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세계관 2014. 9. 27. 18:12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의 기독교 세계관은 지난 20여년 동안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의 표준으로 자리를 잡아왔다.

 

2005년 개정된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은 칼빈신학교의 마이클 고힌Michael Goheen이 공동 저자로 참여함으로서 초판과는 여러가지 면에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개정판에서 달라진 대표적인 두 가지를 든다면, 하나는 미셔널처치, 즉 선교적 교회론이며, 또 다른 하나는,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 즉 "바울에 관한 새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의 개념이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개정판의 공동 저자로 참여한 마이클 고힌은 기독교 세계관운동뿐만이 아니라 미셔널처치, 즉 선교적 교회 운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는 이로서, 개정판에 대한 그의 참여는 "창조 타락 구속"이 좀 더 미셔널 처치의 성격에 부합되는 특성을 가지도록 하였다.


미셔널처치의 기본 틀은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에 그 근거를 두고 있기에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은 자연스럽게 신정통주의적 요소들을 수용한다.


마이클 고힌은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을 표방하지만 이미 칼 바르트의 선교적 교회론에는 개혁주의에서 벗어난 많은 요소들을 지닐 수밖에 없다.

 

또 한 가지 주목할만한 변화는 이번 개정판을 내면서 알버트가 새관점주의자인 톰 라이트로 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개혁주의에서 벗어난 새로운 관점으로서 개혁주의에서의 중요 교리들, 즉 전가교리를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칭의 교리와 하나님 나라 개념, 기독론등에서 이미 종교개혁 사상을 부정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있기에, 새관점을 수용하는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이 과연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과 마이클 고힌의 미셔널 처치 기독교 세계관은 이미  이 땅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한 나라 개념을 추구함으로서 전통적 개혁주의에서 견지하여왔던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관점에서의 "하나님의 두 나라" 개념과 많은 면에서 차이를 보여주고있다.


이번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 패러다임에 대한 비평에서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개념에서 출발된 선교적교회로서의 패러다임이 문화칼빈주의로서의 화란개혁주의와 접목됨으로서 결과적으로 어떠한 특징들을 보여주고있는지 살펴보면서 이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 주장하는 몇 가지 주된 논점들


책 내용에 대한 세부적인 논의에 앞서 몇 가지 주된 몇가지 논제들을 간략하게 정리해보고자한다.


개인의 구원보다는 선한 창조세계의 회복

알버트는 기독교 신자들이 흔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한 가지는 “우리가 구원 받는다는 것은 이 땅에서 벗어나서 뭔가 새로운 세계에 간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계는 선하기에 이 창조세계를 떠나 다른 곳에 간다는 생각은 영지주의적이며 이 땅이 악하다는 생각이 밑바닥에 깔려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88)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선하며 비록 죄로 인하여 타락하였지만 이 땅의 선한 구조는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폐기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창조하신 선한 구조를 새롭고 선하게 회복하신다는 것이다.(87)

 

예수님께서 재림 하실 때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땅이 폐기 되고 오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 땅이 새롭게 회복된다는 것이다.

 

이 땅이 새롭게 회복되는데 있어서 이 땅의 구조는 남아서 새 하늘과 새 땅의 문화의 구조를 이루게 되기에 우리가 이 땅에서 하여야 할 일은 문화구조의 방향을 바꾸는 문화변혁을 통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세계의 구조를 회복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이 땅의 문화를 변혁하는 일에 참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땅의 문화의 구조가 선한지, 이 땅을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이 과연 영지주의적인 것인지, 구조의 회복과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구속적 변혁주의 문화관에는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등을 살펴보고자한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문화의 연속성.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4:4)"(88)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 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 세계가 선하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89)

 

하나님께서 지으신 선한 것에는 피조계뿐만이 아니라 창조명령이라고 할 수있는 발전의 사역을 통하여 이루어 질 수 있는 문화명령의 산물들이 포함된다(78쪽)

 

이러한 문화명령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원래 계획하셨던 발전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84쪽)


창조명령으로서의 문화명령의 궁극적인 목적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문화물의 완성을 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비록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원래 계획되었던 발전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였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는 손수 만드신 작품을 버리시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문화적으로 발전 시킨 것들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폐기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럼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 에서 말하고 있는 문화 명령으로서의 창조 명령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문화물이 보존된다는 주장의 근거는 무엇이며, 이러한 문화변혁운동이 과연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어야하는 충분한 근거는 있는지, 과연 그 근거가 되는 구조가 선한지 등을 살펴보고자한다.


문화 변혁과 두 왕국

문화명령(창1:28)을 근거로하는 문화변혁운동은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대위임령(마 28:19-20)과는 전혀 다른 속성을 가지고있다.

 

같은 개혁주의 내에서도 이에 대한 의견의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있다.

 

어떤 이들(리처드 미들턴등 문화변혁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모든 만물이 하나님과 화목하였기에(골1:20) 그리스도인은 아담에게 주어졌던 문화명령을 다시 수행함으로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보존될 문화를 변혁하는 일에 집중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수행하여야 할 이 땅에서의 사명으로서 대위임령보다도 상위 개념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많은 개혁주의자들은 아담이 실패한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은 두 번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기에 신자는 더 이상 문화명령을 수행하기보다는 오직 대위임령을 수행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많은 개혁주의자들은 아직 이 땅이 하나님의 특별은총에 의한 구속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와 일반은총에 의한 통치 영역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two kingdom)사이에 긴장관계가 지속되고 있으며,  지금 시기는 마치 바벨론 유수 상태에 있었던 이스라엘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문화와 긴장 관계에 있는 것과 같으며, 역사적 이스라엘과 새이스라엘의 불연속성과 같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문화는 이 땅의 문화와 불연속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오직 교회를 더욱 교회답게 하는 일에 집중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알버트 월터스를 비롯한 문화칼빈주의자들과 톰 라이트, 그리고 선교적 교회론자들은 이러한 두 왕국 개념에 반대하면서 이들을 이원론적인 영지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한다.


이들의 하나님 나라 개념은 "이미, 그러나 아직"의 긴장 관계가 아니라 이미 이 땅에 실현되었기에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 문화를 이루어가야한다고 말한다.

알버트는 '창조, 타락, 구속'에서 두 왕국 패러다임을 가진 이들과는 달리 이 땅에서의 문화의 선한 구조는 어떠한 형태로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보존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신자는 천국에 보존될 문화를 위해서 이 땅에서의 문화를 선한 방향으로 변혁하는 일에 동참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이루어 가는 일에 집중하여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주장들의 성경적 근거는 무엇이며 이러한 주장들이 어떠한 문제점들을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고자한다.

선교적교회(미셔널처치)를 위한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 개정판은 선교적교회 운동을 하는 마이클 고힌과 뜻을 같이하여 선교적교회의 관점을 반영한 개정판을 발간함으로서 선교적교회에 부합되는 기독교 세계관을 설명하고 있다.(182쪽)

 

선교적교회는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기초로하는 WCC의 교회론으로서 신정통주의와 WCC에 대하여 비판적인 개혁주의의 교회론과는 여러가지 면에서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창조, 타락, 구속”의 공동 저자인 마이클 고힌은 개혁주의라는 이름하에 이들의 교회론을 수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접목시키는 시도를 하고있다.


이러한 점에서 전통적 개혁주의 교회에서 알버트 월터스 말하는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없이 "창조 타락 구속"의 관점들을 수용하여 이를 적용한다면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전통적 교회는 혼란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일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미셔널처치로서의 선교적 관점을 별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살펴보면서 "창조 타락 구속"에서 말하는 기독교 세계관이 선교적 교회론과 어떻게 접목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한다.

창세 전 구속언약과 아담과의 행위언약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은 피조세계의 구속을 위한 인간의 역할이라는 주제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구속redemption에 대해서는 이미 창세 전에 삼위 하나님께서  택함받은 자들의 구원Salvation을 위해서 구속언약Covenant of Redemption을 세우셨다.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Covenant of Redemption은 예정하심 가운데 택하신 자를 향하여 있는 반면에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은 피조 세계를 향하여 있다.


구속 언약은 성부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보증Surety이 되신 성자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한 구속 사역의 실행과 부활하심,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신자에 대한 도우심이라는 삼위 하나님의 협력을 통한 구속 사역의 실행Execution의 근거가 된다.


이 땅에서의 신자의 삶도 마찬가지로 택함받은 자로서, 종말론적 영생과 축복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 언약의 계획하심과 실행하심에 응답되어지는 삶이 되어야할 것이다.


칼빈은 직접 구속언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칼빈을 따르는 개혁파들의 신학 사상에는 구속언약의 개념이 뿌리 깊게 자리를 잡고있었다.


언약 사상에 대한 변화는 세계관의 변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카이퍼 이전까지의 유럽의 국가들은 실질적으로 신정체제하에 있었고 예수는 정치적 메시아로 자리메김을 하고있었다.


카이퍼가 속하여있던 반혁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던 프랑스대혁명에 숨겨진 인본주의 사상에 대한 반발이었으며, 카이퍼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는 일상의 삶의 영역에서의 하나님 나라 확장이라는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와 접목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로서  칼 바르트의 단일한 은혜언약 개념이 화란개혁주의 기독교세계관 한 가운데 자리메김을 하게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신칼빈주의에서 구속언약과 행위언약 사상이 상실되었으며, 이는 자신의 신학이 칼빈에 근거한 개혁파 사상임을 강조하였던 카이퍼의 화란개혁주의가 구속언약과 행위언약에 그 근거를 둔 전통적 개혁주의로부터 이탈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게된 것이다.


또한 화란개혁주의의 산실인 암스테르담의 자유대학교는 오랫동안 조직신학교수로 활동을 하였던 베르까우어에 의해서 신정통주의 사상이 하나의 커다란 흐름으로 자리를 잡게된다.


베르까우어G. C. Berkouwer등을 통하여 화란개혁주의 깊숙히 자리를 잡은 칼 바르트의 신학 사상은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세계관에서도 자연스럽게 나타나고있다.

 

칼 바르트의 신학 사상은 특히 언약 개념에 관해서  전통적 개혁주의와 많은 부분에서 입장을 달리하고있다.


바르트에게는 하나의 주체만 존재하며, 성부 하나님만이 한 주체이시기에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은 인정할 수 없으며, 아담과의 행위 언약 또한 인정할 수 없었다.


바르트에게는 오직 단일한 은혜 언약만이 존재할 뿐이다.


행위 언약 개념이 배제된 바르트의 신학은, 아담의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는 관계로 인하여, 아담의 대표성의 상실과 죄의 전가 교리의 부재, 그리고 이에 따른 두 번째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성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개념등이 약화되거나 배제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게된다.


삶의 영역에서의 세계관이라는 특성은, 언약 개념과 아담의 대표성, 전가 교리등에 대한 입장이 다른 관계로 인해서, 결과적으로 전통적 개혁주의 세계관과는 다른 모습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이미 이 땅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의 구현이라는 입장을 취하고있기에, 하나님 나라 구현이라는 성격을 가지고있는 신칼빈주의 기독교세계관과 접목될 수밖에 없게된 것이다.


이로서 구속 언약과 행위 언약이 빠진 자리에 자연스럽게 톰 라이트의 "바울에 관한 새관점"이 채워지게됨으로서,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세계관은 새관점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

알버트 월터스는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은 줄곧 개혁주의를 기초로 한 기독교 세계관임을 강조하고있지만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알버트는 개정판 후기에서 이 책이 볼렌호벤과 도예베르트 철학의 입문서라고 밝히면서도(182), 개정판 서문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교회의 특징인 네러티브와 미셔널 처치의 맥락에서 이 책이 사용되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하고있다.


성경을 네러티브 관점에서 볼 수도 있겠지만 성경을 전적으로 네러티브 관점에서만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성경을 내러티브라는 관점으로만 접근하는 톰 라이트의 해석 방식과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를 근거로하는 선교적 교회론을 개혁주의의 범주에 속하여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모한 주장이다.

 

전통적 개혁주의의 범주에 속하여있기 위해서는 최소한 칼빈의 5대 강령을 수용할 수있어야한다.


칼빈의 5대 강령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에 일차적인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알버트 월터스는 '창조, 타락, 구속’에서의 기독교세계관은 기독론이나 구원론보다는 신론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전통적 칼빈주의가 기독론과 구원론 중심이라면 화란개혁주의는 신론 중심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알버트 월터스의 기독교 세계관은 개혁주의의 기초가 되는 칼빈의 5대강령을 제외시킴으로서 전적 부패한 인간의 구원과 교회를 교회답게하는 성령의 역사와, 성도의 성화의 과정등, 인간의 내면 세계의 변화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문화라는 외적인 상황의 변화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세계관이라는 용어 자체가 자신을 보는 관점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관점이기에 당연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지만, 성도는 외부의 세계를 자신의 내면의 세계와의 관련성 안에서 보아야할 것이다.


또한 세계관이라는 용어 자체가 외부의 사람들 자체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외적인 문화와 피조 세계를 보는 관점이기에 이는 일차적으로 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그리스도의 대위임령과 조화를 이룰 수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기에 기독교 세계관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종합적인 관점이 되어야할 것이다.

 

마이클 고힌은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 이 개혁주의 철학을 기초로 한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치기 위하여 쓰여진 책이라고 말하고 있다(181).

 

알버트 월터스는 '창조, 타락, 구속' 의 기독교 세계관이 개혁주의 안에 있음을 자처하고 있지만 실상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적합화된 현대 신학의 산물임을 보여주고있다.


 

 

논의를 위한 주요 주제들

창조와 회복

창조와 회복에 관한 "창조 타락 구속"의 주요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1. 창조는 창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다.(59쪽)


2. 창조의 범위는 피조계의 모든 영역으로 피조물뿐만이 아니라 문화와 사회 제도(152쪽)는 물론 인간의 규례까지도 포함 한다


3. 창조는 인간에게 맡겨진 발전 사역을 통하여 지속된다.(78쪽)


4. 인간의 문명화는 역사적 과정을 통한 창조 사역의 발전 과정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창조사역이다.(81쪽)


5. 그리스도의 구속사건 이후의 그리스도인의 문화변혁운동은 창조계의 회복에 참여하는 창조 사역으로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구속적 사역이다.


6. 하나님은 손수 만드신 작품을 버리시지 않으신다.(84쪽)

그리스도의 구속의 초점은 회복이며 범위는 창조세계 전체이며 창조 세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구속의 범위는 타락의 범위와 같은 넓이로 볼 수 있으며(119쪽) 회복은 인간의 문화와 사회제도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의 회복이 되어야한다.

7. 구속은 지금의 창조세계를 폐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개념이 아니다. (117쪽)

8. 구속은 창조 세계의 회복을 말하며 선한 창조로 인해 이 땅에 존재하였던 에덴의 상태로의 회복을 말한다.(p105)

창조와 회복에 대한 이상의 관점들에 대하여 다음의 제목들로 논해보고자한다.

 

 

인간의 통치행위은 창조행위인가?

 

알버트 월터스는 창조와 지배를 같은 맥락에서 보고있다.(42쪽)

 

이는 창 1:28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을 창조명령, 지배명령, 통치명령, 문화명령등으로 부르는 이유 가운데 한 가지 일 것이다.

 

만드는 창조행위와 다스리는 지배 행위가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를 해석하고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동일시하는 것은 무리가 있게 마련이다.

 

창 1:28에서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이 주어진다.

 

다스려야할 생물 가운데에는 영적으로 사단의 종 노릇하는 생물들도 있었기에 에덴은 영적인 긴장감이 도는 안식 이전의 장소였다.

 

창 1:28에서 지칭하는 다스림의 대상인 생물( חַי  ḥay)은 창세기 3장 1절에서의 짐승( חַי  ḥay)과 같은 용어가 사용 되어지고있다.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한 뱀은 다스리는 지배행위의 대상이다.

 

여기에 지배행위를 창조행위를 동일시 할 경우에 뱀은 아담이 창조할 대상이 된다는 전혀 이상한 논리가 형성이 된다.

 

창조와 지배가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고하더라도 이는 분명히 구분이 되어야한다.

 

아담에게 주어진 지배명령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의 창조물을 다스리고 보존해야할 의무로서의 왕적인 권위를 위임받았다는 개념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는 창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다.(59쪽)”라는 알버트의 주장은 오히려 “통치는 창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다.(59쪽)”라고 바꿀 경우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아담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왕적인 권위가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담은 창조 능력을 부여받았는가?

 

창조의 범위에 문화와 사회 제도는 물론 인간의 규례까지도 포함된 것은 아담에게 주어진 명령을 근거로 한다.

 

이는 창세기 1장 28절은 창조명령의 입장에서 해석한데 따른 것이다.

 

창세기 1장 28절은 분명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이라는 안식을 향하여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6일간의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제7일에 취하신 안식과 유비적인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담의 타락이 없었더라면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으로 실행된 결과물들은 분명 종말에 소멸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실행한 결과물들이 창조물이라고한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6일간의 창조 사역은 마침이 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취하신 안식도 완전한 안식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다고해서 하나님일 수 없는 것과 같이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을 실행한 결과물들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고 동일시하는 것은 무리일 수 밖에 없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아담의 관계 만큼이나 하나님의 창조물과 아담의 수고의 산물의 관계는 유비적인 관계일 뿐 같은 차원의 창조물로 볼 수는 없다.

