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미들턴 2015. 9. 12. 10:10



리처드 미들턴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행위 언약과  E. Fisher의 “the marrow of modern divinity"


                                                                           by 김원호(dent4834@hanmail.net)


한국의 장로교회의 신학은 대부분 박형용박사나 박윤선박사의 영향을 기반으로 형성되어있기에 이들의 모교격인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의 메이첸을 비롯한 보수적인 신학자들의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아 형성되었었다.


메이첸과 마찬가지로 한국 장로교회의 교인들 대부분은 종교개혁 신앙고백을 하는 보수적인 신앙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근래의 해외 유학파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고있는 새로운 신학의 세계는 전통적 보수 신학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주로 화란개혁주의의 영향을 받은 신학교나 출판계를 중심으로한 새로운 신학과 신앙서적들은 전통적 보수주의에 길들여저있는 교인들에게 많은 혼란을 가져다 줄 수밖에 없다.


이제는 보수적인 전통적 개혁주의자가 소수로 전락되고있는 상황에서 신칼빈주의라고 불리우는 화란 개혁주의가 어떠한 특징들이 있는 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전통적 보수주의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신학을 하였다면 화란개혁주의는 성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구원론 중심의 신학에서 신론 중심의 신학으로 이동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은 언약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 개혁주의와 화란 개혁주의의 가장 큰 차이는 언약에 대한 해석에서 나타난다.


언약이 어떻게 해석 되어지느냐에 따라서 성경 전체의 구원의 구도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한가지 예로서 클라인(Meredith G. Kline)의 리퍼블리케이션 교리(Republication Doctrine)는 개혁주의 양 진영의 언약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인하여 모세 언약에 대한 서로의 입장의 차이를 드러내는 기폭제가 되고 있다.


클라인(Meredith G. Kline)의 “Republication Doctrine”에서는 아담 언약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순종을 요구하신 “행위 언약”으로 보고있으며, 이러한 행위 언약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언약, 즉 율법을 통하여 재연(republication)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Republicatin은 율법의 육적인 면 (earthly aspect)에 대한 것이고 영적인 면(spiritual aspect)에서는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은혜의 측면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순종에는 축복을, 불순종에는 저주를 말하는 율법의 육적인 측면에서의 행위 언약에 대한 관점은 종교 개혁 신앙고백과 더불어 전통적 개혁주의 안에서 별다른 문제 없이 수용되었던 관점이지만 최근의 개혁주의 안에서는 오히려 강력한 반발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관점이 되고 버렸다.


이러한 반발의 주된 요인 가운데 하나는 전통적 개혁주의와 화란 개혁주의의 혼합으로 인하여  언약에 대한 해석에 많은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Meredith G. Kline의 “Republication Doctrine”이 왜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Meredith G. Kline의 “Republication Doctrine”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아담 언약, 즉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요구하셨던 명령이 순종을 요구하는 행위 언약이라는 것이다


아담에게 주어진 에덴에서의 생명은 순종을 조건으로하는 것이었으며 불순종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이미 100년이 넘었지만)에는 화란 개혁주의를 중심으로, 언약은 오직 은혜 언약만 있을 뿐이고 행위 언약에 대한 주장은 언약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유래된 잘못된 개념이라는 것이 보편화되고 있다.


두 번째로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행위 언약이 모세 언약(율법), 즉 시내산 언약에서도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모세 언약으로서의 율법이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행위 언약의 반복이라는 것이 Meredith G. Kline의 “Republication Doctrine”의 주요 개념이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조건으로 분명한 순종을 요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도 이러한 구원을 얻고자 율법을 지켰다는 것이다.


(리퍼블리케이션이라는 명칭에 대한 주요 혼란의 핵심은, 아담은 이미 에덴이라는 생명 안에 있으면서 이를 “유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지만 아담의 후손인 이스라엘은 “이미 죽은 상태”이었고 그들에게 주어진 광야와 가나안 땅은 구원의 상징일 뿐 아직 생명에 이르지 못하였기에 구원의 성취가 요구되는 것이다. 하지만 새관점을 비롯하여 미들턴과 같은 신칼빈주의에서는 출애굽한 상태를 생명에 이른 상태로 보고서 아담과 같이 이러한 생명의 상태를 유지하고자 율법을 지켰다는 것이다. 리퍼블리케이션이라는 관점은 아담과 이스라엘이 처한 상태가 다르기에 올바른 표현이라고 할 수 없지만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언약이 구원을 위한 행위 언약이라는 차원에서 리퍼블리케이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생기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지켰던 것이 (흔히 율법주의로 이해되는) “구원의 의를 이루기 위한 것”이냐 아니면 (흔히 언약적 율법주의로 이해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의 안에 머무르기 위한 것”이냐에 대한 논쟁이다.


전자는 유대인들이 아직 시작되지 않은 구원을 얻기 위하여 율법을 지킨다는 것(율법주의)이고, 후자는 이미 출애굽을 통하여 시작된 구원 안에 머무르기 위하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율법(언약적 율법주의)을 지킨다는 것이다.


이들의 특징을 간단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괄호안은 전통적 개혁주의의 관점에서 기술한 것이다.)


율법을 은혜 언약, 즉  “하나님의 구원의 의 안에 머무르기 위한 것”으로 해석하는 부류의 특징적 주장들은 다음과 같다.


• 구원의 시작을 출애굽에 두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구원이 하나님의 의, 즉 케제만이 말하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 the faithfulness of God”을 근거로하여 출애굽을 통하여 이 땅에서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 아담의 죄는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이미 해결된 것으로 간주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으로 해석하고 있다.)


• 율법은 새 언약에 의하여 복음으로 대체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의 언약 백성으로 머물기 위하여 감사함으로 율법을 지켰듯이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방인에게까지 확대된 구원의 은혜에 머물기 위하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며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 율법은 언약적 율법주의, 혹은 신율주의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톰 라이트등이 역사적 예수 탐구를 통하여 제2성전기의 유대주의 문서를 분석해 본 결과 그동안 유대교인들이 지켰던 율법은 율법주의가 아닌 언약 백성으로 머물기 위한 언약적 율법주의였다는 것이다.)


• 구원의 근거는 하나님의 의(faithfulness of God)이다.


(구원의 근거를 그리스도로 보는 전통적 관점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최후의 만찬을 통하여- 톰 라이트의 주장-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삶의 본을 보여주신 분이다. 행위 언약에서 요구되는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순종 개념이 사라졌기에 구원의 근거가 예수님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케제만의 하나님의 의를 구원의 근거로 삼고 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희생적 삶을 의미한다.


(구원의 근거가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으로 대체되었기에 십자가에는 더 이상 구원을 이루기 위한 속죄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 예수 그리스도는 따름의 대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분이 아니시고 단지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스라엘의 그릇된 행동을 고쳐주시기 위하여 삶의 본을 보여주신 분으로 해석되기에 행위 언약에서 요구되는 순종의 개념이 적용될 수가 없다.)


•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가 아니라서 종말론적 윤리를 실행해 나아갈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이 있다.


(톰 라이트의 경우는 인간이 반복적 훈련을 통하여 숙련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며 바울 자신도 “사망의 몸에서 누가 자신을 건져내랴”하고 한탄하였다. 인간은 자연법에 근거한 의는 실행 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의를 실행하기에는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고 오직 내주하시는 성령에 의해서만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다.


(속죄가 믿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만물, 즉 우주와 인간 문화 모두에 적용하고 있다.)


• 그리스도는 만물의 구속을 대표하기에 우주적 교회(cosmic church)의 머리가 되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믿는 자들로 구성된 회중적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생각을 넘어서 모든 만물의 머리가 되신다고 생각한다.)


• 그리스도인은 일상에서의 문화 활동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완성을 추구한다.


(전통적 개혁주의의 그리스도인이 전도를 통하여 대위임령(마28:19-20)을 실행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문화를 포함하여 일상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문화물의 천국 보존을 위한 문화 변혁cultural transformation을 실행하여나아간다.


• 모든 만물이 하나님 나라의 영역으로 선포되었다.


(오직 교회만이 하나님 나라라고 여기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모든 피조 세계를 하나님 나라로 보고 있다.)



• 그리스도인의 역활은 세상과 문화를 기독교화하는 것이다.


(확장된 교회 개념으로 인하여 이 세상과 문화를 기독교화 하자는christianizing of world world, christianizing of culture 모토로, 그리스도인의 역할이 전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를 교회로 모음으로서 교회를 교회답게 하자는 전통적 개념과는 대조를 이룬다.)


• 교회는 세계를 위하여 흩어지는 교회, 즉 미셔널 교회(missional church)를 구현한다.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하기에 세상 속에 들어가는 흩어지는 교회 missional church 개념을 가지고 있다.)


•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과 사람의 공동의 창조 사역으로 확장되어 가며 인간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의 일꾼이다.


(이러한 관점은 주로 카이퍼로부터 유래된 신칼빈주의, 톰 라이트의 새관점,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머징 미셔널 처치에서 수용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마음의 소원을 두시고 하나님 자신의 일을 이루어나가신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의 일꾼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 받은 자녀인 것이다.)


모세 율법의 속성과 역할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인하여 위에 열거한 바와 같은 대조적인 유형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는 교단과 개인에 따라서 어느 정도는 혼합되어있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언약에 대한 단일언약론과 같은 해석은 아브라함 카이퍼 이전의 전통적 칼빈주의에서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았던 현상이었으며 아브라함 카이퍼로부터 시작된 신칼빈주의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수용하는 정도에 따라 위에 열거한 특징들이 혼합되는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아브라함 카이퍼가 생각한 일반은총과 영역주권, 유기체적 교회론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카이퍼의 생각의 뿌리를 분명하게 제시해주는 자료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2015.5)에 카이퍼의 사상의 뿌리가 카톨릭 철학자인 프란츠 폰 바더(Franz Xaver von Baader 1765-1841)에 있었음을 밝혀주는 책이 출간되어 눈길을 끌고 있다.


글렌 프리즌(J. Glenn Friesen)은 자신의 저서 신칼빈주의와 기독교 신지학(Neo-Calvinism and Christian Theosophy: Franz von Baader, Abraham Kuyper, Herman Dooyeweerd)을 통하여 아브라함 카이퍼의 신칼빈주의가 칼빈이나 종교 개혁에 근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카톨릭 철학자인 프란츠 폰 바더(Franz Xaver von Baader)의 신지학( theosophy)에 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신칼빈주의의 핵심 사상은 칼빈이나 종교 개혁의 자료들로 부터 나온 것이 아니며, 그것들의 근원은 프란츠 폰 바더의 기독교 신지학에 있는 것이다"

"The key ideas of Abraham Kuyper’s Neo-Calvinism do not come from Calvin or from Reformed sources. Their source is the Christian theosophy of Franz von Baader (1765-1841)”


카톨릭에 기원을 가지고 있는신칼빈주의의  펠라기우스적 특성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개인적 구원보다는 성례를 통하여 외적인 언약의 틀 안에  머물러야하는 카톨릭의 구원관이 다시 개신교 안에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단일 언약론과 언약적 율법주의, 그리고 톰 라이트의 새관점으로 특징지어지는 페드럴 비전(Federal Vision)에서는 카톨릭과 마찬가지로 유아 세례를 포함하여 육적인 세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보고 있다.


구원을 완성하기 위하여 언약 안에 머물러야 하는 것과  종말론적 윤리를 실천하는 특성들은 톰 라이트의 새관점 위에 쓰여진 리처드 미들턴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이단 논쟁에 휘말려 있는 페드럴 비전의 단일 언약론과 언약적 율법주의는 리처드 미들턴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요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리처드 미들턴의 “새 하늘과 새 땅"은 어찌보면 알버트 월터스(Albert Wolters)의 “창조 타락 구속(Creation regained)"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1985년 초판이 발행되었던 알버트 월터스(Albert Wolters)의 “창조 타락 구속(Creation regained)"은 미셔널 처치 운동과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하는 마이클 고힌(Michael Goheen)과 함께 톰 라이트의 “바울에 관한 새관점" 을 더하여 2005년에 개정판이  발간되었다.


신칼빈주의 기독교 세계관의 대표격인 알버트 월터스(Albert Wolters)의 “창조 타락 구속(Creation regained)"이 톰 라이트의 “바울에 관한 새관점"과 자연스럽게 접목될 수 있었던 것도 신칼빈주의와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동일하게 은혜언약만을 주장하는 단일언약론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단일 언약론을 취하고 있는 리처드 미들턴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 리처드 미들턴이 취하고 있는 단일 언약론의 특성들이 나타나는 몇가지를 살펴보고자한다.


■ 미들턴은 다음과 같이 출애굽을 구원의 시작으로 봄으로서 모세 언약을 톰 라이트와 같이 출애굽의 구원 안에 머무르기 위한 은혜의 언약으로 해석하고 있다.


• 애굽의 속박에서 탈출한 일과 그 후에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일이 구원의 언어 사용의 밑바탕에 깔려있다.(116쪽)


• 출애굽은 하나님의 핵심적인 구원 행위이며 이 행위는 한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만들어 낸다.


• 출애굽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현재의 상황에서 한 역사적 공동체의 사회 정치적 구원을 이룬다.


• 출애굽은 구원에 대한 어떤 영적인 해석에도 반대하며, 구원을 이 세상의 삶에 굳건히 뿌리 내리게 한다.(이상 117쪽)


• 출애굽이 구원의 시작인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속박 속에서 신음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음에서 볼 수 있다.

