다.

He believes that “this way of reading Romans has systematically done violence to the text for hundreds of years, and that it is time for the text to be heard again.”[11]  


라이트는, 칭의에 대한 개념은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의 시각에서 읽혀지면 안되고, 1세기 유대교의 상황에서 읽혀져야한다고 주장한다.

Wright contends that the idea of justification must not be read in the light of the Augustine-Pelagius debate but instead in the context of first-century Judaism.[12]  


물론 사도가 기록한 것은 1세기의 맥락에 있는 것이다.

It is this first-century context, after all, out of which the apostle writes.  


라이트는, 1세기에서의 칭의는 누군가가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확립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Wright argues that justification in the first century was not about how someone might establish a relationship with God.  


그것은 사실 누가, 미래와 현재에 있어서,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정의라는 것이다.

It was about God’s eschatological definition, both future and present, of who was, in fact, a member of his people.  


샌더스의 개념은, 이것은 '들어가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며, 진실로 '안에 머무름'에 관한 것이며, '누가 안에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다.

In Sanders’ terms, it was not so much about ‘getting in,’ or indeed about ‘staying in,’ as about ‘how you could tell who was in.’  


표준적인 기독교 신학 용어로는, 그것은 교회론 이상의 구원론에 관한 것이 아니며; 교회 이상의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다.

In standard Christian theological language, it wasn’t so much about soteriology as about ecclesiology; not so much about salvation as about the church.[13]


물론 이것은, 톰 라이트에 따르면, 칭의가 하나님의 의, 혹은 더욱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들 각자에 전가 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This, of course, means that justification is not, according to Wright, about imputing the righteousness of God, or more specifically Jesus Christ, to the individual believer.  


사실, 개혁주의 전통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라이트는 확실히 전가된 의의 개념을 거부한다.

In fact, with allusions to the Reformed tradition, Wright essentially rejects the concept of imputed righteousness.  


라이트는 "만약에 우리가 과거에 많이 그렇게 해왔던 것과 같은 '법률-법정 비유의 생각'을 떠난다면, 이것은 냉정한 사업의 한 단면으로서의 법 집행과, 논리적이며 올바르지만 좀처럼 우리가 예배하고 싶지 않은 하나님에 의하여 실행되는, 거의 생각의 기교라는  인상을 심어줄 것이다.”고 말한다.

Wright states that “if we leave the notion of ‘righteousness as a law-court metaphor only, as so many have done in the past, this gives the impression of a legal transaction, a cold piece of business, almost a trick of thought performed by a God who is logical and correct but hardly one we would want to worship.”[14]


(톰 라이트는 말하기를) 전가보다는, 칭의가 하나님의 의나 그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으로서, 자신에게 속하여있는 사람을 옳다고 인정하며 인치는 것이다.
Rather than imputation, justification is about the righteousness of God, or His covenant faithfulness, to vindicate and mark those people who belong to Him.  


이러한 맥락에서 라이트는 단언하기를:

Along these lines Wright contends:


그러나 생각해봐라, 바울이 (로마서 2: 25-29에서) 말하기를- 일부 참된 유대인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해본다면 누구에게서 새 언약이 시작 되겠는가?
But supposing, says Paul in [Romans] 2.25-29—supposing there exist some true Jews, in whom the new covenant has been inaugurated?  


예레미야와 에스겔에서 약속한 새 언약이 실제로 누군가에게 실현될 것인지 생각해봐라.

Supposing there are some in whom the new covenant promises of Jeremiah and Ezekiel are coming true?


그들이 유대인이든 아니든, 그들이 할례를 받았든 안받았든,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그의 참된 언약 백성으로 간주될 것이다.

Whether they are racially Jews or not, whether they are circumcised or not, they will be regarded by God as his true covenant people.  


이것이 칭의의 교리이며, 그렇지 않다면 핵심은 변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참된 백성을 옳다고 할 그 때, 큰 날이 올 것이다.

This is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or rather its first key move: there will come a time, a great day, on which God will vindicate his true people.[15]


그러고 나서, 비슷한 맥락에서, 라이트는 "칭의는 로마서 3장 24-26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참된 언약의 가족의 일원들로 밝혀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물론 그들의 죄가 사 하여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 언약의 목적이다"라며 반박한다.
Again, along similar lines, Wright contends that “‘justification,’ as seen in [Romans] 3.24-26, means that those who believe in Jesus Christ are declared to be members of the true covenant family; which of course means that their sins are forgiven, since that was the purpose of the covenant.”


그는 계속하여 "복음은 '믿음에 의한 칭의'가 아니라 예수에 관한 소식이기에, 하나님의 의, 즉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다"고 결론 내린다.

He goes on to conclude that “the gospel—not ‘justification by faith,’ but the message about Jesus—thus reveals the righteousness, that is, the covenant faithfulness, of God.”[16]  


이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칭의에 관한 전통적 개혁주의의 해석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This, as one can see, is very different from the traditional Reformation reading of Paul on the subject of justification.


라이트는 자신이 다양한 관점들에 대한 전통적 해석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특히 율법의 행위와 관계된 칭의와, 로마 카톨릭과 개혁주의 간의 논쟁에 관하여 더욱 그러하다.

Wright is clear to point out his disapprobation for the traditional reading at various points, especially as justification relates to the works of the law and the debate between Roman Catholicism and the reformers.


율법의 행위

The works of the law


상세한 부분까지는 아니지만, 라이트는 자신이 "율법의 행위"라는 문구의 의미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던을 따르고 있다.
Though not in every detail, Wright follows Dunn in his analysis regarding the meaning of the phrase, ‘the works of the law.’  


라이트는, 바울이 어리석은 율법주의를 언급하고 있다고 믿지 않으며, 그 대신에 유대인들이 할례나 안식일의 준수와 같은 문화를 만드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있다고 믿고있다.

Wright does not believe that Paul refers to crass legalism but instead to the cultural markers of the Jews—circumcision and Sabbath observance.


라이트는 갈라디아의 삶의 환경을 조사하는 가운데서, 그는 바울의 강론의 문제가 이방인 회심자가 할례를 받아야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것이었다고 기록하고있다.

In Wright’s examination of the sitz im leben in Galatia , he writes that the problem Paul addresses is whether his ex-pagan converts be circumcised or not?  


이제는 이러한 질문이 결코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혹은 루터나 에라스무스가 직면했던 문제와는 전혀 관계없다(는 것이다).

Now this question is by no means obviously to do with the questions faced by Augustine and Pelagius, or by Luther and Erasmus.  


