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세계관 2019. 9. 20. 22:12

새관점의 윤리 사상과 인간의 죄성

서론

현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에게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한 가지는 기독교에 윤리가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윤리가 실종된 기독교는 하나의 집단으로 변질되면서 사회의 걱정거리가 되고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많은 단체와 개인들이 기독교 윤리와 교회 개혁을 외치지만 이들은 또한 신학이 실종된 또 다른 부작용을 낳기도한다.

이번 글에서는 최근 교회 개혁을 외치는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새관점의 윤리 사상을 교회 개혁의 수단으로 사용하고있음을 보면서 이의 심각성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한다.

그 가운데 청어람 아카데미의 양희송 대표가 전하는 기독교 윤리 사상의 문제점을 중심으로 논하고자한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기독교 세계관과 기독교 윤리, 교회 개혁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남달리 열심을 내었었다.

양희송대표는 "세계관 공부 과정 자체는 실천적 방식으로 습득되어야한다"는 유진 피터슨의 영적 독서 방법인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소개하기도 하면서 실천을 강조하기도하였다.

그는 교회 현실의 문제에 대한 실천적 해결사를 자처하며 현실적 문제를 안고 고민하는 아카데미를 이끌어 왔던 것이었다.

그는 근원적으로,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기독교 윤리, 그리고 이에 비추어 인간의 죄성과 개혁주의의 전가교리와 칭의,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성화등에 관하여 종합적으로 논하면서 과연 톰 라이트가 전하였던 새관점과 윤리 사상에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종합적으로 연계시켜서 생각해보고자한다.

기독교세계관 운동의 핵심에는 창세기 1장 28절을 문화명령이라고 규정하고서 이를 그리스도인의 문화활동의 근거로 삼고있다.

하지만 창세기 1장 28절에서 주어진 명령, 즉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며, 실패한 아담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사역을 통하여 이루신 것이다.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이 명령은 문화명령이 아니다.

리처드 미들턴은 양대표의 기독교 세계관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있으며, 미들턴은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을 문화 명령이라고 규정하고, 그리스도인은 마태복음 28장 19-20절의 대위임령보다도 문화 명령을 지키는 것이 더 차원 높은 창조 사역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문화 명령은 이 땅의 문화를 변혁시켜 이 땅에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에 보존될 문화를 만들어가는 일로서,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구속적 문화변혁운동을 말한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조건이 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더욱 교회답게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자녀 개념도 없다.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이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것은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이 이 땅에서 실행되는 것이다.

참된 기독교 윤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자로서의 행실이 되어야한다.

이를 위해서 제대로된 윤리는 어떻게 세워져야하며, 기독교인들은 윤리의 문제를 어떻게 안고 씨름해야하는가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 윤리는 어떠한 형태로든 정립되어야만 할 것이다.

기독교 윤리는 이론을 넘어서 실천될 수 있는 윤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 윤리는 한 개인의 특수성을 넘어서 모든 성도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개혁주의에서 벗어난 잘못된 교리를 근거로 교회 개혁을 위한 기독교 윤리가 적용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동안 양대표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근거로한 교회 개혁과 기독교 세계관을 전파하는데 열심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그동안 기독교 영역에 트로이 목마와 같이 들어온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 의한 기독교 윤리와 하나님 나라 개념이 어떻게 왜곡되었으며, 현대 신학에서 외면하는 전가교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성화로서의 기독교 윤리에 대하여 논해보고자한다.

성경에 대한 해석과 기독교 세계관

세계관은 이 세계를 바라보는 렌즈와도 같다.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을 통하여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이 되려면 일차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이 올바라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이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게만 제한적으로 깨달아 알 수 있게 하셨다.

구원받는 자는 창세 전에 성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게만 국한된다.

성경 말씀이 복음일 수 있는 것은 구원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택함받지 않은 자에 의해서 해석되어지는 성경은 왜곡되게 해석되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경은 보편적이지 않은 특수성이 있기에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 알게하신다.

성경의 특수성은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의 표현이며, 구속 언약 안에서 중재자되시며 보증자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이다.

성경에 대한 일차적 해석은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서부터 시작되어야한다.

땅 속에 씨앗이 있기에 땅위로 싹이나고 잎이나고 열매를 맺게되는 것이다.

구속 언약은 땅 속의 씨앗과 같다.

현대 신학의 대부분이 구속 언약에 대한 언급과 표현이 없기에, 그리스도를 구속 언약 안에서 택하신 자의 보증자되시고 중재자되심을 무시한다.

성경에 대한 이성적이고 실증주의적인 해석으로는 창세 전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 대한 접근이 불가능하게 한다.

창세기를 고대 근동이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해석하며 제2성전 유대교를 역사적 예수라는 관점에서 탐구해보기도 하지만, 이들의 해석과 탐구에서는 창세 전 구속 언약과 중재자이시며 보증자이신 그리스도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중재자이심과 보증자이심은 인간의 상태가 전적으로 부패한 무능한 상태라는 사실을 내포한다.

전적으로 무능한 이들에게는 은혜만이 필요하다.

성경을 보고 해석하는 능력도 은혜가 있어야한다.

인간에게 보편적이고 이성적인 논리로 성경을 읽고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구원의 길은 인간의 능력에 달려 있을 것이다.

성경을 읽고 깨닫기 위해서는 은혜가 필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은 보편적인 세계관과 구별이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근거로하는 세계관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실증주의와 대립되기 보다는 우선되어야한다.