 

하나님의 창조가 무에서 유ex nihilo를 창조한 개념이라면 알버트가 말하는 창 1:28의 창조는 유에서 유로의 변형과 발전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타락 후에도 창조 사역은 지속될 수 있는가?

 

알버트는 “인간에게 맡겨진 창조는 발전 사역을 통하여 지속 되어야한다(78쪽)”고 말한다.

 

창 1:28의 명령을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이라는 조건을 위한 행위 언약적인 측면에서본다면 이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된 것이다.

 

물론 신학자들마다 언약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고 특히 행위언약을 인정하지 않는 바르트계통의 신학자들이나 존 머레이와 노먼 쉐퍼드의 후예들의 경우에는 오직 은혜언약만을 인정하지만 유형학적인 해석의 관점에서는 행위언약이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 적용되는 것이 바람직함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타락 전에는 아담에게 창 1:28의 통치명령과 선악과 금령이 주어진다.

 

이는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이라는 안식 이전에 아담에게 주어진 한시적인 조건이다.

 

조건의 충족이 없이는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이라는 안식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아담에게 6일의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안식을 취하신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이 땅에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왕권의 표현이다.

 

창 1:28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의 표현으로서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 땅에서 성취되었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시고 사단에 대한 승리를 선포 하심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하셨다.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안식이 성취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안식의 주인이 되신 것은 두 번째 아담으로서 첫 번째 아담에게 주어졌던 안식을 위한 창 1:28의 명령이 성취된 것이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며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자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쉼, 즉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안식은 완성과 마침을 의미하지만 신자에게 창조계의 회복에 참여하는 창조 행위로서의 창조명령이 요구된다면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에 마침표가 아닌 쉼표를 부여하는 것이다.

 

 

노아 언약을 통하여 상실된 창조 명령

 

알버트는 그리스도인의 문화변혁운동은 창조계의 회복에 참여하는 창조 사역으로서 이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구속적 사역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창조명령이 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유효하며 그리스도인은 이 창조명령을 수행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메리데스 클라인Merideth Kline은 자신의 저서 “하나님 나라의 서막Kingdom Prologue”에서 창 1:28의 명령이 타락 이전에는 행위언약의 형태였으며 타락 이후에는 노아언약을 통하여 변형되고 굴절된 일반은총의 형태로서의 언약적 형태로  재연 되었다고 말한다.

 

창세기 9장 1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에서는 타락 이전의 창 1:28의 언어가 거의 그대로 반복되고있지만 한가지 중요한 차이는 “정복하라”라는 통치 개념의 단어가 더 이상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정복의 개념을 창조의 개념과 동일시 시키는 알버트가 말하는 창조의 기능이 상실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창 1:28에서 말하는 정복이 타락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아담의 후손을 대표하는 노아와 노아언약으로 창조명령을 대체하신다.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창 9:9)

 

이는 약속된 끝날까지 오랜 세대를 거쳐 지속되는 언약을 의미하는 “영속된 언약everlasting covenant”을 말한다.(창 9:16)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은 일반은총의 언약의 표시로 더욱 강화된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창9:13)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언약은 일반은총의 언약으로서 문화명령을 새롭게 대체한 것이다.

대신에 아담에게 주어졌던 정복의 과업은 두 번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에게 옮겨졌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원칙적으로 이 땅을 정복하신 것이다.

 

이 땅에 대한 정복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되었기에 알버트가 말하는 창 1:28의 창조명령이 지속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신자는 창조사역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여야하는가?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행위 언약으로서의 통치명령과 선악과 금령은 종말론적 안식까지 한시적인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던 율법도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한시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유형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창 1:28의 문화명령과 율법에는 순종이 요구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주체이시기에 6일간의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안식을 취하셨지만 에덴에서의 아담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창조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 위한 순종이 요구되었다.

 

아담이 선악과 범하지 않고 창 1:28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였더라면 아담에게 주어진 창조명령으로 인한 결과들은 종말론적으로 없어질 것이 아니라 완성되어 영원 가운데 보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담은 반역으로 인하여 더 이상 창조명령을 수행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종말론적 안식을 이루셔야만 하셨던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었기에 에덴에서와 마찬가지로 안식에 들어가기 위한 순종이 요구되었지만 이는 이 땅에서 제한적인 것이었으며 그리스도께로 공로를 넘기기 위한 교사로서의 역할을 할 뿐이었다.

 

율법은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 주어졌던 단순한 구조로서의 문화명령과 비교되지만 타락으로 말미암은 특수성과 두 번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추가적인 기능이 더하여졌던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으로 인해서 창 1:28의 문화명령과 율법은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공통적으로 창조 사역 후에 안식에 들어가기 위한 것이었다.

 

유비적인 관점에서 창 1:28의 문화명령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율법은 하나님의 6일간의 창조 사역의 속성을 가지고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알버트는 이러한 이유로 창 1:28을 창조명령이라고 말한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신자가 창조명령의 개념으로 창 1:28을 계속적으로 수행할 경우에 그리스도는 더 이상 안식의 주인이 되실 수 없으며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되시지도 않는다.

 

신자가 창1:28의 문화명령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여야한다는 것은 신자가 율법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여야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알버트는 그리스도인이 창조 사역으로서의 문화변혁운동을 지속적으로 수행함으로서 창조계의 회복에 참여하여야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고 약속하셨으며 종말론적 심판 때에 완성하실 것이다.

 

에덴에서 약속되었던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이라는 안식은 문화명령보다는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대위임령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알버트의 제자였던 리처드 미들턴Richard Middleton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타락의 문제가 해결되었기에 신자는 다시 발전적 창조명령을 수행하여야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바울의 서신서를 비롯하여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신자가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창조사역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여야한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곳은 없다.

 

 

이 땅에서의 문화물은 천국에서 보존되는가?

 

알버트는 하나님께서 손수 만드신 작품을 버리시지 않으신다고 말한다(84쪽).

 

또한 인간의 문화물도 하나님의 창조물에 포함되어있으며 인간의 문화와 사회제도를 포함한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구속에 포함된 회복될 영역으로 보고있다.

 

두 가지의 경우를 예로 들어 생각해보고자 한다.

 

인간의 의복은 인간 문화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의복의 편리성과 아름다움뿐만이 아니라 군인이나 의사와 같이 직위를 표현하기도한다.

 

하지만 인간의 의복은 타락과 더불어 시작되었기에 에덴으로의 회복을 주장하는 알버트의 논리라면 의복은 사라질 것이다.

 

사회제도의 경우는 법을 전제로한다.

 

법은 타락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타락의 개념이 없어지게되면 법도 없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섬기는 왕국으로서 이 땅에서의 민주주의와 공화국은 사라질 것이며 이 땅에서의 왕국조차도 존속보다는 유형적인 모습일 뿐 연속성과는 거리가 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성전이 참 성전되신 그리스도를 유형적으로 예표 할 뿐 외형적인 연속성이 사라지는 것과 같을 것이다.

 

또한 인간은 죽으면서 육체가 사라지며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같이 있던 영혼이 육체로 부활 할 때 이 전의 육체와의 연속성이 사라지는 것과 같을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이성이라는 생각의 한계가 있기에 부활하게 될 육체를 지금의 육체와 연계시켜서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에 대하여 메리데스 클라인은 “하나님 나라의 서막”에서 메타meta-와 메가mega-의 개념으로 불연속성을 설명한다.

 

클라인에 의하면 아담과 그의 자손은 “메가폴리스Megapolis”라고 부르는 것을 건설하였다.

 

이는 두 가지 헬라어로 구성되었는데, 메가는 커다란 혹은 거대한을 의미하며, 폴리스는 도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메가폴리스는 “거대한 도시”다.


두 번째 단계는 종말론적 극치의 단계eschatological consummation phase다.

 

클라인은 이 단계를 “메타폴리스Metapolis”라고 부른다.

 

메타라는 단어는 저편에 혹은 이후에를 의미meaning beyond or after하는 헬라어 전치사다.

 

클라인은 극치 이후의 문화를 “메타컬처”라고 말하며, 이 후자의 단어에서 “영화롭게 된 인류의 신성한 문화로서 인간의 문화를 넘어서는 메타컬처" 즉 “메타폴리스”라는 용어를 추론한다(Kingdom Prologue 99).

 

달리 말하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종말론적 도시the eschatological City of God에 해당되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우주적 성전the eschatological cosmic temple of God으로 성질이 변하거나 변형 후의 메가폴리스라는 것이다.

In other words, it’s Megapolis after it has been metamorphosed or transformed by the glory of God into the eschatological cosmic temple of God, which is also the eschatological City of God.

 

이는 요한계시록 21장에서 분명히 하는 바와 같이, 성전이면서 또한 도시both a temple and a city다.

클라인은 메타폴리스를 메가폴리스의 자연스러운 발전Metapolis as the natural development of Megapolis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클라인은 “하늘은 인간의 성취물이 아니며Heaven is not a human achievement, 인간 문화의 결과물도 아니다not the end-product of human culture"라고 말한다.(Kingdom Prologue 98)

 

달리 말하자면, 메타폴리스는 단순히 완성된 상태로서의 메가폴리스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메가폴리스는 현재적이지만 메타폴리스는 아직 도달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클라인은 메타폴리스가 시작되기 위해서 종말론적인 개입하심A special supernatural divine act of eschatological intervention이라는 특별한 초자연적인 신적 행하심으로서, 다음의 3가지가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고 말한다.(Kingdom Prologue 99)

 

첫째로는, 인간의 외적인 문화mankind’s external culture, 즉 건축물, 의상, 예술, 기술 그리고 기타 등등의 인간이 만든 문화적 인공물들이 건물의 비계와 같이 사라질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하늘과 땅을 가르는 장막the veil that separates heaven and earth이 제껴짐으로서,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이 거하는 하늘이 눈에 보이게끔 땅으로 침투될 것이다.

 

세 번째로는, 문화명령의 중심 산물인 인류 자체는 거룩한 몸으로 거룩해진 피조물을 즐기도록 변형될 것입니다.

 

이를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용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아담의 가족이 하나님의 우주적 도시인 성전God’s cosmic city-temple으로 함께 만들어진 “산돌들living stones"이 될 것이다.


메가폴리스는, 점진적 발전이 아니라 영광이라는 초자연적 행동a supernatural act of glorification에 의하여 메타 폴리스로 변형될 것이다.

 

또한 연속성은 하나님께서 신적인 능력과 영광으로 개입하셔서 단절될 것이며 현재의 피조물이 무로부터 존재하게 된 것처럼 새로운 창조도 “현현의 섬광epiphanic flash”으로부터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Kingdom Prologue 101).

 

클라인은 결론적으로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메타폴리스는 단순히 확대된 메가폴리스가 아니라 마지막되신 성령의 손에 종말론적으로 본질의 변화를 거친 메가폴리스다”(Kingdom Prologue 100).

 

 

새 하늘과 새 땅은 에덴의 회복인가?

 

알버트는 구속이 창조 세계의 회복이며 에덴의 상태로의 회복이라고 말한다.(105)

 

하지만 에덴은 안식의 장소가 아니었으며 에덴은 가나안과 마찬가지로 사단이 공존하였던 장소였다.(겔28:13.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창 1:28에서 다스려야 할 대상으로서의 동물(חַי  chay)에는 창 3:1의 간교한 들징승(חַי  chay)도 포함되어있었으며 이곳의 동산 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산(Harmagedon)은 사단이 거하는 장소이기도하였다(Merideth Kline, God Heaven Harmagedon 45)

 

이와는 달리 진정 회복될 완전한 안식처로서의 새 하늘과 새 땅으로서의 새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거룩한 장소로서 생명 나무가 있고 생명의 강이 흐르는 동산이다.(계22:1)

 

이는 아담이 있었던 에덴과 구별되는 완전한 안식이 장소다.

 

에덴이 안식을 준비하였던 장소였으며, 새 하늘과 새 땅은 완전한 안식의 장소다.

 

에덴에서의 창 1:28의 명령은 최종적 안식을 준비하는 명령이다.

 

그리스도인의 창조명령 수행은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안식을 위한 율법 아래 놓이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가나안을 완전히 정복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려야한다.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의 긴장 관계와 같이 이미 임한 안식 안에서 아직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이 성취될 날을 기다리면서 안식을 누려야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라고 안식을 선포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누리는 것은 미완성 가운데 있었던 에덴에서의 삶과는 구별되는 삶일 것이다.

 

 

전가교리와 구속의 범위


알버트는 구속의 범위를 타락의 범위와 같은 넓이로 볼 수 있으며(119쪽) 회복은 인간의 문화와 사회제도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의 회복이 되어야한다고 말한다.

 

개혁주의 전가교리에서 흔히들 말하는 3중 전가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아담의 죄가 아담의 후손들에게 전가되었다.

 

두 번째로, 택한 자들의 죄가 그리스도께 전가되었다.

 

세 번째로,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되었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두 번째 경우에 타락의 범위에 있는 인간의 문화와 사회 제도까지 모든 죄가 그리스도께 전가된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모든 이들의 죄가 그리스도께 전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자들의 죄만이 그리스도께 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구속의 범위는 택한 자들에게만 한정된다.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Covenant of Redemption 또한 창세 전 택함받은 이들로 한정이 된다.

 

개혁주의는 모든 이들의 구속을 말하지는 않는다.

 

더 나아가 모든 피조 세계의 구속을 말하지는 않는다.

 

알버트의 논리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피조 세계를 위한 속죄 사역이 된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것과는 관계없이 모든 이들이 구속을 받은 것인데 이러한 논리는 개혁파보다는 항론파의 논리에 가까운 것이다.

 

하나님은 손수 만드신 작품을 버리시지 않으신다(84쪽)는 알버트의 논리는 알버트의 이야기 일 뿐이다.

 

스룹바벨 성전은 하나님께서 직정 명하신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파괴될 것을 명하셨다.

 

실체가 나타나면 모형과 그림자는 폐기하게 되어있다.

 

성전은 참 성전되신 실체로서의 그리스도가 3일 만에 지으셨고 모형과 그림자로서의 이 전의 것은 파괴될 것을 명하셨다.

 

모형과 그림자로서의 역사적 이스라엘은 참 이스라엘인 신약의 교회로 말미암아 폐기된 것이다.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은 오직 세대주의자들만의 관점일 뿐이다.

 

알버트가 회복될 것을 말하는 인간의 문화와 사회 제도도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일 뿐이다.

 

모형과 그림자는 실체가 나타나면 폐기하게되어있기에, 인간의 문화와 사회제도를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창조물로 규정하고서, 하나님은 손수 만드신 작품을 버리시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비약적인 논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한 가지 예로서 엔디 크라우칭은 “컬처 메이킹(ivp, 226)”에서 “아이 팟, 미니쿠퍼, 불고기등이 정화와 구속의 단계를 거쳐서 새로워 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SC) 교수인 반 드루넨David VanDrunen은 우리의 존재만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간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이 땅의 제도와 활동은 급작스럽게 그리고 철저히 종결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반 드루넨,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34쪽)



최후 심판과 지옥에 대하여

 

알버트 월터스는 “창조 타락 구속"에서 회복만을 이야기하며 지옥에 대한 언급은 전혀없다.

 

구속의 범위를 타락의 범위와 같은 넓이로 보는 것은(119쪽) 구속받지 않을 곳이 없다는 것이고 이는 지옥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천국과 지옥은 대립적인 개념이며 천국을 이해하기 어려운 만큼 지옥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없어질 것에 대하여도 말하고 있으며(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막 13:31) 지옥에 대하여도 말하고 있다.(벧후2:4)

 

알버트는 “창조 타락 구속"에서 성과 속을 나누는 이원론을 배제하고 있으며 이 피조계 모두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거룩하여졌기에 속한 것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132쪽)

 

최후의 종말론적 심판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지 않고는 의롭게 될 수 있는 것이 없다.

 

창세 전에 계획하시고 성육신으로 실행되어진 그리스도의 의는 신자의 믿음에 의해서만 최종적 효력을 발휘한다.

 

최종적 구속은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서 시작된 것이며 구속 언약은 오직 택자를 위한 것이다.

 

이는 최후의 심판에서 택자만이 구속의 대상이 됨을 의미한다.


택자 이외는 어느 누구도, 어느 피조물과 피조 세계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될 수가 없다.

 

 

 

구조와 방향

1. 문화물의 구조는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선하다.(144쪽)

2. 문화물의 본래의 구조는 선하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방향이 왜곡되었다.(145쪽)


3. 문화물의 선한 구조는 천국에서 보존된다.(101쪽)


4. 그리스도인은 선한 구조를 회복하고 방향을 선하게 바꾸어야한다.(148쪽)

알버트는 문화물의 구조는 하나님의 창조 영역으로서 선한데 반하여 방향이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알버트가 문화물의 구조를 하나님의 창조 영역으로 보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섭리 사역을 동일시한데서 기인한다.

 

알버트는 “‘만들다To make’와 ‘다스린다to rule’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어휘록God's vocabulary에서는 모두 같은 말a piece이다(42쪽)”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는 과정 뿐만이 아니라 섭리 가운데 다스리시는 현재의 과정을 모두 창조에 포함시킨다.

 

이는 알버트가 창 1:28을 창조명령이라고 부르는 근거가 된다.

 

알버트는 창 1:28을 아담에게 위임한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근거로 보면서, 이러한 명령에 근거해서, 피조된 인간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수행하여야한다고 말한다.