백성의 신음은 하나님의 개입의 동기가 된다. 이스라엘 백성의 구조 요청에 의하여  하나님이 행하신 것이다.(118쪽)


• 미들턴은 가나안 땅을 애굽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에게 주는 구원의 선물로 묘사하고있다. (126쪽)


• 출애굽은 이스라엘 구원 과정의 시작일 뿐이다.(128쪽)


•이스라엘민족의 출애굽은 구약에서 근본적인 구원사건이다.(139쪽)



• 미들턴은 롬8:19-23을 애굽의 속박으로 부터의 구원이라는 출애굽 모형을 활용하여 구원을 해방, 혹은 종살이에서 풀려나는 것으로 해석하며, 그 수혜자를 “피조물"과 “하나님의 자녀"로 본다.(237쪽)


미들턴의 이러한 관점에 대하여 Sherif Gendy는


“비록 출애굽 사건이 하나님의 전체적인 구원 사역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그림자라는 것에 대하여 많은 부분을 공유하더라도, 출애굽 구출의 핵심적인 성격은 구원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Though the exodus event shares many components with the overall work of God’s salvation and is a shadow of Christ’s redemption, one has to keep in mind that the core nature of the exodus deliverance is not salvific.”



■ 미들턴은 구원을 하나님의 개별적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언약에 의한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의 구원이라고 보고 있으며 역사적 이스라엘의 행동 자체가 선행하는 구원의 완성을 위한 적절한 반응으로서의 순종의 행위로 본다.

즉 구원을 이미 토라 이전에 공동체적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행위로 보고 있는 것이다.


• 토라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의 선행하는 구원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다(128쪽)


• 순종은 출애굽에서 시작된 구원을 완성한다. 출애굽은 이스라엘 구원 과정의 시작일 뿐이다.(128쪽)


• 출애굽은 순종의 근거가 된다.(129쪽)


■ 미들턴은 율법을 구원을 이루기 위한 은혜의 복음으로 해석하며 축복과 저주를 자연 질서와 연계시켜 추상화 시키고 있다.


• 토라에 대한 순종은 궁극적으로 땅에서의 평안과 번영을 가져온다?(142쪽)


• 율법과 예언서는 출애굽에 대한 강조의 후속 조치이며 구원의 총체적 성격을 명확히 밝히는 구약의 두 가지 일차적 차원이다.


•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은 순종과 불순종에 대한 언약적 복과 저주를 열거한다. 언약적 복과 저주의 목록은 도덕 질서와 우주 질서의 관계를 명확히 입증한다.(142쪽)


■ 미들턴은 톰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모세 율법을 제2성전 유대교에서의 언약적 율법주의 개념으로 해석하고있으며 그리스도를 민족적 이스라엘의 완성을 위하여 오신 분으로 묘사하고있다.


• 제2성전기에는 메시아적 소망, 즉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가운데 진정으로 민족을 이끌고, 이를 통해 지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울 사람을 그분이 세우리라는 기대의 기초가 된다.(156쪽)


■ 미들턴은 톰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구원의 근거를 언약에 두고 있다.


미들턴은 인간이 고통 가운데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응답하신다고 말한다. (121쪽)

출애굽 사건을 부르짖음에 대한 구원의 사건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구원이 시작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단지 역사적 이스라엘을 완성하시기 위한 분으로 묘사되고 있을 뿐이다.

미들턴의 말하는 구원의 완성은 출애굽으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그리스도를 구속주라고 말하는 것은 아담의 죄를 해결하신 분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회복하신 분으로서의 구속주를 말한다.


■ 미들턴이 말하는 예수는 초라할 뿐이다. 그의 책 어디에도 아담의 죄를 사하는 속죄의 의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포함되어있지 않다.

톰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두번째 아담으로서의 예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 미들턴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고통의 삶을 살아감으로서 종말론적 윤리를 실천하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 예수님의 삶의 방식이 제2성전기의 성도의 종말론적 기대를 근거로하고있으며 자신의 삶의 형태를 이 원칙에 근거를 두고있기에 만약 그를 따르는 이들이 그의 고통을 따른다면 그들은 그의 나라를 공유하게 될 것이다.

Not only is it clear that Jesus was steeped in Second Temple expectation of the eschatological rule of the saints, but also he grounds this rule in his own life pattern: if his followers share in his suffering, they will share in his kingdom (Luke 22: 28– 29).(p146)


■ 미들턴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희생적 삶을 의미한다. 이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희생적 삶을 본받는 따름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 미들턴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의와 복을 회복하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한다.(100쪽)


미들턴은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이시기 전에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의 지위와 역할을 회복시키는 이스라엘의 구주(11쪽)시라고 말함으로서 구원을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관점으로 이해하고있다.


이와는 달리 전통적 개혁주의에서의 예수님은 역사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믿는 자들로 구성된 참 이스라엘인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 미들턴은 그리스도는 믿는 자 뿐만이 아니라 만물의 화목 제물이 되셨고 구속될 만물에는 문화(redemption of human culture)도 포함되어있다고 말한다.(36쪽)

이러한 개념은 대부분이  화란개혁주의의 산물로서 현대 신학자들 대다수가 수용하고 있는 개념이다.


■ 미들턴이 말하는 교회는 회중 중심이 아닌 만물의 구속 위에 세워진 우주적 교회(cosmic church)다.(71쪽)


• 피조물을 마땅히 하나님께 예배 드릴 존재물로 보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인하여 모든 피조계가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하나님과 화목케 된 피조물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면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교회는 모든 피조계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미들턴의 우주적 교회론은 성경의 모든 언약을 순종의 행위가 요구되지 않는 은혜 언약으로 보고 있음으로 인하여 생길 수 있는 개념이다.


■ 미들턴은 일상에서의 문화 활동을 예배의 차원으로 해석하며, 발전된 문화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보존 된다고 말한다.


이외에도 미들턴이 말하는 많은 부분들이 신칼빈주의나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많은 부분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은 성경을 해석 하는 기본 구조가 다같이 은혜 언약만을 인정하는 단일 언약을 기반으로하고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각해보아야할 중요한 점은 인간이 얼마나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인가에 대한 인식과 인간의 부패를 초래한 아담의 범죄의 심각성을 살펴보는 것이다.


분명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의 행위 언약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불순종으로 인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일은 순종이 아니면 불가능했던 것이다.


물론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이미 순종의 능력이 상실된 인간이었기에 모세 언약은 진정 인간에게 순종을 요구하기보다는 인간이 스스로 순종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착각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다.


단일 언약론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이스라엘의 유대인과 같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유형은 인간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착각이다.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지에 대한 인식이 없는 상태에서 사단의 종노릇하는 인간의 교만이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형태로 다시 싹트고 있는 것이다.


모세 언약은 영적인 면(spiritural aspect)에서는  은혜의 개념을 포함하고있다고하더라도 역사적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지상적인 면(earthly aspect)에서는 엄연히 행위 언약이라고 할 수 있다.


모세 언약에서의 영적인 은혜 개념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새롭게 형성된 영적 이스라엘에서 비로소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미들턴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출애굽을 구원의 행위로 볼 때, 출애굽 이후에 역사적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모세 언약은 출애굽에서의 구원 안에 머물기 위한 은혜 언약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이는 결과적으로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현재의 신약의 교회를 역사적 이스라엘의 연장선에 있는 유대교적 교회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된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쟁점으로 부각되는 주된 이유는 현재의 교회가 새로운 이스라엘이 아닌 역사적 이스라엘의 연장선에있으며, 카톨릭과 마찬가지로  반펠라기우스적 교리에 의한 유보적 칭의론(새관점을 비판하였던 김세윤 교수도 이제 유보적 칭의론을 주장하며 새관점의 흐름에 합류하고있다.)을 주장하고있는 것이다.


순종이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는 단일 언약론에서는 구원을 위한 순종이 요구되지 않기에 (페드럴 비전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의 의의 전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들이 요구하는 행위는 순종의 개념이 아니라 언약 안에 머무르는 행위의 개념이며 구약에서는 율법이 기준이 되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말씀과 모범적 행위가 기준이 된다.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더 이상 구원을 위한 속죄의 희생이 아닌 삶의 본을 보여주는 정치적 행위인 것이다.


미들턴이 말하는 문화 명령은 종말론적 윤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희생적 삶을 본받아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키는 창조적 사역에 동참함을 말하고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행위 언약에 대한 부정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십자가의 의미를 변질 시킬 수 밖에 없다.


아담 언약과 모세 언약에서의 행위 언약 개념의 상실은 그리스도의 순종의 개념을 상실시키며, 페드럴 비전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는 교리를 인정한다고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의 의는 전가되지않는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순종은 아담의 불순종과는 관계없는 것이되고 두번째 아담으로서의 예수님은 아담의 불순종의 문제가 아닌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성육신하신 분이 되는 것이다.


신칼빈주의와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이머징 미셔널 처치가 공통적으로 취하고있는 단일 언약론에 대한 경계가 증가되면서 Meredith G. Kline의 리퍼블리케이션 교리(Republication Doctrine)이 재조명을 받고있다.


17세기 자료로서  Edward Fisher의 “The Marrow of Modern Divinity”에서도 이러한 리퍼블리케이션 교리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Edward Fisher는 “The Marrow of Modern Divinity”에서 아담의 행위 언약이 모세의 십계명에서도 반복되고있음을 예리한 통찰력으로 정리를 해주고있다.


다음은 Edward Fisher의 “The Marrow of Modern Divinity”(p56-58)을 번역한 것으로서  리퍼블리케이션 교리뿐만이 아니라 아담의 범죄와 인간의 타락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볼 수 있는 부분이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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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6-58)


Nom: Nomista- 율법주의자 (legalist)

Evangelista: 율법과 복음을 성경적으로 이해하는 자


CHAPTER I, SECTION III


타락으로 인한 인류의 죄악과 비극

The sinfulness and misery of mankind by the fall.


Nom.


그렇다면 아담의 죄와 형벌이 그의 모든 후손에게 전가 되었다는 것입니까?

And was Adam's sin and punishment imputed unto his whole offspring?



Evan.


예 그렇습니다, (롬5:12),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들어왔고,이것으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혹은, "그 안에서, 즉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Yea, indeed; for says the apostle, (Rom 5:12), "Death passed upon all men, for that all have sinned"; or, "in whom all have sinned," that is, in Adam.


진실은, 아담이 자신의 타락으로 인하여 우리의 본질 전체를 같은 파멸로 치닫게 했으며, 그의 후손 전체를 같은 비극의 심연으로 몰고 갔으며, 이유인 즉,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하여, 그는 자신만이 홀로 서거나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공적인 사람으로서, 자신으로 말미암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주어진 모든 행복과 모든 재주와 재능들은 그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전체 본질 위에 주어졌으며, 그와 맺은 언약은 모든 인류와 맺은 것이며, 심지어는 언약을 깨뜨림으로서 모든 것을 잃어 버린 것도 자신에게 해당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The very truth is, Adam by his fall threw down our whole nature  headlong into the same destruction, and drowned his whole offspring in the same gulf of misery, and the reason is, because, by God's appointment, he was not to stand or fall as a single person only, but as a common public person, representing all mankind to come of him: therefore, as all that happiness, all those gifts, and endowments, which were bestowed upon him, were not bestowed upon him alone, but also upon the whole nature of man, and as that covenant which was made with him, was made with the whole of mankind; even so he by breaking covenant lost all, as well for us as for himself.


그가 자신과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받은 것과 같이 그는 자신과 우리 모두에게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As he received all for himself and us, so he lost all both for himself and us.


Nom.


선생님, 그렇다면 언약은 아담이 파기한 것 같은데 모든 인류가 비극적인 상태가 되어야 하나요?

Then, sir, it seemeth by Adam's breach of covenant, all mankind were brought into a miserable condition?


Evan.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모든 인류는 두 가지 손실을 입었는데 첫 번째는, 모든 처음의 선이 박탈 당한 것이며, 두 번째는 습관적이고 자연스럽게 모든 종류의 악으로 향하는 경향이다.

All mankind by the fall of Adam received a twofold damage: First, A deprivation of all original goodness. Secondly, An habitual natural proneness to all kind of wickedness.


그들이 창조된 하나님의 형상이 즉시 파괴됨으로서, 지혜, 의, 그리고 참된 선이 무지, 불결, 거짓, 그리고 불의로 대체되었다.

For the image of God, after which they were created, was forthwith blotted out; and in place of wisdom, righteousness, and true holiness, came blindness, uncleanness, falsehood, and injustice.


사실은 바로, 우리의 본성 자체가 그로 인하여 타락하였으며, 더럽혀졌고, 변형되었으며, 부패하였으며, 오염되었으며, 약하여졌으며, 덧없어졌으며, 극히 해로우며, 악의가 가득 찼으며, 하나님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그 뿐 아니라 그를 대적하며 배반하였다.

The very truth is, our whole nature was thereby corrupted, defiled, deformed, depraved, infected, made infirm, frail, malignant, full of venom, contrary to God; yea, enemies and rebels unto him.


그러므로 루터는 말하기를, 이것이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받은 권리로서: 여기서는 우리가 감사할 수 있지만 그 밖에서는 전혀 아니다; 말하자면,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유아는 전적으로 죄, 사망, 사단, 지옥, 그리고 영원히 지속되는 저주 가운데 있다.

So that, says Luther, this is the title we have received from Adam: in this one thing we may glory, and in nothing else at all; namely, that every infant that is born into this world, is wholly in the power of sin, death, Satan, hell, and everlasting damnation.


Musculus는 말하기를, 아니 오히려 "낙원에서 인간의 죄의 소용돌이는 끝이 없으며 헤아릴 수 없습니다."

