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란개혁주의 2023. 12. 9. 15:35

데이비드 엥겔스마가 말하는 헤르만 바빙크와 그의 신학

번역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들어가는 말

데이비드 엥겔스마는 미시간 그랜빌Grandville, Michigan에 있는 PRS(Protestant Reformed Seminary)신학교 교수로서 존 볼트, 조엘 비키와 함께 화란개혁주의 번역협회The Dutch Reformed Translation Society (DRTS)번역위원으로 활동하고있다.

바빙크는 카이퍼와 함께 화란개혁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인물이다.

화란개혁주의는 사회변혁이라는 과제를 안고서 문화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One-Kingdom을 추구하는데 이는 북미 웨스트민스터 대학을 중심으로한 Two-Kingdom개념의 Escondido 신학과 대조를 이루고있다.

Escondido 신학에서는 아담이 범죄한 날 죽었다는 개념 아래서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강조하고있다.

“ Yet what many often miss is the significance of being cast out of the garden- temple of Eden. To be exiled from the presence of God was akin to death itself. In this sense, Adam surely did die on the day that he was exiled from the benevolence presence of the Lord”
(The Law is not of Faith’ by Bryan D. Estelle, p7)

“우리가 흔하게 범하는 실수는 성전으로서의 에덴동산에서 쫒겨났다는 것의 심각성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의 현존으로부터 쫒겨났다는 것은 죽음 그 자체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아담은 하나님의 선하신 현존에서 쫓겨난 날에 분명히 죽은 것이다.”

에덴 바깥에서의 아담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육신은 살아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은 자라고 말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바빙크는 아담이 범죄한 날 죽지 않고 오랜 시간을 더 살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바빙크의 일반 은혜 이론은 죽은 자의 이론이 아니라 산 자의 이론인 것이다.

로마 카톨릭은 타락한 인간이 영적으로 죽은 존재이며,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로마카톨릭의 자연 신학은 인간의 지식과 노력에 의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있다.

인간이 자연신학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제한될 때 성경이라는 특별계시를 보충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바빙크와 함께 화란 개혁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카이퍼 역시 로마 카톨릭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카이퍼의 자연에 대한 존중은 카톨릭 철학자 프란시스 폰 바더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Schlatter와 Kuyper는 모두 독일 관념론 철학의 이원론적 성향을 거부한 바더에게 많은 빚을 지고있다. Friesen은 Kuyper가 “바더에게서 식별한다… 이원론에 대한 반대를” 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Schlatter는 “얼마나 단호하게 바더는 우리에게 통일성을 요구하는 규범에 순종함으로서, 신학에서 자연을 무시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지" 덧붙입니다.”
Both Schlatter and Kuyper owe a great deal to Baader in their rejection of the dualistic tendencies of German Idealist philosophy. Friesen explains that Kuyper “identifies in Baader . . . the opposition to dualism,” and Schlatter adds, “how valiantly does Baader obey the norm that demands from us the unity, and does therefore not allow for a neglect of nature in theology.”
(The Kuyper Center Review VOLUME 3 Calvinism and Culture
Edited by Gordon Graham WILLIAM B. EERDMANS)

카이퍼와 그 후예인 도예베르트의 사상을 연구하던  J. Glenn Friesen은 카이퍼와 도예베르트의 사상의 뿌리가 카톨릭 철학자 Franz von Baader(1765-1841)의 기독교 신지학(Christian Theosophy)에 있음을 밝힘으로서 카이퍼의 문화에 관한 사상이 카톨릭의 영향을 받았음을 주장한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신칼빈주의의 핵심 개념은 칼빈에서 온 것이 아니며 개혁주의를 근거로하고있지 않다. 그것들의 원천은 프란츠 폰 바더(1765-1841)의 기독교 신지학인 것이다."
"The key ideas of Abraham Kuyper’s Neo-Calvinism do not come from Calvin or from Reformed sources. Their source is the Christian theosophy of Franz von Baader (1765-1841)."(courtesy of Steve Bishop's "An Accidental Blog"의 글에서 인용
https://m.blog.naver.com/penthos7/220409104183

화란개혁주의의 후예인 도예베르트 또한 로마카톨릭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기독교 철학자 Herman Dooyeweerd(1894-1977)는 (카이퍼와) 동일한 출처에 의존했는데 그의 사상을 바더의 사상과 비교해보면 그의 철학이 기독교 신지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중 많은 부분이 다시 언급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The Christian philosopher Herman Dooyeweerd (1894-1977) relied on the same sources, and when we compare his key ideas to Baader’s (in Part 3 of this book), it is evident that his philosophy is rooted in Christian theosophy and restates many of its ideas.

화란개혁주의의 이러한 배경은 엥겔스마의 강연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은 일반은혜에 관한 주제 발표에서 바빙크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엥겔스마의 강연을 번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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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엥겔스마가 말하는 헤르만 바빙크와 그의 신학


다음은 2012년 3월 6일 캘리포니아 레드랜즈에서 개최된 개신개혁교단 임직자 총회에서 행하여진 강연을 확장시킨 문장이다. 이 문장은 2012년 11월에 발간된 개신개혁신학저널 46권, 11월호 3-43쪽에 실린 것입니다.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이 화란개혁번역협회에 의해서 영어로 처음 번역되었을 때(네번째 마지막 책은 2008년에 출간되었다) 북미에서는 일종의 바빙크 르네상스가 일어났습니다. 만약에 개혁교회들과 신학자들이 바빙크의 교의학에 있는 건전하고 견고한 개혁주의 교리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 교리들이 교회와 신학자들의 가르침을 비평하고 수정하고 정보를 제공해준다면, 이는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일은, 개혁교의학에 있는 건전한 교리들은 대부분 무시되었거나 의도적으로 잘못 전달되었는데, 특히 바빙크의 은혜 언약 교리에서 그러하였습니다.

또한, 교회, 신학자, 교육기관들은 개혁교의학에 있는 잘못된 교리들을 가지고,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들, 특히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교리를 강조해 왔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유명한 바빙크 협회도 대체로 개혁교의학에 설명되어있는 바빙크의 개혁교리들은 무시하는 대신에 초교파적 연대와 심리학과 문화에 대한 바빙크의 관점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이는 개혁교의학의 마지막 영역본이 출간된 직후에 프린스턴 신학교의 지원을 받은 바빙크 협회의 실상입니다.

이는 사실 칼빈신학교와 화란개혁번역협회에서 동시에 지원을 받고있는 바빙크협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은 구별된 개혁주의 교리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연설들은 매우 드물며, 실제로는 전무한 상태이다. 대부분의 연설은 교회의 연합과 문화의 기독교화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화란개혁번역협회에서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을 번역하고 출판하는데 있어서 10만불 이상의 비용과 수 많은 시간들을소요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때 이는 아니러니한 것입니다.

이와같이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이 무시되는데에는 바빙크 자신에게도 부분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그의 교리적 작업에는 늘 강력한 문화적 언급이 있어 왔습니다. 그의 생애와 사역의 마지막 10년은 문화에 대한 이와같은 관심이 사실상 그의 유일한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제안하는 두 개의 소논문을 썼는데, 이는 문화변혁에 있어서 교회로 하여금 불신자들과 협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장로교인, 개혁주의 기관들과 신학자들이 바빙크의 문화에 관한 저술들은 좋아하면서 그의 신학을 무시하는 것이 보편화되어있는 것에 대한 주된 이유는 이러한 기관들과 신학자들이 자신들이 바빙크의 네 권의 교의학을 고백하고 변론하는 것과 같이, 개혁주의 전통의 건전한 교리에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 반면에 이러한 기관들과 신학자들은 문화와 초교파적 연대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강연할 이 컨퍼런스는, 바빙크 자신에 관한 실질적 중요성이 아니고,  개혁교의학의 개혁주의 교리와 기념비적인 개혁교의학의 실질적 중요성에 관하여 전념하는 첫번째 바빙크 컨퍼런스가 될것입니다.

이번 컨퍼런스에서 우리는 헤르만 바빙크의 신학을 다루려고 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단순히 학문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빙크에게서 그들이 고백하고, 설명하고, 변론하고, 발전시키려는 것과 같은 개혁주의 신앙의 영광스러운 진리들로부터 배우고 유익을 얻기를 원합니다. 개혁신학을 망치려는 부분에 있어서는 그 결함과 잘못은 노출되고 거부 되어야할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특히 개신교 개혁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개혁교의학의 건전한 교리들을 유지하고 더욱 발전시키려는 것입니다.

이 첫 번째 강연에서 저는 "바빙크와 그의 신학"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저는 단순히 여러분에게 헤르만 바빙크의 생애와 인성의 두드러진 면을 이야기하고,  개혁교의학의 내용인 그의 신학을 요약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대신에 그 자신과 그의 신학, 삶, 그리고 교의학을 다루려고합니다.

바빙크와 그의 삶에 대한 지식을 얻는데 있어서 저는 주로 화란에서의 바빙크에 대한 세가지의 가장 중요한 전기와 연구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즉 V. 헵의 헤르만 바빙크; R. H. 브레머의 Herman Bavinck als Dogmaticus 그리고 R. H. 브레머의 Herman Bavinck en Zijn Tijdgenoten입니다.

저는 또한 영어로된 유일한 바빙크의 전기인 론 글리슨의 "헤르만 바빙크"를 읽었습니다. 비록 평론가들로부터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글리슨이 저술한 바빙크의 생애는 심각한 결점이 있습니다. 눈에 띄는 것은 반카이퍼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화란의 (자유)개혁교회와 이들의 신학에 도끼는 갈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오타들이 있었으며, 분노적으로 잘못된 언어들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저자가 마음에 품고있는 언어와도 같이 들렸습니다. 예를 들자면 바빙크는 "고소인의 외침으로 하나님께 탄원"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이 묘사되고있습니다. 또한 "참된 종교는… 절박하신 하나님을 가르쳐야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카이퍼는 어떠한 도전도 중재하려고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또한 사실에 부합하지 않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살고있는 사람이 옛날 화란에서 기록된 인물을 점검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화란의 거대한 개혁교회에서 1899년의 그로닝겐 총회에 대규모로 참여한 대의원의 수가 고작 8명이었다는 글리슨의 지적은 매우 신빙성이 없는 것입니다.

더욱 심각한 오류는 교리에 있습니다. 글리슨은 언약과 선택이 밀접하게 관계하는 교리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관된 가르침이었으며, 이러한 교리는 전적으로 강령에 대한 선택후타락설이라는 관점을 가져오게되며, 이러한 교리는 결과적으로 "대부분 믿음에 의한 칭의와 구원에 있어서 하이퍼칼비니즘의 관점"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글리슨의 제시는 여러가지 면에서 잘못된 것입니다. 카이퍼뿐만 아니라 바빙크도 언약과 선택의 밀접한 관계를 가르쳤으며, 실제로 선택이 언약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바빙크는 카이퍼의 강령에 대한 타락전선택이라는 관점을 공유하지는 않았더라도 이러한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과 언약적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의 의지와 분리시키기를 거절하는 것이 하이퍼칼빈주의도 아니며, 하이퍼칼빈주의로 이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선택과 언약이 밀접하게 관련되는 교리는 순수하고 건전한 칼빈주의입니다.


이 강연을 준비하면서 컨퍼런스에서의 범위는 광범위하지만, 저 자신은 바빙크 생애에 있었던 한가지 경고를 마음에 간직했습니다. 헵은 캄펀에서  바빙크의 기독분립개혁교회(1834년 분리 교회) 신학교의 신학교수 임명식 공식 행사에서, 교수들이 취임 연설을 하는데 있어서, 바빙크보다 앞서서 새로 교수로 지명된 분이 1월의 심한 추위에서도 3시간 넘게 강연했던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빙크는 이러한 지나친 행동에 대하여 매우 분노하면서, 그의 동료교수의 강연 도중에 강당을 뛰쳐 나가는 소란을 피웠습니다. 오직 그의 연로하신 아버지와 일부 친구들만이 그에게  자신의 강연 ("거룩한 신학의 과학")을 하라고 설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목소리의 어떠한 억양도 없이 가능한 빨리 읽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바빙크는 악명높게 평화적이었습니다.

이는 제 청중들에게 반드시 해당되는 것이 아니기에, 저는 이 강연을 세 시간 이내에 마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바빙크의 삶의 중요한 면들

헤르만 바빙크는, 1834년 흐로닝언의 울룸에서 헨드릭 콕 목사의 가르침과 파면으로 시작된 화란의 개혁교회의 멋진 개혁이 있었던 분리파 교회의 아들이었습니다. 1903년 암스테르담의 자유대학으로 캄펀을 떠나면서 바빙크는 자신에 대하여 "나는 분리파 교회의 아들이며, 그곳에 남길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바빙크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분리파 교회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신학, 특히나 개혁교의학에서의 신실함과 따스함과 그의 은혜언약 교리의 건전함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헤르만 바빙크는 1854년 태어났는데, 이 해는 분리교회가 시작된지 20년이 지난 해였으며, 기독분리개혁교회의 교단 교회가 캄펀에 신학교를 개설한 해였으며, 바빙크는 후에 이 곳에서 수 년동안 교편을 잡게 됩니다.

그의 부친 얀(Jan)은 경건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으며, 그는 드 콕의 제자로서 1840년에 회심을 하였습니다. 얀 바빙크를 회심시킨 설교자는 분리파 교회에서 회복된 복음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화란 당국에 의해서 30여번 투옥 되었습니다. 바빙크는 이와같은 논쟁적 분위기에서 양육되었습니다. 헤르만 바빙크의 부친은 그 자신이 어떠한 형태든 최초로 공식적인 신학교육을 받은 분리교회의 목회자였습니다.

헤르만 바빙크가 1883년 1월 캄펀에 있는 분리파 신학교에 교수로 임명되었을 때, 교수단에는 헬레니우스 콕과 엔서니 브루멜캠프와 시몬 반 벨젠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첫번째 인물은 분리파 교회를 설립한 저명한 헨드릭 드 콕의 아들이었으며, 마지막 두 분은 저명한 "분리파의 아버지"이셨습니다.

바빙크는 그 당시 여전히 활기차고 강력한 분리파 전통의 심장부에서 태어나고 양육되었습니다. 분리파의 신학과 정신이 바로 그가 숨쉬었던 공기였습니다. 분리파의 "정신"이라는 것은 분리파의 경건과 개혁주의 신앙고백과 존 칼빈의 가르침에 전심으로 헌신하는 것과 핸드릭 드 콕이 그렇게 날카롭게 비난하였던 신학적인 현대주의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리파의 아들은 세상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이 끌림은 마치 바빙크가 발견한  하나님없이 사는 삶이 주는 쾌락과 같은 도덕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더군다나 그 자신이 부도덕한 삶을 살지도 않았습니다. 바빙크의 개인적 삶은 거룩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그는 자신의 시대에 유럽 사회의 행동방식을 맹비난하는 논문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브레머에 의하면, 분리교회의 일부 교인들이 자신들의 신앙고백에 대립되는 조심성없고 사악한 삶을 사는 것이 바빙크에게는 눈의 가시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빙크는 이러한 세상의 가르침 즉, 자신의 시대와 과거 시대의 학식있는 사상가들의 지혜와 과학적 이론들, 예를 들면 자신과 동시대 사람인 찰스 다윈의 진화론과 심지어는 어떤 면에서는 불신자로서의 현대신학자의 신학적 지혜에 마음이 이끌렸습니다.

바빙크는 이러한 세상의 지혜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지혜에 마음의 문을 열어놨습니다. 그는 개혁주의 신앙이 이러한 세상 지혜를 수용할 수 있고 또한 수용하여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개혁주의 신학이 세상 지식에 영향을 줄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일부 사람들이 "두 사람의 바빙크"를 말하는 이유입니다. 헵은 바빙크 안에서 긴장감이나 이중성을 인식하였지만 "두 사람의 바빙크"는 정확한 묘사가 아니라고 부인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말하는 바빙크의 영혼에서의 이러한 "이중성"은 개혁교회의 아들로서의 사고와 세상의 지혜가 모두 사실이고 수용되어야 한다는 사고 사이에서의 충돌로서, 우리가 앞으로 살펴볼 바빙크의 신학에 해로운 영향을 끼쳤습니다.

바빙크가 세상적 사고에 의존하면서 발견한 것들은, 그가 자신의 (그리고 카이퍼의) 일반은총의 신학으로 설명하였습니다.

바빙크는 이미 젊은 사람으로서 이러한 세상의 지혜에 대한 끌림을 보여주었고 또한 이에 따라 행동하였습니다. 그는 캄펀의 독립교회신학교에서 오직 1년간 훈련을 받은 후에, 독립교회에서 목회를 준비하면서, 완전한 현대주의 신학교인 (40여년 전에 그의 교회가 잘못된 교회라고 여기고 독립하였던) 국립개혁교회 신학교에서 자신의 신학 훈련을 완성시키기로 결정합니다. 레이든의 교수들은 불신자들이었으며, 화란의 모든 이들이 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육체의 부활을 부인했며, 분리교회의 핵심으로 간직되어지고있는 칼빈주의 은혜교리들을 경멸했으며,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이와같은 계통에 있는 이들로서는 숄튼, 쿠에넨, 라우벤호프등이 있습니다.

바빙크가 자신의 신학교훈련을 캄펀이 아니라 레이든에서 마치기로 결정한 일은 마치 개신개혁교회(PRC)에서의 목회자 지망생이 개신개혁신학교를 거부하거나, 심지어는 칼빈신학교를 거부하고 시카고 신학교를 지망하여 폴 틸리히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바빙크는 스스로 자신이 레이든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는 작은 독립교회의 신학교에서의 신학교육은 열등하고 불만족스러운 것이라고 판단하였으며, (그리고 이는 많은 욕망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특히나 교의학의 중요한 분야에 대하여 그러하였습니다), 그리고 "레이든에서의 나의 연구를 점진시키고, 우선적으로 현대 신학을 배우겠다는 강한 욕망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설명하고있습니다.

바빙크의 Magnalia Dei, 즉,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놀라운 하나님의 큰 일The Wonderful Works of God
"을 "우리들의 합리적인 믿음Our Reasonable Faith"이라고 영어로 번역한 기독개혁교회의 번역가는 바빙크의 레이든에서의 신학교육의 유익에 대하여 극찬하고있습니다.

레이든에서의 훈련은 바빙크에게 매우 유익했다. 정통개혁주의 기독교에 대한 견고한 신학적 학식에 대한 개념은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서 그의 삶에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종교 사상에 대한 그의 친밀한 지식은 그의 칼빈주의에 대한 확신을 깊이있게 해주었을 뿐만이 아니라 그가 신학 전문가로서 그 당시의 문제들을 실질적으로 다룰 수 있었기에 (레이든에서의 훈련이 바빙크에게)  적합한 것이었다.

바빙크 자신은 복음 사역에 있어서 이러한 현대주의자의 훈련이 자신에게 미쳤던 영향에 대하여 좀 더 솔직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레이든은…종종 나를 매우 빈약하게 만들었으며, 나에게서 내가 알고있었던 많은 것들을 빼앗아 갔지만…, 나중에는 나 자신의 영적인 생활에, 특히나 설교를 하여야할 때에, 꼭 필요한 것이었음에 감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다음에 그가 추가로 언급하고 있는 것과 같이, 바빙크는 현대주의 신학교가 성경의 영감에 대하여 의문을 던지고있다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레이든이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그들이 사도들의 글(즉, 성경)에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어린아이와 같은 신뢰가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바빙크가 성경에 관한 의심으로 심각하게 몸부림쳤던 것은 바빙크가 레이든에서 받았던 훈련의 영향이었습니다. 바빙크가 자신의 성직자로서의 경력을 처음 시작하였던 프라네커에서의 짤막한 목회 사역 동안에, 바빙크는 친구에게 자신이 성경에 대한 의심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외적으로는, 회중들에는, 그는 확신에 찬 "화란개신교목사"가 되어야만 했고; 내적으로는 의심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성경과 관련한 이러한 의심과의 몸부림은 그의 사역 내내 지속되었습니다. 이러한 몸부림에 대해서 헵은 "바빙크의 영적 존재의 이중성"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 관한 의심은 바빙크의 노년에 점차 증가되고 있었습니다. 암스텔담의 자유대학교에서 교수로서의 그의 사역의 마지막 단계에서 바빙크는 거의 완전한 회의론에 굴복한 상태였습니다. 바빙크의 학생이었으며 동시에 친구였던 햅은 바빙크가 자신의 생애 말년에 어느날 그에게 "매일같이, 나는 점점 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에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갈 뿐이네"라고 한 이야기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브레머가 언급한 바와같이 1920년 리우아르덴 회의에서 바빙크가 개혁교회는 성경에 관한 세밀한 연구에 관하여 신앙고백 조항(참조 조항은 벨직 신앙고백 2-7항)을 만들어야할 것을 제안하였던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관련된 이러한 의문은 바빙크가 사역의 마지막 10년동안 자신의 저술들 가운데 성경을 설명하거나 혹은 심지어 성경을 다루는 작업이 아무 것도 없었다는 의아한 사실을 설명해 주는 것 같습니다.

제가 나중에 입증해드릴 것이지만, 성경에 관계된 의구심은 개혁교의학에서 성경을 다루는 그 방식에서 알수가 있으며, 의심의 여지없이 그의 자유대학교에서의 신학생들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물론이고 화란의 개혁교회에서의 가르침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화란개혁교회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성경에 관한 이러한 의구심은 전 세계의 개혁교회로 퍼져나갔습니다.

브루멜캠프는 자신이 바빙크의 아버지에게, 어린 바빙크를 레이든에서 목회 훈련을 받게하는 것이 "당신은 당신의 아들을 사자굴에 집어넣는 것"이라고 언제 경고적으로  이야기했는지에 관하여 알고 있었습니다.

바빙크는 레이든에서 6년(1874-1880)이라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1880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이는 분리파 교회의 목회자들 가운데 최초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고등 비평 구약학 교수인 아브라함 쿠에넨과 특별히 친밀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의미심장하게도 바빙크는 사역 내내 자신의 서재에 쿠에넨의 초상화를 걸어놓았습니다. 또한 바빙크는 레이든에 있는 동안에 스노우크 후르그롱제Snouck Hurgrondje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학교동무와 매우 가까운 친분을 유지했습니다. 비록 스노우크는 철저한 현대주의자였으며, 그 상태에 변함이 없었지만, 바빙크는 자신이 사는 동안에 스노우크와 친밀한 우정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빙크가 레이든을 떠난지 9년이 지난 후에 레이든 대학교의 신학부에서는 불신자인 라우벤호프의 후임자로서 바빙크를 임명할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는 것은 바빙크의 능력 뿐만이 아니라 현대주의에 관한 그의 불분명한 태도에 관하여 무언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바빙크와 또한 다른 이들도 바빙크가 후임자 가운데 최종 후보자였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바빙크가 분리교회에서의 사역을 위한 후보자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전에, 분리파 교회에 의해서 치뤄지는 시험에서 일어났던 일을 생략한다면, 바빙크가 레이든에서 받았던 교육을 무시하는 것이 완벽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분리교회의 원로 설교가인 J. F. 불렌스 반 바르세벨트(그의 이름은 이러한 경우에 한 그의 행동으로 인하여 명예롭게 남아있을 것입니다)는 바빙크에게 마태복음 15장 14절 산상설교의 처음 부분(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에 대하여 설교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바빙크는 불렌스의 이러한 선택이 바빙크의 레이든 교수들을 염두에 둔 것이었음을 충분히 인식함으로서, 몹시 화가 났습니다. 처음에는 바빙크는 이러한 요구를 거절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그의 친구들은 그가 마음을 바꾸어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바빙크가 설교에 대한 서문에서 꺼낸 말은 "이러한 본문이 왜 바로 저에게 과제로 주어졌는지에 대한 이유를 생각해내기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였습니다.

바빙크가 레이든에서 찾고자 했던 신학교육은 소위 독일 사람들이 말하는 "Kulturtrieb
즉 문화에 대한 강렬한 원함"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는 바빙크에게 평생에 걸친 강력한 원동력이었습니다. 문화에 대한 이러한 강렬한 원함으로 인하여 바빙크는 문화를 자신의 시대에 더욱 적합화시키고자하는 충동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이러한 문화에 대한 강력한 충동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개념에 대한 바빙크의 열정을 정당화시켜 주지는 못하지만,
설명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바빙크는 처음에는 기독분리개혁교회가 아브라함 카이퍼의 애통교회와 연합되어지는 1892년까지 활발하게 목회 사역을 하였으며, 이는 화란의 개혁교회(GKN)에서 바빙크가 임종을 맞이한 1921년까지 지속되었는데, 바빙크는 이때까지 한 번의 짧은 목회직과 신학교에서의 두 번의 기다란 직책, 즉 캄펀에서의 분리교회신학교와 암스테르담에서의 자유대학교에서 사역을 하였습니다.  

바빙크는 영광스러운 프리스란트  지방의 프라네커에서 2년이 좀 안되는 매우 짧은 기간동안 목회자로서의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바빙크는 레이든을 졸업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1881년 초에 목회자로 임명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바빙크는 좋은 설교자였지만, 목회자로서 아이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는 것과 같은 사역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습니다.

바빙크의 목회사역에서 주목할 점은, 바빙크의 짧은 목회 기간과 특히나 설교를 준비할 때 성경과 관련된 의심과 싸우는 것에 더하여, 바빙크가 프레네커의 목회자가 되기 바로 전에, 프레네커의 회중들에게는 1851부터 1875년까지 K. J. 피터스(Pieters)라는 목회자가 사역을 하였습니다. 피터스는 그의 동료 J. R. 크로일렌(Kreulen)과 함께, 모든 세례받은 어린이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새롭고 이단적인 조건적 언약 교리를 분리파 교회에 도입한 분리파 교회 목회자였습니다. 피터스와 크로일렌은 언약과 구원이 선택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을 부인하였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으로 인해서 이 두 사역자는 프레네커의 피터스의 회중에게서, 그리고 교단에서 논란의 풍파를 일으키게 됩니다. 피터스와 크로일렌은 1861년에 발간된 De Kinderdoop이라는 책에
자신들의 언약교리를 공표하였습니다.

더군다나 피터스는 술꾼이었습니다. 몇번이고 그는 당회에서 경고를 받았으며, 그리고 수차례에 걸쳐서 공공장소에서 만취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장로들에게 모두가 아주 자유롭게 주정을 사용해도 된다고 허락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개혁교회 장로들은 진상 파악을 하게 되었으며, 피터스 목사가 아주 자유롭게 만들어 사용하였던 주정의 상표가 Schiedammer라는 진gin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당회에서는 피터스를 파면하였으며, 그 결과 피터스는 회중을 쪼개어서 한 동안 독립 사역을 지속하기도 하였습니다.

바빙크는 자신의 선임자가 신조에 따라 가르치지 않은 것과 사실상 신조와 불일치한 것에 대하여 심각하게 비판하였습니다. 바빙크는 자신의 친구인 스노우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돠 같이 썻습니다. "수년동안 여기 프레네커에는 한 설교자가 있었는데, 그는 우리 교회 전체에서 결정적으로 예외였네. 특히나 지적 능력이 뛰어난 그는 우리의 신앙고백에 동의하지 않았고 이를 무시하고 자신이 원하는대로 가르쳤다네." 이것이 바빙크의 피터스와 크로일렌의 언약교리에 대한 판단이었으며, 결과적으로 피터스와 크로일렌이 (자유)개혁교회의 언약교리에 고의적으로 채택한 언약교리였다는 것이 바빙크의 판단이었습니다.

바빙크는 개혁교의학에서 언약과 교리에 관한 부분을 다루는데 있어서, 그는 피터스와 크로일렌의 교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빙크는 이 교리를 거부하고 반대로, 특히나 세례받은 신자의 아이들에 있어서, 선택이 언약을 지배한다고 가르쳤습니다.


1882년에 분리교회의 총회에서는 바빙크를 캄펜에 있는 신학교의 교수로 임명하였습니다. 바빙크는 28세 밖에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는 신학교에서 1902년까지 거의 20년 동안 주로 교의학을 가르쳤습니다. 그가 캄펀에 있는 동안에 그의 학부 동료들로는 헬레니우스 드 콕과 반 벨젠과 브루멜캠프가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광범위한 독서를 하고 깊이 생각하고 자신의 대작인 네 권의 개혁교의학을 집필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개혁교의학의 마지막 권은 1901년에 발간되었습니다.

바빙크는, 비록 처음에는 카이퍼의 절대 권한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서 분리파 교회가 카이퍼의 애통교회와 연합하는 것에 대하여 의심을 품었지만, 나중에는 연합에 대한 열광적인 주창자가 되었으며, 연합이 결실을 맺기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바빙크는 캄펀에 있는 동안 자유대학교에서 가르칠 것을 3번이나 부탁 받았습니다. 자유대학교에서는 카이퍼와 또한 학교 권위자들이 바빙크의 신학적 능력을 인식하였으며, 그가 자유대학교의 학부로 와줄 것을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빙크는 분리교회의 신학교를 좋아하였기에, 청빙을 두 번이나 정중히 거절하였습니다.

또한 바빙크는 캄펀에 있는 동안인 1891년에 조안나 아드리아나 쉬퍼스와 결혼을 하였으며, 이 때 바빙크는 장성한 서른일곱이었으며, 그의 아내는 젊은 스물세살이었습니다. 이들은 딸 하나를 두었습니다.

1902년에 바빙크는 자유대학교에서 교의학을 가르쳐달라는 청빙을 수락했습니다. 이는 화란의 수상이라는 낮고 비천한 자리로 이직을 한 카이퍼 자신을 대체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바빙크의 나이는 48세였습니다. 여기서 바빙크는 이상하게도 자신의 강좌를 가르치는 것을 제외하고는 신학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방대한 신학 장서들을 처분하면서, 이는 “나에게는 더 이상 이와같은 책들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말하였습니다.

1911년 이후에는 바빙크는 다른 분야, 특히 심리학이나 교육과 같은 다른 분야에서는 많은 책을 썼지만, 다른 어떠한 신학 책도 쓰지 않았습니다. 바빙크는 자신의 여생을 "심리학이 중심에 있는 연구"에 헌신하기 위해서 신학 교수직을 포기하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바빙크의 삶과 사역의 말년에는 바빙크 자신의 영적이며 심리적인 태도가 눈에 띌 정도의 분명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었읍니다. 그는 침울하고 우울하며 침체된듯 보였습니다. 바빙크를 개인적으로 잘 알고있던 헵은 자신의 스승이며 친구인 그를 "그는 문제들로 인하여 고통스러워 했읍니다"라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헵에 따르면 바빙크가 고통스러워했던 문제는 다음 세 가지였습니다: (1) 유럽 사회의 미래;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후의 바빙크의 죽음; (2) (바빙크가 생각하는) 성경의 문제; (3) 문화의 문제 등입니다. 문화의 문제에 관해서는, 문화는 고통스러워야할 뿐만 아니라, 세상 문화가 기독교화 될 수 있고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이들을 절망에 빠뜨린다는 것입니다.

바빙크는 1921년에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 바로 직전에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고서 "나의 학식은 아무 소용이 없었으며, 나의 교의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의 믿음 뿐이었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제가 바빙크 신학의 강점과 약점을 살펴보기 이전에 저는 바빙크의 삶의 다양한 면을 관찰하고 분석한 것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자합니다.

첫째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특히 진리를 유지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바빙크는 개신교와 개혁주의 전통, 즉 도르트신조에서의 화란과, 영광스러운 분리파 교회, 그리고 아브라함 카이퍼의 회복된 도전적인 개혁 정통의 주된 흐름 안에 서있었습니다.

두번째로는, 바빙크는 근면하고, 매우 박식하며, 뛰어난 개혁주의 신학자였습니다. 특히 캄펀에 있는 동안에는 폭넓은 책을 읽었으며, 깊이 생각을 하였으며, 부지런히 글을 썼습니다. 그의 다른 모든 책들은 둘째치고, 특히나 믿음의 확신과 같은 조그마한 책들과 같은 다수의 여러 세밀한 작품들이 있었지만, 개혁교의학은 기념비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바빙크는 신학자의 신학자였습니다.

세번째로, 바빙크는 개신개혁교회에 1834년 화란에서의 분리교회 신학, 특히 그중에서도 언약신학을 연계시키며, 또한 칼빈으로 돌아가는 개혁주의 전통에서의 좋은 것들을 개신개혁교회에 연계시켰습니다. 바빙크는 이러한 개혁주의 신학을 시간의 관점에서와 내용에 관점에서 개신개혁교회에 연계시켰습니다. 시간에 관해서는 대부분의 분리교회 원로들과 동시대의 사람이었던 헤르만 훅세마를 1924년에 기독개혁교회가 쫓아내기 바로 3년 전에 바빙크는 임종을 맞이하였습니다. 개혁신학의 내용에 관해서는, 대부분의 중요한 믿음의 진리에 있어서, 헤르만 바빙크가 자신의 개혁교의학에 체계적으로 표현한 개혁주의 신앙을 개신개혁교회에서 고백하고 가르쳤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제 생각에는 훅세마가 바빙크의 교의학에서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네번째로, 바빙크는 비록  종교적 분쟁을 피하는 평화를 사랑하는 이로 보여지지만 (이는 언제나 덕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평화적인 바빙크는 특이하게도 이단을 예리하게 비판하거나 단호하게 비난하는 것을 거부하며, 대부분의 지독한 이단들에게서 조차도,
예를 들면 범신론자, 슐라이어마허, 그리고 윤리신학자인 Daniel Chantipie de la Saussaye등
에서 조차도, 항상 무언가 좋은 것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는 비평주의에 극단적으로 예민하며, 자신이 비평을 받는 경우나 교회의 결정이 자신의 방식을 따르지 않을 때는 비통스러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헵에 따르면, 분리파 교회와 애통교회의 연합으로 생긴 교단에서의 논란거리였던 두 신학교의 연합과 관련하여 1889년의 대회에서 바빙크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게된 것으로 인하여 바빙크의 태도와 자세는 근본적인 변화를 보여주게됩니다. 그는 즉시 대회를 떠나면서 잔여 회기에 참석할 것을 거부합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얼마동안 그는 교회에서 찬송을 부르지도 않았으며, 자신을 그냥 불평분자로 보여주기도 했읍니다.

교회회의에서 감당하여야만 했던 쓰라린 경험에 대한 바빙크의 반응은 바빙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면이 아니었음은 분명했지만, 이는 특히 사역자에게는 경고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바빙크의 비통함은 교회에서의 그의 사역을 방해하였습니다. 이러한 연약함은 우리에게도 히브리서 12장 15절의 말씀, 즉 “너희는 돌아보아..쓴뿌리가 나서 괴롭게하고"의 경고를 깨닫게 해줍니다. 이러한 쓰라림은 모든 성도의 삶에서와 같이, 사역에 있어서도 흔한 경우이며, 이는 사역자 자신의 신실함을 손상시키며, 그가 하는 일을 망쳐버리며, 교회의 안녕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수행하는 많은 일들을 훼방합니다. 물론 이것에 대한 비결은 사람과 자신을 잊어버리고 오직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저는 바빙크의 신학을 살펴보고, 우선 그의 신학의 강점과 가치를 살펴보고자합니다.


바빙크 신학의 힘과 가치

바빙크의 개혁교의학, 즉 네 권의 개혁교의학은 훌륭한, 참으로 칭찬할만한 개혁신학의 작품입니다. 이것은 개혁 신앙의 교리들을 철저하게, 포괄적이고 체계적으로, 그리고 보편적인 건전한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기념비적인 작품이 아닙니다.

다음은 개혁교의학의 강점과 장점들 가운데 일부입니다. 첫째로 개혁교의학은, 조심스러운 작업을 통해서, 존 칼빈으로부터 20세기 초까지 고백되어지고 발전되어진 개혁신앙의 풍성함에, 신학의 몸통을 결합시킨 조직적인 형태로입니다. 이는 특히 개혁주의 전통이 흘러나온 주된 흐름이 된, 도르트회의의 시대로부터 시작된, 화란에서의 개혁주의 신앙의 발전에 특별하게 관심을 기울인 것입니다.

두번째로 개혁교의학은 개혁주의 교리에 근거를 두면서 이와 조화를 이루고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바빙크의 교의학이 마치 비평으로부터 초월해 있는 것과 같이 절대로 교리로부터 벗어나지는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은 어떤 부분에서는 심각하게 벗어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빙크는 개혁주의 교리야말로 성경의 진리를 구체화하는 것이며,  개혁주의 신학에 권위가 있는 것이라는 확신으로 의식적으로 결단력있게 작업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개혁교의학이 전체적으로 건전하며 참으로 지속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세번째로는, 개혁교의학의 영역과 폭이 방대하고 심히 방대하다는 것입니다. 바빙크는 성령께서 주신 신학자로서의 탁월함과 그가 하는 교의학 작업에 성령의 역사하시는 신실함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개혁교의학은 교회 역사의 개요를 제시해 줄 뿐만이 아니라 사실상 교리의 완전한 역사를 제공해줍니다. 개혁교의학은 4권의 책을 통하여 교회 전체의 신조들은 물론이고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가르침들을 참고하고 있습니다.이 개혁교의학은 사이비 종교집단은 물론이고, 모든 교회의 분파들, 즉 그리스정교회, 로마카톨릭, 루터교도 그리고 다른 종파들 모두를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칼빈 뿐만이 아니라 루터나 부쳐, 버미글리, 기타 다른 이들의 가르침도 살펴보고 있습니다.

개혁교의학은 모든 시대에 걸쳐서 교회에 위협을 가하였던 철학자들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그리고 그 외의 이들을 다루면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개혁교의학에서는 불교와같은 이교들을 비판하고있습니다.

몬타누스, 아리우스, 펠라기우스부터 피기우스, 알미니우스, 아미라우트, 그리고 슐라이어마허에 이르기까지 정밀하게 분석되어지지 않은 이단은 없었습니다. 항상 바빙크는 이들의 근원적인 오류와 그것이 진리에 모순된다는 것을 어느정도 분명하게 문장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빙크 자신의 시대에 개혁교회를 위협하는 이단자들과 이단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강조가 있었는데 이들 중에는 "현대주위" "중재 신학" "윤리 신학" 그리고 우리가 근본주의 혹은 부흥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 감리교파가 있었습니다.

네번째로, 바빙크는 개혁교의학의 내용인 성경의 진리에는 모순이 없음을 확신하면서 개혁교의학을 썼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마음에는 모순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빙크는 자신의 서문에서 이 자명한 진리를 확증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오직 하나님 자신의 말씀에 의해서 계시된다면, 여기에는 모순적인 요소나 혹은 자연이나 역사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의 충돌이 포함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서로 대립될 수가 없기에 필연적으로 유기적인 통일성을 이를 수밖에 없다. 교의학자의 직무는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의 생각을 생각하고, 그 통일성을 추적하여야만 하는데…. 하나님의 계시에 담겨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존재하는 이와같은 통일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이를 인정하기를 거부한다면 무신론이나 혹은 하나님의 통일성을 부인하게되는 것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

제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제가 개혁교의학에 모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바빙크가 역설적인 신학자, 즉 화란의 칼 바르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개혁 교리에 요약 되어있는 바와 같이, 성경의 계시가 모순이 없다는 확신은 개혁교의학의 많은 결정적 중요 부분에서 주권적 은혜에 의한 구원에 대한 바빙크의 고백을 보호해주고 있습니다. 바빙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가 개별적이고 효과적이며, 그 근거가 영원에서의 선택 교리에 있으며, 여기에 동반되는 유기 교리는 실제로 명백하게 모순되는 역설에 호소하고 있다는 진리에 반대할 자유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앞서 말한 것은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의 강점과 가치에 관계된 좀 더 일반적인 것인 반면 다음에서 말할 내용들은 좀 더 특별한 것입니다.

첫째로, 개혁교의학은 성경적입니다. 바빙크는 벨직신앙고백서 5항에 근거해서, "성경은 교회와 신학의 유일한 원천이principium unicum된다"고 주장합니다. 바빙크는 교의학을 "기독신학자의 사고적 의식에 의해서 흡수되고 재생산된 성경의 진리"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리는 성경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개혁교의학은 성경 해석의 산물입니다. 개혁교의학에 본문을 해석하는 것으로 구성된 기다란 부분들이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바빙크의 방법은 그 보다는 흔히 교리를 몇 문장이나 단락으로 서술하고나서 그 교리를 이끌어낸 성경 본문을 나열합니다.

개혁교의학의 성경적 속성으로 인해서 그 강점과 유익은 엄청납니다. 이는 정통에 속하여 있습니다. 이는 신선한 것이며, 활기가 있는 것입니다. 바빙크는 이와같은 교의학에 대하여 권두언에서 “교의학은 우둔하거나 무미건조한 과학이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바빙크의 성경적 교의학의 또 다른 강점과 유익은 여기에 교리의 발전이 있다는 것입니다.

개혁교의학은 스스로 공언하는 성경적 속성과 긴밀하게 연관됨으로 인하여 하나님 중심적입다. 바빙크는 방대한 개혁교의학의 작업을 시작할 때부터 전심으로 하나님 중심의 교의학을 만들고자 스스로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의 교의학은 전부가 조직적인 형태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어야만 했습니다. “결국 신학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이성적 피조물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고, 하나님을 앎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게 하여야한다(잠 16:4; 롬 11.36; 고전 8:6; 골 3:7)." 바빙크에 의하면 개혁교의학은 “신정론, 하나님의 모든 선하심과 완전하심에 대한 찬가, 경배와 감사의 찬송, 가장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눅 2:14)”을 목적으로 하고있습니다.

개혁교의학은 성경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이기 때문에 이는 또한 진심어리고 실질적입니다. 바빙크는 의도적으로 윤리학을 교의학에 접목시켰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분리파 교회의 자녀로서의 유산은 그가 개혁교의학에 경건함과 신실함을 표현하는데 기여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빙크는 경건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개혁교회 내에서 청교도와 그의 영적인 후손들이나 제2종교개혁 운동Nadere Reformatie 을 하는 사람들을 의심하는 신학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진실된 개혁주의 어른들과 아이들이 경건했던 것과 같이 그도 또한 경건하였읍니다. 바빙크는 자신의 교의학에서 표현했던 것과 같이 개혁주의 교리에서 유래되는 경험과 실천의 경건함을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교의학과 윤리학을 이와같이 긴밀하게 연관시키는 것 또한 바빙크의 신학적 확신에서 탄생된 것이었습니다.

신학적 윤리는 … 전적으로 교의학에 근거를 두고있으며 … 교의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체계이다; 윤리학은 하나님을 섬기는 체계이다. 이 두 가지의 제자도는 결코 두 가지의 독립적인 실체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며, 같이 하나의 체계를 형성해 나아가며; 이들은 하나의 유기체로서의 관계된 구성 요소인 것이다.

세번째로 개혁교의학은, 영원한 협의 안에서 예정된 택함받은 신자인 죄인을 영생과 영광으로, 태초부터 종말까지 보존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을 확신하고, 설명하고, 강력하게 변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또한 모든 진실된 개혁교의학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주권적 은혜의 진리에 대한 신뢰는 신학의 서는 것과 넘어짐의 표지입니다.

바빙크는 선택과 유기 모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가르쳤으며, 모든 조건적 형태를 배격하는 무조건적 예정을 확증했습니다. 그는 아르미니우스와 아미라우트 모두를 분명하게 비난합니다. 바빙크는 저항할 수 있는 은혜에 아르미니우스의 근본적인 잘못이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아르미니우스에게] 은혜는 아직 언제나 저항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아르미니우스 신학의 끔찍한 결과는 이것이 인간 존재를 자신들의 운명의 최종 결정권자로 만들다는 것이었고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는 유별난 아르미니안의 가르침은 “누가 믿을 것인지, 혹은 믿지 않을 것인지에 관한 하나님의 예지나….를 거부하는 결과를 가져오며, 여기에 더해서 모든 인간을 구원해주신다는 하나님의 보편적 의지와, 그리스도의 보편적 속죄, 그리고 충분한 은혜의 수단들이 보편적으로 제공된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합니다.

아미로에 대해, 바빙크는 그와 프랑스에 있는 소뮈르학교가 도르트에서 비난하고있는 알미니안을 지지하는 것을 비판합니다. 바빙크는 아미로가 선택에 관한 두 가지의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고 명기합니다. 첫번째는 보편적이고 조건적인 교리로서,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그들이 믿을 것이라는 조건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특별하고 절대적인 교리로서 이는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에게 믿음의 선물을 주셔서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교리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빙크는 "물론 만약에 첫번째의 보편적 교리가 전체에 대한 무엇인가를 의미한다면, 이는 두번째를 완전히 덮어버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고 올바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미로에 대한 바빙크의 판단은, 오늘날 페더럴비전의 신학, 즉 이 신학의 근원이 되는 조건적 언약 교리에도 적용이 됩니다. 모든 세례받은 가시적 교회의 일원을 구원하실 (보편적, 조건적 선택 등등) 하나님의 조건적 의지는, 입으로만 발림 말을 할 수도 있는 세례받은 모든 이들에 대한 조건적 은혜의 언약을 옹호하는 이들에게 적용되는 특정된 선택교리를 완전히 무색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바빙크는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60페이지 분량의 논의에서 "[예정에 대한 섭리 뿐만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섭리는 그 분 자신의 절대적 주권에 근거를 둔다"는 진리를 주장합니다.

보편속죄론이 그리스도를 선택과 언약으로부터 분리시킨다고 비난하면서, 바빙크는 보편속죄론을 변론하는데 잘 인용되는 본문을 포함하여, 이를 반대하는데 생기는 모든 논의에 직면하면서도, 한정된 제한 속죄를 단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과 의도였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이들만의 죄를 위한 것입니다" "구원을 얻고 적용시키는 것은 분리할 수 없게 연결되어 있으며… 중재가 특별한 것과 같이…희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빙크는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어떤 구원과 관계없는 "유익"을 발견함으로서 이러한 다른 종류의 강력한 고백들을 다소 좀 약화시킵니다.

바빙크 신학에서 내적인 부르심과 함께 시작하는 성령의 구원 사역도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배타적인 은혜의 선물입니다.  은혜는 값없이, 그리고 무조건적일 뿐만이 아니라 "효과적이며" "저항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마음을 따듯하게하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부분에서 바빙크는 성도의 견인이 "인간 개인의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임을 고백합니다. 견인은 선택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속죄와 전능한 은혜의 확실한 효과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은혜 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언약을 약속하신, 혹은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구원 사역을 시작하신 남자나 여자의 타락을 가르치는 이들에 대하여 견인을 변론하는데 있어서, 바빙크는 성경이, 특히 구약에서, "은혜 언약은 인간 존재의 순종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있다. 이는 진실로 언약의 길을 걷게끔 순종의 길로 인도하지만, 언약 자체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달려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을 깨뜨릴 수도 없으시고 깨뜨리시지도 않으신다"고 단언합니다.

바빙크는 신약에서 믿는 부모의 일부 세례받은 자녀들의 멸망에 대하여는, 구약의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멸망 받은 것과 같이 설명하면서, 이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9장 6,7절에서, 그리고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2장 19절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자손이 모두 이스라엘에 속하여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이(롬.9-11), 마찬가지로 요한은 타락한 이들에 대하여 증언하기를: 그들은 우리에게 속하여 있지 않으니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와 계속 함께 있었을 것이다(요1. 2:19)"와 같이 설명합니다.

21세기 초에 이와같은 고백을 하는 개혁교회들은 “하이퍼 칼비니즘"이라며 개혁주의 공동체로부터 징계를 받고 쫓겨났습니다.

바빙크는, 교의학자로서 자신과 개혁주의 신앙의 특징인 교의학과의 균형을 보여주면서, "견인의 확실성은 결코 책망과 위협을 배제하지 않는데, 이는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견인의) 약속과 선물을 신자들에게 확신시키는 방식이다. 이것들은 삶에서 견인이 실현되어지는 수단이다" 라고 충고합니다. 그는 "결과적으로 견인은 강압적이 아닐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서 인간에게 영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다"라고 덧붙입니다.

부르심과 거듭남으로부터 보호하심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모든 은혜로운 구원 사역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으로부터 기인된 것이며, 이러한 은혜 언약은 영원한 선택을 근거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시고 자신의 교회에 나누어주신 모든 유익은 은혜 언약의 유익이다. 이 언약은 비록 시간상으로는 복음에서 처음 드러났지만 그 근원은 영원에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과 계획하심에 근거를 두고있으며, 은혜 언약의 모든 유익이 영원 안에서 굳건하게 확립되었다는 개혁주의의 개념을 붙드는 것이…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성부의  선하신 기쁨이며, 여기에서 이와같은 모든 유익이 교회로 넘쳐나는 것이다.

바빙크는, 모든 구원 사역에 대한 적용 외에도, 견인에 대하여 특별한 언급을 하면서, 구원의 원천이 되는  은혜 언약은 "인간 존재의 순종에 의존하지 않으며 …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에만 의존하며 …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깨실 수도 없으시며, 깨시지도 않으시며 … 은혜 언약은 … 결혼과 같이 깨실 수 없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인한 언약의 불변성을 확신하는 맥락에서, 바빙크는, 언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립되고 유지되며, 이 말씀은, “전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들에게 주어진 하나의 엄청나게 풍요로운 약속이다"라고 언급하고있습니다.

제가 이번 컨퍼런스에서 별도의 강연에서 바빙크의 언약 교리라는 주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이 시간에는 바빙크에 있어서 주권적 은혜에 의한 구원의 진리의 핵심 사항들에 관하여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바빙크 신학의 또 다른 강점은 교리의 발전에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이해의 발전은, 바빙크가 모든 개별 교리의 서로간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포함한 개혁신앙의 몸통 전체를 깊이있고 포괄적으로 사로잡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교리화하는 바빙크의 성경적 이해의 결과였습니다. 바빙크는, 진리의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아, 자신의 생각 속에서 새로워진, 개혁신앙의 모든 교리를 성경으로부터 끄집어 내면서, 어떤 교리들의 부적절한 표현을 개선하고, 개혁주의 전통에서의 잘못된 교리 체계를 수정하여, 이전의 이해보다도 더욱 성경 계시 전체에 일치되는 단계에서 이해하도록
진리를 더욱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이와같은 발전에는 타락전선택설과 타락후선택설과 관련된 오랫동안의 우애있는 논쟁에 대한 특별한 고찰과 함께했던, 예정 교리에 대한 바빙크의 통찰력이 있었습니다. 바빙크는 하나님의 작정의 순서와 관련된 각 이론의 장점과 단점을 지적하면서 양쪽 전부의 장점에는 도움이 되고 이들의 단점은 제거하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개념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계시하는 것과 관련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목적이되는, 하나님의 계획에서의 그리스도의 선택을 최우선으로 만듭니다.

또한 이러한 개념은 “서로가 종속되는 관계이면서 궁극적 목적에 수단이 되는 선행하는 모든 것"을 위치시키는 전통적 타락전선택설의 관점과 전통적 타락후선택설의 관점 모두의 잘못을 피하고 있습니다. 바빙크는 추가된 부가적인 설명에서, 이것은 로마서 9장 15절과 에베소서 1장 4절과 61절을 근거로하여, “선택과 유기는 죄를 전제로하는 자비와 정의의 행동”들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교의학의 정금같이 귀한 것 한 가운데에는 배설물 같은 것도 있습니다. 배설물의 대부분은 소위 하나님의 일반은혜라고 불리우는 교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교리는 개혁교의학 네 권에 걸쳐서 여러 교리적 맥락에서 반복하여 나타납니다. 바빙크에 있어서 이러한 잘못은 이번 컨퍼런스의 강연들 가운데 한 가지 주제이기에, 제가 개혁교의학의 약점을 다루는데 있어서 간략하게나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빙크의 교의학의 약점들

저는 바빙크 신학의 두 가지 중대한 잘못을 지적하고자 하는데, 이 모두는 개혁교리에서 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이러한 오류에 영향을 받도록 허락한 개혁교회들에 재앙적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첫번째로, 바빙크의 신학적 신념에 깊이 스며들어있는 잘못은, 궁극적으로 모든 철학들과 모든 과학적 이론들과 그리고 모든 경건함이 없는 문화적 제안들과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이들과 불신자 운동가들과 그리스도 바깥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이들 안에도 무언가 선한 것과 진실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빙크는 언제나 변함없이 개혁주의 신학에다가 이러한 철학들과 과학적 이론들, 그리고 문화적 작품들을 수용해왔습니다. 그는 슐라이어마허가 되었든, 아니면 다윈이 되었든지간에, 심지어 가장 심각한 이단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맹렬하고 공공연한 위협까지도 포함하는 무신론적 이론을 절대로 날카롭게, 그리고 단호하게 비난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두 차례에 걸쳐서 바빙크의 이러한 약점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였습니다. 첫 번째 경우는 바빙크가 캄펀에 있는 신학교의 교수로 임용되었을 때 하였던 취임사 였습니다. 바빙크는 비록 개신교 이단에 대하여 비판적이었지만,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에 대하여는 역시나 좋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독창적인 사상가에 의하여 신학에 이르게 된 모든 선한 것들을 감사하게 인식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기분좋은 의무인 것입니다." 카이퍼는 자신의 잡지 "더 헤라우트De Heraut"에서 바빙크의 강연 "거룩한 신학에서의 과학"에 대하여 높이 칭찬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룩한 신학의 과학"에 대한 바빙크 박사의 취임 연설에, 진심으로 동의를 하면서, 우리가 읽은 것 대부분의 글이 하나의 저작물이 되어서 우리 손에 들어온 경우는 이제껏 없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개혁주의의 과학적 신학입니다  …  이것을 읽는다는 것은 심신을 상쾌하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도르트 신조에 대한 충실함이 있으며, 이는 도르트 신조로부터 벗어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신학의 발전을 금하지 않는 도르트 신조의 정신입니다.

그러나 카이퍼는 바빙크가 간행물을 통해서 슐라이어마허를 칭찬하는 것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합니다. 카이퍼는 화란의 개혁주의 공동체에서 쓴  바빙크의슐라이어마허를에 대한 칭찬은  그가 얼마나 이 철학자가 그리스도의 교회에 말할 수 없는 악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의식이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빙크가 이단들과 그들의 이단성에 대하여 비난하는데 실패한 것에 대한 카이퍼의 두 번째 공적인 비판은 바빙크가 윤리 신학자인 ​​​​다니엘 샹드피 드 라 소사예Daniel Chantipie de la Saussaye에 관한 책을 출간한 것이었습니다. 이 경우에 있어서 바빙크의 잘못은 그가 소셰를 칭찬한 것이 아니고, 그가 소셰의 이단성을 날카롭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비난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비록 바빙크는 소셰의 가르침이 “성경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기독교 진리라기보다는 범신론에 물든 철학”이라고 결론내리고 있지만, 정작 바빙크는 비평을 해야만 하는 경우에 있어서, 소셰의 신학에서 바빙크 자신이 완전히 동의하는 것을 제한시키는 요소들이 있는 충격적인 진술에만 자신의 비평을 한정시키고 있습니다.


카이퍼는 분명 화가 나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이것이 허용될 만한 일입니까? 만약에 누군가의 신학이 성경과 충돌이 되며, 기독교 진리보다는 철학을 제공하며, 범신론으로 인도한다면, 그리고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경계를 약화시킨다고 결론이 지어진다면, 당신은 이미 화란에서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수 많은 사람들을 미혹시킨 이와같이 완전히 위험한 신학에 대하여,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다고 단순하게 말하는 것과 같은, 우호적인 판단을 내리겠습니까? 사람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우리를 어떻게 비판하던지 간에 우리는 이에 대하여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카이퍼는 잘못된 가르침들에 미혹이 된 개혁교회의 구성원들에게 긴급하게 경고하고자, 복음을 무너뜨리는 모든 이들은 물론이고, 이러한 두 신학자들에 대한 담대하고 엄중한 그리고 근원적인 비난을 원했던 것입니다. 카이퍼는 이러한 중대한 관심사에 대하여 바빙크보다도 훨씬 더 대립적이었습니다.

