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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9.05 ::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


톰 라이트가 말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의” 즉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the faithfulness of God”이라는 사상이 자리잡고있다.


새관점의 언약 사상은 개혁주의 언약 사상과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있다.


그리스도의 새언약이 개혁주의 언약 사상의 중심에 자리잡고있다면,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의 언약 사상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중심에있다.


개혁주의에서는 아브라함 언약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하여 구현된 것으로 보는 반면에, 새관점에서는 아브라함 언약이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통하여 구현된 것으로 본다.


톰 라이트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 있었으며,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언약이 신실하게 이행되는 과정이었기에, 출애굽 자체가 구원의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차이로 인하여 새관점에서는, 언약 백성의 근거가 되는 의, 즉 하나님의 의가 유대 이스라엘을 통하여 구현된 반면에, 개혁주의에서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원인 성도들 안에서 구현된 것이다.


새관점에서는 유대 이스라엘을 실질적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보는 반면에 개혁주의에서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보고있다.


새관점이 보여주는 이러한 차이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을 이루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냐에 대한 차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을 살펴보자.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covenantal faithfulness)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의 핵심적인 특징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는 로마서 2장 17절- 3장 8절을 비추어보면, 하나님의 단일한 계획, 즉 인간의 죄의 문제를 처리하고 온 세상을 바로 잡으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반드시 의미하여야하며, 그것만 의미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Wright, Justification, 175)


라이트에 의하면,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의란, 이스라엘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통해 온 세상을 축복하시려는 언약을 그리스도 안에서 끝내 성취하시고야마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이다.


라이트에게는 하나님의 의를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구약적 증거에 가장 충실한 정의이다.

(박영돈,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읽기, 38, 39)


톰 라이트는 “로마서에서 바울이 전한 복음은 개인의 구원과 칭의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 전 세계를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놀라운 방식으로 성취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 즉 하나님의 의의 나타남이다”라고 말한다.

(박영돈,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읽기, 42)


라이트의 관점에서 보면 의롭게 되는 것은 죄의 용서를 받는 것, 도덕적으로 옳다고 간주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 보다는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되는 것, 그래서 식탁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박영돈,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읽기, 057)


톰 라이트는 로마서 3장 21-22절에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의를 3:9-20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의미로 21절의 하나님의 의를 읽지 않고 오히려 2:17-3:8과 연결해서 새관점에서 선호하는 의미로 하나님의 의를 해석한다.


라이트는 로마서 3장 25-26절이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에서 3번씩이나 하나님이 자신의 의를 계시하신다고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 외에 다른 의미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박영돈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읽기 102)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 자신의 약속,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고 해석한다.(What Saint Paul Really Said: N. T. Wright, 96)

이는 창조 세계를 회복하고 새롭게하려는 언약 계획에 대한 하나님의 헌신을 묘사하는 용어다.

톰 라이트는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의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으로 바꾸어 해석한다.(Resurrection of the Son of God, N. T. Wright, 305)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God)에 대한 70인 역(septuagint)의 해석은 "하나님의 자신의 언약의 약속에 대한 신실하심 God's own faithfulness to his promisses to the covenant”이라고 말한다.(What Saint Paul Really Said, 96)

이사야서 40-55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속성의 한 가지 면을 나타내주며, 이는 이스라엘의 완고함과 상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속성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구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하셨고 이스라엘은 이를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한편으로는 그의 신실하심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심으로서 이는 어원이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사야에 나타난 그의 그림의 중심에는 고통받는 종의 이상한 모습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의로우신 목적이 이를 통하여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사야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불의에 대하여 벌을 주시고 의에 대하여는 상주시는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는 언약에 대한 신실한 행하심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44)


여기서 톰 라이트는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과 죄에 대한 용서를 연관시킨다.