논리적 실증주의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범주 안에 있어야한다.

논리적 실증주의가 하나님의 은혜보다 우선이 될 때 성경은 왜곡되게 해석되어 질 수밖에 없다.

진리에 대한 명제적 접근은 하나님의 은혜를 근거로 성경을 해석하는 접근법이다.

프란시스 쉐퍼의 기독교 세계관이 진리에 대한 명제적 접근 방식을 취하였다면,

리처드 미들턴이나 브라인언 왈쉬, 레슬리 뉴비긴, 톰 라이트와 같은 이들은 내러티브적 접근방식을 취한다.

내러티브적 접근방식은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방식이다.

기독교 세계관을 대표하는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 또한 마찬가지로 톰 라이트에게 도움을 받아 내러티브적 접근 방식을 취하고있다.

명제적 접근 방식은 완성된 진리를 근거로하는 반면에 네러티브적 접근 방식은 완성을 위한 미완성의 과정일 뿐이다.

미완성된 내러티브, 즉 이야기 신학은 절대 진리를 함유하고있지 않다.

내러티브적 세계관은 스스로의 주관적 판단에 근거한 문제 해결의 능력이 요구되며, 복잡성을 감내하며, 스스로의 주관적 판단을 근거로 외부 세계와 소통해야한다.

또한 자신에 대한 성찰은 하나님의 절대 진리보다는 주관적인 내러티브적 세계관이 근거가 되는 것이다.

내러티브적 세계관은 성경적 세계관이라기보다는 문학적 사고방식이다.

미완성을 전제로한 내러티브적 세계관은 완성을 필요로한다.

톰 라이트는 이에 대해서 "5막극의 마지막 무대인 5막을 사는 우리들은 성경에 있는대로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성경에서 말한 바에 근거해서 적절히 즉흥 연주를 해야하는 것이다"(SAG,127)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의 관점대로라면 기독교인은 미완성된 성경의 완성에 참여하는 인물이 되어야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데이비드 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데이비드 웰스, 용기있는 기독교, 135, 136)

"라이트는 하나님의 권위를 성경의 권위에서 파격적으로 떼어 놓은다…..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권위는 성경의 권위와 별개의 것이라고 한다….가령, 잃었던 셰익스피어의 희극을 오늘 발견했다고하자. 그 가운데 4막은 보존되었으나, 본래 5막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최대한 충실하게 다섯째 막을 만들어서 그 희극을 완성시키지 않겠는가? 이것이 오늘 우리 교회가 처한 상황이라고 한다."

톰 라이트에 대한 웰스의 관점은 오늘날의 교회가 미완성된 진리를 완성하는 이야기의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완성된 내러티브에서는 칭의가 완성될 수 없기에 내러티브적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칭의의 완성을 위해서 무엇인가 행할 수밖에 없다.

내러티브적 기독교 세계관은 남아있는 최종적 구원을 완성하기 위한 윤리적 행위와 분리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최종적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기준을 충족시킬 수가 있겠는가?

성경은 어디에도 최종적 구원을 위한 윤리적 행위의 기준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전혀 흠이 없으시기에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존재는 거룩하신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완전하신 순종은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셨기에, 오직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받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러티브적 접근 방식

성경에 대한 내러티브적 접근 방식은 성경을 교훈 이상으로 볼 수가 없다.

양대표는 "예수의 행적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세계관 투쟁'은 그가 내러티브를 어떻게 활용했는지에서 잘 드러난다. 예수는 내러티브를 활성화(activate)했고, 전환(transform) 시켰으며, 창출(create) 했다."고 말한다.

그는 "예수는 이스라엘의 죽은 내러티브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낱낱이 살려 냈다."고 말한다.

그가 보는 예수는 성경의 이야기를 활성화시켜서 새로운 이야기를 창출하신 분에 불과하다.

그는 오늘날 예수의 제자들에게도 이 원리를 적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이 속한 신앙 전통의 이야기를 활성화하고, 고대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새롭게 전환하며, 자기 삶에서 직접 이야기를 창출함으로써 우리는 강고한 이야기 공동체를 계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의 삶은 내러티브의 장 위에서 구성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속한 이야기를 제대로 갖고 있지 못하면서 신실한 그리스도인 혹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양대표가 전하고자하는 제자들의 세계관은 "자신의 삶의 내러티브를 어디서 구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져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양대표의 윤리적 강론이다.

그는 교회의 비극이 성경의 내러티브를 활성화시키지 못하고 죽은 말씀으로 여겼기 때문이 일어난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주어진 내러티브를 충실히 수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예수의 제자들에게는 삶이 획일적이지도 않으며, 개성을 발산하며, 자유를 향유하면서 내러티스의 창의적 재현과 변형과 복귀로 여겨져야한다는 것이다.

양대표의 말대로라면 예수의 제자는 어느 순간 자신이 성경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주인공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말씀과 더불어 영혼이 떠나가신 것은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의 완성을 선포하신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이 땅에서 실행하시기 위해서 성육신하셨고 십자가에서 대속 사역을 행하셨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완성되지 않은 내러티브는 다양성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다원주의와 포괄주의를 수용하면서 동시에 절대를 외칠 수는 없다.

산을 오르는 다양한 길 뿐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산도 수용해야만 한다.