 

알버트는 창조라는 말을 ‘창조주의 주권적인 행위와 창조 질서의 상호 관계the correlation of the sovereign activity of the Creator and the created order”라고 정의한다(43쪽).

 

알버트의 관점에서보면 현재 세계는 인간에 의해서 창조가 현재진행되고있는 과정이다.

 

알버트는, 에덴에서 아담이 실패한 창 1:28의 창조명령을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완료하신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알버트에게 창 1:28은 현재도 우리에게 적용되어지는 창조명령으로서,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진행하는 창조행위의 근거가 된다.

 

알버트에게 창 1:28은 문화변혁 운동의 근거가되는 창조명령으로서, 문화변혁운동의 결과물들은 하나님께서 폐기하지 않으시고 천국에서 보존할 대상으로 보고있다.

 

문화변혁에 대한 구체적인 실행 방법으로 알버트는 구조와 방향의 개념을 도입한다.


알버트가 말하는 구조와 방향에 대하여 몇 가지 주제를 가지고 논해보고자한다.

 

 

구조와 방향이라는 전제는 올바른가?

 

전제가 잘못되면 이 후의 논술은 당위성을 상실하게된다.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의 전제는 에덴에 대한 해석과 아담의 역할에 대한 해석에서 보편성이 결여되어있다.

 

알버트의 기독교 세계관은 문화물이라는 주제에 세계관을 제한시킨다.

 

알버트가 말하는 창조물로서의 문화물은 창세기 1장 28절에서 말하는 “경작하다Cultuvate”라는 말에서 추론한 “문화Culture”에 제한되어있다.

 

하지만 에덴을 하나님의 성전으로보면서 아담을 오실 예수님의 표상으로서, 그리고 아담의 직분을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 보게될 때에는 창 1:28의 명령이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

 

에덴은 아담에게 경작하라고 주신 곳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주신 곳이었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임무는 에덴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전으로 관리하는 것이었다.

 

아담에게는 이러한 직책을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직분을 위임받았다.

 

아담은 선지자로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아야 할 것과 창 1:28의 창조명령을 수행해야 할 것을 선포하는 역할을 하였다.

 

아담은 제사장으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피조물과 에덴 동산과 더불어 자신을 하나님께 거룩한 제물로 드려야만 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왕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창 1:28의 지배명령을 수행함으로서 에덴에서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여야만 했다.

 

후에 이스라엘 성전과 요한계시록에서의 성전은, 에덴에서의 성전으로서의 특징들이 반복하여 나타남으로서, 상실된 성전의 회복이 어떻게 성취되는지 보여주고있다.

 

알버트가 말하는 문화물의 구조라는 전제에는 에덴을 성전으로 보고 있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아담의 역할도 오실 그리스도의 표상이 아닌, 단순한 문화의 경작자로만 묘사할 뿐이다.

 

아담이 단지 문화물을 위한 창조 사역자였다면,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는 단지 이 땅에서 문화물의 완성을 위한 창조 사역자로 그려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가정은 이상하게도 톰 라이트가 묘사하는 그리스도의 역할과 상당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에,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이 2005년 개정판에서 톰 라이트의 새관점 구도로 자연스럽게 수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



타락 이전의 구조와 타락 이후의 구조

 

알버트의 주장은 “문화물의 구조는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선하다(144쪽)”는 것을 전제로한다.

알버트의 논리적 변증의 전제는, 인간의 삶의 영역에서의 문화는 인간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창조 영역에 속하여 있는 창조물로서, 그 자체의 구조는 선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알버트가 말하는 문화물의 진정한 구조는, 삼위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구속 언약을 맺으시고서 이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2차적인 구조일 뿐이지 성경의 주요 주제는 아니다.

 

비록 2차적인 것이지만 알버트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이를 살펴보고자한다.

 

알버트가 말하는 선한 구조를 가진 문화물 가운데에서는 (의복, 성전..) 구속을 위한 임시적인 것들도 포함되어있다.

 

알버트가 말하는 구조물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보존될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이 “가시적 세계인 땅과 비가시적 세계인 하늘의 연합”이라는 클라인의 주장대로라면 이 땅에서의 구조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연속될 수가 없다.

 

알버트가 말하는 구조로서의 의복의 경우도 타락과 더불어 생긴 수치심을 가리기 위한 가시적인 목적도 있지만 의의 옷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비가시적인 기능도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묘사되고있는 옷은 우리의 가시적인 관점에서의 옷이 아니라 거룩함과 성결이라는 비가시적 상징으로 묘사된다고도 볼 수 있다.

 

아담에게 입히신 가죽 옷은 죄로 인한 수치심을 가리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서 후에 어린 양의 피 흘리심을 통해서 수치가 완전히 가리워졌음을 볼 수 있다.

 

벌거벗음이 수치로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상실된 인간의 실상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더 이상 가릴만한 수치가 없음으로 인해서, 수치를 가리는 옷은 더 이상 필요가 없을 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포장하기 위한 인위적인 가식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솔로몬 성전을 뒤 덮은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은 이 땅에서 드러난 수치를 가리우는 하나님의 영광으로서 성령 하나님의 창조 사역인 것이다.



성령이 솔로몬 성전을 뒤덮으신 것과같이, 성도는 가시적인 옷이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해서 비가시적인 영광의 옷을 입고있는 것이고, 이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요한계시록 3:18에서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여기서 금과 흰 옷과 안약을 상징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요한 계시록에서 자주 언급되는 “흰 옷”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의 옷을 입은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마가복음 16: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요한복음 20: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사도행전 1: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여기서 천사들이 입은 흰옷은 인간의 눈에는 흰 옷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영적인 존재로서 하늘의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도 눈에 보이는 것과 같은 흰 옷을 입고 있는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알버트가 하나님의 창조물에 속하였다고 말하는 사회 제도 가운데에서는 타락으로 인하여 끊겨진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대체하는 사람들의 관습 가운데 형성된 것들도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공동체적 사회 구조의 원형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에서 유래되었으며, 에덴에서 아담의 3중직을 통한 우주적 성전으로서의 공동체적 확장을 계획되었었다.

 

아담의 범죄 이후에 형성된 사회 구조로서의  공동체는 방향의 왜곡이 아니라 원형의 상실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인간 사회의 공동체성은 하나님을 배제하고자하는 인간 중심의 구조를 가지고있다.

 

그나마 인간 사회에 남아있는 공동체성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의 모형과 그림자로 남아있을 뿐 구조 자체는 변형되고 왜곡되었을 뿐이다.

 

심판날에 하늘에서 내려올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인간의 성에 대한 구조물의 차원보다는 성전으로서의 에덴공동체의 완성 형태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도시로서의 최초의 성은 에덴이라는 하나님의 성전의 구조로부터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방향의 문제

 

알버트는 “문화물의 본래의 구조는 선하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방향이 왜곡되었다(145쪽)”고 말한다.



알버트가 말하는 구조와 방향에 대한 문제의 해결책은 “은혜가 자연을 회복한다”는 주제로 귀결된다.

 

알버트는 자연의 회복이라는 주제를 위해서 성화의 개념을 도입한다.

 

알버트가 말하는 성화는 “창조를 죄로부터 정화시키는 과정”이다.

 

알버트는 정화의 대상에 모든 피조물, 즉 인간의 피조된 삶으로서의 문화물을 포함시킴으로서, 성과 석을 나누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질타한다.

 

알버트는 “정치적 혁명”을 포함하여 모든 영역에서 세속적이고 부정한 것은 없다고 말하며, 그리스도인이 개혁하여야 할 대상에 문화적, 사회적 기성 체제를 포함한 역사적 상황 전체를 포함시킨다.

 

알버트는 가족, 학교, 국가, 교회, 사업체등 사회적 제도 모두에 창조적 구조가 있지만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방향적 왜곡에 있기에 이를 개혁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모든 삶의 영역에서 창조적 회복을 위한 방향성에 관심을 갖는 것을 옳은 일이다.

 

알버트가 말하는 성과 속의 이원론적 개념에 대한 비판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단순한 방향의 개선이나 창조적 회복보다는 좀 더 구체적이고,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문제는 방향에서부터 시작되었다기 보다는 구조 자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또한 방향 개선의 문제이기 이전에 목표 자체가 상실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와 아담에게 위임된 창조 세계의 목적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의 확장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는 톰 라이트가 말하는 것과 같이 (알버트는 2005년 개정판을 톰 라이트의 하나님 나라에 기반을 둔 세계관적 관점으로 수정하였다) 역사적 이스라엘의 확장으로서의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의 의를 힘입어 삼위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된 자들로 구성된 하나님 나라를 전제로 하여야한다.

 

알버트가 말하는 구조와 방향은 역사적 이스라엘이라는 유형학적 모형으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바와같이) 역사적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로서 적용시키고 있다.

 

알버트는, 역사적 이스라엘이 가지고있던 문제는, 사회제도로서의 구조보다는, 백성들의 삶의 방향성에 있었다고 보고있기 때문에, 이를 오늘날의 사회 구조에 적용시키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 이스라엘은 단지 그리스도가 완성시킬 안식이 성취된 하나님 나라의  유형학적 모형일 뿐이다.

 

역사적 이스라엘은, 성전으로서의 에덴을 그리스도가 회복시키고 성취시킬 안식의 개념으로서의 하나님 나라로 이어주는, 교사로서의 역할을 할 뿐이다.

 

창조 세계의 방향성에 대한 답은 에덴의 방향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알버트가 말하는 창조명령으로서의 창 1:28은 안식에 초점이 맞추어졌다기 보다는 발전적 완성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알버트가 말하는 방향성은 사회 제도 구조를 새 하늘과 새 땅에 적합한 형태로 바꾸어나가는 발전적 완성에 있다.

 

하지만 에덴에서 아담에게 명령된 창 1:28은 발전의 개념보다는 능동적 순종을 통한 성전으로서의 에덴 공동체에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되는 것이다.

 

창조명령의 실현을 통한 에덴에서의 방향성은 안식을 향하여있었다.

 

하나님께서 6일간의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제 7일에 안식을 취하신 것과 같이, 창 1:28의 창조명령을 수행한 아담에게는 종말론적인 축복과 영생이라는 안식이 예비되어있었다.

 

아담은, 수동적 순종을 요구하는 선악과 금령 자체만 가지고는, 종말론적인 안식에 이를 수가 없었다.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능동적 순종으로서의 창조명령은 아담의 불순종과 더불어 상실되었다.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 이루어나아가는 문화의 방향성은 타락으로 인해서 방향이 왜곡된 것이 아니라 안식이라는 목표 자체가 상실된 것이다.

 

목표가 상실된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 이루어나아가는 문화의 방향성은 하나님 의존적인 방향이 아닌 하나님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구속 사역을 위해 주시는 일반은총을 왜곡시켜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알버트가 말하는 구조의 방향성의 문제는 구조라는 틀에 제한되어있기에, 신자로서 아담의 3중직을 이어받은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세계관에 대한 언급이 상실되어있다.

 

창 1:28의 명령은 본래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분을 가진 아담에게 주어졌던 것이지만, 아담은 불순종과 에덴에서 쫓겨났기에, 아담의 후손은 더 이상 창조명령을 실행 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창조명령은 종말론적인 축복과 영생을 위해 요구 되었던 능동적 순종으로서,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에게는 더 이상 실행이 불가능한 명령이다.

 

율법은 에덴에서 요구되었던 명령, 즉 능동적 순종이 요구되는 창조명령과 수동적 순종이 요구되는 선악과 금령이 재현republication된 것으로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율법의 저주를 십자가에서 감당하신 수동적 순종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에덴에서의 목표인 종말론적인 축복과 영생이라는 안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통해서 완성되었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안식의 주인이되시며, 신자에게 안식을 주신 것이다.

 

에덴에서의 종말론적 삶의 목표인 안식이 신자의 삶 가운데 약속되었기에,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창조명령을 실행하기보다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안식을 누리면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살아가야한다.

 

성화는 성취된 안식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알버트는 성화를 “창조를 죄로부터 정화시키는 과정”으로 이해하면서 모든 창조물의 영역에 포함시키고 있지만 이는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전제로 한 개념이다.


만약에 “문화물의 천국보존”이라는 개념이 앞에서 설명한 클라인의 “Meta-와 Mega-의 접목”으로서의 새 하늘과 새 땅의 개념을 적용시킨다면, 이 또한 잘못된 전제로 인한 또 하나의 오류를 낳게되는 것이다.

 

 

일반은혜의 구조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에는 은혜의 개념이 필요하지 읺았다.

 

창 1:28의 창조명령은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더 이상 실행이 불가능하기에, 의미를 상실하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도 구속을 염두에둔 은혜를 베푸심으로서 최소한도의 한시적인 구조로서의 문화를 허락하셨는데, 이는 전적으로 구속이라는 특별은혜를 위한 일반은혜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일반은혜의 구조에 속하여있는 첫 번째 문화물은 의상으로서, 하나님께서 만들어 입히신 가족 옷이다.

 

옷, 즉 의상은 모든 문화 구조의 기초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의상은 사람들이 맡겨진  영역에서 감당하여야할 사역을 특징적으로 나타낸다.

 

아담에게 입혀진 가죽 옷은 아담이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표시함과 동시에 아담이 구속의 대상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한 아담에게 입혀진 가죽 옷은 일반은혜의 영역에 속하여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인간은 수치가 드러날 수밖에 없음 존재임을 보여준다.

 

이는 타락한 아담의 후손에게 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사실로서, 인간이 처해있는 모든 영역이 일반은혜의 영역임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구속의 필요성을 인식시켜 주는 것이다.

 

이는 또한 일반은혜의 영역에 속하여있는 율법과 자연법의 궁극적인 목적이 구속이라는 특별은혜로 귀속되어야만 하는 것을 보여준다.

 

의상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이스라엘에서 구체화된다.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에게 입혀졌던 의상은, 성전으로서의 에덴을 상징하는 장식물들이 달려있었으며, 이는 대제사장의 직책과 역할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는 일반은혜가 구속이라는 특별은혜로 귀결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에덴에서는 의상이 없어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해서 성전에서의 직책을 감당 할 수 있었지만,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들은 의상의 도움으로 수치를 가리면서, 궁극적으로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입히신 가죽 옷은 에덴에서의 실패를 만회 할 수 있는 희망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내는 표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담의 후손들이 처한 위치에서, 의상으로 상징되는 각자의 위치에서 하는 일은, 에덴에서의 상실되었던 목표에 대한 새로운 희망의 상징이 될 수 있다.

 

낙원을 잃어버린 인간의 삶의 구조와 방향은 아담이 입었던 가죽 옷과 같이 에덴에서의  잃어버린 목표를 기억 할 때 구조와 방향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가능한 것이다.

 

구조와 방향이라는 관점에서 문화를 바라본다면, 일반은혜의 구조가 특별은혜라는 방향을 향하여 맞추어진다면 알버트의 세계관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담은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경험해야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은 바로 죽음을 의미했다.

 

어떤 이들은 아담이 범죄한 날 바로 죽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담은 범죄하고서 바로 에덴에서 쫓겨남으로서 영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을 경험했다.

 

모든 인간은 이미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태어난다.

 

태어나는 인간은 비록 육적으로는 살아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어있는 자이다.

 

영적으로 죽은 자는 스스로 구원받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부터만 올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 약속하신 구원이라는 특별은혜를 위해서 일반은혜를 베푸신다.

 

모든 삶의 구조는 일반은혜의 영역에 속하여있다.

 

일반은혜는 특별은혜로 연결되지 않고는 생명에 이를 수가 없다.

 

일반은혜는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에게 임한 은혜로서 하나님의 보편적 선물이다.

 

알버트는 구조라는 틀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의 창조물이라고 본다.

 

알버트는 인간에게 위임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지금 이 시각에도 지속적으로 진행된다고 말한다.

 

알버트는 인간의 삶의 구조가 이 땅에서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지속될 것을 말하고있다.

 

하지만 일반은혜의 구조는 죽은 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한시적으로 허용된 은혜의 구조로서, 구속이 완성되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는 더 이상 은혜의 구조가 필요가 없게 된다.

 

인간이 행하는 구조의 발전 방향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구속으로의 방향성을 가질 수 있다.

 

일반은혜 가운데 세워진 구조들은 궁극적으로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들이다.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의 실행의 주체는 전적으로 창조 사역을 감당하시는 성령이며, 인간이 주체가 될 수가 없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알버트는 구조의 방향성을 인간이 성취할 영역에서 보고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 보는 인간의 문화물의 천국보존은 다분히 신인협력적인 요소가 있으며, 인간의 공로가 천국에서 보존되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이 만든 문화라는 구조물이 천국에서 보존되도록 인간이 노력하는 것은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이라는  복음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하나님의 일반은총으로 세워진 문화의 구조는 사람의 방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향성이 되어야하며, 인간은 다만 여기에 순종이라는 개념으로 동참하여야할 것이다.



발전의 방향성과 절망의 과정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디모데전서 1장 9-10절)”

 

알버트가 제시하는 문화의 방향성은 주어진 환경에서 일관성있는 발전을 거치면서 진보적으로 나아져야 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역사적 이스라엘의 결과물로서 볼 수 있는 참된 이스라엘은 일관성있는 발전의 결과물이 아니라, 유비적 모형의 붕괴와 더불어 나타난 원형적 실체로서의 결과물이었다.

 

역사적 이스라엘에 제시된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이면서 동시에 절망이었다.

