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란개혁주의 2023. 12. 9. 15:35

데이비드 엥겔스마가 말하는 헤르만 바빙크와 그의 신학

번역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들어가는 말

데이비드 엥겔스마는 미시간 그랜빌Grandville, Michigan에 있는 PRS(Protestant Reformed Seminary)신학교 교수로서 존 볼트, 조엘 비키와 함께 화란개혁주의 번역협회The Dutch Reformed Translation Society (DRTS)번역위원으로 활동하고있다.

바빙크는 카이퍼와 함께 화란개혁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인물이다.

화란개혁주의는 사회변혁이라는 과제를 안고서 문화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One-Kingdom을 추구하는데 이는 북미 웨스트민스터 대학을 중심으로한 Two-Kingdom개념의 Escondido 신학과 대조를 이루고있다.

Escondido 신학에서는 아담이 범죄한 날 죽었다는 개념 아래서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강조하고있다.

“ Yet what many often miss is the significance of being cast out of the garden- temple of Eden. To be exiled from the presence of God was akin to death itself. In this sense, Adam surely did die on the day that he was exiled from the benevolence presence of the Lord”
(The Law is not of Faith’ by Bryan D. Estelle, p7)

“우리가 흔하게 범하는 실수는 성전으로서의 에덴동산에서 쫒겨났다는 것의 심각성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의 현존으로부터 쫒겨났다는 것은 죽음 그 자체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아담은 하나님의 선하신 현존에서 쫓겨난 날에 분명히 죽은 것이다.”

에덴 바깥에서의 아담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육신은 살아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은 자라고 말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바빙크는 아담이 범죄한 날 죽지 않고 오랜 시간을 더 살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바빙크의 일반 은혜 이론은 죽은 자의 이론이 아니라 산 자의 이론인 것이다.

로마 카톨릭은 타락한 인간이 영적으로 죽은 존재이며,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로마카톨릭의 자연 신학은 인간의 지식과 노력에 의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있다.

인간이 자연신학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제한될 때 성경이라는 특별계시를 보충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바빙크와 함께 화란 개혁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카이퍼 역시 로마 카톨릭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카이퍼의 자연에 대한 존중은 카톨릭 철학자 프란시스 폰 바더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Schlatter와 Kuyper는 모두 독일 관념론 철학의 이원론적 성향을 거부한 바더에게 많은 빚을 지고있다. Friesen은 Kuyper가 “바더에게서 식별한다… 이원론에 대한 반대를” 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Schlatter는 “얼마나 단호하게 바더는 우리에게 통일성을 요구하는 규범에 순종함으로서, 신학에서 자연을 무시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지" 덧붙입니다.”
Both Schlatter and Kuyper owe a great deal to Baader in their rejection of the dualistic tendencies of German Idealist philosophy. Friesen explains that Kuyper “identifies in Baader . . . the opposition to dualism,” and Schlatter adds, “how valiantly does Baader obey the norm that demands from us the unity, and does therefore not allow for a neglect of nature in theology.”
(The Kuyper Center Review VOLUME 3 Calvinism and Culture
Edited by Gordon Graham WILLIAM B. EERDMANS)

카이퍼와 그 후예인 도예베르트의 사상을 연구하던  J. Glenn Friesen은 카이퍼와 도예베르트의 사상의 뿌리가 카톨릭 철학자 Franz von Baader(1765-1841)의 기독교 신지학(Christian Theosophy)에 있음을 밝힘으로서 카이퍼의 문화에 관한 사상이 카톨릭의 영향을 받았음을 주장한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신칼빈주의의 핵심 개념은 칼빈에서 온 것이 아니며 개혁주의를 근거로하고있지 않다. 그것들의 원천은 프란츠 폰 바더(1765-1841)의 기독교 신지학인 것이다."
"The key ideas of Abraham Kuyper’s Neo-Calvinism do not come from Calvin or from Reformed sources. Their source is the Christian theosophy of Franz von Baader (1765-1841)."(courtesy of Steve Bishop's "An Accidental Blog"의 글에서 인용
https://m.blog.naver.com/penthos7/220409104183

화란개혁주의의 후예인 도예베르트 또한 로마카톨릭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기독교 철학자 Herman Dooyeweerd(1894-1977)는 (카이퍼와) 동일한 출처에 의존했는데 그의 사상을 바더의 사상과 비교해보면 그의 철학이 기독교 신지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중 많은 부분이 다시 언급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The Christian philosopher Herman Dooyeweerd (1894-1977) relied on the same sources, and when we compare his key ideas to Baader’s (in Part 3 of this book), it is evident that his philosophy is rooted in Christian theosophy and restates many of its ideas.

화란개혁주의의 이러한 배경은 엥겔스마의 강연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엥겔스마는 헤르만 훅세마가 카이퍼의 일반은혜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서 CRC를 떠나서 세운 개신교 개혁교단(PRCA)에 소속된 교수이자 목회자이다.

그의 바빙크 비평는 헤르만 훅세마와 마찬가지로 그가 카이퍼의 일반은총 개념을 거부하였을 때 사용하였던 “역사적 문제"를 거부하는 “추상적 사고"의 범주에 속하여있다고 할 수 있다.

코르넬리스 반틸은 이러한 추상적 추론이 실질적인 사람의 책임을 무효화시키는 잘못을 범하고있다고 비평한다.

코르넬리스 반틸은 카이퍼의 일반은총 개념뿐만이 아니라 이를 거부하는 헤르만 훅세마의 추상적 사고마져도 비판한다.

이러한 반틸의 비평을 기억하면서 비록 엥겔스마의 바빙크 비평에 대한 글을 번역하지만 객관적 판단은 읽는 독자의 관점으로 귀결되어야할 것이다.

다음은 일반은혜에 관한 주제 발표에서 바빙크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엥겔스마의 강연을 번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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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엥겔스마가 말하는 헤르만 바빙크와 그의 신학


다음은 2012년 3월 6일 캘리포니아 레드랜즈에서 개최된 개신개혁교단 임직자 총회에서 행하여진 강연을 확장시킨 문장이다. 이 문장은 2012년 11월에 발간된 개신개혁신학저널 46권, 11월호 3-43쪽에 실린 것입니다.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이 화란개혁번역협회에 의해서 영어로 처음 번역되었을 때(네번째 마지막 책은 2008년에 출간되었다) 북미에서는 일종의 바빙크 르네상스가 일어났습니다. 만약에 개혁교회들과 신학자들이 바빙크의 교의학에 있는 건전하고 견고한 개혁주의 교리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 교리들이 교회와 신학자들의 가르침을 비평하고 수정하고 정보를 제공해준다면, 이는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일은, 개혁교의학에 있는 건전한 교리들은 대부분 무시되었거나 의도적으로 잘못 전달되었는데, 특히 바빙크의 은혜 언약 교리에서 그러하였습니다.

또한, 교회, 신학자, 교육기관들은 개혁교의학에 있는 잘못된 교리들을 가지고,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들, 특히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교리를 강조해 왔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유명한 바빙크 협회도 대체로 개혁교의학에 설명되어있는 바빙크의 개혁교리들은 무시하는 대신에 초교파적 연대와 심리학과 문화에 대한 바빙크의 관점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이는 개혁교의학의 마지막 영역본이 출간된 직후에 프린스턴 신학교의 지원을 받은 바빙크 협회의 실상입니다.

이는 사실 칼빈신학교와 화란개혁번역협회에서 동시에 지원을 받고있는 바빙크협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은 구별된 개혁주의 교리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연설들은 매우 드물며, 실제로는 전무한 상태이다. 대부분의 연설은 교회의 연합과 문화의 기독교화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화란개혁번역협회에서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을 번역하고 출판하는데 있어서 10만불 이상의 비용과 수 많은 시간들을소요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때 이는 아니러니한 것입니다.

이와같이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이 무시되는데에는 바빙크 자신에게도 부분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그의 교리적 작업에는 늘 강력한 문화적 언급이 있어 왔습니다. 그의 생애와 사역의 마지막 10년은 문화에 대한 이와같은 관심이 사실상 그의 유일한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제안하는 두 개의 소논문을 썼는데, 이는 문화변혁에 있어서 교회로 하여금 불신자들과 협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장로교인, 개혁주의 기관들과 신학자들이 바빙크의 문화에 관한 저술들은 좋아하면서 그의 신학을 무시하는 것이 보편화되어있는 것에 대한 주된 이유는 이러한 기관들과 신학자들이 자신들이 바빙크의 네 권의 교의학을 고백하고 변론하는 것과 같이, 개혁주의 전통의 건전한 교리에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 반면에 이러한 기관들과 신학자들은 문화와 초교파적 연대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강연할 이 컨퍼런스는, 바빙크 자신에 관한 실질적 중요성이 아니고,  개혁교의학의 개혁주의 교리와 기념비적인 개혁교의학의 실질적 중요성에 관하여 전념하는 첫번째 바빙크 컨퍼런스가 될것입니다.

이번 컨퍼런스에서 우리는 헤르만 바빙크의 신학을 다루려고 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단순히 학문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빙크에게서 그들이 고백하고, 설명하고, 변론하고, 발전시키려는 것과 같은 개혁주의 신앙의 영광스러운 진리들로부터 배우고 유익을 얻기를 원합니다. 개혁신학을 망치려는 부분에 있어서는 그 결함과 잘못은 노출되고 거부 되어야할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특히 개신교 개혁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개혁교의학의 건전한 교리들을 유지하고 더욱 발전시키려는 것입니다.

이 첫 번째 강연에서 저는 "바빙크와 그의 신학"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저는 단순히 여러분에게 헤르만 바빙크의 생애와 인성의 두드러진 면을 이야기하고,  개혁교의학의 내용인 그의 신학을 요약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대신에 그 자신과 그의 신학, 삶, 그리고 교의학을 다루려고합니다.

바빙크와 그의 삶에 대한 지식을 얻는데 있어서 저는 주로 화란에서의 바빙크에 대한 세가지의 가장 중요한 전기와 연구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즉 V. 헵의 헤르만 바빙크; R. H. 브레머의 Herman Bavinck als Dogmaticus 그리고 R. H. 브레머의 Herman Bavinck en Zijn Tijdgenoten입니다.

저는 또한 영어로된 유일한 바빙크의 전기인 론 글리슨의 "헤르만 바빙크"를 읽었습니다. 비록 평론가들로부터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글리슨이 저술한 바빙크의 생애는 심각한 결점이 있습니다. 눈에 띄는 것은 반카이퍼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화란의 (자유)개혁교회와 이들의 신학에 도끼는 갈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오타들이 있었으며, 분노적으로 잘못된 언어들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저자가 마음에 품고있는 언어와도 같이 들렸습니다. 예를 들자면 바빙크는 "고소인의 외침으로 하나님께 탄원"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이 묘사되고있습니다. 또한 "참된 종교는… 절박하신 하나님을 가르쳐야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카이퍼는 어떠한 도전도 중재하려고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또한 사실에 부합하지 않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살고있는 사람이 옛날 화란에서 기록된 인물을 점검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화란의 거대한 개혁교회에서 1899년의 그로닝겐 총회에 대규모로 참여한 대의원의 수가 고작 8명이었다는 글리슨의 지적은 매우 신빙성이 없는 것입니다.

더욱 심각한 오류는 교리에 있습니다. 글리슨은 언약과 선택이 밀접하게 관계하는 교리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관된 가르침이었으며, 이러한 교리는 전적으로 강령에 대한 선택후타락설이라는 관점을 가져오게되며, 이러한 교리는 결과적으로 "대부분 믿음에 의한 칭의와 구원에 있어서 하이퍼칼비니즘의 관점"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글리슨의 제시는 여러가지 면에서 잘못된 것입니다. 카이퍼뿐만 아니라 바빙크도 언약과 선택의 밀접한 관계를 가르쳤으며, 실제로 선택이 언약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바빙크는 카이퍼의 강령에 대한 타락전선택이라는 관점을 공유하지는 않았더라도 이러한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과 언약적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의 의지와 분리시키기를 거절하는 것이 하이퍼칼빈주의도 아니며, 하이퍼칼빈주의로 이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선택과 언약이 밀접하게 관련되는 교리는 순수하고 건전한 칼빈주의입니다.


이 강연을 준비하면서 컨퍼런스에서의 범위는 광범위하지만, 저 자신은 바빙크 생애에 있었던 한가지 경고를 마음에 간직했습니다. 헵은 캄펀에서  바빙크의 기독분립개혁교회(1834년 분리 교회) 신학교의 신학교수 임명식 공식 행사에서, 교수들이 취임 연설을 하는데 있어서, 바빙크보다 앞서서 새로 교수로 지명된 분이 1월의 심한 추위에서도 3시간 넘게 강연했던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빙크는 이러한 지나친 행동에 대하여 매우 분노하면서, 그의 동료교수의 강연 도중에 강당을 뛰쳐 나가는 소란을 피웠습니다. 오직 그의 연로하신 아버지와 일부 친구들만이 그에게  자신의 강연 ("거룩한 신학의 과학")을 하라고 설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목소리의 어떠한 억양도 없이 가능한 빨리 읽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바빙크는 악명높게 평화적이었습니다.

이는 제 청중들에게 반드시 해당되는 것이 아니기에, 저는 이 강연을 세 시간 이내에 마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바빙크의 삶의 중요한 면들

헤르만 바빙크는, 1834년 흐로닝언의 울룸에서 헨드릭 콕 목사의 가르침과 파면으로 시작된 화란의 개혁교회의 멋진 개혁이 있었던 분리파 교회의 아들이었습니다. 1903년 암스테르담의 자유대학으로 캄펀을 떠나면서 바빙크는 자신에 대하여 "나는 분리파 교회의 아들이며, 그곳에 남길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바빙크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분리파 교회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신학, 특히나 개혁교의학에서의 신실함과 따스함과 그의 은혜언약 교리의 건전함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헤르만 바빙크는 1854년 태어났는데, 이 해는 분리교회가 시작된지 20년이 지난 해였으며, 기독분리개혁교회의 교단 교회가 캄펀에 신학교를 개설한 해였으며, 바빙크는 후에 이 곳에서 수 년동안 교편을 잡게 됩니다.

그의 부친 얀(Jan)은 경건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으며, 그는 드 콕의 제자로서 1840년에 회심을 하였습니다. 얀 바빙크를 회심시킨 설교자는 분리파 교회에서 회복된 복음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화란 당국에 의해서 30여번 투옥 되었습니다. 바빙크는 이와같은 논쟁적 분위기에서 양육되었습니다. 헤르만 바빙크의 부친은 그 자신이 어떠한 형태든 최초로 공식적인 신학교육을 받은 분리교회의 목회자였습니다.

헤르만 바빙크가 1883년 1월 캄펀에 있는 분리파 신학교에 교수로 임명되었을 때, 교수단에는 헬레니우스 콕과 엔서니 브루멜캠프와 시몬 반 벨젠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첫번째 인물은 분리파 교회를 설립한 저명한 헨드릭 드 콕의 아들이었으며, 마지막 두 분은 저명한 "분리파의 아버지"이셨습니다.

바빙크는 그 당시 여전히 활기차고 강력한 분리파 전통의 심장부에서 태어나고 양육되었습니다. 분리파의 신학과 정신이 바로 그가 숨쉬었던 공기였습니다. 분리파의 "정신"이라는 것은 분리파의 경건과 개혁주의 신앙고백과 존 칼빈의 가르침에 전심으로 헌신하는 것과 핸드릭 드 콕이 그렇게 날카롭게 비난하였던 신학적인 현대주의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리파의 아들은 세상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이 끌림은 마치 바빙크가 발견한  하나님없이 사는 삶이 주는 쾌락과 같은 도덕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더군다나 그 자신이 부도덕한 삶을 살지도 않았습니다. 바빙크의 개인적 삶은 거룩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그는 자신의 시대에 유럽 사회의 행동방식을 맹비난하는 논문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브레머에 의하면, 분리교회의 일부 교인들이 자신들의 신앙고백에 대립되는 조심성없고 사악한 삶을 사는 것이 바빙크에게는 눈의 가시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빙크는 이러한 세상의 가르침 즉, 자신의 시대와 과거 시대의 학식있는 사상가들의 지혜와 과학적 이론들, 예를 들면 자신과 동시대 사람인 찰스 다윈의 진화론과 심지어는 어떤 면에서는 불신자로서의 현대신학자의 신학적 지혜에 마음이 이끌렸습니다.

바빙크는 이러한 세상의 지혜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지혜에 마음의 문을 열어놨습니다. 그는 개혁주의 신앙이 이러한 세상 지혜를 수용할 수 있고 또한 수용하여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개혁주의 신학이 세상 지식에 영향을 줄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일부 사람들이 "두 사람의 바빙크"를 말하는 이유입니다. 헵은 바빙크 안에서 긴장감이나 이중성을 인식하였지만 "두 사람의 바빙크"는 정확한 묘사가 아니라고 부인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말하는 바빙크의 영혼에서의 이러한 "이중성"은 개혁교회의 아들로서의 사고와 세상의 지혜가 모두 사실이고 수용되어야 한다는 사고 사이에서의 충돌로서, 우리가 앞으로 살펴볼 바빙크의 신학에 해로운 영향을 끼쳤습니다.

바빙크가 세상적 사고에 의존하면서 발견한 것들은, 그가 자신의 (그리고 카이퍼의) 일반은총의 신학으로 설명하였습니다.

바빙크는 이미 젊은 사람으로서 이러한 세상의 지혜에 대한 끌림을 보여주었고 또한 이에 따라 행동하였습니다. 그는 캄펀의 독립교회신학교에서 오직 1년간 훈련을 받은 후에, 독립교회에서 목회를 준비하면서, 완전한 현대주의 신학교인 (40여년 전에 그의 교회가 잘못된 교회라고 여기고 독립하였던) 국립개혁교회 신학교에서 자신의 신학 훈련을 완성시키기로 결정합니다. 레이든의 교수들은 불신자들이었으며, 화란의 모든 이들이 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육체의 부활을 부인했며, 분리교회의 핵심으로 간직되어지고있는 칼빈주의 은혜교리들을 경멸했으며,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이와같은 계통에 있는 이들로서는 숄튼, 쿠에넨, 라우벤호프등이 있습니다.

바빙크가 자신의 신학교훈련을 캄펀이 아니라 레이든에서 마치기로 결정한 일은 마치 개신개혁교회(PRC)에서의 목회자 지망생이 개신개혁신학교를 거부하거나, 심지어는 칼빈신학교를 거부하고 시카고 신학교를 지망하여 폴 틸리히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바빙크는 스스로 자신이 레이든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는 작은 독립교회의 신학교에서의 신학교육은 열등하고 불만족스러운 것이라고 판단하였으며, (그리고 이는 많은 욕망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특히나 교의학의 중요한 분야에 대하여 그러하였습니다), 그리고 "레이든에서의 나의 연구를 점진시키고, 우선적으로 현대 신학을 배우겠다는 강한 욕망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설명하고있습니다.

바빙크의 Magnalia Dei, 즉,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놀라운 하나님의 큰 일The Wonderful Works of God
"을 "우리들의 합리적인 믿음Our Reasonable Faith"이라고 영어로 번역한 기독개혁교회의 번역가는 바빙크의 레이든에서의 신학교육의 유익에 대하여 극찬하고있습니다.

레이든에서의 훈련은 바빙크에게 매우 유익했다. 정통개혁주의 기독교에 대한 견고한 신학적 학식에 대한 개념은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서 그의 삶에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종교 사상에 대한 그의 친밀한 지식은 그의 칼빈주의에 대한 확신을 깊이있게 해주었을 뿐만이 아니라 그가 신학 전문가로서 그 당시의 문제들을 실질적으로 다룰 수 있었기에 (레이든에서의 훈련이 바빙크에게)  적합한 것이었다.

바빙크 자신은 복음 사역에 있어서 이러한 현대주의자의 훈련이 자신에게 미쳤던 영향에 대하여 좀 더 솔직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레이든은…종종 나를 매우 빈약하게 만들었으며, 나에게서 내가 알고있었던 많은 것들을 빼앗아 갔지만…, 나중에는 나 자신의 영적인 생활에, 특히나 설교를 하여야할 때에, 꼭 필요한 것이었음에 감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다음에 그가 추가로 언급하고 있는 것과 같이, 바빙크는 현대주의 신학교가 성경의 영감에 대하여 의문을 던지고있다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레이든이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그들이 사도들의 글(즉, 성경)에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어린아이와 같은 신뢰가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바빙크가 성경에 관한 의심으로 심각하게 몸부림쳤던 것은 바빙크가 레이든에서 받았던 훈련의 영향이었습니다. 바빙크가 자신의 성직자로서의 경력을 처음 시작하였던 프라네커에서의 짤막한 목회 사역 동안에, 바빙크는 친구에게 자신이 성경에 대한 의심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외적으로는, 회중들에는, 그는 확신에 찬 "화란개신교목사"가 되어야만 했고; 내적으로는 의심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성경과 관련한 이러한 의심과의 몸부림은 그의 사역 내내 지속되었습니다. 이러한 몸부림에 대해서 헵은 "바빙크의 영적 존재의 이중성"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 관한 의심은 바빙크의 노년에 점차 증가되고 있었습니다. 암스텔담의 자유대학교에서 교수로서의 그의 사역의 마지막 단계에서 바빙크는 거의 완전한 회의론에 굴복한 상태였습니다. 바빙크의 학생이었으며 동시에 친구였던 햅은 바빙크가 자신의 생애 말년에 어느날 그에게 "매일같이, 나는 점점 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에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갈 뿐이네"라고 한 이야기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브레머가 언급한 바와같이 1920년 리우아르덴 회의에서 바빙크가 개혁교회는 성경에 관한 세밀한 연구에 관하여 신앙고백 조항(참조 조항은 벨직 신앙고백 2-7항)을 만들어야할 것을 제안하였던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관련된 이러한 의문은 바빙크가 사역의 마지막 10년동안 자신의 저술들 가운데 성경을 설명하거나 혹은 심지어 성경을 다루는 작업이 아무 것도 없었다는 의아한 사실을 설명해 주는 것 같습니다.

제가 나중에 입증해드릴 것이지만, 성경에 관계된 의구심은 개혁교의학에서 성경을 다루는 그 방식에서 알수가 있으며, 의심의 여지없이 그의 자유대학교에서의 신학생들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물론이고 화란의 개혁교회에서의 가르침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화란개혁교회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성경에 관한 이러한 의구심은 전 세계의 개혁교회로 퍼져나갔습니다.