Nay, says Musculus, "The whirlpool of man's sin in paradise is bottomless and unsearchable."


Nom.


그러나 선생님, 이상한 것은 금지된 열매를 먹는 것과 같이 조그마한 범죄인 것 같은데 이것이 전 인류를 이와 같은 비극의 심연에 빠뜨려야하는가요?

But, sir, methinks it is a strange thing that so small an offence, as eating of the forbidden fruit seems to be, should plunge the whole of mankind into such a gulf of misery.


Evan.


비록 얼핏 보기에는 이것이 조그마한 범죄 같아 보이지만, 만일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이것은 커다란 범죄를 능가하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는 손상이 행하여졌는데 ; 첫째로는 그의 거룩하신 명령 안에서의  주권과 권위가 더럽혀진 것이다.

Though at first glance it seems to be a small offence, yet, if we look more wistfully upon the matter it will appear to be an exceeding great offence; for thereby intolerable injury was done unto God; as, first, His dominion and authority in his holy command was violated.


두번째로는, 그의 공의로운 위협에 있어서, 그의 의와 진리와 능력이 경멸되고있는 것이다.

Secondly, His justice, truth, and power, in his most righteous threatenings, were despised.


세번째로는, 그의 가장 순수하고 완벽한 형상이, 사람이 의와 참된 거룩 안에서 그로 인하여 창조되었는데, 철저히 손상되었다는 것이다.

Thirdly, His most pure and perfect image, wherein man was created in righteousness and true holiness, was utterly defaced.


네 번째로는, 피조물이 그에게 적극적 헌신으로 드려야 할 그분의 영광이 상실되고 빼앗겼다는 것이다.

Fourthly, His glory, which, by an active service, the creature should have brought to him, was lost and despoiled.


그 뿐만이 아니라, 아담이 어떻게 한 순간의 행동으로 모든 십계명을 깨뜨리는 범죄보다 더 큰 죄가 있을 수 있겠는가?

Nay, how could there be a greater sin committed than that, when Adam, at that one clap, broke all the ten commandments?


Nom.


그러면 그가 십계명의 모두를 어겼다는 말입니까? 선생님, 나에게 어디에 그런 것이 있는지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Did he break all the ten commandments, say you? Sir, I beseech you show me wherein.


(괄호 안의 십계명은 이해를 돕기 위하여 비교하여보라는 의미에서 역자가 추가한 것임)


Evan.


1. 그는 악마를 따랐을 때 자신이 스스로 다른 신을 선택한 것이다.

1. He chose himself another God when he followed the devil.

(1. 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있게 하지 말지니라.)


2. 그는 자기 자신의 탐욕을 우상화하여 숭배하였으며; 사도들이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자신의 탐욕을 자신의 신으로 만들었다."

2. He idolized and deified his own belly; as the apostle's phrase is, "He made his belly his God."

(2.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이는 나 곧 주 네 하나님이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니 나는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명령들을 지키는 수천의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푸느니라.)


3. 그는 그분을 믿지 않음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였다.

3. He took the name of God in vain, when he believed him not.

(3. 너는 주 네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지 말라. 이는 주가 자신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할 것임이라.)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안식과 땅을 지키지 않았다.

4. He kept not the rest and estate wherein God had set him.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네가 수고하고 네 모든 일을 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주 네 하나님의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거하는 나그네나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주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5. 그는 하늘에 계신 자신의 아버지의 명예를 손상 시켰으며; 그로 인하여 그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땅에서 그의 날이 길지 못하였다.

5. He dishonoured his Father who was in heaven; and therefore his days were not prolonged in that land which the Lord his God had given him.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주 네 하나님이 네게 주는 땅에서 네 날들이 길리라.)

6. 그는 자신 뿐만이 아니라 그의 모든 후손까지도 전부 살해하였다.

6. He massacred himself and all his posterity.

(6. 너는 살인하지 말라.)


7.그는 이브에게는 순결했지만 눈과 마음으로는 영적인 간음을 범했다.

7. From Eve he was a virgin, but in eyes and mind he committed spiritual fornication.

(7. 너는 간음하지 말라.)


8. 그는 아간과 같이, 하나님께서 간섭 받지 않도록 옆에 두신 것을 훔쳤으며; 그의 훔친 것으로 인하여 모든 이스라엘과 전 세계를 고통스럽게 하였다.

8. He stole, like Achan, that which God had set aside not to be meddled with; and this his stealth is that which troubles all Israel,the whole world.

(8. 너는 도적질하지 말라.)


9.그는 그분 앞에서 악마의 증언을 믿었을 때 하나님에 대항하는 증거를 하였다.

9. He bare witness against God, when he believed the witness of the devil before him.

(9. 너는 네 이웃을 대적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


10. 그는 암몬과 같이 악한 탐심에 욕심을 내었으며, 그로 인하여 그의 삶(삼하13장)과 그의 모든 후손이 댓가를 치루고있다.

10. He coveted an evil covetousness, like Amnon, which cost him his life, (2 Sam 13), and all his progeny.

(10. 너는 네 이웃의 집을 탐 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소유 중 아무것도 탐 내지 말라.)


자 그럼 악마가  단번에 둥지를 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Musculus를 포함하여, 우리의 경우가 그러하다는 것을 보아야 하며, 하나님의 의에 부합하는 모든 방법을 강구하여야 하며, 모든 인류에 관계되는 우리의 첫 번째 부모들의 죄를 저주하여야하며,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말한바와같이, "이스라엘아, 그것들을 멸할 지어다"하여야 할 것이다.

Now, whosoever considers what a nest of evils here were committed at one blow, must needs, with Musculus, see our case to be such, that we are compelled every way to commend the justice of God, and to condemn the sin of our first parents, saying, concerning all mankind, as the prophet Hosea does concerning Israel, "O Israel, thou hast destroyed thyself," (Hosea 3:9).


리처드 미들턴의 _새 하늘과 새 땅_에서의 행위 언약과 E.pdf


Notes [1] That is, all mankind. [2] With himself. [3] By virtue of the blessing of fruitfulness given before the fall. [4] That is, all mankind. [5] That is, earnestly. [6] That is, as the apostle's, etc. [7] That is, to justify God.

posted by Wonho Kim
:
리처드 미들턴 2015. 9. 2. 22:28



리처드 미들턴의 "새 하늘과 새 땅"과 데이비드 반드루넨의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기"


 by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리처드 미들턴은 전통적 교인들 대부분이 플라톤적 이원론 사상으로 인하여 이 세상의 문화를 외면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이는 단지 미들턴만의 주장이 아니라 (두 나라 two kingdom개념과 대립하는) 한 나라(one kingdom) 개념을 추구하는 신칼빈주의의 기독교 세계관과 톰 라이트의 새관점,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교회인 이머징 미셔널 처치 운동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고있는 단골 메뉴이다.


카이퍼로부터 시작된 신칼빈주의의 문화 변혁 운동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문화가 이 땅의 문화의 발전과 회복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주장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며 미들턴이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도 이러한 관점에서 쓰여진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전통적 개혁주의는 플라톤적 이원론 사상을 수용하지도 않고 있으며 더군다나 미들턴이나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이 땅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이 세상을 바라보는 올바른 개혁주의 관점은 "자연법과 두 나라(Natural Law and Two Kingdom)" 개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미들턴은 전통적 기독교의 플라톤적 이원론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이에 대한 반론에서 출발하여 지상적 개념의 “새 하늘과 새 땅"을 그려내고 있지만 미들턴의 이러한 잘못된 전제는 그의 책 “새 하늘과 새 땅" 전체의 페러다임이 개혁주의와는 다른 그림을 그리게한다.


미들턴의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러한 전제의 오류 외에도 신칼빈주의 기독교 세계관인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과 종교 개혁 신앙고백을 부정하는 톰 라이트의 “바울에 관한 새관점"을 접목시켜 개혁주의에서 한층 더 멀어진 지상적 개념의 "새 하늘과 새 땅"을 그려가고있다.


미들턴의 지상적 "새 하늘과 새 땅"의 특징적 주제 가운데 가장 핵심적 주제는 “ 문화명령과 문화의 구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들턴은 그리스도인의 문화 활동의 근거를 창1:28의 문화 명령에 두고 있으며 아담이 실패한 문화 명령을 그리스도의 사역 위에서 다시 시작하여야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미들턴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보존될 문화를 이루기 위한 문화 명령의 새로운 시작을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였던 문화 명령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미 충분히 충족 되었다.


창세기 1장 28절의 문화 명령(혹은 지배 명령)의 근본 목적은 이 땅에서 아담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의 구현이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의 정체성은 이 땅에 대한 지배 명령을 실행 하는 것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다는 것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실행할 의무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아담의 문화 명령에 대한 실패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손상이었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문화 명령은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검증 기간에 한정된 것이었다.


하나님의 창조 활동과 아담의 피조물에 대한 통치에는 병행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창조 활동이 제 7일에 종결되었듯이 아담의 문화 명령을 통한 검증 기간도, 타락이 없었다면, 문화 명령의 완성을 통한 안식에 들어감으로서 종결되었을 것이다.


문화명령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안식까지 주어진 기간 즉 검증기간에만 한정된 것이었다.


검증 기간에 주어진 문화 명령에는 사단에 대한 지배와 통치도 포함되어있다.


창 1:28절에서 다스림의 대상인 생물은 창 3:1절의 짐승과 같은 히브리어로서 아담에게 주어진 문화 명령의 실패는 다스려야할 사단에게 패배함으로서 실패로 귀결된다.


선악과 범죄는 다스려야할 사단에게 다스림을 받게된 역전패한 사건이었다.


문화 명령과 아담의 타락과 에덴에서의 추방은 시내산 언약과 이스라엘의 타락과 바벨론 유수를 통하여 재연된다.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한 순종은 아담에게 주어졌던 행위 언약으로서의 선악과 명령과 병행 관계에 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아담의 에덴에서의 추방과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수와 병행 관계에 있다.


6일간의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안식을 취하신 하나님께서 마찬가지로 아담에게도 문화 명령을 통한 통치 사역을 마치고 안식을 주시고자하셨지만 문화 명령의 실패로 이루지 못한 안식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심으로 안식에 들어가실 수가 있으셨다.


안식의 주인되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첫 번째 아담이 실패한 문화 명령을 다 이루시고 마지막 아담으로서 안식에 들어가셨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아담에게 주어졌던 문화 명령이 그리스도의 안식과 더불어 종결된 것이다.


리처드 미들턴은 문화 명령을 실행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대위임령보다 고차원적인 그리스도인의 사역이라고 말한다.


문화 명령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다 이루신 완전한 충족을 미완성으로 돌리는 것이며 안식의 주인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충족의 부족함과 이 부족함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가 안식의 주인이 되실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문화 명령 개념은 톰라이트의 새관점이나 신칼빈주의 신학과 마찬가지로, 오직 은혜 언약만을 주장하는 단일언약론의 배경에서 또 다른 명령이 요구되기에, 이러한 논리는 은혜를 은혜답지 못하게하며 또 하나의 행위 언약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우리에게 문화 명령을 수행하라고 촉구하는 구절이 성경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기 힘듦에도 불구하고 미들턴은 지상에서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하기 위해 일관되게 문화 명령을 수행 할 것을 강조한다.


문화 명령과 은혜와 안식에 관한 혼란의 배경에는 모든 피조물의 구속과 그로 인한 이 땅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의 나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미들턴은 구속의 범위에 피조물의 구속은 물론 문화의 구속도 포함 시키고 있다.


반드루넨은 구속은 성도 자체를 위하여 있는 것이지 문화 자체의 구속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반드루넨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물의 회복이 아닌 새로운 창조인 것을 말한다.


미들턴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이러한 여러가지 특징들은 이 땅의 모든 영역을 구속의 영역으로 보고 있음에 기인한 것이다.


전통적 개혁주의에서는 이 땅의 모든 영역이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영역과 구속 영역을 구분하고 있다.


카톨릭 철학자 폰 바더 (Von Baader)의 기독교 신지학 (Christian Theosophy)의 영향을 받아 정립된 카이퍼의 영역 주권론과 일반 은총은 이 땅의 모든 영역을 구속과 연관시킨다.


하지만 이 땅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라고 모든 영역이 구속 영역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구속의 주 이신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셨기에 구속은 교회와 연관되어야 할 것이다.


톰 라이트를 비롯한 새관점과 신칼빈주의의 이머징 미셔널 처치에서는 우주적 구속을 말하면서 우주적 교회론을 주장하지만 이러한 우주적 교회론은 종교개혁 신앙고백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종교 개혁 신앙고백에서는 일관되게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 구성된 성도 중심의 교회를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교회 바깥의 영역을 모두 사단의 영역으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근거가 되는 자연법 아래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볼 수 있는 성경법에 근거를 둔 교회와 자연법에 근거를 둔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의 두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구속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보혈이 근거가되기에 그리스도의 순종과 십자가의 보혈에 의해서만 거룩의 영역에 참여될 수 있는 것이지 신앙고백을 할 수 없는 피조계와 문화까지도 구속되는 것이 아니다.


미들턴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신앙고백을 할 수 없는 문화를 포함한 모든 피조계의 구속을 말할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십자가의 보혈에 대한 개념도 정통 개혁주의와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WSCal)교수인 데이비드 반드루넨(David VanDrunen)의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기 (Living in God's Two Kingdoms-부흥과 개혁사 역간)"는 하나님의 구속받은 자녀들이 이 세상에 대한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야하는지 리처드 미들턴과는 전혀 다른 두 나라 (Two Kingdom) 개념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의 책에 대한 다음의 서평은 반드루넨의 책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되어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출처 http://opc.org/os.html?article_id=251)


문화 전쟁은 끝났다: 서평 글

The Culture War Is Over: A Review Article


Gregory Edward Reynolds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기: 기독교와 문화에 대한 성경적 통찰, 데이비드 반드루넨 저, (부흥과 개혁사 역간)

Living in God's Two Kingdoms: A Biblical Vision for Christianity and Culture, by David VanDrunen. Wheaton, IL: Crossway, 2010, 208 pages, $16.99.