 

율법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사사시대에는 각자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기에, 입다와 같이 인신제사를 드리는 이방종교의 열심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라고 착각하는 우를 범하기도 하였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 앞에 섰을 때 이스라엘은 희망이 있는 듯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려고 했지만, 오히려 율법으로 말미암아 정죄를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율법은 죄인들로 하여금 의롭게 살 것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내면의 죄를 고발한다.

 

자연법(알버트는 45쪽에서, 자연법을 자연법칙의 범주에 넣지만, 일반적인 자연법은 자연법칙과 구분되는 규범까지도 포함한다)도 마찬가지로 사람들로 하여금 의롭게 살아야 할 것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이 의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며, 타락의 속도를 늦추어 줄 뿐이다.

 

알버트가 말하는 창조명령은 타락하기 이전에 에덴에서 요구 되었던 법이다.

 

창조명령은 타락 이후에 노아 언약을 통하여 일반은총의 언약으로 대체된다.

 

창세기 9장 1절(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에서는 타락 이전의 창조명령의 언어를 거의 그대로 반복하고있지만 한가지 중요한 차이는 “정복하라”는 단어가 반복되고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땅을 정복하는 것이 타락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업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에게 옮겨졌다.

 

일반은총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자연법은, 창조명령과 같이 단순한 발전을 요구하는 것 아니라,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복잡성이 더해짐으로 인해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한 죄에 대한 고발이 추가되어질 수 밖에 없다.

 

율법과 자연법의 본질적 기능은, 죄인들로 하여금 은혜의 자리에 참여하게끔 해주면서 동시에 죄를 고발하는 것이다.

 

죄인들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죄가 드러나지 않고는 은혜의 자리에 참여할 수가 없다.

 

비록 율법과 자연법을 통해서 드러나는 죄의 결과물들은 부정적 상황일 수밖에 없지만, 부정적 상황을 통하지 않고는 죄인들을 은혜의 자리로 인도 할 수가 없다.

 

부정적 상황들은, 창세 전 삼위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목표인, 구속 언약이라는 은혜에 참여하는 통로가 된다.

 

인간이 해야 할 우선된 과제는, 문화물의 구조와 방향을 개선시켜서 문화물을 천국에 보존시키는 것보다는, 인간 자신들이 율법과 자연법을 통해서 죄가 고발됨으로서,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드려짐으로서, 자신들이 천국에서 보존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죄의 결과물들인 부정적 상황과 함께 고발되어져야 한다.

 

창 1:28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명령의 유형적 재현typological republication인, 일반은총으로서의 율법과 자연법으로 인하여, 문화의 발전보다는 잘못된 죄성으로 인하여 인생이 고발될 때, 진정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역사적 이스라엘에서 볼 수 있는 참된 문화의 방향은 지상적 나라의 완성이 아니라,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이 고발되어지는 것이다.

 

역사적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선 보편적 인간의 실상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있다.

 

진정한 문화 구조의 방향은 고발되어지는 죄성의 결과물들인 부정적 상황을 통해서 제시될 수 있는 것이다.

 

 

 

 

한시적 구조

 

알버트는, 문화물의 구조는 물론 방향이 제대로 갖추어진 문화물은,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보존된다는 영속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인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보존될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해서, 문화구조의 방향을 바꿀 것을 제안한다.

 

알버트는 문화의 구조를 창조 범주에 넣음으로서, 하나님의 창조물이 문화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폐기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그리스도인이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해서 문화변혁에 전념할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인간의 문화 활동의 결과물이 하나님의 섭리에 속한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것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찾기도 힘들고 성경의 주요 관심사도 아니다.

 

성경을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문화의 구조는 구속을 위한 한시적인 것이며, 천국에서의 영속을 주장할 만한 근거가 분명하지가 않다.

 

에덴에서 아담에게 창 1:28을 통하여 요구되었던 창조명령은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이라는 안식을 향한 과정 가운데 한시적으로 주어졌던 것이다.

 

메러디스 클라인에 의하면 창 1:1의 창조된 천지는 하나님과 천사들이 거주하는 비가시적 공간인 상위 구조upper-rigister로서의 하늘-성전과, 아담을 비롯한 피조물들이 거주하는 가시적 공간이 될 하위 구조lower-rigister로서의 땅이라는 두 가지 구조로 되어있었다고 말한다. (메러디스 클라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 27쪽)

 

영화가 일어나는 종말에는 하늘은 더 이상 비가시적 공간이 아니며, 우주의 비가시적 상위 구조와 땅의 가시적 하위 구조 사이의 간격이 없어지게된다.

 

이 때 가시적 세계의 종말론적 완성은 변화와 새로움을 가져오게된다.

 

클라인은, 가시적 공간과 비가시적 공간의 간격이 사라진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의 지혜가 영광-차원에 이르게 될 때, 땅은 영화된 인간에게 하늘화 될 것이라고 말한다. (43쪽)

 

이 새로운 차원의 시간과 공간에서 현재 보이는 하늘과 땅이 연기와 같이 사라지면서 소멸될 것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차원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차원이 아니며, 첫 창조의 소멸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는 마치 노아 홍수 이전과 홍수 이후의 연속성과 같이 첫 창조가 새롭게 완성된 우주로 변형될 것을 말한다.(46쪽)

 

완성된 우주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거주하는 장막이며, 이 장막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예루살렘으로서, 땅이 하늘화 되는 것이다(53쪽).

 

여기서 중요한 것은, 땅의 것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 땅으로 내려와 땅과 하늘의 연합이 이루어지며, 땅이 하늘화 되는 것이다.

 

문화는, 노아 홍수로 인하여 땅의 것들이 모두 멸하여지는 것과 같이, 하늘화 된 땅에서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창 1:28절의 창조명령을 통해서 이루어질 에덴에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늘과 땅의 완전한 연합이었지만, 아담의 범죄 이후의 인간문화는 에덴 바깥에 있는 상실된 문화이기에, 더 이상 하늘과의 연합이 불가능한 구조를 갖게된 것이다.

 

창조명령과 선악과 금령은 하늘과 땅이 연합되기까지의 한시적인 것이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분리된 하늘과 땅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함께 연합의 과정이 시작되었지만, 오직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들만이 종말론적인 완전한 연합에 참여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연합의 과정으로서, 이 과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시적인 것이다.

 

구속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일어나며, 구속된 존재만 연합된 새 하늘과 새 땅에 남겨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가꾸는 문화물이 과연 구속의 대상이며, 마지막 날에 비가시적 구조로서의 상위 구조에 참여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



 

문화명령

 

 

문화명령은 신칼빈주의의 행동의 근거로서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문화명령은 창조명령이다. 

 

모든 피조계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인하여 본래의 선한 구조로 회복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땅의 관리자로 재임용 된 것이다.(117쪽)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페러다임을 바꾸어야만 하고 창조 명령의 차원에서 문화 변혁 운동에 참여하여야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다시 시작된 문화변혁운동은 사람이 경영하는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2. 창조 사역은 발전의 사역을 통하여 계속 진행 되어야한다.(78쪽) 

 

문화명령은 인간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창조사역이기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더불어 인간의 타락으로 왜곡된 문화의 방향을 원래의 창조된 구조를 회복하는 방향으로 바꿈으로서 하나님께서 원래 아담을 통하여 목적하셨던 인간의 문명화를 통한 문화의 발전 계획을 계속 진행 하여야한다.(81쪽)

 

3.문화물을 천국에서 보존한다. 

 

하나님께서는 손수 만드신 작품을 버리시지 않으시며 문화 변혁운동을 통하여 이루어질 문화적 산물은 주님께서 재림 하실 때 폐기하지 않으시고 천국에서 보존될 것이다.(84쪽)

문화물의 천국보존과 문화명령은 긴밀한 관계에 있고 많은 토론을 요하는 항목이지만 일단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항목을 통해 논해 보고자한다.

 

 

문화 명령

 

인간은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하는 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인생의 삶 가운데 가장 비참한 한 가지는 의미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생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생은 비록 타락으로 말미암아 왜곡되고 일그러졌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기에 하나님께서는 부여한 삶의 의미를 찾아가려고한다.

 

악한 이들은 악한대로 자신의 삶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여야 한다.

 

비록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삶의 주체가 아니라고하더라도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성도는 성경에 비추어 삶의 방식이 주어지고 결정되어야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 하느냐에 따라서 자신이 주체가 되어 살아가느냐, 아니면 내주하시는 성령이 주체가 되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느냐가 결정이 된다.

 

창세기 1~3장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분명히 나타내고있다.

 

창세기 1~3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세계관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특히 창세기 1장 28절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문화 명령, 창조 명령, 통치 명령, 지배 명령등으로 불리워진다.

 

알버트 월터스는 창세기 1장 28절을 창조 명령, 혹은 문화 명령이라고 부른다.

 

알버트는 문화명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의미를 부여한다.

 

“문화명령은 인간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기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더불어 인간의 타락으로 왜곡된 문화의 방향을 원래의 창조된 구조를 회복하는 방향으로 바꿈으로서 하나님께서 원래 아담을 통하여 목적하셨던 인간의 문명화를 통한 문화의 발전 계획을 계속 진행 하여야한다.”(알버트 월터스, 창조 타락 구속, 81, 이하는 쪽수만 표시)

 

알버트는 인간이 수행한 문화명령의 결과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부여한다.

 

“하나님께서는 손수 만드신 작품을 버리시지 않으시며 문화 변혁운동을 통하여 이루어질 문화적 산물은 주님께서 재림 하실 때 폐기하지 않으시고 천국에서 보존될 것이다.”(84)

 

알버트는 문화명령을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감당하여야 할 중요한 사명으로 의미를 부여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점검해보아야할 논점들이 있다.

 

알버트는 에덴의 속성과 에덴에서의 아담의 역할에 대하여 단지 농사를 지으면서 육체적 노동을 하는 곳으로 단순화시킨다.

 

이에 반하여 최근에 몇몇 신학자들, 특히 존 페스코J.V. Fesko나  그레고리 빌G. K. Beale등은 에덴에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실행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한다.

 

이들은 처음 아담이,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3중직, 즉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역할을 에덴에서 수행함으로서,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고 본다.

 

성전으로서의 에덴이 가나안과 이스라엘의 성전을 통하여 유비적으로 재현됨으로서, 에덴에서 요구되었던 문화명령을, 실패한 아담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다는 개념을 적용할 때 알버트의 문화명령 개념에는 많은 수정이 요구될 수 밖에 없다.

 

아담의 3중직을 고려할 때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은 문화명령보다는 통치명령, 혹은 지배명령이라는 수식어가 붙게된다.

 

알버트가 말하는 창조명령으로서의  문화명령에 대해서 몇 가지를 더 생각해보기로하자.



창조명령

 

알버트는 문화명령이라는 용어보다는 창조명령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한다.

 

알버트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여섯째 날에 사람의 창조와 함께 완결 되었으며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셨지만, 이것으로 창조 과정, 즉 창조의 발전 과정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직접적인 창조 사역에서는 물러나셨지만, 대신에 자신의 형상을 땅 위에 세우시고 그에게 그 일을 계속 할 것을 명령하셨다.

 

이제 사람들은 창조 사역으로서의 발전 사역을 계속해야만 하며, 이 발전 사역에는 사회적이고 문화적 발전인 문명의 발전이 포함되어있다. (78쪽)

 

알버트는, 하나님의 창조가 6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의 창조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가야하는 사명을 부여 받았으며, 창 1:28의 문화명령을 근거로 하는 문명의 발전을 위한 인간들의 문화 활동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속하여있다고 말한다.

 

인간이 행하는 문화활동이 하나님의 창조 행위라는 의미에서, 알버트는 창세기 1장 28절을 창조명령이라고 부른다.

 

알버트는, 그리스도인은 창조적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의 땅의 관리자로 재임용 되었기에, 그리스도인은 모든 피조계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인하여 본래의 선한 구조로 회복되도록 하여야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대하여 원래 가지고 있던 페러다임을 바꾸어야만 하며,  창조명령의 차원에서 문화변혁운동에 참여하여야한다고 말한다.

 

알버트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다시 시작된 문화변혁운동은 사람이 경영하는 하나님의 창조 영역에 속하여있는 것으로 본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은, 대체적으로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을,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창조하신 후에 이 땅을 다스리라고 아담에게 주어졌던 창조 사역의 연장 선상에서 보고있으며,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제대로 완성 될 수 없었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서 회복된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은 아담이 못 다 이룬 창조적 문화 명령을 이어받아 문화 활동을 창조 사역의 차원에서 계속적으로 수행해 나아감으로서, 아담에게 맡겨졌던 원래의 사명대로 문화를 회복하여야 할 것을 말한다.( Engaging God’s World, Cornelius Plantinga Jr. p32)

 

즉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다시 시작함으로서, 길들여지지 않은 문화적 사회적 환경을 원래의 선한 구조로 회복되도록, 문화명령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여야한다고 말한다


알버트는, 그리스도인이 수행하는 문화 명령에 의한 문화 변혁운동은, 창조적 차원에서,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수행해야할 명령으로 보고있다.(78)

 

이렇게 문화명령의 실행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문화물은 궁극적으로 천국에서 보존될 인간의 창조물이 되는 것이며, 이는 창조 사역이 마지막에 최종적으로 완성되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어지는 전체 그림의 완성을 위한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창조명령의 실행에 의한 문화물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예수님 재림 후에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이, 현재의 이 땅이 폐기되는 새로운 땅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가 본래의 선한 창조 상태로 회복 되어야만 한다.(116쪽)

 

즉 이 땅에서 폐기되어지는 것은 없기에, 우리의 할 일은 다만 문화 구조의 왜곡된 방향을 바로 잡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마이클 고힌이 추구하는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의 문화변혁운동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차원에서 행해지고있는 것이다.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 모든 피조계가 구속받았기에, 이 땅에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아담이 제대로 실행하지 못한 문화 명령을 다시 제대로 실행하여야 하는) 하나님의 땅을 관리하는 관리자로 임명 받은 사람들이다.(117쪽)

 

알버트의 창조 명령 개념에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논의할 점들이 있다.

 

1) 에덴을 성전이 아닌 농업과 기술적 문명의 원시상태로 보고있다.

 

2) 아담의 역할이 제사장, 선지자, 왕이 아니라 기술을 발전시켜야할 과제를 가진 이로 보았다.

 

3) 창조 명령을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의 왕권을 실행하는 통치 명령의 차원에서 보지 않는다.

 

4) 아담을 오실 자의 모형으로서 마지막 아담과 연계시키지 않는다.

 

5) 그리스도를 아담이 실패한 창조 명령, 즉 통치 명령을 다 이루신 분으로 보고있지 않다.

 

6) 문화 명령, 즉 통치 명령의 실행을 신자의 몫으로 보고있다.

 

7) 문화 명령, 즉 통치 명령을 이 땅에 시작된 안식의 영역인 하나님 나라로서의 교회와 연계시키지 않는다.

 

8) 신자의 역할이 지상 명령, 즉 대위임령이 아니라 문화물의 천국 보존을 위한 문화 변혁 운동이라고 보고있다.

 

9) 성도가 행하여야 할 창조적 발전을 아담이 실패한 문화 명령의 재실행으로 규정함으로서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안식의 영역을 다시 완성 시키려 하고있다.

 

10) 하나님의 형상을 왕으로서의 통치 개념보다는 창조적 능력과 연계시키고있다.

 

11) 에덴에서의 상태를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이라는 안식을 위한 행위 언약 아래에 있었던 상태로 보지 않는다.

 

12) 에덴에서의 아담과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성도를 유형학적으로 대비시키지는 않는다.



그리스도는 문화명령을 완성하셨는가?

 

일반적으로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 운동을 하는 이들이 보는 관점과 마찬가지로, 알버트는 모든 피조계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인하여 본래의 선한 구조로 회복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땅의 관리자로 재임용 된 것으로 본다.(117쪽)

 

이에 그리스도인은 아담이 실패한 창조명령을 이어 받아서 계속적으로 창조 사역을 감당하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한다.

 

알버트의 세계관을 이어받은 리처드 미들턴은, 그리스도인이 행하여야 할 과제로서, 문화명령을 대위임령보다도 한 차원 높은 사명으로 보면서, 그리스도인은 문화명령을 다시 시작 하여야한다고 말한다. (리처드 미들턴, 새 하늘과 새 땅, 257쪽)

 

죄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라는 것을 하지 않는 죄와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죄가 있다.

 

하라는 것은 적극적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고, 하지말라는 것은 최소한도로 금지된 것만 하지 않으면 되는, 소극적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성전으로서의 에덴에서는 이와같이 두 가지 순종의 요구가 있었다.

 

창조명령이라고하는 문화명령에는 아담에게 최대한도로 적극적 순종이 요구되었으며, 선악과 금령에는 아담에게 최소한도로 소극적 순종이 요구되었다.

 

아담은 일차적으로 통치명령을 제대로 행하지 못함으로 다스려야할 대상으로부터 유혹되는 결과를 낳음으로서 2차적으로 선악과 금령을 범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긴밀하게 연관되어있으며, 아담은 이 두 가지 모두에서 불순종 한 것이다.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두 가지 순종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신 적극적 순종과 십자가에서의 속죄 사역을 통한 수동적 순종으로 완성을 시키셨다.

