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도서 2017. 12. 18. 15:06

존 페스코의 “태초의 첫째 아담에서 종말의 둘째 아담 그리스도까지" 요약 정리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이 책의 원제는 Last things First이다.


하지만 번역본의 제목 선정이 쉽지 않았던 것은 원제인 Last things First도 많은 고민 끝에 나온 제목이었으며, 이는 미국의 정서에는 적합하지만 한국의 정서에는 맞지 않기에 결국 “태초의 첫째 아담에서 종말의 둘째 아담 그리스도까지”라는 긴 제목으로 결론이 내려진 것 같다.


이 책은 저자가 서문에서 말하였듯이 “왜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이라 부르는가?”에 대한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이 책의 논증은 역사적 개혁주의 교리의 기본 요소인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이라는 조직 신학 개념이 타당함을 입증하는 것이다.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행위 언약 개념을 비판하면서 이의 수용을 거부하고있는 것이 현실이다.


저자가 논하는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행위 언약의 개념이 없이는 정립되기 어려운 개념이다.


실제로 행위 언약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칼 바르트, 존 머레이, 톰 라이트등의 기독론이 처음 아담과의 관계성에서 정립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루이스 벌코프는 헤르만 바빙크가 정리한 행위 언약 개념을 조직 신학적으로 잘 정리하였다.


저자는 루이스 벌코프의 책과 같은 신학 작품과 같이 읽을 것을 추천한다.


최근 창세기의 창조기사와 관련되어 창조과학, 젊은 지구론, 오래된 지구론, 유신진화론등의 논쟁이 식을 줄을 모른다.


최근 창세기 1~3장에 대하여 논쟁이 뜨겁게 진행되고있지만, 이는 창세기 저자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먼 논쟁이다.


이 책은 창세기 1~3장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제공한다.


젊은 지구론, 오래된 지구론, 유신론적 진화론등은 창세기 저자가 말하고자하는 주제에서 벗어난 논점들이다.


창세기에서의 6일간의 창조가 의미하는 바는 창조 시간의 길이와는 관계가 없으며, 중요한 점은 창조 사역이 안식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서론


창세기에 대한 대중적인 접근 방법들


창세기를 둘러싼 논쟁은 지난 200년간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중심으로 발생했다.


구 프린스턴: 워필드와 핫지


프린스턴 신학교의 구학파장로교Old School Prebyterianism Of Princeton Seminary에 속해 있던 벤자민 워필드B. B. Warfield는 진화론과 창세기 1~3장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했다.


워필드는 인간의 영혼을 제외한 모든 것이 진화론적이라고 말하며, 최초의 천지 창조 이후부터는 인간의 몸과 더불어 모든 것이 진화적인 방식으로 생겨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핫지Charles Hodge는 “날"이라는 단어를 “불명확한 기간의 시간"이라고 해석하면서, 창조가 6일 만에 완성되었다는 창세기의 설명은 지구의 나이가 그것보다도 훨씬 많음을 가리키는 지질학적 증거와 상충된다고 주장했다.


핫지는 창세기 1~3장을 진화론과 조화시킨다.



창조 과학: 헨리 모리스


구 프린스턴의 입장의 특징이 창세기를 과학에 맞춘 해석이라면, 창조 과학 추종자들은 과학을 성경에 맞추어 해석한다.


헨리 모리스Henry Morris는 “창세기 1장을 해석하는 유일하게 적합한 방법은 바로 ‘해석’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라고 결론 내리면서, 창세기는 하나님이 우주를 하루에 24시간씩 엿새 동안 창조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고 말한다.


더글라스 켈리Douglas Kelly는 빛의 속도가 일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근거로, 우주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오래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두 가지 대중적인 접근 방식이 취하는 전제들



창조 과학


창조 과학의 2세대 과학자들 가운데에는 헨리 모리스가 있으며 그는 존 위트콤과 함께 “창세기의 홍수"를 저술하였다.


헨리 모리스의 저술에는 세대주의의 해석학적 특징인 문자적 해석 방식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대부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종말론에 있어서 세대주의의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문자적 해석을 전제로한 종말론적 결론을 거부한다.


하지만 개혁주의 공동체 안에서 그들의 세대주의적 창조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모리스가 쓴 창세기 해석에서 보여주는 세대주의적 증거들을 보여주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삼분법적 인간론을 고수한다.

2. 원죄가 간접적으로 전가되었다고 믿는다.

3.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천년왕국 통치동안에 물지붕이 다시 복원될 것이라고 믿는다.

4. 생명나무 열매 속에 실제로 생명을 연장하는 물질이 들어있다.

5.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에는 유전자를 변형시키는 유독물질이 들어있었다.

6. ‘신비mystery'라는 단어를 성경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


이외에도 모리스는 모형론typology에 대하여 별 관심이 없으며,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는 아담과 교회의 모형이 되는 하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모리스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과학의 나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모리스는 성경이 과학적이지 않고 신학적이라고 말하는 모든 사람을 신정통주의자라고 분류했다.



구프린스턴


핫지의 방식의 문제는 지질학적인 의미로서의 하루가 핫지의 주해적 결론을 이끌어 내는데, 과학 이론은 변하기 마련이기에 이러한 방식에는 문제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 성경 해석의 절대적인 규칙은 성경 그 자체다. 따라서 성경의 어떤 부분에 대한 진정하고 완전한 의미에 대한 의문이 있다면, 이 부분에 대해 더 명확히 설명하고 있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그 답을 찾아내고 알아내야한다(1.9)”


Fesko는 창세기에 대한 창조 과학적 접근뿐 아니라 구프린스턴의 접근방식에도 반대한다.



창세기 1~3장에 대한 최근의 문자적 해석


개혁주의에 속한 많은 이들이 창세기 1~3장을 해석할 때 창조가 일어난 기간에 주목하는 문자적 해석 방법을 채택한다.


하지만 창세기 1~3장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작품들은, 창조가 일어난 날들의 실제 길이가 얼마인가라는 하나의 문제에만 지나친 주해적 초점을 두기 때문에, 결함을 지닐 수 밖에 없다.



창세기 1~3장의 목적


과학적 자료와 세계사


모리스나 로스등 창조 과학을 주장하는 이들은 창세기에 대한 과학적인 묘사들을 하는데 있어서 다음과 같은 전제들을 기초로하고있다.


1. 창세기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방법을 말해준다.

2. 창세기 1~11장은 지구의 일반 역사에 대한 것이다.

3. 창세기 1~11장이 종교에 대한 것이라고 말하거나 신학적 진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정통주의 혹은 자유주의적인 답변이다.


페스코는  이러한 세 가지에 대하여 비판한다.


1. 하나님은 욥에게 창조에 대한 60개 이상의 질문을 하지만 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욥에게 하신 질문은,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셨는지에 대하여 욥이 모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랍비의 해석에 의하면, 창세기 1장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어떻게 창조하셨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러므로 창세기가 창조의 방법에 대해 말해준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며, 해석은 오로지 성경 본문과 그 본문의 맥락에만 충실해야한다.


2. 모리스의 주장과 같이 창세기 1~11장은 세계 역사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창세기 1장에는 천사의 창조나 사탄의 타락에 대한 내용이 전혀 나와 있지 않다.


창세기 1~11장은 선택적 역사이며, 성경은 전반적인 세상의 역사를 다루지 않으며 구속사, 즉 구원의 역사를 다룬다.


3. 모리스의 주장과는 다르게 창세기 1~11장이 일차적으로 종교적 혹은 신학적 글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정통주의와 비슷한 것이 아니다.


신정통주의 밖에 있는 신학자들도 이와같은 주장을 한다.


창세기 1~11장, 그중 특히 1~3장은 과학에 대한 것이 아니며 독자에게 과학적 자료를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창세기 1~3장은 신학적이다.



기독론적 강조와 그 목적


창세기의 첫 장들을 기독론적으로 연결짓는 것은 중요한 해석학적 가정이다.


창세기 1~3장은 과학이나 세계 역사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이해하는 시작점이다.


기독론이 창세기 1~3장을 설명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신약 성경에 비추어 이 부분을 해석해야만 한다.


신약 성경에서 빛과 어두움, 창조주로서의 그리스도,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와 같은 표현들은 창세기 1~3장이 기록된 목적이다.


창세기 1~3장은 첫째 아담의 실패가 지니는 신학적 의미를 설명해주며, 첫째 아담의 실패가 지니는 신학적 의미는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공적 사역의 시작점 역할을 한다.



해석 방법론: 기독론과 종말론


창세기 1~3장은 단지 구속 무대의 건축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인격person과 사역work에 대한 예시shadows와 모형types을 보여준다.


바울도 아담을 “오실 자의 모형"(롬 5:14)이라고 말한다.


창세기는 구속사와 분리할 수 없다.


둘째 아담의 사역은 첫째 아담의 중요성을 가르쳐주며, 첫째 아담의 사역은 둘째 아담의 중요성을 가르쳐준다.


아담이 첫 번째 예언자, 선지자, 왕인 것과 같이, 창세기 1~3장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예언자, 선지자, 왕이라는 세 가지 직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직접적인 역사적 상황


창세기 1~3장은 기원전 15세기라는 직접적인 역사적 상황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두 가지 지평에서 해석되어져야한다.


창세기가 기록된 시점은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이나 광야 기간 중 한 때로 잡을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 숭배로 가득했던 애굽 땅에서 나온 이후에, 다시 우상 숭배자들과 이교도들이 차지하고 있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창세기의 설명은 우주의 나이를 계산하는 일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성품과 특징을 기억나게 해 주었을 것이다.(42)


창조 이야기는 21세기 과학이 던지는 질문들을 통해 분석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약속의 땅의 정복을 둘러싼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맥락에서 이해하여야하며, 궁극적으로는 기독론적인 의미를 염두에 두어야한다.(43)



1장.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


서론


창세기 1~3장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 관한 탐구는, 대부분 구원의 순서(ordo salutis)의 관점에서, 창조, 타락, 구속의 맥락으로 접근한다.


하지만 구속사의 문제들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


둘째 아담의 사역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첫째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손상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9)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종말론적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시작해야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성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창세기 1장 26절의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사람을 만들자'라는 구절에서 하나님이 복수형을 말씀하시는 것에 대한 세 가지 설명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이 자신의 천상회의를 향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가장 초기의 랍비 해석자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왕실에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했었다.


최근에는 이 입장에 대하여 메러디스 클라인Meredith Kline이 지지하고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천상회의가 인간 창조에 참여하였지만, 이 회의에 천사나 다른 천상의 회원이 참여하였다는 말은 없다.


2) 위엄Majesty을 나타내는 하나님 주권의 복수형이다.


3) 삼위일체의 초기 단계적 표현이다.


구약 성경에서 신약 성경에 이르기까지의 점진적인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이 드러남을 볼 때, 본질적으로 하나이지만 복수 성격을 갖고 계신 하나님에 대한 예시일 수 있다.


1)과 2)의 주장보다는 3)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


통전적holistic 정의


하나님의 형상을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의 인간의 역할에서 일차적으로 찾을 수 있으며, 이차적으로는 인간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영역,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 하나님처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역시 지구를 지배하는 주권을 가진다.



고대 근동의 배경에 비춰 본 하나님의 형상


고대 근동의 배경에 비춰볼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갖는 의미는,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다스리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인간은 창조물로서 신이 아니며,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지배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형상, 곧 전달 가능한 하나님의 속성들을 부여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또 삼위일체 안에 있는 신적인 거룩한 공동체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 인간을 공동체로 만드셨고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인간: 창조의 정점


창세기 1장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은 두 가지 특징이 두드러진다.


첫 번째는 ‘바라’(בָּרָ֣א)라는 동사의 사용이다.


한 구절에서 ‘바라’(בָּרָ֣א)라는 동사를 세 번이나 사용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의 정점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형상이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두 개의 얼굴을 지닌 양성체가 아니며, 홀로 하나님의 형상을 갖지 못한다.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서 창조의 정점인 하나님의 형상을 갖는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창조 세계를 다스리도록 인간을 세상에 두셨다는 것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다스리셨다는 선포였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타락 할 수 없는 상태로 창조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고귀한 위치로부터 타락했고, 이 때문에 구속이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중요한 교리적 요지가 담겨있다.


1) 그리스도의 형상은 인간이 참으로 어떠해야하는지를 결정한다.


신약 여러 곳에서 증언하였듯이, 그리스도가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완벽한 인간이었다는 말이다.


이를 학문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기독론이 인류학을 정의한다는 말이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지만, 절대적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와 달리, 상대적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리스도는 신적인 존재로서의 영원한 독생자인 반면에 인간은 신적 존재 밖에 있는 피조된 아들이다.


그리스도는 창조 세계에 주권을 행사하심으로서 하나님을 형상화했는데, 이는 첫째 아담이 실패한 임무인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일을 삼위일체 하나님이 참으로 해내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2) 그리스도의 형상은 인간 구속의 목표를 결정한다.


후크마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완벽한 형상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완전하게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닮는 것이 성화의 최종 목적이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전면에 두어야한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남자와 여자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단일성과 공동체성을 모두 나타낸다.


하나님은 자신의 대리 통치자로서 다스리도록 인간을 창조 세계 가운데 두셨는데, 이는 곧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통치하시고 우주를 다스리심을 뜻한다.


인간은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인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2장 동산이자 성전인 에덴


서론


아담에게 주어진 임무에 대한 창세기 본문의 의도는 과연 채소밭을 경작하는 일등이 주어진 단순한 농장으로서의 에덴을 이야기하는 것인가에 대하여 추론해 볼 때 대답은 “아니다”이다.


아담은 에덴에서 제사장적 임무를 가지고있었으며, 에덴이 지구상의 원형적 성전이라는 결론에 이르게된다.



에덴동산의 특징


동방에 위치함


창세기 2장 8절에서 하나님이 동산을 동쪽 지역에 만드셨다고 나와있다.



산꼭대기에서


에덴 동산은 주변의 지형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하고있었다.


창세기 2장 10~14절에는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왔다고 말한다.


에스겔은 에덴동산의 위치를 하나님의 성산 위라고 말한다.


호렙산, 시내산, 시온산 위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도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거할 종말론적인 장소는 산꼭대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히12:22)


성경은 성전 안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와 산꼭대기에 있는 성전의 위치 사이에 중요한 연관성을 부여한다.


에덴에서 강물이 흘렀다는 사실과 에스겔의 진술을 종합해 볼 때 에덴동산이 산꼭대기에 있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74)



에덴의 강


에덴의 강은 성전 이미지와 중요한 연관성을 지닌다.


시편 46편 4절에서는 강과 성전을 연결시켜 말한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생수의 근원이라고 부른다.(렘 2:13)


강과 성전을 연결하는 이미지는 물의 이미지와 하나님의 임재 사이의 관계를 인식하게끔 해주며, 성령에 대한 내용을 인식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하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8~9)


이에 대하여 메러디스 클라인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에덴에 있는 산의 보좌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가 낙원 안에 있는 강을 샘솟게 하는 근원이었음이 분명하다”(76)



동산 안의 나무들


십계명은 지성소의 궤 안에 보관되었고 그 옆에 율법 책이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궤를 만지거나 궤가 열린 모습을 보게 되면, 즉각 죽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의 가시적인 표현인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와 하나님의 계명 사이에는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명령의 가시적인 표현인 선악을 알게하는 아무든지 언약궤 안의 율법이든지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의 성전 안에 언제나 존재한다.


생명나무와 성전의 일곱 촛대 사이에도 연관성이 있다.


학자들은 이 일곱 촛대가 동산에 있던 생명나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유대 문헌서는 생명나무가 에덴동산 안의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에 있었다고 기록한다.


성전과 나무의 연관성은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현저하게 두드러진다.


에스겔은 ‘성소를 통하여 나오는’ 강을 보는데 이 강이 좌우 강변의 각종 ‘먹을 과실나무’를 자라게 해준다.(78)



보석과 금속


창세기 2장 10~14절에는 금과 호마노등 값진 보석과 금속이 있었다.


동산 안에있던 보석들 가운데는 대제사장의 예복, 특별히 그의 흉패에 다시 등장한다.


대제사장의 흉패는 “하늘나라 성막을 본뜬 땅의 성막의 작은 복사판”으로 만들어져야했다.


이와 동일한 보석들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종말론적 성전의 토대에 다시 등장한다. (79)



그룹 (케루빔)


인간이 타락하게되고 그 후에 동산에서 쫒겨나게되면서 하나님은 동산의 동쪽 문 밖에 두 그룹을 세워두신다.


그룹은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는 수호자이다.


솔로몬의 성전에는 두 그룹이 내소 안을 지켰다.


그룹의 위치와 움직임은 성전으로서의 동산의 정체성을 제공해준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 그룹은 동산 안을 앞뒤로 돌아다닌다(겔 28:14).


이 그룹들은 처음에는 동산에 있었지만, 인간의 타락 후에 동쪽 문으로 옮겨졌으며, 성전 내부와 지성소 사이에 달린 휘장에 상징적으로 재현된다.


이 휘장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찢어졌으며,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한 번 지성소 안에 계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동산 안의 거주자의 활동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은 “동산 안에 거니시고” 있었다.


이는 하나님이 성전 안에 나타나셨을 때 하셨던 하나님의 활동을 묘사하는 표현과 같다.(81)



하나님의 동산 창조


동산과 성전의 유사성은 동산의 창조와 광야의 성막 건축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학자들은 창조가 일어난 기간 칠 일과 하나님이 모세에게 성막 건축을 지시하기 위해 일곱 번 말씀하신 것이 평행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웬함Wenham은 “창세기 1장 1절~2장 3절에 나오는 창조 사건의 결말과 출애굽기 25장 31~40절에 나오는 성막 건축을 설명하는 표현에 있어 평행을 이룬다.”라고 지적한다.


하나님은 창조 사역을 모두 마치신 후에 일곱 째 날에 안식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은 모세에게 일곱 번째 말씀을 마치신 후 안식일을 규정하셨다. (출 31:17)


하나님은 창조가 완료되자 동산-성전에서 안식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광야의 성막 안에 새로 만들어진 지성소에서도 안식하셨다.


성막은 성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우주적 성전인 창조 세계의 작은 복사판이다.


이는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우주적 성전이라면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최초의 지성소라는 것이다.


1. 첫째 날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창 1:1)하셨으며, “하늘을 휘장같이 치셨다”(시 104:2)

-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휘장을 염소 털로 만들되”(출 26:7)


2. 둘째 날

-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창 1:6)

- 그 휘장이 너희를 위하여…… 구분하리라.”(출 26:33)


3. 셋째 날

-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창 1:9)

- “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출 30:18)


4. 넷째 날

-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창 1:14)

- “너는 순금으로 등잔대를 쳐 만들되”(출 25:3)


5 다섯째 날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창 1:20)

-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출 25:20)


6. 여섯째 날

- 인간이 창조되었다.