나는 1974년에 자유 예술 교육 과정을 통합하는데 있어서, 학생들을 돕기 위해 의도된 기독교 신앙의 철학이라는 제목으로 Covenant College에서 가르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질문을 접하게 되었다.

In 1974, I was first exposed to the question of Christ and culture in a course taught at Covenant College, titled Philosophy of the Christian Faith, which was intended to assist students in integrating the liberal arts curriculum.


거기서 나는 이러한 질문의 기준이 되는 표식으로 H. Richard Niebuhr의 그리스도와 문화를 읽게 되었다.

There I read H. Richard Niebuhr's landmark taxonomy of this question, Christ and Culture.[1]


이것은 최근에 동방 신비주의에 몰두해 있던 학생들에게는 성급한 소재였던 것이다,

It was heady stuff for a student who had recently been immersed in Eastern mysticism.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결을 위해서 역사와 실체화된 존재에 대한 새로운 비평은 나를 카이퍼의 저작들로 유혹하고있었다.

My new appreciation for history and embodied existence lured me toward a Kuyperian account of the solution to this question.


그 이후로, 나는 30년 이상에 걸쳐서 이러한 질문에 관하여 도서관의 많은 책들을 쌓아 놓고서 무천년적 해석부터 시작하여 카이퍼의 개념들을 다시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Since then, over the last three decades, I have accumulated quite a library of books on this question and have been revisiting the Kuyperian idea from an amillennial hermeneutic.


이것은 결과적으로 나로 하여금 두 나라(이후로는 2k)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가지게 하였는데, 이 이전에는 그것에 대한 칭호를 가지고 있지 못했었다.

This in turn has moved me to a more distinctly two kingdom (hereafter 2k) position, although I did not early on have a label for it.


나 자신의 생각의 변화와 일치하고 있는 것은 종교 개혁 이후의 교리에 대하여 새롭게 평가한 개혁주의 아카데미 안에서의 발전이라는 것이다,

Coincident with my own change in thinking was the development within the Reformed academy of a renewed appreciation for post-Reformation dogmatics.


이 모든 것 위의 핵심은, 청교도들이 아직도 흔히 이러한 난제에 대한 콘스탄티누스의 설명에 사로 잡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나라를 보이는 교회와 동일시하고있다는데에 인상적이었다.

On top of all this, I have been impressed that, despite the fact the Puritans were often still captive to a Constantinian account of this dilemma, the Westminster Confession equates the kingdom with the visible church.


"보이는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2)

"The visible church ... is the kingdom of the Lord Jesus Christ" (WCF 25.2).


두 나라 신학에 대한 반드루넨의 작품이 최근의 10년에 걸쳐서 나타난 것은 이렇게 새로워진 지적인 환경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It is from within this renewed intellectual climate that VanDrunen's work on the 2k theology has emerged over the last decade.



반드루넨은, 윤리학자로서, 10년 이상을 자연법 학문의 기초를 다져왔다.

As an ethicist, VanDrunen has been laying a foundation of natural law scholarship for more than a decade.


그의 첫 번째 진지한 탐구는 1999-2001의 그의 졸업 논문과 관련되어있다.

His first serious research was connected with his graduate school dissertation from 1999-2001.


2003년에는 발달 과정의 역사적 논술인 "자연법과 두 나라 (2010)"를 탐구하기 시작하였으며, 앞으로의 연구에 대한 기초를 놓았던 것이다.

In 2003 he began research for his seminal historical account Natural Law and the Two Kingdoms (2010),[2] laying the foundation for future studies.


"A Biblical Case for Natural Law (2006)"는 두 나라 교리에 대한 성경적 기초에 대하여 기대를 갖게 만드는 역할을 하였다.

A Biblical Case for Natural Law (2006)[3] served as an appetizer for the biblical foundation of the 2k doctrine.


2007년 후반에는 그는 자신의 계획의 건설적이고 성경 신학적인 부분에 관심을 돌리면서 "생명 윤리와 신앙생활(2009)"을 출간하게 되었으며, 서평을 하려는 현재의 책은 신앙 생활에 있어서 두 나라 교리의 실질적인 참 뜻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In late 2007 he turned his attention to the constructive, biblical-theological part of his project, resulting in the publication of Bioethics and the Christian Life (2009),[4] and the present volume under review, demonstrating the practical implications of the 2k doctrine for the Christian life.



반드루넨은 배심원들을 정면으로 대하는 변호사와 같이 자신의 주제에 접근하고있었으며, 전반에 걸쳐서 그들이 그의 주장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적대적인 상태로 법정에 나온 것을 깨닫고 있었다.

VanDrunen approaches his subject like a skilled lawyer facing a jury squarely, all the while realizing that they come to the courtroom largely hostile to his case.


이것은 그가 책의 전반에 걸쳐서 자신의 논의의 주요 견해를 반복하는 이유이다.

This is why he repeats the main tenets of his argument incessantly throughout the book.


만약 그의 초기의 책들이 문화 변혁주의자들이 고개 숙이는 것을 겨냥했다면, 이 책은 바로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이다.

If his earlier books were shots across the cultural transformationist bow, this book is a direct hit.


이 전투적 비유는 이 책의 본질에 관해서는 적절한 것이지만, 반드루넨이 논의하는 방식은 평화적이었는데, 선조가 말한 것을 예로 들면, 코르넬리스 벤틸이 좋아했던 것으로서:"방식에 있어서는 신사적이고, 진실이나 본질에 있어서는 강해야한다."

While this martial metaphor is appropriate regarding the substance of the book, in his mode of arguing VanDrunen is irenic, exemplifying the ancient saying, loved by Cornelius Van Til: "Suaviter in modo, fortiter in re" (gentle in manner, strong in deed or substance).


* * *



문화 명령과 이와 관련된 행위 언약은 두번째 아담에 의하여 충족되었다는 반드루넨의 탐구는 그리스도와 문화에 관한 논의에서 일관된 공헌을 하고있다.

VanDrunen's exploration of the cultural mandate, and the covenant of works associated with it, being fulfilled by the Second Adam makes a unique contribution to the discussion of Christ and culture.


그는 주장하기를 성경에서는 문화가 하나님에 의하여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 아담의 시민이 구속되고 열방으로부터 모이기 위하여 보존될 뿐이라고 말한다.

He insists that Scripture teaches that culture is not being redeemed by God but is rather being preserved in order for the citizens of the second Adam to be redeemed and gathered from among the nations.


이러한 새 창조의 시민들은 하나님의 구속 활동의 주제이지만 문화는 아닌 것이다.

These citizens of the new creation are the subject of God's redeeming activity, while culture is not (15).



서문에서는, 신칼빈주의에서 이머징 처치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이 문화를 회복하거나 변혁해야하는 소명을 받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잘 요약해주고있다.

The introduction gives a nice summary of the proponents of the idea that Christians are called to redeem or transform culture, from neo-Calvinists to the emerging church (16-24).


반드루넨은 변혁적 관점이 흔히 세상을 부인하는 경건주의자들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 표현된다고 말한다.

VanDrunen maintains that the transformational view is usually presented as the only alternative to a world-denying pietism (25).


특히 20세기 칼빈주의는 대부분 자연법과 두 나라 교리를 선택하는 것을 외면하는데, 이(교리)는 종교개혁 이후의 교리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Twentieth-century Calvinism in particular has largely ignored the doctrine of the natural law/2k alternative, once almost universally present in post-Reformation dogmatics.


반드루넨에 따르면, 두 나라 교리에서는 구속이 "창조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재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단정하고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반 나라는... 합법적이지 거룩한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The 2k doctrine, according to VanDrunen, posits redemption not as " 'creation regained' but 're-creation gained' "; while the "divinely ordained common kingdom ... is legitimate but not holy" (26).



가장 놀랄만한 결론은,- 이 책의 1부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First Things and Last Things," pages 33-71:John Fesko의 저술)- 반드루넨이 직접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진 않았지만, 문화 전쟁은 끝났다는 것이다.

The most eye-popping conclusion that VanDrunen comes to—he does so early in Part 1 ("First Things and Last Things," pages 33-71) of the book—is that the culture war is over, although he doesn't use these terms.


어떻게? 두번째 아담이 첫번째 아담이 실패한 것을 하심으로, 문화 명령이 충족됨으로서 자신의 백성에게 생명 나무로 표현되는 영광을 상속받게 한 것이다.

How so? Fulfilling the cultural mandate, the second Adam has done what the first Adam failed to do, thus inheriting the glory represented in the Tree of Life for his people.


그의 순종의 삶과 희생적 죽으심과 영광스러운 부활로 인하여 그는 천상의 장소에서 안식에 들어가셨는데, 이곳은 삼위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 사역을 완성하신 후에 제 7일에 들어가신 곳이다.

Through his obedient life, sacrificial death, and glorious resurrection, he has entered into the Sabbath rest in the heavenly places, which the triune God entered on the seventh day upon completing his creation (40-41).


주 예수는 첫 번째 아담이 실패한 검증을 통과하심으로서 자신의 언약 백성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광을 상속할 수 있도록 행위 언약을 충족 시키신 것이다.

The Lord Jesus passed the probation that the first Adam failed, thus fulfilling the covenant of works on behalf of his covenant people in order that they might inherit glory in the new heavens and the new earth (42-43).


아담의 후손의 실패한 통치는 나라의 왕위 상속, 즉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렸는데, 그는 이미 찬양 받으시는 왕으로 계신 곳에서 완성된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택을 위한 통치를 얻으신 분이시다.

The failed dominion of Adam's progeny awaited the appearance of the royal heir of the kingdom, Jesus Christ, who would win dominion for God's elect in his consummation glory that he already inhabits as the exalted king (44-47).


이 부분은 언약 신학에서 걸작으로서 일반인이 소화 시킬 수 있도록 잘 분석해 놓았다.

This section is a tour de force of covenant theology, nicely parsed for popular consumption.



반드루넨은 설명하기를,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의 참된 운명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한다고 말한다.

So then, in Christ, explains VanDrunen, the believer finds his true destiny.



그리스도인은 삶의 원래의 운명을 다가올 세상에서 얻게 될 것이지만, 이는 아담이 남겨 놓은 곳에서 과제를 취합으로서 그렇게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과제를 완벽하게 성취하신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에 의지하는 것이다.

Christians will attain the original destiny of life in the world-to-come, but we do so not by picking up the task where Adam left off but by resting entirely on the work of Jesus Christ, the last Adam, who accomplished the task perfectly. (50)



앞으로 사라질 현재의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과업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성취에 대한 감사의 반응에서 나온 것이다.

The Christian's task in the present world, which is passing away, is a "grateful response" (51) to the perfect accomplishment of Jesus Christ.


그러고나서 반드루넨은 두 나라 즉 하나의 영원한 나라와 다른 하나의 임시적인 나라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설득력있게 증명하기 위하여 로마서5장, 고린도전서 15장, 그리고 히브리서의 부분들을 해석하고있다.

VanDrunen then unpacks Romans 5, 1 Corinthians 15, and sections of Hebrews to convincingly prove his point that there are two kingdoms, one eternal and the other temporary (51-60).


"아담에게 주어진 처음의 문화 명령의 목적은 성취되었으며" 주 예수는 그 상을 향유하기 위하여 부활하셨다.

"The goal of Adam's original cultural commission has been achieved," and the Lord Jesus has been resurrected to enjoy the reward (53).


그는 이것을 자신 혼자만을 위하여 하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중개자로서 하신 것이다.

He has not done this for himself alone, but as the mediator of a new creation (56).


"우리가 문화 활동을 하는 것은 새로운 창조가 이미 성취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반응이지 그것(새로운 창조)의 성취를 위한 것이 아닌 것이다.

"We pursue cultural activities in response to the fact that the new creation has already been achieved, not in order to contribute to its achievement" (57).


이것은 믿음에 의한 칭의의 교리에 근거한 직접적인 반응으로서, 종교 개혁 칭의 교리는 궁극적으로 신칼빈주의나 바울에 관한 새관점, 혹은 이머징 처치의 노선을 따르는 문화에 대한 구속적 변혁주의 관점과 양립 될 수 없기 때문이다.

This has direct bearing o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faith, because a Protestant doctrine of justification is ultimately incompatible with a redemptive transformationist view of culture along the lines of neo-Calvinism, the New Perspective on Paul, or the emergent church. (58)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의 목표는 현재의 질서를 새롭게 한다거나 처음의 창조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다.

The goal of redemption in Christ is not the renovation of this present order, the restoration of the original creation (62).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 이 세상에 생명이 소생되신 것이 아니라 오늘 세상에서의 삶으로 올라가신 것이다.

"In his resurrection Christ was not resuscitated to life in this world but raised up to life in the world-to-come."


이것이 히브리서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이 세상에 대한 현재의 우리의 접근 방식이다.

It is our present access to this world that Hebrews emphasizes (59).


우리의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모든 인간 문화의 산물들이 자연 질서와 마찬가지로 붕괴될 것이다.

In the second coming of our Lord all the "products of human culture will perish along with the natural order" (64).