이러한 비평들은 바빙크에게 쓰라린 고통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만약에 카이퍼가 자신이 공적인 비평을 통해서 바빙크를 바꿀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헵이 추측했던 경우였듯이, 카이퍼는 “완전히 실수한 것이었습니다. 대중의 비판보다도 바빙크를 더 짜증나게 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드 라 소사예의 일로 카이퍼가 바빙크를 비평한 순간부터 바빙크의 카이퍼에 관한 친근한 표현들이 감소되었습니다.

그가 철학자나 이단자, 그리고 이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하여 철저히 비난하는 것을 망설이는 것이나, 철학이나 비정상적인 신학에서 무언가 진실되고 선한 것을 기꺼이 찾으려고 하는 것은, 그의 무비평적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바와같이, 결코 그의 평화를 사랑하는 성격에서 기인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빙크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신학을 위한 철학적 지침으로서 "신토마스주의적 철학"을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토마스주의"는 로마카톨릭 교회의 뛰어난 철학자이면서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신토마스주의" 철학은 로마카톨릭 교리의 19세기 형태로서, 이는 타락 후에도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서도 어느 정도의 선한 것과 어느 정도의 신을 경외하는 것이 있기에 기독교는, 기독교 문화와 사회에서까지도, 선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형성하기 위해서 믿지 않는 사상가들과 협력할 수 있고, 심지어는 그들의 작품 안에서도 참되고 선한 것을 만들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 신학에 따르면, 사람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태초에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 "초자연적인" 재능,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 의, 거룩함을 상실했어도, 이성과 의지의 "자연적인" 재능은 남겨 있기에, 비록 타락 후에는 어느 정도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선하고 참된 사고와 바램의 능력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은혜는 타락한 죄인의 완전히 부패한 마음과 의지를 회복하거나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마음과 의지의 근원적인 선함을 온전하게 하거나 “완전하게”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은혜는 "본성"을 세워나가고, 보태고, 완성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로마 카톨릭 신학에서는 은혜는  본성에 의존하는데, 여기서의 본성은 은혜가 요구하는 조건을 실행하는 죄인의 자연적 의지를 말합니다.

여기서 바빙크(그리고 카이퍼)의 일반은혜의 이론이 등장하게됩니다. 이 이론의 옹호자들에 따르면, 일반은혜는 모두 하나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와는 별도로, 세상의 위대한 사상가들의 이론에서 참되고 선한 많은 것들을 설명해주기에, 기독교인은 하나님과 인간과 피조물에 관한 세상의 생각을 취하는 것과, 심지어는 이러한 세상적 생각과 협력할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개혁파의 일반은혜에 관한 이론은 본질적으로 로마카톨릭 교회에서 지배하고있는 철학과 같은 것입니다. 이는 로마카톨릭 사상가와 기관들과 일반은총의 이론에 전념하고있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실질적 협력을 설명해주기까지 합니다.

바빙크에 대하여 호의적인 전기작가 브레머R. H. Bremmer는 "모든 바빙크 주석가들은 신토마스주의 철학이 바빙크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사실에 동의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빙크는 토마스에 의해서 기독교화된 개념들의 교리 안에서 기독교 신앙이 자신의 시대에 문화를 풍성하게 하고 기독교화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빙크가 근본적인 로마 카톨릭 사상에  참여하려는 것과 개혁주의 신학의 중요한 관점들에서 경건치 못한 이들의 것을 수용하면서 그 이론을 배우려는 밑바탕에는 유럽의 문화를 기독교화 하고자 하는 바빙크의 깊은 관심과 강한 열망과 굳건한 다짐이 있었습니다. 문화를 기독교화 하고자 하는 것은 바빙크의 사역의 주된 목적 가운데 한 가지였습니다. 헵은 바빙크가 기독교계와 문화의 통합을 원한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소위 기독교계와 문화 사이의 또 다른 통합에 대한 희망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또한 바빙크의 동료인 아브라함 카이퍼의 염원이기도 했습니다. 카이퍼의 삶에 있어서의 가장 큰 프로젝트들 가운데 한 가지는 "서구 유럽 사회의 문화를 다시 기독교화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브레머가 바빙크의 생애와 사역에 관한 연구 마지막에 요점을 정리할 때, 그 제목은 "문화와 복음"이었습니다. 문화에 대한 관심, 특히 복음을 보편화 되어있는 문화에 접목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서 문화를 기독교화 하고자 하는 관심은 헤르만 바빙크의 사역에 있어서 복음과 동등한 비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디에서도 자신의 교회에 대하여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세상의 사상과 예술과 과학과 삶의 방식을 '기독교화'하기 위해서 복음을 가르치고 고백하라"는 문화명령을 부과하신적은 없습니다.

바빙크와 동시대 사람이며 현대주의 신학자인  로싱은 "이 문화의 세상에서 기독교계의 위치에 대한 질문은 ….  바빙크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했다"고 전하고있습니다. 바빙크에게 호의적인 브레머는 바빙크가 자신의 시대의 문화에 대하여 열정적이었던 것을  좀 더 호의적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바빙크가 자신의 교의학을 저술할 때 문화에 대하여 깊고 의도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바빙크의 교의학의 가장 큰 가치는 의심의 여지없이 지속될 것이며, 우리가 이것을 읽을 때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19세기말에 자신의 시대에 어떻게 문화적 관심사에 접근하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로싱과) 비슷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빙크의 교의학이 그 당시의 문화에 상당히 관련되어있기에, 브레머는, 이를 높이 칭찬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이를 "최고의 문화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빙크가 말년에 깊은 우울감에 빠지고 거의 침울하게 되도록 영향을 미친 3가지 요소들 가운데 한 가지는 의심할 여지 없이 "문화 문제"였습니다.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이나 후에도 문화가 기독교화 되어간다는 어떠한 증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 조그마한 나라였던 네덜란드가 아브라함 카이퍼 수상을 포함한 어떠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독교화 되어간다는 어떠한 증거도 볼 수가 없었던 것은 의문이었습니다.

바빙크나 카이퍼에게 있어서 이것에 대한 책임을 이미 자신의 시대에 존재하고 있었던 동시대의 현대주의자들에게 책임을 돌리고있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었습니다. 사실 "신칼빈주의"(카이퍼와 바빙크와 그들의 제자들의 일반 은혜와 문화에 영향을 주고 문화와의 협력을 도모하는 신학)는 칼빈과 개혁주의 교리들로 구성된 전통적 칼빈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단절되었으며, 단지 위장한 현대주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헤르만 훅세마가  개혁주의 신학에서 카이퍼와 바빙크의 일반은혜 신학(비록 어떠한 경우에는 어느 정도 비슷한 용어이지만, 요한 칼빈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며, 이러한 이론의 옹호자들의 요구들에 모순이 되고있는 것이다)을 제거하려고했을 때, 그(훅세마)는 카이퍼와 바빙크가 만든 이러한 신학의 두드러진 주요 면들과, 그 신학 안에 있는 이질적인 요소들과, 그 신학 안에 담겨진 붕괴 되어가는 변화들과, 일반은혜 이론이 그리스도의 개혁교회에 제시하는 “세상을 기독교화하라"는 불가능하고 완전히 비성경적인 부담들에서 개혁주의 신학과 교회들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두는 하나같이 "선의로 한 제의"- 이는 보편적이고, 저항할 수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서- 라는 더 중요한 단죄에서 벗어난 것이었으며,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선택에 근거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은혜를 목적으로 하는 구원의 효과적인 성취를 근거로 하지도 않습니다. 훅세마가 카이퍼와 바빙크와 그의 신칼빈주의 제자들의 일반은혜 이론을 거부하였던 것은 교회와 개개의 기독교인과 진정한 개혁 모두에 있어서, 개혁주의 신앙과 삶에 거대한 영향을 준, 개혁주의 신학의 중대한 발전이었습니다.

바빙크가 자신의 신학의 밑바탕에 의도적으로 자연/은혜라는 로마카톨릭 철학을 채택하고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와 관련된 일반은혜의 이론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자주 반복되는 말과 같은 바빙크의 교의학 전반에 걸쳐서 흐르는 문구와 바빙크의 신학적 사상인 "은혜가 자연을 완전하게 한다"를 표현하는데 필수적인 문구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이유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한 가지 문구는 바빙크가 "자연은 은혜에 앞서고; 은혜는 자연을 완전하게 한다. 이성은 믿음으로 완전하게 되며, 믿음은 자연을 전제로 한다" 면서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를 다루는 시점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라틴어 원어인 “Gratia perficit naturam,”는 "은혜는 자연을 완성시킨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보통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러한 문구를 정통주의적 의미에서, 구원 사역에 있어서, 개개의 인간에 관해서든, 혹은 피조물 자체에 관해서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폐기하지 않으시며, 새로운 인간이나 새로운 우주를 창조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육체적 존재를 부여하신 죽은 남자나 여자나 아이와 자신이 태초에 창조하신 하늘과 땅을 회복하고 새롭게하고, 그리고 궁극적으로 일으키신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바빙크의 신학은 이러한 문구의 의미를 강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바빙크가 이러한 구절들에 대해서  정통주의에서의 개념보다도 더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는 않은 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기에, 그의 신학은 타락 하였더라도 인간의 본성이 선하고 참된 것을 포함한 건전한 상태로 남아있다는 경건하지 않은 사상을 수용하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데, 이러한 경건하지 않은 사상에
건전한 개혁주의 신학의 "은혜" 자체를 접목 시킴으로써, 자연스럽게 "본성"을 선하고 참된 것으로 완성 시키려고 할 뿐만 아니라 완전한 것으로 간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단순히, 플라톤이나 칸트, 혹은 슐라이어마허, 혹은 다윈과 같은, 자연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진리를 보완해주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신학과 학식있는 경건치 않은 이들의 지혜와의 관계성에서의 이러한 관점은 필연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의 철학 안에 담겨있는, 혹은 슐라이허마허의 이단적 신학에 담겨있는, 혹은 찰스 다윈의 과학 이론에 담겨있는, 이 세상에서 말하는 지혜와 협력하게 만듭니다. 바빙크 자신이 "은혜는 오직 자연을 복원시킨다"는 라틴어를 “복원restores"으로 번역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바빙크가 "은혜가 자연을 완전하게한다"는 글귀를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하고 있는지 와는 관계없이, 그의 교의학에는, 그가 문화와 그와 관련된 주제에 대한 열정으로 인해서, 자신의 신토마스주의 철학의 전제들에 힘입어, 그리고 자신의 일반 은혜 이론의 도움을 받아서, 개혁주의 신학을 경건하지 않은 비성경적인 사상과 접목시킴으로서, 개혁주의 신앙을 심각하게 양보하고 있다는 많은 증거들이 있습니다.

바빙크는 우리가 "이방 종교들 안에서도 나타나는 진리의 요소들을 인식"하여야만 한다고 생각하면서, "토마스 아퀴나스"를 지지할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일반 은혜의 교리"는 개혁주의에 속한 사람으로 하여금 "이방 세계 안에서도 나타나는 모든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함을 인식할 수 있게 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영과 그의 일반 은혜의 활동은 과학이나 예술, 도덕과 법률에서 뿐만이 아니라 이방 종교들에서도 인식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나서는 다음과 같은 끔직한 주장을 합니다: "이런 이유로 기독교는 이교도에 대하여 대립적으로 존재할 뿐만이 아니라, 이교도의 성취를 위해서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타락하고 사악하고 죄악된 인간의 본성을 완성시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자연 신학"이 있으며, "자연 신학은 믿음의 서론"이라는 것입니다.

바빙크는 종교개혁가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이성, 철학이 신학적 문제에 대하여 말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종교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이성은 까막눈”이라고 주장하는 마틴 루터를 비판합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로마 카톨릭 신학에 영향을 준 철학자였습니다. 로마 카톨릭에서 은혜의 복음이 붕괴된 것에 대한 철학자의 광범위한 영향을 인식하고서, 루터는 한번은 "저주받을 악랄한 이교도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러가라"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러나 바빙크는 신학에서 이와같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배제시키는 것은 과잉이라고 비난합니다.

협력을 도모하는 바빙크에게,
모하메드와 같이 [비기독교] 종교들의 창시자들이 "단순히 사기꾼, 하나님의 대적자, 악마의 공범자"라고 여겨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교도와 비기독교 종교들 안에는 복음에 대한 "접촉점"이 있으며, 기독교인이 모든 비기독교인들을 만날 수 있는 굳건한 기초가 있을 것입니다. 신앙은 불신자들의 (어둡고 무지하고 종교적인) 마음을 보충해 줄 것입니다!

바빙크가 어떻게 자신의 신토마스주의와 일반 은혜 이론을 자신의 교의학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하였는지에 대한 방법은 다음의 사례들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바빙크는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인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었던 낙원에서의 행위 언약 교리를 변론하면서 "이는 슐라이어마허의 의존과 칸트의 자유를 결합한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선언에 담겨있는 분명한 것은 슐라이어마허와 칸트가 바빙크의 신학적 사고에 어떤 권위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증거의 경우가 아니었다면, 바빙크의 아담 언약에 대한 구성이 전자의 신학과 후자의 철학을 만족시키는 찬사를 받을 만한 행위 언약이 되었을 것입니다. 마땅히 바빙크의 아담 언약 신학에 있어서 결정적이 되어야했던 것은 골로새서 1장 13절 이하의 가르침에서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선이 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다윈과 그 밖의 과학자들의 진화론에 대한 바빙크의 양보입니다. 브레머는 “바빙크가 19세기 중엽에 강력하게 등장한 새로운 과학적 사고, 특히 다윈의 작업에 매우 공감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첫 장, 특히 창세기 1장과 2장, 그리고 창조 주간의 7일과 관련하여, 바빙크는 성경은 “전설이나 신화 혹은 시적인 환상이 아니라 …  역사, 즉 신뢰할 만하고 믿을 만한 역사를 제공하고 있다”고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빙크는 창세기 1장과 2장을 과학의 명백한 증거, 특히 창세기 1장이 가르치고있는 창조 주간의 6일보다도 오래된 지구인 매우 오래된 지구의 "지리학과 고생물학"과 협력을 도모해야 한다는 압력에 굴복했습니다. 바빙크는 우선 창세기 1장 1절의 하늘과 땅의 창조를 창조 주간의 첫째날보다도 앞에 둠으로서 이를 실행하였습니다. 창세기 1장 3절은 1절과 2절에 기록된 일들보다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의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은 믿지 않는 과학자들이 요구한 수백만년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준 것입니다.

바빙크가 성경을 불신 과학자의 이론에 적합화시킨 두번째 요소는 좀 더 심각합니다. 바빙크는 창세기 1장의 6일이 실제적인 역사적 날들임을 부인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사실상 창세기 1장의 역사성을 부인합니다. 낮이 하루 저녁과 하루 아침으로 제한된다는 창세기 1장에서의 성령의 증거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바빙크는 "창세기 1장의 날들은 … 특별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 날들은 “특별한 우주의 날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 날들은 실제로 며칠이 아니며, 오랜 기간으로서 수백만년은 아니더라도 수십만년이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과학자들에게 오래된 지구와 창세기 1장의 역사성을 양보한 후에, 이러한 양보가 창세기 2-11장의 역사성과 성경의 영감에 대하여 갖게될 모든 함축적 의미와 함께 바빙크는 한 단계 더 앞으로 나아가게됩니다. 그는 이러한 긴 기간 동안의 진화적 발전 과정을 허락하는데, 이는 믿지 않는 과학자가 당연히 우선적으로 가지고있는 오래된 지구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창조의 각 날에는 우리를 의심하게 만드는 창세기의 명백한 말씀보다도 훨씬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데 … 각 날들의 창조 사역은 창세기가 요약적으로 알려주고 있는 것보다도 더욱 웅장하고 더욱 풍성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바빙크는 자신의 창세기 1장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성경은 지질학과 고생물학이 이 세기에 밝혀낸 모든 사실과 현상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시간의 길이를 제공한다"며 만족감을 표현합니다.

진화론자들에 대한 바빙크의 양보는 그가 자신의 개혁 교의학과 "창조냐 진화냐"라는 강력한 제목의 소책자에서 다루었던 진화 과학 이론과 특히 다윈 방식의 진화론에 대한 그의 직설적이고 강력했던 비판과는 모순이 됩니다.

이미 바빙크 자신의 시대에 그의 학생들과 제자들은, 바빙크가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결론으로 불신 과학자들의 지혜를 수용함으로서, 창세기 1장과 2장 뿐 아니라 창세기 3장의 역사성을 담대하게 총체적으로 거부하게 되는 바빙크의 타협을 받아 들이게 됩니다. 동시에 그들은, 바빙크가 창세기 1장의 날들에 진화 과학자들의 이론을 해석학적으로 적용시킨 것이 암시하였던  바와같이, 공개적으로 성경의 영감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문화에 접목시키려는 바빙크의 이러한 잘못의 심화는 바빙크의 교의학에서의 다른 심각한 잘못, 즉 성경의 교리와 관련된 약점들을 악용하는 결과를 수반합니다.

교의학자로서의 바빙크의 두 번째 심각한 약점은 성경에 대한 잘못된 교리였습니다. 바빙크는 생애 내내 성경의 영감에 관한 근원적 의심으로 몸부림쳤습니다. 이러한 의심은 노년에 더욱 증가되었습니다. 레이든은 그에게 영적이고 신학적으로 심각한 손상을 입혔습니다. 이러한 손상은 그의 생애 내내 지속되었습니다. 그는 결코 자신의 서재 벽에서 자신의 구약 고등비평 교수였던 아브라함 쿠에넨의 초상화를 떼어내지 않았습니다.

1880년에 바빙크가 분리교회에 사역자로 들어가려고할 때 그가 자신의 분리교회 시험관들에게 설명하려고 했을 때 자신의 신학에 관하여 시험관들이 가지고 있었던 한 가지 의문점은 그의 성경 교리였습니다.

바빙크의 영혼에 자리잡은 성경기록에 관한 이러한 의문이 얼마나 깊었는지는 그가 자신의 사역과 삶의 마지막에 자신의 교회 회의에다가 벨직신앙고백 2-7항에 있는 성경기록 교리를 교리의 개정이라는 관점에서 연구할 것을 촉구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바빙크가 임종했던 해에 개최되었던 리와르덴 교회회의(1920)에 바빙크가 보내었던 보고서는 비록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유지할 것을 촉구하고 있지만, 젊은 목사들의 신앙고백의 전면적인 개정의 움직임에 반대하면서, "지금 신앙고백의 특별한 점들을 좀 더 공식화하고 발전시킬 때가 되었다"고 교회 회의에 촉구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점들 가운데 한 가지는 "벨직 신앙고백 2-8항에 있는 성경의 신적 영감과 권위"였습니다.

반드시 알아야만 할것은, 바빙크는 성경의 영감을 의심하는 떼어낼 수 없는 죄로 몸부림쳐야만 했습니다. 그는 여기에 단순하게 항복한 적은 없었습니다. 성경의 영감에 관한 의심은 상당히 심각한 죄이며, 바빙크 자신이 자신의 신학과정을 훈련시키는 학교로서 성경를 부정하는 교수들로 구성된 레이든을 자신이 선택하였고, 자신을 비성경적이고, 실은 반성경적인(이는 당연히 필연적으로 성경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론에서 진리와 선을 발견하도록 결정을 한 것이기에, 자신이 스스로 자신을 이러한 의심에 열려있도록 한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어떤 이들은 바빙크의 의심의 몸부림이 어떤 영웅적인 것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이 문제와 그 심각성을 알고 있었으며, 결코 이 의심에 완전히 굴복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의 생애 말기에 하였던 "나는 믿음을 지켰다"는 유명한 말은 성경과 관련한 그의 생사를 다투는 몸부림이었으며, 기독교 신앙에 치명적인 이 의심에 저항하였던 자신의 확신의 표현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개혁교의학에는 성경적 권위에 대한 섬세하고 건전한 설명과 변론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어떠한 것도, 바빙크가 신학교 수업에서 자신의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도하였던, 개혁교의학에서의 바빙크의 잘못된 성경 교리의 심각성을 숨기거나 축소시키지 못합니다. 바빙크는 성경이 신성한 책이면서 신성한 말씀일 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책이면서 인간의 저술, 즉 완전한 인간의 것임을 인정합니다. 여기에는 바빙크의 성경 기록에 대한 결정적인 관점이 담겨 있습니다: "성경는 완전하게 하나님의 영의 작품이면서 … 그리고 동시에 저자들의 활동의 산물이다. 모든 것이 신성하며, 모든 것이 인간적이다" 이와 관련하여, 바빙크는 성령이 성경의 "주된 저자"였음을 말하는데, 이는 도구가 된 인간들이 비록 2차적이었지만, 역시 저자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빙크는 신앙고백서들, 실제는 성경에서 눈을 떼고서 쿠에넨의 초상화에 자신의 눈을 고정시켰습니다. 신앙고백서들은 성경를 결코 인간에게서 기인된 것으로 보지 않고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신앙고백서들은 성경을 "인간적"이라고 부르지 않고 절대적으로 "신성한" 것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성경를 "사람의 말", 혹은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사람의 말"라고 부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만 부릅니다.

성경 자체에서는 성경이 성령께서 성경을 만드시는데 사용하셨던 인간들의 산물, 즉 인간의 말이라는 것을 부인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사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어떠한 예언도 없는데" 이는 성경의 어느 부분도 하나님과 인간과 인간 작가의 창조에 관한 사적인 생각에서 유래된 부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성령 하나님의 "해석"의 산물입니다. 이러한 경이로움에 대한 해석은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들이 원래 말하였던 것을 기록하였다는 것입니다.(베후 1:20-21) 또는 디모데후서 3장 16절을 문자적으로 번역한 것과 같이,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 즉 하나님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영감의 이러한 경이로움의 결과는, 우리가 "더욱 확실한 예언의 말씀"을 갖게 된 것인데, 이 말씀은 변화산에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더욱 확실한 말씀입니다(베후 1:17-19). 만약에 성경이 전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인간 저자들의 산물이라면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분명한 것은 어떠한 인간의 말도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보다도 더욱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오직 성경이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배타적이고 전적인 말씀, 즉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이는 변화산에서 그리스도에 관하여 하신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더욱 확실한 것입니다.

바빙크는 자신의 영감론을 "유기적 영감론"이라고 부르면서, 이를 이미 개혁주의 전통에서 발견되어진다고 추정되어진 영감 교리와 비교 하였습니다. 바빙크는 이와같은 잘못된 영감 교리를 "기계적 영감론"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빙크의 "유기적 영감" 교리를 거부하는 것은 영감에 있어서, 성령께서 사람의 독특한 훈련과 재능, 그리고 심지어 개성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만들어 내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인간 저자가 자신들이 작업에 전념하는데 있어서 의식적으로 작업하였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바빙크의 교리를 거부하는 것은 기록된 언어가 인간의 언어에서 기인된 "산물"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유기적) 영감에서 놀라운 것은 인간 저자가 진정한 도구가 되어 결과적으로 나타난 언어가 하나님의 말씀이 된 것이며, 유일하고 전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바빙크의 성경 기록 교리의 약화는 바빙크의 교의학에 영향을 받았던 많은 개혁주의 교회들에게 재앙을 가져왔습니다. 창세기 1-11장에서 영감된 기원에 대한 진리인 성경 기록 교리에 관한 그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바빙크 자신의 타협은, 기독교 신앙의 근원적인 면에 있어서 그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특히 창세기 1-11장에 적용된, 바빙크의 전적으로 인간적인 성경 기록에 관한 교리는, 화란에서는 얀 레버Jan Lever를, 그리고 미국에서는 하워드 반 틸Howard Van Till을 출현시켰습니다.

그러나 바빙크의 나쁜 성경 교리는 이미 바빙크 자신의 시대에, 특히 기원에 관한 교리에 있어서, 재앙적 결과들을 가져왔습니다. 바빙크의 임종 바로 전에 화란 개혁교회에서의 젊은 목회자인 J. B. 네텔렌보스 목사는 성경의 처음 장들의 역사성을 공개적으로 부정하고 성경이 영감을 받지 않았다고 비판했습니다. 1919년 그의 당회에서는 "네덜란드 신앙고백 4항, 5항과 관련하여 그의 일탈한 의견을 근거"로 그를 파면하였는데 이는 그의 이단적 성경교리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네텔렌보스는 자신의 스승, 즉 헤르만 바빙크로부터 받은 가르침에 호소하였습니다. 바빙크는 1920년 리우바르덴 회의에서 자신의 이전의 학생을 징계하는 것을 지지하기를 원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거침없이 네텔렌보스를 변론하였습니다. 리우바르덴 회의에서는 네텔렌보스가 성경에 대한 신뢰와 무오 그리고 신앙의 근거에 관한 벨직 신앙고백 4항과 5항에서 일탈한 것을 근거로 파면한 것을 확인하고 이를 승인하였습니다.

바빙크가 사망한지 몇 년 후에 그의 학생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J . G. Geelkerken목사는 창세기 3장의 역사성, 특히 "말하는 뱀"의 실체에 관한 부정으로 인해서 아센 공회에서 징계를 받았습니다. 여기서의 이슈는 Geelkerken에 의해서 제기되었고 1926년 아센 특별 공회에서 판결 되어진 것으로서, 재판 기간과 그 이후의 총회에서 표현되었던 바와 같이, 감각으로 지각되어질 수 있고 만져질 수도 있는 뱀이 말한 것이었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Geelkerken은 창세기 3장의 역사성 즉 인류가 타락한 것에 대한 성경의 설명을 부인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하는 뱀"에게 말씀하셨던 원복음에 대한 성경적 설명을 부인하였습니다. 겔케르켄을 비판하는데 있어서, 공회에서는 그가 성경에 관한 벨직신앙고백서 4항과 5항, 특히 “그 안에 포함된 모든 것을 아무 의심없이 믿는다"는 문구를 위반했다는 책임을 물었습니다.

또한 겔케르켄은 자신을 변론하기 위해서 자신의 교수였던 헤르만 바빙크의 소위 성경의 "유기적" 영감이라 불리우는
성경 교리에 호소하였습니다. 아센 공회에 의한 창세기 3장의 해석에 대항하기 위해서 그는 "성경의 유기적 개념은 기계적 개념에 대한 선호가 위축된 것이었으며 … 수용되어진 '저명한 카이퍼와 바빙크'의 유기적 성경교리는 아직 충분히 발전되지 않은 것이다"라고 변론하였습니다.

네텔렌보스와 겔케르켄의 경우에 있어서, 바빙크의 임종 몇 년 후에 바빙크의 미망인과 딸, 그리고 그녀의 남편이, 네덜란드의 개혁교회를 떠나서  겔케르켄과 몇몇 사람들이, 창세기 3장의 신화적 성격과 이러한 창세기 3장에 대한 관점으로 내포되어진 성경의 영감에 대한 이단적 교리에 대한 가르침으로 인하여, 겔케르켄이 파면되면서 새롭게 만든 교단의 일원이 된 것은, 확실히 바빙크에 대한 생각과 동정심으로 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텔렌보스와 겔케르켄은 둘 다 그 당시 네델란드의 개혁교회에서 변화와 무언가 새로운 신학과 그리고 신앙고백서의 개정을 외치는 자유로운 '젊은 목회자들의 운동"의 회원들이었습니다. 이 운동에서는 바빙크를 영적인 아버지로 여겼습니다.

그 당시 현대주의자들이 카이퍼와 바빙크가 존 칼빈과 옛 칼빈주의로부터 근본적으로 떠났다고 비난하였던 근거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성경 교리였습니다. (카이퍼는 이를 바빙크와 공유하였습니다) 레이든 대학의 교수였던 자유주의자이면서 현대주의자인 D. B. Eerdmans교수는 카이퍼와 바빙크의 "유기적 영감"교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대의 개혁주의 신학은 옛 개혁주의 성경 교리를 죽이는데 있어서 양날의 검을 사용하고 있다. 먼저는 이들은 성경의 모두가 신적인 것은 아니며 많은 부분이 단지 인간적인 것이라고 가르치기에, 이를 탐구하는 현대 비평 학자들은 이것이 사실이며 선한 것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성경에서 신적인 것 조차도 역시 완전히 인간적인 것이며 인간의 유기체와 인간의 인격에 의해서 성경이라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라고 가르친다.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에는, 특히 언약의 구원을 포함하는 구원에서의 바빙크의 주권적 은혜에 대한 변론에는, 고백과 자세한 설명과 변론과 발전적인 개혁 신앙의 풍성하고 영광스러운 것에 대한 감사가 있지만, 이것이 개혁교회 혹은 신학자들에게 금에 오물이 섞인 것을 가리울 수는 없습니다. 불경건한 이들의 생각과 이론 가운데에도 선함과 진리가 풍성하게 있다는 바빙크의 생각; 복음을 문화에 접목시킴으로서 기독교와 불경건한 문화의 연합을 가져오고자 하는 그의 열정; 하나님의 일반 은혜에 대한 그의 교리; 그리고 성경을 전적인 인간의 책이라고 보는 그의 잘못된 관점은 후대의 전통에서 비난받고, 거부되며, 제거되어야 합니다.


(원문)


Common Grace Herman Bavinck: The Man and His Theology





Prof. David J. Engelsma


The following is an expanded text of an address held at a conference of Protestant Re­formed officebearers in Redlands, CA on March 6, 2012. The text was published in the Protestant Reformed Theological Journal, vol. 46, no. 1—November 2012, pp. 3–43. [PDF Version Here]




With the publication of Herman Bavinck’s Reformed Dogmatics in English for the first time, by the Dutch Reformed Translation Society (the fourth and last volume appeared in 2008), there has occurred a kind of Bavinck-renaissance in North America. This would be a good thing, if the Reformed churches and theologians would pay attention to the sound and solid Reformed doctrines in Bavinck’s Dogmatics, allowing these doctrines to critique, correct, and inform the teachings of the churches and theologians.


What has happened, however, is that the sound doctrines in the Reformed Dogmatics have largely been ignored, or deliberately misrepresented, particularly Bavinck’s doctrine of the covenant of grace.


Also, churches, theologians, and educational institutions have seized upon erroneous doctrines in the Reformed Dogmatics, and have emphasized these false teachings, especially the doctrine of a common grace of God.


Similarly, the notable Bavinck conferences have largely ignored the Reformed doctrines of Bavinck, as set forth in the Reformed Dogmatics, and have devoted themselves instead to Bavinck’s views on ecumenicity, psychology, and culture. This was true of the Bavinck conference sponsored by Princeton Seminary soon after the publication in English of the last volume of the Reformed Dogmatics.
The same was true of the Bavinck conference sponsored jointly by Calvin Theological Seminary and the Dutch Reformed Translation Society. Very few, indeed almost none, of the speeches concerned a distinctively Reformed doctrine. Most of the speeches were about church union and the “Christianizing” of culture. This was ironic in view of the fact that the Dutch Reformed Translation Society had just spent more than $100,000 and innumerable hours translating and publishing Bavinck’s Dogmatics.


Bavinck is himself partly responsible for this neglect of his Dogmatics. Alongside his dogmatical work was always a powerful cultural urge. During the last ten years of his life and ministry, this concern for culture became virtually his only interest. And he wrote two tracts propounding a common grace of God that is supposed to enable the church to cooperate with the ungodly in transforming culture.2


But the main explanation of the widespread ignoring of Bavinck’s theology in favor of his cultural writings by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institutions and theologians is that these institutions and theologians have little interest in the sound doctrines of the Reformed tradition as they are confessed and defended in Bavinck’s four volumes of dogmatics, whereas these institutions and theologians are obsessed with culture and ecumenicity.


The conference that I am addressing may well be the first Bavinck conference that is devoted, not only chiefly, but also exclusively to the Reformed doctrines of the Reformed Dogmatics and, thus, to the real significance of the monumental Reformed Dogmatics, if not the real significance of Bavinck himself.


At this conference, we are concerned with the theology of Herman Bavinck. Nor is our concern merely academic. We desire to learn and profit from the glorious truths of the Reformed faith as they are confessed, explained, defended, and developed in Bavinck. Where they are present to spoil Reformed theology, the weaknesses and errors must be exposed and rejected. Our purpose is to maintain and develop further the sound doctrines of the Reformed Dogmatics for the benefit, especially, of the Protestant Reformed Churches.


In this first address, I am to introduce “the man and his theology.” I do not intend simply to tell you the outstanding features of the life and personality of Herman Bavinck and then summarize his theology—the content of the Reformed Dogmatics. But I will relate the man and his theology, the life and the dogmatics.


For my knowledge of the man and his life, I rely especially on the three most important biographies, or studies, of Bavinck in Dutch: Dr. Herman Bavinck, by V. Hepp;3 Herman Bavinck als Dogmaticus, by R. H. Bremmer;4 and Herman Bavinck en Zijn Tijdgenoten, by R. H. Bremmer.5


I have also read the only full biography of Bavinck in English, Herman Bavinck, by Ron Gleason.6 Although acclaimed by reviewers, Gleason’s biography has serious weaknesses. It is noticeably anti-Kuyper. It grinds an axe for the Reformed Churches in the Netherlands (Liberated) and their theology. It contains many typos and, annoyingly, the use of wrong words, which sound like the words the author has in mind. For example, Bavinck is said to have “petitioned God with the plaintiff cry.”7 Also, “true religion … preaches a God who is imminent.”8 Yet again, Kuyper “would broker no challenges.”9


The book also contains factual inaccuracies. Although it is virtually impossible for one living in the United States to check the figures in old Dutch records, it seems highly unlikely that the number of delegates from the large Reformed Churches in the Netherlands to the important Groningen 1899 synod was only eight, as Gleason indicates.10


A more serious inaccuracy is doctrinal. Gleason proposes that the doctrine of the close relation between covenant and election was the unique teaching of Abraham Kuyper, that this doctrine is exclusively the implication of a supralapsarian view of the decrees, and that this doctrine results in “an almost hyper-Calvinistic view of justification by faith and salvation.”11 Gleason’s proposal is mistaken in every respect. Not only Kuyper but also Bavinck taught the close relation of covenant and election, indeed that election governs the covenant.12 Bavinck taught this doctrine even though he did not share Kuyper’s supralapsarian view of the decrees. And the doctrine that declines to sever God’s covenant and covenant salvation from God’s gracious will of election is not, and does not lead to, hyper-Calvinism. On the contrary, the doctrine of a close connection between election and covenant is pure, sound Calvinism.


In preparing this lecture, the scope of which is vast, for the conference, I kept before my mind the warning of an event in Bavinck’s life. Hepp relates that at the public ceremony of Bavinck’s installation as professor of theology in the seminary of the Christian Separated Reformed Churches (the churches of the Secession—“Afscheiding”—of 1834) in Kampen, on which occasion the professor would give a fitting address, the man who preceded Bavinck, also a newly appointed professor, spoke for longer than three hours in the severe cold of a January day. Bavinck became so angry at this outrageous behavior that he stormed out of the auditorium during his colleague’s speech, creating a scene. Only the pleas of his old father and some friends prevailed upon Bavinck to give his own address (“The Science of Holy Theology”). But he read the speech as fast as possible, without any inflection in his voice.13


And Bavinck was notoriously irenic.


Since this is not necessarily true of all in my audience, I am determined to keep this speech under three hours.




Important Aspects of Bavinck’s Life


Herman Bavinck was a son of the Secession, the wonderful reformation of the Reformed church in the Netherlands that began in 1834 in Ulrum, Groningen, with the preaching and then the deposition of the Rev. Hendrik de Cock. On his departure from Kampen for the Free University in Amsterdam in 1903, Bavinck said of himself, “Ik ben een kind der scheiding en dat hoop ik te blijven” (“I am a child of the Secession and I hope to remain that”).14


In the providence of God, that Bavinck was both physically and spiritually a son of the Secession accounts for much that is sound in Bavinck’s theology, particularly his doctrine of the covenant of grace, as well as for the godliness and warmth of his Reformed Dogmatics.


Herman Bavinck was born in 1854, twenty years after the beginning of the Secession and the year that the churches of the Secession—the Christian Seceded Reformed Churches—opened their seminary in Kampen, where Bavinck would later teach for many years.


His father, Jan, was a pious, humble man, who had been converted in 1840 by a disciple of de Cock. The preacher by whom Jan Bavinck had been converted was imprisoned some thirty times by the Dutch authorities for preaching the gospel recovered by the Secession. In this charged theological and ecclesiastical climate was Herman Bavinck reared. Herman Bavinck’s father was himself a minister in the Secession churches, the first to receive any kind of a formal seminary training.


When Herman Bavinck was installed as professor in the Secession seminary in Kampen, in January, 1883, the faculty included Helenius de Cock, Anthony Brummelkamp, and Simon Van Velzen. The first was the son of the renowned Hendrik de Cock, the human founder of the Secession churches, and the last two were illustrious “fathers of the Secession.”


Bavinck was born and reared at the very heart of the then still vibrant and powerful tradition of the Secession. The theology and spirit of the Secession were the air he breathed. By the “spirit” of the Secession is meant its piety, its wholehearted commitment to the Reformed confessions and the teachings of John Calvin, and its repudiation of the theological modernism that Hendrik de Cock had so sharply condemned.


This son of the Secession, nevertheless, was attracted to the world. The attraction was not moral, as though Bavinck found its godless life pleasing, much less as though he lived immorally himself. Not only was Bavinck’s personal life holy, but he also wrote a treatise excoriating the behavior of European society in his time.15 Bremmer informs us that it was a “thorn in the eye” to Bavinck that some of the members of the Secession churches lived careless, wicked lives in contradiction of their confession.16


But Bavinck was attracted to the world’s learning: the wisdom of the educated thinkers of his own and past times; the scientific theories, for example the evolutionary theory of his contemporary Charles Darwin; even, in certain respects, the unbelieving theological wisdom of modernist theologians.


Bavinck was impressed with this worldly wisdom. He was open to it. He thought that the Reformed faith can, and should be, accommodated to it. He supposed that Reformed theology can, and should, influence the world’s wisdom.


This is why some have spoken of “two Bavincks.” Hepp denies that this is an accurate description of Bavinck, although he recognizes the tension, or “duality,” in Bavinck.


However one describes this “duality” in Bavinck’s soul, the conflict between the thinking of the son of the Secession and the thinking that found the wisdom of the world both true and attractive had a harmful effect on Bavinck’s theology, as we will see.


That which Bavinck found appealing in the world’s thinking, he explained by his (and Kuyper’s) theory of common grace.


Bavinck showed this attraction to the world’s wisdom, and acted on it, already as a young man. Preparing for the ministry in the Secession churches, after only one year of training in the Secession seminary in Kampen, he decided to complete his seminary training in the thoroughly modernist seminary of the state Reformed church (from which his churches had seceded, as from a false church, some forty years earlier). The professors at Leiden were unbelievers, and all of the Netherlands knew it. They denied the bodily resurrection of Jesus, despised the Calvinistic doctrines of grace dear to the heart of the Secession, and were notorious higher critics of holy Scripture. Among others of the same stripe were Scholten, Kuenen, and Rauwenhoff.


Bavinck’s decision to complete his seminary training in Leiden, rather than in Kampen, was as if an aspirant to the ministry in the Protestant Reformed Churches would reject the Protestant Reformed Seminary, not even for Calvin Theological Seminary, but for the University of Chicago Divinity School and the teaching of a Paul Tillich.


Why he chose Leiden, Bavinck himself explained. He judged the theological instruction at the small Secession seminary to be inferior and unsatisfactory (and it did leave much to be desired, especially in the important area of dogmatics) and “cherished a strong desire to further my study in Leiden and to learn the modern theology at first-hand.”17


The Christian Reformed translator of Bavinck’s Magnalia Dei, literally, The Wonderful Works of God, but published in English translation as Our Reasonable Faith, extols the benefits of Bavinck’s theological education at Leiden.


[The training at Leiden] served him [Bavinck] well. The idea of solid theological scholarship for orthodox Reformed Christianity stood high in his life throughout his career. And his intimate acquaintance with the newer religious thought both deepened his Calvinist convictions and fitted him for a profession of theology realistically addressed to the problems of the time.18


Bavinck himself spoke more soberly of the effects upon him of that modernist training for the ministry of the gospel: “Leiden … has often made me very poor, has deprived me of … much that I now, in a later time, have learned to appreciate as indispensable for my own spiritual life, especially when I must make sermons.” As the remark that he added makes plain, Bavinck referred to the modernist seminary’s casting doubt on the inspiration of Scripture: “[Leiden’s effect on its students is that] their childlike trust in the word of the apostles [that is, Holy Scripture] is shaken.”19


Severe struggle with doubt concerning Scripture was the effect of his Leiden training upon Bavinck. During the brief pastorate in Franeker with which he began his ministerial career, Bavinck confided to a friend that he struggled with doubt about Scripture. Outwardly, to the congregation, he had to be the confident “dominee”; inwardly, he was wrestling with doubt.


This struggle with doubt concerning Scripture persisted throughout his ministry. To this struggle, Hepp refers when he speaks of a “duality in his [Bavinck’s] spiritual existence.”20 In fact, doubt concerning Scripture increased in Bavinck’s old age. In the last phase of his ministry, as professor at the Free University in Amsterdam, Bavinck nearly succumbed to sheer skepticism. Hepp, who was a student and friend of Bavinck, records that Bavinck said to him on one occasion toward the end of his life, “Daily, I become more deeply impressed with the awful relativity of all our knowledge.”21


Therefore, it is “no wonder,” as Bremmer puts it, that Bavinck “at the synod of Leeuwarden (1920) pleaded that the Reformed Churches should make the articles of the confession [the reference is to the Belgic Confession, Articles 2-7] concerning Holy Scripture the object of closer study.”22


This doubt concerning Scripture likely explains the curious fact that in none of his writings during the last ten years of his ministry did Bavinck explain Scripture, or even work with Scripture.


As I will demonstrate later, Bavinck’s doubt concerning Scripture found its way into his treatment of Scripture in the Reformed Dogmatics and, from there, as well undoubtedly as from his instruction of the seminarians in the Free University, into the Reformed Churches in the Netherlands. From the influential Dutch Reformed Churches, this doubt concerning Scripture made its way to Reformed churches throughout the world.


Brummelkamp knew whereof he spoke when he warned Bavinck’s father that in permitting the young Bavinck to train for the ministry at Leiden, “you entrust your son to the lions’ den.”23


Bavinck spent six years at Leiden (1874-1880). He obtained the doctorate in 1880, the first of the ministers in the Secession churches to do so. During these years he became especially close to the Old Testament professor, the higher critic Abraham Kuenen. Significantly, Bavinck had a picture of Kuenen hanging in his study throughout his ministry. Also during the Leiden years, Bavinck formed a very close friendship with a fellow student with the odd name Snouck Hurgrondje. Although Snouck was, and remained, a thorough-going modernist, Bavinck maintained intimate friendship with Snouck as long as Bavinck lived.


And it says something, not only about Bavinck’s ability, but also about his indecisiveness regarding modernism that some nine years after he left Leiden, the seminary department of the University of Leiden considered appointing Bavinck as successor to the unbelieving Rauwenhoff. At the time, Bavinck and others supposed that Bavinck was on the “short list” of nominees.24


No account of Bavinck’s training at Leiden would be complete that omits the incident at his examination by the Secession churches before Bavinck could be accepted as a candidate for the ministry in these churches. An old Secession preacher, whose name lives in honor for his deed on that occasion—J. F. Bulens van Varsseveld—required that Bavinck preach a sermon on the first part of Matthew 15:14: “Let them alone: they be blind leaders.” Recognizing full well that Bulens had Bavinck’s Leiden professors in view with his choice of the text, Bavinck was furious. At first, Bavinck refused the assignment. His father and his friends prevailed on him to change his mind. But Bavinck’s opening words—the introduction to the sermon—were: “Why this text has been assigned exactly to me is not difficult to figure out.”25


The explanation of Bavinck’s seeking theological education at Leiden is what the Germans call “Kulturtrieb,” a strong desire for culture. This was a powerful force in Bavinck all his life. “The Kulturtrieb, the urge for further cultural adaptation to his time, permeated him.”26 This cultural urge helps to explain, although it does not justify, Bavinck’s enthusiasm for the notion of a common grace of God.


Bavinck’s active ministry, first in the Christian Seceded Reformed Churches, until 1892, when these churches united with the Doleantie Churches of Abraham Kuyper, and thereafter in the Reformed Churches in the Netherlands (GKN), until Bavinck’s death in 1921, consisted of one brief pastorate and of two long stints in two seminaries, the Theological School of the Secession Churches at Kampen and the Free University of Amsterdam.


Bavinck began his ministry with a very brief pastorate of less than two years in Franeker, in the glorious province of Friesland. Bavinck was installed as pastor early in 1881, not long after graduating from Leiden. By all accounts, Bavinck was a good preacher, although he did not care much for the pastoral side of the ministry, for example teaching catechism to the children.


What is noteworthy about this pastorate, in addition to its brevity and Bavinck’s struggle with doubt concerning Scripture, especially when preparing sermons, is that shortly before Bavinck became its pastor the Franeker congregation had had the Rev. K. J. Pieters as minister, from 1851-1875. Pieters was the Secession minister who, with a colleague, J. R. Kreulen, introduced into the churches of the Secession the novel and heretical doctrine of a conditional covenant with all the baptized children alike. Pieters and Kreulen denied that the covenant and its salvation are governed by election. By this teaching, the two ministers caused a storm of controversy both in Pieters’ congregation in Franeker and in the denomination. Pieters and Kreulen publicized their covenant doctrine in the book De Kinderdoop, which appeared in 1861.27


In addition, Pieters was a drunk. Time and again, he was admonished by his consistory, and time and again he fell into public drunkenness. On one occasion he admitted to the elders that he made “een al te vrij gebruik van spiritus” (English translation: “an all too free use of alcoholic spirits”). Since Reformed elders in those days got to the very bottom of matters, we even know the brand of spirits of which the Rev. Pieters made too free a use: “Schiedammer,” a gin.28 Finally the consistory deposed Pieters, whereupon he split the congregation and continued for a time with an independent ministry.


Significantly, Bavinck criticized his predecessor for not preaching according to the creeds and as being, in fact, in disagreement with the creeds. In a letter to his friend Snouck, Bavinck wrote: “For a number of years, there was here [in Franeker] a preacher, who definitely was an exception in our entire church. Especially sharp of intellect, he did not agree with our confession, ignored it, and preached as he pleased.”29 This was Bavinck’s judgment on the covenant doctrine of Pieters and Kreulen and, therefore, on the covenant doctrine of the Reformed Churches (Liberated), which deliberately adopted the doctrine of the covenant of Pieters and Kreulen.


When Bavinck came to write that section of his Dogmatics that deals with covenant and election, he was familiar with the doctrine of Pieters and Kreulen. Bavinck rejected that doctrine, teaching, to the contrary, that election governs the covenant, particularly regarding the baptized children of the godly.


In 1882, the synod of the Secession Churches appointed Bavinck to be professor at the Theological School in Kampen. Bavinck was only twenty-eight. He taught mainly dogmatics at the seminary for almost twenty years, until 1902. During his Kampen years, his colleagues on the faculty were Helenius de Cock, Van Velzen, and Brummelkamp. These were the years when he read widely, thought deeply, and wrote his magnum opus, the four volumes of the Reformed Dogmatics. The last volume appeared in 1901.


Although at first suspicious of the proposed union of the Secession Churches with Kuyper’s Doleantie Churches, because of his fear of the “supremacy of Dr. Kuyper,”30 Bavinck became an enthusiastic promoter of the union, and was influential in bringing the union to fruition.


Three times while at Kampen, Bavinck received an appointment to teach at the Free University. Kuyper and the other powers at the Free University recognized Bavinck’s theological abilities and wanted him on the faculty. Twice, Bavinck declined the appointment, in favor of the seminary of the Secession Churches.


Also during his years at Kampen, Bavinck married Johanna Adriana Schippers, in 1891, when Bavinck was a mature thirty-seven and his wife, a young twenty-three. They had one child, a daughter.


In 1902, Bavinck accepted the appointment to teach dogmatics at the Free University, replacing Abraham Kuyper himself, who had gone on to the lower and lesser position of prime minister of the Netherlands. Bavinck was forty-eight. There, strangely, Bavinck lost his zeal for theology, except for teaching his courses. He sold his extensive theological library, because, as he said, “I will not be needing those books any longer.”


After 1911, Bavinck never wrote another theological book, although writing much in other fields, especially psychology and education. Openly, he expressed the wish to be able to give up his professorship in theology in order to devote the rest of his life to “study, in which psychology would be on the foreground.”31


The last years of Bavinck’s life and ministry also marked a distinct, noticeable change in Bavinck’s spiritual and psychological attitude. He was gloomy, somber, and seemingly depressed. Hepp, who knew Bavinck personally and well, describes his teacher and friend this way: “He was tormented with problems.” The problems, according to Hepp, were three: the future [of European society; Bavinck died soon after the end of WW I]; the problem of Scripture [in the thinking of Bavinck]; and the problem of culture.32 Concerning the last, the problem of culture, culture must not only torment, but also drive to despair everyone who supposes that worldly culture can be and should be “Christianized.”


Bavinck died in 1921, at the age of sixty-seven. Shortly before his death, knowing that death was imminent, he said, “Now my scholarship avails me nothing, nor can my dogmatics: it is only my faith can save me.”33


Before I survey the strengths and weaknesses of Bavinck’s theology, I offer the following observations and analyses of various aspects of Bavinck’s life.


First, in the providence of God, specifically with regard to the maintenance and development of the truth, Bavinck stood in the main stream of the Protestant and Reformed tradition: the Netherlands of Dordt; the glorious Secession; and the recovery and bold confession of Reformed orthodoxy by Abraham Kuyper.


Second, Bavinck was a diligent, extremely well-read, brilliant Reformed theologian. Especially during his years at Kampen, he read widely, thought deeply, and wrote industriously. Apart from all his other books, and there are a number of other fine works, particularly the little work on faith’s certainty,34 the Reformed Dogmatics is a monumental achievement. Bavinck was a theologian’s theologian.


Third, Bavinck links the Protestant Reformed Churches with the theology of the Secession in the Netherlands of 1834, especially its covenant doctrine, and with all that is good in the Reformed tradition going back to Calvin. Bavinck does this both with regard to time and with regard to the content of Reformed theology. With regard to time, Bavinck, who died only three years before the Christian Reformed Church expelled Herman Hoeksema, in 1924, was contemporary with most of the “fathers of the Secession.” With regard to the content of Reformed theology, in most of the important truths of the faith, the Protestant Reformed Churches confess and preach the Reformed faith as systematized and presented by Herman Bavinck in his Reformed Dogmatics. There is no doubt in my mind that Hoeksema was strongly influenced by the dogmatics of Bavinck.


Fourth, although Bavinck is widely viewed as “irenic,” that is, a lover of peace (which was not always a virtue, for the irenic Bavinck characteristically refused sharply to criticize and flatly to condemn heresy, always inclined to find some good in even the most egregious of heretics, for example, the pantheist, Schleiermacher, and the “ethical theologian,” Daniel Chantipie de la Saussaye), he—Bavinck—was also extremely sensitive to criticism, and prone to bitterness when he was criticized, or when a church decision did not go his way.


According to Hepp, the defeat at the synod of 1889 of Bavinck’s proposal concerning the union of the two seminaries, a bone of contention in the denomination formed by the uniting of the Secession Churches and the Doleantie Churches, was the cause of a radical change in Bavinck’s attitude and demeanor. He left the synod at once, refusing to attend the rest of the sessions. For some time thereafter, he would not sing at church, and showed himself generally as a malcontent.35


This response of Bavinck to the bitter pill he had to swallow at synod is by no means the most important aspect of Bavinck’s life, but it is a warning especially to ministers. Bavinck’s bitterness hindered his work in the churches. The weakness brings home to us the warning of Hebrews 12:15, “Looking diligently lest … any root of bitterness springing up trouble you.” Bitterness, for which there are abundant occasions in the ministry, as in the life of all the saints, corrodes the minister’s own godliness, spoils the work he does, and prevents a great deal of work that he might otherwise perform for the welfare of the church and the glory of Jesus Christ. The secret, of course, is to forget men and self, and to mind only Jesus Christ.


With this, I turn to the theology of Bavinck, and, first of all, to the strength and worth of his theology.




The Strength and Worth of the Theology of Bavinck


The Reformed dogmatics of Bavinck—the four volumes of the Reformed Dogmatics—is a worthy, indeed praiseworthy, work of Reformed theology. It sets forth the doctrines of the Reformed faith in a thorough, comprehensive, systematic, and generally sound way. It is nothing less than monumental.


These are some of the strengths and virtues of the Reformed Dogmatics. First, the Reformed Dogmatics presents, in the systematic form of a carefully worked out and united body of theology, the wealth of the Reformed faith as this faith was confessed and developed from John Calvin to the beginning of the twentieth century. Special attention is given to the development of the Reformed faith in the Netherlands, which was, especially from the time of the Synod of Dordt, the main stream in which the Reformed tradition flowed.


Second, the Reformed Dogmatics is based on, and in harmony with, the Reformed creeds. I am not claiming that Bavinck’s dogmatics never deviates from the creeds, as though it is above criticism. It does deviate, and, in certain respects, grievously. But I am saying that Bavinck labored, consciously and with determination, in the conviction that the Reformed creeds embody the truth of Scripture and that they are authoritative for Reformed theology. This accounts for the overall soundness and, therefore, the real and lasting worth of the Reformed Dogmatics.


Third, the scope and breadth of the Reformed Dogmatics are vast, helpfully vast. Here, Bavinck’s Spirit-given brilliance as a theologian and Spirit-worked diligence at his dogmatical labors are evident. The Reformed Dogmatics gives a virtually complete history of dogma, as well as a sketch of church history. It takes into account, throughout the four volumes, the teachings of the fathers of the early church, as well as the ecumenical creeds. It interacts with all the church denominations—Greek Orthodox, Roman Catholic, Lutheran, and others, as well as with the cults. It surveys the teachings of the reformers, not only Calvin but also Luther, Bucer, Vermigli, and others.


It engages and analyzes the philosophers who have posed a threat to the church throughout the ages, Plato, Aristotle, Kant, and others.


It critiques the pagan religions, for example Buddhism.


There is no heretic who escapes scrutiny, from Montanus, Arius, and Pelagius, to Pighius, Arminius, Amyraut, and Schleiermacher. Always, Bavinck exposes the fundamental error and its contradiction of the truth in a few, clear sentences. There is special emphasis on the heretics and heresies threatening the Reformed churches in Bavinck’s own time: modernism; the “mediating theology”; the “ethical theology”; and “Methodism” (we would say, “fundamentalism and revivalism”).


Fourth, Bavinck wrote the Reformed Dogmatics convinced that the truths of Holy Scripture—the content of the Reformed Dogmatics—are non-contradictory. And the reason is that there is no contradiction in the mind of God. Bavinck affirms this axiomatic truth in his prolegomena:


For if the knowledge of God has been revealed by himself in his Word, it cannot contain contradictory elements or be in conflict with what is known of God from nature and history. God’s thoughts cannot be opposed to one another and thus necessarily form an organic unity. The imperative task of the dogmatician is to think God’s thoughts after him and to trace their unity … That such a unity exists in the knowledge of God contained in revelation is not open to doubt; to refuse to acknowledge it would be to fall into skepticism, into a denial of the unity of God.36


Again, I am not contending that there are no contradictions in the Reformed Dogmatics, but that Bavinck was not a paradoxical theologian, a Dutch Karl Barth.