누구든지 해석에 있어서, 특히 1세기 상황 안에서, 이것은 분명히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 즉 그들이 유대 민족이라는 표식으로 규정될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규정될 것인지-을 규정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관계되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On anyone’s reading, but especially within its first-century context, it has to do quite obviously with the question of how you define the people of God: are they to be defined by the badges of Jewish race, or in some other way?  


할례는 '도덕적' 주제가 아니며; 이는 도덕적 노력이나 선한 행실로 구원을 얻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Circumcision is not a ‘moral’ issue; it does not have to do with moral effort, or earning salvation by good deeds.  


더군다나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종교적인 의식으로만 취급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것은 모든 종교적 의식을 내적인 펠라기우스적 선행으로 지명해버리는 것으로서, 결과적으로는 갈라디아에 펠라기우스를 주된 대적으로 가만히 가지고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Nor can we simply treat it as a religious ritual, then designate all religious ritual as crypto-Pelagian good works, and so smuggle Pelagius into Galatia as the arch-opponent after all.[17]

라이트의 주장은, 율법의 행위가 바울이 그들이 구원을 얻으려고 한 유대 백성들의 시도로 취급했던 것이 아니라고 한, 던의 확신과 평행을 이루고있다.

Wright’s contention parallels Dunn’s belief that the works of the law were not the attempt of the Jewish people with whom Paul dealt to earn their salvation.  


다시 말하면 라이트의 분석은, 개신교의 해석이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을 바울의 저술에 도입하였다는 주장으로 가득하다.

Once again, Wright’s analysis is replete with the allegation that Protestant exegetes have imported the Augustine-Pelagius debate into Paul’s writings.  


더군다나 라이트의 주장은, 바울을 이러한 이방의 주제에 오염시킴으로서, 개신교와 카톨릭 양쪽 다 칭의 교리를 연합보다는 논쟁의 무기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Moreover, by contaminating Paul with these alien issues, argues Wright, both Protestants and Catholics have used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as a weapon of polemics rather than ecumenism.  


라이트는 갈라디아서에서 처음으로 바울이 가지고 있는 칭의를 크게 노출시킨 것이라고 말한다.

Wright states that Galatians offers the first great exposition of justification in Paul.  


그 장(갈라디아서)에서 주제의 핵심은, 앉아서 함께 먹도록 허락된 그리스도인이 누구냐에 대한 질문이라는 것이다.

In that chapter, the nub of the issue was the question, who are Christians allowed to sit down and eat with?  


바울에게 있어서, 유대 그리스도인이 이방 그리스도인과 함께 먹는 것이 허락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는 것이다).

For Paul, that was the question of whether Jewish Christians were allowed to eat with Gentile Christians.


종교 개혁과 반 개혁 전통 양쪽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칭의 교리를 논쟁의 중심으로 다루면서, 그리고 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는 체계를 기술한 것이라는 가정에 의하여, 자신들과 교회를 상당히 학대를 하였었다(는 것이다).

Many Christians, both in the Reformation and the counter-Reformation traditions, have done themselves and the church a great disservice by treating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as central to their debates, and by supposing that it described the system by which people attained salvation.  


그들은 이 교리를 대적하는 쪽으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They have turned the doctrine into its opposite.  


칭의는 예수를 믿는 이들 모두가, 그들의 문화적, 인종적 차이가 어떠하든 간에, 같은 테이블에 속하여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데, 상당히 많은 교파적 분파들과, 그리고 한 교파에서의 실제적인 분파들에서도 교리보다는 문화로 결론지어지는 것을 직면하여야 할 것이다(고 말한다).

Justification declares that all who believe in Jesus Christ belong at the same table, no matter what their cultural or racial differences and, let’s face it, a good many denominational distinctions, and indeed distinctions within a single denomination, boil down more to culture than to doctrine.  


잘 생각해보면,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칭의 자체에 세부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감사함으로 교제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Because what matters is believing in Jesus, detailed agreement on justification itself, properly conceived, isn’t the thing which should determine eucharistic fellowship.[18]


그러면, 칭의에 대한 라이트의 관점을 요약해보도록 하자.
So, then, let us move to summarize Wright’s views on justification.


(톰 라이트의 칭의) 요약
Summary


라이트에 의하면 바울에 관한 종교 개혁의 해석은 필연적으로 적절한 기회를 놓친 것이나 다름없다.
The Reformation reading of Paul has essentially missed the proverbial boat, according to Wright.  


(라이트에 의하면) 종교 개혁으로 되돌아가는 개신교의 해석은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을 갈라디아와 로마의 환경에 도입한 것이다.

Protestant exegetes going back to the Reformation have imported the Augustine-Pelagius debate into the sitz in leben in Galatia and Rome .  


바울은, 행함의 의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대하여 설명하기보다는, 의, 혹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 그리고 그의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입증하는 칭의 교리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라이트는 말한다).

Rather than expounding works righteousness vs. faith in Christ, Paul sets forth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which demonstrates the righteousness, or covenant faithfulness of God, and the identity of His covenant people.  


자 이제 다음 단계인 존 칼빈의 칭의 교리를 탐구하며 둘러보기로 하자.

Now, let us proceed to the next stage of our investigation and survey the writings of John Calvin o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__________
[8] Wright, Paul, p. 113.

[9] Wright, Paul, p. 101; also see idem, Covenant, p. 216.

[10] Wright, Paul, p. 105.

[11] Wright, Paul, p. 117.

[12] Wright repeats this charge multiple times, see Paul, pp. 19, 32, 35, 116, 120, 124, 129.

[13] Wright, Paul, p. 119.

[14] Wright, Paul, p. 110.

[15] Wright, Paul, p. 127.

[16] Wright, Paul, p. 129; see also idem, Covenant, pp. 148, 214.

[17] Wright, Paul, pp. 120-21; see also idem, Covenant, p. 240.

[18] Wright, Paul, pp. 158-59.

posted by Wonho Kim
:



존 페스코가 말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 칼빈과 톰 라이트


translated by 김원호(dent4834@hanmail.net)


The New Perspective on Paul: Calvin and N.T. Wright
by J.V. Fesko


출처

http://www.ligonier.org/learn/articles/new-perspective-paul-calvin-and-nt-wright/


역자의 들어가는 말


존 페스코J.V. Fesko(Academic Dean, Professor of Systematic Theology and Historical Theology of WSCal)가 말하는 새관점에 대한 비평은, 칼빈주의에 속하여있다고 생각하는 개혁주의 영역에서 있는 이들에게,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개혁주의와 관점과 어떻게 차이가 있는지를 잘 설명해주고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일반 복음주의 영역의 출판사에서 뿐만이 아니라 신학교는 물론 많은 목회자들에게 마치 새로운 유행이라도 되는듯이 아무 저항없이 보편화되고있으며, 심지어는 화란개혁주의의 기독교 세계관과도 연합하여 개혁주의의 기본 진리마저도 왜곡시키고있다.