- “네 형 아론을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출 38:1)


7. 일곱째 날

-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창 2:1)

 “하나님이 복되게하사”(창 2:1)

  하나님은 하시던 일을 마치셨다. (창 2:2)

  하나님은 “거룩하게 하셨고”(창 2:3)

- “이와같이 성막 곧 회막의 모든 역사를 마치되”(출 39:32)

 “모세가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출 39:43)

 “그날에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치니”

 “신성하게(거룩하게)하셨다.(83~85)



아담이 맡은 책임들


하나님이 아담을 동산에 두신 이유는 아담이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게”(창 2:15)하기 위함이었다.


많은 주석가들이 이 노동을 농사짓는 일, 농업적 경작으로만 이해하는데,

‘경작하다’라는 단어인 ‘아바드’와 ‘지키다’라는 단어인 ‘샤마르’는 성막 안의 제사장의 임무를 묘사하는데 쓰인다.


웬함은 아담이 레위인의 원형으로 묘사되어야한다고 말한다.


성경 전체의 더 큰 맥락에서 해석하면, 아담이 동산에서 수행하여야 할 책임은 농업에 관련된 일이기보다는 일차적으로 제사장으로서의 임무인 것이다.



아담이 타락 후에 입은 옷


아담과 하와의 옷은 장차 하나님의 백성을 그리스도의 의로 덮으실 것을 예시하는 것이지만, 에덴동산 안에서 인간이 입은 옷과 이후 성전 제사장들이 입은 예복 사이에는 평행 관계가 있다.(87)



결론


에덴동산의 여러가지 특징들은 에덴동산이 성전의 지위를 가졌음을 확증해주는 상당한 증거들이다.


클라인은 하나님이 우주적 성소의 소우주적인 모형을 에덴동산 안에 만드셨다고 말한다.


루터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성전을 지어주셔서 “아담으로 하여금 자신을 예배하게하셨다”라고 말했다.


아담은 제사장의 원형이지 농부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성전을 지으신 것이지 농장을 만드신 것이 아니었다.(90)



3장 행위언약


서론


아담은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 역사적으로는 행위 언약이라고 불렸던 관계에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사람과 맺은 첫 언약은 행위의 언약으로, 그것 안에서 완전하고 개별적인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에게 그리고 그의 모든 후손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7.2)고 말한다.


정의


언약을 표현하는 히브리 용어는 ,베리트(בְּרִית)다.


‘베리트(בְּרִית)’의 일반적 정의는 인간들 사이 또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조약, 동맹 또는 협정을 말하며, 이는 구약 성경에서 보통 언약covenant라는 단어로 번역된다.


구약 성경 안의 언약들


구약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언약은 크게 사람들 사이의 언약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의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사람 사이의 언약으로는 우정(다윗과 요나단 언약), 동등 조약(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언약), 종주와 봉신(여호수아와 기브온 사이의 조약), 결혼(남자와 여자 사이)을 예로 들 수 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언약은 종주와 봉신의 언약이라는 일반적 범주에 속한다.


여기에는 일방적 언약과 쌍방적 언약이 존재한다.


노아 언약


하나님과 노아 사이의 언약으로서 하나님과 피조물 간의 언약으로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루어지는 일방적 언약의 범주에 속한다. 하나님은 언약에 동반하는 표지로 무지개를 보여주신다.


아브라함 언약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언약으로서, 일방적인 집행이 강조되지만 쌍방적 요소가 존재하며, 표지로는 할례가 있다.


모세 언약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으로서, 일방적인 요소들이 언약 안에 있지만, 쌍방적 요소에 더 큰 강조점이 있다.


십계명과 언약의 책을 동반하며, 언약에 참여하는 남자들에게 할례가 요구된다는 점에서 아브라함 언약을 전제로하며, 언약의 표지로 안식일을 주신다.


다윗 언약


하나님과 다윗 왕 사이의 언약으로서 일방적 언약이다. ‘소금 언약'이라고도 묘사되며, 모세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에 그 뿌리를 두고있다.



창세기 1~3장에 나오는 언약



창세기 1~3장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창 1:5)


하나님이 낮과 밤에 이름을 붙여주시는 것은 언약적 행동이다.


예레미아는 “너희가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깨뜨려 주야로….나의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깨뜨려….레위인 제사장에게 세운 언약도 파할 수 있으리라(렘 33:20-21)”고 말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창조는 언약적인 것이다.


창세기 1장의 창조의 이미지, 특히 하나님의 성령이 혼돈 가운데있는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모습은, 언약적인 배경을 가진 성경의 다른 곳에서 다시 등장한다.


메러디스 클라인에 의하면 “창세기 1장2절의 창조 묘사는 재창조 광경에 대한 환상에서 반복된다…. 영광의 영…. 영광의 임재가 신적인 증인으로서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 출애굽-재창조에서 모세가 창세기 1장 2절의 이미지를 통해 묘사하는 영광의 그름은…. 언약에 대한 핵심적인 증인이 된다.  예수님이 세례받으실 때, 새의 형상으로 물 위로 내려오신 성령은 창세기 1장 2절에서와 같이...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신적인 증언이었다. 영광의 형상은 요한계시록 10장 1절 이후에… 맹세하시는 모습이다….”와 같이 출애굽, 그리스도의 세례, 완성의 때에도 성령이 하나님의 언약 행위에 대한 증인으로 나타나면서, 성령이 창세기 1장 2절의 창조의 시작때와 같은 기능을 하신다.


성령은 하나님의 언약적 주권에 대한 증인이셨다.


고든 스파이크만은 “언약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에, 태초부터 창조물은 하나님께 대한 의존과 하나님 앞에서의 반응이라는 언약적 관계 안에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시고 아담을 원시 성전Primeval temple인 에덴동산 안에 두셨을 때 하나님은 복과 저주를 모두 담고 있는 명령을 내리셨으며, 복과 저주가 첨부되었다는 덤에서 모세 언약과 평행을 이룬다.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하나님의 구속적 언약의 성례적 표지들과 비슷한 성례적 역할을 한다.


칼빈에 의하면 “성례라는 말은….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이 참이라는 사실에 대해 사람들이 더욱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명하신 모든 표지들을 일반적으로 포함한다….자연의 물체 가운데 표지…. 한 예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불멸에 대한 보증으로 생명나무를 주셔서 아담과 하와가 영원히 살 수 있다는 확신을 생명나무 열매를 먹음으로써 갖도록 하신 것이다…. 아담과 노아는 생명나무와 무지개를 성례로 여겼다….생명나무와 무지개 안에 하나님 말씀에 의해 새겨진 표시가 있어서 언약에 대한 증거와 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6장 18절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창 6:18)


하나님께서 노아와 관계를 맺으실 때 처음 사용하신 언약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게서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시작하실 때 사용하신 언약과 다른 명칭을 사용하신다.


아브라함 언약에서는 ‘세우다'라는 뜻의 ‘하킴’ 대신에 ‘카라트’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노아 언약에 사용된 ‘하킴'이라는 단어는, ‘자르다'라는 뜻을 가진 ‘카라트’라는 단어와는 달리, 이미 존재하고있는 것을 다시 세우는 행위로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언약의 지속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9장에서 노아와 언약을 맺으실 때, 9장 1~2절과 창세기 1장 28절의 통치 명령dominion mandate사이에 명확한 연관성이 드러난다.


노아 언약은 창조에 그 뿌리가 있으며, 창세기 1장 1절을 시작으로하고있기에, 하나님이 노아와 세우신 언약은 하나님이 아담과 세우신 언약에 그 뿌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호세아 6장 7절


“그들은 사람들(혹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호 6:7)


‘커아담( כאדם)’이라는 구절을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대하여 의견이 일치하지 않지만, 칼빈이나 워필드의 경우에는 ‘사람들처럼’보다는 ‘아담처럼’에 무게를 실어주고있다.


만약 올바른 해석이 ‘아담처럼’이라면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언약이 존재했음에 대한 명확하고 확실한 증거가 된다.


이 구절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하나님의 아들인 아담과 하나님의 아들인 이스라엘의 비교로 해석하는 것이다.



로마서 5장 12-19절


이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명확한 평행관계를 세운다.


바울이 아딤을 ‘튀포스’ (τύπος), 즉 ‘오실자의 모형’이라고 여길 때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에 핵심적 연관성이 드러난다.


아담으로부터 언약적 배경을 제거해버리는 것은 성경의 근본 흐름을 거스르는 일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렸다”고

아담을 언약적 문맥에서 이야기한다.


그리스도와 아담 사이의 평행 관계, ‘튀포스’라는 단어의 전문적 사용, 그리스도가 둘째 아담으로서 구속을 가져다주는 언약적 배경, 이 모든 것에 기초해 볼 때 아담 또한 언약적 상황 속에 있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아담이 언약 안에서 해야 할 일



통치명령


인간의 언약적 책임에 대하여 가장 많이 진술하는 구절은 통치 명령이라고 불리우는 창세기 1장 28절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이다.


이를 통하여 아담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임무는 “1) 출산을 통해 이 세상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채워라 2) 땅을 정복하라 3) 창조 세계를 다스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명령은 일정한 시험 기간이 지나면 끝나는 것이었다.


시험 기간에 아담에게 주어진 임무는 자신의 일을 끝마칠 때까지 확장 사역을 감당하며 인생을 보내는 것이었다.



잘못 이해된 통치 명령


학술것인 글이나 대중의 글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담의 사역을 노동과 연계시키는 것이다.


존 머리는 창세기 2장 15절에 대하여 “....아담의 노동이 저주가 아니라 복임을 확실히 인식해야한다…..아담의 노동이 에덴동산을 가꾸고 지키는 일이었다는 사실이...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인간의 위엄에 상당히 걸맞는 것이었다는 사실이다”고 말한다.


R. C. Sproul은 “우리는 지구를 가꾸고, 경작하고, 지키도록 만들어졌다...하나님이 생산적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생상적이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타락 전에 이런 일들을 우리에게 맡기셨다….”고 말한다.


머리와 스프로울과 같은 주석자들은 노동을 창조의 법령으로보고, 이로부터 노동 일반이 인간이 맡은 의무의 한 부분임을 도출한다.


하지만 아담이 일만을 했다거나, 동산을 지키기만 했다거나, 아담의 일차적 직업이 농부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116)



성전의 문맥 안에 있는 통치 명령


아담의 언약적인 일의 요소들


첫째, 아담의 주요 직업은 농부가 아니라 제사장이다.


고든 웬함은 “아담을 원형적인 레위인archetypal Levite으로 여겨야한다"고 말한다.


둘째, 에덴동산은 농장이 아니라 최초의 성전이었고, 여기서 아담은 자신의 제사장적 임무를 수행해야했다.


셋째,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담은, 창조 세계 전체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다스리는 임무를 받았으며, 하나님의 권위 아래서 (왕적인 임무를 가지고) 창조 세계를 다스려야했다.


넷째, 동산과 바깥 세상 사이에는 눈에 띄는 경계가 있었으며, 동산 안의 지역에는 질서가 있었다.


홍수 전에도 땅에는 비가 내렸으며, 동산 안은 인간이 땅을 경작하였기 때문에 질서가 유지되고 있던 반면 동산 밖은 경작이 없었기에 무질서했다.


아담은 동산 안의 질서를 세상 전체에 확장해야만 했다.


하나님은 아담과의 언약을 통해 아담에게 다음의 임무(아담의 언약적 의무)를 주셨다.


1) 출산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이 많아지게하며,

2) 지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가득 차게 하고, 동산- 성전을 확장시켜서 땅 끝까지 가득 차게 하여 땅을 정복하고,

3)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들이 창조 세계 전체를 다스리게 함으로써 아담의 통치 대행권을 세상 전체에 확장시키는 의무이다.



아담의 언약적 노동의 목적: 안식일의 쉼


아담에게 주어진 시험의 기간은 영원한 것이 아니었으며, 아담이 언약적 의무를 이;행한 후에는 아마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을 것이다.


종말론은 죄가 있기 전에도 있었으며, 생명나무가 상징적인 모습으로 영광스러운 운명을 나타내고있었다.


행위 언약이란 것은 안식일의 원칙이 구체화된 것이다.



행위 언약에 대한 비판에 답함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세기 2장 16~17절에 대한 설명에서 시작된 행위 언약 교리는 종교개혁 이후에 와서 개혁주의 신학의 표준이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행위 언약 교리가 표기되었지만, 행위 언약에 대한 비판은 계속되었으며 대표적인 사람으로 존 머리를 들 수 있다.


존 머리는 행위 언약에 대한 반대에는 다음의 세 가지 주장이 담겨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논해보고자한다.


1)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의 시험 기간중에 은혜의 요소가 존재했으므로 행위라는 용어는 적합한 표현이 아니다.


2) 성경은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의 상태를 언약이라는 용어 아래에서 정의하지 않는다.


3) 성경은 언약이라는 단어를 하나님이 인간을 구속적으로 다루실 때만 사용한다.



행위라는 용어는 적합하지 못한 표현이라는 주장


머리는 언약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아를 어떻게 다루셨는지를 이해하여야한다면서 노아 언약을 설명한다.


존 머리는 노아 언약을 하나님 단독적monergistic인 일방적인 방식으로 이해함으로서, 언약에 대한 전형적인 분석과 정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머리는 언약을 맹약compact이나 계약contract, 또는 조약agreemant이라는 개념을 시작으로 접근하면 안된다고 말한다.


머리는 언약이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의 주권적인 적용이며, 본질적으로 일방적인 집행이라고 정의했다.


머리는 하나님이 아담을 다루시는 방식이 공의가 아닌 은혜에 기초한 것이라고 믿었다.


아담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했다는 믿음이 에덴동산 안의 인간의 상태에 대한 머리의 생각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머리의 이러한 주장은 몇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다.


1) 머리는 에덴동산 안의 아담의 위치가 공의가 아닌 은혜 위에 세워졌다고 주장한다.


이는 머리가 은혜와 행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고려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머리는 아담이 동산 안에 계속 머물 수 있는지의 여부가 아담의 순종에 좌우된다고 주장함으로서, 아담이 에덴동산에 머물 수 있었던 기반이 은혜와 공로의 혼합이었다는 말이 된다.


(필자 주: 존 머리의 이러한 주장은 새관점이 말하는 이스라엘의 가나안에서의 상태와 유사성을 가지고있다. 이는 존 머리의 영향을 받은 노먼 쉐퍼드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페더럴 비전이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유사성을 갖는 이유가 되기도하다)


즉 아담은 순종에 대한 보상은 공의justice가 아닌 은혜를 기초로 받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필자 주: 만약에 아담이 완전한 순종을 하였을 때 주어졌을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은 순종에 대한 공로를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전적인 은혜를 근거로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 11:6)고 말하면서, 바울은 은혜와 행위를 대조시킨다.


머리의 주장의 또 하나의 결점은, 하나님이 아담의 순종을 은혜가 아닌 공의에 의해 판단하셨을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머리가 행위 언약을 비판하면서 다루지 않는 점 하나는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평행 관계다.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첫째 아담이 공의justice가 아닌 은혜에 기초하여 심판을 받는 것이라면, 둘째 아담의 공로 역시 공의justice가 아닌 은혜에 기초한 것이 된다.


이에 대하여 클라인은 “만약 공로의 행위가 둘째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으로 인정될 수 없다면, 그의 백성이 의롭게 여겨지고 인정받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전가해 줄 공로 또한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리 아이언즈Lee Irons는 “두 아담 사이의 평행 구조는 우리로하여금 이 두 경우 모두의 근거를 하나님의 공의로 보게한다. 왜냐하면 만약 첫째 아담이 공로적 순종을 통해 영생을 얻을 수 없었다며, 마지막 아담도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언약이라는 표현은 아담과 관련하여 등장하지 않는다는 주장


머리는 언약이라는 단어가 동산 안의 아담의 상태와 관련되어 등장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어떤 구절 안에서 단어의 형식적인 부재가 그 구절 안에서 그 단어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 예로서, ‘은혜 언약’ ‘결혼’등을 들을 수 있다.


또한 머리는 호세아 6장 7절의; 행위 언약적 해석을 반대하는 근거가 될만한 대체 해석을 제시하지 않는다.


언약은 언제나 구속적이라는 주장


머리는 “성경이 언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언제나 하나님이 인간에게 구속적, 혹은 구속의 계획에 밀접하게 연관된 준비를 해 나가시며 인간을 다루실 때다"라고 주장한다.


머리는 구속적인 언약에 주목하여 이것만이 유일한 언약이라고 가정한다.


행위 언약을 부정하려는 머리의 시도는 비성경적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4장 둘째 아담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


서론


아담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창조 세계를 다스리라고 하나님이 주신 임무를 팽개쳐 버렸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향해 가졌던 목적이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장 15절(필자 주:원시복음)에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자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이를 위해 구속 역사를 통하여 첫째 아담이 팽개쳐 버린 일을 다시 맡아 하신 것이다.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가 출현하기가지 구속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이 자신과 둘째 아담의 인격과 사역을 모형화하도록 세우신 대표자들 사이에 일련의 언약을 세우셨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필자 주: 저자는 아담 이후의 언약들을 아담 언약과의 관계성, 혹은 연관성을 통하여 유형학적으로 해석하고있다. 이어지는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가운데 담겨있는 아담 언약의 속성들을 밝혀내고있다. 특히 모세 언약을 아담의 행위 언약과의 관계성에서 플어나가는 방식은 모세 언약을 은혜 언약으로 해석하는 이들의 반발을 불러오고있다.)



노아 언약


아담의 타락 이후에 주어지는 일련의 언약들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세우셨던 첫 언약의 통치 명령이 다시 반복해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신 언약의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형상을 땅 위에 퍼뜨리는 것

2) 성전을 땅끝까지 확장하는 것

3) 1)과 2)의 요소를 통해 땅 위를 통치하는 것

4) 돕는 배필의 보조로 이 임무를 완성하는 것


노아 언약은 세대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이 선례가 없는 처음 언약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아담 언약과 평행관계를 이루면서 통치 명령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주셨던 것과 똑같은 임무를 노아에게 주셨다.


노아 언약에 나타나는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요소는 첫 번째 창조와 대홍수 이후의 새로운 창조 사이의 평행관계를 보여준다.


1) 하나님의 형상을 땅 위에 퍼뜨린다.(창 9:7)

2)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땅 위에 퍼뜨린다.

3) 1)과 2)의 요소를 통해 땅을 정복한다.

4) 노아는 이 임무를 자신의 돕는 배필과 연합하여 생긴 열매인, 후손을 통해 성취한다.


이에 대한 워렌 게이지의 설명이다.