 

에덴에서 요구 되었던 두 가지 순종의 완성이 안식으로 귀결 되어야 했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요구와 저주를 충족 시키심으로 안식의 주인이 되실 수 있으셨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의 말씀을 하실 수 있으셨던 것은 에덴에서의 요구를 그리스도께서 충족 시키셨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회복하신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분은 아담이 원래 가지고 있었으나 상실되었던 직분이었다.

 

그리스도가 마지막 아담이시면서 안식의 주인이 되신 것은 아담에게 요구 되었던 통치 명령과 선악과 금령, 그리고 불순종의 죄값을 다 치루셨기에 가능한 것이다.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이,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완성이 되었다면, 리처드 미들턴 뿐만이 아니라 알버트 월터스의 주장도 설득력을 상실하게된다.

 

창세기 1장 28절의 요구는 행위 언약의 요구를 통한 안식이라는 종말론이 내포되어있으며, 아담에게 요구 되었던 통치 명령은 일정한 검증의 기간 후에는 영원한 생명과 축복이라는 안식이 약속된 것이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 상에서 다이루셨다고 선포하신 것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첫번 째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행위 언약을 다 이루신 것이다.

 

행위 언약은 신자에게 전가될 그리스도의 공로의 근거이며,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안식을 위한 행위의 근거였다.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한 안식의 성취는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이라는 언약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만 하며,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해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는 행위언약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주장이다.

 

알버트가 선교적교회 운동을 하는 마이클 고힌과 “창조 타락 구속”을 공동 저술 할 수 있었던 것은 행위 언약에 대한 공통적 거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는 마이클 고힌의 선교적교회의 이론적 근거인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행위 언약 개념을 거부하는 칼 바르트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알버트의 “창조 타락 구속” 패러다임은, 칼바르트와 마찬가지로,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과 행위 언약 개념을 배제하고있기에, 행위언약 개념을 수용하는 개혁주의 신학과 부조화를 이룰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행위언약은 종말론적 안식을 위한 요구 조건이다.

 

에덴에서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두 가지 명령, 즉 적극적 순종을 요구하는 문화명령과 수동적 순종을 요구하는 선악과 금령은 종말론적 안식을 위한 행위 언약으로서의 명령이었다.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에 대한 적극적 순종과 율법의 저주에 대한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행위언약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켜준 공로적 행위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이루신 이 두 가지 의를 신자에게 전가시켜주심으로서, 행위언약 아래있던 자들을 의롭게 만드실 수가 있으셨던 것이다.

 

에덴에서의 문화명령과 선악과 금령은 이스라엘에서 율법을 통하여 유비적으로 재현republication되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요구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문화명령과 선악과 금령에 대한 요구를 충족 시키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창조명령을 다시 수행하여야한다는 주장은,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율법의 요구를 다시 수행하여야한다는 주장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명령과 선악과 금령은 안식을 위한 요구조건이었으며, 신자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안식 안에 거하는 자이다.

 

바울의 서신서는, 그리스도인이 창조명령을 다시 수행함으로서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문화변혁 운동에 참여해야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 되었으며,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복음 전파에 대한 지상 명령, 즉 대위임령(마 28:19~20)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다.

 

성도에게 요구되는 것은 교회를 교회답게하며, 이 땅에 교회를 세우고 확장시켜나가는 것이기에, 이는 창조 명령을 통한 창조적 문화 변혁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문화명령의 지속성

 

알버트는 창조주 하나님을, 무대를 마련하시고 무대 뒤로 물러나 계신 감독으로서의 하나님으로 묘사하고있다. (81쪽)

 

그렇다면 아담의 타락으로 무대 공연의 중단되었다면 그리스도가 무대 공연을 마치셨는지, 아니면 우리에게 맡기실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알버트의 말대로라면 그리스도는 아담이 중단한 무대 공연을 하지 않으신 분이 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 두 번째 아담이라는 용어를 붙이는 것은 잘못된 용어가 된다.

 

그리스도께서 아담이 중단한 무대공연을 지속해야한다면, 과연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서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는 자격이나 능력이 생겼다는 것인가?

 

설령 인간이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땅이 에덴에서와 같이 다시 시작 할 수 있는 구조를 보존하고있는가?

 

여기에 대해서 알버트는 대부분 긍정적인 대답을 한다.

 

알버트가 수용하고 있는 톰 라이트의 말을 빌리자면, 성경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이는 우리가 만들어가야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데이비드 웰스의 말을 빌려본다: “라이트는 자기 논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이상한 예화를 든다. 가령 5막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세익스피어의 희극이 오늘 4막까지만 발견되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최대한 충실하게 5막을 만들어서 희극을 완성시켜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용기있는 기독교, 데이비드 웰스, 136).

 

알버트가 창조 명령을 다시 수행함으로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완성하자는 말은, 성경의 이야기가 미완성된 상태이기에 우리가 이를 마무리하자는 톰 라이트의 주장과 유사하다.

 

성전으로서의 에덴과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개념을 생각할 때, 인간의 문화 활동을 통한 창조적 발전은 안식을 이루신 그리스도 안에서는 의미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안식은 에덴에서 요구되었던 통치 명령으로서의 문화 명령의 성취에 의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문화 명령은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3중직의 개념과 관련되어 생각되어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아담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에게는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역할이 주어진 것이다.

 

이 세 가지 직책은 문화 활동과 같은 사회적 구조보다는, 영적인 하나님 나라의 구조에 맞추어져있는 것이다.

 

알버트는 하나님의 형상의 본체이신 그리스도의 3중직이 성도 안에서 실현되어야하는 것보다는 오직 창조적 발전이라는 논리를 하나님의 형상에 접목시킨다.

 

타락과 더불어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는 내적 구조의 붕괴와 더불어 외적 구조만이 남아있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회복된 내적 구조는 오직 영적인 구조로 제한된다.

 

영적인 구조를 외적인 구조로 바꾸는 눈에 보이는 교회 마저도 인간의 부패된 죄성을 그대로 보여주고있다.

 

조직으로서의 교회마저도 제대로 부패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불신자들과 공유되는 사회 문화의 구조를 바꾸는 것은 더더욱 현실성이 없다.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더라도 여기에는 생명이 상실된 외적 구조만이 남아있다.

 

진정한 생육과 번성은 신자로서의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을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통해서 확대시키는 것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역사적 이스라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생육과 번성은 지상 명령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대위임령(마 28:19-20)을 실행함으로서,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을 확장 시킴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알버트가 지속적으로 수행하자고 권하는 구조의 방향전환은 이미 생명이 상실된 외적 구조에 대한 것 뿐이다.

 

그리스도의 순종과 안식은 잃어버린 내적 구조의 회복이며, 여기에 진정한 생명이 있으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안식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될 것이다.

 

메러디스 클라인이 말하는 종말에 이루어질 상위 구조upper-register와 하위 구조lower-register의 만남에 부합되는 하위 구조는 오직 내적 구조로서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안식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통치 명령은 그리스도의 안식 안에서 성취되었지만, 통치 명령이 지상 명령, 즉 대위임령으로 대체됨으로 인해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연속되어질 결과물은, 창조 명령에 의한 창조적 문화 변혁의 성과물이 아니라, 복음 전파에 의하여 결실을 맺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화변혁운동의 근거

 

알버트는 주님이 손수 만드신 작품을 버리지 않으시며,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하나님의 창조와 우리가 그것을 문화적으로 발전 시킨 것을 폐기하지 않을 것에 대한 확신이 있다고 말한다. (84)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에덴을 초기 구석기와 같이 발전하지 않은 원시적 상태로 보며 문명의 발전에 대하여 긍정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비록 문화 형태는 죄로 인하여 손상 되었지만 문화의 근본요소는 아직 선하게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문화는 회복될 것이고 이는 문화변혁운동에 참여하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문명의 발전이라는 속성에는 많은 부분 화석 연료의 사용이 필수적이며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산업과 엔진은 죽음이 전제된 화석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신칼빈주의자인 엔디 크라우치는 자신의 저서 “컬쳐 메이킹”에서 자동차 미니쿠퍼나 불고기등이 천국에서 보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알버트 월터스는 발전 과정에서의 도시화, 산업화 혹은 내연 엔진 등을 배척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측면에서 볼 때 문명의 발전은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의존을 줄임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저하 시킨다는 점늘 고려해야만 한다.

문명의 속성 가운데 한 가지는, 인간의 필요를 하나님과 관계없이 인간 스스로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삶에 있어서 생기는 문제의 원인이 많은 부분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손상에서 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과 관계없이 인간의 기술로 스스로 해결함으로서 점점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발전이라는 것이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속성에 대하여는 생각하지 않고, 발전 자체를 구조의 선한 방향에 포함시키려 하고 있다.



문화물의 천국보존에 대한 주장들

 

알버트는, 문화변혁cultural transformation에 의한 결과로서의 문화물은,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것이기에,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은 문화 활동을 통하여, 계속되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과정에 동참함으로서, 하나님과 협력하여 천국에서 보존될 문화를 완성시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알버트는, 하나님께서는 손수 만드신 작품을 버리시지 않으시며, 문화 변혁운동을 통하여 이루어질 문화적 산물은 주님께서 재림 하실 때 폐기하지 않으시고 천국에서 보존하실 것이라고 말한다.(84쪽)

 

이는 카이퍼가, 문화물이 종국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 영입되며, 또한 주님은 손수 만드신 작품을 버리시지 않으신다고 하는(송인규, 일반 은총과 문화적 산물, 12쪽) 주장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알버트는 정화된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사람들의 문화적 소산들이 포함될 것이며, 이러한 문화적 소산은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것과 연속성에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86쪽)

 

플란팅가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것들, 즉 치유와 정의와 어둠에 대하여 지적인 빛을 발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도움이 되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들은 다음 생애에서도 보존이 될 것이다”고 말한다.(Plantinga, Engaging God’s World, 137–38.)

 

톰 라이트의 관심사는 신칼빈주의자인 알버트 월터스와 플란팅가의 관심사와 비슷하기에, 알버트는 자연스럽게 톰 라이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알버트에게 도움을 준 톰 라이트는, 현재 개조된 세계가 보존될 것을 말하면서, 세계를 개조하는 작업이 장래 하나님께서 만드시고자 하는 세계에 연결될 것이라고 본다.

 

톰 라이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언제나 그렇듯이) 이원론적이며 반창조적이라는 비난을 가한다.(예수의 도전, 톰 라이트,  267)

 

라이트는 현세계에서 성령의 능력 가운데 수행된 일들은, 성령님께서 미래로부터 현세로 오셔서, 사람들과 교회를 형성하시고 준비하시고, 미래를 위해 일하게 하신다고 믿기 때문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잔존할 것이라고 말한다.(resurrection of the Son of God, N. T. Wright,  p285)

 

반두르넨은 “톰 라이트는 현세적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현세의 문화 활동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어질 문화라는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접근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현재 우리가 하는 일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새 창조의 일부가 될 것이며 이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며 하나님의 미래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신칼빈주의의 입장과 매우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반드루넨, 21~24쪽)

 

라이트는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미 실현되었으며,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미 이 땅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의 완성으로 보고있다.

라이트는, “부활은 현재 우리가 복음을 위해 열심히 하는 일이 낭비되지 않을 것임을 뜻한다(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톰 라이트, 257)”고 말한다.

이는 부활 시에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현재 우리의 행함의 결과들이 보존되리라는 것이다.

라이트는 현재적 하나님 나라와 미래적 하나님 나라가 연속 선상에 있으며,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요구되는 것은 지속적인 훈련과 연습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그리스도인의 미덕, 톰 라이트, 71)

라이트가 주장하는 이러한 연습의 필요성은, 미래적 하나님 나라(새 하늘과 새 땅)가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라이트에게 이미와 아직의 개념은, 이미 이 땅에 실현되어 드러난 하나님 나라가 다만 지상에서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라이트는 사후 천국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톰 라이트, 50)

라이트에게는 현재만 있으며, 현재는 미래의 완성을 위한 진행 과정 가운데 있는 것이기에, 미래의 완성을 위하여 성도가 이 땅에서 무엇인가를 하여야한다는 것이다.

현재적으로 행하여지는 외적인 행위는 마지막 심판에 태워없어질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데이비드 반 드루넨은, 문화물이 천국에서 보존될 것이라는 가정 하에서 문화변혁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구속적 변혁주의 문화관”이라고 부른다.

 

반드루넨은 오직 우리의 존재만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간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이 땅의 제도와 활동은 급작스럽게 그리고 철저히 종결될 것이라고 말한다.(반 드루넨,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34쪽)

알버트는 요한계시록의 말씀(계 21:24,26)에서 땅의 왕들이 정화될 인류의 문화적 유산을 가지고 새예루살렘에 들어갈 것을 말하지만(85쪽), 반 드루넨은 문화물의 천국보존의 근거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이 요한계시록(21:24~26)의 말씀이, 땅에 속한 왕들과 나라들이 장차 올 세상으로 문화적 산물을 가지고 오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자기 구원자 그리스도께 찬양 드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고 말한다.(데이비드 반드루넨,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278쪽)

 

알버트의 주장대로, 요한계시록의 말씀(계 21:24,26)이 땅의 왕들이 정화될 인류의 문화적 유산을 가지고 새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심판이 천국 입성후에 이루어지게되는 모순점을 드러내게된다.


새 예루살렘은 오직 신자만이 들어가도록 허락되었기에(계21:27, 22:14~15), 여기서 말하는 나라와 왕들은 그리스도인임에 틀림없고, 여기서 언급되는 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묘사한 것(계3:12, 5:9, 20:4)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성경에는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베전2:9)라고 기록하면서 성도들을 왕과 나라와 백성으로 묘사하고있다.

요한 계시록에 대한 반 드루넨의 해석은 같은 구절을 가지고 문화물의 천국 보존의 근거를 삼는 송인규(일반은총과 문화적 산물, 294~)의 해석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은 신칼빈주의자들이나 새관점의 톰 라이트, 브라이언 맥클라렌과 같은 이머전트들의 주장과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인의 문화 활동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 세계에 대한 소망을 분명하게 구별 했다.

 

반드루넨은 이 땅에서의 인간의 문화는 한시적이고 없어질 임시적인 문화temporary culture라는 것이다.(David VanDrunen, Living in God’s Two Kingdom, p 25).

 

또한 반드루넨은, 그리스도인은 일반나라에 속한 문화생활과 활동보다는 교회 생활과 사역이 삶의 중심이 되어야한다고 말한다.(David VanDrunen, Living in God’s Two Kingdom, p131~)



두 아담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의 패러다임에 결핍되어있는 것 가운데 한 가지는 두 아담의 대비 구조가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은 기독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 신학이 기독론 중심에서 신론 중심으로, 구원론보다는 하나님 나라 개념으로 중심이 이동된 것이 알버트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신칼빈주의 전체에 걸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반드루넨은 최근의 신칼빈주의를 논하면서 “아마 신칼빈주의에 대하여 먼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성경의 이야기를 ‘창조, 타락, 구속’의 이야기로 표현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Living in God’s two Kingdom, David Vandrunen, 17)

 

“창조, 타락, 구속”은 성경의 이야기의 근본되는 윤곽이지만, 이는 좀처럼 두 나라 교리에서 강조하는 두 아담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야기라는 측면만이 아니라 명령과 언약과 교훈등 다양한 특성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버트는 톰 라이트가 즐겨 사용하는 이야기라는 용어를 적용한다.

 

반드루넨이 신칼빈주의 작가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생각들에 동의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점은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이나 구속이 바로 핵심적인 회복restoration이면서 동시에 재창조re-creation라는 것이다”” (Living in God’s two Kingdom, David Vandrunen, p. 18).

 

바울이 아담을 오실자의 모형이라고 기록하였던 것과 같이 아담과 그리스도는 핵심적인 연관성을 갖는다. (롬 5:14)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아담의 역할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아담에게 창조적 발전이 요구되었다면 그리스도에게도 창조적 발전을 이루시는 분이되어야한다.

 

아담은 하나님과 행위 언약 안에 있었으며,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는 행위 언약을 다 이루신 분으로서 언약의 종결과 안식으로의 귀결을 선언하신 분이시다.

 

언약 신학에서 아담의 실패는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을 통하여 유형학적으로 재연되면서 그리스도의 새 언약으로 귀결되는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마지막 아담으로 귀결되지 않는 알버트의 “창조 타락 구속”은 또한 언약 신학적인 관점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명령은 안식으로 귀결된다.

 

아담의 실패는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3중직은 아담이 에덴에서 상실한 것이었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명령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안식의 주인이 되실 수 있으셨던 것은 통치 명령의 성취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알버트는 통치 명령으로서의 문화 명령을 성도가 다시 시작하여야할 명령으로 규정하고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과 통치 명령이 서로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고있기 때문이다,

 

알버트는 문화명령을 성도의 과제로 인식하고서 문화명령을 실행하는 방법으로 구조의 방향성에 대한 변경을 제시하지만, 반드루넨에 의하면,문화명령은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가 실행하셔서 완성시키셨다는 것이다.

 

반드루네의 해석대로라면, 신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문화명령에 대한 재실행은,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가 처음 아담이 실패한 문화명령과는 관계없는 사역을 하신 분이 된다.



에덴 성전

 

알버트는 에덴을 문화적 관점에서 원시적인 미발전 상태로 보고있다.