라이트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 안에서 아담의 죄와 이스라엘의 죄는 모두 해결되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의가 우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으로 이해가 된다고 하더라도, 톰 라이트는 구약과 유대주의에서 이 하나님의 의라는 용어를 법정적인 비유로 적용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인정하고있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라는 개념을 재판관의 판결을 거칠 필요가 없는 법정적 심판의 영역에까지 확대 적용함으로서, 죄의 문제가 법정적 판결이 없이 해결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반드시 법정적 판결의 과정을 요구하는데 반하여,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항목이 법정적 평결을 대신 한 것으로 간주함으로서  법정적인 평결없이 법정적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다.(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44)


사람의 의는 하나님의 의로 연결되어,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언약 안에서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반드시 재판관의 평결이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God나 칭의justification라는 용어는 완전히 별률적이거나 법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라이트는 로마서1:17의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를 언약에 신실하신 분, 즉 약속을 지키시는 분으로 묘사할뿐, 심판자로서 의를 세우시며 공정하게 판단하시는 분, 즉 정의를 세우시는 분으로 묘사하지 않는다.(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62)


의의 전가Imputation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믿는 자들에 전가된다는 전통적 개혁주의 교리의 중요한 용어 가운데 하나다.


여기서 의는 적극적 순종과 소극적 순종을 근거로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말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의는 신자에게 전가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아닌 언약을 충실히 이행하여 나가시는 하나님의 의The Faithfulness of God를 말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는 관계가 없는 의이다.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은 언약이라는 약속을 만드시고 이를 지키시는, 자신 스스로가 의로우신 분이시다. 

God is himself righteous, as the covenant God who has made promises and kept them.


법정적 비유의 의미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말에 대하여 진실되셨으며, 공정하셨으며 (바울이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똑같이 공정하게 다루시고 있음을 지속적으로 말하고있는 방식에 주목해보면) 그렇게 죄를 다루셨다.

In terms of the law-court metaphor, he has been true to his word, he has been impartial (note the way in which Paul goes on at once to speak of God’s even-handed dealing with Jew and Gentile alike), and he has dealt with sin.  


하나님께서는 무력한 이들을 이와같은 이유로 신원하신다: 그는 '믿음을 가진 자를 의롭게하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하나님 자신의 의라는 주제는, 그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으로 이해되어야하며, 법정적 비유가 의미하는데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결정적 본문의 핵심이다.(Wright, Paul, p. 105)

He has also thereby vindicated the helpless: he is the ‘justifier of the one who has faith.’  This theme of God’s own righteousness, understood as his covenant faithfulness, and seen in terms of the law-court metaphor, is the key to this vital passage.(Wright, Paul, p. 105)



톰 라이트의 칭의를 이해하려면 그가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을 주격이면서 소유격으로 읽어야만한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의 의는 신자에게 전가해주는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속해있다는 것이다(Wright, Paul, p. 101)


역사적 예수 탐구와 하나님의 의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에서의 칭의의 근거가된다.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의 핵심 사상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the faithfulness of God"이라는 해석으로부터 정당화된다.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에 참여된 유대 백성은,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 하는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해서 율법을 지킨다는 "언약적 신율주의"의 틀 안에서 이해되어져야한다.


라이트는 새관점의 근간을 이루는 언약적 신율주의를 재구성하기 위해서 '역사적 예수 탐구'에서의 슈바이처와 불트만 학파의 케제만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톰 라이트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에 있으며,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이 신실하게 이행되는 과정이었기에, 출애굽 자체가 구원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개혁주의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의의 주체이시지만, 새관점에서는 출애굽이 의의 분기점이 되며 예수 그리스도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완성시키기 위한, 부차적인 역할을 한 존재일 뿐이다.


새관점주의자들은,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출애굽이라는 구원의 과정을 통하여 은혜 안에 머물고 있는 상태였기에,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은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삶의 지침으로 주어졌다고 말한다.


라이트는 이를, 창조 세계를 회복하고 새롭게하려는 언약 계획에 대한 하나님의 헌신을 묘사하는 용어로 사용함으로서,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의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으로 바꾸어 해석한다.

또한 이사야서 40-55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속성의 한 가지 면을 나타내주는 것이며, 이는 이스라엘의 완고함과 상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속성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구하신다는 것이다.(Resurrection of the Son of God, N. T. Wright, 305)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하셨고 이스라엘은 이를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한편으로는 그의 신실하심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심과 어원이 같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위해 “역사적 예수 탐구”에 모든 것을 걸어놓고있다.