브루멜캠프는 자신이 바빙크의 아버지에게, 어린 바빙크를 레이든에서 목회 훈련을 받게하는 것이 "당신은 당신의 아들을 사자굴에 집어넣는 것"이라고 언제 경고적으로  이야기했는지에 관하여 알고 있었습니다.

바빙크는 레이든에서 6년(1874-1880)이라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1880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이는 분리파 교회의 목회자들 가운데 최초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고등 비평 구약학 교수인 아브라함 쿠에넨과 특별히 친밀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의미심장하게도 바빙크는 사역 내내 자신의 서재에 쿠에넨의 초상화를 걸어놓았습니다. 또한 바빙크는 레이든에 있는 동안에 스노우크 후르그롱제Snouck Hurgrondje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학교동무와 매우 가까운 친분을 유지했습니다. 비록 스노우크는 철저한 현대주의자였으며, 그 상태에 변함이 없었지만, 바빙크는 자신이 사는 동안에 스노우크와 친밀한 우정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빙크가 레이든을 떠난지 9년이 지난 후에 레이든 대학교의 신학부에서는 불신자인 라우벤호프의 후임자로서 바빙크를 임명할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는 것은 바빙크의 능력 뿐만이 아니라 현대주의에 관한 그의 불분명한 태도에 관하여 무언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바빙크와 또한 다른 이들도 바빙크가 후임자 가운데 최종 후보자였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바빙크가 분리교회에서의 사역을 위한 후보자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전에, 분리파 교회에 의해서 치뤄지는 시험에서 일어났던 일을 생략한다면, 바빙크가 레이든에서 받았던 교육을 무시하는 것이 완벽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분리교회의 원로 설교가인 J. F. 불렌스 반 바르세벨트(그의 이름은 이러한 경우에 한 그의 행동으로 인하여 명예롭게 남아있을 것입니다)는 바빙크에게 마태복음 15장 14절 산상설교의 처음 부분(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에 대하여 설교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바빙크는 불렌스의 이러한 선택이 바빙크의 레이든 교수들을 염두에 둔 것이었음을 충분히 인식함으로서, 몹시 화가 났습니다. 처음에는 바빙크는 이러한 요구를 거절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그의 친구들은 그가 마음을 바꾸어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바빙크가 설교에 대한 서문에서 꺼낸 말은 "이러한 본문이 왜 바로 저에게 과제로 주어졌는지에 대한 이유를 생각해내기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였습니다.

바빙크가 레이든에서 찾고자 했던 신학교육은 소위 독일 사람들이 말하는 "Kulturtrieb
즉 문화에 대한 강렬한 원함"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는 바빙크에게 평생에 걸친 강력한 원동력이었습니다. 문화에 대한 이러한 강렬한 원함으로 인하여 바빙크는 문화를 자신의 시대에 더욱 적합화시키고자하는 충동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이러한 문화에 대한 강력한 충동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개념에 대한 바빙크의 열정을 정당화시켜 주지는 못하지만,
설명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바빙크는 처음에는 기독분리개혁교회가 아브라함 카이퍼의 애통교회와 연합되어지는 1892년까지 활발하게 목회 사역을 하였으며, 이는 화란의 개혁교회(GKN)에서 바빙크가 임종을 맞이한 1921년까지 지속되었는데, 바빙크는 이때까지 한 번의 짧은 목회직과 신학교에서의 두 번의 기다란 직책, 즉 캄펀에서의 분리교회신학교와 암스테르담에서의 자유대학교에서 사역을 하였습니다.  

바빙크는 영광스러운 프리스란트  지방의 프라네커에서 2년이 좀 안되는 매우 짧은 기간동안 목회자로서의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바빙크는 레이든을 졸업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1881년 초에 목회자로 임명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바빙크는 좋은 설교자였지만, 목회자로서 아이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는 것과 같은 사역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습니다.

바빙크의 목회사역에서 주목할 점은, 바빙크의 짧은 목회 기간과 특히나 설교를 준비할 때 성경과 관련된 의심과 싸우는 것에 더하여, 바빙크가 프레네커의 목회자가 되기 바로 전에, 프레네커의 회중들에게는 1851부터 1875년까지 K. J. 피터스(Pieters)라는 목회자가 사역을 하였습니다. 피터스는 그의 동료 J. R. 크로일렌(Kreulen)과 함께, 모든 세례받은 어린이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새롭고 이단적인 조건적 언약 교리를 분리파 교회에 도입한 분리파 교회 목회자였습니다. 피터스와 크로일렌은 언약과 구원이 선택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을 부인하였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으로 인해서 이 두 사역자는 프레네커의 피터스의 회중에게서, 그리고 교단에서 논란의 풍파를 일으키게 됩니다. 피터스와 크로일렌은 1861년에 발간된 De Kinderdoop이라는 책에
자신들의 언약교리를 공표하였습니다.

더군다나 피터스는 술꾼이었습니다. 몇번이고 그는 당회에서 경고를 받았으며, 그리고 수차례에 걸쳐서 공공장소에서 만취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장로들에게 모두가 아주 자유롭게 주정을 사용해도 된다고 허락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개혁교회 장로들은 진상 파악을 하게 되었으며, 피터스 목사가 아주 자유롭게 만들어 사용하였던 주정의 상표가 Schiedammer라는 진gin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당회에서는 피터스를 파면하였으며, 그 결과 피터스는 회중을 쪼개어서 한 동안 독립 사역을 지속하기도 하였습니다.

바빙크는 자신의 선임자가 신조에 따라 가르치지 않은 것과 사실상 신조와 불일치한 것에 대하여 심각하게 비판하였습니다. 바빙크는 자신의 친구인 스노우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돠 같이 썻습니다. "수년동안 여기 프레네커에는 한 설교자가 있었는데, 그는 우리 교회 전체에서 결정적으로 예외였네. 특히나 지적 능력이 뛰어난 그는 우리의 신앙고백에 동의하지 않았고 이를 무시하고 자신이 원하는대로 가르쳤다네." 이것이 바빙크의 피터스와 크로일렌의 언약교리에 대한 판단이었으며, 결과적으로 피터스와 크로일렌이 (자유)개혁교회의 언약교리에 고의적으로 채택한 언약교리였다는 것이 바빙크의 판단이었습니다.

바빙크는 개혁교의학에서 언약과 교리에 관한 부분을 다루는데 있어서, 그는 피터스와 크로일렌의 교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빙크는 이 교리를 거부하고 반대로, 특히나 세례받은 신자의 아이들에 있어서, 선택이 언약을 지배한다고 가르쳤습니다.


1882년에 분리교회의 총회에서는 바빙크를 캄펜에 있는 신학교의 교수로 임명하였습니다. 바빙크는 28세 밖에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는 신학교에서 1902년까지 거의 20년 동안 주로 교의학을 가르쳤습니다. 그가 캄펀에 있는 동안에 그의 학부 동료들로는 헬레니우스 드 콕과 반 벨젠과 브루멜캠프가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광범위한 독서를 하고 깊이 생각하고 자신의 대작인 네 권의 개혁교의학을 집필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개혁교의학의 마지막 권은 1901년에 발간되었습니다.

바빙크는, 비록 처음에는 카이퍼의 절대 권한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서 분리파 교회가 카이퍼의 애통교회와 연합하는 것에 대하여 의심을 품었지만, 나중에는 연합에 대한 열광적인 주창자가 되었으며, 연합이 결실을 맺기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바빙크는 캄펀에 있는 동안 자유대학교에서 가르칠 것을 3번이나 부탁 받았습니다. 자유대학교에서는 카이퍼와 또한 학교 권위자들이 바빙크의 신학적 능력을 인식하였으며, 그가 자유대학교의 학부로 와줄 것을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빙크는 분리교회의 신학교를 좋아하였기에, 청빙을 두 번이나 정중히 거절하였습니다.

또한 바빙크는 캄펀에 있는 동안인 1891년에 조안나 아드리아나 쉬퍼스와 결혼을 하였으며, 이 때 바빙크는 장성한 서른일곱이었으며, 그의 아내는 젊은 스물세살이었습니다. 이들은 딸 하나를 두었습니다.

1902년에 바빙크는 자유대학교에서 교의학을 가르쳐달라는 청빙을 수락했습니다. 이는 화란의 수상이라는 낮고 비천한 자리로 이직을 한 카이퍼 자신을 대체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바빙크의 나이는 48세였습니다. 여기서 바빙크는 이상하게도 자신의 강좌를 가르치는 것을 제외하고는 신학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방대한 신학 장서들을 처분하면서, 이는 “나에게는 더 이상 이와같은 책들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말하였습니다.

1911년 이후에는 바빙크는 다른 분야, 특히 심리학이나 교육과 같은 다른 분야에서는 많은 책을 썼지만, 다른 어떠한 신학 책도 쓰지 않았습니다. 바빙크는 자신의 여생을 "심리학이 중심에 있는 연구"에 헌신하기 위해서 신학 교수직을 포기하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바빙크의 삶과 사역의 말년에는 바빙크 자신의 영적이며 심리적인 태도가 눈에 띌 정도의 분명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었읍니다. 그는 침울하고 우울하며 침체된듯 보였습니다. 바빙크를 개인적으로 잘 알고있던 헵은 자신의 스승이며 친구인 그를 "그는 문제들로 인하여 고통스러워 했읍니다"라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헵에 따르면 바빙크가 고통스러워했던 문제는 다음 세 가지였습니다: (1) 유럽 사회의 미래;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후의 바빙크의 죽음; (2) (바빙크가 생각하는) 성경의 문제; (3) 문화의 문제 등입니다. 문화의 문제에 관해서는, 문화는 고통스러워야할 뿐만 아니라, 세상 문화가 기독교화 될 수 있고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이들을 절망에 빠뜨린다는 것입니다.

바빙크는 1921년에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 바로 직전에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고서 "나의 학식은 아무 소용이 없었으며, 나의 교의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의 믿음 뿐이었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제가 바빙크 신학의 강점과 약점을 살펴보기 이전에 저는 바빙크의 삶의 다양한 면을 관찰하고 분석한 것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자합니다.

첫째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특히 진리를 유지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바빙크는 개신교와 개혁주의 전통, 즉 도르트신조에서의 화란과, 영광스러운 분리파 교회, 그리고 아브라함 카이퍼의 회복된 도전적인 개혁 정통의 주된 흐름 안에 서있었습니다.

두번째로는, 바빙크는 근면하고, 매우 박식하며, 뛰어난 개혁주의 신학자였습니다. 특히 캄펀에 있는 동안에는 폭넓은 책을 읽었으며, 깊이 생각을 하였으며, 부지런히 글을 썼습니다. 그의 다른 모든 책들은 둘째치고, 특히나 믿음의 확신과 같은 조그마한 책들과 같은 다수의 여러 세밀한 작품들이 있었지만, 개혁교의학은 기념비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바빙크는 신학자의 신학자였습니다.

세번째로, 바빙크는 개신개혁교회에 1834년 화란에서의 분리교회 신학, 특히 그중에서도 언약신학을 연계시키며, 또한 칼빈으로 돌아가는 개혁주의 전통에서의 좋은 것들을 개신개혁교회에 연계시켰습니다. 바빙크는 이러한 개혁주의 신학을 시간의 관점에서와 내용에 관점에서 개신개혁교회에 연계시켰습니다. 시간에 관해서는 대부분의 분리교회 원로들과 동시대의 사람이었던 헤르만 훅세마를 1924년에 기독개혁교회가 쫓아내기 바로 3년 전에 바빙크는 임종을 맞이하였습니다. 개혁신학의 내용에 관해서는, 대부분의 중요한 믿음의 진리에 있어서, 헤르만 바빙크가 자신의 개혁교의학에 체계적으로 표현한 개혁주의 신앙을 개신개혁교회에서 고백하고 가르쳤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제 생각에는 훅세마가 바빙크의 교의학에서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네번째로, 바빙크는 비록  종교적 분쟁을 피하는 평화를 사랑하는 이로 보여지지만 (이는 언제나 덕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평화적인 바빙크는 특이하게도 이단을 예리하게 비판하거나 단호하게 비난하는 것을 거부하며, 대부분의 지독한 이단들에게서 조차도,
예를 들면 범신론자, 슐라이어마허, 그리고 윤리신학자인 Daniel Chantipie de la Saussaye등
에서 조차도, 항상 무언가 좋은 것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는 비평주의에 극단적으로 예민하며, 자신이 비평을 받는 경우나 교회의 결정이 자신의 방식을 따르지 않을 때는 비통스러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헵에 따르면, 분리파 교회와 애통교회의 연합으로 생긴 교단에서의 논란거리였던 두 신학교의 연합과 관련하여 1889년의 대회에서 바빙크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게된 것으로 인하여 바빙크의 태도와 자세는 근본적인 변화를 보여주게됩니다. 그는 즉시 대회를 떠나면서 잔여 회기에 참석할 것을 거부합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얼마동안 그는 교회에서 찬송을 부르지도 않았으며, 자신을 그냥 불평분자로 보여주기도 했읍니다.

교회회의에서 감당하여야만 했던 쓰라린 경험에 대한 바빙크의 반응은 바빙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면이 아니었음은 분명했지만, 이는 특히 사역자에게는 경고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바빙크의 비통함은 교회에서의 그의 사역을 방해하였습니다. 이러한 연약함은 우리에게도 히브리서 12장 15절의 말씀, 즉 “너희는 돌아보아..쓴뿌리가 나서 괴롭게하고"의 경고를 깨닫게 해줍니다. 이러한 쓰라림은 모든 성도의 삶에서와 같이, 사역에 있어서도 흔한 경우이며, 이는 사역자 자신의 신실함을 손상시키며, 그가 하는 일을 망쳐버리며, 교회의 안녕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수행하는 많은 일들을 훼방합니다. 물론 이것에 대한 비결은 사람과 자신을 잊어버리고 오직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저는 바빙크의 신학을 살펴보고, 우선 그의 신학의 강점과 가치를 살펴보고자합니다.


바빙크 신학의 힘과 가치

바빙크의 개혁교의학, 즉 네 권의 개혁교의학은 훌륭한, 참으로 칭찬할만한 개혁신학의 작품입니다. 이것은 개혁 신앙의 교리들을 철저하게, 포괄적이고 체계적으로, 그리고 보편적인 건전한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기념비적인 작품이 아닙니다.

다음은 개혁교의학의 강점과 장점들 가운데 일부입니다. 첫째로 개혁교의학은, 조심스러운 작업을 통해서, 존 칼빈으로부터 20세기 초까지 고백되어지고 발전되어진 개혁신앙의 풍성함에, 신학의 몸통을 결합시킨 조직적인 형태로입니다. 이는 특히 개혁주의 전통이 흘러나온 주된 흐름이 된, 도르트회의의 시대로부터 시작된, 화란에서의 개혁주의 신앙의 발전에 특별하게 관심을 기울인 것입니다.

두번째로 개혁교의학은 개혁주의 교리에 근거를 두면서 이와 조화를 이루고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바빙크의 교의학이 마치 비평으로부터 초월해 있는 것과 같이 절대로 교리로부터 벗어나지는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은 어떤 부분에서는 심각하게 벗어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빙크는 개혁주의 교리야말로 성경의 진리를 구체화하는 것이며,  개혁주의 신학에 권위가 있는 것이라는 확신으로 의식적으로 결단력있게 작업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개혁교의학이 전체적으로 건전하며 참으로 지속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세번째로는, 개혁교의학의 영역과 폭이 방대하고 심히 방대하다는 것입니다. 바빙크는 성령께서 주신 신학자로서의 탁월함과 그가 하는 교의학 작업에 성령의 역사하시는 신실함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개혁교의학은 교회 역사의 개요를 제시해 줄 뿐만이 아니라 사실상 교리의 완전한 역사를 제공해줍니다. 개혁교의학은 4권의 책을 통하여 교회 전체의 신조들은 물론이고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가르침들을 참고하고 있습니다.이 개혁교의학은 사이비 종교집단은 물론이고, 모든 교회의 분파들, 즉 그리스정교회, 로마카톨릭, 루터교도 그리고 다른 종파들 모두를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칼빈 뿐만이 아니라 루터나 부쳐, 버미글리, 기타 다른 이들의 가르침도 살펴보고 있습니다.

개혁교의학은 모든 시대에 걸쳐서 교회에 위협을 가하였던 철학자들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그리고 그 외의 이들을 다루면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개혁교의학에서는 불교와같은 이교들을 비판하고있습니다.

몬타누스, 아리우스, 펠라기우스부터 피기우스, 알미니우스, 아미라우트, 그리고 슐라이어마허에 이르기까지 정밀하게 분석되어지지 않은 이단은 없었습니다. 항상 바빙크는 이들의 근원적인 오류와 그것이 진리에 모순된다는 것을 어느정도 분명하게 문장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빙크 자신의 시대에 개혁교회를 위협하는 이단자들과 이단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강조가 있었는데 이들 중에는 "현대주위" "중재 신학" "윤리 신학" 그리고 우리가 근본주의 혹은 부흥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 감리교파가 있었습니다.

네번째로, 바빙크는 개혁교의학의 내용인 성경의 진리에는 모순이 없음을 확신하면서 개혁교의학을 썼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마음에는 모순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빙크는 자신의 서문에서 이 자명한 진리를 확증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오직 하나님 자신의 말씀에 의해서 계시된다면, 여기에는 모순적인 요소나 혹은 자연이나 역사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의 충돌이 포함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서로 대립될 수가 없기에 필연적으로 유기적인 통일성을 이를 수밖에 없다. 교의학자의 직무는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의 생각을 생각하고, 그 통일성을 추적하여야만 하는데…. 하나님의 계시에 담겨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존재하는 이와같은 통일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이를 인정하기를 거부한다면 무신론이나 혹은 하나님의 통일성을 부인하게되는 것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

제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제가 개혁교의학에 모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바빙크가 역설적인 신학자, 즉 화란의 칼 바르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개혁 교리에 요약 되어있는 바와 같이, 성경의 계시가 모순이 없다는 확신은 개혁교의학의 많은 결정적 중요 부분에서 주권적 은혜에 의한 구원에 대한 바빙크의 고백을 보호해주고 있습니다. 바빙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가 개별적이고 효과적이며, 그 근거가 영원에서의 선택 교리에 있으며, 여기에 동반되는 유기 교리는 실제로 명백하게 모순되는 역설에 호소하고 있다는 진리에 반대할 자유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앞서 말한 것은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의 강점과 가치에 관계된 좀 더 일반적인 것인 반면 다음에서 말할 내용들은 좀 더 특별한 것입니다.

첫째로, 개혁교의학은 성경적입니다. 바빙크는 벨직신앙고백서 5항에 근거해서, "성경은 교회와 신학의 유일한 원천이principium unicum된다"고 주장합니다. 바빙크는 교의학을 "기독신학자의 사고적 의식에 의해서 흡수되고 재생산된 성경의 진리"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리는 성경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개혁교의학은 성경 해석의 산물입니다. 개혁교의학에 본문을 해석하는 것으로 구성된 기다란 부분들이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바빙크의 방법은 그 보다는 흔히 교리를 몇 문장이나 단락으로 서술하고나서 그 교리를 이끌어낸 성경 본문을 나열합니다.

개혁교의학의 성경적 속성으로 인해서 그 강점과 유익은 엄청납니다. 이는 정통에 속하여 있습니다. 이는 신선한 것이며, 활기가 있는 것입니다. 바빙크는 이와같은 교의학에 대하여 권두언에서 “교의학은 우둔하거나 무미건조한 과학이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바빙크의 성경적 교의학의 또 다른 강점과 유익은 여기에 교리의 발전이 있다는 것입니다.

개혁교의학은 스스로 공언하는 성경적 속성과 긴밀하게 연관됨으로 인하여 하나님 중심적입다. 바빙크는 방대한 개혁교의학의 작업을 시작할 때부터 전심으로 하나님 중심의 교의학을 만들고자 스스로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의 교의학은 전부가 조직적인 형태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어야만 했습니다. “결국 신학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이성적 피조물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고, 하나님을 앎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게 하여야한다(잠 16:4; 롬 11.36; 고전 8:6; 골 3:7)." 바빙크에 의하면 개혁교의학은 “신정론, 하나님의 모든 선하심과 완전하심에 대한 찬가, 경배와 감사의 찬송, 가장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눅 2:14)”을 목적으로 하고있습니다.

개혁교의학은 성경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이기 때문에 이는 또한 진심어리고 실질적입니다. 바빙크는 의도적으로 윤리학을 교의학에 접목시켰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분리파 교회의 자녀로서의 유산은 그가 개혁교의학에 경건함과 신실함을 표현하는데 기여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빙크는 경건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개혁교회 내에서 청교도와 그의 영적인 후손들이나 제2종교개혁 운동Nadere Reformatie 을 하는 사람들을 의심하는 신학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진실된 개혁주의 어른들과 아이들이 경건했던 것과 같이 그도 또한 경건하였읍니다. 바빙크는 자신의 교의학에서 표현했던 것과 같이 개혁주의 교리에서 유래되는 경험과 실천의 경건함을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교의학과 윤리학을 이와같이 긴밀하게 연관시키는 것 또한 바빙크의 신학적 확신에서 탄생된 것이었습니다.

신학적 윤리는 … 전적으로 교의학에 근거를 두고있으며 … 교의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체계이다; 윤리학은 하나님을 섬기는 체계이다. 이 두 가지의 제자도는 결코 두 가지의 독립적인 실체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며, 같이 하나의 체계를 형성해 나아가며; 이들은 하나의 유기체로서의 관계된 구성 요소인 것이다.

세번째로 개혁교의학은, 영원한 협의 안에서 예정된 택함받은 신자인 죄인을 영생과 영광으로, 태초부터 종말까지 보존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을 확신하고, 설명하고, 강력하게 변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또한 모든 진실된 개혁교의학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주권적 은혜의 진리에 대한 신뢰는 신학의 서는 것과 넘어짐의 표지입니다.

바빙크는 선택과 유기 모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가르쳤으며, 모든 조건적 형태를 배격하는 무조건적 예정을 확증했습니다. 그는 아르미니우스와 아미라우트 모두를 분명하게 비난합니다. 바빙크는 저항할 수 있는 은혜에 아르미니우스의 근본적인 잘못이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아르미니우스에게] 은혜는 아직 언제나 저항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아르미니우스 신학의 끔찍한 결과는 이것이 인간 존재를 자신들의 운명의 최종 결정권자로 만들다는 것이었고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는 유별난 아르미니안의 가르침은 “누가 믿을 것인지, 혹은 믿지 않을 것인지에 관한 하나님의 예지나….를 거부하는 결과를 가져오며, 여기에 더해서 모든 인간을 구원해주신다는 하나님의 보편적 의지와, 그리스도의 보편적 속죄, 그리고 충분한 은혜의 수단들이 보편적으로 제공된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합니다.