 

가령 아담과 하와가 바퀴를 사용하였는지, 혹은 직물을 만드는 방법이나 벽돌 굽는 방법들을 몰랐을 것이라고 추정한다.(126)

 

하지만 에덴에서 아담에게 요구하였던 하나님의 관심사가 문명 기술의 발전이었을까?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과연 이러한 기술들이 하나님의 형상의 표현이었으며, 기술의 발전이 하나님의 형상을 이 땅에 구현하는 것이었을까?

 

알버트는 에덴에서의 아담을 발전이 요구되는 문화명령을 수행하여야만 하는 인물로 묘사한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이를 문명과 관련된 문화명령, 혹은 창조명령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성전 전체에 대한 해석의 틀을 바꾸어버릴 수가 있다.

 

에덴을 성전으로 보느냐, 아니면 문명의 발전을 위한 원시적인 미발전 상태로 보느냐는 성경을 해석하는 방향을 전혀 달리할 수 있다.

 

그레고리 빌G.K.Beale이나 존 페스코J.V.Fesko를 비롯하여 최근 많은 신학자들이 에덴을 최초의 성전이라는 관점에서 보고있다.

 

이들은 에덴에서의 아담의 주요 역할을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역할로 보고있다.

 

(존 페스코J.V.Fesko의 “태초의 첫째 아담에서 종말의 둘째 아담 그리스도까지”에 대한 요약은 여기참조)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삼중직을 회복하신 것은 첫번째 아담이 실패한 삼중직에 대한 회복이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거하셨던 장소로서의  성전이었으며, 아담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예배하였다.

 

에스겔 28장 11~19절은 아담의 제사장 직을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에스겔 28장 13절의 보석은 대제사장의 판결 흉패와 일치하는데 이것들은 의를 상징한다.

 

에스겔은 두로를 하나님의 동산 에덴이라고 부른다(겔 28:13)

 

에스겔 28장 2절의 두로 왕의 “나는 신이라”라는 주장은 아담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서 에스겔은 두로를 하나님의 동산 에덴이라고 부른다(겔 28:13). (부흥과 개혁사, 언약신학으로의 초대, 72~)

 

이는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을 회복시키신 것과도 관련이 있다.

 

통치 명령(창 1:28)에서 다스림의 대상이 되는 생물에는 들짐승(창 3:1)이 포함되어있다.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한 뱀도 아담에게 주신 하나님의 통치 명령의 대상에 포함되어있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통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음으로서 다스려야할 대상으로부터 다스림을 받게 된 것이다.

 

선악과 범죄는 일차적으로 통치 명령을 어김으로서 나타난 결과물이다.

 

아담은 왕으로서 에덴을 다스리는데 실패했지만 그리스도는 사단을 물리치심으로 다시 왕권을 되찾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에덴의 풍요와는 달리 광야에서 금식하신 후에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셨으며, 사단을 정복하셨기에 율법의 마침이 되실 수 있으셨다.

 

어떤 신학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적극적 순종으로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다는 성경의 구절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에덴에서의 통치 명령과 선악과 금령은 가나안에서 율법으로 재현republication되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첫 번째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통치 명령과 선악과 금령을,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시고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충족 시키심으로서 완성시킬 수 있으셨다.

 

에덴에서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이라는 안식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사역은 둘째 아담으로서 아담의 실패를 완성시키심으로 안식의 주인이 되실 수 있으셨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가운데, 지상 명령을 수행함으로서  그리스도도 안식은 전해야한다.

 

하지만 알버트는 에덴을 오직 문화적 관점에서 원시적 미발전 상태로만 보고(126쪽), 성도는 다시 문화의 발전을 위해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지속해야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은 두 번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한 개념이 배제된 것이며, 알버트에게 그리스도는 에덴의 문화를 발전시키신 분이 아니며, 문화의 발전은 오직  성도의 몫이 되는 것이다.



문화의 발전은 구속적 창조의 과정인가?

 

알버트는 다음과 같이 구속적 창조에 대하여 말한다.

 

● 창조 사역은 발전의 사역을 통하여 계속 진행되어야한다.(78)

 

● 문화명령은 인간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창조사역이기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더불어 인간의 타락으로 왜곡된 문화의 방향을 원래의 창조된 구조를 회복하는 방향으로 바꿈으로서, 하나님께서 원래 아담을 통하여 목적하셨던 인간의 문명화를 통한 문화의 발전 계획을 계속 진행하여야한다.(81)


● 문화의 발전 즉 인간의 문명화 단계는 창조적 발전이다.(81쪽)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은, 성경을 문화와 연관시키고자 하는 관심은, 그 특성상 현대적 강박관념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마이클은 문화 그 자체를 이성이나 경험이나 전통 못지않게 믿음과 상반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문화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발견 할 수 있는 어떤 본질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문화 속에 있는 진리와 정의와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일반은총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문화의 배경이 되는 자연신학은 언제나 일종의 우상 숭배로 발전하기 마련이고 교회는 복음과 문화 사이의 대화를 촉진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마이클 호튼 개혁주의 조직신학 206~)

 

이머징미셔널 처치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선교적 교회를 중심으로한 문화에 대한 관심은, 나무의 나이테와 같이, 점진적 진리의 완성이라는 테마와 맥락을 가지고, 창조 과정의 점진성이라는 알버트의 창조적 발전에 동참하고있다.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의 기초적 토대를 마련한 GOCN(Gospel and Our Culture Network)의 주제는 문화와 복음의 접목이다.

 

알버트는 문화를 구속의  주제에 포함시킴으로서 선교적 교회 운동을 하는 마이클 고힌과 함께 “창조 타락 구속”을 공동 저술하면서 GOCN의 범주 안에 스스로를 포함시킨다.

 

마이클 호튼이 문화를 일반 은총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알버트는 문화물의 구조를 하나님이 창조 하신 대상으로 보면서, 문화물을  구속의 대상인 특별 은총의 영역으로 편입시킨다.



창조와 발전, 그리고 안식

 

알버트의 “창조 타락 구속”의 번역이 일부 생략된 부분이다. (78)

 

“하나님은 창조 사역에서 물러나셨지만, 자신의 형상을 땅위에 세우시고, 그에게 그 일을 계속 할 것을 명령하셨다.

Although God has withdrawn from the work of creation, he has put an image of himself on the earth with a mandate to continue.

 

(번역이 생략된 부분- 필자의 번역)

땅은 완전히 혼돈하고 공허하였다; 하나님께서는 6일간의 발전 과정을 통해서 형태를 만드시고 채우셨지만, 완전하게 형태를 만드시고 채우신 것이 아니었다.

The earth had been completely unformed and empty; in the six-day process of development God had formed it and filled it - but not completely.

(알버트는 하나님의 6일간의 창조 사역 대신에 6일간의 발전 과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제 사람들이 발전의 사역을 계속하여야 한다.”

People must now carry on the work of development:

…..

 

그러나 이제 이것은 인간적인 땅의 발전이어야한다.

But this is now to be a human development of the earth.

 

발전이라는 용어에는 미완성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있다.

 

알버트는 하나님의 6일간의 창조 사역을 통하여 이루신 세계를 발전의 개념에서 미완성된 창조 세계로 보고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인간이  마무리해서 완성해야만 한다면, 창조 세계는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에 의한 결과물이 되는 것이다.

 

위에 인용한 부분의 중간 부분은 번역(78쪽)이 생략되었다.

 

내용이 불편하여 번역을 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알버트는, 6일간의 창조 사역이라는 용어 대신에 6일간의 발전 과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를 있는 그대로 이해한다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6일 간의 창조 사역은 일종의 발전 과정으로서, 이 발전 과정은 아직 끝나지 않은 미완성으로, 단지 창조의 시작일 뿐이다.

 

액면 그대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의 6일간의 창조는 완성되지 않은 시작의 과정일 뿐이며, 하나님께서 제 7일에 취하신 안식은 완성에 대한 안식이 아니라, 잠시 과정 가운데 쉬신 것이 된다.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안식에 대한 개념이다.

 

율법에서 안식일은 하나님의 신성한 영역으로서 이를 범하는 자는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알버트가 권하는 인간의 창조 사역은 하나님의 안식을 완성이 아닌 미완성에서의 쉼으로 보면서 참된 안식의 개념을 훼손시키고 있다.

 

여기에는 인간이 창조 세계를 완성시켜 안식을 취하고자하는 공로적 개념이 적용 될 수 있다.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진 통치 명령의 완수를 통한 안식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안식을 구현함으로서,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에덴에서의 궁극적 목표인 안식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연장선상에서 취하는 안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이 이 땅에서 유형적으로 구현되는 것이다.

 

에덴에서의 목표로서의 안식을  하나님이 취하신 안식의 연장선에서 놓는 것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인간의 차원으로 격하시키거나 인간의 행위를 신적인 차원으로 높이는 행위 가운데 한 가지일 것이다.

 

그리스도만이 홀로 안식의 주인이 되시며, 안식은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영역이다.

 

신자가 한 주의 시작을 주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신자의 행함이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안식으로부터 출발된다는 것을 의미이기에, 인간의 행위는 안식을 완성하기 위한 행위가 되어서는 안된다.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가 이루신 안식은, 처음 아담이 실패하였던 안식을 위한 순종을 성취하심으로 이루신 그리스도만의 영역이다.

 

그리스도가 순종을 통하여 성취하신 직분은,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3중직이다.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분은 창조 사역과는 관계없는 상위 구조upper-register에 대한 하위 구조lower-register의 표현이다.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안식은, 성전으로서의 에덴에서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요구가 성취됨으로서 얻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두 번 째 아담으로서 첫 번째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신 것이다.

 

알버트의 주장대로, 아담에게 주어졌던 일이 창조 사역이었다면,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도 창조 사역이 되어야하지만 성경 어디에서도 예수님의 사역을 창조 사역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아담에게 기대되었던 안식은,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유형적 유비typological analogy로서 이해되어야한다.

 

아담에게 기대되었던 안식은, 창조 사역을  마무리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안식의 완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유형적 안식이다.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다는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가 안식의 주인이 되실 수 있으셨던 것은 순종의 의미에서 해석되어져야 한다.

 

아담에게 중요했던 것은, 창조적 발전이 아니라 순종을 통한 종말론적 안식의 성취였다.

 

하나님의 안식이 창조 사역의 완성을 뜻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안식은 순종을 통한 구속 사역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아담이 실패한 종말론의 성취를 위한 것이다.

 

구속 사역은 창조 사역과 발전의 개념과는 연계시킬 수 없는 아담이 실패했던  종말론적 안식의 성취이다.



창조적 발전과 성화

 

바울 서신은 많은 부분에 걸쳐서 신자의 삶이 어떠해야하는지를 말하고있다.

 

바울 서신의 주된 관심사는 신자가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보다는 신자의 내적인 삶의 변화와 영적 진보에 관한 것이다.

 

요한 서신서나 베드로서신서도 마찬가지다.

 

세계관은 이 세상을 보는 그리스도인의 시각에 관한 것이다.

 

세계관의 열매로서의 행동 양식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내면의 변화가 선행되어야한다.

 

외부를 보는 세계관이 내면을 보는 세계관과 연결되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만 균형잡힌 행동 양식이 수반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전적으로 부패하였기에 환경을 변화 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단지 성령의 간섭하심과 신자의 열매로만 가능한 것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나타나는 세상의 긍정적인 요소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이다.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다.

 

세상은 영적으로 타락한 상태에 있기에 이를 지탱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구원의 특별 은총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거듭난 삶을 살아가야하는 의무가 주어졌다.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삶은 내면세계의 영적 진보인 성화와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

 

성화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외부의 환경을 바꾸기에 앞서서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변화시켜야할 의무가 있다.

 

칭의된 자에게 요구되는 성화는 외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보다 내면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영적인 진보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알버트가 말하는 창조적 발전은 영적 진보와는 다른 것이다.

 

알버트가 말하는 창조명령을 수행하는 발전은 외적인 사역으로서 행함의 영역에 속하여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대위임령(마28:19-20)은 행함의 영역보다는 영적인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창조적 발전이란 개념은 육적인 영역을 영적인 영역으로 귀속시키는 개념이지만 이를 영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창조적 발전의 대상인 문화의 대부분은 타락 후에 형성된 인간 세계의 유지를 위한 한시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을 눈에 보이는 육적인 것으로 구현할 때 대부분 타락의 영향에서 자유 할 수가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왕보다도 눈에 보이는 왕을 원함으로서 타락에 가속도가 붙었다.

 

문화의 대부분은, 타락 이후에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체제로서, 하나님께서 죄악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한시적으로 허락한 육적인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창조적 발전의 주요 관심사는 문화변혁을 통한 문화물의 천국보존이다.

 

물론 이원론적인 것은 배격하여야겠지만, 문화변혁은 불신자들의 도움과 협력이 없이는 불가능 한 것이며, 이들과의 협력을 통해서 과연 신자가 문화를 주도 할 수 있을 지에 대하여 좀 더 심사숙고해보아야한다.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면 불신자들의 행동 방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 결과물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보존될 지에 대하여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문화변혁운동

 

알버트는 “문화 명령에 의한 문화 변혁운동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것이며 그리스도인이 수행하는 문화 활동을 창조명령의 차원으로 보는 것이다”고 말한다.(78쪽)

 

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우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이 정립이 되어야한다.

 

알버트는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이 구속의 대상이며,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있으며, 이는 인간의 창조적 변혁 활동을 통하여 완성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데이비드 반드루넨David Vandrunen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두 나라로 구분하여 보고있다.

 

이는 이원론적 개념과는 다른 개념이다.

 

반드루넨은 이 땅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 나라의 두 영역, 즉 하나님의 통치 영역과 구속 영역으로 나누고 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원론적인 한 가지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두 나라에 소속되어있는 것이다.

 

사실 이 세상에서 사단이 패배한 이후에는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속하여있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후에 사십일 간의 지상 사역 기간에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어야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세상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 있지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영역이라고 모두 하나님의 구속 영역인 것은 아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알버트는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구속 영역으로 보고있다.

 

이는 one kingdom(1K)개념과 two kingdom(2K)개념의 신학적 충돌을 일으키며 아직도 논쟁이 지속되고있는 주제이다.

 

화란개혁주의 개통의 신칼빈주의나 톰 라이트의 새관점,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를 주장하는 신정통주의에서는 한 나라one kingdom의 경향이 있으며,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 (WSCal)을 중심으로한 개혁주의는 두 나라two kingdom 개념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한 나라one kingdom개념을 주장하는 이들을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관심을 집중시키는데 반하여 두 나라two kingdom 개념을 지지하는 이들은 교회 중심적인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인해서 이 땅에 세워졌으며, 그리스도가 명하신 대위임령을 통해서 확장되고 완성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을 변화시켜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모으는 지상명령, 즉 대위임령을 수단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대위임령을 기반으로하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중심으로하는 영적인 나라인데 반하여, 문화 변혁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피조계의 회복을 중심으로하는 지상적 개념의 하나님 나라이다.

 

문화변혁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사람보다는 이 땅의 문화를 하나님 나라와 연계시키며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완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창조명령과 노아언약

 

창세기 9장의 홍수 후의 노아 언약은 타락 후에 즉시 이루어진 일반은총 상태가 언약적 형태로 재연된 것으로 본다.

 

창세기 1장 28절의 창조명령은 타락 이전의 행위언약으로서 타락 이후에는 노아언약을 통하여 변형되고 굴절된 일반 은총의 형태로 재현republication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창세기 9장 1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여기서는 타락 이전의 창조명령의 언어를 거의 그대로 반복하고있지만 한가지 중요한 차이는 “정복하라”는 단어가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알버트가 말하는 창조적 어원으로서의 정복이 타락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과 새로 맺으신 노아 언약으로 창조명령을 대체하신다.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창 9:9)

 

이는 약속된 끝날까지 오랜 세대를 거쳐 지속되는 언약을 의미하는 “영속된 언약everlasting covenant”으로 불리운다.(창 9:16)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은 일반 은총의 언약의 표시로 더욱 강화된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창9:13)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일반 은총의 언약은 문화명령을 새롭게 한 것이다.

이러한 과업은 두 번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에게 옮겨졌으며,  그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원칙적으로 이 땅을 정복하신 것이다.

 

창조 명령 개념으로서의 문화 명령은 원래 통치 명령의 개념으로 접근되어야했다.

 

통치 명령 개념에서의 이 땅에 대한 정복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되었기에 알버트가 말하는 창세기 1장 28절의 창조명령이 지속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리 아이언즈lee Irons는 노아 언약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개념이 제외되었다고 보는 반면에, 존 페스코John Fesko는 하나님의 형상을 땅 위에 퍼뜨려서(창 9:7) 하나님에 대하여 예배를 드리게 하는 것을 땅에 대한 정복의 개념으로 봄으로서, 노아 언약에서도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명령이  반복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Last Things First, John Fesko, ch4)



노아 언약

 

존 페스코가 “Last Things First”에서 말하는 노아 언약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주어지는 일련의 언약들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세우셨던 첫 언약의 통치 명령이 다시 반복해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신 언약의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형상을 땅 위에 퍼뜨리는 것

2) 성전을 땅끝까지 확장하는 것

3) 1)과 2)의 요소를 통해 땅 위를 통치하는 것

4) 돕는 배필의 보조로 이 임무를 완성하는 것

 

노아 언약은 세대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이 선례가 없는 처음 언약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아담 언약과 평행관계를 이루면서 통치 명령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주셨던 것과 똑같은 임무를 노아에게 주셨다.

 

노아 언약에 나타나는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요소는 첫 번째 창조와 대홍수 이후의 새로운 창조 사이의 평행관계를 보여준다.