명제적 진리와는 달리 내러티브 방식은 산을 오르는 방식을 제공해줄 뿐이지 잘못된 길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내러티브적 성경 해석은 절대적 행동 방식의 기준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각자가 알아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나아가야만 한다.

역사적 예수 연구와 새관점

톰 라이트의 내러티브적 해석은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1세기 제2성경 유대교에서의 역사적 자료들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돌출해낸 것이다.

물론 성경에 대한 해석은 성경이 기록된 그 시대의 배경에서 해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이 기록된 당시 시대의 시대적 상황을 연구하고 그 당시의 역사적 자료들을 취합하고 분석하여야 할 것이다.

역사적 자료에 대한 분석은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주고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과거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기록된 역사적 자료들을 현재적으로 연구하고 해석하는데에는 한계가 있다.

발견되어진 역사적 자료가 당시 시대적 상황들을 보편적이고 객관적으로 증거 해주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부분에 대한 해석 또한 역사가의 주관적 해석이 가미될 수밖에 없다.

일부의 자료들을 보편화시키기 위해서는 충분히 많은 자료들이 종합적으로 취합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자료에는 객관성이 결여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현대의 모든 언론의 자료들을 종합한다고 하더라도 가짜 뉴스를 추려내고 객관적인 사실을 도출하는 것이 쉽지가 않듯이 과거의 역사적 기록물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러한 자료들을 가지고 성경을 다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객관적인 해석이 될 것이다.

역사적 자료는 성경을 해석하는데 참고가 될 수는 있어도 이를 근거로 성경 전체의 전통적 해석들을 바꾸는 것은 무모한 시도일 뿐이다.

하지만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은 이러한 방법으로 도출한 논리이다.

톰 라이트는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하여 1세기의 제2성전 유대교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율법을 지킨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 율법을 지킨 종교, 즉 제2성전 유대교는 율법주의가 아닌 언약적 신율주의의 종교였다고 주장한다.

새관점에서는 마찬가지로 창세기를 고대 근동의 역사적 배경에서 연구하면서 내러티브적 이야기를 도출해낸다.

새관점을 수용하는 양대표는, 창세기를 고대 근동 세계를 배경으로 읽게 된다면 현재 대다수가 생각하고있는 지배적 세계관과는 매우 다른 그림이 그려질 것이라고 말하면서, 창세기는 창조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창조 기사는 어느 누구도 경험적으로 기록할 수 없으며, 모세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성령의 감동으로 그려내고있는 것이다.

창세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기록될 수가 없는 기사이며, 창세기 1-3장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예비하기 위한 기사인 것이다.

창세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수 없었던 모세가 인간적 생각으로 기록할 수가 없는 창조기사이다.

이러한 창조 기사를 고대 근동 세계의 배경으로 재해석한다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창세기를 고대 근동의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 해석하듯이 신약의 바울 서신들을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방법론으로 재해석하고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은 제2성전 유대교, 즉 1세기의 팔레스타인 유대교에 대한 연구를 통해 바울에 대한 관점을 새롭게 정립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통해서 톰 라이트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기독교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종교개혁 이후 300년 가까이 이어졌던 전쟁들은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예배드리는 그리스도가 2천년 전 유대-팔레스타인 땅에서 실존했던 인물 예수와 얼마나 일치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시한다.

초대 교회에서 매우 일찍부터 그리스도를 예배의 대상으로 삼게 되면서 인간 예수의 면모가 지워지거나 왜곡될 여지는 없었을지에 대한 의문도 제시한다.

이는 이제껏 성경과 역사를 꼼꼼하게 연구해 왔던 여러 학자들로부터 제기되었던 질문이라는 것이다.

새관점의 근거가되는 역사적 예수 탐구는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그리스도보다는 인간 예수에 대하여 탐구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의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하여 제2성전 유대교가 언약적 신율주의였다는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슈바이처와 불트만 학파의 케제만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불트만학파였던 케제만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나치의 등장과 유태인 학살을 보면서, 예수가 누구였는지 절실히 묻지 않았기에 예수의 이름으로 나치가 우상화될 수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역사적 예수 탐구를 통하여 올바른 예수를 알았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케제만의 주장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근거를 예수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단정하고있는 것이다.

이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홀로코스트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새관점은 홀로코스트로 인하여 심각하게 피해를 본 유대인들이 더 이상 이와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기독교의 교리를 바꾸고자하는 시도라고도 할 수 있다.

최덕성교수의 르포르만다의 글에서 크리스차니티투데이의 글을 번역한 "새관점학파와 유대인의 장학금"의 일부를 인용해보고자한다.

"새 관점학파의 상당수 신학자들이 유대인 부호들로부터 거액의 장학금을 받았다는 소문이 나돈다. 유대인은 나치에 의한 민족의 수난을 현대 유대인을 위한 구속사건으로 이해한다. 그 참극이 오늘날의 유대인의 지위와 신분을 보장해 주는 선물을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한다. 영리하고 돈 많은 유대인들은 반유대주의가 다름 아닌 해 묵은 기독교 신학에 있다고 생각하고서 이를 바꾸려고 개신교 신학자들에게 천문학적인 액수의 장학금을 주고 사상의 흐름을 바꾸도록 했다는 것이다. 신약신학자들 사이에 공공연히 떠도는 이 소문이 어느 정도의 근거가 있다면 새 관점학파는 수상한 동기로 출범한 것이 분명하다.