“.... 창세기 8장의 기록은 본래의 창조에 대한 창세기 1장의 설명과 평행을 이룬다…. 창세기 8장 1절에서 하나님은 창조 전에 세상을 덮고 있던 물과 같이(창 1:2) 땅을 덮고 있었던(창 7:18-19) 홍수 위에 바람이 불게 하신다….채소밭이 생기는 장면(1:12)은 비둘기가… 감람나무 잎을 물어다 주는 장면(8:11)과 유사하다…. 하나님이 처음 세상의 창조를 마치신 후 안식하신 일은 새로운 창조가 긑난 후에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으시며 쉬신 일과 일치한다.”


첫 창조와 대홍수 이후의 창조 사이의 평행 구조는 노아를 일종의 새 아담처럼 여기시며 노아와 새로 시작 하셨고, 첫 아담에게 주셨던 언약적 임무를 노아에게도 주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홍수 이후의 노아의 타락은 아담을 연상시킨다.


1) 노아도 에덴동산과 비슷한 환경인 포도밭에서 타락했다(9:20).

2) 아담이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것과 같이 노아도 포도나무의 열매에서 나온 포도주를 마셨다(9:20).

3) 아담이 올곧은 자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이었던 것과 같이, 노아 역시 의로운 자였고 그의 세대 가운데 흠없는 자였다(6:9).

4)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동산에서 바람이 불 때 아담과 함께 동산을 거니셨던 장면을 연상시킨다(3:8, 6:9).

5) 노아는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자신의 하체를 드러냈다. 이 때 아담의 죄를 하나님이 덮으셨던 것처럼(3:21) 노아의 아들들이 와서 그의 벌거벗은 몸을 가렸다(9:23).


노아는 행위 언약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기에 또 다른 아담을 바라보아야했다.



아브라함 언약


아브라함 언약에서도 아담 언약과의 연속성을 살펴 볼 수 있다.


1)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크게 번성시키겠다고 약속하셨다(창17.2).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꾸신다.


이런 하나님의 복은 기본적으로 왕에게 내리는 복으로서 창조 세계의 대리인이었던 아담의 역할과 비슷하다.


2) 아브라함 언약의 목적은 이 언약의 복을 땅끝까지 퍼뜨리는 것이다(창 12:3)


아브라함은 이러한 언약을 실행하기 위해서 돕는 배필인 사라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는 아담의 통치 명령과 평행을 이룬다.


3) 아브라함에게도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주셨다.


4) 아담이 원형적인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했던 것과 같이 아브라함도 성전같은 것을 건축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도착하였을 때 아브라함은 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창 12:7)


게할더스 보스는 “... 가나안은 이스라엘의 종말론적인 상태를 예시해준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즉 전형적인 낙원이었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의 제단은 하나님이 동산- 성전에 있던 아담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던 사건을 상기시켜준다.


제단은 ‘희생하다'라는 동사로서 작은 성전 부지라고 할 수 있다.


쌓은 제단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1. 아브라함이 이 제단들을 산 위에 세웠다.


야곱이 제단을 쌓은 벧엘은 산 위에 있는 “하늘의 문"이다.


2. 아브라함은 보통 나무숲 한 가운데 제단을 쌓았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산 위의 나무숲 속에다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동산- 성전인 에덴을 생각나게해준다.



모세 언약


모세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미 언급한 동산- 성전과 광야의 성막 사이에 평행 요소들이 다음과 같이 존재한다.


1) 칠 일 동안의 창조와 성막 건축에 대한 하나님의 일곱 번의 말씀

2) 장식용 나무들과 귀금속과 금속의 존재

3) 생명나무의 복제본인 일곱 촛대

4) 그룹의 수가 놓인 지성소의 휘장

5) 하나님이 동산 안을 거니심과 성막 안에서 거니심

6) 레위인의 원형인 아담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레위인이 하나님을 섬기며 산 위, 곧 시내산 위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등…

7) 아담의 행위 언약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모세 언약 사이에 연속성의 존재.

8) 아담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것(눅 3:38)과 같이 이스라엘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다(출 4:22).

9) 하나님이 아담을 생명의 원천인 성전의 위치인 동산에 두셨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도 젓과 꿀이 흐르는 땅에 두셨다. 빌Beale이 말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 땅의 풍요는 에덴동산과의 일치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10) 이스라엘이 제사장의 나라가 되어야했던 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임재를 세상 전역에 확장하는 일에 헌신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온 땅에 퍼뜨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로 가득하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11) 하나님아 아담에게 내려진 통치 명령을 노아에게 다시 내려졌듯이 이스라엘도 일종의 통치 명령을 받았다.


이스라엘이 가진 지위는 창세기가 그리는 그림에서 보았을 때 바로 아담이 가졌던 지위이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행위 언약을 주셨듯이 이스라엘에서도 행위 언약이 재현republication되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창조 사이에도 다음과 같이 평행관계가 존재했다.


1) 첫 창조에서 성령은 새처럼 원시적인 혼돈의 수면 위를 운행하셨다.


새를 연상시키는 똑같은 이미지가 하나님이 광야에서 떠도는 이스라엘을 지휘하는 모습과 연결되어 등장한다.


2) 성령이 창조를 지휘하셨던것과 같이 성막의 건축도 지휘하셨다.


성막 건축은 단지 하나님의 우주적 성전인 창조 세계의 재건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우주적 원형 성전인 동산의 재건이기도했다.


3) 성령의 창조론적 관련성은 원시의 물과 이스라엘 사이에도 관련성이 있다.


태초에 혼돈의 깊은 물 속에서 처음으로 마른 땅이 나왔다.


이스라엘은 한 나라로서 물, 곧 홍해에서부터 태어나거나 창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게이지Gage는 “....창세기부터 여호수아에 나온 출애굽과 가나안 입성의 역사는 창조의 구속적인 재현이라는 형태를...홍해에서 이스라엘을 구속적으로 일으키는 사건은 하나님의 첫 창조 사건과 같은 서술 방식으로 이야기된다….출애굽 사건의 정점인 에덴동산 같은 가나안 땅으로의 진입은 창조의 정점인 안식일과 상관관계가 있다(히 4:3-10)”고 말한다.


4) 창조론과 모세 언약 사이에는 안식일에 관련성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사역을 마치신 후에 안식하셨다.


아담은 시험 기간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에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다.


보스는 “소위 ‘행위 언약'이라는 것은 안식일 원칙의 구현에 지나지 않는다" “안식일은 인류의 삶이 세워진 기초가 되는 종말론적 원칙이 표현된 것이다"고 말한다.


이러한 안식일의 원칙으로서의 창조론적 유형이 모세 언약에까지 이어진다.


안식일이 제정된 것은 원형 성전인 에덴동산의 창조와 건설 후의 하나님의 안식과 동산을 계승한 형태인 성막의 건설 이후에 하신 하나님의 안식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윗 언약


다윗 언약에서는 성전을 건축하는 방식에서 창조론과 연결되는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다윗 언약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계승자 중 하나를 이스라엘의 보좌에 앉히셔서, 그 보좌로부터 그가 통치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집을 건축"하고 하나님은 그에게 아버지가되고 그는 하나남의 아들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삼하 7:13-14)


다윗 언약에서 첫 창조로부터 되풀이 되는 주제는 왕의 다스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인 성전의 건축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창조 세계를 다스렸으며, 동산- 성전을 땅끝까지 확장해야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었다.


빌Beale에 의하면,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성전 건축 준비를 했을 때 다윗이 족장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이 제단을 쌓았음에 주목한다.


다윗의 성전 건축에서 볼 수 있는 창조론적 요소로는, 산 위에서의 제사장의 직무, 하나님의 나타나심, 하나님의 처소, 성전등이다.


시편 110편에서는 다윗이 왕과 제사장의 역할을 했을 뿐만이 아니라 예언자로서의 활동도 했음을 말해준다.


이와같이 구속사 내내 창조론의 유형들이 반복된다.


시작에 대한 교리는 다른 교리들의 내용을 결정하기에 중요하다.



신학적인 기반: 은혜 언약


1) 아담이 임무를 실패하자마자 하나님은 승리를 약속하셨다.


아담이 자기 아내에게 지어준 이름이 ‘여자’에서 ‘생명을 주는 자'라는 뜻의 ‘하와’로 바꾸었다.


아담이 자기 아내에게 ‘하와'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사실은 곧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신들을 죄와 사망과 뱀으로부터 구원해 줄 약속된 여자의 후손을 믿었다는 것이다.


2) 노아 언약에서 하나님은 지구를 다시는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언약의 표지로 무지개를 사용하셨다.


무지개는 일종의 창조 세계에 대한 심판 집행의 보류를 나타낸다.


노아에게 주신 통치 명령의 집행은 은혜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


행위 언약의 목적은 더 이상 아담이나 사람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 의도하신 결과를 이뤄 내실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역사하시는 분이 궁극적으로는 바로 자심이심을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숙지 시켜 주셨다.


3) 아브라함과 족장들은 피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지만, 동산- 성전에서 아담은 아마도 곡식제나 감사제를 드렸을 것이고, 이는 죄를 위한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풍성한 복을 감사하며 드리는 제사였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언약에서의 핵심은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인 복음이다.


이들 언약은 구원의 순서에 있어, 타락 이후의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또한 구원 역사의 단계에서 보면 노아, 아브라함, 이스라엘은 앞으로 올 둘째 아담의 그림자요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 성경은 그림자와 모형을 통해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를 예시한다.


노아, 아브라함, 이스라엘은 궁극적으로 미래를 가리키는 그림자이다.



5장 둘째 아담 그리스도의 사역


서론


첫째 아담의 사역은 근본적으로 선지자, 제사장, 왕이었다.


아담의 임무는 배필의 도움을 받아 성전을 땅 끝까지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언약들은 둘째 아담의 인격과 사역을 가리킨다.


이번 장에서는 1) 두 아담 사이의 공통점 2)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창조론과 기독론 3) 어떻게 교회가 둘 째 아담의 돕는 배필이 되었는지 살펴 볼 것이다.



두 아담 사이의 공통점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 사이의 중요한 공통점으로는 바로 형상, 아들됨, 삼중 직분이다.



하나님의 형상


창세기는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고 말한다.


둘째 아담으로 오신 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으신 것이 아니라 그 분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었다.


이것은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첫 번째로 중요한 평행 구조다.



하나님의 아들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린다(눅 3:38).


“아담은 백삼십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창 5:3)


히브리서에서는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 1:2~3)


여기서 형상을 닮는다는 개념과 아들 됨의 개념이 서로 밀접하게 얽혀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중 직분


아담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땅을 통치하였던 자로서 첫 번째 왕이었다.


“경작하고 지키게 하시고"9창 2:15)라는 구절에서 사용된 두 동사는 동산-성전에서 맡았던 임무로서 아담이 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동산-성전을 땅 끝까지 퍼뜨리기 위해서 표면적으로는 설교를 보충적으로 동원했을 거이기에 아담의 임무와 사역 가운데에는 선지자적인 면도 있었다.


아담은 결국 그리스도가 가지신 세 가지 직분, 즉 선지자, 제사장, 왕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다.


벌코프는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가 삼중 직분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이 세 가지 임무와 사역이 본래 인간에게 의도되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벌코프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는 선지자로서 인간과 함께 하고 있는 하나님을 대표하고, 제사장으로서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있는 인간을 대표하며, 왕으로서는 통치권을 행사하며 또한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통치권을 회복해주신다.”



그리스도의 삶  



누가복음 4장 1~14절: 그리스도가 받으신 시험


창조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첫째 아담이 자신에게 주어졌던 시험에 실패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에 있어서 복음서에 기록된 사건들 중 가장 첫 번째 사건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당하신 사건이다.


누가복음에서는 그리스도의 계보가 그리스도에게서부터 하나님의 아들인 아담으로 거슬러 올라가도록 기록되었다.


예수님은 둘째, 혹은 ‘종말론적’ 아담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공생애가 시작되는 처음에 첫째 아담이 시험받았던 것과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다.


그리스도는 아담과 달리 뱀의 유혹을 물리치셨다.


아담에게는 풍부한 식량이 있었지만 그리스도는 사십일 동안 금식하셨다.


아담은 낙원인 동산-성전에 머물러있었지만그리스도는 광활한 광야에서 자신의 시험기간을 보내셨다.


그리스도는 아담과 갈리 하나님의 뜻에 완벽히 순종하셨다.


그리스도의 시험 기간과 관련하여 더 많은 창조론과의 관련성을 찾아볼 수 있다.


창조의 셋째 날 태초의 수면으로부터 창조 세계가 나타났다.


홍수 이후의 창조 세계도 물에서부터 나타난다.


하나님의 아들인 이스라엘도 홍해로부터 태어났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와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가 물에서부터 나왔을 뿐 아니라 성령, 또는 성령을 상징하는 것이 함께 존재한다.


성령은 새처럼 수면 위를 운행하셨고, 빠지고 있는 홍수의 물 위에는 비둘기가 날아 다녔으며, 구름 기둥은 새처럼 날며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통과하도록 인도해 주셨다.


아담은 성령의 감독으로 물에서부터 나오게 되었으며, 이 주제는 노아와 이스라엘에게도 되풀이 되었으며, 둘째 아담과 새하늘과 새 땅을 가리키는 모형이 되었다.


둘째 아담의 사역 아래에서 새로운 창조물은 세례의 물로부터 나오게 된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벧전 3:20)


대홍수의 물은 궁창 위의 물과 관련이 있다.


이는 홍수를 통해 창조 세계를 창조 전의 원상태, 즉 혼돈의 상태로 되돌리셨다는 말이 된다.


홍수는 자연적이면서도 초자연적 사건이었다.


홍수의 물은 원형인 세례의 물을 가리키는 모형이었다.


베드로는 세례를 홍수, 즉 새 창조의 물과 연결시킨다.



빌립보서 2장 5~11절: 둘째 아담에게 부르는 찬송


바울은 빌립보서 6절 앞부분에서 그리스도가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의 근본 본체란 ‘그 밑에 있는 근본이 되는 존재를 진정하고 완전하게 표현하는 형태’다.


바울이 쓴 본체라는 단어는 창세기 1장 26~27절의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과 평행을 이룬다.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 이는 첫째 아담이 받았던 “너희가 하나님 같이 되리라”(창 3:5)는 유혹을 상기시킨다.


둘째 아담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과 동등 됨을 추구하는 시도를 하지 않는 반면 첫째 아담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려고 했다는 사실에서 아담과 그리스도 간에 평행 관계가 드러난다.


첫째 아담이 실패한 일을 둘째 아담은 성공했다.



그리스도의 죽음



로마서 5장 12~19절: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의 사역의 전가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의 사역은 그들 각자가 대표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데, 죄와 의의 전가를 통해 적용이 이루어진다.


아담은 인류의 언약적 대표였다.


한 사람의 죄의 결과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


아담의 불순종 때문에 ‘죄인 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순종 덕분에 ‘의인이 되는 것’은 평행을 이룬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의를 자신의 백성에게 전가하시고, 선택받은 자들의 죄는 그리스도에게 전가되는 것이다(고후 5:21).



구약 성경의 배경: 아브라함 언약


전가 개념은 아브라함 언약에서, 그리고 신약 성경에 나온 아브라함 언약에 대한 해석에서도 나타난다.


창세기 15장 18절에서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에 대하여 로벗 팔머슨은 “....이러한 행동은 자기 스스로를 저주하는 맹세를 성립시켰다….”고 말한다.


모세 언약을 선포할 때 모세가 백성들에게 피를 뿌린 것도 이와 비슷한 읨

의 행동이었다(출 24:8)


로벗 팔머슨은 “이렇게 피를 뿌리는 일이 백성들을 깨끗케 하는 것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백성들을 목숨을 걸고 언약을 지키는 자로 봉헌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신약 성경과 창세기 15장 1절 이후의 관계


히브리서 9장 15~20절은 둘째 아담이 언약 대표임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약속을 하시몀서 자기 자신을 저주하신 것처럼 히브리서의 저자 역시 그리스도께서 모세의 언약 가운데 있는 자들을 위해 자기 자신이 언약의 저주를 담당하셨다고 기록한다.


언약의 계보, 즉 노아, 아브라함, 모세 언약은 원시 복음(창 3:15)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


고린도전서 15장은 그 뿌리가 창조론, 즉 창세기 1~3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20~28절


바울은 첫째 아담이 가져온 죽음과 둘째 아담이 가져온 부활을 평행적으로 연결한다.


아담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릉 향한 목적은 바뀌지 않았다.


첫째 아담과 달리 둘째 아담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세상을 다시리신다.


고린도전서 15장 35~49절


바울은 49절에서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 함으로서 창세기 1~2장의 창조론과 연계시킨다.


창조 사역에 관여하셨던 성령은 새 아담과 협력 관계 안에서 새로운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첫 번째 창조 세계는 아담에게 묶여있고 새 하늘과 새 땅과 이것들의 탄생은 둘째 아담의 부활에 묶여있다.



둘째 아담의 돕는 배필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여자가 창조된 사건의 목적은 그리스도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24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 말하노라”에서 결혼에 대해 설명하며, 비밀은 단지 결혼에 대한 것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하여 드러내는 것이며, 창조론을 기독론뿐만이 아니라 종말론에까지 연결시킨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의 권위를 남편의 권위에 비유하고 교회의 순종을 아내의 순종에 비유한다(엡 5:22~27)


바울이 아담을 오실자의 모형이라고 말했던 것과 같이 창세기 2장 24절은 하와가 교회의 모형이라는 논리가 전제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통치 명령


창세기 1장 28절에서 아담에서 아담에게 주어진 임무는 1) 하나님의 형상을 땅끝까지 퍼뜨리는 것, 2) 성전을 땅끝까지 확장하는 것, 3) 1과 2를 통해 주권을 행사하는 것, 4) 이 임무를 돕는 배필과 함께 수행해 내는 것이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죄 때문에 이 통치 명령을 수행해 낼 수 없었다.


둘째 아담은 첫째 아담이 실패한 이 통치 명령을 완수했다.



잘못 이해된 통치 명령


많은 대중적인 책들이 아담의 타락과 그리스도의 사역을 함께 다루지 않는다.


더글라스 윌슨은 타락이 본래의 통치 명령에 아무런 영향이 미치지 않았다고 본다.


존 머리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고 정복하며, 창조 세계를 다스리고, 일하며, 결혼하고, 안식일을 지키라는 창조의 법령들은 아직 폐지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머리는 통치 명령과 그리스도의 사역을 연결시키지 못하고있다.


머리는 통치 명령이 중지되었다기보다는 계속해서 강조되어야하며, 이 의무를 시행하여야 하는 필요성과 긴박감을 강화시켜야한다고 말한다.


통치 명령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타락과 무관하게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젠트리는 통치 명령을 문화 명령이라 칭하며 이를 ‘후천년주의의 낙관적 기대’와 연관시키지만, 그 가운데 그리스도는 제외시킨다.


헨리 모리스는 통치 명령이 아직도 유효한 명령이라고 말하지만, 이를 수행하는 주체는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민족들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에서의 공통점은 1) 통치 명령을 말할 때 죄가 세상에 들어오지 않은 것처럼 말하며, 2) 둘째 아담의 사역과 계시에 대한 충분한 깨달음과 활용 가운데서 통치 명령을 살펴보지 않는다.