(화란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을 잘 표현하는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이 미셔널 처치 운동을 하는 칼빈신학교의 마이클 고힌과 함께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수용한 개정판이 2005년에 새롭게 발간된 것을 비롯하여, 최근에는 그 뒤를 이어받은 리처드 미들턴의 “새 하늘과 새 땅"이 개혁주의를 표방하면서 정작 내용에서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바탕으로한 기독교 세계관의 도서로 발간되었다.)


이는 톰 라이트를 안다는 것이 마치 시대를 앞서나가는 사람인양 비추어지는 것처럼,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가 자랑이라도 하듯이 톰 라이트를 소개 하고 있지만,  정작 기독교와 유대교, 카톨릭을 섞어 놓은 것과 같은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평신도들에게 많은 혼란을 주고있으며, 심지어는 종교 개혁의 기본 진리마져도 뿌리채 흔들어버리려는 양상으로 번져 나아가고있다.


이러한 위험한 양상에 대하여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칼빈의 개혁주의 관점과 어떻게 다른지를 전하는  존 페스코J. V. Fesko의 다음 글은 새관점이 얼마나 심각하게 다른 복음인가를 잘 표현하고 있기에 이를 번역하고자한다.


서론
Introduction


전도자가 우리들에게 말하였던 바와 같이 해 아래 새것이 없다(전1.9)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근래에 와서는 바울 해석자들의 학부에서 자신들이 바울에 관한 새관점을 수용하고있다고 밝히는 표지를 내세우고있다.
Despite the fact that Qohelet tells us that there is nothing new under the sun (Eccl. 1.9), in recent years a school of Pauline interpreters have raised their banner declaring they have a new perspective on Paul.  


이 새관점의 특성은 정확히 무엇인가?

What exactly is the nature of this new perspective?  


새관점의 초기 일원 중의 한 사람인 샌더스는 역사적 개신교의 바울 해석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One of the earliest proponents of the new perspective, E. P. Sanders, argues that the historic Protestant interpretation of Paul is incorrect.  


바울은 바리세적 율법주의에 맞선것이 아니다;  차라리 바울 시대의 유대교는 행위가 아닌 은혜의 종교였다(고 샌더스는 말한다).

Paul did not face opposition from pharisaical legalism; rather, the Judaism of Paul’s day was a religion of grace, not works.  


샌더스는 바울 시대의 유대교의 전반적인 형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있다:

Sanders describes the overall pattern of Judaism in Paul’s day as:


(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2)율법을 주셨다. 율법은 (3)선택을 유지하시려는 하나님의 약속과 (4)순종에 대한 요구를 내포하고있다.  (5) 하나님은 순종에 대하여 상을 주시며 반역에 대해서는 벌하신다. (6) 율법은 속죄의 수단을 제공해주며, 속죄의 결과는 (7) 언약 관계를 유지하거나 재확립해준다. (8) 순종과 속죄와 하나님의 자비를 통하여 언약 안에 계속 머물러있는 모든 사람은 구원 받을 집단에 속하게 된다.

(1) God has chosen Israel and (2) given the law.  The law implies both (3) God’s promise to maintain election and (4) the requirements to obey.  (5) God rewards obedience and punishes transgression.  (6) The law provides for means of atonement, and atonement results in (7) maintenance or re-establishment of the covenantal relationship.  (8)  All those who are maintained in the covenant by obedience, atonement and God’s mercy belong to the group which will be saved.


샌더스는 "선택과 궁극적인 구원은 인간의 성취에 의한 것보다는 하나님의 자비에 의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Sanders emphasizes the fact that “election and ultimately salvation are considered to be by God’s mercy rather than human achievement.” [1]


샌더스가 언약적 율법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1세기 유대주의를 서술한 것이다.
It is this description of first century Judaism that Sanders has called covenantal nomism.  


바울 시대의 유대교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은혜에 의한 구원의 형태이며, 일반적으로 논의되는 바와 같은 율법주의의 유형이 아니라고 샌더스는 말한다.

It is this pattern of salvation by grace, argues Sanders, that dominates the Judaism of Paul’s day—not rank legalism as is commonly argued.  


샌더스의 경우를 단순하게 서술한다면, 바울 시대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언약에 들어가지만 그들은 순종으로 자신들의 언약 안에서의 지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A simple description of Sanders’ case is that Jews in Paul’s day entered the covenant by God’s grace but they maintained their position in covenant by their obedience.[2]  


그러나 이러한 바울에 관한 학문 분야에서의 샌더스의 초기 연구는 단지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일 뿐이다.

Sanders’ initial work in this area of Pauline scholarship, however, was only an opening volley.


샌더스의 연구의 출간에 이어서 제임스 던은 이러한 새관점에 관하여 몇 단계를 더 진전시키게 된다.
Subsequent to the publication of Sanders’ work James D. G. Dunn carried the case for the new perspective several steps further.  


샌더스의 연구가 제2성전 유대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반면에, 던 자신의 연구는 바울 자신의 저술들-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가 주목할만하다-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While Sanders’ work focused upon the literature of Second Temple Judaism, Dunn’s own work focused on the writings of Paul himself—most notably his epistles to the Romans and Galatians.[3]  


던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유대인들과 논쟁을 하고 있을 때 그(바울)는 유대주의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었다고 하면서 샌더스의 궤도를 따르고있다.

Dunn follows Sanders’ trajectory by arguing that when Paul refutes the Judaizers in Galatians he is not writing against crass legalism.


어느 정도까지 던은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 오는 칭의를 부정한 것은 좀 더 명확하게 말한다면, 칭의가 할례나 혹은 유대인의 정결을 준수하는 것이나 음식을 금기시하는 것에 의존한다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연히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할례나 음식법과 같은 법을 특별히 지킬 것을 생각하라’는 의도에서 ‘율법의 행위’에 대한 것을 말했을 것을 추론해 볼 수 있다"고 논한다.