유대인 장학금 소문은 신약학자들 사이에 오래 전부터 회자되었다. 이신칭의 복음을 사실상 부정하고 행위와 윤리실천을 칭의의 조건으로 보는 '새 관점'이라는 것이 뚜렷하게 드러나기 전부터 나돌았다. 만약 스탠달이 유대인으로부터 거액 장학금을 받았고, 새관점학파의 신학자들이 이러한 동기로 유대인에게 우호적인 신학공식을 만들어내고 유대인을 지지하는 논문을 저술, 발표한 것이 사실이면, 스탠탈과 새 관점학파 신학자들의 학문적 노력과 소신은 거액 장학금을 준 유대인 부호들의 의도에 의해 이런 저런 형태로 통제된, 장학금 신학이 분명하다. 새 관점이 의혹과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이에 대한 자세한 글은 여기를 참조해보길 바란다.

톰 라이트는 새관전이라는 작업을 위해서 불트만과 슈바이처의 사상과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합하여 제2성전 유대교를 언약적 신율주의로 풀어낸다.

새관점의 유대주의적 성향은 슈바이처의 사상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불트만은 슈바이처와 달리, 예수와 바울을 대립 시키지 않는 반면에, 슈바이처는 브레데와 같이 예수와 바울을 대립시킴으로서, 바울이 예수와 다른 어떤 종교를 가르쳤다고 생각한다.

슈바이처는 예수를 구속받은 구속자라는 실존주의적 개념으로 이해함으로서, 예수의 실존을 유대교와 연결시켜 해석한다.

슈바이처는 예수를 유대교의 실존적 완성으로 보고있는 것이다.

예수가 유대교에서의 실존적 완성이었다는 후기 유대교적 메시아 개념은 유대교가 은혜의 종교였다는 톰 라이트의 언약적 율법주의의 근거를 제공한다.

슈바이처는 윌리엄 브레데(William Wrede)와 같이 예수와 바울을 대립시키지만, 예수를 종말론적이고 묵시적인 유대교의 맥락에 둠으로서 브레데와 차이를 보이고있다.

톰 라이트는 브레데의 생각에 동의를 못하다가, 예수를 종말론적이고 묵시적인 유대교의 맥락에 두는 슈바이처의 견해에 상당히 공감하게 된다.(톰 라이트, 예수의 도전, 119)

라이트는 자신이 슈바이처의 접근과 비슷한 접근을 한다고 말한다

슈바이처의 후기 유대교적 메시아 사상은, 톰 라이트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의라는 범주 안에 귀속시키는 틀을 제공한다.

라이트는 슈바이처의 도움을 받아 예수를 유대교를 완성시키신 분으로 각색한다.

슈바이처는, 바울이 예수와는 다른 종말론의 체계를 가지고있다는 바울과 예수의 대립관계를, 유대주의적 묵시 문학의 맥락에서 해결한다.

라이트는 슈바이처의 묵시적 유대교 사상를 통해, 바울의 기독론을 유대주의적 메시아 사상에 귀속시킴으로서, 바울에 관한 새관점의 틀을 형성해간다.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은, 바울 서신서에 나타난 기독론이 유대주의적 메시아 개념을 바울 자신이 특별하게 발전시킨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슈바이처의 사상을 빌려온 것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의의 개념에는, “칭의를 순전히 법정적으로만 이해하는 칭의론은 윤리를 낳지 못한다"는 슈바이처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행위 구원론적 의의 개념을 추가시킨다.

새관점의 윤리 사상은 슈바이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슐라이어마허의 영향을 받은 슈바이처가, 법정적 칭의론이 갖는 윤리의 부재에 대하여 우려했던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톰 라이트는 법정적 칭의론의 윤리 부재에 대한 슈바이처의 염려에 대하여 케제만에게서 도움을 받는다.

라이트는 슈바이처의 법정적 칭의론에, 케제만의 관계적 칭의론을 대입시킴으로서, 결핍된 윤리의 문제를 해결하려한다.

케제만의 관계적 칭의론은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의 밑거름이 된다.

케제만은 기독론 중심의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 대신에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신론 중심의 "하나님의 의"를 칭의의 근거로 삼는다.

톰 라이트는 이와같이 슈바이처의 "후기 유대교적 메시아 사상"과 케제만의 "관계적 칭의론"과 역사적 예수 탐구의 "언약적 신율주의"를 조합시켜서 새관점을 구성시킨다.

이것이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의 기본 틀이다.

새관점에서는 2000년 가까이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생각해왔던 율법주의적 유대교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주장하며, 전통적 해석을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적 흐름에 편승하여 기독교의 새로운 틀로 자리잡으려고한다.

새관점과 포스트모더니즘

양희송대표의 기독교 세계관에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상이 자리잡고있다.

양희송대표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독단적 진리 주장이나 인식론적인 특권적 지위에서의 주장으로서의 최종 목적지에 대한 완결된 주장보다는, 저마다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을 최선의 길로 여기고 성실히 걷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결론은 성경을 명제적 접근방식에서보다는 완성되지 않은 이야기로 접근함으로서, 삶이 성경의 완성을 이루어간다는 접근방식에서 나온 결론이다.

그는 미들턴과 왈쉬를 인용하며 두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첫번째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 자체가 또 다른 특권적 지위를 주장하는 자기 모순을 범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부정적 상황에 대한 표현 자체도 또 다른 부정적 상황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절대적 진리가 없기에 모든 이들이 서로 다른 이들의 주장을 존중해 주어야한다는 것이다.