반드루넨은 이것이 이 세상과 오는 세상 사이에 연속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바로 지적한다.

VanDrunen is quick to point out that this does not mean that there will be no continuity between this world and the next (66).


예를 들면, 우리는 인식을 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부활하신 구세주와 같이 영광의 몸을 가질 것인데 이는 천상적인 것이며 지상적인 것과는 대립 되는 것이다.(고전15:40)

For example, we will have recognizable, but glorified bodies just like our risen Savior—that is heavenly, as opposed to earthly (1 Cor. 15:40).


더군다나 이것은 현재의 문화 활동이 선이나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이것들이 구속의 대상물들이 아니며 임시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Nor does this mean that present cultural activities have no goodness or value, only that they are not the objects of redemption and are temporary (68-69).



두 나라에 대한 해석학적이고 신학적인 기반을 놓으면서 반드루넨은 삶에 대한 함축적 의미를 : 구약과 신약의 체류자(73-128); 그리고 교회와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129-205)의 두 부분으로 전개한다.

Having laid the exegetical and theological foundation for the two kingdoms, VanDrunen proceeds to its implications for living in two parts: Old and New Testament sojourners (73-128); and Christian living in the church and the world (129-205).


후자는 교육과 소명과 정치로 나뉘어진다.

The latter is divided into education, vocation, and politics.



두 나라에 대한 일반적인 불평은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이의 대립적 관계에 대하여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A common complaint about the 2k idea is that it blunts the antithesis between the Christian and the world.


반드루넨은 “영적인 반립"과 “문화적 공유성"의 조화를 증명함으로서 이러한 불평을 잠재운다.

VanDrunen puts this complaint to rest by demonstrating the compatibility of "spiritual antithesis" and "cultural commonality."


결국, 두 나라는 두 언약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하나는 아브라함과의 구속적 언약이고, 다른 하나는 노아와의 일반적, 문화적 언약인 것이다.

In turn, the two kingdoms are founded by two covenants, one redemptive covenant with Abraham and the other common, cultural covenant with Noah (75-76).


신자들과 불신자들은 일반 나라에서의 활동을 공유하고있지만, 오직 신자들만이 참여하는 영적인 나라에서는 그들의 충성이 불신자들의 헌신과는 대립 관계에 있는 것이다.

Believers and unbelievers share the activities of the common kingdom, while only believers participate in the spiritual kingdom in which their allegiance stands in antithesis to the loyalties of unbelievers.


반정립에 대한 관심과 관계된 또 하나의 일반적인 불만은 두 나라 개념이 필연적으로 도덕률 폐기론 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Another common complaint, related to concern for the antithesis, is that the 2k idea is essentially antinomian.


반드루넨은 달리 주장한다:

VanDrunen asserts otherwise:



하나님 자신이 일반 나라를 세우셨고 통치하신다. 이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의 통치에 의하여 존재한다. 일반 나라는 어떠한 의미에서 도덕적 중립성이나 인간의 자율성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God himself established and rules the common kingdom. It exists under the Lordship of the triune God—Father, Son, and Holy Spirit. The common kingdom is not in any sense a realm of moral neutrality or human autonomy. (81)


일반 나라의 한 가운데서의 구속의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신자들의 간결한 초상은 그들을 유배자와 순례자로서의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A brief portrait of believers as citizens of the redemptive kingdom in the midst of the common kingdom focuses on their identity as exiles and sojourners (82-88).


그러고 나서 반드루넨은 이것을 모세 언약 아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특수한 입장과 비교를 한다.

VanDrunen then contrasts this with the unique situation of God's people under the Mosaic covenant (88-97).


이 언약 안에서 구속과 문화는 임시적으로 나타난다.

In this covenant, redemption and culture are temporarily merged.


그러나 문화를 구속하는 것에 대한 기술과는 달리,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즉 도래할 세상의 나라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다.

But, far from being a prescription for redeeming culture, it presents a picture of the coming of the kingdom of Jesus Christ, the kingdom of the world-to-come.


부차적인 유배는 나라가 아직 임하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하게 해준다.

The subsequent exile reminds us that the kingdom had not yet come.


그러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왔을 때에 우리는 유배가 끝났다고 생각을 다듬어야 할 것이다.

But then, when it does come in Jesus the Christ, we may be tempted to think that exile is over.


아직도 신약의 언어는 신자들이 아직까지 유배자이면서 순례자임을 분명히하고 있다.(베전1:1, 17: 2:11,)

Yet the language of the New Testament makes it clear that believers are still exiles and sojourners (1 Pet. 1:1, 17; 2:11, p. 99).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은 현 시대에 있어서 교회의 위치를 기술하고, 분명하게 두 나라를 구분하면서 각각에서 신자의 적절한 활동을 기술하고 있다.

The remainder of the book describes the situation of the church in this present age, clearly distinguishing the two kingdoms and describing the proper activity of the believer in each.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의 하나님 나라와 보이는 교회의 동일시함을 유지하면서, 반드루넨은 "교회가 현세에 있어서 그리스도에 의하여 선언되는 나라로 확인 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면서 공동체다"라고 주장한다.

In keeping with the Westminster Confession's identification of the kingdom of God with the visible church, VanDrunen asserts, "the church is the only institution or community in the present world that can be identified with the kingdom proclaimed by Christ" (101).


그는 신약 성경으로부터, 교회와 구속의 나라가 동일하다는 것과, 교회는 아브라함 언약의 형태를 따르고 있음을, 현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성취라는 복음을 열방에 전하는 과업을 예외로하고는, 계속적으로 증명하고있다.

He goes on to demonstrate from the New Testament that the church and the redemptive kingdom are identical, and that the church follows the pattern of the Abrahamic covenant, except now it is tasked with spreading the good news of the redemptive accomplishment of Jesus Christ to all nations (102-6).


이러한 점에서 반드루넨은 마태복음 5:17-21에 대하여 신정체제로서의 해석을 하고있다.

At this point VanDrunen takes on the theonomic exegesis of Matthew 5:17-21.


그는 아주 섬세하게 이러한 해석을 하면서 묘하게도 Greg Bahnsen을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그는 내가 알고 있기로는 이 문장에 대하여 신정체제적인 해석을 한 주요 인물인데,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윤리적 체계로서의 신정체제에 대하여 해석학적 급소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He does so with great finesse and yet oddly without mentioning Greg Bahnsen, who, as far as I know is the major theonomic exegete of this passage, which many believe to be the interpretive linchpin of theonomy as an ethical system (108-12).


그는 새 언약에서의 윤리의 유일함이, 천상의 나라의 일원으로서 아직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적용되지만 이 세상이나 통치 기관에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있다.

He demonstrates the uniqueness of the ethics of the new covenant as they apply to the Christian as a member of the kingdom of heaven still living in this world, and not to the world or its governments.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시민들의 공동체이며... 천상의 나라는 더 넓은 세상에서의 사회적 정치적 공동체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Consequently, "the church is the community of the citizens of the kingdom.... the kingdom of heaven is not to be found in the social-political communities of the broader world" (114).


산상 설교의 윤리는 오직 새 창조의 시민들에게만 가능한 것이며, 이것은 분명히 그들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The ethics of the Sermon on the Mount are only possible for citizens of the new creation, to whom it is clearly directed (115).


반드루넨은 구속의 나라와 일반 나라 사이에서 얼마간 집합체의 제도가 겹쳐지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VanDrunen does admit to a kind of overlap in the institution of the family between the redemptive and the common kingdoms (119, 121).


이것은 좀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 제도이다.

This is an institution about which much more discussion is needed.



특히 이 장에서 도움이 되는 것은 일반 나라와 그의 시민들과 활동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한 반드루넨의 논의이다.

Especially helpful in this chapter is VanDrunen's discussion of the Christian's attitude toward the common kingdom, its citizens and activities (123-28).


전도서의 관점은 신자로하여금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일반 문화의 축복을 즐기는데 참여하라는 것이며, 단순히 의심스러운 적대적 영역으로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The perspective of Ecclesiastes enjoins the believer to enjoy the blessings of common culture as God's gifts, not simply hostile territory of which to be suspicious.


그러나 반드루넨은 문화 활동이 신약 성서의 핵심이 아님을 주의 시킨다.

However, VanDrunen cautions that cultural activities are not the focus of the New Testament (124).


이러한 통찰은 여러가지 필연적인 결과들을 수반한다.

This insight implies several corollaries.


그러므로 우리의 믿지 않는 이웃을 우리의 대적자로 보기보다는, 우리는 문화를 정복할 것을 모색하는 문화의 전사가 되는 대신에, 우리가 문화에 참여함으로서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축복이 될 수 있기를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So, rather than viewing our unbelieving neighbors as our opponents we should seek to love and be a blessing to them in our cultural involvement, instead of being culture warriors seeking to conquer culture (124-26).


다른 한편으로, 문화에 참여한다는 것은 대립 관계를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On the other hand, cultural participation is not meant to deny the antithesis.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하며 타락한 문화 가운데 있는 우상 숭배적 경향과, 이것이 우리들이 순례자로서 다가 올 세상을 고대하는 것을 손상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So, Christians must be vigilant and beware of the idolatrous tendencies within all fallen culture, which may undermine our longing for the world to come as pilgrims (126-28).



3부에서는 두 나라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참여에 대하여 특별히 관심 있게 다룬다.

Part 3 gets down to the specifics of Christian involvement in the two kingdoms.


이 부분을 정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The order of this section is very important.


교회가 먼저 다루어지는데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The church comes first, because it is the central institution in the Christian life (131-60).


교회와 예배와 생활에 대하여 우수한 책들이 많이 있지만 반드루넨은 교회의 중요성과 중심성을 소개하면서 그리스도와 문화 논쟁에 일관되게 관여를 한다.

While there are many excellent books on the church and its worship and life, VanDrunen makes a unique contribution to the Christ and culture debate by introducing the importance and centrality of the church.


오직 교회만이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 안에 양육 되는 곳이다.

The church alone is the place where people are nurtured in the realities of the new creation in Christ.


아무도 교회 교리에 대한 하나님 중심의 해석과, 교회 윤리의 차별성과, 교회의 영적인 열매의 풍부함과 교회 영성의 순수함 이상을 (교회 밖에서는) 찾지 못할 것이다.

One will not find a more theocentric explication of the doctrine of the church, the distinctiveness of her ethics, the abundance of her spiritual fruits, and the purity of her spirituality.


그러므로 "교회를 일반 나라의 어떠한 기관이나 연합체와 동일시하는 것은 전적으로 적절치 못한 것이다"

Thus, "it is entirely inappropriate to identify the church with any institution or community of the common kingdom" (148).


교회는 새 언약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선교에 붙들려야만 한다.

The church must stick to the mission given her in the New Covenant.



마지막 장에서는 논쟁이 뜨겁게 달아오른 교육과 성직과 정치의 3가지 영역에서 두 나라 교리가 해야 할 역할의 방법들에 관하여 탐구를 하고 있다.

The final chapter (7) explores ways in which the 2k doctrine plays out in the three hotly debated arenas of education, vocation, and politics.


문화 명령과 행위 언약과 그리스도의 성취의 의미에서 문화 전쟁이 끝났다고 말하는 것은 여하튼 간에 영적 전쟁이 끝났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To say that the culture war is over in terms of the cultural mandate, the covenant of works, and the accomplishment of Christ, is not in any way to imply that spiritual warfare is over.


아니다, 사실 이 책의 지금 단락은 우리의 전쟁의 무기가 일반 나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나라에서 오는 것임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No, in fact, this section of the book is a reminder that the weapons of our warfare are not from the common kingdom, but from the spiritual.


그러므로, 반드루넨은 그리스도인이 문화 활동에 기쁘고, 사심이 없고, 순수하게 참여하도록 적절히 권한다.

So, appropriately VanDrunen enjoins Christian cultural activity to be joyful, detached, and modest (163ff.).


비록 그리스도인은 원래의 문화 명령을 수행하라고 부름을 받지는 않았지만, 문화 제도들은 하나님의 임시적인 축복으로서 신자들에 의해서 유지되고 참여되어야만 한다.

Although Christians are not called to take up the original cultural mandate, cultural institutions are God's temporary blessing and must be supported by and participated in by believers (164-65).



우리는 흔히 그리스도인이 자신들이 다양한 문화 활동에 참여하는데 있어서, 그들의 참여가 활동 자체를 독특하게 하거나 아니면 독특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는다.

We often hear Christians speak of their involvement in various cultural activities as if their participation makes the activity itself unique, or uniquely Christian.


반드루넨은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다음과 같이) 바로잡는다

VanDrunen corrects this as a mistaken notion:


문화 활동에 있어서 기준이 되는 표준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의 것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문화 활동의 우수성의 표준들은 일반적으로 신자와 불신자에게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활동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가능한 방법들은 흔하게 널려 있다.

The normative standards for cultural activities are, in general, not distinctively Christian.... The standards of excellence for cultural work are generally the same for believers and unbelievers.... And there are usually many possible ways in which Christians could pursue such activities. (168-72)


그러므로 "'변혁'이나 특히 '회복'에 관한 친숙한 주문들을 폐기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성경에는 어느 곳에서도 우리를 이러한 거대한 과업으로 부른 곳이 없다"

It would, therefore, be wise to "discard familiar mantras about 'transformation' and especially 'redemption.' Nowhere does Scripture call us to such grandiose tasks" (171).



반드루넨에 의하면, 교육은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두 나라 이론이 모든 답들이 있어야 함을 요구 하지 않는 영역이다.

Education is, according to VanDrunen, an area, like all others, where 2k theory does not claim to have all the answers.