 

1) 하나님의 형상을 땅 위에 퍼뜨린다.(창 9:7)

2)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땅 위에 퍼뜨린다.

3) 1)과 2)의 요소를 통해 땅을 정복한다.

4) 노아는 이 임무를 자신의 돕는 배필과 연합하여 생긴 열매인, 후손을 통해 성취한다.

 

이에 대한 워렌 게이지의 설명이다.

 

“.... 창세기 8장의 기록은 본래의 창조에 대한 창세기 1장의 설명과 평행을 이룬다…. 창세기 8장 1절에서 하나님은 창조 전에 세상을 덮고 있던 물과 같이(창 1:2) 땅을 덮고 있었던(창 7:18-19) 홍수 위에 바람이 불게 하신다….채소밭이 생기는 장면(1:12)은 비둘기가… 감람나무 잎을 물어다 주는 장면(8:11)과 유사하다…. 하나님이 처음 세상의 창조를 마치신 후 안식하신 일은 새로운 창조가 긑난 후에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으시며 쉬신 일과 일치한다.”

 

첫 창조와 대홍수 이후의 창조 사이의 평행 구조는 노아를 일종의 새 아담처럼 여기시며 노아와 새로 시작 하셨고, 첫 아담에게 주셨던 언약적 임무를 노아에게도 주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홍수 이후의 노아의 타락은 아담을 연상시킨다.

 

1) 노아도 에덴동산과 비슷한 환경인 포도밭에서 타락했다(9:20).

2) 아담이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것과 같이 노아도 포도나무의 열매에서 나온 포도주를 마셨다(9:20).

3) 아담이 올곧은 자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이었던 것과 같이, 노아 역시 의로운 자였고 그의 세대 가운데 흠없는 자였다(6:9).

4)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동산에서 바람이 불 때 아담과 함께 동산을 거니셨던 장면을 연상시킨다(3:8, 6:9).

5) 노아는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자신의 하체를 드러냈다. 이 때 아담의 죄를 하나님이 덮으셨던 것처럼(3:21) 노아의 아들들이 와서 그의 벌거벗은 몸을 가렸다(9:23).

 

노아는 행위 언약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기에 또 다른 아담을 바라보아야했다.

 

노아 언약을 통하여 반복되고 있는 에덴서의 상황은 성전으로서의 에덴이 일반 은총의 영역으로서 보편적으로 어떻게 일반화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노아 언약을 통하여 재연되고있는 에덴의 상황은 아브라함 언약과 모세 언약, 그리고 새 언약을 통하여 완성되지만, 알버트의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언약적 전개과정을 찾아 볼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성전으로서의 에덴의 개념도 찾아 볼 수 없다.

 

안식의 관점에서본 창조명령

 

창조 명령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되었는지 혹은 아직 우리의 몫으로 남아있는지에 대한 구분은 창조 명령을 안식의 개념과 연개시켜서 생각해 볼 때 더욱 명확해진다.

 

일반적으로 개혁주의에서 보는 에덴에서의 통치명령(문화명령)은 안식으로 귀결된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명령은 종말론적 축복과 영원한 안식으로 귀결되기

까지 한시적temporary으로 주어졌던 것이다.

 

창세기 1장 28절을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대비시킬 때 창조명령은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취하신 안식과 연계되어 안식으로 귀결된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에 아담에게 주어졌던 창조명령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의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본받아 이 땅에서 창조 활동을 하는 것과 연관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창세기 1장 28절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의 창조 사역으로서 안식으로 귀결되어야했다.

 

하지만 문화명령으로서의 창조명령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하에, 즉 순종을 조건으로하고있다.

 

순종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이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순종을 통하여 마지막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이 실패한 사역을 완수 하실 수가 있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안식의 주인이 되실 수 있으셨던 것은 예수님의 사역이 안식을 위한 창조명령을 수행하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신 것은, 택한 자에 대한 구원 사역과 더불어, 첫번째 아담이 에덴에서의 실패한 사역을, 마지막 아담으로서 성취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안식의 필요충분 조건으로서 더 이상의 요구가 필요하지 않다.

 

만약에 그리스도인이 창조명령으로서의 문화명령을 수행한다면,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것에 추가되는 것에 더하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안식에 거하는 칭의된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문화 명령으로서의 창조 명령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답게사는 성화의 과정이다.

 

성화의 과정과 문화 명령의 지속성과의 혼동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안식이 아직 이 땅에서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식의 완전한 성취는 오직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화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내적인 진보이기에, 외적인 사역을 요구하는 문화명령이 성화의 차원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칭의된 자의 열매의 차원으로 설명되어져야 할 것이다.

 

개인의 성화는 이 땅에서 한시적인 것이며, 성화의 정도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연결되지는 않는다.

 

알버트는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해서 구조로서의 문화물의 방향을 개선하여야한다고 말한다.

 

성화가 천국에서 보존되지 않는 것과 같이, 성화 차원의 문화명령은 이 땅에서 한시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6일동안 창조 사역을 마치신 후에 제7일에 안식을 취하셨다.

 

마찬가지로 아담에게 주어진 문화명령은 완전한 안식을 위한 과정으로서 한시적으로 주어진 것이었으며, 그리스도에 의하여 마침이 된 것이기에 성도의 신앙생활은 문화물의 천국 보존을 위한 문화 변혁보다는 교회를 교회답게하는 일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한다.



문화명령과 대위임령

 

알버트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 볼 수 있는 성도의 과제는 지상명령으로서의 대위임령이 아니라 창조명령으로서의 문화명령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40일간의 사역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을 말씀하시면서 복음 전파를 위한 지상명령으로서의 대위임령을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명령으로서의 문화명령을 완성하셨기에 문화명령은 더 이상 구원과는 관계없는 일반은총의 영역에 속한 것이다.

 

문화명령은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 주어졌기에 타락 이후에 같은 개념으로 적용될 수 없다.

 

문화명령은 안식을 위한 조건으로 주어졌으며, 문화명령의 대상에는 성과 속의 구분이 없다.

 

노아언약으로 대체된 문화명령이 행해지는 영역은 에굽이나 바벨론에서와 같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도 포함되어 그들 가운데서 함께 행해져야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대위임령은 특별 은총의 영역에 속한 것이다.

 

대위임령은 구원을 위한 것이며 타락한 자를 위한 것이다.

 

대위임령은 이미 이루어진 안식으로의 초대이다.

 

대위임령은 비록 애굽이나 바벨론과 같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에서 행하여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구별된 장소로 출애굽을 하였듯이, 이 세상과는 구별된 장소에서 구별된 모임으로 초대하기 위한 것이다.

 

대위임령은 노아언약으로 대체된 문화명령의 차원을 넘어서 다시 에덴에서 미완성되었던 문화명령의 성취를 공유하기 위한 것이다.

 

마이클 호튼은 이에 대하여 “구속적 변혁주의 문화관에서는 인간의 문화 활동을 천국에서 보존될 구속적 활동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구속사 시대의 문화적 활동은 일반적 활동이지 거룩한 활동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통해 긍정되고 보존되며 촉진되는 활동이지 구속적 활동이 아니다(마이클 호튼, 개혁주의 조직신학, 721쪽)”고 말한다.

 

반드루넨은 그리스도인의 문화활동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생활하는 가운데 바벨론의 문화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David VanDrunen, Living in God’s Two Kingdom. p69)

예수님께서는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22.21)"고 말씀하시면서 일반은총의 영역과 특별은총의 영역을 구분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이원론

 

성과 속으로의 이원론적 구분은 성경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기인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속성을 한 가지로 통합하려는 일원론적 사고도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

알버트 월터스는 전통적 기독교의 세계관을 이원론적 세계관으로 규정하고서, 이에 대한 수정을 위한 신칼빈주의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세속적 영역과 거룩한 영역을 나누는 것은 잘못된 이원론적 세계관이다. 주로 신학이나 개인적 도덕성의 문제만 거룩한 영역으로 보고 세속적이라는 광범위한 영역을 신앙의 영역에서 분리시키는 것은 잘못된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온 것이다.(33쪽)

2. 잘못된 세속주의적 이원론은 영지주의적인 플라톤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3.개혁주의는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 영역을 구분하지 않는다.(23쪽)

알버트가 이원론에 대하여 반복적인 언급을 하는 것은 교회와 문화를 성과 속의 개념으로 분리하려는 사고방식을 깨뜨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교회와 문화를 성과 속으로 나누는 이원론적 사고는 그리스도인의 사회 문화 활동에 대한 참여를 가로 막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 타락 구속"의 패러다임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한 가지는 그리스도인이 문화 변혁운동에 참여하여야한다는 것이다.

 

구속적 변혁주의 문화관으로의 패러다임의 사고전환을 위해서는 성과 속을 나누는 이원론적 사고를 없애야만 하는 것이다.

 

리처드 미들턴과 같은 이들은 창세기 1장 28절을 문화 명령으로 해석하면서, 문화 명령을 근거로한 문화변혁운동을 그리스도의 대위임령보다도 더 높은 차원의 활동으로 규정하고있다.

문화변혁운동을 한 차원 높은 신앙생활로 인식할 때 신앙 생활의 중심이 교회 안에서 교회 밖으로 이동되는 것이다.

 

알버트는 세상을 향한 문화명령을 단순한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가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보존될 문화를 완성시키는 창조 사역으로 보고 있다.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인의 문화 활동을 저해하는 이원론적 사고를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첫 번째 과정인 것이다.


성과 속의 구분

플라톤적 이원론과 성과 속을 구분하는 성경적 이원론은 분명히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알버트는 이를 동일시하면서 구속적인 관점에서의 성과 속을 나누는 전통적 이원론을 플라톤적 이원론과 동일한 관점에서 비난하고 있다.

 

구속적인 관점에서의 성과 속은 거룩함이라는 구별됨을 기초로 하고 있는 것이다.

거룩이라는 뜻은 구별되어짐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을 하고 나서야 애굽과 떨어진 시내산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강림하신 시내산에는 거룩함이 없이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시내산에서의 구별됨은 성막에서도 이어진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통치하시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계신 지성소는 속된 것과 철저히 구별되는 거룩한 장소였다.

 

모든 피조 세계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지만, 그 가운데 거룩한 영역은 구분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한 하나님 나라 백성은, 또한 하나님의 통치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있는 하나님의 두 나라 백성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과 속이 구별되어있으면서도 혼합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거룩한 지성소는 오직 신자에게만 개방되어있다.

 

지성소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휘장이 갈라져 개방되었지만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만 들어갈 수 있는 은혜를 베푸셨다.(엡2:8)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믿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 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믿음과 관계없이 모든 피조계의 구속을 말하면서 피조 세계에서 성과 속을 나누는 것을 플라톤적이고 영지주의적인 이원론의 산물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이러한 비난은, 모든 피조 세계에는 하나의 하나님 나라 밖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는 이 세상에는 하나님 나라 바깥에 있는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랍벨의 주장과 상통한다.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할 것을(마22.21) 말씀하심은 성과 속의 개념보다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과 구속 영역에 대한 구분이라고 보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개혁주의 이원론에서의 두 왕국(two-kingdom) 개념은 성과 속의 나눔보다는 하나님의 구속 영역과 통치 영역의 구분이라고 보는 것이 적합하지만, 알버트의 신칼빈주의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오직 하나의 하나님 나라(one-kingdom), 즉 모든 통치 영역을 구속 영역에 포함시키고있다.

 

알버트의 구속적 문화변혁운동은 카이퍼의 구속적 문화변혁운동과 맥락을 같이하고있다.

 

알버트의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문화변혁 운동은 카이퍼와 마찬가지로, 모든 피조 세계의 구속이라는 하나의 하나님 나라(one-kingdom) 관점에서 출발된 개념이다.



구속 영역에 대한 관점의 차이와 카이퍼의 영역 주권론

알버트 월터스가 "창조 타락 구속"에서 말하는 이원론은 주로 영역(sphere)에 관한 것이다.(32쪽)

 

알버트의 이원론에 대한 관점은 주로 카이퍼의 영역 주권론으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알버트의 이원론에 대한 배타적인 사고를 이해하기 위해서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 주권론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카이퍼는 “우리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만물의 주재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라 주장하지 않으시는 영역은 단 일 입방인치도 없다”고 말한다.

 

이는 카이퍼의 영역주권론의 기초 개념이면서, 정치인으로서의 카이퍼가 교회로부터의 자유를 얻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다.

 

카이퍼는 칼빈주의를 정치적 운동의 근거로 삼는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칼빈주의 이해의 핵심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이다.

 

그는 칼빈주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역사적으로 칼빈주의라는 명칭은, 루터파나 재세례파나 소치니파가 아닌 이상, 개혁주의가 움직이는 통로를 가리킨다. 철학적 의미에서, 우리는 이것이, 칼빈이 체계화한 것의 영향 아래에서, 삶의 여러 영역들에서, 개념의 체계 자체가 지배할 수 있도록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인 명칭에서는, 칼빈주의는, 첫번째는 화란에서, 그 다음은 영국에서, 그리고 미합중국에서의 18세기 말 이후로, 입헌적 정치력에 있어서, 국가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치적 운동을 가리킨다.”

“Historically, the name of Calvinism indicates the channel in which the reformation moved, so far as it was neither Lutheran, nor Anabaptist nor Socinian. In the philosophical sense, we understand by it that system of conception which, under the influence of the master-mind of Calvin, raised itself to dominance in the several spheres of life. And as a political name, Calvinism indicates that political movement which has guaranteed the liberty of nations in constitutional statesmanship; first in Holland, then in England, and since the close of the 18th century in U.S.A.”(NEO-CALVINISM By Cornelis Pronk)

 

칼빈주의에 대한 카이퍼의 정의는  역사적, 철학적,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카이퍼의 칼빈주의는 상당히 광범위한 영역을 포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칼빈주의는 주로 인간의 전적인 타락으로 인해서, 구원을 위해서는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것을 강조하는 입장으로 이해되어왔지만, 카이퍼는 칼빈주의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통상적인 칼빈주의 그 이상의 것으로 보고있다.

 

그에게 칼빈주의는 전체의 삶을 포괄하는 세계관이며, 우리의 삶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체계와 같은 것이었다.

 

카이퍼는 원래 모든 피조세계가 하나님께 속하여있기에, 성도는 칼빈주의의 원리를 세상의 모든 영역에 적용시켜서, 세상에 영향을 끼치고 세상을 변화시켜고 세상을 구속해서, 그리스도의 것으로 돌려 드려야한다는 것이다.

 

카이퍼가 말하는 성도의 역할은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의 것을 그리스도께 돌려드리는 구속적 역할이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인간에게 부여되어야만 한다.

 

카이퍼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인간의 주권에 반영되어있다고 말한다.

 

카이퍼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반영된 인간의 주권이, 국가와 사회와 교회 속에서 행사되어야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반영된 인간의 주권은 문화 변혁운동의 근거가되며, 카이퍼는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다 인간의 문화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구속적으로 보존되도록,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구속적 문화변혁 운동에 참여하여야한다고 말한다.

 

알버트는 인간의 구속적 문화변혁운동을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창조로 보고있다.

 

알버트 월터스가 창세기 1장 28절을 “창조 명령”이라고 부르는데에는 카이퍼의 구속적 문화 변혁을 위한 인간의 주권 사상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통적 개혁주의에서는 구속을 오직 그리스도께 속하여있는 것으로보지만, 신칼빈주의에서는 기독교인이 세상의 문화를 구속적으로 변혁을 시켜서 그리스도께 돌려드려야한다는 것이다.

 

알버트는 문화물의 구조의 방향 전환을 구속적 문화 변혁이라는 관점에서 다루고있다.

 

카이퍼는 이러한 구속적 문화변혁이  칼빈의 사상에 이미 담겨있었지만, 단지 발견되지 않았던 사상이라고 말한다.

 

칼빈주의에 대한 카이퍼의 이러한 방향 전환은 알버트 월터스에 의해서 더욱 구체화된다.

 

카이퍼가 말하는 구속적 문화변혁에는 국가와 사회를 교회와 구분하지 않는다.

 

신칼빈주의는 세상과 교회를 구분하는 이원론적 사상을 배격한다.

 

신칼빈주의는 문화적인 삶을 강조하지만, 정작 카이퍼 자신도 무엇이 문화적 삶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규정하지 못하고 있다.

 

영역 주권을 강조한 카이퍼 자신도 모든 영역에서의 주권들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고있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구속 영역과 통치 영역의 구분은, 하나님의 특별법인 말씀과 하나님의 일반 은혜를 위한 자연법을 근거로하고있다.

 

이원론적 사상의 배격은 하나님의 특별법과 자연법을 혼합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카이퍼는 자연법을 하나님의 주권에 비약적으로 대입을 시키면서 이원론적 사상의 경계를 허문다.

 

자연법의 영역에 속하여 있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이름으로 구속의 영역으로 편입을 시킨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이름으로,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두 영역, 즉 하나님의 통치 영역과 하나님의 구속의 영역의 경계를 없애버린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의 주권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는 권위를 부여하여, 모든 피조세계의 구속적 변혁이라는 과제를 부여한다.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린다는 구속적 문화변혁의 근거로 삼는다.

 

소위 영역sphere이라는 이름으로 각종의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반영된 인간의 주권에 의해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는다.