아미로에 대해, 바빙크는 그와 프랑스에 있는 소뮈르학교가 도르트에서 비난하고있는 알미니안을 지지하는 것을 비판합니다. 바빙크는 아미로가 선택에 관한 두 가지의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고 명기합니다. 첫번째는 보편적이고 조건적인 교리로서,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그들이 믿을 것이라는 조건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특별하고 절대적인 교리로서 이는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에게 믿음의 선물을 주셔서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교리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빙크는 "물론 만약에 첫번째의 보편적 교리가 전체에 대한 무엇인가를 의미한다면, 이는 두번째를 완전히 덮어버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고 올바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미로에 대한 바빙크의 판단은, 오늘날 페더럴비전의 신학, 즉 이 신학의 근원이 되는 조건적 언약 교리에도 적용이 됩니다. 모든 세례받은 가시적 교회의 일원을 구원하실 (보편적, 조건적 선택 등등) 하나님의 조건적 의지는, 입으로만 발림 말을 할 수도 있는 세례받은 모든 이들에 대한 조건적 은혜의 언약을 옹호하는 이들에게 적용되는 특정된 선택교리를 완전히 무색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바빙크는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60페이지 분량의 논의에서 "[예정에 대한 섭리 뿐만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섭리는 그 분 자신의 절대적 주권에 근거를 둔다"는 진리를 주장합니다.

보편속죄론이 그리스도를 선택과 언약으로부터 분리시킨다고 비난하면서, 바빙크는 보편속죄론을 변론하는데 잘 인용되는 본문을 포함하여, 이를 반대하는데 생기는 모든 논의에 직면하면서도, 한정된 제한 속죄를 단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과 의도였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이들만의 죄를 위한 것입니다" "구원을 얻고 적용시키는 것은 분리할 수 없게 연결되어 있으며… 중재가 특별한 것과 같이…희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빙크는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어떤 구원과 관계없는 "유익"을 발견함으로서 이러한 다른 종류의 강력한 고백들을 다소 좀 약화시킵니다.

바빙크 신학에서 내적인 부르심과 함께 시작하는 성령의 구원 사역도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배타적인 은혜의 선물입니다.  은혜는 값없이, 그리고 무조건적일 뿐만이 아니라 "효과적이며" "저항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마음을 따듯하게하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부분에서 바빙크는 성도의 견인이 "인간 개인의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임을 고백합니다. 견인은 선택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속죄와 전능한 은혜의 확실한 효과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은혜 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언약을 약속하신, 혹은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구원 사역을 시작하신 남자나 여자의 타락을 가르치는 이들에 대하여 견인을 변론하는데 있어서, 바빙크는 성경이, 특히 구약에서, "은혜 언약은 인간 존재의 순종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있다. 이는 진실로 언약의 길을 걷게끔 순종의 길로 인도하지만, 언약 자체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달려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을 깨뜨릴 수도 없으시고 깨뜨리시지도 않으신다"고 단언합니다.

바빙크는 신약에서 믿는 부모의 일부 세례받은 자녀들의 멸망에 대하여는, 구약의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멸망 받은 것과 같이 설명하면서, 이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9장 6,7절에서, 그리고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2장 19절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자손이 모두 이스라엘에 속하여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이(롬.9-11), 마찬가지로 요한은 타락한 이들에 대하여 증언하기를: 그들은 우리에게 속하여 있지 않으니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와 계속 함께 있었을 것이다(요1. 2:19)"와 같이 설명합니다.

21세기 초에 이와같은 고백을 하는 개혁교회들은 “하이퍼 칼비니즘"이라며 개혁주의 공동체로부터 징계를 받고 쫓겨났습니다.

바빙크는, 교의학자로서 자신과 개혁주의 신앙의 특징인 교의학과의 균형을 보여주면서, "견인의 확실성은 결코 책망과 위협을 배제하지 않는데, 이는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견인의) 약속과 선물을 신자들에게 확신시키는 방식이다. 이것들은 삶에서 견인이 실현되어지는 수단이다" 라고 충고합니다. 그는 "결과적으로 견인은 강압적이 아닐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서 인간에게 영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다"라고 덧붙입니다.

부르심과 거듭남으로부터 보호하심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모든 은혜로운 구원 사역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으로부터 기인된 것이며, 이러한 은혜 언약은 영원한 선택을 근거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시고 자신의 교회에 나누어주신 모든 유익은 은혜 언약의 유익이다. 이 언약은 비록 시간상으로는 복음에서 처음 드러났지만 그 근원은 영원에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과 계획하심에 근거를 두고있으며, 은혜 언약의 모든 유익이 영원 안에서 굳건하게 확립되었다는 개혁주의의 개념을 붙드는 것이…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성부의  선하신 기쁨이며, 여기에서 이와같은 모든 유익이 교회로 넘쳐나는 것이다.

바빙크는, 모든 구원 사역에 대한 적용 외에도, 견인에 대하여 특별한 언급을 하면서, 구원의 원천이 되는  은혜 언약은 "인간 존재의 순종에 의존하지 않으며 …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에만 의존하며 …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깨실 수도 없으시며, 깨시지도 않으시며 … 은혜 언약은 … 결혼과 같이 깨실 수 없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인한 언약의 불변성을 확신하는 맥락에서, 바빙크는, 언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립되고 유지되며, 이 말씀은, “전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들에게 주어진 하나의 엄청나게 풍요로운 약속이다"라고 언급하고있습니다.

제가 이번 컨퍼런스에서 별도의 강연에서 바빙크의 언약 교리라는 주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이 시간에는 바빙크에 있어서 주권적 은혜에 의한 구원의 진리의 핵심 사항들에 관하여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바빙크 신학의 또 다른 강점은 교리의 발전에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이해의 발전은, 바빙크가 모든 개별 교리의 서로간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포함한 개혁신앙의 몸통 전체를 깊이있고 포괄적으로 사로잡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교리화하는 바빙크의 성경적 이해의 결과였습니다. 바빙크는, 진리의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아, 자신의 생각 속에서 새로워진, 개혁신앙의 모든 교리를 성경으로부터 끄집어 내면서, 어떤 교리들의 부적절한 표현을 개선하고, 개혁주의 전통에서의 잘못된 교리 체계를 수정하여, 이전의 이해보다도 더욱 성경 계시 전체에 일치되는 단계에서 이해하도록
진리를 더욱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이와같은 발전에는 타락전선택설과 타락후선택설과 관련된 오랫동안의 우애있는 논쟁에 대한 특별한 고찰과 함께했던, 예정 교리에 대한 바빙크의 통찰력이 있었습니다. 바빙크는 하나님의 작정의 순서와 관련된 각 이론의 장점과 단점을 지적하면서 양쪽 전부의 장점에는 도움이 되고 이들의 단점은 제거하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개념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계시하는 것과 관련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목적이되는, 하나님의 계획에서의 그리스도의 선택을 최우선으로 만듭니다.

또한 이러한 개념은 “서로가 종속되는 관계이면서 궁극적 목적에 수단이 되는 선행하는 모든 것"을 위치시키는 전통적 타락전선택설의 관점과 전통적 타락후선택설의 관점 모두의 잘못을 피하고 있습니다. 바빙크는 추가된 부가적인 설명에서, 이것은 로마서 9장 15절과 에베소서 1장 4절과 61절을 근거로하여, “선택과 유기는 죄를 전제로하는 자비와 정의의 행동”들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교의학의 정금같이 귀한 것 한 가운데에는 배설물 같은 것도 있습니다. 배설물의 대부분은 소위 하나님의 일반은혜라고 불리우는 교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교리는 개혁교의학 네 권에 걸쳐서 여러 교리적 맥락에서 반복하여 나타납니다. 바빙크에 있어서 이러한 잘못은 이번 컨퍼런스의 강연들 가운데 한 가지 주제이기에, 제가 개혁교의학의 약점을 다루는데 있어서 간략하게나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빙크의 교의학의 약점들

저는 바빙크 신학의 두 가지 중대한 잘못을 지적하고자 하는데, 이 모두는 개혁교리에서 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이러한 오류에 영향을 받도록 허락한 개혁교회들에 재앙적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첫번째로, 바빙크의 신학적 신념에 깊이 스며들어있는 잘못은, 궁극적으로 모든 철학들과 모든 과학적 이론들과 그리고 모든 경건함이 없는 문화적 제안들과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이들과 불신자 운동가들과 그리스도 바깥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이들 안에도 무언가 선한 것과 진실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빙크는 언제나 변함없이 개혁주의 신학에다가 이러한 철학들과 과학적 이론들, 그리고 문화적 작품들을 수용해왔습니다. 그는 슐라이어마허가 되었든, 아니면 다윈이 되었든지간에, 심지어 가장 심각한 이단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맹렬하고 공공연한 위협까지도 포함하는 무신론적 이론을 절대로 날카롭게, 그리고 단호하게 비난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두 차례에 걸쳐서 바빙크의 이러한 약점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였습니다. 첫 번째 경우는 바빙크가 캄펀에 있는 신학교의 교수로 임용되었을 때 하였던 취임사 였습니다. 바빙크는 비록 개신교 이단에 대하여 비판적이었지만,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에 대하여는 역시나 좋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독창적인 사상가에 의하여 신학에 이르게 된 모든 선한 것들을 감사하게 인식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기분좋은 의무인 것입니다." 카이퍼는 자신의 잡지 "더 헤라우트De Heraut"에서 바빙크의 강연 "거룩한 신학에서의 과학"에 대하여 높이 칭찬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룩한 신학의 과학"에 대한 바빙크 박사의 취임 연설에, 진심으로 동의를 하면서, 우리가 읽은 것 대부분의 글이 하나의 저작물이 되어서 우리 손에 들어온 경우는 이제껏 없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개혁주의의 과학적 신학입니다  …  이것을 읽는다는 것은 심신을 상쾌하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도르트 신조에 대한 충실함이 있으며, 이는 도르트 신조로부터 벗어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신학의 발전을 금하지 않는 도르트 신조의 정신입니다.

그러나 카이퍼는 바빙크가 간행물을 통해서 슐라이어마허를 칭찬하는 것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합니다. 카이퍼는 화란의 개혁주의 공동체에서 쓴  바빙크의슐라이어마허를에 대한 칭찬은  그가 얼마나 이 철학자가 그리스도의 교회에 말할 수 없는 악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의식이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빙크가 이단들과 그들의 이단성에 대하여 비난하는데 실패한 것에 대한 카이퍼의 두 번째 공적인 비판은 바빙크가 윤리 신학자인 다니엘 샹드피 드 라 소사예Daniel Chantipie de la Saussaye에 관한 책을 출간한 것이었습니다. 이 경우에 있어서 바빙크의 잘못은 그가 소셰를 칭찬한 것이 아니고, 그가 소셰의 이단성을 날카롭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비난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비록 바빙크는 소셰의 가르침이 “성경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기독교 진리라기보다는 범신론에 물든 철학”이라고 결론내리고 있지만, 정작 바빙크는 비평을 해야만 하는 경우에 있어서, 소셰의 신학에서 바빙크 자신이 완전히 동의하는 것을 제한시키는 요소들이 있는 충격적인 진술에만 자신의 비평을 한정시키고 있습니다.


카이퍼는 분명 화가 나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이것이 허용될 만한 일입니까? 만약에 누군가의 신학이 성경과 충돌이 되며, 기독교 진리보다는 철학을 제공하며, 범신론으로 인도한다면, 그리고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경계를 약화시킨다고 결론이 지어진다면, 당신은 이미 화란에서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수 많은 사람들을 미혹시킨 이와같이 완전히 위험한 신학에 대하여,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다고 단순하게 말하는 것과 같은, 우호적인 판단을 내리겠습니까? 사람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우리를 어떻게 비판하던지 간에 우리는 이에 대하여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카이퍼는 잘못된 가르침들에 미혹이 된 개혁교회의 구성원들에게 긴급하게 경고하고자, 복음을 무너뜨리는 모든 이들은 물론이고, 이러한 두 신학자들에 대한 담대하고 엄중한 그리고 근원적인 비난을 원했던 것입니다. 카이퍼는 이러한 중대한 관심사에 대하여 바빙크보다도 훨씬 더 대립적이었습니다.

이러한 비평들은 바빙크에게 쓰라린 고통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만약에 카이퍼가 자신이 공적인 비평을 통해서 바빙크를 바꿀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헵이 추측했던 경우였듯이, 카이퍼는 “완전히 실수한 것이었습니다. 대중의 비판보다도 바빙크를 더 짜증나게 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드 라 소사예의 일로 카이퍼가 바빙크를 비평한 순간부터 바빙크의 카이퍼에 관한 친근한 표현들이 감소되었습니다.

그가 철학자나 이단자, 그리고 이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하여 철저히 비난하는 것을 망설이는 것이나, 철학이나 비정상적인 신학에서 무언가 진실되고 선한 것을 기꺼이 찾으려고 하는 것은, 그의 무비평적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바와같이, 결코 그의 평화를 사랑하는 성격에서 기인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빙크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신학을 위한 철학적 지침으로서 "신토마스주의적 철학"을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토마스주의"는 로마카톨릭 교회의 뛰어난 철학자이면서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신토마스주의" 철학은 로마카톨릭 교리의 19세기 형태로서, 이는 타락 후에도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서도 어느 정도의 선한 것과 어느 정도의 신을 경외하는 것이 있기에 기독교는, 기독교 문화와 사회에서까지도, 선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형성하기 위해서 믿지 않는 사상가들과 협력할 수 있고, 심지어는 그들의 작품 안에서도 참되고 선한 것을 만들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 신학에 따르면, 사람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태초에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 "초자연적인" 재능,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 의, 거룩함을 상실했어도, 이성과 의지의 "자연적인" 재능은 남겨 있기에, 비록 타락 후에는 어느 정도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선하고 참된 사고와 바램의 능력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은혜는 타락한 죄인의 완전히 부패한 마음과 의지를 회복하거나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마음과 의지의 근원적인 선함을 온전하게 하거나 “완전하게”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은혜는 "본성"을 세워나가고, 보태고, 완성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로마 카톨릭 신학에서는 은혜는  본성에 의존하는데, 여기서의 본성은 은혜가 요구하는 조건을 실행하는 죄인의 자연적 의지를 말합니다.

여기서 바빙크(그리고 카이퍼)의 일반은혜의 이론이 등장하게됩니다. 이 이론의 옹호자들에 따르면, 일반은혜는 모두 하나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와는 별도로, 세상의 위대한 사상가들의 이론에서 참되고 선한 많은 것들을 설명해주기에, 기독교인은 하나님과 인간과 피조물에 관한 세상의 생각을 취하는 것과, 심지어는 이러한 세상적 생각과 협력할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개혁파의 일반은혜에 관한 이론은 본질적으로 로마카톨릭 교회에서 지배하고있는 철학과 같은 것입니다. 이는 로마카톨릭 사상가와 기관들과 일반은총의 이론에 전념하고있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실질적 협력을 설명해주기까지 합니다.

바빙크에 대하여 호의적인 전기작가 브레머R. H. Bremmer는 "모든 바빙크 주석가들은 신토마스주의 철학이 바빙크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사실에 동의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빙크는 토마스에 의해서 기독교화된 개념들의 교리 안에서 기독교 신앙이 자신의 시대에 문화를 풍성하게 하고 기독교화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빙크가 근본적인 로마 카톨릭 사상에  참여하려는 것과 개혁주의 신학의 중요한 관점들에서 경건치 못한 이들의 것을 수용하면서 그 이론을 배우려는 밑바탕에는 유럽의 문화를 기독교화 하고자 하는 바빙크의 깊은 관심과 강한 열망과 굳건한 다짐이 있었습니다. 문화를 기독교화 하고자 하는 것은 바빙크의 사역의 주된 목적 가운데 한 가지였습니다. 헵은 바빙크가 기독교계와 문화의 통합을 원한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소위 기독교계와 문화 사이의 또 다른 통합에 대한 희망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또한 바빙크의 동료인 아브라함 카이퍼의 염원이기도 했습니다. 카이퍼의 삶에 있어서의 가장 큰 프로젝트들 가운데 한 가지는 "서구 유럽 사회의 문화를 다시 기독교화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브레머가 바빙크의 생애와 사역에 관한 연구 마지막에 요점을 정리할 때, 그 제목은 "문화와 복음"이었습니다. 문화에 대한 관심, 특히 복음을 보편화 되어있는 문화에 접목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서 문화를 기독교화 하고자 하는 관심은 헤르만 바빙크의 사역에 있어서 복음과 동등한 비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디에서도 자신의 교회에 대하여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세상의 사상과 예술과 과학과 삶의 방식을 '기독교화'하기 위해서 복음을 가르치고 고백하라"는 문화명령을 부과하신적은 없습니다.

바빙크와 동시대 사람이며 현대주의 신학자인  로싱은 "이 문화의 세상에서 기독교계의 위치에 대한 질문은 ….  바빙크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했다"고 전하고있습니다. 바빙크에게 호의적인 브레머는 바빙크가 자신의 시대의 문화에 대하여 열정적이었던 것을  좀 더 호의적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바빙크가 자신의 교의학을 저술할 때 문화에 대하여 깊고 의도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바빙크의 교의학의 가장 큰 가치는 의심의 여지없이 지속될 것이며, 우리가 이것을 읽을 때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19세기말에 자신의 시대에 어떻게 문화적 관심사에 접근하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로싱과) 비슷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빙크의 교의학이 그 당시의 문화에 상당히 관련되어있기에, 브레머는, 이를 높이 칭찬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이를 "최고의 문화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빙크가 말년에 깊은 우울감에 빠지고 거의 침울하게 되도록 영향을 미친 3가지 요소들 가운데 한 가지는 의심할 여지 없이 "문화 문제"였습니다.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이나 후에도 문화가 기독교화 되어간다는 어떠한 증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 조그마한 나라였던 네덜란드가 아브라함 카이퍼 수상을 포함한 어떠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독교화 되어간다는 어떠한 증거도 볼 수가 없었던 것은 의문이었습니다.

바빙크나 카이퍼에게 있어서 이것에 대한 책임을 이미 자신의 시대에 존재하고 있었던 동시대의 현대주의자들에게 책임을 돌리고있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었습니다. 사실 "신칼빈주의"(카이퍼와 바빙크와 그들의 제자들의 일반 은혜와 문화에 영향을 주고 문화와의 협력을 도모하는 신학)는 칼빈과 개혁주의 교리들로 구성된 전통적 칼빈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단절되었으며, 단지 위장한 현대주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헤르만 훅세마가  개혁주의 신학에서 카이퍼와 바빙크의 일반은혜 신학(비록 어떠한 경우에는 어느 정도 비슷한 용어이지만, 요한 칼빈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며, 이러한 이론의 옹호자들의 요구들에 모순이 되고있는 것이다)을 제거하려고했을 때, 그(훅세마)는 카이퍼와 바빙크가 만든 이러한 신학의 두드러진 주요 면들과, 그 신학 안에 있는 이질적인 요소들과, 그 신학 안에 담겨진 붕괴 되어가는 변화들과, 일반은혜 이론이 그리스도의 개혁교회에 제시하는 “세상을 기독교화하라"는 불가능하고 완전히 비성경적인 부담들에서 개혁주의 신학과 교회들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두는 하나같이 "선의로 한 제의"- 이는 보편적이고, 저항할 수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서- 라는 더 중요한 단죄에서 벗어난 것이었으며,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선택에 근거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은혜를 목적으로 하는 구원의 효과적인 성취를 근거로 하지도 않습니다. 훅세마가 카이퍼와 바빙크와 그의 신칼빈주의 제자들의 일반은혜 이론을 거부하였던 것은 교회와 개개의 기독교인과 진정한 개혁 모두에 있어서, 개혁주의 신앙과 삶에 거대한 영향을 준, 개혁주의 신학의 중대한 발전이었습니다.

바빙크가 자신의 신학의 밑바탕에 의도적으로 자연/은혜라는 로마카톨릭 철학을 채택하고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와 관련된 일반은혜의 이론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자주 반복되는 말과 같은 바빙크의 교의학 전반에 걸쳐서 흐르는 문구와 바빙크의 신학적 사상인 "은혜가 자연을 완전하게 한다"를 표현하는데 필수적인 문구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이유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한 가지 문구는 바빙크가 "자연은 은혜에 앞서고; 은혜는 자연을 완전하게 한다. 이성은 믿음으로 완전하게 되며, 믿음은 자연을 전제로 한다" 면서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를 다루는 시점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라틴어 원어인 “Gratia perficit naturam,”는 "은혜는 자연을 완성시킨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보통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러한 문구를 정통주의적 의미에서, 구원 사역에 있어서, 개개의 인간에 관해서든, 혹은 피조물 자체에 관해서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폐기하지 않으시며, 새로운 인간이나 새로운 우주를 창조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육체적 존재를 부여하신 죽은 남자나 여자나 아이와 자신이 태초에 창조하신 하늘과 땅을 회복하고 새롭게하고, 그리고 궁극적으로 일으키신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바빙크의 신학은 이러한 문구의 의미를 강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바빙크가 이러한 구절들에 대해서  정통주의에서의 개념보다도 더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는 않은 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기에, 그의 신학은 타락 하였더라도 인간의 본성이 선하고 참된 것을 포함한 건전한 상태로 남아있다는 경건하지 않은 사상을 수용하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데, 이러한 경건하지 않은 사상에
건전한 개혁주의 신학의 "은혜" 자체를 접목 시킴으로써, 자연스럽게 "본성"을 선하고 참된 것으로 완성 시키려고 할 뿐만 아니라 완전한 것으로 간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단순히, 플라톤이나 칸트, 혹은 슐라이어마허, 혹은 다윈과 같은, 자연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진리를 보완해주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신학과 학식있는 경건치 않은 이들의 지혜와의 관계성에서의 이러한 관점은 필연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의 철학 안에 담겨있는, 혹은 슐라이허마허의 이단적 신학에 담겨있는, 혹은 찰스 다윈의 과학 이론에 담겨있는, 이 세상에서 말하는 지혜와 협력하게 만듭니다. 바빙크 자신이 "은혜는 오직 자연을 복원시킨다"는 라틴어를 “복원restores"으로 번역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바빙크가 "은혜가 자연을 완전하게한다"는 글귀를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하고 있는지 와는 관계없이, 그의 교의학에는, 그가 문화와 그와 관련된 주제에 대한 열정으로 인해서, 자신의 신토마스주의 철학의 전제들에 힘입어, 그리고 자신의 일반 은혜 이론의 도움을 받아서, 개혁주의 신학을 경건하지 않은 비성경적인 사상과 접목시킴으로서, 개혁주의 신앙을 심각하게 양보하고 있다는 많은 증거들이 있습니다.