The conviction that the revelation of Scripture, as summarized in the Reformed creeds, is non-contradictory safeguarded Bavinck’s confession of salvation by sovereign grace in many crucially important places in the Reformed Dogmatics. Bavinck did not think himself at liberty to contradict the truth that the grace of God in Jesus Christ is particular and efficacious, having its source as it does in an eternal decree of election, accompanied by a decree of reprobation, with appeal to “paradox,” that is, in reality, sheer contradiction.


Whereas the foregoing is more general concerning the strength and worth of Bavinck’s dogmatics, what follows is more specific.


First, the Reformed Dogmatics is biblical. With appeal to Article 5 of the Belgic Confession, Bavinck asserted that “Scripture is the sole foundation (principium unicum) of church and theology.”37 Bavinck defined dogmatics “as the truth of Scripture, absorbed and reproduced by the thinking consciousness of the Christian theologian.”38 Every doctrine, therefore, is derived from Scripture. The Reformed Dogmatics is the product of exegesis. This is not to say that there are lengthy sections consisting of the interpretation of texts. Bavinck’s method, rather, is usually to state a doctrine in a few sentences, or paragraphs, and then to list the biblical passages from which he has drawn the doctrine.


The strengths and benefits of the Reformed Dogmatics, due to its biblical nature, are great. It is orthodox. It is fresh and lively. Bavinck contends for such a dogmatics in the prolegomena: “Dogmatics is not a dull and arid science.”39 Still another strength and benefit of Bavinck’s biblical dogmatics is that there is development of dogma.


In close connection with its avowed biblical character, the Reformed Dogmatics is God-centered. Bavinck set himself the task of producing a God-centered dogmatics with the whole of the massive Reformed Dogmatics from the outset. All of his dogmatics had to be the knowledge of God in systematic form. “The aim of theology, after all, can be no other than that the rational creature know God and, knowing him, glorify God (Prov. 16:4; Rom. 11.36; I Cor. 8:6; Col. 3:7).”40 The Reformed Dogmatics is, according to Bavinck’s purpose, “a theodicy, a doxology to all God’s virtues and perfections, a hymn of adoration and thanksgiving, a ‘glory to God in the highest’ (Luke 2:14).”41


Because the Reformed Dogmatics is biblical and God-centered, it is also warm and practical. By design, Bavinck wove ethics into the dogmatics. No doubt his heritage as a child of the Secession contributed to the piety, the godliness, of the presentation of Reformed dogmatics. Bavinck was no pietist. He condemned the theology of doubt of the Puritans and their spiritual descendants, the men and women of the Nadere Reformatie, in the Reformed churches.42 But he was pious, as every genuinely Reformed Christian man, woman, and child is pious. Deliberately Bavinck allowed the godliness of experience and practice that is inherent in the Reformed doctrines to come out in his exposition of the doctrines. Relating dogmatics and ethics thus closely was also born of Bavinck’s theological conviction.


Theological ethics … is totally rooted in dogmatics … Dogmatics is the system of the knowledge of God; ethics is that of the service of God. The two disciplines, far from facing each other as two independent entities, together form a single system; they are related members of a single organism.43


Third, the Reformed Dogmatics affirms, explains, and vigorously defends the sovereignty of the grace of God in Jesus Christ from beginning—predestination in the eternal counsel—to end—the preservation of the elect, believing sinner unto eternal life and glory. This is the heart of the gospel. It is also the heart of every truly Reformed dogmatics. Faithfulness to the truth of sovereign grace is the mark of a standing or falling theology.


Bavinck taught God’s sovereignty both in election and in reprobation, affirming unconditional predestination against all forms of conditionality. Explicitly, he condemned both Arminius and Amyraut. Bavinck exposed the fundamental error of Arminius as the doctrine of resistible grace: “[For Arminius] grace was still always considered resistible.” The monstrous effect of Arminius’ theology was (and still is) that it makes “human beings the final arbiters of their own destiny.” The specific Arminian teachings that necessarily result in this God-dishonoring effect are the “objection to the … certain foreknowledge of God with regard to those who would or would not believe, plus the universal will of God to save all humans, Christ’s universal atonement, and the universal offer of the sufficient means of grace.”44


Of Amyraut, Bavinck judges that he and the “school at Saumur in France” supported the Arminian heresy that Dordt had condemned. Bavinck notes that Amyraut taught two decrees of election. The first is a universal, conditional decree, that is, a decree of God to save all humans on condition that they will believe. The second is particular and absolute, that is, a decree of God to give some humans the gift of faith and to save them. Says Bavinck, correctly, “Of course, if the first (universal) decree meant anything at all, it would completely overshadow the second.”45


Bavinck’s judgment of Amyraut applies as well to the theology of the Federal Vision today, as to the doctrine of a conditional covenant whence this theology springs. The conditional will of God to save all baptized members of the visible church (a universal, conditional election, of sorts) completely overshadows any particular decree of election to which the advocates of a conditional covenant of grace with all the baptized may pay lip service.


In a sixty-page treatment of the divine counsel, Bavinck contends for the truth that “all the decrees of God [not only the decree of predestination] are based on his absolute sovereignty.”46


Charging that the doctrine of universal atonement separates Christ from election and the covenant,47 Bavinck affirms, in the face of all the arguments raised against it, including the favorite texts of the defenders of universal atonement, definite, limited atonement. “It was God’s will and intent that Christ make His sacrifice … only for the sins of those whom the Father had given him.”48 “The acquisition and application of salvation are inseparably connected … [As] the intercession is particular … so is the sacrifice.”49 Bavinck somewhat weakens this otherwise forceful confession by finding certain non-saving “benefits” of the cross for the reprobate.50


The work of salvation by the Holy Spirit, which in Bavinck’s theology begins with the internal call, is likewise wholly and exclusively the gift of grace.51 Grace is not only undeserved and unconditional, but also “efficacious” and “irresistible.”52


In a beautiful, heart-warming, and God-glorifying section, Bavinck confesses the perseverance of saints, not as “the activity of the human person but a gift from God.” Perseverance is rooted in election, founded on the atonement, the sure effect of almighty grace, and due, ultimately, to the faithfulness of God in the covenant of grace.”53


In defense of perseverance against those who teach the falling away of men and women to whom God has sworn His covenant promise and in whom God has begun the work of salvation, Bavinck declares that the Bible, indeed the Old Testament, “clearly states that the covenant of grace does not depend on the obedience of human beings. It does indeed carry with it the obligation to walk in the way of the covenant but that covenant itself rests solely in God’s compassion ... God cannot and may not break his covenant.”54


For Bavinck, the explanation of the perishing of many Israelites in the Old Testament, as of the perishing of some baptized children of believing parents in the New Testament, is that given by the apostle Paul in Romans 9:6, 7 and by the apostle John in I John 2:19: “not all who are descended from Israel belong to Israel (Rom. 9-11). Similarly, John testifies of those who fell away: they were not of us or else they would have continued with us (I John 2:19)”55


Those Reformed churches that make this confession at the beginning of the twenty-first century are castigated, and banished from the Reformed community, as “hyper-Calvinists.”


Demonstrating the “balance” of himself as a dogmatician and of his dogmatics, which is characteristic of the Reformed faith, Bavinck admonishes that “certainty” of perseverance by no means rules out “admonitions and threats,” which are “the way in which God himself confirms his promise and gift [of perseverance] through believers. They are the means by which perseverance in life is realized.” He adds: “After all, perseverance is also not coercive but, as a gift of God, impacts humans in a spiritual manner.”56


All of this gracious work of salvation, from the call and regeneration to preservation, has its source in God’s covenant of grace, and the covenant of grace is grounded in eternal election.


All the benefits that Christ acquired and distributes to his church are benefits of the covenant of grace. This covenant, though first revealed in the gospel in time, has its foundation in eternity: it is grounded in the good pleasure of God, the counsel of God … It is of the greatest importance … to hold onto the Reformed idea that all the benefits of the covenant of grace are firmly established in eternity. It is God’s electing love, more specifically, it is the Father’s good pleasure, out of which all these benefits flow to the church.57


With specific reference to perseverance, but with application to all the work of salvation, Bavinck declares that the covenant of grace, from which salvation flows, “does not depend on the obedience of human beings … but solely in God’s compassion … God cannot and may not break his covenant … the covenant of grace is … unbreakable like a marriage.”58


In the context of this affirmation of the indissolubility of the covenant on account of the faithfulness of God, Bavinck states that the covenant is established and maintained by God’s word and that this word “in its totality is one immensely rich promise to the heirs of the kingdom.”59


Since I take up the subject of Bavinck’s doctrine of the covenant in a separate address at this conference, I say no more about this essential aspect of the truth of salvation by sovereign grace in Bavinck at this time.


One other strength of Bavinck’s theology is its development of dogma. Development of the understanding of the truth was the result, not only of Bavinck’s deep and comprehensive grasp of the whole of the body of the Reformed faith, involving the perception of the relation of all the individual doctrines to each other, but also of Bavinck’s biblical method of dogmatizing. Deriving all of the doctrines of the Reformed faith from Scripture, as it were anew in his own thinking, Bavinck was led, by the Spirit of truth, to correct faulty formulations of doctrine in the Reformed tradition, to improve inadequate presentations of certain doctrines, and to bring the understanding of the truth to a higher level—a level more in accord with the whole of biblical revelation than previous understanding.


One such development was Bavinck’s insight into the doctrine of predestination, with specific reference to the longstanding, brotherly debate concerning supralapsarianism and infralapsarianism. Bavinck pointed out both the virtues and the defects of each theory concerning the order of the decrees of God and proposed a new conception that incorporates the virtues of both, while shedding their defects. This conception makes the election of Jesus Christ first in the counsel of God, as the goal of God triune concerning the revelation of His glory.


Also, this conception avoids the error of both the traditional supralapsarian view and the traditional infralapsarian view of placing “all things that are antecedent to the ultimate goal as means in subordinate relation also to each other.”60 What Bavinck meant by this, he indicated when he added, in explanation, that “both election and reprobation presuppose sin and are acts of mercy and justice,” with appeal to Romans 9:15 and Ephesians 1:4.61


Nevertherless, amidst the gold of the Reformed Dogmatics is dung. Much of the dung consists of the doctrine of a purported common grace of God, a doctrine that reappears throughout the four volumes of the Reformed Dogmatics, in a number of doctrinal contexts. Because this error in Bavinck is the subject of one of the addresses at this conference, I can be brief in treating of the weaknesses of the Reformed Dogmatics.




Weaknesses in Bavinck’s Dogmatics


I point out two grievous errors in the theology of Bavinck, both of which have had disastrous consequences, not only for Reformed doctrine but also for Reformed churches that have allowed themselves to be influenced by the errors.


The first, pervasive error is Bavinck’s theological conviction that there is something good, something true, in virtually all the philosophies, all the scientific theories, and all the cultural proposals of the ungodly, antichristian, and unbelieving movers and shakers of the world outside of Jesus Christ. Under this conviction, Bavinck invariably accommodated Reformed theology to these philosophies, scientific theories, and cultural works. He could never, sharply and absolutely, condemn the ungodly theories of even the grossest of heretics and fiercest of avowed foes of the Christian religion, whether Schleiermacher or Darwin.


Abraham Kuyper publicly criticized Bavinck for this weakness, on two occasions. The first occasion was Bavinck’s inaugural address when he was installed as professor in the seminary at Kampen. Although critical of the Protestant heretic, Bavinck also spoke well of Friedrich Schleiermacher: “It is to us a pleasant duty, thankfully to recognize all the good that has come to theology by this original thinker.”62 Kuyper praised Bavinck’s address—“the Science of Holy Theology”—highly, in his magazine, De Heraut.


Almost never has a piece [of writing] come into our hands that we have read, from beginning to end, with such almost wholehearted agreement as the inaugural address of Dr. Bavinck on the Science of Holy Theology. This is truly Reformed scientific theology … It was refreshing to read this. Here is fidelity to Dordt, which will not deviate from Dordt, but at the same time the spirit of Dordt, which does not proscribe the development of theology.63


But Kuyper objected to Bavinck’s praise of Schleiermacher, in print. Bavinck’s praise of Schleiermacher, wrote Kuyper to the Reformed community in the Netherlands, betrayed Bavinck’s lack of “awareness of the unspeakable evil, that this philosopher has inflicted on the church of Christ.”64


The second occasion of Kuyper’s public criticism of Bavinck for failing to condemn heretics and their heresies was Bavinck’s publication of a book on the ethical theologian, Daniel Chantipie de la Saussaye.65 In this case, Bavinck’s fault was not that he praised Saussaye, but rather that he failed sharply and vehemently to condemn his heresy. Although Bavinck himself concluded that Saussaye’s teaching was “philosophy, rather than Christian truth, in conflict with Scripture, and tinged with pantheism,” Bavinck limited his criticism, if criticism it can be called, to the astounding statement that there were “elements” in Saussaye’s theology that “restrained [Bavinck] from complete agreement.”66


Kuyper was obviously indignant.


This places us before the question: Is this permissible? If you conclude, that someone’s theology conflicts with the Holy Scripture; offers philosophy rather than Christian truth; leads to pantheism; and indeed weakens the dividing line between Creator and creature, may you then so favorably judge of such a thoroughly dangerous theology, which has already seduced scores and hundreds of the best [professing Christians in the Netherlands], as you do when you speak [merely] of not completely agreeing? No matter how people may criticize us for it, we emphatically say: No!67


Kuyper wanted a bold, severe, radical condemnation of these two theologians, as well as of all others who corrupted the gospel, as an urgent warning to the members of the Reformed churches who were tempted by the false teachings. Kuyper was far more antithetical in this important regard than was Bavinck.


These criticisms irritated Bavinck sorely. If Kuyper thought that he could change Bavinck by his public criticism, as Hepp supposes was the case, Kuyper “was completely mistaken. Nothing irked Bavinck more than public criticism.”68 From the moment of Kuyper’s criticism of Bavinck in the matter of de la Saussaye “dates the less friendly expressions about Kuyper [by Bavinck].”69


This hesitation of Bavinck completely to denounce a philosopher or heretic and his false teaching and his readiness to find something true and good in philosophy or in an aberrant theology are by no means due merely to his peace-loving personality as his uncritical supporters contend.


Rather, Bavinck deliberately adopted a “neo-Thomist philosophy” as a philosophical guide for his theology. “Thomist” refers to the outstanding philosopher/theologian of the Roman Catholic Church, Thomas Aquinas. “Neo-Thomist” philosophy is a nineteenth century form of the Roman Catholic doctrine that, after the fall, there is still something good, something godly, in the unregenerated, so that Christianity can cooperate with the unbelieving thinkers, and even build on what is true and good in their works, in order to form a good, godly, even Christian culture and society.


According to Roman Catholic theology, the fall stripped man of the “supernatural” gifts with which the Creator endowed man in the beginning—saving knowledge of God, righteousness, and holiness—but left man with the “natural” gifts of reason and will, which, although somewhat weakened by the fall, are still capable of good and true thinking and desiring. The grace of the gospel, therefore, does not redeem and renew the totally depraved mind and will of the fallen sinner, but merely completes, or “perfects,” the fundamental goodness of the mind and will. Grace builds on, adds to, and brings to completion, “nature.” Indeed, in Roman Catholic theology, grace depends on nature: the natural will of the sinner performing the conditions required by grace.


Here, Bavinck’s (and Kuyper’s) theory of common grace comes into play. Common grace, according to its proponents, accounts for much that is true and good in the theories of the world’s great thinkers, altogether apart from the grace of God in Jesus Christ, so that Christian thought may, and must, take the world’s thinking about God, man, and creation seriously and even accommodate itself to this worldly thinking. The theory of common grace in Reformed circles is essentially the same as the philosophy that reigns in the Roman Catholic Church. This goes far to explain the actual cooperation of Reformed theologians who are committed to the theory of common grace with Roman Catholic thinkers and organizations.


R. H. Bremmer, a sympathetic biographer of Bavinck, writes that “all Bavinck-commentators are in agreement that the neo-Thomistic philosophy exercised great influence on [Bavinck].”70 Indeed, Bavinck “saw in the doctrine of the ideas, as Christianized by Thomas, the form in which the Christian faith could enrich and Christianize the culture of his own time.”71


Basic to Bavinck’s commitment to fundamental Roman Catholic thinking and to his readiness to accommodate Reformed theology at crucial points to ungodly but learned theories was Bavinck’s deep concern, strong desire, and firm resolution to Christianize European culture. The Christianizing of culture was one of the main purposes of Bavinck’s ministry. Hepp writes that Bavinck desired a synthesis of Christendom and culture: “He cherished the hope of another synthesis, namely that between Christendom and culture.”72 This was also the ambition of Bavinck’s colleague, Abraham Kuyper. One of the great projects of Kuyper’s life was the “re-Christianizing of the Western European world of culture.”73


When Bremmer sums up Bavinck’s life and ministry at the end of his study, the heading is “Cultuur en Evangelie” (“Culture and Gospel”).74 Concern for culture, specifically the concern to relate the gospel to the prevailing culture, and thus to “Christianize” the culture, had equal billing with the gospel in the ministry of Herman Bavinck. Nowhere does Jesus Christ charge His church with such a cultural mandate: “Preach and confess the gospel, in order to ‘Christianize’ the thinking, the arts and science, and the way of the life of the ungodly world.”


According to Bavinck’s contemporary, the theological modernist Roessingh, “the question of the position of Christendom in this world of culture … was important above all [to Bavinck].”75 The sympathetic Bremmer regards the fascination of Bavinck with the culture of his time more favorably, but indicates, similarly, the deep, deliberate concern of Bavinck with culture in the writing of his dogmatics: “The great worth of his [Bavinck’s] dogmatics will undoubtedly remain, that we can read from it, how a reformational [Dutch: “reformatorisch”] theologian toward the end of the nineteenth century approximated the culture-issues of his time with the gospel.” So much is Bavinck’s dogmatics concerned with the culture of the day that Bremmer, thinking to praise it highly, calls it “a cultural monument of the first order.”76


No wonder, then, that one of the three factors contributing to Bavinck’s deep gloom, bordering on depression, at the end of his life was the “culture problem.”77 Europe, during and immediately after WW I, gave no evidence of any likelihood of the Christianizing of culture. It is doubtful that the little country of the Netherlands at that time gave any evidence of being Christianized, despite the efforts, including the prime ministership, of Abraham Kuyper.


And it was this grievous error of both Bavinck and Kuyper that occasioned the charge by their modernist contemporaries already in their own time, that “neo-Calvinism” (the common grace, culture-influencing and culture-accommodating theology of Kuyper and Bavinck and their disciples) was in fact a fundamental break with the old Calvinism of Calvin and the Reformed creeds, and nothing but modernism in disguise.78


When Herman Hoeksema purged Reformed theology of the common grace theory of Kuyper and Bavinck (which theory, despite some occasional, somewhat similar terminology, cannot be found in John Calvin, contrary to the claims of the defenders of the theory), he delivered Reformed theology and the churches from a prominent, indeed major aspect of what Kuyper and Bavinck had made of this theology, from an alien element in that theology, from a corrupting leaven in that theology, and from the impossible and completely unbiblical burden that the theory of common grace lays on the Reformed church of Christ: “Christianize the world!” Altogether apart from the even more important condemnation of the “well-meant offer”—the corruption of the gospel by the affirmation of a universal, resistible, saving grace of God, a saving grace of God that neither has its source in election nor effectually achieves the salvation of the objects of this grace, Hoeksema’s repudiation of the common grace theory of Kuyper, Bavinck, and their neo-Calvinistic disciples was a significant development of Reformed theology, with huge implications for the Reformed faith and life both of church and of individual Christian, and a genuine reformation.


Because of Bavinck’s deliberate adoption of the Roman Catholic philosophy of the nature/grace scheme as basic to his theology and because of his related adoption of the theory of common grace, there is reason to question the phrase that runs through Bavinck’s dogmatics like a refrain and that is widely recognized as expressing something essential to Bavinck’s theological thought: “Grace perfects nature.”79 One appearance of the phrase is at the juncture of Bavinck’s treatment of “general revelation” and “special revelation”: “Nature precedes grace; grace perfects nature. Reason is perfected by faith, faith presupposes nature.”80 The Latin original, “Gratia perficit naturam,” can be translated, “Grace completes nature.” Commonly, Reformed theologians understand the phrase in an orthodox sense, as expressing the biblical and Reformed idea that in the work of salvation, whether with regard to the individual human or with regard to the creation itself, God does not abandon His work of creation, does not create new humans or a new universe, but redeems, renews, and ultimately raises from the dead the man, woman, or child to whom He gave physical existence and the heaven and the earth that He created in the beginning. There can be no doubt that Bavinck’s theology intends to emphasize this meaning of the phrase.


But it may be questioned whether Bavinck did not read more into the phrase than this orthodox meaning, so that his theology becomes guilty of the error of accepting ungodly thinking as an aspect of (human) “nature” that remains unspoiled by the fall, containing that which is good and true, so that the “grace” of sound Reformed theology, accommodating itself to this ungodly thinking, merely completes and renders perfect this naturally good and true “nature.” Faith merely supplements the truth already present in the natural human mind, whether of Plato, or of Kant, or of Schleiermacher, or of Darwin. And this view of the relation of theology and the wisdom of the learned ungodly inevitably results in accommodating the teaching of the Bible to the alleged wisdom of this world, whether in the philosophy of Plato, Aristotle, or Kant, or in the heretical theology of Schleiermacher, or in the scientific theories of Charles Darwin. It is significant that Bavinck himself preferred to translate the Latin verb as “restores”: Grace only restores nature.81


Regardless how Bavinck understood and applied the phrase “Grace perfects nature,” there is abundant evidence in his Dogmatics that, in his fascination with culture and its issues, by virtue of his neo-Thomistic philosophical presupposition, and with the help of his theory of common grace, Bavinck accommodated Reformed theology to ungodly, anti-biblical thought, and thus seriously compromised the Reformed faith.


Bavinck thinks that we must “recognize all the elements of truth that are present also in pagan religions,” appealing for support to “Thomas [Aquinas].” “The doctrine of common grace” enables Reformed people to “recognize all the truth, beauty, and goodness that is present also in the pagan world.” Indeed, “an operation of God’s Spirit and of his common grace is discernible not only in science and art, morality and law, but also in the [pagan] religions.” And then this dreadful assertion: “Hence Christianity is not only positioned antithetically toward paganism; it is also paganism’s fulfillment.”82 Grace completes (depraved, devilish, sinful, human) nature! There is a “natural theology,” and “natural theology … [is] a ‘preamble of faith.’”83


Bavinck is critical of Martin Luther for the Reformer’s denying “to Aristotle, to reason, and to philosophy all right to speak in theological matters” and for calling “reason stoneblind in religious matters.” Aristotle, of course, was the philosopher who influenced Thomas and, therefore, Roman Catholic theology. Recognizing the pervasive influence of the philosopher upon Rome’s corruption of the gospel of grace, Luther exclaimed, on one occasion, “Away with that damned, rascally heathen, Aristotle.” But Bavinck charges that this exclusion of Aristotle from theology is “excess.”84


“The founders of [non-Christian] religions, like Mohammed” may not be considered as “simply impostors, enemies of God, accomplices of the devil,” according to the accommodating Bavinck.85


In pagan and non-Christian religions is “a point of contact” for the gospel, a “firm foundation on which [Christians] can meet all non-Christians.”86 Faith supplements (the darkened, unenlightened, religious) mind of unbelievers!


How Bavinck put his neo-Thomistic and common grace theories to work concretely in his dogmatics comes out in the following instances. In defense of his doctrine of a covenant of works in Paradise, by which Adam might have merited eternal life by obeying God’s command, Bavinck declares, “It combines Schleiermacher [dependence] and Kant [freedom].”87 Evident in the declaration is that Schleiermacher and Kant have a certain authoritative, determining role in Bavinck’s theological thinking. That Bavinck’s construction of the covenant with Adam satisfies the theology of the one and the philosophy of the other is a commendation, if not a proof, of the covenant of works. What ought to have been determinative in Bavinck’s theology of the covenant with Adam is the primacy of Jesus Christ in the counsel of God, as taught in Colossians 1:13ff.


More substantial is Bavinck’s concession to the evolutionary theories of Darwin and other scientists. Bremmer notes Bavinck’s “strong sympathy for the newer scientific thinking that powerfully came to the fore in the middle of the nineteenth century, particularly the work of Darwin.”88 Concerning the opening chapters of the Bible, particularly Genesis 1 and 2 and the seven days of the week of creation, Bavinck does declare that Scripture “does not present saga or myth or poetic fantasy but offers … history, the history that deserves credence and trust.”89


Nevertheless, Bavinck yields to the pressure to accommodate Genesis 1 and 2 to the apparent testimony of science, specifically “geology and paleontology,” of a very old earth—an earth much older than the six days of the week of creation taught by Genesis 1 allows for. Bavinck does this, first, by locating the creation of the heaven and the earth of Genesis 1:1 prior to the first day of the week of creation. Genesis 1:3 records an act of God some time after the event recorded in verses 1 and 2. Evidently, this provides some of the millions of years demanded by unbelieving scientists.90


The second element of Bavinck’s accommodation of the Bible to the theories of unbelieving scientists is more serious. Bavinck denies that the six days of Genesis 1 were actual, historical days. Thus, in fact, he denies the historicity of Genesis 1. Consciously dismissing the testimony of the Holy Spirit in Genesis 1 that the days were limited by one evening and one morning, Bavinck concedes that “the days of Genesis 1 … have an extraordinary character.” They were “extraordinary cosmic days.”91 That is, they were, in reality, not days at all, but long periods of time—hundreds of thousands, if not millions, of years.


Having conceded an old earth to unbelieving scientists and, thus, the historicity of Genesis 1, with all the implications this concession has for the historicity of Genesis 2-11 and for the inspiration of Scripture, Bavinck goes yet a step further. He allows for the process of evolutionary development during these long periods of time, which is, of course, the reason why unbelieving science must have an old earth in the first place. “Much more took place on each day of creation than the sober words of Genesis would lead us to suspect … Each day’s work of creation must certainly have been much grander and more richly textured than Genesis summarily reports.”92


In conclusion, Bavinck expresses satisfaction that by virtue of his explanation of Genesis 1, “Scripture offers a time span that can readily accommodate all the facts and phenomena that geology and paleontology have brought to light in this century.”93


Bavinck’s concession to evolutionary scientists contradicts his blunt, strong condemnation of evolutionary scientific theory in general and of Darwinian evolutionary theory in particular, both in his Reformed Dogmatics94 and in a penetrating, powerful booklet titled, Schepping of Ontwikkeling (English translation: Creation or Evolution).95


Already in Bavinck’s own time, his students and disciples brought Bavinck’s concession to the wisdom of unbelieving scientists to its natural and inevitable conclusion in a bold, total rejection of the historicity, not only of Genesis 1 and 2, but also of Genesis 3. At the same time, they openly questioned the inspiration of Scripture, as was implied in Bavinck’s exegetical adaptation of the days of Genesis 1 to the theories of evolutionary scientists. Thus, this development of Bavinck’s error of accommodating the gospel to culture also involved the exploiting of the other grievous error in Bavinck’s Dogmatics: weakness concerning the doctrine of Scripture.


A second, serious weakness of Bavinck as dogmatician was his erroneous doctrine of Scripture. Bavinck struggled with fundamental doubt about the inspiration of Scripture all his life. The doubt increased in his old age. Leiden inflicted a severe spiritual and theological injury upon him. The wound lasted all his life. He never ripped the portrait of Abraham Kuenen, his higher critical Old Testament professor, from his study wall.


The one question that his Secession examiners had had about his theology when Bavinck gave account of it to them on his entrance into the ministry of the Secession Churches in 1880 was his doctrine of Scripture.96


How deeply this doubt concerning Scripture resided in Bavinck’s soul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at the very end of his ministry and life he urged the synod of his churches to study the doctrine of Scripture in Articles 2-7 of the Belgic Confession with a view to a revision of the doctrine. To the synod of Leeuwarden (1920), that is, within a year of Bavinck’s death, Bavinck sent a report that, although advising maintenance of the Reformed confessions, against a movement of younger pastors for a wholesale revision of the confessions, urged the synod that “now the time had come for a further formulation and development of specific points of the confession.” One of these points was “the divine inspiration and authority of Holy Scripture, Articles 2-8 of the Netherlands [Belgic] Confession of Faith.”97


It must be recognized that Bavinck struggled with his besetting sin of doubt concerning the inspiration of Scripture. He never simply surrendered to it. Were it not that doubt concerning Scripture’s inspiration is such a grievous sin and that Bavinck himself opened himself up to this doubt by his choice of Leiden with its Scripture-denying faculty as the school of his seminary training, as also by his determination to find truth and goodness in unbiblical, indeed anti-biblical theories (which, of course, necessarily involved casting doubt on the Bible), one would say that there was something heroic about Bavinck’s struggle with doubt. He knew the issue and its gravity, and never outrightly succumbed to the doubt. Very likely his well-known words toward the end of his life, “I have kept the faith,” referred to his life-and-death struggle with doubt concerning Scripture, and expressed his confidence that he had resisted the doubt, which is fatal to the Christian faith. And there are many fine, sound explanations and defenses of biblical authority in the Reformed Dogmatics.


But none of this hides, or mitigates, the seriousness of Bavinck’s erroneous doctrine of Scripture in the Reformed Dogmatics, which he also taught his students in the seminary classroom. Bavinck conceded that the Bible is not only a divine book and word, but also a human book and word—completely human. Here is Bavinck’s description of Scripture at the crucial point: “Scripture is totally the product of the Spirit of God … and at the same time totally the product of the activity of the authors. Everything is divine, and everything is human.”98 In this connection, Bavinck acknowledges the Holy Spirit to be the “primary author” of Scripture, which implies that the human instruments were also the authors, albeit “secondary.”99


Here, Bavinck took his eyes off the confessions, indeed off Scripture, and fixed them on the portrait of Kuenen. The confessions never attribute Scripture to humans, but only to the Holy Spirit. They never call the Bible “human,” but exclusively “divine.” They never refer to Scripture as “the word of man,” or even as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but only as the “word of God.”


Scripture itself denies that it is the “product,” that is, the word, of the humans by whom the Spirit produced Scripture. For “no prophecy of Scripture is of any private interpretation,” that is, no part of Scripture originated in the private thoughts about God, humans, and the creation of the human writers. All is the product of the “interpretation” of God the Holy Spirit. The explanation of this wonder is that the holy men wrote, as they originally spoke, “as they were moved by the Holy Ghost” (II Peter 1:20-21). Or, as is the literal translation of II Timothy 3:16: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that is, the “product” of God.


The result of this wonder of the inspiration of the written word of Scripture is that we have “a more sure word of prophecy”—a word more sure than the spoken word of God on the mount of transfiguration (II Peter 1:17-19). This cannot be the case if the Bible is totally the product of the human writers, as well as the product of God the Holy Spirit. Surely, there is no human word that is as sure as the spoken word of God, much less more sure. Only because Scripture is the word of God written, exclusively and totally the word of God written, is it more sure than the word God spoke about Christ on the mount of transfiguration.


Bavinck called his doctrine of inspiration “organic inspiration,” contrasting it with an erroneous doctrine of inspiration that allegedly has been found in the Reformed tradition. To this erroneous doctrine of inspiration, Bavinck gave the name “mechanical inspiration.”100


Objection to Bavinck’s doctrine of “organic inspiration” does not deny that in inspiration the Spirit used men, with their distinctive training, gifts, and even personalities, to produce the word of God. It does not deny that the human writers labored at their task consciously, pouring themselves into the work. But objection to Bavinck’s doctrine of Scripture denies that the “product”—the word that was written—was on this account a human word. The wonder of (organic) inspiration was that the word that resulted from the genuine instrumentality of the human writers was the word of God, and only and totally the word of God.


The effects of Bavinck’s weakening of the doctrine of Scripture have been disastrous in many Reformed churches, in which the dogmatics of Bavinck have been influential. Particularly have the effects been disastrous in that fundamental aspect of the Christian faith that Bavinck himself compromised by his weak doctrine of Scripture: the truth of origins as inspired in Genesis 1-11. Bavinck’s doctrine of a totally human Scripture, with special application to Genesis 1-11, produced Jan Lever in the Netherlands and Howard Van Till in the United States.101


But Bavinck’s bad doctrine of Scripture produced disastrous effects, particularly with regard to origins, already in Bavinck’s own time. Shortly before Bavinck’s death, a young minister in the Reformed Churches in the Netherlands, the Rev. J. B. Netelenbos, publicly denied the historicity of the opening chapters of the Bible and criticized Scripture as uninspired. His consistory deposed him in 1919 “on the ground of his deviating opinions concerning Articles 4 and 5 of the Netherlands Confession of Faith,” that is, his heretical doctrine of Scripture.102 Netelenbos appealed to the instruction he had received from his teacher, Prof. Herman Bavinck. Not only was Bavinck not in favor of the support of the discipline of his former student by the synod of Leeuwarden (1920), but he also spoke out in Netelenbos’ defense.103 The synod of Leeuwarden upheld the deposition of Netelenbos on the ground that he “deviated from Articles 4 and 5 of our [Belgic] Confession of Faith with regard to the reliability and the infallibility of Scripture and [with regard to] the ground of faith.”104


A few years after Bavinck’s death, another of his students, the Rev. J. G. Geelkerken, was disciplined by the synod of Assen for denying the historicity of Genesis 3, particularly the reality of the “speaking serpent.” The issue raised by Geelkerken and judged by the special synod of Assen (1926), as expressed by the synod both during the trial and afterwards, was that “a serpent, which was perceptible to the senses [Dutch: “zintuigelijk waarneembaar”], and which could be grasped, has spoken.”105 Geelkerken denied the historicity of Genesis 3, the biblical account of the fall of the race into sin, but also the biblical account of the mother promise of the gospel, which was spoken by God to the “speaking serpent.”106 In condemning Geelkerken, the synod charged that he violated Articles 4 and 5 of the Belgic Confession concerning Scripture, particularly the phrase, “believing without any doubt all things contained in them.”


Also Geelkerken appealed in his defense to the doctrine of Scripture of his professor, Herman Bavinck—the so-called “organic” inspiration of Scripture. Against the interpretation of Genesis 3 by the synod of Assen, he charged that “the organic conception of holy Scripture was withdrawn in favor of the mechanical [conception] … The accepted organic doctrine of Scripture of the ‘illustrious Kuyper and Bavinck’ was still not developed far enough.”107


Very likely it is indicative of the thinking and sympathies of Bavinck in the cases of Netelenbos and Geelkerken that, a few years after his death, his widow and his daughter and her husband separated from the Reformed Churches in the Netherlands to become members of the new denomination formed by Geelkerken and others upon Geelkerken’s deposition for teaching the mythical nature of Genesis 3 and, as is implied by such a view of Genesis 3, for a heretical doctrine of the inspiration of Scripture.108


Both Netelenbos and Geelkerken were members of a loose “movement of the young [ministers]” in the Reformed Churches in the Netherlands at that time, which clamored for change, for something new in theology, and for revision of the confessions. The movement regarded Bavinck as its spiritual father.


One of the grounds for the charge against Kuyper and Bavinck by the modernists of their day that they had departed radically from John Calvin and the old Calvinism was exactly their doctrine of Scripture (which Kuyper shared with Bavinck). The liberal, or modernist, D. B. Eerdmans, a professor at the University of Leiden, wrote this concerning Kuyper’s—and Bavinck’s—doctrine of “organic inspiration”:


Contemporary Reformed [theology] employs a two-edged sword in slaying the old [Reformed] doctrine of Scripture. In the first place it teaches that not all of the Scripture is divine and that much of it is merely human so that modern critical scholarship in its investigation can discover much that is true and good. Secondly, it teaches that even that which is divine in Scripture is also fully human, that human organisms, human personalities, on their own brought forth the Scriptures.109


Appreciation of the riches and glories of the Reformed faith as confessed, expounded, defended, and developed in Bavinck’s Reformed Dogmatics, especially Bavinck’s defense of sovereign grace in salvation, including the salvation of the covenant, may not blind the Reformed church or theologian to the dung mixed with the gold. Bavinck’s notion that there is much goodness and truth in the thought and theories of the ungodly; his passion to bring about a union of Christianity and ungodly culture by accommodating the gospel to culture; his doctrine of a common grace of God; and his erroneous view of Scripture as a totally human book must be condemned, rejected, and purged by the tradition that foll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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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NOTES:


1. The expanded text of an address at a conference of Protestant Reformed officebearers in Redlands, CA on March 6, 2012.




2. Herman Bavinck, “De Algemeene Genade” (Grand Rapids: Eerdmans-Sevensma, n.d.). This booklet has been translated into English by Raymond C. Van Leeuwen as “Common Grace,” Calvin Theological Journal 24, no. 1 (April 1989). The other work by Bavinck on common grace is “Calvin and Common Grace,” tr. Geerhardus Vos. The booklet contains no publishing data, but does indicate that the occasion of the work was the “celebration of the four hundreth anniversary of the birth of John Calvin.” This booklet is part of this writer’s library. In this latter work, ominously, Bavinck acknowledges that the theory of common grace qualifies the doctrine of reprobation. Attributing this qualification of reprobation to Calvin, but propounding his own view, Bavinck declares that “reprobation does not mean the withholding of all grace” (117). The effects of this common grace, according to Bavinck, include that unregenerate “men still retain a degree of love for the truth” and retain “the remnants of the divine image” (119, 120). Bavinck does not see in common grace a love of God for all humans that desires the salvation of all without exception, regardless of predestination. That is, Bavinck does not draw from his doctrine of common grace the theory of a “well-meant offer” of salvation to all. For Bavinck, as for Kuyper, common grace is limited to the realm of the earthly and natural.




3. V. Hepp, Dr. Herman Bavinck (Amsterdam: W. Ten Have, 1921). All quotations from this work are my translation of the Dutch.




4. R. H. Bremmer, Herman Bavinck als Dogmaticus (Kampen: J. H. Kok, 1961). All quotations from this work are my translation of the Dutch.




5. R. H. Bremmer, Herman Bavinck en Zijn Tijdgenoten (Kampen: J. H. Kok, 1966). All quotations from this work are my translation of the Dutch.




6. Ron Gleason, Herman Bavinck: Pastor, Churchman, Statesman, and Theologian (Phillipsburg, New Jersey: P&R, 2010).




7. Gleason, Bavinck, 425.




8. Gleason, Bavinck, 494.




9. Gleason, Bavinck, 207.




10. Gleason, Bavinck, 260.




11. Gleason, Bavinck, 339, 340.




12. See Herman Bavinck, Reformed Dogmatics, ed. John Bolt, tr. John Vriend, 4 vols. (Grand Rapids: Baker, 2006), 3:228-232. Gleason’s theological error here is one more instance of his grinding an axe for the theology of the Reformed Churches in the Netherlands (Liberated).




13. Hepp, Bavinck, 120, 121.




14. Bremmer, Bavinck en Zijn Tijdgenoten, 192.




15. Herman Bavinck, Hedendaagsche Moraal [English: Present-Day Morality] (Kampen: J. H. Kok, 1902).




16. Bremmer, Bavinck als Dogmaticus, 378: “Bavinck was offended by a certain hypocrisy in his own circles. ‘What troubled him the most was that some indeed cried, “Reformed, Reformed,” but their life did not correspond to their confession. That was a thorn in the eye to him.’” Bremmer is quoting J. H. Landwehr.




17. Hepp, Bavinck, 29.




18. Henry Zylstra, “Preface” to Herman Bavinck, Our Reasonable Faith, tr. Henry Zylstra (Grand Rapids: Eerdmans, 1956), 5, 6. The Magnalia Dei is Bavinck’s own synopsis in 1909 of his four-volume Gereformeerde Dogmatiek. The sub-title of the Magnalia Dei is significant in that it expresses Bavinck’s conviction that Reformed dogmatics, and his in particular, must be based on and conform to the Reformed creeds. The sub-title is “Onderwijzing in de Christelijke Religie naar Gereformeerde Belijdenis” [English translation: “Instruction in the Christian Religion according to the Reformed Confession”] (Herman Bavinck, Magnalia Dei, Kampen: J. H. Kok, 1909).




19. Hepp, Bavinck, 84, 86.




20. Hepp, Bavinck, 89.




21. Hepp, Bavinck, 322. The Dutch word that I translate as “awful” is “ontzaglijke,” which can also mean “enormous.”




22. Bremmer, Bavinck als Dogmaticus, 381.




23. Hepp, Bavinck, 83.




24. Hepp, Bavinck, 197, 198.




25. Hepp, Bavinck, 83. Bavinck continued by asking why Bulens did not include in the assignment the words that follow in the text, “of the blind.” The addition of the phrase, “of the blind,” to the assignment, would, of course, have reflected on Bavinck himself.




26. Hepp, Bavinck, 36.




27. On the novel, heretical covenant doctrine of Pieters and Kreulen and the controversy it caused in the churches of the Secession, see David J. Engelsma, “The Covenant Doctrine of the Fathers of the Secession,” in Always Reforming, ed. David J. Engelsma (Jenison, MI: RFPA, 2009), 100-136.




28. Hepp, Bavinck, 91.




29. Hepp, Bavinck, 104.




30. Hepp, Bavinck, 180.




31. Hepp, Bavinck, 318.




32. Hepp, Bavinck, 326.




33. Cited in the preface to Our Reasonable Faith, 7.




34. Herman Bavinck, The Certainty of Faith, tr. Harry der Nederlanden (St. Catharines, Ontario, Canada: Paideia, Press, 1980). The original Dutch edition was De Zekerheid des Geloofs, 3rd rev. ed. (Kampen: J. H. Kok, 1918). In this work, Bavinck exposed the pietism of the nadere reformatie and other movements as unreformed. In this corruption of the Reformed faith, “faith was not immediately certain of itself right from the beginning. There was a difference between the essence and the well-being of faith … Certainty was attained only after a series of experiences spread out over many years. It was not given with faith itself, nor did it issue from it.” These pietists in the Reformed churches “continued to stumble forward along life’s way in sighing and lamentations. They were a poor, wretched people always preoccupied with their own misery, seldom if ever rejoicing in the redemption that was theirs in Christ Jesus and never coming to a life of joy and gratitude. They preferred to be addressed as Adam’s polluted offspring, as sinners under God’s judgment” (43, 44).




35. Hepp, Bavinck, 262-264. “In 1889 Bavinck underwent the heaviest psychical shock of his entire life … [For some time thereafter] he gave the impression of a deeply disappointed, although not of a disillusioned, man” (262, 263).




36. Bavinck, Reformed Dogmatics, ed. John Bolt, tr. John Vriend, 4 vols. (Grand Rapids: Baker, 2003), 1:44, 45.




37. Bavinck, Reformed Dogmatics, 1:86, 87.




38. Bavinck, Reformed Dogmatics, 1:89.




39. Bavinck, Reformed Dogmatics, 1:112.




40. Bavinck, Reformed Dogmatics, 1:213.




41. Bavinck, Reformed Dogmatics, 1:112.




42. See his The Certainty of Faith, referred to and quoted from in footnote 33.




43. Bavinck, Reformed Dogmatics, 1:58.




44. Bavinck, Reformed Dogmatics, ed. John Bolt, tr. John Vriend, 4 vols. (Grand Rapids: Baker, 2004), 2:368. The emphasis is Bavinck’s.




45. Bavinck, Reformed Dogmatics, 2:369.




46. Bavinck, Reformed Dogmatics, 2:343.




47.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69.




48.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64.




49.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66.




50.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70, 471.




51.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93-499.




52.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94, 510.




53. Bavinck, Reformed Dogmatics, ed. John Bolt, tr. John Vriend, 4 vols. (Grand Rapids: Baker, 2008), 4:266-270.




54. Bavinck, Reformed Dogmatics, 4:269.




55. Bavinck, Reformed Dogmatics, 4:269.




56. Bavinck, Reformed Dogmatics, 4:267.




57. Bavinck, Reformed Dogmatics, 3:590, 591.




58. Bavinck, Reformed Dogmatics, 4:269, 270.




59. Bavinck, Reformed Dogmatics, 4:269.




60. Bavinck, Reformed Dogmatics, 2:390.




61. Bavinck, Reformed Dogmatics, 2:391. For Bavinck’s complete treatment of the issue of the order of the decrees, see volume 2 of the Reformed Dogmatics, pages 382-392. That his biblical method of doing theology was the cause of his development of the doctrine of the counsel of God with specific regard to the order of the decrees, Bavinck himself expressed: “neither the supralapsarian nor the infralapsarian view of predestination is capable of incorporating within its perspective the fullness and riches of the truth of Scripture and of satisfying our theological thinking” (391).




62. Hepp, Bavinck, 127. Bavinck continued with his encomium.




63. Hepp, Bavinck, 126.




64. Hepp, Bavinck, 126.




65. The “ethical theology” in the Netherlands in the nineteenth century was a distinct theological movement, of which de la Saussaye was a leading representative. It held that the essence of the Christian religion was not doctrinal, but experiential and moral, that is, ethical (whence the name of the movement). Not what one believes is important, but how one feels and lives. It founded the Christian religion, not on the objective basis of Scripture, as summarized by confessions, but in the Christian’s consciousness, or experience. The fundamental principle of the “ethical theology” was “that not Scripture, not the revealed Word of God outside us, but the faith of the congregation is determinative [that is, is the foundation of the Christian religion]” (“Ethischen,” in Christelijke Encyclopaedie voor het Nederlandsche Volk, vol. 2, 122, 123; the translation of the Dutch is mine). This theology, de-emphasizing as it did the Word of God, the creeds, and orthodox doctrine in favor of experience and conduct, was, as is always the case with theologies that make Christian experience fundamental, rife with heresies, among which were rejection of the inspiration of Scripture and the objective revelation of God, denial of predestination, denial of the divine person of Christ, false teaching concerning the atonement of the cross, error concerning the church, and more (see Christelijke Encyclopaedie, 123.)




66. Hepp, Bavinck, 163.




67. Hepp, Bavinck, 163.




68. Hepp, Bavinck, 164.




69. Hepp, Bavinck, 168.




70. Bremmer, Bavinck als Dogmaticus, 328.




71. Bremmer, Bavinck als Dogmaticus, 342.




72. Hepp, Bavinck, 334.




73. Bremmer, Bavinck als Dogmaticus, 313.




74. Bremmer, Bavinck als Dogmaticus, 313.




75. Bremmer, Bavinck als Dogmaticus, 140. Significantly, Roessingh noted that in this concern Bavinck was one with Chantipie de la Saussaye, Jr.




76. Bremmer, Bavinck als Dogmaticus, 372.




77. Hepp, Bavinck, 326.




78. Bremmer, Bavinck als Dogmaticus, 115-122. Significantly, one of those who charged Kuyper and Bavinck with departure from the old Calvinism of Calvin and the creeds—Hylkema—thought to have proved his charge by contrasting Calvin’s Institutes with Kuyper’s brief for common grace, the Lectures on Calvinism—the “Stone lectures” (Bremmer, 121).




79. “[The phrase], grace does not abolish nature, but affirms and restores it,” … is the central theme [in Bavinck] that recurs in numberless variations, the refrain that is unceasingly repeated, the leitmotif which we hear everywhere” (J. Veenhof, “The Relationship between Nature and Grace according to H. Bavinck,” Potchefstroomse Universiteit: Institute for Reformational Studies, 1994, 15).




80. Bavinck, Reformed Dogmatics, 1:322. The original is in Latin: “Natura praecedit gratiam, gratia perficit naturam. Ratio perficitur a fide, fides supponit naturam” (Gereformeerde Dogmatiek, 2nd revised and expanded ed., Kampen: J. H. Bos, 1906, vol. 1, 336).




81. “When Bavinck renders perficit as ‘restores,’ it is plain that this involves a certain modification of the original meaning” (Veenhof, “The Relationship between Nature and Grace according to H. Bavinck,” 15).




82. Bavinck, Reformed Dogmatics, 1:318-320.




83. Bavinck, Reformed Dogmatics, 1:322.




84. Bavinck, Reformed Dogmatics, 1:305.




85. Bavinck, Reformed Dogmatics, 1:318.




86. Bavinck, Reformed Dogmatics, 1:321.




87. Bavinck, Reformed Dogmatics, 2:572.




88. Bremmer, Bavinck als Dogmaticus, 371.




89. Bavinck, Reformed Dogmatics, 2:495.




90. Bavinck, Reformed Dogmatics, 2:496, 497. “It is probable … that the creation of heaven and earth in Genesis 1:1 preceded the work of the six days in verses 3ff. by a shorter or longer period” (496).




91. Bavinck, Reformed Dogmatics, 2:498-500.




92. Bavinck, Reformed Dogmatics, 2:500.




93. Bavinck, Reformed Dogmatics, 2:506.




94. Bavinck, Reformed Dogmatics, 2:407-439, 511-520.




95. Bavinck, Schepping of Ontwikkeling (Kampen: J. H. Kok, 1901). In this work, Bavinck contrasts creation and evolution with regard to the origin, the essence, and the goal of all things, demonstrating the wickedness, the folly, and the hopelessness of evolution. Belief of creation as the truth of the origin, essence, and goal of all things is grounded in Scripture: “We Christians have truly, thanks be to God, another hope and a firmly grounded expectation [in contrast to evolution, the hopelessness of which Bavinck has just described, in chilling detail]. We are able to speak of more glorious things, since God has revealed them to us in his Word. The Holy Scripture is a wonder-book; no other book is like it” (54). The translation of the Dutch is mine.




96. Bavinck himself recorded this dissatisfaction with his doctrine of Scripture on the part of his Secession examiners in a diary he kept (see Gleason, Bavinck, 65). Gleason attributes this dissatisfaction to mistrust on the part of the examiners because of Bavinck’s training at the modernist seminary in Leiden and speaks of “the soundness of Bavinck’s view of Scripture that we find in the Reformed Dogmatics.” Gleason is mistaken.




97. Bremmer, Bavinck als Dogmaticus, 383, 384. The other points were the doctrine of the true and false church in Article 29 of the Belgic Confession and the relation of church and state in Article 36 of the Belgic Confession. Bremmer’s inclusion of Article 8 of the Belgic Confession in the section on Scripture is a mistake. Article 8 confesses the oneness of being and the threeness of persons of the Godhead.




98. Bavinck, Reformed Dogmatics, 1:435; emphasis added.




99. Bavinck, Reformed Dogmatics, 1:435.




100. Bavinck, Reformed Dogmatics, 1:430-448.




101. See Jan Lever, Creation and Evolution, tr. Peter G. Berkhout (Grand Rapids: Kregel’s, 1958) and Where are We Headed? A Christian Perspective on Evolution (Grand Rapids: Eerdmans, 1970); see also Howard J. Van Till, The Fourth Day (Grand Rapids: Eerdmans, 1986).




102. Cited in Gleason, Bavinck, 399.




103. Hepp states that in the matter of the discipline of Netelenbos at the synod of Leeuwarden, Bavinck “belonged to the most longsuffering among the longsuffering” with regard to the young heretic (Bavinck, 337).




104. D. Th. Kuiper, De Voormannen: Een sociaal-wetenschappelijke studie over ideologie, konflikt en kerngroepvorming binnen de Gereformeerde wereld in Nederland tussen 1820 en 1930 [English translation: The Leading Men: A Social-Scientific Study concerning Ideology, Conflict, and the Forming of Basic Groups within the Reformed World in the Netherlands between 1820 and 1930] (Kampen: J. H. Kok, 1972), 265, 266. The translation of the Dutch is mine. Netelenbos’ “believing (sic) criticism” of Scripture consisted, among other instances, of attributing Isaiah 40-66, not to the “real” Isaiah, but to a “second Isaiah” (“Deutero-Isaiah”) “because this section presupposes the Babylonian captivity.” Netelenbos also had doubts about the inspiration and canonicity of the Song of Solomon. Netelenbos’ defense before the synod was that “the divine and the human factor are interwoven in Scripture” and that this was the accepted teaching of Kuyper and Bavinck (De Voormannen, 264, 265).




105. Kuiper, De Voormannen, 286.




106. In addition to the speaking serpent, Geelkerken expressed doubt also concerning the literal reality of the two trees in the garden. For Geelkerken, although he hesitated to use the word, the entire chapter was a “myth.”




107. Kuiper, De Voormannen, 288.




108. Bremmer, Bavinck en Zijn Tijdgenoten, 269. The name of the new denomination was “Gereformeerde Kerken in hersteld verband” [English translation: the Reformed Churches in restored connection, or the Restored Reformed Churches].






109. D. B. Eerdmans, “Moderne” Orthodoxie, quoted in John Bolt, A Free Church, A Holy Nation: Abraham Kuyper’s American Publ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2001), 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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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학 2023. 4. 30. 20:58

그레고리 빌의 요한계시록의 과거사적 관점에 대한 비평

번역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석은 주로 4가지 관점에서 이루어지고있다.

G.K. Beale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서술하기에 앞서서 많은 이들이 취하고있는 과거사적 관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있다.

과거사적 관점주의자들은 요한계시록의 예언들이 역사 속에서 이미 성취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다.

다음은 빌의 요한계시록 주석 152-154쪽에서의 과거사적 관점에 대한 빌의 입장을 번역한 것이다

과거사적 관점
The Preterist View


과거사적 관점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The preterist perspective has two forms.

첫번째는 요한계시록을 기원후 70년에 있을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라고 보는 관점인데, 이는 당연히 계시록이 기원후 70년 이전에 기록되었음을 요구한다.
The first sees Revelation as a prophecy of the fall of Jerusalem in 70 A.D., which, of course, requires that the Apocalypse be dated prior to 70.

(과거사적 관점에서) "큰 성 바벨론"은 그리스도인을 압제하는데 있어서 로마를 도와주는 배교한 이스라엘을 나타낸다.
“Babylon the Great” represents apostate Israel, who aids Rome in oppressing Christians.

(이러한 관점에서는) 당연하게 이 책(계시록)의 목적의 일부가,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배교로 인하여 심판을 받게될 것이라며 기독교인들을 격려하고, 독자로하여금 자신들이 참된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확신시키는 것이다.
Accordingly, part of the purpose of the book is to encourage Christians that their Jewish persecutors will be judged for their apostasy and to assure the readers that they are now the true Israel.

이러한 입장의 문제점들은 이미 앞(계시록의 시기에 관하여 다룬 부분)에서 논의하였으며, 주해를 통하여 좀 더 적절한 관점들을 논의할 것이다.
The problems with this position already have been discussed above (see the section above on the date of the Apocalypse) and will be addressed further at appropriate points throughout the commentary.

과거사적 관점주의자들의 접근방식의 심각한 문제점은 구원과 심판에 관한 계시록의 예언의 대부분을 기원후 70년에 제한시키는 것이며, 이러한 예언들이 그 시기에 절정에 이르면서 성취되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A significant problem with this form of the preterist approach is that it limits most of the book’s prophecies of salvation and judgment to 70 A.D. and asserts that these prophecies reached their climactic fulfillment at that time.

실제로, 다니엘서 2장과 7장의 예언들은, 우선적으로 믿지않는 이스라엘보다는, 악한 민족들의 마지막 심판을 계시적 예언을 통하여 언급하고있음을 보여주고있다.
Indeed, the prophecies of Daniel 2 and 7 alluded to throughout the Apocalypse foresee a last judgment of the evil nations, not primarily of unbelieving Israel.3

흥미롭게도, 이러한 과거사주의자들의 해석은 요한계시록 13장 1절과 다니엘 7장에서의 짐승을 이방 민족인 로마와 동일시하고있는데, 다니엘은 이를 마지막 심판의 대상으로 보고있다는 것이다.
Interestingly, these preterist interpreters identify the beast from Daniel 7 in Rev. 13:1ff. with a pagan nation (Rome), which Daniel then sees as the object of final judgment.