그러나 이것(교육)은 도움이 될 만한 지침을 제시해줌으로서 과제들의 많은 면들을 명확히 하는데 도움이 된다.

But it helps to clarify many aspects of the task by suggesting helpful guidelines.


특별한 계시를 해석하는 신학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학습- 인간성, 사회 과학, 혹은 자연 과학이든 간에- 의 우선적 관심은 자연의 계시를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으로서, 이는 진리가, 노아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유지되고 통치 됨으로서, 창조물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다. (시19:1-6; 롬1:19-20; 2:14-15)

Except for theology, which interprets special revelation, the primary concern of all other disciplines—whether in the humanities, social sciences, or natural sciences—is to interpret and explain natural revelation, that is, the truth revealed in creation, as upheld and governed by God through the Noahic covenant (Ps. 19:1-6; Rom. 1:19-20; 2:14-15)....


이러한 고찰들이 제시해주고있는 것은, 성경은 모든 학술적 학문의 커다란 그림에 관하여 결정적인 것들을 말하고 있는 반면에 (신학을 제외하곤) 이러한 학문들의 세밀하고 기술적인 상세한 것들에 관하여는 거의 침묵한다는 것이다.

These considerations suggest that Scripture says crucial things about the big picture of all the academic disciplines, while it is silent about nearly all the narrower, technical details of these disciplines (except theology). (174-75)



그러므로, 부모들은 자신들의 자녀들의 교육에 관하여 우선적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공립 학교들을 포함한 일정 수의 교육 기관들 가운데 선택 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Thus, parents have primary authority over the education of their children and are free to choose among any number of educational institutions, including public schools.


그러나 그리스도는 나라의 열쇠를 교회에 맡기셨기에, 목사들과 교사들은 신학을 가르칠 우선적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But, because Christ has entrusted the keys of the kingdom to the church, pastors and teachers have the primary authority over instruction in theology.


모든 학문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이 절대 종교적으로 중립일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In every discipline the Christian must remember that "study and teaching are never religiously neutral" (179).


그러나 "불신자들이 이루어 놓은 것과 공헌들을 과도하게 제외 시킨다면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교육에 있어서는 빈곤하게 만들 것이다"

However, "we impoverish our children educationally if we unduly cut them off from the accomplishments and contributions of unbelievers" (184).


반드루넨은 소명에 대하여 숙고하면서 비슷하게 현명한 충고를 하고 있으며, 우리들로하여금 일반 문화에서 각자의 세상적인 소명을 위하여 발달된 교육을 존중하면서도, 이러한 것들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소명에 충실하여야 할 것을 경고한다.

VanDrunen applies similarly sage advice in his consideration of vocation, warning us to respect the disciplines developed for each earthly calling in common culture, while being faithful to our Christian calling in the pursuit of these (187-94).



마지막으로, "정치는 일반 나라의 문제이다"

Finally, "politics is a matter of the common kingdom" (194).


반드루넨은 정치에 관한 두 나라 관점을 명료하게 요약한다:

VanDrunen succinctly sums up the 2k perspective on politics:


그리스도인은 정치의 중요성을 부인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왜냐하면 정치는 이 세상에서 정의, 평화, 그리고 번영의 충분한 결실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정치를 천상의 구속적 나라를 안내하는 수단으로서 찬양해서도 안된다.

Christians must strive neither to deny the importance of politics—since it has great bearing on the justice, peace, and prosperity of this world—nor to exalt politics as a means of ushering in the redemptive kingdom of heaven. (194-95)


국가 정부가 제공하는 정의와 질서가 임시적이고 잠정적이기에- 불완전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그리스도인은 적절한 기대를 가지고 참여하여야 하며, 하나님의 기관으로서의 "국가의 복지를 모색"하는 제한적이지만 중요한 목표들을 도울 것을 모색하여야 한다.

Because the justice and order that civil government provides is temporary and provisional—not to mention imperfect—Christians should participate with modest expectations and seek to assist in the limited but important goals of God's institution, "seeking the welfare of the city" (Jer. 29:7, p. 199).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정책적 위치에서 윤리적 절대성을 산출하지 않는 것과 성경이 침묵하지만 자신들이 선호하는 것들을 지원하는데 주의할 필요가 있다.

Most important of all, Christians need to be careful not to make ethical absolutes out of policy positions and candidates that they favor where Scripture is silent on these things (198-203).



희망해 볼 수 있는 것은 반드루넨이 이러한 것들과 일반적 관심사의 다른 부분들을 분리하여 책을 쓰는 것이다.

One can only hope that VanDrunen will write separate books on each of these and other areas of common concern.


책 전체를 통해서 반드루넨은 그리스도와 문화에 관한 주제에 대하여 상당히 많은 다른 저자들을 도움이 되는 공정한 방법으로 상호 작용되도록 하고있다.

Throughout the book VanDrunen interacts in helpful and fair ways with numerous other writers on the subject of Christ and culture.


그러므로 주제-저자의 색인이 없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Thus, it is a shame that there is no subject-author index.


이 책은 우리들의 교회에서 어른들을 교육하는데 주된 것이 되어야 한다.

This book should become a staple in the adult education programs of our churches.


이 책은 내용을 꼭 널리 들려줄 필요가 있는 훌륭한 책이다.

It is a splendid little book whose message is in desperate need of a wide hearing.



책 전체는 게할더스 보스와 메리디스 클라인의 신학을 생각나게해준다.

The entire book is redolent of the theology of Geerhardus Vos and Meredith G. Kline.


신학적 연결과 반드루넨의 두 나라 입장을 강조하는 것은 일부의 분노를 일으킬 것이지만, 나의 그의 작품이 가치가 있다는 사려 깊은 주목을 받기를 희망한다.

While that theological connection and VanDrunen's articulate 2k position will raise the ire of some, I hope that his work will receive the thoughtful attention it deserves.


두 나라 교리에서 벗어나서 이 세상에서 교회의 역할을 정립하는 어떠한 시도나 혹은 문화에서의 그리스도인의 과업은, 우리가 부름을 받은 대사로서의 역할에 필요한 힘을 낭비시키려 할 것이다.

Any construction of the church's role in the world or the Christian's task in culture that strays far from the 2k doctrine will tend to dissipate the energies needed to be the ambassadors we have been called to be.


Endnotes


[1] H. Richard Niebuhr, Christ and Culture (New York: Harper, 1951).


[2] David VanDrunen, Natural Law and the Two Kingdoms (Grand Rapids: Eerdmans, 2010).


[3] David VanDrunen, A Biblical Case for Natural Law (Grand Rapids: Acton Institute, 2006).


[4] David VanDrunen, Bioethics and the Christian Life: A Guide to Making Ethical Decisions (Wheaton: Crossway, 2009).


Gregory E. Reynolds serves as the pastor of Amoskeag Presbyterian Church (OPC) in Manchester, New Hampshire, and is the editor of Ordained Servant. Ordained Servant Online, April 2011.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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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미들턴 2015. 7. 14. 23:25


리처드 미들톤의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Sherif Gendy의 서평


     by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리처드 미들턴이 10여년의 준비를 거쳐 최근(2014.12) 발간한  “새 하늘과 새 땅(A New Heaven and a New Earth: Reclaiming Biblical Eschatology)”은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Creation Regained)”에 이어 신칼빈주의와 새관점을 접목시킨 새로운 기독교 세계관을 보여주려는 시도를 하고있다.

이번에 새롭게 발간된 미들턴의 "새 하늘과 새 땅"은 아브라함 카이퍼로 부터 시작된 신칼빈주의가 그의 후예들을 통하여 최근에는 어떠한 방향으로 발전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최근의 신칼빈주의는 광범위한 영역에서 각기 다양한 색채를 띄우고 있지만, 이들의 공통된 주제는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들턴이 "새 하늘과 새 땅"을 통하여 말하고자하는 그리스도인의 문화 활동은 단순한 사회 참여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명령(Creation Order)”, 즉 소위 말하는 "문화 명령 (Cultural Mandate)"을 근거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자는 것이다.

미들턴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사회 문화에 대한 변혁적 참여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그 결과물들이 예수님의 재림시에 임하게 될 이 땅에서의 새로운 문화에 보존되리라는 것이며 이러한 사회변혁적 문화 활동이 그리스도인이 일상에서 드리는 진정한 예배라는 것이다.

미들턴의 이러한 주장들이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그가 근거 말씀으로 많이 인용하고있는  창1:28이 소위 말하는 "문화 명령"으로 해석되어지는 것이 올바르냐는 것이다.

미들턴에게 창 1:28은 성경을 해석하는 열쇠이며 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중심 키인 것이다.

이와같은 미들턴의 성경 해석 방법은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하는 개혁주의의 기본 원칙과는 다른  것이며, 전체를 통하여 부분을 해석하는 개혁주의의 성경  해석 방법과 반대되는 것이다.

최근에는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카이퍼의 문화 명령(물론 카이퍼는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스킬더 이후에 사용되었지만) 개념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Dr J. Glenn Friesen은 "신칼빈주의와 기독교 신지학: 프란츠 폰 바더,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도예베르트(Neo-Calvinism and Christian Theosophy: Franz von Baader, Abraham Kuyper, Herman Dooyeweerd)”을 통하여 아브라함 카이퍼의 사상의 뿌리가 카톨릭 철학자인 “프란츠 폰 바더(Franz von Baader)”의 “기독교 신지학(Christian Theosophy)”에 있음을 밝힘으로서 아브라함의 일반은총과 영역 주권 사상, 심지어는 화란 자유 대학의 설립정신의 뿌리가 카톨릭 철학사상과 접목되어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의 J. V. Fesko는 “Last Things First”를 통하여, 유형학적인 관점에서 두 번째 아담 되신 예수님의 "제사장, 선지자, 왕"로서의 역할은 첫번째 아담의 "제사장, 선지자, 왕"로서의 역할을 성취하신 것이며, 두번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첫번째 아담이 실패한 창1:28의 말씀을 다 완성하셨기에 이제 그리스도인이 하여야 할 일은 소위 말하는 문화명령이 아니라 “대위임령(마28:19-20)”이라고 말한다.

창1:28의 명령은 단순한 문화 사역을 뜻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의 왕권을 이 땅에 선포하는 왕으로서의 다스리는 권한을 가진 아담의 왕권을 표현하는 것이다.

아담이 다스려야할 대상 중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인 간교한 뱀도 포함되어있다.

통치명령의 의미를 포함한 창1:28에서 아담에게 주어진 명령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에 대한 영적인 통치를 의미하며 다스린다는 것은 이미 지배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1:28은 일종의 영적인 싸움을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는데 아담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사단을 다스리지 못하였고 그의 유혹에 넘어가서 그의 종이 되어버린 것이다.


창1:28에서 다스림의 대상 중에는 "모든 생물"이 포함되어있다.  창3:1의 들짐승도 모든 생물 가운데 한 가지이기에 다스려야 할 대상이다.

창1:28의 "생물"과 창3:1의 "짐승"은 같은 히브리어 “chay: 살아있는, 생존하는”로서 아담은 분명 왕의 자격으로 간교한 뱀을 다스리라고 창1:28에서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것이다.


다스림은 통치권을 가진 왕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으로서 왕이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아담의 왕권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순종으로 종 되었던 인류는 오직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이를 믿는 자들만이 왕권이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왕권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회복되어진 것이고 이렇게 성도의 회복된 왕권이 요한계시록에 잘 표현되어 있다.


계20:6에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왕 노릇할 성도의 모습이 나타난다.


계21:24에는 성도들이 땅의 왕으로 표현됨으로서 뱀을 다스리지 못하였던 아담의 실패로부터 회복된 성도들의 천국 입성이 나타난다.


계21:24은 성도를 왕으로 표현한 말인데도 불구하고 창1:28을 문화 명령으로 해석하는 이들은 계21:24이 문화물의 천국 입성의 근거가 되는 구절이라고 무리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창1:28을 문화 명령이라고 해석하고있는 이들은 이 왕들이 이 땅의 각 나라의 문화 정치 영역에서의 왕으로서 이 왕들이 자신들의 믿음과는 관계없이 각자 자기들의 문화를 가지고 천국에 입성한다는 무리한 해석을 함으로서, 천국 입성 후의 심판이라는 논리를 전개하는 무리수를 두기도한다.(송인규: 일반은총과 문화적 산물, 문화물의 천국 보존의 근거중에)


미들턴도 마찬가지로 창1:28을 문화 명령, 혹은 창조 명령으로 해석함으로서 천국에서 보존 될 문화를 만드는 일이 성도들이 일상적 사회 참여와 윤리의 근거가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창1:28은 이미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서 회복된 왕권을 가진 성도들에게 다시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창1:28에 대하여 또 다시 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완성된 그리스도의 사역을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의 할 일은 다만 우리가 아담 안에서 이미 실패한 사역을 그리스도께서 다 하셨다는 것을 온 만방에 선포하는 일(대위임령)인 것이다.