바빙크는 우리가 "이방 종교들 안에서도 나타나는 진리의 요소들을 인식"하여야만 한다고 생각하면서, "토마스 아퀴나스"를 지지할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일반 은혜의 교리"는 개혁주의에 속한 사람으로 하여금 "이방 세계 안에서도 나타나는 모든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함을 인식할 수 있게 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영과 그의 일반 은혜의 활동은 과학이나 예술, 도덕과 법률에서 뿐만이 아니라 이방 종교들에서도 인식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나서는 다음과 같은 끔직한 주장을 합니다: "이런 이유로 기독교는 이교도에 대하여 대립적으로 존재할 뿐만이 아니라, 이교도의 성취를 위해서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타락하고 사악하고 죄악된 인간의 본성을 완성시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자연 신학"이 있으며, "자연 신학은 믿음의 서론"이라는 것입니다.

바빙크는 종교개혁가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이성, 철학이 신학적 문제에 대하여 말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종교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이성은 까막눈”이라고 주장하는 마틴 루터를 비판합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로마 카톨릭 신학에 영향을 준 철학자였습니다. 로마 카톨릭에서 은혜의 복음이 붕괴된 것에 대한 철학자의 광범위한 영향을 인식하고서, 루터는 한번은 "저주받을 악랄한 이교도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러가라"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러나 바빙크는 신학에서 이와같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배제시키는 것은 과잉이라고 비난합니다.

협력을 도모하는 바빙크에게,
모하메드와 같이 [비기독교] 종교들의 창시자들이 "단순히 사기꾼, 하나님의 대적자, 악마의 공범자"라고 여겨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교도와 비기독교 종교들 안에는 복음에 대한 "접촉점"이 있으며, 기독교인이 모든 비기독교인들을 만날 수 있는 굳건한 기초가 있을 것입니다. 신앙은 불신자들의 (어둡고 무지하고 종교적인) 마음을 보충해 줄 것입니다!

바빙크가 어떻게 자신의 신토마스주의와 일반 은혜 이론을 자신의 교의학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하였는지에 대한 방법은 다음의 사례들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바빙크는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인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었던 낙원에서의 행위 언약 교리를 변론하면서 "이는 슐라이어마허의 의존과 칸트의 자유를 결합한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선언에 담겨있는 분명한 것은 슐라이어마허와 칸트가 바빙크의 신학적 사고에 어떤 권위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증거의 경우가 아니었다면, 바빙크의 아담 언약에 대한 구성이 전자의 신학과 후자의 철학을 만족시키는 찬사를 받을 만한 행위 언약이 되었을 것입니다. 마땅히 바빙크의 아담 언약 신학에 있어서 결정적이 되어야했던 것은 골로새서 1장 13절 이하의 가르침에서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선이 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다윈과 그 밖의 과학자들의 진화론에 대한 바빙크의 양보입니다. 브레머는 “바빙크가 19세기 중엽에 강력하게 등장한 새로운 과학적 사고, 특히 다윈의 작업에 매우 공감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첫 장, 특히 창세기 1장과 2장, 그리고 창조 주간의 7일과 관련하여, 바빙크는 성경은 “전설이나 신화 혹은 시적인 환상이 아니라 …  역사, 즉 신뢰할 만하고 믿을 만한 역사를 제공하고 있다”고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빙크는 창세기 1장과 2장을 과학의 명백한 증거, 특히 창세기 1장이 가르치고있는 창조 주간의 6일보다도 오래된 지구인 매우 오래된 지구의 "지리학과 고생물학"과 협력을 도모해야 한다는 압력에 굴복했습니다. 바빙크는 우선 창세기 1장 1절의 하늘과 땅의 창조를 창조 주간의 첫째날보다도 앞에 둠으로서 이를 실행하였습니다. 창세기 1장 3절은 1절과 2절에 기록된 일들보다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의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은 믿지 않는 과학자들이 요구한 수백만년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준 것입니다.

바빙크가 성경을 불신 과학자의 이론에 적합화시킨 두번째 요소는 좀 더 심각합니다. 바빙크는 창세기 1장의 6일이 실제적인 역사적 날들임을 부인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사실상 창세기 1장의 역사성을 부인합니다. 낮이 하루 저녁과 하루 아침으로 제한된다는 창세기 1장에서의 성령의 증거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바빙크는 "창세기 1장의 날들은 … 특별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 날들은 “특별한 우주의 날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 날들은 실제로 며칠이 아니며, 오랜 기간으로서 수백만년은 아니더라도 수십만년이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과학자들에게 오래된 지구와 창세기 1장의 역사성을 양보한 후에, 이러한 양보가 창세기 2-11장의 역사성과 성경의 영감에 대하여 갖게될 모든 함축적 의미와 함께 바빙크는 한 단계 더 앞으로 나아가게됩니다. 그는 이러한 긴 기간 동안의 진화적 발전 과정을 허락하는데, 이는 믿지 않는 과학자가 당연히 우선적으로 가지고있는 오래된 지구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창조의 각 날에는 우리를 의심하게 만드는 창세기의 명백한 말씀보다도 훨씬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데 … 각 날들의 창조 사역은 창세기가 요약적으로 알려주고 있는 것보다도 더욱 웅장하고 더욱 풍성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바빙크는 자신의 창세기 1장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성경은 지질학과 고생물학이 이 세기에 밝혀낸 모든 사실과 현상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시간의 길이를 제공한다"며 만족감을 표현합니다.

진화론자들에 대한 바빙크의 양보는 그가 자신의 개혁 교의학과 "창조냐 진화냐"라는 강력한 제목의 소책자에서 다루었던 진화 과학 이론과 특히 다윈 방식의 진화론에 대한 그의 직설적이고 강력했던 비판과는 모순이 됩니다.

이미 바빙크 자신의 시대에 그의 학생들과 제자들은, 바빙크가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결론으로 불신 과학자들의 지혜를 수용함으로서, 창세기 1장과 2장 뿐 아니라 창세기 3장의 역사성을 담대하게 총체적으로 거부하게 되는 바빙크의 타협을 받아 들이게 됩니다. 동시에 그들은, 바빙크가 창세기 1장의 날들에 진화 과학자들의 이론을 해석학적으로 적용시킨 것이 암시하였던  바와같이, 공개적으로 성경의 영감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문화에 접목시키려는 바빙크의 이러한 잘못의 심화는 바빙크의 교의학에서의 다른 심각한 잘못, 즉 성경의 교리와 관련된 약점들을 악용하는 결과를 수반합니다.

교의학자로서의 바빙크의 두 번째 심각한 약점은 성경에 대한 잘못된 교리였습니다. 바빙크는 생애 내내 성경의 영감에 관한 근원적 의심으로 몸부림쳤습니다. 이러한 의심은 노년에 더욱 증가되었습니다. 레이든은 그에게 영적이고 신학적으로 심각한 손상을 입혔습니다. 이러한 손상은 그의 생애 내내 지속되었습니다. 그는 결코 자신의 서재 벽에서 자신의 구약 고등비평 교수였던 아브라함 쿠에넨의 초상화를 떼어내지 않았습니다.

1880년에 바빙크가 분리교회에 사역자로 들어가려고할 때 그가 자신의 분리교회 시험관들에게 설명하려고 했을 때 자신의 신학에 관하여 시험관들이 가지고 있었던 한 가지 의문점은 그의 성경 교리였습니다.

바빙크의 영혼에 자리잡은 성경기록에 관한 이러한 의문이 얼마나 깊었는지는 그가 자신의 사역과 삶의 마지막에 자신의 교회 회의에다가 벨직신앙고백 2-7항에 있는 성경기록 교리를 교리의 개정이라는 관점에서 연구할 것을 촉구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바빙크가 임종했던 해에 개최되었던 리와르덴 교회회의(1920)에 바빙크가 보내었던 보고서는 비록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유지할 것을 촉구하고 있지만, 젊은 목사들의 신앙고백의 전면적인 개정의 움직임에 반대하면서, "지금 신앙고백의 특별한 점들을 좀 더 공식화하고 발전시킬 때가 되었다"고 교회 회의에 촉구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점들 가운데 한 가지는 "벨직 신앙고백 2-8항에 있는 성경의 신적 영감과 권위"였습니다.

반드시 알아야만 할것은, 바빙크는 성경의 영감을 의심하는 떼어낼 수 없는 죄로 몸부림쳐야만 했습니다. 그는 여기에 단순하게 항복한 적은 없었습니다. 성경의 영감에 관한 의심은 상당히 심각한 죄이며, 바빙크 자신이 자신의 신학과정을 훈련시키는 학교로서 성경를 부정하는 교수들로 구성된 레이든을 자신이 선택하였고, 자신을 비성경적이고, 실은 반성경적인(이는 당연히 필연적으로 성경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론에서 진리와 선을 발견하도록 결정을 한 것이기에, 자신이 스스로 자신을 이러한 의심에 열려있도록 한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어떤 이들은 바빙크의 의심의 몸부림이 어떤 영웅적인 것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이 문제와 그 심각성을 알고 있었으며, 결코 이 의심에 완전히 굴복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의 생애 말기에 하였던 "나는 믿음을 지켰다"는 유명한 말은 성경과 관련한 그의 생사를 다투는 몸부림이었으며, 기독교 신앙에 치명적인 이 의심에 저항하였던 자신의 확신의 표현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개혁교의학에는 성경적 권위에 대한 섬세하고 건전한 설명과 변론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어떠한 것도, 바빙크가 신학교 수업에서 자신의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도하였던, 개혁교의학에서의 바빙크의 잘못된 성경 교리의 심각성을 숨기거나 축소시키지 못합니다. 바빙크는 성경이 신성한 책이면서 신성한 말씀일 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책이면서 인간의 저술, 즉 완전한 인간의 것임을 인정합니다. 여기에는 바빙크의 성경 기록에 대한 결정적인 관점이 담겨 있습니다: "성경는 완전하게 하나님의 영의 작품이면서 … 그리고 동시에 저자들의 활동의 산물이다. 모든 것이 신성하며, 모든 것이 인간적이다" 이와 관련하여, 바빙크는 성령이 성경의 "주된 저자"였음을 말하는데, 이는 도구가 된 인간들이 비록 2차적이었지만, 역시 저자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빙크는 신앙고백서들, 실제는 성경에서 눈을 떼고서 쿠에넨의 초상화에 자신의 눈을 고정시켰습니다. 신앙고백서들은 성경를 결코 인간에게서 기인된 것으로 보지 않고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신앙고백서들은 성경을 "인간적"이라고 부르지 않고 절대적으로 "신성한" 것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성경를 "사람의 말", 혹은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사람의 말"라고 부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만 부릅니다.

성경 자체에서는 성경이 성령께서 성경을 만드시는데 사용하셨던 인간들의 산물, 즉 인간의 말이라는 것을 부인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사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어떠한 예언도 없는데" 이는 성경의 어느 부분도 하나님과 인간과 인간 작가의 창조에 관한 사적인 생각에서 유래된 부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성령 하나님의 "해석"의 산물입니다. 이러한 경이로움에 대한 해석은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들이 원래 말하였던 것을 기록하였다는 것입니다.(베후 1:20-21) 또는 디모데후서 3장 16절을 문자적으로 번역한 것과 같이,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 즉 하나님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영감의 이러한 경이로움의 결과는, 우리가 "더욱 확실한 예언의 말씀"을 갖게 된 것인데, 이 말씀은 변화산에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더욱 확실한 말씀입니다(베후 1:17-19). 만약에 성경이 전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인간 저자들의 산물이라면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분명한 것은 어떠한 인간의 말도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보다도 더욱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오직 성경이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배타적이고 전적인 말씀, 즉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이는 변화산에서 그리스도에 관하여 하신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더욱 확실한 것입니다.

바빙크는 자신의 영감론을 "유기적 영감론"이라고 부르면서, 이를 이미 개혁주의 전통에서 발견되어진다고 추정되어진 영감 교리와 비교 하였습니다. 바빙크는 이와같은 잘못된 영감 교리를 "기계적 영감론"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빙크의 "유기적 영감" 교리를 거부하는 것은 영감에 있어서, 성령께서 사람의 독특한 훈련과 재능, 그리고 심지어 개성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만들어 내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인간 저자가 자신들이 작업에 전념하는데 있어서 의식적으로 작업하였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바빙크의 교리를 거부하는 것은 기록된 언어가 인간의 언어에서 기인된 "산물"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유기적) 영감에서 놀라운 것은 인간 저자가 진정한 도구가 되어 결과적으로 나타난 언어가 하나님의 말씀이 된 것이며, 유일하고 전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바빙크의 성경 기록 교리의 약화는 바빙크의 교의학에 영향을 받았던 많은 개혁주의 교회들에게 재앙을 가져왔습니다. 창세기 1-11장에서 영감된 기원에 대한 진리인 성경 기록 교리에 관한 그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바빙크 자신의 타협은, 기독교 신앙의 근원적인 면에 있어서 그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특히 창세기 1-11장에 적용된, 바빙크의 전적으로 인간적인 성경 기록에 관한 교리는, 화란에서는 얀 레버Jan Lever를, 그리고 미국에서는 하워드 반 틸Howard Van Till을 출현시켰습니다.

그러나 바빙크의 나쁜 성경 교리는 이미 바빙크 자신의 시대에, 특히 기원에 관한 교리에 있어서, 재앙적 결과들을 가져왔습니다. 바빙크의 임종 바로 전에 화란 개혁교회에서의 젊은 목회자인 J. B. 네텔렌보스 목사는 성경의 처음 장들의 역사성을 공개적으로 부정하고 성경이 영감을 받지 않았다고 비판했습니다. 1919년 그의 당회에서는 "네덜란드 신앙고백 4항, 5항과 관련하여 그의 일탈한 의견을 근거"로 그를 파면하였는데 이는 그의 이단적 성경교리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네텔렌보스는 자신의 스승, 즉 헤르만 바빙크로부터 받은 가르침에 호소하였습니다. 바빙크는 1920년 리우바르덴 회의에서 자신의 이전의 학생을 징계하는 것을 지지하기를 원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거침없이 네텔렌보스를 변론하였습니다. 리우바르덴 회의에서는 네텔렌보스가 성경에 대한 신뢰와 무오 그리고 신앙의 근거에 관한 벨직 신앙고백 4항과 5항에서 일탈한 것을 근거로 파면한 것을 확인하고 이를 승인하였습니다.

바빙크가 사망한지 몇 년 후에 그의 학생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J . G. Geelkerken목사는 창세기 3장의 역사성, 특히 "말하는 뱀"의 실체에 관한 부정으로 인해서 아센 공회에서 징계를 받았습니다. 여기서의 이슈는 Geelkerken에 의해서 제기되었고 1926년 아센 특별 공회에서 판결 되어진 것으로서, 재판 기간과 그 이후의 총회에서 표현되었던 바와 같이, 감각으로 지각되어질 수 있고 만져질 수도 있는 뱀이 말한 것이었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Geelkerken은 창세기 3장의 역사성 즉 인류가 타락한 것에 대한 성경의 설명을 부인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하는 뱀"에게 말씀하셨던 원복음에 대한 성경적 설명을 부인하였습니다. 겔케르켄을 비판하는데 있어서, 공회에서는 그가 성경에 관한 벨직신앙고백서 4항과 5항, 특히 “그 안에 포함된 모든 것을 아무 의심없이 믿는다"는 문구를 위반했다는 책임을 물었습니다.

또한 겔케르켄은 자신을 변론하기 위해서 자신의 교수였던 헤르만 바빙크의 소위 성경의 "유기적" 영감이라 불리우는
성경 교리에 호소하였습니다. 아센 공회에 의한 창세기 3장의 해석에 대항하기 위해서 그는 "성경의 유기적 개념은 기계적 개념에 대한 선호가 위축된 것이었으며 … 수용되어진 '저명한 카이퍼와 바빙크'의 유기적 성경교리는 아직 충분히 발전되지 않은 것이다"라고 변론하였습니다.

네텔렌보스와 겔케르켄의 경우에 있어서, 바빙크의 임종 몇 년 후에 바빙크의 미망인과 딸, 그리고 그녀의 남편이, 네덜란드의 개혁교회를 떠나서  겔케르켄과 몇몇 사람들이, 창세기 3장의 신화적 성격과 이러한 창세기 3장에 대한 관점으로 내포되어진 성경의 영감에 대한 이단적 교리에 대한 가르침으로 인하여, 겔케르켄이 파면되면서 새롭게 만든 교단의 일원이 된 것은, 확실히 바빙크에 대한 생각과 동정심으로 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텔렌보스와 겔케르켄은 둘 다 그 당시 네델란드의 개혁교회에서 변화와 무언가 새로운 신학과 그리고 신앙고백서의 개정을 외치는 자유로운 '젊은 목회자들의 운동"의 회원들이었습니다. 이 운동에서는 바빙크를 영적인 아버지로 여겼습니다.

그 당시 현대주의자들이 카이퍼와 바빙크가 존 칼빈과 옛 칼빈주의로부터 근본적으로 떠났다고 비난하였던 근거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성경 교리였습니다. (카이퍼는 이를 바빙크와 공유하였습니다) 레이든 대학의 교수였던 자유주의자이면서 현대주의자인 D. B. Eerdmans교수는 카이퍼와 바빙크의 "유기적 영감"교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대의 개혁주의 신학은 옛 개혁주의 성경 교리를 죽이는데 있어서 양날의 검을 사용하고 있다. 먼저는 이들은 성경의 모두가 신적인 것은 아니며 많은 부분이 단지 인간적인 것이라고 가르치기에, 이를 탐구하는 현대 비평 학자들은 이것이 사실이며 선한 것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성경에서 신적인 것 조차도 역시 완전히 인간적인 것이며 인간의 유기체와 인간의 인격에 의해서 성경이라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라고 가르친다.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에는, 특히 언약의 구원을 포함하는 구원에서의 바빙크의 주권적 은혜에 대한 변론에는, 고백과 자세한 설명과 변론과 발전적인 개혁 신앙의 풍성하고 영광스러운 것에 대한 감사가 있지만, 이것이 개혁교회 혹은 신학자들에게 금에 오물이 섞인 것을 가리울 수는 없습니다. 불경건한 이들의 생각과 이론 가운데에도 선함과 진리가 풍성하게 있다는 바빙크의 생각; 복음을 문화에 접목시킴으로서 기독교와 불경건한 문화의 연합을 가져오고자 하는 그의 열정; 하나님의 일반 은혜에 대한 그의 교리; 그리고 성경을 전적인 인간의 책이라고 보는 그의 잘못된 관점은 후대의 전통에서 비난받고, 거부되며, 제거되어야 합니다.


(원문)


Common Grace Herman Bavinck: The Man and His Theology





Prof. David J. Engelsma


The following is an expanded text of an address held at a conference of Protestant Reformed officebearers in Redlands, CA on March 6, 2012. The text was published in the Protestant Reformed Theological Journal, vol. 46, no. 1—November 2012, pp. 3–43. [PDF Version Here]




With the publication of Herman Bavinck’s Reformed Dogmatics in English for the first time, by the Dutch Reformed Translation Society (the fourth and last volume appeared in 2008), there has occurred a kind of Bavinck-renaissance in North America. This would be a good thing, if the Reformed churches and theologians would pay attention to the sound and solid Reformed doctrines in Bavinck’s Dogmatics, allowing these doctrines to critique, correct, and inform the teachings of the churches and theologians.


What has happened, however, is that the sound doctrines in the Reformed Dogmatics have largely been ignored, or deliberately misrepresented, particularly Bavinck’s doctrine of the covenant of grace.


Also, churches, theologians, and educational institutions have seized upon erroneous doctrines in the Reformed Dogmatics, and have emphasized these false teachings, especially the doctrine of a common grace of God.


Similarly, the notable Bavinck conferences have largely ignored the Reformed doctrines of Bavinck, as set forth in the Reformed Dogmatics, and have devoted themselves instead to Bavinck’s views on ecumenicity, psychology, and culture. This was true of the Bavinck conference sponsored by Princeton Seminary soon after the publication in English of the last volume of the Reformed Dogmatics.
The same was true of the Bavinck conference sponsored jointly by Calvin Theological Seminary and the Dutch Reformed Translation Society. Very few, indeed almost none, of the speeches concerned a distinctively Reformed doctrine. Most of the speeches were about church union and the “Christianizing” of culture. This was ironic in view of the fact that the Dutch Reformed Translation Society had just spent more than $100,000 and innumerable hours translating and publishing Bavinck’s Dogmatics.


Bavinck is himself partly responsible for this neglect of his Dogmatics. Alongside his dogmatical work was always a powerful cultural urge. During the last ten years of his life and ministry, this concern for culture became virtually his only interest. And he wrote two tracts propounding a common grace of God that is supposed to enable the church to cooperate with the ungodly in transforming culture.2


But the main explanation of the widespread ignoring of Bavinck’s theology in favor of his cultural writings by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institutions and theologians is that these institutions and theologians have little interest in the sound doctrines of the Reformed tradition as they are confessed and defended in Bavinck’s four volumes of dogmatics, whereas these institutions and theologians are obsessed with culture and ecumenicity.


The conference that I am addressing may well be the first Bavinck conference that is devoted, not only chiefly, but also exclusively to the Reformed doctrines of the Reformed Dogmatics and, thus, to the real significance of the monumental Reformed Dogmatics, if not the real significance of Bavinck himself.


At this conference, we are concerned with the theology of Herman Bavinck. Nor is our concern merely academic. We desire to learn and profit from the glorious truths of the Reformed faith as they are confessed, explained, defended, and developed in Bavinck. Where they are present to spoil Reformed theology, the weaknesses and errors must be exposed and rejected. Our purpose is to maintain and develop further the sound doctrines of the Reformed Dogmatics for the benefit, especially, of the Protestant Reformed Churches.