그러고나서 이들은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의 배교한 이스라엘을 다니엘이 예언하고있는 최후 심판에서의 주된 대상과 동일시하고있다.
But then they identify apostate Israel elsewhere in the book as the main object of Daniel’s prophesied final judgment (e.g., see below on 11:15-18).

구약과 신약에서 배교한 이스라엘이 열방과 함께 심판받으리라고 보는 것은 사실이다.
It is true that the OT and NT expect apostate Israel to be judged along with the nations.

요한도 이를 따르고있는 것이다.
John likely follows suit.

다니엘은 이러한 열방이 징벌을 받을 주된 대상이라고 보고있는데도 불구하고, 요한이 믿지않는 이스라엘을 악한 열방 대신에 우선적인 심판의 대상으로 보고있다고한다면, 이는 이상한 것이 될 것이다.
Nevertheless, it would be strange if John saw unbelieving Israel as the primary object of judgment instead of the evil nations, since Daniel viewed these nations as the main object of punishment.

그러므로, 일관되게 이러한 관점을 선택을 하는 이들이 직면하게되는 가장 어려운 문제점들은, 계시록을 통틀어서 최후의 심판이라고 예언되어지는 것들이 기원후 70년에 비유적으로 성취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Therefore, one of the most difficult problems facing consistent proponents of this alternative is that what appear to be prophecies of final judgment throughout the book are seen as figuratively fulfilled in 70 A.D.

밀접하게 관계되는 문제는 이러한 과거사적 해석자들이 요한계시록의 최후의 심판을 이스라엘로 제한시킨다는 것이지만, 다니엘 2장과 7장은 우주적 심판을 예고하고있다는 것이다.
A closely related problem is that these preterist interpreters understand the prophecies of final judgment in Revelation to be limited to Israel, whereas Daniel 2 and 7 anticipate a universal judgment.

요한의 묘사들은, 자신의 다니엘 암시를 포함하여, 다니엘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가장 잘 해석되어진다는 것이다.
John’s depictions, including his allusions to Daniel, are best interpreted in the same way as Daniel.

결과적으로, 이러한 과거사적 관점주의자들에 의존하게되는 증거의 짐들은, 이스라엘과 함께 이방 나라들을 다니엘의 최후의 심판의 우선적 대상으로 바꾸는 해석학적 근거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최후의 심판을 우주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주로 이스라엘로 제한시킨다는 것이다.
Consequently, the burden of proof rests on these preterists to provide an exegetical rationale both for exchanging a pagan nation with Israel as the primary object of Daniel’s final judgment and for limiting the last judgment mainly to Israel and not applying it universally.

중요한 것은, 요한계시록에서 "모든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의 일부"라는 구절이 구속받은, 그리고 구속받지 않은 무리들 모두에게 사용되어지고 있다는 것이다(5:9; 7:9; 10:11; 11:9; 13:7; 17:15).
Significantly, the phrase “some from every tribe, people, tongue, and nation” is used in Revelation of both redeemed and unredeemed groups (5:9; 7:9; 10:11; 11:9; 13:7; 17:15).

이러한 반복 구절은 다니엘 3-7장을 암시하고 있으며, 다니엘에서도 또한 반복되고있는데, (과거사적 관점은) 이에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It is probably not coincidental that this repeated phrase alludes to Daniel 3–7, where it is also repeated.

여기서 언급되어지는 백성은 바벨론 사람들이나 페르시아 제국, 혹은 끝날의 신성한 나라의 주제로서의 온 지면의 백성들이다.
There it refers to peoples throughout the earth as subjects of the Babylonian or Persian empires or of the end-time divine kingdom (see below on 5:9).

분명한 것은 다니엘 7장 14절에서의 공식은 전 세계를 통틀어 인자에게 속하여있는 모든 백성들을 언급하고있다는 것이다.
Clearly the formula in Dan. 7:14 (Theod.) refers to all peoples throughout the world as subjects of the Son of man.

요한계시록에서도 마찬가지의 우주적 뉘앙스가 설득력이 있으며, 13장 7-8장에 강조되어있듯이, 이는 "땅에 거하는 모든 이들"과 동일한 것이다.
The same universal nuance is probable in Revelation and is underscored in 13:7-8, where it is equated with “all who dwell on the earth.”

요한계시록에서 이러한 분명한 우주적 공식들과 이와 유사한 표현들이 1세기의 이스라엘, 혹은 다른 그룹들에게 제한된다는 주장은 설득력있게 증명되어졌던 적이 없다.
The contention that these apparently universal formulas and like phraseology in Revelation are limited either to Israel or to other groups in the first century has not been persuasively demonstrated.

과거사적 해석의 두번째 형태는 요한계시록이 기원후 5세기에 성도들을 핍박한 "큰 성 바벨론"인 로마제국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이다.
The second form of preterist interpretation holds that Revelation is a prophecy of the fall of the Roman Empire, “Babylon the Great,” the persecutor of the saints, in the fifth century A.D.

이 책(요한계시록)의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들을 박해자들이 분명하게 심판받을 것이기 때문에 견디어낼 것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The purpose of the book is to encourage Christians to endure because their persecutors assuredly will be judged.

더군다나 그리스도인은, 소아시아를 침략한 우상을 섬기는 로마의 체제와 어떠한 형태로든 동일시함으로서 자신의 증거를 타협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한다는 것이다.
Furthermore, Christians are exhorted not to compromise their witness by identifying in any way with the idolatrous Roman system, which has made inroads into Asia Minor.

이러한 (두번째 형태의) 과거사적 접근 형태는, 이른 시기라는 필요성이 없고, 로마가 예루살렘 보다는 "바벨론"과 좀 더 동일시 될 수 있기 때문에, 기원후 70년이라는 선택보다는 좀 더 설득력이 있다.
This version of the preterist approach is more viable than the 70 A.D. alternative because it does not necessitate the early date and because Rome is a more probable identification of “Babylon” than Jerusalem.

그러나 이러한 형태는, 기원후 5세기 동안에 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이미 충족된, 최후의 심판이라는 많은 분명한 예언들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But this version does encounter the difficulty of understanding many of the apparent prophecies of final judgment as being already fulfilled in the fall of the Roman Empire during the fifth century A.D.

어떤 해석자들은 요한의 전세계적인 파괴에 대한 요한의 (일부의) 예언들이, 비유가 아니라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져야한다며, 과거사주의자들의 형태를 고수하는데, 이렇게되면 그가(요한이) 단순히 실수를 한 것이 되기 때문에 절대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Some interpreters hold to a form of preterism in which (some of) John’s prophecies of worldwide destruction are to be understood literally, not figuratively, but never came to pass because he was merely mistak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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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 2022. 10. 22. 21:29

데이비드 딕슨의 구속 언약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 대해서는 종교 개혁 이후 16세기에 들어와서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게된다.

데이비드 딕슨David Dickson (1583-1662)의 논술들은 구속 언약에 대한 관심의 시발점이 된다.

이보다 앞서 16세기 초에 알미니우스Jacob Arminius (1560-1609)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언약에 대하여 명확히 하고 있다.

도르트총회를 중심으로 알미니우스의 후예들인 항론파들의 주장들에 대하여 반박을 하였던 데이비드 딕슨David Dickson (1583-1662)은 항론파들이 알미니우스가 진술한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의 구속 언약에 대하여 익숙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를 계기로 딕슨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의 구속 언약에 대하여 깊은 연구를 하면서 창세 전 구속 언약에 대하여 정리를 하였으며, 여기서 정립한 구속 언약에 관한 그의 논문들은 이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비롯한 여러 고백서들에서 체계적으로 정립되기 시작했다.

비록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는 구속 언약에 대한 교리를 명백히 하지는 않았지만, 스코틀랜드 교회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가 구속 언약과 전적으로 부합되고있음을 믿고있었다.

비슷한 방식으로 개혁주의 회중교회Reformed Congregationalists (1658)와 일부 침례교 신학자들도 개선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채용하면서 여기에 구속 언약을 추가하였다.

17세기 후반에는 이 교리가 개혁신학에 보편적으로 자리메김을 하였으며, 몇몇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에서는 공식적으로 성문화되었다.

다음은 존 페스코J. V. Fesko의 The Trinity and the Covenant of Redemption 23,4쪽의 일부를 번역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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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딕슨David Dickson (1583-1662)은 1638년 스코틀랜드 교회의 총회General Assemblyof the Scottish Kirk에서 구속 언약에 관한 교리에 대하여 처음으로 명확하고 상세한 진술을 하게된다.

그는 항론파의 주된 실패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이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의 구속 언약Covenant of redemption betwixt God and Christ에 대하여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을 진술한다.

딕슨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의 구속 언약the covenant of redemption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구원의 언약covenant of salvation (or grace)과 다르다는 것을 설명한다.

딕슨이 구속 언약에 대하여 언급하는 이유는,구속 언약이 은혜 언약의 붕괴에 대한 방파제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하여 아무도 (은혜 언약을) 침범할 수 없게끔 보장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딕슨은 연설을 마치면서 구속 언약이 어떻게 은혜 언약을 보장하는지에 대하여 5가지 주제로 설명한다.

첫번째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사이의 언약으로서 이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모든 것의 근거가 된다.
First, there is a covenant between God and Christ, which is the ground of all that God does to redeem fallen man.

두 번째로는, 구속 언약에 있는 구원받을 이들의 시간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이름과 숫자에 관해서도 계획되어있다.
Second, in the covenant of redemption the elect were designed in terms of their name and number as well as the time in which they would be saved.

특정인들에 대한 선택은 구속 언약 안에서 결정되어있다.
The election of certain individuals was determined in the covenant of redemption.

세번째로, 구속의 값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잡히신바holden captive of death된 것으로 확립되었다.
Third, the price of redemption was established, how Christ would be ‘holden captive of death, &tc.’

네번째로, 중재자는 자신의 성공이 보장되셨으며, 택함받은 이는 그분께 드려졌으며, 그들의 구원은 그분의 손에 놓여진 것이다.
Fourth, the mediator was ensured of His success and the elect were given to Him, and their salvation was placed in His hand.

다섯번째로, 구속 언약의 열매로서 복음을 통하여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지혜를 고려해 볼 때, 아무도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는 것을 취하거나 구원의 보장을 탈취할 수는 없다.
Fifth, no one would truly take God’s grace for granted or be robbed of the assurance of salvation given God’s wise dispensation of the gospel, the fruit of the covenant of redem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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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 2022. 8. 14. 22:06

존 페스코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믿음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신자의 구원의 근거로서의 그리스도의 믿음은 많은 저명한 설교자들이 종종 인용하고 주장하는 개념이다.

이는 신학적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많은 이들에게 종종 혼란을 가져다 주기도한다.

신자의 구원의 근거가 (그리스도가 주격인) 그리스도의 믿음이냐 아니면 (그리스도가 목적격인)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냐라는 두 가지는 분명 구분되어지고 정리되어져야한다.

어떤 이들은 신자의 믿음 조차도 그리스도의 믿음에 근거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믿음이 신자의 믿음의 근거라고 말하기도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믿음과 신자의 믿음은 분명히 성격이 다른 구분되어져야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믿음은 타락 전 아담이 가졌던 믿음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되어져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믿음은 타락 전 아담의 믿음과 마찬가지로 구원하는 믿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순종에 따른 하나님의 상급에 관한 믿음이다.

물론 창세기에는 아담의 순종에 따른 상급에 대한 언급이 나와있지 않다.

하지만 구약이 신약을 통하여 해석되어질 때 분명 아담의 순종은 영원한 축복과 안식에 대한 상급이 있었다.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서 타락 전 처음 아담과 마찬가지로 죄가 없으시다.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의 믿음은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언약에 대한 믿음이다.

신자에게는 타락 후의 처음 아담과 마찬가지로 구원하는 믿음이 요구된다.

이는 그리스도의 믿음과는 구분되는 다른 성격의 믿음이다.

이에 대하여 존 페스코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다음 번역 부분은 존 페스코의 "아담과 행위언약ADAM AND THE COVENANT OF WORK"에서 "칭의가 행위와 믿음 모두에 의한 것인가? Justification is Either by Works or Faith"에 관한 서술 가운데 일부(p472-475)를 취하여 번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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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적 삶이 순종, 혹은 행위를 요구한다는 주장에 대한 두 가지 그럴듯한  반대가 있다:

There are two likely objections against the claim that eschatological life required obedience, or works:

아담의 상태가 믿음을 요구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성공적인 언약적 검증이 믿음과 행위의 복합적 구성에 의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Did not Adam’s state require faith and thus in some sense his successful covenantal probation would have consisted in a combination of faith and works? 

이런 맥락에서 신약은 그리스도의 믿음을 말하고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의 행위가 믿음과 행위가 섞여있는 것이 아니지 않겠는가?

Correlatively, does not the New Testament speak of the faith of Christ, and thus in some sense was not Christ’s work a mixture of faith and works? 

아담의 믿음에 관한 첫번째 의문은 애매하게 사용되고있는 믿음의 의미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The first question regarding Adam’s faith employs an equivocal use of the term faith. 

예를 들자면, 은혜언약에 있어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구원하는 믿음을 ‘은혜언약으로 인하여, 칭의, 성화,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그리스도만을 받아들이고, 영접하고, 의지하는 것’을 구원하는 믿음으로 정의하고있다(웨민신앙고백 14.2)

In the covenant of grace, for example, Reformed theologians have defined saving faith as ‘accepting, receiving, and resting upon Christ alone for justification, sanctification, and eternal life, by virtue of the covenant of grace’ (WCF XIV.ii). 

믿음이라는 것은 다른 이의 공로, 즉 예수의 공로를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Faith is resting and trusting in the work of another, namely, Jesus. 

보스가 말했던 것과 같이, ‘아담에게 있어서는 선택받은 죄인이 하여야할 것을 인지하였던 것과 같은 구원하는 믿음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As Vos notes, ‘For Adam, there was no thought of saving faith as the elect sinner learns to exercise it.’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25절들 가운데 16번이나 faith (πίστις), 혹은 believe(πιστεύω)를 사용하여 이러한 점을 강조하였다.(롬 4:3, 5, 9, 11, 12, 13, 14, 16, 18, 19, 20, 22, 24). 

The apostle Paul, for example, highlights this point in Romans 4 by using the words faith (πίστις) or believe (πιστεύω) sixteen times in twenty-five verses (Rom. 4:3, 5, 9, 11, 12, 13, 14, 16, 18, 19, 20, 22, 24). 

이러한 점에서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라고 말하는 로마서 4장 5절은 놀랄만하다.

Stunning in this respect is Romans 4:5, ‘And to the one who does not work but believes in him who justifies the ungodly, his faith is counted as righteousness.’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다른 사람의 공로를 의지하는 것, 즉 자신을 대신하여 공로를 행하는 누군가를 신뢰하는 믿음을 실행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God did not tell Adam to rest in the work of another – to exercise his faith and trust someone else to accomplish the work on his behalf. 

1부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아담의 믿음을 말했을 때, 이들은 행위언약 아래서의 믿음의 기능과 은혜언약 아래서의 믿음의 기능을 조심스럽게 구분하고 있었다.

As noted in Part I, when Reformed theologians have spoken of Adam’s faith, they carefully distinguish between the function of faith under the covenants of works versus grace. 

신학자들은 법적인 믿음과 복음적인 믿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Theologians speak of legal versus evangelical faith. 

법적인 믿음은 율법에 대한 순종을 통한 칭의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는 반면에 복음적인 믿음은 복음을 통한 칭의를 추구한다.

Legal faith is interchangeable with justification through obedience to the law whereas evangelical faith seeks justification through the gospel.

법적인 믿음은 단순히 율법의 약속들, 즉 이를 행하는 이들은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약속들을 믿는 것이다.

Legal faith (fides legalis) simply believes the promises of the law, namely, the one who does them will live in them.

이러한 구분은 바울이 행함의 법과 믿음의 법을구대비시킬 때 사용했던 바울 자신의 단어와 유사하다(롬 3:27)

These distinctions parallel Paul’s own vocabulary when he contrasts the law of works versus the law of faith (Rom. 3:27).

두번째로, 그리스도의 믿음이라는 개념은 피스투스 크리스투(pistis Christou)의 의미에 대한 뜨거운 논쟁에 불을 지폈는지, 이는 피스투스 크리스투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이 어휘를 목적격으로 해석하느냐, 아니면 주격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혹은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예를 들면 롬 3:22, 26; 빌 3:9;G갈 2:16, 20; 3:22; 야 2:1를 참조). 

Second, the idea of Christ’s faith treads upon the hotly contested question of the meaning of pistis Christou, which can be translated as faith in Christ or the faith of Christ depending on whether one interprets the lexeme as an objective or subjective genitive (see, e.g., Rom. 3:22, 26; Phil. 3:9; Gal. 2:16, 20; 3:22; James 2:1). 

이 주제에 관해서는, 그렇게 크게 중요하지 않은 부분의 영역을 과도하게 넘어서는 문헌의 점진적 확대가 있다.

There is a growing body of literature on this subject that far exceeds the scope of this modest section.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스티스 크리스투(그리스도의 믿음)에 대한 주격적 해석을 무시해야만 하는 적합한 이유들이 있다.

Nevertheless, there are good reasons to dismiss the subjective genitive translation of pistis Christou (‘faith of Christ’). 

모세 실바는 목적격을 선택하여야만 하는 5가지 핵심적 이유들을 제공해주고있다.

Moisés Silva provides five key reasons for opting for the objective genitive: 

(1) 그리스 동방정교회는 교부들이 목적격을 수용하고있다고 말한다.

(1) the Eastern Greek-speaking church fathers opted for the objective genitive; 

(2) 인간의 믿음은 신약에서의 중요한 주제이다.

(2) human faith is a significant theme in the New Testament; 

(3) 바울은 규칙적으로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대하여 피스티스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리스도에 관련된 다른 경우에 있어서는 가장 최상의 것들 조차도 애매하기만 하다.

(3) Paul regularly uses the term pistis vis-à-vis the Christian’s faith but the other occurrences as they might relate to Christ are ambiguous at best; 

(4) 갈라디아서 2-3장에서는 일관되게 피스튜오(πιστεύω, 믿음)을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관련되어 사용하며, 이는 그리스도의 믿음에 관련된 것이 아니다.

(4) Galatians 2–3 consistently uses the verb πιστεύω to refer to the Christian’s faith, not Christ’s; and 

(5)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 어느 정도 행위를 떠난 구원을 무시하고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5) there is no reason to suggest that highlighting faith in Christ somehow negates salvation apart from works. 

칭의의 모든 관점에 있어서, 솔라피데(오직 믿음)은 자신들의 행위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The whole point of justification sola fide is for people to abandon their own works and rest in the works of Christ.

우리가 혹시 그리스도의 하늘의 아버지에 대한 일반적인 신뢰에 관하여 그리스도의 믿음을 말하는 경우에는, 우리는 율법의 약속에 대한 아담의 믿음과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행하는 이는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자신의 아버지의 말을 믿는다는 것을 언급하여야만 할 것이다(레 18:5).

While we may speak of Christ’s faith as a general trust in His heavenly Father, we must note that like Adam’s faith in the promises of the law, Christ believed His Father’s Word that the one who does the law will live in it (Lev. 18:5).

그리스도는 자신을 대신하여 율법을 충족시킬 다른 이를 찾지 않으셨다.

Christ was not looking to another to fulfill the law on His behalf. 

설령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아버지를 믿었으셨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하여 신약은 침묵하고있다.

But even then, while Christ had faith in His Father, the New Testament is silent regarding this matter. 

신약에서는 한번도 이에 대하여 언급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이는 신자들의 믿음에 대한 풍부한 진술이나 설명과는 분명히 대조를 이루고있는 것이다.

It never once speaks of or explains it; this stands in stark contrast to the copious statements and explanations of the faith of believers. 

피스티스 크리스투 논쟁에 있어서 비슷한 맥락에서, 노먼 쉐퍼드(1933-)는 그리스도의 믿음이 중재자로서의 자신의 행위에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Along similar lines as the pistis Christou argument, Norman Shepherd (b. 1933) has maintained that Christ’s faith was integral to His work as mediator.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어진 언약을 충족시키는 것에 관하여, 쉐퍼드는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적 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이는 그를 온전하게 십자가로 이끄는 살아있는, 능동적인, 그리고 순종하는 믿음이었다. 이러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는 의롭다고 인정받게되어진 것이다.

Concerning the fulfillment of the covenant promise to Abraham, Shepherd writes that, ‘All of this is made possible through the covenantal righteousness of Jesus Christ. His was a living, active, and obedient faith that took him all the way to the cross. This faith was credited to him as righteousness.’

이러한 주장이 성경적 언어로 치장되었고 이러한 이유로 진실인 것처럼 보이지만, 쉐퍼드는 이를 그리스도께 잘못 적용하고있는 것이다.

While this statement is laced with biblical language and for that reason seems to ring true, Shepherd erroneously applies it to Christ. 

신약 어디에도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가 의롭게 여겨졌다고 말하는 곳은 없다.

Nowhere does the New Testament state that Christ’s faith was credited to Him as righteousness. 

바울이 믿음의 예를 제시할 때에는, 그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호소한다(롬 4:3)

When Paul puts forth an example of faith, he appeals to Abraham, not Christ (Rom. 4:3). 

대신에 신약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종을 언급하는 것들로 가득하다(마 3:15; 5:18-19; 요 4:34; 6:38-40; 17:3-6; 롬 5:12-21; 갈 4:4-5). 

Instead, the New Testament is replete with references to Christ obeying the will of His Father, not His faith (Matt 3:15; 5:18-19; John 4:34; 6:38-40; 17:3-6; Rom. 5:12-21; Gal 4:4-5).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자신의 행위와 순종으로 구원하셨다는 것은 바울이 믿음과 행위를 분명한 대조로 제시하는 이유가 된다(롬 2:13;G갈 3:10; cf. 신 6:24; 27.26).

That Christ saves His people by His works or obedience, is why Paul places faith and works in stark antithesis (Rom. 2:13; Gal 3:10; cf. Deut. 6:24; 27.26).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는 의심의 여지 없이 믿음을 가지셨지만, 그의 믿음은 구원하는 믿음과 다른 성격의 것이다.

Again, while Christ undoubtedly has faith, His is of a different order than saving faith. 

바빙크가 언급하였듯이: 우리에게 있어서,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형태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알고있는 죄의 상태의 결과에서만 얻어지는 믿음인 것이기 때문이다.

As Bavinck notes: Naturally faith for Christ was not, as it is for us, trust in the grace and mercy of God, for this feature is something faith only obtained as a result of the state of sin in which we find ourselves. 

본래 아담과 그리스도에 있어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의지하는 행위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며, 보이지 않는 것을 붙잡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께서도 하신 것이다(마 27:46; 히 2:17-18; 3:2)

By nature faith for Adam and Christ was nothing other than the act of clinging to the word and promises of God, a holding on to the Invisible One. And that is what Jesus did as well (Matt. 27:46; Heb. 2:17-18; 3:2).

보스도 비슷한 언급을 하였다: '죄인 안에서 실행되어지는 구원하는 믿음으로서의 믿음이라는 특별한 형태는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Vos similarly states: ‘Of the specific form that faith, as saving faith, takes within the sinner, nothing can be seen in the sinless Christ.’ 

그러므로 행위언약에서의 칭의는 순종에 의한 것이며, 은혜언약에서는 오직 믿음에 의한 것이다.

Justification in the covenant of works is therefore by obedience and in the covenant of grace it is sola fide

 

posted by Wonho Kim
:
스캇 맥나이트 2020. 11. 1. 23:06

스콧 맥나이트의 "예수 왕의 복음"과 메튜 베이츠의 "복음적 충성"에 대한 그레그 길버트의 비평

번역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이번 그레그 길버트의 강연은 스콧 맥나이트의 "예수 왕의 복음"과 메튜 베이츠의 "복음적 충성"을 염두에 두고서 이들이 주장하는 "왕의 복음"이 무엇이 문제인지를 잘 드러내주고있다.

스콧 맥나이트는 자신의 저서 "예수 왕의 복음"에서 많은 부분에서 그레그 길버트의 “Who is Jesus”에서 제시하는 복음의 의미에 이의를 제기하기도했다.

또한 메튜 베이츠는 자신의 저서 "충성으로 받는 구원"과 "복음적 충성Gospel Allegiance”에서 스콧 맥나이트가 강조하였던 왕의 복음을 근거로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충성을 제시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예수가 왕이 되셨다는 사실 자체가 복음이라고 주장한다.

그레그 길버트는 2020년 4월 "T4G”에서의 강연에서 스콧 맥나이트와 메튜 베이츠가 주장하는 왕의 복음에 대한 비평을 하게된다.

그레그 길버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심과 참된 왕의 복음이 무엇인지 왕의 역할을 중심으로 풀어나간다. 

맥나이트와 베이츠의 왕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왕되심과 왕으로서의 역할을 분리시키고있다.

길버트는 왕의 복음이 왕되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분리될 수 없음을 서술하고있다.

다음 글은 2020년 4월 "T4G”에서의 강연 내용이 실린 https://www.9marks.org/article/a-t4g-2020-sermon-what-is-and-isnt-the-gospel/에서의 글을 번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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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복음이고 무엇이 복음이 아닌가
A T4G 2020 Sermon: What Is and Isn’t the Gospel  
 
그레그 길버트
By Greg Gilbert

Article
04.15.2020

이번 강연에서의 제목은 "무엇이 복음이고 무엇이 복음이 아닌가?"입니다. 저는 T4G의 인도자들이 저에게, 이번 달로 쓴지 10년이 되는 "복음이란 무엇이가?"라는 책 때문에, 이번 강좌를 부탁했으리라 생각해봅니다. 그동안 주님이 "이 작은 검정 책"을 사용하셔서 신자들을 격려하고 심지어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하는데 어떻게 사용하셨는가를 듣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The title of this talk is “What Is and Isn’t the Gospel?” I have to assume the grand poohbahs of T4G asked me to do this talk because of a book I wrote ten years ago this month, called What is the Gospel? It’s been wonderful through the years to hear the stories of how the Lord has used “that little black book” to encourage believers and even bring people to faith in Jesus.

그러나 믿든지 안 믿는지 간에, 이 책을— 그리고 우리가 책임져야할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복음에 대한 정의; 인간의 죄의 문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왕이신 예수의 대속적인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해결책; 그리고 회개와 믿음으로 예수께 반응하도록 하는 우리에 대한 부르심을—폄하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But believe it or not, that book—and it’s definition of the gospel as a proclamation of whom we are accountable to; the problem of human sin; God’s solution to that problem in the substitionary life, death, and resurrection of King Jesus; and the call for us to respond to Jesus in repentance and faith—has not been without its detractors.

복음의 핵심
THE BEATING HEART OF THE GOSPEL

저는 지금 제가 10년 전에 쓴 책을 변론하려고 이 시간을 사용할 의도는 없습니다. 대신에 저는 이 시간을 한 가지 특별한 도전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합니다. 이 도전은 성경이 가르치고있는 복음의 핵심이, 우리를 위한 예수의 형벌에 대한 대속적 속죄와, 그를 믿는 것으로 인한 우리의 칭의에 관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우리 모두에 대한 것입니다.
Now, I don’t intend to use this time to defend a book I wrote ten years ago. Instead, I want to use this time to engage in a conversation with one particular charge that’s often leveled against all of us who understand the Bible to teach that the beating heart of the gospel is Jesus’s penal substitutionary atonement for us and our justification by faith alone in him.

나는 최근에 이러한 도전을 하는 두 권의 책, 스콧 맥나이트의 "예수 왕의 복음"과 메튜 베이츠의 "복음적 충성: 구원을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놓치고 있는 것"을 다시 읽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다른 책들 가운데서도 나의 작은 검은 책에 대하여 반응하는데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할애 하였습니다. 나는 특히 감사하게도 베이츠의 책에서 거의 끝나갈 무렵에 그가 요점을 정리하는 가운데에서 다음 문장을 마주치게되었습니다:
I was recently re-reading two books that make this charge, Scot McKnight’s The King Jesus Gospel and Matthew Bates’s Gospel Allegiance: What Faith in Jesus Misses for Salvation. These authors spend a considerable amount of time interacting with my little black book, among others. I was especially gratified to run across this sentence in Bates’s book, near the end, when he’s summing things up:

만약에 챈들러, 길버트, 맥아더, 파이퍼, 그리고 스프로울과 같은 개신교 지도자들이 복음의 참된 내용과 경계들을 규정하는데 실수한다면, 개신교인들은 이들과 교제를 끊거나 아니면 파면시켜야하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이는 매우 부적절한 일일 것이다.
Should Protestants break fellowship with or excommunicate Protestant leaders such as Chandler, Gilbert, MacArthur, Piper, and Sproul if it is true that they have made mistakes about the true content and boundaries of the gospel? Absolutely not. This would be wildly inappropriate.

이것을 읽는 나의 처음 생각은 물론 "와, 나쁘지 않은 사람이군; 나는 이를 받아들이겠어."였습니다. 나는 이러한 문장을 지워버리고 달리 생각하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깨닫게 된 것은 "잠깐, 그는 개신교인들에게 나와 교제를 끊고 나를 추방해야 할 것을 요청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제 마음을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는 우리가 추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베이츠는 나중에 자신들이 이것을 아주 강조할 수는  없겠지만, 매트 챈들러, 존 파이퍼, R. C. 스프로울과 제가 실제로 깊게 낙담해서 구원의 길로 예수를 신뢰하게 될 것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My first thought on reading this, of course, was “Wow. Not bad company; I’ll take it.” I wanted to take that sentence out and frame it. But then I realized, “Wait, did he just ask if Protestant evangelicals should break fellowship with me and excommunicate me?” That wonderfully concentrates the mind! Thankfully, he we shouldn’t be excommunicating. Bates later writes that maybe Matt, John, R. C. and I are actually, deep-down, trusting in Jesus in a saving way even if we can’t articulate it very well.

어떻든 간에, 제가 이 두 가지 책을 제시하게 된 것은, 그들이 자신들 만의 방식으로, 이 분들에게서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 복음적 개혁주의 진영도 비난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유로 잠시 동안 이에 대한 전체 윤곽을 그리고자 합니다. 이러한 비난은, 우리가 죄를 위한 예수의 대속적 형벌 속죄와 그리스도만을 믿는 믿음만으로의 칭의에 대한 복음 선포에 집중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복음의 핵심에 있는 것은 무시하면서 또한 승화시킨다는 것입니다.
Anyway, the reason I bring these two books up is because, in their own way, they each make the same charge against those of us in this Reformed evangelical camp, if I can paint in broad strokes for a minute. That charge is that in centering the proclamation of the gospel around Jesus’s penal substitutionary atonement for our sins, and on justification through faith alone in Christ alone, we are ignoring and sublimating what is actually the heart of the gospel.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인지요? 맥나이트나 베이츠, 그리고 다른 이들은 어떤 때는 미요한 차이로, 어떤 때는 상당한 차이와 불일치를 보여주면서 자신들만의 방식을 만들어 가지만, 그 중심에 있는 명제는, 복음은 예수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메시아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선언이라는 것입니다. 맥나이트는 이러한 선언을 "복음은 이스라엘의 이야기의 절정으로서의 예수의 이야기"로서 이러한 이야기에는 왕권 뿐만이 아니라 다른 맥락들도 포함하고 있지만, 확실하게는 왕권이 이 이야기의 핵심에 있습니다. 베이츠는 이를 궁극적이고 단도직입적으로 "복음의 절정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왕이시라는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And what’s that? Well, McKnight, Bates, and others make their own cases, with sometimes subtle and sometimes enormous differences and disagreements, but the central proposition seems to be that the gospel is the declaration that Jesus is the long-awaited Messiah or King of Israel. McKnight puts that declaration as “The gospel is the Story of Jesus as the culmination of the Story of Israel,” which involves not just kingship but other threads in the story as well; but kingship is certainly key to that Story. Bates puts it utterly straightforwardly: “The gospel climax is that Jesus is the Christ, the King.”

물론 이러한 도전의 취지는 우리 복음주의자들이— 특히 복음주의 설교자들이— 성경의 거대하고 포괄적인 이야기 맥락에서 예수를 제거하지 말것을 확실히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도 이는 좋은 경고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말하고자합니다. 이는 심지어 많은 복음주의적 가르침, 특히 최소한 우리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연자가 복음주의자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구약으로부터 떼어낼 것을 요구하는 경우에는 합법적인 비평으로 자리매김 될 것입니다.
The burden of that charge, of course, is to make sure that we as evangelicals—especially as evangelical preachers—don’t excise Jesus from his place in the grand, sweeping storyline of Scripture. And I have to say, I think that’s a good warning. It may even qualify as a legitimate critique of much evangelical preaching, especially when at least one of our most well-known spokesmen is explicitly calling on evangelicals to “unhitch the Christian faith” from the Old Testament.

사실 우리들 상당 수는, 대속적 속죄와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라는 단순한 (실은 사실인) 전제에 의한 복음을 가르치는 것에서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서사시를 다시 수용하여서 이러한 것들을 전체적인 이야기의 맥락에 적당한 위치에 가져다 놓은 것을 가르치는 것에서 도움을 받고있습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기독교가 냅킨에 쓸 수 있는 서너 문장들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관심을 끌기 위해서 경쟁하고있는 다른 다양한 세계관과 종교들과 비교해서 협소하고 얄팍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는, 여러분이 이를 이해를 하게되었을 때에는, 예수를 놀랄만하게 끔찍하게 만들어 버리는, 왕들과 정복들과 실패와 구속의 이야기인 세계의 역사와 미래에 관한 마법에 묶여있는 이야기에 의존하게 될 것입니다.
It’s true: Many of us would be helped in our preaching of the gospel by not just preaching the simple (though true) propositions of substitutionary atonement and justification by faith alone, but by re-embracing the epic of the Bible, placing those things in their proper place in the grand storyline. If people think Christianity is about three or four sentences that you can fit on a napkin, it’s going to seem shallow and flimsy compared to the myriad other worldviews and religions that are competing for their attention. Christianity rests on a spell-binding story about the history and future of the world—a story of kings, conquests, failures and redemptions that, when once you understand it, makes Jesus breathtakingly awesome.

"왕의 복음"이라는 것이 있는가?
IS THERE A “KINGSHIP GOSPEL”?

그러나 이번 경우에 제가 "왕의 복음"이나 "충성의 복음"을 만드는 책들에 관해서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은, 여기에는 예수의 왕권의 이야기를 개인적인 구원, 용서, 속죄 그리고 칭의의 실상과 분리시키고자하는 시도가 자주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혹스러운 것은; 그 메세지가 바로 “구원이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십자가의 말씀과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을 가르치세요”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보다는  종종 “복음은 예수가 왕이라는 것이지 자신의 백성을 위해서 구원을 성취하신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But what I don’t understand about books that make this case for a “kingship gospel” or a “royal gospel” is why there’s so often an impulse to take the story of Jesus’s kingship and divorce it from the realities of personal salvation, forgiveness, atonement, and justification. It’s puzzling; because the message isn’t just “Don’t forget that salvation has a history; preach the word of the cross and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It’s often something more like, “The gospel is that Jesus is king and not that he wins salvation for his people.”

예를 들자면, 스콧 맥나이트는 복음을 “예수의 이야기가 이스라엘 이야기의 절정이라는 선언”과 그가 소위 말하는 “구원의 계획"이라고 묘사하지만, 그는 이 둘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고 있습니다.
Scot McKnight, for instance, describes the gospel as “the declaration of the Story of Jesus as the culmination of the Story of Israel,” and what he calls “the Plan of Salvation.” But then he draws a hard distinction between the two:

이제 세번째로 다루고자하는 커다란 주제는 (개인적) 구원 계획에 관한 것입니다. 구원 계획은 이스라엘/성경 이야기와 예수의 이야기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이스라엘로부터 예수로 이어지는 성경의 이야기는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복음을 붙잡기를 원한다면, 이러한 이야기의 중요성을 감히 축소시키지 않는 것과 같이, 이야기의 구원의 효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Now to our third big idea: the (personal) Plan of Salvation. The Plan of Salvation flows out of the Story of Israel/Bible and the Story of Jesus. The Bible’s Story from Israel to Jesus is the saving Story. Just as we dare not diminish the importance of this Story if we wish to grasp the gospel, so also with the saving effects of the story.

그러나 구원의 계획을 이스라엘의 이야기나 예수의 이야기와 동일시하는 것은 복음을 왜곡시키게 되는 것이며 어떤 때는 이야기 자체까지도 파괴시키게 될 것입니다.
But equating the Plan of Salvation with either the Story of Israel or the Story of Jesus distorts the gospel and at times even ruins the Story.

그는 구원은 복음으로부터 나타나거나 흘러나오지만 “구원의 계획과 복음은 같은 커다란 개념이 아니다”라고 자주 말하곤합니다.
He goes on to say it a few more times. Salvation “emerges from” and “flows from” the gospel, but “the plan of salvation and the gospel are not the same big idea.”

매튜 베이츠는 이를 좀 더  명확하게 말하지만 그 개념은 같은 것입니다:
Again, Matthew Bates says it even more starkly, but the idea is the same:

내 주장은 다르다: 우리들의 믿음에 의한 칭의는 복음의 일부가 아니다. 우리는 칭의와 믿음이 어떻게 각각 분리되어 서로에 관계하며, 복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관계하는 것을 정확하게 탐색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작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이 복음이다”라고 말하기 시작한다거나 혹은 심지어는 복음의 일부라고 말하기 시작할 때에는, 우리는 성경의 표현을 심각하게 왜곡시키게 되는 것이다.
My claim is different: our justification by faith is not part of the gospel. We need to work cautiously to ferret out exactly how justification and faith separately relate to each other and to the gospel. But when we begin saying that it is the gospel, or even part of the gospel, we seriously distort the Bible’s presentation.

여러분은 여기에서 핵심을 보게됩니다. 만약에 맥나이트나 베이츠와 같은 저자들이 우리에게, 혹은 저에게, 하는 주의사항이나 경고들이 "형제들이여,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은 믿음으로만 얻는 칭의의 진리를 가르치세요, 그러나 그것을 그것의 모든 영광스러운 서술적 내용에 적용하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라는 것이라면 저는 이에 동의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장들은 좀 다른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는 왕이시다"라는 것이 복음이며, 개인적인 구원, 속죄, 그리고 칭의는 복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You see the point here. If the caution and warning to us, even to me, from writers like McKnight and Bates is “Brother, preach the truth of justification by faith alone in Christ alone, but don’t forget to put it in all its glorious narrative context,” I’m there! But these passages seem to be saying something different. They seem to be saying that “Jesus is king” is the gospel, and that personal salvation, atonement, and justification are not.

예수는 왕이시다—그러나 왕의 역할은 무엇인가?
JESUS IS KING—BUT WHAT DOES THE KING DO?

이러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우리는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해야하며,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성경본문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이들의 글에는) 수 많은 증거본문들 보다도 더 높은 차원의 잘못이 있는데, 저는 이러한 이유에서 이번 강연의 나머지를 이를 좀 더 구체화하는데 사용하고자합니다. "예수는 왕이시다"는 복음이고, 개인적인 구원, 속죄, 그리고 칭의는 복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며, 이는 이스라엘에서의 왕권이 실질적으로 의미하는 것을 면밀하게 분석하려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왕의 존재와 그 역할에 대하여 면밀하게 조사하지 않은 것입니다.
What do we say to that? Well, we say it is wrong, and there are plenty of Scripture passages we could unpack to prove it. But I think it’s wrong even on a level higher than a bunch of prooftexts, and that’s what I want to flesh out in the rest of this talk. To say that “Jesus is king” is the gospel, and that personal salvation, atonement, and justification are not the gospel is wrong precisely because it doesn’t grapple with what kingship in Israel actually meant. It doesn’t grapple with who the king is and what he is expected to do.

그러므로 제가 여기서 원하는 것은 여러분이 예수가 왕이시라는 복음을 선언하여야하지만, 왕이 국민을 대신해서 세워졌으며, 국민들이 자신들의 죄로부터 구원을 받도록하기 위해서 대신 죽어야한다는 왕의 역할에 대해서 선언하지 않는다면 복음을 올바르게 선언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합니다. 
So what I want to do here is show that you should proclaim the gospel that Jesus is king—but you cannot rightly do that without proclaiming what that king does: The king stands in his people’s place, and he suffers and dies in their stead in order to save them from their sins.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단순히 부차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는 단순히 한 왕, 예수가 우연하게 하여야만 했던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백성을 대표하고 자신의 백성을 위해서 고통을 받는 것은 이스라엘에서 왕권이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왕에게 기대되었던 것입니다.
Now hear me out: that’s not just incidental; that’s not just what one king, Jesus, happened to have to done. To represent and to suffer for your people was what the kingship in Israel meant. It’s what the king was expected to do.

십자가 위의 왕?
A KING ON THE CROSS?

질문을 가지고 시작해봅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에서 우리는 어떠한 직무를 연관시키려는 경향이 있는지요? 제사장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맞습니다.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예수께서 죽으셨을 때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단번에 완전한 마침이 되는 희생의 제사장으로 드려지셨다고 기록하고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수난의 이야기들에서 어떠한 종류의 이미지가 가득하다는 것을 인지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는 제사장의 이미지가 아닙니다; 바로 왕의 이미지입니다. 예수는 로마군인에 의해서 채찍에 맞으시면서 자색옷이 입혀지시고 왕의 홀로서의 갈대가 주어졌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시면서는 가시관이 씌워졌습니다. 예수는 매달려 돌아가시면서 그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Let’s start with a question: what office do we tend to associate with Jesus’ death on the cross? Priesthood. And that’s right. Hebrews tells us that when he died, Jesus was acting as a priest to make a once-for-all final sacrifice to save his people. But have you ever noticed what kind of imagery suffuses the passion narratives? It’s not priestly imagery; it’s kingly imagery. As he’s scourged by the Romans, Jesus is dressed in a purple robe and given a reed as a scepter. As he’s nailed to the cross, Jesus is coronated with a crown of thorns. As he hung dying, the sign over Jesus’s head read, “King of the Jews.”

그러므로 예수의 죽으심의 이야기는, 좀 아름다우면서도 여전히 뒤틀려진 조롱의 방식으로, 예수는 제사장으로서가 아니라 왕으로 죽으셨다고 우리에게 절규하고 있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어느 정도는 특별하게, 그리고 일관되게 왕의 사역입니다. 이는 우리가 종종 왕권에 대하여 생각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왕이라는 것은 능력과 통치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통치권과 위엄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예수를 왕들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그의 고난과 겸손에 대하여 말할 때, 제사장적인 언어로 도달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So the story of Jesus’ death is screaming to us that, in some beautifully and yet wrenchingly ironic way, Jesus is dying not just as priest, but as king. His death is somehow particularly and uniquely king-like work. That’s not how we usually think of kingship. Kings are about power and ruling. When we talk about Jesus’ sovereignty and majesty, we call him King of kings. When we talk about his suffering and humiliation, we tend to reach for priestly language.

그러나 여기에 바로 오늘 여러분들이 보고서 기뻐해야 할, 제가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백성을 대신하는 예수의 죽으심과 그들을 자신들의 죄로부터의 구원하심은, 그의 왕으로서의 직무와 자연스럽게, 올바르게, 그리고 본질적으로 결합되어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왕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가 고난받는 구원자이심을 동시에 선언하지 않고서는 예수의 왕되심을 올바르게 선포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은, 하나님의 백성이 단지 왕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도살당하신 왕의 피에 의해서 구원받을 것이라는 복음을 향하여있다는 것이 바로 제가 여러분에게 보여주고자하는 것입니다.
But here’s what I want you to see and rejoice in today: Jesus’s death in his people’s place, his salvation of them from their sins, is naturally, rightly, and inherently tied to his office as king. In fact, you can’t understand kingship without understanding that. You cannot rightly proclaim Jesus as king without proclaiming him also as Suffering Savior. That’s what I want to try to show you—that the whole Bible strains toward the good news that God’s people will be saved not just by a king, but by the blood of a Slaughtered King.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예
A BIBLICAL-THEOLOGICAL CASE

이러한 목적에서 약간의 성경 신학을 하면서, 특별히 왕권, 대표성, 그리고 고난이라는 성경 이야기의 문맥을 따라 몇 가지 주제를 추적해 봅시다. 우리는 이를 네가지 장면에서 볼 것입니다.
To that end, let’s do a bit of biblical theology, tracing a few themes through the storyline of the Bible—particularly Kingship, Representation, and Suffering. We’ll look at this in four acts:

동산에서의 왕
이스라엘에서의 왕
예언서에서의 왕
자신의 아름다움에서의 왕
동산에서의 왕
The King in the Garden
The King in Israel
The King in the Prophets
The King in His Beauty
The King in the Garden

창세기 1장 28절은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으로하여금 땅을 지배하고 다스리도록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으로하여금 동물들의 이름을 짓도록 하셨읍니다. 하나님께서는 권위의 구조를 설립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이 뱀의 모습으로 이브에게 온 이유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창조 조직에 세우신 모든 권위의 구조들을 거꾸로 뒤집어서 전복시키길 원합니다.
Genesis 1:28 defines what it means to be the image of God. God commissions Adam to have dominion and subdue the earth. He has him name the animals. God is setting up structures of authority. This is why Satan comes to Eve and as a snake. He wants to upend and overthrow all the structures of authority that God had placed into the fabric of creation.

우리는 이미 왕권이 취하는 모습의 의미와 목적을 볼 수 있는데, 왕의 역할은 하나님을 그의 창조 세계에 올바르게 투영시킴으로서 의 가운데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는 동산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아담이 하기로 되어있었던 것이었지만, 그는 이러한 역할에 실패하였던 것이었습니다.
Already we can see the meaning and purpose of kingship taking shape—the role of the king is to act in righteousness by rightly imaging God to His creation. He must protect the Garden. That’s what Adam was supposed to do, and he failed to do it.

우리는 아담이 하나님 아래서 두 가지 직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는 왕이었습니다—여러분은 이를 통치 언어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직책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2장 15절에서는 아담이 동산을 경작하고 지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경작하다는 아바드라는 단어는 정확히 그것이 들리는 그대로를 의미합니다. 아담은 동산의 관리인으로서 동산을 경작하고 동산의 성장과 아름다움이 자라도록 격려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동산을 지켜야만 했는데, 이는 단순히 동산을 현재적으로 지키는 것 이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그보다는 "보호"한다거나 "방어"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어떠한 악한 것이나 불결한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하여야 했으며, 만약에 이러한 일이 발생할 경우 악이 심판을 받고 쫓겨나도록 확실하게 했어야만 했습니다.
We should note that Adam held two offices under God. He was king—you can see that in the dominion language. But he held another office as well. Genesis 2:15 says that Adam needed to “work” and “keep” the garden. The word “work,” abad, means exactly what it sounds like. Adam was to be the caretaker of the garden, to cultivate it and encourage its growth in maturity and beauty. And he was to “keep” (shamar) the garden, which means more than just keeping it presentable. It means, rather, “guarding” it, “protecting” it, and making sure that nothing evil or unclean ever entered it, and if it did, to make sure that evil was judged and cast out.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두 가지 단어, "일"이라는 아바드와 "지키다"라는 샤마르가 아담 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성전/성막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에덴 동산은 그 근본적인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하시는 완전한 성전이었습니다. 성막과 성전을 아바드하고 샤마르하였던 제사장과 같이 아담도 성전을 아바드하고 샤마르했던 것입니다. 아담은 에덴에서의 단순한 왕이 아니었습니다; 아담은 제사장이면서 왕이었습니다. 아담에게 제사장직과 왕직은 서로 연합되어 있었습니다.
What’s fascinating is that these two words, abad, “work” and, shamar, “keep,” are the precise job description not only of Adam, but of the priests in Israel’s temple/tabernacle. That’s not just a coincidence. The Garden of Eden was, in its very essence, a perfect temple—the dwelling place of God with man. And like the priests who would abad and shamar the tabernacle and the temple, so Adam was to abad and shamar the temple of the Garden of Eden. He was not only king in Eden; he was priest-king. The offices of priest and king were united in him.

물론 결론은 아담은 에덴에서 제사장-왕으로서 동산을 보호하는 행동을 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는 뱀을 처형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탄의 반역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여자와 뱀과 함께 동산에서 쫓아내시고 천사로 하여금 입구를 지키게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화염검으로 생명 나무에 이르는 길을 완벽하게 지키(샤마르)셨습니다(창 3:24). 아시겠습니까? 만약에 대리 통치자가 동산을 샤마르하지 못한다면, 높으신 왕이 직접 그렇게 하십니다. 
The upshot, of course, is that, as the priest-king in Eden, Adam should have acted to protect the Garden. He should have executed the snake. But he didn’t. He joined Satan’s rebellion. Thus God cast him out of the garden, along with the woman and the serpent, and placed an angel at the entrance. He would, with a flaming sword, fascinatingly, “guard [shamar] the way to the tree of life” (Genesis 3:24). See? If the vice-regent would not shamar the garden, the High King would do so himself.

창세기 3장의 끝부분에 와서는 상황이 절망적으로 보입니다. 죄가 권세를 잡고, 죽음이 지배하기 시작하였으며, 여러분이 이야기를 미리 알고있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어떠한 희망도 없었을 것을 우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대변혁에서의 희망의 빗장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실패한 것을 대신 하게될 누군가 다른 이가 오게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창세기 3장 15절을 기억할 것입니다.
By end of Genesis 3 the situation looks hopeless. Sin takes hold, death begins to reign, and if you didn’t know the story already, you’d wonder if there is any hope at all. But then you remember Genesis 3:15—a bolt of lightning in the cataclysm—in which God promises that someone else will come who will do what Adam failed to do.

여기서 "왕"이라는 단어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이 "여자의후손"이 아담이 실패한 왕적인 통치를 실행할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아담이 떨어뜨린 검을 집어들고서, 아담이 동맹한 원수를 죽일 것이며, 아담이 패배한 전쟁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아담은 왕이 되기를 실패하였지만, 그는 최종적으로 왕이 되실 것입니다.
The word “king” isn’t used there, but it’s clear that this “seed of the woman” will exercise the kingly dominion that Adam failed to. He’ll pick up the sword that Adam dropped, slay the Enemy that Adam allied with, and win the battle that Adam lost. In other words, he’ll finally be the king that Adam failed to be.

이러한 점에서, 성경 전체의 줄거리는 커다란 질문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누가 창세기 3장 15절에서의 새로운 왕에 대한 약속된 성취가 될 것인가?" 누가 왕이며, 그가 어떻게 아담이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입힌 손상을 회복시킬 것인가?
From that point, the whole storyline of the Bible begins to revolve around the great question: “Who is going to be the fulfillment of the promise of a new king in Genesis 3:15?” Who is the king, and how does he repair the damage that Adam has done by his rebellion against God?

우리는 이러한 질문이 창세기의 나머지 부분에서 실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4장에서는 가인이 아닌가 의심해 보게 되고, 창세기 5장 29절에서 라멕은 진짜 노아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됩니다.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창세기 3장 15절의 성취에 대한 희망이 단순히 왕의 오심이 아니라, 죽음과 저주를 바꾸어 놓을 왕이라는 것은 놀랄만한 일입니다. 정확하게는 이러한 관점에서 그가 하실 일은 아직 막연한 것이지만, 이와같은 이야기의 초기 부분에서 제가 여러분이 알기를 원하는 것은, 창세기에서 선언된 복된 소식이 단순한 왕의 오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된 소식이란, 왕의 오심이 구원, 즉 저주의 종결과 죄로부터 기인된 죽음과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회복시키는 구원을 의미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왕이 하는 것입니다.
We can see that question working itself out in the rest of Genesis. In chapter 4, we wonder if it’s Cain, then in Genesis 5:29, Lamech really thinks its Noah. “Out of the ground that the Lord has cursed, this one shall bring us relief from our work and from the painful toil of our hands.” It’s also striking that the hope of a fulfillment of Genesis 3:15 isn’t just the coming of a king, but a king who will reverse death and the curse. Exactly how he’s going to do that is still cloudy at this point, but here’s what I want you to see, even this early in the story: The good news proclaimed in Genesis is not just the coming of the king. The good news is that the arrival of the king will mean salvation—it will mean an end to the curse, and a reversal of the death and separation from God that resulted from sin. That’s what the king does.

창세기의 이어지는 몇몇 장들에서는, 창세기 3장 15절에서의 오실 왕에 대한 약속이 한 사람, 아브라함과 그로부터 기인된 민족에 초점이 맞추어지게 됩니다.
Through the next few chapters of Genesis, that Genesis 3:15 promise of a coming king focuses on one man, Abraham, and the nation that would come from him.

이는 우리를 두 번째 장으로 인도합니다.
That brings us to the second act.

이스라엘에서의 왕
The King in Israel

창세기 12장에서는,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집중되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로부터 후손이 나올 것이며, 이 (창세기 3장 15절에서와 같은 용어인) 자녀가 세상의 족속들에게 저주 대신에 축복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 15절의 성취로서의 약속된 자녀는 아브라함도 아니며, 이삭도 아니며, 야곱도 아닙니다. 사실 창세기의 나머지 부분은 Kill the Carrier라는 거대한 게임과도 같습니다. 루우벤?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의 첩과 동침했습니다. 시몬? 아닙니다. 레위? 아닙니다. 그들은 세겜에서 완전히 고약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혹시 유다는? 아닙니다, 다말과의 불행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 그가 약속된 왕일 것이다!
In Genesis 12, it’s clear that God’s promise of salvation has localized on Abraham. From him will come the Seed, the Offspring (same word as Gen 3:15) who will bring blessing instead of curse to the families of the world. But the promised seed, the fulfillment of Genesis 3:15, is not Abraham, nor Isaac, nor Jacob. In fact, the rest of Genesis reads like a giant game of Kill the Carrier. Reuben? Nope, sleeps with his father’s concubine. Simeon? Nope. Levi? Nope. They do the whole nasty thing in Shechem. Maybe Judah? Nope, unfortunate incident with Tamar. Oh, it’s Joseph; he’s the promised King!

하지만 그 다음에 우리는 창세기 49장 10절을 보게됩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놀랄 일입니다. 결국은 유다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은 아직 거기에 머물러있으며 감질나게 애를 태우지만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
But we find then Genesis 49:10. “The scepter shall not depart from Judah, nor the ruler’s staff from between his feet, until he comes to whom it belongs!” Shocking; it’s Judah after all. And the promise of Genesis 3:15 still hangs there, tantalizing but unrealized.

모세 오경의 나머지 부분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왕이 올 것이라는 약속을 유지하시고 계십니다. 심지어는 민수기 24장에서 이방인 마술사인 발람은 미래를 가리키며 예언합니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 . . 주권자가 야곱에게서 나서 남은 자들을 그 성읍에서 멸절하리로다." 여러분은 창세기의 메아리들을 쉽게 들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Through the rest of the Pentateuch, God keeps promising his people that the king is coming. In Numbers 24, even this pagan sorcerer Balaam points to the future and says, “I see him, but not now; I behold him, but not near. A star shall come out of Jacob, and a scepter shall rise out of Israel. . . . And one from Jacob shall exercise dominion.” You can easily hear the echoes of Genesis.

그러나 아직은 약속이 다가오기에는 멀었습니다. 사사기의 끝 무렵에서 우리는 계파들의 혼란과 연약함의 한 가운데에서 불길한 반복구를 듣게됩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왕이 없었더라."
But still, the promise is long in coming. By the end of Judges we hear the ominous refrain in the midst of rank chaos and wickedness: “There was no king in Israel.”