두번째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전일적 메타내러티브의 독주에 제동을 걸어 해체하고 국지적 담론(local-narrative)이 들려지게하라'는 주장이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 주장하는 핵심적 대안이라는 것이다.

이는 거대한 이념 충돌이 붕괴된 이후에 더 깊고 세밀해진 분열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라는 것이다.

미들턴과 왈쉬는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이 '기울어가는 모더니즘이 겪고 있는 윤리적 혼란과 폭력성에 대해 아무런 내러티브적 대안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무능력'을 보이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우리에게는 포스트모던적 삶의 조건을 해쳐 나갈 내적 자원이 될 내러티브의 공급이 필요하다. 그것은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

미들턴과 왈쉬의 주장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우리가 성경 내러티브를 다시 불러낼 때는 적어도 기존의 메타내러티브들이 억압적이고 폭력적으로 작동했던 방식과는 다른 읽기를 시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성경이 보존하고 있는 주변부와 소수자의 목소리를 찾아내어 귀 기울이며, 단성적 방식이 아니라 다성적 층위를 한꺼번에 음미하는 방식으로 본문 읽기 등을 시도하도록 제안한다는 미들턴과 왈쉬의 주장을 인용한다.

그는 주변의 폭력적 메타내러티브 방식의 성경 읽기를 민감하게 분별하고서 이에 대한 저항력을 키워 나갈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할 것을 권하는 미들턴과 욀쉬의 권고로 충고한다.

양희송대표는 정통 개혁주의의 성경해석을 일종의 폭력적 메타내러티브로 단정하고서 이에 대한 저항으로서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자신의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하고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전하는 새관점은 미들턴과 왈쉬의 처음 주장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폭력이 되어 많은 이들을 혼란케하고있다.

양희송대표의 톰 라이트에 대한 애착은 일종의 폭력적 메타내러티브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나는 영국 복음주의에 ‘존(John Stott)의 시대’가 가고, ‘톰(Tom Wright)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누구보다도 이 땅에 톰 라이트를 가장 먼저 보급하였고, 톰 라이트의 신학을 확장시키는데 가장 앞장 섰던 인물이었다.

한때는 톰 라이트와 같이 찍은 사진을 공개하며 톰 라이트와의 친분을 과시하기도했다.

톰 라이트의 "바울에 관한 새관점"

그렇다면 톰 라이트가 말하는 신학의 특징은 무엇인가?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신학은 소위 말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이다.

새관점에서의 주제는 믿음이 아니라 삶이다.

새관점에서는 인간의 행함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새관점에서의 삶은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는 삶이다.

새관점에서는 이 땅에서의 구원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통하여 아브라함 언약이 실현된 것이라고 본다.

새관점에서는 두 가지의 구원을 말하고있다.

첫번째 구원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임하였다는 주장이다.

톰 라이트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라고 주장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임한 그리스도의 나라와는 다른 것이다.

두 번째 구원은 최종적 구원으로서 최후의 심판 때에 행위에 대한 심판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머무르기 위한 조건으로서 윤리적 삶을 살아가야한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윤리적 삶은 최종적 구원에 이르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공로적 삶이기에,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과정으로서의 삶과는 다른 개념이다.

톰 라이트의 윤리 사상은 기독론적 윤리사상이 아니다.

톰 라이트가 제시하는 예수는 삶의 모본일 뿐 믿음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새관점주의자들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말한다.

새관점주의자들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로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더불어 이 땅에 임한 그리스도의 나라로서의 하나님 나라와는 다른 나라이다.

용어만 같을 뿐 뜻은 다른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이다.

새관점주의자들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기독교를 유대교의 틀에 맞추어 재해석한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이다.

새관점주의자들에게 그리스도는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후기 유대교적 메시아일 뿐이다.

새관점주의자들에게 그리스도는 최종적 구원에 도달하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본을 보여주신 분에 불과하다.

이들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구원론적 개념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이들은 예수를 본받아 살아감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론적 의를 추구하는 이들이다.

새관점주의자들에게 예수는, 택하신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창세 전에 영원 가운데 삼위 하나님께서 맺으신 구속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택하신 자의 중재자도, 보증자도 아니다.

톰 라이트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 나라를 대변하는 로마에 대항하는 혁명적 삶을 위한 희생적 정신일 뿐이다.

톰 라이트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가 로마에 대항하여 싸운 방식이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표시일 뿐이다.

새관점에서 요구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행동 방식은, 산상수훈이라는 새로운 율법을 기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 방식을 따르는 희생적 삶을 살아감으로서, 최종적 심판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받아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희생적 삶의 방식이 새관점에서 말하는 기독교 윤리인 것이다.

톰 라이트에게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며 최종적 구원을 위한 따름의 대상일 뿐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지만 최종적 구원은 백성들의 몫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요구되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공로에 힘입어 구원을 받았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예수의 행동 방식이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받았기에 예수의 행동방식이 옳다는 것을 신뢰하고 자신도 예수의 행동 방식을 따라 살 때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는 인간 예수의 행동 방식에 대한 신뢰일 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순종의 공로를 전가받은 것으로 인한 구원의 믿음이 아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하는 윤리적 과제가 주어졌기에 아직 안식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을 수용하는 사람들은,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윤리의 기준으로서의 인간 예수의 희생적이고 혁명적인 삶을 본받아 살아가야하는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연습과 노력을 통해서 고도화된 삶을 살아가야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로마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에 이른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보다는 몸의 지체로서의 삶을 강조한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지체들이다.