통치 명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


통치 명령은 아직도 유효하지만 이는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사역과 계시에 비추어 해석되어야하며, 통치 명령은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가 완수하신다.


그리스도는 통치 명령의 사명을 담당하셨고, 자신의 돕는 배필, 신부, 둘째 하와인 교회의 도움으로 지금도 그 명령을 완수하고 계신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통치 명령에서 “천하 만민 (판타 타 에스네πάντα τὰ ἔθνη)(창 23:18)”와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모든 민족 (판타 타 에스네πάντα τὰ ἔθνη)(마 28:19)”에서 ‘판타 타 에스네’가 반복되고있다.


이로서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가 그의 돕는 배필이자 신부인 교회의 도움으로 통치 명령을 완수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통치 명령은 단순히 번식을 통해, 또는 대가족을 이룸으로써 완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타락 후 아담과 하와는 죄 때문에 더 이상 이 명령을 수행 할 수 없게 되었다.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돕는 배필인 교회와 함께 후손을 만들어 가심으로 통치 명령을 맡아 수행하시고 자신의 형상을 지닌 자들을 만들어 가신다.


통치 명령은 생육과 번식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전파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복음의 전파로 자녀들이 태어나는 것이다.


이들은 남편과 아내에게서 태어난 자들이 아니라 둘째 아담과 그의 돕는 배필이자 둘째 하와인 교회에게서 태어난 자들이다.



6장 안식일



서론


창조의 일곱째 날이 지닌 본질을 첫째 아담, 이스라엘, 모형론적인 하나님의 아들과 둘째 아담과 관련하여 이해하여야한다.


종말론의 교리는 창조론적인 안식일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


마지막 장에서는 안식일이 아담과 이스라엘과 그리스도와 맺는 관계를 살펴본다.


종말론은 구원론보다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선행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종말론이 다른 주요 교리들과 맺는 관계를 인식하는 우리의 방식이 바뀔 것이다.



아담과 안식일


창조가 끝난 주의 주말, 엿새 동안의 일이 끝난 후 하나님은 일곱째 날에 쉬셨고 일곱째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는데, 아담도 자신의 일, 곧 하나님의 형상을 증가시키고 땅끝까지


성전을 확대시키는 행위 언약의 노동을 완수하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담이 해야 할 의무였다.


이에 대하여 게할더스 보스는 행위 언약이란 “결국 안식일 원칙의 구현”이라고 말한다.


안식일의 원칙은 종말론적 목적을 가진 노동 행위의 종착점이다.


보스는 “행위 언약이 인류에게 절대적인 목적과 불변하는 미래를 가정하는 한, 우리는 종말론이 구원론을 선행한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종말론은 죄가 들어오고 구속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 따라서 구원이 아직 필요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다.


거룩한 시간인 안식일은 행위 언약에 대한 시간적인 종말론적 그림자의 역할을 하며, 창조의 목적을 기억하게 해주는 시간적 장치이다.


종말론이 창조론에 내재되어있는 까닭에 안식일의 원칙은 구속사 내내 지속된다.



이스라엘과 안식일


일곱째 날의 안식은 모세 언약에서 역사 속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안식일은 십계명의 제4계명으로 공표된다.


제4계명은 단지 창조를 기념하는 계명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이고 종말론적 성격을 가지고있다.


히브리서 4장 1절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해주는데, 여기서의 안식은 창조 주간의 일곱째 날의 하나님의 안식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바로 전에 그들은 창조 주간의 일곱째 날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약속의 땅 자체는 시편 95편이 말하는 안식이 아니었다.


안식은 약속의 땅에서의 시간적인 쉼을 의미하지 않았다.


안식이란 하나님이 창조 사역을 마치신 후 영원한 일곱째 날에 원형적 하늘나라를 성전 삼아 그 안에 거하시며 쉬는 것을 말한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일곱째 날 안식의 무대가 되는 하늘나라의 모형의 역할을 한다.


이스라엘은 믿음이 부족했기에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안식은 하나님이 종말론적 주님이심을 보여주기 위해 십계명 속에 포함되어있음을 말해준다.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종말론적 표지와 같은 역할을 한다.(출 31:17)


타락 이후의 안식일은 구원론적인 표지로서의 작용을 한다.


이스라엘이 최종적으로 일곱째날의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오직 둘째 아담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것은 매주 돌아오는 표지인 안식일에 의해 표현된다.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영원한 일곱째 날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었기에, 이스라엘은 행위 언약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언약 아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둘째 아담의 인성과 사역을 가리키는 모형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둘째 아담과 안식일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가 일곱째 날의 안식에 들어가셨다고 말한다(히 10:12~13)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쉬기 시작하였던 원형 성전 속에 들어가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역 가운데 종말론적으로 실현된 부분은 그리스도가 창조의 안식으로 들어간 것이다.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첫 번째 창조가 주일에 시작되었던 것과 같이 한 주의 첫째 날에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셨다.


새로운 창조는 시작되었지만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는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구약 성경의 유형은 먼저 일하고 그 다음에 쉬는 것이지만, 신약 성경의 유형은 먼저 쉬고 그 다음에 일하는 것이다.


세례는 새 창조 안에 들어가는 것, 또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시각적으로 상징하는 의식인 것이다.


안식일에 일을 한다면, 그것이 곧 이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안식에 참여할 수 있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posted by Wonho Kim
:
리처드 미들턴 2015. 9. 2. 22:28



리처드 미들턴의 "새 하늘과 새 땅"과 데이비드 반드루넨의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기"


 by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리처드 미들턴은 전통적 교인들 대부분이 플라톤적 이원론 사상으로 인하여 이 세상의 문화를 외면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이는 단지 미들턴만의 주장이 아니라 (두 나라 two kingdom개념과 대립하는) 한 나라(one kingdom) 개념을 추구하는 신칼빈주의의 기독교 세계관과 톰 라이트의 새관점,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교회인 이머징 미셔널 처치 운동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고있는 단골 메뉴이다.


카이퍼로부터 시작된 신칼빈주의의 문화 변혁 운동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문화가 이 땅의 문화의 발전과 회복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주장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며 미들턴이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도 이러한 관점에서 쓰여진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전통적 개혁주의는 플라톤적 이원론 사상을 수용하지도 않고 있으며 더군다나 미들턴이나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이 땅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이 세상을 바라보는 올바른 개혁주의 관점은 "자연법과 두 나라(Natural Law and Two Kingdom)" 개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미들턴은 전통적 기독교의 플라톤적 이원론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이에 대한 반론에서 출발하여 지상적 개념의 “새 하늘과 새 땅"을 그려내고 있지만 미들턴의 이러한 잘못된 전제는 그의 책 “새 하늘과 새 땅" 전체의 페러다임이 개혁주의와는 다른 그림을 그리게한다.


미들턴의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러한 전제의 오류 외에도 신칼빈주의 기독교 세계관인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과 종교 개혁 신앙고백을 부정하는 톰 라이트의 “바울에 관한 새관점"을 접목시켜 개혁주의에서 한층 더 멀어진 지상적 개념의 "새 하늘과 새 땅"을 그려가고있다.


미들턴의 지상적 "새 하늘과 새 땅"의 특징적 주제 가운데 가장 핵심적 주제는 “ 문화명령과 문화의 구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들턴은 그리스도인의 문화 활동의 근거를 창1:28의 문화 명령에 두고 있으며 아담이 실패한 문화 명령을 그리스도의 사역 위에서 다시 시작하여야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미들턴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보존될 문화를 이루기 위한 문화 명령의 새로운 시작을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였던 문화 명령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미 충분히 충족 되었다.


창세기 1장 28절의 문화 명령(혹은 지배 명령)의 근본 목적은 이 땅에서 아담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의 구현이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의 정체성은 이 땅에 대한 지배 명령을 실행 하는 것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다는 것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실행할 의무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아담의 문화 명령에 대한 실패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손상이었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문화 명령은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검증 기간에 한정된 것이었다.


하나님의 창조 활동과 아담의 피조물에 대한 통치에는 병행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창조 활동이 제 7일에 종결되었듯이 아담의 문화 명령을 통한 검증 기간도, 타락이 없었다면, 문화 명령의 완성을 통한 안식에 들어감으로서 종결되었을 것이다.


문화명령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안식까지 주어진 기간 즉 검증기간에만 한정된 것이었다.


검증 기간에 주어진 문화 명령에는 사단에 대한 지배와 통치도 포함되어있다.


창 1:28절에서 다스림의 대상인 생물은 창 3:1절의 짐승과 같은 히브리어로서 아담에게 주어진 문화 명령의 실패는 다스려야할 사단에게 패배함으로서 실패로 귀결된다.


선악과 범죄는 다스려야할 사단에게 다스림을 받게된 역전패한 사건이었다.


문화 명령과 아담의 타락과 에덴에서의 추방은 시내산 언약과 이스라엘의 타락과 바벨론 유수를 통하여 재연된다.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한 순종은 아담에게 주어졌던 행위 언약으로서의 선악과 명령과 병행 관계에 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아담의 에덴에서의 추방과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수와 병행 관계에 있다.


6일간의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안식을 취하신 하나님께서 마찬가지로 아담에게도 문화 명령을 통한 통치 사역을 마치고 안식을 주시고자하셨지만 문화 명령의 실패로 이루지 못한 안식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심으로 안식에 들어가실 수가 있으셨다.


안식의 주인되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첫 번째 아담이 실패한 문화 명령을 다 이루시고 마지막 아담으로서 안식에 들어가셨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아담에게 주어졌던 문화 명령이 그리스도의 안식과 더불어 종결된 것이다.


리처드 미들턴은 문화 명령을 실행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대위임령보다 고차원적인 그리스도인의 사역이라고 말한다.


문화 명령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다 이루신 완전한 충족을 미완성으로 돌리는 것이며 안식의 주인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충족의 부족함과 이 부족함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가 안식의 주인이 되실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문화 명령 개념은 톰라이트의 새관점이나 신칼빈주의 신학과 마찬가지로, 오직 은혜 언약만을 주장하는 단일언약론의 배경에서 또 다른 명령이 요구되기에, 이러한 논리는 은혜를 은혜답지 못하게하며 또 하나의 행위 언약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우리에게 문화 명령을 수행하라고 촉구하는 구절이 성경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기 힘듦에도 불구하고 미들턴은 지상에서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하기 위해 일관되게 문화 명령을 수행 할 것을 강조한다.


문화 명령과 은혜와 안식에 관한 혼란의 배경에는 모든 피조물의 구속과 그로 인한 이 땅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의 나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미들턴은 구속의 범위에 피조물의 구속은 물론 문화의 구속도 포함 시키고 있다.


반드루넨은 구속은 성도 자체를 위하여 있는 것이지 문화 자체의 구속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반드루넨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물의 회복이 아닌 새로운 창조인 것을 말한다.


미들턴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이러한 여러가지 특징들은 이 땅의 모든 영역을 구속의 영역으로 보고 있음에 기인한 것이다.


전통적 개혁주의에서는 이 땅의 모든 영역이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영역과 구속 영역을 구분하고 있다.


카톨릭 철학자 폰 바더 (Von Baader)의 기독교 신지학 (Christian Theosophy)의 영향을 받아 정립된 카이퍼의 영역 주권론과 일반 은총은 이 땅의 모든 영역을 구속과 연관시킨다.


하지만 이 땅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라고 모든 영역이 구속 영역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구속의 주 이신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셨기에 구속은 교회와 연관되어야 할 것이다.


톰 라이트를 비롯한 새관점과 신칼빈주의의 이머징 미셔널 처치에서는 우주적 구속을 말하면서 우주적 교회론을 주장하지만 이러한 우주적 교회론은 종교개혁 신앙고백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종교 개혁 신앙고백에서는 일관되게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 구성된 성도 중심의 교회를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교회 바깥의 영역을 모두 사단의 영역으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근거가 되는 자연법 아래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볼 수 있는 성경법에 근거를 둔 교회와 자연법에 근거를 둔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의 두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구속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보혈이 근거가되기에 그리스도의 순종과 십자가의 보혈에 의해서만 거룩의 영역에 참여될 수 있는 것이지 신앙고백을 할 수 없는 피조계와 문화까지도 구속되는 것이 아니다.


미들턴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신앙고백을 할 수 없는 문화를 포함한 모든 피조계의 구속을 말할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십자가의 보혈에 대한 개념도 정통 개혁주의와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WSCal)교수인 데이비드 반드루넨(David VanDrunen)의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기 (Living in God's Two Kingdoms-부흥과 개혁사 역간)"는 하나님의 구속받은 자녀들이 이 세상에 대한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야하는지 리처드 미들턴과는 전혀 다른 두 나라 (Two Kingdom) 개념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의 책에 대한 다음의 서평은 반드루넨의 책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되어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출처 http://opc.org/os.html?article_id=251)


문화 전쟁은 끝났다: 서평 글

The Culture War Is Over: A Review Article


Gregory Edward Reynolds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기: 기독교와 문화에 대한 성경적 통찰, 데이비드 반드루넨 저, (부흥과 개혁사 역간)

Living in God's Two Kingdoms: A Biblical Vision for Christianity and Culture, by David VanDrunen. Wheaton, IL: Crossway, 2010, 208 pages, $16.99.




나는 1974년에 자유 예술 교육 과정을 통합하는데 있어서, 학생들을 돕기 위해 의도된 기독교 신앙의 철학이라는 제목으로 Covenant College에서 가르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질문을 접하게 되었다.

In 1974, I was first exposed to the question of Christ and culture in a course taught at Covenant College, titled Philosophy of the Christian Faith, which was intended to assist students in integrating the liberal arts curriculum.


거기서 나는 이러한 질문의 기준이 되는 표식으로 H. Richard Niebuhr의 그리스도와 문화를 읽게 되었다.

There I read H. Richard Niebuhr's landmark taxonomy of this question, Christ and Culture.[1]


이것은 최근에 동방 신비주의에 몰두해 있던 학생들에게는 성급한 소재였던 것이다,

It was heady stuff for a student who had recently been immersed in Eastern mysticism.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결을 위해서 역사와 실체화된 존재에 대한 새로운 비평은 나를 카이퍼의 저작들로 유혹하고있었다.

My new appreciation for history and embodied existence lured me toward a Kuyperian account of the solution to this question.


그 이후로, 나는 30년 이상에 걸쳐서 이러한 질문에 관하여 도서관의 많은 책들을 쌓아 놓고서 무천년적 해석부터 시작하여 카이퍼의 개념들을 다시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Since then, over the last three decades, I have accumulated quite a library of books on this question and have been revisiting the Kuyperian idea from an amillennial hermeneutic.


이것은 결과적으로 나로 하여금 두 나라(이후로는 2k)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가지게 하였는데, 이 이전에는 그것에 대한 칭호를 가지고 있지 못했었다.

This in turn has moved me to a more distinctly two kingdom (hereafter 2k) position, although I did not early on have a label for it.


나 자신의 생각의 변화와 일치하고 있는 것은 종교 개혁 이후의 교리에 대하여 새롭게 평가한 개혁주의 아카데미 안에서의 발전이라는 것이다,

Coincident with my own change in thinking was the development within the Reformed academy of a renewed appreciation for post-Reformation dogmatics.


이 모든 것 위의 핵심은, 청교도들이 아직도 흔히 이러한 난제에 대한 콘스탄티누스의 설명에 사로 잡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나라를 보이는 교회와 동일시하고있다는데에 인상적이었다.

On top of all this, I have been impressed that, despite the fact the Puritans were often still captive to a Constantinian account of this dilemma, the Westminster Confession equates the kingdom with the visible church.


"보이는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2)

"The visible church ... is the kingdom of the Lord Jesus Christ" (WCF 25.2).


두 나라 신학에 대한 반드루넨의 작품이 최근의 10년에 걸쳐서 나타난 것은 이렇게 새로워진 지적인 환경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It is from within this renewed intellectual climate that VanDrunen's work on the 2k theology has emerged over the last decade.



반드루넨은, 윤리학자로서, 10년 이상을 자연법 학문의 기초를 다져왔다.

As an ethicist, VanDrunen has been laying a foundation of natural law scholarship for more than a decade.


그의 첫 번째 진지한 탐구는 1999-2001의 그의 졸업 논문과 관련되어있다.

His first serious research was connected with his graduate school dissertation from 1999-2001.


2003년에는 발달 과정의 역사적 논술인 "자연법과 두 나라 (2010)"를 탐구하기 시작하였으며, 앞으로의 연구에 대한 기초를 놓았던 것이다.

In 2003 he began research for his seminal historical account Natural Law and the Two Kingdoms (2010),[2] laying the foundation for future studies.


"A Biblical Case for Natural Law (2006)"는 두 나라 교리에 대한 성경적 기초에 대하여 기대를 갖게 만드는 역할을 하였다.

A Biblical Case for Natural Law (2006)[3] served as an appetizer for the biblical foundation of the 2k doctrine.


2007년 후반에는 그는 자신의 계획의 건설적이고 성경 신학적인 부분에 관심을 돌리면서 "생명 윤리와 신앙생활(2009)"을 출간하게 되었으며, 서평을 하려는 현재의 책은 신앙 생활에 있어서 두 나라 교리의 실질적인 참 뜻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In late 2007 he turned his attention to the constructive, biblical-theological part of his project, resulting in the publication of Bioethics and the Christian Life (2009),[4] and the present volume under review, demonstrating the practical implications of the 2k doctrine for the Christian life.



반드루넨은 배심원들을 정면으로 대하는 변호사와 같이 자신의 주제에 접근하고있었으며, 전반에 걸쳐서 그들이 그의 주장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적대적인 상태로 법정에 나온 것을 깨닫고 있었다.

VanDrunen approaches his subject like a skilled lawyer facing a jury squarely, all the while realizing that they come to the courtroom largely hostile to his case.


이것은 그가 책의 전반에 걸쳐서 자신의 논의의 주요 견해를 반복하는 이유이다.

This is why he repeats the main tenets of his argument incessantly throughout the book.


만약 그의 초기의 책들이 문화 변혁주의자들이 고개 숙이는 것을 겨냥했다면, 이 책은 바로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이다.

If his earlier books were shots across the cultural transformationist bow, this book is a direct hit.


이 전투적 비유는 이 책의 본질에 관해서는 적절한 것이지만, 반드루넨이 논의하는 방식은 평화적이었는데, 선조가 말한 것을 예로 들면, 코르넬리스 벤틸이 좋아했던 것으로서:"방식에 있어서는 신사적이고, 진실이나 본질에 있어서는 강해야한다."

While this martial metaphor is appropriate regarding the substance of the book, in his mode of arguing VanDrunen is irenic, exemplifying the ancient saying, loved by Cornelius Van Til: "Suaviter in modo, fortiter in re" (gentle in manner, strong in deed or substance).