John Fesko등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에덴을 성전 개념으로 봄으로서 창1:28은 단순한 문화 명령이 아니라 선지자로서 말씀을 통하여 성전을 다스리고, 왕으로서 성전을 위협하는 세력을 정복하며, 제사장으로서 온 땅이 하나님 나라인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을 예배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도 왕으로서, 선지자로서, 제사장으로서 이 땅에서 아담의 역할을 재연하면서 제대로된 역할을 하였어야했는데 아담과 마찬가지로 실패한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이러한 아담과 이스라엘의 실패를 재연하시면서 완성하신 것이기에, 우리가 소위말하는 창조 사역으로서의 문화 명령을 실행한다고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을 대신하려는 것이면서 동시에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십자가 상에서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아담은 범죄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역할을 못하였다기보다는 오히려 사단, 즉 생물을 명령대로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것이 오히려 역으로 다스려야 할 대상이었던 사단에게 다스림을 당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창1:28은 단순한 문화 명령이 아니라 정복과 다스림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확장이었고, 아담이 실패한 사역을 예수님께서 완성 시키셨기에 우리는 이제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대 위임령”을 수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시기는 일부 신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문화변혁의 완성 시기가 아니라  대 위임령의 수행을 통하여 땅 끝까지 복음이 다 전파되는 때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들턴은 예수님의 다시오심을 문화 변혁을 통하여 준비하여야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창1:28의 명령이 언약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되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 언약은 언약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님에 의하여 성취되어졌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소위 말하는 "문화 명령"을  “창조 명령”의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은 개혁주의의 근간이 되는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에 대한 도전이며, 인간의 공로를 인정하는 신칼빈주의의 펠라기우스적 개념은 개혁주의의 기본 틀을 흔들 위험의 소지가 있는 것이다.


미들턴의 "새 하늘과 새 땅"의 기본 틀은 자신의 스승이었던 알버트 월터스(Albert Wolters)의 "창조 타락 구속(Creation Regained)"의 기본 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를 발전시킨 것이다.


미들턴은 월터스와 마찬가지로 지옥에 대하여는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영혼 소멸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이 땅에서의 “새 하늘과 새 땅" 개념에 상응하는 지옥의 개념을 생각할 수가 없었기 때문 인 듯하다.


또한 죽은 자의 상태를 천상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 존재하는 상태가 아닌 단순한 수면의 상태로만 해석하고있는 것은 천상의 하나님 나라에서의 존재의 연장 선에서 이어져야 할 이 땅에서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존재의 연속성을 설명하지 못한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히려 알버트 월터스가 자신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하여 기술한  "창조 타락 구속(Creation Regained)"의 2005년 개정판이 톰 라이트에게서 도움을 받은 개정이었음을 고백하면서 톰 라이트의 "하나님 나라"개념을 수용하고있듯이, 이러한 수용은 미들턴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나타나고있다.