지체는 각자가 받은 믿음의 분량에 따라 받은 은사대로 역할을 감당해야하는 것이며, 이는 구원을 이루기 위한 조건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각자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면서 살아갈 것이 요구된다.

새관점과 인간의 죄성

새관점의 가장 큰 오류는 인간의 죄성을 과소 평가한 것이다.

새관점의 윤리 사상은 인간의 죄성을 간과한 것이다.

인간의 죄성을 간과한 새관점주의자들의 행동 방식은 결국 죄의 올무에 걸려들 수밖에 없다.

톰 라이트는 인간의 잠재적 능력을 높게 평가한다.

톰 라이트에게 인간의 죄성은 하나의 나쁜 습관일 뿐이며, 노력하여 고치면 되는 피상적인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인간의 죄성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나쁜 영향을 받은 것일 뿐, 종교개혁자들이 말하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는 다른 것이다.

톰 라이트는 인간이 근원적인 죄성을 가지고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표면적 습관에 의해서 잘못 길들여졌을 뿐이라고 말한다.

표면적인 습성은 근원적인 죄성과 달리, 인간의 노력과 연습으로 바뀔 수가 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아담의 범죄를 암묵적으로 용서하신 것으로 간주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출애굽을 통하여 이 땅에 임한 구원의 은혜의 삶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이스라엘에게, 바벨론 포로 생활을 종식시키고, 앞으로 살아가야할 새로운 삶의 본을 제시해주시기 위한 것이다.

톰 라이트에게는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이 구약과 신약의 분기점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공생애 사역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십자가가 아니라 최후의 만찬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생활에 대한 종식을 선언하고, 자신의 십자가의 길이라는 새로운 삶의 표준을 제시함으로써, 이를 본받아 희생적 삶을 살아가라는 선언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에게 신약의 교회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이 중심이 되어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 새롭게 모이는 유대인의 회당과 같은 곳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구원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죽음에 이른 인간의 육신에 대한 구원이 아니라, 출애굽을 통하여 가나안 땅에 임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온 땅에 확대되어 전 우주적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교회는, 바벨론 포로로부터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확장일 뿐이며, 신약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는 다른 것이다.

톰 라이트에게 처음 아담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모형도 아니다.

인간의 죄성은 아담과 관계 없기에 톰 라이트가 말하는 교회는 둘째 아담과는 관계가 없는 곳이다.

새관점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존재가 아니며, 노력과 연습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감으로서 최종적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무한한 잠재적 능력을 가지고있는 존재다.

새관점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톰 라이트가 제시하는 기준을 따라 살아가야할 의무가 주어졌는데, 산상수훈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들이 따라가야할 새로운 윤리적 기준이 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전파하면서, 윤리적 삶을 살아갈 것을 전하는 양희송대표가 정작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불륜을 저지른 것은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죄성을 간과한 것이다.

그가 먼저 공동 사역을 하였던 교회의 S목사도 교인들에 대한 성폭력 문제로 인하여 중도하차할 수밖에 없었던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은 그 후에도 몇 년을 불륜을 지속하고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가 인간의 죄성이 어떠한지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인간에게 자신의 죄성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원의 은혜가 필요 없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에게 그리스도는 따름의 대상이기 이전에 믿음의 대상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서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자가 성화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열매로서의 삶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존재이며, 둘째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존재이다.

백성에게는 행함의 의무가 제시되지만 자녀에게는 행함에 대한 책임이 주어진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개념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개념보다는 좀 더 하나님과 친밀한 존재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모든 행동에 있어서 신중함을 보이게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욕되게 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해서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간다.

성령에 이끌리는 자는 순간에 대해서는 잘못된 행동을 할 수 있어도 자신을 속이는 지속적인 잘못을 범할 수는 없다.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가며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매일의 삶을 기도와 더불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하기에, 매일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새관점과 전가교리

새관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인간의 잠재적 능력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전가교리와의 대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들은 아담의 죄가 인류에게 전가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에 인간이 얼마나 부패하고 무능한 존재인지에 대하여 정통 개혁주의와 다른 입장일 수밖에 없다.

정통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전가교리는 크게 세 가지로 구성되어있다.

첫번째는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처음 죄를 모든 인간에게 전가시키셨으며, 두번째로는 택한 자의 구속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택한 자의 죄를 그리스도께 전가시키셨으며, 세번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 혹은 그의 순종하심을 택한 자에게 전가시키셨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그들(아담과 이브)은 온 인류의 근원이었으므로 이 죄의 허물이 전가 되었으며, 죄 안에서 동일한 죽음과 부패한 성질이 보통 생육법으로 태어나는 그들의 모든 후손에게 전달되었다’(6-3)고 말한다.

종교개혁 신앙을 거부하는 새관점은 개혁주의에서의 삼중전가도 마찬가지로 거부한다.

전가교리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와 구원을 위한 칭의에 있어서 핵심 교리이다.

톰 라이트는 전가 교리를 부정하기에,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도 인정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도 인정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는 칭의도 인정하지 않는다.