* * *



문화 명령과 이와 관련된 행위 언약은 두번째 아담에 의하여 충족되었다는 반드루넨의 탐구는 그리스도와 문화에 관한 논의에서 일관된 공헌을 하고있다.

VanDrunen's exploration of the cultural mandate, and the covenant of works associated with it, being fulfilled by the Second Adam makes a unique contribution to the discussion of Christ and culture.


그는 주장하기를 성경에서는 문화가 하나님에 의하여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 아담의 시민이 구속되고 열방으로부터 모이기 위하여 보존될 뿐이라고 말한다.

He insists that Scripture teaches that culture is not being redeemed by God but is rather being preserved in order for the citizens of the second Adam to be redeemed and gathered from among the nations.


이러한 새 창조의 시민들은 하나님의 구속 활동의 주제이지만 문화는 아닌 것이다.

These citizens of the new creation are the subject of God's redeeming activity, while culture is not (15).



서문에서는, 신칼빈주의에서 이머징 처치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이 문화를 회복하거나 변혁해야하는 소명을 받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잘 요약해주고있다.

The introduction gives a nice summary of the proponents of the idea that Christians are called to redeem or transform culture, from neo-Calvinists to the emerging church (16-24).


반드루넨은 변혁적 관점이 흔히 세상을 부인하는 경건주의자들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 표현된다고 말한다.

VanDrunen maintains that the transformational view is usually presented as the only alternative to a world-denying pietism (25).


특히 20세기 칼빈주의는 대부분 자연법과 두 나라 교리를 선택하는 것을 외면하는데, 이(교리)는 종교개혁 이후의 교리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Twentieth-century Calvinism in particular has largely ignored the doctrine of the natural law/2k alternative, once almost universally present in post-Reformation dogmatics.


반드루넨에 따르면, 두 나라 교리에서는 구속이 "창조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재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단정하고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반 나라는... 합법적이지 거룩한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The 2k doctrine, according to VanDrunen, posits redemption not as " 'creation regained' but 're-creation gained' "; while the "divinely ordained common kingdom ... is legitimate but not holy" (26).



가장 놀랄만한 결론은,- 이 책의 1부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First Things and Last Things," pages 33-71:John Fesko의 저술)- 반드루넨이 직접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진 않았지만, 문화 전쟁은 끝났다는 것이다.

The most eye-popping conclusion that VanDrunen comes to—he does so early in Part 1 ("First Things and Last Things," pages 33-71) of the book—is that the culture war is over, although he doesn't use these terms.


어떻게? 두번째 아담이 첫번째 아담이 실패한 것을 하심으로, 문화 명령이 충족됨으로서 자신의 백성에게 생명 나무로 표현되는 영광을 상속받게 한 것이다.

How so? Fulfilling the cultural mandate, the second Adam has done what the first Adam failed to do, thus inheriting the glory represented in the Tree of Life for his people.


그의 순종의 삶과 희생적 죽으심과 영광스러운 부활로 인하여 그는 천상의 장소에서 안식에 들어가셨는데, 이곳은 삼위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 사역을 완성하신 후에 제 7일에 들어가신 곳이다.

Through his obedient life, sacrificial death, and glorious resurrection, he has entered into the Sabbath rest in the heavenly places, which the triune God entered on the seventh day upon completing his creation (40-41).


주 예수는 첫 번째 아담이 실패한 검증을 통과하심으로서 자신의 언약 백성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광을 상속할 수 있도록 행위 언약을 충족 시키신 것이다.

The Lord Jesus passed the probation that the first Adam failed, thus fulfilling the covenant of works on behalf of his covenant people in order that they might inherit glory in the new heavens and the new earth (42-43).


아담의 후손의 실패한 통치는 나라의 왕위 상속, 즉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렸는데, 그는 이미 찬양 받으시는 왕으로 계신 곳에서 완성된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택을 위한 통치를 얻으신 분이시다.

The failed dominion of Adam's progeny awaited the appearance of the royal heir of the kingdom, Jesus Christ, who would win dominion for God's elect in his consummation glory that he already inhabits as the exalted king (44-47).


이 부분은 언약 신학에서 걸작으로서 일반인이 소화 시킬 수 있도록 잘 분석해 놓았다.

This section is a tour de force of covenant theology, nicely parsed for popular consumption.



반드루넨은 설명하기를,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의 참된 운명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한다고 말한다.

So then, in Christ, explains VanDrunen, the believer finds his true destiny.



그리스도인은 삶의 원래의 운명을 다가올 세상에서 얻게 될 것이지만, 이는 아담이 남겨 놓은 곳에서 과제를 취합으로서 그렇게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과제를 완벽하게 성취하신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에 의지하는 것이다.

Christians will attain the original destiny of life in the world-to-come, but we do so not by picking up the task where Adam left off but by resting entirely on the work of Jesus Christ, the last Adam, who accomplished the task perfectly. (50)



앞으로 사라질 현재의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과업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성취에 대한 감사의 반응에서 나온 것이다.

The Christian's task in the present world, which is passing away, is a "grateful response" (51) to the perfect accomplishment of Jesus Christ.


그러고나서 반드루넨은 두 나라 즉 하나의 영원한 나라와 다른 하나의 임시적인 나라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설득력있게 증명하기 위하여 로마서5장, 고린도전서 15장, 그리고 히브리서의 부분들을 해석하고있다.

VanDrunen then unpacks Romans 5, 1 Corinthians 15, and sections of Hebrews to convincingly prove his point that there are two kingdoms, one eternal and the other temporary (51-60).


"아담에게 주어진 처음의 문화 명령의 목적은 성취되었으며" 주 예수는 그 상을 향유하기 위하여 부활하셨다.

"The goal of Adam's original cultural commission has been achieved," and the Lord Jesus has been resurrected to enjoy the reward (53).


그는 이것을 자신 혼자만을 위하여 하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중개자로서 하신 것이다.

He has not done this for himself alone, but as the mediator of a new creation (56).


"우리가 문화 활동을 하는 것은 새로운 창조가 이미 성취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반응이지 그것(새로운 창조)의 성취를 위한 것이 아닌 것이다.

"We pursue cultural activities in response to the fact that the new creation has already been achieved, not in order to contribute to its achievement" (57).


이것은 믿음에 의한 칭의의 교리에 근거한 직접적인 반응으로서, 종교 개혁 칭의 교리는 궁극적으로 신칼빈주의나 바울에 관한 새관점, 혹은 이머징 처치의 노선을 따르는 문화에 대한 구속적 변혁주의 관점과 양립 될 수 없기 때문이다.

This has direct bearing o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faith, because a Protestant doctrine of justification is ultimately incompatible with a redemptive transformationist view of culture along the lines of neo-Calvinism, the New Perspective on Paul, or the emergent church. (58)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의 목표는 현재의 질서를 새롭게 한다거나 처음의 창조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다.

The goal of redemption in Christ is not the renovation of this present order, the restoration of the original creation (62).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 이 세상에 생명이 소생되신 것이 아니라 오늘 세상에서의 삶으로 올라가신 것이다.

"In his resurrection Christ was not resuscitated to life in this world but raised up to life in the world-to-come."


이것이 히브리서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이 세상에 대한 현재의 우리의 접근 방식이다.

It is our present access to this world that Hebrews emphasizes (59).


우리의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모든 인간 문화의 산물들이 자연 질서와 마찬가지로 붕괴될 것이다.

In the second coming of our Lord all the "products of human culture will perish along with the natural order" (64).


반드루넨은 이것이 이 세상과 오는 세상 사이에 연속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바로 지적한다.

VanDrunen is quick to point out that this does not mean that there will be no continuity between this world and the next (66).


예를 들면, 우리는 인식을 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부활하신 구세주와 같이 영광의 몸을 가질 것인데 이는 천상적인 것이며 지상적인 것과는 대립 되는 것이다.(고전15:40)

For example, we will have recognizable, but glorified bodies just like our risen Savior—that is heavenly, as opposed to earthly (1 Cor. 15:40).


더군다나 이것은 현재의 문화 활동이 선이나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이것들이 구속의 대상물들이 아니며 임시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Nor does this mean that present cultural activities have no goodness or value, only that they are not the objects of redemption and are temporary (68-69).



두 나라에 대한 해석학적이고 신학적인 기반을 놓으면서 반드루넨은 삶에 대한 함축적 의미를 : 구약과 신약의 체류자(73-128); 그리고 교회와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129-205)의 두 부분으로 전개한다.

Having laid the exegetical and theological foundation for the two kingdoms, VanDrunen proceeds to its implications for living in two parts: Old and New Testament sojourners (73-128); and Christian living in the church and the world (129-205).


후자는 교육과 소명과 정치로 나뉘어진다.

The latter is divided into education, vocation, and politics.



두 나라에 대한 일반적인 불평은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이의 대립적 관계에 대하여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A common complaint about the 2k idea is that it blunts the antithesis between the Christian and the world.


반드루넨은 “영적인 반립"과 “문화적 공유성"의 조화를 증명함으로서 이러한 불평을 잠재운다.

VanDrunen puts this complaint to rest by demonstrating the compatibility of "spiritual antithesis" and "cultural commonality."


결국, 두 나라는 두 언약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하나는 아브라함과의 구속적 언약이고, 다른 하나는 노아와의 일반적, 문화적 언약인 것이다.

In turn, the two kingdoms are founded by two covenants, one redemptive covenant with Abraham and the other common, cultural covenant with Noah (75-76).


신자들과 불신자들은 일반 나라에서의 활동을 공유하고있지만, 오직 신자들만이 참여하는 영적인 나라에서는 그들의 충성이 불신자들의 헌신과는 대립 관계에 있는 것이다.

Believers and unbelievers share the activities of the common kingdom, while only believers participate in the spiritual kingdom in which their allegiance stands in antithesis to the loyalties of unbelievers.


반정립에 대한 관심과 관계된 또 하나의 일반적인 불만은 두 나라 개념이 필연적으로 도덕률 폐기론 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Another common complaint, related to concern for the antithesis, is that the 2k idea is essentially antinomian.


반드루넨은 달리 주장한다:

VanDrunen asserts otherwise:



하나님 자신이 일반 나라를 세우셨고 통치하신다. 이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의 통치에 의하여 존재한다. 일반 나라는 어떠한 의미에서 도덕적 중립성이나 인간의 자율성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God himself established and rules the common kingdom. It exists under the Lordship of the triune God—Father, Son, and Holy Spirit. The common kingdom is not in any sense a realm of moral neutrality or human autonomy. (81)


일반 나라의 한 가운데서의 구속의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신자들의 간결한 초상은 그들을 유배자와 순례자로서의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A brief portrait of believers as citizens of the redemptive kingdom in the midst of the common kingdom focuses on their identity as exiles and sojourners (82-88).


그러고 나서 반드루넨은 이것을 모세 언약 아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특수한 입장과 비교를 한다.

VanDrunen then contrasts this with the unique situation of God's people under the Mosaic covenant (88-97).


이 언약 안에서 구속과 문화는 임시적으로 나타난다.

In this covenant, redemption and culture are temporarily merged.


그러나 문화를 구속하는 것에 대한 기술과는 달리,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즉 도래할 세상의 나라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다.

But, far from being a prescription for redeeming culture, it presents a picture of the coming of the kingdom of Jesus Christ, the kingdom of the world-to-come.


부차적인 유배는 나라가 아직 임하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하게 해준다.

The subsequent exile reminds us that the kingdom had not yet come.


그러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왔을 때에 우리는 유배가 끝났다고 생각을 다듬어야 할 것이다.

But then, when it does come in Jesus the Christ, we may be tempted to think that exile is over.


아직도 신약의 언어는 신자들이 아직까지 유배자이면서 순례자임을 분명히하고 있다.(베전1:1, 17: 2:11,)

Yet the language of the New Testament makes it clear that believers are still exiles and sojourners (1 Pet. 1:1, 17; 2:11, p. 99).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은 현 시대에 있어서 교회의 위치를 기술하고, 분명하게 두 나라를 구분하면서 각각에서 신자의 적절한 활동을 기술하고 있다.

The remainder of the book describes the situation of the church in this present age, clearly distinguishing the two kingdoms and describing the proper activity of the believer in each.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의 하나님 나라와 보이는 교회의 동일시함을 유지하면서, 반드루넨은 "교회가 현세에 있어서 그리스도에 의하여 선언되는 나라로 확인 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면서 공동체다"라고 주장한다.

In keeping with the Westminster Confession's identification of the kingdom of God with the visible church, VanDrunen asserts, "the church is the only institution or community in the present world that can be identified with the kingdom proclaimed by Christ" (101).


그는 신약 성경으로부터, 교회와 구속의 나라가 동일하다는 것과, 교회는 아브라함 언약의 형태를 따르고 있음을, 현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성취라는 복음을 열방에 전하는 과업을 예외로하고는, 계속적으로 증명하고있다.

He goes on to demonstrate from the New Testament that the church and the redemptive kingdom are identical, and that the church follows the pattern of the Abrahamic covenant, except now it is tasked with spreading the good news of the redemptive accomplishment of Jesus Christ to all nations (102-6).


이러한 점에서 반드루넨은 마태복음 5:17-21에 대하여 신정체제로서의 해석을 하고있다.

At this point VanDrunen takes on the theonomic exegesis of Matthew 5:17-21.


그는 아주 섬세하게 이러한 해석을 하면서 묘하게도 Greg Bahnsen을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그는 내가 알고 있기로는 이 문장에 대하여 신정체제적인 해석을 한 주요 인물인데,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윤리적 체계로서의 신정체제에 대하여 해석학적 급소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He does so with great finesse and yet oddly without mentioning Greg Bahnsen, who, as far as I know is the major theonomic exegete of this passage, which many believe to be the interpretive linchpin of theonomy as an ethical system (108-12).


그는 새 언약에서의 윤리의 유일함이, 천상의 나라의 일원으로서 아직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적용되지만 이 세상이나 통치 기관에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있다.

He demonstrates the uniqueness of the ethics of the new covenant as they apply to the Christian as a member of the kingdom of heaven still living in this world, and not to the world or its governments.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시민들의 공동체이며... 천상의 나라는 더 넓은 세상에서의 사회적 정치적 공동체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Consequently, "the church is the community of the citizens of the kingdom.... the kingdom of heaven is not to be found in the social-political communities of the broader world" (114).


산상 설교의 윤리는 오직 새 창조의 시민들에게만 가능한 것이며, 이것은 분명히 그들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The ethics of the Sermon on the Mount are only possible for citizens of the new creation, to whom it is clearly directed (115).


반드루넨은 구속의 나라와 일반 나라 사이에서 얼마간 집합체의 제도가 겹쳐지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VanDrunen does admit to a kind of overlap in the institution of the family between the redemptive and the common kingdoms (119, 121).


이것은 좀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 제도이다.

This is an institution about which much more discussion is needed.



특히 이 장에서 도움이 되는 것은 일반 나라와 그의 시민들과 활동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한 반드루넨의 논의이다.

Especially helpful in this chapter is VanDrunen's discussion of the Christian's attitude toward the common kingdom, its citizens and activities (123-28).


전도서의 관점은 신자로하여금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일반 문화의 축복을 즐기는데 참여하라는 것이며, 단순히 의심스러운 적대적 영역으로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The perspective of Ecclesiastes enjoins the believer to enjoy the blessings of common culture as God's gifts, not simply hostile territory of which to be suspicious.


그러나 반드루넨은 문화 활동이 신약 성서의 핵심이 아님을 주의 시킨다.

However, VanDrunen cautions that cultural activities are not the focus of the New Testament (124).


이러한 통찰은 여러가지 필연적인 결과들을 수반한다.

This insight implies several corollaries.


그러므로 우리의 믿지 않는 이웃을 우리의 대적자로 보기보다는, 우리는 문화를 정복할 것을 모색하는 문화의 전사가 되는 대신에, 우리가 문화에 참여함으로서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축복이 될 수 있기를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So, rather than viewing our unbelieving neighbors as our opponents we should seek to love and be a blessing to them in our cultural involvement, instead of being culture warriors seeking to conquer culture (124-26).


다른 한편으로, 문화에 참여한다는 것은 대립 관계를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On the other hand, cultural participation is not meant to deny the antithesis.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하며 타락한 문화 가운데 있는 우상 숭배적 경향과, 이것이 우리들이 순례자로서 다가 올 세상을 고대하는 것을 손상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So, Christians must be vigilant and beware of the idolatrous tendencies within all fallen culture, which may undermine our longing for the world to come as pilgrims (126-28).



3부에서는 두 나라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참여에 대하여 특별히 관심 있게 다룬다.

Part 3 gets down to the specifics of Christian involvement in the two kingdoms.


이 부분을 정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The order of this section is very important.


교회가 먼저 다루어지는데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The church comes first, because it is the central institution in the Christian life (131-60).


교회와 예배와 생활에 대하여 우수한 책들이 많이 있지만 반드루넨은 교회의 중요성과 중심성을 소개하면서 그리스도와 문화 논쟁에 일관되게 관여를 한다.

While there are many excellent books on the church and its worship and life, VanDrunen makes a unique contribution to the Christ and culture debate by introducing the importance and centrality of the church.


오직 교회만이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 안에 양육 되는 곳이다.

The church alone is the place where people are nurtured in the realities of the new creation in Christ.


아무도 교회 교리에 대한 하나님 중심의 해석과, 교회 윤리의 차별성과, 교회의 영적인 열매의 풍부함과 교회 영성의 순수함 이상을 (교회 밖에서는) 찾지 못할 것이다.

One will not find a more theocentric explication of the doctrine of the church, the distinctiveness of her ethics, the abundance of her spiritual fruits, and the purity of her spirituality.


그러므로 "교회를 일반 나라의 어떠한 기관이나 연합체와 동일시하는 것은 전적으로 적절치 못한 것이다"

Thus, "it is entirely inappropriate to identify the church with any institution or community of the common kingdom" (148).


교회는 새 언약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선교에 붙들려야만 한다.

The church must stick to the mission given her in the New Covenant.



마지막 장에서는 논쟁이 뜨겁게 달아오른 교육과 성직과 정치의 3가지 영역에서 두 나라 교리가 해야 할 역할의 방법들에 관하여 탐구를 하고 있다.

The final chapter (7) explores ways in which the 2k doctrine plays out in the three hotly debated arenas of education, vocation, and politics.


문화 명령과 행위 언약과 그리스도의 성취의 의미에서 문화 전쟁이 끝났다고 말하는 것은 여하튼 간에 영적 전쟁이 끝났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To say that the culture war is over in terms of the cultural mandate, the covenant of works, and the accomplishment of Christ, is not in any way to imply that spiritual warfare is over.


아니다, 사실 이 책의 지금 단락은 우리의 전쟁의 무기가 일반 나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나라에서 오는 것임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No, in fact, this section of the book is a reminder that the weapons of our warfare are not from the common kingdom, but from the spiritual.