 

Dr J. Glenn Friesen은 카이퍼의 이러한 사상이 칼빈주의에 뿌리는 둔 것이 아니라 카톨릭 철학자인 프란츠 폰 바더의 기독교 신지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Dr J. Glenn Friesen은 자신의 저서 “신칼빈주의와 기독교 신지학:

프란츠 폰 바더,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도예베르트”에서 “아브라함 카이퍼의 신칼빈주의의 핵심 개념은 칼빈에서 온 것이 아니며 개혁주의를 근거로하고있지 않다. 그것들의 원천은 프란츠 폰 바더(1765-1841)의 기독교 신지학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삶의 모든 부분(우리 존재의 모든 평방 인치)이 우리의 기독교 세계관의 지배를 받는다Kuyper’s idea that every part of our life (every square inch of our existence) is to be governed by our Christian worldview는 카이퍼의 생각은 신학이 아닐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철학도 아니라고not a theology or even a philosophy 말한다.

 

이를 종합해 볼 때 이원론을 배격하는 카이퍼의 영역 주권 사상은 칼빈주의에 근거를 두고있다고 볼 수도 없으며, 개혁주의 교리에 편입 될 수도 없다.

 


이미 그러나 아직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는 이미 도래하였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최종적으로 완성될 것이지만, 성도에게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 나라 확장이라는 과제가 주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대한 관점이 정립되어야한다.

 

성도는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킬 것인지, 아니면 이 세상에 대하여 배타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여야 할 것인지에 대한 관점이 정립되어야한다.

 

신칼빈주의에서는 이 세상 자체를 이미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영역으로 보고있다.

 

이와는 반대로 개혁주의 두 왕국two kingdom 개념에서는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의 구속적 영역이 아닌, 바벨론과 같이 심판의 대상이 되는 곳으로 보고있다.

 

신칼빈주의에서 보는 이 세상은 개혁시켜야 할 곳이지만, 개혁주의 두 왕국 입장에서 보는 이 세상은, 유대인들이 살아가던 바벨론과 같은 임시적인 곳일 뿐이다.

 

이와같은 관점은 이 세상에 대하여 배타적인 태도를 취한다기보다는, 이 세상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까지, 이 땅에서 한시적인 것이라는데 의미를 두는 말이다.

 

한시적이라는 개념에는 불연속적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있다.

 

신칼빈주의에서는 이 세상이 새 하늘과 새 땅과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며, 신칼빈주의에서 이 세상을 변혁시고자하는 것은,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것이다.

 

개혁주의 두 왕국two kingdom 관점에서는, 성도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 대하여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여야하지만, 이 세상의 문화를 천국보존을 위한 변혁의 대상이라는 영원성의 관점에서 보게되면 안된다는 것이다.

 

신칼빈주의에서는 “이미 그러나 아직”의 개념이 세상에 적용되지만, 개혁주의 두왕국 관점에서는 오직 하나님 나라로서의 교회에만 적용이 된다.

 

“이미 그러나 아직”은 이 세상에 적용이 된다면, 세상 자체은 구속받은 하나님 나라의 영역이 된다.

 

“이미 그러나 아직”은 이 세상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속성에 관한 것일 뿐, 이 세상의 속성에 관한 것은 아니다.

 

세상은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와 대립 관계에 있는 세상일 뿐이다.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대립관계는 이원론의 근거가 되지만, 이원론적 사상을 배격하는 신칼빈주의 입장에서 보는 이 세상은 구속을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의 한 부분일 뿐이다.

 

신칼빈주의 입장에서보는 이 세상은 지옥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 세상 자체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를 입고, 이 세상은 새 하늘과 새 땅과 연속선 상에 있기 때문에, 지옥의 개념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예수님의 재림 시에 있게 될 최후의 심판에서는, 알곡과 가라지가 나뉘어지며, 양과 염소가 구별되며, 두 부류의 사람들이 전혀 다른 세계로 양분되어야 할 기다림이 있다.

 

이 땅에 임한 구속적 하나님 나라는 거룩의 속성을 가지고있어야한다.

 

거룩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보혈을 덧입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개혁주의 두 왕국 개념에서 보는 이 세상은 거룩에 참여될 수 없기에, 이 땅에 임할 구속적 하나님 나라와 불연속성에 있지만, 신칼빈주의 입장에서보는 이 세상은 이미 거룩하기에, 구속적 하나님 나라와 연속선상에 있다.

 

이 세상이 구속적 하나님 나라와 연속선상에 있을 경우, 지옥에 대한 해석은 막연해질 수밖에 없으며, 톰 라이트가 말하는 쓰레기 소각장과 같은 상징적인 게헨나의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알버트는 “창조 타락 구속” 개정판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하여 톰 라이트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기술한다.

 

알버트가 보는 세상과, 새 하늘과 새 땅은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어느 정도의 일치를 보여주고있다.

 

존 스토트는 영혼소멸설을 주장하기도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지옥에 대하여 말하고있다.

 

지옥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된 곳이다.

 

아담은 범죄한 후에 육신이 됨으로서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거하지 않으셨다(창 6:3)

 

아담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에 참여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담은 창조 세계에 대하여 왕노릇하였지만, 이 세상은 아담의 왕권으로 인하여,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거룩함이 상실되었다.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성도가 거룩함에 참여되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성도에 대하여 대립적인 입장을 취하고있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심판을 받을 대상이다.

 

이 세상이 새 하늘과 새 땅과 불연속선상에 있는 심판의 대상이 될 때, 지옥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이미 그러나 아직”이 세상에 적용된다면 오직 죽음에 대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지만,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생명되신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신 곳에는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다면, 이 세상은 지옥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이미 그러나 아직”은 오직 이 세상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만 적용될 뿐 세상에 적용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 영역의 구분이 비개혁적?

알버트는 교회와 세상을 거룩한 영역과 세석적 영역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적 사고를 비개혁주의적 사고로 보고있다.

 

알버트의 “창조 타락 구속”은 “교회만이 거룩한 영역이다”라는 개념과 함께 할 수 없는 논리들로 가득차있다.

 

알버트의 사상의 모체가 되는 카이퍼의 영역주권론에는, 세속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구속의 대상이 된다는, 즉 거룩에 참여하였다는 것을 전제로한다.

 

알버트의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은, 교회를 변혁시키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기독교인이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다.

 

이는 세속의 영역도 거룩에 참여되어야한다는 것을 전제로하며, 교회는 세상을 거룩하게하기 위한 기관일 뿐이다.

알버트는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 영역을 구분하는 것은 개혁주의가 아니라고 말한다.(23쪽)

 

그러나 칼빈의 5대 강령에서는 분명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거룩에 참여된 이들에 대한 선택적 구분을 말하고있다.

 

영역의 가장 기본은 사람이며, 이에는 선택받은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가 있다.

 

교회는 성령이 내주하시는 성도들의 모임으로 거룩한 곳이다.

 

교회는 보이지 않는 교회가 보이는 교회의 형태를 취함으로서 거룩함에 있어서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지만, 원론적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도들은 거룩함에 참여한 자들이다.

알버트 월터스가 “창조 타락 구속”을 통하여 말하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세상과 구별되는 이원론적 사고를 거부해야한다.

 

알버트가 말하는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한 기관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의 한 부분일 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이클 호튼의 개혁주의 조직신학은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이 성도의 기본 도리”라는 사상이 깔려있다.

 

그리스도의 대위임령이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면, 문화명령은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바꾸는 것이다.

 

알버트의 제자였던 리처드 미들턴과 같은 문화칼빈주의자들은, 문화명령을 대위임령보다도 더 차원이 높은 상위의 명령이라고 말하며, 문화명령에 근거한 문화변혁운동을 하는 이들을 대위임령에 근거한 선교사역을 하는 이들보다도 차원이 높은 이들로 규정하고있다(리처드 미들턴의 “새 하늘과 새 땅” 참조)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피조계의 모든 영역을 구속받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세상과 구별되는 곳으로서의 교회를 거부한다.

"창조 타락 구속" 개정판의 후기를 쓴 마이클 고힌이 주도하는 미셔널 처치는 이러한 개념에서의 선교적 교회이며, 마이클 고힌은 교회가 문화 속에 침투해 들어가서 문화를 변혁하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한다고 말한다.

 

 

 

 두 영역 이론two-realm theory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세계관에서 보는 두 영역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1. 사회 속의 문화의 기본 구조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맡겨 놓은 창조의 영역이기에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시작된 창조세계의 회복은 먼저 문화의 구조를 회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한다.

2.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모든 피조계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문화의 영역도 교회와 마찬가지로 회복되어야 할 영역인 것이다.

3. 이를 위해 교회는 문화의 선한 구조를 회복하는 일에 동참함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수행하여야 하며 서구 사회가 급속히 세속화 된 것은 문화를 외면한 두 영역이론에 물든 교회에 책임이 있다고 본다.(109쪽)



구속의 범위

 

'두 영역' 개념에서는 구속받은 영역을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로 제한하는데 반하여 신칼빈주의에서의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피조세계의 모든 영역을 구속받은 곳으로 여기는 '한 영역' 개념을 고수하고 있다. 

 

신국원 교수에 의하면, 신칼빈주의에서 보는 하나님 나라는 교회보다 훨씬 큰 실재이며 그 범위는 구속을 통해서 회복되는 세계 전체로서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다르게 보고 있다.(신국원. 니고데모 안경 157 쪽)

 

여기서 문제는 전통적 개혁주의의 하나님 나라 개념이 성과 속의 개념이라고 단정짓는 것이다.

 

두 영역은 성과 속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신칼빈주의자들은 이원론을 성과 속의 개념으로 규정하려고하지만 개혁주의 두 나라 개념은 성과 속의 개념과는 다르다.

 

두 영역 개념에서의 하나님의 두 나라는, 신칼빈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두 나라, 즉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나라와 하나님의 특별은총의 나라로 구분하고있다.

 

하나님의 두 나라 개념에서 하나님의 자녀는 두 나라에 동시에 속하여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나라는 자연법을 근거로 존재하는 세상 나라로서 일반 성도들도 세상 사회 제도 가운데서 자연법에 근거하여 생활한다.

 

성도는 동시에 하나님의 특별 은총의 나라에 속하여있다.

 

특별 은총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동일시 된다.

 

이는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에서 말하는 두 영역과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신칼빈주의에서는 오직 하나의 하나님 나라만 있을 뿐이다.

 

이들은 성도가 속하여있는 세상 나라도 하나님의 구속의 영역에 속하여있기에 교회는 세상 기관의 한 가지일 뿐이라고 말한다.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에서 도달하는 결론은 다음과 같은 전제들을 통하여 내려지는 것이다.

 

"문화의 구조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맡겨 놓은 창조의 영역이다"

 

"창조 세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문화의 구조를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모든 피조계의 회복을 의미한다"

 

"문화의 영역도 교회와 마찬가지로 회복되어야 할 영역이다"

 

이러한 전제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문화는 인간에게 맡겨진 그리스도의 구속의 영역에 속하여있기에, 그리스도인은 문화의 구조를 회복하는 문화변혁운동에 참여함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영역을 완성시켜나아가야한다."

 

여기서 언급되어지는 특징 가운데 한 가지는 창조 세계의 모든 영역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모든 피조 세계의 구속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은 개혁주의 세계관reformational worldview이라고 거듭 강조하지만 구속의 대상에 있어서는 전통적 개혁주의 전가교리와 상충된다.

 

존 페스코John Fesko는 개혁주의 전가교리에서의 3중 전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번째,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처음 죄를 모든 인간에게 전가시키셨다.

First, God imputes Adam’s first sin to all human beings. 

 

두번째, 택한 자의 구속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의 죄를 그리스도께 전가시키셨다.

Second, in the redemption of the elect, He imputes the sins of the elect to Christ.

 

세번째,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 혹은 그의 순종하심을 택한 자에게 전가시키셨다.

And third, He imputes Christ’s righteousness, or His obedience, to the elect.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개혁주의 전가교리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구속의 대상이 택한 자에게만 제한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 대상은 모든 피조 세계가 아니라 택한 자에게만 한정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모든 피조 세계가 구속되었다는 개념은 개혁주의 전가교리에서의 제한적 구속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구속의 범위에 대한 견해의 차이에 따라서 문화를 대하는 성도의 입장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현재의 문화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범위에 속하여있다면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문화변혁을 위해서 힘써야할 것이다.

 

하지만 구속이 택한 자에게만 제한된다면 구속받은 택한 자는 문화변혁보다는 복음 전파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임하기까지 구속은 사람에게 한정되어있기에 이들에게는 복음 전파만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방법이다.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현재의 피조 세계가 장차 임할 새 하늘과 새 땅과 연속성을 가진 구속의 영역이라고 보고있다.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에서 보는 모든 피조 세계는 구속받은 세계이기에, 성도의 관심은 복음 전파보다는 구속된 피조 세계의 완성을 위한 문화변혁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이들은 문화 구조의 방향 전환이라는 문화 변혁을 통해 현재의 피조 세계의 문화물을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남겨질 문화물로 놓으려고한다.

 

하지만 두 영역 이론에서는 현재의 피조 세계의 문화물은 현 세상에서 한시적인 것이며,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문화물과는 연속성이 없다고 본다.



전통적 개혁 교회와 선교적 교회

 

"창조 타락 구속"의 패러다임에서의 하나님 나라는 하나의 하나님 나라이다.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는 하나의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적용시킨 교회이다

 

선교적 교회는 하나님의 두 나라 개념을 적용한 전통적 교회와 여러가지 면에서 구분이 된다.

 

"창조 타락 구속"의 패러다임을 적용한 선교적 교회는 세상과 교회를 하나의 구속 영역으로 보고있다.

 

선교적 교회는 구속된 세상 조직 가운데 하나의 조직이라고 보고있기에 복음 전파를 통해서 성도를 교회로 모이게 하지는 않는다.

 

선교적 교회는 일상에서의 삶을 예배로 보고있기에 일주일 내내 삶 속에서 신앙 생활을 한다고 본다.

 

이러한 의미에서 선교적 교회는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이다.

 

교회는 마치 베이스캠프와 같이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기 위한 전진 기지이기에 세상 사람들을 베이스캠프로 모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선교적 교회는 전통적 교회와는 달리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성도들의 모임이 아닌, 선교적 훈련을 위한 기관이다.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서구 사회가 급속히 세속화 된 것은 문화를 외면한 두 영역 이론에 물든 교회에 책임이 있다고 본다"라고 말하면서 서구 사회의 세속화를 두 영역 이론을 주장하는 전통적 교회의 책임으로 돌리고있다.

 

이들은 "교회는 문화의 선한 구조를 회복하는 일에 동참함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수행하여야한다"고 말한다.

 

선교적 교회는 바로 문화의 선한 구조 회복을 위한 문화 변혁을 수행하는 교회이다.

 

결론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정통개혁주의 신앙 안에 자리잡고 있는 자기 중심적이고 내세적인 구원관에 대하여 새롭게 도전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세계관의 변화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해결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

 

일제시대와 한국 전쟁이라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서 가운데 급성장한 한국의 기독교는 특히나 내세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신앙관을 가지고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기독교가 사회의 중심 역할을 하지 못하고 어느덧 변방으로 밀려난 상황에서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은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은 정통개혁주의와 많은 면에서 충돌되는 개념을 제시하고있다.

 

정통개혁주의가 하나님의 두 나라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면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하나의 하나님 나라를 제시하고있다.

 

또한 정통개혁주의가 그리스도의 구속을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은 택한 자로 제한시키는데 반하여,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모든 피조 세계의 구속을 말하고있다.

 

전통적 개혁주의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예루살렘으로 규정하는데 반하여,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과 더불어 이 땅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자연스럽게 정통개혁주의에서의 성도의 역할은 복음 전파인 반면에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성도의 역할이 구속된 피조세계의 완성을 위한 문화변혁에 초점을 맞추고있다.

 

정통개혁주의에서는 이 땅에서의 문화가 새 하늘과 새 땅의 문화와 단절되었다고 보지만,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과 더불어 이 땅에서 이미 시작된 구속적 문화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연속되어진다고 말한다.

 

인간의 문명, 즉 도시화를 통한 발전에 대해서도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일종의 긍정적 구속 사건으로 해석한다.

 

이들은 에덴을 발전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일종의 구석기 시대로 규정하고, 인류의 문명의 발전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향하는 방향성을 가지고있다고 말한다.

 

이는 에덴을 성전으로 보는 정통개혁주의와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에덴에서의 아담의 역할 또한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 보는 정통개혁주의와 달리 아담을 에덴을 경작하고 문명을 발전시키야하는 의무를 가진 자로 규정하고있다.

 

이들은 아담이 오실 자의 모형으로서, 오실자 예수 그리스도가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삼중직을 가지고있는 것과 같이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을 가지고 있음을 고려하지 않는다.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의 부제는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이지만 정작 정통개혁주의와는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있다.

 

진정한 기독교 세계관은 시대적 필요에 따라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있는가를 먼저 살펴보고서 성경적 세계관으로 시대를 분별하여야할 것이다.

 

종말의 마지막 시대는 심판을 받기에 합당한 모습을 갖춘 최악의 모습일 것이며, 이는 문명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심판받을 자는 거짓에 유혹이 되어 심판받기에 합당한 모습을 갖출 것이다.

 

종말의 마지막 때에는 미혹시키는 거짓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필요가 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데후 2:11,12)"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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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 그리스도인의 비전, 황영철 옮김, IVP,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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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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