“역사적 예수 탐구”를 하지 않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예수가 실제로 누구였는지를 모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라이마루스로부터 시작된 역사적 예수 탐구로 인하여 성경의 예수가 누구였는지 연구되기 시작했으며, 지금 제3의 탐구에 의하여 밝혀진 예수가 진짜라면, 이제까지의 성경에 대한 해석은 전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를 포함하여, 루터나 칼빈을 비롯하여, 개혁주의 신학자 전부가 이제껏 잘못 만들어진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다. 


라이트의 성경 해석은, 20세기 말 상황에서의 슈바이처 라인의 제3의 탐구에 의한 것이다.


슈바이처의 유대 묵시문학적 종말론은 예수를 1세기 유대교의 맥락에서 철저하게 재구성함으로서, 예수 연구에 대한 새로운 추진력을 제공한다.

톰 라이트에게 슈바이처의 유대 묵시문학적 종말론은, 라이마루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됨으로서, 옛 탐구와 구분되는 새 탐구로서의 제 3의 탐구를 시작하게 한다.

슈바이처의 철저한 종말론은 예수를 1세기 유대교의 묵시적 기대를 품은 자로 보고있다.

브레데 노선과 구별된 슈바이처의 노선은 “역사적 재구성”을 향한 최고의 전망으로 제시되면서, 바울에 관한 새관점의 시발점이 되었다.


윌리엄 브레데(William Wrede)와는 달리  예수를 종말론적이고 묵시적인 유대교의 맥락에 두었던 슈바이처는 톰 라이트에게 언약적 율법주의의 틀을 제공하였던 것이다.(예수의 도전, 119)



슈바이처의 묵시적 유대교 사상


톰 라이트는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영역에서 슈바이처의 바울 해석에 많은 도움을 받고있다.

예수와 바울을 대립 시키지 않는 불트만과는 달리,  슈바이처는 브레데와 같이 예수와 바울을 대립시킴으로서, 바울이 예수와 다른 어떤 종교를 가르쳤다고 생각한다. 

슈바이처는 예수를 구속받은 구속자라는 실존주의적 개념으로 이해함으로서, 예수의 실존을 유대교와 연결시켜 해석하고있다.

슈바이처는 예수를 유대교에서의 실존적 완성으로 보고있는 것이다.

예수의 유대교에서의 실존적 완성이라는 후기 유대교적 메시아 개념은, 유대교가 은혜의 종교였다는 톰 라이트의 언약적 율법주의와 맥락을 같이한다.

슈바이처는 윌리엄 브레데(William Wrede)와 같이 예수와 바울을 대립시키지만, 예수를 종말론적이고 묵시적인 유대교의 맥락에 둠으로서 브레데와 차이를 보이고있다.


톰 라이트는 브레데의 생각에 동의를 못하다가, 예수를 종말론적이고 묵시적인 유대교의 맥락에 두는 슈바이처의 견해에는 상당히 공감하게 되었다.(톰 라이트, 예수의 도전, 119)


라이트는 자신이 슈바이처의 접근과 비슷한 접근을 한다고 말한다

슈바이처의 후기 유대교적 메시아 사상은, 톰 라이트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의라는 범주 안에 귀속시키는 틀을 제공한다.

슈바이처가, 바울이 예수와는 다른 종말론의 체계를 가지고있다는 바울과 예수의 대립관계를, 유대주의적 묵시 문학의 맥락에서 해결한 것은, 톰 라이트가 예수를 유대주의적 메시아, 즉 유대를 해방시키기 위한 혁명적 메시아라는 사상의 밑거름이 된다.

이는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구속주로서의 그리스도의 의를 유대교에 편입시킴으로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의, 즉 아브라함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신다는 하나님의 의를 완성시키신 분으로 제한 시킨다.

라이트는 슈바이처의 묵시적 유대교 사상를 통해, 바울의 기독론을 유대주의적 메시아 사상에 귀속시킴으로서, 바울에 관한 새관점의 틀을 완성시켜 나간다.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은, 바울의 서신서에 나타난 기독론이 유대주의적 메시아 개념을 바울 자신이 특별하게 발전시킨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슈바이처의 묵시적 유대교 사상을 빌려온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 라이트의 의의 개념에는, “칭의를 순전히 법정적으로만 이해하는 칭의론은 윤리를 낳지 못한다"는 슈바이처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행위 구원론적 의의 개념이 추가된다. 