그러므로, 반드루넨은 그리스도인이 문화 활동에 기쁘고, 사심이 없고, 순수하게 참여하도록 적절히 권한다.

So, appropriately VanDrunen enjoins Christian cultural activity to be joyful, detached, and modest (163ff.).


비록 그리스도인은 원래의 문화 명령을 수행하라고 부름을 받지는 않았지만, 문화 제도들은 하나님의 임시적인 축복으로서 신자들에 의해서 유지되고 참여되어야만 한다.

Although Christians are not called to take up the original cultural mandate, cultural institutions are God's temporary blessing and must be supported by and participated in by believers (164-65).



우리는 흔히 그리스도인이 자신들이 다양한 문화 활동에 참여하는데 있어서, 그들의 참여가 활동 자체를 독특하게 하거나 아니면 독특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는다.

We often hear Christians speak of their involvement in various cultural activities as if their participation makes the activity itself unique, or uniquely Christian.


반드루넨은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다음과 같이) 바로잡는다

VanDrunen corrects this as a mistaken notion:


문화 활동에 있어서 기준이 되는 표준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의 것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문화 활동의 우수성의 표준들은 일반적으로 신자와 불신자에게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활동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가능한 방법들은 흔하게 널려 있다.

The normative standards for cultural activities are, in general, not distinctively Christian.... The standards of excellence for cultural work are generally the same for believers and unbelievers.... And there are usually many possible ways in which Christians could pursue such activities. (168-72)


그러므로 "'변혁'이나 특히 '회복'에 관한 친숙한 주문들을 폐기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성경에는 어느 곳에서도 우리를 이러한 거대한 과업으로 부른 곳이 없다"

It would, therefore, be wise to "discard familiar mantras about 'transformation' and especially 'redemption.' Nowhere does Scripture call us to such grandiose tasks" (171).



반드루넨에 의하면, 교육은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두 나라 이론이 모든 답들이 있어야 함을 요구 하지 않는 영역이다.

Education is, according to VanDrunen, an area, like all others, where 2k theory does not claim to have all the answers.


그러나 이것(교육)은 도움이 될 만한 지침을 제시해줌으로서 과제들의 많은 면들을 명확히 하는데 도움이 된다.

But it helps to clarify many aspects of the task by suggesting helpful guidelines.


특별한 계시를 해석하는 신학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학습- 인간성, 사회 과학, 혹은 자연 과학이든 간에- 의 우선적 관심은 자연의 계시를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으로서, 이는 진리가, 노아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유지되고 통치 됨으로서, 창조물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다. (시19:1-6; 롬1:19-20; 2:14-15)

Except for theology, which interprets special revelation, the primary concern of all other disciplines—whether in the humanities, social sciences, or natural sciences—is to interpret and explain natural revelation, that is, the truth revealed in creation, as upheld and governed by God through the Noahic covenant (Ps. 19:1-6; Rom. 1:19-20; 2:14-15)....


이러한 고찰들이 제시해주고있는 것은, 성경은 모든 학술적 학문의 커다란 그림에 관하여 결정적인 것들을 말하고 있는 반면에 (신학을 제외하곤) 이러한 학문들의 세밀하고 기술적인 상세한 것들에 관하여는 거의 침묵한다는 것이다.

These considerations suggest that Scripture says crucial things about the big picture of all the academic disciplines, while it is silent about nearly all the narrower, technical details of these disciplines (except theology). (174-75)



그러므로, 부모들은 자신들의 자녀들의 교육에 관하여 우선적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공립 학교들을 포함한 일정 수의 교육 기관들 가운데 선택 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Thus, parents have primary authority over the education of their children and are free to choose among any number of educational institutions, including public schools.


그러나 그리스도는 나라의 열쇠를 교회에 맡기셨기에, 목사들과 교사들은 신학을 가르칠 우선적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But, because Christ has entrusted the keys of the kingdom to the church, pastors and teachers have the primary authority over instruction in theology.


모든 학문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이 절대 종교적으로 중립일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In every discipline the Christian must remember that "study and teaching are never religiously neutral" (179).


그러나 "불신자들이 이루어 놓은 것과 공헌들을 과도하게 제외 시킨다면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교육에 있어서는 빈곤하게 만들 것이다"

However, "we impoverish our children educationally if we unduly cut them off from the accomplishments and contributions of unbelievers" (184).


반드루넨은 소명에 대하여 숙고하면서 비슷하게 현명한 충고를 하고 있으며, 우리들로하여금 일반 문화에서 각자의 세상적인 소명을 위하여 발달된 교육을 존중하면서도, 이러한 것들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소명에 충실하여야 할 것을 경고한다.

VanDrunen applies similarly sage advice in his consideration of vocation, warning us to respect the disciplines developed for each earthly calling in common culture, while being faithful to our Christian calling in the pursuit of these (187-94).



마지막으로, "정치는 일반 나라의 문제이다"

Finally, "politics is a matter of the common kingdom" (194).


반드루넨은 정치에 관한 두 나라 관점을 명료하게 요약한다:

VanDrunen succinctly sums up the 2k perspective on politics:


그리스도인은 정치의 중요성을 부인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왜냐하면 정치는 이 세상에서 정의, 평화, 그리고 번영의 충분한 결실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정치를 천상의 구속적 나라를 안내하는 수단으로서 찬양해서도 안된다.

Christians must strive neither to deny the importance of politics—since it has great bearing on the justice, peace, and prosperity of this world—nor to exalt politics as a means of ushering in the redemptive kingdom of heaven. (194-95)


국가 정부가 제공하는 정의와 질서가 임시적이고 잠정적이기에- 불완전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그리스도인은 적절한 기대를 가지고 참여하여야 하며, 하나님의 기관으로서의 "국가의 복지를 모색"하는 제한적이지만 중요한 목표들을 도울 것을 모색하여야 한다.

Because the justice and order that civil government provides is temporary and provisional—not to mention imperfect—Christians should participate with modest expectations and seek to assist in the limited but important goals of God's institution, "seeking the welfare of the city" (Jer. 29:7, p. 199).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정책적 위치에서 윤리적 절대성을 산출하지 않는 것과 성경이 침묵하지만 자신들이 선호하는 것들을 지원하는데 주의할 필요가 있다.

Most important of all, Christians need to be careful not to make ethical absolutes out of policy positions and candidates that they favor where Scripture is silent on these things (198-203).



희망해 볼 수 있는 것은 반드루넨이 이러한 것들과 일반적 관심사의 다른 부분들을 분리하여 책을 쓰는 것이다.

One can only hope that VanDrunen will write separate books on each of these and other areas of common concern.


책 전체를 통해서 반드루넨은 그리스도와 문화에 관한 주제에 대하여 상당히 많은 다른 저자들을 도움이 되는 공정한 방법으로 상호 작용되도록 하고있다.

Throughout the book VanDrunen interacts in helpful and fair ways with numerous other writers on the subject of Christ and culture.


그러므로 주제-저자의 색인이 없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Thus, it is a shame that there is no subject-author index.


이 책은 우리들의 교회에서 어른들을 교육하는데 주된 것이 되어야 한다.

This book should become a staple in the adult education programs of our churches.


이 책은 내용을 꼭 널리 들려줄 필요가 있는 훌륭한 책이다.

It is a splendid little book whose message is in desperate need of a wide hearing.



책 전체는 게할더스 보스와 메리디스 클라인의 신학을 생각나게해준다.

The entire book is redolent of the theology of Geerhardus Vos and Meredith G. Kline.


신학적 연결과 반드루넨의 두 나라 입장을 강조하는 것은 일부의 분노를 일으킬 것이지만, 나의 그의 작품이 가치가 있다는 사려 깊은 주목을 받기를 희망한다.

While that theological connection and VanDrunen's articulate 2k position will raise the ire of some, I hope that his work will receive the thoughtful attention it deserves.


두 나라 교리에서 벗어나서 이 세상에서 교회의 역할을 정립하는 어떠한 시도나 혹은 문화에서의 그리스도인의 과업은, 우리가 부름을 받은 대사로서의 역할에 필요한 힘을 낭비시키려 할 것이다.

Any construction of the church's role in the world or the Christian's task in culture that strays far from the 2k doctrine will tend to dissipate the energies needed to be the ambassadors we have been called to be.


Endnotes


[1] H. Richard Niebuhr, Christ and Culture (New York: Harper, 1951).


[2] David VanDrunen, Natural Law and the Two Kingdoms (Grand Rapids: Eerdmans, 2010).


[3] David VanDrunen, A Biblical Case for Natural Law (Grand Rapids: Acton Institute, 2006).


[4] David VanDrunen, Bioethics and the Christian Life: A Guide to Making Ethical Decisions (Wheaton: Crossway, 2009).


Gregory E. Reynolds serves as the pastor of Amoskeag Presbyterian Church (OPC) in Manchester, New Hampshire, and is the editor of Ordained Servant. Ordained Servant Online, April 2011.


posted by Wonho Kim
:
화란개혁주의/카이퍼 2015. 6. 14. 15:24
코르넬리스 프롱크 목사가 말하는 카이퍼의 신칼빈주의

  by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다음 글은 Cornelis Pronk목사님이 Neo-calvinism에 관하여 정리한 글 중에서 카이퍼의 핵심적 신학 사상을 중심으로 일부분을 번역한 것이다.

기존의 신칼빈주의에 대한 대부분의 글들이 카이퍼의 후예들에 관한 것이라면 프롱크 목사님의 다음의 글은 주로 카이퍼 자신의 신학 체계속에 담겨있는 신칼빈주의적 요소를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들은 카이퍼의 기본 사상의 핵심적 개념들인 일반 은총과 반정립, 유기체적 교회론과 문화 명령, 하나님의 예정들이 서로가 어떻게 연관되어 하나의 신칼빈주의의 신학 체계를 형성하여 가고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

카이퍼가 1897년 뉴 저지주에 있는 프린스턴 대학에서의 강연을 모은 칼빈주의라는 그의 책을 보게 되면, 그는 칼빈주의라는 용어를 4가지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칼빈주의를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In his book Calvinism, which is a collection of lectures on that subject delivered at Princeton University, N.J. in 1897, Kuyper mentions four uses of the word Calvinism. According to him Calvinism may be viewed as:

1. 반대자들에 의하여 개혁주의자들에게 대하여 주어진 분파적인 명칭
1. a sectarian name given to the Reformed by their opponents.

2.예정 교리와 그와 관계된 진리들에 동의하는 이들에 의하여 사용된 고백적인 명칭
2. a confessional name used by those who subscribe to the dogma of Predestination and other related truths.

3. 칼빈주의자인 침례교인이나 감리교인과 같이 칼빈주의자로 분류되길 원하는 교회들에 의하여 사용되었던 교파적인 명칭
3. a denominational name used by churches which want to be identified as Calvinist, such as Calvinistic Baptists and Methodists.

4. 역사적으로나 철학적, 혹은 정치적 의미로서의 과학적 명칭
4. a scientific name, either in a historical, philosophical or political sense.

카이퍼는 말하기를: 역사적으로 칼빈주의라는 명칭은, 루터주의나 재세례파나 소시니언이 아닌 한에는, 개혁의 움직임이 나아가는 분야를 가리키고 있다.
Says Kuyper: Historically, the name of Calvinism indicates the channel in which the reformation moved, so far as it was neither Lutheran, nor Anabaptist nor Socinian.

철학적인 의미에서 말한다면, (칼빈주의는) 칼빈의 주도적인 기획의 영향을 받아서, 삶의 여러 영역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내는 개념들의 조직을 통해서 이해 하려는 것이다.
In the philosophical sense, we understand by it that system of conceptions which, under the influence of the master-mind of Calvin, raised itself to dominance in the several spheres of life.

그리고 정치적인 명칭으로는, 칼빈주의는 제도적인 정치력에 있어서 국가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정치적 운동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처음에는 화란에서 있었고, 그다음에는 영국에서, 그리고 18세기 말엽 이후의 미국에서 있었다.
And as a political name, Calvinism indicates that political movement which has guaranteed the liberty of nations in constitutional statesmanship; first in Holland, then in England, and since the close of the 18th century in U.S.A.

카이퍼가 이해하고 있는 칼빈주의의 개념은, 소위 말하는 독립적인 일반적 성향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는 고유의 모체의 원칙으로부터, 우리의 삶과 우리의 사고 모두에서 독립적인 형태로 발전하는 것으로서의 과학적인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It is in this scientific sense that Kuyper understands the concept of Calvinism , namely as "an independent general tendency which, from a mother-principle of its own, has developed an independent form both for our life and for our thought among the nations of Western Europe and North America."

카이퍼에게 있어서 칼빈주의의 범위는 그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보다도 훨씬 넓은 것이었다.
For Kuyper the domain of Calvinism was much broader than what most people in his time understood by it.

개혁주의 범위 안에 있었던 그의 동료들은 칼빈주의를 근본적으로 교회론적이고 고백적인 운동으로 보았던 것이다.
His contemporaries in Reformed circles saw Calvinism as basically an ecclesiastical and confessional movement.

그들에게 개혁적 혹은 칼빈주의적 이라는 것은 인간이 부패 하였다는 것과 구원을 위해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을 의미하였다.
Reformed or Calvinistic for them meant believing in the depravity of man and his absolute dependence on God for salvation.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이들은 은혜의 교리, 혹은 칼빈주의 5대 강령을 부정하는 알미니안이나 현대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이를 강조하였다.
In other words, they stressed the doctrines of grace or the so-called Five Points of Calvinism in opposition to Arminians and Modernists who denied these doctrines.

카이퍼는 자신의 동료 개혁주의 신자들에게 칼빈주의가 이것보다 훨씬 더 크다고 확신 시키는 것을 자신의 삶에 있어서의 사명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Kuyper saw it as his mission in life to convince his fellow Reformed believers that Calvinism was much more than that.

그는 이것이 우리를 이해시키고 현실감을 가지게 할 수 있는, 세상과 삶에 대하여 모든 것을 망라하는 관점이라고 주장한다.
It was an all-encompassing world-and-life view, he insisted, which enables us to understand and make sense of reality.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과업은 칼빈주의의 원리들로 세상을 품어서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시키어, 모든 창조 질서가 속하여있는 그리스도께 구속되도록 주장하여야 할 것이라고 한다.
Our task as Christians, he said, is to bring the principles of Calvinism to bear upon the world so as to influence and change it, redeeming and claiming it for Christ to whom the whole created order belongs.

카이퍼에 의하면, 칼빈주의의 핵심적 개념은 모든 영역에 있어서 전체 피조계를 관할하는 하나님의 주권이다.
The key-concept of Calvinism, according to Kuyper, is the sovereignty of God over the whole cosmos in all its spheres.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은 국가와 사회와 교회에서의 인간의 3중 주권에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This Divine sovereignty is reflected in a three-fold human sovereignty, namely in the State, in Society and in the Church.

카이퍼의 칼빈주의의 개념은 신칼빈주의라고 불리어지는데 이는 반대자들에 의해서 뿐만이 아니라 카이퍼와 그의 동료들 자신들로부터도 불리어지는 것이다.
Now it is this concept of Calvinism that has come to be referred to as Neo-calvinism, not only by its opponents, but by Kuyper and his followers themselves.

비록 카이퍼는 자신의 생각들의 대부분이 칼빈에게 함축적으로 표현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것들은 원래의 고전적 칼빈주의나 개혁주의 신앙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새로운 사상들이나 가르침 들인 것이다.
It is neo or new in that it represents ideas and teachings which are not found in the original, classic Calvinism or the Reformed Faith, although Kuyper claimed that many of his ideas were seminally present in Calvin.

그는, 이 근원들이 칼빈의 사상에 있으며 이것들은 단지 실행되고 적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The seeds are there in Calvin's thought, he says, they only need to be worked out and applied.

실은 칼빈이 모든 것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Now it is true that Calvin taught the sovereignty of God in all things.

그(칼빈)도 역시 하나님의 주권이 구원에만 제한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교리가 삶의 모든 것, 즉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포함하여, 가족의 역할, 사회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소명, 과학의 영역, 기타 등등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He also knew that God's sovereignty is not limited to salvation but that there are implications of this doctrine for all of life, including Church-State relations, the role of the family, the Christian's calling in society, the place of science, etc.,etc.

하지만 칼빈 사상의 깊은 뜻들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카이퍼는 일부 중요한 부분에서는 원래의 것과는 동떨어진 것들로 구성된 칼빈주의 체계로 귀결 시켜버린다.
Yet in the process of working out the implications of Calvin's thought, Kuyper ended up with a system of Calvinism that in some important areas constituted a departure from its original version.

카이퍼는 화란에서 칼빈주의의 원리들을 사회의 모든 영역에 적용을 시킨 영향력으로 인하여 자주 칭찬을 받곤 한다. 이 칭찬은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이다.
Kuyper has often been praised for the impact he has made on the Netherlands by applying Calvinistic principles to society in all its spheres. This praise is well-deserved.

반정립이라는 단어는 대립을 뜻하는 anti와 명제, 혹은 이론과 진술을 뜻하는 thesis로 이루어졌다.
The word antithesis is made up of anti, meaning against, and thesis which means proposition, theory or statement.

그렇다면 반정립은, 예를 들자면, 신앙이나 철학의 영역에서 대적자들이 믿음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Antithesis, then, means taking position against beliefs held by one's opponents e.g., in the area of religion and philosophy.

카이퍼에 의하면 교회와 세상 사이에는 근본적인 반정립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According to Kuyper there exists a basic "antithesis" between the church and the world.

이를 표현하자면, 구속 받은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원칙으로 살아가고 다른 이들은 하나님이 미워하는 반대의 원칙으로 살아간다
The redeemed live out of one principle-love for God-and all others live out of the opposite principle, enmity of God, however this might be expressed.

교회와 세상 사이에 이러한 간격이 존재함으로 인하여 이 두 진영 사이에는 협력이 전혀 있을 수 없다고 결론을 지을 수도 있다.
One might conclude from this that with such a gap existing between church and world there could be no cooperation at all between the two camps.

그러나 카이퍼는 일반은총이라는 새로운 교리를 만듦으로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발견하게된다.
But Kuyper found the solution to this problem by constructing a new doctrine, namely that of common grace.


나는 이것(일반은총)이 진짜 새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데, 이는 칼빈과 개혁주의 신앙고백들에 이미 존재하였던 요소들이지만,사실 카이퍼가 이 교리에 대하여 자신의 도장을 찍은 것이다.
I shouldn't say it was new, really, because we find elements of it already in Calvin and the Reformed confessions, but it is a fact that Kuyper put his own stamp on this doctrine.

그렇다면 카이퍼가 규정하고 있는 일반 은총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What, then, is common grace as defined by Kuyper?

이것은 하나님께 선택 받은 자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구원의 은총에 더 하여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도 주시는 은혜가 있다는 것이다.
It is the idea that in addition to special or saving grace which is given only to God's elect, there is also a grace which God bestows on all men.