Rather, Dunn argues that Paul’s “denial that justification is from works of law is, more precisely, a denial that justification depends on circumcision or on observation of the Jewish purity and food taboos.  We may justifiably deduce, therefore, that by ‘works of law’ Paul intended his readers to think of particular observances of the law like circumcision and the food laws.”[4]


그렇다면 로마 교회나 갈라디아 교회에서의 문제는 구원론에 관한 것이 아니고 교회론이나 사회학에 관한 것이 된다.
The problem, then, in the churches of Rome and Galatia , is not one of soteriology but rather of ecclesiology and sociology.  


던은 '율법의 행위'가 율법주의가 아니라 유대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과 관계된다고 말한다.

The ‘works of the law,’ argues Dunn, have to do with maintaining Jewish identity and not legalism.  


양 서신에서의 바울의 임무는 문화적 우월주의를 깨부수고 유대인들로하여금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동등한 동역자라는 이해를 돕는 것이된다.

Paul’s mission in both epistles is to break down the cultural elitism and help the Jews understand that Gentiles are equal partners in God’s covenant.[5]  


비록 이것은 새관점에 관한 간략한 개요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가 가장 다작의 새관점 작가들 중의 하나를 소개하는  틀을 제공해준다.

Though this is a brief thumb-nail sketch of the new perspective, this nonetheless gives us a rough framework out of which we can introduce the writings of one of the most prolific new perspective writers.


근래에 와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사제 신학자인 톰 라이트는 새관점에 관하여 수 많은 책들을 써왔다.
In recent years N. T. Wright, Canon Theologian at Westminster Abbey, has written numerous works from the new perspective.  


그의 작품에서는 샌더스와 던과 같은 비난, 즉 바울에 대한 개신교도들의 해석은 이방 신학자들의 문건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비난을 반복하고있다.

His works have echoed the same charge as Sanders and Dunn, namely the Protestant reading of Paul has been influenced by alien theological issues.


샌더스와 던과 비슷한 맥락에서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Along similar lines to Sanders and Dunn, Wright argues:


바울 시대의 유대교는 철저하게 가정 되었던 바과 같이, 율법적 행위로 의를 얻는 종교는 아니었다.
Judaism in Paul’s day was not, as has regularly been supposed, a religion of legalistic works-righteousness.  


만약 우리가 그것이 그러했고(유대교가 율법주의였다는 것), 그리고 바울이 만약 그러했던 것(율법주의)을 공격하였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것(유대교)과 그(바울)에게 상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될 것이다.

If we imagine that it was, and that Paul was attacking it as if it was, we will do great violence to it and to him.  


대부분의 개신교에서는 바울과 유대교를, 마치 유대교가 고대 펠라기우스 이단의 한 형태이며, 이것에 의하여 인간이 자신들 스스로의 도덕적 노력을 통하여 자신들을 끌어올려서 칭의와 의와 구원을 얻는다고 해석한다.

Most Protestant exegetes had read Paul and Judaism as if Judaism was a form of the old heresy Pelagianism, according to which humans must pull themselves up by their moral bootstraps and thereby earn justification, righteousness, and salvation.  


샌더스는 아니라고 말한다. 유대교 안에서 율법을 지킨 것은 항상 언약적 계획 안에서 행하여진 것이다.

No, said Sanders.  Keeping the law within Judaism always functioned within a covenantal scheme.  


하나님께 유대교에서 언약을 맺으실 때 (언약을) 시작하셨기에;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이 (특히 유대인이) 반응으로 하는 모든 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God took the initiative, when he made a covenant with Judaism; God’s grace thus precedes everything that people (specifically, Jews) do in response.  


유대인은 은혜에 대한 적절한 반응으로서의 감사함으로 율법을 지킨 것이며, 달리 표현하면, (율법을 지키는 것은) 언약 백성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언약 백성) 안에 머물기 위한 것이다. 우선적으로 안에 머무르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The Jew keeps the law out of gratitude, as the proper response to grace—not, in other words, in order to get into the covenant people, but to stay in.  Being ‘in’ in the first place was God’s gift.[6]


이와같이 라이트의 진술이 새관점의 일반적인 것들에 대하여 동의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One can easily see the approbation of the general theses of the new perspective in Wright’s statement.  


그 밖에도 그리스도의 사역의 중요성에 관하여 논하는데 있어서, 라이트는 전통적 해석이 표준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Elsewhere, in commenting about the significance of the ministry of Christ, Wright contends that traditional interpretations miss the mark. Wright states: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통하여 머무실 것이라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자신들의) 역할에 대하여 들을 것을 요구하시는 예수의 요청에 대하여 경청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들이 도전에 직면하고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Those who heeded Jesus’ call to audition for the kingdom-play that God was staging through him found themselves facing a challenge.  


그리스도인은, 그의 의도가 단순히 도덕율에 대한 새로운 법전을 제공하는 것처럼, 교회 생활에 있어서 매우 초기부터 자신들이 새로운 규율의 책에 대한 도전에 직면하도록 하였다.

Christians from quite early in the church’s life have allowed themselves to see this challenge as a new rule book, as though his intention was simply to offer a new code of morality.  


이것이 특히 종교개혁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여기에서 사람들이  선행이 논리적으로 칭의의 근거가되는 믿음을 앞선다는 것의 위험에 대하여 예민하였기 때문이다.

This has become problematic within the Reformation in particular, where people have been sensitive about the danger of putting one’s human ‘good works’ logically prior to the faith by which one is justified.  But that was not the point.[7]


지금 라이트가 샌더스나 던의 모든 점에 동의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주요 전제들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동의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Now, this is not to say that Wright agrees with Sanders and Dunn on every point; the overall agreement on the major premises, however, is evident.


이러한 비난과 확언들은 분명히 여러가지 질문들을 제기한다.
These accusations and affirmations obviously raise several questions.


바울에 대한 종교 개혁의 이해가 고대 펠라기우스에 대한 반론으로 채색되었단 말인가?

Is the Reformation reading of Paul colored by the ancient Pelagian controversy?  


개신교의 해석은 종교개혁 이후에 1세기 유대교와 바울이 “율법의 행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잘못 이해한 것이란 말인가?

Have Protestant exegetes since the Reformation misunderstood first century Judaism and what Paul means by ‘works of the law’?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라는 개신교 교리에 대하여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What does this mean for the Protestant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faith alone?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려고 노력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먼저 바울의 칭의 교리에 대한 톰 라이트의 관점을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In an effort to answer these questions, we will first survey N. T. Wright’s views on Paul’s doctrine of justification.  