이는 슐라이어마허의 영향을 받은 슈바이처가, 법정적 칭의론이 갖는 윤리의 부재에 대하여 우려했던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라이트는 슈바이처의 법정적 칭의론에 케제만의 관계적 칭의론을 대입시킴으로서, 결핍된 윤리의 문제를 해결하려한다.

슈바이처에게 칭의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김세윤 교수의 글을 인용해보면

종교사학파인 슈바이처(1808-1888)는 "바울 복음의 주된 분화구는 '그리스도-신비주의'이고,칭의론은 그 분화구 안에 부차적으로 형성된 2차적분화구이다."라고함으로서 그리스도-신비주의의 입장을 취한다. 

그는 "칭의론은 바울이 자기의 이방 선교를 방해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싸우기 위하여, 즉 그들이 이방 그리스도인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을 배격하기 위해 고안한 논쟁 교리이다. 그래서 그것은 이방 선교문제를 다루는 갈라디아서, 로마서, 빌립보서3장에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론은 바울 신학의 중심이 아니고 바울 신학의 곁가지에 불과하다. 바울 신학의 중심은 '그리스도-신비주의'이다"(칭의와 성화, 김세윤, 20)

이와같이 슈바이처에게는 칭의가 중요하지 않았기에 법정적 칭의에서의 윤리부제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톰 라이트에게는 칭의가 중요한 문제였다.

톰 라이트는 슈바이처에 상당히 공감을 하면서 슈바이처의 접근과 비슷한 접근을 하고 있지만, 슈바이처의 법정적 칭의론에 의한 윤리의 결핍에 대한 문제를 케제만의 관계적  칭의론에 대한 개념을 보충함으로서 비로소 해결 할 수있었다.

그는 케제만의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을 칭의의 근거로 내세운다.(톰 라이트, 예수의 도전 119)

톰 라이트는 윤리의 부재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과 같이 신자도 신실할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으로 이해하는 것과 같이 신자에게 주어지는 의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같이 신실한 삶을 살아감으로서 얻어진다는 윤리적 의를 제시한다.

톰 라이트가 추론한 하나님의 의는 윤리를 위한 의라고 할 수 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로의 이전"이라는 관계적 칭의는, 슈바이처의 윤리의 부재에 대한 문제 해결하기 위한 필요에 의해서, 케제만으로부터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관계적 칭의를 도입하게된 것이다.

톰 라이트에게 슈바이처의 법정적 칭의론에 의한 윤리의 결핍은 케제만의 관계적  칭의론에 대한 개념이 보충될 때  비로소 해결 될 수있었다.

이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윤리적 행위가 따르는 행위구원론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하지만 칭의의 근거가 윤리의 부재를 해결하기 위하여 도출되어서는 않된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새관점에서의 하나님의 의 개념은 법정적 칭의를 배제한체 칭의의 영역을 포함시킨다.

법정적 칭의는 인격적 관계의 회복이기에 법적인 윤리를 넘어서는 인격적 윤리가 있다.


법정적 칭의에는 죄용서라는 최소한의 소극적 칭의를 넘어서, 자녀로 삼는 완전하고 적극적인 칭의가 내포되어있다.


단순한 죄용서와 자녀로 삼는 입양은 차원이 다른 칭의다.


슈바이처-칭의를 순전히 법정적으로만 이해하면 "칭의론은 윤리를 낳지 못한다"(칭의와 성화, 김세윤, 88)고 말하지만, 법정적 칭의로 말미암은 입양됨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로 인하여 마땅한 윤리적 변화를 가져온다.

새관점은 자녀로서의 관계보다는 "하나님 나라로의 이전"이라는 관계적 의미로 윤리의 문제를 해결하려고한다.


케제만의 하나님의 의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불트만학파의 케제만(Ka:semann)으로부터 가져온 것이다.

케제만은 슈바이처의 “옛 탐구”와 구별된 “새 탐구”를 시작하였다.

톰 라이트에게 신학적 근거를 제공하고있는 “역사적 예수 탐구”는 케제만의 “새 탐구”의 영역에 속하여있다.


라이트는 케제만의 역사적 예수 탐구에 대하여 긍정적 입장을 취한다.