In this first address, I am to introduce “the man and his theology.” I do not intend simply to tell you the outstanding features of the life and personality of Herman Bavinck and then summarize his theology—the content of the Reformed Dogmatics. But I will relate the man and his theology, the life and the dogmatics.


For my knowledge of the man and his life, I rely especially on the three most important biographies, or studies, of Bavinck in Dutch: Dr. Herman Bavinck, by V. Hepp;3 Herman Bavinck als Dogmaticus, by R. H. Bremmer;4 and Herman Bavinck en Zijn Tijdgenoten, by R. H. Bremmer.5


I have also read the only full biography of Bavinck in English, Herman Bavinck, by Ron Gleason.6 Although acclaimed by reviewers, Gleason’s biography has serious weaknesses. It is noticeably anti-Kuyper. It grinds an axe for the Reformed Churches in the Netherlands (Liberated) and their theology. It contains many typos and, annoyingly, the use of wrong words, which sound like the words the author has in mind. For example, Bavinck is said to have “petitioned God with the plaintiff cry.”7 Also, “true religion … preaches a God who is imminent.”8 Yet again, Kuyper “would broker no challenges.”9


The book also contains factual inaccuracies. Although it is virtually impossible for one living in the United States to check the figures in old Dutch records, it seems highly unlikely that the number of delegates from the large Reformed Churches in the Netherlands to the important Groningen 1899 synod was only eight, as Gleason indicates.10


A more serious inaccuracy is doctrinal. Gleason proposes that the doctrine of the close relation between covenant and election was the unique teaching of Abraham Kuyper, that this doctrine is exclusively the implication of a supralapsarian view of the decrees, and that this doctrine results in “an almost hyper-Calvinistic view of justification by faith and salvation.”11 Gleason’s proposal is mistaken in every respect. Not only Kuyper but also Bavinck taught the close relation of covenant and election, indeed that election governs the covenant.12 Bavinck taught this doctrine even though he did not share Kuyper’s supralapsarian view of the decrees. And the doctrine that declines to sever God’s covenant and covenant salvation from God’s gracious will of election is not, and does not lead to, hyper-Calvinism. On the contrary, the doctrine of a close connection between election and covenant is pure, sound Calvinism.


In preparing this lecture, the scope of which is vast, for the conference, I kept before my mind the warning of an event in Bavinck’s life. Hepp relates that at the public ceremony of Bavinck’s installation as professor of theology in the seminary of the Christian Separated Reformed Churches (the churches of the Secession—“Afscheiding”—of 1834) in Kampen, on which occasion the professor would give a fitting address, the man who preceded Bavinck, also a newly appointed professor, spoke for longer than three hours in the severe cold of a January day. Bavinck became so angry at this outrageous behavior that he stormed out of the auditorium during his colleague’s speech, creating a scene. Only the pleas of his old father and some friends prevailed upon Bavinck to give his own address (“The Science of Holy Theology”). But he read the speech as fast as possible, without any inflection in his voice.13


And Bavinck was notoriously irenic.


Since this is not necessarily true of all in my audience, I am determined to keep this speech under three hours.




Important Aspects of Bavinck’s Life


Herman Bavinck was a son of the Secession, the wonderful reformation of the Reformed church in the Netherlands that began in 1834 in Ulrum, Groningen, with the preaching and then the deposition of the Rev. Hendrik de Cock. On his departure from Kampen for the Free University in Amsterdam in 1903, Bavinck said of himself, “Ik ben een kind der scheiding en dat hoop ik te blijven” (“I am a child of the Secession and I hope to remain that”).14


In the providence of God, that Bavinck was both physically and spiritually a son of the Secession accounts for much that is sound in Bavinck’s theology, particularly his doctrine of the covenant of grace, as well as for the godliness and warmth of his Reformed Dogmatics.


Herman Bavinck was born in 1854, twenty years after the beginning of the Secession and the year that the churches of the Secession—the Christian Seceded Reformed Churches—opened their seminary in Kampen, where Bavinck would later teach for many years.


His father, Jan, was a pious, humble man, who had been converted in 1840 by a disciple of de Cock. The preacher by whom Jan Bavinck had been converted was imprisoned some thirty times by the Dutch authorities for preaching the gospel recovered by the Secession. In this charged theological and ecclesiastical climate was Herman Bavinck reared. Herman Bavinck’s father was himself a minister in the Secession churches, the first to receive any kind of a formal seminary training.


When Herman Bavinck was installed as professor in the Secession seminary in Kampen, in January, 1883, the faculty included Helenius de Cock, Anthony Brummelkamp, and Simon Van Velzen. The first was the son of the renowned Hendrik de Cock, the human founder of the Secession churches, and the last two were illustrious “fathers of the Secession.”


Bavinck was born and reared at the very heart of the then still vibrant and powerful tradition of the Secession. The theology and spirit of the Secession were the air he breathed. By the “spirit” of the Secession is meant its piety, its wholehearted commitment to the Reformed confessions and the teachings of John Calvin, and its repudiation of the theological modernism that Hendrik de Cock had so sharply condemned.


This son of the Secession, nevertheless, was attracted to the world. The attraction was not moral, as though Bavinck found its godless life pleasing, much less as though he lived immorally himself. Not only was Bavinck’s personal life holy, but he also wrote a treatise excoriating the behavior of European society in his time.15 Bremmer informs us that it was a “thorn in the eye” to Bavinck that some of the members of the Secession churches lived careless, wicked lives in contradiction of their confession.16


But Bavinck was attracted to the world’s learning: the wisdom of the educated thinkers of his own and past times; the scientific theories, for example the evolutionary theory of his contemporary Charles Darwin; even, in certain respects, the unbelieving theological wisdom of modernist theologians.


Bavinck was impressed with this worldly wisdom. He was open to it. He thought that the Reformed faith can, and should be, accommodated to it. He supposed that Reformed theology can, and should, influence the world’s wisdom.


This is why some have spoken of “two Bavincks.” Hepp denies that this is an accurate description of Bavinck, although he recognizes the tension, or “duality,” in Bavinck.


However one describes this “duality” in Bavinck’s soul, the conflict between the thinking of the son of the Secession and the thinking that found the wisdom of the world both true and attractive had a harmful effect on Bavinck’s theology, as we will see.


That which Bavinck found appealing in the world’s thinking, he explained by his (and Kuyper’s) theory of common grace.


Bavinck showed this attraction to the world’s wisdom, and acted on it, already as a young man. Preparing for the ministry in the Secession churches, after only one year of training in the Secession seminary in Kampen, he decided to complete his seminary training in the thoroughly modernist seminary of the state Reformed church (from which his churches had seceded, as from a false church, some forty years earlier). The professors at Leiden were unbelievers, and all of the Netherlands knew it. They denied the bodily resurrection of Jesus, despised the Calvinistic doctrines of grace dear to the heart of the Secession, and were notorious higher critics of holy Scripture. Among others of the same stripe were Scholten, Kuenen, and Rauwenhoff.


Bavinck’s decision to complete his seminary training in Leiden, rather than in Kampen, was as if an aspirant to the ministry in the Protestant Reformed Churches would reject the Protestant Reformed Seminary, not even for Calvin Theological Seminary, but for the University of Chicago Divinity School and the teaching of a Paul Tillich.


Why he chose Leiden, Bavinck himself explained. He judged the theological instruction at the small Secession seminary to be inferior and unsatisfactory (and it did leave much to be desired, especially in the important area of dogmatics) and “cherished a strong desire to further my study in Leiden and to learn the modern theology at first-hand.”17


The Christian Reformed translator of Bavinck’s Magnalia Dei, literally, The Wonderful Works of God, but published in English translation as Our Reasonable Faith, extols the benefits of Bavinck’s theological education at Leiden.


[The training at Leiden] served him [Bavinck] well. The idea of solid theological scholarship for orthodox Reformed Christianity stood high in his life throughout his career. And his intimate acquaintance with the newer religious thought both deepened his Calvinist convictions and fitted him for a profession of theology realistically addressed to the problems of the time.18


Bavinck himself spoke more soberly of the effects upon him of that modernist training for the ministry of the gospel: “Leiden … has often made me very poor, has deprived me of … much that I now, in a later time, have learned to appreciate as indispensable for my own spiritual life, especially when I must make sermons.” As the remark that he added makes plain, Bavinck referred to the modernist seminary’s casting doubt on the inspiration of Scripture: “[Leiden’s effect on its students is that] their childlike trust in the word of the apostles [that is, Holy Scripture] is shaken.”19


Severe struggle with doubt concerning Scripture was the effect of his Leiden training upon Bavinck. During the brief pastorate in Franeker with which he began his ministerial career, Bavinck confided to a friend that he struggled with doubt about Scripture. Outwardly, to the congregation, he had to be the confident “dominee”; inwardly, he was wrestling with doubt.


This struggle with doubt concerning Scripture persisted throughout his ministry. To this struggle, Hepp refers when he speaks of a “duality in his [Bavinck’s] spiritual existence.”20 In fact, doubt concerning Scripture increased in Bavinck’s old age. In the last phase of his ministry, as professor at the Free University in Amsterdam, Bavinck nearly succumbed to sheer skepticism. Hepp, who was a student and friend of Bavinck, records that Bavinck said to him on one occasion toward the end of his life, “Daily, I become more deeply impressed with the awful relativity of all our knowledge.”21


Therefore, it is “no wonder,” as Bremmer puts it, that Bavinck “at the synod of Leeuwarden (1920) pleaded that the Reformed Churches should make the articles of the confession [the reference is to the Belgic Confession, Articles 2-7] concerning Holy Scripture the object of closer study.”22


This doubt concerning Scripture likely explains the curious fact that in none of his writings during the last ten years of his ministry did Bavinck explain Scripture, or even work with Scripture.


As I will demonstrate later, Bavinck’s doubt concerning Scripture found its way into his treatment of Scripture in the Reformed Dogmatics and, from there, as well undoubtedly as from his instruction of the seminarians in the Free University, into the Reformed Churches in the Netherlands. From the influential Dutch Reformed Churches, this doubt concerning Scripture made its way to Reformed churches throughout the world.


Brummelkamp knew whereof he spoke when he warned Bavinck’s father that in permitting the young Bavinck to train for the ministry at Leiden, “you entrust your son to the lions’ den.”23


Bavinck spent six years at Leiden (1874-1880). He obtained the doctorate in 1880, the first of the ministers in the Secession churches to do so. During these years he became especially close to the Old Testament professor, the higher critic Abraham Kuenen. Significantly, Bavinck had a picture of Kuenen hanging in his study throughout his ministry. Also during the Leiden years, Bavinck formed a very close friendship with a fellow student with the odd name Snouck Hurgrondje. Although Snouck was, and remained, a thorough-going modernist, Bavinck maintained intimate friendship with Snouck as long as Bavinck lived.


And it says something, not only about Bavinck’s ability, but also about his indecisiveness regarding modernism that some nine years after he left Leiden, the seminary department of the University of Leiden considered appointing Bavinck as successor to the unbelieving Rauwenhoff. At the time, Bavinck and others supposed that Bavinck was on the “short list” of nominees.24


No account of Bavinck’s training at Leiden would be complete that omits the incident at his examination by the Secession churches before Bavinck could be accepted as a candidate for the ministry in these churches. An old Secession preacher, whose name lives in honor for his deed on that occasion—J. F. Bulens van Varsseveld—required that Bavinck preach a sermon on the first part of Matthew 15:14: “Let them alone: they be blind leaders.” Recognizing full well that Bulens had Bavinck’s Leiden professors in view with his choice of the text, Bavinck was furious. At first, Bavinck refused the assignment. His father and his friends prevailed on him to change his mind. But Bavinck’s opening words—the introduction to the sermon—were: “Why this text has been assigned exactly to me is not difficult to figure out.”25


The explanation of Bavinck’s seeking theological education at Leiden is what the Germans call “Kulturtrieb,” a strong desire for culture. This was a powerful force in Bavinck all his life. “The Kulturtrieb, the urge for further cultural adaptation to his time, permeated him.”26 This cultural urge helps to explain, although it does not justify, Bavinck’s enthusiasm for the notion of a common grace of God.


Bavinck’s active ministry, first in the Christian Seceded Reformed Churches, until 1892, when these churches united with the Doleantie Churches of Abraham Kuyper, and thereafter in the Reformed Churches in the Netherlands (GKN), until Bavinck’s death in 1921, consisted of one brief pastorate and of two long stints in two seminaries, the Theological School of the Secession Churches at Kampen and the Free University of Amsterdam.


Bavinck began his ministry with a very brief pastorate of less than two years in Franeker, in the glorious province of Friesland. Bavinck was installed as pastor early in 1881, not long after graduating from Leiden. By all accounts, Bavinck was a good preacher, although he did not care much for the pastoral side of the ministry, for example teaching catechism to the children.


What is noteworthy about this pastorate, in addition to its brevity and Bavinck’s struggle with doubt concerning Scripture, especially when preparing sermons, is that shortly before Bavinck became its pastor the Franeker congregation had had the Rev. K. J. Pieters as minister, from 1851-1875. Pieters was the Secession minister who, with a colleague, J. R. Kreulen, introduced into the churches of the Secession the novel and heretical doctrine of a conditional covenant with all the baptized children alike. Pieters and Kreulen denied that the covenant and its salvation are governed by election. By this teaching, the two ministers caused a storm of controversy both in Pieters’ congregation in Franeker and in the denomination. Pieters and Kreulen publicized their covenant doctrine in the book De Kinderdoop, which appeared in 1861.27


In addition, Pieters was a drunk. Time and again, he was admonished by his consistory, and time and again he fell into public drunkenness. On one occasion he admitted to the elders that he made “een al te vrij gebruik van spiritus” (English translation: “an all too free use of alcoholic spirits”). Since Reformed elders in those days got to the very bottom of matters, we even know the brand of spirits of which the Rev. Pieters made too free a use: “Schiedammer,” a gin.28 Finally the consistory deposed Pieters, whereupon he split the congregation and continued for a time with an independent ministry.


Significantly, Bavinck criticized his predecessor for not preaching according to the creeds and as being, in fact, in disagreement with the creeds. In a letter to his friend Snouck, Bavinck wrote: “For a number of years, there was here [in Franeker] a preacher, who definitely was an exception in our entire church. Especially sharp of intellect, he did not agree with our confession, ignored it, and preached as he pleased.”29 This was Bavinck’s judgment on the covenant doctrine of Pieters and Kreulen and, therefore, on the covenant doctrine of the Reformed Churches (Liberated), which deliberately adopted the doctrine of the covenant of Pieters and Kreulen.


When Bavinck came to write that section of his Dogmatics that deals with covenant and election, he was familiar with the doctrine of Pieters and Kreulen. Bavinck rejected that doctrine, teaching, to the contrary, that election governs the covenant, particularly regarding the baptized children of the godly.


In 1882, the synod of the Secession Churches appointed Bavinck to be professor at the Theological School in Kampen. Bavinck was only twenty-eight. He taught mainly dogmatics at the seminary for almost twenty years, until 1902. During his Kampen years, his colleagues on the faculty were Helenius de Cock, Van Velzen, and Brummelkamp. These were the years when he read widely, thought deeply, and wrote his magnum opus, the four volumes of the Reformed Dogmatics. The last volume appeared in 1901.


Although at first suspicious of the proposed union of the Secession Churches with Kuyper’s Doleantie Churches, because of his fear of the “supremacy of Dr. Kuyper,”30 Bavinck became an enthusiastic promoter of the union, and was influential in bringing the union to fruition.


Three times while at Kampen, Bavinck received an appointment to teach at the Free University. Kuyper and the other powers at the Free University recognized Bavinck’s theological abilities and wanted him on the faculty. Twice, Bavinck declined the appointment, in favor of the seminary of the Secession Churches.


Also during his years at Kampen, Bavinck married Johanna Adriana Schippers, in 1891, when Bavinck was a mature thirty-seven and his wife, a young twenty-three. They had one child, a daughter.


In 1902, Bavinck accepted the appointment to teach dogmatics at the Free University, replacing Abraham Kuyper himself, who had gone on to the lower and lesser position of prime minister of the Netherlands. Bavinck was forty-eight. There, strangely, Bavinck lost his zeal for theology, except for teaching his courses. He sold his extensive theological library, because, as he said, “I will not be needing those books any longer.”


After 1911, Bavinck never wrote another theological book, although writing much in other fields, especially psychology and education. Openly, he expressed the wish to be able to give up his professorship in theology in order to devote the rest of his life to “study, in which psychology would be on the foreground.”31


The last years of Bavinck’s life and ministry also marked a distinct, noticeable change in Bavinck’s spiritual and psychological attitude. He was gloomy, somber, and seemingly depressed. Hepp, who knew Bavinck personally and well, describes his teacher and friend this way: “He was tormented with problems.” The problems, according to Hepp, were three: the future [of European society; Bavinck died soon after the end of WW I]; the problem of Scripture [in the thinking of Bavinck]; and the problem of culture.32 Concerning the last, the problem of culture, culture must not only torment, but also drive to despair everyone who supposes that worldly culture can be and should be “Christianized.”


Bavinck died in 1921, at the age of sixty-seven. Shortly before his death, knowing that death was imminent, he said, “Now my scholarship avails me nothing, nor can my dogmatics: it is only my faith can save me.”33


Before I survey the strengths and weaknesses of Bavinck’s theology, I offer the following observations and analyses of various aspects of Bavinck’s life.


First, in the providence of God, specifically with regard to the maintenance and development of the truth, Bavinck stood in the main stream of the Protestant and Reformed tradition: the Netherlands of Dordt; the glorious Secession; and the recovery and bold confession of Reformed orthodoxy by Abraham Kuyper.


Second, Bavinck was a diligent, extremely well-read, brilliant Reformed theologian. Especially during his years at Kampen, he read widely, thought deeply, and wrote industriously. Apart from all his other books, and there are a number of other fine works, particularly the little work on faith’s certainty,34 the Reformed Dogmatics is a monumental achievement. Bavinck was a theologian’s theologian.


Third, Bavinck links the Protestant Reformed Churches with the theology of the Secession in the Netherlands of 1834, especially its covenant doctrine, and with all that is good in the Reformed tradition going back to Calvin. Bavinck does this both with regard to time and with regard to the content of Reformed theology. With regard to time, Bavinck, who died only three years before the Christian Reformed Church expelled Herman Hoeksema, in 1924, was contemporary with most of the “fathers of the Secession.” With regard to the content of Reformed theology, in most of the important truths of the faith, the Protestant Reformed Churches confess and preach the Reformed faith as systematized and presented by Herman Bavinck in his Reformed Dogmatics. There is no doubt in my mind that Hoeksema was strongly influenced by the dogmatics of Bavinck.


Fourth, although Bavinck is widely viewed as “irenic,” that is, a lover of peace (which was not always a virtue, for the irenic Bavinck characteristically refused sharply to criticize and flatly to condemn heresy, always inclined to find some good in even the most egregious of heretics, for example, the pantheist, Schleiermacher, and the “ethical theologian,” Daniel Chantipie de la Saussaye), he—Bavinck—was also extremely sensitive to criticism, and prone to bitterness when he was criticized, or when a church decision did not go his way.


According to Hepp, the defeat at the synod of 1889 of Bavinck’s proposal concerning the union of the two seminaries, a bone of contention in the denomination formed by the uniting of the Secession Churches and the Doleantie Churches, was the cause of a radical change in Bavinck’s attitude and demeanor. He left the synod at once, refusing to attend the rest of the sessions. For some time thereafter, he would not sing at church, and showed himself generally as a malcontent.35


This response of Bavinck to the bitter pill he had to swallow at synod is by no means the most important aspect of Bavinck’s life, but it is a warning especially to ministers. Bavinck’s bitterness hindered his work in the churches. The weakness brings home to us the warning of Hebrews 12:15, “Looking diligently lest … any root of bitterness springing up trouble you.” Bitterness, for which there are abundant occasions in the ministry, as in the life of all the saints, corrodes the minister’s own godliness, spoils the work he does, and prevents a great deal of work that he might otherwise perform for the welfare of the church and the glory of Jesus Christ. The secret, of course, is to forget men and self, and to mind only Jesus Christ.


With this, I turn to the theology of Bavinck, and, first of all, to the strength and worth of his theology.




The Strength and Worth of the Theology of Bavinck


The Reformed dogmatics of Bavinck—the four volumes of the Reformed Dogmatics—is a worthy, indeed praiseworthy, work of Reformed theology. It sets forth the doctrines of the Reformed faith in a thorough, comprehensive, systematic, and generally sound way. It is nothing less than monumental.


These are some of the strengths and virtues of the Reformed Dogmatics. First, the Reformed Dogmatics presents, in the systematic form of a carefully worked out and united body of theology, the wealth of the Reformed faith as this faith was confessed and developed from John Calvin to the beginning of the twentieth century. Special attention is given to the development of the Reformed faith in the Netherlands, which was, especially from the time of the Synod of Dordt, the main stream in which the Reformed tradition flowed.


Second, the Reformed Dogmatics is based on, and in harmony with, the Reformed creeds. I am not claiming that Bavinck’s dogmatics never deviates from the creeds, as though it is above criticism. It does deviate, and, in certain respects, grievously. But I am saying that Bavinck labored, consciously and with determination, in the conviction that the Reformed creeds embody the truth of Scripture and that they are authoritative for Reformed theology. This accounts for the overall soundness and, therefore, the real and lasting worth of the Reformed Dogmatics.


Third, the scope and breadth of the Reformed Dogmatics are vast, helpfully vast. Here, Bavinck’s Spirit-given brilliance as a theologian and Spirit-worked diligence at his dogmatical labors are evident. The Reformed Dogmatics gives a virtually complete history of dogma, as well as a sketch of church history. It takes into account, throughout the four volumes, the teachings of the fathers of the early church, as well as the ecumenical creeds. It interacts with all the church denominations—Greek Orthodox, Roman Catholic, Lutheran, and others, as well as with the cults. It surveys the teachings of the reformers, not only Calvin but also Luther, Bucer, Vermigli, and others.


It engages and analyzes the philosophers who have posed a threat to the church throughout the ages, Plato, Aristotle, Kant, and others.


It critiques the pagan religions, for example Buddhism.


There is no heretic who escapes scrutiny, from Montanus, Arius, and Pelagius, to Pighius, Arminius, Amyraut, and Schleiermacher. Always, Bavinck exposes the fundamental error and its contradiction of the truth in a few, clear sentences. There is special emphasis on the heretics and heresies threatening the Reformed churches in Bavinck’s own time: modernism; the “mediating theology”; the “ethical theology”; and “Methodism” (we would say, “fundamentalism and revivalism”).