두 번째로, 그 다음에 우리는 이것들을 주요 2세대 종교개혁자 가운데 한 사람인 존 칼빈의 관점과 비교하면서 대조해 볼 것이다.

Second, we will then compare and contrast them with the views of John Calvin, one of the chief second-generation reformers.  


이러한 비교를 통해서, 우리는 최소한 톰 라이트의 저술 가운데에서의 새관점의 주장이 타당한 지에 대하여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By this comparison, we will be able to evaluate whether the claims of the new perspective, at least as they come from the pen of N. T. Wright, are valid.


마지막으로, 우리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과 이것이 개혁주의 사회에 미치는 점증적인 영향력에 관하여 몇가지 일반적인 고찰과 함께 결론을 내릴 것이다.

Lastly, we will conclude with some general observations about the new perspective on Paul and its growing influence in the Reformed community


________


TE J. V. Fesko is pastor of Geneva Presbyterian Church (OPC) in Marietta , Ga. , and visiting lecturer in Systematic Theology at RTS-Atlan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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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 P.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7), p. 422.

[2] D. A. Carson, “Introduction,” in Justification and Variegated Nomism: A Fresh Appraisal of Paul and Second Temple Judaism , eds. D. A. Carson, Peter T. O’Brien, and Mark and Seifrid, vol. 1, The Complexities of Second Temple Judaism (Grand Rapids: Baker Books, 2002), p. 2.

[3] James D. G. Dunn,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Black’s New Testament Commentary (Peabody: Hendrickson, 1993); idem, Roman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s. 38 a & b (Dallas: Word Books, 1988).

[4] James D. G. Dunn, “The New Perspective on Paul,” Bulletin of the John Rylands University Library of Manchester 65 (1983), pp. 95-122; idem, Jesus, Paul, and the Law: Studies in Mark and Galatians (Louisville: Westminster / John Knox, 1990), p. 191.

[5] Carson , “Introduction,” p. 4.

[6] N. T. Wright, What Saint Paul Really Said: Was Paul of Tarsus the Real Founder of Christianity? (Grand Rapids: Eerdmans, 1997), p. 19; also see idem, The Climax of the Covenant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1), p. 173; and idem, Who Was Jesus? (Grand Rapids: Eerdmans, 1992), p. 59.

[7] N. T. Wright, The Challenge of Jesus: Rediscovering Who Jesus Was and Is (Downers Grove: Inter Varsity Press, 1999), p. 45; also see idem, Covenant, pp. 17, 122.

 



posted by Wonho Kim
:
칭의의 속성에 관한 칼빈과 톰 라이트의 해석의 차이점1)

  by 김원호(dent4834@hanmail.net)
 
1. 톰 라이트
 
1) 톰 라이트가 말하고 있는 칭의는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일원이 되는 것으로 시작되며 칭의의 완성은 궁극적으로 완성될 완전한 극치의 날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김을 받는다는 종말론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2)
 
2) 톰 라이트는 1세기 유대 사회에서 생각하고 있던 칭의의 개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정의에 의하여 미래와 현재에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3)
 
3) 톰 라이트의 칭의에 대한 정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 안에 속하여 있느냐의 자격에 관한 것으로서 이는 종말론적인 관점에서4)규정하고 있는 것이다.5)
 
4) 톰 라이트가 말하는 칭의는 성경 교리의 다른 중심축과 연계되어있지 않다.
 
5) 톰 라이트는 칭의를 개인 차원의 주제가 아닌 공동체적인 성격에서 규정하고 있다.
 
2. 칼빈
 
1) 칼빈이 말하는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실제로 믿는 자에게 전가됨으로 인하여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6)
 
2) (톰 라이트 못지않게 1세기 유대자료를 많이 연구하였던) 칼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이라고 좋게 받으시는 수단으로서의 칭의를 말한다. 이러한 칭의는 죄를 사해주시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는 것으로 구성되어있다고 말한다.7)
 
 
 
 
3) 칼빈은 의가 필요한 죄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이는 구원론에 관한 것이다.8)
 
4) 칼빈이 말하는 칭의는 성경의 다른 주제의 중심 축과 서로 연계되어있다.
칼빈은 구원론과 거듭남, 믿음, 죄, 회개, 그리고 성화등을 칭의와 연계시키고있다.9)
 
5) 칼빈은 톰 라이트와 달리 개인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에 대한 강조가 공동체를 희생하면서까지 지나치게 강조되지는 않는다.10)
 
3. 종합적인 소견
 
1) 톰 라이트는 언약을 근거로 한 칭의의 개념을 말하고 있다.
 
 칭의의 개념은 하나님의 의의 개념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어있기에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면 그가 말하는 칭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분”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한다.톰 라이트가 하나님의 의를 언약을 중심으로 정의하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의도 언약을 중심으로 정의될 수밖에 없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과 인간의 공통분모가 되는 “의(Righteousness)"를 언약의 개념을 기초로 정립하고 있기에 의롭다고 인정되는 개념인 "칭의(Justification)"는 언약을 떠나서는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11)
 톰 라이트가 의로운 상태라고 말하는 언약 백성으로 있기 위한 조건은 믿음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지 않아도 되고 다만 백성의 일원으로서 율법을 지킴으로서 백성의 상태를 유지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또한 혹시라도 율법을 어기게 되면 율법 안에 은혜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회개를 하고다시 율법을 지키면 언약 백성 안에 있게 되고 이러한 상태가 최종적으로 유지 될 때 종말론적 칭의가 주어지는 것이다.12)
 
 칼빈이 말하는 칭의는 의의 전가와 더불어 더 이상의 요구 조건이 필요 없는13)완성된 상태14)인데 반하여 톰 라이트가 말하는 칭의는 완성의 개념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미래의 현재적 상태를 말한다. 이는 믿음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달됨으로서 칭의가 완성된 상태와 비교되는 미래적인 개념으로서 톰 라이트가 말하는 칭의는 현재 상태만으로는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2) 톰 라이트의 칭의 개념은 언약 안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와 같은 맥락이다.
 