마침내 사무엘서에서 왕이 나타납니다. 사무엘 상하의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어떻게 왕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의 밑바탕과 그 안에는 다른 것이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에서의 왕위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치심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에 와서 왕의 역할과 책임이 선명해지기 시작합니다.
In the books of Samuel a king finally arrives. The story of 1 and 2 Samuel, on its face, is the story of how the nation of Israel got a king. But underneath and within that story is another one—the story of God teaching what Kingship in Israel was all about. In David, the role and responsibility of the King begin to become clear.

이러한 책임이라는 것들이 무엇이겠습니까? 대표성과 고난으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이것이 왕이 하여야할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는 자신 안에서 백성을 대표하고있으며 고난을 감당합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하여 생각해봅시다.
What are those responsibilities? They are particularly representation and suffering. As the story plays out, it becomes clear that this is what the king does. He represents the people in himself and he suffers. Let’s think about both.

먼저 대표성입니다. 이는 감을 잡기에 대단히 어려운 개념은 아닙니다. 통치자는 그들 국가의 실제적인 정체성을 대표하고 있다고 흔히들 말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왕위에서의 강력한 주제였으며,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문구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이것이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언급하고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또한 잘 알려진바대로 이스라엘 왕을 칭하는 보좌의 명칭이었습니다.
First, representation. This isn’t a terribly hard concept to grasp. Sovereigns are often said to represent the very identity of their nation. This was a strong theme in Israelite kingship, and we can see it in several ways. For instance, think about the phrase “Son of God.” We know it refers to Jesus being the second person of the Trinity, the Son of God. But it was also a well-known throne title for King of Israel.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삼하 7: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시 2:7)
하나님께서는  왕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내게 부르짖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내가 또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시 89:26-27)
그렇다면 대표자로서 이스라엘 왕의 역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어떤 이유에서 이와같이 "아들됨"이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겠습니까?
“I will be to him a father, and he will be to me a son” (2 Sam. 7:14).
“The LORD said to me, ‘You are my Son’” (Ps. 2:7).
God says of the king, “He shall cry to me, ‘You are my Father, my God, the Rock of my Salvation, and I will make him the firstborn, the highest of the Kings of the earth’” (Ps. 89:26).
Now, why would this use of “sonship” language be important in understanding the role of Israel’s king as representative? 

자 그럼 출애굽기 4장 22-23절을 살펴봅시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 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왕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장자”인 이유는 이스라엘이 먼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장자”였기 때문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왕 안에서 취하여지고 요약 되어졌습니다. 그들은 왕과 연합되어 있었습니다. 왕은 이스라엘을 대표합니다.
Well, consider Exodus 4:22–23: “Then you shall say to Pharaoh, ‘Thus says the Lord, Israel is my firstborn son, and I say to you, ‘Let my son go that he may serve me.’” The reason the king was the “son” and “firstborn” of God was that Israel first was the “son” and “firstborn” of God. Do you see? The identity of Israel was taken up and summed up in the King. They were united to him. He represented them.

대표한다는 것은 왕이 국민을 위해서 행동하는 중요한 방식으로  이해되어져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왕이 한 것은 국민이 한 것입니다. 왕이 한 것은 국민에게 결과로 나타납니다. 역대상 21장 3, 7절을 봅시다. 요압은 다윗에게 인구조사를 하지 말기를 간청합니다. 요압은 다윗에게 요청하기를: “내 주께서 어찌하여 이 일을 명령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하시나이까?” 그러나 왕의 말은 요압을 제압하였습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에 화가 나셨으며, 이스라엘을 치셨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시지않습니까? 왕은 행동하였고, 왕은 범죄하였으며, 그 결과로 국민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시편 89편도 봅시다:
That representation meant that the king was understood in important ways to act for the nation. What he did, they did. What he did had ramifications for them. Consider 1 Chronicles 21:3, 7. Joab is pleading with David not to take a census of the people. He asks him: “‘Why then should my lord require this? Why should it be a cause of guilt for Israel?’” But the king’s word prevailed against Joab. . . . But God was displeased with this thing, and he struck Israel.” Did you notice what happened? The king acted, the king sinned, and the nation suffered the consequences. Consider also Psalm 89:

주께서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노하사 물리치셔서 버리셨으며 
주의 종의 언약을 미워하사 그의 관을 땅에 던져 욕되게 하셨으며
But now you have cast off and rejected;
you are full of wrath against your anointed.
You have renounced the covenant with your servant;
you have defiled his crown in the dust.

그의 모든 울타리를 파괴하시며 그 요새를 무너뜨리셨으므로 
길로 지나가는 자들에게 다 탈취를 당하며 그의 이웃에게 욕을 당하나이다 
You have breached all his walls;
you have laid his strongholds in ruins.
All who pass by plunder him;
he has become the scorn of his neighbors.

주께서 그의 대적들의 오른손을 높이시고 그들의 모든 원수들은 기쁘게 하셨으나 
그의 칼날은 둔하게 하사 그가 전장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하셨으며
You have exalted the right hand of his foes;
you have made all his enemies rejoice.
You have also turned back the edge of his sword,
and you have not made him stand in battle.

왕에게 일어난 일이 국민에게 일어났으며, 국민에게 일어난 일이 왕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서로가 분리될 수 없게 연합되어 있습니다. 왕은 국민을 대표하며, 그들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What happens to the king happens to the people, and what happens to the people happens to the king. They are inseparably united to one another. He represents them; he stands in their place.

대표성 이외에도 다윗의 삶은 고난 받는 것이 왕의 신분의 또 다른 주된 주제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왕이 된다는 것은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이야기 속에 담겨있습니다ㅡ다윗의 삶은 궁전에서의 안락한 삶이 아니라 고난의 삶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살았으며, 그는 적의 포로가 되었으며, 심지어는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그의 통치는 가족의 반란과 시민 전쟁, 그리고 죄의 결과 등으로 파괴되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다윗 언약에서 왕에게 고난을 약속하셨습니다: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삼하 7:14). 시편을 보십시오. 시편의 많은 부분이 다윗이 괴로움과 고통ㅡ어떤 때는 개인으로서, 그러나 어떤 때는(특히 2권에서) 국민의 소리로ㅡ 부르짖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권이 끝나갈 무렵인 시편 89편에서는 왕의,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국민 자체의, 부끄러움과 절망을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Besides representation, David’s life teaches that suffering is another major theme of kingship. To be king is to suffer. It’s right there in the story—David’s life is not one of royal ease; it’s one of suffering. He lives in the wilderness, he’s captured by enemies; even when he takes the throne, he doesn’t have an easy time. His reign is wracked by family strife, civil war, and consequences for sin. In fact, God promises suffering for the king in the Davidic Covenant: “When he commits iniquity, I will discipline him with the rod of men, with the stripes of the sons of men” (2 Sam 7:14). Read the Psalms. Many of them show David crying out in distress and pain—sometimes as an individual, but sometimes (especially in Book 2) as the voice of the nation. By end of Book 3, Psalm 89 reveals nothing but shame and despair for the king and therefore for the nation itself.

이제 정리를 해봅시다. 왕위가 발전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동산에서 아담은 왕으로서 하나님을  피조물에 올바르게 형상화하면서 의롭게 지배하는 행동을 하여야만 했습니다. 왕인 아담은 실패하였지만 또 다른 왕이 약속되었습니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과의 언약에서 구체화되면서, 다윗 왕은 이스라엘에서의 왕권의 진정한 속성은 자신 안에  국민을 대표하고 고난을 받는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So let’s take stock. Can see picture of kingship developing? In the Garden, Adam the king must act in righteous dominion by imaging God correctly to creation. King Adam fails, but another is promised. That promise crystallizes in a covenant with David, King of Israel, who learns that the very nature of kingship in Israel is to represent the people in himself and to suffer.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구원의 결과를 가져오는지 아직은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이것들은 의미에 있어서 전혀 다른 것이며, 서로 연결되어있지 않은 파편들입니다. 왕은 대표를 해야하며, 왕은 고난을 받아야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이러한 것들을 서로 연관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It’s still not clear, though, how this is going to result in salvation. These are disparate, unconnected shards of meaning. The king would represent and the king would suffer. But what do those things have to do with each other?

확실한 것은, 이스라엘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위해서 고난을 받고, 죽음으로서 다른 존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대리적 고난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희생 제도의 전체적 교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사장의 영역이었으며, 왕의 영역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왕이 제사장의 의무를 실행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웃시아 왕이 이러한 일을 시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나병으로 치셨으며, 그는 도시 바깥의 나환자 촌에서 죽었습니다. 이것이 다윗 왕조가 가장 난점 가운데 한 가지였습니다.
Sure, Israel had an understanding of vicarious suffering—one thing suffering for another, dying so that another wouldn’t have to. That’s the whole lesson of the sacrificial system. But that was the realm of the priests, not the king. In fact, it was forbidden for the king to do the duties of the priest. When King Uzziah tried, God struck him with leprosy and he died outside the city in a village of lepers. That’s one of the lowest points of Davidic Dynasty.

그렇다면 왜 이러한 왕권의 의미의 분리된 조각들이 나실인의 파편과 같이 놓여 있겠습니까? 이것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들을 함께 모아 놓는다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한다면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대하여 좀 더 드러낸 것과 같이 좀 더 선명해질 것입니다.
So why these disparate pieces of the meaning of kingship, lying there like the shards of Narsil? What do they mean? What do they become when you put them together? That would become a bit clearer as prophets revealed more of God’s plan and purpose.

예언서에서의 왕
The King in the Prophets

다윗의 생애가 끝나갈 무렵, 그는 창세기 3장 15절의 성취가 아니었음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는 약속된 왕의 희미한 모습이었지만,  그는 왕의 홀이 주어지는 이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다윗의 가족은 그를 대항하여 반역을 하였으며, 그의 아들 아도니아는 그의 죽어가는 부친이 침대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따스함으로 보호 받고 있는 동안 왕좌를 찬탈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분명 능력의 그림은 아닙니다.
By end of David’s life, it was clear he wasn’t the fulfillment of Genesis 3:15. He was a blurry picture of the promised king, but he wasn’t him to whom the scepter belongs. In the end, David’s family was in rebellion against him, and Adonijah his son tried to usurp the throne while his dying father was kept warm in bed by a beautiful woman. This isn’t exactly a picture of strength.

상황은 더 나아지지가 않았습니다. 솔로몬의 통치는 잠시동안은 영광스러웠지만 그의 죄로 인하여 붕괴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르호보암은 재앙이었으며, 그의 통치의 결과는 다윗의 왕좌를 두 개의 다른 왕국으로 분열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북왕국은 앗시리아의 침략을 받아 유배를 당하고, 다시는 소식이 들리지 않았으며, 남왕국은 바벨론에 두 번이나 침략을 당하였습니다.
The situation didn’t get better. Solomon’s reign was glorious for a time but collapsed because of his sin. His son Rehoboam was a disaster, the result of his reign being the splitting of the throne of David into two different kingdoms. Ultimately, the northern kingdom was invaded by Assyria and carried away into exile, never to be heard from again, and the southern kingdom was invaded twice by Babylon.

그러나 양쪽 모두의 왕국에서 이러한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들 모두에게 일련의 선지자들을 보내시면서 국민들에게 회개를 요구하시면서 동시에 미래를 가리키면서,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의도를 재확인 시켜주었습니다. 수 세기에 걸쳐서 선지자들은 이러한 왕권과,연합, 대표성, 그리고 고난의 줄기들을 끄집어내서, 이러한 것들로부터, 그들을 위해서 고난을 받고 그들을 구원함으로서 자기 백성들을 대표할 놀랄만한 왕의 모습을 엮어내기 시작하였습니다.
Through all this, though, in both kingdoms, God sent a series of prophets both to call the nation to repentance and to point them to a future, reaffirming God’s intention to keep the promise of Genesis 3:15. Through the centuries, prophets picked up these threads of kingship, union, representation, and suffering and began to weave them together into a breathtaking picture of a king who would represent his people by suffering for them, and so save them.

이와같은 것을 몇 군데에서 살펴보겠습니다.
Let me show you this in a few places.

먼저 이사야서를 보겠습니다. 이사야 예언의 처음 부분을 우리는 왕의 책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웃시아의 끔찍스러운 죽음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3장, 민수기 24장, 사무엘하 7장, 시편 2편 등에 쌓여있는 약속들을 지키시겠다는 자신의 결정을 재확인시켜주십니다. 우리는 이사야서의 두 번째 부분을 고난받는 종의 책이라고 부릅니다. 그 안에는 백성들의 죄악의 희생물로서 자신의 백성을 대신하여서 고난을 받으시는 주의 고난받는 종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이사야서 53장에서 두드러지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이사야서를 읽으시면서 더욱 놀라게되는 것은, 이 약속된 왕과 고난받는 종이 한 사람이면서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이 파편 조각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제서야 어떻게 국민에 대한 왕의 대표성과 왕의 고난이 하나로 합쳐지는지를 보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3장 15절은, 단순히 고난받는 왕이 아니라, 국민의 대표자로서 그들을 위해서 그들을 대신해서 고난받는 왕에 의해서 성취될 것입니다.
First, look at Isaiah. The first part of Isaiah’s prophecy we might call The Book of the King. In it, God reaffirms his determination, even in the wake of Uzziah’s awful death, to keep the now-piled-up promises of Genesis 3, Numbers 24, 2 Samuel 7, and Psalm 2. The second part of Isaiah we might call the Book of the Suffering Servant. It in, this suffering Servant of the Lord suffers in the place of his people as a sacrifice for their sins. We see this preeminently in Isaiah 53. But the shocker is that as you read Isaiah, you realize that this Promised King and this Suffering Servant are one and the same person. Do you see the shards coming together? We can now begin to see how the king’s representation of the people and the king’s suffering fit together. Genesis 3:15 would be fulfilled by a king who would not just suffer, but would suffer as the representative of his people—for them, in their place.

두번째로는, 스가랴서를 봅시다. 스가랴는 분리되어있는 두 가지의 직책인 제사장과 왕에게 초점을 맞추고있습니다. 에덴에서의 타락 이후에, 이러한 직책들은 언제나 분리되어왔습니다. 왕은 통치를 하지만 제사장은 속죄를 위한 희생을 실행합니다. 그러므로 스가랴는 나와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제사장과 왕이라는 두 가지 직책을 통해서 구원하실 것이라는 놀랍지도 않은 말을 하게됩니다. 그러고나서 우리는 3장에서 그 때의 대제사장인 여호수아를 소개하는 환상을 보게되며; 그 다음에는 4장에서 통치지인 스룹바벨을 소개하는 또 다른 환상을 보게됩니다.
Second, look at Zechariah. Zechariah focuses on both priest and king—two separate offices. Since the Fall in Eden, these offices had always been separated. The king rules, while the priest performs the sacrifices of atonement. So Zechariah comes along and says—unsurprisingly—that God is going to save his people through those two offices of priest and king. Then in chapter 3 we find a vision that introduces Joshua the high priest of the time; then another vision in chapter 4 that introduces Zerubbabel the governor.

그러고나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사로잡힌 자 가운데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 . .  은과 금을 받아 면류관을 만들어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슥 6:9-11)
But then something astonishing happens. “And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me: ‘Take from the exiles who have arrived from Babylon. . . . Take from them silver and gold, and make crowns, and set it on the head of Joshua the high priest” (Zechariah 6:9–11).

잠깐, 무엇이라고요? 우리는 즉각 두 가지 문제에 마음이 사로잡히게 됩니다. 첫번째로는, 그들은 다수의 왕관을 만들어야 할 것을 생각하였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머리에 씌우질 단 하나의 왕관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머리라고요? 통치자인 스룹바벨이 아니라 대제사장인 여호수아의 머리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이는 놀라운 일이어서 사람들은 스가랴가 이름을 잘못 선택하였으며 스룹바벨에게 왕관이 씌워져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핵심이 이것입니다. 이와같이 활성화된 비유는 어느날엔가는 왕위와 제사장직이 함께 나타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왕관은 하나로 합쳐지게됩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속죄하고 희생을 실행할 제사장과 통치하고 대표하며 고난을 당할 왕을 갖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다시 하나로 합쳐진 제사장-왕이 백성을 대표할 것이며, 자신을 그들을 위한 희생 제물로 드릴 것입니다.
Wait, what? Our mind is immediately caught by two problems. First, they are supposed to make crowns—plural. But then it says to set it—singular, one crown—on somebody’s head. And who’s head? Not Zerubbabel the governor, but Joshua’s, the high priest’s head. This is shocking! It’s so shocking that people have asserted that Zechariah got the name wrong and Zerubbabel should have been the one crowned. But that’s whole point! This enacted parable shows that one day, kingship and priesthood would merged together. The two crowns are forged into one. No longer will Israel have a priest who would atone and perform sacrifices and a king who would rule and represent and suffer. Rather, once again, a single, united priest-king would represent the people, and offer himself as a sacrifice for them.

스가랴서의 후반부에서는 이를 적용시킵니다. 여기서는 국민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왕을 거부하며, 그를 찌르고 못박으며, 그의 죽으심으로 어떻게 구원이 흘러 나올 것인지 말해주고있습니다. 왜 왕은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서 고통을 받으셔야만 했는지요? 이는 이것이 왕이 해야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 가운데, 자신들의 백성들이 스스로 감당했어야만 했던 진노를 제거하기 위해서 자신의 백성의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The second half of the book of Zechariah drives this home. It tells how the people reject their king, pierce him and run him through, and salvation will flow from his death. Why does this happen? Why does the king have to be stricken for his people? Because that’s what the King does. In love he stands in the place of his people to absorb the wrath that should have been theirs.

아름다움에서의 왕
The King in His Beauty

물론 이 모든 것은 천사가 마리아에게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1-33) 라고 말할 때 궁극적인 최종 목적지에 이르게되며 성취됩니다.
Of course, all this comes to its ultimate end, goal, and fulfillment when the angel says to Mary, “Behold, you will conceive in your womb and bear a son, and you shall call his name Jesus. He will be great and will be called the Son of the Most High. And the Lord God will give to him the throne of his father David, and he will reign over the house of Jacob forever, and of his kingdom there will be no end” (Lk. 1:31–33).

모든 복음은 “이 분이 바로 그 왕이시다”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해야할 것은, 그리고 예수 자신이 이해하시는 것은, 왕관을 쓰고 왕이 된다는 것은, 또한 죽어야만하는 고난받는 종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All the gospels scream, “This is the King!” But now we understand—and Jesus himself understood—that to take the crown, to be the King, was also to be the suffering servant who would have to die.

제가 생각하기에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장 특별하고 가슴 아픈 순간 가운데 한 가지는 예수의 세례입니다. 하늘로부터 들려온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러한 말씀에는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으며, 이는 우리로 하여금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는지를 볼 수 있게끔 도와줍니다.
I think one of the most extraordinary and poignant moments in entire Bible is the baptism of Jesus. Remember what the voice from heaven says? “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That statement is packed with meaning, and it helps us see how all this came to its fulfillment in Jesus.

우리는 이러한 말씀에서 세 가지 것을 듣게됩니다.
We are told three things about Jesus in that statement:

첫 번째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이는 성부 하나님의 선포로서, 예수는 그의 매우 사랑하시는 아들이시며, 사도 요한이 설명한 바와같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아들이시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태초부터 진실로 하나님이셨던 분이십니다.
First, “my beloved Son.” This is God the Father’s announcement that Jesus is his dearly-loved Son, the one who, as the apostle John puts it, is God’s one-and-only begotten Son, the one who was with God and who in fact was God from the very beginning.

두 번째로는,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것과 같은 구절에서, 예수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메시아로서, 이스라엘의 왕이셨다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애굽에서 부르실 때 이스라엘을 “나의 아들”이라고 처음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러한 호칭이 하나님 앞에서 전체 백성의 대표자로서의 왕에게 주어졌습니다. 여기서 예수께 이러한 호칭이 주어진 것이며; 예수는 왕과 대표자의 직무를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
Second, with this same phrase God declared, again, that Jesus was the long-awaited Messiah, the King of Israel. God first called Israel “my Son” when he brought the nation out of Egypt. But later the title was given to the king, the representative of the entire nation before God. Jesus is here given that title; he steps into the office of King and Representative.

마지막으로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입니다. 이는 평범한 말씀인 것 같지만, 이는 예수가 담당하여야 할 또 다른 직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이사야서 42장 1절을 반영하고 있는데,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종은, 사람들에 의해서 경멸 당하고 거절될 종과 같은 종으로서, 자기 사람들을 대신해서 고난을 받을 사람입니다. 여기에 그는 고난받는 종이 있었습니다.
Finally, “my beloved Son, with whom I am well-pleased.” This seems like a plain statement, but it points to another office that Jesus was stepping into. These words reflect Isaiah 42:1, where God says, “Behold my servant, whom I uphold, my chosen (or beloved) one, in whom my soul delights.” My servant—the same servant who would be despised and rejected by men, who would suffer in the place of his people. Here was the suffering servant.

예수는 자신의 세례와 하늘로부터의 이와같은 말씀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로하여금 성취하도록 의도하신 직무로서의 역할에 완전히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늘로부터의 이러한 말씀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세 가지 왕관을 쓰셨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하늘의 왕관과,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왕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왕관과, 자신의 백성을 위해서 그들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심으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가시관을 쓰신 것입니다. 이는 그가 많은 죄인들과 함께 세례를 받는 것이 옳았던 이유이며, 이는 그가 죄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들의 대표자로서, 그들의 왕으로서, 심지어는 그들의 대변인으로서의 직책을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With his baptism and with these words from heaven, Jesus steps fully into the roles—the offices—that God intended him to fill since the very beginning. You might say that with these words from heaven, Jesus takes on the triple crown—the crown of heaven as God’s Son, the crown of Israel as the long-awaited king, and the crown of thorns as the suffering servant who would save his people by suffering for them, in their place. That’s why it was right for him to be baptized with a bunch of sinners—not because he was a sinner, but because he was taking on the office of being their representative, their king, even their champion.

여러분은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이는 놀라운 일입니다! 이러한 사역에 들어서면서, 예수는 즉시 일어나셔서, 자신의 검을 취하시고, 자신의 왕적인 뒤꿈치를 상하게하겠지만, 예수가 그 머리를 부숴뜨리실, 자신의 백성의 철천지 원수를 상대하시기 위해서 광야로 들어가셨습니다.
Do you know what happens next? It’s amazing! Having stepped into these offices, Jesus immediately rises, takes up his sword, and heads into the wilderness to take on his people’s mortal enemy—the one who would bruise his royal heel, but whose head he would crush.

십자가 주변에는 왕의 이미지 뿐입니다. 자색 가운, 가시관, 머리 위의 표식은 예수가 제사장이 아닌 왕으로 죽으신 것을 보여줍니다. 예 그렇습니다, 오시는 왕은 왕국이 시작되었음을 알리시지만, 그는 또한 자신의 백성의 죄를 담당하시고, 그들이 왕국에서 자신과 함께 살도록 그들을 변화 시키십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예수는 단순한 왕이 아니십니다; 그는 고난받는 왕이십니다. 그는 단순히 위대하신 왕 예수가 아니십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왕 예수이십니다.
All that kingly imagery around the cross. The purple robe, the crown of thorns, the sign above his head—Jesus died as King, not just as Priest. Yes, the coming king would inaugurate a kingdom, but he would also bear his people’s sins and qualify them to live with him in that kingdom. Do you see? Jesus is not just the king; he is the suffering King. He is not just King Jesus the Great, but King Jesus the Crucified and Resurrected.

세 가지 결론적 고찰들
THREE CONCLUDING OBSERVATIONS

첫 번째로, 여러분들은 제가 왜 지금 단순한 왕권만의 복음이 불충분하다고 말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불충분한 이유는 이는 이스라엘 왕의 본연의 역할과 책임을 공정하게 다루질 않습니다. 왕이 된다는 것은 대표자로서 자신의 백성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가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예수가 왕이심을 가르쳐야합니다. 그의 통치와 능력과 권위를 선언해야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과, 예수 자신이 세우신 공의와 정의의 나라에 관하여 말해야합니다.
First, I hope you can see now why I say that a gospel of mere kingship is insufficient. It is insufficient because it doesn’t do justice to the very role and responsibility of the King of Israel. To be King was to represent and suffer in the place of your people. That’s what Jesus does. So by all means preach Jesus as King. Declare his dominion and power and authority. Talk about the new heavens and new earth, the kingdom of justice and righteousness that he himself is establishing.

그러나 기억하셔야 할 것은 복음은 왕의 오심으로 모든 것이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구원하시는 왕의 오심입니다.
But remember that the good news is not the coming of the King, full stop; it is the coming of the King to suffer, to die, to rise, and to save.

두번째로는, 제가 원하는 것은, 왜 십자가가 복음의 한 가운데 서 있는지; 왜 바울이 자신의 메세지를 “십자의 도”라고 언급하는지; 왜 복음에서 예수의 왕권에 대한 가장 명백한 증거가 십자가에서의 죽으실 때 그가 머리를 숙이셨음인지, 지금 여러분이 알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왕권이 의미하는 것으로서, 왕이 된다는 것은 고난받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주의자들이 이렇게 종종 왕국과 십자가로 몸부림치는 것을 보는 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 둘을 서로 다른 이야기로 다루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며, 우리가 십자가가 어떻게 왕국의 이야기에 적합할수 있는지 감을 잡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십자가와 왕국 사이에 틈을 만들어 놓고서, 십자가는 이쪽으로, 왕국은 저쪽으로, 그리고 누구나 할 것 없이 벌어진 틈의 한 쪽이나 다른 쪽에 모여 앉게 하고서는 서로를 의심하면서 조롱하게 합니다.
Second, I hope you can see now why the cross stands at the center of the gospel; why Paul refers to his message as “the word of the Cross”; why the most unambiguous testimony to Jesus’s kingship in the gospels is a sign hanging over his head as he dies on the cross. This is what kingship means—to be king is to suffer, to die, to rise, and to save. It’s strange to see evangelicals struggle so often with kingdom and cross. It’s almost like we treat the two of them as different stories, and we can’t figure out how the cross fits into this story of the kingdom. So we manage to create a rift between the cross and the kingdom, with cross over here and kingdom over there and everyone crouching on one side or the other of the chasm, sneering suspiciously at each other.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이와같은 분열의 상태로 놔두질 않습니다. 십자가와 왕국은 신학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데 이는 왕국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십자가를 통해서이기 때문입니다.
But the Bible doesn’t leave us with that kind of division. The cross and the kingdom are theologically inseparable because the only way into the kingdom is through the cross.

이것이 우리가 이 모두를 함께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왕국에 속하는 것과 왕국의 축복을 받는 유일한 길은 왕의 보혈을 통하는것입니다.
That’s how we must put all this together. The only way to be included in the kingdom, to receive the blessings of the kingdom, is through the blood of the king.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여러분에게 잠시 간곡히 부탁 드리고자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에 대한 설교를 하거나 글을 쓰면서 십자가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소홀히 하다면, 여러분은 좋은 소식에 대하여 전혀 가르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은 단지 사람들에게 그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들어갈 권리가 없는 놀라운 것을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예수 자신과 사도들이 가르쳤던 것은 단순히 왕국의 도래만이 아니라, 왕국의 도래이면서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는 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So brothers, let me exhort you a moment. If you preach a sermon or write a chapter on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but neglect to talk about the cross, you’ve not preached good news at all. You’ve just shown people a wonderful thing that they have no right to be a part of because they are sinners. What Jesus himself and the apostles preached was not just the coming of the kingdom; it was the coming of the kingdom and the way people could enter it.

그러므로 당연히 왕국에 대해서 가르치십시오. 예수의 악에 대한 정복에 대해서 전하십시오. 그의 도래할 통치에 대하여 글을 쓰십시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이 그 자체로 모두 영광스러운 좋은 소식인 척은 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가 완전한 의로서 세상을 통치할 것이라는 사실은 저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저는 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이는 끔찍한 소식입니다! 저는 그 분이 오셔서 부수려고 하는 원수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다가오는 왕국은 오직 오시는 왕이 죄를 용서하시고 백성을 의롭게 하실 구원자이시며, 자신의 죽으심으로 십자가에서 죽음을 물리치셨고 다가올 세대의 생명으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만 좋은 소식이 됩니다. 
So by all means, preach about the kingdom. Talk about Jesus’ conquest of evil. Write about his coming reign. But don’t pretend that all those things are glorious good news all by themselves. They’re not. The bare fact that Jesus is going to rule the world with perfect righteousness is not good news to me; it’s terrifying news, because I am not righteous! I’m one of the enemies he’s coming to crush! The coming kingdom becomes good news only when I’m told that the coming king is also a savior who forgives sin and makes people righteous—and he does that through his death-destroying death on the cross and resurrection to the Life of the Ages.

세번째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는 여러분이 이러한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왕을 마음으로 즐거워하고 경배하고자하는 충동을 새롭게 느낄 수 있게되기를 희망합니다.
Third, and finally, I hope you can feel anew an impulse in your heart to rejoice, to worship this Suffering, Dying, Rising King.

면류관 벗어서 주 앞에 드리세 
저 천사 기쁜 노래가 온 땅에 퍼지네 
내 혼아 깨어서 주 찬송하여라 
온 백성 죄를 속하신 만왕의 왕일세
Crown Him with many crowns,
The lamb upon the throne:
Hark! How the heav’nly anthem drowns
All Music but its own!
Awake, my soul, and sing
Of Him who died for thee,
And hail him as thy matchless King
Through all eternity.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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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


톰 라이트가 말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의” 즉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the faithfulness of God”이라는 사상이 자리잡고있다.


새관점의 언약 사상은 개혁주의 언약 사상과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있다.


그리스도의 새언약이 개혁주의 언약 사상의 중심에 자리잡고있다면,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의 언약 사상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중심에있다.


개혁주의에서는 아브라함 언약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하여 구현된 것으로 보는 반면에, 새관점에서는 아브라함 언약이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통하여 구현된 것으로 본다.


톰 라이트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 있었으며,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언약이 신실하게 이행되는 과정이었기에, 출애굽 자체가 구원의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차이로 인하여 새관점에서는, 언약 백성의 근거가 되는 의, 즉 하나님의 의가 유대 이스라엘을 통하여 구현된 반면에, 개혁주의에서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원인 성도들 안에서 구현된 것이다.


새관점에서는 유대 이스라엘을 실질적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보는 반면에 개혁주의에서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보고있다.


새관점이 보여주는 이러한 차이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을 이루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냐에 대한 차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을 살펴보자.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covenantal faithfulness)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의 핵심적인 특징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는 로마서 2장 17절- 3장 8절을 비추어보면, 하나님의 단일한 계획, 즉 인간의 죄의 문제를 처리하고 온 세상을 바로 잡으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반드시 의미하여야하며, 그것만 의미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Wright, Justification, 175)


라이트에 의하면,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의란, 이스라엘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통해 온 세상을 축복하시려는 언약을 그리스도 안에서 끝내 성취하시고야마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이다.


라이트에게는 하나님의 의를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구약적 증거에 가장 충실한 정의이다.

(박영돈,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읽기, 38, 39)


톰 라이트는 “로마서에서 바울이 전한 복음은 개인의 구원과 칭의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 전 세계를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놀라운 방식으로 성취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 즉 하나님의 의의 나타남이다”라고 말한다.

(박영돈,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읽기, 42)


라이트의 관점에서 보면 의롭게 되는 것은 죄의 용서를 받는 것, 도덕적으로 옳다고 간주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 보다는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되는 것, 그래서 식탁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박영돈,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읽기, 057)


톰 라이트는 로마서 3장 21-22절에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의를 3:9-20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의미로 21절의 하나님의 의를 읽지 않고 오히려 2:17-3:8과 연결해서 새관점에서 선호하는 의미로 하나님의 의를 해석한다.


라이트는 로마서 3장 25-26절이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에서 3번씩이나 하나님이 자신의 의를 계시하신다고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 외에 다른 의미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박영돈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읽기 102)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 자신의 약속,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고 해석한다.(What Saint Paul Really Said: N. T. Wright, 96)

이는 창조 세계를 회복하고 새롭게하려는 언약 계획에 대한 하나님의 헌신을 묘사하는 용어다.

톰 라이트는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의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으로 바꾸어 해석한다.(Resurrection of the Son of God, N. T. Wright, 305)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God)에 대한 70인 역(septuagint)의 해석은 "하나님의 자신의 언약의 약속에 대한 신실하심 God's own faithfulness to his promisses to the covenant”이라고 말한다.(What Saint Paul Really Said, 96)

이사야서 40-55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속성의 한 가지 면을 나타내주며, 이는 이스라엘의 완고함과 상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속성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구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하셨고 이스라엘은 이를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한편으로는 그의 신실하심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심으로서 이는 어원이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사야에 나타난 그의 그림의 중심에는 고통받는 종의 이상한 모습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의로우신 목적이 이를 통하여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사야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불의에 대하여 벌을 주시고 의에 대하여는 상주시는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는 언약에 대한 신실한 행하심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44)


여기서 톰 라이트는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과 죄에 대한 용서를 연관시킨다.


라이트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 안에서 아담의 죄와 이스라엘의 죄는 모두 해결되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의가 우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으로 이해가 된다고 하더라도, 톰 라이트는 구약과 유대주의에서 이 하나님의 의라는 용어를 법정적인 비유로 적용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인정하고있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라는 개념을 재판관의 판결을 거칠 필요가 없는 법정적 심판의 영역에까지 확대 적용함으로서, 죄의 문제가 법정적 판결이 없이 해결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반드시 법정적 판결의 과정을 요구하는데 반하여,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항목이 법정적 평결을 대신 한 것으로 간주함으로서  법정적인 평결없이 법정적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다.(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44)


사람의 의는 하나님의 의로 연결되어,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언약 안에서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반드시 재판관의 평결이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God나 칭의justification라는 용어는 완전히 별률적이거나 법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라이트는 로마서1:17의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를 언약에 신실하신 분, 즉 약속을 지키시는 분으로 묘사할뿐, 심판자로서 의를 세우시며 공정하게 판단하시는 분, 즉 정의를 세우시는 분으로 묘사하지 않는다.(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62)


의의 전가Imputation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믿는 자들에 전가된다는 전통적 개혁주의 교리의 중요한 용어 가운데 하나다.


여기서 의는 적극적 순종과 소극적 순종을 근거로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말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의는 신자에게 전가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아닌 언약을 충실히 이행하여 나가시는 하나님의 의The Faithfulness of God를 말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는 관계가 없는 의이다.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은 언약이라는 약속을 만드시고 이를 지키시는, 자신 스스로가 의로우신 분이시다. 

God is himself righteous, as the covenant God who has made promises and kept them.


법정적 비유의 의미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말에 대하여 진실되셨으며, 공정하셨으며 (바울이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똑같이 공정하게 다루시고 있음을 지속적으로 말하고있는 방식에 주목해보면) 그렇게 죄를 다루셨다.

In terms of the law-court metaphor, he has been true to his word, he has been impartial (note the way in which Paul goes on at once to speak of God’s even-handed dealing with Jew and Gentile alike), and he has dealt with sin.  


하나님께서는 무력한 이들을 이와같은 이유로 신원하신다: 그는 '믿음을 가진 자를 의롭게하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하나님 자신의 의라는 주제는, 그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으로 이해되어야하며, 법정적 비유가 의미하는데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결정적 본문의 핵심이다.(Wright, Paul, p. 105)

He has also thereby vindicated the helpless: he is the ‘justifier of the one who has faith.’  This theme of God’s own righteousness, understood as his covenant faithfulness, and seen in terms of the law-court metaphor, is the key to this vital passage.(Wright, Paul, p. 105)



톰 라이트의 칭의를 이해하려면 그가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을 주격이면서 소유격으로 읽어야만한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의 의는 신자에게 전가해주는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속해있다는 것이다(Wright, Paul, p. 101)


역사적 예수 탐구와 하나님의 의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에서의 칭의의 근거가된다.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의 핵심 사상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the faithfulness of God"이라는 해석으로부터 정당화된다.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에 참여된 유대 백성은,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 하는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해서 율법을 지킨다는 "언약적 신율주의"의 틀 안에서 이해되어져야한다.


라이트는 새관점의 근간을 이루는 언약적 신율주의를 재구성하기 위해서 '역사적 예수 탐구'에서의 슈바이처와 불트만 학파의 케제만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톰 라이트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에 있으며,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이 신실하게 이행되는 과정이었기에, 출애굽 자체가 구원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개혁주의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의의 주체이시지만, 새관점에서는 출애굽이 의의 분기점이 되며 예수 그리스도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완성시키기 위한, 부차적인 역할을 한 존재일 뿐이다.


새관점주의자들은,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출애굽이라는 구원의 과정을 통하여 은혜 안에 머물고 있는 상태였기에,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은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삶의 지침으로 주어졌다고 말한다.


라이트는 이를, 창조 세계를 회복하고 새롭게하려는 언약 계획에 대한 하나님의 헌신을 묘사하는 용어로 사용함으로서,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의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으로 바꾸어 해석한다.

또한 이사야서 40-55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속성의 한 가지 면을 나타내주는 것이며, 이는 이스라엘의 완고함과 상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속성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구하신다는 것이다.(Resurrection of the Son of God, N. T. Wright, 305)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하셨고 이스라엘은 이를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한편으로는 그의 신실하심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심과 어원이 같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위해 “역사적 예수 탐구”에 모든 것을 걸어놓고있다.


“역사적 예수 탐구”를 하지 않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예수가 실제로 누구였는지를 모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라이마루스로부터 시작된 역사적 예수 탐구로 인하여 성경의 예수가 누구였는지 연구되기 시작했으며, 지금 제3의 탐구에 의하여 밝혀진 예수가 진짜라면, 이제까지의 성경에 대한 해석은 전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를 포함하여, 루터나 칼빈을 비롯하여, 개혁주의 신학자 전부가 이제껏 잘못 만들어진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다. 


라이트의 성경 해석은, 20세기 말 상황에서의 슈바이처 라인의 제3의 탐구에 의한 것이다.


슈바이처의 유대 묵시문학적 종말론은 예수를 1세기 유대교의 맥락에서 철저하게 재구성함으로서, 예수 연구에 대한 새로운 추진력을 제공한다.

톰 라이트에게 슈바이처의 유대 묵시문학적 종말론은, 라이마루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됨으로서, 옛 탐구와 구분되는 새 탐구로서의 제 3의 탐구를 시작하게 한다.

슈바이처의 철저한 종말론은 예수를 1세기 유대교의 묵시적 기대를 품은 자로 보고있다.

브레데 노선과 구별된 슈바이처의 노선은 “역사적 재구성”을 향한 최고의 전망으로 제시되면서, 바울에 관한 새관점의 시발점이 되었다.


윌리엄 브레데(William Wrede)와는 달리  예수를 종말론적이고 묵시적인 유대교의 맥락에 두었던 슈바이처는 톰 라이트에게 언약적 율법주의의 틀을 제공하였던 것이다.(예수의 도전, 119)



슈바이처의 묵시적 유대교 사상


톰 라이트는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영역에서 슈바이처의 바울 해석에 많은 도움을 받고있다.

예수와 바울을 대립 시키지 않는 불트만과는 달리,  슈바이처는 브레데와 같이 예수와 바울을 대립시킴으로서, 바울이 예수와 다른 어떤 종교를 가르쳤다고 생각한다. 

슈바이처는 예수를 구속받은 구속자라는 실존주의적 개념으로 이해함으로서, 예수의 실존을 유대교와 연결시켜 해석하고있다.

슈바이처는 예수를 유대교에서의 실존적 완성으로 보고있는 것이다.

예수의 유대교에서의 실존적 완성이라는 후기 유대교적 메시아 개념은, 유대교가 은혜의 종교였다는 톰 라이트의 언약적 율법주의와 맥락을 같이한다.

슈바이처는 윌리엄 브레데(William Wrede)와 같이 예수와 바울을 대립시키지만, 예수를 종말론적이고 묵시적인 유대교의 맥락에 둠으로서 브레데와 차이를 보이고있다.


톰 라이트는 브레데의 생각에 동의를 못하다가, 예수를 종말론적이고 묵시적인 유대교의 맥락에 두는 슈바이처의 견해에는 상당히 공감하게 되었다.(톰 라이트, 예수의 도전, 119)


라이트는 자신이 슈바이처의 접근과 비슷한 접근을 한다고 말한다

슈바이처의 후기 유대교적 메시아 사상은, 톰 라이트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의라는 범주 안에 귀속시키는 틀을 제공한다.

슈바이처가, 바울이 예수와는 다른 종말론의 체계를 가지고있다는 바울과 예수의 대립관계를, 유대주의적 묵시 문학의 맥락에서 해결한 것은, 톰 라이트가 예수를 유대주의적 메시아, 즉 유대를 해방시키기 위한 혁명적 메시아라는 사상의 밑거름이 된다.

이는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구속주로서의 그리스도의 의를 유대교에 편입시킴으로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의, 즉 아브라함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신다는 하나님의 의를 완성시키신 분으로 제한 시킨다.

라이트는 슈바이처의 묵시적 유대교 사상를 통해, 바울의 기독론을 유대주의적 메시아 사상에 귀속시킴으로서, 바울에 관한 새관점의 틀을 완성시켜 나간다.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은, 바울의 서신서에 나타난 기독론이 유대주의적 메시아 개념을 바울 자신이 특별하게 발전시킨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슈바이처의 묵시적 유대교 사상을 빌려온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 라이트의 의의 개념에는, “칭의를 순전히 법정적으로만 이해하는 칭의론은 윤리를 낳지 못한다"는 슈바이처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행위 구원론적 의의 개념이 추가된다. 

이는 슐라이어마허의 영향을 받은 슈바이처가, 법정적 칭의론이 갖는 윤리의 부재에 대하여 우려했던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라이트는 슈바이처의 법정적 칭의론에 케제만의 관계적 칭의론을 대입시킴으로서, 결핍된 윤리의 문제를 해결하려한다.

슈바이처에게 칭의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김세윤 교수의 글을 인용해보면

종교사학파인 슈바이처(1808-1888)는 "바울 복음의 주된 분화구는 '그리스도-신비주의'이고,칭의론은 그 분화구 안에 부차적으로 형성된 2차적분화구이다."라고함으로서 그리스도-신비주의의 입장을 취한다. 

그는 "칭의론은 바울이 자기의 이방 선교를 방해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싸우기 위하여, 즉 그들이 이방 그리스도인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을 배격하기 위해 고안한 논쟁 교리이다. 그래서 그것은 이방 선교문제를 다루는 갈라디아서, 로마서, 빌립보서3장에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론은 바울 신학의 중심이 아니고 바울 신학의 곁가지에 불과하다. 바울 신학의 중심은 '그리스도-신비주의'이다"(칭의와 성화, 김세윤, 20)

이와같이 슈바이처에게는 칭의가 중요하지 않았기에 법정적 칭의에서의 윤리부제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톰 라이트에게는 칭의가 중요한 문제였다.

톰 라이트는 슈바이처에 상당히 공감을 하면서 슈바이처의 접근과 비슷한 접근을 하고 있지만, 슈바이처의 법정적 칭의론에 의한 윤리의 결핍에 대한 문제를 케제만의 관계적  칭의론에 대한 개념을 보충함으로서 비로소 해결 할 수있었다.

그는 케제만의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을 칭의의 근거로 내세운다.(톰 라이트, 예수의 도전 119)

톰 라이트는 윤리의 부재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과 같이 신자도 신실할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으로 이해하는 것과 같이 신자에게 주어지는 의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같이 신실한 삶을 살아감으로서 얻어진다는 윤리적 의를 제시한다.

톰 라이트가 추론한 하나님의 의는 윤리를 위한 의라고 할 수 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로의 이전"이라는 관계적 칭의는, 슈바이처의 윤리의 부재에 대한 문제 해결하기 위한 필요에 의해서, 케제만으로부터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관계적 칭의를 도입하게된 것이다.

톰 라이트에게 슈바이처의 법정적 칭의론에 의한 윤리의 결핍은 케제만의 관계적  칭의론에 대한 개념이 보충될 때  비로소 해결 될 수있었다.

이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윤리적 행위가 따르는 행위구원론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하지만 칭의의 근거가 윤리의 부재를 해결하기 위하여 도출되어서는 않된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새관점에서의 하나님의 의 개념은 법정적 칭의를 배제한체 칭의의 영역을 포함시킨다.

법정적 칭의는 인격적 관계의 회복이기에 법적인 윤리를 넘어서는 인격적 윤리가 있다.


법정적 칭의에는 죄용서라는 최소한의 소극적 칭의를 넘어서, 자녀로 삼는 완전하고 적극적인 칭의가 내포되어있다.


단순한 죄용서와 자녀로 삼는 입양은 차원이 다른 칭의다.


슈바이처-칭의를 순전히 법정적으로만 이해하면 "칭의론은 윤리를 낳지 못한다"(칭의와 성화, 김세윤, 88)고 말하지만, 법정적 칭의로 말미암은 입양됨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로 인하여 마땅한 윤리적 변화를 가져온다.

새관점은 자녀로서의 관계보다는 "하나님 나라로의 이전"이라는 관계적 의미로 윤리의 문제를 해결하려고한다.


케제만의 하나님의 의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불트만학파의 케제만(Ka:semann)으로부터 가져온 것이다.

케제만은 슈바이처의 “옛 탐구”와 구별된 “새 탐구”를 시작하였다.

톰 라이트에게 신학적 근거를 제공하고있는 “역사적 예수 탐구”는 케제만의 “새 탐구”의 영역에 속하여있다.


라이트는 케제만의 역사적 예수 탐구에 대하여 긍정적 입장을 취한다.


톰 라이트는 제1,2차 대전 동안에 교회가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를 하지 않았을 때 비역사적 예수가 제시되어, 나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했다는 에른스트 케제만의 1953년 10월 23일 행한 연설에 동의한다.(Challenge of Jesus, 21)


불트만학파인 에른스트 케제만이 로마서 1장 17절의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한 이래, 라이트는  이를 보편화 영구화 시키고있다.(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64)     


새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전통적인 개념과 달리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으로 해석한다.

케제만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케제만은 불트만의 제자로서, 불트만의 인간론 중심적 개인론 중심적 해석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의'를 '뒤틀린 온 세상을 바로잡는 하나님의 힘'으로 해석한다.

2. 케제만은 칭의론을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라는 관점에서 해석한다.(칭의와 성화, 김세윤, 21)

3. 하나님의 의에 대한 케제만의 해석도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다.(칭의와 성화, 김세윤, 63)

4. 케제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죄를 씻어 버리고 덮어버리는 제사expiation”라고 해석한다.

이는 죄를 벌주고 의를 상주는 법정적 의미로서의 전통적인 그리스도의 속죄 개념인 “형벌적 대속론(Penal substitutionary theory of atonement)”과는 다른 것이다.

5. 케제만은 칭의의 관계론적 의미를 중시함을 넘어서, 하나님의 의를 자신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힘이라고 말한다.(칭의와 성화,김세윤, 84)

여기서 하나님의 의는 창조주가 타락한 자신의 피조물들을 자신의 주권 아래로 회복시키는 힘이다.

라이트는 케제만의 관계론적 칭의론, 즉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하심”과, “하나님 나라로의 이전”이라는 관계적 칭의를, 윤리로서의 성화와 연계시켜 칭의와 윤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한다.

6. 케제만은 칭의를 “주권의 전이(lordship- transfer/ lordship-change)”로 해석한다.

아담적 죄인들을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를 통해 사단의 통치 아래서 해방하여(여기에 죄용서가 내포됨) 자신의 통치(하나님 나라) 아래로 이전하는 것을 말한다.(칭의와 성화, 김세윤, 85)

하지만 하나님의 의를 케제만의 주장처럼 주권의 전이라고한다면, 주권의 전이가 구원을 뜻한다고 할 수밖에 없다. 

주권의 전이는 신자의 믿음을 전제로하고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구원을 위해서 자신들이 본질적 죄인이라는 고백을 할 필요가 없으며, 그리스도의 법정적 속죄사역에 대한 인식이 없어도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담적 죄를 용서하여 주셨기에,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윤리가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주권의 전이 개념에서,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어지는 윤리로 주어진 것이며,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님이 모델이 되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예수의 삶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요구의 성취이며, 이는 신자에게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같이 신실하게 살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만약 요구되어지는 윤리적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면 최종적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새관점의 주장은 행위 구원론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고 구원을 위한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 알미니우스적 주장이면서 동시에 구원을 신인협력에 의한 결과물로 보는 것이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


1) 믿는자가 의롭다고 칭함을 받기 위하여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댓가 없이 선물받아서 의롭게된다.


이 하나님의 의는 믿는 자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하는 것이다.(롬1:16-17, 3:21-26)(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28)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하여 하나님의 의는(율법에 순종하시고 율법으로 받을 징벌을 감당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는자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다.(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45)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을 의롭게 하면서 동시에 신자와 의를 공유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의는 복음을 통하여 나타난다.

This is a definition of that righteousness which he said had been revealed when Christ was given, and which, as he has taught us in the first chapter, is made known in the Gospel. 


이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있다.

He affirms that it consists of two parts.  


첫 번째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는 많은 것 가운데 한 가지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 내포된 모든 의를 말하는 것이다.

The first is that God is just, not indeed as one among many, but as one who contains in Himself alone all the fullness of righteousness.  


하나님은 모든 충만한 찬양을 받으실 분이신데, 이는 하나님 한 분만이 의롭다는 이름과 명예를 마땅히 받으셔야만 하는 반면에, 모든 인간은 불의로 저주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He receives the full and complete praise which is His due only as He alone obtains the name and honor of being just, while the whole human race is condemned of unrighteousness.  


다른 부분으로는, 의의 소통에 관한 것인데, 이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풍요를 결코 자신 안에만 가둬놓지 않으시고, 이를 사람들에게 부어주신다는 것이다.

The other part refers to the communication of righteousness, for God does not by any means shut His riches within Himself, but pours them forth upon mankind.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게하시는 한에는,  하나님의 의는 우리를 비추게되는 것이다.

The righteousness of God, therefore, shines in us in so far as He justifies us by faith in Christ, for Christ was given in vain for our righteousness, if there were no enjoyment of Him by faith.  


이에 비추어볼때 모든 인간은 하늘로부터 치료책이 나올때까지는 불의하고 상실되어있는 자들인 것이다.[Calvin, Romans, pp. 77-78.]

It follows from this that in themselves all men are unrighteous and lost, until a remedy from heaven was offered to them.[Calvin, Romans, pp. 77-78.]


루터는 밤낮으로 로마서 1장 17절을 묵상하는 중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라는 말씀은 다름이 아니라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만나는 루터, 우병훈, 68)



2) 믿는 자에게 보혈의 속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는 공의의 심판을 하시는 의뿐만이 아니라 믿는자에게 보혈에 의한 속죄를 베푸시는 의로도 나타난다.(롬3:25-26)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그의 피를 흘리심을 통해서, 믿음으로 받아들이라고, 속죄의 희생으로 내어주셨다.

God presented Christ as a sacrifice of atonement, through the shedding of his blood—to be received by faith.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지은 죄를 벌하지 않으시고 참으심으로서, 자신의 의를 증거하시기 위해서 이를 행하셨으며, 예수를 믿는 자들을 의롭게하신 것과 같이 자신도 의로우시도록, 현재도 자신의 의를 증거하신다.(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71)

He did this to demonstrate his righteousness, because in his forbearance he had left the sins committed beforehand unpunished— he did it to demonstrate his righteousness at the present time, so as to be just and the one who justifies those who have faith in Jesus.


3) 의로운 자에게 상주시는 하나님


모세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에게 상을 주실 수 밖에 없으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여기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넘어서) 의로운 자에게 상주시는 일을 신실하게 행하셔야만 하는 하나님의 의무의 속성도 드러난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께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서 우리는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상 주시는 일을 신실하게 이행하셔야만 하는 의무가 있으신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약속을 지킨다는 개념을 넘어서 우리에게 상을 주셔야만 하시는 의를 가지고 계신 것이다.



법정적 개념이 제거된 새관점의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에 관하여 바울이 사용한 용어들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법정적 행하심을 볼 수가 있는데, 이는 언약백성에 대한 무죄선언과 옳음을 인정하심이 있고 그들의 적들에 대하여는 심판과 저주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의에 대하여는 옳다고 하시고 악에 대하여는 저주를 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의가 로마서에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가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구약적 배경에 비추어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법정적 행위에서 자기의 백성을 의로운 상태로 보증하는 그리스도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다.( 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54)


톰 라이트가 말하는 의는 누군가가 대신 죄값을 치러준 것을 근거로 해서 재판장이 무죄를 선고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죄값과 관계없이 그냥 재판장의  일방적인 선포에 의하여 무죄가 선언되는 것이기에 피고의 무죄의 근거는 재판장의 의가 되는 것이지 누군가의 죄값을 치룬 분의 의가 아닌 것이다.(Wright, Paul, 105)


피고가 되신 예수님의 의가 전가된 의가 아니라 믿음과 관계없이 선포되는 재판장의 의를 말한다.


이부분이 전통적 개혁주의와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다.



로마서에 나타난 4가지 법정적인 하나님의 의


1)  로마서1-3장에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시다( the concept of God’s faithfulness to his covenant)는 개념이 나온다.


그러나 로마서3:1에서  바울이 사용하는 헬라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faithfulness of God)과 대비되는 불순종하는 이스라엘(the unfaithfulness of Isreal)이다.(dik-langue  대신에 pist-langue사용)

(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67)


2) 롬1:17-3:26절에 나타나는 강력하고 인내심있는 관심사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법정적 심판의 개념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는  로마서의 이 부분에서 강하게 나타나고있으며 여기서는 최소한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심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관심사는 시편(시98:9) 기자의 관심사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 땅을 의와 공평으로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롬1:16- 3:26은 문맥상으로 볼 때 분명히 하나님의 법정적의를 드러내신다.

.(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67)


3) 로마서 1장 18절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은 로마서 1장 16-17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에 대한 설명의 시작으로서 로마서11장까지 이어지고있다.

(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66-72)


4) 로마서 1장 17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는 18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wrath of God)의 나타나심으로 설명된다. (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69)



법정적 개념이 제거된 하나님의 의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 개념에서 법정적인 심판의 개념을 제거하고있다. 


톰 라이트는 개혁주의와 마찬가지로 칭의의 개념을 법정적으로 본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의를 전가받는다는 개혁주의의 생각을 거부하고있다.(What Saint Paul Really Said: N. T. Wright 96)


라이트가 말하는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하나님의 의"는 법정적 심판의 개념이 포함되어있지 않지만, 죄의 문제가 판결없이 해결된 것으로 간주함으로서, 사실상 칭의에 대한 법정적 의미를 부여한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은 법정적 판결을 대신하는 것으로서 죄인에게 법정적 판결이 없이 법정적 의인이 됨을 선포하는 역할을 하고있는 것이다.(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44)


톰 라이트는 로마서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법정적이고 심판적인 개념들을 제거함으로서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를 잘못 이해하고있다.


톰 라이트는 바울이 설명하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자신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으로 해석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것을 성실히 이행하신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더 나아가 아담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며 궁극적으로 모든 피조계의 자유를 선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What Saint Paul Really Said, 48)


여기서 “의"(righteousness)를 “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God’s faithfulness to his covenant)이라는 기술적 용어(technical language)로 단정짓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63)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선과 악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의가 아니라 언약에 대하여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고있다.


쉽게 말해서 심판의 개념을 제외시키고 언약 안에서 선인이든 악인이든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하나님을 그려내고자 하는 것이다.(Ibid, 54)


톰 라이트가 바울에서 볼 수있는 하나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God)를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에 대한 신실하심 (the faithfulness of God in fulfilling of his covenant promises)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바울의 이 용어 사용에 대한 적절한 적용이라고 할수 없다.