특별 은총은 사람들의 마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인 반면에 일반 은총은 (1) 일반적으로 인류 안에 있는 죄로 인한 파괴적인 과정들을 억제하는 것이고 (2) 비록 거듭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우주에 있는 잠재적인 능력들을 개발하도록 하여서 타락 전에 사람에게 주어진 문화 명령을 완성시키는 일에 긍정적으로 공헌하도록 하는 것이다.
Whereas special grace regenerates men's hearts, common grace (1) restrains the destructive process of sin within mankind in general and (2) enables men, though not born again, to develop the latent forces of the universe and thus make a positive contribution to the fulfillment of the cultural mandate given to man before the Fall.

모든 사람이 자신들 안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하여 이러한 일반 은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삶의 환경을 향상 시키며, 빈곤과 싸우며 모두를 위한 사회 정의를 추구하기 위하여 믿지 않는 이들과 함께 일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Because all men share in this common grace by virtue of the image of God left in them, Christians can and should work together with unbelievers towards improving living conditions, fighting poverty and promoting social justice for all.

이 외에도 카이퍼는 일반 은총이 우리들로 하여금 세상의 선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을 인식하고 감사하도록 하여서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함으로 즐거워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Besides, Kuyper argued, common grace enables us to recognize and appreciate all that is good and beautiful in the world and allows us to enjoy God's gifts with thanksgiving.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술과 과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서 문화의 발전에 관여하여야한다.
Therefore Christians should be actively involved in the arts and sciences and thus in the development of culture.

카이퍼는 이러한 방식, 즉 주일을 평일과 분리 시키며,신학적 의미들에 있어서의 육적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을 분리시키며, 은혜로부터 자연을 분리시키는 "경건주의적 이원론"을 제거하도록, 개혁주의 공동체에 도전을 가하고있다.
In this way Kuyper challenged the Reformed community to "purge themselves of their 'pietistic dualisms,' their separation of Sunday from the workweek, of the spiritual from the physical-in theological terms, of nature from grace" (James Bratt).

카이퍼의 일반 은총 이론은 그의 전체 작품과 사상의 핵심이 되고있다.
Kuyper's doctrine of common grace has been called the linchpin of his entire work and thought.

카이퍼는 이를 반정립 이론과 기술적으로 결합시켜서, 교회와 세상의 차이를 보존하려는 이들을 설득시켰을 뿐만이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최소한 문화의 어떤 면에 대하여 좋게 생각하는 개혁주의 영역 안에 있는 지식인들도 만족시키고있다.
By skillfully combining it with the doctrine of the antithesis, he reassured those who were concerned to preserve the difference between church and world, while on the other hand he also satisfied intellectuals within the Reformed camp who appreciated at least some aspects of culture.

그러므로 일반 은총은 이중적 목적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Common grace thus served a dual purpose.

이(일반 은총 교리)는 전적 부패의 교리를 회심 하지 않은 이들 가운데 있는 선의 존재와 조화를 이루도록 하며, 동시에 이 세상 가운데 아직 존재하는 어떠한 선이든지, 이는 인간의 노력의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임을 주장함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있다.
It reconciled the doctrine of total depravity with the presence of good among the unconverted, while at the same time emphasizing God's sovereignty by insisting that whatever good there still is in the world is not the result of human effort but the fruit of divine grace.

통치 체제나 법으로서의 기관에서 일반 은총이 보여주었던 것과 같이, 예술과 과학도 단순한 은혜의 산물이 아니라, 은혜의 수단으로서 하나님께서 죄를 억제하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원래부터 의도하셨던 데로 창조물을 발전시키는 수단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But not only that, common grace also showed that such institutions as the government and the law, the arts and sciences were not just products of grace but means of grace- instruments whereby God restrained sin and enabled man to develop creation as He had originally intended.

그러나 만약에 일반 은총이 카이퍼 사상의 핵심이라고 한다면, 이는 바로 자신의 체계의 취약점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But if common grace was the linchpin of Kuyper's thought, it also proved to be the Achilles heel of his system.

많은 개혁주의 사람들이 카이퍼와 그의 사상을 따르고 있지만, 역시 많은 이들이 그의 관점에 동의하지 못하고 있다.
For while many Reformed people followed Kuyper and his ideas enthusiastically, there were also many who disagreed with his views.

특히 분리 교회들에서 신칼빈주의에 반대하는 이들이 많이 있었다.
Especially in the Secession churches there was much opposition to Neo-Calvinism.

린드붐이나 텐 후어 같은 이들은 매우 중요한 분야의 일부분에서 카이퍼의 가르침들이 성경과 개혁주의 신앙고백에 상반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Men like Lindeboom and Ten Hoor were convinced that in some very important areas Kuyper's teachings were contrary to Scripture and the Reformed confessions.

나는 이에 대하여 상세한 기술을 할 수는 없지만, 관심 있는 세 분야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고자 한다.
I cannot go into detail here, but I will mention three areas of concern.

첫째로는 교회에 대한 카이퍼의 교리이고, 두번째로는 교회의 우선되는 과업에 대한 그의 관점이고, 세번째로는 문화와 그것의 잠재적 구속에 대한 낙관적인 관점이다.
First there was Kuyper's doctrine of the church.Second, there was his view of the primary task of the church. And, third, his optimistic view of culture and the potential for redeeming it.

카이퍼는 기관으로서의 교회와 유기적 조직체로서의 교회를 구분하여야한다고 믿고 있다.
Kuyper believed that a distinction should be made between the church as institute and the church as organism.

기관으로서의 교회는 세가지 직무에 대한 위임을 받았는데 이는 가르치는 일과 성례를 집행하는 것과 제자 훈련을 시키는 것에 대한 소명을 말한다.
As institute the church has been entrusted with the three offices and is called to preach and administer the sacraments and exercise discipline.

유기적 조직체 혹은 성도들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사회적 활동에 관여하여서 문화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다.
As organism or body of believers she is to be involved in social activities and thus carry out the cultural mandate.

이러한 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지만 카이퍼가 사용하였던 방법은 분리 교회 신자들에게 불안감을 주고 있다.
As such there was nothing wrong with this distinction, but the way Kuyper used it alarmed the Seceders.

카이퍼가 말하는 참된 교회는 기관으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유기적 조직체로서의 교회를 말하는 것 같다.
Kuyper seemed to say that the real church is not the church as institute but the church as organism.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기관으로서의 교회는 교회의 전부가 아니며, 참되고 필연적인 교회도 아니며, 교회 자체도 아니며, 다만 교회를 통하여 설립된 기관이며, 말씀이 그 가운데 영향을 미치도록 하기 위한 교회이다."
This is how he put it: "The church as institute is not all of the church, nor the real or essential church, not the church itself, but an institute established through the church and for the church in order that the Word can be effective in its midst."

달리 표현한다면, 기관으로서의 교회는 유기적 조직체로서의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존재하며, 성도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과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In other words, the church as institute exists to serve the church as organism, equipping the saints for their task in the world.

그렇다면 이러한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카이퍼에게는 이것이 무엇보다도 사회에 관여를 하여서, 세상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회복 시키며, 문화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다.
And what is that task? For Kuyper it is primarily one of social involvement, redeeming the world for Christ, obeying the cultural mandate.

그러므로 신칼빈주의는 이전의 칼빈주의나 개혁주의 신학에서 근본적으로 이탈되었음을 보여주고있다.
Thus neo-Calvinism marks a radical departure from the older Calvinism or Reformed theology.

카이퍼 시대 이전까지는 개혁주의는 교회를 구원에 관련된 기관으로, 성령이 역사하시는 장소로, 죄인이 구원받고 성도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살수 있도록 무장하는 것은 물론 믿음으로 양육되도록하는 터전으로 보았다.
Until Kuyper's time the Reformed viewed the church as a salvation-institute, the work-shop of the Holy Spirit, where sinners are saved and believers nurtured in the faith as well as equipped for living in this world as Christians.

그러나 카이퍼의 계획 안에 의하면, 선택 받은 이들이 이미 거듭난 상태로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탄생할
때부터 이미 은혜의 상태 안에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But in Kuyper's scheme the elect enter this world already regenerated and thus may be presumed to be in a state of grace from birth.

사실 유아는 이러한 가정에 의하여 세례를 받는 것이다.
In fact, infants are to be baptized on the ground of this presumption.

결과적으로 교회의 우선 되는 과제는 거듭난 이들을 양육하며 이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준비를 해주는 것이다.
Consequently, the church's primary task is to nurture the regenerate and prepare them for life in the world.

카이퍼 이전에 개혁주의에서는, 교회가 이 사회에서 할 일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죄인의 구원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Prior to Kuyper the Reformed, while not denying that the church has a task in society, put the emphasis on the salvation of sinners.

그러므로 전통적인 칼빈주의자들의 가르침에서는, 회개에 관한 성경의 주요 주제들을 다루는데 있어서, 신자의 매일의 회개 뿐만이 아니라 교회생활에서의 회심하지 않았던 부분과 거듭남, 칭의, 성화 그리도 기타 등등의 회개에 대한 처음의 행위에 대하여도 가르친다.
Preaching for the Old School Calvinists, therefore dealt with the great Biblical themes of repentance-and then not just daily repentance of believers, but also the initial act of repentance on the part of the unconverted in the churchfaith, the new birth, justification, sanctification and so on.

그러나 카이퍼에 와서는 강조점의 이동이 일어났다.
But with Kuyper a shift in emphasis took place.

말씀을 통하여 죄인의 마음에서 성령이 일하시는 것보다는, 사회와 문화의 회복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하여야 하는 일이 중요한 것으로 바뀐 것이다.
Not what the Holy Spirit works in sinners' hearts through the Word, but what Christians should do to redeem society and culture-that became the important thing.

이는 우리들을 문화 명령으로 이끌어오는 것이다.
This brings us to the cultural mandate.

카이퍼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타락 전에 주신 직무가 아직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의 직무라고 믿고 있다.
Kuyper believed that the task God gave Adam before the fall is still the task of Christians today.

사실 그(카이퍼)는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진실로 이러한 직무를 적절히 수행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거듭났고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상실된 원래의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In fact, he says it is really only Christians who are able to carry out this task properly because they have been regenerated by the Spirit of God and restored into the original relationship which was lost through Adam's fall.

그럼 이러한 직무가 무엇이란 말인가?
What was that task?

창세기 1장 28절을 읽어보자,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시고, 기타 등등.
Let us read Gen.1:28, "And God blessed them, etc.

카이퍼는 이 구절이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진정한 목적을 요약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목적은 죄인들의 구원이 아니라, 우주의 구속을 말하는 것이다. 구원은 단지 이러한 목적의 수단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진정한 목적은 우리가 아담과 이브에게 주어진 이러한 처음의 명령, 혹은 문화 명령을 수행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카이퍼는 말한다.)
This verse, Kuyper says, sums up God's real purpose for man. That purpose, ultimately, is not the salvation of sinners, but the redemption of the cosmos. Salvation is but the means to that end. God's real purpose in saving us is that we will carry out that original command or cultural mandate first given to Adam and Eve.

카이퍼와 그의 제자들에게는 이러한 명령이 너무도 중요했기에 이것은 대위임령을 앞서는 것과 같이 보인다.
So important is this mandate for Kuyper and his disciples that it seems to take precedence over the Great Commission.

카이퍼는 그리스도가 구속의 중재자이실 뿐만이 아니라 창조의 중재자라고 믿고 있다.
Kuyper believed that Christ is not only the Mediator of redemption but also Mediator of Creation.

이것은 그리스도가 잃어버린 죄인 뿐만이 아니라 상실된 세계와 우주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That means Christ died not only for lost sinners but also for a lost world or cosmos.

이를 달리 표현한다면, 카이퍼의 관점으로는, 예정이 선택 받은 자의 구원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창조 세계의 회복과도 관계된다는 것이다
To put it still differently, in Kuyper's view, predestination does not just concern the salvation of the elect but also the restoration of the entire creation.

예정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관심을 창조 세계 전체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하나님의 뜻이 역사 전체를 관할 함으로서 하나님 자신의 손으로 만드신 작품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이 영광을 받으시려는 목적을 향하게 된다
God in predestination focusses His attention on the whole creation so that the decree encompasses all of history and is directed to the end that He will receive the glory from all the works of His hands.

이러한 방식으로 카이퍼가 생각한 것은, 사람들의 관심이 특정한 혹은 특별한 은총의 일에만 제한되어서는 안되고, (사람들의 관심이) 일반 은총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완전하게 다른 일에까지도 확장되어야한다는 것이다.
In this way, Kuyper felt, one's attention is not restricted to the work of particular or special grace, but it also extends to that completely different work of God in the realm of common grace.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방대한 양의 직무를 담당하여야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문화 명령을 수행하여야 하며, 창조적 잠재력을 충분히 발전시켜야하는 것이다.
The Christian, then, has a formidable task in this world.
He is to carry out his cultural mandate and fully develop the creation's potential.

실제로 이 분야에서의 신자의 활동은 하나님 나라의 오심을 준비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명령이 완성되기까지 그리스도는 다시 오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In fact the believer's activity in this area is absolutely necessary as a preparation for the coming of God's Kingdom. Christ will not return until this mandate is completed.

카이퍼는 말하기를, 우리에게 있어서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은, 군사에서 승리한 교회로의 변화를 가져올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자연과 세상에 숨겨 놓으신 모든 것이 마지막이 도래하기 전에 빛 가운데 나타나야 한다고 말한다.
For us, Kuyper says, it is certain that the Parousia must bring us not only a change from the militant to the triumphant church...but also that everything that God has hidden in nature and the world must be brought to light before the end can be ushered in.

분명히 카이퍼는 여기서 너무 멀리 나아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많은 동료들도 그렇게 했고 또 그렇게 하고 있다.
Surely Kuyper went too far here. And so did and do many of his followers.

그리 오래되지 않은 몇 해 전에, 토론토에 있는 전신이 AACS였던 ICS의 대변인 가운데 한 사람인 B. Zijlstra는 기록하기를 "교회는 필연적으로 태초에 인류에게 주어진 원래의 과업을 다시 하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회복된 인간성"이고, 그의 관점은 마태복음28장의 선교적 명령이 근본적으로 창세기 1장28절의 문화 명령을 다시 표현하거나 아니면 다시 진술한 것이라고 보고있는 것이다.
Not many years ago, B. Zijlstra, one of the spokesmen for the Toronto based ICS., formerly AACS, wrote that the church is essentially "redeemed humanity restored to its original task assigned to mankind at the beginning," and that in his view the missionary mandate of Matt. 28 is basically a republication or restatement of the cultural mandate of Gen. 28.

그러나 이것이 성경적인 기독교란 말인가? 절대로 아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우리의 문화적 노력으로 이루어진 과정에 의존한다는 생각은, 좋게 표현해서, 말도 안되는 생각이다.
But is this Biblical Christianity? Hardly. The very notion that Christ's second coming is contingent on the progress we make with our cultural endeavours is preposterous, to put it mildly.

만약에 우리 주님이 재림 하실 때가 우리의 활동과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신약 성경에 강조되어있는 선교적 사역과 관계 되는 것이다.
If the timing of our Lord's second coming has anything to do with our activity it is our involvement in missionary work that is emphasized in the NT.

예수님 자신이 마태복음 24장 14절에서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와 같이 말씀하신다.
As Jesus Himself states in Matthew 24:14, "This gospel of the kingdom shall be preached in all the world for a witness unto all nations; and then shall the end come."

그러나 창세기 1장 28절은 어떠한가?
But what about Gen.1:28?

오늘날 우리에게 이것을 말씀 하시지 않는가?
Does it have nothing to say to us today?

그렇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어진 명확한 과업이나 선교를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Yes it does. It cannot be denied that here God speaks of a definite task or mission given to man.

그러나 소위 말하는 문화명령이 아담에게 주어졌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동일하게 강력하다는 말인가? 분명히 아니다.
But is this socalled cultural mandate still in force in the same way as it was for Adam? Clearly it is not.

문화 명령의 개념에는 법적인 함축적 의미가 담겨있다.
The very notion of a cultural mandate has a legalistic connotation.

이것(문화 명령)은 은혜의 맥락이나 은혜 언약에 속하여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It is a term that does not belong in the context of grace and the covenant of grace.

하나님께서 이러한 명령-당신이 이렇게 부르기를 원한다면-을 주셨을 때는 아직 타락이 일어나지 않은 상황이다.
When God gave this mandate, if you want to call it that, the fall had not yet taken place.

그러나 아담이 범죄 하였을 때 그는 더 이상 이 명령을 수행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When Adam sinned, however, he was no longer in a position to carry out this command.

태초에 사람에게 부여된 과업을 아담에게로부터 책임을 넘겨 받아서 충족시키신 분은 두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이시다.
It was Christ, the second Adam, who took over this responsibility from the first Adam and fulfilled the task assigned to man at the beginning.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처음의 명령을 폐지하시지 않으셨다. 다만, 이를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직접 이 요구를 감당하신 것이다.
No, God did not abrogate His original demand. Rather, in Christ He Himself met that demand.

우리를 위하여 자신이 순종하심으로서 율법을 지키신 것이다.
By His obedience He has kept the law for us.

그의 구원 사역의 결과는 우리의 행위와 행동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The result of His saving work is that the character of our work and activity has fundamentally changed.

문화적이든 아니면 그 밖의 것이든 간에, 선한 행위들은 신자들에 의하여 감사함으로 행해져야 하고 두려움에서 하면 안되는 것이다.
Good works, cultural or otherwise, are now performed by the believer out of gratitude and never out of fear.

그러므로 우리의 활동이나, 혹은 이것들의 결핍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재촉하거나 늦출 수 있다는 어떠한 생각도 완전히 거부되어야 할 것이다.
Any notion, therefore, that our activities, or the lack of them, could either hasten or delay the return of Christ is to be firmly rejected.

이 때문이든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든 간에 문화 명령이라는 의미는 삼가야 할 것이다.
For this and other reasons the term cultural mandate should be avoided.

W.H. Velema는 "의미에 있어서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역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우리를 모두 다 처음의 출발선으로 돌려놓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일은 그리스도가 이 세상 역사의 결정적인 전환을 가져온 것을 뒤 따라서 행해져야 할 것이다."
As dr. W.H. Velema says, "as a term it does not show a relation to the work of Christ and puts us all the way back to the starting line... Our work takes place after Christ has brought about a decisive turn in world history."

사도들이 믿는 이들에게 선한 행위를 하라고 권면 할 경우에 이들은 항상 명령법을 직설법에 연결 시키곤 하였다.
When the apostles urge believers to perform good works they always join the imperative to the indicative.

달리 표현하자면, 행위에 대한 명령은 항상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근거로 하여 논해져야한다는 것이다.
In other words, the command to work is always issued on the basis of Christ's finished work.

우리의 영적인 활동들 모두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All our spiritual activities are grounded in His saving activity.