 톰 라이트는 여러 가지 출판물이나 인터뷰를 통하여 많이 사용하는 말 중의 하나가 종말론적 개념의 현재적 칭의이다. 이는 언약 안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구원을 약속받았다는 것을 전재로 언약 안에 있는 상태를 의롭다고 규정하는 것과 같은 그림이다.
 톰 라이트는 신약 시대인 현재에도 이방인인 우리에게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다는 개념의 칭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약속한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언약 백성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톰 라이트는 율법이 언약 백성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이방인과 구별을 두기 위한 법으로 규정하듯이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아감으로서 언약백성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구도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율법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시며 예수님은 더 이상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따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의가 빠진 칭의 개념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에서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의를 공유하기 위한 조건으로 의의 전가(Imputation) 대신에 언약 백성으로 있기만 하면 된다.15)
전통적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칭의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통한 의의 전가가 필수요소이지만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미 아브라함 언약을 통하여 이 땅에서 실현되고 있기에 예수님의 역할은 이러한 아브라함 언약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조해 주는 수단으로 전락 되는 것이다.16)
 
4) 하나님의 의의 개념이 다르다.
 
 톰 라이트의 칭의 개념이 칼빈과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God)의 의에 대한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분이라는 하나님의 본질 자체보다는 하나님의 행하심에서 나온 개념이다. 행함이 전제가 되는 개념의 의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행함을 통하여 언약 안에 머물러야할 것이 요구된다.17)
 
 
5) 톰 라이트의 칭의는 자격(Identity)에 관한 것이다.
 
 톰 라이트의 칭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에 속해 있느냐에 대한 것이다. 마치 회원이냐 아니냐와 같이 그 사람의 본질의 변화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구비 조건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회개의 과정이 있어야하며 세례와 더불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수반되어야한다. 톰 라이트는 세례의 행위를 로마카톨릭과 같이 일종의 자격(Identity)을 얻는 행위로 보고 있다.
 초대 교부인 터툴리안부터 시작된 세례 행위를 통한 자격 획득의 개념은 로마 카톨릭에서 정착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데 톰 라이트의 새관점도 같은 개념에서 자격 획득의 수단으로 세례를 말하고 있다.18)
 전통적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세례는 자격 획득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고 의인이 된 하나님의 자녀가 그리스도가 머리되신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행위로서 새관점이나 로마 카톨릭이 말하는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성례와는 개념이 다르다.
 
6) 톰 라이트는 언약 안에 있는 백성은 죄인이 아닌 약속된 의인으로 보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한 아담의 죄의 문제가 언제 해결 되었느냐는 주제에 대하여 새관점은 개혁주의와 전혀 다르게 보고있다.
 개혁주의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 사건 이전에는 모든 인류가 죄 안에 있었던 상태이고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조차도 속죄의 필요성을 가지고 있는 백성으로 보고 있다. 반면에 톰 라이트는 이미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아담의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전재로 하고 있다. 즉 언약 백성으로 있는 상태 자체가 의로운 상태이고 칭의의 의미는  이러한 의로운 상태가 종말까지 이어졌을 때의 결과를 말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전의 사람들은 아직 의인이 되지 않은 상태에 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의가 전가 되어 의인이 되는 과정 즉 구원의 과정 이후에 칭의를 말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칼빈의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는 시점에 있는 반면 톰 라이트의 칭의는 의로운 상태가 완성되는 종말에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톰라이트는 어떻게 언약 안에 계속적으로 머물 것인가가 관심의 주제라면 칼빈은 어떻게 예수님의 의를 전가 받아 구원 받은 백성이 될 것이고 의로운 자로서 마땅한 도리로서의 성화의 차원에서의 삶을 살아갈 것인가의 차이를 보여준다.
 이러한 개념의 차이로 인하여 톰 라이트는 행위를 칼빈은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즉 행위냐 믿음이냐 이것이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칼빈의 이론을 따르는 전통적 개혁주의와  커다란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커다란 시각 차이로 인하여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의 교리는 자연스럽게 구원론에 관한 논의를 모두 건너뛰고 있다는 것이다.19)
 
 
 
6) 칼빈의 교리는 전체적으로 유기적이다.20)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에서의 칭의는 오직 성경의 한 부분만을 이루고 있을 뿐인데 반하여 칼빈의 칭의론은 창세 전에 시작된 구속 언약에서부터 창조 언약, 은혜 언약으로 이어지는 성경의 전체 구도 가운데 중요한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다. 톰 라이트에게 개인 구원에 관한 칭의에 대한 주제는 공동체적 구원에 관한 언약백성의 주제보다 덜 중요하기에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 칭의는 톰 라이트에게 불편한 주제일 따름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칭의는 언약 백성이라는 의로운 공동체 안에 거하는 것이며 의로움의 상태는 개인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백성이라는 공동체적인 속성에 있기에 톰 라이트의 의로움에 대한 개념은 공동체가 1차적이고 개인은 1차적 공동체의 2차적 결과물인 것이다.
 반면에 칼빈이 말하는 칭의는 공동체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의 믿음에 의한 신앙고백과 그리스도의 의가 전달된 개인에 국한된 것이며 교회는 다만 일차적으로 칭의 된 자들이 모이는 이차적인 공동체라는 것이다.
 
결론
 
 톰 라이트의 “바울에 관한 새관점”이 개혁주의와 많은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은 성경 해석의 전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톰 라이트는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게 하라”는 개혁주의와 달리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방법론을 도입하여 이미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내려진 결론21)을 도입하여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방법으로 해석되어진 새관점은 모든 내용을 아브라함 언약에서 시작하고 있는데 반하여 개혁주의는 새관점과 달리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에 중심을 두고 있다.
 이러한 해석의 차이로 인한 결과는 아담의 죄의 문제의 해결 시점과 방법, 율법의 의미,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유월절 만찬의 의미, 십자가에서의 죽으심, 부활, 승천, 다시 오심의 모든 의미가 달라지게 되며 이는 종교개혁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데 까지 나아가게된다.
 만약 톰 라이트의 해석이 옳다면 이제까지의 모든 신학자 즉 어거스틴을 비롯하여 루터, 칼빈, 조나단 에드워드, 마틴 로이드 존스, 메이첸등 개혁주의 신학자와 신앙인 모두 다 커다란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톰 라이트가 틀렸다면 톰 라이트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톰 라이트와 개혁주의의 상반된 해석의 차이로 인하여 이 둘 다 옳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학자들의 성경 해석의 도움을 받으며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누구를 옳다고 인정하고 수용 할 것이냐는 우리의 구원이 달린 문제이기에 결코 가볍게 다룰 주제가 아닌 것이다.
1) The New Perspective on Paul: Calvin and N.T. Wright by J.V. Fesko를 참조하여 정리한 것임.
 