톰 라이트의 이러한 이해는 보편적이지도 않고 바울의 글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 말이 뜻하는 특별한 의미를 찾기도 힘들다.


만약에 톰 라이트의 말대로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언약의 약속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면 어떻게 그 신실하심이 표현이 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의”(righteousness)의 뜻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고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기게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 비평



(주권의 전이와 행위구원론)


톰 라이트는 케제만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하나님의 의 개념에 도입한다.


하나님의 의를 케제만의 주장처럼 “주권의 전이”라고한다면, 주권의 전이가 구원을 뜻한다고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케제만이 말하는 주권의 전이는 사람의 믿음을 전제로하지 않는다. 

구원을 위해 자신들이 본질적 죄인이라는 고백을 할 필요도 없으며, 그리스도의 법정적 속죄사역에 대한 인식도 필요없다.

케제만의 주권의 전이는 언약적 신율주의의 토대가 된다.

언약적 신율주의에서의 율법은 윤리를 위한 도구로 전락 되었으며,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는 삶의 모델로 전락되었다.

새관점에서는 요구되어지는 예수를 따르는 윤리적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면 최종적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새관점의 주장은 행위 구원론으로 귀착될 수 밖에 없으며, 구원을 위한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 알미니우스의 주장과 같이, 구원을 신인협력에 의한 결과물로 보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선물이라고 말하지만, 그 선물에 내포된 윤리적 삶의 요구로 보아서는, 결코 은혜의 선물일 수가 없는 것이다.

윤리에 대한 요구가 의무적 요구 조건이 된다면, 요구조건을 이행하지 못하면 최종적 구원이 취소되는 것이다.

케제만의 주장과 같이, 하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고 자신의 나라로 이전 시켜 자신의 백성으로 만듬으로써, 이제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의지하고 순종하며 살아야한다는 요구, 즉 윤리적 의무를 담고있다면 윤리는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 탐구의 객관성)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개혁주의의 해석 방법과는 달리,  성경을 "역사적 예수 탐구(Quest for Historical Jesus)"라는 접근법을 사용하여 해석함으로서 얻어진 결과물이다.


문제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얼마나 객관성을 가지고 "역사적 예수 탐구"를 응용하였는가이다.


톰 라이트에게 "역사적 예수 탐구"는 이미 자신이 내린 결론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다.


톰 라이트에게서는 홀로코스트라는 유대인의 비극이 재연되지 않도록 기독교를 유대교화하려는 여러가지 시도들이 포착된다.


이미 톰 라이트에게서 배운 많은 유학생들의 장학금이 유대인의 장학금에서 자유하지 못하고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나오고있다.


톰 라이트가 역사적 예수 탐구에 사용되었던 1세기 유대교의 문서들은 객관성과 보편성에 문제가 있다.


일부 지역의 문서들일 뿐만이 아니라 이를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많은 선입관들이 전제가 되어있다.


톰 라이트가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만큼이나 이러한  자료들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문서들은 정경에 준하는 신뢰성을 가지고있는 문서들이 아니다.


정경에서 제외된 외경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 즉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의는 "언약적 신율주의"를 합리화시키기 위한 부차적인 유추물일 뿐이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의는, 바울의 서신서의 주제와는 거리가 멀다. 


바울 서신서의 주제와는 어울리지 않는 전혀 낯선 해석일 뿐이다. 



(공의의 하나님)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심판은 주로 약속과 행함에 관하여 이루어진다.


약속이 없다면 행함의 의무도 따르지 않는다.


처음 아담과의 약속,  아담 언약은 아담에게 주권적으로 선포되어진 하나님의 약속이다.


아담이 불순종하였을 때는 이에 상응하는 형벌이 주어졌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과의 약속에서 그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약속하시면서 쪼갠 짐승 사이로 지나가셨다.


즉 약속에 대한 불이행은 죽음뿐이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맺으신 구속 언약과 처음 아담과 맺으신 아담 언약도 아브라함과 맺으신 약속은 마찬가지로 반드시 이행하셔야했다.


불순종한 아담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불순종한 날 죽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날에 반드시 죽으리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실행하셨다.


바빙크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날에 바로 죽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날 바로 죽었다.


죽지 않은 것은 육신일 뿐이며, 아담 안에 있었던 하나님의 생명은 상실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으로서의 에덴에서 쫒겨남으로서 버림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정하고 절대적이다.


인간이 육신이 살아있다고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재판장은 공의의 재판장이 아니다.


죄에 대하여 죄를 묻지 않으며, 죄인에 대하여 심판을 선고하지 않는 재판장이다.


죄인을 그냥 죄가 없다고 선포하는 재판장으로서  공의의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의 속성과는 거리가 멀다.


모세는 신명기를 통하여 끊임없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기록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공의 의 심판의 희생물로 돌아가신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재판장의 의는 죄인을 대신하여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적그리스도적 발상이다. 



(구원의 기준)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를 말하면서 신자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같이 신실하게 살아갈 것을 요구하고있다.


톰 라이트가 제시하는 윤리적 요구로서의 율법과 예수의 행하심은 명확한 구원의 기준을 제시하고있지 못하고있다.


어느 정도를 충족시켜야지만 최종적 구원에 이를 수 있는지 명확한 기준이 없다.


또한 톰 라이트는 인간이 실상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있지 않다.


모든 인간은 실상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이기에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존재다.


아담 안에서 죽은 죄인에게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요구한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게 만드는 발상이다.


구원을 위해서 요구되어지는 행함의 기준은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기준으로서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다.


죽은 자에게 행함이 요구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행할 능력이 없는 절망적인 이들에게 다가오는 희망의 소식으로서 오직 전적인 은혜를 근거로하여야만 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와 예수 그리스도)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신자에게 주어지는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를 대체한다.


결과적으로 톰 라이트에게 그리스도는 구속주도 아니다.


톰 라이트가 부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위격이다.


그리스도가 구속주가 되실 수 있으셨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위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혁명적 행동 방식은 신격을 가지지 않은 선지자라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며, 실제 톰 라이트가 묘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에서는 그리스도의 신격을 찾아볼 수가 없다.


톰 라이트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행동 방식이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 받았다는 표식에 불과하다. 


톰 라이트는 신자가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때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부활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부활의 의미를 손상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과연 어느 누가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 될 수가 있단 말인가?


이러한 모순 투성이의 새관점의 논리는 복음도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왜곡시켜서 참된 복음을 손상시키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유대주의적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posted by Wonho Kim
:
교리 2019. 10. 7. 12:57

존 페스코가 말하는 존 오웬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1부)


역자: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들어가는 말 


존 오웬이 활동하던 청교도 시대에 청교도들에게 가장 큰 도전이 되었던 이들은 주로 로마 카톨릭과 알미니안, 그리고 소시니안들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그리스도의 역할을 약화시키고 인간의 역활을 강화시켰다는데 있었다.


로마 카톨릭은 최종적 구원을 위한 인간의 공로를, 알미니안도 마찬가지로 구원에 있어서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으며, 소시니안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기까지 이른다.


이들의 사고는 분명히 청교도들과는 대립되는 사상들이었지만, 청교도 내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보이는 이들이 있었다.


리처드 백스터는 청교도에 속하여있다고하면서도 행위 언약을 배제함으로서 최종적 구원을 위한 인간의 공로를 추가하기도하였다.


존 오웬의 많은 저술들은 대부분 이들과의 논쟁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리스도의 사역을 약화시키고 그 자리에 인간의 공로를 집어넣는 시도는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다. 


오늘을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신성을 약화시키고 그 자리에 인간의 공로를 집어넣는 가장 대표적인 이들로는 톰 라이트를 비롯한 새관점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존 오웬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는 존 오웬이 살아가던 청교도 시대에 개혁주의 신학을 위협하는 이들에 대한 반박으로  쓰여졌지만, 오늘날의 새관점주의자들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존 페스코가 말하는 "오웬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 를 번역하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 그리고 전가 교리를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비롯한 현대신학에 적용해봄으로서 새관점에서는 어떠한 문제들이 있는지 살펴보고자한다.


새관점의 문제의 기저에는 인간 중심적인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라는 뿌리가 자리잡고있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종교개혁 이후에서 뿐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걸쳐서 나타난 인간 중심적인 사고로부터 기인된 것이다.


인간 중심적인 사고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배제한 신론 중심의 신학을 도출해낸다.


종교 개혁 이후의 개혁파 신학과 영국을 중심으로한 청교도 신학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과 믿음을 통한 칭의가 신학의 주요 주제였다.


그러나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모든 신학적 주제는 인간의 이성에 검증을 받아야만 했다.


인간의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신학은 퇴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성에 호소하는 신학은 인간으로부터 출발된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라는 특징을 나타내게 되며, 계시 중심의 위로 부터의 신학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칼빈주의나 개혁파 정통주의는 인간의 이성이라는 필터를 거치면서 신칼빈주의나 신정통주의라는 결과물을 낳게된다.


신칼빈주의나 신정통주의는 슐라이허마허로부터 시작된 자유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전통적 신학을 보호하고자 시작된 신학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또 다른 형태의 이성적 신학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신학의 이와같은 유형적 변화는 기독론 중심의 신학에서 신론 중심의 신학으로 형태적 변화를 가져왔다.


기독론을 배제한 인본주의 신학은 신론 중심의 칭의론으로 귀결되는 양상을 보여주고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라는 주제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성립될 수 없는 주제가 되어버린다. 


존 페스코가 말하는 존 오웬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를 번역하기에 앞서서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중심으로한 현대 신학이 어떻게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라는 주제에 심각한 손상을 가하고있는지 간략하게나마 정리해보고자한다.



새관점의 언약적 율법주의


최근에 들어와서 이슈가 되고있는 톰 라이트의 "바울에 관한 새관점"(이하 새관점으로 약칭)은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1세기 유대 문서들에 대한 해석을 근거로 성경을 재해석함으로서 나타난 인본주의적 성경해석의 한 가지 유형이다.


하지만 "역사적 예수 탐구"의 주요 문서들은 당시 에센파를 중심으로한 쿰란 공동체라는 지역적 제한성으로 인해서 이를 근거로 성경을 재해석하기에는 보편성이 결여되어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정경에서 제외된 외경들을 비롯하여 도마복음이나 Q문서들을 포함한 해석은 정경을 중심으로한 성경해석과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방법을 통해 1세기 유대주의 문서들을 분석해본 새관점주의자들은, 1세기 제2성전 유대교에서의 율법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지켜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 지켜진 것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게된다.


즉 제2성전 유대교에서의 유대인들은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머무르기(stay in) 위해서 율법을 지킨 것이지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가기(get in) 위해서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새관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러한 언약적 신율주의는 이제껏 정통개혁주의에서 주장한 율법주의적 관점에 수정을 요구하고있다.


언약적 신율주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참여하기 위한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의 개념이 자리를 잡을 곳을 없애버린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는 통로이지만, 언약적 신율주의에서는 이미 출애굽을 통하여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실현되었으며, 최종적 구원은 율법의 또 다른 표현인 그리스도의 행동 방식을 따르는 행위로 구현되기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개념은 자리잡을 곳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미 은혜 안에 들어와있는 이들에게 은혜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가라고하는 말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옳다면 어거스틴 이후의 기독교는 잘못된 길을 걸어왔다는 뜻이 된다.



현대신학과 칭의


칭의는 신자에게 하나님 앞에서의 정체성을 부여하며, 구원에 참여된 신자의 표징이기에, 칭의는 성경에서의 중심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정통개혁주의가 기독론 위에 칭의론을 정립하고있다면, 새관점을 비롯한 현대신학은 신론 위에 칭의론을 정립하고있다고 할 수 있다.


새관점은 칭의에 대하여 정통개혁주의의 관점과는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존 파이퍼가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 대한 반박으로 저술한 "칭의 논쟁(The Future of Justificaion)"에서는 새관점이 제시한 칭의에 대한 개념이 정통개혁주의에서의 칭의에 대한 개념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났는지 잘 말해주고있다. 


칭의는 종교개혁에서도 가장 중요한 주제였기에, 루터는 칭의가 교회가 서고 넘어짐의 대들보(articlus standis et cadentis ecclesiae)라는 표현을 한다.


칭의는 창세 전 영원 가운데 삼위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삼위 하나님 간에 맺어진 약속을 이 땅에서 구현하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순종의 공생애가 궁극적으로는 성도의 칭의와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통개혁주의에서는 인간을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로 보고있기에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옷입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신론 중심의 칭의를 주장하는 새관점에서는 인간의 노력과 수고에 의해서 최종적 구원이 완성될 수 있으며, 그리스도는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삶의 본을 보여준 따름의 대상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한다.



전가교리와 칭의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가 신자의 의가 되는 것은 전가라는 방식을 통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인간이 죄의 자리에 있는 것과 의의 자리에 있는 것도 모두 전가라는 방식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의 근거가되는 아담의 죄의 전가뿐만이 아니라, 칭의를 위해서 필요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개념 자체를 부정하고있다.


전가는 속죄와 칭의에 필수적인 개념이다.


모든 인간이 죄인인 것은 아담의 죄를 전가받은 것으로 인한 것이다.


인간이 죄인으로 규정되는 것은 행함 이전에 아담의 죄를 전가받음으로 말미암아 존재론적으로 규정된 것이다.


이는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서 바로 세례를 받아야하는 근거를 제공해준다.


갓 태어난 아이라고하더라도 악행을 하기 이전에 이미 죄인인 것이다.


모든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죄인이냐, 아니면 악행을 하였기에 죄인으로 규정되느냐의 차이는, 정통 개혁주의와 인본주의 신학의 중요한 차이점이 되기도한다.


톰 라이트와 같은 새관점주의자는 죄와 구원의 문제를 인간의 행함에서 찾으려한다.


새관점주의자들을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을 신약에 제시된 또 하나의 행함의 기준으로 보고서 이를 행함으로서 최종적 구원에 이르려고한다.


인간의 행함을 죄인됨의 근거로 보기에 완전한 행함을 통해서 의를 성취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존재론적으로 규정된 죄인은 구원을 이를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행함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모든 인간은 아담의 죄로 인한 형벌을 치루어야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또한 형벌을 치루었다고 의인으로 규정될 수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규정되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형벌 뿐만이 아니라, 처음 아담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이행하여야만 한다.


존재론적으로 죄인으로 규정된 모든 인간은 이미 그 존재 안에 심겨진 아담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죄의 형벌을 대신 치르는 것만이 아니라, 순종의 의를 전가해줄 둘째 아담이 필요하다.


두 가지의 요구 조건, 즉 범죄로 인한 형벌과 완전한 순종이라는 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될 수가 없다.


전가 방식으로 죽은 인간은 전가 방식으로 생명을 얻어야한다.


신자는 생명을 얻기 위해서 누군가 죄가 없는 이에게 신자의 죄를 전가시켜서 대신 형벌을 치르고, 완전한 순종을 통하여 얻은 의를 전가받아 의인이 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리스도 자신의 죄로 인한 형벌이 아니라, 택함받은 자의 죄를 전가받아 신자가 치루어야할 형벌을 대신 치룸으로서 죄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과정으로서의 사역이다. 


모든 이들이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기에,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죄의 형벌을 대신 감당해줄 이가 없다.


신자는 그리스도께 죄의 형벌이라는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형벌로 값을 주고 성도를 사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값으로 사신 이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전한 순종의 의를 전가시키심으로서 그리스도와 하나의 몸을 이루시는 연합을 완성시키신다.

 

칭의는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룬 모든 신자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신자는 더 이상 존재론적으로 죄인이 아니다.


이러한 과정은 모두 아담의 죄가 전가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전가라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다.


믿음의 고백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은 것에 대한 고백일 뿐이며, 믿음의 고백이 구원을 이루는 수단이 될 수는 없다.


믿음의 고백은 이미 창세 전에 택함받은 자에게 예정하셨던 구원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결정적 과정이다.


믿음의 고백에 의한 칭의가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할 수가 없다.


전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는 성경적 방식이며 칭의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다.


하지만 많은 현대신학자들은 전가교리를 최소화시키거나 제거해버리고 이를 대신하는 다른 방식의 구원을 제시하고있다.


그리스도의 의를 충분히 전가받지 못한다면 그 부족한 부분은 인간의 행위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노먼 쉐퍼드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 페더럴 비전에서는 전가교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의 의를 제외시킨 수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만을 인정한다.


많은 점에서 페더럴 비전과 유사한 주장을 하는 새관점주의자들은 전가 교리 자체를 부정하며 그리스도의 역할을 달리 규정해버린다.


새관점주의자들은 죄와 의에 대해서도 개혁주의와 달리 규정하며 그리스도의 사역도 달리 해석한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대속 사역이 아니라 최종적 구원을 얻기 위한 행함의 본을 보여준 삶의 행동 방식에 불과하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신자에게 전가해줄 의가 없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을 대변하는 로마에 대항하여 희생된 혁명정신에 불과하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의 행동 방식이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받았다는 표식에 불과하다.


새관점주의자들에게 인간의 죄는 아담의 죄와 관련없다.


새관점주의자들은 아담의 죄가 이미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잠정적으로 해결되었다고 보기에, 인간의 죄악을 아담의 죄가 전가된 결과물로 보지 않는다.


새관점에서는 인간을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로 보지 않는다.


새관점에서는 인간이 끊임없는 연습과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새관점에서는 인간에게 구원을 이룰만한 능력이 있다고 보기에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필요로하지 않으며,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필요성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구원을 위해서 전가가 상실된 자리에는 그만큼 인간의 행위가 요구되며, 아담 안에서 이미 죽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인간에게는 이러한 행위를 충족시킬만한 능력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만약에 인간에게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자신의 선행을 더하여 구원을 완성시킬 것이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들이 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완전하게 충족시키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인정하지 않는 새관점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해서 요구되는 인간의 행함으로 변형시킨다.


새관점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지만, 이들이 이야기하는 은혜는 최종적 구원이라는 과제가 남겨진 미완성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과정일 뿐이다.


이들이 말하는 인간의 행함은 최종적 구원을 완성시키는 수단으로서,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만한 자격이 있는 존재라는 교만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인간의 행위가 필요하다는 새관점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최종적 구원에 충족될 수 있는 행위에 대한 어떠한 구체적인 기준도 제시하지 않는다.


과연 인간이 행함으로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


하나님의 요구 조건은 이미 아담에게 제시되었으며, 율법을 통하여 재연된 행위언약은 율법의 마침이 되신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으로 이미 충족되었다.


구원을 위해서 신자에게 요구되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받음으로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능동적 순종의 전가


전가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 새관점과는 달리 패더럴비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속죄 사역, 즉 수동적 순종의 의만을 인정하고 능동적 순종의 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능동적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셨다는 것이다.


능동적 순종의 개념을 부정하는 이들은 성경 어디에도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지키셨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랑이 없는 완악한 이들에게 주어졌던 율법을 넘어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신 희생적 사랑의 표현이었다.


처음 아담의 행위 언약에는 사랑이 담겨있지가 않다.


모세 율법에서 재연된 행위 언약도 마찬가지로 사랑이 담겨있지 않다.


희생적 사랑은 행위 언약을 넘어서는 완전한 언약의 성취였다.


인간에게 제시된 행위 언약은 사랑을 전제로하지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행위 언약은 사랑이 더해진 완전한 언약으로서의 새언약이다.


새언약에는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이 담겨있기에 아담 언약과 모세 언약은 새언약 안에서 완성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이 요구하는 최소한도의 행위 언약을 넘어서 희생적 사랑을 통하여 창세 전 구원 협약을 완성시키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아담 언약과 율법에 담겨있는 행위 언약의 맥락에서 순종의 부분적 특성을 표현한 것이다.


아담 언약을 행위 언약으로 보지 않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개념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기 위한 전가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그리스도가 둘째 아담, 혹은 마지막 아담이 되기 위해서는 아담에게 주어졌던 언약이 행위 언약이라는 전제가 있어야한다.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와 톰 라이트의 새관점, 그리고 페더럴 비전은 아담 언약이 행위 언약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사상들이다.


아담 언약이 행위 언약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율법에 담겨있는 행위 언약의 속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메리데스 클라인은 율법의 속성을 표면적 속성과 본질적 속성으로 이원화 시킨다.


클라인은 율법이 표면적으로는 아담 언약의 재연, 즉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명령의 재연Republication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율법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새언약으로 인도하는 은혜 언약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율법과 행위 언약 논쟁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것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율법의 마침은 율법의 요구에 대한 충족이며, 율법의 요구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능동적 순종의 개념을 거부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율법의 요구가 행위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저주에 대한 요구였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지키셔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이 요구하는 저주를 십자가에서 감당하셨기에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심으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것이다.


순종의 행위에 대한 요구가 제외된 율법에서는 공로의 개념이 성립되지 않기에 그리스도의 순종의 공로로 성취된 의 또한 존재하지 않기에, 전가될 의 또한 있을 수가 없다.

 


아담 언약과 칭의


아담 언약을 행위 언약으로 보느냐, 아니면 은혜 언약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속성은 달리 해석될 수밖에 없다.


어떤 신학자는 아담 언약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도 한다. 


아담 언약이 행위 언약이었는가에 대한 논쟁 못지 않게 모세 언약이 행위 언약인가에 대한 논쟁도 종종 격렬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이시기에, 처음 아담의 속성을 규정하는 것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이 규정될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셨기에 모세 율법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에 대한 속성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짧은 지면에서 행위 언약에 대한 논쟁을 다룰 수는 없지만, 결론부터 말하지만 아담 언약이 행위 언약으로 규정되어야지만,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를 규정할 수 있다.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둘째 아담으로 이루신 순종의 의를 전가받음으로서 처음 아담으로부터 전가받은 실패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되는 것이다.


칼 바르트는 아담 언약이 행위 언약이었음을 적극 부정하고있으며, 존 머레이 또한 아담 언약을 은혜 언약으로 보고있다.


행위 언약에 대한 부정은 칼 바르트의 구원론이 만인 구원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존 머레이도 마찬가지로 그의 제자였던 노먼 쉐퍼드가 아담의 행위 언약을 부정함으로서, 그의 제자들이 이단성을 가진 패더럴 비전을 구성할 수 있었던 근거를 제공해주었다.


아담 언약은 행위 언약으로 규정되어야지만 모든 인간이 아담 안에서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죄인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으며,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이 율법의 행위 언약에 대한 순종이었음을 말해주고있는 것이다.


언약 사상에 있어서 행위 언약 개념이 제거된다면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의 속성과 믿음의 내용과 전가의 내용, 그리고 칭의와 구원론에 대한 모든 내용이 행위 언약을 인정하는 신학과 달리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 나라 백성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타락한 인간과 함께 하실 수가 없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타락한 인간을 더 이상 죄인으로 규정하지 않고 의인으로 규정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하시는 신비로운 방법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는 신자의 맏형이 되신다.


이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칭의된 자의 정체성을 발해주는 것이다.


인본주의적 접근 방식으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이나 하나님의 자녀의 개념까지 나아가지 못하고있다.


인본주의자들은 기껏해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기들만의 해석 방식으로 정체성을 규정한다.


새관점주의자들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나라로서의 하나님 나라와는 다르다.


새관점주의자들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통해서 가나안 땅에서 이루어진 나라이며, 그리스도와는 상관이 없는 나라이다.


이들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언약적 신율주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 산상수훈을 비롯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한다.


이들은 최종적 구원이라는 과제가 남아있기에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상태가 아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하나님의 자녀는 안식의 주인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하나님 나라 백성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최종적 구원을 위한 행위가 요구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하나님의 자녀는 구원의 보증자되시고 중보자되심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의 행위가 요구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행위는 최종적 구원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성화의 과정으로서의 열매일 뿐이다.



인간은 언제 죽었는가?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서 생명을 얻게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생명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죄인이 죽은 자임을 전제로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육신으로는 살아있으나 실상은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죽은 자이다.


이는 아담은 언제 죽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남은 더 이상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조건이 상실된 곳,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곳으로 쫓겨난 것이다.


아담은 범죄한 후에 육신이 됨으로서 하나님의 영이 떠난 죽은 존재가 되었다.


에덴 바깥에 있는 모든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었기에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력한 생명이 없는 존재인 것이다.


에덴 바깥에서의 아담은 범죄한 후에 육신은 어느 정도 살 수 있었으나  실상은 하나님의 영이 떠난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존재로 살아갔던 것이다.


바빙크는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일정 기간 살 수 있었던 것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


바빙크는 하나님께서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바로 죽지 않고 살려두신 것을 은혜라고 말하지만, 아담이 범죄 후에도 일정기간 살아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상실된 육신뿐이었다.


어떤 이들은 아담이 불순종하는 날 바로 죽으리라고 했는데 그렇지 않는 것에 대하여 다양한 해석을 하지만 이러한 해석들은 전제가 잘못된 것이다.


실상 아담은 범죄하고서 바로 죽은 존재가 되어 에덴에서 쫓겨난 것이다.


에덴 바깥에서의 아담의 삶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죽음과 심판 사이의 삶이었다.


모든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로 죽음과 심판의 삶을 살아가고있는 것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참 생명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아담의 후손은 육신의 생명만 있을 뿐 하나님의 영이 떠난 육신이 된 죽은 존재일 뿐이지만, 참 생명에 대하여 알 수 없는 상태로 살아갈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생명으로 오신 것은 죽은 존재를 살리시기 위한 것이다.


에베소서 2장에서는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고 기록하고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들이 허물과 죄로 인하여 이미 죽은 존재임을 말하고있다.


에베소 사람들은 행함으로 범죄하기 이전에 이미 아담 안에서 범죄한 존재였다.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을 이미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에베소 사람들이 죄를 범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론적으로 죽어있던 존재라는 것이다.


에베소 사람들은 분명히 살아있는 존재들이지만 이는 오직 육적인 관점에서만 본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을 죽은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도 적용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울이 말하는 생명에 대한 관점은 일반 상식적인 관점과는 다른 관점임을 보여준다.


참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사람은 실상은 죽어있는 존재이다.


인간이 의존하는 육신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생명이 없는 육신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참 생명되신 하나님의 순종의 요구에 응답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인간은 육신의 본능을 따라갈 뿐 하나님의 생명에 이르는 길로 궤도를 수정할 능력이 없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인간의 실상을 외면하고 인간을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행할 능력이 있는 존재로 보고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말한다.


톰 라이트의 바울에 관한 새관점은 실제의 바울과 다른 바울을 그려내고있다.


하나님께서 살리셨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죽었던 것을 전제로 하며 이는 하나님과 분리되었음을 말해주고있지만, 톰 라이트는 이미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있다고 말한다.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는 바울의 선언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성령이 내주하시는 살아있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다.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안식에 참여된 것이며, 그리스도의 안식은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행위 언약이 성취 되었음을 말해준다.


하나님께서 6일간의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을 취하셨듯이, 아담은 자신에게 주어진 선악과 금령과 통치 명령을 수행함으로서 종말론적 축복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어야만 했었다.


에덴 바깥에 있는 모든 인간은 종말론적 축복과 영원한 안식이라는 목표가 상실되어 스스로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존재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생명을 상실한 인간에게 칭의를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삶에 있어서의 행동 방식이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에 관한 주제는 새관점에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된다.


톰 라이트를 비롯한 새관점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역할을 재규정함으로서, 이들이 말하는 예수는 더 이상 성도와 연합을 이루시는 분도 아니시며, 성도에게 칭의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시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예수는 존 오웬이 말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에서의 그리스도와 전혀 다른 인물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 개념에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칭의의 개념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예수는 창세 전 구속 언약 가운데 중재자이시면서 보증자로 세워진 분이 아니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에는 전가 개념이 적용될 수가 없다.


새관점주의자들이 말하는 예수는 택한 자의 죄를 전가받아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도 아니며, 완전한 순종을 통한 행하심으로 얻은 의를 신자에게 전하여주시는 분도 아니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죄는 아담의 불순종과 관계가 없기에 새관점에서의 그리스도에게는 속죄 사역이 필요하지가 않다.


새관점에서는 아담의 죄의 문제가 아브라함 언약에서 잠정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보며, 새관점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께 택함받아 은혜 안에 거하였던 이스라엘이 율법을 선교의 수단이 아닌 이방 민족과 구별하는 배타적 수단으로 사용한 범죄로 규정한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죄는 지극히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죄이기에 인류의 근원적 죄에 대한 접근이 불가능하다.


새관점주의자들이 말하는 예수는 인류의 근원적인 죄의 문제와 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없으신 분이다.


단지 삶의 본을 보여주신 분이실 뿐이며, 최종적 구원을 위한 몫은 인간의 행함에 있을 뿐이다.


새관점주의자들이 말하는 예수의 부활은 단지 예수의 행하심이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받았다는 표시일 뿐이기에 인간에게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최종적 구원을 위한 공로를 요구한다.


새관점주의자들에게 예수는 처음 아담과 관계된 둘째 아담도 아니시며, 처음 아담이 실패한 행위 언약을 충족시키신 분도 아니다.


대표적인 새관점주의자인 톰 라이트의 그리스도와 칭의에 대한 해석은 제2성전 유대교에 대한 역사적 예수 탐구를 통해 재구성된 것이었다.


새관점주의자들이 말하는 예수에게서는 삼위 하나님의 신격을 찾아볼 수가 없다.


죄인에 대한 중보나 보증은 하나님과 동등한 신격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죄인이 성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신격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하나님이신 중보자 그리스도는 택함받은 자의 죄를 없애주시고 이들과 연합하심으로 의의 옷을 입혀주신다.


이는 삼위 하나님의 인격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칭의는 삼위 하나님 가운데 한 분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며,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전가와 연합에 의하여 완성되는 것이다.


존 페스코는 톰 라이트의 칭의에 대한 주장이 리처드 백스터와 매우 유사하다고 말한다.


이와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것은 리처드 백스터도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배제하고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배제된다면 부족한 의는 인간의 몫이 될 뿐이다.


하지만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에게는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기회가 주어진다고하더라도 이미 육신의 죄 안에 갖힌 죽은 존재이기에 죄를 깨달을 뿐이다.


신자의 칭의는 오직 전가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만이 근거가 될 수 있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행함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부활이 예수가 로마에 대항하는 혁명적 행동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옳다고 증명해주셨다는 개념이라고 말하지만, 어느 누가 자신의 혁명적 행동으로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을 받을 수 있겠는가?


톰 라이트가 말하는 믿음은 예수의 행동 방식이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받으셨음을 믿고 그러한 삶의 방식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한다고 주장하지만 과연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톰 라이트가 말하는 믿음대로 행동하면서, 이러한 행동 방식을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행함의 의의 근거로 제시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순종과 전가교리와 칭의 개념을 변형시킨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은 "만약에 칭의에 관한 논술이 상실된다면, 기독교 교리 전체가 상실될 것이다"라고 말한 마틴 루터의 예언이 실현된 것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연합과 삶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본을 보여주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은 행함의 문제이기 이전에 믿음의 문제이다.


잘못된 내용의 믿음을 소유하고있기에 잘못된 행동이 나오는 것이다.


새관점주의자들을 비롯하여 개혁을 외치는 많은 이들이 믿음의 문제를 외면하고 행함을 강조함으로서, 행함의 문제를 윤리적으로만 접근하려고한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참된 신자라면 행함은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다.


행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상적 접근보다는 근원적 접근이 필요하다


현상적 접근은 고무줄을 당기는 것과 같은 접근 방식이다.


힘을 빼면 원위치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행함의 문제는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부터 접근해야한다.



posted by Wonho Kim
:
교리 2019. 10. 7. 12:54

존 페스코가 말하는 존 오웬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2부)
John Owen on Union with Christ and Justification
J. V. Fesko


1.서론
1. Introduction


C. S. 루이스는, 각 세대마다 그 자체의 고유한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책보다는 고전을 선호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C. S. Lewis argues that we should prefer old books over new books because every age has its own outlook. 


고전을 읽음으로서 우리는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으며, 또한 우리 자신의 잘못된 관점의 수정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By reading old books, we can learn from the past and possibly correct errors in our own outlook.


역사적 신학의 과거를 삿삿이 뒤져 보게되면, 작은 이들 가운데에서 특출나게 드러나는 거대한 인물로서 존 오웬이 있으며, 아마 그는 매우 중요한 영국 신학자이었을 것이며, 확실한 것은 그가 17세기 이래로 유럽에서 몇 안되는 특출난 개신교 성직자의 명부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When rummaging in the historical-theological past, one giant figure who stands out among a field of Lilliputians is John Owen (1616-83), who is perhaps the most significant English theologian and certainly on a very short list for premier Protestant divines from Europe from the seventeenth century.


오웬은 "영국이 이제껏 배출한 가장 뛰어난 신학적 정신"으로 불리워지곤 했다.

Owen has been called the "finest theological mind England ever produced." 


오웬은, 다수의 교리적 주제들에 대한 광범위한 저술들과, 지식과 역사와 독서와 해석학에 대한 광범위한 증거들과, 철학적 예리함과 신학적 명료함으로 인해서, 신학의 역사에서 명성을 굳혀왔다.

Owen's reputation has been cemented in the history of theology due to his extensive writings on a host of doctrinal topics, evidencing a wide breadth of knowledge, history, reading, exegesis, philosophical astuteness, and theological acumen.

그러나 이번 글에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자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 교리에 관한 오웬의 관점이다.
But what is of particular interest for this essay are Owen's views on union with Christ and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이러한 교리들에 관해서는 현재 역사신학, 조직신학, 해석학, 그리고 성경신학이라는 

다양한 신학적 연구 분야에서, 상당히 다른 입장에서 많은 논의들이 있다.

There is much discussion at present over these doctrines coming from many different corners in the various fields of theological study: historical, systematic, exegetical, and biblical. 


이러한 주제들에 관한 탐구에서 추천해주고 싶은 것은, 오웬이 자신의 저술 경력의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이러한 교리들에 관한 논쟁에 관여하고있다는 것이다.

What commends an investigation on these subjects is that Owen spent a good part of his writing career engaged in debate over these two doctrines. 


17세기는 반율법주의가 태동되기 시작한 시기였으며 동시에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신율법주의라는 움직임이 발생한 시기였다.

The seventeenth century was a period where antinomianism was on the rise, and the pendulum swung hard in the opposite direction and yielded a neonomian reaction. 


역사적으로, 반율법주의자들은 도덕법이 구속된 죄인을 속박할 수 없다는 신념에 대하여 고발당하였다면, 신율법주의자들은 개인의 칭의에 믿음과 행위를 묶은 것에 대한 잘못에 대하여 고발당하였다.

Historically, antinomians were charged with the belief that the moral law was in no way binding upon the redeemed sinner whereas neonomians were accused of erroneously combining faith and works in a person's justification. 


토비아스 크리스프(1600-43)의 "홀로 찬양받으실 그리스도"나 에드워드 피셔(fl. 1625-55)의 "현대신학의 진수"와 같은 작품들은 반율법주의로 분류되었으며, 리처드 백스터(1615-91)와 같은 이는 자신의 저술 활동을 통하여 다양한 반응들을 진화시키기도하였다.

Works such as Tobias Crisp's (1600-43) Christ Alone Exalted and Edward Fisher's (fl. 1625-55) Marrow of Modern Divinity were labeled antinomian, and the likes of Richard Baxter (1615-91) fired off numerous responses throughout his writing career.


앞으로 나아가려는 반율법주의자들과 뒤로 물러서려는 신율법주의자들 사이에서 오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에 대한 자기 자신의 이해를 제시한다.

Between the Scylla of antinomianism and the Charybdis of neonomianism, Owen set forth his own understanding of union with Christ and justification.

그러나 최근에는 오웬과 같은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교리를 가지고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Recent claims, however, about Reformed Orthodox theologians like Owen maintain that they did not have a doctrine of union with Christ. 


Charles Partee는 개혁정통주의에 대한 자신의 분석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칼빈의 신학 한 가운데 있지만, 이들 가운데에는 없기 때문에, 칼빈은 칼빈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In his analysis of Reformed Orthodoxy, Charles Partee argues, "Calvin is not a Calvinist because union with Christ is at the heart of his theology-and not theirs."


윌리암 에반스와 같은 다른 이들은,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존 칼빈 (1509-64)

의 초기의 개통적 논술들을 크게 재구성하였으며, 구속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개혁주의자들의 형태에 구원의 서정이라는 낮선 영역을 적용시키는 변형을 가하였다고 주장하기도한다.

Others, such as William Evans, claim that Reformed Orthodox theologians greatly restructured the earlier formulations of John Calvin (1509-64) and distorted the Reformer's union with Christ model of redemption with the imposition of the foreign category of the ordo salutis.


칼빈은 각각의 유익들의 순서에 관해서는 무관심하였는데- 칭의는 성화에 앞설 필요가 없었다- 이는 양쪽 모두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신자에게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Calvin was indifferent regarding the respective order of benefits-justification need not precede sanctification because both were given to the believer in their union with Christ. 


광범위한 초기 현대 개혁주의 전통의 칼빈과의 관계를 탐구하는 것은 지금 이 조그마한 논술의 규모을 넘어서는 것이지만, 연합과 칭의에 대한 오웬의 관점을 탐구하는 것으로 앞서 언급했던 주장들이 잘못된 것임이 증명될 것이다.

While examining Calvin's relationship to the broader Early Modern Reformed tradition is beyond the scope of this modest essay, examining Owen's views on union and justification will demonstrate that the aforementioned claims are incorrect.


이 논술에서는 오웬이 구원의 서정을 고수하면서, 성화보다도 칭의 교리에 우선 순위를 두는 동시에, 그리스도와의 연합도 수용하고있다는 것을 증명해줄 것이다.

This essay proves that Owen embraces both union with Christ but at the same time gives priority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over sanctification, that is, that he holds to an ordo salutis.

오웬은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우선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사람이 의롭게되었기 때문에 성화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성화되었기 때문에 의롭게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Owen gives priority in this sense: a person can say that they are sanctified because they are justified, but a person cannot say that they are justified because they are sanctified. 


달리 말하자면, 오웬은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적 특징을 그대로 고수하고있다는 것이다: 칭의와 성화는 구분될 수 있지만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한 분리될 수 없는 유익이며, (선행으로 나타나는 열매인) 개인의 성화는 어떠한 형태로든 자신들의 칭의와 섞이거나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In other words, Owen maintains the classic hallmark of Reformed theology: justification and sanctification are distinct but inseparable benefits of union with Christ, but a person's sanctification (the fruit of which is good works) is not in any way mixed or confused with their justification. 


선행은 칭의의 열매이거나 증거일뿐이며 (칭의에) 앞선 요인이 아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는 칭의가 성화에 앞서는 것이다.

Justification logically comes before sanctification because good works are the fruits and evidences of justification, not its antecedent cause. 


더군다나, 칭의는 완성된 조항인 반면에 성화는 시작은 되었지만 불완전한 과정인 것이다.

Moreover, justification is a complete act whereas sanctification is an inaugurated but nevertheless incomplete process.

이러한 우선 순위는 구원의 서정, 혹은 (좀 더 일반적으로 알려져있는) 황금 사슬로 표현된다.
This priority is expressed through the ordo salutis or the golden chain (as it was more commonly known). 


어떤 이들은 이와같은 우선 순위를 유지하는 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충돌된다고 생각하지만, 오웬은 이와같은 충돌은 없다고 본다.

While some think that maintaining such a priority is at odds with the doctrine of union with Christ, Owen sees no such conflict.


오웬이 충돌이 없다고 보는 이유는, 그가 창세 전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의 구속 언약에 근거를 둔 거시적 구원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The reason Owen sees no conflict is that he has a full-orbed soteriology that is rooted in the pre-temporal pactum salutis between the Father and the Son. 


오웬의 관점을 이해하는 열쇠는 신자의 구속의 긴밀하고 궁극적인 근원을 알아보는 것이다.

Key to comprehending Owen's views is recognizing the proximate and ultimate sources of the believer's redemption.

이러한 논제를 증명하기 위해서, 이 글에서는 오웬의 구원론을 구속 언약과 더불어 논리적으로 시작하는 것으로부터 진행하려고한다.
To prove this thesis, the essay proceeds at the logical beginning of Owen's soteriology with the pactum salutis. 


이 교리는 많은 방식에서 아래와같은 단계로 전계될 것이다.

This doctrine in many ways sets the stage for what follows. 


그 다음에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와 성화의 관계성에 대하여 논의하려고한다.

We then move on to discuss the relationship between union with Christ, justification, and sanctification. 


마지막으로 이 논술은 오웬이 어떻게 각각의 부분들을, 구속에서의 법정적 우선권을 유지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취합하고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Finally, the essay shows how Owen assembles the individual parts as a whole while maintaining the priority of the forensic in redemption. 


그와 함께 이 논술은 오웬의 관점을 그 시대의 다른 관점들과 비교할 것이다.

Along the way, the essay compares Owen's views with other views of the period. 


그리고 비록 신학과 역사를 구분하는 선을 넘을 수는 있겠지만, 이 글은 오웬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에 관한 교리를 현대적 논의에 비추어보면서 오웬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의 교리에 관한 교리의 중요성에 관하여 몇가지 논의를 하면서 결론지으려고한다.

And though perhaps transgressing the line dividing history from theology, the essay concludes with some observations about the importance of Owen's doctrines of union with Christ and justification vis-à-vis contemporary discussions of the same.


2. 구속언약
2. The Pactum Salutis


오웬의 신학에 적용될 수 있는 많은 형용사 가운데에는 언약적이라는 용어가 있다.
Among the many adjectives that can be applied to Owen's theology is the term covenantal.


이 용어는 분명히 오웬의 구원론에 적용이 된다.

This term certainly applies to Owen's soteriology. 


종교 개혁 초창기부터 시작하여,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신학에 언약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나, 17세기 들어서는 구속 언약이 개혁파 정통주의의 신학적 조직에서 좀 더 보편적인 형태로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From the earliest days of the Reformation, Reformed theologians employed the covenant concept in their theology, but by the seventeenth century the pactum salutis was beginning to feature more commonly in the theological systems of the Reformed orthodox. 


구속 언약은 은혜 언약을 통해서 타락한 이들의 구속을 가져오기 위해서 삼위 하나님 간에 맺어진 언약이다.

The pactum salutis is the covenant made among the members of the Trinity to bring about the redemption of fallen man through the covenant of grace. 


일반적인 용어로서,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구속언약과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이라는  3중의 나누어진 형태를 취하고있다.

In general terms many Reformed theologians held to a threefold division of the pactum salutis, the covenant of works, and the covenant of grace.


행위 언약은 창조 시에 아담과 맺어진 처음의 언약이었다.

The covenant of works was the original covenant made with Adam at creation. 


언약 교리에 관해서, 오웬은 페트릭 길레스피(1616-75)의 구속 언약에 관한 책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있다, "여기서의 교리와 이 안에 담긴 진리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 자신의 의무에 관계된 모든 선들이 만나는 중심이있으며, 이 안에서 모든 신앙이 구성된다"

Concerning the doctrine of the covenant, Owen writes in the preface to Patrick Gillespie's (1616-75) book on the pactum salutis, "For the doctrine hereof, or the truth herein, is the very center wherein all the lines concerning the grace of God and our own duty, do meet; wherein the whole of religion does consist."

구속 언약에 관해서 오웬은 다섯 가지 특징들이 있음을 설명한다.
Regarding the pactum salutis (or covenant of redemption), Owen explains that there are five characteristics:

● 성부와 성자는 택자의 구원이라는 공통의 목표에 대하여 상호간에 동의한다.(히 2:9-10; 12:2; 슥 6:13; 13:7; 시 55:14; 잠 8:22-21);

● the Father and the Son mutually agree to the common goal of the salvation of the elect (Heb 2:9-10; 12:2; Zech 6:13; 13:7; Ps 55:14; Prov 8:22-21);
 

●언약의 주체로서의 성부는 성자에게 성부의 뜻을 행함으로서 택자의 구속의 보증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수행하도록 요구하신다.(미 6:6-7; 베전 1:18; 히 10:4; 롬 3:25; 빌 2:6-7; 갈 4:4; 롬 8:3; 히 10:9; 사 49:5; 요 14:28; 사 53:10);

●the Father as principal of the covenant requires the Son to accomplish all that is necessary to secure the redemption of the elect-to do the Father's will (Mic 6:6-7; 1 Pet 1:18; Heb 10:4; Rom 3:25; Phil 2:6-7; Gal 4:4; Rom 8:3; Heb 10:9; Isa 49:5; John 14:28; Isa 53:10);
 

●성부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뜻을 수행하실 것에 대한 상급을 약속하신다.(사42:4; 시 16:10; 89:28; 히 5:7; 사 53:10-11; 히 12:2; 사 42:1-4; 히 7:28);
●the Father promises to reward Christ for accomplishing his will (Isa 42:4; Ps 16:10; 89:28; Heb 5:7; Isa 53:10-11; Heb 12:2; Isa 42:1-4; Heb 7:28);
 

●성자는 성부로부터 주어진 과업을 받아들이셨으며(시 40:7-8; 16:2; 사 50:5;  빌2:6-8)

●the Son accepts the work given to him by the Father (Ps 40:7-8; 16:2; Isa 50:5; Phil 2:6-8); and

●성부는 성자께서 완성하실 과업을 수용하실 것에 동의하신다.(사 49:5-6; 시 2:7 행 13:33; 롬 1:4; Ps 2:8; 요 17:1, 4-6, 12-16; 히 9:24).

●the Father agrees to accept the Son's work upon its completion (Isa 49:5-6; Ps 2:7 Acts 13:33; Rom 1:4; Ps 2:8; John 17:1, 4-6, 12-16; Heb 9:24).



오웬이 인용하고 해석한 수 많은 본문들 가운데 명백한 것은, 성경이 성부와 성자가 택한 자를 구원하시는데 동의하셨음을 보여주고있다는 기초적인 생각들이다. 

Evident from the cornucopia of texts that Owen cites and exegetes is the basic idea that Scripture shows that the Father and Son agreed to redeem the elect. 


오웬은 이러한 동의가 그 속성에 있어서 언약적이었다고 믿고있다.

Owen believes this agreement was covenantal in nature.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에 관한 오웬의 교리의 입장은 이와같은 근원적인 특징들에 기반을 두고있다.

Within these basic characteristics are the ground of Owen's doctrines of union with Christ and justification.

대부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에게있어서와 같이, 오웬에게 있어서 선택 교리는 절대로 추상적으로 고려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 편에서 결코 무모한 선택이 될 수가 없다.
For Owen, as for most Reformed theologians, the doctrine of election is never considered abstractly; it is never a bald choice on God's part. 


그보다 선택은 언제나 기독론, 성령론, 구원론과 같은 다른 분야와 함께하여야한다.

Rather, election is always coordinated with the other loci, such as Christology, pneumatology, and soteriology.


예를 들면, 오웬은 자신이 주요 작성자로서 자신의 신학을 반영한 신앙고백인, 사보이 선언(1658)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For example, in the Savoy Declaration (1658), a confession for which Owen was one of the chief architects and which therefore reflects his theology, states,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 안에서, 그 기쁘신 뜻대로, 두분 사이에 맺어진 언약을 따라서, 자신의 유일하신 독생자이신 주 예수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로 되시도록 선택하시고, 지명하셔서; 선지자, 제사장, 왕이시며, 교회의 머리와 구원자가 되시며, 모든 것의 상속자이시며 세상의 심판자이시며; 그에게 영원으로부터 사람을 그의 자손으로 주셨으며, 그로 인하여 역사 가운데 구속하셨고 부르셨고, 의롭게하셨고, 깨끗하게 하시며, 영화롭게 하셨다.
It pleased God, in his eternal purpose, to choose and ordain the Lord Jesus his only-begotten Son, according to a covenant made between them both, to be the Mediator between God and man; the Prophet, Priest, and King, the Head and Savior of his church, the Heir of all things and Judge of the world; unto whom he did from all eternity give a people to be his seed, and to be by him in time redeemed, called, justified, sanctified, and glorified.


다른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오웬의 경우에 있어서, 탬하심은 구속 언약과 동등한 위치에 있으며, 구속 언약은 이와같은 다른 교리적 궤적들을  수반하게된다.
In Owen's case, as well as for other Reformed orthodox theologians, election is coordinated with the pactum salutis, which entails these other doctrinal loci. 


오웬은, 구속과 칭의와 화해 모두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해 규정되며, 이들은 구속 언약에도 부합되겠지만, 역사 안에서 실제적으로 실행되기까지는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고있다.

Owen believes that the whole of redemption, justification, and reconciliation is predicated upon the work of Christ, which is agreed upon in the pactum, but is not effectual until its actual execution in history.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 그의 공로의 유익을 함께 공유하기까지는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취하게 된것은 아니다.

A person does not lay hold of Christ's accomplished work until they are united with him and share in the communion of his benefits through the work of the Spirit.

오웬은 영원칭의 교리를 거절하며, 구속 언약은 시간과 역사 안에서 실행되는 것과는 구별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Owen rejects the doctrine of eternal justification and believes that the pactum is something distinct from its execution in time and history. 


또한 사보이 선언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영원으로부터 모든 택하신 자들을 의롭게 하시기로 정하셨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때가 차매 그들의 죄를 위해서 돌아가시고, 칭의를 위해서 부활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성령께서 예정된 시간에 실제적으로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적용하시기까지 개인적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고있다.

Again, the Savoy Declaration states, "God did from all eternity decree to justify all the elect, and Christ did in the fullness of time die for their sins, and rise again for the justification: nevertheless, they are not justified personally, until the Holy Spirit does in due time actually apply Christ unto them." 


그보다, 구속 언약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백성의 언약적 대표이심을 확립해주고있으며, 이는 택함받은 자의 구속에 따라오게되는 모든 것에 대한 법정적 근거를 제시해주고있는 것이다.  

Rather, the pactum establishes Christ as the federal representative of his people as the second Adam, which establishes a forensic foundation for all that follows in the redemption of the elect. 


오웬은 기록하기를,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구속 언약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언약, 혹은 협약으로서, 이는 이제껏 말해왔고 좀더 언급되어질 그리스도의 공로와 충족에 관하여  중요한 근거가된다.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형벌을 받으셔야만 하셨던 것에 대한 경륜의 의의 근거들이 놓여있다."

Owen writes, "This, I say, was the covenant or compact between the Father and the Son, which is the great foundation of what has been said and shall farther be spoken of about the merit and satisfaction of Christ. Here lies the ground of the righteousness of the dispensation treated of, that Christ should undergo the punishment due to us."21



3.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구원의 서정
3. Union with Christ and the Ordo Salutis


오웬의 구속 언약의 교리를 파악해보는 것은 오웬이 구속에 있어서 법정적 요소를 얼마나 우선시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Grasping Owen's doctrine of the pactum is cardinal in understanding how he prioritizes the forensic element in redemption. 


그러나 우리가 이를 진행하려한다면, 그 이전에 우선 오웬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관하여 믿고있었던 것을 이해하여야만 한다.

But we must first understand what Owen believes about union with Christ before we can proceed. 


오웬은 대부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같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를 고수하고있다.

Owen, like most Reformed theologians, holds to the doctrine of union with Christ.


오웬은 구속의 모든 유익은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부터 흘러나온다고 믿고있다.

Owen believes that all of the benefits of redemption flow from the believer's union with Christ.


오웬은 기록하기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가 다른 모든 은혜들의 참여자가 되는 원천이 된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전달된 것이다. 그 결과들로서는 우리의 양자됨과 우리의 칭의와 우리의 성화와 우리의 열매맺음과 우리의 인내와 우리의 부활과 우리의 영광이있다."

Union with Christ, writes Owen, "is the cause of all other graces that we are made partakers of; they are all communicated to us by virtue of our union with Christ. Hence is our adoption, our justification, our sanctification, our fruitfulness, our perseverance, our resurrection, our glory."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속의 모든 요소들을 포함하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교리적 표제이다.

Union with Christ, therefore, is the all-encompassing doctrinal rubric that embraces all of the elements of redemption.

그러나 이것은 오웬에게 있어서 연합이 단순히 지식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But this is not to imply that for Owen union is merely an intellectual concept. 


그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성령에 의해서 효과가 나타나는 영적인 혼인의 결합으로서, 이것의 목적은 사랑이다: "특히 성도들에게 펼쳐지는 성부의 인격에는 사랑이 있으며, 여기에서 성부는 성도들과 영적인 교제를  의지적으로 행하신다."

Rather, union with Christ is a spiritual conjugal bond effected by the Holy Spirit, the goal of which was love: "There is love in the person of the Father peculiarly held out unto the saints, as wherein he will and does hold communion with them."


그러나 오웬의 연합 교리는 오웬으로 하여금 연합에 수반되는 (칭의, 성화, 양자됨, 기타등등의) 다른 요소들을 구분하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But Owen's doctrine of union does not preclude him from distinguishing the different elements comprehended by union (justification, sanctification, adoption, etc.).

오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구원의 서정을 함께 강조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보고있다.
Owen sees no problem with affirming both union with Christ and articulating an ordo salutis. 


오웬은 바울이 어디에도 결코 신자의 칭의에 선행되는 성화, 거듭남, 성령의 사역에 의한 혁신의 필요성에 관하여 말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Owen explains that Paul never speaks about the necessity of sanctification, regeneration, or renovation by the work of the Spirit antecedently to the believer's justification. 


오웬은 거듭남, 혁신, 그리고 칭의의 어떤 역할에 신자의 선행을 포함시키려는 것을  철저하게 배제한다.

Owen is careful to preclude including the believer's good works from any role in regeneration, renovation, and justification. 


오웬은 바울이, 칭의와 양자됨에 있어서, 칭의가 속성상 순서에 있어서 우선적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자신이 언급한 것들 사이에서 어떠한 우선적 순서나 연관성에 대해서 암시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됨으로서, 우리는 영생에 대한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어야만하는 것이다." 그가 언급한 모든 것들은 분리될 수 없는 것들이다. 의롭게됨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성신에 의해서 거듭나거나 새롭게되지 않으며, 성신에 의해서 새롭게됨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Owen declares that Paul does not intimate any order of precedency or connection between the things that he mentions, but only between justification and adoption, justification having the priority in order of nature: "That, being justified by his grace, we should be heirs according to the hope of eternal life." All the things he mentions are inseparable. No man is regenerate or renewed by the Holy Ghost, but withal he is justified;-no man is justified, but withal he is renewed by the Holy Ghost.

오웬이 칭의 교리를 조심스럽게 보호하는것은, 바울이 하나님께서 경건치 않은 이들을 의롭게 하셨다(롬 4:5)고 말하고있는데, 이는 신자의 칭의가 자신의 성화에 앞서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Owen carefully safeguards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ecause Paul states that God justifies the ungodly (Rom 4:5), which means that the believer's justification has to be antecedent to his sanctification. 


오웬은 설명하기를, "우리는 경건하지 않은 이를 의롭게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도록, 성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지만, 사도는 이를 대신하는 어떠한 것이나 이러한 목적으로 할 수 있는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는다."

Owen explains, "It is necessary that we should be sanctified, that we may be justified before God, who justifies the ungodly, the apostle says not in this place, nor any thing to that purpose."


싱클레어 퍼거슨은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렇다면 오웬에게 있어서, 구원의 서정에서의 순서는, 효과적인 부르심; 거듭남, 믿음; 회개; 칭의; 양자됨; 그리고 성화일 것이다"

Sinclair Ferguson summarizes, "For Owen, then, such order as there is in the ordo salutis would seem to be: Effectual Calling; Regeneration, Faith; Repentance; Justification; Adoption; and Sanctification."


퍼거슨은, 오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선택은 구원의 서정에서 완성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이러한 것 모두는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하나가 된다고 언급하고있다.

Ferguson goes on to comment that for Owen, divine election finds its outworking in the ordo salutis, which all coalesces in the believer's union with Christ.