톰 라이트는 제1,2차 대전 동안에 교회가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를 하지 않았을 때 비역사적 예수가 제시되어, 나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했다는 에른스트 케제만의 1953년 10월 23일 행한 연설에 동의한다.(Challenge of Jesus, 21)


불트만학파인 에른스트 케제만이 로마서 1장 17절의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한 이래, 라이트는  이를 보편화 영구화 시키고있다.(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64)     


새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전통적인 개념과 달리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으로 해석한다.

케제만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케제만은 불트만의 제자로서, 불트만의 인간론 중심적 개인론 중심적 해석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의'를 '뒤틀린 온 세상을 바로잡는 하나님의 힘'으로 해석한다.

2. 케제만은 칭의론을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라는 관점에서 해석한다.(칭의와 성화, 김세윤, 21)

3. 하나님의 의에 대한 케제만의 해석도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다.(칭의와 성화, 김세윤, 63)

4. 케제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죄를 씻어 버리고 덮어버리는 제사expiation”라고 해석한다.

이는 죄를 벌주고 의를 상주는 법정적 의미로서의 전통적인 그리스도의 속죄 개념인 “형벌적 대속론(Penal substitutionary theory of atonement)”과는 다른 것이다.

5. 케제만은 칭의의 관계론적 의미를 중시함을 넘어서, 하나님의 의를 자신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힘이라고 말한다.(칭의와 성화,김세윤, 84)

여기서 하나님의 의는 창조주가 타락한 자신의 피조물들을 자신의 주권 아래로 회복시키는 힘이다.

라이트는 케제만의 관계론적 칭의론, 즉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하심”과, “하나님 나라로의 이전”이라는 관계적 칭의를, 윤리로서의 성화와 연계시켜 칭의와 윤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한다.

6. 케제만은 칭의를 “주권의 전이(lordship- transfer/ lordship-change)”로 해석한다.

아담적 죄인들을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를 통해 사단의 통치 아래서 해방하여(여기에 죄용서가 내포됨) 자신의 통치(하나님 나라) 아래로 이전하는 것을 말한다.(칭의와 성화, 김세윤, 85)

하지만 하나님의 의를 케제만의 주장처럼 주권의 전이라고한다면, 주권의 전이가 구원을 뜻한다고 할 수밖에 없다. 

주권의 전이는 신자의 믿음을 전제로하고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구원을 위해서 자신들이 본질적 죄인이라는 고백을 할 필요가 없으며, 그리스도의 법정적 속죄사역에 대한 인식이 없어도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담적 죄를 용서하여 주셨기에,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윤리가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주권의 전이 개념에서,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어지는 윤리로 주어진 것이며,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님이 모델이 되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예수의 삶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요구의 성취이며, 이는 신자에게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같이 신실하게 살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만약 요구되어지는 윤리적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면 최종적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새관점의 주장은 행위 구원론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고 구원을 위한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 알미니우스적 주장이면서 동시에 구원을 신인협력에 의한 결과물로 보는 것이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


1) 믿는자가 의롭다고 칭함을 받기 위하여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댓가 없이 선물받아서 의롭게된다.


이 하나님의 의는 믿는 자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하는 것이다.(롬1:16-17, 3:21-26)(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28)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하여 하나님의 의는(율법에 순종하시고 율법으로 받을 징벌을 감당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는자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다.(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45)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을 의롭게 하면서 동시에 신자와 의를 공유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의는 복음을 통하여 나타난다.

This is a definition of that righteousness which he said had been revealed when Christ was given, and which, as he has taught us in the first chapter, is made known in the Gospel. 


이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있다.

He affirms that it consists of two parts.  


첫 번째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는 많은 것 가운데 한 가지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 내포된 모든 의를 말하는 것이다.

The first is that God is just, not indeed as one among many, but as one who contains in Himself alone all the fullness of righteousness.  


하나님은 모든 충만한 찬양을 받으실 분이신데, 이는 하나님 한 분만이 의롭다는 이름과 명예를 마땅히 받으셔야만 하는 반면에, 모든 인간은 불의로 저주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He receives the full and complete praise which is His due only as He alone obtains the name and honor of being just, while the whole human race is condemned of unrighteousness.  


다른 부분으로는, 의의 소통에 관한 것인데, 이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풍요를 결코 자신 안에만 가둬놓지 않으시고, 이를 사람들에게 부어주신다는 것이다.