Fourth, Bavinck wrote the Reformed Dogmatics convinced that the truths of Holy Scripture—the content of the Reformed Dogmatics—are non-contradictory. And the reason is that there is no contradiction in the mind of God. Bavinck affirms this axiomatic truth in his prolegomena:


For if the knowledge of God has been revealed by himself in his Word, it cannot contain contradictory elements or be in conflict with what is known of God from nature and history. God’s thoughts cannot be opposed to one another and thus necessarily form an organic unity. The imperative task of the dogmatician is to think God’s thoughts after him and to trace their unity … That such a unity exists in the knowledge of God contained in revelation is not open to doubt; to refuse to acknowledge it would be to fall into skepticism, into a denial of the unity of God.36


Again, I am not contending that there are no contradictions in the Reformed Dogmatics, but that Bavinck was not a paradoxical theologian, a Dutch Karl Barth.


The conviction that the revelation of Scripture, as summarized in the Reformed creeds, is non-contradictory safeguarded Bavinck’s confession of salvation by sovereign grace in many crucially important places in the Reformed Dogmatics. Bavinck did not think himself at liberty to contradict the truth that the grace of God in Jesus Christ is particular and efficacious, having its source as it does in an eternal decree of election, accompanied by a decree of reprobation, with appeal to “paradox,” that is, in reality, sheer contradiction.


Whereas the foregoing is more general concerning the strength and worth of Bavinck’s dogmatics, what follows is more specific.


First, the Reformed Dogmatics is biblical. With appeal to Article 5 of the Belgic Confession, Bavinck asserted that “Scripture is the sole foundation (principium unicum) of church and theology.”37 Bavinck defined dogmatics “as the truth of Scripture, absorbed and reproduced by the thinking consciousness of the Christian theologian.”38 Every doctrine, therefore, is derived from Scripture. The Reformed Dogmatics is the product of exegesis. This is not to say that there are lengthy sections consisting of the interpretation of texts. Bavinck’s method, rather, is usually to state a doctrine in a few sentences, or paragraphs, and then to list the biblical passages from which he has drawn the doctrine.


The strengths and benefits of the Reformed Dogmatics, due to its biblical nature, are great. It is orthodox. It is fresh and lively. Bavinck contends for such a dogmatics in the prolegomena: “Dogmatics is not a dull and arid science.”39 Still another strength and benefit of Bavinck’s biblical dogmatics is that there is development of dogma.


In close connection with its avowed biblical character, the Reformed Dogmatics is God-centered. Bavinck set himself the task of producing a God-centered dogmatics with the whole of the massive Reformed Dogmatics from the outset. All of his dogmatics had to be the knowledge of God in systematic form. “The aim of theology, after all, can be no other than that the rational creature know God and, knowing him, glorify God (Prov. 16:4; Rom. 11.36; I Cor. 8:6; Col. 3:7).”40 The Reformed Dogmatics is, according to Bavinck’s purpose, “a theodicy, a doxology to all God’s virtues and perfections, a hymn of adoration and thanksgiving, a ‘glory to God in the highest’ (Luke 2:14).”41


Because the Reformed Dogmatics is biblical and God-centered, it is also warm and practical. By design, Bavinck wove ethics into the dogmatics. No doubt his heritage as a child of the Secession contributed to the piety, the godliness, of the presentation of Reformed dogmatics. Bavinck was no pietist. He condemned the theology of doubt of the Puritans and their spiritual descendants, the men and women of the Nadere Reformatie, in the Reformed churches.42 But he was pious, as every genuinely Reformed Christian man, woman, and child is pious. Deliberately Bavinck allowed the godliness of experience and practice that is inherent in the Reformed doctrines to come out in his exposition of the doctrines. Relating dogmatics and ethics thus closely was also born of Bavinck’s theological conviction.


Theological ethics … is totally rooted in dogmatics … Dogmatics is the system of the knowledge of God; ethics is that of the service of God. The two disciplines, far from facing each other as two independent entities, together form a single system; they are related members of a single organism.43


Third, the Reformed Dogmatics affirms, explains, and vigorously defends the sovereignty of the grace of God in Jesus Christ from beginning—predestination in the eternal counsel—to end—the preservation of the elect, believing sinner unto eternal life and glory. This is the heart of the gospel. It is also the heart of every truly Reformed dogmatics. Faithfulness to the truth of sovereign grace is the mark of a standing or falling theology.


Bavinck taught God’s sovereignty both in election and in reprobation, affirming unconditional predestination against all forms of conditionality. Explicitly, he condemned both Arminius and Amyraut. Bavinck exposed the fundamental error of Arminius as the doctrine of resistible grace: “[For Arminius] grace was still always considered resistible.” The monstrous effect of Arminius’ theology was (and still is) that it makes “human beings the final arbiters of their own destiny.” The specific Arminian teachings that necessarily result in this God-dishonoring effect are the “objection to the … certain foreknowledge of God with regard to those who would or would not believe, plus the universal will of God to save all humans, Christ’s universal atonement, and the universal offer of the sufficient means of grace.”44


Of Amyraut, Bavinck judges that he and the “school at Saumur in France” supported the Arminian heresy that Dordt had condemned. Bavinck notes that Amyraut taught two decrees of election. The first is a universal, conditional decree, that is, a decree of God to save all humans on condition that they will believe. The second is particular and absolute, that is, a decree of God to give some humans the gift of faith and to save them. Says Bavinck, correctly, “Of course, if the first (universal) decree meant anything at all, it would completely overshadow the second.”45


Bavinck’s judgment of Amyraut applies as well to the theology of the Federal Vision today, as to the doctrine of a conditional covenant whence this theology springs. The conditional will of God to save all baptized members of the visible church (a universal, conditional election, of sorts) completely overshadows any particular decree of election to which the advocates of a conditional covenant of grace with all the baptized may pay lip service.


In a sixty-page treatment of the divine counsel, Bavinck contends for the truth that “all the decrees of God [not only the decree of predestination] are based on his absolute sovereignty.”46


Charging that the doctrine of universal atonement separates Christ from election and the covenant,47 Bavinck affirms, in the face of all the arguments raised against it, including the favorite texts of the defenders of universal atonement, definite, limited atonement. “It was God’s will and intent that Christ make His sacrifice … only for the sins of those whom the Father had given him.”48 “The acquisition and application of salvation are inseparably connected … [As] the intercession is particular … so is the sacrifice.”49 Bavinck somewhat weakens this otherwise forceful confession by finding certain non-saving “benefits” of the cross for the reprobate.50


The work of salvation by the Holy Spirit, which in Bavinck’s theology begins with the internal call, is likewise wholly and exclusively the gift of grace.51 Grace is not only undeserved and unconditional, but also “efficacious” and “irresistible.”52


In a beautiful, heart-warming, and God-glorifying section, Bavinck confesses the perseverance of saints, not as “the activity of the human person but a gift from God.” Perseverance is rooted in election, founded on the atonement, the sure effect of almighty grace, and due, ultimately, to the faithfulness of God in the covenant of grace.”53


In defense of perseverance against those who teach the falling away of men and women to whom God has sworn His covenant promise and in whom God has begun the work of salvation, Bavinck declares that the Bible, indeed the Old Testament, “clearly states that the covenant of grace does not depend on the obedience of human beings. It does indeed carry with it the obligation to walk in the way of the covenant but that covenant itself rests solely in God’s compassion ... God cannot and may not break his covenant.”54


For Bavinck, the explanation of the perishing of many Israelites in the Old Testament, as of the perishing of some baptized children of believing parents in the New Testament, is that given by the apostle Paul in Romans 9:6, 7 and by the apostle John in I John 2:19: “not all who are descended from Israel belong to Israel (Rom. 9-11). Similarly, John testifies of those who fell away: they were not of us or else they would have continued with us (I John 2:19)”55


Those Reformed churches that make this confession at the beginning of the twenty-first century are castigated, and banished from the Reformed community, as “hyper-Calvinists.”


Demonstrating the “balance” of himself as a dogmatician and of his dogmatics, which is characteristic of the Reformed faith, Bavinck admonishes that “certainty” of perseverance by no means rules out “admonitions and threats,” which are “the way in which God himself confirms his promise and gift [of perseverance] through believers. They are the means by which perseverance in life is realized.” He adds: “After all, perseverance is also not coercive but, as a gift of God, impacts humans in a spiritual manner.”56


All of this gracious work of salvation, from the call and regeneration to preservation, has its source in God’s covenant of grace, and the covenant of grace is grounded in eternal election.


All the benefits that Christ acquired and distributes to his church are benefits of the covenant of grace. This covenant, though first revealed in the gospel in time, has its foundation in eternity: it is grounded in the good pleasure of God, the counsel of God … It is of the greatest importance … to hold onto the Reformed idea that all the benefits of the covenant of grace are firmly established in eternity. It is God’s electing love, more specifically, it is the Father’s good pleasure, out of which all these benefits flow to the church.57


With specific reference to perseverance, but with application to all the work of salvation, Bavinck declares that the covenant of grace, from which salvation flows, “does not depend on the obedience of human beings … but solely in God’s compassion … God cannot and may not break his covenant … the covenant of grace is … unbreakable like a marriage.”58


In the context of this affirmation of the indissolubility of the covenant on account of the faithfulness of God, Bavinck states that the covenant is established and maintained by God’s word and that this word “in its totality is one immensely rich promise to the heirs of the kingdom.”59


Since I take up the subject of Bavinck’s doctrine of the covenant in a separate address at this conference, I say no more about this essential aspect of the truth of salvation by sovereign grace in Bavinck at this time.


One other strength of Bavinck’s theology is its development of dogma. Development of the understanding of the truth was the result, not only of Bavinck’s deep and comprehensive grasp of the whole of the body of the Reformed faith, involving the perception of the relation of all the individual doctrines to each other, but also of Bavinck’s biblical method of dogmatizing. Deriving all of the doctrines of the Reformed faith from Scripture, as it were anew in his own thinking, Bavinck was led, by the Spirit of truth, to correct faulty formulations of doctrine in the Reformed tradition, to improve inadequate presentations of certain doctrines, and to bring the understanding of the truth to a higher level—a level more in accord with the whole of biblical revelation than previous understanding.


One such development was Bavinck’s insight into the doctrine of predestination, with specific reference to the longstanding, brotherly debate concerning supralapsarianism and infralapsarianism. Bavinck pointed out both the virtues and the defects of each theory concerning the order of the decrees of God and proposed a new conception that incorporates the virtues of both, while shedding their defects. This conception makes the election of Jesus Christ first in the counsel of God, as the goal of God triune concerning the revelation of His glory.


Also, this conception avoids the error of both the traditional supralapsarian view and the traditional infralapsarian view of placing “all things that are antecedent to the ultimate goal as means in subordinate relation also to each other.”60 What Bavinck meant by this, he indicated when he added, in explanation, that “both election and reprobation presuppose sin and are acts of mercy and justice,” with appeal to Romans 9:15 and Ephesians 1:4.61


Nevertherless, amidst the gold of the Reformed Dogmatics is dung. Much of the dung consists of the doctrine of a purported common grace of God, a doctrine that reappears throughout the four volumes of the Reformed Dogmatics, in a number of doctrinal contexts. Because this error in Bavinck is the subject of one of the addresses at this conference, I can be brief in treating of the weaknesses of the Reformed Dogmatics.




Weaknesses in Bavinck’s Dogmatics


I point out two grievous errors in the theology of Bavinck, both of which have had disastrous consequences, not only for Reformed doctrine but also for Reformed churches that have allowed themselves to be influenced by the errors.


The first, pervasive error is Bavinck’s theological conviction that there is something good, something true, in virtually all the philosophies, all the scientific theories, and all the cultural proposals of the ungodly, antichristian, and unbelieving movers and shakers of the world outside of Jesus Christ. Under this conviction, Bavinck invariably accommodated Reformed theology to these philosophies, scientific theories, and cultural works. He could never, sharply and absolutely, condemn the ungodly theories of even the grossest of heretics and fiercest of avowed foes of the Christian religion, whether Schleiermacher or Darwin.


Abraham Kuyper publicly criticized Bavinck for this weakness, on two occasions. The first occasion was Bavinck’s inaugural address when he was installed as professor in the seminary at Kampen. Although critical of the Protestant heretic, Bavinck also spoke well of Friedrich Schleiermacher: “It is to us a pleasant duty, thankfully to recognize all the good that has come to theology by this original thinker.”62 Kuyper praised Bavinck’s address—“the Science of Holy Theology”—highly, in his magazine, De Heraut.


Almost never has a piece [of writing] come into our hands that we have read, from beginning to end, with such almost wholehearted agreement as the inaugural address of Dr. Bavinck on the Science of Holy Theology. This is truly Reformed scientific theology … It was refreshing to read this. Here is fidelity to Dordt, which will not deviate from Dordt, but at the same time the spirit of Dordt, which does not proscribe the development of theology.63


But Kuyper objected to Bavinck’s praise of Schleiermacher, in print. Bavinck’s praise of Schleiermacher, wrote Kuyper to the Reformed community in the Netherlands, betrayed Bavinck’s lack of “awareness of the unspeakable evil, that this philosopher has inflicted on the church of Christ.”64


The second occasion of Kuyper’s public criticism of Bavinck for failing to condemn heretics and their heresies was Bavinck’s publication of a book on the ethical theologian, Daniel Chantipie de la Saussaye.65 In this case, Bavinck’s fault was not that he praised Saussaye, but rather that he failed sharply and vehemently to condemn his heresy. Although Bavinck himself concluded that Saussaye’s teaching was “philosophy, rather than Christian truth, in conflict with Scripture, and tinged with pantheism,” Bavinck limited his criticism, if criticism it can be called, to the astounding statement that there were “elements” in Saussaye’s theology that “restrained [Bavinck] from complete agreement.”66


Kuyper was obviously indignant.


This places us before the question: Is this permissible? If you conclude, that someone’s theology conflicts with the Holy Scripture; offers philosophy rather than Christian truth; leads to pantheism; and indeed weakens the dividing line between Creator and creature, may you then so favorably judge of such a thoroughly dangerous theology, which has already seduced scores and hundreds of the best [professing Christians in the Netherlands], as you do when you speak [merely] of not completely agreeing? No matter how people may criticize us for it, we emphatically say: No!67


Kuyper wanted a bold, severe, radical condemnation of these two theologians, as well as of all others who corrupted the gospel, as an urgent warning to the members of the Reformed churches who were tempted by the false teachings. Kuyper was far more antithetical in this important regard than was Bavinck.


These criticisms irritated Bavinck sorely. If Kuyper thought that he could change Bavinck by his public criticism, as Hepp supposes was the case, Kuyper “was completely mistaken. Nothing irked Bavinck more than public criticism.”68 From the moment of Kuyper’s criticism of Bavinck in the matter of de la Saussaye “dates the less friendly expressions about Kuyper [by Bavinck].”69


This hesitation of Bavinck completely to denounce a philosopher or heretic and his false teaching and his readiness to find something true and good in philosophy or in an aberrant theology are by no means due merely to his peace-loving personality as his uncritical supporters contend.


Rather, Bavinck deliberately adopted a “neo-Thomist philosophy” as a philosophical guide for his theology. “Thomist” refers to the outstanding philosopher/theologian of the Roman Catholic Church, Thomas Aquinas. “Neo-Thomist” philosophy is a nineteenth century form of the Roman Catholic doctrine that, after the fall, there is still something good, something godly, in the unregenerated, so that Christianity can cooperate with the unbelieving thinkers, and even build on what is true and good in their works, in order to form a good, godly, even Christian culture and society.


According to Roman Catholic theology, the fall stripped man of the “supernatural” gifts with which the Creator endowed man in the beginning—saving knowledge of God, righteousness, and holiness—but left man with the “natural” gifts of reason and will, which, although somewhat weakened by the fall, are still capable of good and true thinking and desiring. The grace of the gospel, therefore, does not redeem and renew the totally depraved mind and will of the fallen sinner, but merely completes, or “perfects,” the fundamental goodness of the mind and will. Grace builds on, adds to, and brings to completion, “nature.” Indeed, in Roman Catholic theology, grace depends on nature: the natural will of the sinner performing the conditions required by grace.


Here, Bavinck’s (and Kuyper’s) theory of common grace comes into play. Common grace, according to its proponents, accounts for much that is true and good in the theories of the world’s great thinkers, altogether apart from the grace of God in Jesus Christ, so that Christian thought may, and must, take the world’s thinking about God, man, and creation seriously and even accommodate itself to this worldly thinking. The theory of common grace in Reformed circles is essentially the same as the philosophy that reigns in the Roman Catholic Church. This goes far to explain the actual cooperation of Reformed theologians who are committed to the theory of common grace with Roman Catholic thinkers and organizations.


R. H. Bremmer, a sympathetic biographer of Bavinck, writes that “all Bavinck-commentators are in agreement that the neo-Thomistic philosophy exercised great influence on [Bavinck].”70 Indeed, Bavinck “saw in the doctrine of the ideas, as Christianized by Thomas, the form in which the Christian faith could enrich and Christianize the culture of his own time.”71


Basic to Bavinck’s commitment to fundamental Roman Catholic thinking and to his readiness to accommodate Reformed theology at crucial points to ungodly but learned theories was Bavinck’s deep concern, strong desire, and firm resolution to Christianize European culture. The Christianizing of culture was one of the main purposes of Bavinck’s ministry. Hepp writes that Bavinck desired a synthesis of Christendom and culture: “He cherished the hope of another synthesis, namely that between Christendom and culture.”72 This was also the ambition of Bavinck’s colleague, Abraham Kuyper. One of the great projects of Kuyper’s life was the “re-Christianizing of the Western European world of culture.”73


When Bremmer sums up Bavinck’s life and ministry at the end of his study, the heading is “Cultuur en Evangelie” (“Culture and Gospel”).74 Concern for culture, specifically the concern to relate the gospel to the prevailing culture, and thus to “Christianize” the culture, had equal billing with the gospel in the ministry of Herman Bavinck. Nowhere does Jesus Christ charge His church with such a cultural mandate: “Preach and confess the gospel, in order to ‘Christianize’ the thinking, the arts and science, and the way of the life of the ungodly world.”


According to Bavinck’s contemporary, the theological modernist Roessingh, “the question of the position of Christendom in this world of culture … was important above all [to Bavinck].”75 The sympathetic Bremmer regards the fascination of Bavinck with the culture of his time more favorably, but indicates, similarly, the deep, deliberate concern of Bavinck with culture in the writing of his dogmatics: “The great worth of his [Bavinck’s] dogmatics will undoubtedly remain, that we can read from it, how a reformational [Dutch: “reformatorisch”] theologian toward the end of the nineteenth century approximated the culture-issues of his time with the gospel.” So much is Bavinck’s dogmatics concerned with the culture of the day that Bremmer, thinking to praise it highly, calls it “a cultural monument of the first order.”76


No wonder, then, that one of the three factors contributing to Bavinck’s deep gloom, bordering on depression, at the end of his life was the “culture problem.”77 Europe, during and immediately after WW I, gave no evidence of any likelihood of the Christianizing of culture. It is doubtful that the little country of the Netherlands at that time gave any evidence of being Christianized, despite the efforts, including the prime ministership, of Abraham Kuyper.


And it was this grievous error of both Bavinck and Kuyper that occasioned the charge by their modernist contemporaries already in their own time, that “neo-Calvinism” (the common grace, culture-influencing and culture-accommodating theology of Kuyper and Bavinck and their disciples) was in fact a fundamental break with the old Calvinism of Calvin and the Reformed creeds, and nothing but modernism in disguise.78


When Herman Hoeksema purged Reformed theology of the common grace theory of Kuyper and Bavinck (which theory, despite some occasional, somewhat similar terminology, cannot be found in John Calvin, contrary to the claims of the defenders of the theory), he delivered Reformed theology and the churches from a prominent, indeed major aspect of what Kuyper and Bavinck had made of this theology, from an alien element in that theology, from a corrupting leaven in that theology, and from the impossible and completely unbiblical burden that the theory of common grace lays on the Reformed church of Christ: “Christianize the world!” Altogether apart from the even more important condemnation of the “well-meant offer”—the corruption of the gospel by the affirmation of a universal, resistible, saving grace of God, a saving grace of God that neither has its source in election nor effectually achieves the salvation of the objects of this grace, Hoeksema’s repudiation of the common grace theory of Kuyper, Bavinck, and their neo-Calvinistic disciples was a significant development of Reformed theology, with huge implications for the Reformed faith and life both of church and of individual Christian, and a genuine reformation.


Because of Bavinck’s deliberate adoption of the Roman Catholic philosophy of the nature/grace scheme as basic to his theology and because of his related adoption of the theory of common grace, there is reason to question the phrase that runs through Bavinck’s dogmatics like a refrain and that is widely recognized as expressing something essential to Bavinck’s theological thought: “Grace perfects nature.”79 One appearance of the phrase is at the juncture of Bavinck’s treatment of “general revelation” and “special revelation”: “Nature precedes grace; grace perfects nature. Reason is perfected by faith, faith presupposes nature.”80 The Latin original, “Gratia perficit naturam,” can be translated, “Grace completes nature.” Commonly, Reformed theologians understand the phrase in an orthodox sense, as expressing the biblical and Reformed idea that in the work of salvation, whether with regard to the individual human or with regard to the creation itself, God does not abandon His work of creation, does not create new humans or a new universe, but redeems, renews, and ultimately raises from the dead the man, woman, or child to whom He gave physical existence and the heaven and the earth that He created in the beginning. There can be no doubt that Bavinck’s theology intends to emphasize this meaning of the phrase.


But it may be questioned whether Bavinck did not read more into the phrase than this orthodox meaning, so that his theology becomes guilty of the error of accepting ungodly thinking as an aspect of (human) “nature” that remains unspoiled by the fall, containing that which is good and true, so that the “grace” of sound Reformed theology, accommodating itself to this ungodly thinking, merely completes and renders perfect this naturally good and true “nature.” Faith merely supplements the truth already present in the natural human mind, whether of Plato, or of Kant, or of Schleiermacher, or of Darwin. And this view of the relation of theology and the wisdom of the learned ungodly inevitably results in accommodating the teaching of the Bible to the alleged wisdom of this world, whether in the philosophy of Plato, Aristotle, or Kant, or in the heretical theology of Schleiermacher, or in the scientific theories of Charles Darwin. It is significant that Bavinck himself preferred to translate the Latin verb as “restores”: Grace only restores nature.81


Regardless how Bavinck understood and applied the phrase “Grace perfects nature,” there is abundant evidence in his Dogmatics that, in his fascination with culture and its issues, by virtue of his neo-Thomistic philosophical presupposition, and with the help of his theory of common grace, Bavinck accommodated Reformed theology to ungodly, anti-biblical thought, and thus seriously compromised the Reformed faith.