신칼빈주의자들은, 문화에 대한 강조로 인하여, 선교적 헌신에 있어서, 신자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범주와 맥락에서 자신들의 일을 하여야한다는 사실에 대한 관점을 상실하는 경향이 있다.
Neo-Calvinists, with their emphasis on cultural, rather than missionary endeavour tend to lose sight of the fact that believers do their work in the sphere and context of Christ's soteriological work.

복음의 참된 사역의 과정을 못하게 하는 것은 비극적 오류인 것이다.
This is a tragic error which has hindered the progress of the real work of the Gospel.

최근에는 J. Douma 나 W.H. Velema 같은 신학자들이 카이퍼와 그의 추종자들이 문화 명령을 위하여 제시한 해석학적 근거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했다.
Recently, theologians like J. Douma and W.H. Velema have questioned the exegetical basis which Kuyper and his followers have adduced for the cultural mandate.

예를 들어서 Douma는 창세기1:28; 2:15, 3:23과 시편8이 진실로 신칼빈주의자들이 믿는 것과같이 모든 것을 망라하는 명령을 구성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의구심을 갖는다.
Douma, e.g., wonders if such passages as Gen.1:28; 2:15, 3:23 and Psalm 8 really constitute such an all-encompassing mandate as Neo--Calvinists believe.

창세기 1:28과 2:15이 동산을 가꾸고 보존 할 뿐만이 아니라 땅을 정복하도록 위임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은 창조물의 생명이 충만한 잠재력에 이르도록 하라는 명령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True, Gen. 1:28 and 2:15 assign man the task of subduing the earth as well as dressing and keeping the garden, but does this have to be seen as a mandate to bring the life of creation to its full potential?

Douma는 히브리어인 abad가 단순히 땅을 경작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Douma points out that the Hebrew verb abad means simply to cultivate a field.

이러한 노동은 사람이 먹기 위하여 요구되는 것이다.
This labour is required of man if he is to eat (Gen.1:29; 2:5; 3:17ff.).

이러한 구절들은 일하는 것과 먹는 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죄는 일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여준다고 생각된다.
What these verses seem to tell us is that there is a connection between working and eating and that sin has made work difficult.

Douma는 넓은 의미에서 여기서의 경작한다는 뜻에 담겨있는 뜻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는 이 구절을 근거 이상으로 읽는 것에 대하여 주의를 주고있다.
Douma does not deny that there may be implications here for culture in a broader sense, but he cautions against reading more into these verses than is warranted.

Culture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에 씨의 형태로 주신 것을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특별한 명령 이상의 결과물이라고 그는 보고있다.
Culture in the sense of the unfolding of what God has put in His creation in seed form, in his view, is more a matter of consequence than a specific mandate.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고 번성하라고 독촉을 하셨기 때문에, 인류는 땅에 충만할 것이고 그 과정 중에 문화가 발전할 것이기에, 이것은 먹고 마시는 것 이상이어서 사람이 아직까지도 많은 좋은 것들을 즐긴다고 볼 수 있다.
Because God has created man in His image and with the urge to reproduce himself the human race will populate the earth and in the process a culture will develop that will go beyond eating and drinking so that man may still enjoy many good things.

Venema는 Douma에게 동의하면서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한 문화 프로그램을 끝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은 거부를 하는데, 이 경우에는 이와 같은 프로그램이 우선 윤곽이 그려져야 하는데, 이에 대하여 신약성서에서 전혀 증거를 찾을 수가 없는데도 홀로 "명령"으로 규정되고 있는 것이다.
Velema agrees with Douma and rejects the idea that Christians are under obligation to finish off a specific cultural program, for in that case such a program would first have to be drawn up, but for this we find no evidence at all in the NT, let alone that it prescribes a "mandate."

그는 이와같이 문화와 사회에 개입하여야한다는 선입관에 반대하면서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순례자" 특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경고를 한다.
He warns against such a preoccupation with culture and social involvement that the Christian life loses its "pilgrim" character.

우리는 원래 이 땅에서 영원한 이방인이고 순례자인 것이다.
We are first and foremost strangers and pilgrims on earth.

순례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필수적인 것이다.
Being a pilgrim is essential for the church of Christ.

신약의 신자들은 자신들이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The congregation of the NT knows that she is 'on the way.'

성도는 여기가 고향이 아니다.
She is not at home here.

성도는 자신의 옛날의 환경에서 이탈 되었고 지금은 사람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세울 나라가 장래에 나타날 것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She has been loosed from her old environment and now looks for the future revelation of the Kingdom which Christ will establish, not man.

Velema는 명령 대신에 그리스도인의 이 세상에서의 소명이나 부르심을 말하는 것을 선호한다.
Velema prefers to speak of the Christian's vocation or calling in the world instead of a mandate.

이 소명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은 이 죄악된 붕괴되는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And what is this vocation? it is to live in this sinful and corrupt world as salt and light.

소금이 맛을 낼 뿐만이 아니라 고기나 다른 음식들의 부패를 감지하는 것과 같이,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증인으로서 그리고 거룩한 행보로서 주변의 세상에 영향을 줄 것을 모색하여야 한다.
Just as salt checks decay in meat and other foods, as well as giving it flavour, so Christians should by their Gospel witness and holy walk seek to influence the world around them.

달리 말하자면, 그들(그리스도인들)의 세상에서의 존재와 활동은 죄의 파괴적인 영향들이 경감되거나 소멸되도록 도와야 하며, 사회에서의 삶이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관용적이거나 전도적이 되도록 만들어야하는 것이다.
In other words, their presence and activity in the world should help to alleviate and offset the baneful effects of sin and make life in society tolerable and conducive to the work of proclaiming the Gospel.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는 모든 것은 선교적이며 종말론적 초점을 가지고 있어야한다.
Everything we do as Christians should have a missionary and eschatological focus.

심지어 우리가 이와 같은 문화에 참여하는데 있어서 조차도, 그리스도의 도래할 나라의 관점으로부터 행하여져야하는 것이다.
Even our cultural involvement such as it is, should take place from the perspective of Christ coming kingdom.

이것은 신약에서의 분명한 가르침이다.
This is the clear teaching of the NT.

바울이 빌립보서에 기록한 바와같이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2:14-16)"
As Paul writes to the Philippians," Do all things without murmuring and disputings: That ye may be blameless and harmless, the sons of God, without rebuke, in the midst of a crooked and perverse nation, among whom ye shine as lights in the world, holding forth the word of life; that I may rejoice in the day of Christ, that I have not run in vain, neither laboured in vain." (2:14-16). Cf.,I Thess. 3:13; 5:23; 2 Pet. 3:14.

세상에 대하여 이러한 종류의 영향을 주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소명이지만, 우리는 성공이라는 비현실적인 희망을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While it is our calling as Christians to try to have this kind of impact on the world, we should not entertain unrealistic hopes of success.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가, 문화적이든 혹은 선교적이든 간에, 우리의 노력들을 통해서 올 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We should certainly not expect the Kingdom of God to come through our efforts, be they cultural or missionary.

눈에 보이는 결과라는 방식으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주님께서 영광 가운데 우리로 하여금 다가올 나라의 몇 가지 징조를 세우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The most we can look for in the way of visible results is that the Lord will graciously enable us to erect a few signs of the coming Kingdom.

이 나라는 근본적이고 종말론적으로 현실적이지만, 충만함과 눈에 보이는 징후가 관계되는 한에서는, 이는 아직 미래의 실제인 것이다.
That Kingdom is basically and eschatological reality, i.e., as far as its fullness and visible manifestation is concerned, it is still a future reality.

이 세대 동안에 이는 근본적으로 내면적이고, 영적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During this dispensation it is basically inward, spiritual and invisible.

천상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The kingdom of heaven, Jesus said, is within you.

이제 그리스도는 자신의 백성의 마음에서 통치를 하시며 그는 자신의 교회의 왕이시며 이와 같이 인식 되어지신다.
Christ now rules in the hearts of His people and He is King in His Church and acknowledged as such.

그렇다, 그리스도는 당연히 이 세상의 왕이시지만,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는 사단이 불법적으로 왕자로서 이 세상을 계속 다스릴 것이고, 이 세대가 지속될 때까지는 요한1서 5장19절에 요약되어있는 바와 같이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혹은 악한 자인 사단에게)이기에,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과업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과업이 무엇으로 구성되어있으며 그것의 성경적 기초와 이를 위한 근거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True, Christ is also King of the world, but until His return Satan continues to rule, be it illegally, as prince of the world, and as long as this dispensation will last "the whole world lieth in wickedness" (or in the wicked one, Satan.) I John 5:19 Summing up, the question is not whether Christians have a task in this world or not, but what this task consists of and what is the Scriptural basis and warrant for it.

우리가 알아본 바와 같이, 카이퍼는 그 기초를 일반 은총의 교리에 두고 있다.
Kuyper, as we saw, found the basis in the doctrine of common grace.

이 교리는, 혹은 최소한 그가 공식화하고 있는 방식에 있어서는, 일련의 문제에 노출되어있다.
This doctrine, or at least the way he formulated it, is open to serious question.

만약에 그가 의미하는 일반 은총이 단순히 교회가 항상 이해하고 있었던, 즉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 가운데 임함으로 해서, 그가 의인이나 불의한 자나 모두에게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리시는 것이라면, 나는 아무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If he had only meant by common grace what the church has always understood by it, namely God's gracious disposition toward all men, so that He lets his sun shine and his rain fall on the just and the unjust, I would have no problem with it.

다시 말하면, 만약에 일반 은총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복음이 전체 세계에 전파되어서 자신의 은혜를 모두에게 제공하시는 것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진심으로 동의 할 것이다,
Again, if common grace for him meant that God wants His Gospel to be preached to the whole world and offers his grace to all, we would heartily agree.

그러나 이 교리에 대한 카이퍼의 해석은 이것 이상의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But Kuyper's version of this doctrine includes much more than that.

그에게 있어서 일반은총은 우선 우주와 문화의 회복에 향하여있는 은혜인 것이다.
For him common grace is primarily a grace directed to the redemption of the cosmos and culture.

그는 이(일반 은총) 교리를 예정이라는 신적인 강령에 근원을 두고서, 하나님의 피조계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두 가지 방식으로 규정하는데, 선택받은 이는 (특별 은총에 의하여) 구속의 중재자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을 받으며, 문화에 대한 잠재력을 가지고있는 우주는 (일반 은총으로) 창조의 중재자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회복이 되는 것이다.
By rooting this doctrine in the divine decree of predestination he was able to construct a system whereby God's plan for His creation is realized along a double track: the elect are brought to salvation by Christ as Mediator of redemption (particular grace) and the cosmos with all its potential for culture is redeemed by Christ as Mediator of creation (common grace).

이러한 개념은 문화와 세상에 대하여 필연적으로 낙관적 관점으로 귀결 될 수밖에 없다.
Such a conception had to lead to an essentially optimistic view of culture and the world.

카이퍼 자신이 죄와 그것으로 인한 인류와 우주의 무서운 결과들에 대한 시야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아니다.
Not that Kuyper himself lost sight of sin and its awful consequences for the human race and the cosmos.

그는 반정립과 이에 따른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의 근본적 차이를 굳게 믿고 있었다.
He deeply believed in the antithesis and thus in the fundamental difference between common and particular grace.

그러나 그의 제자들에 대하여도 똑같이 말 할 수는 없다.
The same cannot be said of his disciples, however.

만약에 일부가 그의 일반 은총이 특별 은총이나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위협이 될 수 있음으로 인하여 문제를 제기했다면, 다른 많은 이들은 그것이 기독교인들을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 시키는 너무 경직된 관점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서 이를 기뻐하기만 하였던 것이다.
If some had problems with his theory of common grace because they saw in it a threat to particular or saving grace, many others were only to happy with it because it offered an escape from what they considered a too rigid view of the Christian's separation from the world.

이렇게 함으로서 일반 은총은 세속에 대하여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Thus common grace opened the door to worldliness.

신칼빈주의는 오래된, 전통적 칼빈주의와 다른가?
Is Neo-Calvinism different from the old, classic Calvinism?

여러 방면에서 그렇다.
Yes, in many ways.

이러한 주제에 대하여 완전하게 연구를 한 화란의 위대한 학자인 W. Aalders는 카이퍼와 신칼빈주의 전체 운동에 대하여 "거대한 탈선"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W. Aalders, a great scholar in the Netherlands who has studied this issue thoroughly does not hesitate to refer to Kuyper and the whole Neo-Calvinist movement as De Grote Ontsporing, The Great Derailment.

그는 카이퍼가 문화와 사회 참여에 대하여 편협되게 강조함으로 인하여 소위 그가 말하는 은혜 교리의 외형화- 특히 칭의와 거듭남에서-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고 보고있다.
In his view, Kuyper with his lopsided emphasis on culture and social involvement has contributed greatly to what he calls the externalization of the doctrines of grace, especially justification and regeneration.

그는 말하기를, 신칼빈주의 계통에서는 칭의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루터나 칼빈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았던 모두에게서 하였던 경험을 더 이상 할 수 없었으며, 이를 기독교 철학이 되게 끔 하였다는 것이다.
In Neo-Calvinistic circles, he says, justification is not denied, but no longer experienced as it was by Luther, Calvin and all who live by God's Word rather than by human, be it Christian philosophy.

살아있는 말씀이 성령과 연합되면서 죄인을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의 영적인 실체로 인도하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칭의에 대하여 신칼빈주의자들은 어떻게 알고있단 말인가?
What do NeoCalvinists still know of justification as an inner occurrence wherein the living Word in union with the Spirit introduces a sinner into the spiritual reality of Christ and His Realm?

사색적이고 추상적이며 철학적인 사고는 말씀의 주권적이고 영적인 내면의 역사를 제거하며 그것을 머리만의 지적인 개념으로 바꾸어 버린다.
Speculative, abstract, philosophical thinking has eliminated the sovereign, spiritual, inward working of the Word, turning it into a cerebral, intellectual concept.
천천히 성장하는 씨앗으로서의 거듭남의 추상적이고 유기체적인 개념은 말씀과 성령에 의한 거듭남과 칭의를 대신하게 되었다.
An abstract, organic idea of regeneration as a slowly maturing seed has taken the place of regeneration and justification by Word and Spirit.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왕 되심에 대한 카이퍼의 열심은 영적인 가치에 대한 세속화의 과정을 가속시키게 된 것이다.
Kuyper's zeal for the kingship of Christ in the world had to lead to an acceleration of the process of the secularization of spiritual values.

점차 증가 되는 세상과의 접촉과 세상의 영에 대한 노출로 인하여, 개혁주의 신앙은 점점 더 외형화되거나 손상되어가게된 것이다.
Through ever-increasing contact with the world and exposure to spirit of the world, the Reformed faith became more and more externalized or hollowed out.

카이퍼와 가장 가까웠던 친구들 가운데 일부는 개혁주의 계통에서 점증하는 이와같은 경향으로 인하여 불안해하였다.
Some of Kuyper's closest friends were alarmed by this growing trend in Reformed circles.

신칼빈주의자인 J. C. Aalders는 1916년 성직자 회의에서 자신의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우리 개혁주의자들은 세상의 문화와 점진적으로 접촉을 하게되면서 인본주의에 의한 영향으로 인하여 커다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J.C. Aalders, himself a Neo-Calvinist warned his colleagues at a ministers' conference in 1916 in these words: Our Reformed people, having gradually come into contact with the world of culture are in great danger of being influenced by humanism.

신비주의나 재세례주의를 극복하였던 것과 같은 정도로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들의 이 땅에서의 소명을 인식하여야한다.
To the degree that mysticism and anabaptism have been overcome, God's people have recognized their earthly calling.

그러나 우리는 시대의 정신에 의하여 오염될 위험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But now we face the danger of contamination by the spirit of the age.

우리들이 고백하고 실천하는 일반 은총의 교리는, 이 세상과 동일시되는 위험과 동시에 이 세상에 열려있는 것이다.
The doctrine of common grace, confessed and put into practice by our people, opens with the world at the same time the danger of conformity to the world.

우리는 영적인 양식에 있어서의 특정한 불균형에서 탈피하지는 않는다.
We have not escaped a certain imbalance in our spiritual food.

개인의 마음과 영혼의 필요들에 대하여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Not enough attention is given to the needs of the individual heart and soul.

외적인 순종은 구원에 충분하지는 않다.
Outward obedience is not sufficient to salvation.

약 10년정도 전에, 헤르만 바빙크는 Ralph와 Ebenezer Erskine의 설교들을 화란에로 번역을 하면서 서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여기에는 우리들 가운데 많이 부족한 중요한 요소들이 있다.
About a decade earlier, H. Bavinck had written in an introduction to a Dutch translation of sermons by Ralph and Ebenezer Erskine: Here we have an important element which is largely lacking among us.

우리는 이러한 영적인 영혼의 지식을 놓치고 있다.
We miss this spiritual soul-knowledge.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은혜, 범죄와 용서, 거듭남과 회심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It seems we no longer know what sin and grace, guilt and forgiveness, regeneration and conversion are.

우리는 이것을 이론으로는 알고 있지만 이것을 더 이상 삶의 두려운 실체로서는 모르는 것 같다.
We know these things in theory, but we no longer know them in the awful reality of life.

바빙크는 자신의 생애 끝 무렵에 신칼빈주의 운동의 특정한 면들에 대하여 매우 환멸을 느끼게 되었는데 이는 (신칼빈주의의) 상당한 부분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세속적이고, 피상적이며, 교만한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있다.
It is well-known that Bavinck became very disillusioned with certain aspects of the NeoCalvinist movement towards the end of his life, because so much of it seemed to result, be it ever so unintentionally, in worldliness, superficiality and pride.

신칼빈주의가 궁극적으로 인도하는 것 혹은 최소한 공헌하는 것은, 카이퍼가 그렇게 많이 세운 (화란)개혁주의 교회들과, 적게는 NACRC의 자매 교회 가운데서 볼 수 있는 배교들이다.
What Neo-Calvinism has ultimately led to or at least contributed to, can be seen in the apostasy taking place at present in the very churches Kuyper did so much to establish, the Gereformeerde Kerken and to a lesser extent in their sister churches in North America, the Christian Reformed Church.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해주시고, 우리를 사도들에 의하여 성도들에게 한번 전하여지고, 개혁주의자들과 청교도 계승자들에 의하여 다시 발견되고 제시된, 신앙을 지키기를 바랍니다.
May God help us avoid making the same mistakes and may He preserve us in the faith once delivered to the saints by the apostles and rediscovered and set forth by the Reformers and their successors the Puritans.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칼빈주의가 아니고 옛 칼빈주의나 참된 개혁주의 신앙인데 이는 이것이 성경적이며, 고백적이며, 경험한바 되었기 때문이다.
What we need is not Neo but Old Calvinism or the true Reformed Faith because it is Scriptural, confessional and experiential.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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