The other part refers to the communication of righteousness, for God does not by any means shut His riches within Himself, but pours them forth upon mankind.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게하시는 한에는,  하나님의 의는 우리를 비추게되는 것이다.

The righteousness of God, therefore, shines in us in so far as He justifies us by faith in Christ, for Christ was given in vain for our righteousness, if there were no enjoyment of Him by faith.  


이에 비추어볼때 모든 인간은 하늘로부터 치료책이 나올때까지는 불의하고 상실되어있는 자들인 것이다.[Calvin, Romans, pp. 77-78.]

It follows from this that in themselves all men are unrighteous and lost, until a remedy from heaven was offered to them.[Calvin, Romans, pp. 77-78.]


루터는 밤낮으로 로마서 1장 17절을 묵상하는 중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라는 말씀은 다름이 아니라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만나는 루터, 우병훈, 68)



2) 믿는 자에게 보혈의 속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는 공의의 심판을 하시는 의뿐만이 아니라 믿는자에게 보혈에 의한 속죄를 베푸시는 의로도 나타난다.(롬3:25-26)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그의 피를 흘리심을 통해서, 믿음으로 받아들이라고, 속죄의 희생으로 내어주셨다.

God presented Christ as a sacrifice of atonement, through the shedding of his blood—to be received by faith.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지은 죄를 벌하지 않으시고 참으심으로서, 자신의 의를 증거하시기 위해서 이를 행하셨으며, 예수를 믿는 자들을 의롭게하신 것과 같이 자신도 의로우시도록, 현재도 자신의 의를 증거하신다.(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71)

He did this to demonstrate his righteousness, because in his forbearance he had left the sins committed beforehand unpunished— he did it to demonstrate his righteousness at the present time, so as to be just and the one who justifies those who have faith in Jesus.


3) 의로운 자에게 상주시는 하나님


모세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에게 상을 주실 수 밖에 없으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여기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넘어서) 의로운 자에게 상주시는 일을 신실하게 행하셔야만 하는 하나님의 의무의 속성도 드러난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께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서 우리는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상 주시는 일을 신실하게 이행하셔야만 하는 의무가 있으신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약속을 지킨다는 개념을 넘어서 우리에게 상을 주셔야만 하시는 의를 가지고 계신 것이다.



법정적 개념이 제거된 새관점의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에 관하여 바울이 사용한 용어들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법정적 행하심을 볼 수가 있는데, 이는 언약백성에 대한 무죄선언과 옳음을 인정하심이 있고 그들의 적들에 대하여는 심판과 저주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의에 대하여는 옳다고 하시고 악에 대하여는 저주를 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의가 로마서에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가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구약적 배경에 비추어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법정적 행위에서 자기의 백성을 의로운 상태로 보증하는 그리스도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다.( 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54)


톰 라이트가 말하는 의는 누군가가 대신 죄값을 치러준 것을 근거로 해서 재판장이 무죄를 선고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죄값과 관계없이 그냥 재판장의  일방적인 선포에 의하여 무죄가 선언되는 것이기에 피고의 무죄의 근거는 재판장의 의가 되는 것이지 누군가의 죄값을 치룬 분의 의가 아닌 것이다.(Wright, Paul, 105)


피고가 되신 예수님의 의가 전가된 의가 아니라 믿음과 관계없이 선포되는 재판장의 의를 말한다.


이부분이 전통적 개혁주의와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다.



로마서에 나타난 4가지 법정적인 하나님의 의


1)  로마서1-3장에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시다( the concept of God’s faithfulness to his covenant)는 개념이 나온다.


그러나 로마서3:1에서  바울이 사용하는 헬라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faithfulness of God)과 대비되는 불순종하는 이스라엘(the unfaithfulness of Isreal)이다.(dik-langue  대신에 pist-langue사용)

(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67)


2) 롬1:17-3:26절에 나타나는 강력하고 인내심있는 관심사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법정적 심판의 개념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는  로마서의 이 부분에서 강하게 나타나고있으며 여기서는 최소한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심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관심사는 시편(시98:9) 기자의 관심사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 땅을 의와 공평으로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롬1:16- 3:26은 문맥상으로 볼 때 분명히 하나님의 법정적의를 드러내신다.