Bavinck thinks that we must “recognize all the elements of truth that are present also in pagan religions,” appealing for support to “Thomas [Aquinas].” “The doctrine of common grace” enables Reformed people to “recognize all the truth, beauty, and goodness that is present also in the pagan world.” Indeed, “an operation of God’s Spirit and of his common grace is discernible not only in science and art, morality and law, but also in the [pagan] religions.” And then this dreadful assertion: “Hence Christianity is not only positioned antithetically toward paganism; it is also paganism’s fulfillment.”82 Grace completes (depraved, devilish, sinful, human) nature! There is a “natural theology,” and “natural theology … [is] a ‘preamble of faith.’”83


Bavinck is critical of Martin Luther for the Reformer’s denying “to Aristotle, to reason, and to philosophy all right to speak in theological matters” and for calling “reason stoneblind in religious matters.” Aristotle, of course, was the philosopher who influenced Thomas and, therefore, Roman Catholic theology. Recognizing the pervasive influence of the philosopher upon Rome’s corruption of the gospel of grace, Luther exclaimed, on one occasion, “Away with that damned, rascally heathen, Aristotle.” But Bavinck charges that this exclusion of Aristotle from theology is “excess.”84


“The founders of [non-Christian] religions, like Mohammed” may not be considered as “simply impostors, enemies of God, accomplices of the devil,” according to the accommodating Bavinck.85


In pagan and non-Christian religions is “a point of contact” for the gospel, a “firm foundation on which [Christians] can meet all non-Christians.”86 Faith supplements (the darkened, unenlightened, religious) mind of unbelievers!


How Bavinck put his neo-Thomistic and common grace theories to work concretely in his dogmatics comes out in the following instances. In defense of his doctrine of a covenant of works in Paradise, by which Adam might have merited eternal life by obeying God’s command, Bavinck declares, “It combines Schleiermacher [dependence] and Kant [freedom].”87 Evident in the declaration is that Schleiermacher and Kant have a certain authoritative, determining role in Bavinck’s theological thinking. That Bavinck’s construction of the covenant with Adam satisfies the theology of the one and the philosophy of the other is a commendation, if not a proof, of the covenant of works. What ought to have been determinative in Bavinck’s theology of the covenant with Adam is the primacy of Jesus Christ in the counsel of God, as taught in Colossians 1:13ff.


More substantial is Bavinck’s concession to the evolutionary theories of Darwin and other scientists. Bremmer notes Bavinck’s “strong sympathy for the newer scientific thinking that powerfully came to the fore in the middle of the nineteenth century, particularly the work of Darwin.”88 Concerning the opening chapters of the Bible, particularly Genesis 1 and 2 and the seven days of the week of creation, Bavinck does declare that Scripture “does not present saga or myth or poetic fantasy but offers … history, the history that deserves credence and trust.”89


Nevertheless, Bavinck yields to the pressure to accommodate Genesis 1 and 2 to the apparent testimony of science, specifically “geology and paleontology,” of a very old earth—an earth much older than the six days of the week of creation taught by Genesis 1 allows for. Bavinck does this, first, by locating the creation of the heaven and the earth of Genesis 1:1 prior to the first day of the week of creation. Genesis 1:3 records an act of God some time after the event recorded in verses 1 and 2. Evidently, this provides some of the millions of years demanded by unbelieving scientists.90


The second element of Bavinck’s accommodation of the Bible to the theories of unbelieving scientists is more serious. Bavinck denies that the six days of Genesis 1 were actual, historical days. Thus, in fact, he denies the historicity of Genesis 1. Consciously dismissing the testimony of the Holy Spirit in Genesis 1 that the days were limited by one evening and one morning, Bavinck concedes that “the days of Genesis 1 … have an extraordinary character.” They were “extraordinary cosmic days.”91 That is, they were, in reality, not days at all, but long periods of time—hundreds of thousands, if not millions, of years.


Having conceded an old earth to unbelieving scientists and, thus, the historicity of Genesis 1, with all the implications this concession has for the historicity of Genesis 2-11 and for the inspiration of Scripture, Bavinck goes yet a step further. He allows for the process of evolutionary development during these long periods of time, which is, of course, the reason why unbelieving science must have an old earth in the first place. “Much more took place on each day of creation than the sober words of Genesis would lead us to suspect … Each day’s work of creation must certainly have been much grander and more richly textured than Genesis summarily reports.”92


In conclusion, Bavinck expresses satisfaction that by virtue of his explanation of Genesis 1, “Scripture offers a time span that can readily accommodate all the facts and phenomena that geology and paleontology have brought to light in this century.”93


Bavinck’s concession to evolutionary scientists contradicts his blunt, strong condemnation of evolutionary scientific theory in general and of Darwinian evolutionary theory in particular, both in his Reformed Dogmatics94 and in a penetrating, powerful booklet titled, Schepping of Ontwikkeling (English translation: Creation or Evolution).95


Already in Bavinck’s own time, his students and disciples brought Bavinck’s concession to the wisdom of unbelieving scientists to its natural and inevitable conclusion in a bold, total rejection of the historicity, not only of Genesis 1 and 2, but also of Genesis 3. At the same time, they openly questioned the inspiration of Scripture, as was implied in Bavinck’s exegetical adaptation of the days of Genesis 1 to the theories of evolutionary scientists. Thus, this development of Bavinck’s error of accommodating the gospel to culture also involved the exploiting of the other grievous error in Bavinck’s Dogmatics: weakness concerning the doctrine of Scripture.


A second, serious weakness of Bavinck as dogmatician was his erroneous doctrine of Scripture. Bavinck struggled with fundamental doubt about the inspiration of Scripture all his life. The doubt increased in his old age. Leiden inflicted a severe spiritual and theological injury upon him. The wound lasted all his life. He never ripped the portrait of Abraham Kuenen, his higher critical Old Testament professor, from his study wall.


The one question that his Secession examiners had had about his theology when Bavinck gave account of it to them on his entrance into the ministry of the Secession Churches in 1880 was his doctrine of Scripture.96


How deeply this doubt concerning Scripture resided in Bavinck’s soul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at the very end of his ministry and life he urged the synod of his churches to study the doctrine of Scripture in Articles 2-7 of the Belgic Confession with a view to a revision of the doctrine. To the synod of Leeuwarden (1920), that is, within a year of Bavinck’s death, Bavinck sent a report that, although advising maintenance of the Reformed confessions, against a movement of younger pastors for a wholesale revision of the confessions, urged the synod that “now the time had come for a further formulation and development of specific points of the confession.” One of these points was “the divine inspiration and authority of Holy Scripture, Articles 2-8 of the Netherlands [Belgic] Confession of Faith.”97


It must be recognized that Bavinck struggled with his besetting sin of doubt concerning the inspiration of Scripture. He never simply surrendered to it. Were it not that doubt concerning Scripture’s inspiration is such a grievous sin and that Bavinck himself opened himself up to this doubt by his choice of Leiden with its Scripture-denying faculty as the school of his seminary training, as also by his determination to find truth and goodness in unbiblical, indeed anti-biblical theories (which, of course, necessarily involved casting doubt on the Bible), one would say that there was something heroic about Bavinck’s struggle with doubt. He knew the issue and its gravity, and never outrightly succumbed to the doubt. Very likely his well-known words toward the end of his life, “I have kept the faith,” referred to his life-and-death struggle with doubt concerning Scripture, and expressed his confidence that he had resisted the doubt, which is fatal to the Christian faith. And there are many fine, sound explanations and defenses of biblical authority in the Reformed Dogmatics.


But none of this hides, or mitigates, the seriousness of Bavinck’s erroneous doctrine of Scripture in the Reformed Dogmatics, which he also taught his students in the seminary classroom. Bavinck conceded that the Bible is not only a divine book and word, but also a human book and word—completely human. Here is Bavinck’s description of Scripture at the crucial point: “Scripture is totally the product of the Spirit of God … and at the same time totally the product of the activity of the authors. Everything is divine, and everything is human.”98 In this connection, Bavinck acknowledges the Holy Spirit to be the “primary author” of Scripture, which implies that the human instruments were also the authors, albeit “secondary.”99


Here, Bavinck took his eyes off the confessions, indeed off Scripture, and fixed them on the portrait of Kuenen. The confessions never attribute Scripture to humans, but only to the Holy Spirit. They never call the Bible “human,” but exclusively “divine.” They never refer to Scripture as “the word of man,” or even as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but only as the “word of God.”


Scripture itself denies that it is the “product,” that is, the word, of the humans by whom the Spirit produced Scripture. For “no prophecy of Scripture is of any private interpretation,” that is, no part of Scripture originated in the private thoughts about God, humans, and the creation of the human writers. All is the product of the “interpretation” of God the Holy Spirit. The explanation of this wonder is that the holy men wrote, as they originally spoke, “as they were moved by the Holy Ghost” (II Peter 1:20-21). Or, as is the literal translation of II Timothy 3:16: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that is, the “product” of God.


The result of this wonder of the inspiration of the written word of Scripture is that we have “a more sure word of prophecy”—a word more sure than the spoken word of God on the mount of transfiguration (II Peter 1:17-19). This cannot be the case if the Bible is totally the product of the human writers, as well as the product of God the Holy Spirit. Surely, there is no human word that is as sure as the spoken word of God, much less more sure. Only because Scripture is the word of God written, exclusively and totally the word of God written, is it more sure than the word God spoke about Christ on the mount of transfiguration.


Bavinck called his doctrine of inspiration “organic inspiration,” contrasting it with an erroneous doctrine of inspiration that allegedly has been found in the Reformed tradition. To this erroneous doctrine of inspiration, Bavinck gave the name “mechanical inspiration.”100


Objection to Bavinck’s doctrine of “organic inspiration” does not deny that in inspiration the Spirit used men, with their distinctive training, gifts, and even personalities, to produce the word of God. It does not deny that the human writers labored at their task consciously, pouring themselves into the work. But objection to Bavinck’s doctrine of Scripture denies that the “product”—the word that was written—was on this account a human word. The wonder of (organic) inspiration was that the word that resulted from the genuine instrumentality of the human writers was the word of God, and only and totally the word of God.


The effects of Bavinck’s weakening of the doctrine of Scripture have been disastrous in many Reformed churches, in which the dogmatics of Bavinck have been influential. Particularly have the effects been disastrous in that fundamental aspect of the Christian faith that Bavinck himself compromised by his weak doctrine of Scripture: the truth of origins as inspired in Genesis 1-11. Bavinck’s doctrine of a totally human Scripture, with special application to Genesis 1-11, produced Jan Lever in the Netherlands and Howard Van Till in the United States.101


But Bavinck’s bad doctrine of Scripture produced disastrous effects, particularly with regard to origins, already in Bavinck’s own time. Shortly before Bavinck’s death, a young minister in the Reformed Churches in the Netherlands, the Rev. J. B. Netelenbos, publicly denied the historicity of the opening chapters of the Bible and criticized Scripture as uninspired. His consistory deposed him in 1919 “on the ground of his deviating opinions concerning Articles 4 and 5 of the Netherlands Confession of Faith,” that is, his heretical doctrine of Scripture.102 Netelenbos appealed to the instruction he had received from his teacher, Prof. Herman Bavinck. Not only was Bavinck not in favor of the support of the discipline of his former student by the synod of Leeuwarden (1920), but he also spoke out in Netelenbos’ defense.103 The synod of Leeuwarden upheld the deposition of Netelenbos on the ground that he “deviated from Articles 4 and 5 of our [Belgic] Confession of Faith with regard to the reliability and the infallibility of Scripture and [with regard to] the ground of faith.”104


A few years after Bavinck’s death, another of his students, the Rev. J. G. Geelkerken, was disciplined by the synod of Assen for denying the historicity of Genesis 3, particularly the reality of the “speaking serpent.” The issue raised by Geelkerken and judged by the special synod of Assen (1926), as expressed by the synod both during the trial and afterwards, was that “a serpent, which was perceptible to the senses [Dutch: “zintuigelijk waarneembaar”], and which could be grasped, has spoken.”105 Geelkerken denied the historicity of Genesis 3, the biblical account of the fall of the race into sin, but also the biblical account of the mother promise of the gospel, which was spoken by God to the “speaking serpent.”106 In condemning Geelkerken, the synod charged that he violated Articles 4 and 5 of the Belgic Confession concerning Scripture, particularly the phrase, “believing without any doubt all things contained in them.”


Also Geelkerken appealed in his defense to the doctrine of Scripture of his professor, Herman Bavinck—the so-called “organic” inspiration of Scripture. Against the interpretation of Genesis 3 by the synod of Assen, he charged that “the organic conception of holy Scripture was withdrawn in favor of the mechanical [conception] … The accepted organic doctrine of Scripture of the ‘illustrious Kuyper and Bavinck’ was still not developed far enough.”107


Very likely it is indicative of the thinking and sympathies of Bavinck in the cases of Netelenbos and Geelkerken that, a few years after his death, his widow and his daughter and her husband separated from the Reformed Churches in the Netherlands to become members of the new denomination formed by Geelkerken and others upon Geelkerken’s deposition for teaching the mythical nature of Genesis 3 and, as is implied by such a view of Genesis 3, for a heretical doctrine of the inspiration of Scripture.108


Both Netelenbos and Geelkerken were members of a loose “movement of the young [ministers]” in the Reformed Churches in the Netherlands at that time, which clamored for change, for something new in theology, and for revision of the confessions. The movement regarded Bavinck as its spiritual father.


One of the grounds for the charge against Kuyper and Bavinck by the modernists of their day that they had departed radically from John Calvin and the old Calvinism was exactly their doctrine of Scripture (which Kuyper shared with Bavinck). The liberal, or modernist, D. B. Eerdmans, a professor at the University of Leiden, wrote this concerning Kuyper’s—and Bavinck’s—doctrine of “organic inspiration”:


Contemporary Reformed [theology] employs a two-edged sword in slaying the old [Reformed] doctrine of Scripture. In the first place it teaches that not all of the Scripture is divine and that much of it is merely human so that modern critical scholarship in its investigation can discover much that is true and good. Secondly, it teaches that even that which is divine in Scripture is also fully human, that human organisms, human personalities, on their own brought forth the Scriptures.109


Appreciation of the riches and glories of the Reformed faith as confessed, expounded, defended, and developed in Bavinck’s Reformed Dogmatics, especially Bavinck’s defense of sovereign grace in salvation, including the salvation of the covenant, may not blind the Reformed church or theologian to the dung mixed with the gold. Bavinck’s notion that there is much goodness and truth in the thought and theories of the ungodly; his passion to bring about a union of Christianity and ungodly culture by accommodating the gospel to culture; his doctrine of a common grace of God; and his erroneous view of Scripture as a totally human book must be condemned, rejected, and purged by the tradition that foll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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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NOTES:


1. The expanded text of an address at a conference of Protestant Reformed officebearers in Redlands, CA on March 6, 2012.




2. Herman Bavinck, “De Algemeene Genade” (Grand Rapids: Eerdmans-Sevensma, n.d.). This booklet has been translated into English by Raymond C. Van Leeuwen as “Common Grace,” Calvin Theological Journal 24, no. 1 (April 1989). The other work by Bavinck on common grace is “Calvin and Common Grace,” tr. Geerhardus Vos. The booklet contains no publishing data, but does indicate that the occasion of the work was the “celebration of the four hundreth anniversary of the birth of John Calvin.” This booklet is part of this writer’s library. In this latter work, ominously, Bavinck acknowledges that the theory of common grace qualifies the doctrine of reprobation. Attributing this qualification of reprobation to Calvin, but propounding his own view, Bavinck declares that “reprobation does not mean the withholding of all grace” (117). The effects of this common grace, according to Bavinck, include that unregenerate “men still retain a degree of love for the truth” and retain “the remnants of the divine image” (119, 120). Bavinck does not see in common grace a love of God for all humans that desires the salvation of all without exception, regardless of predestination. That is, Bavinck does not draw from his doctrine of common grace the theory of a “well-meant offer” of salvation to all. For Bavinck, as for Kuyper, common grace is limited to the realm of the earthly and natural.




3. V. Hepp, Dr. Herman Bavinck (Amsterdam: W. Ten Have, 1921). All quotations from this work are my translation of the Dutch.




4. R. H. Bremmer, Herman Bavinck als Dogmaticus (Kampen: J. H. Kok, 1961). All quotations from this work are my translation of the Dutch.




5. R. H. Bremmer, Herman Bavinck en Zijn Tijdgenoten (Kampen: J. H. Kok, 1966). All quotations from this work are my translation of the Dutch.




6. Ron Gleason, Herman Bavinck: Pastor, Churchman, Statesman, and Theologian (Phillipsburg, New Jersey: P&R, 2010).




7. Gleason, Bavinck, 425.




8. Gleason, Bavinck, 494.




9. Gleason, Bavinck, 207.




10. Gleason, Bavinck, 260.




11. Gleason, Bavinck, 339, 340.




12. See Herman Bavinck, Reformed Dogmatics, ed. John Bolt, tr. John Vriend, 4 vols. (Grand Rapids: Baker, 2006), 3:228-232. Gleason’s theological error here is one more instance of his grinding an axe for the theology of the Reformed Churches in the Netherlands (Liberated).




13. Hepp, Bavinck, 120, 121.




14. Bremmer, Bavinck en Zijn Tijdgenoten, 192.




15. Herman Bavinck, Hedendaagsche Moraal [English: Present-Day Morality] (Kampen: J. H. Kok, 1902).




16. Bremmer, Bavinck als Dogmaticus, 378: “Bavinck was offended by a certain hypocrisy in his own circles. ‘What troubled him the most was that some indeed cried, “Reformed, Reformed,” but their life did not correspond to their confession. That was a thorn in the eye to him.’” Bremmer is quoting J. H. Landwehr.




17. Hepp, Bavinck, 29.




18. Henry Zylstra, “Preface” to Herman Bavinck, Our Reasonable Faith, tr. Henry Zylstra (Grand Rapids: Eerdmans, 1956), 5, 6. The Magnalia Dei is Bavinck’s own synopsis in 1909 of his four-volume Gereformeerde Dogmatiek. The sub-title of the Magnalia Dei is significant in that it expresses Bavinck’s conviction that Reformed dogmatics, and his in particular, must be based on and conform to the Reformed creeds. The sub-title is “Onderwijzing in de Christelijke Religie naar Gereformeerde Belijdenis” [English translation: “Instruction in the Christian Religion according to the Reformed Confession”] (Herman Bavinck, Magnalia Dei, Kampen: J. H. Kok, 1909).




19. Hepp, Bavinck, 84, 86.




20. Hepp, Bavinck, 89.




21. Hepp, Bavinck, 322. The Dutch word that I translate as “awful” is “ontzaglijke,” which can also mean “enormous.”




22. Bremmer, Bavinck als Dogmaticus, 381.




23. Hepp, Bavinck, 83.




24. Hepp, Bavinck, 197, 198.




25. Hepp, Bavinck, 83. Bavinck continued by asking why Bulens did not include in the assignment the words that follow in the text, “of the blind.” The addition of the phrase, “of the blind,” to the assignment, would, of course, have reflected on Bavinck himself.




26. Hepp, Bavinck, 36.




27. On the novel, heretical covenant doctrine of Pieters and Kreulen and the controversy it caused in the churches of the Secession, see David J. Engelsma, “The Covenant Doctrine of the Fathers of the Secession,” in Always Reforming, ed. David J. Engelsma (Jenison, MI: RFPA, 2009), 100-136.




28. Hepp, Bavinck, 91.




29. Hepp, Bavinck, 104.




30. Hepp, Bavinck, 180.




31. Hepp, Bavinck, 318.




32. Hepp, Bavinck, 326.




33. Cited in the preface to Our Reasonable Faith, 7.




34. Herman Bavinck, The Certainty of Faith, tr. Harry der Nederlanden (St. Catharines, Ontario, Canada: Paideia, Press, 1980). The original Dutch edition was De Zekerheid des Geloofs, 3rd rev. ed. (Kampen: J. H. Kok, 1918). In this work, Bavinck exposed the pietism of the nadere reformatie and other movements as unreformed. In this corruption of the Reformed faith, “faith was not immediately certain of itself right from the beginning. There was a difference between the essence and the well-being of faith … Certainty was attained only after a series of experiences spread out over many years. It was not given with faith itself, nor did it issue from it.” These pietists in the Reformed churches “continued to stumble forward along life’s way in sighing and lamentations. They were a poor, wretched people always preoccupied with their own misery, seldom if ever rejoicing in the redemption that was theirs in Christ Jesus and never coming to a life of joy and gratitude. They preferred to be addressed as Adam’s polluted offspring, as sinners under God’s judgment” (43, 44).




35. Hepp, Bavinck, 262-264. “In 1889 Bavinck underwent the heaviest psychical shock of his entire life … [For some time thereafter] he gave the impression of a deeply disappointed, although not of a disillusioned, man” (262, 263).




36. Bavinck, Reformed Dogmatics, ed. John Bolt, tr. John Vriend, 4 vols. (Grand Rapids: Baker, 2003), 1:44, 45.




37. Bavinck, Reformed Dogmatics, 1:86, 87.




38. Bavinck, Reformed Dogmatics, 1:89.




39. Bavinck, Reformed Dogmatics, 1:112.




40. Bavinck, Reformed Dogmatics, 1:213.




41. Bavinck, Reformed Dogmatics, 1:112.




42. See his The Certainty of Faith, referred to and quoted from in footnote 33.




43. Bavinck, Reformed Dogmatics, 1:58.




44. Bavinck, Reformed Dogmatics, ed. John Bolt, tr. John Vriend, 4 vols. (Grand Rapids: Baker, 2004), 2:368. The emphasis is Bavinck’s.




45. Bavinck, Reformed Dogmatics, 2:369.




46. Bavinck, Reformed Dogmatics, 2:343.




47.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69.




48.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64.




49.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66.




50.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70, 471.




51.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93-499.




52.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94, 510.