기독교 교리의 전가 교리를 제거한다면 유대교와 유사한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틀에 맞추어 재구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톰 라이트는 인간에게 구원을 이루기 위한 능력이 있다고 보기에 중재자이시며 구원의 보증자되신 그리스도의 순종의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간이 육체의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사는 동안에 윤리적 삶을 통해서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공로를 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있다면 구원의 의는 인간으로부터 기인된 것이 된다.

하지만 삶 가운데 나타나는 인간의 부정적 모습은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인간 만큼이나 스스로를 속이는 악한 존재는 없다.

인간이 악한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들은 없다.

인간이 어떻게 악한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들이 있어왔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악이 집단성에서 기인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집단의 악의 기원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고있다.

단지 표면적인 현상의 한 부분만을 설명하고있을 뿐이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보편적인 죄가 아담의 범죄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말하며, 이는 인류가 유전에 의해서 아담으로부터 죄악의 형질을 전이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도 인간의 죄성에 대한 완전한 설명이 되지는 못한다.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강령decree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불순종을 죽음에 이르는 죄로 규정하셨기 때문에,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죄성을 가진 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로서 하나님의 강령에 의해서 처음 아담의 범죄가 모든 인간에게 전가된 것이다.

현재의 삶에서 인간의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죄악된 행동 방식을 볼 때 죄의 전가는 결코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인 논리만은 아니다.

불순종의 일차적인 결과는 죽음이며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다.

아담은 범죄하고서 에덴에서 쫓겨났으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아담의 에덴 바깥으로의 쫓겨남은 죽음을 의미한다.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에덴 바깥에 있으며, 육신은 살아있으나 실상은 영적으로 죽은 존재이다.

아담의 범죄의 전가로 죽은 모든 인간이 살길은 둘째 아담으로부터 의를 전가받는 것이다.

전가로 인해서 발생한 문제는 전가의 방식으로 해결되어야만 한다.

전가 교리는 인간의 근원적이고 실제적인 죽음과 생명을 얻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하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전가의 방식으로 구속 사역을 진행하신다.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죽음에 대한 해결책은 창세기 3장 15절의 원시복음 안에서 제시된다.

원시복음이 구체화되기 위한 과정으로서 아담 언약이 율법을 통하여 재연된다.

율법은 아담 언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은 율법을 통하여 다시 재연된다.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이 안식으로 귀결되어야했듯이, 율법의 요구는 안식으로 귀결되는 것이며, 그리스도는 완전한 순종을 통하여 안식의 주인이 되실 수 있으셨다.

율법은 아담에게 요구되는 순종이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상기시키면서, 인간은 율법에 대한 순종을 통하여 스스로를 구원할 수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줌으로써, 중보자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율법은 순종을 요구하는 행위 언약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은혜 언약의 속성을 내포하고있는 것이다.

율법은 인간에게 좌절과 낙망을 주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가나안 땅에 오신 시기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게 더 이상의 희망이 보이지 않던 시기에 오신 것이다.

새관점은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행동 방식을 제시하시기 위해서 이 시기에 오셨다고 말한다.

새관점이 말하는 복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율법의 또 다른 형태로서의 행동 방식을 제시하는 것이다.

율법을 새로운 형태로 다시 부활시킨 새관점은 예수를 따르는 윤리적 삶을 통해서 최종적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은 불순종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께 나아갈 기회를 앗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길을 방해하는 적그리스도적인 관점이다.

율법은 새관점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머무르기 위한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둘째 아담 안에서 이루어질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을 예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율법은 처음 아담에게 주어졌던 행위 언약과 마찬가지로 행위 언약의 속성을 지니고있지만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교사로서의 역할을 하고있다.

율법도 행위 언약으로 주어진 것이기에 순종을 요구하지만,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들은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었기에, 율법은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은혜 언약의 속성을 가지고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처음 아담은 에덴에서 받았던 명령을 수행하는데 실패하였지만,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율법의 요구를 완전하게 충족시키심으로서 불순종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이러한 점에서 율법은 처음 아담에게 주어졌던 행위 언약의 재연republic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요구를 완전하게 충족시키심으로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어떤 이는 성경 어디에도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지키셨다는 내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행위 언약의 개념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개념도 부정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사랑은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키신 행하심이기에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받는다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율법의 요구에 대한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위한 또 다른 율법이 필요없게 될 것이다.

톰 라이트는 산상수훈이 그리스도인이 지켜야할 삶의 지침으로서의 새로운 율법이라고 말하며, 새관점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최종적 구원을 위한 삶의 윤리적 기준으로 삼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세상을 대변하는 로마에 대항하는 희생적 삶의 표현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처음 아담의 범죄로 인한 사망의 형벌을 대신 치르신 속죄 사역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택함받은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들의 죄를 전가받아 대신 죽으시고, 죽음을 통하여 얻으신 수동적 순종의 의를 택함받은 자에게 전가시키심으로서, 택함받은 자에게 더 이상 사망의 형벌을 주어지지 않게 죄를 속하신 것이다.

택함받은 자는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의 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삶을 통하여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신 능동적 순종의 의를 전가받음으로서,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한 자로 여김을 받음으로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로부터 의를 전가받지 않는다면, 구원을 위한 의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만 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출애굽을 통한 이스라엘에게 임한 나라이다.

톰 라이트는 이스라엘에 임한 나라가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이며,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르기 위한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라고하지만, 톰 라이트가 말하는 은혜의 하나님 나라는 안식이 임한 나라가 아니다.