.(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67)


3) 로마서 1장 18절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은 로마서 1장 16-17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에 대한 설명의 시작으로서 로마서11장까지 이어지고있다.

(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66-72)


4) 로마서 1장 17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는 18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wrath of God)의 나타나심으로 설명된다. (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69)



법정적 개념이 제거된 하나님의 의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 개념에서 법정적인 심판의 개념을 제거하고있다. 


톰 라이트는 개혁주의와 마찬가지로 칭의의 개념을 법정적으로 본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의를 전가받는다는 개혁주의의 생각을 거부하고있다.(What Saint Paul Really Said: N. T. Wright 96)


라이트가 말하는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하나님의 의"는 법정적 심판의 개념이 포함되어있지 않지만, 죄의 문제가 판결없이 해결된 것으로 간주함으로서, 사실상 칭의에 대한 법정적 의미를 부여한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은 법정적 판결을 대신하는 것으로서 죄인에게 법정적 판결이 없이 법정적 의인이 됨을 선포하는 역할을 하고있는 것이다.(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44)


톰 라이트는 로마서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법정적이고 심판적인 개념들을 제거함으로서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를 잘못 이해하고있다.


톰 라이트는 바울이 설명하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자신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으로 해석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것을 성실히 이행하신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더 나아가 아담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며 궁극적으로 모든 피조계의 자유를 선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What Saint Paul Really Said, 48)


여기서 “의"(righteousness)를 “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God’s faithfulness to his covenant)이라는 기술적 용어(technical language)로 단정짓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63)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선과 악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의가 아니라 언약에 대하여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고있다.


쉽게 말해서 심판의 개념을 제외시키고 언약 안에서 선인이든 악인이든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하나님을 그려내고자 하는 것이다.(Ibid, 54)


톰 라이트가 바울에서 볼 수있는 하나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God)를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에 대한 신실하심 (the faithfulness of God in fulfilling of his covenant promises)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바울의 이 용어 사용에 대한 적절한 적용이라고 할수 없다.


톰 라이트의 이러한 이해는 보편적이지도 않고 바울의 글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 말이 뜻하는 특별한 의미를 찾기도 힘들다.


만약에 톰 라이트의 말대로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언약의 약속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면 어떻게 그 신실하심이 표현이 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의”(righteousness)의 뜻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고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기게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 비평



(주권의 전이와 행위구원론)


톰 라이트는 케제만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하나님의 의 개념에 도입한다.


하나님의 의를 케제만의 주장처럼 “주권의 전이”라고한다면, 주권의 전이가 구원을 뜻한다고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케제만이 말하는 주권의 전이는 사람의 믿음을 전제로하지 않는다. 

구원을 위해 자신들이 본질적 죄인이라는 고백을 할 필요도 없으며, 그리스도의 법정적 속죄사역에 대한 인식도 필요없다.

케제만의 주권의 전이는 언약적 신율주의의 토대가 된다.

언약적 신율주의에서의 율법은 윤리를 위한 도구로 전락 되었으며,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는 삶의 모델로 전락되었다.

새관점에서는 요구되어지는 예수를 따르는 윤리적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면 최종적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새관점의 주장은 행위 구원론으로 귀착될 수 밖에 없으며, 구원을 위한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 알미니우스의 주장과 같이, 구원을 신인협력에 의한 결과물로 보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선물이라고 말하지만, 그 선물에 내포된 윤리적 삶의 요구로 보아서는, 결코 은혜의 선물일 수가 없는 것이다.

윤리에 대한 요구가 의무적 요구 조건이 된다면, 요구조건을 이행하지 못하면 최종적 구원이 취소되는 것이다.

케제만의 주장과 같이, 하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고 자신의 나라로 이전 시켜 자신의 백성으로 만듬으로써, 이제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의지하고 순종하며 살아야한다는 요구, 즉 윤리적 의무를 담고있다면 윤리는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 탐구의 객관성)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개혁주의의 해석 방법과는 달리,  성경을 "역사적 예수 탐구(Quest for Historical Jesus)"라는 접근법을 사용하여 해석함으로서 얻어진 결과물이다.


문제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얼마나 객관성을 가지고 "역사적 예수 탐구"를 응용하였는가이다.