53. Bavinck, Reformed Dogmatics, ed. John Bolt, tr. John Vriend, 4 vols. (Grand Rapids: Baker, 2008), 4:266-270.




54. Bavinck, Reformed Dogmatics, 4:269.




55. Bavinck, Reformed Dogmatics, 4:269.




56. Bavinck, Reformed Dogmatics, 4:267.




57. Bavinck, Reformed Dogmatics, 3:590, 591.




58. Bavinck, Reformed Dogmatics, 4:269, 270.




59. Bavinck, Reformed Dogmatics, 4:269.




60. Bavinck, Reformed Dogmatics, 2:390.




61. Bavinck, Reformed Dogmatics, 2:391. For Bavinck’s complete treatment of the issue of the order of the decrees, see volume 2 of the Reformed Dogmatics, pages 382-392. That his biblical method of doing theology was the cause of his development of the doctrine of the counsel of God with specific regard to the order of the decrees, Bavinck himself expressed: “neither the supralapsarian nor the infralapsarian view of predestination is capable of incorporating within its perspective the fullness and riches of the truth of Scripture and of satisfying our theological thinking” (391).




62. Hepp, Bavinck, 127. Bavinck continued with his encomium.




63. Hepp, Bavinck, 126.




64. Hepp, Bavinck, 126.




65. The “ethical theology” in the Netherlands in the nineteenth century was a distinct theological movement, of which de la Saussaye was a leading representative. It held that the essence of the Christian religion was not doctrinal, but experiential and moral, that is, ethical (whence the name of the movement). Not what one believes is important, but how one feels and lives. It founded the Christian religion, not on the objective basis of Scripture, as summarized by confessions, but in the Christian’s consciousness, or experience. The fundamental principle of the “ethical theology” was “that not Scripture, not the revealed Word of God outside us, but the faith of the congregation is determinative [that is, is the foundation of the Christian religion]” (“Ethischen,” in Christelijke Encyclopaedie voor het Nederlandsche Volk, vol. 2, 122, 123; the translation of the Dutch is mine). This theology, de-emphasizing as it did the Word of God, the creeds, and orthodox doctrine in favor of experience and conduct, was, as is always the case with theologies that make Christian experience fundamental, rife with heresies, among which were rejection of the inspiration of Scripture and the objective revelation of God, denial of predestination, denial of the divine person of Christ, false teaching concerning the atonement of the cross, error concerning the church, and more (see Christelijke Encyclopaedie, 123.)




66. Hepp, Bavinck, 163.




67. Hepp, Bavinck, 163.




68. Hepp, Bavinck, 164.




69. Hepp, Bavinck, 168.




70. Bremmer, Bavinck als Dogmaticus, 328.




71. Bremmer, Bavinck als Dogmaticus, 342.




72. Hepp, Bavinck, 334.




73. Bremmer, Bavinck als Dogmaticus, 313.




74. Bremmer, Bavinck als Dogmaticus, 313.




75. Bremmer, Bavinck als Dogmaticus, 140. Significantly, Roessingh noted that in this concern Bavinck was one with Chantipie de la Saussaye, Jr.




76. Bremmer, Bavinck als Dogmaticus, 372.




77. Hepp, Bavinck, 326.




78. Bremmer, Bavinck als Dogmaticus, 115-122. Significantly, one of those who charged Kuyper and Bavinck with departure from the old Calvinism of Calvin and the creeds—Hylkema—thought to have proved his charge by contrasting Calvin’s Institutes with Kuyper’s brief for common grace, the Lectures on Calvinism—the “Stone lectures” (Bremmer, 121).




79. “[The phrase], grace does not abolish nature, but affirms and restores it,” … is the central theme [in Bavinck] that recurs in numberless variations, the refrain that is unceasingly repeated, the leitmotif which we hear everywhere” (J. Veenhof, “The Relationship between Nature and Grace according to H. Bavinck,” Potchefstroomse Universiteit: Institute for Reformational Studies, 1994, 15).




80. Bavinck, Reformed Dogmatics, 1:322. The original is in Latin: “Natura praecedit gratiam, gratia perficit naturam. Ratio perficitur a fide, fides supponit naturam” (Gereformeerde Dogmatiek, 2nd revised and expanded ed., Kampen: J. H. Bos, 1906, vol. 1, 336).




81. “When Bavinck renders perficit as ‘restores,’ it is plain that this involves a certain modification of the original meaning” (Veenhof, “The Relationship between Nature and Grace according to H. Bavinck,” 15).




82. Bavinck, Reformed Dogmatics, 1:318-320.




83. Bavinck, Reformed Dogmatics, 1:322.




84. Bavinck, Reformed Dogmatics, 1:305.




85. Bavinck, Reformed Dogmatics, 1:318.




86. Bavinck, Reformed Dogmatics, 1:321.




87. Bavinck, Reformed Dogmatics, 2:572.




88. Bremmer, Bavinck als Dogmaticus, 371.




89. Bavinck, Reformed Dogmatics, 2:495.




90. Bavinck, Reformed Dogmatics, 2:496, 497. “It is probable … that the creation of heaven and earth in Genesis 1:1 preceded the work of the six days in verses 3ff. by a shorter or longer period” (496).




91. Bavinck, Reformed Dogmatics, 2:498-500.




92. Bavinck, Reformed Dogmatics, 2:500.




93. Bavinck, Reformed Dogmatics, 2:506.




94. Bavinck, Reformed Dogmatics, 2:407-439, 511-520.




95. Bavinck, Schepping of Ontwikkeling (Kampen: J. H. Kok, 1901). In this work, Bavinck contrasts creation and evolution with regard to the origin, the essence, and the goal of all things, demonstrating the wickedness, the folly, and the hopelessness of evolution. Belief of creation as the truth of the origin, essence, and goal of all things is grounded in Scripture: “We Christians have truly, thanks be to God, another hope and a firmly grounded expectation [in contrast to evolution, the hopelessness of which Bavinck has just described, in chilling detail]. We are able to speak of more glorious things, since God has revealed them to us in his Word. The Holy Scripture is a wonder-book; no other book is like it” (54). The translation of the Dutch is mine.




96. Bavinck himself recorded this dissatisfaction with his doctrine of Scripture on the part of his Secession examiners in a diary he kept (see Gleason, Bavinck, 65). Gleason attributes this dissatisfaction to mistrust on the part of the examiners because of Bavinck’s training at the modernist seminary in Leiden and speaks of “the soundness of Bavinck’s view of Scripture that we find in the Reformed Dogmatics.” Gleason is mistaken.




97. Bremmer, Bavinck als Dogmaticus, 383, 384. The other points were the doctrine of the true and false church in Article 29 of the Belgic Confession and the relation of church and state in Article 36 of the Belgic Confession. Bremmer’s inclusion of Article 8 of the Belgic Confession in the section on Scripture is a mistake. Article 8 confesses the oneness of being and the threeness of persons of the Godhead.




98. Bavinck, Reformed Dogmatics, 1:435; emphasis added.




99. Bavinck, Reformed Dogmatics, 1:435.




100. Bavinck, Reformed Dogmatics, 1:430-448.




101. See Jan Lever, Creation and Evolution, tr. Peter G. Berkhout (Grand Rapids: Kregel’s, 1958) and Where are We Headed? A Christian Perspective on Evolution (Grand Rapids: Eerdmans, 1970); see also Howard J. Van Till, The Fourth Day (Grand Rapids: Eerdmans, 1986).




102. Cited in Gleason, Bavinck, 399.




103. Hepp states that in the matter of the discipline of Netelenbos at the synod of Leeuwarden, Bavinck “belonged to the most longsuffering among the longsuffering” with regard to the young heretic (Bavinck, 337).




104. D. Th. Kuiper, De Voormannen: Een sociaal-wetenschappelijke studie over ideologie, konflikt en kerngroepvorming binnen de Gereformeerde wereld in Nederland tussen 1820 en 1930 [English translation: The Leading Men: A Social-Scientific Study concerning Ideology, Conflict, and the Forming of Basic Groups within the Reformed World in the Netherlands between 1820 and 1930] (Kampen: J. H. Kok, 1972), 265, 266. The translation of the Dutch is mine. Netelenbos’ “believing (sic) criticism” of Scripture consisted, among other instances, of attributing Isaiah 40-66, not to the “real” Isaiah, but to a “second Isaiah” (“Deutero-Isaiah”) “because this section presupposes the Babylonian captivity.” Netelenbos also had doubts about the inspiration and canonicity of the Song of Solomon. Netelenbos’ defense before the synod was that “the divine and the human factor are interwoven in Scripture” and that this was the accepted teaching of Kuyper and Bavinck (De Voormannen, 264, 265).




105. Kuiper, De Voormannen, 286.




106. In addition to the speaking serpent, Geelkerken expressed doubt also concerning the literal reality of the two trees in the garden. For Geelkerken, although he hesitated to use the word, the entire chapter was a “myth.”




107. Kuiper, De Voormannen, 288.




108. Bremmer, Bavinck en Zijn Tijdgenoten, 269. The name of the new denomination was “Gereformeerde Kerken in hersteld verband” [English translation: the Reformed Churches in restored connection, or the Restored Reformed Churches].






109. D. B. Eerdmans, “Moderne” Orthodoxie, quoted in John Bolt, A Free Church, A Holy Nation: Abraham Kuyper’s American Publ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2001), 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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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석학 2023. 4. 30. 20:58

그레고리 빌의 요한계시록의 과거사적 관점에 대한 비평

번역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석은 주로 4가지 관점에서 이루어지고있다.

G.K. Beale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서술하기에 앞서서 많은 이들이 취하고있는 과거사적 관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있다.

과거사적 관점주의자들은 요한계시록의 예언들이 역사 속에서 이미 성취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다.

다음은 빌의 요한계시록 주석 152-154쪽에서의 과거사적 관점에 대한 빌의 입장을 번역한 것이다

과거사적 관점
The Preterist View


과거사적 관점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The preterist perspective has two forms.

첫번째는 요한계시록을 기원후 70년에 있을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라고 보는 관점인데, 이는 당연히 계시록이 기원후 70년 이전에 기록되었음을 요구한다.
The first sees Revelation as a prophecy of the fall of Jerusalem in 70 A.D., which, of course, requires that the Apocalypse be dated prior to 70.

(과거사적 관점에서) "큰 성 바벨론"은 그리스도인을 압제하는데 있어서 로마를 도와주는 배교한 이스라엘을 나타낸다.
“Babylon the Great” represents apostate Israel, who aids Rome in oppressing Christians.

(이러한 관점에서는) 당연하게 이 책(계시록)의 목적의 일부가,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배교로 인하여 심판을 받게될 것이라며 기독교인들을 격려하고, 독자로하여금 자신들이 참된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확신시키는 것이다.
Accordingly, part of the purpose of the book is to encourage Christians that their Jewish persecutors will be judged for their apostasy and to assure the readers that they are now the true Israel.

이러한 입장의 문제점들은 이미 앞(계시록의 시기에 관하여 다룬 부분)에서 논의하였으며, 주해를 통하여 좀 더 적절한 관점들을 논의할 것이다.
The problems with this position already have been discussed above (see the section above on the date of the Apocalypse) and will be addressed further at appropriate points throughout the commentary.

과거사적 관점주의자들의 접근방식의 심각한 문제점은 구원과 심판에 관한 계시록의 예언의 대부분을 기원후 70년에 제한시키는 것이며, 이러한 예언들이 그 시기에 절정에 이르면서 성취되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A significant problem with this form of the preterist approach is that it limits most of the book’s prophecies of salvation and judgment to 70 A.D. and asserts that these prophecies reached their climactic fulfillment at that time.

실제로, 다니엘서 2장과 7장의 예언들은, 우선적으로 믿지않는 이스라엘보다는, 악한 민족들의 마지막 심판을 계시적 예언을 통하여 언급하고있음을 보여주고있다.
Indeed, the prophecies of Daniel 2 and 7 alluded to throughout the Apocalypse foresee a last judgment of the evil nations, not primarily of unbelieving Israel.3

흥미롭게도, 이러한 과거사주의자들의 해석은 요한계시록 13장 1절과 다니엘 7장에서의 짐승을 이방 민족인 로마와 동일시하고있는데, 다니엘은 이를 마지막 심판의 대상으로 보고있다는 것이다.
Interestingly, these preterist interpreters identify the beast from Daniel 7 in Rev. 13:1ff. with a pagan nation (Rome), which Daniel then sees as the object of final judgment.

그러고나서 이들은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의 배교한 이스라엘을 다니엘이 예언하고있는 최후 심판에서의 주된 대상과 동일시하고있다.
But then they identify apostate Israel elsewhere in the book as the main object of Daniel’s prophesied final judgment (e.g., see below on 11:15-18).

구약과 신약에서 배교한 이스라엘이 열방과 함께 심판받으리라고 보는 것은 사실이다.
It is true that the OT and NT expect apostate Israel to be judged along with the nations.

요한도 이를 따르고있는 것이다.
John likely follows suit.

다니엘은 이러한 열방이 징벌을 받을 주된 대상이라고 보고있는데도 불구하고, 요한이 믿지않는 이스라엘을 악한 열방 대신에 우선적인 심판의 대상으로 보고있다고한다면, 이는 이상한 것이 될 것이다.
Nevertheless, it would be strange if John saw unbelieving Israel as the primary object of judgment instead of the evil nations, since Daniel viewed these nations as the main object of punishment.

그러므로, 일관되게 이러한 관점을 선택을 하는 이들이 직면하게되는 가장 어려운 문제점들은, 계시록을 통틀어서 최후의 심판이라고 예언되어지는 것들이 기원후 70년에 비유적으로 성취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Therefore, one of the most difficult problems facing consistent proponents of this alternative is that what appear to be prophecies of final judgment throughout the book are seen as figuratively fulfilled in 70 A.D.

밀접하게 관계되는 문제는 이러한 과거사적 해석자들이 요한계시록의 최후의 심판을 이스라엘로 제한시킨다는 것이지만, 다니엘 2장과 7장은 우주적 심판을 예고하고있다는 것이다.
A closely related problem is that these preterist interpreters understand the prophecies of final judgment in Revelation to be limited to Israel, whereas Daniel 2 and 7 anticipate a universal judgment.

요한의 묘사들은, 자신의 다니엘 암시를 포함하여, 다니엘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가장 잘 해석되어진다는 것이다.
John’s depictions, including his allusions to Daniel, are best interpreted in the same way as Daniel.

결과적으로, 이러한 과거사적 관점주의자들에 의존하게되는 증거의 짐들은, 이스라엘과 함께 이방 나라들을 다니엘의 최후의 심판의 우선적 대상으로 바꾸는 해석학적 근거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최후의 심판을 우주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주로 이스라엘로 제한시킨다는 것이다.
Consequently, the burden of proof rests on these preterists to provide an exegetical rationale both for exchanging a pagan nation with Israel as the primary object of Daniel’s final judgment and for limiting the last judgment mainly to Israel and not applying it universally.

중요한 것은, 요한계시록에서 "모든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의 일부"라는 구절이 구속받은, 그리고 구속받지 않은 무리들 모두에게 사용되어지고 있다는 것이다(5:9; 7:9; 10:11; 11:9; 13:7; 17:15).
Significantly, the phrase “some from every tribe, people, tongue, and nation” is used in Revelation of both redeemed and unredeemed groups (5:9; 7:9; 10:11; 11:9; 13:7; 17:15).

이러한 반복 구절은 다니엘 3-7장을 암시하고 있으며, 다니엘에서도 또한 반복되고있는데, (과거사적 관점은) 이에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It is probably not coincidental that this repeated phrase alludes to Daniel 3–7, where it is also repeated.

여기서 언급되어지는 백성은 바벨론 사람들이나 페르시아 제국, 혹은 끝날의 신성한 나라의 주제로서의 온 지면의 백성들이다.
There it refers to peoples throughout the earth as subjects of the Babylonian or Persian empires or of the end-time divine kingdom (see below on 5:9).

분명한 것은 다니엘 7장 14절에서의 공식은 전 세계를 통틀어 인자에게 속하여있는 모든 백성들을 언급하고있다는 것이다.
Clearly the formula in Dan. 7:14 (Theod.) refers to all peoples throughout the world as subjects of the Son of man.

요한계시록에서도 마찬가지의 우주적 뉘앙스가 설득력이 있으며, 13장 7-8장에 강조되어있듯이, 이는 "땅에 거하는 모든 이들"과 동일한 것이다.
The same universal nuance is probable in Revelation and is underscored in 13:7-8, where it is equated with “all who dwell on the earth.”

요한계시록에서 이러한 분명한 우주적 공식들과 이와 유사한 표현들이 1세기의 이스라엘, 혹은 다른 그룹들에게 제한된다는 주장은 설득력있게 증명되어졌던 적이 없다.
The contention that these apparently universal formulas and like phraseology in Revelation are limited either to Israel or to other groups in the first century has not been persuasively demonstrated.

과거사적 해석의 두번째 형태는 요한계시록이 기원후 5세기에 성도들을 핍박한 "큰 성 바벨론"인 로마제국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이다.
The second form of preterist interpretation holds that Revelation is a prophecy of the fall of the Roman Empire, “Babylon the Great,” the persecutor of the saints, in the fifth century A.D.

이 책(요한계시록)의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들을 박해자들이 분명하게 심판받을 것이기 때문에 견디어낼 것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The purpose of the book is to encourage Christians to endure because their persecutors assuredly will be judged.

더군다나 그리스도인은, 소아시아를 침략한 우상을 섬기는 로마의 체제와 어떠한 형태로든 동일시함으로서 자신의 증거를 타협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한다는 것이다.
Furthermore, Christians are exhorted not to compromise their witness by identifying in any way with the idolatrous Roman system, which has made inroads into Asia Minor.

이러한 (두번째 형태의) 과거사적 접근 형태는, 이른 시기라는 필요성이 없고, 로마가 예루살렘 보다는 "바벨론"과 좀 더 동일시 될 수 있기 때문에, 기원후 70년이라는 선택보다는 좀 더 설득력이 있다.
This version of the preterist approach is more viable than the 70 A.D. alternative because it does not necessitate the early date and because Rome is a more probable identification of “Babylon” than Jerusalem.

그러나 이러한 형태는, 기원후 5세기 동안에 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이미 충족된, 최후의 심판이라는 많은 분명한 예언들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But this version does encounter the difficulty of understanding many of the apparent prophecies of final judgment as being already fulfilled in the fall of the Roman Empire during the fifth century A.D.

어떤 해석자들은 요한의 전세계적인 파괴에 대한 요한의 (일부의) 예언들이, 비유가 아니라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져야한다며, 과거사주의자들의 형태를 고수하는데, 이렇게되면 그가(요한이) 단순히 실수를 한 것이 되기 때문에 절대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Some interpreters hold to a form of preterism in which (some of) John’s prophecies of worldwide destruction are to be understood literally, not figuratively, but never came to pass because he was merely mistaken.



posted by Wonho Kim
:
언약 2022. 10. 22. 21:29

데이비드 딕슨의 구속 언약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 대해서는 종교 개혁 이후 16세기에 들어와서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게된다.

데이비드 딕슨David Dickson (1583-1662)의 논술들은 구속 언약에 대한 관심의 시발점이 된다.

이보다 앞서 16세기 초에 알미니우스Jacob Arminius (1560-1609)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언약에 대하여 명확히 하고 있다.

도르트총회를 중심으로 알미니우스의 후예들인 항론파들의 주장들에 대하여 반박을 하였던 데이비드 딕슨David Dickson (1583-1662)은 항론파들이 알미니우스가 진술한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의 구속 언약에 대하여 익숙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를 계기로 딕슨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의 구속 언약에 대하여 깊은 연구를 하면서 창세 전 구속 언약에 대하여 정리를 하였으며, 여기서 정립한 구속 언약에 관한 그의 논문들은 이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비롯한 여러 고백서들에서 체계적으로 정립되기 시작했다.

비록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는 구속 언약에 대한 교리를 명백히 하지는 않았지만, 스코틀랜드 교회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가 구속 언약과 전적으로 부합되고있음을 믿고있었다.

비슷한 방식으로 개혁주의 회중교회Reformed Congregationalists (1658)와 일부 침례교 신학자들도 개선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채용하면서 여기에 구속 언약을 추가하였다.

17세기 후반에는 이 교리가 개혁신학에 보편적으로 자리메김을 하였으며, 몇몇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에서는 공식적으로 성문화되었다.

다음은 존 페스코J. V. Fesko의 The Trinity and the Covenant of Redemption 23,4쪽의 일부를 번역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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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딕슨David Dickson (1583-1662)은 1638년 스코틀랜드 교회의 총회General Assemblyof the Scottish Kirk에서 구속 언약에 관한 교리에 대하여 처음으로 명확하고 상세한 진술을 하게된다.

그는 항론파의 주된 실패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이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의 구속 언약Covenant of redemption betwixt God and Christ에 대하여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을 진술한다.

딕슨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의 구속 언약the covenant of redemption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구원의 언약covenant of salvation (or grace)과 다르다는 것을 설명한다.

딕슨이 구속 언약에 대하여 언급하는 이유는,구속 언약이 은혜 언약의 붕괴에 대한 방파제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하여 아무도 (은혜 언약을) 침범할 수 없게끔 보장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딕슨은 연설을 마치면서 구속 언약이 어떻게 은혜 언약을 보장하는지에 대하여 5가지 주제로 설명한다.

첫번째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사이의 언약으로서 이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모든 것의 근거가 된다.
First, there is a covenant between God and Christ, which is the ground of all that God does to redeem fallen man.

두 번째로는, 구속 언약에 있는 구원받을 이들의 시간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이름과 숫자에 관해서도 계획되어있다.
Second, in the covenant of redemption the elect were designed in terms of their name and number as well as the time in which they would be saved.

특정인들에 대한 선택은 구속 언약 안에서 결정되어있다.
The election of certain individuals was determined in the covenant of redemption.

세번째로, 구속의 값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잡히신바holden captive of death된 것으로 확립되었다.
Third, the price of redemption was established, how Christ would be ‘holden captive of death, &tc.’

네번째로, 중재자는 자신의 성공이 보장되셨으며, 택함받은 이는 그분께 드려졌으며, 그들의 구원은 그분의 손에 놓여진 것이다.
Fourth, the mediator was ensured of His success and the elect were given to Him, and their salvation was placed in His hand.

다섯번째로, 구속 언약의 열매로서 복음을 통하여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지혜를 고려해 볼 때, 아무도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는 것을 취하거나 구원의 보장을 탈취할 수는 없다.
Fifth, no one would truly take God’s grace for granted or be robbed of the assurance of salvation given God’s wise dispensation of the gospel, the fruit of the covenant of redemption.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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