2) Wright believes that justification is God’s declaration that a person is part of His covenant people and that this is primarily tied in with the ultimate eschatological vindication of the people of God at the consummation of the age.(p10/22)
3) Wright defines justification in the following manner: “‘Justification’ in the first century was not about how someone might establish a relationship with God.  It was about God’s eschatological definition, both future and present, of who was, in fact, a member of his people.”[Wright, Paul, p. 119.]
4) 톰 라이트의 칭의는 종말론적인 완성을 전재로 하고있다. 이러한 완성의 개념은 로마 카톨릭이 말하는 세미 펠라기우스 즉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공로로 구원이 완성되어진다는 개념이다.
5) Wright’s definition speaks of identity—who belongs to the covenant—or in other words, Wright speaks from ecclesiology. (P10/22) 
 
6) Calvin, on the other hand believes that justification is the actual imputation of the righteousness of Christ to the believer through faith.
7) Calvin, on the other hand, defines it as the acceptance with which God receives us into his favor as righteous men.  And we say that it consists in the remission of sins and the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 Calvin, Institutes, 3.9.2, p. 727.]
8) Calvin, on the other hand, speaks about sin, the need for righteousness—or in other words, Calvin speaks from soteriology.(p11/22)
 
9)It is important that we notice that Calvin’s treatment of justification rotates on an entirely different axis than that of Wright.  Notice how Calvin connects matters of soteriology, regeneration, faith, guilt, repentance, and sanctification, to justification.  Moreover, Calvin emphasizes the individual believer whereas Wright does not. (p12/22)
10) Calvin does not emphasize the individual at the expense of the corporate body in his doctrine of justification
 
11)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은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이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칭의를 비롯한 성경의 모든 해석을 아브라함 언약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12) 이러한 주장이 맞다면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생활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율법을 잘 지켰다면 예수님의 성육신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13)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인간의 행위적 공로가 추가되어야하는 반펠라기우스(semi-pelagius) 개념과 대립되는 차원에서의 완성이다.
14) 톰 라이트는 의의 완성 즉 칭의를 종말론적으로 보고 있는 반면에 칼빈은 칭의를 현재적 완성으로 보고 있다.
15) 톰 라이트는 율법이 언약 백성으로 있기 위한 수단으로 주어졌다고 보고 있다.
16) 새관점의 예수님은 아브라함 언약의 주체가 아니라 다만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방법을 제시해주기 위한 미봉책에 불과하신 것이다.
17) 톰 라이트는 의를 규정하는 데 있어서 존재론적인 접근이 아닌 행위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펠라기우스적이 될 수밖에 없는 근거가 된다.
18) Justification: Understanding the Classic Reformed Doctrine. J. V. Fesko p10
 
19) What makes the critical difference between the two is that Wright virtually by-passes all discussions that pertain to soteriology effectively divorcing it from other doctrinal considerations.(p12/22)
20) Calvin recognizes that doctrine as a whole is organic.(p12/22)
21) 톰 라이트는 1세기의 고대 문서를 분석하여 내린 결론 즉 율법이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결론을 성경해석의 전제로 도입하였다. 


posted by Wonho Kim
:
(The New Perspective on Paul: Calvin and N.T. Wright
by J.V. Fesko 에서 인용)


  by 김원호(dent4834@hanmail.net)

톰 라이트를 비롯하여 다른 복음을 전하는 새관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은 성경에 대하여 개혁주의와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하고 있지만 이들이 사용하는 신학적 용어에 있어서는 정통 개혁주의와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있으면서도 정통 개혁주의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라이트는 성경보다는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방법을 통하여 성경을 해석하고있으며 이러한 방법을 통한 성경해석은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결론을 이끌어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기독교를 유대교에 귀착시키며 기독교의 근본을 흔들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대속사역과 그의 의의 전가 교리를 부정하면서도 개혁주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서 같은 용어지만 전혀 다른 내용을 전함으로 독자들의 이해에 심각한 혼란을 초래하고있다.

이에 대하여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WSC)의 조직신학 교수인 John Fesko는 자신의 글 “The New Perspective on Paul: Calvin and N.T. Wright”에서 칭의의 예를 들면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있다.

칭의에 대한 새관점의 주장

1) 새관점론자들은 바울이 자신의 서신서를 통하여 말하고자 했던 것은 율법주의에 대립된 믿음을 통한 칭의 즉 유대인의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미 언약 안에서 의로운 상태에 있는 유대인의 교회론이나 공동체 즉 1세기의 교회에 있어서 유대인이 이방인과 어떻게 같이 지낼 수 있는 지에 관하여 논의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The new perspective argues that Paul largely deals with matters of ecclesiology and sociology, how Jews and Gentiles can co-exist in the first-century church. p13/22)


2) 새관점에서는 칭의를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극치의 날에 자신의 의를 나타내시어 자기 백성들을 인정하시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Justification is a declaration that God, who is faithful to His covenant promises, which is a display of His righteousness, makes at the consummation of the age to vindicate His people. p13/22)




칭의 용어에 대한 칼빈( 개혁주의)의 해석

1) 개혁주의에서는 톰 라이트의 앞의 주장과는 달리 바울이 구원론에 관하여 다루고 있고 이는 교회론과 종말론에 긴밀하게 엮어져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The Reformation, on the other hand, argues that Paul largely deals with matters of soteriology, which are intermeshed with ecclesiology and eschatology. p14/22)

2)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칭의는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 의롭게 된 사람을 하나님께서 명확히 인정하시는 것이다.

(justification is when God declares a person as righteous based upon the imputed righteousness of Jesus Christ. p14/22)

톰 라이트의 몇가지 문제점들

톰 라이트는 개혁주의와 다른 주장을 하면서도 실질적으로 거의 모든 영역에서 개혁주의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용어인 칭의를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살펴 볼 수 있다.

1)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복음주의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erminster Theological Seminary: WTS philadelphia)의 역사신학 교수인 칼 투루만(Carl. R. Trueman)은 새관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소위 새관점 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칭의의 교리에 대한 재조명은 개혁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신조와 교리들로 굳건히 서있는 개신교를 거부하는 것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칭의에 대한 서구 전통 전체를 부정하며 어거스틴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it seems to me that the current revision of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as formulated by the advocates of the so-called New Perspective on Paul is nothing less than a fundamental repudiation not just of that Protestantism which seeks to stand within the creedal and doctrinal trajectories of the Reformation but also of virtually the entire Western tradition on justification from at least as far back as Augustine. Trueman, “Martin Luther,” p. 1.)