톰 라이트에게 "역사적 예수 탐구"는 이미 자신이 내린 결론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다.


톰 라이트에게서는 홀로코스트라는 유대인의 비극이 재연되지 않도록 기독교를 유대교화하려는 여러가지 시도들이 포착된다.


이미 톰 라이트에게서 배운 많은 유학생들의 장학금이 유대인의 장학금에서 자유하지 못하고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나오고있다.


톰 라이트가 역사적 예수 탐구에 사용되었던 1세기 유대교의 문서들은 객관성과 보편성에 문제가 있다.


일부 지역의 문서들일 뿐만이 아니라 이를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많은 선입관들이 전제가 되어있다.


톰 라이트가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만큼이나 이러한  자료들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문서들은 정경에 준하는 신뢰성을 가지고있는 문서들이 아니다.


정경에서 제외된 외경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 즉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의는 "언약적 신율주의"를 합리화시키기 위한 부차적인 유추물일 뿐이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의는, 바울의 서신서의 주제와는 거리가 멀다. 


바울 서신서의 주제와는 어울리지 않는 전혀 낯선 해석일 뿐이다. 



(공의의 하나님)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심판은 주로 약속과 행함에 관하여 이루어진다.


약속이 없다면 행함의 의무도 따르지 않는다.


처음 아담과의 약속,  아담 언약은 아담에게 주권적으로 선포되어진 하나님의 약속이다.


아담이 불순종하였을 때는 이에 상응하는 형벌이 주어졌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과의 약속에서 그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약속하시면서 쪼갠 짐승 사이로 지나가셨다.


즉 약속에 대한 불이행은 죽음뿐이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맺으신 구속 언약과 처음 아담과 맺으신 아담 언약도 아브라함과 맺으신 약속은 마찬가지로 반드시 이행하셔야했다.


불순종한 아담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불순종한 날 죽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날에 반드시 죽으리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실행하셨다.


바빙크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날에 바로 죽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날 바로 죽었다.


죽지 않은 것은 육신일 뿐이며, 아담 안에 있었던 하나님의 생명은 상실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으로서의 에덴에서 쫒겨남으로서 버림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정하고 절대적이다.


인간이 육신이 살아있다고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재판장은 공의의 재판장이 아니다.


죄에 대하여 죄를 묻지 않으며, 죄인에 대하여 심판을 선고하지 않는 재판장이다.


죄인을 그냥 죄가 없다고 선포하는 재판장으로서  공의의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의 속성과는 거리가 멀다.


모세는 신명기를 통하여 끊임없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기록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공의 의 심판의 희생물로 돌아가신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재판장의 의는 죄인을 대신하여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적그리스도적 발상이다. 



(구원의 기준)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를 말하면서 신자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같이 신실하게 살아갈 것을 요구하고있다.


톰 라이트가 제시하는 윤리적 요구로서의 율법과 예수의 행하심은 명확한 구원의 기준을 제시하고있지 못하고있다.


어느 정도를 충족시켜야지만 최종적 구원에 이를 수 있는지 명확한 기준이 없다.


또한 톰 라이트는 인간이 실상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있지 않다.


모든 인간은 실상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이기에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존재다.


아담 안에서 죽은 죄인에게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요구한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게 만드는 발상이다.


구원을 위해서 요구되어지는 행함의 기준은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기준으로서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다.


죽은 자에게 행함이 요구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행할 능력이 없는 절망적인 이들에게 다가오는 희망의 소식으로서 오직 전적인 은혜를 근거로하여야만 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와 예수 그리스도)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신자에게 주어지는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를 대체한다.


결과적으로 톰 라이트에게 그리스도는 구속주도 아니다.


톰 라이트가 부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위격이다.


그리스도가 구속주가 되실 수 있으셨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위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혁명적 행동 방식은 신격을 가지지 않은 선지자라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며, 실제 톰 라이트가 묘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에서는 그리스도의 신격을 찾아볼 수가 없다.


톰 라이트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행동 방식이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 받았다는 표식에 불과하다. 


톰 라이트는 신자가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때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부활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부활의 의미를 손상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과연 어느 누가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 될 수가 있단 말인가?


이러한 모순 투성이의 새관점의 논리는 복음도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왜곡시켜서 참된 복음을 손상시키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유대주의적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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