4. 칭의와 성화
4. Justification and Sanctification


우리가 좀 더 의지적으로 오웬의 칭의 교리를 살펴보게되면, 그가 왜 칭의 교리를 우선시하는지에 대한 다른 이유들이 표면에 드러나게된다.
As we look more intently into Owen's doctrine of justification, other reasons surface as to why he gives priority to it. 


칭의에 대한 우선권은 특히 성화 교리와 비교, 대조할 때 분명해진다.

The priority of justification is especially evident when it is compared and contrasted with the doctrine of sanctification. 


"만약에 칭의에 관한 논술이 상실된다면, 기독교 교리 전체가 상실될 것이다"라고 말한 마틴 루터를 제쳐놓터라도, 오웬은 칭의 교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고있다.

Owen believes that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is of the greatest importance, even siding with Martin Luther (1483-1546), who writes, "Amisso articulo justificationis, simul amissa est tota doctrina Christiana [If the article of justification is lost, the whole of Christian doctrine is lost]." 


그러고나서 오웬은, "그리고 나는 그(루터)가 앞으로의 세대에서는 이러한 교리가 다시 불분명해질 것이라고 예언하였을 때, 그가 참된 선지자가 아니었기를 원했다"고 언급한다. 

Owen then comments, "And I wish he had not been a true prophet, when he foretold that in the following ages the doctrine hereof would be again obscured."


오웬이 칭의에 관한 논문(1677)을 쓸 때까지 이 교리를 성문화하여 정의한 고백 전집들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갈리칸 고백(1559), 벨기에 고백(1561), 39개 조항(1563), 아이리쉬 신앙고백서(1615), 혹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등이 있었다.

By the time Owen wrote his treatise on justification (1677), there was a confessional corpus of definitions that had codified the doctrine, whether in the Gallican Confession (1559), the Belgic Confession (1561), the Thirty-Nine Articles (1563), the Irish Articles (1615), or the Westminster Confession (1647).

오웬이 보았던 사보이 선언의 핵심적 요소 가운데 한 가지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전가에 관해 분명하게 언급하고있는 것이다:
One of the key elements of the Savoy Declaration that Owen saw to was explicitly referring to the imputation of the active and passive obedience of Christ:

하나님께서 효과적으로 부르신 이들을 그리스도께서는 아낌없이 의롭게하시는데, 이는 이들에게 의를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인격적으로 의롭다고 여기시고 받아주시는데; 이는 그들 안에 기록된 어떠한 것이나 그들이 행한 것에 의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 의한 것이며; 믿음 자체를 전가시키거나 신자의 행동이나, 혹은 자신들의 의를 위해 그들에게 주어진 어떠한 다른 복음적 순종에 의한 것이 아니며; 율법 전체에 대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그들 모두의 유일한 의를 위한 자신의 죽으심에 의한 수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에 의한 것이며, 그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하는데; 그들이 소유한 이러한 믿음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다.

Those whom God effectually calls, he also freely justifies, not by infusing righteousness into them, but by pardoning their sins, and by accounting and accepting their persons as righteous; not for anything wrought in them, or done by them, but for Christ's sake alone; nor by imputing faith itself, the act of believer, or any other evangelical obedience to them, as their righteousness; but by imputing Christ's active obedience to the whole law, and passive obedience in his death for their whole and sole righteousness, they receiving and resting on him and his righteousness by faith; which faith they have not of themselves, it is the gift of God (emphasis).

오웬은 칭의가 오직 믿음에 의한 것이며, 여기에는 죄에 대한 용서가 포함되며, 전가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 포함되며, 단번에 완전히 이루신 결정적 행하심이 포함된다는 것을 고수한다.
Owen holds that justification is by faith alone, includes the forgiveness of sins, includes the imputed active and passive obedience of Christ, and is a once-for-all definitive act.


이러한 기본적인 관점들을 넘어서 오웬의 신학에서는 성화와 비교하여 칭의의 우선성이 나타나고있다.

Beyond these basic points, how does the priority of justification emerge in comparison with sanctification in Owen's theology?

오웬은 완전한 의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하나님의 법정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검증을 견디어 낼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믿고있다.
Owen believes that nothing less than perfect righteousness can withstand the scrutiny of God's judgment before the divine bar. 


시편 130편 3절(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에 비추어 볼 때, 오웬은 (성화라고 불리우는) 신자의 내재적 의가 칭의를 위해서 요구되는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들을 충족시킬 수 없다고 확신한다: "만약에 어느 누구도 자신의 순종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가 없다고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이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죄악 때문이며; 만약에 이러한 경우에 우리의 유일한 간청이 하나님의 의가 된다면, 이는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만 그러한 것이다; 그렇기에 어떠한 신자에게도 자신이 의롭게 되는 근거로 내세울 수 있는 개인적이고 본성적 의는 없는 것이다."

Reflecting upon Ps 130:3 ("If thou, Lord, shouldest mark iniquities, O Lord, who shall stand?"), Owen is convinced that the believer's inherent righteousness (read sanctification) cannot withstand the demands of God's justice required for justification: "If no man can stand a trial before God upon his own obedience, so as to be justified before him, because of his own personal iniquities; and if our only plea in that case be the righteousness of God, the righteousness of God only, and not our own; then is there no personal, inherent righteousness in any believers whereon they may be justified."

오웬은 본성적 의가 불완전하며 신자의 칭의에 적합하지 않은 3가지 이유들을 제시한다.
Owen gives three reasons that inherent righteousness is imperfect and therefore unsuitable for a believer's justification. 


첫번째는, 신자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자신의 안에 거하는 습관적 죄에  대적하는 원리가 있는 것이다.

First, there is a contrary principle of habitual sin that abides within the believer so long as they dwell in this world. 


오웬은 갈라디아서 5장 17절(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에 근거하여,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어떠한 영적인 능력들도 완벽하게 새로워 질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있다.

Owen explains, based upon Gal 5:17, that none of the faculties of the soul are perfectly renewed as long as a person lives in the world. 


두번째로, 본성적 의는 죄가, 내적이건 외적이건 간에, 모든 행동과 의무에 달라붙어있기에 결함이 있는 것이다.

Second, inherent righteousness is defective because sin clings to every act and duty, whether internal or external. 


신자의 선행은 단지 "더러운 옷"일 뿐이다.(사 64:6)

The believer's good works are but "filthy rags" (Isa 64:6). 


세번째로, 본성적 의는 (원죄와 비교되는) 실제적 죄로 인해서 결함이 있다.

Third, inherent righteousness is lacking because of actual sins (in contrast to original sin).34


이러한 세가지 이유로 인해서 오웬은 성화보다도 칭의에 우선 순위를 둔다.
For these three reasons, Owen gives priority to justification over sanctification. 


그러므로 오웬은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 위에 구원의 근거를 세워간다:

Owen establishes the bedrock of salvation, therefore, upon the imputed righteousness of Christ:

만약에 우리에게 전가된 의가 완전한 의라고 한다면, 전가된 의는 완전하다고 평가되어지고 판단되어질 것이며; 완전한 의를 가지고있는 이들과 동일하게 우리도 이에 맞추어 취급되어질 것이며: 만약에 우리에게 전가된 의가 불완전하다거나, 혹은 불완전하게 전가되었다면, 전가받았을 때에도 이와같이 판단되어질 수밖에 없으며; 우리는 이와같은 불완전한 의를 가지고있는 이들과 같이 취급되어질 수밖에 없으며,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성적 의가 (성향이 다름으로 인해서 강력하게 주장되어지지않고 그것들이 동정을 받거나 무시되어지거나하는)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우리에게 전가되어진다면, 우리는 심판에서의 오류가 없이는 완전히 의롭게 받아들여질 수 없을 것이다.
If it be a perfect righteousness that is imputed unto us, so it is esteemed and judged to be; and accordingly are we to be dealt withal, even as those who have a perfect righteousness: and if that which is imputed as righteousness unto us be imperfect, or imperfectly so, then as such must it be judged when it is imputed; and we must be dealt withal as those which have such an imperfect righteousness, and no otherwise. 

And therefore, whereas our inherent righteousness is imperfect (they are to be pitied or despised, not to be contended withal, that are otherwise minded), if that be imputed unto us, we cannot be accepted on the account thereof as perfectly righteous without an error in judgment.


그러므로 오웬에게있어서 전가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는 신자의 칭의와 구원의 근거가 되는데, 이는 본성적 의가 아닌 전가가 영생에 대한 권리와 자격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So for Owen, the imputed perfect righteousness of Christ is the ground of the believer's justification and salvation because imputation, not inherent righteousness, gives right and title unto eternal life.


오웬의 입장은, 마지막 때에 신자의 최종적 칭의가 자신들의 행위에 근거한다는 백스터의 입장과 대조를 이루고있다.

Owen's position contrasts with Baxter, who argues that the believer's final justification at the consummation is based upon their good works.

칭의의 우선성은 오웬이 칭의와 최후의 심판 간의 관계를 설명할 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어떤 이들은 사도들이 우리의 처음 칭의로부터의 모든 행함을 배제하는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실은 두번째 칭의; 혹은 어떤 이들이 말하는 바와같이, 우리의 칭의의 연속성으로부터의 나오는 모든 행위를 배제하는 것이다."
The priority of justification prominently emerges when Owen explains the relationship between justification and the final judgment: "Some affirm that the apostle excludes all works from our first justification, but not from the second; or, as some speak, the continuation of our justification." 


비록 여기서 오웬은 이름을 거명하고있지는 않지만, 그는 로마카톨릭교회, 야곱 알미니우스(1560-1609), 그리고 백스터의 관점을 염두에 두고있는 것이다.

Though Owen does not name names here, he has the views of the Roman Catholic Church, Jacob Arminius (1560-1609), and Baxter in mind. 


로마카톨릭과 알미니우스와 백스터 모두 칭의가, 신자의 성화가 그들의 최종적 칭의에 어떠한 역할을하는 지속적인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Rome, Arminius, and Baxter all hold that justification is an ongoing process where the believer's sanctification plays a role in their final justification.


그밖에도 오웬은 로마카톨릭이 첫번째와 두번째의 이중적 칭의를 고수하고있다는 것을 인식하고있었다.
Elsewhere, Owen acknowledges that the Roman Catholic Church holds to a double justification, a first and second. 


처음 칭의에서는 세례시에 은혜 혹은 자선의 습성을 주입하며, 두번째 칭의에서는 처음 칭의의 부차적인 결과로서 처음에 주입된 습관적 은혜로부터 나오는 선행에 근거를 두고있다.

The first justification infuses a habit of grace or charity in baptism, and the second is consequent of the first and based upon the good works that proceed from this infused habitual grace. 


오웬은 소위 말하는 트렌트 공의회(1546)를 언급한다.

Owen mentions the Council of Trent (1546) by name.


오웬은 이와같은 사고체계를 거부하는데, 이는 성화를 칭의로 바꾸기 때문이다: "사도가 확고하게 단언한 것과같이, 죄의 무조건적인 용서와 의의 전가로 구성되어있는 복음주의적 칭의의 전체 속성과, 말씀만이 알려주는 것과 같이, 그로 인하여 믿는 죄인에 대하여 의롭다고하는 선언이, 궁극적으로 그(이중적 칭의)로 인하여 공격을 받는 것이다."

He objects to such a formulation because it turns sanctification into justification: "The whole nature of evangelical justification, consisting in the gratuitous pardon of sin and the imputation of righteousness, as the apostle expressly affirms, and the declaration of a believing sinner to be righteous thereon, as the word alone signifies, is utterly defeated by it."

오웬이 이중적 칭의를 거부한다면, 그는 칭의와 최후의 심판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고있는가?
If Owen rejects double justification, how does he explain the relationship of justification to the final judgment? 


오웬은 칭의의 속성과 본질과 그것의 표현이나 선언 이 둘 사이를 구분한다.

Owen distinguishes between the nature and essence of justification and the manifestation or declaration of it. 


전자는 현재적 삶 가운데 일어나며, 후자는 심판날에 일어난다.

The former occurs in this life, the latter on the day of judgment. 


사람이 이 생애 가운데 의롭게되어도, 이들은 자신들의 마음에서 그것을 알고는 있어도, 교회나 세상 앞에서 그것에 대한 외적인 공식적 증거는 있지는 않다.

In this life when a person is justified, they know of it in their heart, but there is no formal external evidence of it before the church and the world. 


최후의 심판 때에는 신자의 칭의가 교회와 세상 앞에서 공식적으로 선언되어지고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At the final judgment, the believer's justification will be publicly declared and made manifest before the church and world. 


그러나 오웬은 이를 규정하는데 조심스러워한다,"이는 두번째 칭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 야고보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과 같이, 이는 우리를 의롭게하는 믿음의 가시적 효과들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증거가되고 선언되며, 그의 영광으로,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하며, 우리 자신의 상급을 증가시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오직 하나의 유일한 칭의일 뿐이다."

But Owen is careful to stipulate, "Yet is it not a second justification: for it depends wholly on the visible effects of that faith whereby we are justified, as the apostle James instructs us; yet is it only one single justification before God, evidenced and declared, unto his glory, the benefit of others, and increase of our own reward."


오웬에게있어서는, 전가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만을 근거로하는 오직 하나의 칭의만 있을 뿐이다.

For Owen, there is only one justification grounded upon the imputed perfect righteousness of Christ. 


그의 마음에는 두번째 혹은 최종적 칭의를 소개하는 것은 (이들을 혼동함으로 인해서) 신자의 성화를 소개시키는 것이다; 신자의 선행은 하나님의 법정에서의 심판의 철저한 검증에 항상 부적합한 것이다.

To introduce a second or final justification, in his mind, introduces the believer's sanctification (hence confusing them); the believer's good works are always ill suited for the scrutiny of judgment before the divine bar.

5. 부분을 전체에 관련시키다.
5. Relating the Parts to the Whole


우리는 이와같이 오웬의 구원론을 관찰해보고서, 그가 구속 언약, 그리스도와의 연합, 구원의 서정, 성화에 앞선 칭의의 우선성등을 확고히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Thus far we have surveyed Owen's soteriology and recognize that he affirms the pactum salutis, union with Christ, the ordo salutis, and the priority of justification over sanctification. 


오웬은 어떻게 이러한 다른 요소들을 모두 자신의 구원론에 연관시키고있는가?

How does Owen relate all of these different elements within his soteriology?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나 칭의가 오웬의 신학에서 주된 부분으로 자리잡고있는가?

Does union with Christ or justification retain chief place in Owen's theology? 


아니면 오웬이 분류가 될 수 없는 양립이 불가능한 구원론을 보여주고있는 것인가?

Or has Owen presented an irreconcilable soteriology that cannot be sorted out?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사학자들은 개개의 부분을 전체에 연계시키기 위해서 신학자의 구원론의 함축과 해석에 의존해야만 한다.

In some cases, historians must rely upon implication and interpretation of a theologian's soteriology in order to relate the individual parts to the whole. 


그러나 이는 오웬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데 이는 그가 이러한 주제를 여러 곳에서 설명하고있기 때문이다.

But this is not the case with Owen because he addresses these issues in a number of places.

오웬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법을 도입하여 칭의의 원인을 매우 전통적인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Owen can explain the causes of justification in a very traditional manner by employing Aristotelian distinctions. 


오웬은 칭의의 최상의 동적인 원인은 하나님이시며; 공로적 원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중재 사역이며; 도구적 원인은 믿음이라고 설명한다.

Owen explains that the supreme moving cause of justification is God; the meritorious cause is Jesus Christ and his mediatorial work; and the instrumental cause is faith.


우리가 전가와 같은 칭의의 특정한 요소를 좀 더 깊이 파고들어가보면, 오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보고있었다;

When we dig a little deeper into the particular elements of justification such as imputation, Owen looks to union with Christ: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전가될 그리스도의 속죄와 의의 직접적인 기초가 세워질 것을 지정하셨다; 그리고 그 위에 우리 대신에 그가 행하신 것과 받으신 고통이 우리가 그 안에서 행하고 고통 받은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이러한 것들로 인해서 이것이 우리에게 인정되고 수여되며 전가되는 것이며; 혹은 우리가 그것에 관여되어지거나, 그것이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모두는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에 의해서 우리가 그와 하나의 신비한 인격으로 실제적으로 연합되어지는 것이다.
God has appointed that there shall be an immediate foundation of the imputation of the satisfaction and righteousness of Christ unto us; whereon we may be said to have done and suffered in him what he did and suffered in our stead, by that grant, donation, and imputation of it unto us; or that we may be interested in it, that it may be made ours: which is all we contend for. And this is our actual coalescency into one mystical person with him by faith.

확신하건데, 오웬은 (법정적인) 칭의를 (변화시키는) 성화와 혼동하지 않았으며, 그보다는 사람이 전가의 법정적 유익을 함께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만 한다고 말하고있다.
To be sure, Owen does not confuse justification (the forensic) with sanctification (the transformative), but rather states that a person must be in union with Christ to partake of the forensic benefit of imputation. 


오웬은 이러한 점을 분명하게 말하고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속죄에 실제적으로 관계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믿음에 의해서 우리가 그의 신비한 몸으로 실제적으로 유입됨으로 인한 것이다."

Owen clearly states this point: "Our actual interest in the satisfaction of Christ depends on our actual insertion into his mystical body by faith, according to the appointment of God."


그외에도 오웬은 단호하게 주장한다, "주장되어지는 전가의 근거는 연합이다."

Elsewhere, Owen bluntly asserts, "The foundation of the imputation asserted is union."

갑자기 의문이 생기게된다: 오웬은 어떻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법정적 유익의 근거로 여길 수 있으며 (이는 연합이, 좀 더 근본적인 영역으로서, 칭의와 성화 모두에 우선된다는 것을 내포하는 것이다), 또한 지속적으로 칭의가 성화보다 우선된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A question quickly arises: How can Owen consider union with Christ to be the foundation of the forensic benefits (which implies that union takes priority over both justification and sanctification as the more fundamental category) and yet still assert the priority of justification over sanctification? 


오웬은 자신을 딜레마의 뿔에 꽉 찔러넣은 것인가?

Has Owen inextricably impaled himself upon the horns of a dilemma? 


오웬은 혼동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전가를 인류학적으로 강조하거나 혹은 구속을 적용하는데 있어서의 유익한 점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Owen is not confused, but rather addresses imputation anthropologically or from the vantage point of the application of redemption. 


오웬은 연합과 전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많은 근거들과 원인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우리가 이러한 전가의 근거로서 즉각적으로 고려해야할 것은, 그것으로 인해서 주이신 그리스도와 신자들이 하나의 신비한 인격으로 실제적으로 연합된다는 것이다."

Owen explains that concerning union and imputation, "Hereof there are many grounds and causes . . . but that which we have immediate respect unto, as the foundation of this imputation, is that whereby the Lord Christ and believers do actually coalesce into one mystical person."

여기에서, 오웬이 백스터에 대한 관점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이, 17세기의 칭의 논쟁에 대한 광범위한 내용들은 이를 해석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을 주고있다.
Here, the broader context of the seventeenth-century justification debates provides some interpretive assistance, as Owen likely has the views of Baxter in mind. 


백스터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내주하심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제외시키는 방식으로 재정의한다.

Baxter redefines union with Christ in such a manner as to exclude the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 as well as his indwelling through the Holy Spirit. 


백스터의 관점은 신비적 연합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이다.

Baxter's view is a political rather than mystical union.


(오웬은 비록 이름으로 그를 거론하지는 않지만) 백스터에 대항하여, 오웬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In opposition to Baxter (though Owen does not mention him by name), Owen writes,

그리스도와 신자들간에 이와같은 연합이 있다는 것은, 모든 세대에서 보편적 교회의 믿음으로 자리잡아왔다. 오늘날 그것을 부정하거나 의문을 제시하는 이들은, 그들이 말하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혹은 그들의 마음이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부정하는 그들의 교리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이러한 연합의 가정 위에는, 전가가 이성에 호소해야만 한다는 것을  이성이 받아들일 것이며; 여기에는 최소한 사람 사이에서 어떤 자연적이거나 정치적인 것들에서는 예로 들 수가 없는 이와같은 특별한 근거가 있어야하는 것이다.

That there is such a union between Christ and believers is the faith of the catholic church, and has been so in all ages. Those who seem in our days to deny it, or question it, either know not what they say, or their minds are influenced by their doctrine who deny the divine persons of the Son and of the Spirit. Upon supposition of this union, reason will grant the imputation pleaded for to be reasonable; at least, that there is such a peculiar ground for it as is not to be exemplified in any things natural or political among men.

오웬은 자신이 전가가 연합에 근거한 것이라고 추구하는 것이, 개혁주의와 구분되는 어떤 것을 주장하는 것이라고는 믿지 않으며, 그보다는 모든 세대에 보편적인 교회가 확신하였던 어떤 것이라고 믿는다.
Owen does not believe he is asserting anything distinctively Reformed by promoting imputation as founded in union, but rather something that the universal church has affirmed in every age. 


그렇다고 이를 탐구하는 것을 멈춰서는 안되며, 오웬은 연합이 칭의와 성화에 좀 더 근원적인 것이라고 믿고있다는 결론을 내려야한다.

But one should not therefore stop the investigation and conclude that Owen believes that union is more foundational to justification and sanctification. 


오웬이 말하는 전가의 "많은 근거들과 원인들"은 무엇인가?

What of Owen's statement about the "many grounds and causes" of imputation?


오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를 인류학적으로 고려되는 구원의 적용, 혹은 구속의 개념에서 엄격하게 정의하는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Owen is not content to define union with Christ and justification strictly in terms of the applicatio salutis or redemption considered anthropologically. 


구원의 적용을 넘어서 커다란 그림을 뒤돌아 볼 때, 오웬은 전가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신자에게 적용되기에 앞서서 먼저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When one steps back to the bigger picture beyond the application of redemption, Owen explains how imputation occurs prior to its application to the believer through union with Christ:

죄가 그리스도께 전가된 것은 그리스도와 죄인 간의 어떠한 실제적 연합보다도 앞서 일어난 일이었기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뜻 가운데서 자신이 목적하신바대로 그들의 죄를 취하셨다; 그러나 자신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된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께 연합된 속성의 순서에 따른 결과적인 것으로서, 이로 인해서 특별한 방식으로 그들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죄인으로서 평가받아야 할 이론적 근거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의롭다고 여겨져야만 할 것이다.
The imputation of sin unto Christ was antecedent unto any real union between him and sinners, whereon he took their sin on him as he would, and for what ends he would; but the imputation of his righteousness unto believers is consequential in order of nature unto their union with him, whereby it becomes theirs in a peculiar manner: so as that there is not a parity of reason that he should be esteemed a sinner, as that they should be accounted righteous.

오웬은 전가가 연합에 앞서면서도 그것의 결과라고 기록하고있는데, 오웬의 이러한 이중적인 언급에 잘못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Owen is not guilty of doublespeak when he writes that imputation is both antecedent to union and consequent to it. 


그보다 우리는 전체 맥락에서의 처음 출발 지점과 구속 언약에 대한 오웬의 교리로 되돌아 와야할 것이다.

Rather, we come full circle to our starting point and Owen's doctrine of the pactum salutis.

오웬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기원에 관하여 논할 때, 그는 구속 언약으로 되돌아와 있다: "이러한 연합의 처음 기원과 원인, 그리고 그것의 모든 다른 원인들은, 타락한 인류의 회복과 구원에 관한 성부와 성자 사이에 있었던 영원한 조약에 근거를 두고있다."
When Owen discusses the origins of union with Christ, he reaches back to the pactum salutis: "The first spring or cause of this union , and of all the other causes of it, lie in that eternal compact that was between the Father and the Son concerning the recovery and salvation of fallen mankind."


성육신과 인성을 취하심은 구속 언약 안에서 계획되어있었다.

The incarnation, the assumption of human nature, was designed in the pactum salutis. 


구속 언약이라는 협약 안에 담겨있는 것은, 성부께서 성자를 은혜 가운데 사람이시며 하나님으로 성육신하게 하신 것과, (1) 하나님 자신의 인격과 사역에 특화된 것과 (2) 하나님께서 교회와 소통하시려는 것, 이 두 가지 목적으로 영화롭게 하신 것이다.

Within the terms of the pactum, the Father predestined the Son as the incarnate God-man unto grace and glory unto two ends: (1) what was specific to his own person and work and (2) what he was to communicate to the church. 


이와같이 성부는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지명하셨으며, 구속 언약이라는 협약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그리스도께 맡기심으로서, 죄와 율법의 저주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셨다.

As such, the Father designated Christ as head of the church and committed the elect of God, according to the terms of the pactum, unto Christ to be delivered from sin, the curse of the law, and death.


오웬은,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보증자"가 되셨다는 개념의 구속 언약의 구조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요약하고있다.

Owen summarizes the work of Christ within the architecture of the pactum under the idea that Christ was made "the surety of the new covenant." 


오웬은 히브리서 7장 22절을 인용하며, "'예수께서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께 전가되었다는 모든 근원적인 고려 사항들 안에서, 보증자로서의 속성에 관한 실수를 방지하거나 제거하고, 그리고  그가 보증자이셨다고 말하는 언약에 부합되게하려는 목적으로 이것만을 주장하려고한다." 고 언급하고있다.

Quoting and commenting on Heb 7:22, Owen writes, "'Jesus was made a surety of a better testament.' This alone, of all the fundamental considerations of the imputation of our sins unto Christ, I shall insist upon, on purpose to obviate or remove mistakes about the nature of his suretiship, and the respect of it unto the covenant whereof he was the surety."


오웬은 언약의 보증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의 속성에 관한 세부 사항들을 상당히 자세히 해석하며 논의를 이어간다.

Owen then goes on to discuss in great exegetical detail the nature of Christ's role as surety of the covenant. 


오웬은, 비록 보증자라는 용어가 신약에서는 오직 이 한군데에서만 나타나지만, 이 한 번의 나타남은 스무번 만큼이나 권위가 있다고 말한다.

Owen argues that even though the term ἔγγυος (surety) appears in only this one place in the NT, one occurrence is just as authoritative as twenty. 


이 용어를 정의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오웬은 70인 역과 히브리어 구약을 파고든다.

To define and understand the term, Owen digs into the Septuagint and Hebrew OT. 


그는 잠언 6장 1절 "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에 나타나는 용어를 주목한다.

He notes that the term occurs in Prov 6:1: "My son, if thou be surety for thy friend, if thou hast stricken thy hand with a stranger."


오웬에 따르면, 히브리어 구약의 용어ערב(아라브 혼합하다, 섞다)는 70인역에 ἐγγυάω로 번역되었다는 것이다.

According to Owen, the Hebrew OT term ערב is translated by the Septuagint as ἐγγυάω. 


오웬은 이러한 용어가 다른 곳에도 나타난다며 잠언 17장 18절과 20장 16절을 인용한다.

Owen cites Prov 17:18 and 20:16 as other occurrences of these lexemes. 


그러고나서 그는 "아라브가 원래는 어떤 사물이나 인격들이 섞이거나 혼합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로 인해서 보증자와 자신이 보증이 되려는 이들 사이에서 일어난 결합과 섞임으로 인해서, 이러한 보증자의 목적하신 바대로 그들이 하나의 인격으로 섞이게되는데, 이것이 보증자, 혹은 보증을 서주는 것으로 사용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He then explains, "ערב originally signifies to mingle, or a mixture of any things or persons; and thence, from the conjunction and mixture that is between a surety and him for whom he is a surety, whereby they coalesce into one person, as unto the ends of that suretiship, it is used for a surety, or to give surety."


오웬은 이러한 관점을,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라는 창세기 43장 9절의 벤야민에 관하여 유다가 아버지 야곱에게 한 말에서 예를 든다

Owen illustrates this point from Gen 43:9, Judah's words to his father Jacob concerning Benjamin: "I will be surety for him [אנכי אערבנו]; of my hand shalt thou require him." 


오웬은 설명하기를, "그의 안전과 보존에 있어서, 그를 위해서 보증자로서의 책임을 맡아야하기에, 그는 그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답이 되도록 자신을 종속시킨다;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Owen explains, "In undertaking to be surety for him, as unto his safety and preservation, he engages himself to answer for all that should befall him; for so he adds, 'If I bring him not unto thee, and set him before thee, let me be guilty for ever.'"

이러한 사서편집상의, 그리고 해석학적인 세심한 모든 작업을 통해서 오웬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보증자는 다른 것이나 다른 이들의 책임을 맡은 자이기에, 이들로 인한 것이나 그들로부터의 것에 대하여 공평하게 법적으로 대답하여야한다."
All of this lexicographical and exegetical spadework leads Owen to conclude, "A surety is an undertaker for another, or others, who thereon is justly and legally to answer what is due to them, or from them."


그리스도의 보증이 그 속성에 있어서 법정적이라는 것과, 택자의 죄가 그리스도께 전가되며 그리스도의 의가 택자에게 전가되는 것이 구속언약의 조항에 포함된다는 것을 전제로, 오웬은 구속을 법정적인것으로 귀착시킨다.

Given that Christ's suretiship is legal in nature and involves the imputation of the sins of the elect to Christ and the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 to the elect as a stipulation of the pactum salutis, Owen rests redemption upon the forensic. 


그러므로 오웬에게있어서 구속의 법적인 요소들은 변화시키는데 있어서 궁극적으로 근원적이다.

For Owen, therefore, the legal elements of redemption are ultimately foundational for the transformative. 


혹은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면: 신자의 구속의 가장 긴밀한 원천은 칭의와 성화라는 두 가지 유익으로 나타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Or stated another way: the proximate source of the believer's redemption is union with Christ with its dual benefits of justification and sanctification. 


그러나 칭의는 성화에 우선하는데 이는 그 핵심에 완전하고 완성된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가 있기 때문이며, 이것의 근원적인 근거는 성부와 성자 사이에 맺어진 구속 언약 안에서 택자에 언약적 보증이 되시는 것에 대한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수용과 약속에 있다.

Justification has priority, however, over sanctification because at its core is the perfect and complete imputed righteousness of Christ, the ultimate cause of which is Christ's voluntary acceptance and promise to be covenant surety for the elect in the pactum between the Father and the Son.


6. 결론
6. Conclusion


오웬은 반율법주의와 신율법주의의 위험한 축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방향을 잡아간다.
Owen cuts a careful path between the dangerous poles of antinomianism and neonomianism. 


그는 매우 조심스럽게 반율법주의의 위험스러운 전진을 피해가며,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것을 논하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자가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으로 인해서 선행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해주는 것이다.

With great precision he skirts the dangerous Scylla of antinomianism by arguing that the believer is in union with Christ, which ensures that the believer will yield the fruit of good works because of Christ's indwelling presence. 


동시에 오웬은 신자의 칭의, 자격, 그리고 영생에 대한 권한이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근거하고있다고 말함으로서, 신율법주의의 위험한 퇴보에 대해서도 성공적으로 피해가고있다.

At the same time, Owen also successfully navigates by the treacherous Charybdis of neonomianism because he argues that the believer's justification, title, and right to eternal life is grounded upon the imputed righteousness of Christ.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는 신자가 자신의 순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존재하기 훨씬 전인 과거의 영원 가운데서 성부와 성자 사이에 상호 협약하에 동의되었던 것을 받는 것이다.

The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 is not something that the believer earns through their obedience but is something he received-something that has been agreed upon in a mutual covenant between the Father and the Son in eternity past, long before the believer ever existed. 


그러나 오웬에게 있어서 영원 전에서의 이 언약은 단순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구원의 서정과 같은 부차적인 것은 물론 다수의 다른 교리 영역들과 기독론, 성령론, 구원론을 포함하는 것이다.

For Owen, though, this covenant in eternity past is not merely a bald choice by God but rather involves a number of different doctrinal loci, Christology, pneumatology, soteriology, as well as their subsets, such as union with Christ and the ordo salutis. 


구속 언약은 오웬이 어떻게 법정적인 면에 궁극적인 우선권을 부여하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주된 우선권을 부여하였는지에 대한 답을 제공해준다.

The doctrine of the pactum salutis provides the answer as to how Owen gives ultimate priority to the forensic and proximate priority to union with Christ. 


오웬에게있어서, 구속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서 찾을 수 있다.

For Owen, the ground of redemption is found in the imputed righteousness of Christ.

오웬의 관점은, 비록 현대인들의 취향에는 전혀 맞지 않는 코드라고 할지라도, 17세기 초기 근대 개혁주의 상황에서는 커다란 대세였으면서도 평범한 것이었다.

Owen's views, though perhaps striking an odd chord to contemporary ears, were quite mainstream and mundane within the early modern Reformed context of the seventeenth-century. 


그리고 어떤 역사학자들의 주장들과는 반대로, 오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구원의 서정 교리- 이 둘이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평판에도 불구하고- 모두를 전혀 의심하지 않고 고수하고있다.

And contrary to the claims of some historians, Owen holds the doctrines of union with Christ and the ordo salutis together without a raised eyebrow despite the purported incompatibility between the two.

오웬의 오래된 방식들은 다양한 신학 분야 사이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에 관한 현재적 논의들에 관하여 지식을 제공할 수 있다.
Owen's "old" ways can inform present discussions about union with Christ and justification among the various theological disciplines. 


리처드 멀러는, 집단적으로, 조직 신학자들이 역사적 문헌들을 읽지를 않는다는 것을 주지시킨다.

Richard Muller has noted that, as a group, systematic theologians do not read historical documents. 


신학자들은 과거를 무시하거나 아니면 그들 자신들만의 지식체계를 증진시키는 의견들에 대한 과거의 고찰들만을 찾는 것으로서 자신들의 교리들을 구축해간다.

Theologians construct their doctrines in ignorance of the past or only mine the past looking for opinions that will promote their own formulations. 


성경신학자들과, 특별히 신약학회 안에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The same can be said of biblical scholars and especially those within the NT guild. 


신약학자들에 있어서, 해석의 역사는 종종 앞선 1800년간의 교회 역사에서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19세기 초기의 어디에선가 부터 시작을 하곤한다. 

For NT scholars, the history of interpretation usually starts somewhere in the early nineteenth-century with little to no attention given to the previous eighteen hundred years of church history. 


톰 라이트는 자신의 모든 주장이 칭의에 대한 혁명적인 이해를 제공하고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말하는 것은 리처드 백스터와 너무나도 유사한 것이다.

For all of his claims to offer a revolutionary understanding of justification, N. T. Wright sounds all too much like Richard Baxter.

성경에 대한 자기 자신의 독해를 제공하기에 앞서서, 자신의 영역의 특수성에 상관없이, 학자에게 의지하는 것 이상으로, 어떤 특정한 주제에 대하여 교회가 이제껏 말해왔던 것을 탐구하여야한다.

It seems more than incumbent upon scholars, regardless of one's field of specialty, to investigate what the church has said on any one subject before offering one's own reading and interpretation of Scripture. 


과연 과거의 신학자들에게서 배울만한 것들이 있을까요?

Might there be something to learn from theologians of the past? 


지금과같은 경우에, 오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의 교리에 있어서 고려하고 평가해봐야할 풍부한 신학적 자료들을 제공해주고있다.

In this one case, Owen presents a wealth of theological grist to consider and evaluate when it comes to the doctrines of union with Christ and justification. 


오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에 관한 좀 더 만족스러운 설명을 해주고있다.

Owen offers a more satisfying account of union with Christ and justification. 


칭의를 오직 바울의 본문으로만 설명하려는 일부 신약학자들과는 달리, 오웬의 교리는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영원전부터 극치까지 뻗혀 있으며, 신학적 궤적, 즉 신학적 적정성, 기독론, 성령론, 인류학등을 포괄하며, 언약 교리와도 연계되어있다.

Unlike some NT scholars who explain justification only from Pauline texts, Owen's doctrine stretches from Genesis to Revelation, from eternity past to the consummation; integrates theological loci-theology proper, Christology, pneumatology, anthropology; and is coordinated with the doctrine of the covenant.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고자한다면, 우리 인간들을 통하여 과거에 휘몰아쳤던 이전 세대들의 분쟁을 필요로한다는 루이스의 말은 옳은 것이다.
Lewis is correct: we need the breeze of ages past blowing through our minds as we seek to understand Scripture. 


우리는 우리의 신학을 개인주의라는 모루 위에 구축하지는 않는다.

We do not forge our theology upon the anvil of individualism.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교회에 주셨기에, 모든 해석과 신학은 교회와의 대화를 통해서 실행되어야만 한다.

God has given the Scriptures to the church, and hence all exegesis and theology should be performed in dialogue with the church. 


이것이 바로 오웬이 자신의 연합과 칭의 교리를 구축하는 방식이다.

That is how Owen forged his doctrines of union and justification.

출처 http://themelios.thegospelcoalition.org/article/john-owen-on-union-with-christ-and-justification


posted by Wonho Kim
:
기독교세계관 2019. 9. 20. 22:12

새관점의 윤리 사상과 인간의 죄성

서론

현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에게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한 가지는 기독교에 윤리가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윤리가 실종된 기독교는 하나의 집단으로 변질되면서 사회의 걱정거리가 되고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많은 단체와 개인들이 기독교 윤리와 교회 개혁을 외치지만 이들은 또한 신학이 실종된 또 다른 부작용을 낳기도한다.

이번 글에서는 최근 교회 개혁을 외치는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새관점의 윤리 사상을 교회 개혁의 수단으로 사용하고있음을 보면서 이의 심각성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한다.

그 가운데 청어람 아카데미의 양희송 대표가 전하는 기독교 윤리 사상의 문제점을 중심으로 논하고자한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기독교 세계관과 기독교 윤리, 교회 개혁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남달리 열심을 내었었다.

양희송대표는 "세계관 공부 과정 자체는 실천적 방식으로 습득되어야한다"는 유진 피터슨의 영적 독서 방법인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소개하기도 하면서 실천을 강조하기도하였다.

그는 교회 현실의 문제에 대한 실천적 해결사를 자처하며 현실적 문제를 안고 고민하는 아카데미를 이끌어 왔던 것이었다.

그는 근원적으로,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기독교 윤리, 그리고 이에 비추어 인간의 죄성과 개혁주의의 전가교리와 칭의,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성화등에 관하여 종합적으로 논하면서 과연 톰 라이트가 전하였던 새관점과 윤리 사상에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종합적으로 연계시켜서 생각해보고자한다.

기독교세계관 운동의 핵심에는 창세기 1장 28절을 문화명령이라고 규정하고서 이를 그리스도인의 문화활동의 근거로 삼고있다.

하지만 창세기 1장 28절에서 주어진 명령, 즉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며, 실패한 아담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사역을 통하여 이루신 것이다.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이 명령은 문화명령이 아니다.

리처드 미들턴은 양대표의 기독교 세계관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있으며, 미들턴은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을 문화 명령이라고 규정하고, 그리스도인은 마태복음 28장 19-20절의 대위임령보다도 문화 명령을 지키는 것이 더 차원 높은 창조 사역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문화 명령은 이 땅의 문화를 변혁시켜 이 땅에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에 보존될 문화를 만들어가는 일로서,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구속적 문화변혁운동을 말한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조건이 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더욱 교회답게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자녀 개념도 없다.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이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것은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이 이 땅에서 실행되는 것이다.

참된 기독교 윤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자로서의 행실이 되어야한다.

이를 위해서 제대로된 윤리는 어떻게 세워져야하며, 기독교인들은 윤리의 문제를 어떻게 안고 씨름해야하는가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 윤리는 어떠한 형태로든 정립되어야만 할 것이다.

기독교 윤리는 이론을 넘어서 실천될 수 있는 윤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 윤리는 한 개인의 특수성을 넘어서 모든 성도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개혁주의에서 벗어난 잘못된 교리를 근거로 교회 개혁을 위한 기독교 윤리가 적용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동안 양대표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근거로한 교회 개혁과 기독교 세계관을 전파하는데 열심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그동안 기독교 영역에 트로이 목마와 같이 들어온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 의한 기독교 윤리와 하나님 나라 개념이 어떻게 왜곡되었으며, 현대 신학에서 외면하는 전가교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성화로서의 기독교 윤리에 대하여 논해보고자한다.

성경에 대한 해석과 기독교 세계관

세계관은 이 세계를 바라보는 렌즈와도 같다.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을 통하여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이 되려면 일차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이 올바라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이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게만 제한적으로 깨달아 알 수 있게 하셨다.

구원받는 자는 창세 전에 성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게만 국한된다.

성경 말씀이 복음일 수 있는 것은 구원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택함받지 않은 자에 의해서 해석되어지는 성경은 왜곡되게 해석되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경은 보편적이지 않은 특수성이 있기에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 알게하신다.

성경의 특수성은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의 표현이며, 구속 언약 안에서 중재자되시며 보증자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이다.

성경에 대한 일차적 해석은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서부터 시작되어야한다.

땅 속에 씨앗이 있기에 땅위로 싹이나고 잎이나고 열매를 맺게되는 것이다.

구속 언약은 땅 속의 씨앗과 같다.

현대 신학의 대부분이 구속 언약에 대한 언급과 표현이 없기에, 그리스도를 구속 언약 안에서 택하신 자의 보증자되시고 중재자되심을 무시한다.

성경에 대한 이성적이고 실증주의적인 해석으로는 창세 전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 대한 접근이 불가능하게 한다.

창세기를 고대 근동이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해석하며 제2성전 유대교를 역사적 예수라는 관점에서 탐구해보기도 하지만, 이들의 해석과 탐구에서는 창세 전 구속 언약과 중재자이시며 보증자이신 그리스도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중재자이심과 보증자이심은 인간의 상태가 전적으로 부패한 무능한 상태라는 사실을 내포한다.

전적으로 무능한 이들에게는 은혜만이 필요하다.

성경을 보고 해석하는 능력도 은혜가 있어야한다.

인간에게 보편적이고 이성적인 논리로 성경을 읽고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구원의 길은 인간의 능력에 달려 있을 것이다.

성경을 읽고 깨닫기 위해서는 은혜가 필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은 보편적인 세계관과 구별이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근거로하는 세계관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실증주의와 대립되기 보다는 우선되어야한다.

논리적 실증주의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범주 안에 있어야한다.

논리적 실증주의가 하나님의 은혜보다 우선이 될 때 성경은 왜곡되게 해석되어 질 수밖에 없다.

진리에 대한 명제적 접근은 하나님의 은혜를 근거로 성경을 해석하는 접근법이다.

프란시스 쉐퍼의 기독교 세계관이 진리에 대한 명제적 접근 방식을 취하였다면,

리처드 미들턴이나 브라인언 왈쉬, 레슬리 뉴비긴, 톰 라이트와 같은 이들은 내러티브적 접근방식을 취한다.

내러티브적 접근방식은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방식이다.

기독교 세계관을 대표하는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 또한 마찬가지로 톰 라이트에게 도움을 받아 내러티브적 접근 방식을 취하고있다.

명제적 접근 방식은 완성된 진리를 근거로하는 반면에 네러티브적 접근 방식은 완성을 위한 미완성의 과정일 뿐이다.

미완성된 내러티브, 즉 이야기 신학은 절대 진리를 함유하고있지 않다.

내러티브적 세계관은 스스로의 주관적 판단에 근거한 문제 해결의 능력이 요구되며, 복잡성을 감내하며, 스스로의 주관적 판단을 근거로 외부 세계와 소통해야한다.

또한 자신에 대한 성찰은 하나님의 절대 진리보다는 주관적인 내러티브적 세계관이 근거가 되는 것이다.

내러티브적 세계관은 성경적 세계관이라기보다는 문학적 사고방식이다.

미완성을 전제로한 내러티브적 세계관은 완성을 필요로한다.

톰 라이트는 이에 대해서 "5막극의 마지막 무대인 5막을 사는 우리들은 성경에 있는대로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성경에서 말한 바에 근거해서 적절히 즉흥 연주를 해야하는 것이다"(SAG,127)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의 관점대로라면 기독교인은 미완성된 성경의 완성에 참여하는 인물이 되어야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데이비드 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데이비드 웰스, 용기있는 기독교, 135, 136)

"라이트는 하나님의 권위를 성경의 권위에서 파격적으로 떼어 놓은다…..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권위는 성경의 권위와 별개의 것이라고 한다….가령, 잃었던 셰익스피어의 희극을 오늘 발견했다고하자. 그 가운데 4막은 보존되었으나, 본래 5막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최대한 충실하게 다섯째 막을 만들어서 그 희극을 완성시키지 않겠는가? 이것이 오늘 우리 교회가 처한 상황이라고 한다."

톰 라이트에 대한 웰스의 관점은 오늘날의 교회가 미완성된 진리를 완성하는 이야기의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완성된 내러티브에서는 칭의가 완성될 수 없기에 내러티브적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칭의의 완성을 위해서 무엇인가 행할 수밖에 없다.

내러티브적 기독교 세계관은 남아있는 최종적 구원을 완성하기 위한 윤리적 행위와 분리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최종적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기준을 충족시킬 수가 있겠는가?

성경은 어디에도 최종적 구원을 위한 윤리적 행위의 기준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전혀 흠이 없으시기에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존재는 거룩하신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완전하신 순종은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셨기에, 오직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받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러티브적 접근 방식

성경에 대한 내러티브적 접근 방식은 성경을 교훈 이상으로 볼 수가 없다.

양대표는 "예수의 행적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세계관 투쟁'은 그가 내러티브를 어떻게 활용했는지에서 잘 드러난다. 예수는 내러티브를 활성화(activate)했고, 전환(transform) 시켰으며, 창출(create) 했다."고 말한다.

그는 "예수는 이스라엘의 죽은 내러티브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낱낱이 살려 냈다."고 말한다.

그가 보는 예수는 성경의 이야기를 활성화시켜서 새로운 이야기를 창출하신 분에 불과하다.

그는 오늘날 예수의 제자들에게도 이 원리를 적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이 속한 신앙 전통의 이야기를 활성화하고, 고대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새롭게 전환하며, 자기 삶에서 직접 이야기를 창출함으로써 우리는 강고한 이야기 공동체를 계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의 삶은 내러티브의 장 위에서 구성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속한 이야기를 제대로 갖고 있지 못하면서 신실한 그리스도인 혹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양대표가 전하고자하는 제자들의 세계관은 "자신의 삶의 내러티브를 어디서 구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져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양대표의 윤리적 강론이다.

그는 교회의 비극이 성경의 내러티브를 활성화시키지 못하고 죽은 말씀으로 여겼기 때문이 일어난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주어진 내러티브를 충실히 수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예수의 제자들에게는 삶이 획일적이지도 않으며, 개성을 발산하며, 자유를 향유하면서 내러티스의 창의적 재현과 변형과 복귀로 여겨져야한다는 것이다.

양대표의 말대로라면 예수의 제자는 어느 순간 자신이 성경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주인공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말씀과 더불어 영혼이 떠나가신 것은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의 완성을 선포하신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이 땅에서 실행하시기 위해서 성육신하셨고 십자가에서 대속 사역을 행하셨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완성되지 않은 내러티브는 다양성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다원주의와 포괄주의를 수용하면서 동시에 절대를 외칠 수는 없다.

산을 오르는 다양한 길 뿐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산도 수용해야만 한다.

명제적 진리와는 달리 내러티브 방식은 산을 오르는 방식을 제공해줄 뿐이지 잘못된 길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내러티브적 성경 해석은 절대적 행동 방식의 기준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각자가 알아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나아가야만 한다.

역사적 예수 연구와 새관점

톰 라이트의 내러티브적 해석은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1세기 제2성경 유대교에서의 역사적 자료들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돌출해낸 것이다.

물론 성경에 대한 해석은 성경이 기록된 그 시대의 배경에서 해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이 기록된 당시 시대의 시대적 상황을 연구하고 그 당시의 역사적 자료들을 취합하고 분석하여야 할 것이다.

역사적 자료에 대한 분석은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주고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과거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기록된 역사적 자료들을 현재적으로 연구하고 해석하는데에는 한계가 있다.

발견되어진 역사적 자료가 당시 시대적 상황들을 보편적이고 객관적으로 증거 해주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부분에 대한 해석 또한 역사가의 주관적 해석이 가미될 수밖에 없다.

일부의 자료들을 보편화시키기 위해서는 충분히 많은 자료들이 종합적으로 취합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자료에는 객관성이 결여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현대의 모든 언론의 자료들을 종합한다고 하더라도 가짜 뉴스를 추려내고 객관적인 사실을 도출하는 것이 쉽지가 않듯이 과거의 역사적 기록물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러한 자료들을 가지고 성경을 다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객관적인 해석이 될 것이다.

역사적 자료는 성경을 해석하는데 참고가 될 수는 있어도 이를 근거로 성경 전체의 전통적 해석들을 바꾸는 것은 무모한 시도일 뿐이다.

하지만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은 이러한 방법으로 도출한 논리이다.

톰 라이트는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하여 1세기의 제2성전 유대교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율법을 지킨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 율법을 지킨 종교, 즉 제2성전 유대교는 율법주의가 아닌 언약적 신율주의의 종교였다고 주장한다.

새관점에서는 마찬가지로 창세기를 고대 근동의 역사적 배경에서 연구하면서 내러티브적 이야기를 도출해낸다.

새관점을 수용하는 양대표는, 창세기를 고대 근동 세계를 배경으로 읽게 된다면 현재 대다수가 생각하고있는 지배적 세계관과는 매우 다른 그림이 그려질 것이라고 말하면서, 창세기는 창조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창조 기사는 어느 누구도 경험적으로 기록할 수 없으며, 모세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성령의 감동으로 그려내고있는 것이다.

창세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기록될 수가 없는 기사이며, 창세기 1-3장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예비하기 위한 기사인 것이다.

창세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수 없었던 모세가 인간적 생각으로 기록할 수가 없는 창조기사이다.

이러한 창조 기사를 고대 근동 세계의 배경으로 재해석한다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창세기를 고대 근동의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 해석하듯이 신약의 바울 서신들을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방법론으로 재해석하고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은 제2성전 유대교, 즉 1세기의 팔레스타인 유대교에 대한 연구를 통해 바울에 대한 관점을 새롭게 정립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통해서 톰 라이트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기독교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종교개혁 이후 300년 가까이 이어졌던 전쟁들은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예배드리는 그리스도가 2천년 전 유대-팔레스타인 땅에서 실존했던 인물 예수와 얼마나 일치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시한다.

초대 교회에서 매우 일찍부터 그리스도를 예배의 대상으로 삼게 되면서 인간 예수의 면모가 지워지거나 왜곡될 여지는 없었을지에 대한 의문도 제시한다.

이는 이제껏 성경과 역사를 꼼꼼하게 연구해 왔던 여러 학자들로부터 제기되었던 질문이라는 것이다.

새관점의 근거가되는 역사적 예수 탐구는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그리스도보다는 인간 예수에 대하여 탐구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의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하여 제2성전 유대교가 언약적 신율주의였다는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슈바이처와 불트만 학파의 케제만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불트만학파였던 케제만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나치의 등장과 유태인 학살을 보면서, 예수가 누구였는지 절실히 묻지 않았기에 예수의 이름으로 나치가 우상화될 수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역사적 예수 탐구를 통하여 올바른 예수를 알았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케제만의 주장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근거를 예수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단정하고있는 것이다.

이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홀로코스트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새관점은 홀로코스트로 인하여 심각하게 피해를 본 유대인들이 더 이상 이와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기독교의 교리를 바꾸고자하는 시도라고도 할 수 있다.

최덕성교수의 르포르만다의 글에서 크리스차니티투데이의 글을 번역한 "새관점학파와 유대인의 장학금"의 일부를 인용해보고자한다.

"새 관점학파의 상당수 신학자들이 유대인 부호들로부터 거액의 장학금을 받았다는 소문이 나돈다. 유대인은 나치에 의한 민족의 수난을 현대 유대인을 위한 구속사건으로 이해한다. 그 참극이 오늘날의 유대인의 지위와 신분을 보장해 주는 선물을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한다. 영리하고 돈 많은 유대인들은 반유대주의가 다름 아닌 해 묵은 기독교 신학에 있다고 생각하고서 이를 바꾸려고 개신교 신학자들에게 천문학적인 액수의 장학금을 주고 사상의 흐름을 바꾸도록 했다는 것이다. 신약신학자들 사이에 공공연히 떠도는 이 소문이 어느 정도의 근거가 있다면 새 관점학파는 수상한 동기로 출범한 것이 분명하다.

유대인 장학금 소문은 신약학자들 사이에 오래 전부터 회자되었다. 이신칭의 복음을 사실상 부정하고 행위와 윤리실천을 칭의의 조건으로 보는 '새 관점'이라는 것이 뚜렷하게 드러나기 전부터 나돌았다. 만약 스탠달이 유대인으로부터 거액 장학금을 받았고, 새관점학파의 신학자들이 이러한 동기로 유대인에게 우호적인 신학공식을 만들어내고 유대인을 지지하는 논문을 저술, 발표한 것이 사실이면, 스탠탈과 새 관점학파 신학자들의 학문적 노력과 소신은 거액 장학금을 준 유대인 부호들의 의도에 의해 이런 저런 형태로 통제된, 장학금 신학이 분명하다. 새 관점이 의혹과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이에 대한 자세한 글은 여기를 참조해보길 바란다.

톰 라이트는 새관전이라는 작업을 위해서 불트만과 슈바이처의 사상과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합하여 제2성전 유대교를 언약적 신율주의로 풀어낸다.

새관점의 유대주의적 성향은 슈바이처의 사상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불트만은 슈바이처와 달리, 예수와 바울을 대립 시키지 않는 반면에, 슈바이처는 브레데와 같이 예수와 바울을 대립시킴으로서, 바울이 예수와 다른 어떤 종교를 가르쳤다고 생각한다.

슈바이처는 예수를 구속받은 구속자라는 실존주의적 개념으로 이해함으로서, 예수의 실존을 유대교와 연결시켜 해석한다.

슈바이처는 예수를 유대교의 실존적 완성으로 보고있는 것이다.

예수가 유대교에서의 실존적 완성이었다는 후기 유대교적 메시아 개념은 유대교가 은혜의 종교였다는 톰 라이트의 언약적 율법주의의 근거를 제공한다.

슈바이처는 윌리엄 브레데(William Wrede)와 같이 예수와 바울을 대립시키지만, 예수를 종말론적이고 묵시적인 유대교의 맥락에 둠으로서 브레데와 차이를 보이고있다.

톰 라이트는 브레데의 생각에 동의를 못하다가, 예수를 종말론적이고 묵시적인 유대교의 맥락에 두는 슈바이처의 견해에 상당히 공감하게 된다.(톰 라이트, 예수의 도전, 119)

라이트는 자신이 슈바이처의 접근과 비슷한 접근을 한다고 말한다

슈바이처의 후기 유대교적 메시아 사상은, 톰 라이트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의라는 범주 안에 귀속시키는 틀을 제공한다.

라이트는 슈바이처의 도움을 받아 예수를 유대교를 완성시키신 분으로 각색한다.

슈바이처는, 바울이 예수와는 다른 종말론의 체계를 가지고있다는 바울과 예수의 대립관계를, 유대주의적 묵시 문학의 맥락에서 해결한다.

라이트는 슈바이처의 묵시적 유대교 사상를 통해, 바울의 기독론을 유대주의적 메시아 사상에 귀속시킴으로서, 바울에 관한 새관점의 틀을 형성해간다.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은, 바울 서신서에 나타난 기독론이 유대주의적 메시아 개념을 바울 자신이 특별하게 발전시킨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슈바이처의 사상을 빌려온 것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의의 개념에는, “칭의를 순전히 법정적으로만 이해하는 칭의론은 윤리를 낳지 못한다"는 슈바이처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행위 구원론적 의의 개념을 추가시킨다.

새관점의 윤리 사상은 슈바이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슐라이어마허의 영향을 받은 슈바이처가, 법정적 칭의론이 갖는 윤리의 부재에 대하여 우려했던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톰 라이트는 법정적 칭의론의 윤리 부재에 대한 슈바이처의 염려에 대하여 케제만에게서 도움을 받는다.