Sherif Gendy는 최근 발간된 리처드 미들턴의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 도움이 될만한 서평을 기록하였기에 좋은 글이라고 생각되어 아래와 같이 번역하였다.


~~~~~


Sherif Gendy의 "새 하늘과 새 땅"(리처드 미들턴) 서평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A Review Article
Sherif Gendy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Reclaiming Biblical Eschatology, by J. Richard Middleton.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14, 336 pages, $26.99, paper.


이 책에서 리처드 미들턴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에 대한 새로운 표현을 하고있다.
In this book J. Richard Middleton brings in a fresh presentation to the biblical teaching about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그의 첫 번째 목적은 창조물의 구속에 관한 종말론적 예측에 대하여 논리적인 성경 신학을 그리기 위한 것이다.

His primary purpose is to sketch the coherent biblical theology of the eschatological vision of the redemption of creation.


그가 이것을 하는 방법은, 우리의 현 시대의 성경을 근거로 하고있는 전체론적인 종말론의 일부 윤리적 함의를 탐구하고, 기독교의 종말론 역사에 있어서 이 땅의 회복에 관한 성경적 전망 가운데 일어날 것을 탐구하는 것이다.

He does so by exploring some of the ethical implications of a biblically grounded holistic eschatology for our present day and investigating what happened to the biblical vision of the redemption of the earth in the history of Christian eschatology.

이 책은 12장과 부록을 포함하고 있다.
The book contains twelve chapters and an appendix.


1장에서는 이 책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으며, 최종적 운명으로서의 하늘에 대한 기독교인의 전통적인 관점의 잘못을 강조하고 있다.

Chapter 1, which serves as the introduction to the book, highlights what is wrong with the traditional Christian view of heaven as final destiny.


미들턴은, 구약은 사후에 대한 어떠한 확실한 희망을 제공해주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Middleton argues that the Old Testament does not place any substantial hope in the afterlife.


(구약은) 어느 정도는 창조를 새롭게 하거나 회복 시킬 하나님의 의도를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Rather, it presents a holistic vision of God’s intent to renew or redeem the creation.


구약의 종말론적인 본문(예, 단.12:2-3)들은 명백히 현세적이라는 것이다.

The expectation in Old Testament eschatological texts (e.g., Dan. 12:2–3) is manifestly this-worldly.


그리고 나서 미들턴은, 천상에서의 사후의 삶으로서의 내세 개념이 역사적으로 플라톤의 가르침에 기원을 두고있다고 말하면서, 기독교인 선조들이 그리스-로마 문화의 맥락에서 자신들의 신학을 강조하기 위하여 (플라톤의) 이러한 개념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Middleton then sketches the historical origins of the otherworldly idea of heavenly afterlife in the teachings of Plato to show how Christian forebears have used his ideas to articulate their theology in the context of Greco-Roman culture.

2장과 3장은 이 책의 1부에 포함되어있으며 여기에는 "창조로부터 종말까지"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Chapters 2 and 3 are grouped together under part 1 of the book, which is titled “From Creation to Eschaton.”


2장에서 미들턴은 문화를 발전시키고 이 땅의 환경을 돌봄으로서- 이 의도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단절되었지만-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담으시려는 원래의 의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Middleton focuses in chapter 2 on God’s original intent for humans to image him by developing the culture and caring for the earthly environment—an intent that was blocked by human sin.


그는 사람이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지어졌다는 믿음에 대하여 의문을 제시한다.

He questions the belief that man was created to primarily worship God.


미들턴에게 있어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하여 특별한 방법으로 예배 하는데, 이는 이 땅을 환경이 복잡한 사회 문화의 세계에 맞추어 변화되도록 서로 영향을 미치게 만드는 것이다.

For Middleton, man worships God in a distinctive way by interacting with the earth to transform the environment into a complex sociocultural world.

비록 사람이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지만, 사람은 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지어졌다는 것이다.(시편.86:9, 이사야 60:21, 롬. 11:36, 고전. 6:20; 계. 4:11)
Although man was not created primarily to worship God, he was created chiefly to glorify him (cf. Ps. 86:9; Isa. 60:21; Rom. 11:36; 1 Cor. 6:20; Rev. 4:11).


분명히 예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형태의 한 가지이다.

Certainly, worship is one form of glorifying God.


하나님의 나타난 뜻에 대한 적극적인 순종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품은 자로서  마땅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또 다른 방법인 것이다.

Active obedience to God’s revealed will is another way through which man ought to glorify God as his image bearer.

3장에서는 창세로부터 종말까지의 성경적 거대 담론의 구조를 설명하면서, (우리를 이 땅에서 벗어나게 하여 하늘로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창조물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다.
Chapter 3 presents the structure of the biblical metanarrative from creation to eschaton, which clarifies God’s purpose to redeem earthly creation (rather than take us out of earth to heaven).


여기서 미들턴은, 하늘은 결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일부가 될 수 없으며, 본래적으로 인간 구원의 최종 운명으로서의 역할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Here Middleton emphatically argues that heaven was never part of God’s purposes for humanity and has no intrinsic role as the final destiny of human salvation.


미들턴이 말하는 종말론적 회복은, 이 땅에서 인간의 문화 생활이 새롭게 되는 것이다.

For Middleton, eschatological redemption consists in the renewal of human cultural life on earth.

성경이 하늘을 믿는 자의 영원한 목적지로서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하여는 미들턴이 옳을 수도 있겠지만, 그가 이 땅에서의 문화적 삶을 변화시키는 인간의 수고가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이고, 의에 대한 종말론적 희망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이다.
While Middleton might be right that the Bible does not describe heaven as the eternal destiny of the believer, I find his emphasis on the human’s labor of transforming the cultural life on earth as the ultimate purpose of God, and the eschatological hope for the righteous, biblically ungrounded.


미들턴은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희망이 "하늘"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우리의 이땅에서의 삶을 변화시키는 기대감으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돌려버린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Middleton goes as far as to say that to name the Christian hope “heaven” diverts our attention from the expectation for the transformation of our earthly life.


그러나 성경은 새로운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올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계. 21:2, 10)

Yet, the Bible clearly speaks of new Jerusalem that will come down out of heaven (Rev. 21:2, 10).

이 하늘의 예루살렘은 "새 하늘과 새 땅", 즉 전적으로 새로운 상황의 질서의 도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베전. 3:13; 계. 21:1)

This heavenly Jerusalem ushers in the “new heavens and new earth;” a totally new order of things (2 Pet. 3:13; Rev. 21:1).


이것은 인간의 노력의 결과도 아니며, 미들턴이 말하려는 것과 같이 단순히 이 땅의 문화나 환경의 발전이 아닌 것이다.

This is not the result of human effort, nor is it simply a development of earthly culture and environment, as Middleton would like to propose.


이것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일인 것이다.( 계21:5; 고후.5:1, 17; 히.12:27)

This is the supernatural work of God in Christ who is making all things new (cf. Rev. 21:5; cf. 2 Cor. 5:1, 17; Heb. 12:27).

2부 "구약에서의 전체론적인 구원"은 4장에서 6장까지 구성되어있으며, 이 땅의 삶을 꽃피울 것에 대하여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관여하고 계심을 묘사하고있다는 것을 밝히고있다.
Part 2 “Holistic Salvation in the Old Testament” consists of chapters 4 through 6 and uncovers the Old Testament’s portrayal of God’s ongoing commitment to the flourishing of earthly life.


4장에서는 출애굽 이야기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분석하고서, 이러한 전형적인 사건이 구약과 신약에서 구원을 이해하는 하나의 형태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Chapter 4 analyzes God’s deliverance of Israel in the exodus narrative and suggests that this paradigmatic event functions as a pattern for understanding salvation in both the Old and New Testaments.


비록 출애굽 사건이 하나님의 전체적인 구원 사역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그림자라는 것에 대하여 많은 부분을 공유하더라도, 출애굽 구출의 핵심적인 성격은 구원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Though the exodus event shares many components with the overall work of God’s salvation and is a shadow of Christ’s redemption, one has to keep in mind that the core nature of the exodus deliverance is not salvific.


결국 출애굽 세대는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광야에서 죽었다.(민. 26:64-65; 32:11-13)

After all, the exodus generation died in the wilderness for disobedience (Num. 26:64–65; 32:11–13).


그러므로 출애굽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는 몇 가지 주된 차이가 있는 것이다.

Therefore, there are some major dissimilarities between the exodus and Christ’s work of redemption.


전체적인 유사성을 갖추려는데 있어서, 미들턴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완전한 구원에 필요하다는 것의 예를 만들어서 찾으려고한다.

Building upon the full analogy, Middleton seeks to make the case that a life of obedience to God is necessary to complete salvation.


그는 "구원을 완성하려는 순종은 출애굽에서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다. (87)

He states that “obedience completes the salvation begun in the exodus” (87).


이러한 가정에서 미들턴은, 신약 성경에서 순종은 구원의 결정적인 면이라고 말하면서, 그는 이것(순종)이 정의를 다시 세우며 공동체의 복지를 회복하는 것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From that premise Middleton goes on to say that in the New Testament obedience is a crucial aspect of salvation, which for him entails the reestablishment of justice and restoration of communal well-being.


이것은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 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Here Middleton is influenced by N. T. Wright’s new perspective theology which many evangelicals would find problematic.


분명히 믿는 자의 순종은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과 은혜를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Surely a believer’s obedience naturally follows his God-given faith and grace (Eph. 2:10; Titus 2:14).


그러나 이러한 순종은 자신의 구원에 공헌하는 것도 아니며 더군다나 (구원을) 완성 시킬 수도 없는 것이다.

But this obedience does not contribute to his salvation nor does not complete it (Eph. 2:8–9).



구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공로이며, 그리스도만이 다시 오실 때 완성 시키실 수 있는 것이다.

Salvation is entirely the work of Christ, and he alone will bring it to completion at his return.

5장에서는 어떻게 이스라엘의 율법과 지혜의 전통이, 심판의 예언적 말씀과 출애굽을 넘어서는 회복의 예측과 함께, 이 땅에서의 일상적인 인간의 삶에 평안과 축복을 가져오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지를 증명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살펴보고있다.
Chapter 5 examines how Israel’s laws and wisdom traditions, together with prophetic oracles of judgment and anticipations of restoration beyond exile, testify to God’s desire to bring shalom and blessing to ordinary human life on earth.


6장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는 이들에게 피할 수 없는 실제로서의 심판을 나타내는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현현의 본문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In chapter 6 Middleton addresses the Old Testament’s theophany texts that present judgment as an inescapable reality for those who resist God’s will.


이 본문에서는 심판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인간애가 꽃 피우고 인간적이지 않은 세상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원래의 의도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These texts show that God’s ultimate purpose beyond judgment is to accomplish his original intent for the flourishing of humanity and the nonhuman world.

3부, "우주의 회복에 대한 신약 성서의 전망"은 7장과 8장으로 구성되어있다.
Part 3, “The New Testament’s Vision of Cosmic Renewal,” is comprised of chapters 7 and 8.



7장에서는 회복의 희망에 대한 내적 논리와 이것이 이 땅에서 인간의 규율의 회복과 연결되는 것을 탐구하고 있으며, 이는 구약 본문의 후반부에서 시작되어 신약으로 이어진다.

Chapter 7 explores the inner logic of the hope of resurrection and its connection to the restoration of human rule of the earth, beginning with late Old Testament texts and on into the New Testament.


8장에서는 신약에서의 구원에 관한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탐색에 관하여 논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이 다  합하여 모든 것이 새롭게 됨으로서 죄와 악이 역전된다는 기대의 다양한 맥락에 이르게 된다.

The comprehensive and holistic scope of salvation in the New Testament is discussed in chapter 8 as it brings together various strands of expectation that sin and evil will be reversed through the renewal of all things.

4부 " 전체론적인 종말론에 문제되는 본문들"은 9장과 10장으로 구성되어있다.
Part 4, “Problem Texts for Holistic Eschatology,” contains chapters 9 and 10.


9장에서 미들턴은, 예수의 재림 시에 우주의 파괴나 사라짐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잘못 읽혀지고 있는 일부의 신약의 본문에 대한 오해를 고치려고 한다.(예, 마 24; 계 6:20-21; 히 12)

In chapter 9 Middleton seeks to correct the misunderstanding of some New Testament texts that are typically misread as if they teach the destruction or annihilation of the cosmos at Christ’s return (e.g., Matt. 24; Rev 6; 20–21; Heb. 12).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베드로후서 3장의 하늘과 물질의 파괴에 대하여 미들턴이 논의하는 것이다.

Worthy of note here is Middleton’s discussion on the destruction of heavens and the elements in 2 Peter 3.


그가 말하는 바는 이 본문이 마지막 날에 우주의 사라짐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He makes the case that this text does not describe the obliteration of the cosmos on the last day.


차라리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악을 깨끗하게 제거하심으로서 악마의 세력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으며, 이렇게 하심으로서 이 세상은 다시 새롭게 되고 변혁 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Rather, it depicts God’s judgment of demonic powers as he purges the world of evil so that it might be renewed and transformed.


미들턴은 이 땅과 그 위의 작품들은 세워질 것이라고 말한다. (베전 3;10)

Middleton argues that the earth and its works will be “found” (2 Pet. 3:10).


여기서의 파괴는 창조물에 대한 것이 아니고 죄에 대한 것이기에, 창조물을 깨끗하게 하고 정화 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The destruction is not of creation but of sin, thus cleansing or purifying creation.

미들턴은 모든 이들이 최종적으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멀한다.
Middleton is clear that not everyone will be finally saved.


그는 심판의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He does not deny the fact of judgment.


그러나 그는 최종 심판은 이 땅이 우주적으로 상속되지 않는 것, 즉 하나님의 창조물로부터 영원히 추방되는 것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He does, however, suggest that the final judgment is akin to cosmic disinheritance of the earth; a permanent exile from God’s creation.


그러므로 심판은 영원한 고통보다는 사람이 소멸되는 것이라고 한다.

Judgment, therefore, is an annihilation of the person rather than eternal torment.


분명한 것은, 이러한 결론이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Certainly, this conclusion does not seem to be supported from the Scriptures.


다른 곳에서는, 성경은 타락하고, 죄악되고, 범죄하고서도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 사역을 거절하는 이들에 대하여 영원한 형벌을 확실히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34:10; 마 18:8, 25:41, 46; 유7; 계 14:10-11, 19:3; 20:10)

At different places, the Bible does in fact confirm eternal punishment to those fallen, sinful, and guilty persons who rejected the perfect atoning work of Christ (cf. Isa. 34:10; Matt. 18:8; 25:41, 46; Jude 7; Rev. 14:10–11; 19:3; 20:10).

10장에서 미들턴은 "휴거" 본문을 포함하는 하늘에서의 초자연적인 운명을 약속하는 듯한 신약에서의 본문들과 죽음과 부활 사이의 잠시 동안과 중간 단계를 말하는 신약의 본문들을 다루고있다. (예, 마. 24:40–41; 25:34; 고후. 5:1–5; 데전. 4:13–18; 베전. 1:3–5; 계. 6:9–10; 21:1–2).
In chapter 10 Middleton covers the New Testament texts that seem to promise an otherworldly destiny in heaven including the “rapture” texts and those that speak of the interim or intermediate state between death and resurrection (e.g., Matt. 24:40–41; 25:34; 2 Cor. 5:1–5; 1 Thess. 4:13–18; 1 Pet. 1:3–5; Rev. 6:9–10; 21:1–2).


그가 말하는 핵심은 이러한 본문들이, 이 땅의 베일이 벗겨진 후에 따르게 될 천상에서의 준비를 묵시적인 형태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His main point is that these texts present an apocalyptic pattern of preparation in heaven followed by unveiling on earth.


미들턴은 고집스럽게 하늘이 의인들이 죽은 후에 갈 곳이라는 관점을 배제하려고한다.

Middleton insistently dismisses any view of heaven being a place to which the righteous go when they die.

미들턴은 잠시 동안(Interim)의 상태가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려고 하지만, 그는 의인들이 죽은 후에 갈 곳에 대한 어떠한 통찰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다.
While Middleton tries to make the case that an interim state is not taught in the Scripture, he offers no insight on where the righteous go when they die.


그는 사람이 자각하는 상태로 죽음에서 부활로 움직이는 곳으로서의 "영혼의 수면"의 개념이 더욱 그럴듯하다고 말한다.

He suggests that the notion of “soul sleep” where one moves subjectively from death to resurrection, with no consciousness of the intermediate state, is more plausible.


미들턴에 따르면, 이것은 십자가에서 믿는 강도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에 적용이 된다고 한다.(눅 23:39–43).

This applies, according to Middleton, to Jesus’s promise to the believing criminal on the cross (Luke 23:39–43).


이것의 예로서, 미들턴은 고린도후서 5:6-9와 빌립보서 1:23절은 바울이, 그가 죽었을 때 즉시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의미보다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종말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Middleton takes 2 Corinthians 5:6–9 and Philippians 1:23, for example, to mean that Paul is looking at the second coming of Christ and thinking of the eschaton rather than being with Christ immediately when he dies.


이 구절들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바울을 이해하는 말도 안되는 방법인 것 같다.

This seems to be a farfetched way of understanding Paul in these passages.


영혼이 잠잔다는 이론은 참으로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 없으며 성경의 어디에서도 가르치고 있지 않다.

The theory of souls sleep does not really find biblical warrant and is nowhere taught in the Scriptures.


이 책의 마지막 부인 5부 "왕국에서의 윤리"는 11장과 12장으로 구성되어있다.
The last part of this book, Part 5 titled “The Ethics of the Kingdom,” consists of chapters 11 and 12.


11장에서는 나사렛 회당(눅 4:16–30)에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복된 소식의 전체론적이고 현세적인 특성

에 초점을 맞추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방인에게 개방하시면서 전체적인 사람과 사회 질서의 새로워짐에 대한 예수님의 메세지의 함의를 풀어나가고있다.

Chapter 11 focuses on the holistic, this-worldly character of Jesus’s announcement of good news in the Nazareth synagogue (Luke 4:16–30), unpacking the implications of Christ’s message for the renewal of the entire person and social order itself with the opening of the kingdom to outsiders.


미들턴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의 복된 소식은 다름 아닌 우리 모두가 참여하도록 초대 받은 세상을 회복(문자적으로는, 확립)하는 것일 뿐이다.

According to Middleton,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is nothing less than the healing (literally, the establishing) of the world in which we are all invited to participate.


이 책의 마지막 장인 12장에서는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그의 시대와 우리 시대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윤리적 도전에 대하여 말하고있다.

The last chapter of the book, chapter 12, addresses the ethical challenge of the kingdom that Jesus brings, both in his day and ours.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은 오직 삶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요구하는 근원적 도전을 통해서 만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can be grasped only through a radical challenge that requires a fundamental reorientation of life.


창세로부터 종말까지의 성경적 이야기에서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이는 이 땅에서의 삶의 모든 차원에 적용할 수 있으면서 또한 모든 인간 가족에게 열려있다는 것이다.

The overall thrust of the biblical story from creation to eschaton unveils a vision of God’s kingdom that is both applicable to every dimension of earthly life and open to the entire human family.


미들턴은 1장에서 논의된 바와같이 플라톤적인 내세의 비젼의 역사적 분석을 지속하면서 이책을 부록과함께 결론을 짖고있다.
Middleton concludes this book with an appendix that continues the historical analysis of a Platonic otherworldly vision discussed in chapter 1.


여기서는 교회 역사의 과정을 통하여 우주의 회복에 대한 성경적 전망을 가리게하였는지 추적함으로서, 어떻게 천상에서의 운명에 대한 개념이 일반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을 지배하게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있다,

It looks at how the idea of a heavenly destiny came to dominate popular Christian eschatology by tracing the eclipse of the biblical vision of the redemption of the cosmos over the course of church history.


미들턴은 좀 더 전체론적인 종말론의 희망적인 회복의 징조들에 주목하고있다.

Middleton notices hopeful recent signs of the recovery of a more holistic eschatology.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면서, 이 책은 물리적인 우주와 인류의 문화와 사회 모두를 포함하는 창조물의 회복을 가르치는데 관여하는 전체론적인 성경적 세계관의 발전을 시도하고있다.
Comprehensive in its scope, this book is an attempt to develop a holistic biblical worldview regarding the teaching of the redemption of creation, including both physical cosmos and human culture and society.


미들턴이 이러한 전망에 윤리를 결부 시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Middleton’s ethical implications of such a vision are noteworthy.


궁극적으로, 우리가 구원의 성취로서 바라고 예상하는 것이 우리가 현재를 어떻게 살아갈 지에 진실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는 것이다.

Ultimately, what we desire and anticipate as the culmination of salvation is what truly affects how we attempt to live in the present.


"윤리가 살아있는 종말론"이라는 것이다. (24)

“Ethics is lived eschatology” (24).


그러므로, 미래를 전체론적으로 보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동정적이면서도 담대하게 구속적인 삶을  활성화하고 견고히하는 것이라고한다.

Thus, a holistic vision of the future can motivate and ground compassionate yet bold redemptive living in God’s world.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이 땅에서의 삶을 회복시키려는 그의 구속적인 목적 안에서, 이 땅이 번성하고 최고점에 달하게하려는 하나님의 원래의 의도로 시작하는, 전체 성경의 이야기 안에서 종말론을 구축하려는 미들턴의 노력은 이 책의 또 하나의 훌륭한 한 면이다.

Middleton’s endeavor to ground eschatology in the entire biblical story, beginning with God’s original intent for earthly flourishing and culminating in his redemptive purpose of restoring earthly life through the work of Christ, is another commendable aspect of this book.



일부 논쟁을 일으키킬 수 있는 요인은, 특히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하늘이 그리스도인의 희망도 아니며 이 생의 삶 이후에 있을 그들의 거처도 아니라는 미들턴의 관점이다.
What might cause some controversy, especially among evangelicals, is Middleton’s view that heaven is not the hope for Christians or their home after this life.


영혼의 수면에 대한 그의 한쪽에 치우친 제시는 역사적 개혁주의 전통에서 많은 이들의 환영을 받지는 못할 것이다.

His alternative suggestion of soul sleep may not be welcomed by many in the historic Reformed tradition.


하지만 많은 이들이 틀림없이 이 세상의 새로워짐이 종말론에 대한 성경적 전망이라는 미들턴의 강조에 동의할 것이지만, 이러한 새로워짐은 이 땅의 문화와 환경이 꽃을 피운 것이 포함되는 인간이 만든 노력의 결과물이 아니다.

While many would rightly agree with Middleton on his emphasis on the renewal of the world as the biblical vision for eschatology, this renewal is not a man-made effort that involves the flourishing of earthly culture and environment.


거의 톰 라이트의 영향을 받음으로서, 미들턴이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의 상태를 요구하는 종말론적인 생각을 끊임없이 고집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Hugely influenced by N. T. Wright, Middleton’s consistent pursuit of an eschatological notion that requires a this-worldly final state is highly questionable.


미들턴은 자신의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아키발드 알렉산더 핫지,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 그 외의 사람들과 같은 개혁주의 성경 학자와 신학자들을 언급하고있다.

Middleton mentions Reformed biblical scholars and theologians like A. A. Hodge, Abraham Kuyper, Herman Bavinck, and others to support his position.


이러한 학자들은 실제로 이 땅이- 창조 질서의 회복으로서- 새롭게 되고 이 세상이 재건 되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작업인 것이다.

These scholars do indeed speak of the renewal of this earth and the reconstitution of the world—the redemption of the created order—as the eschatological work of God in Christ.


그러나 이것은, 이 세상을 새롭게 하는 회복 사역이 인간이 이 땅의 문화를 번성시킴으로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미들턴의 관점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However, they sharply differ from Middleton’s view that the redemptive work of world renewal is done gradually by man through the prospering of earthly culture.


오히려 이것은, 모든 것들이 완성된 상태에서,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세워진 상태에서, 그의 재림과 함께 동반되는 그리스도 자신에 의하여 성취될 신성한 사역인 것이다.

Rather, it is a divine work accomplished by Christ himself that will accompany his return in the consummation of all things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new heaven and new earth.

요컨데 이 책의 구성 요소들은, 특히 천상에서의 사후 생활에 대한 미들턴의 거부는, 논쟁이 있을 것이지만, 이 책은 전체론적인 구원에 대한 성경의 이야기와 창조물의 필연적이고 광범위한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하심에 대하여 잘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In sum, while elements of this book, particularly Middleton’s disavowal of heavenly afterlife, will be controversial, this book is a welcome reminder of the biblical story of holistic salvation and God’s commitment to an integral and comprehensive restoration of the cre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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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rif Gendy is a member of the Mission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in Saint Paul, Minnesota, a licentiate in the Presbytery of the Midwest (OPC), and a PhD student at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in Glenside, Pennsylvania.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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