존 페스코(J. V. Fesko)는 새관점이 복음주의 교회에 대하여는 치명적이라고 말한다. 새관점이 치명적인 이유는 새관점이 복음주의 신학의 여러가지 유형 중의 한가지 형태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the new perspective is quite lethal to the church. What makes the new perspective lethal is that it is presented as a variant of evangelical theology.)
국내 출판사에서도 한 가지로 톰 라이트를 소개할 때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복음주의 신학자라는 서술을 붙인다. 사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더 이상 복음주의 안에 있다고 할 수 없고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대부분 수용하고 있는 서구의 패더럴 비전(Federal Vision)이라는 교단은 이미 이단(Federal Vision Heresy, Auburn Avenue Heresy)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있는 상태이다.

2) 톰 라이트는 어거스틴 이후의 서구 기독교의 역사적 전통 가운데 있는 개혁주의 해석을 전부 부정하고 있다.(Yet, the proponents of the new perspective reject the very evangelical understanding of justification that goes as far back as Augustine.p14/22)

새관점 주의자들은 칭의에 대한 역사적 해석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정경에 대한 역사적 복음주의적 이해를 거부하고있다.
(Not only do new perspective advocates reject the historic understanding of justification but they also reject the historic evangelical understanding of canon-Wright, Who Was Jesus?, p. 83~4).

3) 새관점이 교회에 가장 해를 끼치는 것은 (복음주의) 용어 사용에 있다.

새관점 옹호자들은 성경, 죄, 칭의, 공로, 믿음과 같은 복음주의 용어를 사용하고는 있지만 의미에 있어서는 (복음주의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What makes the new perspective most harmful to the church is its use of terminology. Advocates of the new perspective use terms such as Scripture, sin, justification, works, faith, and gospel, but have given them entirely different meanings. p14/22)

새관점이 아무런 해가 없고 마치 개혁주의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여겨지며 톰 라이트가 더 이상 개혁주의의 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새관점이 정통주의에서 사용하는 학술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It is this use of orthodox nomenclature that makes the new perspective seemingly harmless and has some within Reformed circles thinking that Wright is no foe of the Reformation.p15/22)

4) 톰 라이트가 말하는 개인적 칭의는 정통적인 의미를 가진 용어가 아니다.

톰 라이트는 공동체적 칭의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지만 가끔 강의에서는 개혁주의의 개인적 칭의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의 이 말은 항상 일관성이 있는데 이에 대하여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이 있다. 과연 그가 말하는 칭의가 의의 전가(Imputation)에 근거한 칭의냐 아니면 새관점에서 주장하는 종말에 확정될 칭의냐인 것이다.
만약 전자라면 톰 라이트는 일관성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만약에 후자라면 (메이첸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자유주의자들이 자신의 이단성을 가리기 위하여 정통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Similarly, Douglas Wilson writes that “while Wright’s emphasis on corporate justification is important and necessary, the way he stresses it is a cause for concern. But in a taped lecture of his, I heard him explicitly say that he was not denying the Protestant doctrine of individual justification. Given his overall approach, this is consistent.”[62] Yet, one must ask, Does Wright mean justification in the sense of imputed righteousness or as eschatological definition? If it is the former, then he is inconsistent; if it is the latter, then this is precisely the danger of which Machen speaks—orthodox nomenclature that veils liberalism.-p15/22)

실은 톰 라이트가 사용하는 칭의는 믿음과 더불어 확정되는 현재적 칭의가 아니라 극치의 날에 확정되는 종말론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훈련된 신학자나 신약학자들은 쉽게 이 용어의 변질을 파악하겠지만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It appears that it is the latter because Wilson calls Wright “an outstanding exegete,” who “does not shy away from showing how the text conflicts with ‘standard’ interpretations.”[63] The trained theologian or New Testament scholar will readily identify this shift in nomenclature, but the person in the pew who reads Grant’s review or Wilson ’s general approbation may not. (p15/22)

이러한 용어 사용에 있어서 톰 라이트가 사용하는 복음이나 죄, 칭의 믿음 등이 정통 개혁주의와 다른 뜻이 있다면 우리는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가 진짜 성경이 말하는 예수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Wright’s views on gospel, sin, justification, and faith stand behind his preaching, then we must wonder if Wright’s Jesus truly is “the biblical Christ.”(p15/22)

결론

John Fesko가 말하는 톰 라이트의 위험성은 복음주의자가 아닌 사람이 복음주의를 표방하며 복음주의 안에서 복음주의의 용어를 사용하며 복음주의 자처럼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사용하는 용어들의 문제는 하나님 나라 개념에서도 심각한 혼란을 초래하고있다.

기독교는 유대교와 분명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신약의 교회를 하나님 나라로서의 구약 이스라엘의 확장으로 보고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케제만의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한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기초로 하고있다.

신약의 교회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의, 즉 예수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통하여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신 의를 기초로하고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신다는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하고있기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의의 전가를 통한 칭의를 필요로하지 않는다.

개혁주의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의롭게된 신자들을 말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와 신약의 교회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있지만 내용에서는 전혀 다른 근거를 기반으로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는 많은 이들이 이러한 차이를 모름으로 인해서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보다는 따름의 대상으로 보는 과오를 범하고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지와 혼란은 새관점의 하나님 나라 개념을 기초로하고있는 미셔널 처치, 혹은 성육신적 교회의 선교적 교회론에 대한 분별력의 상실로 인한 혼란을 가져오기도한다.

이러한 혼란은 전혀 다른 복음인 새관점이 자연스럽게 개혁주의와 혼합되는 양상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기도한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 세계관 운동과 신칼빈주의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들은 역사적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통한 문화 변혁을 추진하고있다.

대표적 기독교 세계관 저서인 알버트 월터스 (Albert Wolters)의 "창조 타락 구속 (Creation Regained)"의 경우에는 미셔널 처치 운동을 하는 칼빈 신학교의 마이클 고힌과 함께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수용한 개정판이 출간되기도했다.

신칼빈주의자인 마이클 고힌은 개혁주의를 표방하면서도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수용함으로서 전형적 새관점주의자인 스캇 맥나이트와 함께 미셔널 처치 운동에 동력을 부여하고있다.

최근의 미셔널 처치와 마참가지인 성육신적 교회는 선교적 교회론을 그대로 수용하며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서의 교회 변혁을 추구하고 있다.

최근의 이러한 많은 움직임이 동력을 얻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운동들이 같은 개혁주의 용어를 사용하지만 대다수의 개혁주의 진영에 속하여 있는 이들이 이것이 전혀 다른 복음인지에 대한 분별력이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개혁주의 진영에 속하여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다른 복음에 대한 분별이 어느 때 보다도 중요하다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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