라이트는 슈바이처의 법정적 칭의론에, 케제만의 관계적 칭의론을 대입시킴으로서, 결핍된 윤리의 문제를 해결하려한다.

케제만의 관계적 칭의론은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의 밑거름이 된다.

케제만은 기독론 중심의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 대신에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신론 중심의 "하나님의 의"를 칭의의 근거로 삼는다.

톰 라이트는 이와같이 슈바이처의 "후기 유대교적 메시아 사상"과 케제만의 "관계적 칭의론"과 역사적 예수 탐구의 "언약적 신율주의"를 조합시켜서 새관점을 구성시킨다.

이것이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의 기본 틀이다.

새관점에서는 2000년 가까이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생각해왔던 율법주의적 유대교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주장하며, 전통적 해석을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적 흐름에 편승하여 기독교의 새로운 틀로 자리잡으려고한다.

새관점과 포스트모더니즘

양희송대표의 기독교 세계관에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상이 자리잡고있다.

양희송대표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독단적 진리 주장이나 인식론적인 특권적 지위에서의 주장으로서의 최종 목적지에 대한 완결된 주장보다는, 저마다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을 최선의 길로 여기고 성실히 걷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결론은 성경을 명제적 접근방식에서보다는 완성되지 않은 이야기로 접근함으로서, 삶이 성경의 완성을 이루어간다는 접근방식에서 나온 결론이다.

그는 미들턴과 왈쉬를 인용하며 두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첫번째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 자체가 또 다른 특권적 지위를 주장하는 자기 모순을 범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부정적 상황에 대한 표현 자체도 또 다른 부정적 상황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절대적 진리가 없기에 모든 이들이 서로 다른 이들의 주장을 존중해 주어야한다는 것이다.

두번째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전일적 메타내러티브의 독주에 제동을 걸어 해체하고 국지적 담론(local-narrative)이 들려지게하라'는 주장이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 주장하는 핵심적 대안이라는 것이다.

이는 거대한 이념 충돌이 붕괴된 이후에 더 깊고 세밀해진 분열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라는 것이다.

미들턴과 왈쉬는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이 '기울어가는 모더니즘이 겪고 있는 윤리적 혼란과 폭력성에 대해 아무런 내러티브적 대안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무능력'을 보이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우리에게는 포스트모던적 삶의 조건을 해쳐 나갈 내적 자원이 될 내러티브의 공급이 필요하다. 그것은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

미들턴과 왈쉬의 주장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우리가 성경 내러티브를 다시 불러낼 때는 적어도 기존의 메타내러티브들이 억압적이고 폭력적으로 작동했던 방식과는 다른 읽기를 시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성경이 보존하고 있는 주변부와 소수자의 목소리를 찾아내어 귀 기울이며, 단성적 방식이 아니라 다성적 층위를 한꺼번에 음미하는 방식으로 본문 읽기 등을 시도하도록 제안한다는 미들턴과 왈쉬의 주장을 인용한다.

그는 주변의 폭력적 메타내러티브 방식의 성경 읽기를 민감하게 분별하고서 이에 대한 저항력을 키워 나갈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할 것을 권하는 미들턴과 욀쉬의 권고로 충고한다.

양희송대표는 정통 개혁주의의 성경해석을 일종의 폭력적 메타내러티브로 단정하고서 이에 대한 저항으로서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자신의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하고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전하는 새관점은 미들턴과 왈쉬의 처음 주장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폭력이 되어 많은 이들을 혼란케하고있다.

양희송대표의 톰 라이트에 대한 애착은 일종의 폭력적 메타내러티브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나는 영국 복음주의에 ‘존(John Stott)의 시대’가 가고, ‘톰(Tom Wright)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누구보다도 이 땅에 톰 라이트를 가장 먼저 보급하였고, 톰 라이트의 신학을 확장시키는데 가장 앞장 섰던 인물이었다.

한때는 톰 라이트와 같이 찍은 사진을 공개하며 톰 라이트와의 친분을 과시하기도했다.

톰 라이트의 "바울에 관한 새관점"

그렇다면 톰 라이트가 말하는 신학의 특징은 무엇인가?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신학은 소위 말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이다.

새관점에서의 주제는 믿음이 아니라 삶이다.

새관점에서는 인간의 행함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새관점에서의 삶은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는 삶이다.

새관점에서는 이 땅에서의 구원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통하여 아브라함 언약이 실현된 것이라고 본다.

새관점에서는 두 가지의 구원을 말하고있다.

첫번째 구원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임하였다는 주장이다.

톰 라이트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라고 주장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임한 그리스도의 나라와는 다른 것이다.

두 번째 구원은 최종적 구원으로서 최후의 심판 때에 행위에 대한 심판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머무르기 위한 조건으로서 윤리적 삶을 살아가야한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윤리적 삶은 최종적 구원에 이르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공로적 삶이기에,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과정으로서의 삶과는 다른 개념이다.

톰 라이트의 윤리 사상은 기독론적 윤리사상이 아니다.

톰 라이트가 제시하는 예수는 삶의 모본일 뿐 믿음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새관점주의자들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말한다.

새관점주의자들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로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더불어 이 땅에 임한 그리스도의 나라로서의 하나님 나라와는 다른 나라이다.

용어만 같을 뿐 뜻은 다른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이다.

새관점주의자들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기독교를 유대교의 틀에 맞추어 재해석한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이다.

새관점주의자들에게 그리스도는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후기 유대교적 메시아일 뿐이다.

새관점주의자들에게 그리스도는 최종적 구원에 도달하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본을 보여주신 분에 불과하다.

이들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구원론적 개념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이들은 예수를 본받아 살아감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론적 의를 추구하는 이들이다.

새관점주의자들에게 예수는, 택하신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창세 전에 영원 가운데 삼위 하나님께서 맺으신 구속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택하신 자의 중재자도, 보증자도 아니다.

톰 라이트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 나라를 대변하는 로마에 대항하는 혁명적 삶을 위한 희생적 정신일 뿐이다.

톰 라이트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가 로마에 대항하여 싸운 방식이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표시일 뿐이다.

새관점에서 요구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행동 방식은, 산상수훈이라는 새로운 율법을 기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 방식을 따르는 희생적 삶을 살아감으로서, 최종적 심판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받아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희생적 삶의 방식이 새관점에서 말하는 기독교 윤리인 것이다.

톰 라이트에게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며 최종적 구원을 위한 따름의 대상일 뿐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지만 최종적 구원은 백성들의 몫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요구되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공로에 힘입어 구원을 받았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예수의 행동 방식이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받았기에 예수의 행동방식이 옳다는 것을 신뢰하고 자신도 예수의 행동 방식을 따라 살 때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는 인간 예수의 행동 방식에 대한 신뢰일 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순종의 공로를 전가받은 것으로 인한 구원의 믿음이 아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하는 윤리적 과제가 주어졌기에 아직 안식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을 수용하는 사람들은,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윤리의 기준으로서의 인간 예수의 희생적이고 혁명적인 삶을 본받아 살아가야하는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연습과 노력을 통해서 고도화된 삶을 살아가야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로마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에 이른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보다는 몸의 지체로서의 삶을 강조한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지체들이다.

지체는 각자가 받은 믿음의 분량에 따라 받은 은사대로 역할을 감당해야하는 것이며, 이는 구원을 이루기 위한 조건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각자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면서 살아갈 것이 요구된다.

새관점과 인간의 죄성

새관점의 가장 큰 오류는 인간의 죄성을 과소 평가한 것이다.

새관점의 윤리 사상은 인간의 죄성을 간과한 것이다.

인간의 죄성을 간과한 새관점주의자들의 행동 방식은 결국 죄의 올무에 걸려들 수밖에 없다.

톰 라이트는 인간의 잠재적 능력을 높게 평가한다.

톰 라이트에게 인간의 죄성은 하나의 나쁜 습관일 뿐이며, 노력하여 고치면 되는 피상적인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인간의 죄성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나쁜 영향을 받은 것일 뿐, 종교개혁자들이 말하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는 다른 것이다.

톰 라이트는 인간이 근원적인 죄성을 가지고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표면적 습관에 의해서 잘못 길들여졌을 뿐이라고 말한다.

표면적인 습성은 근원적인 죄성과 달리, 인간의 노력과 연습으로 바뀔 수가 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아담의 범죄를 암묵적으로 용서하신 것으로 간주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출애굽을 통하여 이 땅에 임한 구원의 은혜의 삶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이스라엘에게, 바벨론 포로 생활을 종식시키고, 앞으로 살아가야할 새로운 삶의 본을 제시해주시기 위한 것이다.

톰 라이트에게는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이 구약과 신약의 분기점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공생애 사역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십자가가 아니라 최후의 만찬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생활에 대한 종식을 선언하고, 자신의 십자가의 길이라는 새로운 삶의 표준을 제시함으로써, 이를 본받아 희생적 삶을 살아가라는 선언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에게 신약의 교회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이 중심이 되어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 새롭게 모이는 유대인의 회당과 같은 곳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구원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죽음에 이른 인간의 육신에 대한 구원이 아니라, 출애굽을 통하여 가나안 땅에 임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온 땅에 확대되어 전 우주적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교회는, 바벨론 포로로부터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확장일 뿐이며, 신약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는 다른 것이다.

톰 라이트에게 처음 아담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모형도 아니다.

인간의 죄성은 아담과 관계 없기에 톰 라이트가 말하는 교회는 둘째 아담과는 관계가 없는 곳이다.

새관점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존재가 아니며, 노력과 연습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감으로서 최종적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무한한 잠재적 능력을 가지고있는 존재다.

새관점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톰 라이트가 제시하는 기준을 따라 살아가야할 의무가 주어졌는데, 산상수훈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들이 따라가야할 새로운 윤리적 기준이 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전파하면서, 윤리적 삶을 살아갈 것을 전하는 양희송대표가 정작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불륜을 저지른 것은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죄성을 간과한 것이다.

그가 먼저 공동 사역을 하였던 교회의 S목사도 교인들에 대한 성폭력 문제로 인하여 중도하차할 수밖에 없었던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은 그 후에도 몇 년을 불륜을 지속하고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가 인간의 죄성이 어떠한지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인간에게 자신의 죄성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원의 은혜가 필요 없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에게 그리스도는 따름의 대상이기 이전에 믿음의 대상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서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자가 성화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열매로서의 삶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존재이며, 둘째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존재이다.

백성에게는 행함의 의무가 제시되지만 자녀에게는 행함에 대한 책임이 주어진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개념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개념보다는 좀 더 하나님과 친밀한 존재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모든 행동에 있어서 신중함을 보이게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욕되게 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해서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간다.

성령에 이끌리는 자는 순간에 대해서는 잘못된 행동을 할 수 있어도 자신을 속이는 지속적인 잘못을 범할 수는 없다.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가며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매일의 삶을 기도와 더불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하기에, 매일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새관점과 전가교리

새관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인간의 잠재적 능력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전가교리와의 대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들은 아담의 죄가 인류에게 전가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에 인간이 얼마나 부패하고 무능한 존재인지에 대하여 정통 개혁주의와 다른 입장일 수밖에 없다.

정통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전가교리는 크게 세 가지로 구성되어있다.

첫번째는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처음 죄를 모든 인간에게 전가시키셨으며, 두번째로는 택한 자의 구속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택한 자의 죄를 그리스도께 전가시키셨으며, 세번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 혹은 그의 순종하심을 택한 자에게 전가시키셨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그들(아담과 이브)은 온 인류의 근원이었으므로 이 죄의 허물이 전가 되었으며, 죄 안에서 동일한 죽음과 부패한 성질이 보통 생육법으로 태어나는 그들의 모든 후손에게 전달되었다’(6-3)고 말한다.

종교개혁 신앙을 거부하는 새관점은 개혁주의에서의 삼중전가도 마찬가지로 거부한다.

전가교리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와 구원을 위한 칭의에 있어서 핵심 교리이다.

톰 라이트는 전가 교리를 부정하기에,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도 인정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도 인정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는 칭의도 인정하지 않는다.

기독교 교리의 전가 교리를 제거한다면 유대교와 유사한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틀에 맞추어 재구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톰 라이트는 인간에게 구원을 이루기 위한 능력이 있다고 보기에 중재자이시며 구원의 보증자되신 그리스도의 순종의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간이 육체의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사는 동안에 윤리적 삶을 통해서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공로를 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있다면 구원의 의는 인간으로부터 기인된 것이 된다.

하지만 삶 가운데 나타나는 인간의 부정적 모습은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인간 만큼이나 스스로를 속이는 악한 존재는 없다.

인간이 악한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들은 없다.

인간이 어떻게 악한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들이 있어왔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악이 집단성에서 기인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집단의 악의 기원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고있다.

단지 표면적인 현상의 한 부분만을 설명하고있을 뿐이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보편적인 죄가 아담의 범죄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말하며, 이는 인류가 유전에 의해서 아담으로부터 죄악의 형질을 전이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도 인간의 죄성에 대한 완전한 설명이 되지는 못한다.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강령decree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불순종을 죽음에 이르는 죄로 규정하셨기 때문에,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죄성을 가진 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로서 하나님의 강령에 의해서 처음 아담의 범죄가 모든 인간에게 전가된 것이다.

현재의 삶에서 인간의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죄악된 행동 방식을 볼 때 죄의 전가는 결코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인 논리만은 아니다.

불순종의 일차적인 결과는 죽음이며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다.

아담은 범죄하고서 에덴에서 쫓겨났으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아담의 에덴 바깥으로의 쫓겨남은 죽음을 의미한다.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에덴 바깥에 있으며, 육신은 살아있으나 실상은 영적으로 죽은 존재이다.

아담의 범죄의 전가로 죽은 모든 인간이 살길은 둘째 아담으로부터 의를 전가받는 것이다.

전가로 인해서 발생한 문제는 전가의 방식으로 해결되어야만 한다.

전가 교리는 인간의 근원적이고 실제적인 죽음과 생명을 얻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하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전가의 방식으로 구속 사역을 진행하신다.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죽음에 대한 해결책은 창세기 3장 15절의 원시복음 안에서 제시된다.

원시복음이 구체화되기 위한 과정으로서 아담 언약이 율법을 통하여 재연된다.

율법은 아담 언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은 율법을 통하여 다시 재연된다.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이 안식으로 귀결되어야했듯이, 율법의 요구는 안식으로 귀결되는 것이며, 그리스도는 완전한 순종을 통하여 안식의 주인이 되실 수 있으셨다.

율법은 아담에게 요구되는 순종이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상기시키면서, 인간은 율법에 대한 순종을 통하여 스스로를 구원할 수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줌으로써, 중보자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율법은 순종을 요구하는 행위 언약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은혜 언약의 속성을 내포하고있는 것이다.

율법은 인간에게 좌절과 낙망을 주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가나안 땅에 오신 시기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게 더 이상의 희망이 보이지 않던 시기에 오신 것이다.

새관점은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행동 방식을 제시하시기 위해서 이 시기에 오셨다고 말한다.

새관점이 말하는 복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율법의 또 다른 형태로서의 행동 방식을 제시하는 것이다.

율법을 새로운 형태로 다시 부활시킨 새관점은 예수를 따르는 윤리적 삶을 통해서 최종적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은 불순종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께 나아갈 기회를 앗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길을 방해하는 적그리스도적인 관점이다.

율법은 새관점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머무르기 위한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둘째 아담 안에서 이루어질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을 예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율법은 처음 아담에게 주어졌던 행위 언약과 마찬가지로 행위 언약의 속성을 지니고있지만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교사로서의 역할을 하고있다.

율법도 행위 언약으로 주어진 것이기에 순종을 요구하지만,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들은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었기에, 율법은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은혜 언약의 속성을 가지고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처음 아담은 에덴에서 받았던 명령을 수행하는데 실패하였지만,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율법의 요구를 완전하게 충족시키심으로서 불순종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이러한 점에서 율법은 처음 아담에게 주어졌던 행위 언약의 재연republic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요구를 완전하게 충족시키심으로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어떤 이는 성경 어디에도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지키셨다는 내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행위 언약의 개념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개념도 부정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사랑은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키신 행하심이기에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받는다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율법의 요구에 대한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위한 또 다른 율법이 필요없게 될 것이다.

톰 라이트는 산상수훈이 그리스도인이 지켜야할 삶의 지침으로서의 새로운 율법이라고 말하며, 새관점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최종적 구원을 위한 삶의 윤리적 기준으로 삼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세상을 대변하는 로마에 대항하는 희생적 삶의 표현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처음 아담의 범죄로 인한 사망의 형벌을 대신 치르신 속죄 사역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택함받은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들의 죄를 전가받아 대신 죽으시고, 죽음을 통하여 얻으신 수동적 순종의 의를 택함받은 자에게 전가시키심으로서, 택함받은 자에게 더 이상 사망의 형벌을 주어지지 않게 죄를 속하신 것이다.

택함받은 자는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의 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삶을 통하여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신 능동적 순종의 의를 전가받음으로서,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한 자로 여김을 받음으로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로부터 의를 전가받지 않는다면, 구원을 위한 의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만 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출애굽을 통한 이스라엘에게 임한 나라이다.

톰 라이트는 이스라엘에 임한 나라가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이며,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르기 위한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라고하지만, 톰 라이트가 말하는 은혜의 하나님 나라는 안식이 임한 나라가 아니다.

영원한 안식을 위해서 율법을 지켜야했기에 참된 은혜가 아니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윤리적 삶은 최종적 구원을 위한 조건이기에 안식이라는 과제가 남아있다.

처음 하나님께서 6일 간의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쉬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통하여 안식에 이르러야만 했다.

신자는 중보자되신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안식에 들어감으로서, 불순종한 아담 안에서 손상된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하게 회복될 것을 약속받게 된 것이다.

아직 율법 아래있는 자는 저주 아래있는 자이며, 산상수훈을 최종적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자는 그리스도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이다.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하나님의 안식에 이른 자가 성화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최종적 구원을 위해 요구되는 윤리라면 이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이기에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새관점을 받아들이고 전하는 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서 그리스도의 안식에 들어간 자이다.

그리스도인이 얻은 칭의는 그리스도께서 보증자되시고 성령께서 인을 치셨기에 또 다른 최종적 구원을 위한 행위가 요구되지 않는 완전한 것이다.

그리스인이라고 할지라도 아직은 죄성을 가진 육신, 즉 바울이 고백하는 사망의 몸을 지니고있기에 삶의 여정에서 부족함과 실수를 나타낼 수밖에 없다.

성령께서 내주하는 이들에게 부족함과 실수는 일시적인 것이 될 수는 있어도 지속 될 수는 없다.

성령께서 내주하는 이들은 거듭난 자로서 죄악이 둥지를 틀 수가 없는 존재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습관적으로 죄악을 즐길 수가 없다.

전가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 새관점주의자들은 최종적 심판에 대한 부족함을 스스로 충족시켜야하지만, 이들은 생명이 없는 죽은 존재로서 그 안에 근원적인 죄성이 자리잡고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영원한 구원은 불가능한 것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은 인간에게 어떠한 새로운 과제를 제시하는 소식이 아니라 안식을 전하는 복된 소식이다.

복음은 짐이 아니라 쉼을 전해주는 복된 소식이다.

톰 라이트를 복음주의자라고 칭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가 전해주는 성경이야기는 복음이 아니다.

행위로 구원을 받으려는 자에게 제시하는 또 다른 형태의 희망적인 대안이지만, 이는 인간에게 감당이 불가능한 소식이다.

톰 라이트가 전하는 새로운 형태의 행위에 대한 최종적 판정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제시되지 않는다.

누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겠는가?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인간에게 최종적 구원을 위한 윤리적 삶을 요구하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죄의 문제를 다 해결하셨다는 복된 소식을 전함으로서 그리스도인에게 회개와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예수의 행동방식이 옳았음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순종의 요구를 대신 충족시키심으로서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다.

참된 복음은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요구한다.

회개와 믿음은 의를 얻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의를 받아들이는 행위이기에 공로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는 혁명적 삶을 보여주신 따름의 대상이 아니라 택함받은 자의 중보자이심을 믿는 믿음의 대상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결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와 연합된 하나님의 자녀이다.

이 땅에서의 결혼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모형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결혼은 유형적으로 같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이 한 몸이 되어,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가는 곳이다.

창세기 2장 24절에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후에 인간에게 처음 적용하신 첫번째 창조 명령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성도와의 연합은 처음 아담이 실패한 창조 명령을 그리스도께서 실행하신 것이다.

아담이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결혼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모형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었듯이 결혼을 통하여 남여가 한 몸을 이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를 낳는 것이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은 타락 전에 하나님의 자녀를 낳는 것이었지만, 타락 이후에는 육신의 자녀를 낳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이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가정을 이루어나아가야한다.

동거문화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위배되며,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어나아가는 교회의 원리에도 위배된다.

동성 간의 결혼도 마찬가지이다.

불륜도 마찬가지로 가정의 원형인 교회를 깨뜨리고 파괴시키는 행동이다.

교회 사역자의 불륜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파괴시킨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결혼을 통해 이루어가는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 명령의 실행이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기초가 되기에 그리스도인이 가꾸어가야할 제일 우선되는 영역이다.

나가는 말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때에 그리스도인의 비윤리적 삶은 많은 이들을 혼란케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허무는 일이다.

웃사는 마차에서 떨어지려는 궤를 잡으려고함으로서 죽임을 당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교인들의 비윤리적인 삶으로 인해서 쓰러져가는 교회를 인간적인 방식으로 세우려고해서는 안된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인본주의적이고 유대주의적인 사상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제거하고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의를 집어넣음으로서, 왜곡된 하나님의 의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하여 새관점을 합리화시키고 있지만, 역사적 예수 연구는 부분적이기에 보편화 될 수 없고, 해석도 주관적이기에 성경 전체의 주제를 바꿀 수도 없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분명 잘못된 관점임에도 이를 적용하여 교회를 세우려는 행동 방식은 웃사의 방식과 다르다고 할 수 없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전하는 양희송대표는, 오랫동안 교회 개혁을 외치며 기독교 세계관을 전파하며 가나안 성도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지만 그가 진정 그리스도의 안식의 은혜를 전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잘못된 길에서 보호받을 수가 없다.

참된 기독교 윤리는 올바른 개혁주의 신앙을 근거로해야한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그리스도의 안식에 거하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하는 것이다.

일차적인 개혁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살아감으로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전적으로 부패한 자들이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지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기에, 주어진 긍정적 환경에 감사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posted by Wonho Kim
:
교리 2019. 4. 10. 08:13

존 오웬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들어가는 말


다음 글은 마이클 브라운 목사가 존 오웬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에 대하여 정리한 글을 번역한 것이다.


국내에 소개된 마이클 브라운 목사의 저서로는 부흥과 개혁사에서 출간된 “언약 신학으로서의 초대”가 있다.


마이클 브라운 목사는 마이클 호튼이 공동 목사로 참여하고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근처에 위치한 크라이스트 연합 교회의 목사이다.


출처: www.reformedfellowship.net/john-owen-the-imputation-of-christs-active-obedience



존 오웬: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JOHN OWEN: THE IMPUTATION OF CHRIST'S ACTIVE OBEDIENCE


마이클 브라운

by Rev. Michael Brown



존 오웬(1616-1683)이 자신의 책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통한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 설명되어졌고, 확고부동하며, 그리고 입증된 개신교 칭의 교리”를 발간하였을 때인 1677년에도 개신교 칭의 교리는 아직 논란의 소용돌이 안에 있었다.

In 1677, when John Owen (1616–1683) published his book,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Faith through the Imputation of the Righteousness of Christ; Explained, Confirmed, and Vindicated, the Protestant doctrine of justification was still engulfed in controversy.


영국 칼빈주의자는 “나의 판단에는, 루터가 ‘칭의에 관한 글들을 잃어버린다면, 동시에 기독교 교리 전체를 잃어버린 것이 된다’고 말하였을 때, 그 때는 그가 진리를 말한 것이었으며, 그가 앞으로의 세대에서는 이러한 교리가 다시 불분명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면, 그는 참된 예언자가 아니었기를 바란다” 고 말했다.

"In my judgment," said the English Calvinist, "Luther spake the truth when he said, 'When the article of justification is lost, at the same time the whole Christian doctrine is lost.' And I wish he had not been a true prophet, when he foretold that in the following ages the doctrine hereof would be again obscured."



개혁주의 신학자이며, 옥스포드대학 부총장이며, 회중 교회 목사였던 오웬은 알미니안주의, 소시안주의, 로마 카톨릭주의에 대항하여 칭의에 관한 개신교 고백 교리를 변론하였다.

As a Reformed theologian, Oxford University Vice-Chancellor, and Congregationalist pastor, Owen defended the Protestant and confessional doctrine of justification against Arminianism, Socinianism, and Roman Catholicism.


실제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는 주로 이러한 세 가지 입장들, 특히 소시니안주의에 대한 거부였다.

Indeed,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Faith was primarily a repudiation of these three positions, particularly Socinianism.

17세기 개신교도들은 일반적으로 신자의 칭의의 공식적 근거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가 되어야한다고 이해하였지만, 전가된 의의 정확한 정의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While Protestants in the seventeenth-century generally understood the formal cause of a believer's justification to be the imputed righteousness of Christ, not all agreed on the precise definition of that imputed righteousness.


예를 들어, 웨스트민스터 총회(1643-1649)에서 대다수는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 포함되어있다고 믿었다.

At the Westminster Assembly (1643–1649), for example, the majority believed that the imputed righteousness of Christ included both Christ's active and passive obedience.


그러나 소수는 후자(수동적 순종)에 대해서는 확신하였지만, 전자(능동적 순종)에 대해서는 거부하였다.

A small minority, however, affirmed the latter but denied the former.


이들 가운데에는 총회의 초대 의장인 윌리엄 트위스(1578–1646)와 신학자인 토마스 가타커(1574–1654)가 포함되어있었다.

Among these were the Assembly's first prolocutor, William Twisse (1578–1646), and the theologian Thomas Gataker (1574–1654).

비록 오웬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는 능동적 순종의 전가라는 대다수의 관점에 상당히 관여하고있었다.
While Owen was not present at the Westminster Assembly, he was nevertheless fully committed to the majority view of imputed active obedience.


오웬은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에 관계하고 있었기에, 그가 주된 역할을 하여 구성한 사보이 선언에서는, 이러한 효과를 나타내게하는 용어들이 포함되도록 웨스트민스터 선언을 개선하였다.

So committed was Owen to the imputation of Christ's active obedience, that the Savoy Declaration, which he played a major role constructing, modified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to include words to that effect.


사보이 선언에서는, 칭의에 관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용어를 필수적으로 채용하고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순종과 충족을 그들에게 전가시킴으로서(웨민신앙고백41)”를 “그러나 율법 전체에 대한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과 그들의 완전하고 유일한 의를 위한 그의 죽으심 안에서의 수동적 순종의 전가에 의해서”라는 말로 바꾸었다.

While it essentially adopted the Westminster Confession's language on justification, the Savoy Declaration replaced the words, "but by imputing the obedience and satisfaction of Christ unto them" (WCF XLI) with the words, "but by imputing Christ's active obedience to the whole law, and passive obedience in his death for their whole and sole righteousness."

오웬에게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는 칭의 교리에 있어서 필수적 요소였으며, 앞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제공되었던 것보다도 좀 더 특별한 용어를 사용할 가치가 있었다.
For Owen, the imputation of Christ's active obedience was a necessary component of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and deserved more specific wording than previously afforded by the Westminster Confession.


자신의 시대에 개혁 교회 안에 있었던 논쟁들을 의식하면서, 그는 이 교리로부터 분리되어있던 자신의 청교도 동료들이, 성경으로부터 떠났을 뿐만 아니라, “영국 교회의 예전의 교리”로부터도 떠났다고 믿었다.

Aware of the debates within the Reformed churches of his day, he believed that his Puritan contemporaries who had deviated from this doctrine not only departed from Scripture, but from "the ancient doctrine of the church of England."

이 글은 오웬이 어떤 이유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가 칭의 교리의 필수적 요소였다고 믿었는지, 그리고 오웬은 이것을 어떻게 “구속 언약”, 혹은 구속 언약과 연계시켰는지에 대한 질문들을 추적해나가게 될 것이다.
This article shall pursue the question of why Owen believed the imputation of Christ's active obedience was an essential element of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and how Owen linked it to the "covenant of redemption" or pactum salutis.


이는 오늘날 개혁주의와 장로교 안에서, 전가된 능동적 순종의 주제에 관한 상당한 분량의 논쟁이 제기된 것을 고려해 볼 때, 중요한 질문인 것이다.

This is a significant question to consider in the present day for, within Reformed and Presbyterian circles, a substantial amount of debate has erupted over the issue of imputed active obedience.


한편으로는, 소위 말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 혹은 페더럴 비전을 고수하는 이들로서, 이들은 노골적으로 복음의 메세지를 신뢰한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라는 어떠한 특정한 교리적 표현을 요구한다는 것을 거부한다.

On the one hand are those holding to the so-called New Perspectives on Paul and/or Federal Vision, who outright "deny that faithfulness to the gospel message requires any particular doctrinal formulation of the 'imputation of the active obedience of Christ. '"


다른 한편으로는, 칭의에 있어서 신자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필요성을 확고히함으로서, 이러한 움직임에 대항하는 이들이 있다.

On the other hand are those who have responded to these movements by affirming the necessity of Christ's active obedience imputed to the believer in justification.

이와같은 논쟁의 한 가운데에서, 개혁정통주의의 탁월한 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오웬이, 왜 칭의에 있어서 전가에 관한 말들을 왜 언급하였는지 고찰해보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In the midst of such a debate, it may be helpful to consider why Owen, one of the preeminent theologians of Reformed Orthodoxy, said what he said about imputation in justification.


이 글은 오웬이,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전가시키신 것이, 구속 언약에서의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할 때문이었다고하는 것에 대하여 논할 것이다.

This essay argues that for Owen, God imputes, Christ's active obedience to the believer in justification because of the roles of Christ and the Holy Spirit in the pactum salutis.

이러한 주제를 탐구하기 위해서, 구속 언약에 관한 오웬의 교리와, 은혜 언약에 있어서의 보증이되고 중재자가 되신 그리스도의 역할과, 그리스도와 교회를 하나의 신비한 인격으로 연합되게하신 성령의 사역과, 칭의에 있어서 유일한 도구로서의 믿음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In order to examine this thesis, a concise observation will be made of Owen's doctrine of the pactum salutis, Christ's role as surety and mediator in the covenant of grace, the work of the Holy Spirit coalescing Christ and the church into one mystical person, and faith as the sole instrument in justification.

삼위일체적 구원: 오웬의 구속 언약 교리
Trinitarian Salvation: Owen's Doctrine of the Pactum Salutis

17세기 중반까지는 구속 언약 교리가 영국이나 대륙의 개혁 정통주의에서 상당히 일반적이었다.
By the mid-seventeenth-century, the doctrine of the pactum salutis had become quite prevalent in Reformed Orthodoxy, both in Britain and on the continent.


오웬도 이러한 경향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Owen was no exception to this trend.


오웬은 소시니안들을 대항하며 복음을 변론하는 1655년 작품에서, 구속 언약을 “성부와 성자사이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중재에 의한 우리들의 구속을 위한 사역의 수행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양하는 협약, 언약, 조약, 혹은 협정”으로 묘사하고있다.

In his 1655 work against the Socinians, Vindiciae Evangelicae, Owen described the pactum salutis as "that compact, covenant, convention, or agreement, that was between the Father and the Son, for the accomplishment of the work of our redemption by the mediation of Christ, to the praise of the glorious grace of God."


그는 이 언약에 5가지의 주된 요소들이 있음을 보았다.

He saw five major elements within this covenant:


1.성부는 약속자로서, 성바는 보증자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택한 자의 구원”이라 불리우는 보편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함께 총회에서 자의적으로 동의하셨다.

(i) The Father, as "promiser," and the Son, as "undertaker," voluntarily agreed together in counsel to achieve a common purpose, namely, "the glory of God and the salvation of the elect."


2.성부께서는 이러한 언약의 조건들을 규정하셨는데, 이는 성자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택함받은 자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그들을 위해서 자신의 순종으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시며,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으로 고난을 받으시는 것으로 구성되어있다.

(ii) The Father prescribed conditions for this covenant, which consisted of the Son assuming human nature, fulfilling the demands of the law through his obedience, and suffering the just judgment of God for the elect in order to satisfy God's justice on their behalf.  


3.언약의 약속들은 두 가지로 구성되어있는데: 첫번째는, 성부는 성자가 자신의 구속 사역을 완수하는데 있어서 지속적으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자신의 지상의 삶에서의 고통과 시험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시는 것이며, 두번째로는, 만약에 성자께서 자신에게 요구되었던 것을 성취하셨다면, 그 사역 자체는 그가 위하여 순종하고 고통을 받았던 이들의 구원과 영화를 가져옴으로서 번성할 것이다. 이러한 약속들은 성부께서 맹세로 확고히하신 것이다.

(iii) The promises of the covenant, which were two: First, the Father assisting the Son in the accomplishment of his redeeming work by continually being present with him as he underwent the afflictions and trials of his earthly life. Secondly, if the Son did what was required of him, the work itself would prosper by bringing about the deliverance and glorification of those for whom he obeyed and suffered. These promises the Father confirmed with an oath.


4.성자는 자의적으로 조건들을 수용하셨으며, 언약의 보증자로서 사역을 담당하셨다.

(iv) The Son voluntarily accepted the conditions, and assumed the work as surety of the covenant.


5.성부는 성자의 행하심을 인정하셨고 받아들이셨으며, 성자 마찬가지로 언약에서 주어진 약속들을 요구하셨다.

(v) The Father approved and accepted the performance of the Son, who likewise laid claim to the promises made in the covenant.


오웬은 구속 언약이 구속사의 근간이며 추구하는 목적이 되어야한다고 믿었다.
Owen believed the pactum salutis to be the basis and driving purpose of redemptive history.


오웬에게있어서 이는 교회의 고백으로 불분명하게 진술되기에는 너무나도 중요한 교리였다.

For Owen, it was a doctrine too important to state vaguely in the church's confession.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1647)이 회중교회 성도들의 조직에 적합하도록 변형된, 회중 교회를 위해 1658년에 그가 도움을 주어 다듬어진, 사보리 선언이라고 불리우는 신앙고백에는 구속 언약에 관한 분명한 용어를 포함하고있다.

The confession he helped craft in 1658 for the Congregationalist churches, namely, the Savoy Declaration, a modification of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7) to suit Congregationalist polity, included explicit language on the pactum salutis.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8.1에서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그의 독생자이신 주 예수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되도록 선택하시고 임명하시기를 기뻐하셨다” 고 말한다.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VIII.l reads, "It pleased God, in His eternal purpose, to choose and ordain the Lord Jesus, His only begotten Son, to be Mediator between God and man."


그러나 사보이 선언 8.1에서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그의 독생자이신 주 예수가, 두 분 사이에 맺어진 언약을 따라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되도록 선택하시고 임명하시기를 기뻐하셨다” 고 말한다.

VIII.1 of the Savoy Declaration, however, reads: "It pleased God, in his eternal purpose, to choose [sic] and ordain the Lord Jesus his only [sic] begotten Son, according to a Covenant made between them both, to be the Mediator between God and Man."

칼 투르먼은, 오웬이 구속 언약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고려함으로서, 17세기에 이러한 교리를 발전시키는데 중대한 공헌을 하였음을 지적하고있다.
Carl Trueman points out that Owen made a significant contribution to the seventeenth-century development of this doctrine by considering the Holy Spirit's function in the pactum salutis.


투루먼에 따르면, 이것은 “피셔와 벌켈레브의 업적들이, 배타적으로 성부-성자의 관계에 자신들의 주의를 기울임으로서, 구원의 경륜에 있어서 삼위일체에 미치지 못하는 근거를 발전시키고있다고 제기되는 이의에 대하여, 논쟁적 취약점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데 대한 분명한 삼위일체적 진보를 보여주는 핵심점”이었다.

This was, according to Trueman, "a point which represents a distinctly Trinitarian advance on the works of Fisher and Bulkelev who, with their exclusive attention to the Father-Son relationship were arguably vulnerable to the accusation of developing a subTrinitarian foundation for the economy of salvation."!!


오웬은 신격에서 각 위격의 구별된 역할을 조심스럽게 묘사함으로서, 구원의 삼위일체적 속성을 보여주고있다.

Owen was careful to describe the distinct roles of each Person in the Godhead, showing the Trinitarian nature of salvation.


성령에 관하여는, 처녀 마리아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잉태하신 것과, 성자가 성부께 자신을 내어드린 것과, 성자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도 성령을 통한 것이었다.

With regard to the Holy Spirit, it was through him that the Virgin Mary conceived the Incarnate Christ, that the Son offered himself to the Father, and that the Son was raised from the dead.


또한 성령은 택함받은 자를 그들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 효과적으로 연합케 인도하시며, 그들을 보존하신다.

The Spirit also brings the elect into union with Christ their Savior efficaciously and keeps them secure.

이와같이 오웬에게 있어서 구속 언약은 삼위 하나님 안에서의 언약이었으며, 이는 성부께서 자기에게 주신 이들을 위해서, 처음 아담의 행위 언약에 대한 범죄의 재앙적 결과들을 극복하고,  은혜 언약에 근거한 구속의 유익의 공로가 되신 둘째 아담이시며 언약적 대표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을 분명히 한 것이다.
Thus, the pactum salutis was for Owen an intra-Trinitarian covenant that made explicit Christ's role as the second Adam and federal head, who, on behalf of those given to him by the Father, overcame the catastrophic consequences of the first Adam's breaking of the covenant of works (foedus operum), and merited the benefits of redemption mediated in the covenant of grace (foedus gratiae).


오웬은, 자신의 시대의 많은 언약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구속 언약과 타락 이전의 행위 언약과 타락 이후의 은혜 언약 간의 필연적이고 핵심적인 연관성을 보았다.

As with many federalist theologians of his day, Owen saw a necessary and vital connection between the covenant of redemption and the pre-fall covenant of works and post-fall covenant of grace.


그의 구속 언약에 대한 관점은, 그가 전가된 능동적 순종을 이해하는 근거를 제공해주며, 영원한 과거로부터의 이와같은 언약이 없었다면, 그리스도는 은혜 언약 안에서 보증자와 중재자로 오시지 않으셨을 것이며, 성령은 택한 자를 그리스도께 연합시키지 않으셨을 것이다.  

His view of the pactum saluti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understanding of imputed active obedience, for apart from this covenant from eternity past, Christ would not have come as the surety and mediator in the covenant of grace, and the Holy Spirit would not have united the elect to Christ.

그리스도의 은혜 언약에서의 보증과 중재자로서의 역할에 있어서, 오웬은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에서 구속 언약에 대한 설명과 함께 자신의 주장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Christ's Role as Surety and Mediator in the Covenant of Grace Owen did not begin his case i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Faith with an explanation of the pactum salutis.


그보다 그는, 소위 말하는 “신자들의 화평과 순종의 진보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이러한 작업을 해야만하는 자신의 이유들과 목회적 관심사들에 관한 장문의 서문으로 시작한다.

He began, rather, with a lengthy introduction stating his reasons and pastoral concerns for taking up this work, namely, "the glory of God in Christ, with the peace and furtherance of the obedience of believers."


그는 칭의 자체의 의미는 물론이고, 의롭게하는 믿음의 속성과 목적에 관하여 여섯 장 가득히 이것으로 채우고있다.

He followed this with a full six chapters on the nature and object of justifying faith, as well as the meaning of justification itself.

그러나 오웬은 자신의 탐구가 일곱번째 장에 이르렀을 때, 종종 그래왔던 것과같이, 자신들을 위해서 이들 둘(교황주의자들과 소시니안들)로부터 과감하게 빌려오는 많은 침입자들은 물론이고, 교황주의자들과 소시니안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의한 칭의 교리를 반대하는 거대한 양대 무리라고 불리우는 이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전가의 속성에 관하여 좀 더 자세하게 다루기 시작한다.
When Owen came to the seventh chapter of his study, however, he began to deal with the nature of imputation more precisely.

Responding to what he called "the two grand parties by whom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the imputation of the righteousness of Christ is opposed; namely the Papists and the Socinians," as well as the "many interlopers, who, coming in on their hand, do make bold to borrow from both as they see occasion."

오웬은 낯선 의에 대하여 논한다.
Owen argued for an alien righteousness.


의는 우리 안으로부터 오기도하고, 혹은 우리 바깥으로부터 오기도한다.

Righteousness either comes from within us or from outside of us.


“한편으로는 전가의 근거가 우리 안에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이 안에 있는데: 이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In the one way, the foundation of imputation is in ourselves; in the other, it is in another: which are irreconcilable."


개인의 믿음조차도 이러한 근거가 될 수 없는데, 이는 만약에 하나님께서 단지 우리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면, 이는 은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의에 의한 것이며, 믿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행위에 의한 구원이다.

Not even one's faith can be this ground, for if God merely regards our faith as righteousness then it is ours by justice and not by grace, a salvation by works and not by faith.


그러므로 오웬은 결론 내리기를:

Thus, Owen concludes:

이러한 전가는 하나님의 'ex mera gratia,'- 단순한 사랑과 은혜의 행위로서; 이는 그리스도의 중재를 고려함으로서, 그리스도 자신의 것인, 진실되고, 실제적이며, 완전한 의를  믿는 모든 자에게, 효과적으로 인정하고 수여하시며, 이것들을, 그 자신의 은혜로운 행동으로 인하여, 그들을 죄로부터 죄가 없게하시며, 그들을 옳다고 인정하시며, 영생을 부여하심으로서, 그들의 것으로 여기시는 것이다.

This imputation is an act of God 'ex mera gratia,' —of his mere love and grace; whereby, on the consideration of the mediation of Christ, he makes an effectual grant and donation of a true, real, perfect righteousness, even that of Christ himself, unto all that do believe; and accounting it as theirs, on his own gracious act, both absolves them from sin and granteth them right and title unto eternal life.


그러므로 이러한 전가에 있어서, 그 자체가 우선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며, 그것의 어떠한 효과들은 아니며, 이것들이 이러한 전가로 인해서 우리들의 것이 된 것이다.

Hence, -in this imputation, the thing itself is first imputed unto us, and not any of the effects of it; but they are made ours by virtue of that imputation.

은혜 언약 안에서의 보증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중재는 신자에게 전가된 의를 제공해준다.
The mediation of Christ, as the surety in the covenant of grace, provides imputed righteousness for the believer.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의 여덟번째 장에서 오웬은, 보증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다른 것의 원인과 조건으로 삼는 것이며, 책임을 져야할 것이나 실행되어지는 것에 대한 답이되거나 담당하거나 갚는 것으로서, 이로인해서 자신이 정당하게 법률적으로 실행한 것에 대하여 책임지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In chapter eight of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Faith, Owen explained that a surety is "one that voluntarily takes on himself the cause and condition of another, to answer, or undergo, or pay what he is liable unto, or to see it done; whereon he becomes justly and legally obnoxious [i.e. liable] unto performance."16


보증자로서의 그리스도는, 보증자가 없었던 곳에서, 깨어진 행위 언약으로 인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필연이되었다:

Christ as surety was a necessity for our redemption due to the broken covenant of works, III which there was no surety:

아담과 맺어진 첫번째 언약에서는 보증자가 없었지만, 하나님과 사람은 언약의 직접적인 당사자였으며; 우리는 그 당시 모든 언약의 요구 조건들을 실행하고 응답할 수 있는 상태와 조건에 있었지만, 언약은 이미 깨어지고 무효화되었다… 실패하고 언약을 깨뜨린 이는 사람뿐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새언약을 만들 필요가 생겼으며...우리는 우리를 위한 보증자와 실행자가 있어야만 했다.
In the first covenant made with Adam there was no surety, but God and men were the immediate covenanters; and although we were then in a state and condition able to perform and answer all the terms of the covenant, yet it was broken and disannulled...It was man alone who failed and broke that covenant: wherefore it was necessary, that upon the making of the new covenant...we should have a surety and undertaker for us.

아담은 행위 언약 안에서 하나님께 완벽하고, 완전하고, 개인적인 순종을 드리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인류는 하나님께서 주시고자했던 종말론적 삶과 목표를 얻지를 못하였다.
Because Adam failed to render perfect, complete, and personal obedience to God in the covenant of works, humankind did not attain the eschatological life and goal for which God created them.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서 보증자과 실행자”로 보내주셨다.

Thus... God sent Christ as "a surety and undertaker for us."


오웬은 알미나안주의자인 Grotius(1583–1645), 소시나안주의자인 Schlichtingius(1592–1661), 그리고 17세기 영국 성공회 신학자이며 주교인 Hammond (1605–1660)등,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기보다는 하나님을 후원하거나 하나님을 위한 보증이었다고 주장하는, 대적자라고 분명하게 불리워지는 모든 이들을 대항하여,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면서 논쟁하였다.

In
using this language, Owen made an argument against the Arminian Grotius (1583–1645), the Socinian Schlichtingius (1592–1661), and the seventeenth-century Anglican theologian, Bishop Hammond (1605–1660), all of whom he explicitly named as asserting just the opposite, viz., that Christ was a sponsor or surety for God, rather than for us.


(대적자들의) 이러한 주장들과는 반대로, 오웬은 그리스도의 후원과 보증은, 구속 언약에 명시되고 은혜 언약에 적용되었던 것과 같이, 죄인을 위해 하나님께 향하여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위해서 죄인을 향하여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Contrary to these claims, Owen maintained that the sponsorship and surety of Christ, as prescribed in the pactum salutis and applied in the covenant of grace, was directed to God on behalf of sinners, and not to sinners on behalf of God.


오웬에게 있어서, 보증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은 그의 제사장직과 분리될 수 없었다: “그는 제사장으로서 보증자가 되셨으며, 이러한 직책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과 함께 하신 것이다.”

For Owen, Christ's role as surety was inseparable from his priesthood: "he is a surety as he is a priest, and in the discharge of that office; and therefore is so with God on our behalf."

이러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의 자신의 죽음을 포함하여) 자신의 사역을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성취하셨기 때문에, 칭의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전가는 불가능한 것이라는 소시니안의 주장에 대항하는 오웬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이었다.

This was important for Owen's case against the Socinian claim that the imputation of Christ's active and passive obedience in justification was impossible because Christ accomplished his work (including his death on the cross) for himself and on his own behalf.


오웬은 성육신의 모든 의미들이 구속 언약의 요구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것과 죄인들을 위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었다는 설명을 함으로서, (대적자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항하였다.

Owen opposed this claim by explaining that the whole point of the Incarnation was to fulfill the conditions of the pactum salutis and obtain salvation on behalf of sinners.


“인성의 신성과의 형언할 수 없는 연합”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죄성을 가진 인간을 위한 제사장과 중재자로서 행하시는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The "ineffable union between the human nature with the divine" is what qualified Christ to act as priest and mediator for sinful humans:

그러므로 그가 사람이 되시거나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신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정도로 언약의 보증이 되신 것과, 보편적으로 사람으로서는 율법에  대해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는 모세의 율법에 대하여 자신이 순종한 모든 것을 대표하신 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며, 이렇게 계획되고 실행된 것이며; 교회에 대한 관계가 없다면 자신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에게로 나셔서 우리에게 자신을 주셨으며; 우리를 위해서 사신 것이다; 즉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이들이 의롭게 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였으며; 이것이 보편적 교회의 믿음이다. 그리고 그가 우리를 위해서 하신 것은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다.

Whereas, therefore, he was neither made man nor of the posterity of Abraham for himself, but for the church—namely, to become thereby the surety of the covenant, and representative of the whole his obedience as a man unto the law in general, and as a son of Abraham unto the law of Moses, was for us, and not for himself, so designed, so performed; and, without a respect unto the church, was of no use unto himself. He was born to us, and given to us; lived for us; that "by the obedience of one many might be made righteous." This was the "grace of our Lord Jesus Christ;" and this is the faith of the catholic church. And what he did for us is imputed unto us.

다른 이들을 위해서 공인으로 보내심을 받으셨기에, 그리스도는 자신을 위해서 율법에 능동적으로 순종하신 것이 아니다. 그는 다른 이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법에 능동적으로 순종하신 것이다.
Sent as a public person on behalf of others, Christ was not actively obedient to the law for his own sake. He was actively obedient to the law of God for the sake of others.

하나의 신비한 인격: 전가의 주요 근거
One Mystical Person: The Principal Foundation of Imputation

오웬은 자신의 저서 여덟번째와 아홉번째 장에서, 전가의 주요 근거를 성령의 사역에 의한 전가라고 규정했다:

In chapters eight and nine of his study, Owen identified the principal foundation of imputation as the work of the Holy Spirit:



“이러한 구상에서의 주요 근거는,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의 신비적 인격이라는 것이며, 이러한 상태는 이들이 성령의 연합케하는 효능을 통해서 실질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The principal foundation hereof is, that Christ and the church, in this design, were one mystical person; which state they do actually coalesce into, through the uniting efficacy of the Holy Spirit."


성령이 창출해내시는, 이러한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 간의 연합은 필연적으로 이중 전가를 수반한다:

This union between Christ and his people, which the Holy Spirit creates, necessarily involves double imputation:


“그러므로 그가 하신 것이 마치 그들이 한 것처럼, 그들에게 전가된 것과 같이; 마찬가지로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할 죄가 그에게 책임지워진 것이다.”

"Hence, as what he did is imputed unto them, as if done by them; so what they deserved on the account of sin was charged upon him."


오웬은 자신의 주장을 견고히 하기 위해서, 어거스틴, 이레니우스, 시프리안, 아타나시우스, 유세비우스, 그리고 크리소스톰을 포함하는 여럿의 초대 교부들을 인용한다.

Owen quoted several of the early church fathers in support of his claim, including Augustine, Irenaeus, Cyprian, Athanasius, Eusebius, and Chrysostom.


그가 이것을 한 것은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이와같은 연합이 보편적 교회의 믿음이기에, 모든 세대에서도 이와 같아야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He did this in order to show that "such a union between Christ and believers is the faith of the catholic church, and hath been so in all ages."


또한 오웬은, 자신이 “다양한 유형들”에서 이와같은 신비적 연합을 가르친다고 믿고있는 성경의 여러 본문들을 인용한다.

Owen also referred to several passages in Scripture that he believed taught this mystical union in "divers kinds."

오웬에게 있어서, 성령께서 창출하시는 이와같은 신비한 연합은 구속 언약에 뿌리를 두고있는 것이다.
For Owen, this mystical union, which the Holy Spirit creates, is rooted in the pactum salutis:

이러한 연합의 처음 원천과 근거는, 그리고 그것의 모든 다른 근거들은, 타락한 인류의 회복과 구원에 관계한 성부와 성자 간에 있었던 영원한 협약에 자리잡고 있었다.
The first spring or cause of this union, and of all the other causes of it, lieth in that eternal compact that was between the Father and the Son concerning the recovery and salvation of fallen mankind.


여기에는, 다른 것들 가운데서, 그것의 효율성을 위해서, (이러한 연합의 근거가되는) 우리 본성을 떠맡는 것이 계획되었다.

Herein, among other things, as the effects thereof, the assumption of our nature (the foundation of this union) was designed.


나는 이러한 협약과 협의와 협정의 속성과 의미들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밝혔기에, 여기서는 이것에 대해서 다시 주장하지 않으려고한다.

The nature and terms of this compact, counsel, and agreement, I have declared elsewhere; and therefore must not here again insist upon it.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성부와 성자의 협의 안에서, 성령에 의해 효과적으로 이루어진, 무한한 지혜의 결과들이기에, 다른 모든 연합이나 어떠한 관계들로부터도 구분되어야한다.

But the relation between Christ and the church, proceeding from hence, and so being an effect of infinite wisdom, in the counsel of the Father and Son, to be made effectual by the Holy Spirit, must be distinguished from all other unions or relations whatever.

구속 언약을 완성하는데 있어서의 성령의 역할은, 그리스도와 신자들이 하나의 신비한 인격으로 연합되도록 하게 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었다.
The role of the Holy Spirit in the outworking of the pactum salutis was to cause Christ and believers to "coalesce into one mystical person.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신비적 몸의 일원이 되는 것은, 교회의 머리로서 모든 충만함으로 각 사람에 맞게끔 모든 신자들 안에 거하는 성령에 의한 것이다,

This is by the Holy Spirit inhabiting in him as the head of the church in all fullness, and in all believers according to their measure, whereby they become members of his mystical body."


“그리스도와 신자들이 하나의 신비적 인격이며, 하나의 영적으로 생기가 불려넣어진 몸과, 머리와 일원들인 것”은 성령에 의한 것이다.

Because of the Holy Spirit, "Christ and believers are one mystical person, one spiritually-animated body, head and members."

오웬은 그리스도와 신자들 간의 이러한 신비한 연합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전가라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믿었다:
Owen believed that this mystical union between Christ and believers resulted in the imputation of Christ's active and passive obedience: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속죄와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직접적인 근거가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기에; 이를 근거로 우리는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행하신 것과 고통받으신 것을 우리에게 승인하고 기증하시고 전가시키심으로, 우리가 그 안에서 행하고 고통받은 것으로 여겨질 것이며...이는 우리의 것이 될 것이며: 이 모두는  우리가 주장하는 것이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으로 그와 함께 하나의 신비한 인격으로 이끄는 우리의 실제적인 하나됨이다. 여기에 처음부터 믿음의 필요성이 기대되었던 것이다.
God hath appointed that there shall be an immediate foundation of the imputation of the satisfaction and righteousness of Christ unto us; whereon we may be said to have done and suffered in him what he did and suffered in our stead, by that grant, donation, and imputation of it unto us... that it may be made ours: which is all we contend for. And this is our actual coalescency into one mystical person with him by faith. Hereon doth the necessity of faith originally depend.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 의롭게 되는데, 이는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다.
Thus, believers are "made righteous by the righteousness of Christ, which is not inherent in us, but only imputed unto US."

결론
Conclusion

오웬에게 있어서, 신자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으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서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For Owen, Christ's passive obedience imputed to the believer was not enough for a right standing before God.


그는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한 순종과 이것이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 같은 목적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칭의를 위해서 자신이 받으신 율법의 형벌의 고통과 이것이 우리에게 전가된 것보다도 결코 덜 필요한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He said, "The obedience of Christ unto the law, and the imputation thereof unto us, are no less necessary unto our justification before God, than his suffering of the penalty of the law, and the imputation thereof unto us, unto the same end."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하나님의 계명의 율법으로 인해서, 오웬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단순한 고통 이상의 것이 필요하며, 이것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믿었다.

Because the law of God commands, "Do this and live," Owen believed that "we have need of more than the mere sufferings of Christ, whereby we may be justified before God."3l


단순한 용서와 무죄 선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Mere pardon and acquittal is not enough.


오직 완전한 의만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만하다.

Only perfect righteousness merits God's approval.

오웬은 구속 언약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하나의 신비적 인격체가 된 신자에게, 그리스도의 이와같은 능동적 의를 전가시키셨다고 믿었다.
Owen believed that, because of the pactum salutis, God imputed this active righteousness of Christ to believers who are coalesced with him into one mystical person.


그리스도와 그의 택한자의 이러한 신비적 연합을 이해함으로서, 오웬은 결코 칭의와 성화의 연대적 순서와 구분을 혼합시키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직 믿음이라는 고백과 개혁주의 공식으로부터도 일탈하지도 않았다.

By understanding this mystical union of Christ and his elect as the principal foundation of imputation, Owen in no way conflated the chronological order and distinction of justification and sanctification, nor deviated from a confessional, Reformed formulation of sola fide.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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