영원한 안식을 위해서 율법을 지켜야했기에 참된 은혜가 아니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윤리적 삶은 최종적 구원을 위한 조건이기에 안식이라는 과제가 남아있다.

처음 하나님께서 6일 간의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쉬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통하여 안식에 이르러야만 했다.

신자는 중보자되신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안식에 들어감으로서, 불순종한 아담 안에서 손상된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하게 회복될 것을 약속받게 된 것이다.

아직 율법 아래있는 자는 저주 아래있는 자이며, 산상수훈을 최종적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자는 그리스도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이다.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하나님의 안식에 이른 자가 성화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최종적 구원을 위해 요구되는 윤리라면 이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이기에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새관점을 받아들이고 전하는 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서 그리스도의 안식에 들어간 자이다.

그리스도인이 얻은 칭의는 그리스도께서 보증자되시고 성령께서 인을 치셨기에 또 다른 최종적 구원을 위한 행위가 요구되지 않는 완전한 것이다.

그리스인이라고 할지라도 아직은 죄성을 가진 육신, 즉 바울이 고백하는 사망의 몸을 지니고있기에 삶의 여정에서 부족함과 실수를 나타낼 수밖에 없다.

성령께서 내주하는 이들에게 부족함과 실수는 일시적인 것이 될 수는 있어도 지속 될 수는 없다.

성령께서 내주하는 이들은 거듭난 자로서 죄악이 둥지를 틀 수가 없는 존재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습관적으로 죄악을 즐길 수가 없다.

전가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 새관점주의자들은 최종적 심판에 대한 부족함을 스스로 충족시켜야하지만, 이들은 생명이 없는 죽은 존재로서 그 안에 근원적인 죄성이 자리잡고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영원한 구원은 불가능한 것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은 인간에게 어떠한 새로운 과제를 제시하는 소식이 아니라 안식을 전하는 복된 소식이다.

복음은 짐이 아니라 쉼을 전해주는 복된 소식이다.

톰 라이트를 복음주의자라고 칭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가 전해주는 성경이야기는 복음이 아니다.

행위로 구원을 받으려는 자에게 제시하는 또 다른 형태의 희망적인 대안이지만, 이는 인간에게 감당이 불가능한 소식이다.

톰 라이트가 전하는 새로운 형태의 행위에 대한 최종적 판정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제시되지 않는다.

누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겠는가?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인간에게 최종적 구원을 위한 윤리적 삶을 요구하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죄의 문제를 다 해결하셨다는 복된 소식을 전함으로서 그리스도인에게 회개와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예수의 행동방식이 옳았음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순종의 요구를 대신 충족시키심으로서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다.

참된 복음은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요구한다.

회개와 믿음은 의를 얻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의를 받아들이는 행위이기에 공로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는 혁명적 삶을 보여주신 따름의 대상이 아니라 택함받은 자의 중보자이심을 믿는 믿음의 대상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결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와 연합된 하나님의 자녀이다.

이 땅에서의 결혼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모형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결혼은 유형적으로 같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이 한 몸이 되어,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가는 곳이다.

창세기 2장 24절에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후에 인간에게 처음 적용하신 첫번째 창조 명령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성도와의 연합은 처음 아담이 실패한 창조 명령을 그리스도께서 실행하신 것이다.

아담이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결혼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모형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었듯이 결혼을 통하여 남여가 한 몸을 이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를 낳는 것이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은 타락 전에 하나님의 자녀를 낳는 것이었지만, 타락 이후에는 육신의 자녀를 낳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이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가정을 이루어나아가야한다.

동거문화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위배되며,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어나아가는 교회의 원리에도 위배된다.

동성 간의 결혼도 마찬가지이다.

불륜도 마찬가지로 가정의 원형인 교회를 깨뜨리고 파괴시키는 행동이다.

교회 사역자의 불륜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파괴시킨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결혼을 통해 이루어가는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 명령의 실행이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기초가 되기에 그리스도인이 가꾸어가야할 제일 우선되는 영역이다.

나가는 말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때에 그리스도인의 비윤리적 삶은 많은 이들을 혼란케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허무는 일이다.

웃사는 마차에서 떨어지려는 궤를 잡으려고함으로서 죽임을 당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교인들의 비윤리적인 삶으로 인해서 쓰러져가는 교회를 인간적인 방식으로 세우려고해서는 안된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인본주의적이고 유대주의적인 사상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제거하고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의를 집어넣음으로서, 왜곡된 하나님의 의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하여 새관점을 합리화시키고 있지만, 역사적 예수 연구는 부분적이기에 보편화 될 수 없고, 해석도 주관적이기에 성경 전체의 주제를 바꿀 수도 없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분명 잘못된 관점임에도 이를 적용하여 교회를 세우려는 행동 방식은 웃사의 방식과 다르다고 할 수 없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전하는 양희송대표는, 오랫동안 교회 개혁을 외치며 기독교 세계관을 전파하며 가나안 성도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지만 그가 진정 그리스도의 안식의 은혜를 전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잘못된 길에서 보호받을 수가 없다.

참된 기독교 윤리는 올바른 개혁주의 신앙을 근거로해야한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그리스도의 안식에 거하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하는 것이다.

일차적인 개혁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살아감으로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전적으로 부패한 자들이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지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기에, 주어진 긍정적 환경에 감사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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